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2화 (62/118)
  • [■] 그래서 지금 나보고 가라구요? [■]

    ─────

    윤영민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꼴통 놈이!'

    통일이라니.

    그게 그리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인가.

    '으음, 이놈은 정치를 하는 놈이 아니니까.'

    대한민국 정치인에게 있어서 통일이란 매우 민감한 단어였다. 물론 통일이라는 요소를 이용해 자신의 지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어젠다를 만들어낸 대통령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 어젠다 역시 현실적으로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국민적인 공감대의 전제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통일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그걸 무슨 지나가던 슈퍼에서 과자 사서 나오는 것처럼 말한단 말인가.

    윤영민은 분명히 이지혁의 말을 들었지만 의뭉스레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통일 한 번 해보지 않겠냐구요."

    "……."

    진짜 또라인가?

    "그,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거야 알죠. 그러니까 이 기회에 해볼 생각 있냐고 묻는 거구요."

    그게 왜 논리가 그렇게 되나!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요."

    "대통령이 결정 안 하면 그걸 누가 결정해요?"

    윤영민은 입을 닫았다.

    확실히 그 말은 맞다. 이걸 대통령이 결정하지 않으면 누가 결정하겠는가.

    국민투표에 붙일 일도 아니고.

    "토, 통일이라는 건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준비 과정만 몇 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이지혁이 한심하다는 듯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윤영민은 울컥하여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그리 평가가 좋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지지율만 봐도 아는 것을 어떻게 모를 리가 있겠는가.

    우민들이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여하튼 그가 무시당하는 대통령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감히 그의 앞에서 대놓고 그를 이리 무시한단 말인가.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

    "그 몇 십 년을 단축할 방법이 있으니까 하는 말 아니겠어요?"

    "그게 뭡니까?"

    "간단해요. 간다고 해놓고 지금부터 손가락 빨면서 구경이나 하는 거죠."

    "……."

    "그럼 평양이 싹 정리될 거고, 무혈입성을 할 수 있는 거죠."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윤영민은 웃고 말았다.

    "진심인데?"

    "평양의 인구가 몇인지는 아십니까?"

    "모르는데요? 몇이에요?"

    "……."

    그냥 그 물어본 건데 그리 수치를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궁해지지 않는가!

    "그, 그게……."

    박두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삼백만입니다."

    "사, 삼백만이랍니다!"

    "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많네요. 그래서요?"

    "지금 통일을 하겠다고 삼백만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방관하겠다는 겁니까? 그런 짓을 했다가 무슨 비난을 들을 생각이십니까?"

    "비난?"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비난을 들어요?"

    니가 안 듣지.

    그래, 너는 안 듣지! 내가 듣는 거지, 인마!

    윤영민은 과거 국회의원 시절에도 하지 않던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짓눌렀다. 여기서 화를 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학살당하는 것을 방조하고 이득을 취하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그래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왜요?"

    "…네?"

    "그게 왜 당연한데요?"

    "아니, 그걸 꼭 설명해야 아는 겁니까? 같은 인간이잖습니까."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같은 인간이니까 그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면 나는 당연하게 구하러 가야 한다?"

    "…능력이 없다면 모르지만, 능력이 있으시니 돕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요?"

    이지혁이 소파로 한껏 등을 기댔다. 귀찮음과 짜증이 반쯤 섞여 있는 것 같은 그 리액션에 윤영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왜냐고 해버리면 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이니까.

    더 많이 가진 자가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은 관용이다. 하지만 그 관용은 강제가 아니다. 가진 자가 베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해도 비난은 할 수 있을지언정 강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힘 역시 같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위기에 나서주는 것은 선한 일이지만, 나서지 않는다 해서 악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약자를 위해서 나선다는 것은 강자의 수고와 피해를 동반하는 일이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넹?"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지금 상황이 이지혁 씨에게는 매우 불쾌한 상황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지혁은 대답 없이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지혁 씨의 입장에서는 굳이 북한을 돕기 위해서 가야 할 이유가 없죠. 그곳에 간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이득을 얻기 어렵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호오?"

    이지혁이 재미있다는 듯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

    역시 아무나 하는 자리는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의 대처는 곤란합니다. 확실하게 대화를 했을 때, 진전이 있는 법이지요."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은 맞는 거 같아요."

    윤영민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놈이 좀 또라이 기질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진심은 통하는구나.

    "그럼 그냥 확실하게 말할게요. 저 별로 안 가고 싶은데요."

    아니네.

    안 통하네.

    "그,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대화로 하면 된다면서요?"

    "이건 대화가 아니지 않습니까. 통보지요! 대화를 하셔야지요, 대화를!"

    "별로 안 하고 싶은데."

    "그러지 마시고……."

    윤영민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다 보니 뭔가 서글퍼진다. 이건 무슨 물건 파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의 입장에 있는 그가 이런 식으로 매달리는 꼴이 우스웠다.

    미국 대통령을 만나도 이렇게 일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데 말이다.

    "안 가도 돼요?"

    윤영민의 머리에 떠올랐던 불만이 사라졌다.

    "가, 가셔야죠."

    "진짜 안 가고 싶은데?"

    "…그러시겠죠. 하지만 이번에는 북한을 한 번 도와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죽는 게 내 탓도 아닌데 왜 그걸 제가 책임져야 하냐구요."

    최정훈은 입을 쩌억 벌렸다.

    니 탓이지, 인마!

    니가 몬스터들 그리로 다 몰았잖아!

    세상에, 사람이 양심은 있어야지.

    "헐?"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지혁의 얼굴을 보니 정말 억울하다는 얼굴이다. 그사이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다 잊어버렸단 말인가.

    무슨 뇌가 탈착식도 아니고, 다른 걸로 바꿔 끼웠나?

    '정말 편리한 뇌네.'

    불리한 건 깔끔하게 잊어버렸구나. 무서운 놈.

    아니, 불리한 게 아니라 관심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빨리 잊는 건가?

    "저희가 최대한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윤영민의 간곡한 어투에도 이지혁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뭔 도움이 된다고."

    "대가도 심심치 않게……."

    "저 딱히 필요한 게 없는데요."

    "끄응."

    윤영민이 침음을 삼켰다.

    가장 큰 문제가 이거였다. 아무리 분석을 하고 정보를 파봐도 이지혁은 딱히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애국심도 그리 없어서 국가에 대해 헌신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수룩하지 않고 계산에도 밝아서 속여 먹을 수도 없는 완전체였다. 어떻게든 이지혁을 꼬드겨서 북으로 보내야 하는 윤영민의 입장에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게 없으시다구요?"

    "네."

    "…그, 꼭 필요한 걸 받고 가는 건 아니니까……."

    이제 윤영민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근데 왜 자꾸 사람을 보내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그냥 좀 냅 두면 알아서 통일 아니에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면서, 그거 다 구란가?"

    윤영민이 입을 반쯤 벌렸다.

    그게 구라는 아니지. 아니기는 한데… 거, 그 노래 만들어질 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문제지.

    그때 노래 만든 사람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겠냐고?

    "지금은 통일을 하게 되면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뭘 그렇게 고려해야 하는데요?"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윤영민이 난감해할 때, 최정훈이 윤영민을 돕기 시작했다.

    "일단 영토가 두 배로 늘면 게이트가 두 배로 열립니다. 이지혁 씨의 일도 두 배로 늘겠죠."

    움찔.

    이지혁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파악한 최정훈이 팩트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단순히 두 배로만 늘면 다행이지만, 일이 늘어나면 구멍이 숭숭 뚫릴 테니 일이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끄응."

    이지혁이 고개를 숙이는 듯하다 발끈하여 소리쳤다.

    "그럼 안 하면 그만이지! NDF고 뭐고 다 때려치우면 그만이지!"

    최정훈이 빙글빙글 웃었다.

    "난민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게이트 방어가 어려워지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텐데요. 가족분들의 삶이 팍팍해지지 않겠습니까?"

    "훗."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내가 그 정도도 생각 못했을 것 같아요? 이민 가면 그만이지! 아메리카로!"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방법이 있었다.

    "영어는 할 줄 아시구요?"

    "토, 통역 마법."

    "그거 남한테도 걸 수 있습니까? 부모님이 영어도 안 되는데, 미국에 가서 살려고 할까요?"

    "……."

    "예원이는요?"

    "으음……."

    최정훈이 가만히 이지혁에게 와서 속삭였다.

    "사실 돈만 있으면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바 아닙니까. 치안도 좋고, 돈 있으면 이보다 편한 나라가 없죠."

    "그, 그렇지."

    "삼시 세끼 햄버거만 먹고 살 것도 아닌데, 한국에 있는 것이 이지혁 씨에게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귀찮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아시죠?"

    이지혁은 최정훈의 팩트 폭격에 밀려 점점 소파에 파묻혀 갔다.

    "귀, 귀찮은데."

    "한 번 귀찮은 걸로 더 큰 귀찮음을 피할 수 있다면 좋은 딜이 될 겁니다."

    "끄응."

    이지혁이 말없이 인상만 쓰고 있자 윤영민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뭐지?

    저 또라이를 이렇게 쉽게 다루다니.

    이래서 이놈 옆에 최정훈이 붙어 있어야 한다고 국방부 장관과 KSF 원장이 그토록 신신당부를 했던 거구나.

    젊은 공무원 놈이 너무 많은 힘을 가진다고 생각했더니, 이놈은 이지혁에게 빌붙어 있는 여우가 아니라 이지혁을 통제하는 자물쇠 같은 놈이었다.

    "너무 헐거워서 문제지만."

    "예?"

    "아니, 아닐세."

    아무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끊어버릴 수 있는 사슬이라고는 하나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일단 그래서 지금 이지혁 씨에게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

    "으음."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방부 장관."

    "예."

    "브리핑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국방부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이 열리더니 바퀴 달린 화이트보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화이트보드에는 평양 주변의 지도가 걸려 있었다.

    "뭔 대형 화면이 나온다든가, 그런 거 없어요?"

    "원래 회의실이 아니다 보니……. 지금 빔 프로젝트 설치 중입니다."

    "내 초딩 때도 나름 다양하게 뭔가 활용했던 것 같은데."

    "크흐흠."

    국방부 장관은 쓴웃음으로 이지혁의 불만을 무시하고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 * *

    "현재 북한은 평양 주위로 방어선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의 진격 속도는 빠르지 않으나 이동 방향은 평양을 향해 일직선이기에 예측 경로 파악에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빔 프로젝트가 켜지고 위성에서 찍은 몬스터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현재 몬스터들의 위치는 평산을 지나 횡주로 향하고 있습니다. 곧 강남에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응? 강남?"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 소리예요? 북한에 있던 애들이 왜 강남에 와? 쇼핑하러 오나?"

    "…북한 지명입니다. 대동강 남쪽이란 뜻이죠."

    "와, 이름 막 지었다. 그럼 우리는 한강 남쪽이라 그래서 강남인가?"

    "맞는데요?"

    "그, 그래요?"

    이지혁이 민망해하는 얼굴로 얼굴을 돌렸다.

    국방부 장관이 한심하단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다 브리핑을 계속했다.

    "여하튼 지금 북한은……."

    국방부 장관이 지도의 평양 아래쪽에 직선으로 선을 그었다.

    "이렇게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변의 가용 병력은 모조리 끌어 모으고 있고, 장사정포도 방열 중입니다."

    "흐음……."

    KSF 원장 배정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 병력들도 모집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예."

    "비무장지대에서 온 영상을 봤는데, 일반 병력이 도움이 될 상황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지금 그런 거 따질 정신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서울이 날아갈 판이라면 육군부터 모으겠죠."

    "그렇네요."

    배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막상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고.

    장사정포를 미친 듯이 때려 박으면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아무리 화력이 딸린다고는 하나 집중적으로 타격을 하면 저지 효과라도 있을지 모르니까.

    '헛된 희망이겠지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저 그럴 수도 있다 수준에서 끝나는 문제였다. 이미 폭격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상황이다. 최신식 화기들도 의미가 없는데,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넘은 구식 화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외에 능력자로 구성된 인민 무력 여단과 다른 능력자 부대들도 평양으로 합류하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의 예상 도착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24시간 뒤입니다."

    "전선 도달 시각 말입니까?"

    "예."

    윤영민이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못 막게 될 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까?"

    통일부 장관 최선형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끝장입니다."

    "…정확하게 말을 해보세요."

    "에, 일단……."

    최선형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북한은 비정상적으로 평양에 집중도가 높은 나라입니다. 북한의 핵심 계층은 모두가 평양에 모여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지요. 그런 곳이 초토화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말 안 해도 다들 아실 겁니다."

    "으음……."

    "생산력적 측면으로는 평양이 크게 기여하는 바가 없으니 큰 타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평양이 무너지는 순간 북한의 체계 자체가 붕괴됩니다.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겠지요."

    "어차피 지금도 나라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이지혁의 말에 최선형이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행정력은 발휘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석탄을 가져와야 하는 것이고, 그 석탄을 때워야 합니다. 하지만 평양이 무너지고 체계가 붕괴되면, 석탄이 생산된다고 하더라도 이 석탄을 사용할 곳을 정하는 이들이 사라지게 되는 셈입니다."

    "…뭔 소리야?"

    "북한이라는 곳은 그런 곳입니다. 지시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죠. 한국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못 알아먹었지만 설명을 듣는다고 알아먹을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평양이 무너지면, 북한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북한이 무너지게 되면……."

    최선형이 지도를 가리켰다.

    "러시아와 중국이 밀고 내려올 확률도 매우 큽니다. 휴전 단계라고는 하지만, 이미 북한과 우리는 독립적인 국가입니다. 망한 나라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근거가 희박하지요."

    이지혁이 다시 손을 들었다.

    "네."

    "그런데… 우리는 북한 영토를 먹으면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쟤들은 그런 것 없나요? 우리는 먹기 싫은데 왜 쟤들은 먹으려고 하는 건데요? 말이 안 되잖아요."

    "들여야 하는 비용과 노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중국은 이미 수많은 소수 민족에 대한 자치를 반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원을 해주는 게 없으니 '알아서 살아라'가 기본적인 자세죠.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정훈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닙니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다 보니 그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지원을 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의료보험과 국민연금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다가, 거기에 이천만에 달하는 이재민들의 일자리와 최저생계비를 지원하는 문제까지 겹치면 나라가 붕괴될 위험에 처할 겁니다. 그러지 않겠다면 국민들의 단계를 나누어 차등 지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만약 그러다가 아사하거나 사회 적응을 하지 못해서 겉도는 북한인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사회 혼란은 그야말로 끔찍하겠죠."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문제라는 거네요."

    "네, 그겁니다."

    최선형은 애초에 이지혁에 대한 기대가 없는지 깔끔하게 설명을 마쳤다.

    "고로……."

    윤영민이 힘을 주어 말했다.

    "평양이 붕괴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현재 게이트 워(Gate War)는 예측 불가의 상황까지 왔습니다. 국토를 방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수많은 난민과 두 배로 넓어진 국토까지 책임질 힘이 아직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거 통일 안 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아직은이죠, 아직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겁니다."

    이지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뭐, 좋아요. 다 좋은데, 그러니까… 그래서 어떻게 막겠다는 건데요? 판문점 열고 국군이라도 투입하시려고?"

    윤영민이 두말 없이 빤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응?"

    "…그건 제가 아니라 NDF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죠."

    "아!"

    이지혁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요. 그럼?"

    최정훈에게 시선이 쏠렸다.

    "제가 NDF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 원장님도 계신데 제가 왜……."

    "아냐, 아냐. 내가 뭘 알겠어. 실권자가 해야지. 나는 최정훈 씨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워, 원장님!"

    "사실이 그런 걸 뭐. 나는 KSF만으로 벅차. 그래서 독립 명령권 준 거잖아. 알아서 해, 알아서."

    배정국이 바로 뒤로 빠지고 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최정훈에게로 쏠렸다.

    "에, 음……."

    최정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 양반은 평소에는 상관이랍시고 온갖 걸 다 해달라고 사람 귀찮게 하더니, 이럴 때는 또 쏙 빠진다.

    그런 처세가 있으니까 저 자리까지 올라갔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외부적으로야 나보다 최정훈 씨가 유명한 게 사실이기도 하고. 안 그래?"

    거기에다 비꼼까지.

    최정훈은 부들거리는 속마음을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다 원장님이 뒤에서 받쳐 주신 덕이지요."

    "아냐, 아냐.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최정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비꼬는 거야 자유라지만, 꼭 이런 상황에 해야 하나?

    보는 눈이 많아서 말도 못하겠고, 영 껄끄럽기만 하다.

    이지혁이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네?"

    "누구냐구요."

    배정국이 당황하여 이지혁을 슬쩍 보고는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KSF 원장 배정국입니다."

    "KSF?"

    "예."

    "근데 난 왜 아저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순간, 윤영민의 눈썹이 꿈틀했다.

    본 적이 없어? KSF 원장을?

    윤영민의 시선이 칼날같이 꽂히자 배정국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워, 워낙에 바쁘신 몸이니까요."

    "내가요?"

    "예, 그렇죠. 공사다망하시니까."

    "나 사무실에서 제일 한가한데?"

    "…그, 그래요?"

    "조금이라도 관심 있으면 다 아는 건데, 전혀 모른다는 투로 말씀하시네요?"

    배정국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지혁이 NDF에서, 아니, KSF에서 가장 한가하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엮이고 싶지가 않았으니까 그동안은 안 본 것이다.

    최정훈과 서아영에게 일임하기도 했고, 사실 비능력자가 능력자를 만나서 할 일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분위기가 요상해지고 있었다.

    "하하하, 최정훈 씨가 워낙에 잘해주고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죠. 그런데 얼굴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책임자랍시고 떡하니 앉아 있는 걸 보니 좀 그렇네요."

    "……."

    윤영민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일하라고 앉혀놨더니 농땡이를 쳐도 정도가 있지. 명색이 KSF 원장이라는 사람이 이지혁을 한 번도 안 봐?

    KSF에서 이지혁의 관리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는가.

    "원장."

    "예, 예! 대통령님!"

    "따로 이야기 좀 하지."

    "…네."

    배정국이 고개를 푹 숙이자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그렇고, 엄청 한가한가 봐요? 바쁜 척하더니 대통령 앞에서 부하 직원 갈굴 시간도 있고? 회의 끝날 때까지 가서 한숨 자고 와도 되나요?"

    "죄송합니다."

    윤영민이 자신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 말았다.

    뿌득.

    이를 갈아붙인 윤영민이 배정국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배정국은 오들오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급진 개혁파치고 왕년에 미친놈 소리 안 들은 사람이 없는 법이다. 윤영민의 성격을 알고 있는 배정국으로서는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색……."

    "에헤이! 대통령님, 진정하십시오. 사람들이 많습니다."

    박두진의 만류에 윤영민이 몸을 돌리더니 한참 씩씩거리고는 다시 미소를 띠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추태를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에이, 아니죠. 그리 따지면 저희가 못난 원장을 보여 드려서 죄송한 거죠. 얼굴도 본 적 없고,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고,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직책은 우리 원장이니까요."

    "…마음이 넓으시군요."

    예의도 바르고 말이야.

    으드득.

    윤영민이 다시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해가 안 가는 게 하나가 있는데……."

    "예?"

    "저번에도 그랬는데, 최정훈 씨가 일을 엄청 많이 하잖아요."

    "그렇습니까?"

    "퇴근도 못한 채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고 일을 계속하는데, 인력 충원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그게 안 돼서… 외교부 장관인가? 그 양반한테 부탁해서 사람 받아오고, 그리고 전화 오는 것 좀 막아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안 돼서 제가 청와대까지 찾아왔잖아요."

    "그…렇습니까?"

    "근데 대체 뭘 지원하고 뭔 일을 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하는 일을 생각하면 사람 몇 보내주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데. 대통령 아저씨가 돈 안 준 거예요?"

    그럴 리가.

    가장 예산을 많이 배정한 곳이 KSF와 국방부인데.

    사람 두엇쯤 못 쓸 정도로 예산을 팍팍하게 줬으면 KSF는 망해도 벌써 망했을 것이다.

    정말 심력을 다해서 지원했건만, 이게 무슨!

    "잠시만요."

    윤영민이 뭔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부릅떴다.

    * * *

    그럼 그때 이지혁이 그 난리를 피웠던 게…….

    따져 보면 전부 배정국 때문이라는 말인가.

    으드드득.

    박두진은 치과를 예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대통령의 이가 무사할 것 같지 않았다.

    "원장."

    "…예."

    저 등신 같은 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윤영민은 핏발 선 눈으로 배정국을 노려보며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잠깐 나 좀 보지."

    "대, 대통령님, 지금 한시가 급한……."

    "그러니 빨리 보면 될 일 아닌가. 이리 오게."

    "…예."

    거칠게 걸어 나가는 대통령의 뒤로 고개를 숙인 배정국이 힘없이 따라갔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군.'

    국방부 장관은 그 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배정국은 돌아오지 않고 대통령만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박두진에게 말을 했다.

    "새 후보 섭외 좀 하지."

    "바로 해놓겠습니다."

    깔끔하게 배정국의 실각이 결정되었다.

    "햐, 깔끔한 거 보소."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고, 최정훈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리 간단하게…….'

    윤영민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지금 이지혁의 권력이 어느 수준인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속은 시원하네.'

    그동안 도움은 하나도 안 주고 바라는 것만 많던 배정국 때문에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최근에야 최정훈의 입지가 올라가며 간섭이 좀 줄어들었지만, 그전에는 얼마나 그를 귀찮게 했던가.

    '진즉에 이야기할 걸 그랬나?'

    그럼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이 되는 문제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지혁을 등에 업고 있다고 든든히 여기기는 했지만, 그를 활용해서 딱히 이득을 챙겨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리 협상으로 돈을 좀 벌기는 했지만, 권력적으로 이용해 본 적은 없었다.

    "계속하시죠."

    윤영민의 말에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정국이 없는 이상 일단은 그가 상황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우선 NDF가 넘어가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국방부에서도 나름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생각을 해보면 대규모의 군사 병력이 휴전선을 넘게 되면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자극이라……."

    "아무래도 전쟁 이후로 처음 있는 군사 이동이니까요. 반대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의심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흐음……."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쪽은 어떻습니까?"

    "일본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번 도쿄 사태 이후 국외로 시선을 돌릴 정신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일본은 지금 세계 어느 국가보다 이지혁 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라 도발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외교부 장관이 없는 자리라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대신 차관이 참석하기는 했지만…….

    '이름을 부르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겠군.'

    이 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 뭘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어본다 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나중에 따로 브리핑을 받는 게 낫지, 지금을 물어볼 상황이 아닌 것 같다.

    "그럼 결국에는 빠르게 지원을 하는 게 좋다는 결론이군요."

    "사실 결론이야 이미 그렇게 나 있었죠."

    윤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을 어떻게 꼬셔서 보내는가가 문제였지, 어떻게 할 것인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저 인간을 어떻게든 꼬셔봐야 한다는 건데…….

    "이지혁 씨."

    "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서 북한으로 파견에 동의해 주십시오."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받아쳤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가라구요?"

    "……그, 그렇죠."

    "제가 가서 좋은 게 뭔데요?"

    "일단은 보상을……."

    "국가적으로 얻는 건 있어요?"

    윤영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인간은 지금까지 뭘 들은 것인가.

    "북한이 무너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득입니다."

    "끄응."

    어떻게든 발을 빼보려 하던 이지혁이 짜증을 부리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자, 이지혁 씨."

    하지만 때맞춰 최정훈이 이지혁을 달래기 시작했다.

    "진정하시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곧 게이트가 열릴 테고, 여기에 있는다고 일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응?"

    "하지만 북한에 가서 일을 처리하고 나면 한동안은 푹 쉴 수 있습니다."

    "왜요?"

    "북한에서 대접을 하겠죠."

    "걔들 피죽 먹을 돈도 없는 거 아니에요?"

    "북한 상류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거기다가 남남북녀 아니겠습니까? 언니들도 이쁘고……."

    "이뻐?"

    아…….

    얘한테는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된다.

    에르카나가 마누라인데,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 에르카나도 짜증 난다고 이혼하자고 하는 놈인데.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왜 꼬나봐요?"

    "아, 아닙니다."

    "여하튼 북한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많을 겁니다. 예전에 김정일이 살아 있을 때만 하더라도 미식가로 유명했으니까요."

    "생긴 건 아무거나 막 주워 먹게 생겼던데."

    "사람은 얼굴로는 모르는 거죠. 자, 그러니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겁니다."

    "끙, 알았어요."

    이지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최정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오!"

    윤영민이 그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뭐랄까. 이지혁을 다루는 데 특화되어 있는 사람을 본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 같은데, 고작 저런 걸로 협상을 끌어내다니.

    '능력은 확실하군.'

    괜히 여기저기서 최정훈, 최정훈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근데 그럼 뭐 주나요?"

    최정훈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아시다시피……."

    어깨를 쫙 편 최정훈의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최정훈에게서 절로 댄디함이 뿜어져 나왔다.

    "그건 제 전공 아니겠습니까."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뽑아내기?"

    "협상의 달인이라고 해주시죠."

    "여튼 맡길게요, 그럼."

    "예, 걱정 마십시오."

    이지혁과의 협상을 마친 최정훈이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려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대통령님."

    "으응?"

    "우리 고객님께서는 양심적인 분이십니다."

    어디가?

    아니, 그전에 고객님?

    갑자기 무슨 고객님?

    "하지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고, 자유 시장경제를 모토로 삼는 국가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지요."

    "능력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시장경제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저렴한 가격에 모시고 싶지만, 그럴 경우 시장경제의 기본이 파괴된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새끼… 뭐지?

    사짜 기질이 풀풀 풍기는데?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겨서는 사기꾼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가격만 매겨주신다면 저희 고객님께서 움직이시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돈 주려고 했다!

    주려고 했다고!

    어차피 말로 때우는 게 안 먹힌다는 거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주기가 싫어지지!

    "끄응……."

    윤영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싫다고 할 수도 없는 게 그의 입장 아닌가.

    "그래서 뭐 얼마나 원하시는……."

    "잠시만요."

    그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박두진이 앞으로 나섰다.

    "협상은 제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

    윤영민이 박두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두진이 이런 쪽으로는 전문가다. 그가 나서준다면 윤영민도 편해진다.

    "호오, 선배님께서?"

    "그러다가 내가 큰 코 한 번 다칠 거라고 했을 텐데?"

    "명심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최정훈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오늘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호오?"

    최정훈이 웃으며 밖을 가리켰다.

    "가시죠."

    "그러지."

    두 사람이 비장한 자세로 다른 곳으로 향했다.

    "흐음……."

    그러자 이지혁이 남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자, 잠깐만.'

    최정훈이 없으면 이지혁을 누가 제어하지?

    저 사람을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윤영민의 등골로 식은땀이 흘렀다.

    국방부 장관에게 눈길을 주자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입을 열었다.

    "하하, 이지혁 씨."

    "네?"

    "식사는 하셨습니까?"

    "밥 먹다 왔는데요. 그러게 왜 사람 밥도 제대로 못 먹게 빨리 오라고 난리예요? 막상 와보니 별로 바쁠 것도 없구만."

    "……."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게 생긴 국방부 장관이 민망한 얼굴로 윤영민을 돌아보았다.

    '계속해.'

    일단은 이지혁의 관심을 잡아두는 것이 우선이라 여긴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방부 장관 역시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런, 실수를 했군요. 그럼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여기 식당이 괜찮습니다. 춘추관 쪽이 좋더군요."

    "밥?"

    이지혁이 솔깃한 기색을 보이자 윤영민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밥이나 먹을까?"

    이지혁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최정훈과 박두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음?"

    이지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두 사람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후우."

    최정훈이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박두진을 돌아보았다.

    "대단하시군요."

    "그쪽이야말로."

    "이쪽이 너무 손해를 본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이렇지 않을 겁니다."

    "나는 지금 보고를 어떻게 올려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야. 정말 다 빼먹을 생각이로군."

    "후후."

    최정훈이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상이었습니다."

    "동감이네."

    둘이 진하게 손을 맞잡았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깔끔한 감상을 내놓았다.

    "뭐래?"

    아저씨들의 브로맨스는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경이다.

    "협약서는 양쪽의 사인을 받아서 따로 보관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음, 그러지. 나는 이 항목대로 서류를 작성하겠네."

    "예, 부탁드립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가서 말했다.

    "북으로 넘어가는 시간과 다른 문제들은 제가 조율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바로 출발해야 할 상황 같으니 집에 가지 마시고……."

    "헐, 그럼 저는 여기서 뭐해요? 대통령님이랑 놀까요?"

    윤영민이 불타는 눈으로 최정훈을 노려보았다.

    "쉬, 쉬실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넹."

    최정훈이 박두진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컴퓨터 좋은 곳이 필요합니다. 성능 좋은 컴! 게임 잘 돌아가는 컴퓨터."

    "아, 알겠네."

    "탄산이랑 과자 많이 준비해 주시구요, 의자는 푹신한 걸로 부탁드립니다. 아니지……. 청와대 옆에 피시방 없습니까?"

    "그, 그건 잘 모르겠는데."

    "…저대로 뒀다가는 대통령님이랑 놀게 될 겁니다."

    "조치하겠네."

    박두진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는 것을 본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았다.

    그러니 지금은 애들 장난감 주듯이 빨리 이지혁을 컴퓨터 앞에 앉혀놔야 좀 편해질 것이다.

    "그리고 배고프면 짜증내니까, 얼른 밥 좀 주십시오."

    "알겠네."

    "어머니께는 미리 상황을 설명드려야 합니다. 괜히 늦게 집에 들어갔다가 등짝 맞으면 다음 날 화풀이합니다."

    "……."

    뭐지, 이 새끼?

    보모인가?

    지금까지 이러고 살았단 말이야?

    박두진은 어쩐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최정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말게. 내가 다 알아서 하겠네."

    "부탁드립니다."

    최정훈이 못내 불안한 얼굴로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폭탄을 청와대에 놓고 일을 하려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근데 우리… 가면 언제 와요? 내일 게임 대회 결승전하는 거 봐야 하는데……. 북한에 와이파이 터지나?"

    최정훈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 * *

    "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뒤로 NDF 요원들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뭐야? 차 타고 가는 거야?"

    이지혁이 신기하다는 듯 버스를 바라보자 서아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하다못해 북한이라니."

    미국이고, 중국이고, 런던이고… 나라라는 나라는 온통 다 돌아다니고 있는 판이니 어딘들 못 가겠냐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북한이라니…….

    가장 가까운 나라인 동시에 가장 가고 싶지 않은 나라로 손꼽히는 곳이 바로 북한 아닌가.

    뭐, 위에서 가라니 안 갈 수는 없고…….

    "이럴 줄 알았으면 청와대 따라가서 깽판 놓는 건데."

    서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고, 대통령 앞에서 이지혁이 날뛰는 거 보다가 심장 멎을까 봐 안 따라갔더니, 북한에 가란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사태란 말인가.

    서아영은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진정해."

    "언니!"

    "어차피 이리될 거 알았잖아."

    "어휴."

    서아영이 한숨을 푹푹 내쉬자 정해민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차피 북한에 문제가 생겨서 이지혁이 넘어가야 할 상황이 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거기서 정리했으면 됐는데……."

    긁어 부스럼이라고, 골탕 한 번 먹여보겠다고 했다가 역으로 당한 격 아닌가.

    "여하튼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서아영이 사납게 노려보자 최정훈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버스로 가는 거냐구요."

    마침 주변 분위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지혁이 최정훈을 구해주었다.

    "네. 차 타고 갈 겁니다."

    "북한이랑 도로가 이어져 있어요?"

    "물론이죠. 예전에 개성 공단 때문에 닦아놓은 도로가 있습니다. 판문점을 통해서도 갈 수 있죠."

    "오오!"

    이지혁이 신기하다는 듯 앞으로 뻗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우리끼리만 가나 보네요?"

    "일단 혹시 모르니까 육군 측에서도 동행은 할 겁니다. 아마도 정인수 대령이 대표로 갈 것 같더군요."

    "그 아저씨도 참 자주 보는 것 같네요?"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정인수가 이곳저곳으로 자주 불려 다닌다기보다는 국방부 측에서 정인수를 이지혁 전담 마크맨으로 붙인 것이었다.

    이지혁과 NDF 관련된 일에서는 우선적으로 정인수가 배정되게 대책이 짜여 있었다.

    '불편하게시리.'

    차라리 국방부 장관이 편했다. 최정훈에게 정인수는 영 껄끄러운 상대였으니까.

    "저기 오네요."

    이지혁의 말에 최정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다 다를까, 지프에 탄 정인수가 보였다.

    차에서 내린 정인수가 우선 이지혁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안면을 싹 바꾸고 굳은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무슨 아수라 백작이여.'

    저게 가식이 아니라는 게 더 무서웠다.

    에르카나를 제외한다면 전 세계에서 이지혁을 가장 좋게 보고 있는 사람이 아마 정인수일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은 그런 눈으로 보느냔 말이다.

    "준비 다 했어?"

    "일단 소집은 끝냈습니다. 그쪽에서는 동행 병력 없습니까?"

    "특수부대 애들 한 소대 정도만 데리고 간다. 그 이상이면 자극할 우려도 있고 말이야. 저번에 보니까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이던데,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드느니, 소수로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음, 확실히 그렇네요."

    전력은 이지혁 하나로도 차고 넘치니까 굳이 머릿수로 밀어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여차하면 그 게이트인가 뭔가로 도망치면 되잖아?"

    "그렇죠."

    저 인간이 도망을 친다면 말이지.

    문제가 생기면 길길이 날뛰겠지. 평양을 제 손으로 날려 버리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북한 놈들도 그걸 알아야 할 텐데……."

    "응?"

    "아닙니다."

    최정훈은 불길한 상상을 냉큼 접었다.

    항상 그런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번만큼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했다.

    "집합 좀 시켜봐."

    "예."

    최정훈이 사람들을 불러모으자 정인수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NDF 대원 여러분. 방위사의 정인수 대령입니다. 안면 있으신 분들도 계시네요. 사실 저번에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이제 인사를 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당부할 말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정인수가 살짝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북한의 영토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이라는 나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 안에서는 개인행동을 최대한 자제하여 통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능력자이고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다른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타국에 파견 나가는 것과는 명백히 다릅니다. 아시겠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북한이라는 나라가 주는 중압감에 긴장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저번 DMZ 사건을 떠올려 보면 저쪽에서 우리에게 호의적으로 나올 일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통제에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과 화기 속에서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있습니까? 뭐,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모두가 무사할 수는 없을 겁니다. 나 하나의 실수로 동료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최정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참 멋진데 말이야.

    "통제는 저희 요원들이 하겠습니다. 저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저희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저쪽에서 도발을 해올 시에 어찌 방어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라도 더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최정훈이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도 박수를 쳤다.

    지휘자임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정인수의 모습이 그들에게도 좋게 보였던 모양이다.

    "리더는 저래야지."

    "하, 부럽다."

    최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욕이 아닌데, 왜 욕같이 들리는 것인가.

    "그럼 탑승하시죠."

    "예."

    최정훈은 뭔 말만 하면 궁시렁대기 바빴던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이럴 수가!

    이건 배신이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이런 차별이라니!

    "내가 다시는 잘해주나 봐라!"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최정훈이 부들거리면서 버스로 향하려는 순간, 저쪽에서 완전무장을 한 대원 하나가 뛰어왔다.

    그러고는 정인수를 향해 속삭였다.

    "으음……."

    정인수가 난처한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판문점 넘기 전에 몸수색을 해야 한다는데?"

    "몸수색이요?"

    "규정이라네요."

    "우리가 뭐 반출할 게 있습니까? 몸수색이라니."

    "관례라는 것 같은데……."

    "북한에서 요구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 우리 측에서 해야 한다고 하는 모양이네."

    "그래요?"

    최정훈은 말없이 전화기를 꺼내서 번호를 눌렀다. 그러고는 두말 없이 이지혁에게 폰을 넘겼다.

    이지혁도 말없이 폰을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 무슨 일인가?

    "아저씨, 저 이지혁인데요."

    - 무, 무슨 일이십니까!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얘들이 나 몸수색해야 한다는데요? 내가 다른 사람 손이 몸에 닿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 어느 미친놈이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해결하겠습니다. 5분 내로 해결해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넹. 빨리 좀 해줘요."

    이지혁이 전화를 끊자 정인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편하다.

    편해.

    * * *

    "심심해."

    이지혁이 차창 밖을 보며 하품을 했다.

    처음에는 북한이라는 곳이 신기하다 보니 밖을 계속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이지혁은 모든 흥미를 잃어버렸다. 도로 주변으로 보이는 것은 산 아니면 밭이었고, 그 광경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도로는 나름 잘 닦아놨는데……."

    북한 수준이 한국의 70년대 시절도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왜 볼 게 산밖에 없냐."

    최정훈이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북쪽은 산지니까요."

    "그래도 너무 심한데……."

    "한국도 원래는 이랬습니다. 도로를 내고 산을 깎고 하다 보니 좀 나아진 거지, 지금도 국도를 타고 가면 주변에 산밖에 안 보이죠."

    "그래요?"

    이지혁은 흥미를 잃은 듯 휴대폰을 꺼냈다.

    "어?"

    이지혁의 눈이 흔들렸다.

    "데, 데이터가 안 되는데?"

    "기지국이 없으니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데이터가 안 된다는 게 말이 돼요? 그럼 나는 뭐하라고?"

    "…평양에는 와이파이가 터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가시면……."

    순간, 이지혁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자자, 여기……."

    이지혁이 발악을 하기 직전, 최정훈이 가방에서 꺼낸 과자를 앞에 늘어놓았다.

    와그작.

    두말 없이 과자를 먹기 시작하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이 식은땀을 닦았다.

    "휴우……."

    시작부터 이 난린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보통 일이 아니야."

    저쪽도 폭탄인데, 이쪽은 핵폭탄이다.

    국가적 꼴통인 북한과 인간적 꼴통의 최고봉인 이지혁이 만나고도 아무런 사고 없이 끝낼 수 있다면, 그날로 신의 존재를 믿어야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촵촵촵촵.

    이지혁이 과자를 흡입하는 소리만이 버스 안을 조용히 울렸다. 평소라면 왁자지껄하게 소란이 일었을 것인데, 오늘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하기야…….'

    이미 이곳은 북한.

    따져 보자면 적국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겁대가리를 능력과 교환한 능력자 놈들이라고는 하나 겁이 나지 않을 수는 없겠지.

    '나도 쫄리는데.'

    최정훈은 심각한 얼굴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공기가 무겁다.

    눈이 쌓인 새하얀 산들을 보자 담배 한 개비가 간절해졌다.

    "전방에 누군가 있습니다."

    "음?"

    최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정인수도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검문소인가?'

    이 상황에도 검문이 유지가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라가 날아갈 판인데도 통제를 하다니. 역시 북한이라고 해야 할지.

    "일단 세워봐."

    정인수가 긴장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자리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정인수는 영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미 북한으로 그들이 찾아간다는 전언이 보내진 상황이다. 한시가 급할 텐데 이리 막아선다는 것은 이곳으로 그들이 온다는 것이 전달되지 않았든가, 그게 아니라면 고의적으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정인수는 버스가 멈춰 서자 문을 열고 내렸다.

    인민복을 입은 북한군 병사가 버스 입구로 다가왔다.

    "니네 무어네?"

    "대한민국 육군 국토 방위 사단 대령 정인수요."

    "대한민국? 남조선?"

    정인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기가 좋은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너무도 자연스럽다.

    "뭔 소리네? 지금 남조선 놈들이라, 이 말이네?"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정인수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할 때, 등 뒤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렸다.

    "북한 사람이다."

    정인수는 눈을 감아버렸다.

    * * *

    "나, 나오시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궁금하잖아요."

    "뭐가 말입니까?"

    "북한 사람인데."

    "……."

    거, 이지혁 씨.

    같은 사람을 그렇게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하면 안 됩니다.

    북한이라고 외계인이 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고 그러십니까!

    에헤이!

    "이, 이 간나 새끼는 뭐네?"

    이지혁의 눈빛에서 불쾌함을 느꼈는지, 북한 병사의 반응도 호의적이지는 못했다.

    "아니, 그게……."

    정인수는 간만에 말문이 막히는 게 뭔지 느낄 수 있었다. 북한 사람들에게 이지혁이라는 개체를 설명한다는 것은 열대기후 원주민들에게 남극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애초에 이해가 가능한 영역이 아닌 것이다.

    "이지혁 씨, 잠시만 안에 들어가 계시지요. 북한 사람은 평양에 도착하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심심한데."

    아니, 너 그때 북한 애들 봤잖아.

    "그때 능력자들 보셨잖습니까."

    "난 이상하게 능력자 애들은 사람이란 기분이 안 들어요."

    "……."

    그건 공감이네.

    나도 가끔 당신이 사람처럼 느껴지지가 않거든요.

    "여하튼 제가 해결을 할 테니, 잠시만."

    "음, 알았어요."

    이지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뭐네?"

    "아닙니다."

    정인수는 대충 손을 휘젓고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고 보니…….

    '선도 차량이 어디 갔지?'

    앞쪽에서 길 안내를 하던 차량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앞쪽에서 운행을 하고 있었는데…….

    '먼저 통과한 건가?'

    말이 안 된다.

    뒤의 차량을 안내하기 위해 존재하는 선도 차량이 검문소를 홀로 통과해 먼저 가버렸다면 선도를 나선 의미가 없지 않은가.

    '먹이겠다는 거군.'

    정인수는 이를 살짝 갈았다.

    이건 대놓고 엿을 먹이겠다는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콱 엎어봐?'

    다른 거 할 것 없이 이지혁만 불러다가 옆에 서 있게 해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왜 이곳에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북한 노동당의 태도였다.

    그들은 반드시 이지혁과 NDF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트러블을 자초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사회 안에 있다고 해도 최소한의 이성은 있어야지.

    이런 식으로 하다가 이지혁이 기분이 나빠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누가 엿을 먹는 건데.

    "시간 끌지 말고 차 안에 있는 인간들 다 내리라."

    "내리라구요?"

    "귀 먹었네?"

    정인수의 다리가 살짝 옆으로 빠졌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도 더 이상은 이들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생각을 해보니 지금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이지혁의 기분이 뒤틀리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당신들 계급이 뭐요?"

    "뭐이래?"

    "내가 분명히 대한민국의 대령이라고 밝혔을 텐데? 우리는 지금 조선노동당의 요청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중이오. 그런데 감히 어디서 아까부터 반말 찍찍 하면서 강압적으로 나오는 거요? 당에 정식으로 항의해 볼까?"

    "…로동당?"

    군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 앞으로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소?"

    "그, 그랬지."

    "그 차가 우리 선도 차량이오. 뭔가 지금 착오가 있던 모양인데, 우린 지금 당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하게 만들고도 당신들이 무사할 것 같소?"

    군인들의 눈이 흔들렸다.

    '모르는 건가?'

    하기야 미리 말해주고 일을 벌이다가 계획이 틀어지면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그럴 바에야 말을 안 해주고 수작질을 벌이면 일이 뒤틀렸을 때 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벗어날 수 있겠다는 계산이겠지.

    매우 비열하고 짜증나는 수작이지만, 문제는 이 빤한 수작이 먹힌다는 것이었다.

    '자칫 강행 돌파라도 하면 이들도 무사하진 못하겠군.'

    여하튼 이들의 임무는 초병.

    지나는 이들을 감시하고 검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도 모르는 수십 명의 남한 사람들을 그냥 통과시켰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지.

    "상관없소?"

    "…뭔 소리요?"

    "책임자한테 연락을 해보란 말이오. 통과시키라는 말이 나올 테니까. 어차피 당신들이 책임질 수 있는 사안도 아니잖소."

    "조금만 기다리라."

    군인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들을 힐끔힐끔 보다가 초소 안으로 향했다.

    그래도 도로를 지키는 이들이라 무전 장비는 갖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골치가 아파졌겠지만 말이다.

    군인들이 한참 동안 무전 장비를 붙들고 씨름을 했다.

    '돌겠구만.'

    정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때 북한군에 대한 과대평가가 한국을 뒤흔든 적이 있었다. 독기과 악을 갖춘 병사들이 어쩌고 하면서 북한의 특수부대와 특작조들에 대한 고평가와 두려움을 논하던 시절.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간단한 결론이 나왔다.

    결국 군인이라는 것은 잘 먹어야 잘 싸우는 것이고,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드는 법이다.

    기본적인 식량마저 부족한 나라에서 정예병을 양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 정인수는 그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한국이 당나라 부대라고 자학하는 처지라 하나 지금 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초병들이 우왕좌왕했다가는 당장에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만약 정인수가 책임자였다면 열흘은 족히 지옥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관문을 지키는 나름 정예병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저런 꼴이라니.

    '전쟁이라도 나면 순식간에 밀고 올라갈 수 있겠군.'

    전쟁이야 안 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태생이 군인인 정인수는 그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씨름하던 군인이 밖으로 나와 정인수에게 다가왔다.

    "어찌 됐소?"

    "이 간나 새끼가 지금 나 놀리네?"

    철컥!

    총구가 정인수의 머리로 겨눠졌다.

    "저, 씨!"

    박성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상황을 알아챈 이들도 다들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계십시오."

    특수부대 요원들이 NDF들을 진정시켰다.

    "저기 지금 대령님 머리에 총구 겨눠진 거 안 보여요?"

    "보입니다.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너희 대장이 위험한데 니들이 우릴 말리면 어떻게 하냐?"

    박성찬이 성질을 내자 대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우리의 임무는 여러분을 안전하게 평양까지 모시는 겁니다."

    "아니, 지금 위험하니까."

    "대령님을 생각하신다면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군인으로서 대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임무의 완수입니다. 민간인의 보호를 받다가 되레 임무를 실패하게 된다면 그 이상의 치욕이 없습니다."

    "끄응."

    박성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리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맨손으로도 저 정도는 제압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요?"

    "방위사 대령 자리가 그냥 주어지는 자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몬스터를 상대한다고는 하나 대한민국 창건 이후로 가장 많은 전투를 겪은 부대입니다. 그 부대의 장을 맡고 계신 분입니다."

    "음……."

    박성찬이 불안한 눈으로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 * *

    "이거, 뭐하는 짓거리지?"

    정인수가 뚱한 눈으로 군인과 시선을 맞췄다.

    "윗선에서는 그런 일 없다지 않나! 너 이 새끼, 어디서 온 거야! 내래 어수룩해 보이디?"

    정인수는 혀를 끌끌 찼다.

    아주 엿을 먹이겠다고 작정하고 나온 것이다.

    "총 내려."

    "말부터 똑바……."

    "총 내려!"

    정인수가 눈에 불을 뿜자 군인은 움찔하여 뒤로 살짝 물러났다.

    몬스터와의 끊임없는 전투를 지휘해 온 지가 벌써 오 년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누구도 그보다 많은 전투를 겪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백전연마의 군인이 내뿜는 기세를 일개 초병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디서 총부터 들이대?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이 새끼들이."

    정인수가 화를 내자 주변의 군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대기 시작했다.

    "노동당에 연락해. 내 이거 그냥 안 넘어갈 테니까. 어떤 새끼가 쓴 각본인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군인이 만만해 보여? 거지새끼들이 도와달라 그래서 도와주러 왔더니만, 어디서 엿을 처먹여?"

    "……."

    "야, 이 새끼야! 뭐해! 너희 상관한테 전화하라니까!"

    "그, 그게……."

    "무전 때리라고!"

    정인수가 강하게 나가자 군인들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머리가 있는데 버스가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상부의 지시가 없는 이상 매뉴얼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윗대가리 부르라고, 너희랑은 할 말 없으니까. 해결도 못할 일 잡고 시간 끌지 말고!"

    군인들이 어어, 대더니, 서로를 마주 보며 대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하기야.'

    우리 입장에서도 북한군이 부담스럽지만, 저들 입장에서도 대한민국이 부담스러운 것은 분명했다.

    이지혁처럼 서로를 무슨 환상종처럼 보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리라.

    게다가 지금 정인수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되었을 시 저들도 수용소행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당연히 주저할 수밖에.

    "뭐야?"

    그때, 멀리 초소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이 종간나 새끼들이 다 미쳤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네?"

    "대, 대장님, 이놈들이 좀 이상합네다."

    "이상해?"

    대장이라 불린 자가 정인수 등을 돌아보았다.

    한눈에도 북한에서 볼 수 없는 차량이란 것을 알아챈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너네 뭐네?"

    "그전에 그쪽부터 자기소개를 하는 게 예의 아닙니까?"

    "예의? 지금 예의라 했네?"

    정인수는 사내의 계급부터 살폈다. 약장을 보면 소좌로 보인다.

    "너, 말투가 간지러운 게 남조선 놈이네?"

    "그렇소만?"

    "어데 남조선 놈이 영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 안에서 큰 소리를 치고 있네? 이 새끼들 전부 묶어서 압송하라우."

    정인수의 얼굴이 멍해졌다.

    '미친 건가?'

    압송?

    외교 요청으로 온 이들을 압송한다?

    아무리 북한이 막장 국가라고는 하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선 제압이 아닌가? 정말 뭐가 꼬인 건가?'

    기선 제압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었다.

    "잠깐 기다려 보세요. 선도 차량이 지나갔단 말입니다. 거기에 연락해 보면 될 겁니다."

    "선도 차량?"

    "그렇소."

    "뭐라 씨부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거 모른다. 출입증이나 통행증 있어?"

    "……."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압송하라. 이 새끼들, 큰일 날 놈들이구만."

    "지금 실수하는 겁니다."

    "대드는 거네?"

    철컥! 철컥!

    동시에 사방에서 총구가 겨누어졌다. 정인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좋은데…….'

    북한과 트러블이 생긴다고 해서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들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인원이 아니다. 이들은 NDF 요원 하나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트러블이 생기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그리 이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몬스터들을 막아내 체제 붕괴를 막는 일이니까.

    "순순히 따라오라."

    포위가 조여들기 시작하자 정인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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