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1화 (61/118)
  • [■] 너희, 누가 보냈냐? [■]

    ─────

    "뭐예요?"

    이지혁의 물음에도 최정훈은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도 모르는 것을 어찌 대답하라는 말인가.

    '정부 쪽은 아닌 것 같은데…….'

    검은 세단이 줄지어 왔을 때는 국정원 등이 우선적으로 떠올랐지만, 내리는 이들의 복장이 꽤나 자유로운 것으로 보아서는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 쪽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거칠게 굴 사람이 없을 텐데?

    최정훈은 표정을 굳혔다.

    "어? 저 사람들, 이쪽으로 오는데?"

    '나도 눈이 있으니 알지.'

    검은 슈트 차림의 사람들과 꽤나 자유로운 복장의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앞쪽은 검은 세단이 주지만, 뒤쪽으로는 승합차도 몇 대 따라붙은 모양이었다.

    '일단 우리가 이곳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능력자 거주구 안의 NDF 건물부터 감시를 시작했든가, 아니면 그들의 행적을 따로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느 쪽이든 유쾌하진 않은데……."

    "넹?"

    "아, 아닙니다."

    최정훈은 시동을 건 채로 벨트를 풀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지혁이 이 일에 나서게 해서는 안 된다.

    저들이 이 차를 노리고 왔다면 최정훈이 아니라 이지혁을 노리고 온 것이다.

    제정신이 박힌 놈들이라면 이지혁이라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지혁이 누군지 알고 왔을 테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이지혁이라는 사람이 엮었을 때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차에서 내리지 마십시오."

    "왜요?"

    "…그냥 부탁드릴게요."

    "그럼 뭐……."

    말이라도 들어줘서 고마웠다.

    그동안 쌓아온 유대감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빛을 발하는 것은 최정훈의 마음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

    찰칵! 찰칵!

    "뭐, 뭐야!"

    순식간에 터지기 시작한 카메라 플래시에 최정훈이 기겁을 했다.

    짙은 선팅을 해두기는 했지만 얼굴이 아주 가려질 만큼은 아니라서 저만큼 빛을 뿌려 댄다면 얼굴이 찍힐 것이다.

    "아, 씨!"

    이지혁이 짜증을 내기 시작하자 최정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기 계세요. 제가 일단 처리해 보겠습니다!"

    "끙."

    이지혁이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최정훈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기랄.'

    최정훈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뭡니까?"

    짜증이 한가득 담긴 얼굴로 최정훈이 소리를 치자 시선들이 일제히 쏠렸다.

    "최정훈 씨죠?"

    "네?"

    "지금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이지혁 씨 맞죠?"

    "…당신들 누구야?"

    최정훈은 말을 하면서도 우스웠다.

    이 광경을 보고도 이들이 누군지 모르면 그게 바보지.

    '기자들이 왜 온 거지?'

    이지혁에 대한 취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취재를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기자들이 특종이라면 가리지 않고 벌 떼처럼 달려드는 족속들이라고는 하나,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어떤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이리 막무가내로 나오지는 못할 일이었다.

    '뒷배가 있다는 건가?'

    지금까지 없던 시도가 이리 한 번에 벌어졌다는 것은 분명 뭔가 원인이 있었다.

    "찍지 마요! 찍지 말라고! 아오, 내가 성질이 뻗쳐서!"

    최정훈이 화를 내며 카메라를 밀쳤지만, 이지혁 쪽으로 쏟아지는 셔터 세례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최정훈은 다급해졌다.

    저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건드리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저러는 건가?

    기자라면 최소한 취재 대상에 대한 조사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지혁을 자극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개념도 없이 무슨 취재를 하겠다고!

    언론이 권력이니 뭐니 하지만 차라리 대통령의 집에 잠입하는 것이 낫지, 저건 정말 죽겠다고 호랑이 굴에 머리를 들이미는 격이었다.

    "그만하라고 했죠!"

    최정훈이 바로 앞에 있는 카메라를 잡아 내동댕이쳤다.

    카메라가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나자 소란스러웠던 현장이 급격하게 식었다.

    "…뭐야?"

    기자들이 험악한 인상으로 최정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 많은 기자들이 노려보면 섬뜩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최정훈이 누군가.

    이지혁을 따라다니며 몬스터에, 마왕에, 험한 꼴이란 험한 꼴은 다 겪은 백전노장이다.

    인간의 눈빛 따위에 콧방귀도 뀔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들, 지금 누구 허락 받고 사진 찍는 겁니까? 안 비켜요?"

    최정훈이 강하게 나오자 기자들이 움찔했다.

    "기자가 취재하는 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데."

    "기자라는 양반들이 초상권도 모르나? 그 카메라 다 가져와요."

    기자들이 카메라를 뒤로 뺐다.

    "안 가져와?"

    최정훈이 사납게 이를 드러내자 기자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야, 왜 밀어?"

    "뭔데! 왜 미냐고!"

    아직 상황을 파악 못한 뒤쪽에서 원성이 들려왔다.

    "씁."

    최정훈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지혁을 만나기 전부터 기대 받던 관료이자 엘리트로서 포스가 넘치던 최정훈이다.

    이지혁을 만나고 난 후, 온갖 개고생을 하면서 한층 더 단련이 된 최정훈의 기백을 일반인들이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늘 찍은 사진을 기사화하는 곳이 있으면 NDF에서 공식적으로 항의가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공식적이지 않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도 모릅니다."

    살짝 협박을 섞은 최정훈이 일갈했다.

    기자들이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

    최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송정수?"

    최정훈이 놀라 말하자 송정수라 불린 중년의 사내가 미소로 화답을 했다.

    "예, 제가 송정수입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최정훈이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부른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연상인 사람을 말이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있지?'

    하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례를 저질렀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될 만큼.

    송정수.

    현 여당의 총재.

    암묵적으로 여당의 1인자인 대통령을 제외한다면 현재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제외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지.'

    윤영민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열풍 덕에 갑자기 경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 이전에도, 거품이 사그라든 그 이후에도 정치적인 역량과 영향력에서 윤영민이 송정수를 능가한 적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가.

    '이지혁 씨를 만나러 왔다고?'

    가능한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움직여 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이지혁이라는 존재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예!"

    최정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현대 정치사에 있어 거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 아무리 최정훈이 담이 크다고 해도 떨릴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을 만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인데?'

    막장 대통령이 설치는 것을 보며 비웃는 마음이 있었기에 윤영민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송정수에게 받는 느낌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무슨 일이신지?"

    송정수가 가볍게 웃었다.

    "빤한 일 아니겠습니까. 큰일 하러 가시는 분이 계시니 말씀 좀 나눠볼까 하고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나 뵙게 된 건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눈도 피해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아, 예."

    최정훈은 정신이 없었다.

    '이게 위압감인가?'

    딱히 위협적인 언사를 한 게 아님에도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카리스마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그러니 이지혁 씨를 좀 뵐 수 있을까요?"

    최정훈의 눈이 떨렸다.

    목적이야 빤하지만, 그 말을 직접 들으니 긴장이 확 들었다.

    "지금은 상황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청와대에 가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보다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그렇습니다. 당장 회의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확실히 급한 상황이기는 하죠. 북한에서 요청이 들어왔고, 이지혁 씨가 파견을 가야 하는지, 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을 해야 하니까요."

    "예."

    최정훈은 초조한 얼굴로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이리 시간을 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급한 와중이라 당부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 겁니다. 아무래도 대통령님과 지금의 각료만을 믿기에는 상황이 너무 위중하니까요."

    "으음……."

    최정훈은 침음을 삼켰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정신이 나갔다고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존중을 받기에 차고 넘치는 자리였고, 지금의 대통령 역시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송정수가 이런 말을 하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번 열풍이 없었더라면 확실하게 대통령이 되었을 거라 평가 받던 사람이었다.

    이전까지 대한민국에 대한 기여도를 따져 본다 해도 윤영민이 감히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총재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국정에 관한 일입니다. 총재님과 상의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정훈은 단호하게 송정수의 말을 끊었다.

    송정수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해온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지금하고 있는 짓이 월권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여당의 총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권력의 척도일 뿐, 국정에 대해 실질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가요?"

    "예."

    최정훈의 말에 송정수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최정훈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죠."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데?

    최정훈이 상황을 마무리하는 말을 찾으려는 찰나, 송정수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최정훈 씨가 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지혁 씨가 그 말에 대해 듣고 생각하고 나서 그리 말을 한다면 저 역시 납득하겠죠."

    "……."

    늙은 너구리.

    최정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예상이 갔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가 직접 말을 해보고 싶군요. 최정훈 씨가 이지혁 씨의 보호자도 아닌데, 말을 해보는 것도 막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총재님."

    "예."

    "저… 제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송정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으로 파악하자면 뭔가 굉장히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송정수가 안타까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무슨 말이죠?"

    최정훈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이지혁 씨와 총재님의 만남을 막는 것은 이지혁 씨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총재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지요. 이지혁 씨에 대한 이해 없이 독대를 하시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송정수의 얼굴이 멍해졌다.

    무슨 소리지, 이게?

    * * *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미 알고 오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최정훈은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지혁 씨를 자극하시는 것은 그리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내가 자극을 했다는 말이신가요?"

    "총재님께서 자극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최정훈의 눈이 기자들에게 향했다.

    이 많은 기자들이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데는 뒷배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더니, 그 생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저 많은 기자들을 끌고 오신 건 분명히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실수요?"

    "총재님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저 같은 범인이 짐작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죠. 저는 총재님보다 이지혁 씨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이지혁 씨는 이런 상황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송정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그건 저와 이지혁 씨가 풀어낼 문제 아니겠습니까?"

    "……."

    "이렇게 거친 방식으로 만남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제가 굳이 최정훈 씨에게 양해를 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사실은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이 정도면 제가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정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비켜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명심해 주십시오."

    "뭘 말인가요?"

    "…저 같으면 안 그럴 겁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송정수를 보며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뒤로 물러났다.

    세상에는 꼭 당해봐야 아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정치인이라는 부류는 시류를 타거나 조율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지만, 맞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분명 그건 인정한다.

    저 양반도 한때는 정계에서 불도저라 불리던 양반이니,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

    '그런데 밀고 나갈 대상을 잘못 택했어.'

    하필이면 이지혁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저 양반의 감이 떨어졌다는 것이리라. 경선 패배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더니…….

    하기야 짜증이야 나겠지.

    당연히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대통령 자리가 블랙 먼데이를 통한 사회불안으로 날아간 것도 열 받는데, 대신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이 온갖 패악질과 삽질을 버라이어티하게 부려 대서 여당 지지율 자체를 깎아먹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 보면 다음 대선에서는 손도 못 써보고 패배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탈출구를 찾는 거겠지.

    '그런데 거긴 탈출구가 아니라 싱크홀이에요, 이 사람아.'

    설마 이지혁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 줄이야.

    국가에서 치적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역사상 역대급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홍보에 전혀 이용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자기는 이지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최정훈은 문득 이다음 상황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최정훈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인지 송정수가 이지혁이 있는 차량의 보조석으로 다가가 유리창에 노크를 했다.

    최정훈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쯤 되면 그도 반쯤은 즐기는 심정이었다.

    위이이잉.

    차창 유리가 내려가고 이지혁의 얼굴이 드러났다.

    찰칵! 찰칵!

    그와 동시에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절묘한 각도에서 이지혁과 송정수의 얼굴이 동시에 나오도록 사진이 찍히고 있었다.

    "이지혁 씨? 맞나요?"

    차창을 내린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맞는데요?"

    송정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송정수입니다."

    이지혁이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송정수가 어색한 얼굴로 손을 거둬들였다.

    "제가 누군지 들어본 적 없나요?"

    "네. 모르는데요."

    "…몰라요?"

    "네. 누구신데요?"

    송정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놈은 중학생도 아니고, 20세가 넘은 사람이다. 투표권도 있는 양반인데 자신을 모른다고?

    "정말 모르나요?"

    "…내가 알아야 돼요?"

    송정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 그걸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그건 상식의 영역이지 않은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알면 좋은 것이고, 웬만해서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크흠, 그런 건 아니지요."

    송정수는 입술을 짓씹었다. 초선 의원이던 시절 이후로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정치인답게 얼굴을 붉힌다거나 당연히 알 것을 모른다는 투로 화를 내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제가 실수했네요. 저는 신한국당의 총재인 송정수라고 합니다."

    "신한국당?"

    "……."

    모르나?

    모르는 건가?

    십 년 넘게 한 이름을 쓰고 있는데 모르는 건가?

    애들이 나 모르게 당명을 바꾸기라도 했나?

    "지, 지금 여당입니다."

    "여당?"

    송정수는 눈을 감았다.

    방금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은 그냥 유치원생이다.

    그의 지위나 권력이 통하지 않는 완벽한 자유인이었다.

    "정당입니다. 지금 집권하고 있는 당이죠."

    "아, 그러네요. 그래서요?"

    "아, 음……."

    무슨 말을 하러 왔더라?

    송정수는 자신이 이렇게 말을 더듬는다는 사실이 너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터지더라도 혀는 매끄럽게.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건만, 이런 애송이 앞에서 추태를 보이다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을 노리고 있는 그에게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송정수는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말 한마디에 이리 흔들릴 송정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를 흔들리게 하는 건 이지혁의 저 눈빛이었다.

    분명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파악했다면 송정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 텐데, 저 해충을 보는 듯한 눈빛은 뭐란 말인가.

    아니, 해충이라면 적어도 싫은 티는 내는 법인데, 저 길가에 돌을 보는 듯 관심 없는 눈빛이 송정수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송정수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보았다면 최소한 '뭔가 있는 놈이다' 하는 생각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상대가 어떤 놈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놈이든 그는 목적만 이루면 된다.

    "청와대로 가고 계시는 중이죠?"

    "모르겠는데요."

    "…네?"

    "나야 그냥 가자는 대로 가고 있는 거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이지혁을 보며 송정수는 일순 또 할 말을 잃었다.

    "어, 음……."

    '당황하지 말자.'

    송정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어디로 가시든 간에 결국은 북한에 대한 사항을 논의하러 가시는 거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가자 그래서 가는 거라니까요. 아저씨, 귀가 잘 안 들리세요?"

    "……."

    이지혁이 측은하다는 투로 위아래를 훑어보자 송정수는 자신의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했다.

    예로부터 신세대라는 놈들의 귀빵맹이를 후려치고 싶어진다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송정수는 나이가 꽤 많이 든 게 분명했다. 기분 같아서는 눈앞에 있는 놈을 차에서 끌어내 해머링을 갈기고 싶었으니까.

    '내가 20년만 젊었어도.'

    베트남전에서 날아다니던 그때까지는 아니더라도 딱 20년만 젊었어도 이 건방진 어린놈을 두들겨 패버릴 텐데.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건 알고 있다.

    두들겨 패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겠지.

    "크흐흠."

    송정수는 자꾸 페이스가 말린다고 생각했다. 이 주도권을 끌고 와야 상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이다.

    "결국은 북한으로 가시게 될 겁니다."

    "제가 왜요?"

    "상황이 그러니까요."

    "가기 싫으면 안 갈 건데요?"

    "…가기 싫으신가요?"

    "지금은 모르죠."

    "……."

    와!

    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지?

    송정수는 정치 인생 30년에 최고의 강적을 만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 그럼 안 가실 겁니까?"

    "모르죠."

    "방금 싫으면 안 간다고 하셨잖아요."

    "싫으면 안 간다고 했죠."

    "그럼 싫지는 않다는 거네요?"

    "모르죠."

    "…그게 뭔 소립니까?"

    기어코 이지혁이 짜증을 냈다.

    "아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싫으면 안 가고 좋으면 간다는 말이 그렇게 알아듣기가 힘들어요? 아저씨, 정치한다고 안 그랬어요?"

    "예, 그랬죠."

    "정치한다는 분이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먹어서 어떻게 해요? 보청기라도 좀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보청기가 문제가 아니라 심장에 페이스 메이커라도 박아야 할 판이었다.

    심장이 두근대고 숨이 가빠온다. 그가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 이런 대접을 어디서 받아보았단 말인가.

    '그 친구가 괜히 그리된 게 아니었어.'

    외교부 장관으로 한참 잘 나가다가 어느 순간 커리어를 말아먹기 시작한 친구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미, 미안하게 됐습니다."

    깊은 한숨이 내려앉는다.

    '이런 미친놈.'

    막말로 안 보낼 거면 뭐하러 그를 부른다는 말인가.

    국가 측에서는 당연히 그를 보내려고 하고 있는 건데.

    뭐?

    들어보고 좋으면 가고, 싫으면 안 간다고?

    그건 무슨 배짱인가.

    그럴 거면 차라리 회의에 참석이라도 하지 말지.

    "그러시군요."

    송정수는 말을 끌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끝내 버리는 것은 화법에 어긋난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대처를 생각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왜 바쁜 사람 잡았냐구요."

    눈앞의 어린놈의 얼굴에 심통이 어린다.

    송정수는 손수건으로 이마에서 배어 나오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깊이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입니다."

    "음, 그래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뭐, 어려울 거 없죠."

    이지혁의 대답에 송정수가 반색을 했다. 태도로 보아 대화는 반쯤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전에 하나 해결 좀 하구요."

    "네?"

    "영감님은 좀 기다리세요. 제가 우선순위가 좀 남달라서."

    이지혁이 문을 벌컥 열더니 밖으로 나왔다.

    "뭐하시려고……."

    송정수는 의아해하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이지혁은 밖으로 나와 어깨를 좌우로 흔들고 목을 까딱까딱댔다.

    찰칵! 찰칵!

    그 와중에도 플래시가 마구 터져 나온다.

    이지혁은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짓고 브이 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했다.

    '포토 존인가?'

    송정수는 눈앞에 보이는 어린놈의 기행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이 옆에 있는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어, 음……."

    이지혁이 머리를 슬쩍 긁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우웅!

    작은 파공음이 인다 싶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자가 들고 있는 카메라가 이지혁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어엇!"

    놀란 기자가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콰드득!

    이지혁의 손안으로 들어간 카메라가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으로 비산했다.

    "아……."

    깔끔하게 카메라를 회복 불능으로 만들어놓은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 누가 보냈냐?"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지혁의 등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송정수의 얼굴도 허옇게 질려갔다.

    * * *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속에 다들 말이 없었다.

    "누가 보냈냐고."

    이지혁이 건들건들거리는 양아치 포즈로 입을 떼자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기자는 정보에 빨라야 하고, 요즘 가장 민감한 일이 능력자 관련 사건들이다. 그러니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한국 능력자 역사상 최악의 개차반.

    해외에까지 그 더러운 성격으로 악명을 떨치던 지랄마녀 서아영을 출현과 동시에 데꿀멍시키고, 역사상 최악의 능력자 자리를 꿰찬 또라이.

    이지혁이 저지른 일들을 조금만 둘러봐도 '아, 이 새끼랑은 엮이면 안 되는구나'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특성상 온갖 또라이와 엮이는 기자들이다 보니, 그런 냄새는 또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이지혁은 상종해서는 안 되는 인물인 것이다.

    그동안 이지혁에 대한 정보를 들으면서도 함부로 기사화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괜히 취재를 나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고, 괜히 기사를 썼다가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니까.

    그냥 대충만 봐도 법의 권한을 벗어나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의 비위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송정수가 뒷배가 되어주었기에 나설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송정수의 힘도 먹히지 않는다면 앞으로 영영 이지혁에 대한 취재를 할 수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기에 모두가 합심해서 취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기자들의 시선이 송정수에게로 향했다.

    '책임져 준다면서요.'

    눈빛에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다.

    송정수는 미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지혁과 만났다는 것이 그저 구전으로 전해져서는 의미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소문으로나마 암암리에 전해지고 있는 세계 최고의 능력자를 그가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모습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떨어지고 있는 작금의 여당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

    게다가 기자들에게 던져 준 떡밥으로 대통령이나 정부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이지혁이 송정수의 말은 듣는다는 뉘앙스로 기사가 나가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서 일을 벌인 것인데…….

    '저 미친놈이…….'

    문제는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이상한 놈이라는 점이었다.

    능력자들 중 제정신 박힌 놈이 잘 없다는 말이야 공공연히 듣고 있었고, 과거에 서아영을 위시로 한 상위급 능력자의 패악질 역시 수도 없이 보고 느꼈지만…….

    '걔들은 성질이 더러운 거고…….'

    이놈처럼 그냥 이상한 놈은 아니었다.

    이놈은 능력자라서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이상한 놈이 능력자가 된 케이스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놈이 그런 케이스란 말인가! 이놈이!

    "아, 그래서 누가 보냈냐고!"

    기자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하자 송정수가 화들짝 놀라서 소을 휘저었다.

    지금은 그가 보냈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기자들도 그걸 이해했는지,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내서 온 게 아니라, 취재하러 온 겁니다."

    "그래?"

    "예. 뭐, 취재하는 게 잘못된 겁니까? 켕기는 부분이라도 있으시냐, 이겁니다. 그게 아니면 국민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셔야죠."

    한 기자가 소리를 치자 다른 이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공인으로서 국민의 알 권리에 답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겁니다. 우리 국민들도 우리나라에 어떤 능력자가 있는지는 알아야죠."

    "그게 다 세금으로 월급 받고 일하는 건데."

    "그렇지!"

    이지혁은 의외로 별말 없이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중간중간 날아드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추임새도 넣어가며 말이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이거, 안 좋은데…….'

    뭔가 기분이 찝찝하고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뭔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든다.

    "어. 뭐, 그래."

    이지혁이 기자들의 말을 끊었다.

    "뭐, 알겠는데… 그래서 누가 보냈냐고."

    "……."

    기자들의 입이 닫혔다.

    지금까지 한 말을 뭘로 들은 거지?

    "보낸 사람 없다니까요? 우린 취재하러 나온 겁니다. 보냈다면 사장님이 보낸 거죠."

    "그래요? 그럼……."

    이지혁이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당신들 회사 사장들 다 데리고 와."

    "……."

    이게 뭔 소리여?

    이지혁이 그들의 이해를 쉽게 해주었다.

    "나도 죄 없는 아저씨들한테 화풀이하고 싶지 않으니까, 책임질 만한 사람 다 데리고 와요. 한 사람에 한 명씩."

    기자들이 발끈했다.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거요?"

    "이 사람이, 시대가 어느 시댄데 기자를 협박하고 그래?"

    이지혁이라는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몇 배는 더 심한 말이 나갔을 테지만, 그들도 많이 자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자제력을 이지혁이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거지만.

    "협박?"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협박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건데요."

    "그게 뭔 소리야?"

    "협박이 아니라, 음……."

    이지혁이 고민하는 듯 턱을 괴더니, 이내 손을 풀고 머리를 긁었다.

    "어,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지금 기분이 나빠서 아저씨들을 잡아 여기서 바다까지 던져 버리고 싶거든요?"

    "……."

    저 새끼, 저거 진심이야.

    나 소름 돋았어.

    여기서부터 바다까지면 대체 몇 킬로미터인가를 계산하던 기자들의 귓가에 이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아저씨들을 족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요. 우리 엄마가 아버지 보고 항상 그랬거든요. 시키는 것만 하는데, 욕은 아버지가 다 먹는다고. 사장 놈이 한 일을 왜 죄 없는 아랫사람 욕하냐구요."

    끄덕.

    매우 공감이 가는 이야기라 다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사람들 상대하는 일은 아니라서 이유 없이 욕먹을 일은 적었는데, 아저씨들 보니까 우리 아버지보다 그게 더 심할 것 같아서 뭐라고 하기 뭐하더라구요."

    "으음……."

    다들 뭔가 조금 들뜬 얼굴이 되었다.

    대접이나 접대야 많이 받아보았다. 그만큼 욕도 많이 먹는다. 그런데 이렇게 진짜로 걱정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 만난 것 같다.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그때, 이지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냥 시킨 사람을 족치려구요. 기분 같아서는 내가 지금 아저씨들을 다 잡아서 바다에 던져 버리고 싶으니까, 시킨 사람을 대충 바다에 오십 번쯤 쑤셔 박으면 되겠죠."

    삐질.

    송정수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그, 그러면 죽지 않습니까?"

    한 기자가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기자질을 해먹고 살면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만 몇 십 년씩 해온 터였다. 지금 이지혁이 하고 있는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내가 죽이는 것도 아닌데."

    '니가 죽이는 거지, 이 미친놈아!'

    저 새끼는 사고방식이 이상하다.

    분명 뭔가 잘못됐다.

    "그러니까, 말해봐요. 누가 시켰냐구요. 정 말하기 싫으면, 아저씨들이 바다에 들어가고, 에……."

    이지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최정훈 씨."

    "네?"

    "여기 어디 쪽이 바다예요?"

    "……."

    최정훈은 뭔가 고민하는 듯하다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죠. 저쪽만 빼면 아무 쪽으로나 던지시면 됩니다. 대신에 600㎞ 이상 던져 주셔야 육지에 처박히지 않습니다."

    "에이, 육지에 박으면 죽잖아요."

    '바다에 박아도 죽지.'

    보통은 말이야.

    사람이라면 빼도 박도 못하고 죽는단 말이다, 이 미친놈아!

    "그렇다면야……."

    이지혁이 기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말해보죠. 누가 보냈어요?"

    "……."

    "일단 그럼 뭐, 사장이라도 데리고 와봐요. 허가가 났으니까 취재하러 온 거잖아요. 아니지. 데리고 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기다려야 하잖아. 내가 다 찾아갈 테니까, 내일 자리에 있으라고 그래요. 자리에 없으면 사옥 다시 볼 생각하지 말라 그러시고."

    기자들의 머리에서 사장이 죽는 것과 사옥이 날아가는 것 중 어느 게 더 중요한 일인가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결론은 어느 쪽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니, 차라리 사장이 죽으면 다행인데, 사장이 그 꼴을 당하고도 살아남는다면 그들이 죽을 차례다.

    특히나 사장이 악명 높기로 유명한 몇몇 신문사의 기자들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하, 하하, 이지혁 씨, 그게 아니고……."

    "아저씨들."

    "예."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거 같죠?"

    "……."

    "나 지금 엄청 열 받았거든요? 다 엎어버리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니까, 자꾸 사람 건드려서 열 받게 만들지 말고 뒤에 있는 사람을 불든가, 그게 아니면 사장을 제물로 바치든가, 둘 중에 하나로 하세요. 다 싫으면 지금 여기서 나랑 해결 보시든가."

    대답이 없었다.

    "어디 사람 가는 길을 막고 사진을 찍어대? 당신들, 원래 이런 식으로 취재해?"

    "…아니, 그게 아니구요."

    "웬만하면 귀찮아서 그냥 갈려고 했는데, 자꾸 사람 성질 건드리네. 그러니까 보낸 사람이 누구냐고?"

    송정수의 얼굴이 썩어가기 시작했다.

    슬슬 이지혁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하자 아까부터 자꾸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오한이 들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온다.

    그저 눈앞에서 사람 하나가 화를 내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변화였다.

    "으으……."

    이지혁이 바닥으로 발을 굴렀다.

    쩌저저적!

    그와 동시에 아스팔트가 사방으로 갈라지며 밑으로 움푹 파였다.

    "안 들려?"

    "……."

    기자들이 기겁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능력자들의 능력이 엄청나다는 것이야 누가 모르겠냐마는, 저런 광경을 눈앞에서 보기는 쉽지 않았다. 안전을 이유로 게이트 주변 취재는 금지되니까.

    영상으로 보기야 했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과는 그 느낌이 확연하게 달랐다.

    "아니면 댁들이 당해볼래?"

    "그……."

    한 사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밝혀지면 어찌 되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이지혁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바다로 오십 번 던질 거라니까."

    "…여기서요?"

    "그 사람 있는 데서부터 던지는 거지, 뭔 여기서예요?"

    그게 여기니까 그러지.

    그게.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송정수에게로 향했다.

    '해결 좀 해보세요.'

    그 시선의 압박을 받은 송정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지혁에게로 다가갔다. 단순히 기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목숨도 보호해야 할 것 아닌가.

    "이지혁 씨."

    "네?"

    "으음,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보냈든 중요한 건 국민들이 이지혁 씨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는 거죠. 그 과정에서 조금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소심한데요?"

    최정훈이 추임새를 넣었다.

    "엄청."

    송정수가 최정훈을 보며 입을 쩌억 벌리자 이지혁이 혀를 찼다.

    "그래서……."

    "네?"

    송정수가 대답을 하자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닷물이 많이 찰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송정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 악마 같은 새끼.'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그를 가지고 놀고 있던 것이다.

    "예능의 기본은 입수죠."

    "얼음물이면 더 좋고."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추임새를 넣는 최정훈이 더 죽이고 싶은 송정수였다.

    "이리 와요."

    이지혁이 송정수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 * *

    "왜, 왜 이러는 거요!"

    송정수가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러시나?"

    히죽거리는 이지혁을 보며 송정수는 온몸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옆에 그냥 미친놈이 있는 것과 그 미친놈이 자신을 노리기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지혁이 그를 타깃으로 삼았다는 인식이 생기자마자 눈앞의 미친놈이 그냥 미친놈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제대로 미친놈쯤으로 순식간에 격상되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여기서 조금만 잘못 행동하면 망한다.

    송정수는 직감했다.

    험한 정치판에서 오래도록 살아남게 해준 그의 감각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송정수쯤 되는 정치인은 무서울 것이 없다. 차라리 길 가던 꼬맹이가 경찰보다 더 무서운 게 정치인이라는 자리였다.

    강한 자에게 더 강한 것이 정치인이니까.

    그런데 눈앞의 놈은 달랐다. 이 미친놈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막말로 대한민국에서 여당 총재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도 바지 총재가 아니라 실권을 가진 총재였다.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으로 따지자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송정수였다.

    대통령마저도 앞에서는 한 수 접어주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랬는데…….'

    이 미친놈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가끔 있다.

    지위나 권력이 전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

    문제는 그런 사람들은 보통 야인이거나 힘이 없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힘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힘이 사라질까 봐 꺼려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다른 힘을 가진 이들을 경계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말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아니란 말이다.'

    첫 번째로 이 인간이 가진 힘은 송정수가 어떻게 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했고, 두 번째로 이 인간은 힘을 가진 주제에 다른 힘에 민감하지 않았다.

    밀림에서 바로 튀어나온 원주민에게 M60 기관총을 들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튈 줄 몰라서 위험하고, 통제가 되지 않아서 더 위험하다.

    "오해?"

    이지혁이 실실 웃었다.

    "이 아자씨가 농담으로 상대해 주니까 사람이 멍청해 보이는 모양인데? 최정훈 씨."

    "네, 이지혁 씨."

    "제가 그리 멍청한가요?"

    "그럴 리가요. 일반적으로 따지자면 이지혁 씨는 총명하다 못해서 천재과에 가깝죠."

    "크, 그건 너무 띄웠는데?"

    잘들 논다.

    아주 죽이 착착 맞았다.

    송정수는 이마에 촉촉이 배어 나온 땀을 닦아냈다.

    "왜 이러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좋은 의도로 온 것인데,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른 곳에서였다면 플러스가 될 만한 요소지만, 안타깝게도 이지혁은 그런 겉치레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와, 이 아저씨 사람 가지고 놀아놓고는 발뺌하는 거 보소?"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좀 배워야겠어요?"

    "제가 말입니까?"

    "정치인 지망 아니었어요? 이 아저씨 보니까 완전첸데? 대통령 보고 좀 실망했는데, 이 아저씨는 완전 너구린데?"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 그렇기야 하지만요. 그래도 키가 작은 사람한테 '너, 키가 엄청 작구나'라고 하는 건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나?"

    "비슷한 거죠."

    "아, 아저씨, 미안해요."

    예의도 바르지.

    최정훈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사과까지 하는 모습이 얼마나 올바른가.

    최정훈의 생각과는 다르게 송정수의 얼굴을 대놓고 썩어갔다.

    그가 어디서 이런 취급을 받아보았겠는가.

    둘이 죽이 착착 맞는 것이,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그를 놀리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보세요."

    송정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이렇게 절 모욕하신다면 나도 참지 않을 겁니다. 이 송정수, 그리 만만한 사람 아닙니다."

    "오!"

    이지혁이 눈을 크게 뜨고 송정수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데요?"

    "그런가 봅니다."

    "내가 저 아저씨 건드리면 어떻게 돼요?"

    "음……."

    최정훈이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별일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요?"

    "네. 뭐, 죽이지만 않으면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지혁 씨를 체포한다고 나서지는 못할 거구요."

    "그래도 미쳐서 체포하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럼 미국 가시죠."

    "아!"

    이지혁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러고는 미묘한 미소를 띤 얼굴로 송정수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요?"

    "……."

    송정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을 해보아도 지금 이지혁이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다고 해서 딱히 제재가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눈을 감아버릴 것이다.

    사법기관도 고개를 돌려 버릴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언론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언론기관도 지금 딱히 그의 편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망할 놈들.'

    주변에 기자가 몇 십 명이 있는데 아무도 카메라를 들지 않고 있었다. 찍는 시늉이라도 해야 기자 아닌가. 그런데 아무도 촬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카메라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기자들 역시 아는 것이다.

    지금은 뭔가 잘못됐다.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

    "선배님."

    기자 중 하나가 나름 최선임이라고 할 수 있는 메이저 신문사 기자에게 운을 뗐다.

    "왜?"

    아주 낮게 속삭이듯 대답이 돌아왔다. 괜히 큰 소리를 내서 이지혁을 자극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찍어서 뭐하게?"

    "기사 써야죠."

    "뭐라고?"

    "능력자가 여당 총재를 폭행하려는 상황 아닙니까? 이거, 기사로 나가면 파장이 어마어마할 텐데요."

    "어마어마하겠지."

    "그럼 특종 아닙니까?"

    "특종이지."

    "그런데 왜 보도를 안 합니까?"

    선배 기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고 싶으면 해라. 나는 안 하련다."

    "왜 안 하십니까?"

    "생각을 해봐라. 니가 기사를 쓰면 그걸로 특종이야 잡겠지. 난리가 날 거 아냐. 니 이름도 순식간에 확 뜨겠지."

    "좋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거 때문에 저 양반이 다른 나라로 가버리면 어떻게 될 것 같냐?"

    "어……."

    "처음에야 속 시원하다고 하겠지. 그런데 게이트 처리가 잘 안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원인을 찾겠지. 지금 저 양반이 우리나라에 가져오고 있는 유무형적 이득이 얼만 줄은 아냐? 그런데 그런 양반을 내쫓은 원인이 너한테 있다고 생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

    "논문에 표절 저지르고 대한민국을 전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든 연구자도 아직까지 비호하는 나라다. 국격에 민감한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되레 대중이야. 그런데 전 세계 역사에 다시없을 능력자를 우리 손으로 내쫓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물어본 이는 입을 닫았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될지 예상이 간다.

    "너나 기사 써라. 나는 길가다가 칼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낮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뭐, 딱히 틀린 말도 없잖아."

    송정수가 불러서 온 것은 사실이니까.

    "그, 그래도……."

    "뭐, 그래도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보도를 해야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니가 그거 사진 찍어 간다고 너희 데스크가 기사 내줄 것 같냐? 니 블로그에나 올리라 그럴걸?"

    "…그것도 그렇겠네요."

    카메라에서 손이 떨어졌다.

    "그리고 뭐, 이게 대단한 정의구현쯤 되는 거면 그런 것도 보도할 만하지. 기자라는 게 그런 직업 아니겠냐? 예전에 선배들은 독재정권에 맞서면서 죽을 위기 넘겨가며 보도하고 그랬지. 그런데 저 양반이 뭐 그런 악의 축도 아니고, 나는 그냥 관망하련다."

    "그러시다면……."

    그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을 해보니, 이건 그냥 눈을 감는 것이 이득이었다.

    "……."

    하지만 송정수의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일이었다.

    '이 썩을 놈들이!'

    지금까지 꼬리치며 살랑댈 때는 언제고, 저렇게 입을 싹 닦는단 말인가.

    아무리 더 강한 자에게 붙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라지만,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아저씨 편은 없는 것 같은데요?"

    이지혁이 씨익 웃으면서 점점 더 송정수에게로 다가갔다.

    "지, 진정하시고, 제 말을 좀 들어보십시오."

    "그냥 말해요. 진정 안 한다고 귀가 막히나? 어차피 말은 들리는 건데."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제가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기자들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아저씨, 웃긴 아저씨네?"

    이지혁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피해를 끼쳐서 짜증난 건데, 그게 악감정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좋은 뜻으로 엿 먹이면 기뻐해야 하나?"

    "…그, 그건 아니죠. 다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계산은 확실한 사람이니까."

    "무지하게 확실하죠."

    최정훈의 추임새는 언제나 적절했다.

    "아저씨가 날 엿 먹이려고 왔다 싶었으면 아저씨는 이미 염라대왕 만나고 있었을 거예요. 그게 아니니까 적당히 목숨을 붙여놓을 생각이거든요."

    참 고마운 말이지만, 전혀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일단은 진정하시고……."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간 이지혁이 송정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저씨."

    "네, 네!"

    "아저씨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온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아저씨쯤 되는 정치인이 계산 없이 무작정 날뛴 것은 아닐 거고, 리스크를 어느 정도 감수하고 도박을 한 번 해보겠다는 심정이었을 거예요. 맞죠?"

    송정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의외로 이놈, 통찰력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럼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에 대해서도 고려했겠네요. 그러니 그냥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맘 편하지."

    "아, 아니, 나는!"

    "자, 그럼 어떻게 해줄까?"

    이지혁이 사악하게 웃었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송정수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 설령 그가 한 짓이 기분 나쁘다고 해도 한 나라의 여당 총재인 그를 이런 식으로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냐고! 날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무사하다잖아요."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아, 시끄러."

    이지혁이 우수를 살짝 휘저어 시커먼 게이트를 열더니, 송정수를 잡고 게이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노인네, 목청도 좋지."

    비명을 지르며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는 송정수를 보며 이지혁이 사납게 이죽였다.

    게이트를 닫아버린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들은 내가 한 번 봐주는 거예요."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취재하려면 인터뷰 요청하고 오면 되지, 왜 이렇게 사람 짜증나게 찾아오냐구요."

    "이, 인터뷰 요청하면 받아줍니까?"

    "안 받을 이유는 있어요?"

    기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것도 그렇네?

    우린 왜 지금까지 요청을 안 해봤지?

    "대신……."

    이지혁이 손을 내밀어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적당히 알아서 좀 챙겨 주는 거 잊지 말구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갈게요."

    이지혁이 차에 오르자 최정훈이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을 기사화하는 언론은 제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두요."

    여기저기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예?"

    "소, 송정수 총재는 어떻게 된 겁니까?"

    "……."

    최정훈이 뒤를 슬쩍 돌아 이지혁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그 순간, 기자들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미친놈들이랑은 엮이지 말자.'

    현명한 생각이었다.

    * * *

    "여하튼 기사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경고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남고 싶거든요."

    최정훈은 눈으로 그들을 한 번 위협하고는 차에 오르려고 했다.

    "저기……."

    하지만 최정훈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예?"

    "이건 기사화 안 한다고 치고, 아까 이지혁 씨가 인터뷰 받아 준다고 했는데, NDF도 같은 입장이신 겁니까?"

    "으음……."

    최정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본적인 NDF의 입장으로는 이지혁이 밖으로 노출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NDF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지혁을 안다면 저런 인간이 국민의 시선에 띄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막을 도리는 없죠."

    문제는 이지혁이 하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본인이 하겠다는데 NDF 요원들이 무슨 국정원 직원이라 정보 보호의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막말로 자기가 하겠다고 하면 인터뷰를 하든 리얼리티 쇼를 진행하든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럼 진행해도 되는 걸로 받아들이면 됩니까?"

    최정훈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그런데 들으셨다시피……."

    "네."

    "웬만큼 먹여서는 입이 안 떨어질 건데요. 회사에 돈 많으십니까?"

    "……."

    "무지하게 버는 양반이니까, 무지하게 줘야 할 겁니다. 잘 생각해서 진행하세요."

    최정훈은 그 말을 끝으로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시동을 걸자 앞을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이 길을 내주었다.

    '이게 뭔 소란인지.'

    절로 짜증이 난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나저나 방금 그 총재님은 어디로 보내신 겁니까?"

    "네?"

    시트를 한껏 뒤로 젖히고 폰 게임을 하던 이지혁이 영혼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게이트에 실어 보내셨잖아요."

    "음, 어디더라? 목숨이 위험한 데는 아니에요. 적당히 며칠 고생시키다가 풀어주려구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오는 건 아니겠죠? 그분, 한국에서는 나름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 너구리가요?"

    "너구리는 쓸모가 많은 동물이죠."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하기야, 그런 양반들이 필요악이죠."

    예전부터 그렇긴 했다. 어느 왕국이든 정치적으로 악독하다고 일컬어지는 인간들이 모든 원인인 것 같지만, 막상 그 인간들이 실각하고 나면 행정적으로 엄청난 공백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악독하거나 비열한 것도 똑똑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최정훈은 순순히 이지혁의 말에 공감했다.

    "그런데 좀 늦은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RRRRR.

    적절한 타이밍에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최정훈은 두말없이 폰을 받았다.

    "네, 최정훈입니다. 아, 원장님."

    휴대폰 건너편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최정훈은 폰을 멀리 떼고는 운전을 하다 소리가 잦아들자 휴대폰을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금방 가겠습니다."

    뚝.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헐, 그래도 돼요?"

    "네, 뭐……."

    최정훈이 씨익 웃었다.

    "이걸 기억하고 화낼 만한 정신이 지금 그쪽에는 없을 테니까요."

    * * *

    "언제 도착하나요?"

    대통령 윤영민의 재촉에 KSF 총괄원장 배정국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오고 있답니다."

    "오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게 벌써 한 시간은 된 것 같네요. 애초에 NDF가 뭐 얼마나 멀다고 이리 오래 걸린다는 말입니까? 저번에는 게이튼가 뭔가로 바로 열고 들어오더니."

    오랄 때는 안 오고, 오지 말라고 할 때는 오니까 이지혁이지!

    알면서 뭘 묻고 그러십니까.

    "금방 도착할 겁니다."

    "흐음……."

    윤영민은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대통령님."

    비서실장 박두진이 넌지시 부르자 윤영민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오는가 보다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 것인가를 미리 논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박두진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국방부 장관님."

    "예."

    "일단 파견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겁니까?"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한 쪽의 정확한 요구는 뭡니까?"

    "그게… 일단 원하는 건 이지혁 씨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저희 쪽 능력자를 추가 파병하길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흐음……."

    윤영민은 침음을 삼켰다.

    '이래서야…….'

    북한 쪽에서 이지혁을 원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그리고 윤영민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일이지만, 이지혁 하나만을 원하는 것은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대한민국에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이지혁이라는 한 개인에게 손을 내미는 것과 비슷하게 비춰질 가능성이 있었다.

    혹자는 뭐가 다르냐고 생각하겠지만, 윤영민의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달랐다.

    NDF와 KSF는 국가가 주도해서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국력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돌연변이와 같은 존재.

    "이왕이면 함께 파견하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는데요?"

    KSF 원장 배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

    "다른 건 몰라도 이지혁을 혼자 보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를 생각해 보면 무조건 호위를 붙여야 합니다."

    "호위?"

    이지혁에게 호위가 필요한가?

    "북한을 보호해야죠."

    "아……."

    윤영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북한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급진파 보수인 윤영민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그래서 이지혁 씨는 어떻게 설득해야 합니까?"

    "……."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장관이 모두 모여 있건만, 아니, 외교부 장관을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건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책이 없습니까?"

    윤영민이 대답 없는 장관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왜 우리한테 묻냐고.'

    국토교통부 장관이 보이지 않게 혀를 찼다.

    이게 무슨 쌍팔년 대식 정치도 아니고, 북한에 능력자를 파견하는 문제에 장관을 왜 다 소환하는가. 국토교통부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가는 길에 꽃길이라도 깔라는 건가?

    그도 그렇지만,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여성가족부 장관도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 저 여자는 원래 표정이 안 좋구나.

    "일단 그건 이지혁 씨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국방부라든가 KSF 같은 곳 말이지요. 저희야 저번에 얼굴 한 번 본 게 다인데, 대책을 세우라시라 한들……."

    윤영민도 나름 일리가 있다는 듯 배정국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이 아니라, 대책을 짜보세요! 사람 불러놓고 이게 뭐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이지혁이라는 양반이 워낙에 예측불가라… 일단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북한으로 갈 의사가 없는 건 아닐겁 니다."

    "…초등학생도 그건 알겠네요."

    윤영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양반들을 데리고 일을 진행하니 국정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결국 믿을 건 하나밖에 없었다.

    "비서실장."

    "예."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으음……."

    박두진이 머리를 긁었다.

    "일단 지금까지 이지혁 씨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지혁 씨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단둘뿐입니다."

    "둘?"

    "가족과 돈이죠."

    "……."

    아주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가족에 대한 애착은 상당합니다. 저번 좀비 사태 때도 가족에 대한 방공호를 제공한다는 걸로 이지혁 씨의 마음을 돌렸을 정도니까요. 문제는 돈인데……."

    "막대한 액수를 요구할 것 같습니까?"

    "그런 것보다……."

    박두진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 양반은 돈을 밝히기는 하는데, 대체 돈을 왜 밝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뭔 소리죠?"

    "돈을 모으기는 하는데, 쓰지를 않습니다. 통장에 현금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쌓이고는 있는데, 인출이 되지 않습니다."

    "……."

    "생활 패턴 자체도 소비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동안 쓴 돈이라 봐야 인터넷 쇼핑에서 가족들 옷과 가방을 산 정도고, 본인한테 쓴 돈은 트레이닝복을 사는 것과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사는 게 전부입니다."

    "백순가?"

    "…소비 패턴 자체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심지어 차도 없습니다."

    "그, 그런 사람이 돈은 왜 달라고 하는 겁니까?"

    "그게 저도 잘……."

    박두진은 대답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좌절했다.

    그냥 있으니 모으는 것 같기는 한데, 냉정하게 따져서 이 양반은 지금 있는 돈을 다 쓰기도 어려웠다. 평생 동안 쓴다고 해도 말이다.

    "흐으음."

    윤영민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럼 구속력이 없다는 말 아닙니까?"

    그거야 원래 그랬잖아요.

    언제 우리가 이지혁을 구속했다고 구속력 운운하십니까.

    "일단은 부탁을 하는 걸로……."

    "부탁이라……."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가는 건 둘째 치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하다니.

    "꼴이 우습군요."

    "업적은 남습니다."

    "그렇지요."

    잠시 고개를 숙이는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굴욕이야 감수하면 그만이죠."

    윤영민이 비장하게 말을 내뱉자 배정국이 초를 쳤다.

    "그런데… 그렇게 부탁한다고 들어줄 사람도 아니라는 게 문제지요."

    "……."

    윤영민의 머릿속에 도는 문장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불러는 놨는데 해결이 안 된다.

    대체 어떻게 이지혁을 꼬셔서 북한으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지혁 씨가 도착했습니다."

    실내가 순식간에 긴장으로 물들어갔다.

    "으음……."

    윤영민조차도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배어 나오는 땀을 닦았다. 이지혁이 온다고 생각하자 저번에 겪은, 그 지옥 같던 상황이 떠올라 정신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손 주머니에 넣으십시오."

    "그러지."

    살짝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윤영민이 문을 바라보았다.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심통 가득한 얼굴을 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청년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옷이라도 좀.'

    청와대에서 삼선 추리닝을 보게 될 줄이야.

    트레이닝복 제조사가 본다면 사진을 못 찍어 안타까워할 일이지만,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기엔 청와대의 권위가 아작 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신발이라도 좀.'

    운동화라도 신지.

    삼디다스는 너무하지 않은가.

    윤영민은 눈을 감았다. 태클을 걸자고 마음을 먹으면 걸게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다. 이지혁에 대해서는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게 제일이다.

    "오랜만이네요."

    이지혁이 그리 말하더니, 윤영민의 건너편에 있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마치 제집처럼.

    "나는 콜라."

    "준비해 뒀습니다."

    이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들이 쟁반에 콜라를 얹어 가져왔다.

    "오, 역시."

    이지혁이 박두진을 보며 윙크를 했다.

    "크흐흠."

    윤영민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모시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게 뭐냐면……."

    "북한 가라는 거죠?"

    "……."

    윤영민이 순간 입을 다물자 이지혁은 콜라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마시더니, 거칠게 콜라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생각을 해봤는데요……."

    "네?"

    "아저씨."

    이지혁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이 기회에 통일 한 번 해보지 않을래요?"

    "……네?"

    윤영민이 떨리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낄낄낄낄."

    이지혁이 사악하게 웃어 젖혔다.

    청와대에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내려앉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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