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0화 (60/118)
  • [■] 리지혁이가 뭐하는 놈이네? [■]

    ─────

    "드레인."

    이지혁이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밀도가 높다 못해 마나가 아닌, 전혀 다른 성질의 그 무언가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끄으윽."

    이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정갈한 마나가 육체를 파고들며 이지혁의 몸 내부에 자리하고 있던 암흑 마나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우웁."

    이지혁이 입을 꽉 깨물었다.

    몸 안에서 폭탄이 터지는 느낌.

    마나가 몸속으로 끊임없이 유입되며 육체를 부수고, 가르고, 폭파시키고 있었다.

    연쇄적인 충돌과 함께 몸 안에서 충격파가 연신 터져 나왔다.

    "달링!"

    이지혁의 상황을 알아챈 에르카나가 이지혁에게 다가오다 멈춰 선다.

    지금 건드리는 행위가 이지혁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에르카나는 다가설 수 없었다.

    몸 안에서 극의 성질을 가진 마나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이지혁이 보유하고 있는 마나와 흡수되고 있는 마나는 한 사람의 육체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두 마나를 합친다면 상위 마왕이 가지는 마나량에 육박할 것이다. 그런 마나가 몸 안에서 충돌하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이지혁의 몸이 찢겨 나가지 않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강력한 마왕들의 육체라면 모를까, 이지혁의 육체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지구로 돌아오면서 에테르를 손에 넣었고, 덕분에 육체가 적당히 강화되었다고는 해도 그저 인간의 육체일 뿐.

    강화계로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박성찬이라고 하더라도 마왕의 앞에서는 종잇조각보다 딱히 나을 게 없는 수준일 뿐이다.

    "달링……."

    에르카나가 걱정 어린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겪을 고통과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막아야 할 일이지만, 그녀는 이지혁을 막을 수 없었다. 지구와 마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나약함은 천천히 다가올 확실한 죽음에 불과하다.

    전성기의 이지혁이 가졌던 힘의 반의반이라도 되찾아야 생존할 확률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이지혁을 말릴 수 없었다.

    "끄으으으."

    이지혁의 육체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도마뱀!"

    에르카나가 목소리를 높이자 아펠드리체가 그녀에게로 날아왔다.

    "힐 걸어."

    "하지만……."

    "어차피 지금 충돌하고 있는 것 안 보여?"

    "알겠습니다."

    평소라면 힐이 이지혁의 육체를 파괴하겠지만, 지금은 이미 백마력과 흑마력이 육체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육체가 이미 무너지고 있으니 백마력이 좀 더 들어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에르카나의 말을 이해한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에게 힐을 걸었다.

    "지혁 씨, 힘내세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파아아앗!

    이지혁의 관자놀이가 터져 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붉은 피가 에르카나에게 날아들어 그녀의 얼굴을 붉게 적셨지만, 에르카나는 단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두 눈을 뜬 채 이지혁을 지켜보았다.

    "큭."

    이지혁이 이를 악물었다.

    '이거 진짜 암살용인가?'

    만약 누군가 이지혁이 이 마나를 흡수할 것을 알고 덫을 놓은 거라면 정말 훌륭한 트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막상 흡수하기 시작하자 그가 예상했던 이상의 밀도를 가진 마나가 육체로 밀려 들어왔다.

    한 번 시작한 드레인을 끊어낼 수도 없을 만큼 고농도의 마나가 육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매우 비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합리적이고 확실하게 이지혁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지금 이지혁의 육체 상태는 심각했다.

    외부에서 충돌했다면 서울까지는 가볍게 날려 버릴 정도의 폭발을 일으킬 마나가 이지혁의 육체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끝도 없는 경험치로 단련한 마나 컨트롤이 아니었다면 벌써 몸이 터져 나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졌다.

    "…버틸 수 있을까요?"

    아펠드리체의 물음에 에르카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멍청한 년아!"

    "……."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과는 다르게 에르카나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펠드리체는 심각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마나를 한 몸 안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이지혁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지혁은 육체 안으로 들어오는 백마력을 흑마력으로 전환하여 쌓고 있었다. 문제는 그 결과를 내놓기 위해서는 일단 백마력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으드득.

    꽉 깨문 이지혁의 이가 부러져 나간다.

    살이 터져 나가고, 압력을 이기지 못한 뼈가 으스러졌다가 아펠드리체의 회복 마법에 다시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정신은?"

    아펠드리체가 다급하게 외쳤다.

    "정신이 먼저 붕괴될 거예요!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강도를 넘었잖아요! 이제는 불멸의 육체도 아니라구요!"

    "알고 있으니 닥쳐."

    "에르카나 님!"

    "닥치라고 했어."

    에르카나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살기까지 묻어났다.

    "도마뱀 주제에 감히 우리 남편 정신력을 의심하는거야?"

    "……."

    "인간의 몸으로 마왕까지 올라온 사람이야. 아무리 고정된 육체가 있었다지만 보통 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 네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입 다물고 지켜보기나 해."

    아펠드리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지혁이 얼마나 강건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는 그녀가 더 잘 알고 있다. 이지혁과 보낸 시간도 그녀가 더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무조건적인 확신을 보낼 때가 아니지 않은가.

    과거처럼 어떤 대미지를 입더라도 즉시 회복하는 이지혁이 아니었다. 지금 이지혁의 육체는 아펠드리체의 회복 마법으로 어떻게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상처가 났다가 회복될 때마다 정신에는 부하가 걸리고 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고통으로 1초 만에 쇼크사했을 정도의 충격이 끊임없이 퍼부어지고 있는데 그저 지켜보라니.

    "걱정할 것 없어."

    에르카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야. 그런 사람이었으면 내가 반했을 리가 없지."

    에르카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도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어라?

    이지혁은 자각했다.

    정신을 살짝 잃었던 건가? 왜 이리 멍하지?

    아니, 잠시만…….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이지혁이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와 동시에 격통이 그를 잠식했다.

    "끄윽."

    순간, 잠시 날아갔던 기억을 되찾은 이지혁이 입을 악물었다. 하지만 속에서 폭포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가 그의 입을 강제로 열고 밖으로 흘러내렸다.

    '이거, 죽겠는데?'

    삶과 죽음의 균형추가 있다면 지금쯤 죽음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을 것이다.

    "쪽팔리게."

    제대로 말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안구가 터지고 고막이 나갔는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지혁은 되레 흡수하는 마나량을 늘렸다.

    우드득.

    마나를 끌어당기는 손의 뼈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모조리 으스러진다. 절로 입이 쩍 벌어지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고통은 이미 수도 없이 겪었다.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고통이지만, 그의 역치가 다른 이들보다 높은 것은 사실. 육체로 흡수되는 마나량이 늘어나며 들리지도 않는 귀에 천둥소리가 터지는 것만 같았다.

    이지혁은 이를 악물고 내부로 들어온 마나를 흑마력으로 전환했다.

    차곡차곡 흑마력을 쌓고 또 쌓아 나가자 이제 흑마력이 스스로 일어나 육체로 들어오는 마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휴우."

    안정기.

    육체에 쌓인 흑마력이 백마력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지자 큰 고통 없이 마력을 제압하고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아야!"

    하지만 옆에서 들어오는 이질적인 마나가 고통을 유발하고 있었다.

    치유된 눈을 돌려보니 아펠드리체가 그에게 회복 마법을 펑펑 퍼붓고 있었다.

    "스탑!"

    이지혁이 손짓을 하자 아펠드리체가 손을 내린다.

    응?

    아펠드리체의 얼굴이 미묘하다.

    저 도마뱀도 걱정이라는 걸 얼굴에 띨 수 있었나?

    사람 다 됐는데?

    피식 웃은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잘하면 울겠는데?"

    "당신 죽을 뻔했다는 거 알아요?"

    "내가 이 정도로 죽을 리 없지."

    죽을 뻔은 했지만.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제 거의 농구공 크기로 작아진 마나의 덩어리를 보며 치를 떨었다.

    "어느 미친놈이 보낸 건지는 모르겠는데,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아주 멋진 계획이었다고 해주지."

    까딱했으면 정말 죽었다.

    외부에서 그를 파괴하던 마왕들의 공격과는 다르게 이건 정말 몸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까딱 잘못했으면 육체가 산산조각이 나서 회복 마법도 통하지 않는 육편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달링, 괜찮아?"

    "어."

    이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과장 좀 보태면 날아갈 것 같았다.

    속성이 달라서 애를 먹기는 했지만, 무지막지한 마나를 몸 안에 집어넣은 것이니까.

    '이만한 마나를 느껴본 게 얼마 만이더라?'

    지구로 돌아온 이후로는 처음이다.

    이지혁은 육체 이곳저곳을 점검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충이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이 정도 마나면 웬만한 마왕쯤은 도움 없이 혼자서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의 양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좋기는 한데……."

    이지혁은 사라져 가는 게이트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분명 나를 노리고 보낸 게이트다.'

    이쯤 되면 심증만으로 결론을 내려도 된다.

    여러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열렸다는 것뿐 아니라 그 안에서 나온 것이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거기서 나온 마나 덩어리를 활용할 수 있는 이가 이 세계에서는 이지혁과 아펠드리체뿐이라는 점.

    그 모든 것을 감안한다면 결과야 빤했다.

    "그런데 목적을 모르겠단 말이지."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정말 이지혁을 죽이기 위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효율이 너무 떨어지는 짓이다. 이만한 마나를 보내기 위해서 반대편에서 감당해야 할 에너지를 생각한다면, 수지타산이 안 맞는 정도가 아니었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이런 불확실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고민한다고 결론이 나지는 않을 일이었다. 우선은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며 기다리다 보면 호의든 악의든 결국에는 그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 해결하면 그만.

    어느새 이지혁에게 다가온 최정훈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갔었어요?"

    "혹시 터지기라도 하실까 봐."

    "아, 피 묻을까 봐 멀리 떨어져 있었나 보구나. 청결도 하시지."

    "헤헤, 그게 아니라요."

    "본인 피는 안 더럽다던데, 한 번 터뜨려 드려요?"

    "죄송합니다."

    최정훈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제 저쪽을 해결하셔야죠."

    "저쪽?"

    "북한 말입니다. 저만한 몬스터 떼가 날뛰면……."

    "아, 그렇죠. 그렇긴 한데……."

    이지혁이 씨익 웃자 최정훈은 불안함에 떨어야 했다.

    "배고픈데 일단 밥은 좀 먹고 나서."

    "달링, 나는 햄버거."

    "……."

    최정훈은 저 멀리 북쪽에서 보이는 먼지구름을 바라보았다.

    '미안.'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진짜야.

    * * *

    "대, 대장 동지!"

    조선인민군 육군 사령관 김룡성 대장은 끊임 없이 터지는 무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보고를 똑바로 하라우!"

    "혀, 현재 남쪽에서부터 괴물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내래 뭔 소린지 묻지 않았니? 남쪽에는 여단애들이 가 있는데, 어떻게 몬스터가 북상을 한단 말이가!"

    "괴물 놈들의 수가 엄청납니다."

    "리진철이! 리진철이 어찌 됐나?"

    "리진철 대좌에게서 현재 방어선을 버리고 퇴각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 종간나 새끼!"

    김룡성는 들고 있던 지휘봉을 바닥으로 내려치고는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 새끼 어디 있나. 내래 그 새끼 대가리에 빵꾸를 뚫어버리갔어."

    "대장 동지, 진정하시라요. 지금 그럴 때가 아니지 않갔습니까. 이 소식이 수령 동지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줄초상 납니다."

    수령 동지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김룡성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소식이 영도자 동지에게 들어가는 순간, 그는 무능을 의심 받게 될 것이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보라. 대체 얼마나 올라온다는 기야?"

    "수는 정확하게 셀 수 없지만, 눈에 다 들어찰 정도랍니다."

    "세디?"

    "총알이 안 박힙네다. 거, 능력자 애들도 속수무책이라 카지 않갔습네까?"

    김룡성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아차 하는 순간에 평양까지 괴물들이 들어찰 것이다.

    그럼 모든 게 끝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촘촘히 배치되어 있는 계급도가 붕괴하는 순간, 조선은 더 이상 나라로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구, 국방부장 동지를 만나야갔어. 아니야. 정치국장 동지부터 만나야갔어. 당장 연결하라."

    "알갔습니다."

    김룡성은 초조하게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총정치국장 동지."

    - 뭔 일이네?

    "지금 남에서부터 괴물 놈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습네다."

    - 뭐이? 그게 뭔 소리야? 똑바로 설명을 해보라카지 않네.

    "거, 휴전선 있는 데 문이 열리지 않았습네까."

    - 그랬지.

    "거기서 괴물 놈들이 새까맣게 몰려나와서 지금 무력 여단 애들이 손도 못 쓰고 후퇴 중이랍니다. 그 괴물 놈들이 지금 다 북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네다."

    - 어디까지 왔네? 지금 그 괴물 놈들이 어디까지 왔나?

    "펴, 평산입네다."

    - 평산? 야, 이 간나 새끼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네? 그럼 지금 그 괴물 놈들이 평양으로 몰려오고 있다, 이 말이네?

    "그렇습네다, 총정치국장 동지."

    - 이 개간나! 니 지금 어디네!

    "고정하시라요."

    -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네? 짤까닥거리지 말라!

    김룡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정치국장이 왜 화가 났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화를 참기 어려웠으니까.

    - 일단 수령 동지께 보고 올릴 테니, 너는 어떻게든 평양 앞을 틀어막으라. 평양에 괴물 놈 하나라도 들어오는 순간에 네 모가지 날아가는 줄 알라!

    "명심하겠습네다."

    - 끊으라.

    전화를 끊은 김룡성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동원할 수 있는 애들 모조리 동원해서 길 틀어막으라. 당장!"

    "예."

    후다닥 뛰어나가는 부관을 보며 김룡성은 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아무리 병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까?

    총알도 안 박히는 괴물 놈들을 무슨 수로 막으라는 말인가.

    그의 한숨이 깊어졌다.

    * * *

    "뭐라 했네?"

    북한의 권력층 중에서도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자가 앉는 자리가 국방부장과 총정치국장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북한의 권력의 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 권세는 옛말로 비유하자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고, 웬만한 사람들은 즉결로 처형을 한다 해도 죄를 묻지 않는 자리였다.

    그런 북한의 총정치국장인 최명해가 지금 흐르는 땀도 닦아내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눈으로 들어와 따끔거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처신을 조금만 잘못하는 순간, 그가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날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은 실수나 실패라면 그의 입지가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이번 사안은 달랐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이자의 심기를 크게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이 최악이었다.

    자신의 안전에는 누구보다 민감한 자니까.

    "지, 지금 남조선과의 분계선에서 발생한 게이트에서 몰려나온 괴물들이 평양으로 몰려들고 있습네다."

    "전에 뭐라 했네? 거기로 인민 무력 여단을 보냈다 하지 않았네?"

    "그, 그렇습니다만, 그 반동 놈들이 공화국의 깃발 아래서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 것을 거부하고 퇴각 중이라 합니다!"

    "퇴각?"

    "용서하시라요!"

    조선 인민공화국의 국무위원장이자 조선로동당의 위원장, 그리고 조선 인민군의 최고사령관인 그가 자리에서 그 비대한 몸을 일으켰다.

    "용서하라 했네?"

    "수, 수령 동지."

    "이번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칠 때는 언제고, 일이 뒤틀리니 용서하라?"

    "불가항력이었습네다."

    "당에 대한 충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수, 수령 동지!"

    최명해는 그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 한목숨 내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네다. 무능하니 뒈지라고 하신다면 기꺼이 고래 하갔습네다. 하지만 내래 당에 대한 충심을 의심 받는 것은 억울합네다."

    "흐음."

    "수령 동지께서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막으라 하면 막을 것입네다. 제 충심은 변함이 없습네다."

    "일어나라우."

    "수령 동지."

    "내래 날래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네."

    "가, 감사합네다."

    "감사할 거 없네. 정치국장 동지."

    "예, 수령 동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 평양이 뒤집히면 공화국도 뒤집히는 거 알지 않네."

    "명심하겠습네다."

    그가 가만히 정치국장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 했네."

    "…알갔습네다."

    "나가보라."

    "평안하시라요."

    방을 빠져나온 최명해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붙어 있어.'

    최명해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저 방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목이 아직 붙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청년기 때는 나름 생각 있는 인물이었던 그는 권력을 잡은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고모부를 바주카로 날려 버리는 인간에게 무슨 인정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린놈이 힘을 얻었으니 보이는 게 없겠지.'

    그리고 그 어린놈에게 그와 인민들의 목숨이 저당 잡혀 있다는 사실이 서글플 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 했네?"

    꼴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그 무슨 수가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모양 빠지는구만."

    최명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무전기를 들어 지시를 내렸다.

    "최고회의 소집하라."

    회의실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에는 어쩐지 힘이 없었다.

    * * *

    "이게 무슨 일입네까!"

    "진정하라."

    "지금 평양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습네까! 그런데……."

    "내가 진정하라지 않든?"

    "…죄송합네다."

    다른 이들도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불만스러운 얼굴들이 가득했다.

    '돼지 새끼들.'

    뱃대지에 기름이나 차서 뒹굴대던 놈들이 자기 발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펄떡펄떡 뛰는 꼴을 보자니 배알이 뒤틀렸다.

    "총정치국장 동지."

    "말씀하시라요, 상임위원장 동지."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건가?"

    김룡성은 헛기침을 했다.

    "현재 괴물 놈들이 평양으로 몰려들고 있습네다."

    "그거이 누가 몰라서 물었갔네? 대비는 되고 있느냔 말이디, 대비는!"

    "사실……."

    최명해가 손부채질을 했다. 아까부터 자꾸 얼굴이 달아오른다.

    "막기가 힘듭네다."

    "뭐야?"

    상임위원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이 종간나 새끼야. 그게 니가 할 말이야?"

    "진정하시라요. 제 일이 아니지 않습네까. 그건 국방부장이 할 일입네다. 제가 보고를 받고 수령 동지를 영접하고 온 길이라 제가 소집했을 뿐 아닙네까."

    "국방부장 이 새끼 어디 갔네?"

    "국방부장 동지는 지금 현장에 나가 있습네다."

    "총참모장, 지금 상황이 어찌 되갔어? 당의 은총이란 은총은 다 받아먹고 막상 위기 상황이 생기니까 못하겠다고 드러누울 생각은 아니갔디?"

    "동무, 솔직히 힘듭네다."

    "이 간나 새끼들!"

    국무위원회 상임위원장 정병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게 네들이 할 말이네! 다들 당에 대한 충심이 바닥을 쳤구만. 내 오늘 이 개간나 새끼들 모조리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 넣어버리갔어!"

    "진정하시라요."

    "지금 화를 낸다고 해결이 되는 상황이 아니잖습네까, 동무!"

    "뭐이 어드래?"

    정병서는 한참을 씩씩댔지만 총을 쏘지는 못했다. 이 시국에 이들 중 하나라도 공백이 벌어진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상임위원장 동무."

    "말하라."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말씀하신 게 있습네다."

    "사령관 동지께서?"

    "예, 그렇습네다."

    "뭐라 하시대?"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평양으로 괴물 놈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라 하셨습네다."

    "그거이 뭐 어쨌다는 것이네? 당연한 말씀 아니네?"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를 강조하셨습네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렇습네다."

    정병서가 침음을 삼켰다.

    최고사령관이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는 것은 따로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를 옆에서 보필한 게 몇 년인데 그 정도도 못 알아듣겠는가.

    "그럼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지금처럼 해서는 평양을 지켜낼 수가 없다고 판단하셨다, 이 말이디?"

    "영민하신 최고사령관 동지의 깊은 뜻을 저 같은 범부가 어찌 알갔습네까. 그나마 상임위원장 동무라면 그 뜻을 짐작이나 하지 않갔나 싶어 말씀드리는 겁네다."

    "간나 새끼, 혓바닥에 기름칠 했나? 잔망대지 말라."

    정병서는 권총을 집어넣고는 자리에 앉았다.

    "…상황이 더럽다, 이 말이디."

    평양이 무너지면 공화국이 무너진다. 공화국의 8할이 평양이었다.

    아무리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한다고 해도 평양이 기반 시설이 무너지는 순간, 공화국은 더 이상 공화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무슨 수라도 써야디. 네놈 새끼들 말해보라.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 거 같네?"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최고사령관의 뜻을 함부로 짐작하여 행동했다가 나중에 말이 바뀌기라도 하면 가문 전체가 아작 난다는 것을 알기에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주둥아리에 아교라도 칠했니? 입 안 여는 새끼들은 내가 입에다가 직접 구멍을 뚫어주갔어. 말하라."

    최병서가 눈을 부라리자 슬그머니 총참모장이 입을 열었다.

    "동무."

    "말하라 하지 않았네."

    "솔직히 말해 이건 공화국의 힘으로만 해결할 수 없습네다."

    "뭐, 이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하네?"

    "현실을 보시라요. 미제 놈들이나 중국도 자기들 힘으로만 해결 못해서 다른 나라에 추잡스럽게 손을 벌리고 있습네다. 아무리 공화국이 위대한 곳이라고는 하나 혼자서만 다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갔습네까?"

    "그래서 그 미제 놈들이랑 똑같이 굴자는 거네?"

    "중국도 그러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네까. 로씨야도 마찬가집네다."

    "…계속해 보라."

    "그러니 저희도 힘을 빌려야 하지 않갔습네까?"

    "어디에?"

    방 안이 침묵으로 차올랐다.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결코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그곳.

    모두가 모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 *

    "그게 무슨 말이네?"

    정병서가 의뭉스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총참모장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채지 못할 사람이 지금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을 하는 것은 북한이라는 살얼음 정치판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노회한 너구리답게 문제가 될 만한 소지를 원천에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묻디 않네."

    정병서가 짜증 어린 어투로 발언을 재촉했다.

    총참모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는 정말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당장 보위부로 끌려가서 반동분자라 낙인찍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조심해야 한다.'

    "사실 제가 뭘 알겠습네까. 위대하신 수령 동지의 말씀을 따를 뿐 아니겠습네까."

    "수령 동지께서?"

    "지난번 당 대회에서 수령 동지께서 미제 패권주의자 놈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라 하지 않으셨습네까."

    "그리하셨디."

    "그러니 그놈들의 대응 방식을 배우자 이겁네다. 중국 놈들도 남조선에 연락을 해서 지원을 받지 않았습네까."

    "남조선이라 했네?"

    총참모장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공화국의 안녕을 위해서 고놈들을 적당히 이용해 먹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습네까?"

    "이용해 먹어?"

    정병서가 솔깃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네다. 고놈들이 민족이니 뭐니 하면 애가 닳아서 설치지 않습네까. 그러니까 민족으로서 함께 싸우자고 말을 하는 겁네다."

    "흐으음."

    정병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족으로서 함께 싸우자 하면 이쪽의 자존심을 다칠 필요가 없는, 좋은 단어 선택이었다.

    "그런다고 그 얌체 같은 놈들이 와서 싸우려고 하갔어? 그리고 같이 싸우려면 차라리 중국이나 로씨야에 이야기를 할 것이지, 남조선에 이야기 할 필요가 뭐 있네."

    총참모장의 얼굴이 푸들거렸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상임위원장 동무, 중국이나 로씨야도 일이 생기면 남조선에 연락을 합네다."

    "그게 뭔 소리디?"

    총참모장은 가만히 정병서를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김씨 일가 3대에 개처럼 충성한다고 해서 김일성의 개라고 불린 정병서다. 과거 노동당 고위직들이 무식하다는 것이야 암암리에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국제관계에 이렇게까지 아는 것이 없어서야 어떻게 상임위원장이라는 지위를 유지한단 말인가.

    "거, 남조선에 리지혁이가 있지 않습니까."

    "리지혁?"

    "그렇습네다."

    "리지혁이가 뭐하는 놈이네?"

    총참모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상임위원장 앞에서 한숨을 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순간만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조선에서 제일가는 능력잡네다. 아주 신출귀몰하다고 소문이 나 있습네다."

    "그럼 지금 고놈 하나 때문에 남조선에 손을 벌리자고 하는 거네? 미쳤어?"

    "상임위원장 동무, 화를 낼 일이 아니라 우선 중국에 연락을 해보시라요. 저번에 중국에서 거인이 출몰해서 난리가 났을 때도 리지혁이가 가서 해결을 봤다지 않습네까."

    "고거이 참말이네?"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할 상황이 아니잖습네까. 전화 한 통이면 빤히 드러날 거짓부렁을 미쳤다고 씨부리고 있겠습네까."

    "그렇긴 한디……."

    정병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중국이 남조선에 도움을 청했다고?

    그가 아는 세상의 개념대로라면 중국은 대국이고, 남조선은 나름 잘살기는 해도 미제 앞잡이 놈들에게 알랑방귀나 뀌고 사는 속국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데 중국이 남조선에 도움을 청했다는 말인가?

    그 리지혁이라는 놈 때문에?

    "그 리지혁이가 뭐하는 놈이래?"

    "말씀드렸잖습네까. 남조선 제일의 능력잡네다. 아니, 천하제일의 능력자입네다."

    "천하제일의 능력자가 남조선에 있단 말이디?"

    "그렇습네다."

    정병서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뭔가 좀 뿌듯한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나쁘고 배가 아픈, 복합적인 심정을 느끼며 정병서는 입을 열었다.

    "고거이 확실한 거이디?"

    "속고만 살았습네까. 제 말이 틀렸으면 교화소에 집어 처넣으시라요."

    "으음……."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 걸로 봐서는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런 말이 들리지 않았디?"

    "고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합네까."

    "음, 뭐, 알갔네. 그런데 그 리지혁이가 오믄 지금 사태는 다 해결이 되는 게 확실하나?"

    "못하는 게 없답네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난리가 났을 때도 일단 미국 놈들이 리지혁이, 리지혁이 하면서 온 종일 남조선에 난리를 쳤다고 안 합네까."

    "허허, 고거 들을수록 이상하다야."

    정병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네 생각에는 우리가 지금 남조선이랑 같이 괴물 놈들을 때려잡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이 말이디?"

    "고렇습네다."

    "다른 동무들 생각은 어떻네?"

    슬그머니 정병서의 눈치를 살피던 이들이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에도 그 남조선 동무가 아주 날라 다닌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유명합네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지금 아마 온 세상에서 제일 유명할 겁네다."

    정병서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뭐야, 다들 알고 있었네?"

    "해외만 나가도 워낙 많이 들려오는 이름이라 모를 수가 없었습네다."

    "흐음, 알갔어."

    정병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총참모장의 말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같은 의견이라면, 그 리지혁이라는 놈의 실력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어 있다고 봐야 했다.

    "근데 말이디……."

    정병서가 조금은 떨떠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조선 능력자한테 손을 벌린다는 게 우리 힘으로 이걸 해결할 수 없다고 자인하는 꼴 아니갔어? 다른 나라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느냔 말이디."

    "꼭 그리 생각하실 일은 아닙네다. 그렇게 따지자면 중국도 손을 벌리지 않았습네까. 창피한 일은 아닙네다."

    "우리가 남조선에 손을 벌리는 일이 어찌 창피하지 않나!"

    총참모장은 고개를 숙이고는 혀를 찼다.

    저 노망든 영감이 또 저 난리를 치고 있었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혹시나 문제가 생겼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몰아넣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저런 식의 처세를 오십 년 이상 해왔기에 저 나이에도 이 살벌한 판에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 수령 동지께 여쭤보는 게 어떻겠습네까?"

    "수령 동지께 그런 걸 일일이 물어보란 말이디? 너 정신 놨네?"

    "그러면……."

    "안 그래도 조국을 이끌어 나가시느라 몸 돌보실 틈도 없이 일하시는 수령 동지께 그런 부담을 드려서야 되갔어?"

    "제가 멍청했습네다. 용서하시라요."

    총참모장은 이를 갈았다.

    '비열한 늙은이 같으니.'

    그저 앞에서 그 말을 꺼냈을 때, 수령 동지가 보일 언짢음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의 수령 동지의 오른팔이란 평을 받고 있으니까.

    '오른팔이 아니라 개지만.'

    "현실적으로 그 방법이 아니면 평양 방어가 쉽지 않습네다."

    "우리의 조선인민군이 그깟 괴물 놈들 하나 감당하지 못한다는 거네? 그거이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네?"

    "감당할 수도 있습네다."

    "그런데?"

    총참모장은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방어선이 뚫려서 평양으로 괴물 놈들이 쳐들어와 금수산 태양 궁전이 더럽혀지기라도 하면……."

    "이 간나 새끼,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 거네? 주둥아리 함부로 나불대지 말라!"

    "혹여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저희는 모두 모가지가 잘리는 겁네다. 아시지 않습네까."

    "이 새끼가."

    정병서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총참모장은 씩씩대는 연기 속에서 정병서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상임위원장 동무."

    "……."

    "냉정히 말해서 못 막습네다. 남조선 놈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평양 이전에 우리 모두 숙청되는 겁네다. 지금은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네까?"

    "으으음……."

    정병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금수산 태양 궁전이 더럽혀진다면 그 죄는 죽어도 씻을 수가 없다. 공화국의 체제에서 금수산을 방어하지 못한다는 것은 목이 백번 잘려도 용서 받지 못할 죄였다.

    "…연락해 보라."

    "남조선에 말입네까?"

    "이……."

    정병서가 이를 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남조선에 연락해 보라."

    "용단이십네다."

    총참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저 종간나 새끼가.'

    이로써 남조선에 연락을 한 책임자가 정병서가 되었다. 정병서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는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이번 일만 해결되면 네놈은 숙청이야.'

    정병서의 다짐을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예?"

    "그 리지혁이라는 동무는 지금 어디 있네?"

    "어……."

    총참모장이 갸웃하며 대답했다.

    "거, 남조선 동무니, 지금 남조선에 있지 않갔습네까?"

    "그렇디?"

    총참모장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이걸로 이지혁을 끌어들이는 것을 정병서에게 미뤘다.

    훗날에라도 이 괴물들이 북한으로 쳐들어온 것이 이지혁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정병서는 엄청난 역풍을 맞아야 할 것이다.

    일을 해결할 때는 입 다물고 있다가 끝나고 나면 잘잘못을 따진답시고 승냥이처럼 몰려들어 물어뜯는 것이 북한의 생리니까.

    '늙은이, 너무 오래 해 처먹었어.'

    총참모장이 비릿하게 웃었다.

    * * *

    "버거다!"

    에르카나는 눈앞에 쌓인 버거들을 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 최정훈은 또다시 넋을 놓고 말았다.

    '아차!'

    이런 실수를!

    최정훈이 순간적으로 팔을 뒤로 돌려 등짝을 막았다.

    이제 금방 스매시가…….

    "응?"

    왜 타격이 없지?

    따악!

    "끅."

    순간, 최정훈의 정강이에 지옥의 극통이 찾아들었다.

    "끄으으윽."

    숨이 쉬어지지 않는 극통 앞에 최정훈이 테이블을 부여잡고 몸을 숙였다.

    "어머, 피곤하신가 봐요?"

    "끄으으윽."

    최정훈이 눈물을 쏟아냈다.

    하이힐 신은 발로 그의 정강이를 정통으로 가격한 것이다.

    "저 아저씨는 왜 저러신데?"

    "글쎄?"

    영문을 모르는 이지혁과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사람이 테이블을 부여잡고 우는 게 헤어진 첫사랑 생각이라도 나는 듯싶다.

    "달링, 이거 맛있어."

    "그래."

    "먹어봐! 먹어봐! 달링."

    "…많이 먹어라."

    "자, 아아∼"

    마구잡이로 입안에 들어오는 버거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 밀려 들어왔다.

    이지혁은 묘한 기분이었다.

    챙겨주는 건 챙겨주는 건데…….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남에게 먼저 먹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애정인지 이지혁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런 식이고, 하필이면 그 사람이 에르카나라는 사실이 그저 서글플 뿐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엄마도 잘 챙겨주지 않는데 천 년을 넘게 봐왔음에도 아직 그를 못 챙겨서 안달이라는 것이 에르카나의 장점이자 무서운 점이었다.

    "그런데 저희,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겨우 고개를 든 최정훈이 불안한 듯 물었다.

    "뭐……."

    이지혁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바쁘면 전화하겠지."

    로밍이 폼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최정훈은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 사고를 쳐놓고!'

    잘도 미국까지 버거를 먹으러 오는구나! 잘도!

    그런데 이거 맛있어!

    최정훈이 입안에 들어간 트리플 치즈 버거의 맛에 감격하려는 순간, 그의 전화기가 거칠게 울리기 시작했다.

    * * *

    최정훈이 뚱한 얼굴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버거 하나 먹을 시간을 안 주는구나."

    공무원이 다 그렇지 뭐.

    아니, 보통 공무원은 안 그런가?

    공무원으로 살면서 정시에 퇴근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이상한 선입견이 생겼다니까.

    최정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으음……."

    이지혁이 깽판을 치기 시작한 이후로 유명무실해진 자리라고는 하지만, 명목상은 아직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국장의 번호가 떠 있었다.

    '걸렸나.'

    사고를 워낙에 크게 쳐놓은 관계로 걸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빠르게 걸린 것 같았다.

    이제 잔소리 폭탄이 떨어지겠지.

    본인이 저지르지 않은 일을 수습하는 것이야 항상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억울한 생각이 든 최정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전화기를 받았다.

    "예, 최정훈입니다."

    뭔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음성을 듣던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그렇습니다. 예, 예."

    기묘한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던 최정훈이 고개를 들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예, 지금 같이 있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최정훈의 반응을 보고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가서 뵙겠습니다."

    최정훈이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에요?"

    서아영이 묻자 최정훈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얼굴로 이지혁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일단 이지혁 씨가 쫓아 보낸 몬스터들이 지금 평양으로 진격하고 있답니다."

    "평양?"

    서아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평양이 몬스터에게 짓밟힌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이 붕괴하는 것과 그리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요?"

    "일단 북한에서 방어선을 펴고 있기는 한데, 막아내기는 역부족이랍니다. 하나하나 열려도 막아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많은 게이트가 한 번에 열렸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겠죠."

    서아영도 그 끝도 없이 밀려 나오던 몬스터들의 향연을 두 눈으로 본 사람이다.

    이지혁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막아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NDF들을 뒤로 물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대로 만약 북한이 막아내지 못한다면 큰 문제고, 막아낸다 해도 큰 문제였다.

    "외교 문제가 되겠죠?"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엮이기 싫은 나라와 엮이게 되는 것이다. 그걸 생각한다면 이지혁이 만들어낸 일이 얼마나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박성찬이 거들었다.

    "그런데 그거, 꼭 그리 생각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네?"

    "어차피 평양이 밀리고 나면 북한 놈들도 박살이 나는 건데, 외교 문제가 될 건 뭐가 있습니까? 윗대가리라고 할 것도 없을 텐데. 그럼 북한 땅이나 힘 안 들이고 꿀꺽하면 그만이죠."

    "북한 돼지 놈들이 몬스터 좀 밀려온다고 죽겠어요? 제 살겠다고 제일 먼저 도망갈 놈들인데?"

    "그래도 평양의 체계가 무너지고 나면 걔들도 타격이 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에 책임을 물어올 정신도 없을 텐데?"

    듣고 보니 그 말도 맞았다.

    '박성찬 씨가 원래 이리 똑똑했나?'

    육체파라는 선입견이 있던 모양이다. 대화를 깊게 나눌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상대의 지적 수준까지는 짐작할 수 없는 게 당연하긴 했지만 말이다.

    "에… 그게 아니라……."

    하지만 그때, 최정훈이 조금 민망하다는 투로 입을 열자 대화를 하던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북한 쪽에서 의외의 반응을 보여왔습니다."

    "의외의 반응?"

    "그게, 음……."

    최정훈이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북한 쪽에서 이지혁 씨의 파견을 요청한 모양입니다."

    사람들의 고개가 천천히 이지혁에게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말든 관심이 없다는 듯 버거를 흡입하고 있던 이지혁이 입안에 든 버거를 채 다 삼키지도 못한 얼굴로 멍하게 입을 열었다.

    "눼?"

    * * *

    "재미있게 되었어."

    대한민국의 대통령 윤영민은 간만에 들려온 호소식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북한에서 먼저 손을 뻗어오다니.

    외교적으로 보자면 몇 십 년 만의 쾌거였다. 그동안 북한이 남한의 화해 무드에 동조한 적은 있지만, 이런 식으로 먼저 고개를 숙이고 요청을 해온 것이 얼마 만이던가.

    치적으로 따지자면, 거대한 치적이라 할 수 있었다.

    국가의 위상도 더없이 높아진데다가 북한과의 관계마저 개선할 수 있다면, 훗날에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북한이 먼저 고개를 숙이다니 말이야."

    거지 주제에 자존심은 더럽게 높아서 만날 행패에 쓸데없이 시비를 걸고 온갖 일을 다 물고 늘어져서 사람 피곤하게 만들기가 일쑤였던 북한이 저리 저자세로 나오다니.

    이것보다 통쾌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지혁 씨만 엮이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비서실장 박두진이 잘 나가던 윤영민의 기분에 초를 쳤다.

    "끄으응."

    이지혁과 엮인 트라우마로 인해 한동안 업무도 제대로 보지 못하던 윤영민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렇지……."

    윤영민의 목소리에 힘이 사라졌다.

    이지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쭉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이지혁이 문제지, 이지혁이."

    윤영민의 목소리에 서글픔이 묻어났다.

    하늘은 왜 그런 인간에게 그런 능력을 내리셨다는 말인가.

    아무리 기회와 위기는 함께 온다지만, 그 기회와 위기를 한 몸에 내리시는 것은 인간을 농락하는 처사가 아니던가.

    눈앞에 있는 박두진 같은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생겼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가가 되어 있을 텐데, 왜 하필 그 개차반 같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생겨서 윤영민을 개차반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 이지혁 씨는 어떻게 됐어요?"

    "최정훈을 통해 연락 중입니다."

    "연락은 받나요?"

    "미국이라는 소식이 전해져 온 것으로 보아 연락은 되는 모양입니다."

    "미국?"

    "햄버거 먹으러 갔다네요."

    윤영민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 비상사태에 햄버거라니.

    걔들은 원래 버거 하나 먹으려고 미국도 가고 그러나?

    부럽… 아, 이게 아니지.

    윤영민은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파견에 동의한다고 하나요?"

    "그게 말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일단은 이쪽으로 온다고 합니다."

    윤영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쪽으로라니?

    그러니까…….

    "청와대로 온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히이이이익!"

    윤영민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아니, 왜! 왜 여기로 온다는 겁니까! 왜!"

    "진정하십시오, 대통령님."

    "그 양반이 여기 온다는데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습니까! 미국 대통령한테 물어봐요! 이지혁이 온다는데 진정하겠느냐고!"

    '거, 심정이야 이해한다마는.'

    그래도 체통이 있는데, 너무 호들갑이 아닌가 싶다.

    이지혁이 온다고 이리 호들갑을 떠는 윤영민이 잘못된 것인지, 일국의 대통령을 이리 만들어 버리는 이지혁이 대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그래서 어쩌기로 했습니까?"

    "온다는 사람을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그리고 사안의 중요도를 생각하면 국방부 장관부터 국정원장급은 되어야 어떻게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끄응."

    말은 맞는 말이었다.

    북한에 대한민국 최고 전력을 투입하는 일인데, 소홀히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는 것이 맞았다.

    그게 맞긴 하다만…….

    "위가 아픈데……."

    "이번에는 안 됩니다."

    "진짜 아픈데."

    "진통제와 약을 준비하겠습니다."

    "…입원하면 안 될까?"

    "안 됩니다."

    단호한 박두진의 목소리에 윤영민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내가 대통령인데! 내가 쉬겠다는데!"

    "정 그러시면 병실로 이지혁 씨를 보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잠시 이성을 놓았네요.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회의입니다."

    윤영민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관계 부처 장관들과 실무자들 모두 준비시키세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만."

    "뭔가요?"

    "장관님들에겐 먼저 전화를 했는데, 이지혁이라는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외교부 장관님이 전화를 끊고 잠수 탔습니다."

    "…또?"

    "예."

    윤영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해임시키세요. 새로 뽑죠."

    "업무 태만입니까?"

    "아뇨. 배알 뒤틀려서요."

    "……."

    "치사하게 지만 살겠다고 도망가다니."

    박두진은 이지혁이 관련된 이상 정상적인 대화는 힘들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조치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리고 대통령님."

    "말씀하세요."

    "이번 일을 언론에 알리는 건 어떻게 합니까? 지금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슬금슬금 몰리고 있습니다."

    "차단하세요."

    "한계가 있습니다."

    "…TV 메인 뉴스에 이지혁 씨의 얼굴을 내보낼 생각입니까?"

    박두진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큰일이네요."

    이지혁이라는 존재를 국민에게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암암리에 대한민국에 세계 최고위급 능력자가 존재한다는 소문은 퍼져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가 정확하지 않을 뿐.

    이지혁이라는 이름은 대충 퍼져 있지만, 이지혁의 얼굴이라든가 신상명세는 아직까지는 극비였다.

    다행히 이지혁이 능력자 거주구에서 벗어나는 일이 매우 드물기에 아직은 어느 정도 비밀이 지켜지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이 공개적으로 북한의 요청을 받아서 방북을 한다고 했을 시에는 그의 존재를 숨길수가 없게 된다.

    "언론에서 반발이 클 텐데요."

    "국민이 반발하는 것보다야……."

    "그렇긴 합니다만."

    아마 이지혁의 존재가 밝혀지면 잠시 동안이야 국민들도 환호하겠지.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 것인가.

    각국의 권력자들도 통제를 못해서 웬만하면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개망나니가 한국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 된다면?

    그 능력자가 대한민국에서 투표로 뽑은 대통령의 말조차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사회 분위기가 순식간에 개판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능력자와 일반인이 저마다 차별 받는다고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데, 거기에 국가권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 능력자의 출현은 불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는 일이었었다.

    "끄응, 내가 홍길동도 아니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다니."

    "정치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윤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이라는 폭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가 그의 정치적인 역량을 증명해 줄 것이다. 잘 안 될 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빤하지만.

    "그래서 이지혁 씨는 지금 어디 있는가?"

    "텔레포트로 올 테니 바로 이곳으로 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NDF에 들렀다 올 테죠. 어느 쪽이든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도착이라도 사고 안 치고 했으면 좋겠군."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박두진은 생각 없이 내 뱉은 말이지만, 그 말이 씨가 될 줄은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NDF 건물.

    "아니, 왜 여기로 옵니까?"

    "그럼 어디로 가요?"

    "바로 가자니까요."

    "내가 급하나?"

    확실히 그 말에는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급한 건 이지혁이 아니니까.

    "어차피 가는 거, 그냥 바로 가시면 덜 귀찮고 좋지 않습니까."

    "오식이 밥 줘야 해요."

    "아……."

    그러고 보니 마당에 묶여 있는 오식이 사료가 떨어진 지가 한참 되었다. 예전이었다면 최정훈이 챙겼을 테지만, 요즘 바쁘다 보니 한동안 신경을 못 썼다.

    오식이쯤 되는 놈이 사료 안 준다고 밥 못 챙겨먹겠냐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알아서 화장실 가는 오거한테 밥 안 챙겨준다고 밥 못 먹을 일이야 있겠는가.

    '동네 개들을 잡아먹을지도 몰라서 그렇지.'

    이지혁이 구타와 윽박지름으로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놔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식인 괴물을 풀어서 키운다는 것도 제정신은 아닌 일이었다.

    오식이가 워낙에 지능이 뛰어나서 사고를 안 치니 그나마 가능한 일인 것이다.

    '아니면 저 인간이 그만큼 무지막지하다는 거겠지.'

    따져 보면 사자를 길에다 풀어놓고 키우면서 폭력과 갈굼으로 사람에게 손도 못 대게 만든 거나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를 따져 본다면…….

    그런 최정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지혁은 성큼성큼 걸어 건물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우리는 가서 할 말도 없으니, 이지혁 씨랑 최정훈 씨 둘이 다녀오세요."

    그 말에 최정훈이 황당하다는 듯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고, 부장님이 안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괜찮아요."

    "뭐가 괜찮냐고!"

    "어차피 저 바지 부장인 거 다 아는데요, 뭐. 그쪽에서도 아니까 신경 안 쓸 거예요."

    "……."

    그렇기야 하지만.

    본인 입으로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니 저 양반 잘 다독여서 협상 잘하고 오세요."

    과연 청와대에 가는 일을 협상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남았지만,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도 서아영들은 없는 게 나았다. 하나라도 더 많아지는 순간,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서아영이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최정훈이 밖으로 나가자 서아영이 썩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됐죠?"

    "하, 감사합니다."

    박성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아영에게 감사를 표했다. 심지어 정해민마저 동조하고 있었다.

    "그 꼴을 봤다가는 피 토하고 응급실로 실려 갈 거야."

    "위장병 때문에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저번 이지혁이 벌인 일을 전해 들은 이들이 신경성 위염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NDF 내의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거길 왜 가야 한단 말인가.

    이지혁이야 무슨 짓을 벌여도 문제가 없겠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이지혁의 비호가 사라진다면 권력자들 앞에서는 좋은 샌드백이나 다름없는 것이 그들의 처지였다.

    "흐으응."

    에르카나가 콧소리를 내더니, 나긋나긋하게 걸어 이지혁의 자리로 향했다.

    "안 가셨어요?"

    정해민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와는 다르게 에르카나는 세속의 권력에 속박되지 않은 존재다. 거기에 이지혁과는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당연히 따라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같이 가고야 싶지."

    "그런데요?"

    "하지만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어 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내조가 우선이란다. 잘 보렴."

    에르카나의 손이 이지혁의 컴퓨터로 향했다.

    "남편이 뭘 하고 사는지 정도는 당연하게 다 알아야 하는 것이지."

    에르카나가 컴퓨터를 켜자 정해민이 썩은 얼굴로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컴퓨터도 할 줄 알았나?

    무슨 마왕 주제에 여기 사는 사람보다 현대 문물에 더 익숙한 것 같다.

    "뭘 보시려구요?"

    "숨겨진 폴더? 웹페이지 접속 목록? 그동안 달았던 댓글?"

    "…개인 정보 침해 아닌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해민도 슬금슬금 에르카나의 등 뒤로 다가가고 있었다.

    "개인 정보라니, 부부 사이엔 그런 게 없는 거야."

    법률적으로는 무척이나 잘못된 말이지만,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이지혁의 컴퓨터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 * *

    "뭔가 소름이 돋는데?"

    이지혁은 자신의 발을 핥고 있는 오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상하게 오한이 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끼이잉.

    오식이가 머리로 다리를 부비기 시작하자 이지혁은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날려 버리고는 오식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집 잘 지키고 있지?"

    컹!

    "그래, 밥도 잘 챙겨먹고."

    이지혁은 뒤쪽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사료 더미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사료도 좋지만, 얘도 육식동물인 만큼 고기를 적당히 먹여야 할 텐데. 그동안 나름 이지혁을 위해서 애를 써줬는데 딱히 밥에 대해 신경을 써주지 못한 듯싶었다.

    '나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었나?'

    예전이었다면 밑에서 부리는 마수들이 죽든 말든 관심도 주지 않았을 이지혁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이 세계로 넘어와서 많은 것이 변한 듯싶었다.

    고정되어 있던 것들이 풀렸으니 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변화라는 것과 관련 없이 너무 많은 세월을 살아서 그런지 이런 변화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아무래도 좋겠지."

    이지혁이 손을 흔들어 게이트를 열었다.

    끼잉?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대는 오식이를 보며 이지혁이 손을 뻗어 촉수를 날렸다.

    콰득!

    촉수가 오식이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

    촉수를 통해 전해져 오는 흑마력을 받아들인 오식이가 순식간에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크르르륵.

    아니, 원래의 형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모습이었다.

    처음 이 세계에 소환되었을 때의 오식이에 비해 지금의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진짜 더럽게 못생겼네."

    오식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어깨는 더 벌어졌고, 키는 더 커졌으며, 육체에 붙은 근육은 우락부락하다 못해 보는 순간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밸런스는 마치 날렵한 야수를 보는 듯한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무척이나 강인하고, 일견 멋져 보이기까지 하지만…….

    "으, 진짜 못생겼어."

    오식이는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오거 로드를 넘어서 오거라고 하기에도 뭐한, 새로운 종족으로 진화해 나가고 있는 오식이지만, 저 말은 너무도 가슴 아프다. 안 그래도 이 동네에 계속 살다 보니 미적 감각이 변해서 얼굴 보기도 싫은데!

    크롸롸뢀!

    "응? 왜 이래놨냐고?"

    크륵.

    "고기 먹자."

    오식이의 짧은 귀가 꿈틀거렸다.

    우우웅.

    이지혁이 공명하고 있는 게이트를 가리키더니 씨익 웃었다.

    "적당한 데로 연결해 놨다. 한동안 열어둘 테니 배 터지게 먹고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들어와라."

    끼이잉.

    오식이가 바닥에 넙쭉 엎드리더니, 그 큰 얼굴로 이지혁의 다리를 부비기 시작했다.

    "아! 하지 마! 침 묻어!"

    크륵.

    오식이가 시무룩해하자, 웃으며 머리를 두드려 준 이지혁이 게이트 안으로 오식이를 밀어 넣었다.

    "먹고 와."

    오식이가 신이 나서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자 이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도 좋을까."

    "저……."

    "넹?"

    "어디로 보내신 겁니까?"

    "글쎄요. 적당히 분류해 놓은 곳 중에 오거가 가도 안 위험하다 싶은 곳으로 보내놓긴 했는데……."

    "오거가 가서요?"

    "네."

    "…쟤를 오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이지혁이 입을 닫았다.

    오거는 오거지. 오거이기는 한데…….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일단은 오거 종에 속하기는 할 테니까…….

    슈퍼 오거? 그레이트 오거?

    이지혁의 마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오식이는 흑마력의 영향으로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이제는 오거는 오거이되, 오거가 아닌 지경이었다.

    "내가 엄한 세계에 마왕을 보낸 건지도."

    이지혁은 오식이가 적당히 먹어주길 바라면서 몸을 돌려 버렸다.

    "여튼 가죠."

    "멀쩡한 차원에다 핵폭탄을 떨어뜨려 놓고는 외면하다니!"

    "세상사 다 그런 거죠."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하튼 지금 그가 당장 바쁘니까.

    "그리고 그 차원 애들은 먹히는 게 차라리 이로운 애들이라서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하시죠."

    최정훈이 차 문을 열었다.

    "와, 이거 엄청 오랜만에 타는 것 같은데?"

    "…처음 타시는 겁니다."

    "응? 전에도 한 번 탔잖아요."

    "걔는 폐차했습니다."

    "아……."

    "그냥 동일 모델입니다, 그냥."

    보험 처리도 안 돼서 그냥 폐차해 버린 애마가 생각나자 최정훈은 흐르는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진즉에 몬스터 특약 보험에 들었어야 하는 건데.

    "안됐네요."

    "…가시죠."

    더 이상 말을 하다가는 울어버릴 것 같아 최정훈은 운전석에 올랐다. 이지혁이 보조석에 타는 것을 확인한 최정훈이 시동을 걸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요?"

    "일단 청와대로 가야죠."

    "그런데 원래 이런 일에는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고 그러나요?"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이 일은 대통령께서 직접 관할하셔야 할 일이라 그렇습니다."

    "음……."

    이지혁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일에는 그러려니 하면 그만이다.

    최정훈은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했다.

    '이번 일은 또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나.'

    여튼 요청이 왔으니 지원은 가야 할 확률이 높다. 대통령 개인의 치적을 위해서도 거절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 개인의 생각도 문제지만, 이대로 평양이 붕괴되도록 내버려 두면 체제가 무너져 버린 북한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쪽으로 머리를 굴려봐도 결국은 평양을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게 옳은 일이다. 통일을 한다고 해도 점진적으로 해야 하지, 이런 식으로 급격하게 흡수를 하게 된다면 게이트 출현 빈도만 두 배가 되고 경제적으로는 지옥을 겪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막아줘야 하는데…….'

    문제는 옆에 있는 이놈이다.

    웬일로 순순히 따라나서는 것까지야 달가운 일이지만, 북한에 가서 몬스터 좀 막으라고 했을 때도 순순히 가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길길이 날뛰고 뜯어낼 것은 다 뜯어내려고 할 텐데, 그게 얼마나 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중간에 있는 자신만 죽을 맛이겠지.

    "끙."

    달갑지 않은 상상에 최정훈이 신음성을 내자 이지혁이 물어왔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닙니다."

    "뭔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니가 고민이다.

    니가!

    최정훈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그의 차 주위로 검은 세단들이 몰려들었다.

    "응?"

    마치 포위하든 차를 둘러싼 세단들이 그의 차를 도로 한쪽으로 유도했다.

    최정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뭐지?"

    분명히 이 차 안에 누가 있는지를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차 안에 누가 있는지 안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슨 결과를 유발할지도 알 텐데?

    결국 길 끝에 차를 세우자 세단들의 문이 열리더니, 일련의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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