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9화 (59/118)

[■] 그럼 어디 한 번 해결해 보라고 하지 뭐 [■]

─────

최정훈의 머릿속으로 주마등이 스쳤다.

뇌가 지금의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여 위기를 알아채기 이전에 육체가 먼저 알아서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느낀 죽음의 감상에 최정훈은 반응할 수 없었다.

날아드는 시커먼 에테르에 가득 실린 악의를 느끼는 순간, 육체는 석상처럼 굳어 다가올 죽음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피하라니까!"

그때, 누군가가 그의 허리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헉!"

그제야 몸이 풀린 최정훈이 헛바람을 삼켰다.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이 어느새 최정훈의 옆에 나타나 그를 안고 뛰어올랐다.

콰아아앙!

최정훈이 있던 자리가 폭음과 함께 폭발에 휩싸였다.

"몬스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최정훈이 멍한 목소리로 묻자 김다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눈앞에 보이는 괴물들이 에테르를 분출할 수 있는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보는 종류의 괴물이니까. 그러니 그 괴물들이 에테르를 뿜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다현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우선 방향이 달랐다.

에테르가 날아온 방향은 괴물 쪽이 아니었다.

그게 어느 쪽인가 하면…….

"저기!"

김다현이 가리킨 곳은 군사분계선 너머였다.

김다현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최정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형형색색의 에테르가 한국의 능력자를 향해 쏟아지는 광경이었다.

"이 미친!"

최정훈이 놀라 소리쳤다.

"피해요!"

최정훈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국의 능력자들은 몸을 사방으로 날리며 떨어져 내리는 에테르들을 피했다.

콰콰콰쾅!

연쇄적인 폭발이 터졌다.

제때 발견하고 피하지 못했다면 요원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라 확신할 만큼 파괴적인 공격이었다.

"이 개새끼들이!"

최정훈의 눈에 불이 올랐다.

이렇게 대놓고 공격을 해놓고도 무사하길 바란다는 말인가.

"내려줘!"

"예."

낮게 가라앉은 최정훈의 목소리에 김다현이 두말없이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최정훈의 얼굴은 더없이 딱딱했다.

폭염이 가시고 나자 상황이 명백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북한군들이 그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거, 다친 사람은 없네?"

으드득.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리진철 대좌가 미묘하게 웃으면서 변명을 했다.

"조준이 조금 엇나갔어. 그러게 내 미리 체제 통일을 하자고 말하지 않았네 기래.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 우리라고 동포 죽이고 싶갔네?"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조준이 빗나갔다고?

한두 명도 아니고, 단체로 그리 한곳을 향해서 에테르를 쏘아댔는데, 그걸 조준이 빗나갔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

사람을 대놓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NDF가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NDF가 창설된 이래로 다른 나라의 능력자에게 무시당하거나 도발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이지혁의 후광이 많은 역할을 했다고는 하나, NDF 자체로도 전 세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과 실적을 쌓아왔다.

그 자부심을 지금 저놈들이 건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저 새끼들이?"

박성찬이 이를 갈며 북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등 뒤에서 게이트가 아직 닫히지 않은 상황이고, 다른 게이트도 언제 열릴지 모르는 위기 상황이지만, 이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성찬 씨!"

"말리지 마십시오. 이 기회에 저 새끼들 박살을 내버릴 테니까."

"진정하세요. 저긴 북한이란 말입니다."

"그게 뭐가 문젭니까?"

"저놈들이 서 있는 곳이 북한 땅이라구요!"

박성찬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국가의 어떠한 보호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측 능력자들이 국경을 넘는 순간, 그 자체로 도발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박성찬이 육체형 능력자라고 해서 머리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영토로 들어간다는 것과 그 행위가 가져올 대가가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북조선 돼지 새끼 모가지도 따 오면 될 것 아닙니까?"

"그거, 말 안 되는 소린 거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시죠?"

"제길."

박성찬이 대놓고 성질을 부리더니, 바닥을 걷어찼다.

"너, 이 새끼들. 자신 있으면 이쪽으로 넘어와 봐. 내가 피떡을 만들어줄 테니까."

리진철 대좌가 그 모습을 보더니, 옆에 있는 부관에게 물었다.

"저거 뭐라는 거네?"

"돼지가 하는 말을 사람이 어찌 알갔습니까."

"동무 말이 맞다."

둘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하자 박성찬은 열이 너무 올라 머리에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진정하세요."

"진정이요?"

박성찬이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왜 우리 쪽은 항상 이런 식으로 얻어 처맞고 나서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참아준다고 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가 약한 것도 아닌데!"

"미친놈이랑 싸우지 않는 게 미친놈이 무서워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그 똥이 있는 곳이 우리 집 앞마당이면 치워야죠!"

박성찬이 원래 이리 말을 잘했나?

최정훈은 피어오르는 의문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잖습니까. 지금 게이트가 열리고 있다구요."

"제길."

박성찬이 욕설을 내뱉고 한참을 씩씩대다가 몸을 돌렸다.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저 안 참습니다."

"예. 그때는 제가 안 참을 겁니다."

"아, 씨, 거기 제대로 막으라고!"

박성찬이 소리를 지르며 다시 전열로 달려갔다. 다른 강화계 능력자들이 막고는 있다지만, NDF에서도 손꼽히는 강화계 능력자인 박성찬이 빠진 빈자리는 컸다.

게이트에서 밀려 나온 몬스터들이 능력자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최정훈이 전열로 복귀한 박성찬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틀린 말도 아니지.'

매번 북한에 대한 대처는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벌어질 위기가 닥치면 잃을 것이 많은 쪽이 움츠릴 수밖에 없다.

북한이야 지금도 막장 국가지만, 한국은 나름 잘나가는 선진국 중 하나다. 전쟁이 일어났을 시에 어느 쪽의 피해가 클지는 자명하다.

그러니 언제나 상황이 격화될 움직임이 보이면 이쪽에서는 브레이크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이쪽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방법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도 똑같고 말이야.'

그런 행태를 혐오해 오던 최정훈이지만, 막상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그 자신이 전쟁의 원인이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기분만으로 저지르기에는 이 땅의 국민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도 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고 그런 거 아니갔어?"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이쪽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거, 기집애처럼 생긴 동무가 협박도 할 줄 아네?"

'진짜 이 새끼들이.'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쳐들어가 저 망할 놈들의 주둥아리를 다 찢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정훈은 더 이상 저놈들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 최정훈의 눈에 의자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고 있는 이지혁이 보였다.

그 먼 거리임에도 이지혁의 눈이 반월형으로 웃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부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지혁의 눈을 보는 순간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저거, 지금 분명히 비웃고 있는 것 같은데?

비웃는다고?

"성격 진짜."

생각 같아서는 박선덕 여사를 찾아가서 대체 성장 과정에 무슨 애로 사항이 있었기에 저런 성격이 되었느냐고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았다.

"거기, 최정훈 씨!"

이지혁도 최정훈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큰 목소리로 최정훈을 불렀다.

"왜요?"

말이 퉁명스럽게 나온다.

이 상황에 곱게 대답할 수 있으면 그게 사람인가, 공자지.

"등 안 돌리는 게 좋을 텐데요."

"네?"

"또 날아올 건데?"

"……."

무슨 소리지? 또 날아온다고? 뭐가?

최정훈이 순간 소름이 돋아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북한 쪽에서 에테르의 덩어리가 다시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최정훈 쪽으로 날아들지 않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심각했다.

게이트를 막고 요원들이 있는 쪽으로 에테르들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피해요!"

최정훈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자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몬스터들을 버려두고 황급하게 몸을 빼냈다.

"이!"

박성찬이 다급하게 앞으로 뛰어들었다.

나름 피한다고 했지만, 미처 벗어나지 못한 요원들이 있었다. 이대로 몸을 빼버리면 저들은 에테르에 직격당할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제기랄!"

박성찬이 고함을 지르고는 그들에게 날아드는 에테르를 향해 뛰어들었다.

"성찬 씨!"

최정훈이 고함을 질렀지만, 박성찬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콰아아앙!

박성찬의 몸에 부딪친 에테르가 폭발을 일으켰다.

처음 목표로 하고 있던 곳보다 가까운 곳에서 폭발했기에 다른 요원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

으드득.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당장에라도 북한 쪽으로 화력을 집중해서 다 갈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박성찬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의료진!"

엘프들이 함께 왔다면 걱정할 것이 없겠지만, 지금 미국에 있는 엘프들을 당장 데리고 올 방법이…….

"정해민 씨! 지금 당장 미국으로 가서 엘프들 데리고 오세요! 치료 마법이 필요합니다!"

"알았어요."

정해민 역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두말없이 텔레포트를 시전하려 했다.

"아, 됐어."

"…응?"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지혁의 목소리에 정해민이 멈춰 섰다.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 무슨 오버야? 안 보여?"

이지혁이 가리킨 곳을 보자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박성찬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의복이 걸레 조각이 되기는 했지만, 나름 몸은 멀쩡해 보였다. 여기저기 그을린 듯 검게 타올랐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중상.

하지만 강화계 능력자의 육체 능력을 생각한다면 자연 회복이 될 수 있을 만한 부상이었다.

"다행이다."

최정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은 얼어 죽을."

이지혁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거, 그러니까 긴장 좀 하고 살아야죠. 이게 뭐예요, 등신처럼 당하기만 하고. 저쪽에서 대놓고 엿 먹이겠다고 선언하고 갔는데, 제대로 대처도 못하고!"

"……."

최정훈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보복해야죠."

"전쟁 치를 일 있어요? 보복은 무슨."

"그럼 그냥 참습니까?"

"누가 참는데요?"

"그럼요?"

"보복이 아닌 것뿐이죠. 어쨌든 이쪽 게이트는 이쪽이 해결하는 거고, 저쪽 게이트는 저쪽이 해결하는 거잖아요."

"그, 그렇죠."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그럼 어디 한 번 해결해 보라고 하지 뭐."

이지혁의 심술이 가득 찬 얼굴을 본 최정훈의 마음에 불안함이 마구 몰려오기 시작했다.

* * *

"설마… 저쪽에 게이트를 열 생각은 아니시겠죠?"

게이트를 언급하니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지혁이 저쪽에다 게이트를 열고 그 마귀들을 소환하여 몰아붙인다면 금방 해결이야 되겠지.

북한이 없어질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무식한 방법을 쓰겠냐마는 이지혁이라면 또 모른다.

최정훈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어?"

이지혁이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짝, 쳤다.

"아, 그거도 되겠네?"

"헐……."

최정훈이 멍하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뭐지?

내가 지금 무덤 판 건가?

"생각해 보니 그것도 게이트네요. 그 생각은 못했어요. 그쪽으로 바꿀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네? 왜요? 좋은 정보 알려주신 건데."

"아뇨.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상하신 분이네."

이지혁이 빙글빙글 웃자 다급해진 최정훈이 팔을 꼭 붙잡았다.

"정말 저쪽에다 게이트를 소환하실 것은 아니죠?"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듣고 보니 좋은 생각 같아서요. 생각을 해보니까 걔들도 이제 슬슬 배가 많이 고플 텐데. 이러다 굶어 죽겠네요. 깜빡 잊고 살았네."

마수라도 굶어 죽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죠.

하지만 그 마수를 굶어 죽이지 않기 위해서 밥을 사람으로 주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일단 최소한이라도 인간의 탈을 쓰고 계신다면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되죠.

그러니까 니가 인간이냐고!

최정훈은 입에서 불이라도 뿜어낼 기세였다.

"안 됩니다."

"넹?"

"절대 안 됩니다."

"뭘 그리 진지하게 나오시나."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설마 제가 진짜 저기다가 게이트라도 소환할까 봐서 그러세요?"

응.

너라면 할 것 같아.

"사람을 몇 점으로 보시고."

몇 점이라고 하면…….

최정훈은 순간 점수를 매기다가 그만두었다.

이지혁에게도 슬픈 일이고, 이지혁에게 매달리는 최정훈에게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네.'

이지혁이 저쪽 영토에다 게이트를 소환해 버리는 순간, 상황은 막장으로 치달을 것이다.

법률적으로야 이지혁이 게이트를 소환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으니 문제가 없겠지만, 도의적인 문제가 있는데다가 저쪽의 피해가 너무 커져 버리면 되레 대한민국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있다.

북한에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하고, 그 몬스터들을 제대로 처리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 게이트가 열리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북한이 죽음의 땅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균형추가 게이트로 돌아서는 순간, 인간의 땅이 어떻게 변하는지는 아프리카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는 불과 3개월 사이에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하고 있었다. 짐승이 우글거리는 땅이 아니라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인세의 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름 어떻게 제어를 해보려 애쓰던 사람들과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는 무장 단체들도 이제는 손을 놓고 유럽과 중동으로 대피하기 바빠 난민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한국과 중국이 그 부담을 나눠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중국이야 워낙 대국이니 그 정도 난민이야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은 경제력 이전에 그만한 난민을 받아버리면 사회 체계가 붕괴된다.

북한 난민들이 하나로 뭉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사회 혼란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모든 부담을 감내하면서까지 지금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의 한국은 북한의 체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원을 해도 모자란 상황이다.

그런데 이지혁이 북한에다 게이트를 떨어뜨린다?

남북 분쟁에서 끝나면 다행이고, 잘못하면 북한의 체제 붕괴까지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그 키를 쥐고 있는 인간이 하필이면 이 양반이라는 말이지.'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신의 가장 큰 실수가 있다면 이지혁을 낳고, 그 이지혁을 베라프로 보낸 것이리라.

덕분에 인류 역사상 가장 골치 아픈 존재가 탄생했다.

"진짜 안 하실 거죠?"

"그런데 듣다 보면 좋은 방법 같기도 하고?"

"제발 좀!"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런 거 안 해도 방법 많은데 내가 귀찮게 힘 뺄 필요 없잖아요."

"몬스터들 굶어 죽느다면서요?"

"뭐, 그럼 지들끼리 잡아먹겠지."

잔인한 인간.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개체수를 줄이면…….

이득이네?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지혁과 대화를 하다 보면 선악이라든가, 우리 편과 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가장 골치 아픈 놈이 아군이라는 점에서 오는 혼란이 아닐런가.

"듣고 있으니 재밌기는 한데 말입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정인수의 목소리에 최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한창 전투 중인데 노가리는 그만 까시고 어떻게 해결을 하든가 해야지 말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최정훈에게 꽂히는 눈빛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이지혁을 나무랄 수는 없으니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말이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최정훈은 억울했지만, 차마 항변할 수 없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지혁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순간 당황했다.

무슨 짓을 저지르고 싶던 사람은 되레 최정훈인데, 이지혁이랑 엮이는 순간 그 무슨 짓이 엄청난 짓이 될까 봐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최정훈의 잘못은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들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사이다도 병으로 마셔야 사이다지, 드럼째로 들어붓는 사이다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동무, 미안하게 됐소. 거, 조심한다고 하는데, 자꾸 넘어가네. 그러지 말고 좀 피해 있는 게 몸 성히 돌아가는 길 아니갔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리진철의 목소리에 최정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젠 화도 안 난다.

그와 NDF 선에서 해결해야 했을 때는 화를 내야 할 일이었지만, 이지혁이 의자에서 일어난 이상 북한이 온전히 감당해야 할 재앙이 된 것이다.

최정훈은 안쓰러운 얼굴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가엽게도.'

아무리 북한이라고는 하지만, 쟤들은 이지혁에 대한 소문도 못 들었나?

이지혁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면 다른 나라들은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위문 공연단이라도 불렀을 텐데, 뭔 배짱으로 저렇게 자꾸 일을 벌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짜 모르는 건가?'

워낙 정보가 통제되고 있는 사회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에 세계 최고의 능력자가 있다는 사실이 북한 인민들의 사기 진작에 좋을 리가 없으니 정보를 통제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지혁이 올지도 모르는 곳에서 도발을 자제하라는 명령 정도는 내려놔야 할 것 아닌가.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따로 노림수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둘 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동무 화났네?"

낄낄대는 리진철을 보며 최정훈은 한숨을 쉬었다.

인마, 니가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옆에서 함께 낄낄대고 있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리진철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직 모르겠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사실 나도 잘 모르거든.

"에르카나!"

이지혁이 부르자 등 뒤에서 에르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 달링?"

"거기 계셨습니까?"

어쩐지 안 보인다 했다.

무슨 마귀도 아니고, 왜 자꾸 사람 그림자에서 나타나…….

아, 쟤 마족 맞구나.

그러고 보면 이지혁은 등 뒤에 참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닌다. 기본적으로 그림자에다 도가윤은 패시브로 장착하고, 어둠의 정령도 한 마리 넣고 다녔는데, 이제 에르카나까지 이지혁의 등 뒤에서 나타나지 않는가.

등 뒤에 게이트라도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쟤들 컨트롤할 수 있지?"

"응? 뭐, 어렵지는 않지만."

"않지만?"

에르카나가 붉은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이지혁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서방 일하는 곳에서 아녀자가 설치면 복 떨어진대."

"……."

이지혁이 커진 눈으로 뚱하게 에르카나를 돌아보았다.

"진짜로……."

뭐지, 이 악마는?

악마 주제에 오컬트에 심취하기라도 했나?

어디서 미신질이여?

"너는 사람이 아니라 괜찮아."

"응? 그럴까?"

"그래, 그건 사람한테만 적용되는 거야. 너는 이쪽이랑 별 관계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아아……."

논리적인 이지혁의 설명에 에르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꼭 해야 해?"

"왜?"

"나 마나도 얼마 없는데."

"저런 것들 다루는데 뭔 마나가 필요하다고 그래?"

"하지만 쟤들은 나도 처음 보는 애들인걸. 마수면 모르겠지만, 타 차원의 생물체에게는 마왕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럼 힘으로 눌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나가 소비돼."

"끄응."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카나의 설명은 한 점 틀림이 없었다. 단순히 몬스터니까 마왕의 권능으로 제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지혁이 틀린 것이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그 와중에 빠져나가는 마나가 좀 아깝기는 하지만, 지금 이지혁의 몸 안에는 마나가 넘쳐 나고 있으니까.

마왕이 가진 순수한 마나를 모조리 흡수했더니 전성기의 절반쯤 되는 마나가 육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흐으읍."

이지혁이 낮은 기합성을 내자 주변으로 검은 기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뭐, 뭐하시려고?"

최정훈이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이지혁이 저리 검은 마나를 줄줄이 뿜어낼 때는 항상 큰일을 저질러 댔다는 것이 각인처럼 박혀 있었다. 마왕이 출현한 것도 아니고, 거대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날뛰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게이트 추가로 열립니다."

"큭."

최정훈이 고개를 황급히 꺾었다.

지금까지는 최남단의 게이트 하나만 열려 있어 NDF들이 그 게이트를 막고 있었지만, 지금 추가로 다른 게이트들이 모두 열리려 하고 있었다.

"왜 하필!"

하나씩 차례로 열려주면 좀 고맙겠냐고!

왜 이렇게 동시에 열린다는 말인가.

"나이스 타이밍!"

"뭐가 나이습니까!"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말했다.

"보기만 해요."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최정훈이 황급하게 소리쳤다.

"대피! 뒤로 대피! 물러나요!"

이지혁이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것 정도야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러나라고!"

"저 양반, 왜 저래?"

박성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게이트가 열리면 그 앞을 막아야 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그런데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대피라니?

"정신 줄 놨나?"

그때, 최정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혁 씨가 일 벌이고 있다고!"

머릿속으로 해석이 일어나기 전에 입이 먼저 터졌다.

"얘들아! 튀어라!"

박성찬이 소리치기도 전에 주변의 능력자들은 이미 뒤로 돌아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의리 없는 새끼들."

찔끔 배어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박성찬도 그들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저 새끼, 또 뭐하려는 거야!"

* * *

따져 보면 그동안 이지혁이 나서서 해결하지 못한 일이 없었다. 어떤 몬스터가 출현하든, 마왕이 출현하든 이지혁은 그 피해의 정도와는 별개로 모든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은 해왔다.

그런데도 이만큼이나 사람이 신뢰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박성찬 역시 그리 생각했다.

사실 이 중에서 가장 이지혁의 덕을 많이 본 사람은 박성찬일지도 모른다.

이지혁이 아니었다면 박성찬은 지금쯤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죽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물론이고, 죽어가는 그를 치료해서 살려준 것도 이지혁이다.

그러니 이지혁에게 무한한 신뢰와 고마운 감정을 품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게 되냐고!'

배은망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이냐!

살다 보면 사자가 죽어가는 사람을 구할 수도 있지!

그렇다고 그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넣을 수 있겠냐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겁나는 건 겁나는 거지.

"뭘 하려면 말을 좀 하고 하라고! 으아아아아!"

저 멀리 이지혁의 몸에서 불꽃 같은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오.

실제로 하는 짓도 악마 같은 놈이 비주얼은 또 얼마나 끔찍한지.

누가 봐도 이쪽이 마왕군이다, 마왕군!

* * *

"저 양반은 왜 저리 오바여, 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냥 기운만 좀 뿜어낸 것뿐인데, 왜 사람을 저런 눈으로 보고 그러나.

"내가 언제 뭔 사고 친 적 있어요?"

"네? 뭐라구요?"

"제가 무슨 사고라도 친 적 있냐구요."

"그걸 말이라고……."

최정훈은 얼척이 없었다.

저건 이지혁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지 않은가.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지혁이 친 사고를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어……."

뭐가 있더라?

어?

막상 말하려니 뭔가 좀 애매한데?

따지고 보면 이지혁이 지금까지 사고라고 친 것은 다들 사건을 해결하려다 벌어진 일이 아닌가.

그걸 사고 쳤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그런데 왜 이리 심정적으로는 이지혁이 지구를 반쯤 부쉈다가 되돌려 놓은 것 같은 기분이지? 왜?

"내가 언제 지들한테 피해 준 적이 있다고 저렇게 안달인지 모르겠네요. 이상한 사람들이야."

…왜 반박이 안 되는가!

왜!

반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반박을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인데, 왜 그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는가!

피해를 안 줬다니!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자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괜히 쓸데없이 이상한 연기를 피워 올리니까 그러는 거잖습니까. 뭔가 큰일 치를 때나 그러시잖아요."

"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쓸데없이?"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구요."

"쯧쯧."

한심하다는 눈으로 이지혁이 최정훈을 바라본다.

최정훈은 그 눈빛을 받으며 서러움에 목이 메었다.

"이해력이 이리 없는 사람이 무슨 지휘를 한다고,"

"네?"

"잘 봐요!"

이지혁이 손을 뻗어 게이트에서 마구 몰려나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가리켰다.

"보여요?"

"저도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냐고요."

"네, 보입니다."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저 많은 애들을 감당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죠?"

"으음?"

최정훈은 이지혁의 말에 새삼스럽게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아……."

이지혁이 워낙 시선을 끌어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도 장난이 아니었다.

'잊고 있었다.'

잊었다기보다는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맞으리라. 레벨 6의 게이트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보고 있자니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멀리서 보면 여섯 개의 수문에서 검은 물이 홍수라도 난 듯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리라.

"저게 다가 아니겠지."

지금 보이는 광경만으로도 충분히 파괴적인데, 더 무서운 것은 분명 저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레벨 5 이상의 게이트에서는 언제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대형 몬스터들이 함께 출현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연히 대형 몬스터가 나올 것이 빤했다.

대형 몬스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감안하면, 아직 레벨 6 게이트의 진정한 힘은 나오지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넋이 나가 버릴 것 같군.'

그저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량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자꾸 힘이 풀린다.

그럴 만도 하지 않겠는가.

하나하나가 인간 따위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찢어버릴 수 있는 괴물들이 몇 겹씩 겹쳐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채로 물밀 듯 밀려오고 있다.

평번한 사람이 본다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고 주저앉아 버리고도 남을 만큼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어, 어떻게 좀……."

어떻게 좀 해보라고!

태평한 태도를 보고 속이 답답해진 최정훈이 이지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주위를 휘감고 있는 검은 기류 때문에 그의 몸을 잡아채지는 못했다. 저 몬스터들보다 이 검은 마나가 더 두려운 것이라는 건 그도 알고 있으니까.

"휘유~ 많이도 나왔네."

이지혁도 감탄했다.

레벨 6 게이트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그가 없이 NDF로도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수준밖에는 안 된다. 그런데도 그게 열 개쯤 한 곳에서 열리다 보니 장관이 따로 없었다.

자주 보던 광경과 겹치기 시작한다.

그때, 이지혁이 반대쪽에 서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주변의 NDF들이 의욕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기분도 알 것 같았다. 그의 앞을 막아선 이들은 대체로 보통 저런 반응이었지.

"그리운걸."

빌어먹을 베라프.

지랄 같은 베라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음에도 가끔 이런 느낌을 주는 썩을 곳.

크롸롸롸롸롸!

카르르륵!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이지혁은 묘한 감흥에 빠졌다.

"뭐, 뭐하세요!"

"아, 거, 남자가 땍땍대기는!"

이지혁이 핀잔을 주자 최정훈이 눈에 핏발을 세웠다.

"아, 알았어요. 뭘 그렇게 노려보고 그래요. 무섭게."

이지혁이 너스레를 떨더니,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치달아오는 몬스터의 웨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미 주변의 군 병력마저 모두 도망간 이후였다. 그러자 그 많은 몬스터들이 이지혁과 최정훈, 그리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인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 쫌! 어떻게 좀 하라구요!"

소리를 버럭 지르자 정인수가 최정훈의 머리를 덥석 잡았다.

"야, 최정훈이."

"예?"

"이지혁 씨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너도 참 이상한 놈이다. 그리 걱정이 되면 도망이나 가지, 왜 여기 붙어서 땍땍대고 있냐?"

"……."

그야 여기가 가장 안전하니까.

운석이 떨어진다 치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지하 방공호가 아니라 이지혁이 있는 곳이라고 확신하거든.

"헤헤헤."

자신도 잘 모르고 있던 본심을 알아챈 최정훈이 멋쩍게 웃었다.

"냅 둬요.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이지혁이 피식 웃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 그런데……."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슬쩍 바라보았다.

"여기 있으면 좀 위험할 수도 있는데."

"네? 뭐하시려구요?"

"뭐, 어디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닌데요."

"네."

"정신이 나가 버릴 수가 있는데, 괜찮아요?"

"당연히 안 괜찮죠."

"흐음, 조절하기 귀찮은데……."

이지혁이 투덜대더니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의 눈에도 물밀 듯 밀려오는 몬스터들의 웨이브가 보였다. 반쯤은 본 적이 있는 괴수와 마수들이고, 나머지 반쯤은 이지혁도 처음 보는 종류의 마수들이었다.

"낄낄낄낄."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마수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마수들이라는 것은 이지혁에게 있어서는 사료 주고 키우는 개나 다름없었다. 이빨이 있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것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들개들은 감히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를 드러낸 채 달려들고 있었다.

"낄낄낄낄."

우습게도 말이다.

"들개가 이를 드러내면 죽어야지."

보통은 말이지.

하지만 오늘은 써먹을 데가 있으니 적당히 용서해 주기로 할까?

대신에…….

"겁은 좀 줘야지."

이지혁의 육체에서 폭풍 같은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

최정훈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알 수 있다.

지금 이지혁은 자신들 쪽으로 기세가 뿜어지지 않도록 조절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정훈의 몸은 바람 맞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눈앞에서 느껴지는 광포한 기운이 결코 그를 향해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절로 반응하는 육체를 다잡을 수가 없었다.

기운을 몸으로 받지 않는 그가 이 정도로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러니 이지혁이 뿜어내고 있는 기세를 정면으로 받고 있는 몬스터들은?

최정훈은 곧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헤일처럼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마치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굳어버리자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후우우우우."

그 싸늘한 정적은 깬 것은 이지혁의 낮은 숨소리였다.

"자아……."

이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눈앞의 수많은 마수들이 일제히 두려움에 떠는 광경.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압도적인 힘이 가져오는 압도적인 입지.

그 정상에서 이지혁은 몸을 떨었다.

이건 육체로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이다.

수많은 권력자들이 권력을 놓지 못하는 것도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군중이 복종하는 것은 인간에게 상상할 수 없는 정신적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인간도 아닌 마수들이 일제히 두려움에 떠는 광경을 보는 심정은 어떨까?

"흐음……."

실은 '별다를 게 없다'였다.

워낙 많이 봐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다만…….

"자, 이제 달려봐라."

조금은 더 겁을 줘야겠지?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간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불꽃이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고오오오오오!

이지혁이 뿜어내는 기세가 몬스터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저 기세를 받는 것만으로도 살이 터지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압력이 휘몰아쳤다.

키에에에에엑!

카아아아아아악!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인간과 다르게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눈앞에 있는 저 작은 생물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대적을 맞이한 몬스터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도주!

카아아아아악!

필사의 도주가 시작된다.

다른 몬스터들을 짓밟고 물어뜯으며 그들이 온 방향을 그대로 돌아 치달리기 시작했다.

반대 방향으로 웨이브가 펼쳐진 것이다.

북으로.

또 북으로.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미소 지었다.

"후회할 거라니까."

낄낄낄낄.

* * *

몬스터들에게 이성이라는 게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 그들에게 이성이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은 날아가 버린 것이 확실했다.

몬스터들은 동족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짓밟고 후려치며 이지혁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두 발로, 네발로 뛰고 또 뛰었다.

밟히는 것이 있으면 그대로 짓누르고 몸을 날렸다. 구르고, 기고, 피가 터져 나와도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했다.

북으로.

또 북으로.

"낄낄낄낄."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 그래서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다.

응? 내가 그 말을 안 해줬나?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말을 안 해줘도 알아서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말이야.

이지혁은 자신을 피해 북으로 질주하는 몬스터들의 헤일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이 문제될 소지는 있지만, 어차피 지능 없는 몬스터들이니만큼 관성에 따라서 북으로 달리게 될 것이다.

이지혁이 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뿜어낸 이지혁이 손가락을 까딱대며 앞쪽을 가리켰다.

그럼 이제…….

"몬스터 디펜스다. 막아봐라, 이 새끼들아."

"이, 이게 뭣입네까!"

리진철을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

이게 대체 무슨 광경인가.

왜 갑자기 저 몬스터들이 일제히 그들 쪽으로 달려든단 말인가. 그것도 저리 미칠 듯한 기세로!

"어찌합니까?"

묻는다고 답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리진철이 아니었다. 수령 동무가 온다고 해도 이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

이곳에 이대로 있다가는 그들은 육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간나 새끼."

리진철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도망을 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에서 그에게 내린 임무는 이곳에서 열리는 게이트를 막아내면서 적절히 남한 놈들을 도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포기하고 물러난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시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곳이 공화국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능력자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리진철만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의심된다는 죄목으로 교화소로 끌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런 죄도 없이 말이다.

앞에서 밀려오는 몬스터에 대한 공포와 등 뒤에 버티고 있는 당에 대한 공포가 그의 뇌를 하얗게 탈색시키고 있었다.

"동무!"

"나대지 말라!"

리진철은 소리를 지르고는 이를 갈았다.

"남조선 간나 새끼들!"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동무, 물러나야 합니다!"

"나대지 말라 했네!"

"이러다 모가지 따이면 개죽음밖에 더 됩니까?"

"너 이 새끼, 말에 탄내 난다!"

"용서하시라요."

"이……."

리진철은 목청을 돋워 외쳤다.

"퇴각하라! 퇴각하라우!"

남한 놈들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기는 했지만, 지금은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저 몬스터의 파도에 휩쓸리면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퇴각……."

리진철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의 그로울링을 들으며 몸을 돌려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등 뒤에서 헐떡이는 몬스터들의 괴성이 들려온다. 머리털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공포 속에 전력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으아아아! 동무우우우!"

하지만 모두가 리진철처럼 잘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이들은 금세 몬스터들에게 따라잡혔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우드득.

섬뜩한 소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사라진다. 리진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동료가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질끈 깨문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거칠게 튀었다.

"왜 다 이쪽으로 오는 거냔 말이다!"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호오?"

이지혁은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북한의 인민 무력 여단을 보며 호성을 냈다.

"잘 뛰는데?"

최정훈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전 마왕을 처치하면서 이지혁이 뭔가 얻었다는 것은 정황상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만한 마수를 공포로 억압해 버리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달링, 쟤들은 뭐야? 못 보던 애들인데?"

어느새 이지혁의 어깨에 앉은 에르카나가 물었다.

"나도 몰라."

"이 동네에는 저런 애들도 넘어오는 거야? 차원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거야?"

"모른다니까."

"관심 없구나?"

"이쪽에서 역추적이 막혀 있어. 게이트 자체에 신성이 개입되어 있다고."

"신성?"

"그래, 신성. 그래서 마나만으로는 탐지가 안 돼."

"흐으음, 신성이라면 신들이 개입한 건가?"

"그건 모르지."

"달링에게는 쥐약이겠네. 그런데 신성이라면 도마뱀이 추적할 수 있는 것 아냐? 걔도 나름 그 라트렐 년의 축복을 받은 애잖아."

"라트렐이 아니니까 문제지."

"흐으응."

최정훈은 에르카나와 이지혁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둘의 대화를 이해해야 하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쟤들이야 원래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그가 지금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북한 땅으로 몰려 들어가는 몬스터들을 보는 최정훈의 심정은 기묘했다.

뭔가 속이 시원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뒷일이 걱정되는, 이중적인 마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먼저 도발해 온 놈들에게 제대로 엿을 먹였다는 것에서는 시원한 기분이 들긴 하는데, 북한이라는 나라가 저 몬스터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가 더 불안할 정도였다.

"감당 못하면 막장되는 건데."

북한 붕괴 시나리오야 정치권을 비롯하여 고위층에서야 기본적으로 해보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북한 붕괴가 시작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게이트를 감당하지 못해서 북한이라는 나라가 무너지는 시나리오야 있겠지만…….

"그 시작점에 내가 연관이 될 줄이야."

그저 이지혁이랑 함께 움직였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매우 역사적인 순간을 눈으로 본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영광은 사양하고 싶은 최정훈이었다.

"…저, 이지혁 씨."

"넹?"

"저거 북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나야 모르죠."

사람이 그렇게 무책임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져야 하는 거예요, 이 썩을 놈아.

"저거, 저러다가 북한 무너지면 우리나라도 피해가 장난이 아닐 텐데요."

"나야 모르죠."

"일단 난민부터가 장난이 아닐 텐데, 그걸 감당하려면 정말 허리 부러집니다."

"나야……."

"네! 모르시겠죠!"

알든 말든 일단 저지르고 보는 니가 알 리가 없지!

"그런 건 아닌데요?"

"뭐가 들렸습니까?"

"마음의 소리?"

귀신같은 놈.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지혁 씨."

"넹?"

"장난 그만하고 진지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아까부터 진지했는데."

…그게?

최정훈은 무지하게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자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사람이 죽습니다."

"죽으라고 보낸 건데?"

"…물론 저놈들이 얄미운 건 사실입니다."

"그래요? 전 괜찮은데."

응. 나도 이젠 쟤들은 괜찮은 거 같다.

대신 니가 얄밉다.

"저쪽에서 도발을 해왔으니 적당한 응징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그래서요?"

최정훈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북한의 국민… 국민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군요. 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몬스터들이 저렇게 몰려가면 능력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이들도 피해를 입을 겁니다."

"그런데요?"

"죄가 없는 평범한 이들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최정훈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니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요놈아!

"죄를 짓지 않은 이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우리 측의 잘못 아니겠습니까?"

"아니죠."

"네?"

"정확하게는 내 잘못이죠."

"…아시네요."

"그러니 그냥 냅 두자구요. 남들이 뭐라고 하면 제가 했다고 해요."

"평범한 사람들이……."

"아, 그 평범한 사람들 내가 죽였다고 하라니까."

최정훈은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아, 이거 미친놈이었지.'

일반적인 논리는 이지혁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최정훈은 방법을 바꿨다.

"이지혁 씨도 귀찮아집니다!"

"넹?"

"한국 국민이 늘어나는 겁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더 많아져요."

"어차피 땅덩어리 지키는 건데요, 뭐."

"생필품 대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콜라도 못 먹는 상황이 온다구요."

"뭐?"

이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확실히 뼈아프다.

"미국 가서 사 먹으면 되지 않나?"

"아……."

그러고 보니 얘는 아무 데나 다 갈 수 있구나.

사기 캐네. 사기 캐야.

"치안이 불안정해지고,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며, 국민의 세금이 폭발적으로 사용되어서 복지가 힘들어질 것이며, 경제성장이……."

"선거 나가세요?"

"저도 말하면서 미묘하게 그런 느낌이 들기는 했습니다."

"적성이 그쪽인 거 같은데."

"…감사합니다."

이게 아닌데.

왜 말을 하다 보니 자꾸 꼬이는 것인가.

"여하튼 지금 저걸 그대로 내버려 두면 북한의 체제가 붕괴된단 말입니다!"

"에.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막아야 합니다!"

"뭘 어떻게?"

"…그거야 이지혁 씨가 알아서 하셔야죠."

"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엄청 무책임하다는 거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나도 내가 능력자면 너한테 이런 거 안 해!

"헤헤, 이지혁 씨 말고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최정훈은 자존심이고 뭐고 모두 버리고 이지혁에게 매달렸다. 아까부터 장난스레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에, 뭐, 그런데요."

"네?"

"해결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게, 지금 자리를 못 비우는데?"

"어째서죠?"

"저기 봐요."

이지혁이 가리킨 곳을 보자 게이트들이 진동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게 왜 떨리지?

아직 나올 게 남았나?

이만큼이나 나오고도 뭐가 더 나오는…….

"아, 보스 몹."

"게임도 아니고 보스 몹이라니!"

"하지만 적절한 네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인정."

이지혁이 씨익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저것들부터 처리하고 나서 생각해 보자구요."

그래야죠.

쟤들 처리 못하면 북한이 아니라 우리나라부터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최정훈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 * *

게이트가 점점 더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멀리 도망쳤던 박성찬이 헐레벌떡 달려와 최정훈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저 게이트는 또 왜 저래요?"

최정훈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대형 몬스터나 나오겠죠."

"그게 그렇게 무심하게 할 말입니까?"

"어차피 나오든 안 나오든 저는 딱히 할 것도 없는데요, 뭐."

박성찬은 자신이 지금 이지혁과 대화를 하는지 최정훈과 대화를 하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닮아도 이런 것만 닮나?'

좀 좋은 부분을 배울 것이지, 왜 이리 깐죽대는 것만 배웠는지 모르겠다.

아…….

생각해 보니 이지혁에게 배울 수 있는 좋은 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게 없든지.

"대형 몬스터가 나온다구요?"

"레벨 6 처음 봅니까?"

"…자주 본 적은 없는데요?"

"그렇긴 하네요."

퉁명스레 대답하는 최정훈을 보면 박성찬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다.

이 양반까지 이런 식이 되어버리면 NDF는 미래가 없다.

"거, 장난치지 마시고 빨리 대책을 내놓으시죠!"

"대책이라……."

최정훈이 이지혁을 힐끔 바라보았다.

"일단은 대책을 잡아두고는 있습니다만."

"아……."

확실한 대책이기는 하다.

이지혁이 여기 있는 것만으로 저 레벨 6 게이트가 별게 아니게 느껴지는 효과가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긴장감이 너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네?"

"아닙니다."

박성찬은 고개를 저었다.

괜히 이 양반들과 대화를 해서 말리느니, 그냥 지켜보고 있다가 시키는 거나 잘하면 된다. 그게 속이 안 뒤집어지는 길이다.

"저거 더 떨리는데요?"

"…그것도 하나같이 말이죠."

뭐, 얼마나 대단한 게 나오려고 저러는가.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박성찬의 물음에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야죠."

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정훈은 스마트워치를 켜고 지시를 내렸다.

"부장님."

- 네.

"이쪽으로 지원이 필요합니다."

- 몬스터가 너무 많던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대형 몬스터가 나올 겁니다."

- …네? 잘 안 들리는데요?

"부장님!"

- 아, 알았어요.

이 아줌마도 갈수록 능글맞아진단 말이야.

따져 보면 NDF들 모두가 처음에 비해서는 많이 능글맞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최정훈은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게이트가 우그러지고 있었다.

"겁나네."

이쯤 되니 뭐가 나올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랄라."

옆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이지혁이야 원래 간을 배 밖에다 내놓고 집에 두고 다니는 인간이니 그렇겠지만, 최정훈은 정상적인 사람이란 말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 겁을 먹지 않기가 힘들 것이다. 그전에 게이트에서 쏟아진 몬스터들의 물량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근데 이지혁 씨."

"네."

"이렇게 되면 괜히 북한 놈들 쫓아버린 것 때문에 저 열한 개의 게이트를 온전히 우리끼리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아닙니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최정훈이 뚱한 눈으로 빤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럴 수가 있다니!"

이지혁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따지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따지는 건 맞다만, 어찌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더러운 세상.

"내가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지 말쟀잖아!'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걔들이 있다고 별 도움이 되지도 않아요."

"으음……."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다.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은 능력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라고 하더라도 레벨 6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줄줄이 나오는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지혁 없이 그 열한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모두 열렸다면, NDF들도 속수무책이었을 테니까.

그 쏟아지는 몬스터를 본 사람들이라면 다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대형 몬스터?

도망이라도 안 가면 다행이다.

'새삼 어이가 없네.'

하나만 열려도 국가 붕괴 위기를 초래하고도 남는 레벨 6짜리 게이트가 왜 여기서 열한 개나 동시에 열린단 말인가.

나라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도 유분수지!

"열려요?"

어느새 이지혁 앞에 포진을 짠 NDF 요원들 사이로 서아영이 쭈뼛거리며 걸어왔다.

"…뒷모습이 아름다우시더군요."

"제가 좀……."

"얼마나 열심히 뛰시던지, 다리 힘줄 터질 것 같던데."

"그게 보였어요? 눈도 좋으시지."

"제일 앞에서 제일 열심히 뛰시던데."

"스토커가 따로 없네요, 그런 걸 다 지켜보고 있고. 관심 있으면 말로 하지."

"……."

최정훈이 지그시 노려보자 서아영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 같이 도망갔는데 왜 자신만 가지고 이러는지 야속하다.

"열리는 것 같습니다만?"

"음……."

최정훈은 굳은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뭐가 나올까나?"

이젠 뭔 새삼 뭐가 나온다고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지만 말이다.

우우우웅!

게이트가 반쯤 일그러지며 안에서 무언가가 느릿하게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

서아영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예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헐."

서아영이 황당하다는 듯 전방을 바라보았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대형 몬스터가 눈에 익은 적은 없다. 언제나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한, 희귀한 몬스터가 나왔으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게이트에서 나온 것들을 보니 이제까지와는 그 양상이 다르다.

"…작은데?"

"그러네요."

"정령인가?"

"그건 아닌 것 같고."

찰칵.

그 순간, 이지혁이 말없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후우우우."

길게 연기를 뿜어낸 이지혁이 찡그린 얼굴 그대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하……."

스으으으.

이지혁의 등 뒤에서 에르카나가 나타나더니, 이지혁의 무릎에 앉았다.

"흐음?"

그녀 역시 그리 유쾌하지 않은 얼굴로 게이트에서 나온 것들을 바라보았다.

"저게 뭐지?"

에르카나조차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이트에서 나온 것은 생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나 덩어리?"

열한 개의 게이트에서 나온 것은 모조리 새하얀 빛을 띠고 있는 순백의 마나였다.

밀집도가 너무 높아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덩어리 같아 보이는 마나들.

마치 빛의 정령처럼 보이는 마나 덩어리들이 각각의 게이트에서 나와 한곳으로 뭉쳐 들고 있었다.

후우우우.

이지혁이 뿜어낸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냄새가 풀풀 나는군."

"우연히 벌어지는 일은 아니지?"

"흠……."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어이, 도마뱀."

"네."

"아는 것 있어?"

"모릅니다."

"그렇겠지."

이지혁이 웃었다. 답지않게 그의 얼굴에는 냉소적인 빛이 감돌고 있었다.

"냄새가 풀풀 난단 말이야."

"정말 모릅니다."

용족의 말이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드래곤은 거짓을 말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말에서 찝찝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래서 싫다니까.'

이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링."

"알아."

저 마나 덩어리들은 마치 이지혁을 위해서 차려진 식사 같았다.

독을 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데, 그 독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식사가 이지혁으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진수성찬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

베라프였다면 흩어지게 내버려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이곳은 베라프가 아니라 지구다. 지구에서 마나는 소멸하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 천천히 흩어지는데, 그 이전에 다른 몬스터가 저 마나를 흡수하기라도 한다면 대재앙이 벌어질 것이다.

"재미있네."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이걸로 반쯤은 확실해졌다.

게이트를 여는 존재가 있다.

이성을 가진 존재가 확실하게 이쪽을 노려 게이트를 열어오고 있다.

그리고 아마 그 존재는 이지혁을 알고 있다.

"선물까지 보낼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이지혁이 키득대며 웃었다.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는 몬스터들은 이지혁이 제압해 쓰기 딱 좋은 종류의 것들이었고, 그 이후로는 마나 덩어리까지 보내고 있었다.

호의를 가지고 이지혁을 도우려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구성이다.

"그런데 영 찝찝하단 말이지."

웬만하면 들어맞는 이지혁의 촉이 이 진수성찬이 반드시 배탈을 일으킬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내 생각도 그래, 달링."

"그렇지?"

"응. 그냥 버리자."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지."

아무리 독이 들었다고 해도 밥상은 밥상.

밥상을 엎었다가는 엄마한테 등짝이 터져 나간다는 것은 이지혁의 집에서는 상식이었다.

"편식하면 못 쓰는 거야."

이지혁이 낄낄대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에르카나가 꺄르르 웃으며 등 뒤에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우리 달링, 남자다워."

"…쯧."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반응이 너무 일관적이라고 해야 할까나?

그게 에르카나의 좋은 점이기는 하지만.

이지혁은 에르카나를 등에 달고는 마나 덩어리를 향해 걸어갔다.

"흐으음."

익숙한 마나의 향이 난다.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 익숙하냐고 하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겪어본 적이 있는 마나 같았다.

그렇다면 이 마나의 출처가 지금까지 이지혁이 지내온 곳이라는 건데…….

"베라프."

베라프에서 왔다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몬스터들은 베라프의 것들이 아니었다.

베라프에서 볼 수 있는 몬스터들도 섞여 있지만, 사실 베라프에서 볼 수 없는 종류의 몬스터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그 몬스터들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꼬였군."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그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 느낌이 슬슬 확신으로 바뀌고 있지만,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을 노려서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이지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무슨 전설의 드래곤쯤 되어서 드래곤 하트라도 품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이지혁에게 이러한 투자를 해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나를 사모하는 신이 있는 건지도 모르지."

"달링, 약 먹을 시간이야."

…영양제지?

향정신성 의약품을 말하는 건 아니지, 에르카나?

이지혁이 피식 웃고는 마나의 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어마어마하군.'

마나가 이렇게까지 뭉쳐서 유형화된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이지혁이 흑마력을 뭉치고 압축하여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밀도 높은 마나가 집채만 한 크기로 웅웅대고 있었다.

"이거 좀 부담되는데?"

이지혁이 살짝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달링, 이거 배탈 날 것 같은데?"

"흐음, 일단 물러나 있어, 에르카나."

"응."

이지혁이나 그녀처럼 흑마력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눈앞에 보이는 순백의 마나는 정말 독이나 다름없다.

"진짜 먹여서 암살할 생각인가?"

이지혁은 그럴싸한 방법이라 생각하며 손을 뻗어 마나에 가져다 댔다.

"드레인."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