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8화 (58/118)
  • [■]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

    ─────

    "아, 면제시구나."

    정인수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처음 이지혁을 방위사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을 때, 그가 군대를 갔다 왔는지부터 살폈던 정인수 아닌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지혁이 미필이라는 사실이 이만큼이나 원망스러운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당시에는 군대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좋아했는데…….

    '군대만 갔다 왔으면…….'

    아무리 개념이 없다고는 해도 군대를 갔다 오기라도 했으면 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하늘 위에 있는 사람이고, 얼마만큼의 존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있을 터인데, 군대를 다녀온 적이 없다 보니 무슨 옆집 아저씨 보듯이 하고 있지 않은가.

    설민범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 못해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한평생을 군대에 몸을 바쳐서 살아온 설민범이다. 다른 똥별들처럼 아부와 정치질로 올라온 자리가 아니라 그 능력과 성실함으로 소장이라는 자리까지 오른 참 군인이 이런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슬슬 치밀었다.

    '참아야지.'

    다른 사람이 이런 짓을 했다면 정인수도 참지 않았을 것이다.

    정인수 역시 방위사에서는 또라이로 유명한 사람이다. 민간인에게야 더없이 친절하지만, 능력자들에게는 자비가 없는 사람으로 유명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지혁만은 예외였다.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도 하지만, 이지혁의 저러는 게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쪽을 탓할 수도 없고, 저쪽을 탓할 수도 없으면, 제3자를 탓할 수밖에!

    '뒈지고 싶냐?'

    정인수의 강렬한 눈빛이 최정훈에게 가 꽂혔다.

    "하하하……."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정인수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고, 불편해.'

    어쩐지 까마득하게 높은 장관들보다 정인수가 더 불편한 최정훈이었다.

    장관들이나 대통령을 봤을 때는 이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우선 최정훈이 그들과의 관계를 처음 정립하는 상황이라 현실감이 없기도 하고, 지금의 최정훈이 가진 입지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인수는 아니다.

    이지혁이 오기 전까지 5년을 넘는 시간 동안 같이 부딪히고 서로 양해도 구하고 최정훈이 은근히 찌르며 빼먹기도 한, 말 그대로 피부를 맞대며 함께 커온 사이인 것이다.

    형님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대령님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정이 없는, 딱 그런 사이였다.

    그런 양반이 저렇게 대놓고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찝찝하기도 찝찝하고, 무시하기도 뭐하고.

    "하하, 이지혁 씨, 그래도 소장님이신데 아저씨는 좀……."

    정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어도 그리 말은 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단장님이신데 아저씨가 뭔가.

    "소장은 뭐예요? 현장소장 같은 건가?"

    "……."

    최정훈이 정인수를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안 됩니다.'

    '미안하다.'

    정인수도 이지혁을 어떻게 해보려던 마음을 접었다.

    단 한마디만으로도 사태가 파악이 끝난 것이다.

    일단 이지혁에게 상식적인 반응을 바라느니, 차라리 그를 상식적인 이들과 격리하는 쪽이 몇 배는 더 효율적인 일이다.

    "…모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잠시만."

    정인수가 이지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설인범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휴우."

    설인범이 깊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권 양도하겠네. 알아서 잘하게나. 내가 여기 있다가는 좋은 꼴 볼 일 없을 것 같구만."

    "죄송합니다."

    "대신……."

    설인범이 눈에 불을 켰다.

    "우리 애들 안 다치게 조심해. 단 한 놈이라도 억울하거나 멍청하게 다치는 놈 나오면 내가 반드시 네놈 모가지를 따버릴 테니까! 알아들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제기랄."

    설인범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지휘봉을 정인수에게 건넸다. 이 지휘봉이 딱히 군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휘권을 넘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정신 바로 차리겠습니다."

    감사하다고는 할 수 없기에 나온 말이었다.

    설인범도 정인수의 심정을 아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

    설인범의 걸음이 이지혁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어?"

    "으?"

    최정훈과 정인수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지혁의 앞에 멈춰 섰다는 것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건데, 이지혁은 말을 섞어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설인범 같은 사람은 더더욱!

    "자네가 이지혁인가?"

    "네? 저 아세요?"

    "모르면 죽어야지."

    설인범은 못마땅한 어투로 이지혁을 위아래로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젊은 친구가 입대도 안 하고 뭐하는 건가?"

    "저도 뭐 딱히 군대를 안 갈 생각은 없었는데, 나라에서 가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있나요?"

    "입대할 생각은 있었다는 건가? 핑계 아니고?"

    "에이, 영감님. 입대가 뭐 별거라고요. 대충 몇 년 캠핑한다고 생각하면 금방 가는 건데."

    설인범이 묘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언뜻 듣기에는 현장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을 모욕하는 말 같기도 한데, 말투에서 묻어나는 묘한 느낌이 이지혁에 대한 혐오감을 막아주었다.

    "흠……."

    말을 들어보자면 입대도 안 한 애송이인데, 말투나 하는 짓거리에서는 뭔가 노회한 냄새가 난다. 짬이 찰 만큼 찬 원사급에서 느껴지는, 군 생활에 달관한 듯한 그 여유가 눈앞의 꼬맹이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이상한 친구로군."

    "이상하실 것 없어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원래 지는 걸 싫어해서요."

    설인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예의 같은 건 바라지 않아. 하지만 자네도 나라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남자라면 최소한의 무게감을 가져야 하지 않겠나?"

    "무게 잡는다고 일이 잘되면 잡죠. 그런데 그게 아니면 그냥 편안하게 살래요."

    "……."

    설인범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 아무래도 좋겠지. 중요한 건 그런 건 아니니까. 지금 자네의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니겠지."

    순간, 설인범이 모자를 벗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

    그 이지혁마저 순간적인 설인범의 동작에 놀라 입을 벌렸다.

    이 장군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고개 드세요, 아저씨. 왜 이래요?"

    설인범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네. 중요한 것은 자네가 지금부터 벌어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내 이리 부탁함세.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게나."

    이지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질색이다.

    딱히 이득을 줄 생각도 없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자존심을 꺾는 것만으로 남에게 압박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들.

    한 점 가치도 없는 그들의 자존심을 꺾는 것이 마치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인 양 생각하는 족속들.

    정말 싫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존심이라는 것이 전부임을 알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

    내려놓을 것이 더 없을 정도로 청렴하게 한길만 걸어온 이들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라는 것은 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지혁은 이 상황이 불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알았으니 고개 들라구요!"

    "최선을 다해주겠나?"

    "뭐, 이런 양반이 다 있어?"

    "대답해 주게."

    "쯧."

    이지혁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설민범이 고개를 숙이고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이지혁은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젖혀 버렸다.

    그러자 되레 안절부절못하게 된 것은 지켜보는 이들이었다.

    최정훈의 입장에서는 이지혁이 대충 받아줘서 이 상황을 끝내줬으면 하지만, 이지혁은 이런 신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이지혁이 기지개를 켰다.

    "아저씨."

    설민범은 대답 없이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아저씨가 그렇게 강요한다고 해서 제가 아저씨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아요. 이해가 안 가세요?"

    "강요가 아니라 부탁이네."

    "다짜고짜 마음을 다해서 하는 부탁은 부탁이 아니라 강요죠."

    "그럴 마음은 없었네."

    "뭐, 그럼 안 들어드려도 괜찮겠네요. 가보세요."

    "……."

    이지혁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러게 부탁을 해놓고 안 들어줬다고 그리 똥 씹은 얼굴이 될 거면 애초에 부탁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거라니까요. 아저씨는 그 장면이 각이 나온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영 뜬금없거든요?"

    "미안하군."

    "아저씨가 부탁을 하든 말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설인범은 더 이상 부탁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선배님."

    "자네에게라도 부탁하지."

    "예."

    설인범이 천막 밖으로 나가자 이지혁이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어휴, 질색이야."

    "왜 그러셨습니까? 나름 자존심 굽혀가며 부탁한 건데. 그냥 그러겠노라만 해주면 그만인 것을."

    "들어주지도 않을 걸 해주겠다고 속이는 거랑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하는 것 중 어느 게 더 옳은 것인지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남지만요?"

    "그래도……."

    최정훈은 설인범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다는 표정으로 설인범이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예우는 해드려야죠. 소장님이신데."

    "소장이 뭔데 그래요?"

    최정훈이 뚱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래서 남자는 군대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투 스타라고 투 스타!

    별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달렸는데! 그걸 뭐라고 물으면 어떻게 하냐!

    '대통령이 뭔데 그래요'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을 해주겠냐고!

    그리고 보통 군대를 안 갔다고 소장을 모르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기본 상식 아닌가?

    "왜 사람은 꼬나봐요?"

    "아닙니다."

    최정훈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앓느니 죽지.

    이지혁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일 뿐이다.

    "여하튼 지휘권이 들어왔으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합니다……."

    "적당히 개기다가 게이트 열리면 그냥 폭격해 버려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최정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콰광!

    최정훈과 이지혁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천막 밖으로 향했다.

    "폭음?"

    "게이트?"

    아직 게이트가 열리려면 멀었을 텐데?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으음……."

    게이트가 급속도로 열렸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감시 요원들에게서 연락이 바로 왔을 것이다.

    게이트 관련이 아닌데 폭음이 터졌다면 생각할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알고 시비 거나?"

    이지혁이 얼굴 가득 심술보를 주렁주렁 달고는 천천히 걸어 천막 밖으로 나갔다.

    "……."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면서 성호를 그었다.

    평소 종교와는 상관없는 그지만, 지금부터 이지혁이 무슨 일을 벌일까를 생각해 보면 청심환과 종교가 꼭 필요했다.

    "그러니까……."

    최정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이지혁이 있는 쪽으로 다리 뻗으면 발목 잘리는 거여.

    이제 북한 쪽도 그걸 알 때가 되었다.

    최정훈은 심호흡을 하며 이지혁을 따라 나섰다.

    * * *

    간이 천막 밖으로 나간 이지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아직 게이트가 파릇파릇한 것을 보면 몬스터 관련으로 일이 터진 건 아닌 듯싶었다.

    그런데도 확실히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눈앞에 피어오르고 있는 새하얀 연기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폭탄이라도 떨어졌나?"

    "전쟁할 생각이 아니라면야……."

    최정훈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전력상으로 압도적인 한국이 북한의 도발에 항상 미온적으로 대처해 온 이유는 전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긴다고 해서 얻을 것이 없는데, 북한과의 전쟁에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은 피해가 발생한다.

    멀리 떨어져서 군인만 투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서로 마주 붙어 있는 이상 민간인 피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북한을 통째로 집어삼킨다고 해도 지금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빈민층이 이천만 더 추가되고 이득은 없는 상황이니, 되레 손해를 보는데다가 민간인 피해까지 발생한다면 손해액은 그야말로 하늘을 뚫을 것이다.

    그러니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는 심정으로 외면하고 미온적으로 대처해 왔다.

    하지만 국토에 직접 폭격이 떨어지는 사태라면 외면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아니겠지."

    그러니 아닐 것이다.

    북한도 박살이 나고 싶지는 않을 테니,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북한의 뚱땡이가 개념은 없어도 제 몸 하나는 눈물 나게 챙긴다 했으니, 정신이 박혀 있다면 전쟁을 각오하고 도발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저 연기는 뭐지?

    최정훈이 연기가 나는 부분을 자세히 노려보았다.

    확실히 군사분계선 팻말이 보이는 곳 안쪽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연기 주변의 풀들이 박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진짜 쐈나?"

    최정훈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만약 진짜 내륙으로 공격을 한 것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아닐세."

    "음?"

    먼저 천막 밖으로 나갔던 설인범이 군모를 눌러쓰고는 대답했다.

    "폭격은 아니었어. 화기라기보다는 능력 쪽 같더군."

    "능력이요?"

    "능력자일 거야. 화기와는 반응이 달랐네."

    "아……."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화기가 아니라 능력자의 공격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다른데…….

    '뭐가 어떻게 다른 거지?'

    최정훈조차도 순간적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타국의 능력자에 의한 본토 피격이라는 상황 자체가 대한민국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인데다가, 민간인이나 군 병력에 피해가 없는 상황.

    이 상황에 대한 대처를 어느 선까지로 한정 지어야 할 것인가.

    "이래서 정치인이 있는 거구나."

    실무자인 최정훈으로는 도통 선을 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무능하다고 느낀 대통령이 지금 이 순간에는 최정훈보다 나을 것 같았다.

    분야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정치라는 것도 쉬운 게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며 최정훈은 전화기를 들었다.

    이걸 어디에 보고해야 하나.

    대통령 직속으로 보고하기에는 그렇고, KSF는 원래 이런 일을 처리하는 부서가 아니다 보니 국장님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애매하다.

    그럼…….

    "장관님밖에 없나?"

    아무래도 이런 일은 국방부 장관에게 직속으로 보고하는 것이 가장 옳아 보였다.

    그 아래로 육참이나 합참 같은 보고 체계가 있겠지만, 친분도 없고, 안면도 없고, 어디로 연락해서 보고해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다행히 최정훈이 보고를 해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제길, 이게 뭔 일이야?"

    정인수가 나서서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새끼들아, 무슨 일인지 파악해서 보고를 해야 할 것 아냐!"

    "아……."

    최정훈은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벌어진 일이면 일차적으로 정인수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닌가. 매번 일만 터지면 나서서 처리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보니 생각도 못했다.

    "추가 공격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하고! 이 새끼야, 누가 그렇게 보이게 돌아다니래! 그러다 니 모가지 날아가면 누가 책임져 줘?"

    정인수는 현장에서 구르다 못해 바닥에 붙어버린 사람답게 순식간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군인들을 싸그리 정리해서 각을 잡아버렸다.

    "와!"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우리 인간들이 저 애들 반만 말을 들었어도…….'

    평소에 항상 치고받던 정인수였다. 능력자가 우선시되는 상황상 최정훈이 우위를 잡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번만은 진심으로 정인수가 부러워졌다.

    말 한마디에 탁탁 각이 잡혀가는 것을 보라.

    NDF 놈들에게 저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면 콧방귀 소리가 오케스트라로 들려왔을 텐데.

    "입대나 할걸."

    "헐? 면제예요?"

    이지혁이 놀라 묻자 최정훈이 겸연쩍게 고개를 돌렸다.

    "면제는 아니구요."

    "군대 안 갔어요?"

    "그, 그렇죠. 따지자면 안 간 겁니다. 그런데 그게 면제는 아니구요."

    "안 갔으면 면제지!"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최정훈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행정고시를 패스한 사람은 3년간 장교로 복무를 한다. 최정훈은 워낙 이른 나이에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패스한 재원이다 보니 원래대로라면 장교 복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블랙 먼데이가 터졌고, KSF 소속으로 일을 하다 보니 군대로 입대하는 것이 애매해져 버렸다.

    결국 KSF도 군의 일종이라는 해석으로 KSF 복무를 군 복무로 대체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면제는 아닌데…….

    "거, KSF도 군대나 마찬가지라… 다른 능력자들처럼 직장을 다니는 걸로 복무를 대체한 거죠."

    "돈은 다 받아 처먹으면서?"

    "…원래 장교 입댄데, 장교는 돈 좀 받습니다! 거, 그거 받아봐야 공무원 월급 얼마나 된다고!"

    "차는 좋은 거 끌더만!"

    "생명 수당 아닙니까, 생명 수당!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아무리 생명 수당 준다고 해도 KSF에서 복무하고 싶어 하는 일반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차라리 우간다 평화유지군에 지원하는 게 제정신 박힌 거지."

    속에서 터져 나온 최정훈의 본심에 서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KSF가 어때서!"

    "거, 능력자들이나 있을 곳이지! 맨 정신 가진 일반인이 있을 곳입니까, 거기가?"

    "와, 저 양반 말하는 거 봐."

    최정훈이 콧김을 뿜었다.

    아무리 빡센 군대를 갔다고 하더라도 KSF 복무만 하겠는가!

    그런데 면제라니!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는가!

    "면제 아닙니다!"

    "아, 알았어요. 뭐 그런 걸로 눈을 부라리고 그래요?"

    "군부심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닙니다! 저 진짜 빡세게 복무했단 말입니다."

    "알았다구요."

    이지혁이 귀를 후비며 최정훈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어이, 최정훈 씨."

    정인수가 삐딱한 어조로 부르자 최정훈이 찔끔하여 고개를 돌렸다.

    "예, 대령님."

    "지금 그렇게 놀고 있을 때야? 아무리 능력자들이랑 같이 있다지만, 당신 역할 잊어버린 거야?"

    "…아닙니다."

    최정훈이 부동자세가 되었다.

    "지금 씨발, 포탄이 떨어졌는지 뭘로 공격이 들어왔는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노닥거리고 있어? 왜? 내가 발로 뛰어서 뭔 일인지 알아내 오면 당신이 지시 내려줄래?"

    "죄송합니다."

    "여기가 당신 사무실이야?"

    "아닙니다."

    짝짝짝짝.

    이지혁이 박수를 쳤다.

    그랬다.

    최근 최정훈이 얼마나 빡세게 드립을 쳐 대는지 이지혁이 당황할 지경이 아니었던가!

    저렇게 군기를 잡아줄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사람이 제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뭐해, 상황 파악 안 하고!"

    "예!"

    최정훈이 부리나케 한쪽에 있는 NDF 요원들을 향해 뛰었다.

    상사는 아니지만 틀린 말이 없고, 동종 업계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오래 복무한 선배를 존중하기에 최정훈 역시 불만은 없어 보였다.

    "와, 아저씨 최고!"

    "하하……."

    이지혁이 엄지를 내밀자 정인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최정훈에게는 칼 같은 군인의 모습을 보였지만, 이지혁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저 친구가 요즘 좀 빠진 것 같더라구요."

    "빠진 게 아니라 완전 맛이 갔어요! 요즘 일은 안 하고 얼마나 뺀질거리는데요."

    "그럴 시기죠."

    "그래도 시국이 이렇게 요상한데! 각 잡고 일해야죠!"

    "그 말은 맞습니다."

    상황을 대충 파악했는지 최정훈이 이지혁과 정인수에게로 다가왔다.

    "최정훈 씨."

    "예, 대령님."

    "예전 당신은 그래도 중간에서 일 참 잘해서 내가 좋게 봤는데, 요즘 하는 꼴을 보면 영 예전 같지 않아. 알아?"

    "예."

    "초심 잃으면 이 바닥에서는 훅 가는 거 알고 있지?"

    "압니다."

    "잘해."

    "예."

    최정훈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깐죽으로 따지면 이지혁도 한 수 접어줘야 할 지경이 된 최정훈을 말 몇 마디로 깔끔하게 제압해 버리는 걸 보면… 정인수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쪽은 뭐래?"

    "아무래도 북한 쪽 능력자가 도발을 한 모양입니다.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불덩어리를 쏘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다수 있습니다."

    "이쪽과 의견이 같군."

    정인수는 골똘히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상부에 보고는 이미 했지만, 돌아올 답변이야 빤했다. 경계를 강화하고 추가적인 도발이 없을 시에는 반격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명이 떨어질 것이다.

    상식적이고 현명한 대처다.

    문제는 속이 끓는다는 것이다.

    공동 작전에 협의했음에도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한다는 것은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나 다 없었다.

    물론 북한 주제에 한국을 무시하는 게 말이나 되겠냐마는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곳이 바로 군사분계선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영 속이 불편하고."

    그가 책임자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삭이겠지만, 지금은 그가 현장 지휘권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까?'

    웬만하면 상부의 지시를 따르고 싶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냥 넘어간다는 것도 영 찝찝했다. 윗선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에서 적당히 손을 봐주고 싶은 것이 정인수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리고…….

    "넹?"

    정인수의 시선을 받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최적의 카드가 있다.

    북한뿐 아니라 미국이라도 전혀 보복을 생각할 수 없는, 절대적인 카드.

    열병기가 협상 카드라면, 이지혁은 그 판을 깨버리는 카드였다. 그 카드가 손에 있는데 쓰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정인수의 인내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다.

    "이지혁 씨, 제 생각에는……."

    "잠만요."

    이지혁이 말을 하려는 정인수 대령을 제지했다.

    "저기 뭐가 보이는데요?"

    "네?"

    이지혁이 가리킨 곳을 보자 일련의 인원들이 군사분계선으로 접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인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북한의 인민복을 차려입은 일련의 인물들이 군사분계선까지 다가와서 가만히 정인수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다 크게 소리쳤다.

    "거기 대가리가 누구네?"

    * * *

    대가리?

    이지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금 대가리를 찾은 건가?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자 최정훈이 말없이 다가와 팔을 꼬옥 잡았다.

    "왜요?"

    "진정하시죠. 지금 일단은 정인수 대령님께 맡겨두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흐음."

    이지혁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지만, 정인수가 나서는 것이 옳다고 생각은 했는지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런 자리에서는 이지혁의 기분보다는 정인수의 입지를 세워주는 것이 옳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이지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만, 지금까지 꾸준하게 대가 없는 호의를 보여온 정인수를 무시하는 것만은 이지혁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새끼들이……."

    정인수가 이를 갈며 북한 놈들에게 다가갔다.

    "안 됩니다, 대대장님."

    "야, 인마. 저 새끼들이 지금 도발하는 거 안 보여?"

    부관의 만류에 정인수가 소리 질렀지만, 부관은 정인수의 허리를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도발을 한다고 무턱대고 가시면 어쩝니까. 저 새끼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구요."

    "죽이기야 하겠어?"

    "대령님이 돌아가신 걸 핑계로 저 새끼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면 저도 안 말립니다. 그런데 대령님이 돌아가시는 정도로는 전쟁이 안 난단 말입니다. 그냥 개죽음밖에 안 됩니다."

    "인마, 저 새끼들이 생각이 있으면 날 죽이겠어?"

    "언제 북한 놈들이 생각 있었습니까? 요즘 게이트만 상대하시다 보니 감이 죽으셨지 말입니다."

    "……."

    정인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 더 상식적이라니.

    그마나 몬스터는 행동 패턴이라는 게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서 예측이 가는 반면에 북한 놈들은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 아닌가.

    "내가 경솔했던 것 같군."

    정인수는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이대로 입을 닫고 있는다면 우리가 겁을 먹은 줄 알 거 아닌가."

    "물론 안 됩니다. 하지만 대령님이 직접 가시는 건 더 안 됩니다. 적당하게 이빨 좋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정인수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시선이 멈춘 곳에 있던 이가 옆으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정인수의 눈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따라붙었다.

    "아니, 저는……."

    "적임자가 있군."

    "헐, 대령님, 저는 고급 인력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이건 고급 인력이 해야 하는 일이지."

    "저 무식한 북한 놈들을 상대하는 게 고급 인력이 해야 하는 일이란 말입니까?"

    "가장 민감한 이들을 상대하는 것이야말로 고급 인력이 해야 하는 일이지."

    "위험하잖습니까?"

    "아까 생명 수당 어쩌고 하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건 꽁으로 받아 처먹나?"

    "……."

    할 말이 없어진 최정훈이 간절한 눈으로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저 아직 장가도 못 갔습니다."

    "에이, 죽기야 하겠나?"

    "그리 쉽게 말씀하실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서 가보게."

    최정훈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장가도 못 갔는데 저 북한 놈들 앞에 나섰다가 뭔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합니까!"

    "영혼 결혼식도 있잖아."

    "영혼 결혼은 뭔 놈의 영혼 결혼입니까! 그냥 안 죽으면 언젠가는 갈 수 있는 건데!"

    정인수는 입맛을 다셨다.

    "아쉽다."

    "뭐가요?"

    "좀 못생겼으면 그래도 안 생긴다고 우길 수 있을 텐데, 니 얼굴 보니 생기긴 할 것 같아서."

    최정훈이 치를 떨었다.

    지금 이게 농담으로 넘어갈 일인가?

    "여하튼 저는 안 갑니다!"

    "음, 뭐, 그럼……."

    정인수가 누군가와 순간적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지혁 씨."

    "넹?"

    "한 번 다녀와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뭐."

    최정훈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지금 누굴 보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정인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못 가니 믿을 사람이 저 양반밖에 더 있나."

    "믿을 사람요? 믿을 사람? 지금 믿을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그래."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어서 저 사람을 믿습니까!"

    헐.

    말이 좀 심한데?

    저 양반이 지금 내가 뒤에 있다는 것을 잊은 건가?

    저게 사람 앞에다 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저라면 세상에 인간이 저 양반하고 저하고 둘만 남아도 저 사람을 믿지는 않을겁니다!"

    "말이 심하시네요!"

    최정훈이 이지혁을 흘깃 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사실이니까."

    "헐."

    이지혁의 가슴을 비수로 찌른 최정훈이 정인수를 설득했다.

    "다, 다른 사람을 보내죠."

    "누구?"

    "믿을 만한 부관이라든가."

    "이봐, 최정훈이."

    "예."

    "거기서 쓸 만한 인력은 다 뽑아가지 않았나?"

    "……."

    "안 그래도 인력 없어 뒈지겠는데, 그리고 나도 그냥 대령이야. 대령 밑에 북한이랑 직접 접촉해도 될 만한 애가 있으면 내가 대령이겠어?"

    "대장이시겠죠."

    "그렇지?"

    "그렇네요."

    최정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이지혁 씨가 가는 게 맞지. 저 사람이야 저쪽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든 대처가 되잖아."

    입이 대처가 안 되잖아, 입이!

    몸이 아니라 주둥아리가 대처가 안 된다고, 이 양반아!

    주둥아리 말이다, 주둥아리!

    코 밑에 붙어 있는 그거!

    이지혁의 입을 꿰매서 보낼 수 있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게 안 되는 이상 이지혁을 한 국가의 대표 격으로 다른 국가와 접촉시킨다는 것은 나라 망신을 뛰어넘어 나라의 위기를 자초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럼 뭐, 최정훈 씨가 가야겠네."

    "…그게 왜 그렇게 됩니까?"

    "이봐, 최정훈이."

    "예."

    "자꾸 안 된다, 안 된다 말하지 말고 대안을 내봐. 나도 안 돼, 이지혁씨도 안 돼. 그럼 누가 가야 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새끼들 낄낄대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럼 뭐, 외교관이라도 불러올까? 쟤들한테 여기 대가리 없으니 기다리라고 하고?"

    "그건 안 되죠."

    "그렇지?"

    "그, 그렇죠."

    "그럼 누가 가야겠어?"

    최정훈은 빙긋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곳에 가서 대거리를 해야 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네요."

    "그렇지?"

    "차라리 그냥 강제로 가라고 하지그러셨어요. 그럼 소속이 다르다고 거부라도 할 것을."

    "우리 사이에 그럴 수야 있나."

    "하하하하."

    최정훈이 눈가를 훔쳤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할 일이다.

    결심을 굳힌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그의 팔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왜 이러세요?"

    "가, 같이 가시죠."

    "뭘 같이 가요!"

    "저쪽에서 대가리를 찾지 않습니까! 솔직히 제가 대가리라고 하기에는 좀 급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대가리라고 해줄 테니까 다녀오세요. 왜 이래요, 남자끼리!"

    "아니, 저는 대가리 안 할 테니까, 같이 가시죠."

    "아까는 가지 말라더니!"

    "그때는 제 목숨이 안 걸렸잖습니까!"

    "헐……."

    이지혁은 진심으로 말하는 최정훈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내려놨는데?"

    "목숨이 걸렸는데 자존심이 문젭니까! 같이 가시죠!"

    "아, 안 간다니까! 가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제가 죽는 꼴 보기 싫으시면 같이 가시죠!"

    "저랑 별 상관없는데."

    "카악! 시끄럽고, 같이 가시죠!"

    "헐."

    이지혁은 최정훈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 앞으로 나갔다.

    "난 별로 할 이야기 없는데……."

    "옆에 같이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심심한데……."

    "휴대폰 하고 노세요. 게임 깔아드려요?"

    "와이파이도 안 터지고, 여기 데이터도 안 되는 듯?"

    "인터넷 안 되도 할 수 있는 게임 있습니다. 제 폰에 있으니 이거 가지고 노세요."

    "재미없는데……."

    "팍, 씨!"

    니가 그걸 하면 안 되는데…….

    이지혁은 목숨 앞에서 마초가 되어버린 최정훈의 단호함 앞에 반항도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이 양반, 언제부터 이런 상남자였지?

    결국 최정훈에게 끌려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도달한 이지혁이 눈앞을 훑어보았다.

    "호오?"

    군사분계선이라 추정되는 곳의 10m쯤 전방에 다섯 명의 남자가 일렬로 서 있었다.

    "북한 애들은 삐쩍 곯았지 않나요?"

    "뚱뚱한 사람은 찾기 어렵죠."

    "근데 쟤들은 잘 먹나 봐. 덩치들 엄청 좋은데?"

    "…관리하겠죠."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화기로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웬만한 지역에만 있어도 깡패 국가 소리를 들을 만한 군사력이지만, 위로는 러시아와 중국이 버티고 있고, 아래로는 한국이, 옆으로는 미국이 있는 동아시아에서 북한 정도의 전력으로는 큰 목소리를 내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능력자 전력은 다르다.

    권력자들이 처음 능력자를 발견했을 때부터 은밀하게 준비해 오던 능력자의 전쟁 병기화는 이미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를 위시로 많은 국가들이 현재 능력자들을 앞세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민을 국가의 소유물쯤으로 생각하는 북한이 능력자들을 활용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마도 이전의 인민군보다 더 많은 관리를 받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저놈들이 그중 가장 난놈들이겠지.'

    대한민국 역시 이 사태에 NDF부터 투입하고 봤듯이 북한 역시 가장 믿을 수 있는 전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식으로 자체적으로 도발을 해오지는 못했을 테니.

    그게 아니라면 저 도발 역시 상부의 지시를 받은 계획적인 일이거나.

    어느 쪽이든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최정훈이 심호흡을 할 찰나에 건너편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쪽이 대가리네?"

    최정훈은 이지혁을 슬쩍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누굴 원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는 제가 해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원하시는 게 뭡니까?"

    "뭐 이유가 있갔어? 그냥 얼굴 한 번 보자는 거 아니겠네. 같이 일 치르는 사이끼리 얼굴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갔어?"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치고는 과격하게 부르시는군요."

    "사내새끼가 되어가지고서 깔짝깔짝 말로 불러 대고 하는 게 낯 뜨거운 일이라 그런 거 아니갔네. 이해하라우."

    "하하하……."

    최정훈은 어색하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NDF의 최정훈 부부장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엔? 엔 뭐? 뭐라고 씨부리는 거네. 한국말로 하라우. 동포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미제 앞잡이마냥 미국 말로 씨부려 쌌는 게 챙피하지도 않네?"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인민무력여단 리진철 대좌요. 남조선 동무들 만나서 반갑구만기래."

    최정훈은 가만히 리진철을 바라보았다.

    '거침이 없는데?'

    비공식이라고는 하나 남한과 북한이 만나는 자리는 언제나 부담스럽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리진철의 언행은 너무 거침이 없다.

    남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직된 사회인 북한에서 이런 식으로 거칠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의 충돌을 승인 받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말려들지 말자.'

    그렇다면 계산된 자리라는 것.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저쪽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고…….

    "그런데 자네 옆에 있는 동무는 뭐하는 동문데 말이 없네?"

    어이.

    안 돼.

    그쪽은 건드리는 거 아냐.

    큰일 나.

    * * *

    "동포끼리 만나는 자린데 에미나이처럼 입 다물고 뭐하는 기래? 남자가 그리 히매가리가 없어서 어따 쓰갔네."

    "나?"

    이지혁이 자신을 가리켰다.

    "말귀는 알아듣는 모양인데?"

    이지혁은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리진철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 웃었니?"

    "에헤이."

    최정훈이 손을 휘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이지혁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진정하시죠. 사고방식이 많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근데요……."

    "네."

    "쟤들은 왜 다 군복입고 있어요? 저거 군복 맞죠?"

    "아, 그게……."

    건너편에 자리한 이들은 하나같이 인민복을 입고 있었다.

    이지혁의 눈에는 그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북한 쪽은 능력자들이 따로 단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 왜요?"

    "아무래도 다들 조선노동당 휘하 단체니까요."

    "조선노동당?"

    이렇게 설명하다가는 북한의 설립 배경과 김일성의 탄생 설화까지 넘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직감한 최정훈이 이지혁을 달랬다.

    "여하튼 저쪽은 군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궁금한 건 많으시겠지만 지금 설명해 드리기가 여의치 않으니, 나중에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지금 궁금한데?"

    "제발."

    최정훈이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하자 마음 넓은 이지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예."

    최정훈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건너편에 북한 놈들이 있는데 아군이 더 무서운 이 상황을 세상 누가 이해해 줄 것인가.

    앞뒤로 문제여, 앞뒤로.

    최정훈이 몸을 돌려 북한군을 바라보았다.

    "일단 왜 불렀는지나 말씀해 주시죠."

    대좌라고 했다.

    이쪽으로 따지자면 대령의 지위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북한이라고 해서 대령의 자리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일 리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있는 사내는 대좌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젊어 보였다.

    이제 겨우 최정훈 정도나 될까?

    한국에서라면 대령이 아니라 대위에 더 어울리는 나이였다.

    그렇다면 고위직의 자식이거나, 아니면 정말 그 능력 하나로 초고속 진급을 한 케이스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말한 인민무력여단이라는 곳이 다른 곳과는 계급 체계가 조금 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정보부는 뭐하는 거야?'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인민무력여단이라는 곳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최정훈이 알고 있는 북한의 능력자 부서는 조선초능사단이다.

    새로운 단체와 새로운 인물의 등장.

    '좋지 않은데…….'

    물론 한국도 KSF가 있음에도 NDF를 만들었듯이 북한도 비슷한 케이스로 인민무력여단을 창설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확정된 정보 없이 짐작만으로 가정하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최정훈을 힘들게 만들었다.

    다 아는 상대라 해도 북한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운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대라니.

    "거, 이상한 소리 하고 있네. 내래 남조선 동무들과 말을 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대화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거, 동무. 정 없이 굴지 말라. 동포끼리 그러는 거 아임네."

    이 능글맞은 새끼가?

    최정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때,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뭐, 다 좋은데요."

    리진철의 시선이 이지혁에게 가 꽂혔다.

    "왜 남에 땅에 불질이에요?"

    "하하하."

    리진철이 유쾌하게 웃었다.

    "거, 시선 한 번 끌어보자고 한 짓이니,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

    "아니, 그러니까……."

    이지혁이 두 손을 불끈 쥐고 말했다.

    "어디, 우리 신성한 영토에 불질이냐고!"

    "…이지혁 씨."

    최정훈이 이지혁의 어깨를 잡고 작게 속삭였다.

    "쟤들은 그런 거 못 알아듣습니다."

    "응? 왜요?"

    "TV 없잖아요. 남한 사람들이 더 잘 알 겁니다."

    "아, 그렇구나."

    리진철의 눈치를 살피니 정말 몰라서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었다. 북한 놈이 친 드립을 남한 사람이 더 잘 알다니, 이게 아이러니지.

    이지혁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뒤로 빠졌다.

    "이상한 동무구만."

    이상하지.

    많이 이상하지.

    넌 다행인 줄 알아야 돼. 저 양반이 진짜 이상해지면 너희는 줄초상 난다.

    "다음부터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부르는 건 자제해 주시죠. 이쪽에서 그걸 도발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요."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네?"

    "보여 드립니까?"

    최정훈의 시선과 리진철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으…….'

    최정훈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직접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이놈들은 정말 살인 병기다.

    눈빛에서 살기라는 것을 느낀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인 줄만 알았는데, 이놈의 눈에서는 정말 그런 것이 느껴진다.

    살기라기보다는 적의?

    금방이라도 최정훈의 목을 따러 달려들 것만 같은 폭력성이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최정훈 혼자였다면 감히 이렇게 눈싸움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바로 옆에 이지혁이 있으니 겁날 게 없었다.

    리진철이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이지혁이 눈앞에 있는 다섯 놈쯤은 순식간에 박살 내버릴 것이다.

    "거, 말투는 여리여리해서 기집애 같은 양반이 강단이 있네. 다시 봤어."

    리진철이 먼저 시선을 거두면서 웃었다.

    이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버텨냈다는 느낌은 들었다.

    "크게 생각하고 한 일 아니니 이해하라우. 그렇다고 여기 와서 거기 말 좀 들어달라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갔어? 여기까지 와서니까 말하는 거지만, 우리도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 거니끼네, 속 좁게 굴지 말라."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일을 키울 생각은 없다. 다만, 그냥 넘어가서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럼 됐습니다. 이제 할 말은 다 하신 거지요?"

    "아니, 용건이 남았지."

    "용건이요?"

    최정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문이 곧 열릴 긴데, 어떻게 할 생각이네? 그냥 각자 오는 쪽 거만 막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갔어?"

    "그리 협의된 것 아닙니까?"

    "동무도 야전에서 구르는 사람이면 알지 않갔나? 이쪽으로 오는 놈을 막다 보면 그쪽으로 불도 튀고 물도 흐르고 그럴 건데, 그러다 누구 하나 맞기라도 하면 그건 어떻게 해결이 안 되지 않갔어?"

    "흠……."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문제가 있군요."

    "그러니 같이하는 건 어떻갔어? 이거 처리할 동안은 함께 움직이자 이거지."

    최정훈이 미묘한 눈으로 리진철을 바라보았다.

    이 사내가 지금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어렵지 않겠습니까?"

    "뭐가 어렵니? 같은 동포 아니네."

    "그럼 누가 지휘를 합니까?"

    "그거야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될 거 없지."

    "그러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은 누가 지구요?"

    "책임? 그런 거이 무서워서 못하겠다 이거네?"

    살살 긁어오는 것이, 노림수가 있어 보였다. 최정훈은 이 노림수에 휘말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지휘권은 그쪽이 가지라. 우린 필요 없으니. 그럼 되갔어?"

    최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서로 조심하는 걸로 하죠. 그쪽의 지휘권을 가질 생각도 없고,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거, 강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만. 알갔어. 각자 알아서 하는 걸로 하지. 후회하지 말라."

    최정훈은 저 멀리 사라지는 리철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뭔 생각이지?"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뭔 생각인지 몰라요?"

    "아십니까?"

    "빤한 거죠. 면피해 놓은 거죠."

    "네?"

    "가만 봐요. 아주 재밌어질 테니까."

    최정훈이 이지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건 내가 전문분야거든."

    이지혁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다른 상황이라면 최정훈이 이지혁에 비해 훨씬 비상한 시각을 가지고 있겠지만, 인간의 악의와 음모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이지혁보다 민감한 사람이 흔치 않을 것이다.

    천 년을 넘게 그런 환경에서 시달려 온 이지혁이 아닌가.

    이지혁은 돌아가는 북한군들을 보며 혀를 찼다.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는 법이다.

    어딘지도 모르고 다리를 뻗었다가는 발목 잘려 나가도 하소연 할 데도 없다는 걸 알아야지.

    정인수가 슬그머니 둘에게로 다가왔다.

    "저 새끼들도 참 실없네."

    최정훈이 말없이 째려보자 정인수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내 목숨이 아까운 게 아니라… 지휘관이잖아. 지휘관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네, 잘 배웠습니다."

    "거참,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네, 잘 배웠습니다."

    "크흐흠."

    정인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최정훈의 등을 두드렸다.

    "어쨌든 멋졌네. 강단 있었어. 그 이상한 요구에 휘말리지 않은 것도 좋았고."

    "감사합니다."

    "…미안하다, 그래. 소주 살게."

    "소고기."

    "벼룩의 간을 내먹어라! 니가 나보다 봉급 높은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소고기!"

    "에이, 개새끼."

    정인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능글맞아졌단 말인가.

    "그런데 진짜 저놈들… 무슨 생각이지?"

    "글쎄요."

    "수작질을 부리는 건 분명한데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인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생각이네만……."

    "아, 깜짝이야!"

    정인수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소리쳤다.

    "선배님, 아직 안 가셨습니까?"

    "갈 상황이나 됐나?"

    설인범이 조금은 어정쩡한 자세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북한 놈들이랑은……."

    "예."

    "얽히는 것 자체가 손해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절대 얽혀서 이득 볼 일이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특히나 너도 이제 슬슬 고위 장교라고 할 수 있는 몸이 아닌가. 그럼 이제 정치에도 신경을 써야 하네. 공격당할 거리를 만들어서는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예."

    그런데 안 가십니까?

    지휘권도 주신 분이 왜 자꾸 여기서 얼쩡얼쩡대시는지 거참.

    정인수는 등 뒤에 선생님이 서 있는 듯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 끝난 부장이 집에 안 가고 바둑 두면서 일하는 직원들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대대장님!"

    그때,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이트 열립니다!"

    "음?"

    과연 저쪽 끝에 있는 게이트부터 점차 완전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옹기종기 잘도 모여 있군."

    정인수는 긴장을 풀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여 댔다.

    북한과 인접해 있는 곳에서 작전을 시행한다는 것이 이제껏 느끼지 못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준비해!"

    "예."

    부관이 부리나케 임시 지휘소로 달리기 시작하자 정인수 역시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고 말했다.

    "가시죠."

    "네."

    이지혁 역시 정인수의 안내를 받아 지휘소를 향해 갔다.

    "어? 이지혁 씨를 데려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왜? 이지혁 씨도 있어야 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게이트가 많다 뿐이지, 5레벨급 같은데. 이런 일에 일일이 이지혁 씨가 다 나서면 나중에는 전국을 다 돌아야 할 건데? 일처리를 그리하면 안 되지."

    "그, 그렇죠."

    "그럼 잘해보라고."

    네?

    잠시만요, 정인수 대령님.

    지휘관은 그쪽이시잖아요.

    저기요?

    대령님?

    정인수는 이지혁과 농담을 나누며 지휘소를 향해 가버렸다.

    "하……."

    남겨진 최정훈은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양반도 갈수록 맛이 간다니까."

    최정훈이 거칠게 몸을 돌리고는 NDF를 바라보았다.

    * * *

    "준비됐어요?"

    "저 양반은 지금까지 노가리 까고 놀다가 이제 와서 우리보고 '준비됐냐' 그런다니까."

    대놓고 터져 나오는 박성찬의 불만에 최정훈이 헛기침을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런 모양이 된 것은 사실이니까.

    "냅 둬. 온종일 이지혁씨 만 찾다가 없으면 우리보고 해결하라고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거 일일이 섭섭해하다가는 일 못해요. 그냥 그러려니 하죠."

    어라?

    그런데 이상한 사람이 껴 있는데?

    서아영 씨?

    부장님?

    부장님이 왜 거기서 저를 까고 계십니까?

    제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데.

    이거, 원래 부장님이 해야 했던 일이라는 거 알고 계시죠?

    "부장님, 거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서아영이 최정훈의 시선을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자자, 북한 놈들도 보고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자구요."

    "예."

    뭐지?

    이 소외된 느낌은?

    지금 내가 제일 위험한 일을 하고 온 것 같은데…….

    어느새 변해 버린 NDF 요원들의 태도에 최정훈은 눈물을 훔쳐야 했다.

    '원래는 내가 가장 신뢰 받았던 것 같은데.'

    KSF 때는 전 지부를 통틀어 가장 믿을 만한 행정가로 이름을 날리던 최정훈인데, 어쩌다가 대접이 이리되었다는 말인가.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그저 이지혁과 함께 어울렸던 것뿐인데, 어느새부터 우리의 만남이…….

    아, 이게 아니고.

    여하튼 근묵자흑이라고, 이지혁과 함께 계속 놀다 보니 미묘하게 변한 그의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준 모양이었다.

    행정가로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최정훈은 통렬하게 반성을 했다.

    "저, 저는 그저……."

    "얼른 일하러 갑시다."

    "예, 부장님!"

    "하……."

    최정훈은 안타까움에 몸서리쳤다. 저기 있는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는 다 그의 편이었는데…….

    "거,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지휘 좀 하쇼."

    "아, 네."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오밀조밀하게도 모여 있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이 많은 게이트가 어떻게 동시에 열릴 수 있는 것인가 의심될 정도로 많은 게이트가 좁은 공간 안에 열려 있었다.

    일전에 비슷한 경우가 있었고, 이지혁이 해결해 버리지만 않았어도 이 현상 자체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일어났던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으니 납득할 수밖에.

    문제는 그런 것보다 왜 하필 이곳에 열렸는가이지만, 지금까지 휴전선 부근에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 되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운이 한 번에 터진 거지만.'

    "뭐해요!"

    "알겠습니다."

    최정훈이 빠르게 현장을 스캔했다.

    가장 먼저 열릴 게이트는 최남단!

    "전열 최후미 게이트 앞으로 바리게이트 쳐주십시오! 순식간에 몰아쳐서 뭐가 나오든 화력으로 녹여 버릴 테니까!"

    "누가 보면 자기가 화력 뽑는 줄 알겠네."

    "……."

    누구 목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아픈 곳을 찔러온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하필이면 여자의 것이라는 것도 최정훈을 슬프게 했다.

    어디서 많이 들은 목소리지만, 그는 모르는 목소리다.

    절대 모르는 목소리다.

    매일같이 들었던 목소리지만… 모를 거다!

    '부장니이이임!'

    저 아줌마가 요즘 노처녀가 되어가나?

    왜 이리 히스테리가 심하지?

    키득대는 NDF 요원들이 게이트 앞으로 달려갔다.

    * * *

    "흐음……."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새끼들아, 저쪽으로 지원하란 말이야! 다른 게이트는 내버려 두라고! 어차피 니들끼리 앞을 막아서 봤자 못 막잖아! 저기서 나오는 찌끄래기들이라도 제대로 틀어막으란 말이야!"

    "예!"

    정인수가 과격하게 지시를 내리고는 빙긋 웃으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그런 건 아닌데……."

    "예."

    "언제부터 저 양반들이 저리 잘났었나 하구요."

    "네?"

    정인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니, 지금 보는 게이트는 예전이었으면 덜덜 떨면서 도망 갈만한 게이트 같은데, 그게 지금 열 개 가까이 모여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낄낄대며 일한다는 게 좀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아……."

    정인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NDF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국방부와 나름 팽팽한 관계를 유지하던 NDF가 순식간에 주도권을 빼앗을 만큼 NDF의 위상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다.

    구성원의 실력도 이지혁의 등장 이후로 전 세계에서 내로라할 정도로 강해졌고, 조직으로서의 탄탄함도 과거 이상이다.

    "강해졌으니까요."

    "글쎄, 그게……."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분명히 수작질을 부릴 거니까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저러고 있네요. 왜 위기감이 없지? 이게 무슨 놀이터인 줄 아나?"

    이지혁이 화기애애한 NDF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매번 마왕을 잡으러 다니고, 좀비 드래곤이라든가 하는 거대 몬스터를 상대하다 보니 애들이 간이 배 밖에 나왔는지 저만한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데도 태연자약하다.

    '저러다 피 보지.'

    사고는 언제나 방심과 함께 찾아온다.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 싶은 상황에서는 져도 아슬아슬한 패배가 나오는 거지만, '이건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다'라고 생각했을 때는 '대첩'이 나오는 것이다.

    승부든 전쟁이든 토벌이든 반드시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는 전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 너무 피해 없이 이겨온데다가 치료사들이 있어 다치더라도 죽지만 않으면 회복된다는 마인드가 자리 잡혔는지, 하고 있는 짓거리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신교육이 필요하겠어.'

    예전에는 게이트만 보면 덜덜 떨던 것들이 이제 머리 좀 굵었다고 저러고 있는 꼴을 보니 배알이 뒤틀리고 몸이 절로 부들부들거린다.

    뭐, 물론 이지혁이 그런 꼴을 웃으며 넘겨줄 만큼 마음이 넓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객관적인 정도를 넘었다.

    "여하튼 안전 불감증이 문제라니까."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러다가 뒈진 놈들을 워낙에 많이 봐왔다. 그러니 NDF를 아끼는 이지혁이 어찌 그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극기정신으로 재무장을 할 때까지 굴리고 또 굴려서 참NDF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열립니다!"

    그때, 큰 목소리와 함께 최남단의 게이트가 붉은색으로 완전히 물들더니, 그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흠……."

    이지혁은 다리를 꼬며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이거, 꽤나 심각한 상황일지…….

    "음료 드릴까요?"

    "콜라 있나요?"

    "콜라 하나 가져와라!"

    심각한 상황이고 뭐고, 이지혁은 정인수가 참 좋았다.

    "헤헤."

    * * *

    "열립니다!"

    최정훈이 심각한 어조로 소리쳤다.

    "알아요!"

    서아영이 퉁명스레 최정훈의 말을 받았다.

    "아니, 거……."

    "우리도 눈 있거든요?"

    최정훈이 장난스레 받아치는 서아영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왜 이러지?'

    조금 이상한데?

    이전 작전까지는 이리 들뜬 분위기가 아니었다.

    매번 마왕들만 상대하다가 좀 만만하다 싶으니 이러는 건가?

    이유가 무엇이든 좋은…….

    최정훈이 허벅지를 꽉 움켜잡았다.

    '이지혁.'

    그러고 보니 한동안 이들이 모두 모였을 때는 언제나 이지혁이 선두에 섰다.

    강한 공격은 이지혁이 모두 받아냈고, 죽을 위기에 처하면 어디선가 바람과 같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해냈다.

    분명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이거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자.'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니까!

    "전열! 준비!"

    박성찬을 위시로 한 강화형 능력자들이 게이트 앞쪽으로 포진해서 인간 바리게이트를 쌓았다.

    시간이 충분하고 군 병력을 마음대로 투입할 수 있었다면 매뉴얼대로 강화 콘크리트로 바리게이트를 쳤겠지만, 비무장지대 안으로 덤프트럭을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능력자 위주로 편대를 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정훈 씨!"

    "네."

    "저 뒤에 저 총구들 너무 신경 쓰이는데?"

    최정훈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3사단과 방위사가 포위망을 넓게 짜고 있었다. 그들의 화망 안에는 확실히 NDF들도 들어간다.

    이전까지의 방식대로라면 화망과 능력자들이 교차되지 않도록 포진을 짰을 테지만, 지금은 그게 쉽지 않았다. 게이트가 워낙에 많아서 포진을 짜기도 어렵고, 지형 역시 도와주지 않았다.

    "발포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이쪽으로는 탄이 날아오지 않도록 할 테니, 저를 믿고 등 뒤는 잊어주세요."

    "알겠습니다."

    "나옵니다! 전열!"

    "예!"

    박성찬이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게이트가 열리며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저건 또 뭐야!"

    박성찬이 신음 소리를 냈다.

    게이트 안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이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기괴한 이형의 생물체, 반쯤 녹아내린 듯한 육체와 반쯤은 날카로운 듯한 형태가 뒤섞인,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검녹색의 육체가 바닥에서 뭉클뭉클대며 앞으로 돌진한다. 본능적인 혐오감이 박성찬의 몸을 강제로 움츠리게 만들었다.

    "으아, 나는 물컹거리는 건 질색이란 말이다!"

    신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눈앞의 괴물들을 보는 순간 뒷덜미부터 식은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 흐물거리는 형태가 힘만으로는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짐작케 한 것이다.

    "갈겨! 갈기라고!"

    박성찬의 외침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에서 형형색색의 에테르들이 날아들었다.

    콰앙!

    콰아아앙!

    폭음과 눈보라가 몰아친다. 괴물들이 에테르의 폭풍에 휘감겼다.

    최정훈이 소리를 질렀다.

    "전열에 도달하기 전에 더 퍼부어요! 부장님!"

    "알았어요!"

    서아영이 양손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오오오!

    순식간에 허공 위로 건물보다 더 클 것 같은 화염의 덩어리가 마구 소용돌이쳤다.

    "아……."

    뭔가 과거보다 화력이 진일보한 느낌.

    얼마 전이었다면 저만한 화력을 뿜어내기 위해서는 준비 시간이 상당했는데, 이제는 바로바로 뽑아내는 것이 서아영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갈겨요!"

    서아영은 대꾸도 없이 화염 덩어리를 게이트를 향해 날렸다.

    화르르르르륵!

    폭발이 아닌 폭염!

    네이팜이라도 떨어진 듯 끝없이 작렬하는 화염의 폭풍 앞에 괴물들의 육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다!'

    최정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처음 보는 몬스터가 두려운 것은 공략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몬스터마다 약점이 다르고 강점이 다르기에, 획일적인 방법으로 상대하다가는 피해가 커질 수 있었다. 다행히 이 몬스터는 그나마 화력적인 측면이 통하는…….

    "최정훈 씨 피해요!"

    "예?"

    최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측면에서 날아오는 시커먼 색의 에테르들이 마치 마귀처럼 흐물거리며 그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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