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7화 (57/118)
  • [■] 그게 대체 무슨 컨셉이여 [■]

    ─────

    "야, 행보관님 오늘 빡친 것 같던데?"

    "아까 내무반 정리 개판으로 해놨다고 되게 열 받으셨지 말입니다."

    "하여튼 깐깐하시다니까."

    박형석 병장은 짜증을 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더럽게 안 간다.

    이제 전역까지 불과 두 달이 남았을 뿐인데, 그 두 달이 이천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 말년에 이게 무슨 개짓이냐."

    "에이, 두 달이나 남으셨는데, 말년은 아니시지 말입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먹다 흘린 짬에도 너는 빠져 죽어."

    "그만큼 짬 흘렸으면 지금쯤 박 병장님이 살아 계셨겠습니까? 맞아 죽어도 벌써 맞아 죽었지."

    박형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 이 새끼 보게? 말년 아니라면서 은근슬쩍 엉긴다?"

    "반말년 하십시오. 반쯤은 말년이시니까. 이젠 내려놓을 건 좀 내려놓으시고, 완전히 말년은 아니시니까 아직 하실 건 하셔야지 말입니다."

    "뒈질래?"

    "에이, 뭐 그리 진지하게 나오시고 그러십니까."

    박형석은 깐죽대는 이병태 상병을 걷어차 버리려다가 참았다.

    초소 안에서 장난을 치다가 걸리면 단순히 욕을 먹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 입창이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집에 가는 날이 그만큼 늦어질 것이다.

    하루를 백 년처럼 보내고 있는 박형석에게 그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휴, 진짜 시간 안 간다."

    "그래도 두 달만 있으시면 집에 가시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병장도 못 달았는데."

    "이 새끼야, 니가 병장 다는 꼴을 안 보고 가는 게 내 유일한 위안이다. 아오, 그 꼴을 어케 보냐?"

    "잘하면 보고 가실 수도 있지 말입니다. 군 생활 조금만 늘리시면 되지 말입니다."

    "넌 일단 내무반 가면 바로 나한테 튀어 와라."

    "살려주시지 말입니다."

    박형석은 피식 웃으며 초소 밖을 바라보았다.

    이 지겨운 초소 임무에서 이렇게 노가리를 까는 맛이라도 없으면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근데 저 새끼들은 무슨 기분일까?"

    "북한 놈들 말입니까?"

    "야, 이 년 군 생활 하는 것도 진짜 토할 것 같은데, 쟤들을 얼마씩 한다고? 십 년?"

    "그쯤 된다고 들었지 말입니다."

    "와, 그럼 이십 대 초반에 와서 삼십 대에 나가는 거잖아? 총각이 아재 돼서 나가는 거네."

    "끔찍하지 말입니다."

    "조금만 더 위에서 태어났으면 우리도 그 꼴 났을 거 아냐. 이 나라에 태어난 걸 고마워해야 돼."

    이병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예전에는 도발도 엄청 심하고 초소끼리 총격전도 하고 했다던데 말입니다."

    "어, 그랬다더라."

    "게이트 열리면서 그런 일 싹 사라졌지 않습니까."

    "그렇지."

    "게이트가 남북 평화에 이바지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미친놈이 별소릴 다 하네."

    박형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블랙 먼데이 이후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던 북한의 도발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이트는 랜덤으로 아무 데나 열린다. 국력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나 중국, 미국이나 캐나다같이 국토가 넓은 나라들은 막중한 부담을 지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같이 국토가 작은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게이트에 대한 부담이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은 또 상황이 달랐다.

    얼마 열리지 않는 게이트도 북한에 있어서는 거대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아무래도 국력 자체가 차이 나다 보니 같은 수준의 게이트라 해도 한국과 북한이 느끼는 압박이 달랐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게이트가 출현한 이후로 북한의 도발은 거의 멈추다시피 했고, 게이트 덕분에 대북 관계는 역사상 다시없을 정도의 평화기를 맞고 있었다.

    "저 새끼들도 고생 좀 해……."

    말을 이으려던 이병태가 입을 닫았다.

    "왜?"

    "박 병장님."

    "말해, 새끼야."

    "저거 뭡니까?"

    "응?"

    박형석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이병태를 바라보았다.

    "저거 안 보이십니까?"

    "뭐?"

    이병태가 손을 들어 초소 앞쪽, 먼 곳을 가리켰다.

    "어?"

    이 초소만 벌써 몇 달째 지키고 있는 박형석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눈앞의 광경은 너무도 익숙했다. 그러나 그 익숙한 광경에 지금 익숙하지 않은 것이 끼어들어 있었다.

    아주 새파란 문.

    유리 같은 거대한 문이 그의 눈에 명확하게 보이고 있었다.

    "…씨발."

    박형석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그와 이병태의 눈이 동시에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분명 그들의 눈앞에 게이트가 생겨나고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이런……."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못해도 열 개는 넘는 게이트가 그의 눈을 가득 메웠다.

    "무전 쳐라."

    "…뭐라고 합니까?"

    박형석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뭐라고 하긴 뭐라고 해, 새끼야."

    이럴 때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좆 됐다고 해야지."

    * * *

    오식이는 위병소를 지키는 군인처럼 바짝 각을 잡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번에 새로이 그의 짝이 된 오순이가 함께 서 있었다.

    작은 애완견 크기로 변해 있는 둘이 그러고 있어봤자 위협적이기는커녕 귀여울 뿐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너무 귀엽다면서 사진을 찍어 댈 만큼 말이다.

    하지만 오식이는 자세를 풀 수 없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이래로 가장 큰 위기가 지금 그를 덮치고 있었다.

    끼이잉.

    오식이는 서글픈 울음소리를 냈다.

    그나마 그 정도는 되니까 그나마 울음소리라도 내는 거지, 지금 옆에 있는 오순이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끼이잉.

    오식이가 다시금 서글픈 울음소리를 냈다.

    이 세계에서 이지혁을 만난 것도 무척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나름 맞춰가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왕이 오다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마왕의 마기에 오식이의 털이 곤두섰다.

    오식이와 같은 마물에게 있어 마왕이란 절대적인 존재다.

    종속의 인이 찍혀 마왕에게 달려들기도 했지만, 그건 광포화가 되어 이성이 날아갔으니 가능한 일이고, 평소에 그들에게 있어서 마왕이란 저승사자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다.

    저승사자는 그냥 저승으로 끌고 갈 뿐이지만, 저 안에 있는 마왕은 그 죽음조차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끼이이잉.

    오식이의 고개가 축 처졌다.

    하고 많은 마왕 중에 하필 열세 번째 마왕이라니.

    열세 번째 마왕의 악명은 마계에서도 아주 자자했다.

    난다 긴다 하는 마물들도 열세 번째 마왕을 보면 오줌을 지리고 바닥을 기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집 안에 있고, 오식이는 그 집을 지키는 경비견인 것이다.

    오식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하…….

    그 험난한 마계에서도 혼자 힘으로 오거 로드의 지위까지 오른 오식이건만, 이 세상은 왜 이리도 그를 못살게 군단 말인가.

    끼이이잉.

    오식이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다시금 현관을 울렸다.

    "…너, 왜 그러니?"

    오식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정해민을 위시로 한 이들이 오식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통과시켜도 될까?

    오식이는 고민을 하다가 앞발을 들어서 인터폰을 가리켰다.

    "…안에 물어보라고?"

    끄덕.

    정해민은 개와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오식이가 개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생긴 것이 워낙에 개 같다 보니, 정말 개와 대화하고 있는 기분이 나는 것이다.

    "응, 그래."

    정해민은 두말없이 인터폰을 눌렀다.

    - 누구세요?

    "어머니, 저 해민이에요. 지혁이 직장 동료들이랑 같이 왔어요."

    - 음, 그래. 들어오렴.

    찌잉.

    현관문이 열린다.

    "흐음."

    정해민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등 뒤로 최정훈과 서아영을 위시로 한 정예 NDF의 멤버들이 보였다.

    정해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왕.

    에르카나가 이 집에 들어온 지 어언 삼 일째.

    그동안 출근을 하고 있지 않은 이지혁과 에르카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본인들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들어가죠."

    최정훈이 선뜻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 정해민을 재촉했다.

    "네."

    정해민은 이윽고 결연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사태를 파악하고는 반쯤 넋을 놓아버린 정해민이지만, 이젠 정리가 끝났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한 번 뒤집어엎고 나서야 물러서더라도 물러서는 것이다.

    "갑니다."

    정해민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

    그러나 집 안으로 들어간 정해민은 이상한 광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집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게임을 하고 있거나 바닥에 퍼질러져 누워서 과자를 폭풍흡입하던 이지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이지혁은 상태가 좀 이상했다.

    퀭한 몰골의 이지혁이 마치 정신병자처럼 소파에 무릎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지혁아?"

    눈 밑에 다크 서클이 가득한 이지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꼬, 꼬맹이……."

    "누가 꼬맹이야!"

    발끈하긴 했지만, 단 삼 일 만에 수척해진 이지혁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너 왜 그래?"

    "사, 살려줘."

    "응?"

    "이러다가 내가 먼저 돌아버리겠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이지혁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지혁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아……."

    정해민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그녀의 눈에 주방이 들어왔다. 넓은 집답게 요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넓은 주방에서 박선덕과 에르카나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건 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박선덕이 주방에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 안에 있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고, 에르카나가 아무리 마왕이라고는 하나 요리 정도야 할 수도 있는 법이지.

    마왕이라고 뭐, 꼭 피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나 뜯어먹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광경이 뭔가 좀 이상했다.

    "엄허니, 다 구워씁니다."

    "어머, 우리 에르카나가 생선을 참 잘 구웠구나. 노릇노릇하게."

    "엄허니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게 어디 시킨다고 시키는 대로 되는 일이니? 자기 센스가 있어야지. 어쩌면 이렇게 일을 잘할까."

    "헤헤, 엄허니가 잘 가르쳐 주셔서 그런 겁니다. 에르카나 열심히 합니다. 에르카나 엄허니 말 잘 듣습니다."

    정해민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저게 뭐냐.

    저게 대체 뭐냔 말이다!

    마왕님!

    당신은 이 세계로 오신 세 번째 마왕이십니다.

    아무리 신분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체통은 지켜주셔야지요!

    이게 무슨 베트남 처녀 요리 배우는 광경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대화란 말인가!

    정해민이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허탈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고생하네."

    "큽."

    이지혁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오열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정해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판이다.

    여긴 진짜 개판이야.

    * * *

    "쟤 왜 저러는 건데?"

    이지혁은 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대답했다.

    "몰라……."

    "지금 요리 배우고 있는 거 맞아?"

    "응."

    무서운 년.

    정해민은 이제는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녀 역시 박선덕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이지혁을 두고 벌어지고 있던 이 은밀한 경쟁의 키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멍청하게 이지혁에게 공을 들일 때, 그녀만은 박선덕에게 공을 들이지 않았던가.

    '안일했어.'

    저 적극적인 모습을 보라.

    첫 만남부터 고가의 한정판 백을 내밀어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더니, 다문화 며느리 기믹으로 동정심을 유발하고, 이제는 요리까지 배우면서 이쁜 척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엄허니, 이거 마시써요."

    "맛있어? 입맛에 맞으니 다행이네."

    저저저…….

    저 가증스러운!

    정해민의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반응을 보아, 저년은 지금 저 모든 것을 계산해서 하는 것이 틀림없다.

    애초에 이 세계에 넘어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는데 그 시간 동안 가방을 챙기고 책을 읽으면서 체계적으로 어머니를 공략할 전략을 수립해서 온 것이다.

    두려운 마왕.

    보통의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저리 태연자약하게 저지르는구나.

    "에르카나는 참 빨리 배우는구나."

    "엄허니가 잘 가르쳐 주셔서 그런 겁니다. 에르카나는 열심히 배웁니다. 지혁 씨가 엄허니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 그랬습니다."

    "…에이, 아니야. 제 엄마 밥이니 그러는 거지."

    어머니?

    그 입가에 맺힌 푸근한 미소는 뭐지요?

    심지어 지혁이 볼 때도 그렇게 웃으신 적은 없잖아요?

    "어머니?"

    "응?"

    박선덕이 고개를 돌려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아, 응. 해민이 왔니?"

    쿵!

    정해민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박선덕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지금까지는 도무지 장가라고는 제대로 가지 못할 것 같은 아들내미를 구원해 줄, 귀엽고 착한 며느리 후보를 보는 눈이었는데, 이제는 아들내미 옆에 붙어 있는 여자아이 정도를 보는 눈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기감!

    급박한 위기감이 그녀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설마 저 간악한 것이 이 짧은 시간 만에 어머니의 마음을 저토록 완벽하게 사로잡아 버릴 줄이야.

    "어, 어머니!"

    "응, 앉아. 우리 아가가 요리를 했는데, 마침 잘 왔다. 좀 먹어보거라."

    "누, 누가 아간가요?"

    "어머, 내 정신 좀 보게. 우리 에르카나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야. 호호호호."

    휘청.

    정해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이럴 수가.

    믿었던 박선덕마저 넘어가디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지, 지혁아, 어떻게 좀 해봐."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나라고 저항 안 해봤을까 봐? 늦었어."

    "야, 이!"

    그럼 이제 이 꼴을 순순히 보고 인정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녀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꼴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왕."

    도가윤이 낮게 속삭였다.

    "응?"

    "퇴치한다!"

    우득.

    도가윤이 주먹을 꽉 쥐자 정해민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안 돼, 가윤아! 여기서 사고 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마왕. 사람들을 속임! 죽여야 평화가 찾아옴."

    "그 말에는 백프로 동의한다마는……."

    현실적으로 저 마왕을 우리끼리 퇴치하기도 어렵고, 퇴치한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역효과라고.

    "사고 치면 죽여 버린다고 했어!"

    서아영이 눈을 부라리자 도가윤이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서아영의 말에는 고분고분한 도가윤답게 더 이상 어떤 행동을 보이려 하지는 않았다.

    서아영은 도가윤을 진정시키고는 아직도 부들대고 있는 정해민을 눈빛으로 눌렀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따라오기를 잘했다.

    정해민 등만 보내놓았다면 서울 멸망 시나리오에 가속도가 붙었을 것이다. 그 꼴을 절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들 많이 오셨네?"

    박선덕 여사가 거실을 가득 채운 인원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많이 찾아오는 건가.

    "또 무슨 일이 났나요?"

    그 무슨 일이 지금 어머니의 곁에 있습니다.

    어머니, 이쪽을 보실 게 아니라 그쪽을 보셔야죠. 지금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무서운 재앙이 어머니의 옆에 있습니다.

    그 재앙에 비하면 전쟁쯤은 애교죠, 애교.

    "벼, 별일 아닙니다."

    하지만 당사자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마음만 먹으면 서울 정도는 순식간에 날려 버릴 수 있는 폭탄이 바로 옆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까?

    다정한 얼굴로 에르카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박선덕을 보니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끄으응."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엄허니."

    "응?"

    "고기 타요."

    "어머, 내 정신 좀 보게. 보렴, 에르카나야. 여기에서는 간장보다는……."

    "네, 엄허니."

    에르카나가 박선덕의 옆에 찰싹 붙어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다가 이지혁의 옆에 가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여요?"

    "집들이는 언제쯤?"

    "…죽일 거야."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지혁이 이리 핀치에 몰린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살아생전 기대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무력이 아니라 입장으로 이지혁이 당할 날이 올 줄이야.

    "그런 것 아니라고 설명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안 된대요."

    "응?"

    "이혼은 안 된대……."

    "아……."

    그, 뭐, 전형적인 반응이기는 하지.

    "저렇게 이쁘고 귀엽고 싹싹한 애와 이혼을 한다니, 니가 요즘 좀 편해지더니 뇌에 헛바람이 들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뭐라 하셨습니까?"

    "뇌에 바람 들어가면 죽는다고 했죠."

    "……."

    그러니까 니가 안 되는 거지.

    거기서 왜 개드립을 치냐고, 이 미친놈아!

    "그래서요?"

    이지혁은 말없이 입고 있는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그의 등에 핀, 울긋불긋한 단풍을 보고 있자니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이제 곧 봄인데…….

    "힘내요."

    "하……."

    이지혁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이지혁 씨도 몸이 엄청 단단하시지 않나요? 저번에 보니까 건물에 틀어박혔을 때도 툭툭 털고 나오셨던 거 같은데?"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등짝이 이렇게……."

    이지혁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네."

    "울 엄마 측정 좀 해줘 봐요."

    "……."

    "아무리 봐도 우리 엄마 각성한 것 같은데, 측정을 안 하다 보니까 다들 모르는 것 같아."

    최정훈의 뇌리에 KSF에 출근하는 박선덕의 모습이 떠올랐다.

    능력자로 분류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대게이트 임무에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지혁의 엄마가 그런 위험에 처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니가 잘도 그 꼴을 보고 있겠다.'

    고래고래 날뛰면서 대통령이고 뭐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불을 뿜을 이지혁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에르카나가 등장하기 전에 이지혁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박선덕이었으니,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과거 박선덕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 싫어하던 NDF에 제 발로 들어온 이지혁이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 왜요!"

    "몰라서 묻는 것 맞으시죠?"

    "그럼 아는데 묻나?"

    "에휴……."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리 말을 돌려놔서 박선덕은 절대로 에테르 수치 측정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 능력자로 분류된 이를 투입하지 않는 것은 법에 저촉되지만, 능력자로 분류만 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일반인으로 살 수 있을 테니까.

    세계의 평화와 대한민국의 안정을 위해서도 그게 좋았다.

    박선덕이 괜히 능력자로 투입되었다가 생채기만 한 상처라도 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 빌어먹을 마마보이 자식.

    "어쩌겠습니까. 괜히 귀찮은 일 벌어지 마시고……."

    "그럼……."

    이지혁이 최정훈의 손을 꼬옥 잡았다.

    "울 엄마한테 자기 힘이 어떤 건지라도 설명 좀 해주세요. 아직도 자기가 일반인인 줄 알고 풀스윙한단 말이에요."

    그건 좀 무서운데?

    최정훈이 몸을 살짝 떨었다.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십니까?"

    "우리 엄마는 나를 빼면 평생 폭력이란 걸 써본 적이 없으신 분이세요."

    "그럼 뭐, 괜찮겠네요."

    "……."

    절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지혁의 눈빛을 최정훈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솔직히 니가 그거 맞는다고 죽지는 않잖아.

    미국에 있는 치료사 애들 불러다가 쓰든지.

    "끄응."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르카나가 집으로 오더니, 그래도 암묵적으로나마 그의 편을 들어주던 박선덕마저 돌아섰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지구로 돌아온 게 아닌데.

    어떻게 날이 갈수록 더 슬퍼져 가나?

    "장을 본다고?"

    "에르카나, 장 봅니다. 엄허니가 없어도 지혁 씨 밥을 차려야 합니다. 남편 밥 굶기면 나쁜 마누라라고 했습니다."

    "어머, 어쩜 착하기도 하지."

    박선덕이 에르카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쩜 이리 이쁜데 마음까지 고울까? 어디서 이런 천사가 왔지?"

    엄마, 그거 마왕이야!

    악마라고!

    마족이란 말이야!

    천사가 있었으면 걔들 지금쯤 다 억울해서 피 토했겠다!

    아, 이게 바로 인간을 현혹하는 악마의 방식이구나.

    두려운 것들!

    "그런데 에르카나야."

    "예, 엄허니."

    "남편을 챙기는 것도 좋지만 손님을 챙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란다. 지금 손님이 와 있으니 장은 한 사람이 가서 보는 게 맞을 것 같구나."

    "으음, 그럼 에르카나가 갑니다. 엄허니는 쉽니다. 에르카나가 다리가 더 튼튼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금방 갔다올 테니, 손님들 좀 대접하고 있거라. 알겠지?"

    "에르카나,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에르카나는 엄허니 말 잘 듣습니다. 손님 대접 제가 합니다."

    "그래그래, 금방 다녀올게."

    박선덕이 에르카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지혁아."

    "응?"

    "애 괴롭히지 말고."

    이지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괴롭혀?

    누가 누구를?

    내가 쟤를?

    대체 3일 동안 뭘 본 거야! 대체!

    "엄마, 내가 괴롭히는……."

    "됐고! 엄마 말 명심해!"

    "…눼."

    박선덕은 찬바람을 날리며 뒤로 돌아섰다.

    텅!

    현관이 큰 소리로 닫히자 이지혁이 절망 어린 눈으로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호호호홋."

    에르카나가 고혹적인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지혁을 향해 사뿐사뿐 뛰어가 그의 품에 다이빙을 하듯 안겼다.

    "달링, 나 잘했어?"

    "휴우우우우."

    최정훈은 눈을 비볐다.

    방금 이지혁이 한숨을 쉬는데 입에서 희끗한 것이 빠져나오는 걸 본 것 같은데?

    설마 영혼은 아니겠지?

    "어머니가 날 너무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은데?"

    "…어머니구나. 엄허니가 아니라 어머니."

    "에이, 컨셉이지. 내가 너무 똑 부러지면 날 부담스러워하실 것 아냐. 내가 얼마나 연구했는데."

    "독한 것."

    이지혁이 얼굴을 감쌌다.

    이래서 악마라고 하는구나. 사람을 얼마나 잘 속여 먹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컨셉이여?"

    "베트남 며느리."

    "…책으로 배웠나?"

    "TV에서도 많이 나오던데?"

    "너 한국 TV도 봤나?"

    "일단은 연구할 수 있는 건 모두 연구해야지. 그래야 사랑 받는 며느리가 되지 않겠어?"

    "…너 잘났다."

    너무 잘났네!

    너무!

    * * *

    이지혁은 서글픈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다 업보지, 업보.

    애초에 악마와 계약을 맺은 인간의 결말이란 빤한 것이다. 영혼이 아예 없어서 영혼을 지킬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결론만 보자면 차라리 영혼이 날아가는 편이 나을 뻔했다.

    그럼 이 악마가 집에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끄으응."

    어머니가 나가자마자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에르카나를 보며 이지혁은 연신 한숨을 내뿜었다.

    "땅 꺼지겠다."

    "차라리 땅이라도 꺼졌으면 좋겠다."

    정해민은 이지혁을 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이거, 진짜 얄미워서 저 볼따구를 잡아서 부산까지 늘려 버리고 싶기는 한데, 얼굴이 퀭하다 못해 해골처럼 보이니 불쌍하기는 하고…….

    "휴……."

    정해민 역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가.

    "그런데……."

    에르카나가 고개를 돌려 최정훈들을 보고는 뚱하게 물었다.

    "너흰 뭐지? 남의 신혼집에 함부로 들락거리는 거 아니라는 거 못 들었니?"

    "여기가 왜 신혼집이야!"

    이지혁이 발끈해서 일어나려고 하자 에르카나가 위에 올라타서 몸을 꾹 누르고는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어머니한테 인정받고 새로 시작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신혼이지!"

    "…황혼 이혼이라고 들어봤니?"

    "모르겠는거얼?"

    "끙."

    이지혁은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말은 통하는 사람에게나 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에게는 이지혁의 가장 강한 무기인 이빨도 전혀 쓸모가 없었다.

    "너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 강경하게 나가란 말이야, 강경하게!"

    에르카나가 고개를 돌려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흐음? 뭐, 불만이라도?"

    "아니요."

    정해민은 찬바람이 나도록 고개를 쌩하니 돌렸다.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는 도가윤도 뭔가 미묘한 시선으로 에르카나를 응시하고 있고, 저기 문 쪽에서 기웃대고 있는 김다솜은 아예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으으응?"

    그녀들의 기색을 살핀 에르카나가 피식 웃었다.

    "그렇구나. 여기 내 편은 없는 거네?"

    니가 마왕인데, 여기 니 편이 어딨냐!

    다 사람인데, 당연히 적이지!

    "뭐, 상관없어."

    에르카나가 손을 뻗어 이지혁의 목을 감쌌다.

    "나야 우리 달링만 있으면 되니까."

    "이익!"

    정해민이 막 폭발하려는 찰나에 최정훈의 폰이 마구 울렸다.

    RRRRRR.

    "아악! 남의 집에서는 진동으로 하라구요."

    "죄, 죄송합니다."

    뜬금없이 욕을 퍼먹은 최정훈이 눈물을 삼키며 전화기를 들었다. 왜 다른 데서 뺨맞고 와서 자신에게 화풀이인가.

    그가 무슨 샌드백도 아니고.

    최정훈은 조용히 구석으로 가서 휴대폰을 받았다.

    죄가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세상에는 죄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눈치가 있고 없고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최정훈입니다."

    전화를 받는 최정훈의 눈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싸한 분위기를 느낀 다른 이들도 모두 입을 닫고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예, 알겠습니다. 바로 그쪽으로 갈 테니, 상황을 계속 주시해 주십시오."

    최정훈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게이트 출현입니다."

    "난 또 뭐라고."

    "그런데 상황이 좀 심각합니다."

    무슨 일이기에 심각하냐고 물으려던 정해민은 갑자기 옆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니, 그런데 명색이 내가 부장인데 그런 연락은 왜 최정훈 씨한테 가는 거예요! 체계가 왜 이래?"

    최정훈은 서아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서아영은 그 시선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느꼈다.

    "…왜?"

    그럼 평소에 전화라도 잘 받든가.

    그게 아니면 전화를 받았을 때 제대로 응대라도 하든가.

    너한테 전화를 걸었다가 짜증만 잔뜩 생기고 나한테 다시 걸려온 케이스가 쌓이고 쌓여서 여기까지 온 건데…….

    원래 니가 해야 할 업무까지 내가 다 하고 있는 건데, 지금 뭐라고?

    "아, 알았으니 그만해요."

    "딱히 뭐라 말한 건 없습니다만."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고."

    "독심술 쪽으로 능력이 개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일단 사무실로 가시죠. 아무래도 출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정훈이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이지혁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턱짓으로 에르카나를 가리켰다.

    나도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여기 매달려 있는 이걸 어떻게든 치워보라는 뜻이었다.

    "저, 에르카나 님?"

    "으응?"

    에르카나가 고혹적인 눈으로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아……."

    최정훈이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대비는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은 모양이었다.

    쫘아아악!

    "끅."

    최정훈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으으으."

    아프다.

    이건 너무 아프다!

    이지혁이 그에게 어머니를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등짝이란 게 이렇게 아픈 거였나?

    눈물 맺힌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서아영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혹될까 봐서요. 최정훈 씨는 중요한 사람이니까."

    진짜 그런 거지?

    감정 실린 거 아니지?

    감정이 안 실리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찰진 타격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무슨 배구 선순 줄 알았네.

    능력자들이 스포츠 종목에 출전할 수 있었다면 쟤는 여자 배구 대표팀 에이스가 될 만큼 출중한 자질이 있을 텐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최정훈이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에르카나 씨."

    "응?"

    "저희는 이지혁 씨와 함께 게이트 현장에 출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 돼."

    에르카나는 깔끔하게 최정훈의 요청을 무시했다.

    "…가야 하는데요."

    "게이트라고?"

    "네."

    에르카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딴 저급한 몬스터들이 나오는 게이트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지금 달링의 소중한 마나와 체력을 낭비하라고 하는 거야? 너희가 무능한 것은 잘 알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 달링이 그런 벌레 같은 것들과 상대하게 둘 순 없지. 격 떨어지게."

    "뭐가 나올지는 아직 모릅니다만?"

    "뭐가 나오든 똑같아."

    "…센 몬스터도 나옵니다."

    "하?"

    에르카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몬스터 따위를 지금 우리 달링과 비교하는 거야? 아펠."

    "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펠드리체가 살짝 시립했다.

    "넌 대체 뭘 했지? 우리 달링이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야? 몬스터나 잡으러 다니고?"

    "…본인이 원하셨기에."

    "그 본인이 원하는 걸 잘 조율해서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게 내조 아냐?"

    아펠드리체가 입을 살짝 벌리며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왜?"

    "아뇨, 너무 상식적인 말이라서."

    "혼난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에르카나는 확정적으로 입을 떼었다.

    "나는 우리 달링이 그런 데서 힘을 낭비하는 꼴을 못 봐. 너희끼리 알아서 하든지 해."

    "근데 왜 그걸 니가?"

    이지혁의 물음에 에르카나가 배시시 웃었다.

    "우리 달링은 너무 착해서 남들이 좀 해달라고 하면 마지못해서 다 해주고 마니까 안 돼."

    최정훈이 귀를 팠다.

    뭘 잘못 들었나?

    누가 착하다고?

    "에르카나 씨, 저희는 이지혁 씨가 꼭 필요합니다."

    "그건 너희 사정이고, 우린 관심 없거든?"

    "이 게이트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곳까지 피해가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때 해결하면 그만이지. 안 그래?"

    "그사이에 피해가 클 텐데요?"

    에르카나가 꺌꺌대며 웃었다.

    "벌레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인간의 일은 인간이 해결하면 그만이야. 잊지 마. 나는 마왕이다. 나에게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바라지는 말아야지. 안 그래?"

    '정론이로군.'

    하기야 마왕에게 인간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응?"

    "그거 조금 도와준다고 체력이 상할 만큼 이지혁 씨가 나약하지는 않을 텐데요?"

    '오?'

    서아영은 감탄한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최정훈!

    부탁으로 안 되니까 이지혁에게 집착하는 에르카나의 자존심을 슬슬 건드리고 있었다.

    여기서 힘들다고 해버리면 이지혁은 에르카나가 벌레 같다고 말한 몬스터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하는 약골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안 돼."

    하지만 에르카나는 단호했다.

    "우리 달링 체력은 거기 말고도 쓸데가 많아."

    어디에?

    설마?

    최정훈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에르카나는 서큐버스 퀸이고…….

    이 집에 산 지가 삼 일째고…….

    이상하게도 이지혁은 해골 같은 몰골이 되어 있고…….

    "아……."

    최정훈이 알았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그건 생각을 못했네요."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정해민이 부들부들대며 소리를 질렀다.

    원독에 찬 그녀가 에르카나를 찢어 죽일 듯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응? 무슨 짓?"

    "애, 애를 저 꼴로 만들어놓다니!"

    "흐응?"

    에르카나가 그 순간 깔깔 웃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것들은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네."

    에르카나의 비웃음에 정해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자의 질투는 정말 재미있다니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지금 나는 우리 달링과 재미있는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왜요?"

    쫘악!

    최정훈이 눈치 없이 물어보자 서아영이 바로 단죄를 했다.

    하지만 에르카나는 친절히 대답을 해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우리 달링을 죽일 수는 없잖아. 지금 달링은 날 감당할 수가 없거든. 말라 죽는 걸 볼 수는 없으니 참아야지. 아쉽지만 말이야……."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으면서 이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지혁은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의 달링은 진짜 멋졌지. 내 남편 자격이 있었어. 지금은 좀 비실해졌지만, 그런 남편을 다시 잘 나가게 만드는 게 아내로서 할 일 아니겠어?"

    "…그냥 좀 냅 둬."

    "호호, 역시 우리 달링. 농담도 잘한다니까."

    정해민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최정훈은 때를 놓치지 않고 두 번째 카드를 꺼냈다.

    "그럼 말입니다, 에르카나 씨."

    "으응?"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뭘?"

    "이지혁 씨가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 말입니다. 보기 힘든 광경일 텐데요."

    "흐으음?"

    흔들린다.

    최정훈은 고삐를 바짝 죄었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최정훈이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내조라고 하셨는데, 이지혁 씨가 직장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알아두는 것도 내조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서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니까요."

    "으으으으음."

    어머니란 말이 나오자 에르카나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엿다.

    장하다, 최정훈. 결국은 해내는구나.

    "좋아, 보내주지. 대신 나도 같이 갈 거야. 우리 달링이 어떻게 일하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봐주지."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이지혁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 의견은 이제 듣지도 않는 거냐?"

    이놈들아.

    이 나쁜 놈들아.

    크흑.

    * * *

    "시간이 아까우니 일단 바로 사무실로 가시죠."

    이지혁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정훈은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게이트 좀 열어주시죠."

    빤히 바라보자 최정훈이 왜 그러냐는 듯 되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앓느니 죽지.

    이지혁은 두말없이 NDF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감사."

    최정훈이 선두에서 게이트로 들어갔다. 다른 이들이 차곡차곡 게이트로 들어가고 나자 이제는 이지혁과 에르카나, 그리고 정해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 가?"

    "가야지."

    이지혁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에르카나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머? 달링, 이대로 가버리면 어머니가 돌아오셔서 놀라실 거야."

    "별걱정을 다 하네."

    "그런 걸 챙기는 게 며느리가 해야 할 일이지. 외부인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겠지만, 난 이 집 며느리잖아. 잠시 마트 가셨는데 돌아와 보니 다들 사라져 있으면 어머니가 기분이 얼마나 안 좋으시겠어? 안 그래?"

    정해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확실히 생각하지 못했다.

    마왕이고 인간이고 부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기본적인 마인드 차이에서 졌다는 사실이 정해민이 변명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

    "그냥 전화하면 되는 걸 뭐 별거라고."

    "전화?"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이래서 무식한 마왕은 안 된다니까. 아무리 세고 강하면 무엇하는가, 현대에 적응을 못하는데.

    "아냐, 달링. 내가 톡할게."

    "으으응?"

    지금 잘못 들었나? 뭐라고?

    "괜히 장 보시는데 전화 가고 그러면 불편하실 거야. 내가 톡 보내놓을 테니, 그냥 가자."

    "……."

    뭘까…….

    이 패배한 기분은?

    나도 톡은 잘 안 하는데, 저건 이쪽 세계에 온 지 얼마 됐다고 벌써 톡을 하지?

    아니, 그전에 휴대폰은 어디서 났고, 우리 엄마랑 번호 교환은 언제 했지?

    "무슨 생존왕이세요? 적응력이 왜 그래?"

    "흐응? 우린 원래 다른 차원으로 가서 다른 이들의 혼을 빨아먹고 사는 존재들인데? 타 차원에 적응하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듣고 보니?"

    그러고 보니 이지혁이 에르카나를 처음 소환했을 때도 베라프에 몇 천 년 만에 왔다고 들었는데, 바로 자기 집인 것처럼 드러누워서 할 건 다 했지.

    이지혁이 베라프에 처음 떨어졌을 때는 패닉으로 두세 달 동안 사람 구실도 못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해민이 저벅저벅 걸어와서 이지혁의 손을 잡았다.

    "일단 그럼 넘어가자. 알아서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응?"

    스슷.

    그 순간, 정해민이 이지혁을 데리고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자 홀로 남겨진 에르카나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흐음, 귀엽게 노는데?"

    그녀는 서큐버스.

    다른 여자들의 반응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에로스에는 민감한 그녀였으니까.

    "우리 달링은 인기도 많다니까?"

    싱긋 웃은 그녀의 몸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 * *

    "오셨습니까?"

    최정훈이 회의실에 앉아 이지혁을 맞이했다.

    "뭔가 분위기가 급박한데?"

    "상황이 좀 심각합니다."

    "뭐가요? 게이트 처음 나온 것도 아니고."

    "음……."

    최정훈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고는 비전을 가리켰다.

    "직접 보시죠."

    최정훈이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지도나 나와 있고, 그 주변으로 게이트가 표시되어 있었다.

    "하나, 둘, 셋… 음, 좀 많긴 하네요. 근데 저기, 산지 아니에요? 저기면 그냥 폭격으로 날려 버려도 될 것 같은데?"

    "평소라면 그렇게 했겠죠. 그런데 저기 선 보이십니까?"

    "응?"

    최정훈이 가리킨 곳.

    지도 한가운데에 지형을 가르고 지나가는 붉은 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네."

    "저게 휴전선입니다."

    "…넹?"

    "지금 게이트가 나타난 곳은 보통은 DMZ라 부르는 비무장지대이고, 게이트는 휴전선을 기점으로 이남과 이북에 모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

    이지혁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절묘한 자리에 나타났네요? 그런데 이전까지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나요?"

    "운 좋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이런 경우가 생긴 거죠."

    박성찬이 지도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하필 생겨도 저런 곳에 생긴단 말인가.

    "골치 아프네."

    김다현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래서 어쩌기로 했답니까?"

    "글쎄요. 그게 워낙 얽혀놔서."

    "네?"

    "일단은 이게 국방부 소관이기도 하고, 저희 소관이기도 한데… 어느 쪽 소관이든 서로가 얽혀드는 모양새라서 상황을 정리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예전 같으면 대통령께서 정리를 하셨겠지만, 요즘은 대통령께서도 건강이 영 좋지 않다는 말이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쏠렸다.

    "…뭐?"

    이지혁은 당당하게 그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뭐? 왜?"

    "아닙니다."

    할 말은 많지만, 이지혁의 앞에 두고 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화병이지."

    "응, 아마도."

    "화병이시겠지."

    그 꼴을 당했으니.

    평범한 사람도 그런 꼴을 당하면 속이 뒤집어질 텐데 한 나라의 대통령쯤 되는 사람이 그런 꼴을 당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화병은 기본으로 오겠지.

    "뭐?"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딱히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이지혁과 얽히면 그 정도 스트레스야 다들 기본으로 가지고 가는 거고, 그나마 대통령은 한 번 보고 그만이었으니 차라리 나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지금도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뭐 어쩌자고?"

    저 봐.

    저러고 있다니까.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다 어디로 들었단 말인가.

    "상황이 정리되어야 어떻게 움직일지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럼 왜 급하다고 불렀어요?"

    "……."

    가끔 예리하다니까?

    자기 이득이나 쉴 시간에 관련된 일에서는 철두철미하다는 것이 이지혁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일단은 대기를 타고 있어야 바로 출동할 수 있으니까요."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출동?"

    이지혁의 눈이 지도를 향했다.

    여긴 비무장지대다. 쉽게 말하자면, 민간인이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다. 그런데 여기에 굳이 능력자를 투입해서 격전을 벌이겠다고?

    "여기 가서 몬스터랑 싸우라구요?"

    "그렇습니다."

    "지뢰는?"

    "……."

    "내 발목 날아가면 대한민국도 같이 날아가는 거여."

    다른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했을 텐데, 얘가 하니 왜 이리 살벌하냐?

    "자기, 발목 날아가?"

    그 순간, 이지혁의 등 뒤에서 에르카나가 슬며시 기어 나왔다.

    "왜?"

    에르카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헐."

    최정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해도 마왕급의 존재가 눈앞에서 기분 나쁜 티를 내자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지뢰 때문에."

    "지뢰?"

    "바닥에서 터지는 마법 같은 거여."

    "날아가면 되잖아?"

    "…그렇지."

    얘는 쓸데없는 데는 눈치가 빠삭하면서 이럴 때는 꼭 눈치가 없더라.

    "흐으음."

    이지혁이 애매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그렇죠. 게다가 아직 정해진 건 없으니까요."

    최정훈이 옳다구나 상황을 정리했다.

    이지혁이 살짝 노려보았지만, 최정훈은 실실 웃으며 그 눈길을 받았다.

    하, 저 인간…….

    언제부터 저리 뻔뻔해진 거지?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그러고 보면 능력자들은 그냥 능력이나 좀 늘어난 거지, 따져 보면 최정훈이 가장 확실하게 업그레이드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지혁이었다.

    "뭐가 문제래요?"

    "잠시만요."

    최정훈이 휴대폰을 꺼내 몇 가지를 클릭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은 DMZ를 폭격할 수가 없다는 거랍니다."

    "왜요?"

    "군사분계선에 폭격을 가한 역사는 군사분계선이 생긴 이후로 한 번도 없습니다. 개인화기급이나 지원화기급으로 총격이 오간 적은 있지만, 상대 영토에다 폭격을 때려 박는 것은 전쟁을 하자는 말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게 왜 그리되지? 게이트가 생겼으니 어떻게든 게이트부터 처리하고 봐야 할 것 아니에요?"

    "…저도 그리 생각은 합니다만."

    저쪽 애들은 상식이 안 통하는 애들이란 말이야.

    처음 겪는 것도 아니면서.

    언제 쟤들이 그렇게 상식에 맞춰서 행동해 준 적이 있어야지.

    "북한이잖습니까."

    "끙."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저것보다 확실한 대답은 없다. 꼬투리를 못 잡아 안달인 이지혁조차 더 이상의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할 만큼 북한이라는 나라는 상식을 거부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자고?"

    "외교부에서 접촉하고 있습니다. 국방부와 공동으로 움직여서 타협점을 찾아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음……."

    이지혁이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때, 최정훈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왔습니다."

    최정훈이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예, 최정훈입니다."

    전화기에서 뭔가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지만, 정확하게 무슨 말이 나오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저 조금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예."

    최정훈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다.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 이들의 얼굴에 불안이 떠올랐다.

    "꼭 그렇게밖에는 안 되는 겁니까?"

    "흐으음……."

    최정훈의 대사를 엿들은 이지혁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알겠습니다.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최정훈이 전화를 끊고는 바로 이지혁의 눈치를 살폈다.

    "자, 이제……."

    이지혁이 살짝 이를 갈았다.

    "말씀해 보시죠."

    "흐흠."

    최정훈이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 보시면 정확하게 여덟 개의 게이트 중 우리나라 쪽으로 열린 게이트가 세 개 있고, 북한 영토에 열린 게이트가 세 개, 그리고 절묘하게 휴전선에 걸친 게이트가 두 개 있습니다."

    "미묘하네."

    확실히 그리 보였다.

    "각자의 영토에 열린 게이트야 알아서 한다고는 해도 이 사이에 걸친 게이트가 문제입니다. 각자 해결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도 뭐한 위치에 있지요."

    "그래서요?"

    최정훈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뭐, 일단은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대기 타고 있다가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가 이쪽으로 오면 이쪽에서 처리하고, 저쪽으로 가면 저쪽에서 처리하자는, 아주 합리적인 결론이 나왔습니다."

    "음……."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일 수 있지만, 무척이나 수동적이라는 느낌인데…….

    "뭐, 아무래도 좋아요. 그럼 이쪽으로 몬스터들이 오면 구워버리면 그만이죠, 뭐."

    "그게 말입니다……."

    "네?"

    "양측의 합의로 비무장지대에는 화력이 아니라 능력자들이 직접 출동해서 처리하기로 했답니다."

    "호오?"

    이지혁이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네."

    "그냥 비행기나 띄워서 폭격이나 하면 그만인 일을 가지고, 우리가 직접 가서 그 앞에서 텐트 치고 캠핑이나 하다가……."

    "…캠핑은 아니죠."

    "멧돼지나 구워 먹다가 몬스터가 이쪽으로 오면 처리하라? 저쪽으로 가면 내버려 두고?"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음, 매우 합리적이네요. 그러니까……."

    "네?"

    "국방부 장관님 전화번호 좀."

    "…진정하시죠."

    "저 지금 매우 진지하거든요? 전번 좀요."

    이지혁이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 * *

    전화기 화면을 내밀어 전화번호를 요구하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지를까?'

    사실 이 사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이지혁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그가 사태를 부숴 버리는 것을 관망하는 것이다.

    이지혁에게 관련된 이들의 전화번호를 넘기고 딱 십 분 정도만 귀마개를 하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면 모든 사태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자리도 깔끔하게 정리되겠지.'

    정리까지야 오버라고 해도 그의 자리가 심각한 위협에 처할 것이라는 것은 확고한 사실이었다. 지금 최정훈의 가치는 이지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 존재하니까.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이지혁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느낀다면, 그 인간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정훈을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을 앉히려 들 것이다.

    해외에서 보거나 관련자들이 본다면 기겁을 할 일이지만, 대한민국의 윗대가리들이란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 빤했다.

    "그러시면 제가 짤립니다."

    그러니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양해를 구하는 게 옳았다.

    "안 짤리게 해주면 되지!"

    어?

    그것도 그러네?

    이지혁이 비호를 해준다면 서류고 뭐고 다 팽개치고 출근해서 아이돌 영상이나 보며 놀고먹어도 잘리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순간 들었다.

    줄까?

    최정훈은 심각한 유혹 앞에 몸을 떨었다.

    사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영 개판이라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북한이라는 곳은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어떻게 보면 일본 이상으로 민감한 곳이고, 역사적이나 정치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 얽혀 있는 곳이었다.

    그나마 게이트의 등장 이후로는 소 닭 보듯 서로를 보며 입장을 정리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어느 정도는 배제를 할 수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얽히기 시작하니 말 그대로 정치권이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건드리자니 무섭고, 그렇다고 숙이고 들어가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마인드가 너무 잘 느껴져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런 미온적 대처인데, 한두 번은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북한과 얽히게 되는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특단의 대책이 필요횄다.

    '그건 아는데…….'

    최정훈은 눈앞의 '특단의 대책'을 보며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보통 특단의 대책이라는 것은 희생이나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추구해야 하는 해결법이라는 뜻을 가지지 않는가.

    문제는 이 눈앞에 있는 특단의 대책은 그런 정도를 너무 쉽게 넘어버린다는 것에 있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도 있겠지만, 이 특단의 대책… 그러니까 이지혁을 풀어놓았을 때 감수해야 할 희생이라는 것은 단위가 커도 너무 컸다.

    "끄으응."

    최정훈은 머리를 휘휘 저었다.

    사람은 가끔 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걸 억누를 줄 알아야 사람인 것이다. 더우면 에어컨을 틀어야지, 냉장고 안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게 사람이니까.

    "일단은 현장으로 가보시죠. 그쪽 양반들이 일하는 게 이지혁 씨의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저는 거기 가는 게 싫은 건데요."

    "…아, 그쪽이었군요."

    최정훈은 가볍게 납득했다.

    하기야 이지혁이 남북 관계가 어떻든 그런 것에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지.

    "어차피 거기 간다고 해서 이지혁 씨가 할 일이 크게 있겠습니까?"

    "가기 싫은 건데, 가서 뭐하느냐가 중요해요?"

    최정훈이 조용히 이지혁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이지혁 씨."

    "네?"

    "지금 거기 안 가시면 집으로 돌아가셔야 하는데, 그럼 어머니와 에르카나 씨와 함께 계셔야 합니다."

    이지혁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린다.

    "삼박 사일은 안 됩니까?"

    "……."

    급격한 태세 전환에 어이가 없을 만도 하지만, 그보다 간절한 눈빛이 너무도 안쓰럽다.

    최정훈은 이지혁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말했다.

    "게이트가 빨리 열리지만 않으면 대기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가죠! 당장 가요!"

    "…진정하시죠."

    최정훈은 눈가를 훔쳤다.

    이지혁이 이리 열심히 출동하려 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만 같았다.

    칼퇴근을 생명처럼 알고 살던 직장인이 결혼하고 나서는 퇴근을 하지 않으려 드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 왠지 눈이 따끔따끔하고 마음이 시큰시큰하다.

    결혼이 이리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 * *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3사단의 사단장 설민범 소장이 지휘봉을 바닥으로 내려쳤다.

    "우리보고 저 빨갱이 새끼들 눈치나 실실 보면서 대기나 타고 있으라고? 지금 장난하는 거야?"

    "그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야, 이 새끼들아. 니들이 방위사면 방위사지, 여긴 우리 구역이야! 이 안에서 작전권은 우리한테 있다고! 그런데 니들이 뭔데 우리보고 물러나라 마라야!"

    정인수 대령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너 이 새끼, 방위사니 뭐니 설쳐 대는데! 너 그러다가 훅 가는 수가 있어!"

    "아, 선배님. 제가 설친 게 아니고."

    "아니면 뭐야, 이 새끼야."

    정인수는 미칠 노릇이었다.

    '이래서 별을 달아야 하는 건데…….'

    대령인 그의 신분으로는 소장인 설민범과는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다. 육사 선배인 설민범에게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위에서 내려온 지시지 않습니까."

    "장관님도 왜 그러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잖아, 지금!"

    "장관님 지시겠습니까. 더 윗선에서 내려온 거겠죠."

    "하……."

    윗선이라는 말에 설민범이 이를 바득 갈았다.

    장관보다 윗선이면 빤했다. 그 인간은 당선될 때는 과격파더니 당선되고 나서는 몸을 얼마나 사리는지,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속이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제기랄."

    안 그래도 게이트가 출현하고 국방이 타국이 아닌 내부의 게이트를 중점으로 돌아가며 불만이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국방부와 육군의 위상이야 예전에 비하면 올랐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이득은 방위사가 쏙쏙 빼먹고 있고, 야전에서 구르는 그와 같은 현장 지휘관들은 할 짓 없는 훈련이나 하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아무리 게이트 사태고 북한과의 충돌이 우려된다고는 하나 그의 관할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 지휘권을 놓고 물러나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철원에서!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군이 왜 필요해! 육군 해체하고 방위사로 재편하라고 해!"

    "선배님."

    "선배는 이 새끼야, 내가 왜 니 선배야!"

    "죄송합니다, 사단장님."

    "…제기랄."

    설민범은 지휘봉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화풀이를 하기는 했지만, 정인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을 그가 어쩌겠는가.

    설민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명을 한다면 결국에는 모가지다. 불명예제대라는 결론 말고는 없었다.

    "이 꼴 보려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게 아닌데."

    설민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관할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건만, 지휘권을 놓고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 지금 군의 입지가 얼마나 낮아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사단장님."

    "선배님이라고 해, 새끼야."

    "…예, 선배님. 죄송하지만, 이젠 그만 지휘권을 양도해 주셔야겠습니다. NDF가 오고 있답니다."

    "그 돌연변이 새끼들?"

    "…예."

    "하,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장군이 돌연변이 새끼들 때문에 쫓겨나듯이 도망쳐야 하고."

    "도망치는 게 아닙니다. 험한 꼴 볼 일 없이 잠시 피하시는 것뿐이지요."

    "그게 그거지, 새끼야."

    설민범이 고개를 젓더니 몸을 일으켰다.

    정인수의 말이 맞다.

    이 나이에 NDF 돌연변이 놈들이 패악질 부리는 것까지 보고 있다 보면 화병으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지금 관사에 가서 소주나 까는 게 더 건설적인 일일지도 몰랐다.

    "잘해, 새끼야."

    "예. 걱정 마십……."

    그 순간, 야전에 마련된 천막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두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정인수의 눈이 흔들렸다.

    "어? 아저씨?"

    "…이지혁 씨."

    정인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와,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하지만 정인수의 미소는 결국 쓴웃음이 되고 말았다.

    다른 장소였다면 어떤 상황이더라도 정인수는 이지혁을 반겼을 것이다. 그는 이지혁에게 그 정도의 빚을 졌다 생각하고 있고, 꼭 빚을 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이 청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뒤쪽에 있는 이 노장군을 NDF라는 다혈질 집단과 엮을 생각이 없었다.

    태생적인 군인인 설민범이 NDF의, 좋게 말하면 자유롭고 나쁘게 말하면 부모도 몰라볼 싸가지에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바빴어요? 얼굴 보기 힘드네요."

    "제가 바쁜 게 아니라 이지혁 씨가 바쁘셨죠. 국내 게이트 사태에는 NDF가 거의 출동하지 않은 지 오래됐으니까요. 다른 NDF 요원들은 조금씩 봤는데, 이지혁 씨는 정말 보기가 어렵더군요."

    "아, 그렇죠."

    생각을 해보니 그랬다.

    최근 이지혁은 국내의 게이트에는 전혀 출동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는 귀찮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이제 그런 상황에서는 굳이 이지혁의 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NDF 역시 이지혁의 주변에서 많이 성장했다. 이제는 레벨 6 게이트 정도는 굳이 이지혁의 도움이 없더라도 피해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그러니 이지혁을 출동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지혁은 효율이 무척 높지만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이 취급되고 있었다. 초반에 게이트에 대한 대처 능력이 많이 부족했을 때는 부작용이고 뭐고 당장 죽기 싫으면 이지혁을 데려다 써야 했지만, 이제 NDF 자체적으로 웬만한 게이트는 해결할 수 있으니 차라리 이지혁을 사무실에 고이 모셔놓는 것이 위험도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최정훈이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입니다, 대령님."

    "오랜만이군."

    이지혁을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딱딱한 어조였다.

    하지만 최정훈은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방위사와 KSF가 사이가 나쁜 것은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지는 일이었으니까.

    그나마 그는 방위사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방위사의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정인수와 저런 막역해 보이는 사이를 유지하는 이지혁이 이상한 것이지, 최정훈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지휘관은 어느 분입니까?"

    "……."

    정인수는 입을 닫았다.

    자신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지만, 그리 대답했을 시에는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설민범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었다.

    어찌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그의 뒤에서 설민범의 묵직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내가 3사단장인 설민범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휘 천막에 들어오면서 경례도 할 줄 모르는가?"

    최정훈이 난감한 듯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쪽의 실수라면 실수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면제라서 그런 거 몰랐는데요."

    설민범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원래 군대 안 간 놈에게는 사단장이고 사령관이고 다 아저씨인 법이다.

    "아저씨가 책임자예요?"

    설민범은 눈을 감고 말았다.

    아까 정인수가 빨리 가라고 할 때 갈 것을.

    한 번의 충고를 무시한 대가는 뼈저리게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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