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6화 (56/118)
  • [■] 엄마, 며느리야. [■]

    ─────

    "어머! 지혁이 어머님!"

    박선덕 여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에게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장 보러 오셨나 봐요?"

    우아한 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여인.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 친해진 이웃집 사람이다.

    "호호, 네. 아들내미 오면 밥 먹여야 하니까요."

    박선덕의 앞에 선 여인은 호들갑을 떨며 말을 이었다.

    "아! 아드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자 박선덕의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이 시간에 식사 준비라니, 또 먼 데 갔다 오는 모양이네요?"

    "네. 이번에도 미국 갔다가 온다던데……."

    "미국!"

    다른 곳에서라면 미국을 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일일이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곳은 능력자 특별 거주구.

    아들내미가 미국에 갔다는 것을 알아서 찰떡같이 알아듣고 호응해 줄 사람들만 살고 있는 곳이었다.

    "어머! 어머! 미국이라니! 역시 NDF쯤 되면 다른 모양이에요. 우리 아들은 멀리 가봤자 부산이던데."

    "좋지도 않아요. 아들이 자꾸 해외로 도니 걱정이지요."

    "그만큼 능력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어요! 듣자하니 NDF에서도 굉장히 인정받는다고 하는 것 같던데."

    "글쎄요. 저는 아들 일은 잘 몰라서……."

    박선덕은 의뭉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럴 때 스스로 입을 열어서 이야기를 하면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는 한심한 여편네쯤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가만히 기다리면 알아서 이야기해 줄 것을 굳이 입을 열어 자신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들이 NDF에 친구가 있는데, 이지혁이라는 말을 듣더니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우연이겠죠."

    박선덕은 우아하게 웃었다.

    "어머, 우연이라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직업에 관련된 일인데, 얼마나 잘 알겠어요. 듣자하니 NDF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인 것 같던데."

    "부장인가 하는 사람이 가끔씩 집에 들르고 하는 거 보니 거기서도 뭔가 직책이 있기는 한 모양이에요."

    "어머, 어머! 부장이!"

    박선덕의 얼굴에 더욱 우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결혼한 여인의 자부심, 자식 배틀인 것이다.

    누가 더 자식을 잘 키웠는가로 결론이 나는 배틀!

    누가 더 예쁜가, 누가 더 돈이 많은가에서 최종적으로 여인이 도달하게 되는 배틀의 극한.

    박선덕은 승리의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 보면 지혁이 어머님은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아드님도 잘 키우셨는데 아직도 부지런하시고. 아드님이 벌어 오는 돈만 해도 엄청날 텐데, 아직 손으로 밥도 해 먹이시고."

    "호호, 우리 아들이 입이 좀 짧아서요. 엄마가 해준 밥이 아니면 잘 안 먹더라구요."

    당연히 거짓말이다.

    이지혁은 불어 터진 라면도 흡입하는, 쓰레기 같은 식성을 가진 남자였다. 한국에서 만든 음식이라면 그 어느 것이라도 맛있다고 먹을 수 있는, 퇴화한 미각세포의 소유자였다.

    "어머님이 요리를 잘하셔서 그런 거겠죠."

    "에이, 아니에요. 그냥 남들만큼만 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남들만큼이 얼마나 힘든 건데요."

    "호호호호."

    이 아줌마는 사람의 기분을 띄울 줄 알았다.

    박선덕은 자꾸 펴지는 어깨를 내리눌렀다. 이러다가 고개가 뒤로 젖혀질 판이었다.

    '좀 더 칭찬해라!'

    남편이 좀 잘나가기는 했지만 자식을 잃어버린 엄마가 자식 자랑을 할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런데 자식이 무사히 돌아온 것도 모자라서 잘 나가는 능력자라니.

    이제야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진 느낌이었다.

    물론.

    이들이 알고 있는 이지혁과 실제 이지혁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아니, 거의 삼만 광년쯤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

    이들은 잘나가는 능력자쯤으로 이지혁을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 박선덕의 포장과 양념이 조금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누구나 치는 MSG 같은 거니까 괜찮지 않은가.

    "아드님이 그렇게 효자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에이, 안 그래요. 그냥 조금 엄마를 무서워하는 거죠."

    "어머, 어머님 농담도. 능력자 아들이 엄마를 무서워할 리가 있겠어요? 어머니가 너무 좋으니까 져주는 척하는 거죠. 엄청 효자네."

    진짠데…….

    이 부분에 있어서만은 양심이 조금 찔렸다.

    이지혁이 들었다면 아줌마가 우리 엄마랑 같이 한 달만 살아보라고 피거품을 토했을 것 같다.

    "여하튼 좋으시겠어요. 아드님이 그리 중요한 사람이라던데."

    "좋기는요, 걱정만 되죠. 너무 눈에 띄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냥 남들 하는 만큼만 하라고 했는데……."

    "주머니 속에 송곳이 들었는데 어떻게 남들만큼만 하겠어요."

    "제 욕심이겠죠."

    박선덕은 오늘 치의 자부심을 모두 충전했다.

    그러자 멈춰 있던 손이 다시 움직이면서 장바구니를 채우기 시작했다.

    오늘 치의 자부심이 조금 과다 섭취되었는지 장바구니에 고급재료가 담기기 시작했다.

    재료가 싸구려든 좋은 것이든 관계없이 맛있게 퍼먹는 아들내미 때문에 굳이 좋은 재료를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박선덕이지만, 오늘만큼은 좋은 재료로 밥을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듣고 보면 참 귀한 아들인데.'

    내 자식의 귀함을 남들의 입에서 듣게 된다는 것도 참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집에서 뻐대는 아들내미를 보고 있으면 그냥 잉여 인간인데.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그런 인간이 바깥에서는 귀한 능력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영 어색했다.

    낳아놓기는 했지만 제대로 기르지를 못해서 막장 아들 만들어놓았다는 죄책감이 언제나 가슴 한편을 짓누르는데, 그런 녀석이 귀하신 몸 취급을 받는다니.

    어쩐지 불편했다.

    성격이 좋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그냥 상식적으로만 행동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이를 그만큼 먹은 녀석이 놀지 못해 안달이고, 게으른데다 이제는 집 안에 여자까지 끌어들여서 반동거를 하시다시피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배워먹지 못한 짓거린가.

    평소의 박선덕이었다면 아들내미가 등짝에 철판이라도 깔고 왔는지 그 두 손으로 실험했겠지만, 데리고 온 여자가 그녀가 보기에도 눈이 돌아갈 만큼 이뻤기에 이해해 주고 말았다.

    방 하나 내주고 그런 며느리를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니까.

    사실 능력이야 있다지만 워낙에 성격이 개차반이라 장가는 갈 수 있을까 항상 걱정했는데, 저런 이쁜 애를 어디서 물어 오는 것을 보고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고.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하단 말이야."

    남자는 능력이라지만 그것도 남자가 어느 정도 정상적일 때 하는 말이고.

    이지혁 같은 성격 파탄자에게는 제대로 된 여자가 붙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어디서 이쁜 것들만 골라서 데리고 오는 것을 보면 이놈이 제 아비를 닮아서 여자 후리는 능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꼴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박선덕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들내미가 능력으로 인정받고 이쁜 며느릿감을 줄줄이 데리고 오는데, 기분이 나쁠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덕분에 어깨에도 힘이 빠질 날이 없어 근육통이 생길 지경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집으로 돌아가는 박선덕의 입가에 콧노래가 떠나지 않았다.

    "흐으음……."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적당히 돈을 버는 옆집 아줌마들도 하나같이 자기 차를 몰고 다니는데, 박선덕은 아직 차가 없어서 튼튼하고 굳건한 두 다리로 짐을 옮기고 있지 않은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면허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나쁜 것이었다.

    "면허를 따야겠어."

    남편도 돈은 벌 만큼 번다.

    비록 비리를 저질러서 벌어온 돈이기는 하지만, 그동안에도 많은 돈을 벌어왔고, 공기업에 취직된 지금도 예전만은 못해도 다른 집에서 보면 헉! 소리 날 만큼 돈을 벌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지혁이 버는 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가끔씩 통장 관리를 위해서 잔액을 확인하면 눈이 돌아갈 만큼 돈이 불어 있었다.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도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인데, 그만큼이 자꾸 더 벌리니,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건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입금처가 워낙 확실하다 보니 남편처럼 비리를 저지른 건 아니겠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국가에서 한 개인에게 입금하는 돈치고는 그 액수가 너무 어마어마했다.

    "아니겠지."

    아무리 이지혁이 당돌하고 그 아버지의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설마 국가를 등쳐 먹지는 않겠지.

    대충 키웠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개념 없이 키우지는 않았다.

    "여하튼!"

    일단은 면허를 따야겠다.

    차 한 대쯤 있으면 예원이 통학시키기도 편하고, 이모저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꼭 그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족들과 이지혁의 품위를 위해서도 엄마가 이리 발품을 팔아 장을 보는 모습은 보일 수 없지.

    그러고 보면 이지혁도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박선덕은 순간 반성을 했다.

    그녀가 먼저가 아니었다.

    아무리 혼자서 뭐든 알아서 하는 아들놈이라고는 하나, 그 많은 돈을 벌어 오고 있는 아들놈이 뚜벅이족인데 지금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차 한 대 사 주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생각해 보면 돈을 모아두기만 하지, 담배 사는 것 말고는 돈을 쓸 줄도 모르는 아들이었다.

    지금까지는 돈을 벌고도 과소비를 하지 않는 착한 아들내미라고 생각했지만, 다르게 보면 좀 궁상이다 싶을 만큼 돈 쓰는 일에 관심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녀와 이예원은 비싼 백이나 사댔으니.

    "아들 등골 빼먹는 부모가 있다더니."

    지금 그녀가 딱 그 꼴 아닌가.

    "안 되겠어."

    박선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번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 바닥에 등이 붙은 아들내미를 끌고 나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된 옷들로 도배를 해야겠다.

    그 망할 트레이닝복은 모조리 버려 버릴 테다.

    지금까지는 '아들이 좋다고 하면 좋은거겠지' 하고 이해하려 애썼는데,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러다가 아들내미 등골 뽑아먹으며 자기는 호강하면서 아들은 트레이닝복만 입혀서 내보내는 막장 부모가 될 판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라면 사실 그런 평과 다를 것도 없었고.

    마음 깊이 반성한 박선덕이 한창 이지혁 외모 갱생 프로젝트를 짜며 집 앞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집 앞에 우르르 몰려 있는 인간들을.

    "지혁아?"

    "어, 엄마? 어디 갔다 왔어?"

    "마트에서 장 보고 오는 길인데, 이게 다 무슨 일이니?"

    "응?"

    이지혁이 뒤를 돌아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잠깐 일이 있어서 데리고 왔어."

    "일? 무슨 일?"

    박선덕은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아들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할 때는 항상 사고를 친 상태였다.

    "응, 별건 아니고……."

    이지혁이 겸연쩍게 웃고는 구석에 있는 한 여인을 가리켰다.

    "세상에."

    박선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쩌억 벌렸다.

    대체 저게 뭔가.

    저게 사람인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그동안 아펠인가 뭔가 하는 그 외국 여자도 너무 예뻐서 쫓아내지도 못했는데, 이 여자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가게 예쁘다.

    이놈의 자식은 어디 가서 이런 애들만 골라서 데리고 온단 말인가.

    TV에 나오는, 제일 이쁘다는 사람들도 이토록 아름답지는 못할 텐데!

    "누, 누구시니?"

    이지혁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엄마가 기절을 안 하실까?

    고민이네, 이거.

    * * *

    "지혁아."

    "응, 엄마."

    "저분이 누구신지 엄마가 묻잖아."

    "으응."

    이지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하기가 껄끄러웠는데 어머니에게 말을 하려니 입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어머니.

    아들내미가 사실은 이계에서 좀 오래 살았는데, 살다 보니 정도 들고 해서 마누라가 있습니다?

    당장에 귀빵망이를 처맞고 길에 나뒹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끄으응."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고 태연히 물어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아오, 바로 뒤에 마왕이 있는데 눈앞에 있는 어머니가 더 껄끄럽다니.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엄마, 사실은!"

    용기를 낸 이지혁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말했다.

    "엄마, 며느리야."

    박순덕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진짜야."

    "그래, 재밌구나. 이제 뭐하는 분인지 설명 좀 해주지 않으련?"

    어머니의 이마에서 핏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지혁은 본능적으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엄마… 빡친 것 같은데?'

    평소 같으면 다짜고짜 등짝부터 부숴놓았을 엄마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만약 이곳이 집 안이었다면 지금쯤 이지혁의 등짝은 불이 났겠지.

    가면 갈수록 파괴력이 올라가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은 이지혁으로 하여금 방어에 마나를 소모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들 정도였다.

    이러다가 엄마가 능력자로 각성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으니,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대로 가면 등짝 두어 방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지구로 돌아와 이지혁이 가장 신경 쓴 것은 게이트도 아니고, 마왕도 아니고, 어머니의 기분이었다.

    엄마가 기분이 나쁜 날에는 그 좋아하던 게임조차 손대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이지혁에게 어머니란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엄마,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응, 말해보렴."

    "이게 그냥 장난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응."

    "이게 장난이 아니거든?"

    "응."

    "그러니까, 엄마… 듣기에는 무척이나 이상하고 어색하고 어안이 벙벙하겠지만 말이야……."

    "그래."

    이지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에르카나를 가리켰다.

    "얘가 엄마 며느리야."

    "……."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이구, 우리 자랑스러운 아들내미.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어디 가서 이런 이쁜 며느리를 물고 왔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이지혁에게 다가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

    이지혁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왜 하필 등인가.

    쓰다듬고 있는데도 전신에 소름이 돋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하라고.

    이지혁은 은근히 등에 힘을 주며 다음에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박순덕은 노련했다. 등 근육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을 파악한 박순덕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아들내미의 귀를 움켜잡았다.

    "아야야야야야야야! 엄마! 엄마!"

    "너, 이놈의 자식? 뭐라고? 뭐? 며느리이이?"

    "엄마! 아야야! 엄마, 귀 떨어져! 귀! 귀!"

    "며느리? 며느리? 오냐, 그래! 내가 며느리 보는 게 소원이었다. 아주 엄마 소원도 들어주고… 착해 빠졌네!"

    "착해 빠진 게 아니라 귀 빠진다고오오오! 엄마! 귀이이이이!"

    "죽어! 그냥! 아주 그냥 죽어!"

    다른 이들은 그 광경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곳에…….

    세계 최강자가 있었다.

    * * *

    "그러니까……."

    박순덕은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에르카나를 보면서 반쯤 이성을 잃고 있었다.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어가 귀로는 들어오는데, 머리에서 해석되지 못하고 그냥 빠져나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얘가 내 며느리라고?"

    이지혁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거, 설명하기는 매우 힘들지만… 며느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박순덕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지혁아?"

    "응?"

    "나도 설명하기는 매우 힘들지만, 너를 죽일 것 같기도 하고, 안 죽일 것 같기도 하다."

    "…살려줘, 엄마."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경우 없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디 가서 어떻게 혼인을 했다는 거야? 양가 합의도 없이 니들 마음대로 그게 진행되는 일이니? 난 인정 못한다."

    "어머니!"

    정해민이 화색을 띠고 만세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그동안 이 집에 들인 공이 얼만데, 자신을 무시하고 저런 근본도 없는 악마와의 혼인을 인정할 리가 있나!

    보았느냐, 마왕이여!

    이것이 한국의 시어머니다!

    시 월드에 걸리면 그냥 마왕이고 악마고 허리 부러지는 거여.

    "그리고 그쪽."

    박순덕이 에르카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어느 나라에 사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박순덕이 그렇게 운을 떼고는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은 영문을 모르지만 이지혁은 찰떡같이 박순덕의 눈빛을 이해했다.

    "알아들어, 엄마. 그냥 이야기해."

    "크흠."

    아, 한국말.

    다른 이들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혼인은 그렇게 본인들만 마음에 든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집안과 집안이 만나는 거지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 우리 지혁이와 결혼하고 싶다면 예의와 격식을 갖추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완벽하다.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품위를 잃지 않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한국의 결혼 문화를 모르는 에르카나가 이런 박순덕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순간, 에르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모두가 놀라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그러자 에르카나가 손을 휘저어 아공간을 열었다.

    "큭!"

    최정훈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서아영은 박순덕의 앞을 틀어막았다.

    마왕이란 존재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설마 이지혁의 집 안에서 난동을 피울…….

    "응?"

    서아영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턱!

    에르카나가 아공간에서 꺼낸 물건을 본 모두의 눈이 흔들렸다.

    무엇이 나와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이, 이게 뭔가요?"

    "엄헌히."

    "응?"

    "어머니래, 엄마."

    "아, 애가 발음이 서툴구나."

    "…엄헌히, 선물이에여. 버킨 다이아몬드 히말라야. 밀라노 에디션."

    "뭐, 뭐라고?"

    "선물."

    박순덕의 눈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선물.

    선물이라니!

    박순덕의 눈앞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진, 아니, 그런 단어로 표현하는 것도 무색할 만큼 어마어마한 형상의 핸드백이 놓여 있었다.

    저 무심한 아들놈이 돈은 떼돈을 벌면서 제대로 된 백 하나 사주지 않았는데!

    저번에 주문한 백들도 가슴이 떨리고 심장이 벌렁거려서 결국에는 반품하고 말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평생 중산층으로 살아온 박순덕이 소화하기에 그 백은 너무도 비쌌던 것이다.

    충동구매로 지르긴 했지만, 밤새 잠을 못 이룬 박순덕은 눈물을 머금고 배송된 백을 돌려보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 이건……."

    박순덕은 결국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고야 말았다.

    "이, 이건 얼마짜리니?"

    "엄마!"

    "어머니!"

    이지혁과 정해민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 일단 선물이라고 온 거니까 얼마인지만……."

    아무리 명품을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가방은 격이 다르다.

    "얼마 안 해요. 제 마음이에요. 빈손으로 시댁에 방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어요."

    "어쩜,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구나."

    "쟤 부모도 없는데 가정교육을 어디서 받아!"

    발끈한 이지혁에게 박순덕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부모도 없는 애도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아서 저리 예의가 바른데, 너는 엄마가 있는 앞에서도 낄 데 안 낄 데 모르고 입을 내미는구나. 그 주둥아리가 오리 주둥아리처럼 부풀고 나면 집 나간 예의가 돌아오겠니?"

    "죄송합니다."

    이지혁은 소파로 찌그러졌다.

    박순덕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 다르게 에르카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온화하게 느껴졌다.

    '어머니!'

    정해민은 속이 탔다.

    저 여우 같은 것이 뜬금없이 백이라니!

    한눈에 봐도 범상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지구에 온 지 한참 되었다는데, 그동안 어디에 갔나 했더니……."

    이지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 저런 걸 가지고 왔을 줄이야.

    밀라노까지 갔다가 미국으로 간 건가?

    "어쩜 이런 생각은 어떻게 했니? 기특하게."

    "배웠어요."

    "누구한테?"

    "책에서요."

    "책?"

    에르카나가 두말없이 아공간을 열더니, 손을 넣어 책 몇 권을 꺼냈다.

    "……."

    책의 제목을 보는 최정훈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거구나!'

    * * *

    <베트남에서 왔어요.>

    <다문화 가정의 이해와 실천.>

    <알기 쉬운 한국 시댁.>

    "다, 다문화!"

    서아영이 경악하여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 따져 보면 다문화는 맞지. 마계와 한국도 다문화라면 다문화니까.

    그런데 이거, 방향이 조금 다른 거 아닌가?

    그 다문화가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에르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르카나 집 멀어요. 여기랑 달라요. 그래도 이쁨 받고 싶어요. 에르카나 열심히 할게요."

    "어구."

    박순덕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이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지혁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 엄마, 그거 아냐!"

    "넌 조용히 해."

    "엄마!"

    "조용히 하라고 했다?"

    이지혁은 다시 찌그러졌다.

    박순덕은 이지혁의 반항을 가볍게 제압하고는 에르카나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아요.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아니, 엄마. 그거 아니라니까!

    먼 나라는 뭔 먼 나라여!

    어?

    먼 나라는 맞나?

    따지고 보면 지구에 있는 나라들보다는 더 머니까 저게 틀린 말은 아니고…….

    이거, 반박이 좀 이상한데?

    "그래, 우리 지혁이랑 혼인했다고?"

    "네, 엄어니."

    "이놈이 뭐가 좋다고 이 먼 곳까지 따라왔누. 가여운 것."

    잠깐만, 엄마.

    그 여자 마왕이야.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가엽다는 말을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저 여자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고!

    그리고 이건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쟤가 베트남에서 왔나?

    이게 무슨 따뜻한 다문화 가정 방송 같은 상황이냔 말이다!

    "엄마! 저 여자 마왕이라고!"

    "마왕?"

    "아, 엄마. 마왕 모르는구나. 그게 마계에서 엄청 잘나가는 왕 같은 건데……."

    "…그럼 자기 나라에서 공주 같은 사람인데 너 보겠다고 다 버리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그게 그렇게 되나?

    아니, 그거… 미묘하게 뭔가 다른데?

    그런데 말은 맞는 거 같고?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니? 사정이 그러면 일단은 집으로 데리고 와서 보살펴야지!"

    "그, 그래서 데리고 왔잖아……."

    그런데 엄마가 근본 없는 여자라고 꺼지라고 했잖아!

    "시끄러워!"

    "나, 아무 말 안 했는데."

    "속으로도 궁시렁거리지 마!"

    "으, 으응."

    "그래,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쉬어요."

    "네, 어머니."

    "그래요. 어이구, 가여운 것."

    박순덕이 에르카나를 덥석 안았다.

    겉으로만 보면 참 따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엄마…….

    그 손이 쓰다듬는 게 왜 가방이야?

    왜!

    * * *

    "지혁아."

    "응?"

    "손님방으로 안내해 드려라."

    "바, 방?"

    "남는 방 있잖니."

    최정훈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좋은 집을 구하는 바람에 이지혁의 집에는 방이 남아돌았다. 1층만 해도 방이 다섯 개고, 2층에는 더 많은 방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현재 아펠드리체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남는 방이 너무 많아 고양이라도 키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판이었다.

    그래서 방을 내주는 거야 별문제가 없었다.

    에르카나와 아펠드리체.

    마왕과 드래곤 로드가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지옥도가 펼쳐지긴 하겠지만…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어, 엄마! 그러면 안 된다니까!"

    이지혁은 이런 상황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에 데리고 오면 박선덕이 어련히 알아서 쫓아내 주겠거니 했는데, 이게 뭔 상황이란 말인가.

    고부갈등 막장 드라마를 찍으려고 했더니, 다문화 휴먼 다큐멘터리로 장르가 바뀌어 버렸다.

    "엄마! 걔 못사는 데서 온 게 아니라니까!"

    "엄마가 바보니?"

    "으응?"

    박선덕이 말없이 눈앞의 백을 가리켰다.

    "이게 얼마짜리 같은데?"

    "그야……."

    비싸겠지.

    더럽게 비싸겠지.

    저기 박힌 거, 저거 큐빅은 아니겠지?

    뭔 놈의 백이 저리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고 있나 그래.

    그리고 쟤는 지구에 와서 뭘 했기에 일단 저런 것부터 사 왔지?

    무시무시한 적응력이 아닌가!

    "돈이야 많겠지. 돈 없는 애가 저런 걸 사 왔겠니. 그런데 세상에 돈이 전부니?"

    "…아니, 그건 아니지만……."

    "돈이 전부면 엄마도 참 좋겠다. 너도 돈은 많잖니."

    "엄마, 그거 발언이 미묘한데……."

    아들내미가 뭐 어때서!

    이 정도면 됐지!

    "먼 나라 오면 수중에 돈이 있든 없든 마음이 허하고 그런 거야. 넌 그것도 모르니?"

    알지. 너무 잘 알지.

    내가 그걸 너무 잘 알아서 무슨 짓을 했는지 엄마는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엄허니."

    "…호칭이 매우 다채롭구나. 왜 그러니?"

    "저 다른 방에서 안 자요."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에르카나가 박선덕의 손을 꼭 잡고는 입을 열었다.

    "부부는 한방에서 자는 거라고 했어요. 에르카나, 이쪽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부부는 그러지 않는다고 배웠어요."

    "그, 그렇지."

    박선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부부 아니라니까!"

    이지혁의 항변은 박선덕의 귀에 이제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해."

    "엄마, 자꾸 이러면 나 진짜로!"

    "…조용히 해라."

    "네."

    어머니가 뿜어낸 살기에 이지혁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의 귀에 들릴락 말락 조용히 궁시렁대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엄마는 누구 편이야?"

    "쯧."

    하지만 그 반항조차도 박선덕 여사는 눈빛이 사나워지자 따스한 햇살 앞의 거품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래, 에르카나라고 했니?"

    "네, 엄허니."

    "네가 지혁이와 부부라면 당연히 한방을 쓰는 것이 맞겠지."

    "네."

    "하지만 아직 그걸 인정할 수가 없는 사람이 많은 듯싶구나."

    정해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도가윤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고 있었다.

    "어?"

    그 뒤에 아펠드리체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에르카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그저 먼 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호오?"

    박선덕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펠드리체의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맺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

    "많이 컸네?"

    유부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음성이 아펠드리체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아펠드리체에게만 들리는 음성이었다.

    아펠드리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왜 그러니?"

    박선덕이 의아해하자 에르카나는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그래? 어쨌든 갈 곳도 없고 하니, 한동안은 같이 지내자꾸나.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준비가 덜되어 있으니 일단은 각방을 쓰는 걸로 하고."

    "예, 엄허니."

    에르카나가 다소곳하게 대답을 했다.

    그 앞에서 이지혁은 절망적인 어투로 말했다.

    "망했어……."

    이리하여 에르카나는 아무런 방해 없이 이지혁의 집에 군식구로 들어앉았다.

    * * *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지혁의 집 앞에 위치한 카페.

    그곳에 지금 세 여자가 앉아 있었다.

    쪼로록.

    요구르트 스무디를 쪽 빨아들인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이한 맛이네요. 상한 것 같으면서도 상하지 않은 시큼한 맛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들은 이상한 것을 먹네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야 않죠."

    아펠드리체는 상대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이야 이지혁에게 마누라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마누라를 눈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지만, 아펠드리체는 애초에 에르카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딱히 충격 받을 일은 없었다.

    그저 그 에르카나가 지구까지 따라올지는 몰랐기에 당황했을 뿐.

    "어떻게 된 거?"

    흔치 않게 도가윤이 먼저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내 정해민이 도가윤을 만류하고 나섰다.

    "잠시만 가윤아."

    "……?"

    "기다려. 아직 덜 왔어."

    도가윤이 고개를 갸웃할 때, 카페 문이 열리고 매우 굳은 얼굴을 한 김다솜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도가윤이 가만히 김다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도 이 사태에 대해 알 자격이 있었다.

    "무슨 말이죠?"

    인사고 뭐고 없었다.

    정해민이 보낸 톡을 확인하자마자 이곳까지 무슨 정신으로 온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일단 앉아봐."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어요."

    "그래, 말해줄 테니까… 일단 앉아봐."

    김다솜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정해민을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뭐 마실래?"

    "얘기 듣구요."

    "마실 거 정해. 속 탈 테니까."

    "…아메리카노요."

    "찬 거 먹는 게 좋을 텐데."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정해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정해민이 한숨을 쉬고는 김다솜을 향해 말했다.

    "이지혁 씨 마누라가 나타났어."

    "…네?"

    "말 그대로야. 예전에 이계에 있을 때 결혼한 사람이 있대. 근데 그 사람이 찾아왔어."

    김다솜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이계?

    "그리고……."

    "또 있어요?"

    "그 마누라가 마왕이야."

    김다솜이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뿜었다.

    정해민은 김다솜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아펠드리체 씨는 알고 계셨죠?"

    "네."

    "아펠드리체 씨도 이지혁 씨와 감정이 있는 것 아닌가요?"

    정해민의 돌직구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펠드리체에게로 향했다.

    지금까지 서로 암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제대로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그리고 아펠드리체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인정했다.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던 거예요?"

    아펠드리체는 그녀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되레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당연히 상관이 있죠."

    "어째서요?"

    어째서라니?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물어오자 대답이 막연해졌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가.

    "아……."

    아펠드리체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세계는 일부일처가 기본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군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남자가 여러 명의 처를 거느리는 것이 당연한 곳이라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네요."

    "흐음……."

    정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화적인 차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둘이 어떤 사이인데요?"

    "부부요."

    "…어떻게 마왕이랑 사람이……."

    "이지혁 씨도 그쪽에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였죠."

    "사람이 아니었다구요?"

    아펠드리체가 조금은 싸늘한 눈으로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이지혁 씨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조금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군요."

    "……."

    "상처가 많은 사람이에요. 사람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죠.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 상처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기를 바랐는데, 당신들과 같이 무심한 이들 사이에서 치유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네요. 차라리 베라프가 낫겠어요."

    김다솜이 싸늘한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노려보았다.

    "말을 안 해주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보려고는 했나요?"

    도가윤이 입을 열었다.

    "싸우려고 모인 것 아님."

    "……."

    "대책 세움. 입장 정리함.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함. 그 말 듣고 옴."

    도가윤이 정리를 하자 다른 이들도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혁 씨는 에르카나가 영 못마땅한 것 같던데. 태도가 전혀 반갑지 않은 듯하던데요?"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 씨는 벌써 몇 백 년 전부터 같이 못살겠다고 도망 다니는 중이었죠."

    "어째서요?"

    "글쎄, 안 그래도 왜 그런지 물어봤는데……."

    "예."

    "대답이 좀 이상했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결혼하면 다 그렇대요."

    "……."

    이게 뭔 소리야?

    "아무리 이쁘고 좋은 여자랑 산다고 해도 십 년을 같이 살면 호랑이로 보이고, 이십 년을 같이 살면 마귀로 보이고, 백 년을 같이 살면 슬라임으로 보이고, 삼백 년을 같이 살면 생사대적으로 보인다던데… 도통 이해를 못하겠더라구요."

    "흐으음……."

    이해할 것 같기도 하고, 이해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사, 삼백 년을 같이 살았다구요?"

    그 와중에 김다솜이 문화 충격을 받은 건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

    "지혁이 오빠 나이가 몇인데요?"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조금 애매한데……."

    "네?"

    "이쪽 세계 기준이라면 20대겠지만, 베라프 기준으로 보면 대충 천삼백 살 정도?"

    "…네?"

    "그리고 거기에 마계에 넘어가서 살았던 시간을 생각하면 이천 살은 넘는 것 같은데……."

    그래, 이천살이라…….

    그럼 예수님이랑 나이가 비슷하네.

    허허허.

    김다솜이 피식 웃고 말았다.

    "농담에는 소질이 없네요."

    "……."

    동조하듯 주위를 둘러봤지만… 정해민도, 도가윤도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짜예요?"

    끄덕.

    도가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다솜이 또다시 문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었다.

    이천 살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40대 아저씨만 되어도 속았다는 기분이 절로 들 텐데, 이천 살이라니!

    "이쪽 세계 기준으로는 이십 대가 맞다고 했죠?"

    "네."

    "그럼 됐어요."

    어라?

    얘, 충격 먹은 거 아니었나?

    "괜찮아?"

    "네. 뭐, 생각해 보니 몸도 젊고, 마음도 젊은데, 나이가 뭐 대수겠나 싶어서요. 이십 년쯤 더 살았다고 하면 충격 받을 거 같은데, 이천 살이라고 하니까 딱히 현실감도 없구요."

    얘도 사고방식이 좀 이상한 듯.

    "그래서……."

    도가윤이 아펠드리체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지?"

    모두의 시선이 아펠드리체에게 쏠렸다.

    * * *

    "이론상으로는 어렵죠."

    "오?"

    "아무래도 그녀는 마족. 흑마력이 없으면 자신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이곳에서는 흑마력을 공급 받는 것에 한계가 있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흑마력이 모두 떨어지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마계로 돌아가야 할 거예요."

    "지금 가지고 있는 마력이라……. 그럼 그게 언제 떨어지는데요?"

    아펠드리체가 잠시 계산을 하는 듯하더니 대답을 했다.

    "한 오백 년쯤?"

    "……."

    저 여자 드래곤이라기에 안 믿었더니, 사실인가 보다.

    그런데 드래곤이란 애들은 하나같이 이리 멍청한가?

    "계속 있는다는 거네요."

    "아뇨. 오백 년밖에 못 버틴다니까요."

    "네네, 계속 있는다는 거네요."

    정해민은 깔끔하게 아펠드리체의 말을 무시했다.

    이 여자는 인간에게 오백 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여겨질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없나?

    머리가 일반 인간보다는 훨씬 좋은 드래곤이라고 하던데, 도무지 어디가 머리 좋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해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누라라는 애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골치인데 그 부인이 마왕이고, 이제 계속 지혁이네 집에 얹혀살 거라, 이 말이잖아?"

    김다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주 아주 멋진 상황이네."

    "퇴치해야죠."

    "응?"

    "마왕이라면서요? 퇴치해야죠."

    "끄응……."

    말은 맞는 말이다만, 그게 말처럼 쉽다면 다행일 것이다.

    "인류를 적대하지 않는 마왕을 어떻게 하겠어. 그 마왕을 잡으려면 투입되어야 하는 전력과 희생이 장난이 아닐 텐데. 모험을 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정해민은 뒷말은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구나 이지혁이 나서지 않는다면 세계의 능력자들을 모조리 끌어모은다고 해도 마왕을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보자면 회의적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비전투 요원이라고 하나 눈이 없는 것이 아닌 이상 마왕이라는 이들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들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마왕이라면 조용히 모셔두는 것이 최상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아니 다행이네."

    정해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아영이 카페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허튼짓은 절대 하지 마, 언니. 사고 치면 언니고 뭐고 다 가둬놓을 테니까."

    "누가 사고 친데?"

    "내 귀가 잘못됐나 보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

    정해민은 애꿎은 아메리카노를 잡고 들이켰다.

    "앗, 뜨거!"

    "쯧쯧."

    서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대책 회의까지 열린단 말인가.

    그것도 마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 회의를 가장한 치정 회의라니.

    "그 인간이 뭐가 좋다고……."

    "좋다고 한 적 없거든?"

    "입에 침이나 바르시지?"

    "흥."

    정해민이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너나 단속 잘하지그래?"

    "응?"

    "마누라 있는 남자 때문에 속 끓는 우리도 바보지만, 남의 마누라 보고 침 흘리는 남자한테 관심 두는 너도 뭐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으드득.

    서아영이 이를 갈아붙였다.

    정해민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최정훈의 그 멍청했던 표정이 떠올라서 그런 것이다.

    "우리 서로 디스할 때가 아닌 것 같아."

    "으응."

    이리 서로 이야기해 봤자 상처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한 두 여인은 극적으로 타협을 봤다.

    그때, 문을 열고 최정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다들 모여 계……."

    "닥치고 설명이나 시작해요!"

    "헐……."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뜬금없이 욕을 퍼먹은 최정훈은 억울함에 뭔가 항변하려 했지만, 한기를 풀풀 풍기는 서아영의 얼굴을 보고는 시도 자체를 포기했다.

    이건 뭔가 입 한 번 잘못 뗐다가는 한 달 내내 욕만 먹을 분위기였다.

    '내가 뭘 어쨌다고.'

    당연히 억울한 최정훈이지만, 세상은 꼭 순리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기에 두말없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서아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NDF의 요원들이 문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으응?"

    정해민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양반들이 왜 갑자기 이리 들어온단 말인가.

    "제가 불렀습니다."

    "왜요?"

    "전체 회의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자리를 비우기는 애매하니 어쩔 수 없죠. 당연히 불러야죠."

    "아……."

    감다현이 자리에 앉아 있는 김다솜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 다솜아, 니가 여기 왜 있니?"

    "별일 아냐."

    "별일이 아니기는."

    김다현은 영문을 몰라 했지만, 김다솜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친절히 설명을 해줄 만큼 멘탈이 온전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야기해, 나중에."

    "으응."

    최정훈이 상황을 정리했다.

    "확실히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이 나아 보이네요. 지금은 일단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최정훈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검은 양복을 입은 요원들이 안으로 들어와 일반 손님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다른 곳에서였다면 항의가 들어올 만도 한 일이지만, 능력자 거주구라 그런지 협조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텅 비어버린 카페 안에 NDF들과 김다솜만이 남았다.

    최정훈이 물끄러미 김다솜을 바라보자 정해민이 입을 쭉 내밀었다.

    "다솜이는 일단 두죠. 나름 관계자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으음, 알겠습니다."

    살짝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그녀도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에는 최정훈도 동의하는 바였다.

    "우선 여러분이 아셔야 할 일은… 지금 이지혁 씨의 집에 마왕이라 불리는 개체가 머무르고 있다는 겁니다."

    "으……."

    박성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태생이 탱커다 보니 마왕과 싸울 때 가장 부상을 많이 당한 것도 그였고, 가장 많이 고통을 받은 것도 그였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마왕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마왕이 왜 이지혁 씨의 집에 있는 겁니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지켜본 바에 의하면, 마왕이라는 개체들은 이지혁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어투와 표정, 그리고 행동만으로도 적의를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지혁 씨에게 위험이 닥친 겁니까?"

    김다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문도 모른 채 수십 명분의 커피를 뽑고 있던 가게 주인이 김다현의 기세에 놀라 몸을 웅크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최정훈은 김다현을 진정시키며 혀를 찼다.

    '배알도 없나.'

    이 중에서 가장 크게 이지혁에게 당한 사람 중에 하나가 김다현일 텐데, 이지혁에게 위협이 닥쳤다 싶으니 발끈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형님, 형님' 하면서 따라다니기에 처세술인 줄 알았는데, 처세술이 아니었나!

    진짜로 그리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단 그런 일은 아니고, 이지혁 씨와 마왕 사이에 친분이 있는 모양입니다."

    "마왕이랑?"

    "따져 보면 이상할 것도 없잖아?"

    잠시 웅성거림이 찾아왔지만, 모두들 쉽게 납득을 했다.

    하기야 친분이란 게 없었다면 이지혁과 마왕들이 대화를 나눌 이유도 없지.

    그 대화의 반이 이죽거림과 도발에 가까워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서로가 알고 있는 사이라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이지혁이라면 마왕이 아니라 신이랑 말 트고 지내는 사이라고 해도 별 위화감이 없었다.

    그 인간이 못할 짓이 뭐 있겠는가.

    "일단 마왕은 본인이 이지혁 씨의 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요. 응? 처요?"

    김다현의 눈이 떨렸다.

    "부인 말하는 겁니까?"

    "자꾸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이, 이지혁 씨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거부는 하고 있는데, 부정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맞다는 거잖아! 아니었으면 그 인간이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박성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참을 인간이 아니지."

    "맞는 것도 틀리다고 할 사람인데, 틀린 걸 맞다고 할 리가 없지."

    "청와대에서도 깽판 놓는 사람인데, 그런 걸 참아줄 사람이 아니지."

    최정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실이라……."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들에게 꽂혔다.

    "뭘 봐요?"

    정해민이 이를 드러내자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크흠."

    최정훈이 기침으로 상황을 환기시켰다.

    "여하튼 지금 이지혁 씨의 집에 마왕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다들 잘 아시겠죠?"

    "이민 가라는 거죠?"

    "……."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아니, 사실 그게 제일 현실적인 방법이기는 하잖아!

    "이지혁 하나도 감당을 못하겠는데, 이제는 마왕까지 있구나. 아이고, 내 팔자야."

    "진짜 이민 갈까?"

    여기저기서 푸념이 터져 나왔다.

    "다들 진정하시고……."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생각까지는 안 했는데, 이들의 반응을 보다 보니 이게 진짜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자각이 든다.

    "사실 여러분을 부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이지혁 씨의 집에 마왕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마왕이 사는 곳이 NDF의 본부와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마왕이라니…….'

    일전의 마왕에 런던에 떨어진 여파로 지금 영국은 거의 나라의 기능을 상실한 지경까지 갔다.

    이지혁이 필사적으로 막아내긴 했지만, 이미 도착하기 이전부터 반파가 되어 있었고, 둘의 싸움의 여파로 완파가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도가 날아가 버린 나라가 어떻게 제구실을 하겠는가.

    현재 영국은 타국의 지원이 아니면 자국 내의 게이트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막장 국가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였다.

    '여기라고 다를 것 없지.'

    만약 에르카나가 이지혁과 트러블이 생겨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면, 서울도 순식간에 날아갈지 몰랐다.

    "끔찍하군."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부부 싸움 때문에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니.'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저 둘이 부부 싸움을 하면 대체 어떻게 중재를 해야 하는가.

    "여하튼 이제부터 한동안 NDF는 비상 체제로 전환합니다. 저 마왕이 이 나라에 적응할 때까지 어떻게든 트러블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지원할 겁니다."

    "말은 쉬운데……."

    거, 어려운 거 누가 모릅니까.

    어려워도 해야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명령을 내리는 입장에서 아랫사람들의 불만을 일일이 받아주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김다현이 다시 물었다.

    "감시를 한다고는 하는데, 둘이 싸운다고 치면 우리가 뭘 해야 하나요?"

    "……."

    "경찰에 신고할까요?"

    "……."

    최정훈은 이 답도 없는 상황에 절망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 둘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뭘 어렵게 생각해요."

    하지만 정해민은 간단히 해결책을 내놓았다.

    "지혁이 어머니한테 연락해요."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최정훈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이지혁의 집.

    "……."

    이지혁은 멍하니 에르카나가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에르카나가 자신의 방을 꾸미고 있었다.

    "…야."

    "응, 달링?"

    "사람 사는 집에다가 염소 대가리 놓는 거 아니다……."

    "응?"

    이지혁이 바라보고 있는 테이블 위에는 에르카나가 아공간에서 꺼낸 흑염소의 머리가 올라가 있었다.

    "안 돼?"

    "우리 엄마가 그걸 보면 내 대가리도 옆에 나란히 놓으려고 하실 거다."

    "흠, 엄허니가 싫어하신다면 빼야지."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지혁은 에르카나가 꾸며놓은 방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건 무슨 동화에 나오는 방도 아니고.

    아니지, 동화라고 하면 안 된다.

    애들이 이 방을 보면 결코 정서에 좋을 리가 없었다.

    "…커튼이고 뭐고 다 검은색이어야 하는 거냐? 여기 무슨 장님 사냐?"

    "어머! 블랙은 진리라고, 달링."

    그놈의 진리.

    몇 만 년을 검은 거만 보고 살았으면 이제 슬슬 다른 색이 땡길 만도 하지 않니?

    언제까지 검은색 타령할 거니?

    "으으……."

    모든 가구와 침구류가 검은색으로 된 방을 보고 있다 보니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이런 취향 하나까지 안 맞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맞춰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미친 짓이라는 걸 애초에 깨달은 이지혁이지만, 에르카나에게서는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계약이 맺어져 있는 이상 그녀는 언제든 그의 꿈속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잠도 안 잤는데……."

    이지혁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 내가 올까 봐 안 잔 거야?"

    "솔직히 그건 아니고……."

    "안 그래도 한 번 올까 했는데, 그 도마뱀이 배리어를 깔아놨던데? 난 혹시 바람이라도 났나 했어."

    "바람……."

    이지혁이 허무하게 웃었다.

    자신과 아펠드리체의 관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 중 하나인 그녀가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그저 놀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뭐,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난다고 해서 내가 딱히 제지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내가 본처라는 건 잊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이지혁이 대체 재질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시커먼 소파에 축 늘어져서는 입을 열었다.

    "너 무슨 생각이야?"

    "응?"

    "왜 온 거야?"

    "달링이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헛소리 말고."

    "인간이란 종족은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더라. 달링이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 왜 왔겠어?"

    "보고 싶어서 왔다고? 단순히?"

    "왜? 안 믿겨?"

    "안 믿어, 이 악마야!"

    "호호호호."

    에르카나는 깔깔 웃고는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예전에는 이렇게 시니컬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다른 이를 못 믿게 되었을까, 우리 달링?"

    에르카나가 천천히 이지혁에게 다가왔다.

    이지혁이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에르카나가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타더니, 이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를 못 믿는 거야, 달링?"

    "끄응."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존재를 따지자면, 눈앞에 있는 이 악마일 수밖에 없다.

    세상 어느 곳에도 의지할 이 없던 이지혁에게 손을 내밀고, 그에게 힘을 준 존재가 바로 눈앞의 이 악마였으니까.

    그것도 아무런 대가 없이.

    일반적으로 악마와의 계약이 영혼을 담보로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지혁은 보통의 악마와도 계약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르카나는 그에게 영혼을 담보로 하지 않은 일방적인 계약을 맺어주었고, 대가 없는 마나를 공급해 주었다.

    다른 어떤 일이 있었어도 이지혁은 이 세계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다. 불사의 육체와 무한의 시간을 가진 이지혁은 어떻게든 강해졌을 테니까.

    하지만 에르카나와 계약하여 흑마력을 손에 넣지 않았다면 결코 그는 멸망의 좌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라트렐의 눈을 손에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에르카나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를 이 세계로 돌아오게 만들어준 은인이었다.

    은인인데…….

    "마누라만 아니었으면."

    "응?"

    이지혁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냥 아는 사람이면 이보다 좋은 여자가 없는데, 왜 하필 마누라여서는.

    세상에서 마누라보다 더 껄끄럽고 무서운 존재가 어디에 또 있는가. 그나마 에르카나가 바가지를 안 긁는 타입이라 이제까지 관계가 유지되었던 거지.

    이십 년을 살기도 힘들다는 부부 생활을 천 년 넘게 유지했으니.

    "끄응."

    이지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달링."

    "응."

    그녀의 그저 검은 눈동자가 이지혁의 눈과 마주쳤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검디검은 눈동자.

    이지혁은 그 눈을 바라볼 때마다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아찔함을 맛보아야 했다.

    "날 못 믿어?"

    "…믿어."

    "그런데 왜 내 말을 의심하지?"

    "너는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흐응?"

    이지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너나 아펠드리체나 마찬가지지. 내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 사람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할 뿐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에르카나는 고혹적으로 웃었다.

    "응, 당연히 말할 수 있지. 아니야. 난 언제나 당신을 위해서 움직이지, 달링."

    "끄응."

    이지혁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태생적인 악마.

    악마로 태어난 이들은 인간을 현혹시키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는 언제나 그를 괴롭히는 명제였다.

    "흐음, 안 믿는 모양이네? 부부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신뢰가 없다니, 조금 슬픈데?"

    "부부로 오래 살았으니 신뢰가 없는 거지."

    "후훗."

    에르카나가 혀를 내밀어 이지혁의 볼을 핥았다. 피처럼 붉은 혀가 이지혁의 볼을 농락했다.

    "꼭 다 들어야겠다면 이야기해 줄게."

    "음?"

    에르카나의 눈이 가라앉았다.

    "달링."

    "말해."

    "이곳은 이제 너무 위험해."

    이지혁이 가만히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위험하다?

    베라프와 마계에서도 버텨낸 이지혁이다. 아니, 버텨낸 정도가 아니라 그 두 세계를 지배했던 이지혁이다.

    그런데 그 두 세계에 비하면 위험도가 극히 낮다고 해도 좋을 이 지구가 위험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좀 더 설명이 자세하다면 내가 알아듣기 좋을 텐데?"

    "달링은 내가 어떻게 여기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야……."

    이지혁은 입을 다물었다.

    에르카나는 계약자가 있는 세상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계약자의 꿈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지, 계약자의 세상으로 실체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베라프는 진즉에 마계에 정복당하여 풀 한 포기 남지 않았겠지.

    베라프라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서 음차원의 에너지를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마계는 베라프를 정복하지 못했다.

    차원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건가?"

    "후후후."

    에르카나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왔다.

    "나를 다른 마왕들과 같이 취급하다니. 이거, 조금 화나려고 하는데?"

    "……."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르카나가 화가 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떠올리자 몸이 절로 떨려왔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응, 알아. 우리 달링 말주변 없는 거."

    이지혁이 말주변이 없다니!

    디오레 1세가 들었으면 무덤에서 리치가 되어 벌떡 일어날 이야기가 아닌가!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입 하나는 절대 쉬지 않아서 모든 이의 경탄을 이끌어냈던 이지혁의 입이 이런 취급을 받다니!

    대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뭘 본 거지?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정 표현도 서툴러서 매번 좋다고 말도 못하고 싫은 척하면서 틱틱대기만 하는 사람인 거 잘 알고 있어."

    아니야!

    진짜 싫은 거라고!

    사람 감정을 그렇게 잘 아는 서큐버스가 왜 내 감정은 항상 제대로 모르는 건가!

    "그런 달링이라서 내버려 둘 수가 없다니까."

    "이 세계가 위험하다는 말은 뭐야?"

    "링크."

    "응?"

    "마계와 이 세계가 링크되고 있어."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세계 자체가 이어지고 있단 말이야?"

    "응."

    "……."

    이지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건 베라프에서도 없던 일이다.

    "다시 말해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에르카나가 미소를 지었다.

    당황하여 그녀를 노려보는 이지혁의 얼굴은 매번 그녀를 두근대게 만들었다.

    "다시 말할 것 없어. 지금 이 세계는 마계와 이어지고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야? 다른 세계가 서로 이어지는 게 가능한가?"

    이지혁의 차원에 대한 이해도는 역사를 통틀어도 제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상식으로도 다른 차원이 서로 겹쳐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거짓을 말할 리 없는 에르카나의 말이 모두 지어낸 것이라 느껴질 만큼 말이다.

    "그 증거가 여기 있잖아."

    "증거?"

    "나."

    에르카나가 입술을 핥았다.

    "아무리 당신의 존재를 느낀다고 해도 소환되지 않은 내가 이렇게 차원을 넘어서 당신 앞에 나타났잖아. 마계를 잘 아는 당신이라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알 텐데?"

    "…알지."

    "이 세계는 이미 마계와 이어지고 있어. 원인은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지. 이제 슬슬 그 부작용이 나타날 때가 됐어, 달링."

    이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계.

    만약 마계와 이 세계가 이어지게 된다면, 마계의 생물과 마족들이 거침없이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단 한 명의 마왕에게도 세계의 멸망을 각오했던 이 세계로 마왕들이 쏟아진다?

    그건 지옥의 강림이었다.

    "그리고 아마 시작되었을 거야."

    "시작?"

    "왜 어린애처럼 굴고 그래? 내가 아는 달링은 이리 멍청하지 않았어. 그 냉철하던 판단력은 다 어디로 갔지? 이 세계의 평화에 너무 젖어버린 거 아냐?"

    이지혁은 차마 변명하지 못했다.

    아무리 긴장의 끈을 당기고 있었다고는 하나 지구에서 그가 과거에 비해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다.

    "달링, 이곳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야. 그리고 달링은 지금 과거의 달링이 아니야. 너무나도 나약하고, 너무나도 무력하지."

    "……."

    "그래서 내가 온 거야.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을 과거로 되돌리기 위해서."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불멸성을 잃은 이상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 과거로 돌아갈 생각도 없고."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무릎 위에서 일어나 조용히 마주했다.

    그 광경은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멸망의 좌이시여."

    이지혁이 이를 악물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마계를 지배하던 분이시여, 당신의 나약함은 저를 슬프게 하는군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지혁의 귀를 유린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나약한 모습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세상이 올 테니까요. 평화는 이제 끝났습니다."

    에르카나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방 안을 떠돌았다.

    이지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세상이 뒤틀린다.

    짧은 평화가 지금 그 종말을 알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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