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5화 (55/118)
  • [■] 마왕이 무서운지, 엄마가 무서운지 [■]

    ─────

    어색한 웃음으로 긴장감을 날려 버린 최정훈이 슬금슬금 이지혁의 건너편 소파로 가 앉았다.

    '자, 이 사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일단 최초의 목적이던 대통령을 구출하는 일은 해결했다. 후유증이 남든 부작용이 있든 병원에 실려 가다 죽든 그건 이제 최정훈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였다.

    "그러니까……."

    최정훈이 정리를 시작했다.

    "이지혁 씨의 부인이시라구요?"

    "그럼~"

    "그러니까… 부인이신 거죠?"

    에르카나의 아미가 위로 올라갔다.

    "못 믿는 거야?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데도? 인간이란 의심이 많구나? 내가 하는 말을 거짓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거겠지?"

    "그럴 리가요! 믿습니다! 믿지요!"

    이내 정해민과 서아영의 한심하다는 시선이 싸늘하게 와서 꽂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니들도 말이 통하는 마왕은 처음 보잖아!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는 게 아니라 세포째 분쇄되게 생겼는데, 내가 뭐라고 뻐대겠냐고.

    "하지만 당사자에게도 말은 들어봐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사자? 우리 달링?"

    "예, 예. 그렇죠. 아무래도 저희는 이지혁 씨와 좀 더 관계가 깊으니까요. 그러니 일단은 이지혁 씨의 말을 들어봐야 어떻게 결론이 나지 않겠습니까?"

    "흐응, 인간이란 의심이 많다니까. 내가 너희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뭐가 있다는 거지? 인간 따위를 속여서 내가 뭘 얻겠다고. 아무튼 좋아. 달링 입으로 듣고 싶다면 그렇게 해줘야지."

    에르카나가 빙긋 웃으며 이지혁에게 매달렸다.

    "달리잉, 말 좀 해줘요."

    "하아아아……."

    이지혁은 그저 썩은 한숨을 내뿜을 뿐이었다.

    왜지?

    왜 저 이지혁의 모습에 동정이 가는 거지?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마왕이라고는 하나 에르카나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핑핑 돌아가는 미녀였다. 저런 미녀를 옆에 끼고 썩은 표정을 짓는 건 복에 겨워 맛이 간 인간이나 할 짓이 아닌가.

    나는 저거 반만 생겨도 업고 다닐 텐데! 아니, 반이 뭐야!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지혁의 표정이 너무 리얼해서 그런지 절로 동정이 간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달링?"

    "내가……."

    "응? 달링?"

    "내가! 왜 니 달링이야아아아아!"

    이지혁이 옆에 붙은 에르카나를 잡아 던졌다.

    에르카나가 허공에서 빙글 돌더니 부드럽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어머, 달링.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여자를 그렇게 휙휙 던지면 안 돼요. 내가 아무리 마왕이라도 그렇지, 까딱하면 상처 받는다구요."

    "상처?"

    이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에르카나를 노려보았다.

    핵폭탄이 터져도 생채기 하나 날까 말까 한 마왕이 집어 던진다고 상처라니!

    니가 그런 일로 상처가 생길 거면 보통 여자는 머리만 쓰다듬어도 대가리가 터지겠다!

    "그리고 달링을 달링이라 그러지, 뭐라고 해요?"

    "이혼했잖아! 이혼!"

    "누가? 나는 한 적 없는데!"

    "크윽."

    이지혁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좀 사람 좀 놔줘. 내가 피가 말라 죽겠다."

    어깨가 들썩이는 이지혁의 모습을 보고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결혼은 다 그런 거예요."

    "크아아아악!"

    이지혁이 발악하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서아영이 그를 꾹 잡아 다시 앉혔다.

    "자자, 그러지 말고……."

    "으응?"

    "이야기를 해봐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도통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네."

    "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둘이 어떻게 만난 건데요?"

    "응?"

    이지혁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데 여기서 썰을 풀기 시작하라는 건가.

    최정훈 역시 둘을 만류했다.

    "여기가 어딘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기요?"

    "백악관입니다. 아직 포위도 안 풀렸어요. 이제 슬슬 여기도 비워줘야죠."

    "아, 그러네요."

    서아영이 동의하자 최정훈이 슬금슬금 이지혁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저… 이지혁 씨."

    "네……."

    "일단은 여길 비워주고 우리나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럼 그러세요."

    "다른 사람은 상관없는데, 저……."

    이지혁이 멍한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최정훈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애써 억누르며 이지혁에게 부탁했다.

    "저분도 데리고 가줘야 할 것 같은데."

    "누굴요?"

    "저 에르카나라는 분, 이지혁 씨 부인 말입니다."

    "아니라고오오오오오!"

    이지혁이 처절하게 절규했지만, 최정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채 말을 이었다.

    "아니든 맞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단은 한국으로 가야 하니까 준비해 주십시오. 저는 나가서 크리스토퍼와 접선하고 오겠습니다."

    "왜 그걸 최정훈 씨 마음대로 정하는 건데요!"

    "그럼 여기 계속 계실 겁니까?"

    "……."

    "저도 뭐, 딱히 저…분을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은 건 아닙니다. 어느 미친놈이 마왕을 자기 나라로 데려가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일단 이지혁 씨와 관계가 있다니까, 무엇보다 부인이라니까요."

    "아니라니까……."

    이지혁은 이제 저항의 의지를 상실했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최정훈은 안쓰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럼."

    최정훈이 밖으로 나가자 이지혁은 절망 어린 한숨을 지었다.

    * * *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

    "일단은 소강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왕은?"

    "…이지혁 씨의 옆에 찰싹 붙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어이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진짜였던 모양이군요."

    "그런가 봅니다."

    "허참, 거, 마누라라니."

    크리스토퍼가 혀를 찼다.

    "보통 일이 아니군요. 진짜 보통 일이 아니야."

    "조용히 해결될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미스터 최, 결혼 안 해봤죠?"

    "네?"

    "결혼을 해봤으면 그리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인데 말이죠."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 유부남들의 공감대에는 영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대체 결혼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확고부동하게 이지혁 씨에 대해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겁니다. 이건 권력관계의 지각변동이나 마찬가지예요. 이번 일을 그리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듣고 보니……."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렇게 심각해질 수도 있구나.

    "그런데……."

    최정훈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저쪽 구석에 포승줄에 묶여서 제압되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 사람들은?"

    "아, 별거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별거 아니라고 하기에는……."

    잡혀 있는 사람들 옷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훈장들이 장난이 아닌데?

    저런 정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면 고위층일 텐데 말이다.

    "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인데요?"

    "그럴 겁니다. 참모총장이니까요."

    "네?

    내가 잘못 들었나?

    참모총장?

    그러니까 육군 참모총장할 때 그 참모총장을 말하는 건가?

    최정훈은 멍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참모총장? 진짜 육군 참모총장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분이 왜 저기에?"

    "반란군 놈의 새끼는 저런 대접도 과한 거죠."

    반란?

    최정훈이 모르는 사이에 반란이라도 일어났나?

    "그게 대체 무슨?"

    "뭐, 자세히는 아실 것 없습니다."

    능력자와 몬스터에 관련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미군의 모든 명령권이 대통령에게 귀속되고, 대통령이 그 임무를 이행할 수 없을 시 국방장관이 아니라 크리스토퍼에게 명령권이 위임되게 되어 있었다.

    결국 크리스토퍼는 대통령의 명령과 같은 권한을 지니게 되는데, 그걸 거부하고 단독 행동을 벌인 것은 명령불복종만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리한 행동으로 대통령을 죽일 뻔하기까지 했으니, 당장 구속당한다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최정훈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으음, 제가 못 볼 걸 봤네요."

    "괜찮습니다, 미스터 최. 미국의 치부이기는 하지만, 당신은 우리의 동지이니까요."

    '동지라…….'

    저걸 보여준 것도 실수는 아니겠지?

    그래, 이만한 사람이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지. 보나마나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연출한 장면일 것이다.

    "매우 부담되는 경우겠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겠죠. 물론 우리는 동지이며, 앞으로도 함께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귀국의 대통령이 하는 말보다는 더 신뢰가 가겠군요. 지금까지 이지혁 씨와 최정훈 씨가 보여준 행동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당신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 걱정 마시길."

    둘은 서로 손을 맞잡았다.

    각각 머리에 든 생각은 다르겠지만, 이 순간 겉으로 보기에 둘은 완벽한 우방이자 동료였다.

    "그런데… 그 에르카나라는 마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은 한국으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이곳에 계속 놔두는 것도 문제겠지요. 일단 이지혁 씨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잘못했다가는 외교 문제로 비화될 우려도 있고."

    "설마 저희가 그런 것까지 문제 삼겠습니까? 지금까지 이지혁 씨가 해주신 게 얼만데."

    그리고 그만큼 받아 처먹기도 많이 받아 처먹었지.

    최정훈은 가만히 크리스토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크리스토퍼가 지금은 저자세로 나오고 있지만, 그건 당장의 이익을 위한 처세일 뿐, 그의 가슴 안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져다주는 자부심이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고깝겠지.

    자신의 반도 살아오지 않은 나이의 동양 청년을 상대로 동지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런 기색을 겉으로는 조금도 내보이지 않는 것이 크리스토퍼의 능력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잡아먹히진 말아야겠지.'

    주도적으로 끌고 가진 못하더라도 손해는 보지 않아야 한다.

    그와 국가와 이지혁을 위해서 말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벌써 말이오? 이지혁 씨가 좋아하는 햄버거라도 먹이고 보내고 싶은데……."

    "상황이 상황이라 느긋하게 대화를 하고 있을 틈이 없네요."

    "그렇긴 하지요. 매우 아쉬운 일이오."

    "그리고 참고로……."

    "으음?"

    "이지혁 씨는 버거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음식은 다 좋아합니다. 특히 단것, 그리고 고기류를 선호하는 편이지요."

    "…고급 정보로군. 참고하겠소."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출발 전에 무전을 해드릴 테니, 저희가 떠나기 전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시지 말기 바랍니다. 자극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자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쪽이 더하오. 아, 그리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크리스토퍼가 은근히 최정훈에게 다가와 귀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지혁 씨와 그녀의 관계는 어떻소? 이지혁 씨가 주도권을 잡고 있소?"

    그리 묻고는 있지만, 말투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공처가인 것 같습니다."

    "심하오?"

    "굉장히."

    "쯧쯧."

    크리스토퍼의 경험상으로는 이상하게 바깥에서는 유능하고 잘나가는 인물일수록 안에서는 공처가인 경우가 많았다.

    마누라가 던진 휴대폰에 맞아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돌아다니던 전직 대통령처럼 말이다.

    "넘버원이 바뀌었군."

    "아직은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다른 나라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는 며느리에게만은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들이 있지요."

    최정훈이 씨익 웃었다.

    이제 정말로 이지혁의 어머니가 마왕보다 무서운지가 증명될 시간이었다.

    * * *

    우우웅!

    NDF의 청사 앞에 게이트가 열렸다. 이지혁들이 조금은 지친 얼굴로 게이트 안에서 걸어 나왔다.

    "흐음?"

    에르카나는 살짝 불만 어린 얼굴로 이지혁을 향해 항의했다.

    "달링, 옛날보다 게이트가 좀 불안정한 것 같아. 좀 부드럽게 열어주면 안 돼?"

    "……."

    니 머리는 부드럽게 쪼개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지혁이 부들부들거리는 찰나, 최정훈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지혁 씨."

    "왜요!"

    "죄송하지만, 우리 대원들도 옮겨 와야 하는데, 아까 거기로 게이트 하나만 열어주시면……."

    "내가 택시야, 지하철이야!"

    "굳이 따지자면 지하철 쪽이 더 가깝……."

    이지혁의 눈이 치켜 올라가자 최정훈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헤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지혁이 게이트를 열려고 하자 에르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달링."

    "…왜?"

    "지금 뭐해?"

    "사람들 옮겨 와야하니까 게이트 좀 열어달라고 하잖아."

    "옮겨 와? 거기 있던 애들을?"

    "어."

    에르카나가 호호, 웃더니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돌변하여 최정훈을 노려보았다.

    "인간, 네까짓 게 감히 우리 달링을 부려 먹으려 들어?"

    우드득.

    그저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정신적 압박감에서 그치지 않고 육신이 오그라들었다.

    "끄윽."

    최정훈이 뭔가 다급히 변명을 하려 했지만, 제멋대로 뒤틀리는 근육이 입을 열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하지 마."

    "달링!"

    "하지 말라니까."

    "흥."

    에르카나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자 최정훈이 육신을 옥죄던 압박에서 벗어나 거친 숨을 토해냈다.

    "허어억."

    마치 지옥에라도 갔다 온 듯한 고통이었다.

    "너희 같은 쓸모없는 것들을 옮겨준 것만으로도 평생을 감사해야 할 일인데, 감히 달링에게 수고를 끼치시겠다? 정말 벌레처럼 기어봐야 정신이 드려나?"

    "하지 말라고!"

    "응! 달링이 그렇게 말한다면."

    에르카나는 방금 전까지의 눈빛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이지혁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하아아아……."

    이지혁이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래서 얘가 무섭다고! 이래서!

    "그냥 좀 열어주면 되지!"

    "애들 버릇 나빠져. 안 돼. 왜 자기가 그런 수고를 해야 돼? 쟤들이 뭐라고."

    "…사람은 정이라는 게 있는 거야."

    "아, 애완동물 같은 거? 그럼 미리 말을 하지그랬어. 그런데 애완동물치고는 애들이 귀엽지가 않네. 하기야 취향은 다양한 거니까. 우리 달링이 좋아하면 나도 좋아."

    "……."

    이지혁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그 광경을 보는 최정훈의 어깨도 같이 처졌다.

    아니, 저 인간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저만큼 예쁜 여자가 저리 좋아해 주니 자기 같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인데, 뭐가 저리 불만이 많아서 저러는 걸까?

    지금까지 하는 양을 보면 딱히 뭔가 이지혁에게 잘못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이지혁은 팔에 달라붙은 에르카나를 슬며시 밀어내며 손을 휘저어 게이트를 열었다.

    '그런데 효과는 있네.'

    평소 같으면 한참을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느냐며 징징댔을 이지혁이 에르카나가 먼저 나서서 설치자 군말 없이 게이트를 열어주고 있었다.

    이득인 것 같기도 하고?

    게이트를 연 이지혁이 털레털레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이들도 이지혁의 뒤를 따랐다.

    오늘따라 이지혁의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것은 최정훈의 착각이련가?

    * * *

    "아우으으."

    회의실 의자에 앉아 축 늘어진 이지혁을 보며 에르카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달링 게이트 열어서 피곤한가 보다. 마나 좀 충전해 줄까?"

    "…니 마나가 더 없어 보이는데?"

    "헤헤, 알아서 넘어오려다 보니 좀 놓고 왔지. 그래도 나름 잘 뽑아서 추려 왔어."

    이지혁은 얼굴을 감쌌다.

    그 고생을 해서 넘어온 사람이라 애정이 가야 하는데, 왜 자꾸 한숨만 나는가.

    이지혁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부들부들.

    아고, 깜짝이야.

    최정훈은 옆에서 전해 오는 진동에 놀라 돌아보았다.

    무슨 진동기라도 가져다 둔 줄 알았네. 자동 떨림 기능 죽이구요.

    그의 옆에서 정해민이 말 그대로 진동기처럼 떨고 있었다.

    얼마나 부들부들대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지, 진정하시죠."

    "제가 뭘요?"

    뭐지?

    자체 바이브레이션 기능인가?

    노래하면 엄청 잘하겠는데?

    최정훈은 머리를 타고 흐르는 어이없는 상상을 지워 버리며 서아영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서아영이 슬그머니 정해민을 뒤에서 감싸며 자리에 앉혔다.

    "진정해, 언니."

    "크윽."

    정해민이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언제까지 저 꼴을 봐줘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최정훈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두 분은 대체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넹?"

    이지혁이 멍하게 되물어왔다.

    최정훈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분은 인간인데, 다른 한 분은 마왕이라니. 조합이 좀 이상하니까요."

    "이상해?"

    에르카나가 눈을 부라리자 최정훈이 얼른 자세를 낮췄다.

    "그러니까, 두 분이 어색하다 이런 게 아니라 워낙에 극적인 만남이니까… 신기하다, 뭐, 이런 뜻이죠. 제가 뭐 다른 의도가 있기야 하겠습니까? 헤헤."

    서아영의 눈초리가 더 가늘어졌다.

    최정훈은 등 뒤에 와서 꽂히는 서아영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 목을 움츠렸다.

    싸늘하다.

    등 뒤로 차가운 시선이 와 꽂힌다.

    앞에는 전 차원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가 있고, 등 뒤에는 인간 중에 가장 무서운 여자가 있다.

    이 좁은 회의실 안에서 뭐 이런 사태가 벌어진단 말인가.

    최정훈은 눈물을 삼켰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용가리 통뼈라도 마왕 앞에서 각을 잡을 수는 없다니까 그러네.

    마왕한테 납작 엎드린다고 누가 비난을 하냐고!

    여기에 무슨 용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겁쟁이."

    "큭."

    최정훈의 등이 쫙 펴졌다.

    겁쟁이라니! 그런 치욕적인 말을!

    남들은 눈도 안 마주치고 도망 다니는 이지혁을 그동안 피 말리는 심정으로 케어해 온 최정훈이다.

    거침없이 사자 우리에 들어가서 사자랑 같이 사슴을 뜯어먹는 사람도 감히 최정훈을 겁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겁쟁이라니!

    "제가 좀……."

    하하하하.

    평소에는 아니지만, 오늘은 좀 쫄린다.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숙이자 서아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내가 저런 인간을…….

    "어떻게 만났느냐고?"

    다행히 에르카나가 끼어들며 난처해하는 최정훈을 도와주었다.

    "꺅! 그걸 내 입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저기요.

    그 얼굴로 부끄부끄하는 표정 짓지 마시죠.

    이미지랑 엄청 안 맞거든요?

    채찍이라도 들어야 패션의 완성일 것 같은데, 얼굴을 붉히다니!

    최정훈이 딴지 걸고 싶은 심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를 때, 에르카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건 마치 운명 같았지."

    "…지옥 같았다."

    "어쩜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날 수 있는지 몰라!"

    "사고였다."

    "헤헤, 신이 이어준 인연 아닐까?"

    "…라트렐, 이년!"

    에르카나가 정색하고 말했다.

    "달링, 라트렐이랑 나랑은 관련 없잖아."

    "걔도 신이잖아. 그쪽 세계에서는 주신 아냐?"

    "마계랑 베라프랑은 다르지."

    "아, 그러네."

    이 둘을 그냥 대화하게 놔둬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는 듣지도 못하고 계속 삼천포를 헤매게 될 거라 판단한 최정훈이 확실하게 기준선을 잡았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된다!

    "그러니까,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냐구요!"

    "헐, 왜 화를 내요?"

    "인간? 지금 짜증 부린 건가?"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실패다.

    괜히 목소리에 힘 한 번 줬다가 처맞을 위기에 처한 최정훈이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워낙 궁금해서 그렇죠."

    "흐응?"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최정훈이 순간 아찔함을 느끼고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등 뒤에서 누군가 그의 살을 꼬집어 비틀었다.

    "끄으으으윽!"

    이건 진짜 아프다.

    옷이 찢어질 듯한 강력한 악력 앞에 최정훈이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쩌억 벌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정신 안 차릴래요?"

    이걸 뭐라고 하나.

    앞에는 마왕이고, 뒤에는 마녀로구나.

    사면초가가 이럴 때 쓰는 말이네.

    "그렇게 궁금하면 이야기를 해줘야지."

    에르카나가 이지혁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그의 볼에 자신의 볼을 마구 비볐다.

    "그러니까 우리 달링이랑 나랑 어떻게 만나게 됐냐면, 간단해. 우리 달링이 간절한 마음으로 나를 불렀지. 그래서 나는 차원을 넘어 그를 만나러 간 거고! 이보다 더 운명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어!"

    "네?"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내쉬며 에르카나의 말을 해석해 주었다.

    "이지혁 씨가 계약을 위해 소환한 악마가 바로 에르카나 님이었습니다."

    "어, 음, 흑마법이라는 게 계약을 통해 쓰는 건가 보죠?"

    "보통은 그렇습니다. 아니면 흑마력을 공급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

    "아……."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혁이 에르카나를 주유소로 쓰기 위해서 소환을 했다는 거군.

    "그런데……."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흑마법을 쓰는 사람이 굉장히 희귀한가 보네요? 그런 소환으로 만난 건데 그게 운명적이라니."

    "에……."

    아펠드리체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최정훈이 목을 움츠렸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날인가 보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그를 비난하는 것 같은 날이었다.

    "생각을 해보세요. 흑마법을 배우기 위해서 소환을 했다고 하잖아요."

    "예, 그러셨죠."

    "최정훈 씨가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서 체육관에 갔다고 쳐요."

    "네."

    "그런데 첫날부터 국가대표급 사범이 최정훈 씨를 상대해 주겠어요?"

    "그러지야 않겠죠."

    "그런데 이지혁 씨는 흑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마계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었을 뿐인데……."

    "……."

    "마왕이 온 거죠."

    최정훈이 뚱한 얼굴로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저 인간은 강해졌기 때문에 사고를 치고 다닌다는 선입견이 있었구나.

    그냥 인간 자체가 사고 유발자인 것을.

    "어마어마한 일이었죠."

    "운명이니까!"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옆에 찰싹 붙어 부비적대자 이지혁의 입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저거, 영혼인가?'

    악마는 영혼을 갈취해 간다더니!

    방법도 다양하군!

    "그럼 보통 그렇게 연결을 하면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되는 거군요. 그런데 이상한 게, 지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들로 생각해 보자면… 계약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하던데요?"

    보통 영혼이라든가 제물이라든가 그런 걸 바쳐야 하지 않나?

    "맞아요. 보통은 영혼을 넘기는 것을 매개로 계약을 하는 거죠."

    "그럼?"

    이지혁의 영혼이 에르카나에게 종속되었다는 건가?

    그건 정말 심각한 일인데?

    그래서 저렇게 반항도 하지 못하고 넋 나간 얼굴로 저러고 있는 거?

    "그건 아니에요. 이지혁 씨는 영혼을 매개로 계약하지 않았어요."

    "네?"

    "이지혁 씨는 영혼이 없었거든요."

    "……."

    하하, 뭐…….

    별로 놀랍지도 않네, 뭐.

    저 인간이 그렇지, 뭐.

    개념이고 인성이고 제대로 된 거 하나도 없는데 영혼이라고 제대로 붙어 있었겠어?

    하하하하…….

    …이런 미친.

    최정훈의 두통이 극심해졌다.

    * * *

    "그,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영혼이 없다니?"

    아펠드리체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했다.

    "이지혁 씨가 영혼이 없는 사람인 게 아니라 당시의 이지혁 씨는 영혼이 고정되어 있는 상태다 보니 계약의 조건으로 활용할 수가 없었죠. 베라프 한정으로는 영혼이 없다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구요."

    "…죄송합니다만,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사람이라서."

    "으음, 인간의 지능에 맞춰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렵네요."

    그 인간을 원숭이 취급하는 발언은 매우 거슬리는데요?

    당신들 입장에서야 그렇다 치지만, 개를 키우는 애견인들도 개 앞에서 '너는 개 같아서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하지는 않습니다만?

    그게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때는 진짜 깜짝 놀랐어."

    에르카나가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따져 보자면 지금 최정훈이 놀란 것도 만만치 않겠지만 말이다.

    "몇 천 년 만에 소환돼서 그쪽으로 넘어간 것도 놀랄 일이었는데, 소환자가 영혼이 없잖아. 깜짝 놀랐어, 진짜."

    "하아아……."

    이지혁이 영혼이 빨린 듯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너였냐."

    "흐응. 달링이 날 부른 거잖아."

    "끄으응."

    이지혁이 얼굴을 감쌌다.

    망할!

    그저 시키는 대로! 교본에 적혀 있는 대로 소환진을 짰을 뿐인데!

    그놈의 흑마법 비서를 손에 넣기 위해 십 년은 족히 애썼는데, 그렇게 손에 넣은 비서로 소환한 게 마왕이라니!

    그리고 그 마왕이 하필이면 에르카나라니!

    불행의 시작이었다.

    * * *

    "뭐야, 너……. 영혼이 없잖아?"

    그 말을 들었을 때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하아아아……."

    이지혁이 바닥을 꺼트릴 듯 한숨을 쉬어 대자 에르카나의 눈초리가 새침해졌다.

    "달링, 우리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잖아. 표정이 왜 그래?"

    "추억이라……."

    그걸 추억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지나고 나면 미화되는 것이 추억이라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미화가 안 되는데?

    "세상에는 참 다양한 추억이라는 게 있구나."

    이지혁의 눈가에 습기가 차올랐다.

    어떻게 도망 왔는데.

    여기까지 쫓아와서는!

    어머니!

    "여하튼 그래서 우리 달링을 처음 만났지. '헐, 그럼 계약 안 되는 건가요?'라고 묻는 게 얼마나 귀엽던지."

    "……."

    최정훈은 뇌에 물이 차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 지금 그의 두개골을 쪼개보면 뇌가 제멋대로 뒤틀리고 있지는 않을까?

    귀엽다니.

    저 인간이 귀엽다니.

    역시 마왕인가!

    인간과는 도저히 연결시킬 수 없는, 괴이한 취향의 소유자구나!

    "좀 귀엽긴 하지."

    이어진 정해민의 동조 발언이 최정훈의 뇌를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렸다.

    귀여워?

    죄송한데 쌍으로 눈에 뭘 끼셨나?

    맛이 가지 않고서야 그게 할 발언인가?

    내가 뱀 보고 귀엽다는 사람을 보기는 했다마는, 그 사람도 이런 느낌은 주지 않았는데.

    최정훈이 묘한 눈길로 바라보자 두 여인의 시선이 칼날같이 날아와 꽂혔다.

    '이게 여성 상위 시대인가.'

    깨갱, 고개를 낮춘 최정훈의 어깨가 들썩였다.

    서글픈 삶이여.

    "그래서 계약을 안 해주신 건가요?"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 달링이 워낙에 귀엽잖아. 그래서 파격 특가로 계약 해줬지."

    뭔 백화점 세일하는 것도 아니고, 파격 특가는 또 뭐야?

    "그게 원래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겁니까?"

    "응?"

    에르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내 마음대로 계약한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네, 그러시겠죠. 그러실 것 같습니다.

    저도 딱히 불만이 있던 건 아니에요.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긴 한데, 나야 뭐 괜찮아. 그랬으니 우리 달링을 만났잖아! 꺄아!"

    이지혁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마구 부비는 에르카나.

    그 부비부비가 이어질수록 이지혁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는 것은 그저 최정훈의 착각이련가.

    "그렇게 만나서 혼인하신 거군요."

    "아니, 아니지."

    에르카나가 단호히 손을 저었다.

    "그건 벌써 천 년은 지난 이야기고! 그 이후로도 인연이 계속 이어지다가 그리된 거지! 그렇게 간단히 기분파로 만난 사이가 아니란 말씀!"

    "…아, 네."

    뭘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던 최정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달링,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오래 걸렸어! 이제 우리 알콩달콩하게 살아."

    "으아아아아!"

    임계점에 도달한 이지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에르카나를 집어 던졌다.

    에르카나는 뭐가 좋은지 날아가면서도 꺄하하, 웃어 댔다.

    "알콩달콩은 얼어 죽을! 마왕 놈들이 심심하면 쳐들어오고, 베라프고 뭐고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도 미친 듯이 쳐들어오는데, 알콩달콩은 무슨 얼어 죽을 알콩달콩이야!"

    "걔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끼리 잘살면 그만이지!"

    "세계가 망하는데! 그리고……!"

    이지혁이 손을 부르르 떨면서 에르카나를 가리켰다.

    "우리 이혼했잖아!"

    "응? 언제?"

    "내가 이제 같이 안 살 거라고 했잖아!"

    "그건 달링 말이고, 나는 동의한 적 없는데? 원래 이혼이라는 것은 쌍방의 동의가 필요한 일 아닌가?"

    "크… 크윽."

    에르카나의 당연한 논리에 할 말이 없어진 이지혁이 몸을 떨었다.

    악마 같은 년!

    아니, 악마 맞나?

    아이고, 세상에. 내가 어쩌다가 저런 여자랑 얽혀서 아직까지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그 모습을 보던 최정훈이 아펠드리체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물었다.

    "그런데 이지혁 씨는 왜 저렇게 저분을 싫어하는 거죠?"

    "…그러게요."

    아펠드리체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한두 번 본 광경도 아니건만, 생각해 보니 이지혁이 왜 저리 그녀를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따져 보면 최고의 신붓감 아닌가.

    능력 있어.

    재력 있어.

    예쁘기로 따지면 아펠드리체조차 한 수 접어줘야 한다.

    더구나 아펠드리체는 본체가 드래곤의 형상이지만, 그녀는 지금 저 모습이 본체다.

    내추럴 본 미녀란 말이다.

    거기에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고, 마계의 마왕, 그것도 열세 번째 마왕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한 남자에게 저리 애정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인데…….

    "배가 불렀어."

    생각하니 이상한 일이었다.

    이지혁이 도끼눈을 뜨고 둘을 돌아보았다.

    "내가 뭐!"

    "아니,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당신들도……."

    이지혁의 눈에서 마음의 땀이 흘러내렸다.

    "살아봐요. 한 번 살아봐!"

    언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이 허무를 북돋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러는 걸까?

    "저분이 뭘 잘못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이지혁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백 년도 못 사는 사람들 중에……."

    "응?"

    "이혼하는 사람들이 반이 넘잖아요!"

    "그렇죠."

    "천 년을 같이 산다고 생각해 봐요."

    "……."

    아, 그거 뭐랄까…….

    생각하니 좀 무시무시한 것 같기도 하고.

    "진절머리가 나……."

    이지혁이 머리를 잡고 마구 긁어 댔다.

    "아, 비듬 떨어져!"

    정해민의 타박에도 이지혁은 넋 나간 듯 머리를 긁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이지혁이 뇌까렸다.

    "이제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올 줄이야."

    "헤헤."

    분명 자기 욕을 하는 것 같은데 에르카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반쯤 늘어진 이지혁의 가슴을 안고 머리를 부벼 댔다.

    "…그런데 저분, 제가 보기에는 말입니다."

    "네."

    "악마 중에서도 제가 아는 그런 종류 같은데요. 너무 전형적인 모습이라 다른 게 생각이 안 나서 그런데……."

    "맞을 겁니다. 이 세계에도 저들에 대한 언급이 있더군요."

    "그럼 설마?"

    "네, 서큐버스입니다."

    화가 난다.

    뭔가 마구 화가 난다!

    서큐버스라면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색기 넘치는 악마가 아닌가!

    사람을 홀리는 게 주 업무라는 서큐버스가 이지혁을 홀리는 게 아니라 이지혁에게 홀려서 저러고 있다니!

    직무 유기 아닌가!

    최정훈은 뭔가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부들댔다.

    "그, 그럼 혹시?"

    최정훈의 뜬금없는 질문을 아펠드리체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예상하시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종족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 부분 때문에 그녀가 이지혁 씨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이니까요."

    "네?"

    "그녀는 서큐버스 퀸입니다."

    "그렇죠."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여성형의 서큐버스와 남성형의 인큐버스를 나누는 것 같던데, 실제로 둘은 전혀 다른 종족입니다. 몽마라고 통칭되기는 하지만요."

    "다르다구요?"

    "네. 번식 행위를 통해서 정기를 빨아먹는 게 그들의 방식인데, 서로 정기를 빨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서큐버스는 남자를 유혹하고, 인큐버스는 여자를 유혹해서 생명력을 갈취한다고 하는데, 둘이 서로 종족번식을 하려 한다면 서로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꼴이 아닌가.

    "생태가 비슷해서 그렇지, 둘은 전혀 다른 종족입니다. 그리고 번식 역시 다른 형태로 하지요. 둘은 다른 종족에게서 씨를 받거나 씨를 뿌리는 것으로 종족을 이어갑니다."

    "흐음……."

    "문제는 거기서 발생하죠."

    "네?"

    "악마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마들도 사랑을 하고, 애정을 가지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들은 악마가 아니라 마족이라는 하나의 종족이니까요."

    "아……."

    "되레 고등 차원의 생명체이다 보니 사랑도 복합적이고 좀 더 진솔하죠. 그런데 서큐버스는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를 죽이게 됩니다."

    "아……."

    최정훈은 아펠드리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딜레마였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과 된다니. 생각해 보면 서큐버스라는 것은 매우 슬픈 종족이 아닌가.

    "게다가 에르카나 님 같은 경우에는 그냥 서큐버스도 아니고, 서큐버스 퀸입니다. 웬만한 마왕급들조차 그녀와는 정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겠네요."

    눈빛만으로 심장이 멎을 지경인데…….

    상상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지혁 씨는 상관없거든요."

    "네?"

    "베라프에서의 이지혁 씨는… 그러니까 죽지도 않고 정기를 빨려도 순식간에 회복를 하는데다 원상 복귀가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리셋이 되는 부조리, 그 자체의 생명체지요. 게다가 인간형이기도 하고."

    "아, 그렇구나."

    확실히 저쪽 세계에서 이지혁은 불사신이었다고 했으니까.

    이곳에서 상처 입고 피 토하는 이지혁이 익숙하다 보니 그런 사실을 잊게 된다니까.

    "그럼 그래서?"

    에르카나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댔다.

    "아니다, 인간."

    에르카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런 이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지. 내가 태어난 이후로 나의 마음을 훔친 사람이 여기에 있는 달링뿐이라는 게 중요한 거야. 중요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니까."

    그거… 서큐버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정체성을 찾으시죠.

    그냥 서큐버스도 아니고, 서큐버스 퀸이시라는 분이 그게 할 말입니까!

    "하아아아아아……."

    어쩐지 이지혁의 짙은 한숨이 이해가 가는 최정훈이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정이 드신 겁니까?"

    "이야기하자면 긴데……."

    에르카나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입을 열었다.

    * * *

    "처음에는 나도 깜짝 놀랐지. 몇 천 년 만에 소환되어 베라프로 갔는데, 적어도 아크 메이지급은 되는 애가 소환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가보니 마나라고는 없는 어린애가 있으니 내가 얼마나 황당했겠어."

    "그럼 그때 그냥 가지."

    "헤헤헤헤, 달링도 참. 농담도 잘해."

    농담 아닌 거 같은데요.

    저런 표정으로 누가 농담을 합니까?

    "끄응."

    이지혁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에르카나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사실 심심하잖아. 그래도 몇 천 년 만에 외유 나온 건데. 그래서 이 기회에 연결 고리 좀 만들어놓아야겠다 싶어서 계약해 줬지."

    "이지혁 씨 입장에서는 행운이군요."

    행운?

    이지혁은 아주 쉽게 말을 내뱉는 최정훈의 입을 좌우로 쫙 벌리면 어디까지 벌어질지 알아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니지. 우리 달링을 만난 내가 행운인 거지. 헤헤."

    "……."

    최정훈이 얼굴을 감쌌다.

    이상하다.

    이 커플 뭔가 묘하게 잘 어울리면서도 꼴 보기가 싫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를 보는 것 같은, 짜증나는 그런 심정?

    근데 외모 밸런스가 너무 안 맞잖아.

    이지혁이야 영 못 봐줄 얼굴은 아니라고 해도 객관적으로 잘생겼다고 평하기는 무리가 있는 얼굴인데, 에르카나는 너무 눈이 돌아가게 예쁘니까…….

    음…….

    "오징어가 따로 없군."

    "뭐요?"

    "아, 아닙니다."

    최정훈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세상은 상대적인 것 아닌가!

    저런 미녀 옆에 웬만한 미남을 가져다 놔도 외모가 확 죽을 텐데, 이지혁이 있으니… 진짜 뭐랄까, 저건…….

    이지혁도 어디서 못생겼다 소리는 안 들을 텐데, 저건 미녀와 야수도 아니고 미녀와 오크 수준이다.

    물론 이지혁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저런 모습을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심심하면 달링을 보러 갔지."

    "이곳과는 다르게 베라프라는 곳과 마계는 이어져 있는 겁니까? 여기로는 넘어오려면 엄청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 같은데."

    "별다를 것 없어."

    "그런데 어찌 그리 쉽게?"

    "어머, 너 바보구나?"

    "……."

    살면서 바보라는 말 처음 들어봤거든!

    니들이 마족이면 마족이지, 나도 사람 중에서는 상위 0.1%에 속하는 지능의 소유자란 말이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네. 난 서큐버스 퀸이야. 나와 계약된 이의 꿈을 통해서 언제나 만나러 갈 수 있지."

    "…잠 좀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아……."

    그래서 사람이 저렇게 삐뚤어졌구나.

    어쩐지.

    이계로 넘어가기 전에는 딱히 사고 친 적도 없던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개차반이 되어 있다 싶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

    "그렇게 자꾸 보다 보니 우리 달링이 너무너무 멋진 남자인 거 있지!"

    "설마요."

    "뭐라고?"

    "아니요. 이지혁 씨 정도면 정말 멋진 남자죠."

    "그렇지? 헤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으아, 여기 대나무 숲이 어디에 있더라!

    최정훈의 속이 썩어 들어가든 말든 에르카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자상하고 부드러운지."

    '거짓말.'

    "이해심도 많고, 배려심도 많고……."

    '입에 침이라도 말라야지!'

    "거기에 얼마나 로맨틱한지."

    최정훈은 더 이상 에르카나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에게 관심을 끊는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이지혁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해명해 보시죠."

    "……."

    해명을 요구하는 태도가 얼마나 단호한지, 이지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솔직히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그건 그래."

    "…삼중창하지 말고."

    이지혁은 헛기침을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들 같으니라고. 조금 편 들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뭘요?"

    "비교 기준이 뭔지."

    "아……."

    최정훈은 납득할 수 있었다.

    저 에르카나가 살아온 시간 동안 봐온 수컷들이라고 해봐야 전부 마족 아니면 마왕일 텐데.

    마왕이나 마족에 비한다면 이지혁도 로맨티스트고 예의 바른 사람이지.

    그건 확실했다.

    "하, 하지만 그리 따지면 베라프에도 남자는 있지 않습니까?"

    "마족 기준으로 20년이면 사람 기준으로는 20일이에요. 20일 만에 늙어버리는 남자랑 뭘 해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죽었는데."

    "아……."

    그거 확실히 그렇겠네.

    "그리고 베라프 남자 놈들도 마왕이랑 다를 것도 없어요. 여기 조선시대 사람들이 거기로 넘어가면 여성 인권주의자 취급 받을 거예요. 걔들은 여자를 사람으로도 안 본다니까. 내가 처음에 갔다가 얼마나 충격을 먹었었는지."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라프의 문명 수준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현대의 해외만 보더라도 과거 조선시대보다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가 숱했다.

    그러니 베라프의 여성 인권 수준이 처참하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데에 떨어졌으니."

    "하……."

    그거 뭐랄까.

    전설적인 여성 인권주의자의 탄생이로군.

    일반적인 현대인의 상식만 가지고 가도 거기서는 거의 이단 수준일 테니까 말이다.

    "응응! 사람이 얼마나 자상한지, 막 녹는 것 같았다니까."

    "…그냥 녹았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 달링은 농담도 참 잘해. 꺄하하하하!"

    저거, 일부로 맥이는 건가?

    아니면 진짜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느 쪽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지혁은 그런 반응이 익숙한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청혼했지! 그때 달링의 놀라는 눈이란!"

    최정훈이 뚱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외로웠어."

    당신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에 떨어져서 괴물 취급당하면서 살아봐. 좋아해 주는 사람 하나 나타나면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

    최정훈은 이지혁의 마음속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필요 없고, 얼굴만 봐도 저는 대환영입니다."

    쫘아아아악!

    "꺽!"

    등 뒤에서 작렬하는 타격감에 최정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죽음인가?

    대체 뭘로 후려치면 이런 고통이 오는 거지?

    "옷 찢어진 거 같은데?"

    희미하게 정해민이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프겠다."

    얼마나 심하게 맞았으면 마왕도 걱정을 해주겠는가.

    최정훈이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아펠드리체가 손을 내밀었다.

    "힐."

    뭔가 새하얀 빛이 스며든다 싶더니, 고통이 사라졌다.

    "주, 죽을 뻔했잖습니까!"

    "죽었으면 좋을 텐데."

    무섭게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최정훈은 김다솜이 빙의한 듯 한기를 내뿜고 있는 서아영의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지혁이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말했다.

    "…몰랐지,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걸."

    "아니지, 달링. 축복이지."

    "그걸 천 년이나 할 줄이야."

    "천 년밖에 못한 거지."

    "제발."

    이지혁이 눈물을 뽑으며 말했다.

    "멀쩡하게 잘 있는 사람을 강해져야 한다고 온갖 마법으로 후려치지를 않나! 가만히 있는 사람을 수련해야 한다고 마계로 끌고 가지를 않나!"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니까…….

    마왕들이 치를 떠는 이지혁의 마계 생활의 원인이 여기 있는 이 여자라는 거로군.

    따지고 보면 마계의 진정한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강해졌잖아. 헤헤."

    "난 그냥 현실로 돌아오기만 하면 됐다고! 방법은 다른 것도 있었다고!"

    "에이, 안 돼. 남자는 능력이지. 성공해야 할 것 아냐. 이만큼이나 내가 내조했으니 우리 달링이 다른 마왕들까지 찜 쪄 먹은 것 아니겠어?"

    인간에 불과한 한 남자가 날고 기는 마왕들을 후려치고 다녔다기에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이런 사연이 있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행히 최정훈 대신에 참전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까지 부인의 권리를 주장하시겠다?"

    "흐으으응?"

    에르카나가 고혹적인 교성을 내며 정해민을 돌아보았다.

    "왜?"

    "본인이 싫다잖아요."

    "싫다고? 달링이?"

    에르카나가 싱긋이 웃으면서 이지혁의 뺨을 쓰다듬었다.

    "넌 잘 모르는구나? 우리 달링이 얼마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인데. 지금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날 밀어내지는 않잖아. 그것도 모르니 너는 가망 없겠다."

    "이익!"

    정해민 씨.

    그러다가 연구소 끌려가겠어요. 진동도 적당히 하셔야죠.

    "너는 왜 말이 없어! 싫으면 싫다고 똑바로 말을 해야지!"

    화살이 이지혁에게로 돌아갔다.

    "끄으응."

    이지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말로 해서 될 일이면 말을 했지. 내가 언제 입 쉬는 거 본 적 있냐?"

    "아니."

    확실히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말은 말이 통하는 사람한테 하는 거야."

    이지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죽하면 도망까지 쳤겠어."

    "어머?"

    에르카나가 놀라서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달링, 도망친 거야?"

    "……."

    이지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에르카나의 눈꼬리가 쭉 올라갔다.

    화가 났나?

    최정훈이 팝콘 튀기는 심정으로 둘을 주시했다.

    이거, 극적인 장면이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어구, 우리 달링 힘들었구나. 내가 더 잘할게. 앞으로는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 달링의 마음을 달래줘야겠네."

    "흐흐흐흑."

    최정훈은 이지혁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오열하는 이지혁을 보자 자신의 가슴까지 덩달아 아파왔다.

    저 사람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 안 통하네요."

    "장난 아니다."

    "쩐다."

    이지혁이 왜 별말도 못하고 저러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열정이 이상한 쪽으로 발휘되는 케이스였다.

    "해결책이 하나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해결책?"

    서아영의 말에 정해민이 반색하며 바라보았다.

    "언니는 지금까지 유부남을 만난 거나 마찬가진데 머리채는 못 쥐어뜯을망정!"

    서아영의 일갈에 정해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채는 뜯더라도 일단 상황은 해결해야지. 그리고 천 년 동안 거기 있었다잖아."

    "근데?"

    "천 년 노총각이랑 만나는 게 더 찝찝한 거 아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거 좀 아리송하네.

    유부남이라 찝찝하기는 한데, 따져 보면 천 년 넘게 총각인 것도 진짜 끔찍한 것 아닌가.

    무능력의 극치랄까?

    어느 쪽이 더 나은 건지 순간 구분이 가지 않기 시작했다.

    "그냥 다른 놈을 만나면 되는 거죠."

    명쾌한 최정훈의 대답에 정해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닌 건 알죠?"

    "죄송합니다."

    정해민이 최정훈을 일별하고는 서아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해결책이 뭔데?"

    "쟤는 마왕이잖아."

    "응."

    "그러니 모르겠지."

    "뭘?"

    "한국에서 결혼하려면 시월드를 겪어야 한다는 걸 말이야."

    "……."

    "마왕이 별건가. 시어머니보다 무서운 게 어딨어?"

    제아무리 악마가 무섭고, 귀신이 무섭고, 마왕이 무섭다고 해도 어느 날 집에 들이닥치는 시어머니보다 무섭겠는가.

    원래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운 법이었다.

    게다가 이지혁의 어머니면…….

    "한 번 보자고."

    서아영이 씨익 웃었다.

    "마왕이 무서운지, 엄마가 무서운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좀 헷갈리는데?"

    * * *

    그 시각, 미국.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미국 대통령 브루노 로런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깨어나셨습니까?"

    비서들이 우르르 그의 옆으로 달려왔다.

    "내가 왜?"

    "기억이 안 나십니까?"

    혼란스러워하던 브루노가 천천히 기억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끔찍한 일이군."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다.

    1차 세계대전이 지난 이후로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언제나 평가 받아오던 미국의 대통령.

    바로 그가 그 미국의 대통령인 것이다.

    그런 그가 인질이 되어 협박을 받았다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인데, 그 범인에게 아무 대항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분명히 그는 범인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주체적인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자존심과 품격을 위해서 자살한다는 선택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홀리지만 않았다면…….

    '위험해.'

    이번에는 다행히 별 피해 없이 끝났다.

    하지만 다음에는?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과연 별 피해 없이 끝날 수 있을까?

    그녀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그가 일하고 있는 곳까지 들어왔다.

    다음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녀가 다른 목적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만약 세계 파멸을 원하는 자가 그녀처럼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면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능력자라는 건 너무나 위험하군."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브루노가 고개를 돌리자 침중한 얼굴로 크리스토퍼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네가 나서주었군."

    "네, 제가 했습니다. 그 와중에 저 골빈 놈들이 사고만 안 쳤더라면 더 편히 모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쯧쯧."

    굳이 더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마 국방부에서 또 저질렀겠지. 창문에서 뭔가가 뚫고 들어와 에르카나를 공격하는 것을 그도 보았으니까. 그 이후로 의식이 끊긴 걸 보면 그들이 저지른 것 때문에 그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브루노는 딱히 그들에게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다.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차라리 거기서 그가 죽었더라면 모양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니까.

    안타깝지만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죽음으로 세계를 뒤흔들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한 자리일 뿐이다.

    "언론은?"

    "통제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퍼지겠죠."

    "일단 최대한 막아보게."

    "군사훈련이었다고 둘러대고는 있습니다만, 타국 놈들이 과연 가만히 입을 닫아줄지는 의문입니다."

    "노력은 해봐야지."

    브루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크리스토퍼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고맙군."

    크리스토퍼는 담배보다는 시가를 더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리 담배를 챙겨 왔다는 것은 그를 위해 따로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이런 배려성이 있으니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거겠지.

    "이봐, 크리스."

    "예."

    "내가 너무 늙었나?"

    "…객관적인 나이로 보자면 각하나 저나 젊은 나이라고 하기는 힘들겠지요.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할 나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늙었나?"

    크리스토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찰칵.

    입에 문 담배에 불이 붙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내가 늙은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군. 예전이었다면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이리 나약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은 이 모든 일을 해결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는 생각만 확고해지니 말이야."

    "충격이 크셔서 그렇습니다."

    "일시적인 현상이면 좋겠지. 그런데 말이야… 크리스토퍼 맥클라렌."

    브루노가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라면 이 상황에 대한 대처를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크리스토퍼는 말없이 브루노를 바라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이 노신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크리스토퍼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화당 최후의 보루라 불리며 전면에 나서지 않던 이 역전의 용사를 대통령의 자리로까지 이끈 것은 혼란스러운 세상이었다. 입으로 논하던 정치인들이 갈 곳을 잃고 헤맬 때 몸으로 움직이던 그는 빠르게 당권을 장악하고 미국을 장악했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이라면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끝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겠지."

    브루노 역시 크리스토퍼의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렇고, 크리스토퍼도 그렇고… 이 상황에서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은 서로 알고 있는 바였다.

    "그들 역시 인간이라는 것은 잊지 않고 있다네."

    "예."

    "하지만 요즘 들어 그 인간이라는 것도 한 가지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 믿어온 것이 몇 백 년이나 되었지?"

    "각하."

    "알아. 헛소리겠지. 하지만 십 년 뒤에도 이 말이 헛소리일까?"

    "각하에게 위해를 끼친 존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네. 그런데 말일세……."

    "예?"

    "그들은 인간과 그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크리스토퍼는 떨리는 눈으로 브루노를 바라보았다.

    이 거인의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전에 아펠드리체라는 자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지."

    "예. 이지혁의 지인이죠."

    "지인이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군. 인간이 아니니까 말일세."

    크리스토퍼가 겸연쩍게 웃었다.

    하지만 브루노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떨기만 했네.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그저 떨 수밖에 없었지. 수많은 능력자들을 보아왔지만, 그들 역시 통제 가능한 존재들이고, 내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그녀는 격이 다르더군. 뭐라고 할까, 어릴 적에 아버지가 아끼던 캐딜락에 낙서를 하고는 불같이 화가 난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떨던 때가 생각났다고 할까?"

    "각하, 그건 너무……."

    "그저 내 심정일 뿐이지. 하지만 내가 그런 기분을 느낀 것 역시 사실이었네. 다만, 그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지. 적어도 그녀는 이성적이고, 말이 통하는 상대였으니까. 그녀의 입장에서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적어도 그녀와 같은 존재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성적인 대처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네. 어떻게든 조율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말일세……."

    크리스토퍼는 눈을 감았다.

    브루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는 그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말이 이토록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크리스토퍼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지배할 수 있는 압도적인 존재들을 상대로 우리는 대체 뭘 해야 하는 건가."

    "그녀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다른 이들은 특별하지 않고?"

    "그들 모두가 특별하죠."

    브루노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떨어내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보게, 크리스."

    "예, 각하."

    "빤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네. 능력자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인류라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효율적으로 밀어 넣는 것이 내가 할 일이겠지. 하지만 인류라는 개념에 함께 묶여 버린 그 능력자들이 인류의 정점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만큼은 나도 막아낼 수가 없다는 말일세."

    "……."

    "인간은 자신보다 하등하다고 생각되는 존재들과는 선을 긋기 마련일세. 처음에는 종족이고, 그다음에는 인종이 되었지, 그리고 이제는?"

    "인간은 이성으로 평등을 얻어냈습니다."

    "이성? 이익이 아니라?"

    "저는 이성이라 믿습니다."

    브루노는 피식 웃었다.

    "자네가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저들에게도 있었으면 좋겠군."

    "각하."

    "약자는 강자에게 이성을 바라고, 강자는 약자에게 굴종을 바라지. 지금까지는 나름 밸런스가 맞았다는 말일세. 아무리 능력자들이 대단하고는 하나 그들은 소수고 다수의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이제는 다수의 힘으로 짓누를 수 없는 이레귤러들이 등장하고 있구만. 자네가 좋아하는 그 이지혁 같은 사람 말이지."

    "그들이 없다면 우리는 게이트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인류는 갈수록 위기에 몰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게이트와 타 차원의 침범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이 세계를 지키고 있는 능력자들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각하, 그들과 몬스터들을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인간입니다."

    "인간……. 그래, 인간이지. 그런데 크리스."

    "예."

    "그래서 나는 무섭네."

    "…네?"

    브루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그저 배척하면 된다. 그들이 좋은 감정으로 이 세계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확고하게 정해진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대체 어떻게 규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규정한 것을 능력자들은 받아들일 것인가.

    "인간이 아닌 자들은 무서울 게 없지. 그저 끝까지 싸우면 되니까. 인류의 절멸은 두려운 게 아니야. 싸우고 싸우다가 버틸 수 없다면 그걸로 끝인 거지. 하지만 크리스, 자네도 알다시피 인간의 적은 언제나 인간이지."

    "……."

    "그래서 나는 두렵네. 그들은 인간이니까. 우리 인간의 적이 될 수 있는 존재니까 말일세."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저었다.

    "어렵습니다."

    "늙은이가 흰소리를 했구만. 신경 쓰지 말게. 일단 업무에 복귀해야겠어."

    "건강을 챙기는 것이 우선입니다."

    "진심인가?"

    크리스토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몸뚱아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 말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정치권에 구르면서 배운 거라고는 처신과 눈치밖에 없네. 이럴 때 자기가 할 일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치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지. 그리고 나는 훌륭한 인간은 못 되어도 훌륭한 정치인이라 자부하는 사람이네. 그러니 이 치렁치렁한 것들 좀 치워주겠나?"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말이 통해서 좋군."

    가볍게 웃는 브루노를 보며 크리스토퍼는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렸다.

    '복잡하군.'

    크리스토퍼의 위치를 감안하면 결코 환영할 수는 없는 발언들이지만, 적극적으로 반발하지 않은 것은 크리스토퍼 역시 대통령이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생각에 사로잡혀 가던 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괜찮다.

    아직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게이트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면?

    게이트 사태로 억눌러 온 일반인과 능력자들의 갈등은 어디로 치닫게 될 것인가.

    '복잡해.'

    답이 없는 문제였다.

    아무래도 능력자들 사이에서 정부의 명령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 보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을 필요는 없으니까.

    "대통령이 깨어나셨다. 가서 도와드리도록."

    데스크를 지나며 말을 남긴 크리스토퍼는 주차해 둔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꺼내 입에 문다.

    불이 붙지 않은 시가에서 느껴지는 달달한 초콜릿 향이 오늘따라 거슬리기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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