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4화 (54/118)
  • [■] 나 안 보고 싶었어? [■]

    ─────

    "휘유."

    럼필드는 스코프 건너편으로 보이는 여인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 아닌데?"

    "뭐가?"

    "몸매가 쩐다."

    "미친놈."

    그의 지원조인 브래들리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아, 스코프 가리지 마."

    "긴장감이 없냐, 긴장감이."

    "긴장감은 무슨."

    럼필드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의 손에 묵직하게 잡히는 대물저격총이 그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특별히 주문 제작된 이 대물저격총은 지금까지 그가 사용해 오던 저격총과는 그 성능이 전혀 달랐다.

    시험 사격을 해보며 얼마나 놀랐던가.

    이 작은 총에서 그만한 파괴력이 나온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확실히 성공해야 한다."

    "껌이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것은 그만큼 럼필드가 긴장했다는 말이다.

    이럴 때 입을 꾹 다물고 침착하라, 침착하라 되뇐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미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저격수들 중에서 최고라 자부하고 인정받는 럼필드이기에 이곳에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긴장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이 끝내주는 걸 처음 사용하는 대상이 저 여자라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말이야."

    "능력자라잖아."

    "능력자는 총알도 안 박히나? 굳이 이런 것까지 쓸 필요가 있나 싶어서 말이야.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 설명이 부족했나?

    "죄송합니다."

    럼필드가 바짝 얼어 대답했다.

    작전에 들어가면 상황에 대한 판단이 그에게 주어져 있다고는 하나 육군 참모총장과 직접 무전을 하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왔다.

    - 긴장을 푸는 것은 좋지만,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이니만큼 너무 풀어지지는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해. 저 제멋대로 노는 능력자 놈들과 크리스토퍼에게 엿을 먹여줘야 하니까 말이야. 우리가 그동안 놀고먹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자네가 증명해야 하네. 저놈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자고.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물론입니다."

    - 그래. 그럼 준비하게.

    럼필드는 두말없이 저격총을 움켜잡았다.

    '이거, 대체 원리가 뭐지?'

    스나이퍼에게 총기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총은 분해가 안 된다는 것이고, 그가 총기를 지급 받은 지가 불과 세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총기에 대한 이해를 할 시간이 부족했다. 영점을 잡고 총기에 익숙해지는 것만 해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손에는 잘 맞아 시간 내로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게 위안이랄까?

    스코프 안으로 눈을 들이밀기 전에 손끝에 침을 바르고 허공에 세운다.

    "너무 구식이야. 모니터는 폼으로 놔뒀나."

    "놔둬. 이게 더 잘 맞으니까."

    목표물까지의 풍향과 풍속을 실시간으로 측정해 띄워주는 측정기와 모니터가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지만, 럼필드는 자신이 해오던 방식을 더 믿었다.

    기계는 편리하지만, 거기에만 의존하다 보면 놓치는 것이 더 많다.

    그런 방식을 맹신하던 놈들이 이 자리에 오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입술을 살짝 핥은 럼필드가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댔다.

    "유리를 통과하면서 각도가 꺾일 거야."

    "브래들리, 좀 내버려 둬. 난 유치원생이 아니라고. 이미 같은 상황을 수없이 시뮬레이션하고, 또 연습까지 하고 왔잖아. 내가 한 시간 동안 부순 방탄유리만 백 장은 될 거야."

    "에이, 백 장까지는 아니지."

    잊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 확인하고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부분이 자꾸 반복되자 짜증이 솟았다.

    '침착하자.'

    이렇게 자꾸 짜증이 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지금 긴장해 있다는 증거였다.

    긴장은 심장을 뛰게 만들고 혈류 속도를 빠르게 만든다.

    몸을 돌처럼 굳히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야 하는 저격수에게 긴장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마친 럼필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스코프에 정신이 집중되자 유리 너머로 소파에 누워 있는 여자가 보인다.

    "제길, 저런 여자를 죽여야 하는 건가?"

    이건 인류적 손실인데 말이야.

    "저건 괴물이야. 현혹되지 말라고."

    "알아, 알긴 한데……."

    그래도 저런 괴물이면 나쁘지 않다고 브래들리는 생각했다.

    - 준비됐나?

    "예."

    - 크리스토퍼가 움직이고 있다. 마인도 넘어왔다. 더는 기다릴 시간이 없어.

    "이쪽은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좋아, 작전을 개시한다. 실패 없이 끝내도록.

    "라져."

    럼필드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브래들리가 그에게 방해되지 않게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오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천국으로 가라고.'

    원리가 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여하튼 성능 하나는 끝내주는 저격총이 지금 그의 손에 들려 있다.

    듣기로는 화약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자기를 이용한다고는 하던데, 그가 알아야 할 사항까지는 아니었다.

    그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저격총이 백악관의 창마다 설치되어 있는 고성능 방탄유리를 단방에 꿰뚫어 버릴 정도로 끝내주는 것이라는 점뿐이다.

    "바이바이, 베이비."

    럼필드가 숨을 멈췄다.

    육체의 반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바람의 방향을 몸으로 느낀다.

    그러고는…….

    탕!

    깔끔한 한 발.

    럼필드가 쏘아낸 총알은 단숨에 대통령 집무실의 방탄 유리창을 꿰뚫고 소파에 누워 있던 여인의 머리에 명중했다.

    "목표 적중. 반복한다. 목표 적중."

    머리에 정확하게 맞은 이상 코끼리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럼필드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손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긴장을 하기는 많이 한 모양이었다.

    "성공했군. 역시 자네야!"

    "이게 뭐 별거라고."

    럼필드는 거드름을 피우며 저격총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그 와중이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브래들리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성공적으로 끝낸 것 아닌가.

    - 상황은?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 확인했나?

    "물론입니다. 그 여자의 이마에 총탄이 박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그 여자가 쓰러진 것도 확인했나?

    "물론……."

    럼필드는 말끝을 흐렸다.

    그랬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보고는 언제나 정확해야 한다.

    - 당장 확인하게! 지금 당장!

    '뭐 이렇게 오버하는 거지?'

    아무리 그녀가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콘크리트 1m도 깔끔하게 뚫어버리는 저격총을 머리에 맞고 살아날 수는 없다.

    이건 상식 이전의 문제 아닌가.

    "총장님?"

    - 당장!

    무전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럼필드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총을 다시 들었다.

    워낙에 거리가 있다 보니 내부를 확인하려면 스코프로 봐야 한다.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댄 럼필드의 눈이 떨렸다.

    "어……."

    대통령 집무실.

    대통령의 책상 바로 뒤로 나 있는 거대한 창.

    그 창에 한 여자가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머리에 총탄이 박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으으으……."

    더욱 두려운 사실은…….

    저 여자가 지금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쪽에서 보자면 지금 럼필드는 개미보다 작게 보일 터인데!

    "대, 대체!"

    그 순간.

    우우우웅.

    창 안이 시커먼 연기로 순식간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 * *

    크리스토퍼는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분노한 그의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저 새끼들 삽질 안 하게 관리하라고 했냐, 안 했냐!"

    - 부,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전달? 전달하면 끝나! 어느 새끼가 저지른 일인지 빨리 파악해서 내 앞으로 끌고 와! 너도 모가지 같이 따이기 싫으면 말이야!"

    -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제기랄!"

    크리스토퍼는 전화기를 바닥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비싼 거 같은데……."

    옆에서 깐죽대는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크리스토퍼는 애써 이지혁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 같은 기분에서 이지혁의 깐죽댐을 듣고 있다 보면 속이 터지다 못해서 핵분열을 일으킬 정도였다.

    "상황 파악해! 당장! 비전 켜고 이쪽으로 상황실 바로 차려!"

    "예!"

    크리스토퍼의 심각한 분위기를 느낀 이들이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니터들이 날라져 오고 그 자리에 바로 천막이 쳐졌다.

    "오, 빠르다. 이것만 연습하나?"

    "……."

    왜 저 새끼의 입에는 음 소거 기능이 없는가!

    그리고 왜 저 새끼의 뇌에는 분위기 파악 기능이 없다는 말인가!

    사람이 상황을 봐가면서 깐죽대야지!

    저렇게 꿋꿋하게 아이덴티티를 지키다니,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여기!"

    모니터가 켜지고 이내 그 안에 외부에서 찍은 대통령 집무실 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끄응……."

    하지만 내부가 시커먼 마기로 가득 차서인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의 생존이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건만."

    크리스토퍼는 절망 어린 눈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누구냐? 어느 놈이야!"

    대충 짐작은 간다.

    아마도 그가 움직이기 전에 공을 세워보려 했던 국방부의 오버 플레이겠지. 그 미친놈들이 뭔가를 저지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만큼이나 단속을 하라고 한 건데…….

    "국방장관, 이 새끼!"

    애초에 크리스토퍼도 처음부터 능력자를 맡아왔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그들과 같은 소속이었을 때가 존재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이가 으득, 갈렸지만, 지금은 그놈들을 족칠 때가 아니었다.

    이 사태만 어떻게 해결한다면 시간은 차고 넘칠 테니까!

    "이지혁 씨!"

    "…이거, 이야기가 좀 다른데……."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백악관을 바라보았다.

    저기 물씬물씬 풍겨 나오는 마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보통 마왕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이 세계로 쳐들어왔으니 처리를 하긴 해야 하는데, 마나의 밀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의 순수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흑마력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 대통령이 위험합니다."

    "에……."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10분만 있다가 들어가면 안 될까요?"

    "어째서죠?"

    "저런 마기면 보통 사람은 아무 위협 없이 대충 10분만 노출해 놓아도 뼈까지 깔끔하게 녹을 거 같은데, 그럼 실종 처리하고……."

    "으아아아아아! 이지혁 씨이이이이!"

    "아, 알았어요. 들어가요, 간다구요. 울지 말고 말해!"

    이지혁이 투덜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갈 거야?"

    "응."

    "같이 가?"

    "으음……."

    이지혁이 쀼루퉁한 눈으로 정해민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위험해 보이니 일단은 나 혼자."

    "그래도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애매하면 텔레포트로 빠져나오면 되잖아."

    "그래요, 같이 가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서아영과 최정훈까지 동조하자 이지혁이 조금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이지혁이 막지 않자 사람들이 뒤를 따른다.

    '얘들은 목숨을 무슨 여벌로 가지고 다니나?'

    마왕이 어떤 것들인지 겪어봤을 텐데도 뭘 믿고 이리 나대는 걸까?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고는 백악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근데…….

    아까부터 나…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응?

    자꾸 오한이 드는데?

    이지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백악관을 응시했다.

    저 안에 분명 뭐가 있긴 한데…….

    "에이, 뭐가 있든 뭔 상관이야!"

    이지혁이 단호하게 발을 옮겼다.

    * * *

    "소수만 가실 생각이십니까?"

    크리스토퍼가 바로 이지혁에게로 따라붙었다.

    "나도 다수로 가고는 싶은데요."

    "예."

    "저 안으로 다수가 어떻게 들어가요. 그냥 날려 버리면 안 된다면서요?"

    "…그렇긴 하죠."

    백악관 안만 아니었으면 어떻게 포위진이라도 제대로 짜볼 텐데, 저 안으로는 다수의 진입이 불가능했다.

    백악관 건물을 포기한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만한 화력을 쏟아부으면 대통령이 무사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아니, 십중팔구는 죽겠지.

    저 안에 있는 마왕이 대통령을 보호해 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보통은 인질이라는 것이 범인의 생명 역시 담보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 경우는 전혀 달랐다.

    대통령이 죽는다고 해서 마왕이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게 왜 사태를 키워서는!"

    이지혁이 버럭하자 크리스토퍼는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 빌어먹을 국방부 놈들.

    내가 반드시 네놈들에게 지옥을 보여주겠다!

    크리스토퍼는 이를 갈았다.

    같은 편으로서 돕지는 못할망정 타국 능력자 앞에서 이런 굴욕을 당하게 만들다니!

    "으……."

    크리스토퍼가 주머니로 선을 넣었다가 아차 했다.

    무전기 던졌지!

    제기랄, 아직 하지 못한 욕이 엄청나게 남았는데, 무전기가 없다니!

    크리스토퍼는 비통한 심정으로 손을 뺐다.

    "어떻게 할까?"

    이지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새하얀 백악관을 둘러싸듯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마기를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저 농밀하고 끈적한 마기가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도 분명히 있었다.

    '왜 저것밖에 안 되지?'

    마나의 질에 비에 양이 너무 적었다.

    화가 나서 마나를 뿜어내고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뭘 하려 하지 않아도 뿜어져 나오는 것만으로도 백악관 정도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야 정상일 텐데…….

    마나가 나오고는 있지만, 매우 적은 양이 나오고 있는 것이 영 이상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나 왜 자꾸 오한이 들지?'

    저 마나… 뭔가 기분이 상당히 이상한데?

    익숙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따지고 보면 마계의 마왕을 모조리 알고 있는 이지혁이 마력에 친밀성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 알고 있는 마력의 패턴일 테니까.

    그런데 이 한기는 뭐지?

    이지혁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래?"

    정해민이 물었지만, 이지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백악관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은 거리가 좀 있다.

    그런데도 이 발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은 뭐란 말인가.

    '상위 10위계 마왕이라도 왔나?'

    지금의 이지혁이라면 쉽사리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마왕들이다.

    최상위의 마왕은 이지혁의 전성기에도 확실하게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이지혁은 불멸이었고 그들은 마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소멸하는 존재들이라 실제로 붙는다면 무조건 이지혁의 승리로 끝났겠지만.

    애초에 저울추가 기울어 있는 불공평한 싸움이라 그렇지, 서로 목숨 하나씩을 들고 원 코인 대전을 벌인다면 이지혁이 그들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약해진 지금에 와서는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었다.

    "안 가?"

    "끙……."

    이지혁이 앓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지구로 온 이상 그냥 만나서 반갑다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세계로 오기 위해서 저들이 들여야 할 노력을 생각한다면, 지구에 그저 관광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왜 자꾸 남의 나와바리에 발을 들이는지 모르겠군."

    지구에 뭐 대단한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베라프도 있잖아.

    지들 원래 드나들던 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한테 원한이 그렇게 많나?'

    물론 뭐, 깽판을 좀 치긴 했지.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깽판을 좀 많이 치기는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른 차원까지 이리 쫓아와서 자신의 목을 따겠다고 설치는 건 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미저리도 아니고, 이 시키들아!

    "내가 뭘 어쨌다고!"

    "응? 뭐?"

    "…자꾸 저리 찾아와서 사람 괴롭히잖아.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말이야."

    "너 쟤들 알아?"

    "응?"

    "그러고 보면… 너, 그 시커먼 놈들이랑 대화하더라. 이상한 말로? 원래 아는 애들이야?"

    "어."

    "어떻게 알아?"

    "그쪽에서 좀 살았어. 한 백 년 정도?"

    "…그럴 만하네."

    "응?"

    "죽이고 싶겠지. 음, 죽이고 싶을 거야."

    "에?"

    서아영이 참전하자 최정훈이 말렸다.

    "아무리 진실이라고 해도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닙니다."

    어이, 어이.

    이봐, 당신들 누구 편인데?

    어쩐지 지금 마왕들을 안쓰러워하는 눈빛들인데?

    내가 대체 뭘 어쨌다고!

    거, 그냥 자꾸 방해해서 줄빳다 좀 친 것뿐이잖아.

    그 오래 사는 마왕 놈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잠시 스쳐 지나간 해프닝밖에 안 될 텐데.

    "에휴……."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앞으로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앓느니 죽지.

    "그런데 진짜 기분이 왜 이런지 모르겠네."

    이지혁이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어느새 백악관의 정문이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으음……."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욱한 마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딱히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되레 진수성찬이 주위를 두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신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농밀한 마나에 노출되다 보면 정신이 나가 버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으음……."

    이지혁이 고민을 했다.

    마나를 빨아들이며 전진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 마나는 주인 없는 마나가 아니라 다른 이의 컨트롤 아래에 있는 마나였다.

    순식간에 덮쳐들기 시작하면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타인의 마나가 풀려 있는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애초에 금기나 마찬가지라고.

    "어?"

    최정훈의 경호성에 이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스스스스.

    지금까지 앞을 가로막듯이 차올라 있던 마나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다.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길을 만들 듯이 그들의 앞에 있는 검은 마나만이 뒤로 쭈욱 물러난다.

    "환영한다는 건가?"

    이지혁의 얼굴에 심술이 맺히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런 경우 뒤도 안 돌아보고 째는 게 맞다.

    괜히 환영을 해주니 어쩌니 하며 호기 부리며 들어갔다가 준비된 각종 함정에 처맞고 고통 받다가 질질 짜면서 도망간다거나, 운명하는 게 이 바닥의 정해진 룰 아니던가.

    "들어가실 겁니까?"

    최정훈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거 함정인데……."

    "그렇죠?"

    "…너무 빤해서 되레 이상할 정도 아닙니까? 이런 데로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흥! 예의는 있군! 내가 무섭긴 한가 보지!"

    "전형적인 대사 치시지 말란 말입니다! 그거, 삼류 악당 대사잖아요!"

    "괜찮아요. 나는 주인공이니까."

    "누가!"

    이지혁이 최정훈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감히 내 앞에 함정을 파다니!"

    "그런 대사 하시지 말라니까요! 너무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까!"

    "훗, 이런 함정으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함정 따위로 막아낼 수 없다고!"

    "아… 답도 없네, 진짜."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 그건 그렇다 치고……."

    최정훈이 불안한 눈으로 그들 앞으로 나 있는 길을 보았다.

    "진짜 이거 어쩌죠?"

    "가야죠."

    "그래도……."

    "저 뒤에 아저씨가 눈을 뻘겋게 뜨고 지켜보고 있잖아요. 어차피 가야 할 곳인데, 이런 식으로 시간 끌다가는 저 아저씨 속 터져 죽을지도 몰라요."

    "끄응……."

    최정훈은 영 떨떠름한 얼굴이지만,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을 구해내야 하는데 타임 리미트까지 걸린 상황이다.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갈 수밖에 없다.

    "다섯이서 진입한다. 나머지는 대기하고 있어. 상황 터지면 바로 부를 테니까."

    "네."

    김다현이 통솔을 맡았는지 대답을 하고 일행을 뒤로 물린다.

    "그럼 갈까요?"

    "흠……."

    이지혁이 두말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거, 영 불안한데……."

    최정훈이 떨떠름한 얼굴로 이지혁을 따라나섰다.

    * * *

    "음산하네요."

    시커먼 마나들이 주변을 가득 두르고 있다 보니 어두컴컴한 밤 느낌이 났다.

    실제로 지금 미국은 오후인데도 말이다.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건물 안을 걷고 있으니 속이 메스꺼운 느낌이었다.

    아니. 이거, 느낌이 아니라 실제인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마나들이 그들의 감정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거 괜찮을까요?"

    "별일 없어요."

    "그래도 영 찝찝한데?"

    "실제로 몸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별 영향 없어요. 대충 주변에 있기만 해도 미쳐 나가는 애들 하나둘씩은 있는데, 그건 워낙 대가 약한 애들이라 그런 거고."

    그럼 문제 있는 거 맞잖아, 이 미친놈아!

    머리에 뭐가 들었으면 그게 그렇게 연결이 되나!

    "어차피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인데, 이거 하나 못 버티면 장사 접어야죠."

    그건 그렇네.

    최정훈은 이지혁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하는데도 따라온 게 최정훈이니만큼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었다. 능력자도 아닌 그가 이곳에 따라온 것이 이지혁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지독한 마나네요."

    "으헛! 깜짝이야!"

    갑자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아펠드리체를 본 최정훈이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랐잖습니까!"

    서아영이 조용히 뇌까렸다.

    "겁쟁이."

    "누가 겁쟁입니까! 누가!"

    "최근에 본 공포 영화는?"

    "…없는데요."

    "겁쟁이."

    최정훈이 억울함에 몸을 떨었다.

    야, 이 여자야! 사람을 퇴근을 시켜주고 영화 뭐 봤는지 물어봐라!

    집엘 못 가는데 영화는 무슨 영화야!

    입사하고 나서 영화관을 한 번도 못 갔는데!

    최정훈이 억울함을 담아 항변하기도 전에 아펠드리체가 말을 끊었다.

    "익숙한 마나네요."

    "그렇지?"

    이지혁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 아니라 아펠드리체도 익숙함을 느낀다면 보통 마왕은 아니라고 봐야 했다.

    그만큼이나 강렬한 능력을 갖춘 마왕이니 기억에 남아 있는 거겠지.

    "그런데……."

    이지혁이 뭔가 말을 내뱉으려고 하는 순간, 그들의 눈앞에 집무실의 커다란 문이 들어왔다.

    "도착했네요."

    "음……."

    문을 보고 있는 이지혁의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어? 이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해를 못하겠네, 진짜?

    "돌입하나요?"

    "들어가야죠."

    이지혁이 찝찝한 눈으로 문을 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지만, 일단 확인을 해야지!

    "하, 잠깐만.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남자가 강단 없이!"

    "남자는 꼭 마초적이어야 하나! 내가 얼마나 섬세한 남잔데!"

    "네이, 네이."

    이지혁이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집무실 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노인과…….

    "히이이이이이이익!"

    이지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왜!

    왜 저게 여기 있는가!

    왜에에에에에!

    * * *

    "으… 으아……."

    지옥의 마귀라도 본 듯이 새하얗게 질린 이지혁의 얼굴.

    그것을 본 이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마왕 앞에서도 깐죽거리던 이지혁의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고, 공포와 충격으로 몸을 떠는 이지혁만이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가.

    그들이 아는 이지혁은 용감함의 화신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용감하며 뒤를 보지 않는 투지의 집약체였고, 조금, 아주 조금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겁대가리를 상실해 간을 집에다 보관해 놓고 다니는 탈창형 간장의 소유자였다.

    그런 이가 지금 이렇게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인다?

    그럼 저 안에 있는 이는 얼마나 무서운 존재라는 말인가.

    "아… 아……."

    이지혁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손끝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아……."

    서아영이 탄성을 터뜨린다.

    그곳에는 아주 이질적인 존재가 있었다.

    '아름다워.'

    아름답다.

    그저 아름답다.

    이지혁이 등장한 이후로 한 미모 뽐내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보아왔다.

    인간 중에서는 김다솜이 워낙에 압도적으로 예뻤다.

    서아영도 본인의 미모에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김다솜은 정말 인형처럼 예뻤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서아영이 조금 처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펠드리체가 등장하면서 다시 깨졌다.

    아펠드리체의 미모는 인간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도 아니었다.

    그저 아름다움을 집약해 놓은 것 같은 그 미모 앞에 인간으로서 초라함을 느낀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독보적이었다.

    그녀보다 아름다운 존재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만큼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생각이 다시 깨지고 있었다.

    '전혀 달라.'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미녀는 아펠드리체와 전혀 다른 매혹을 뽐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흑발과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가죽 타이즈.

    화사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아펠드리체와는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묻어 나올 것만 같은 하얀 피부와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검고 깊은 눈, 그리고 피처럼 붉은 입술의 조화는 말 그대로 그녀를 현혹하고 있었다.

    슬쩍 빠져나온 혀가 입술을 핥았다.

    "아……."

    그녀의 눈에 빨려들던 서아영이 저도 모르게 흘린 신음에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여자가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그럼 지금 다른 남자들은 어떻다는 말인가.

    "헤……."

    빠직.

    눈이 반쯤 풀려 당장에라도 침을 흘릴 기세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최정훈을 보자 순간 핏대가 섰다!

    짜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

    등짝에 폭격이 떨어진 최정훈이 바닥을 짚고 절규했다.

    이것 뼛속까지 아프다!

    "뭐, 뭡니까!"

    "정신 안 차려요!"

    "아……."

    최정훈도 자신의 실태를 알아챘는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차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본다면 정신을 차릴 자신이 없었다.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엄청난 추녀라고 해도 지금 최정훈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뭐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매혹당했다.

    영혼을 앗아가는 느낌.

    '그래서 그런 건가?'

    지금 보이는 이지혁의 반응은?

    '하기야.'

    생각해 보면 이지혁도 남자였다.

    주변에 워낙 많은 여자가 있음에도, 그리고 그 여자들이 한결같이 호감을 표시하고 있음에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고자가 아닌가 걱정했던 때도 있지만, 이지혁도 명색이 남자란 말이다.

    남자인 이상 저 미녀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절대로!

    "이지혁 씨!"

    "아으……."

    이지혁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으……."

    그때,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호."

    그저 웃음일 뿐이다.

    그런데도 최정훈은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애써야 했다.

    '대체 뭐냐고!'

    싸울 수 있을까?

    공격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이제까지 만난 것과는 다른 최악의 마왕을 만난 것인지도 몰랐다.

    이지혁이 매혹되기라도 하면 인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지혁 씨!"

    최정훈이 다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라?"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지혁의 표정이 이상하다.

    이거, 뭐라고 해야 하지?

    공포는 공포인데 말이야.

    애초에 저 미녀를 보면서 공포를 느낀다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이지혁이 느끼고 있는 공포의 종류가 좀 뭐랄까…….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이 표정을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이지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뭐랄까…….

    "아!"

    그거다!

    분명히 어릴 적에 아버지가 월급날에 술을 진탕 마시고는 월급봉투를 탕진하고 있다가 최정훈의 손을 잡고 찾으러 나온 어머니의 얼굴을 봤을 때의 표정이 딱 저랬다.

    공포와 좌절이 뒤섞인 약자의 얼굴!

    그런데…….

    왜 이지혁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그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인지 그녀가 천천히 걸어서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또각.

    또각.

    바닥에서 울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그런데도 이지혁은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왜!"

    그 순간, 이지혁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고혹적인 미소.

    폭발적인 염기를 뿜어내는 고혹적인 미소였다.

    정면이 아닌 곳에서 보는 최정훈이 이리 아찔한데, 이지혁은 오죽할 것인가.

    "이지혁 씨, 현혹되시면… 이지혁 씨?"

    이 인간 뭐야?

    어떻게 사람이 저 얼굴을 보고도 이리 벌레 본 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정신력이 엄청나군.'

    역시 이지혁!

    저런 미소 따위에는 현혹되지 않는 거지!

    "왜… 왔어!"

    "응?"

    뭐지? 아는 사인가?

    그 순간, 여인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달링!"

    * * *

    달링?

    그 달링이 내가 아는 그 달링이 맞나?

    최정훈이 기겁을 하며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아니지? 그렇지? 지금 놀리려고 한 말이죠?

    그렇죠, 이지혁 씨?

    "히이이이익!"

    그 순간, 이지혁이 몸을 뒤로 돌리더니, 후다닥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어디 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푹 꺼지듯 시아에서 사라지더니, 이지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히익!"

    고양이 앞의 쥐처럼 이지혁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한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미쳤냐! 내가 미쳤어!"

    "에이, 보고 싶었잖아!"

    "아니라고오오오오!"

    "헤헤, 보고 싶었어용!"

    그 순간, 그녀가 이지혁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그의 턱에 자신의 머리를 마구 비볐다.

    어미 찾는 새끼 고양이 같은 모습에 최정훈은 넋을 놓아버렸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히이이이익!"

    이지혁이 그 순간, 그녀를 걷어차듯 밀어내더니, 반대쪽을 향해 전력질주를 했다.

    "으아아아아아!"

    "어디 가요!"

    그녀가 이지혁의 등을 향해 소리치자 경기를 일으킨 이지혁이 바닥으로 넘어지더니, 네 발로 뽈뽈뽈뽈 기어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

    남은 이들은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바퀴벌레가 따로 없네."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을 뛰어넘었어.

    "으으음……."

    최정훈은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정리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너 여기 있었구나?"

    "네."

    아펠드리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아직도 우리 달링 따라다니니? 그래봤자 자리 안 내준다고 했을 텐데?"

    "…그런 뜻으로 따라 다닌 건 아니에요."

    밀린다?

    심지어 그 이지혁과도 결코 꿀리지 않는 포지션을 구축하고 있던 아펠드리체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아펠드리체가 정확하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은 바로 추정하건대, 다른 세계에서는 거의 세계의 정점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저리 뻘쭘하게 물러서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이건 뭐랄까…….

    뭔가 미묘한 감정이 흐르는 것 같은데?

    "우리 달링 잘 챙기고 있었어?"

    "네."

    "흐음, 도마뱀 주제에 그런 건 잘한단 말이지. 명심해. 너 그것도 제대로 못하면 구워버린다고 했지?"

    "네."

    "우리 달링 그림자라도 밟고 싶으면 잘해야 할 거야."

    "네."

    저게 대체 무슨 대화냐.

    대체 뭐냐고!

    "저… 아펠드리체 님?"

    정해민이 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펠드리체를 불렀다.

    "네?"

    "저기… 이분은?"

    "아……."

    아펠드리체가 뭔가 우물쭈물한다.

    드래곤이 우물쭈물이라니!

    베라프의 사람들이 봤다면 '저 드래곤이 드디어 미쳤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이분은 그러니까……."

    아펠드리체가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었는지 입을 열었다.

    "이지혁 씨의 소유권을 가진 분이십니다."

    "에에엑?"

    "네?"

    "뭐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펠드리체 역시 고민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이지혁과 이 사람의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 세계의 상식으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한 것이다.

    "으음……."

    "됐어. 비켜."

    "네."

    아펠드리체가 고분고분 뒤로 물러섰다.

    고분고분이라니!

    세상에, 저게 무슨 시어머니 만난 며느리도 아니고!

    "너희가 우리 달링 친구들이야?"

    "……."

    "대답 안 해?"

    "네,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친구라는 단어 선택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지금 딱히 설명할 만한 말이 없었다.

    마왕이 직장 동료라는 어감을 이해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말이다.

    "나는 에르카나."

    "……."

    "마계의 열세 번째 마왕이다. 이 세계에는 우리 달링을 만나러 왔지."

    "잠깐만요!"

    그때, 정해민이 눈을 희번덕 뜨더니 앞으로 나섰다.

    희번덕이라니!

    상대가 마왕인데!

    건방지다고 당장 눈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다!

    여긴 이지혁 씨도 없다고!

    "자꾸 달링, 달링 하시는데, 지혁이랑 무슨 관계이신데 자꾸 달링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응? 내 단어 선택이 잘못됐나? 이상하다. 이 나라 언어는 대충 다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에르카나가 아펠드리체를 돌아보았다.

    아펠드리체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에르카나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갸르릉댄다.

    "그럼 그렇지. 이거 어감도 좋았거든."

    "틀리지 않았다고요?"

    정해민이 떨리는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돌아보았다.

    달링이 맞는 표현이라니!

    그럼!

    "정식으로 말씀드리자면……."

    아펠드리체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은 마계의 마왕이십니다. 그리고 이지혁 씨와 계약으로 이어져 있는 흑마력의 종주이시자……."

    그녀의 입이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을 밀어냈다.

    "이지혁 씨의 현재 부인이십니다."

    순간, 정해민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정해민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망치로 머리를 후려 맞은 듯한 충격 앞에 말을 잃었다.

    약간의 침묵이 지나고 나서 정해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에에에에에에엑?"

    이게 대체 뭔 소리야!

    * * *

    부인?

    부인이라고 한 건가, 지금?

    그 부인이 내가 알고 있는 부인이 맞겠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아내를 뜻하는 그 부인이라는 뜻으로 말한 거지, 지금?

    정해민은 멍한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성함은 에르카나시구요."

    "에르카나."

    이름이 에르카나라…….

    지금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갑자기 이지혁의 마누라가 튀어나온 상황인데.

    "자, 잠깐만요."

    최정훈이 소리쳤다.

    평소답지 않게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과 당황이 마구 묻어 나왔다.

    "부인이라구요?"

    "예."

    "그럼 이지혁 씨가 유부남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죠."

    "헐……."

    최정훈이 기겁한 눈으로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지혁이 유부남이고, 이 여자가 이지혁의 마누라라 이거지!

    그러니까!

    "마왕이라면서요!"

    "네, 맞아요."

    "마왕인데 이지혁 씨 마누라라구요?"

    "뭐가 잘못됐나요?"

    뭐가 잘못된 게 없는지를 물어야지!

    다 잘못됐지! 다!

    "세상에."

    천하의 최정훈도 이 사태를 정리할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유, 유부남?"

    정해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헐……."

    최정훈이 다급하게 정해민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진정하십시오."

    "유부남?"

    그야 정해민 입장에서는 황당할 만도 하겠지.

    갑자기 애가 유부남이라고 밝혀진 것만 해도 기절초풍할 일인데, 마누라가 떡 나타나다니.

    남자 친구랑 카페에서 커피 먹고 있는데 옆에서 달려든 애기 띠 멘 아줌마가 머리채를 잡은 심정이 아니겠는가!

    "으으으……."

    "시, 시동 걸지 마시구요!"

    야, 이 아줌마야! 지금 눈앞에 마왕이 있는데 음파 병기 날리지 말란 말이다!

    하지만 정해민은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컥!"

    바로 앞에서 음파 병기가 터지자 최정훈이 신음을 토했다.

    귀를 파고드는 하이 톤의 울음소리가 내장을 뒤집는 느낌이었다.

    "꺄악! 언니!"

    서아영도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이미 터진 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어머? 쟤 뭐지?"

    에르카나가 신기하다는 듯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우는 것도 이상한데, 울음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마계 생물 중에서도 저만한 성량으로 우는 생물은 흔치 않을 것인데, 저 작은 몸에서 저런 소리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지, 진정하시지요!"

    정해민이 전혀 들을 기색 없이 목 놓아 울어 젖히자 최정훈이 간절한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사일런스."

    아펠드리체가 침묵을 걸자 겨우 주변이 조용해졌다.

    - 치익!

    그 순간, 최정훈의 무전기가 울렸다.

    - 무, 무슨 일인가!

    거기까지 들렸나?

    "일단 아무 일 아닙니다. 조금 뒤 연락드릴 테니, 대기해 주십시오."

    - 알았네.

    궁시렁대는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최정훈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지금은 이런 것으로 심력을 낭비할 수 없었다.

    이쪽은 대형 폭탄이 터졌단 말이다.

    "그러니까……."

    최정훈이 상황 정리를 시도했다.

    "이분이 그러니까… 마계의 마왕이시고……."

    "네."

    "마계의 마왕이시자 이지혁 씨의 부인이시라구요?"

    "네."

    "이지혁 씨가 결혼을 했었어요?"

    "그렇죠."

    흐끅.

    울음을 그친 정해민이 옆에서 딸꾹대며 대화를 듣고 있었다.

    우는 것도 우는 것인데, 일단은 상황을 듣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럴 거면 진즉에 그칠 것이지!

    "결혼이라니, 왜 이제까지 말을 안 한 거지?"

    딱히 이야기해야 할 이유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정보를 지금까지 꼭꼭 숨기고 있었다니, 왠지 모를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새로울 게 없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네?"

    "결혼이 처음도 아니니까."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최정훈이 눈빛으로 해명을 요청하자 아펠드리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지혁 씨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지 모르는 건 아니죠? 젊은 상태 그대로 수천 년을 살아오신 분이에요. 죽은 부인들을 다 세면 열 손가락으로는 모자랄 텐데."

    "……."

    헐.

    이게 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 사일런스 왜 풀었어요!

    진짜 미치겠네!

    * * *

    정해민이 진정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더 걸렸다.

    "훌쩍."

    계속 훌쩍대고 있는 정해민을 서아영이 토닥대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우는 거 보기 짜증난다고 푹푹 찔러 댔을 서아영이 웬일로 얌전히 정해민을 달래고 있었다.

    "언니, 진정 좀 해."

    "흐아앙."

    "내가 그래서 그 인간이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도……."

    "애초에 그 싸가지 없는 인간이랑 그렇게 어울리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지!"

    그 순간.

    콰득!

    서아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검은 마기가 그녀의 목을 금방이라도 꿰뚫을 듯 날카롭게 벼려져 그녀를 위협했다.

    "흐으음, 우리 달링이 어쨌다고?"

    "……."

    할 말은 많지만 입을 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우리 달링의 험담을 해? 넌 곱게 죽진 못할 거야."

    끈적끈적한 그녀의 목소리가 사신의 속삼임처럼 서아영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만두십시오."

    "응?"

    보다 못한 아펠드리체가 그녀를 만류하고 나서자 에르카나의 눈이 아펠드리체에게로 향했다.

    "지금 날 막은 거야?"

    "그분들은 이지혁 씨가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생채기라도 난다면 이지혁 씨가 좋아하지 않을겁니다."

    "그래?"

    서아영의 목을 노리고 있던 마기가 다시 에르카나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럼 내가 참아야지.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인간."

    에르카나가 서아영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그녀의 볼을 손톱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는 우리 달링을 욕하는 사람을 싫어하거든. 증오한다고 해야 할까? 너는 우리 달링이 귀여워하는 애완동물인 것 같으니 한 번 봐주는 거야."

    "으……."

    서아영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성격으로 이런 도발을 참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마왕급의 존재감은 그런 그녀의 입마저도 틀어막았다.

    입을 여는 순간, 금방이라도 전신이 터져 나가 버릴 것 같은 압박감.

    '이게 마왕인가.'

    지금까지는 원거리에서 공격을 하거나 다수로 압박을 해왔기에 마왕의 기세를 온전히 혼자 받아볼 기회가 없었다.

    '이지혁 씨는 이런 마왕과 단독으로 싸워온 거고?'

    사람이 아니다.

    에르카나는 지금 결코 그녀에게 강한 기운을 날리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등이 젖어들 만큼 공포스러운데, 이런 마왕급과 전력으로 맞부딪히며 싸운다고?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부인?"

    하지만 정해민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에 어린 맹렬한 적개심이 서아영에게도 느껴졌다.

    저런 눈으로 마왕을 바라보다니, 서아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흐음?"

    에르카나가 흥미롭다는 듯이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너, 우리 달링한테 관심 있구나?"

    "히끅."

    정해민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안 되지, 안 돼. 우리 달링은 인간은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조금 정들라 치면 픽픽 죽어 나가는데, 사람을 좋아할 리 없잖아? 안 그래?"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분도 불멸이 아니지 않습니까. 보통 인간일 뿐입니다. 오래 살아봐야 100년이죠."

    "응?"

    에르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이 아니면 되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워낙 본인의 정체성에 집착이 강하신 분이라……."

    "그건 인간이 될 수 없었으니까 그런 거고. 막상 인간으로 살아보면 불편하고 피곤하다며 다시 돌아가려 할 거야. 정 안 되면 마족만 되도 되잖아."

    "…아마 그걸 제일 싫어하실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 괜찮아. 남편이 이상한 길로 가면 바로잡아 주는 게 부인의 역할이지. 원래 내가 내조에는 일가견이 있잖아."

    아펠드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마이페이스의 전형. 다른 사람의 기분과 입장 같은 건 애초에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가 고려하는 존재는 오로지 이지혁뿐, 그 외의 다른 존재들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지혁에 대한 관심 역시 이지혁이 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부인이라고요?"

    정해민이 눈을 똑바로 뜨고 에르카나를 노려보았다.

    그 적대적 시선에 에르카나가 미소를 지었다.

    에르카나의 입가에 맺힌 미소에서 불길함을 느낀 서아영이 자신도 모르게 정해민의 앞을 막아섰다.

    "흐응,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을까아? 왜 그리 무서운 눈으로 날 보는 걸까?"

    에르카나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증거 있어요?"

    "증거?"

    "네! 증거요!"

    서아영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 언니, 왜 이러지?

    여기서 증거를 따지면 어쩌자는 건가.

    그리고 거기가 지구도 아니고, 법적인 결혼 같은 게 있지도 않을 건데 여기서 증거가 나올 게 어디 있나!

    "언니, 왜 그……."

    하지만 그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에르카나가 '꺄아'거리며 정해민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달려든 에르카나를 서아영이 막아서려 했지만, 에르카나는 그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스쳐 지나가며 정해민을 꽉 껴안았다.

    "응?"

    뭐지, 저 악마?

    뭘 하려는 거지?

    "꺅! 증거? 증거라고 했지! 어머어머!"

    미쳤나…….

    서아영이 멍한 눈으로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여하튼 이지혁이랑 관계가 있다는 것들치고 제정신 박힌 것들이 없다.

    "있지! 있지! 내가 이걸 얼마나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는데, 보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 있지! 마족 놈들은 감수성이 부족해서 관심도 없고!"

    "에……."

    정해민이 떨리는 눈으로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 마왕이라 그랬는데…….

    마왕들은 다 이런가?

    지금까지 그녀가 봐온 무지막지한 마왕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남성형과 여성형의 차이인지, 개인적인 개체의 차이인지 알 수가 없다.

    "자, 볼래?"

    에르카나가 주머니로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헐.

    분명 주머니는 작았는데,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뭔가 커다란 책 같은 것이었다.

    마술도 아니고, 저게 어떻게 저 작은 주머니에서 나온단 말인가.

    "봐봐, 봐!"

    에르카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펼쳤다.

    "헐?"

    정해민이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책을 바라보았다.

    있어야 할 곳에 글은 없고, 웬 사진 같은 것들만 잔뜩 붙어 있었다.

    "이, 이거……."

    거기에는 이지혁과 에르카나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들이 한 장씩 박혀 있었다.

    "달링한테 들으니까, 너희는 결혼하면 이렇게 사진첩 만든다며? 우리 쪽에는 없는 문화인데, 마법으로 만들어봤어. 안 그래도 이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해하는 애들이 없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냉가슴을 앓았는데……. 헤헤."

    정해민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KO패. 완벽한 KO였다.

    "빼박이네."

    눈치 없는 최정훈이 쓰러진 정해민의 뒤통수에 깡통을 날렸다.

    "그런데 이지혁 씨는 어디 간 거죠?"

    "흐응?"

    에르카나가 고양이처럼 웃었다.

    * * *

    "한 번 나와 접촉한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는 걸 알 텐데. 우리 달링도 참 장난기가 심하다니까."

    저기… 그거 장난기 아닌 것 같은데요.

    진짜 도망간 거 아닌가?

    세상에, 이지혁이 도망을 가다니.

    마왕이 앞에 있을 때도 이죽거리며 약을 올리던 이지혁이다. 적어도 이지혁에게만은 겁대가리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언어라고 생각했던 최정훈의 상식이 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마왕보다 무섭다던 엄마 앞에서도 도망은 안 갔던 이지혁인데!

    "흐음, 우리 달링이 어디 있을까아?"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이지혁도 마누라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헐?"

    최정훈이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여자… 텔레포트도 할 수 있는 건가?

    "어디 간 거지?"

    "찾으러 갔겠죠."

    "누굴?"

    "그야 이지혁 씨죠."

    아펠드리체는 그리 말하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필이면 저 사람이 넘어오다니, 이제 평온한 일상은 끝났다.

    * * *

    "거짓말이야."

    이지혁은 불안증 환자처럼 손톱을 물어뜯었다.

    왜!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단 말인가!

    저 여자를 피하기 위해서 그동안 그 개고생을 해왔는데, 여기에서 다시 마주치다니!

    신은 없는가!

    "라, 라트렐이라도 빌려와야 하나."

    지구에 신이 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다 지구에 신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라트렐이 끔찍하게 싫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절망의 좌가 아니라 디오레 5세로 전직하라고 해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이나 지금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어떻게 넘어왔지?"

    그쪽 동네에서 지구로 넘어온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다른 마왕들이야 이쪽의 동조자가 불러서 넘어온 것이라 하겠지만, 마계의 마왕들이 단체로 대가리에 가습기 살균제를 쑤셔 박은 것이 아닌 한에야 이런 일은 벌어질 수가 없었다.

    기껏 고생고생해서 넘어온 마왕이 이지혁에게 찰싹 달라붙을 것이 빤한데 어느 미친 마왕들이 그런 짓을 하겠는가.

    애초에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마누라라는 것은 마계에서 유명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으으으으……."

    이지혁은 손을 달달 떨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안 돼! 안 된다!

    나의 자유가!

    나의 프리 라이프가!

    돌아갈 수는 없어!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그래, 차라리 베라프로 가자!"

    거기까진 못 따라오겠지!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서 베라프를 거의 골로 보내 버린 이지혁이지만, 지금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베라프가 아니라 지옥이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 당장 게이트를……."

    그리고 그 순간.

    "찾았다아~!"

    등 뒤에서 들려온 끈적끈적한 목소리에 이지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으으……."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려보자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하…하하……."

    저 예쁜 얼굴이 지옥의 마귀가 찡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굉장한 일이었다.

    "아, 안 돼!"

    덥석.

    그 순간,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팔에 팔짱을 끼더니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 * *

    스슷.

    기이한 소음과 함께 에르카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삼 일 동안 처맞은 북어 같은 모습을 한 이지혁이 기운을 모조리 빨린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 이지혁 씨?"

    뭐야, 저거?

    드레인이라도 당한 건가?

    생기를 모조리 빨리지 않은 이상 사람이 어떻게 순식간에 저 꼴이 나지?

    "흐흑."

    이지혁이 얼굴을 감싸자 최정훈은 그게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인간은 지금 정말로 말 그대로 절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달링."

    "으……."

    "나 안 보고 싶었어?"

    "내, 내가……."

    "응?"

    "내가 니가 왜 보고 싶어, 이 미친 마족아!"

    이지혁이 에르카나를 그대로 들어 올리더니 멀리 던져 버렸다.

    "꺄하하하핫!"

    하지만 에르카나는 뭐가 좋은지 웃음을 빵 터뜨렸다.

    "우리 자기는 진짜 장난이 너무 심하다니까!"

    "장난 아니라고오오오오오오!"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알았으니까, 울지 말고 말해요."

    "으흐흑."

    이지혁이 절망 어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빌어먹을 마왕 놈들. 저거 하나 못 막아서 이 세계로 보내나. 내가 마계로 돌아가서 다시 깽판을 한 번 놓든 해야지."

    마왕들이 알면 피를 토할 말을 주저없이 내뱉는 이지혁이었다.

    "왜 왔어!"

    "우리 달링 보고 싶어서 왔지! 어떻게 가고 나서 한 번을 연락을 안 했어! 에르카나 속 타는 거 알면서!"

    "…야, 이 미친."

    지구에서 마계로 무슨 수로 연락을 하냐!

    그리고!

    "내가 왜 너한테 연락을 해야 하는데! 내가 왜!"

    "어머? 달링, 그게 무슨 소리야? 마누라한테 연락을 안 하면 누구한테 연락을 해!"

    "마누라는 무슨 마누라! 그리고 너, 마누라라는 말은 대체 또 어디서 배웠어!"

    "헤헤, 직업상 언어 스킬은 필수거든."

    "끄으으응."

    이지혁이 머리를 마구 긁었다.

    "내가 왜 니 달링이야!"

    "어머? 우리 달링, 다른 사람들 앞이라고 부끄러워하는구나?"

    "아니라고오오오오! 그런 게 아니라고!"

    최정훈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렀다.

    저 이지혁이 속절없이 말리고 있었다.

    열이 받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지혁과는 달리 에르카나는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지혁의 팔짱을 끼더니 애교를 부리고 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다냐?"

    최정훈이 넋을 놓고 말하자 서아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쥐약이 있었네."

    세상에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지혁용 살충제가 다른 세계에서 날아왔다.

    * * *

    추욱.

    이지혁은 말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이지혁 씨?"

    안쓰럽게 바라보던 최정훈이 나지막이 불렀지만, 이지혁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아이고……."

    물먹은 시래기가 따로 없었다.

    대체 얼마나 정신적으로 대미지가 컸으면 그 이지혁이 이런 꼴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달링~!"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 대미지만으로 이지혁을 녹초로 만들어 버린 원인은 지금도 이지혁 옆에 찰싹 붙어 있다는 것이다.

    '죽일 셈인가?'

    조금만 더 저러면 진짜 사람이 피 토하고 죽을 수도 있겠는데?

    '그리고…….'

    한 명 더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부들부들.

    바로 옆에서 덜덜 떨리는 진동이 전해져 왔다.

    정해민이 둘의 꼴을 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기야.'

    정해민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따로 없을 것이다.

    에르카나라는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격과 공포인데, 바로 앞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으니 속이 타다 못해 내장이 뒤집히는 느낌이겠지.

    그런데 워낙 정당성이 확고하다 보니 따져 묻기도 뭐한, 말 그대로 탈출구가 없는 상황이었다.

    - 치익.

    그때, 다시 무전이 울렸다.

    -미스터 최!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코드 원은 무사한가?

    "코드 원이요?"

    - 대통령 말일세! 우리 대통령.

    "아, 잊고 있었다."

    - 잊어? 대통령을 잊었다고?

    원래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거 저도 압니다, 크리스토퍼. 그런데 당신이 여기에 있었다면 당신도 저 노인장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라구요. 나와 똑같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입을 허, 벌리고 있겠지.

    할 말은 정말 많지만, 무전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심각하고 또 너무 하찮은 이야기였다.

    "일단 다시 무전드리겠습니다."

    - 응?

    "아, 아니, 일단 대기하세요. 금방 끝나니까요."

    최정훈이 무전기를 바지춤에 찔러 넣고는 고개를 돌려 집무실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으음?"

    여기 어디 있어야 하는데…….

    최정훈은 집무실 책상 근처로 가서야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백발의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지는 않았겠지?"

    최정훈의 손이 떨려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첫손에 꼽혔을 사람이 이러고 있는데 신경도 쓰지 못하다니.

    최정훈은 자신의 멍청함을 반성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보지만, 반응이 없었다.

    "제발."

    목과 코에 손을 대보자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아직은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대로 조금 더 방치해 뒀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아직 안 죽었다는 게 어디인가.

    "저……."

    최정훈이 뻘쭘하게 에르카나를 향해 물었다.

    "이분은 밖으로 모셔가도 될지?"

    "흐응?"

    에르카나가 눈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매혹적인 눈에서 느껴지는 적의에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아니, 저는……."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말을 걸었으니 매우 짜증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한다.

    그래도 인간인 그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대통령인 그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이지혁 씨."

    결국 이럴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이지혁밖에 없었다.

    이지혁은 썩은 고등어 같은 눈을 하고는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데, 데리고 나가라고 하는데요?"

    거 봐, 이지혁도 데리고 나가라고 하잖아!

    최정훈의 의도가 굉장히 잘 전달되었는지 에르카나가 살짝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마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최정훈의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는 것은 비밀이지만.

    "흐음, 어쩔 수 없네. 우리 달링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에르카나가 '꺄!'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이지혁의 팔을 잡고 어깨에 마구 얼굴을 비볐다.

    "어어어어."

    하지만 이지혁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의미 없는 호성만 낼 뿐이었다.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집무실 밖으로 의료진 대기 바랍니다."

    - 당장 준비하겠네.

    "끄응."

    최정훈이 두말없이 무전기를 끊고는 대통령을 안아 들었다.

    "영감님, 무겁기도 하시지."

    끙끙대며 입구까지 간 그가 힘겹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저 멀리서 의료진이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

    최정훈을 반쯤 밀치듯이 대통령을 받아 든 이들이 간이침대에 대통령을 싣고는 바람처럼 백악관을 빠져나갔다.

    "크리스, 코드 원 확보했습니다."

    - 수고가 많았네.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거지만, 대통령이 빠져나갔다고 해서 아까 같은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는 이지혁 씨도 있습니다. 그 양반이 꼭지가 도는 게 마왕이 화내는 거보다 더 무서우니까요."

    -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약속하지. 내 의도도 아니었네.

    "일단 그럼 여기서 해결을 해보겠습니다.

    - 그래, 수고 부탁하지.

    "그런데 혹시 여기에 있는 마족이 이지혁 씨와 무슨 관계인지 알고 계셨습니까?"

    - 아직도 믿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지.

    "그럼 됐습니다."

    최정훈은 전화를 끊었다.

    할 수 없는 말이 있다는 게 이것이었군.

    대통령 집무실 안으로 다시 들어간 최정훈의 눈에 소파에서 넋이 나간 이지혁과 그의 팔에 바짝 붙어 있는 에르카나, 그리고 그 둘을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펠드리체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정해민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설명하자면, 말 그대로 음…….

    "개판이네."

    허허허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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