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3화 (53/118)
  • [■] 어? 그럼 나도 가도 돼요? [■]

    ─────

    "그걸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걸 알아야 내가 당신이 이지혁 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말에 대해 확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이란 이상한 존재들이라니까. 오히려 악마들보다 더 신뢰가 없군. 인간들에게는 말이라는 것이 거짓투성이로 들리는 모양이야."

    "부정하긴 어렵겠군요."

    "좋아, 말해주지."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크리스토퍼의 가슴이 진탕되었다.

    '미치겠군.'

    그저 살짝 웃은 것뿐인데도 이리 심장이 뛰다니.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마치 15세의 소년으로 돌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그와 나는 말이야……."

    * * *

    "이지혁 씨."

    "넹?"

    "크리스토퍼 맥크라렌입니다. 지금 당장 이지혁 씨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데요?"

    "그 아저씨가 왜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급하게 바꿔 달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흐으음……."

    귀찮은데?

    저 전화를 받으면 분명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받지 말까?

    "없다고 해요."

    "이미 있다고 해버렸습니다."

    "전화 받는 사이에 사람이 사라졌다고 하면 안 될까?"

    - 이지혁 씨! 이지혁 씨! 목소리 다 들립니다.

    "거, 영감님 귀도 밝지."

    수화기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크리스토퍼의 목소리에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지금 할 일이 많은데……."

    이지혁이 대통령들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을 본 이들의 모공이 송연해졌다.

    저 인간, 대체 뭘 할 생각이었을까?

    저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예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지혁이 신경질적으로 걸어가서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왜요!"

    이지혁이 짜증을 한껏 담아 소리쳤다.

    - 이지혁 씨!

    "네네, 이지혁입니다, 이지혁이라구요. 그러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죠. 뭔 일이에요?"

    - 지금 당장 미국으로 와주셔야겠습니다. 워싱턴입니다.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저씨! 아저씨 은퇴한다고 하지 않았었어요?"

    - 그랬었죠.

    "그런데 왜 은퇴 안 하고 징그럽게 남아서 사람 괴롭히고 그러십니까! 은퇴 좀 하고 전화 좀 하지 마시구요. 집에 가셔서 손주 보면서 노세요!

    - 손주 다 큰 지가 언젠데…….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하튼 지금 미국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장난하나!"

    이지혁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굳이 저런 전화를 받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RRRR.

    하지만 전화가 끊기자마자 바로 다시 벨이 울렸다.

    "끙……."

    이지혁이 전화를 받고 소리쳤다.

    "아니, 진짜 나한테 왜 그래요!"

    - 이지혁 씨, 심각한 상황입니다.

    "내가 더 심각해! 내가 더 심각하다고! 아오, 진짜!"

    - 제가 웬만한 사안으로 이리 전화를 드려서 부탁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르는데요? 만날 별것도 아닌 걸로 사람 불러들이고 했잖아요.

    - 별게 아니라니…….

    마왕이 출현에 좀비 사태가 별것 아니라고 할 만한 일인가?

    크리스토퍼는 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세히 설명을 할 때가 아니었다.

    - 이지혁 씨, 제 명예를 걸고 부탁드립니다. 지금 이곳에 대형 사태가 터졌습니다. 이지혁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 대형 사태가 뭔데요?"

    - 그걸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오……."

    이지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이럴 때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체로 파악해 버리는 머리가 싫었다.

    "끄으으응……."

    이지혁이 앓는 소리를 낸다.

    "말을 할 수는 없는데, 급한 상황이라 이거죠?"

    -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그가 급하다고 말한 상황을 유발한 존재가 크리스토퍼를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왔다.

    "어느 정도 상황이에요?"

    - 다 끌고 오셔야 합니다.

    "하……."

    그럼 대충 마왕급이 넘어온 사태에 버금간다는 이야긴데…….

    "아니, 무슨 지구가 소문난 맛집도 아니고, 온 동네 애들 다 몰려오네, 진짜!"

    그런데 그걸 왜 이지혁이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이번에도 이리 끌려간다면 앞으로도 일이 터질 때마다 자신이 온 동네를 빨빨거리며 쏘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절대로 싫었다.

    "미국도 강대국이니 알아서 합시다."

    - 이, 이지혁 씨! 이건 이지혁 씨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안 간다면 안 가요."

    - 잠깐만요! 전화 끊지 마십시오! 조건이 뭡니까!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지금 이쪽에는 국가수반이 인질로 잡혀 있단 말입니다.

    "그런 거 나는 모르겠고. 그 아저씨가 죽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해결하시죠."

    - 이지혁씨이! 원하시는 조건을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제발 다시 한 번 생각을!

    "아니, 나는……."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불쑥 들이밀어지며 이지혁의 귀에서 수화기를 떼어냈다.

    아니, 어느 놈이 감…….

    수화기를 뺏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이지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언제 왔어요?"

    "방금 왔습니다. 일단 이건 제가 맡을 테니, 잠시 쉬고 계시죠."

    "나 안 가요!"

    "네네, 일단 쉬십시오."

    "…와, 사람 말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봐, 저거!"

    "하하하."

    전화기를 뺏은 사람은 최정훈이었다.

    "일단은 조건부터 들어봐야죠. 그게 기본 아니겠습니까?"

    "아니! 나는!"

    그때, 누군가 이지혁의 손을 잡고 쭉 당겼다.

    "으응?"

    "자, 콜라 가져왔어. 여기 앉아서 이거 먹어."

    "내가 콜라 곰이냐! 콜라만 주면 좋아하게?"

    "안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내가 먹고."

    "먹을래."

    정해민은 이지혁이 보지 않게 살짝 웃으면서 그의 팔을 슬그머니 잡아 당겼다.

    "이리 앉아서 먹어, 이리 앉아서."

    "응."

    "착하다."

    정해민이 능수능란하게 이지혁을 구석으로 끌고 가자 최정훈이 재빠르게 수화기를 귀에 댔다.

    "미스터 맥클라렌, 최정훈입니다."

    - 크리스토퍼로 하지. 긴말하지 않겠네. 지금 당장 이지혁 씨를 워싱턴으로 보내주게.

    "조건부터 협상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 급하네. 무척이나 급하단 말이네!

    "흐음……."

    최정훈은 침음성을 흘렸다.

    크리스토퍼가 항상 자신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입장이지만, 언제나 줄 것은 확실하게 주는 편이었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등에 업고 있다는 자존심과 자부심이 그의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준 것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다른 이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지금 크리스토퍼가 그동안 지켜왔던 절차와 조건을 모두 무시하고 다급히 요청하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때가 가장 크게 뜯어낼 수 있을 때다. 부르는 걸 모두 들어줄 확률이 가장 높으니까.

    "알겠습니다. 저희가 감안해야 할 것은 뭡니까?"

    - 모든 전력, 가용한 모든 전력을 이끌고 오게.

    "그러도록 하죠. 준비가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 고맙네, 미스터 최.

    "별말씀을."

    최정훈은 전화를 끊었다.

    "헐……."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쩌억 벌렸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뭐든 다 준다고 하는데, 조건도 안 말하고 무작정 가겠다고?"

    "때가 아닙니다."

    "그게 뭔 소리예요?"

    "사람이 급할 때는 얻어낼 것이 많아지죠. 하지만 그 급함이 사라지면 원망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로 급한 사람에게는 조건을 따져서는 안 되는 겁니다."

    "…뭐라는 거여?"

    "콜라 마셔, 콜라."

    "응."

    이지혁이 콜라 캔을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마시자 정해민이 빨리 해결하라는 듯이 최정훈을 향해 손을 저었다.

    '저 사람이 언제부터 이지혁을 저리 잘 다뤘지?'

    이지혁 조련 1급 자격증이라도 줘야 할 판이었다.

    언제나 깽판을 놓지 못해서 안달이던 이지혁이 얌전히 앉아서 콜라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어색하고 이상하기만 하다.

    "장관님."

    "말하게."

    국방부 장관이 최정훈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저희 원장님께서는?"

    "집무실로 갔네만."

    "네? 왜 다른 분들은 다 여기 계시는데 저희 원장님만 다른 데로 간 겁니까?"

    "…그냥 모르는 척해주게."

    직감적으로 이지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최정훈이 말을 돌렸다. 굳이 파고들어서 아픈 사람 가슴에 소금을 뿌릴 필요는 없으니까.

    "해외 파견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허락 부탁드립니다."

    "그런 건 대통령님께 직접 요청하게. 자리에 계시지 않는가."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뭐, 사람이 믿음이 가야 말이지.'

    국방부 장관이나 KSF 원장은 업무에 치이고 이지혁에 치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능력자 전력도 약하던 대한민국이 이리 피해 없이 버텨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영민은 그의 기준으로 보자면 자격 미달인 대통령이었다.

    지금까지 이지혁이 한 일들이 전 세계적으로 칭송 받고 있는데도 이지혁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무능을 극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NDF와 국방부가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녀서 그렇지.

    아니, 그 이상으로 이지혁이 타국이나 물욕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이지혁이 아닌 다른 능력자가 그 정도의 힘을 갖추었다면 그는 이미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단 국민들이 뽑아놓은 대통령이다 보니 대접은 해주어야 한다. 선출직 공무원은 아무리 꼴 보기 싫다고 해도 국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인물이니까.

    "대통령님, 미국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으니 허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윤영민의 눈썹이 꿈틀했다.

    뭔가 딱히 거슬리는 말이 있는 것은 아닌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말투 자체에 공경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조금 전부터 윤영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안하무인인 이지혁을 상대하는 데서 이미 기분이 많이 상했는데, 미국에서 전화가 걸려온 이후로 그는 완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고 있다.

    아무리 그가 관련되지 않은 상황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이곳은 청와대고 그의 집무실이었다.

    평범한 가정이라고 해도 집주인을 두고 자기들끼리 일을 진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날진대, 청와대에서 타국과의 협상을 일개 공무원이 하고 잇다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자네가 최정훈이라고 했나?"

    "예, 최정훈이라고 합니다."

    "NDF?"

    "예. 부부장입니다."

    윤영민이 노골적으로 노기를 머금었다.

    "그럼 내가 자네의 직속상관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일국의 대통령이자 자네의 명령권자인 내가 있는 곳에서 자네는 무슨 배짱으로 자네 마음대로 타국과의 협상을 진행하는 것인가."

    "……."

    최정훈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저 윤영민 대통령의 입에서 저리 상식적인 말이 나올 줄이야.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게도 그가 하는 말은 지극히 옳았다.

    "아, 저는……."

    최정훈마저 마땅히 변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젊은 친구가 거물들과 놀더니 건방져졌군. 호가호위가 따로 없어."

    "죄송합니다."

    "물러나게. 자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책임을 묻지는 않겠지만, 이 일에 관해서는 더 나서지 말도록."

    "하지만 대통령님."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최정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지혁을 구슬리는 데 집중하다 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윤영민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이 침범 받지 않는 것이리라. 그런 윤영민의 면전에서 그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으니 눈 밖에 나는 것도 당연했다.

    '어떻게 하지?'

    자신이 윤영민의 눈 밖에 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이 일 때문에 미국에 대한 지원이 늦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다급한 크리스토퍼의 목소리를 감안한다면 한시가 급한데.

    하나 윤영민은 최정훈과 대화 자체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 그럼 나도 가도 돼요?"

    최정훈이 살짝 눈을 감았다.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빠삭하다니까!

    이지혁 씨, 나이스 샷!

    * * *

    윤영민이 떨리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인간은 또 갑자기 왜 이러는가.

    "이지혁 씨, 이지혁 씨에게 한 말이 아니고, 최정훈에게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가도 되냐구요."

    "이지혁 씨는 가시면 안 되죠."

    네가 가면 어떻게 해.

    지금 다 네 이야기 하는 거 안 보이니?

    "여기서 할 것도 없잖아요."

    "지금 미국에서 이지혁 씨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마는?"

    "안 갈 건데요?"

    "정말 안 가십니까?"

    "응, 안 가요."

    윤영민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얼마나 물로 본단 말인가.

    크리스토퍼 맥클라렌과 개인적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과 지금까지 이지혁이 항상 미국을 지원해 왔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팩트였다.

    그런데 이런 식의 협박이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지혁 씨, 어차피 지원하러 가실 것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래요?"

    "서로 쓸데없는 힘 빼지 마시죠.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러냐구요?"

    "예?"

    이지혁이 소파에 등을 한껏 기대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 광경을 본 비서실장이 손을 엉거주춤하게 뻗으며 말했다.

    "여긴 금연입니다만?"

    "그래서?"

    이지혁이 뚱하게 물어보자 비서실장은 즉각 태세를 전환했다.

    "재떨이 여기 있습니다."

    깔끔하게 새 재떨이를 가져다 바친 비서실장에게 사나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뭐 어때서! 어차피 니들도 말 못할 거면서 눈은 왜 부라려?

    찰칵.

    이지혁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 거참."

    담배를 쭉 빨았다가 뱉은 이지혁이 찡그린 눈으로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힘 빼지 말자구요?"

    윤영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 말한 것 같기는 한데, 그래서 저 인간이 기분이 상한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추적이 되지 않는다.

    "그게… 에……."

    이지혁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윤영민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런 양반이 대통령이랍시고 앉아 있다니.

    그는 명군을 많이 봐온 만큼 암군도 많이 봐왔다.

    혼자서 나라를 말아먹는 암군도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그래도 저런 인간은 찾아보기가 힘든 게 왕이라는 자리였다.

    아무리 등신 같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보통은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정말 최악의 인간들은 걸러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폭군이니 암군이니 하는 왕도 보통은 일반인보다 더 뛰어나다.

    그런 인간들이 왜 암군이 되냐고?

    왕이라는 자리가 주는 스트레스가 말도 못하니까.

    보통 즉위하자마자 등신이 되는 왕은 잘 없다. 보통은 이삼 년 하다가 왕이라는 직위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여 제대로 된 병신이 되어버리는 게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나라를 말아먹는 건 보통 사람은 시도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 왕이 일반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추진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 추진력이 좋은 방향으로 전개되면 업적이 되는 것이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면 흑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그런 병신도 아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저 남이 하는 일을 가만히 옆에서 피해 안 받으며 있다가 숟가락이나 얹어보겠다는 태도가 너무 눈에 잘 보여서 짜증이 날 정도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대통령이 됐지?'

    부정선거라도 했나?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적어도 이런 일은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지혁은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말씀 잘하셨네요. 쓸데없는 힘 안 빼려고 안 간다구요. 간다고 나한테 뭐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윤영민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게 지금 진심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의 상식대로라면 지금 이지혁은 정신이 나간 것이거나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국의 입지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지혁이라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재원이라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실권자가 해온 요청을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경제력이든 군사력이든 전 세계와 붙는다고 해도 되레 발라 버릴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세계 유일국 아닌가.

    지금 시대는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짜인 체계이고, 미국을 위한 체계이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예전과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미국과 대등해진다는 것은 무리였다.

    절대로.

    몬스터의 위협에서 이지혁이 필요하니 배짱 좀 부릴 수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지원 요청에 좀 튕겨주고 지원도 받고, 이지혁이 가주는 대가로 상당수의 금전적 이득을 보고 있지 않은가.

    과거, 나라의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미국이 바라는 것을 대가없이 주어야 하던 때에 비한다면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간다고?

    '절대 안 되지.'

    당장 내일부터 경제 제재만 들어와도 대한민국은 패망이다. 지금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 군사적으로 너무 많이 얽혀 있다. 미국이 제재하기로 마음먹는다면 한국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물론 미국도 피해야 입겠지.

    하지만 손가락이 잘리는 쪽과 목이 잘리는 쪽이 대등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정말 안 가시겠다는 겁니까?"

    이지혁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네."

    "이지혁 씨의 행동 하나 때문에 국민들이 얼마나 피해를 볼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저씨."

    윤영민의 눈이 찌푸려졌다.

    자꾸 듣다 보니 열이 오른다.

    대통령을 두고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가 이해를 못하겠어서 말하는 건데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원래 정치라는 게 국민 하나 붙들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징징거리는 거예요?"

    "……."

    "원래대로라면 국민이 하기 싫다는 것은 안 하게 해주는 게 정치고, 해외에서 우리 국민에게 목숨 걸고 싸우라고 하면 그런 부당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실드 치고 막는 게 국가원수라는 사람이 해야 할 일 아니에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윤영민은 입을 다물었다.

    이지혁이 한 말은 지금까지 이어지던 미묘한 감정 싸움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이지혁은 타국에 지원을 나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를 타국으로 보낼 수 있는 강제성을 국가가 가지지 못한 이상 타국으로 지원을 나가 한국의 국익에 이바지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일 뿐,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지혁 씨……."

    "하지만이고 뭐고."

    이지혁은 윤영민의 헛소리를 더 들어줄 용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두 번이나 미국으로 날아가서 한 일로 나한테 떨어진 게 뭔데요?"

    "국가적인 이득이……."

    "그러니까 그 국가적인 이득 말고, 나한테 떨어진 건 뭐냐고?"

    윤영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지 못했다.

    국익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되는 일이지, 이지혁이 그 일을 통해 뭘 얼마나 벌었는지 그가 알 게 뭔가.

    이건 솔직히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 부분까지 챙기는 대통령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대통령의 업무량은 결코 적지 않다. 그 일들을 다 챙기면서 한 명, 한 명의 국민들을 다 챙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없거든요?"

    그 순간, 비서실장이 손을 들고 나섰다.

    "왜요?"

    "제가 알기로는 이지혁 씨도 적지 않은 돈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필요 없는데?"

    "네?"

    "내가 살아보니까 돈이라는 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그냥 통장에 0이 늘어나는 것 말고는 딱히 달라질 게 없는 거더라구요."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대기업 회장들은 미쳤다고 죽어라고 일을 하겠는가.

    돈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것이고,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나는 거다.

    "난 그런 거 필요 없어요."

    "……."

    그런데 뭐, 자기가 싫다는 데 어쩌겠는가.

    "그러니까, 나는 가서 도와준다고 딱히 이득 보는 거도 없거든요?"

    윤영민의 안색이 썩어 들어갔다.

    "국민으로서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이득을 보려고 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월급 반납하고 가진 재산 모조리 사회 환수하고 나서 말해요."

    "……."

    "뭔 시답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어. 그리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싶으면 부족한 세수에 그 재산이라도 보태고 시작하셔야지. 어디 자기도 안 하는 짓을 남한테 강요하고 있어요, 짜증나게."

    윤영민의 눈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그… 논리적으로는 틀린 게 없는 거 같은데, 같은 말을 들어도 왜 이리 기분이 나쁘게 들리는가.

    "그래서 못하겠다는 겁니까?"

    "네."

    "비서실장!"

    "예?"

    비서실장이 엉거주춤 앞으로 나왔다.

    "국가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 대통령명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어떤 법적 처벌을 내릴 수 있나?"

    비서실장이 대체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하며 윤영민과 눈을 마주쳤다.

    저 초롱초롱한 눈은 뭐지?

    저 인간이 미쳤나?

    "그,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없어?"

    "당연히 없죠.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 없어?"

    이지혁은 얼굴을 감쌌다.

    여기 분명 청와대인 거 같은데…….

    내가 지금 잘못 찾아왔나?

    청와대에서 이런 대화가 오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하……."

    여하튼 어느 시대든 위정자라는 것들은 다 비슷비슷하다니까.

    "여하튼 난 안 가니까 그런 줄 알아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어, 어딜 가는가!"

    "집에요."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는데?"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아자씨."

    "……."

    "법적인 내용은 변호사와 이야기하는 거고, 회장님과 대화하고 싶으면 비서를 통해야 하는 거구요. 저와 이야기하고 싶으면 저한테 이야기하시면 안 되죠."

    "그, 그럼?"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아……."

    윤영민은 보고야 말았다.

    조금 전까지 그저 '지나가는 공무원 1'이라 생각했던 남자가 가만히 뿜어내고 있는 어두운 기운을 말이다.

    "최, 최정훈 씨?"

    빙긋.

    최정훈은 말 그대로 환히 웃으며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그 웃음에서 '꺼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친한 척이냐, 이 영감탱이야'라는 뜻이 느껴지는 것은 윤영민만의 착각일런가?

    최정훈이 윤영민을 무시하고는 이지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최정훈의 눈빛을 받은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오케이, 알아들었다.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이쪽을 통하시죠. 제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니까요."

    "……."

    "직통은 안 받아요. 크리스토퍼도 이쪽 통하는 거 보셨죠? 귀찮게 하면 그냥 갑니다."

    윤영민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윤영민과 눈이 마주친 최정훈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명령하신 대로 나가보겠습니다, 대통령님."

    이 인간, 뒤끝 쩌네.

    * * *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나!"

    윤영민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최정훈의 의뭉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공무원의 본분에 알맞게 이런 자리에는 나서지 말고 고이 가보라는 말씀…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금과옥조를 잊지 않고 제 인생의 이정표로 삼아 되새기고 또 되새기겠습니다."

    이놈의 자식이 말하는 것 보소?

    저 얼굴 봐, 얼굴.

    삐친 게 눈에 저리 보이는구만, 입에서는 저리 버터 바른 듯한 말들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다니!

    "크흐흠."

    윤영민은 사태를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내가 조금 실수를 한 듯하구만."

    무릇 정치인이 자존심을 내세우는 족속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정치인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피해가 없을 때만 발동하는 액티브 스킬이다.

    이익과 자존심이 충돌한다면 언제나 이익을 선택하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올바른 덕목 아니겠는가.

    "실수라니요."

    최정훈이 황망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실수는 제가 한 거죠. 제 실수를 혼내지 않고 바로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실수의 급으로만 따지면 당장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인데 이리 자비로우시니, 나라의 미래가 무척 밝습니다."

    윤영민의 눈두덩이 푸들푸들 떨렸다.

    이게 지금 나 엿 먹이나?

    "내 실수라 하지 않았는가."

    "대통령님."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공직에 있는 사람에게 실수란 건 없습니다. 실수라고 말해 다 해결된다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수습을 하는가죠."

    "끄응……."

    윤영민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평소라면 눈도 마주치지 못할 하급 공무원 따위가 지금 이지혁을 등에 업고 제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왜 저런 놈에게…….'

    이지혁도 문제다.

    왜 저런 인간에게 힘을 실어주는가.

    그가 진정으로 힘을 실어줘야 할 사람은 최정훈이 아니라 대통령인 자신 아닌가!

    "이지혁 씨!"

    "안 들려요."

    이지혁은 귀를 후비더니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과자 없어요?"

    "이, 있습니다."

    "과자 좀 가져다주세요. 콜라도 추가하고."

    "콜라는 여기 있어. 이거 먹어."

    "응."

    정해민과 이지혁이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황당한 광경을 보는 윤영민의 마음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어쩌다가 저런 미친놈이 힘을 가져서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대한민국 5,000만 국민 중에 왜 하필이면 저놈인가.

    그리고 저놈의 비호를 받는 사람이 왜 하필 이놈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원하는 것이 뭔가?"

    어차피 이놈들과 대화를 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차라리 빨리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것이 답이었다.

    "원하는 것이라……."

    최정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곳에 달려왔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 인마!

    이지혁이 너한테 전화 좀 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여기 왔다는 거 이 방에 있는 사람이 다 들었는데!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해야지!

    당장에라도 재떨이를 잡아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윤영민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자신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 그렇지. 알지, 내 알고말고. 아암."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미국이나 중국의 수장쯤 되었다면 이리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공무원이라니! 평소라면 손가란 하나로 목을 따버릴 수 있는 사람을 무슨 강대국 대통령 대하듯이 해야 한다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이토록 작았나?'

    윤영민은 일순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까 이지혁 씨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대가 없는 노동이 반복되면 사람은 의욕을 잃기 마련이죠. 열정 페이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뼈가 으스러지게 일하는 사람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님께서는 그리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무, 물론이네. 다만, 내 말은 그 정당한 대가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지."

    "그거야 주는 사람이 정할 일 아니겠습니까? 받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비, 비서실장!"

    대통령이 다급하게 부르자 비서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꼭 이럴 때만 부르지, 이럴 때만!

    "예, 대통령님."

    "우리가 이지혁 씨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나?"

    "서면으로 작성해 둔 것이 있습니다. 일단 훈장부터 시작하시죠."

    "훈장? 그래! 그렇지! 준비한 훈장이 있지 않나. 그것부터 수여하겠네."

    최정훈은 훈장이라는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얼마나 대놓고 웃는지 보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였다.

    "훈장요? 이지혁 씨, 훈장 주신답니다."

    "먹는 거예요?"

    "먹지는 못할걸요?"

    "그럼 됐어요."

    "됐답니다."

    와…….

    욕하는 시어머니보다 옆에서 깐죽대는 시누이가 더 엿 같다더니!

    윤영민은 최정훈의 대가리를 쪼개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그럼 원하는 게 뭔가?"

    "아실 만한 분께서 왜 이러십니까."

    "알면 묻겠나! 돈도 싫다! 훈장도 싫다! 그럼 대체 뭘 해줘야 한다는 말인가!"

    "흐으음……."

    최정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방에서 A4 용지를 꺼냈다.

    "워드로 작성하면 좋겠지만, 일단 최소한의 합의만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일단은 면책특권부터."

    "면책특권?"

    이건 뭔 개소린가!

    국회의원도 아니고, 면책특권이라니!

    그런 걸 능력자에게 줬다가는 당장에 국민들이 거품을 물고 일어날 것이다. 실시간 레임덕이 터지는 걸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걸 줄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안 됩니까?"

    "국민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나!"

    최정훈이 씩 웃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럼 모르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뭐라고?"

    "굳이 공표할 필요는 없지요. 당사자들만 알면 그만인데. 그럼 그만 아니겠습니까?"

    "……."

    이 인간은 뭐지?

    조금 전까지는 뭔가 상식적인 인간 같더니, 판이 깔리자마자 이 물씬 풍겨 나오는 사짜 기질은 뭐란 말인가.

    '대성하겠어.'

    이런 타입은 관료가 아니라 정치인을 해야 한다.

    적당히 지역구 하나 주고 돈 좀 몰아주면 순식간에 치고 올라올 타입이었다.

    '이, 이게 아니지.'

    지금은 정치인 판독을 할 게 아니라 지금 사태부터 해결을 해야 한다.

    "그런 건 할 수 없네."

    "네?"

    "나는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일세.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 해도 국민을 속일 수는 없지."

    "아……."

    최정훈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인간…….

    머리에 든 거 없고, 생각 없고, 급진적인 주제에 운 좋게 대통령이 되었다고 욕은 먹어도 개인적인 비리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청렴하긴.'

    무능한 주제에 청렴하고 열정적인 것은 죄다.

    차라리 비리로 가득한 사람이면 탄핵을 하든 어쩌든 해결책이라도 있을 텐데.

    "그래서 지원해 주실 수 없다는 겁니까?"

    "그건 안 되네."

    "흐음……."

    최정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처럼 상황이 풀리지 않는다.

    그때, 최정훈을 돕는 자가 있었다.

    RRRR.

    전화가 울린다. 비서실장이 다급하게 전화를 받더니, 최정훈과 윤영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입니다."

    "스피커로 연결해 주세요."

    최정훈의 말에 비서실장이 살짝 그를 노려보고는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최정훈입니다."

    - 크리스토퍼일세. 어찌 되었나?

    "죄송하지만, 지원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 어째서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호적이지 않았는가.

    "안타깝지만 대통령께서 지원에 대한 대가 지불을 거부하셨습니다. 무료 봉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 무료 봉사라니! 지금까지 우리가 해준 게 얼만데! 그리고 이번에도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지 않았나!

    "금전적인 것들은 이미 충분합니다. 이지혁 씨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 그럼 뭘 원하는 건가?

    "간단한 것들이죠. 가벼운 면책특권과 여러 편의 사항 같은 것들 말입니다."

    - 그게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 하…….

    윤영민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고개를 돌려 법무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다른 나라는 하고 있소?"

    "그게, 음……."

    법무부 장관이 머리를 긁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특정 능력자들에게 부분적인 면책특권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주요 능력자가 죄를 지었다고 감옥에 가둬 버리면 그 공백을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 대부분이라……."

    듣고 보니 그러네?

    윤영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면 이지혁에게 면책특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저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감옥에 가둘 수도 없다. 이지혁을 가둘 감옥이 있을 리도 없고, 이지혁을 체포할 수 있는 경찰이 있을 리도 없었다.

    설사 그 두 조건이 갖춰지더라도 이지혁을 감옥에 집어넣는 순간, 대한민국의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그래서 그 사소한 문제 때문에 이지혁 씨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 귀국의 대통령과 통화할 수 있겠는가?

    "스피커폰이니 말씀하시지요. 듣고 계십니다."

    - 대통령님, 듣고 계십니까?

    윤영민은 인상을 썼다.

    자신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고, 건너편에 있는 자는 미국의 일개 국장이다.

    직위만 놓고 보자면 감히 그가 대통령과 통화를 요구할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았을 때일 뿐, 실제 역학관계가 어찌 되는지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듣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미국의 대통령과도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는 인물이고, 윤영민은 그저 소국의 대통령일 뿐이다.

    최근 윤영민의 위상이 급상승한 것은 그가 이지혁의 위세를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이지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맥클라렌의 말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듣고 있습니다."

    -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귀국의 협조가 미진하다는 생각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본국의 대통령에게 불의의 사태가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명백한 협박이었다.

    감히 타국의 대통령에게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의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통령이 인질로 잡혀있고 이지혁이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윤영민 때문에 지원을 가지 못했다?

    일이 터지면 모든 책임이 윤영민에게로 쏠릴 것이다.

    "협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 긴 대화는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이지혁 씨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

    윤영민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힘이 문제였다. 힘이 있었다면 이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풀이 죽은 윤영민이 알겠다고 말을 하려는 찰나,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저씨."

    - 이지혁 씨?

    "아저씨는 뭔데 우리나라 대통령한테 말을 그따위로 해요?"

    - …네? 저는 그저 이지혁 씨를 도와드리려고…….

    이지혁이 눈을 부라리며 전화기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왜 말을 함부로 하냐고! 우리나라 대통령인데! 미국이 그렇게 잘 나가?"

    - 헐.

    "까도 내가 깐다! 어디 남의 나라 대통령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윤영민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 * *

    저 인간이 왜 저러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골탕 먹이지 못해서 안달이던 인간이 갑자기 편을 들어주기 시작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하기도 하고, 뭔가 먹먹하기도 하고.

    윤영민은 시큰해진 콧날을 훔쳤다.

    - 이지혁 씨, 저는 그저 이지혁 씨를 도와드리려고…….

    "도와주는 건 좋은데, 왜 남의 나라 무시하냐고요."

    - 무시한 적 없습니다.

    "내가 듣기에는 무시한 것 같은데?"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확실해요?"

    - 물론입니다. 저뿐 아니라 이지혁 씨가 속한 국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남의 나라 대통령한테 협박이에요, 협박이!"

    왈칵.

    윤영민은 안구에 차오르는 습기를 닦아냈다.

    그렇지!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데.

    초딩 때 놀이터에서 중학생한테 얻어맞고 있는데 저 멀리서 달려오는 아버지를 본 기분이었다.

    더! 더! 좀 더 갈궈줘!

    나의 원한은 이 정도가 아니야!

    "아무리 사람이 매가리 없고 우유부단하고!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도대체 왜 대통령으로 뽑혔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는 해도!"

    듣다 보니 좀 이상한데?

    지금 편 들어주는 거 맞지?

    나 까는 거 아니지?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대통령이면 우리 국민이 까는 거지! 남이 까면 기분이 좋아요, 안 좋아요?"

    - 깐 적 없습니다만…….

    "물론 저 양반이랑 대화를 하다 보면 답답해서 속이 터지는 심정 내가 이해해요! 이해는 하는데!"

    - 저는 안 그랬는데…….

    "그래도 우리 국민이 뽑은 대통령인데, 타국인인 그쪽이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뭔 말인지 알아요?"

    - 매우 잘 알겠습니다.

    "쯧."

    이지혁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거 받아요."

    "스피커폰입니다만."

    "……."

    이지혁이 무안하게 서 있자 정해민이 슬그머니 다가와 수화기를 받아 들고 내려놓았다.

    "괜찮아. 저리로 가자."

    "으응."

    풀죽은 이지혁이 등을 토닥이는 정해민의 인도를 받으며 소파 모서리에 앉았다.

    "아저씨, 여기 따뜻한 것을."

    "…예."

    순식간에 아저씨로 격하된 비서실장이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비서의 조인트를 깠다.

    "빨리 안 움직여?"

    "넷!"

    비서가 부리나케 달려가자 비서실장이 한숨을 쉬었다.

    - 에… 그래서…….

    "넹."

    - 지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진짜 한시가 급합니다, 이지혁 씨.

    "흐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지원해야죠."

    - 언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스터 맥클라렌."

    - 크리스로 좋다고 했을 텐데요.

    "좋습니다, 크리스. 지원은 하겠습니다. 미국이 무너지면 한국에도 영향이 온다는 것을 모를 만큼 이쪽도 바보는 아닙니다. 하지만 방식과 과정의 문제는 저희 쪽에서 해결하고 싶군요."

    - 이해합니다. 다만, 이쪽도 상황이 급하니 조속한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지원은 뭐든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정훈은 전화를 끊고 윤영민을 돌아보았다.

    "대통령님."

    윤영민이 움찔하여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나?"

    "시간이 없습니다. 조속한 결제를."

    최정훈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가?"

    "미리 준비한 요구 사항입니다."

    "이걸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작성해 왔습니다."

    "헐……."

    윤영민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정훈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곳에 도청 장치를 만들어놓은 것도 아닌데, 미리 이런 것을 준비했다고?

    그럼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했다는 건가?

    '보통 놈이 아니군.'

    최정훈, 최정훈…….

    최근에 많이 들려오던 이름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설마 둘이 미리 짠 건 아니겠지?'

    이지혁이 이곳에 오기 전에 상황을 이리 만들 것이라 계획했었다면 서류를 미리 만들어놨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예상한 상황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만들어낸 능력이 더 대단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어느 쪽이든 대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끄응……."

    윤영민은 힘없이 서류를 훑었다.

    그저 전화 한 통을 받았을 뿐인데, 그전과는 상황이 매우 달라졌다.

    크리스토퍼는 이지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지혁에 대한 지원을 천명했다. 지금 이 상황만큼은 이지혁이 미국이라는 뒷배를 등에 업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이지혁이 윤영민을 도와주었다고는 하나 그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압박하는 것을 막아준 것이지, 윤영민 개인을 도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라는 중간 지대가 사라지면 이지혁과 윤영민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지혁의 대리인이 바로 최정훈이었다.

    정리하자면 지금 최정훈은 이지혁과 미국이라는 강대한 두 세력을 등에 업고 윤영민 앞에 선 것이다.

    "조건이 좀……."

    "네?"

    "아니, 이 조건이 좀……."

    "뭐라고 하셨죠?"

    "으……."

    윤영민은 이를 갈았다.

    이 망할 놈.

    "자, 자네, 언제까지 그리 목에 힘주고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윤영민의 마지막 발악에 최정훈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반격했다.

    "글쎄요. 각하의 임기보다야 오래 살지 않겠습니까?"

    "끄으으응."

    윤영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서실장!"

    "예."

    "적당히 조절해서 사인해 줘."

    "그래도 되겠습니까?"

    "난 이만 가겠네!"

    "예."

    윤영민이 붉어진 얼굴로 퇴장하자 비서실장이 최정훈의 반대편에 와 앉았다.

    "음……."

    최정훈도 지금까지 윤영민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실무자는 실무자를 알아보는 법.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만만찮은 포스에 최정훈이 긴장한 것이다.

    "꽤나 재미있게 놀더군."

    "칭찬 감사합니다."

    "젊은 친구가 강단도 있고 좋지만, 오늘은 너무 나갔어. 뒷배가 단단한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 뒷배가 언제까지 자네를 지켜줄 것 같은가? 끈 떨어진 연은 시궁창에 처박히는 법이지."

    "으음……."

    최정훈은 묵직한 침음을 흘려냈다.

    "하지만 연은 올라가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끈이 떨어지더라도 올라갈 수 있는 한 올라가 봐야죠."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높이 올라간 만큼 떨어질 때가 더 아프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

    "충고 감사합니다. 다만……."

    "다만?"

    "그 충고는 비서실장님께 더 유용할 것 같군요."

    "하하……."

    비서실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윤영민에게 줄을 대고 있는 그의 미래는 이미 빤한 것이었으니까.

    "그래, 오를 일만 남은 사람에게 이제 곧 떨어질 사람이 할 말은 아니겠지."

    씁쓸한 마음을 삼킨 그가 펜을 들었다.

    "어디 사인하면 되는가?"

    "읽어보지 않으십니까?"

    "어차피 한계가 있는 정권이네. 욕이야 이래도 먹고 저래도 먹는 것. 활동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욕먹으면 그것도 나라를 위하는 거겠지."

    "음……."

    최정훈이 비서실장에게 사인란을 펴 보였고,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었다.

    "됐는가?"

    "협조 감사드립니다."

    "그럼 어서 지원 가보게. 정치권이랑 실랑이한다고 미국 대통령을 죽게 내버려 뒀다고 하면 역사에 남을 멍청이들로 기록되겠지. 그건 못 참겠군."

    "예."

    최정훈이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요?"

    "아니, 아직 남았어요."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숨을 죽이고 있던 장관들이 이지혁의 눈길을 받자 움찔했다.

    "전화하지 마요."

    "……."

    "전화기 내가 가지고 있을 거야. 전화 온 곳마다 내가 직접 가서 왜 전화했는지 이유 들을 테니, 전화할 때 생각하고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 그럴 일 없습니다."

    "두고 봅니다."

    장관들의 얼굴이 썩어갔다.

    하지만 이지혁이 윤영민을 어떻게 대했는지 본 사람들이다 보니 차마 불만이 나올 수는 없었다.

    "가요."

    "예, 이지혁 씨."

    이지혁과 최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아영과 정해민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읏차."

    이지혁이 손을 휘저어 게이트를 열고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한 번씩 숙여 보이고는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지혁 일행의 모습이 사라지자 장관들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안하무인도 유분수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무리 중요 인물들이라고는 하나 저리 마음대로 하게 두어서 되는 겁니까?"

    "대책이 필요합니다! 대책이!"

    국방부 장관이 혀를 찼다.

    "그 말을 당사자들 앞에서 하지그러셨습니까?"

    "뭐요?"

    "앞에서 못할 말이면 뒤에서도 하지 맙시다. 이게 무슨 추태들이오!"

    "이!"

    "거기까지 하시지요."

    분위기가 격해지자 비서실장이 상황을 중재하고 나섰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그게 뭐라고 읽지도 않고 서명을 해, 서명을!"

    비서실장은 흐려지는 눈을 문질렀다.

    이런 인간들이랑 같이 일을 하니 피곤할 수밖에.

    "어차피 저항할 방법도 없습니다. 빨리 서명하느냐, 시간을 끌고 서명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그게 어찌 그리되나!"

    "그럼 그때 말씀하지 그랬습니까!"

    "이 사람이!"

    "그리고!"

    언성이 높아지자 비서실장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분들입니다. 괜히 밉보이는 일 없도록 알아서들 처신하시지요."

    "끄응."

    그제야 장관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럼."

    비서실장은 집무실 밖으로 나가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무게 추가 기울었어.'

    별것 아닌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대통령 집무실에 이지혁이 난입하여 깽판 한 번 친 것뿐이니까.

    그저 그런 헤프닝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진정한 의의는 이지혁과 국가가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던 무게 추가 이지혁 쪽으로 급격하게 쏠려 버렸다는 사실이다.

    대통령마저 두 손을 들어버린 상황에 누가 이지혁을 제어할 수 있겠는가.

    '최정훈이라고 했던가.'

    그나마 이지혁이 그를 신경 쓰고, 그의 말이라면 듣는 척이라도 한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단순한 감시역이나 조언자가 아니라 어느 정도 제어자의 역할도 맡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이지혁이 굳이 최정훈의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무시한 사안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정권의 희망이었다.

    "자리를 한 번 만들어봐야겠군."

    회유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가 봐도 현재 국가에 충성해서 얻어낼 것보다 이지혁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서 얻을 것이 더 많으니까.

    그래도 이지혁의 주위에 대화가 통하는 자와 선이 닿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피곤하군."

    비서실장이 힘겹게 자리에 앉았다.

    "그 아저씨, 괜찮지 않았어요?"

    "비서실장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국방부 장관이라는 사람도 강단 있던데. 실리도 챙길 줄 알고."

    "그렇죠."

    "근데 대통령 아저씨는 어떻게 뽑혔데요? 나 없을 때인 거 같은데."

    "혼란한 시대였죠."

    "그런 양반이 그런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골치 아픈데."

    "…난들 어쩌겠습니까."

    "국방부 장관 아저씨는 나이 많아요?"

    "나이요? 나이는 왜?"

    "대통령 할 만한가?"

    "…이지혁 씨."

    "농담이에요."

    니가 하면 농담으로 안 들린단 말이다, 인마!

    "어쨌든 가기로 한 이상 얼른 가죠."

    "크리스토퍼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오라 했습니다."

    "그럼 준비해요."

    내가?

    왜 자연스럽게 내가 준비를 해야 하는 거지?

    최정훈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가슴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 * *

    이스트 포토맥 파크.

    웅! 웅!

    드넓은 이스트 포토맥 파크의 한중간으로 전투복을 차려입은 NDF의 능력자들이 텔레포트해 왔다.

    "으으으……."

    얼굴이 누렇게 뜬 미국의 텔레포터들이 사람 하나를 옮기자마자 헛구역질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텔레포트를 하는 광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구, 국장님, 저는 더 이상……."

    "더 이상 뭐?"

    "…아닙니다."

    단호한 크리스토퍼의 목소리에 텔레포터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텔레포트해 갔다.

    "쯧쯧, 요즘 것들이란……."

    내가 베트남전에서 현역으로 활약할 때는 사박 오일을 잠 한 숨 안 자고 베트콩들이랑 싸우면서도 아쉬운 소리 하나 안 했는데!

    뼈대가 얇아졌어!

    이번 사태가 잘 해결되면 어떻게든 그들의 정신 상태를 다잡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크리스토퍼였다.

    그러려면 그 양반에게 연수를 보내는 게 최곤데…….

    늠름하게 서 있는 NDF의 요원들을 보자 미국의 능력자들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국장님."

    "크리스로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스터 최."

    "영 입에 익지 않는군요."

    "천천히 익숙해지면 좋겠지. 그런데……."

    크리스토퍼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물었다.

    "이지혁 씨는 어디 있는가?"

    "아직 안 왔습니다."

    "어째서?"

    "귀찮다고 마지막에 온다고 하더군요. 지금 사무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면서 만화 보고 있습니다."

    "…위기감이라는 게 없는 건가?"

    최정훈은 쓰게 웃었다.

    이지혁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이지혁의 어머니밖에 없다.

    대통령 앞에서도 엿을 퍼 먹이는 인간인데, 어디에서 위기감을 느끼겠는가.

    "마왕급입니까?"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네. 능력자도 아닌 내가 뭘 그리 자세히 알겠냐마는 내 느낌상으로는 이제까지 왔던 마왕들과 비슷한 기운인 것 같았네."

    "…그놈의 마왕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왜 이리 많답니까?"

    "내 말이!"

    크리스토퍼는 간만에 공감을 해주는 이를 만나서 기분이 들떴다.

    어쩜 이렇게 그와 생각하는 게 같단 말인가.

    "그래서 이리 긴장감이 없으신 건가?"

    이지혁이야 마왕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새로운 마왕이 언제든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아도 생각했겠지.

    "그런데 저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다면서요?"

    "그렇다네."

    "무사히 빠져나오셨네요."

    "무사히 나온 게 아니라 보내준 거지. 나보고 이지혁 씨를 찾아오라더군."

    "이지혁 씨를요?"

    "그러게 말일세."

    "흐음……."

    최정훈은 표정을 가라앉혔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지구로 쳐들어온 마왕들의 목적도 지구 자체라기보다는 이지혁이었으니까.

    그들이 벌인 일련의 파괴 공작도 지구를 파괴한다기보다는 이지혁의 관심을 끌어내는 행동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확실하군.'

    미국 대통령을 인질로 잡고 이지혁을 끌고 오라니, 이 얼마나 확실하고도 무식한 방법인가.

    "그럼 일단 이지혁 씨가 오기 전까지는 별일 없겠군요."

    "으음, 하지만 자기가 언제 지루해질지 모른다고 계속 이대로 시간을 끌면 무슨 일을 벌일지 알아서 상상하라더구만."

    무슨 일?

    그야 뭐…….

    이전의 마왕들이 하던 짓대로라면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린다거나, 좀비 사태를 벌인다거나 하는, 아주 흔한 일이겠지.

    "썩을."

    최정훈이 저 멀리 보이는 백악관의 하얀 외벽을 보며 침음성을 냈다.

    "대피는 끝났습니까?"

    "주변 도시 내에 있는 시민들은 지금도 대피 중일세. 모두 대피한다는 게 어디 쉬운가? 여긴 워싱턴이란 말일세."

    "그야 그렇겠죠."

    일단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대피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미국 측은 준비가 끝났습니까?"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다 끌어모았네."

    "그럼 다행이군요."

    "신소리 말게. 나도 알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는 딱히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말이야. 고기 방패라도 되면 다행이지."

    "……."

    최정훈은 굳이 좋은 말로 미국의 위상을 올려주려 하지 않았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이대로는 어렵겠네요."

    "앞으로 말인가?"

    "예."

    "나도 생각은 하고 있네. 그래서 이번에 굳이 훈련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건데……."

    그 썩을 놈 때문에 일이 꼬였지.

    알카트라즈의 식단 예산을 줄여야겠어.

    그러는 와중에도 NDF의 요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대충 다 넘어왔습니다."

    박성찬이 와서 보고를 하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영은 넘어온 대원들에게 기합을 불어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혁 씨는요?"

    "…처놀고 있던데."

    "거, 악감정이 있는 건 알겠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죠."

    "조심하겠습니다."

    "마음은 알겠지만요. 네, 마음은 알겠지만……."

    "…진정하시죠, 부부장님."

    "추태를 보였군요."

    최정훈은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뭔 마음을 안다는 거여?"

    귀신같은 인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정훈은 우선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이 중요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해야 한다.

    "별말 아닙니다. 그나저나 도착하셨군요."

    "하……."

    이지혁이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좀 늦으면 미국이 날아가나?"

    "미국은 안 날아가는데, 대통령은 죽을 수도 있다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

    "…응?"

    정해민은 별말 없이 이지혁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버거야. 미리 시켜서 사놨어. 출출하지?"

    "응."

    "먹어."

    "응."

    얌전히 버거 포장지를 까서 먹기 시작하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이 머리를 쳤다.

    '저게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저 인간…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김치찌개를 3인분씩 퍼먹던 인간이었다.

    정인수 대령도 과자 하나로 제압하지 않았던가!

    왜 이제까지 저걸 잊고 있었을까!

    잊은 그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이지혁이 저런 성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여 이용하고 있는 정해민이 대단한 건가!

    우물우물.

    "맛있어?"

    "마시쪙!"

    …그런데 저거, 뭔가 그림이…….

    엄마가 애 챙기는 것 같지 않은가.

    뭔가 미묘한데 말이야, 뭔가.

    최정훈이 고심을 하고 있을 때, 크리스토퍼는 반색을 하며 이지혁에게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끄덕.

    입으로는 계속하여 분쇄 절삭을 하며 고개만 까딱이는 이지혁이었다.

    "버거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미리 준비해 둘 걸 그랬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제가 꼭 준비해 두겠습니다."

    "다음에도 또 오라구요? 내가 미쳤다고 여길 다음에……."

    "콜라 먹자."

    "응."

    꿀꺽꿀꺽.

    크리스토퍼가 콜라를 빨아먹는 이지혁을 보며 슬쩍 최정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여성분은?"

    "정해민 씨입니다. 우리 측의 텔레포트 능력자죠."

    "이지혁 컨트롤러가 아니고?"

    "……."

    정해민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퍼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아서라. 그 사람… 데려갈 수 있는 사람 아니다.

    근데…….

    가윤아.

    너는 왜 그 인간 입을 닦아주고 있니?

    걔가 무슨 5살짜리 어린애니!

    햄버거 치즈를 질질 흘리며 먹고 있으면 제대로 먹으라고 다그쳐야지, 그걸 닦아주고 있으면 어떡하자는 거니!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이상해.

    진짜 다들 이상해졌다.

    "상황은요?"

    "제 눈으로 보기에는 마왕으로 보이는 여성형 인간체가 현재 대통령을 인질로 잡고 농성 중입니다."

    "농성이라……. 목적은?"

    "글쎄요."

    크리스토퍼가 의뭉스레 말끝을 흐렸다.

    순간,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몰라?"

    "그, 그렇습니다."

    "목적도 없이 인질을 잡았고, 대통령이 인질로 잡혔는데 목적이 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나보고는 급하다고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그게……."

    "매우 구린데? 아저씨,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흐음……."

    이지혁이 가늘어진 눈으로 크리스토퍼를 노려보았다.

    "뭐, 좋아요. 알고 온 거니 당해주죠. 그런데 이러면 위험수당이 더 붙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최정훈 씨."

    "네."

    최정훈이 두말 없이 서류를 꺼내 크리스토퍼에게 내밀었다.

    "사인하시죠."

    "끄응……."

    크리스토퍼는 서류를 보지도 않고 사인을 했다.

    "안 읽어보십니까?"

    "어차피 이 상황에서 협상하자고 한다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거고, 협상한다고 시간 끄는 사이에 대통령이 당하기라도 하면 끔찍한 일이 터지는 거요. 당신이 우리에게 가당치도 않은 요구는 하지 않을 거라 믿소."

    신뢰가 가득 담긴 크리스토퍼의 눈을 마주한 최정훈이 우물쭈물하다가 서류를 펴 들었다.

    "…두 조항은 삭제하겠습니다."

    이 새끼가?

    지금 나 엿 먹이려고 한 거냐?

    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흔들리는 크리스토퍼의 눈길을 외면하며 최정훈이 서류의 두 줄을 죽죽 긋고는 그 위에 사인을 했다.

    "그럼 조건은 정해진 걸로……."

    "…나중에 이야기 좀 합시다, 미스터 최."

    "그러지요, 크리스."

    이럴 때만 크리스지, 이럴 때만!

    "그래서 저 안에 있는 놈을 잡아 죽이면 된다는 거죠?"

    "대통령에게는 절대 피해가 가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그런 영감 하나 죽는다고 별일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상징성이죠, 상징성."

    "흐음……."

    이지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백악관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건물은?"

    "웬만하면 보존하고 싶습니다마는 그게 쉽지는 않겠죠. 편한 대로 해주십시오."

    "알겠어요. 그런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우리 말고 다른 애들도 있나요?"

    "다른 애들이라니요?"

    "능력자들 말고 다른 사람도 보이는 거 같은데?"

    "국방부에서 나와 있습니다. 육군 쪽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음, 전투 병력?"

    "전투 병력은 아닙니다. 실내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는 거죠."

    이지혁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네?"

    "쟤들은 뭔데요?"

    이지혁이 손을 쭉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대통령 집무실의 창 건너편으로 일련의 무리들이 보였다.

    "허?"

    크리스토퍼가 당황하여 헛바람을 냈다.

    저런 건 보고 받은 적이 없는데?

    "서, 설마!"

    이 미친놈들!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그만큼이나 이야기했는데!

    "저거, 저격수들 아니에요?"

    "저격이라니……."

    대통령 집무실 안으로 저격이 될 리가 있나. 저 유리가 보통 유리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하다면 백악관이 아니지!

    "쏠 거 같은데?"

    "아, 안 돼!"

    타앙!

    하지만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닿기도 전에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그런 후…….

    사방이 조용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와, 저 유리 좋은 건가 보네?"

    이지혁의 눈에는 보이는 건가?

    "마, 막아낸 겁니까?"

    "아뇨. 총알 들어간 자국만 동그랗게 남아 있는데요? 깨지지도 않았어."

    "…이 개 같은 놈들."

    크리스토퍼는 분노로 이성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으음, 근데 아저씨……."

    "네?"

    "그 대통령인가 뭔가 하는 양반 있잖아요."

    "네."

    "못 살리겠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봐요."

    고오오오오오!

    그 순간, 백악관의 창틈과 문틈 사이로 검은색의 마기가 구름처럼 뭉클뭉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빡 쳤네."

    말 안 해도 알아, 인마!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