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2화 (52/118)

[■] 이지혁 씨를 찾아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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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최정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시커먼 입을 벌린 게이트가 둥둥 떠 있었다.

"으으음……."

최정훈은 수많은 상황을 봐왔다고 생각했다.

블랙 먼데이 이후 그의 삶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그 와중에 수많은 못 볼 꼴과 막장 상황, 그리고 대처가 힘든 경우들을 겪어왔다.

힘든 삶을 사는 이들은 많겠지만, 난이도로 따졌을 때 최정훈의 삶은 S급 하드 모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드 모드를 지금까지 잘 헤쳐 나온 최정훈으로서도 지금의 상황만큼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간 거예요?"

서아영이 물어오자 최정훈은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은데요."

"진짜?"

"아마도."

서아영 역시 학을 뗀 얼굴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미친놈."

저 게이트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럽다.

"마, 말려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이지혁이 하는 일을 말린다고 나선 적이 한 번도 없는 정해민마저 당황한 얼굴로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하면서 뭔가 심통 난 듯 짜증을 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게이트를 열고 사라졌다.

보통 그런 경우 저 게이트가 어디로 연결되었을지는 빤하지 않겠는가.

"말리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최정훈은 심각한 얼굴로 게이트를 바라보다가 그냥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다.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

서아영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 그래도 말려야 하지 않을까?"

"으음……."

최정훈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한참을 얼굴을 문지르던 최정훈이 게이트를 보고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냅 둡시다."

"응?"

"네?"

최정훈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애초에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뭘 어떻게 말립니까? 그리고 딱히 말려야 할 이유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정해민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그런데… 지금 지혁이가 간 데가 제가 생각하는 거기가 맞는거죠?"

"아마도요."

"그, 그런데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거예요?"

"…생각 좀 해보죠."

"정신 차려요, 최정훈 씨! 지금 넋이 나가 보여요."

최정훈은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지금은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게이트는 호랑이 굴이 아니고, 건너편에 있는 곳은 호랑이굴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서운 곳이었다.

최정훈이 패닉에 빠져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근데… 뭐가 문젠데?"

서아영이 의자에 한껏 몸을 기대며 말했다.

"청와대에 갔잖아! 무슨 깽판을 칠 줄 알고!"

"깽판 치면 어때서?"

"응?"

"어차피 그 양반이 깽판 친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최정훈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하다!"

생각해 보니 걱정하는 게 이상하다.

"청와대라는 이름에 눌려서 잠시 현실 파악을 못했네요! 그렇죠. 이지혁 씨를 뭘 어쩌겠어요."

"뭔 소리예요?"

최정훈이 어찌 보면 서글픈 듯하고, 어찌 보면 통쾌한 듯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뒈지기 싫으면 가만있겠지."

"네?"

* * *

'뒈지기 싫으면 가만히 있자.'

국방부 장관은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지혁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지만, 이지혁이 어떤 인간인지 너무도 잘 아는 그로서는 지금 해야 할 가장 현명한 대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일단은 저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첫 번째요…….

저 인간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두 번째였다.

"자, 자네, 누군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런 머저리들이 장관이라니.'

몰라서 묻나.

이 상황에 게이트를 열고 청와대에 나타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인간 중에 저런 게이트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이지혁 하나뿐이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인데, 아직 그런 상식도 모른단 말인가.

'뭐, 내 알 바 아니지.'

무지로 생기는 참사는 본인들이 감당할 일이지, 그가 신경 써줄 바는 아니었다.

"누, 누구냐니까?"

"넹?"

테이블 위로 내려앉은 사내를 보며 국교부 장관이 소리를 질렀다.

이지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비서실장을 찾아내고는 씨익 웃었다.

"아저씨."

"네?"

"아저씨는 좀 뭐랄까, 말이 통하게 생겨서 하는 말인데요."

"아, 네."

"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국가교통부 장관입니다."

"요즘 장관이란 건 아무나 하는 건가 보네요? 저런 양반이 장관도 하고?"

"……."

입은 있지만, 차마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사실 그도 똑같이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구냐니까!"

국교부 장관의 외침에 짜증이 확 치민 비서실장이 소리를 질렀다.

"아! 이지혁 씨지, 누구긴 누굽니까!"

순간,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이, 이지혁?"

국교부 장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뇌까리고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저 인간이 갑자기 여기에는 왜 나타난단 말인가.

비서실장은 한숨을 푹 쉬고는 이지혁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청와대에 방문해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지혁 씨. 그런데 무슨 용무로?"

"음?"

이지혁이 비서실장에게서 눈을 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그의 눈에 상석에 앉은 사람이 들어왔다.

"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TV에서 많이 본 사람 같은데?

"아저씬 누구예요?"

이지혁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면 그만이지.

모두의 시선이 윤영민에게로 향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거짓말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창피한 일인데, 이렇게 들킨 이상 어떻게 반응을 하는 것이 옳을지 알 수 없었다.

"나 말인가?"

"넹."

"……."

윤영민이 빙그레 웃었다.

오!

과연 대통령의 여유.

비서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상황이 만들어져 당선된 인간이라고는 하나 대통령이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 웃음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인간의 힘이 느껴진다.

저 여유!

대통령 자리는 고스톱 쳐서 딴 게 아니란 말이지!

"나는 신경 쓰지 말게."

"……."

"관계자는 여기에 많으니까 말일세. 저분이 총리이니, 저분하고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뭔가 노회하기는 한데…….

그 뭐랄까…….

음…….

"여유는 얼어 죽을."

구렁이 같은 인간.

"아, 알았다!"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윤영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저씨가 대통령이죠?"

"……."

윤영민의 얼굴이 흑색으로 썩어 들어갔다.

"그, 그렇다네."

이리된 이상 더 이상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잘됐네요. 우리……."

이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이야기 좀 하죠."

"아?"

윤영민의 얼굴이 매우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 * *

"끄응."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정신이 없었다.

"사표 수리 좀 해달라고!"

평생의 소원이다. 사표만 쓸 수 있게 해준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저 증오하던 러시아로 귀화하는 것조차 고려할 정도로 그는 지금 일에 치이고 또 치이고 있었다.

러시아로 귀화하면 일은 줄어들겠지.

그 빌어먹을 러시아 놈들에게 헤헤거려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겠지만, 지금처럼 일에 치여 죽지는 않을 것이다. 휴식시간을 조금이라도 준다면 그 러시아 놈들과 잘 지내볼 용의도 있다.

"전쟁은 왜 일으키고 지랄이야. 미친놈들."

크리스토퍼는 머리를 싸맸다.

안 그래도 대게이트 매뉴얼이 모두 종잇조각이 되어버린 판이라 할 일이 하늘에서 눈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거기에 멕시코가 국경을 넘어버리지를 않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쳐들어가지를 않나.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으로서는 전 세계적으로 사건이 마구 벌어지고 있어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를 판이었다.

그나마 국내에 있는 전력들이야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멕시코 쪽으로 집중을 시킨다 하더라도 해외에 나가 있는 파병 병력들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그 빌어먹을 국방 장관 놈이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어버버' 하고 있다 보니 일이란 일은 모조리 크리스토퍼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사표 써야 돼.'

이건 노인 학대다.

나라고 뭐고 이 생활을 한 달만 지속하다 보면 크리스토퍼가 먼저 과로로 죽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부관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크리스토퍼는 부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일갈했다.

"큰일 났습니다!"

"……."

"…겠지? 이제 지겨우니까 다른 멘트를 좀 찾아봐."

"진짜 큰일입니다."

"알아! 안다고! 대체 큰일이 아닌 게 뭐가 있는가! 다 큰일이지!"

"아니, 정말 큰일입니다."

"휴……."

크리스토퍼는 한숨을 내쉬고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의 큰일은 하루에도 열 번은 더 벌어지는데 새삼스러울 것이 뭐 있다고.

"흐으읍."

깊숙하게 연기를 빨아들인 크리스토퍼가 천천히 시가 연기를 내뿜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말해봐."

"백악관이 점령당했습니다."

"음, 그래. 그럼… 뭐?"

크리스토퍼가 멍한 눈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무언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백악관이 점령당했습니다."

"…농담이지?"

"진담입니다."

"야, 이 미친놈아! 백악관이 어떤 데라고 점령을 당해! 누구냐! 멕시코냐? 아니면 러시아야? 그것도 아니면 알파냐?"

"아뇨. 그게……."

"사람 속 터지기 전에 빨리 말해!"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는 세력입니다. 아니, 세력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한 것이… 단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

"예."

한 사람이 백악관을 점령했다?

말은 이상하지만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있었다. 백악관이라는 곳은 대통령의 거주지이고, 백악관이 점령당했다는 것은 대통령이 인질로 잡혔다는 뜻이겠지.

그럼 단 한 사람이 백악관으로 쳐들어가서 대통령을 인질로 잡았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미쳤군."

백악관이 어떤 곳인가.

무려 미국의 대통령이 거주하는 곳이다.

능력자들이 생겨난 이후로 능력자를 통한 암살과 테러 가능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온갖 전력이 투자되어 있는 곳이 백악관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곳을 혼자서 뚫고 들어갔다고?

"…누군지 파악은 안 되고?"

"예. 인상착의 자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능력자입니다."

"사살은?"

"불가능합니다."

휴…….

크리스토퍼는 머리를 박박 긁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좀 더 자세한 브리핑을 받아봐야 파악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놓고 보자면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은 지금은 제압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구 조건이 있을 테고, 잘하면 대통령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요구 조건은 뭔가?"

"그게 좀……."

"뭐?"

부관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지혁 씨를 찾아내라고."

"응?"

크리스토퍼가 멍한 눈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 * *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오는가.

이지혁?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제대로 들으신 게 맞습니다."

"음, 그래?"

크리스토퍼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들은 게 맞다라…….

그것참 슬픈 이야기인데 말이야.

세상이 이지혁으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여기도 이지혁, 저기도 이지혁.

어디를 가도 이지혁에 대한 이야기만이 귀에 들려온다.

"그러니까 요구 조건이 뭐라고?"

"이지혁 씨를 찾아내랍니다."

크리스토퍼가 손에 들고 있던 시가를 집어 던졌다.

"이런 빌어먹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크리스토퍼가 입으로 불이라도 뿜을 기세로 소리쳤다.

"그런 한국에 가서 난리를 칠 것이지, 왜 여기서 그 난리를 치고 있다는 말이야!"

부관이 크리스토퍼의 노성에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한 것은 없지만 상사가 화를 낼 때는 죽어 있는 것이 기본이다.

"알려진 적이 없는 능력자라고?"

"예."

"사진 있나? 사진?"

"예. 지금 전송해 뒀습니다."

크리스토퍼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음……."

화면에 나타난 사진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바짝 붙은 가죽옷이 제정신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지만, 능력자 놈들의 코스튬 센스는 정신이 나간 경우가 많기에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문제는…….

"이, 이거 뭐야?"

사진일 뿐인데도 빨려 들어갈 듯한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흐릿한 얼굴 사이로 보이는 빨간 입술이 절로 고혹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매, 매혹 능력인가? 그런데 이건 사진인데!"

"대통령 역시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그렇겠지."

크리스토퍼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젠 노구가 되어 다시는 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능력이라면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 이리 사람의 가슴을 뒤흔든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능력이라는 것은 에테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고, 인터넷을 통해 전파된 사진에 에테르가 작용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본연의 미모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리 뒤흔들 수 있겠는가.

무리다.

절대 무리였다.

크리스토퍼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비워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간단하게.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결론은 아주 쉽게 나온다.

"인간이 아니군."

"네?"

"인간이 아냐."

예전이었다면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크리스토퍼도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우선 아펠드리체가 그러했고, 엘프들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

마왕들 역시 모양은 좀 이상했을지언정 인간형이었지 않았는가.

그럼 인간이 아닌, 이런 존재가 지구로 넘어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지혁을 아는, 인간이 아닌 존재.

그럼 모든 것이 명쾌해진다. 그런데…….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 깽판이냐고!"

크리스토퍼가 다시금 입에서 불을 뿜었다.

망할 놈의 이지혁!

그 이지혁이라는 이름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찾아오게 하는 마의 존재!

전 세계에 능력자 놈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도 이지혁이 한국에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저 빌어먹을 인간, 아니, 인간도 아닌 것 같은 존재는 그런 기본적인 오지랖도 없단 말인가!

"왜, 우리가 왜!"

크리스토퍼는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위장이 쿡쿡 쑤셔온다.

"망할."

탄식을 내뱉는 크리스토퍼를 부관이 재촉했다.

"한시가 급합니다."

"…알아."

아무리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워낙 짜증이 나서 화풀이를 할 필요가 있던 것뿐이지.

"일단 지원 부대 투입해 주변을 물샐틈없이 포위하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잠깐!"

"예?"

"지원 부대는 전원 여성으로만 구성하라고 해."

"…예."

"그리고 텔레포터 하나 불러. 현장에 가봐야겠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은 부관이 지시를 이행하러 나가자 크리스토퍼는 다시 시가 끝을 잘라내고 불을 붙였다.

"빌어먹을, 청와대에나 갈 것이지."

지금 청와대에는 더 큰 재앙이 떨어졌다는 것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 * *

"워, 원하는 것이 뭔가?"

일국의 대통령이 하는 말이라기에는 품위가 너무 떨어졌고, 목소리에서 살짝 느껴지는 떨림이 권위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저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바로 앞에 앉아 있으면 누구나 반응은 비슷할 것이다.

"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한다.

"원하는 것이 있으니 찾아왔을 거 아닌가."

"아, 그렇죠. 음, 그런데……."

이지혁은 뭔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싸맸다. 그 광경을 보는 이들의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제발 상식에만 맞춰다오, 제발.'

이지혁의 입에서 나올 말이 그들의 속을 뒤집어놓을 거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요구가 그들이 들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하지만 이지혁의 입에서는 그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종류의 말이 나오고 있었다.

"어? 나 왜 왔지?"

"아……."

주님.

저 인간을 어찌해야 합니까?

"어?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 내 용건이 뭐였더라? 치매가 왔나?"

젊은 놈이 치매라니!

진짜 걱정해야 할 나이의 사람들을 옆에다 두고 저게 무슨 망언인가!

끓어오르는 울화에 속이 뒤집어졌지만, 이지혁에게 그걸 직접 따지고 들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 잠깐만요."

이지혁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다.

- 최정훈입니다.

"저… 근데 제가 여기 왜 왔죠?"

-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몰라요?"

- 모르죠.

"어, 큰일이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저… 이지혁 씨."

"네?"

비서실장이 참담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은 좀 내려오시는 게?"

"에?"

이지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통령의 책상에서 내려왔다.

보통 사람이 말을 할 때 책상 위로 올라가나?

이게 무슨 '오, 대통령, 나의 대통령'도 아니고.

"아! 생각났다!"

이지혁이 손뼉을 짝, 치고는 대통령을 돌아봤다.

"대통령님."

"으음… 예, 이지혁 씨. 말씀하시죠."

'공대라…….'

법적 사회적으로 대통령의 공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마는, 지금 이지혁이 대통령의 공대를 받는 것은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권력의 추와 힘의 무게추가 지금 이지혁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건 비서실장만의 착각이련가.

"NDF는 대통령 직속 기관 맞죠?"

"네?"

"직속이잖아요."

"그, 그렇죠."

확실히 구조는 그렇게 짜여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왜 개나 소나 NDF에 전화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예요?"

"……."

윤영민은 굳은 얼굴로 총리를 돌아보았다.

총리는 어색한 얼굴로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실시간으로 책임 전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가만히 지켜보다 보니 알게 된 건데요……."

"예."

"개나 소나 전부 다 최정훈 씨한테 전화해서 시시콜콜한 거까지 다 물어보더라고요. 이상하잖아요."

"으음……."

윤영민이 침음을 삼켰다.

"여기가 대통령 직속이면 대통령만 명을 내려야죠. 뭐, 장관이니, 내가 실장이니, 내가 1급이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와요. 그 양반이 얼마나 바쁜 양반인데 이런 식으로 자꾸 일을 방해하면 과로로 죽거든요?"

"……."

"난 그 꼴 별로 안 보고 싶으니까 자제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채널 통일하고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그쪽 통해서 물어봐요."

윤영민의 얼굴이 썩어갔다.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여길 온 것인가? 청와대를?

여기가 무슨 동네 사랑방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쳐들어온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것도 자기 일도 아니고, 일개 공무원 때문이라니!

황당하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가 대체 불가능한 능력자라고는 하지만, 자신은 일국의 대통령이다. 그런 자신이 일개 국민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으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윤영민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업무의 일환입니다. 제가 하지 마라 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죠."

"흐으으음……."

최정훈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지금 화들짝 놀라서 이지혁을 잡으려 들었을 것이다.

하늘로 치솟아 올라간 이지혁의 눈꼬리가 점점 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지혁이 미소를 지었다.

"못하시겠다?"

"……."

윤영민은 담담히 눈을 뜨고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이리 저자세로 나갔던 것도 이상하다.

자신들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지 않은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업무의 일환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NDF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국토교통부가?"

"……."

"여성가족부가?"

"으음……."

"왜요?"

이지혁의 말에 말문이 막힌 윤영민이 국교부 장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 됐고."

이지혁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런 이야기 들으려 온 거 아니에요. 쉽게 말하자면, 나는 지금 부탁을 하러 온 게 아니니까."

부탁이 아니면?

명령이라는 말인가?

윤영민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이건 최소한의 예의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이지혁, 이지혁하더니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지혁을 딱히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쪽 일은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자꾸 전화해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요.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 자꾸 전화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데 뭐가 제대로 돌아가겠어요."

"저기……."

"네?"

등 뒤에서 들려온 반응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국방부 장관이 수줍게 손을 들고 있었다.

"저는 업무상 꼭 통화를 해야 합니다만?"

"누구?"

"국방부 장관입니다."

"아, 뭐, 그쪽이야… 전화하세요."

"감사합니다."

윤영민이 일그러진 얼굴로 국방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저 인간이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나?

하지만 국방부 장관은 슬그머니 윤영민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가 보기에도 관련도 없는 것들이 자꾸 NDF에 관여하려 드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외교부 장관은 타국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명목이라도 있었지. 지금 다른 장관들은 굳이 NDF와 선을 대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떨떠름한 얼굴의 윤영민이 어색하게 고개를 흔들 때쯤 대통령의 핫라인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엇?"

비서실장이 다급한 목소리를 내며 핫라인을 향해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 * *

"청와대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비서실장에게로 집중되었다.

저 전화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서 받을 정도라면 보통 전화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까.

"예."

전화를 받는 비서실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비서실장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돌아본다.

다들 그런 비서실장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뭔 일인가요?"

대통령이 물어보자 비서실장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일단 미국입니다만."

"그런데요?"

"…이지혁 씨의 파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지혁?

모두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꽂혔다.

"아, 뭐!"

"……."

저런 인간이 왜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걸까?

조금이라도 애국심이라든가 충성심이라든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뭔 내가 짱가도 아니고, 지들이 부르면 내가 가야 돼?"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비서실장에 겸연쩍게 웃었다.

"그렇지만 이건 국익과 관련된 일입니다."

"국익?"

대통령 윤영민의 발언에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습니다. 국익이지요. 국익은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왜요?"

"…예?"

"국익이 왜 무엇보다 우선하는데요?"

"그야… 국가에 소속된 다수의 이익을 만들 수 있는……."

"아니, 그러니까 그 다수를 위해서 왜 내가 귀찮음을 무릅써야 하냐구요."

"……."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그건 보통 익스큐즈하는 문제 아닌가?

애국심이라든가… 뭐, 그런 걸로 말이야.

"다수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숭고한 일이지 않습니까?"

"아!"

이지혁이 그걸 몰랐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예?"

"제가 숭고해 보이시나 보죠?"

미안하다.

내가 말을 잘못했다. 보통은 그냥 그렇게 하니까 그리하라고 할 것을.

윤영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보고는 이미 받았다.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이며, 움직이는 목적을 찾을 수 없고, 행동에 규칙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

따지자면 카오스.

철저한 혼돈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뽑아준 대통령의 이름으로 부탁드리겠소. 지금 미국이 우리나라에 요청을 하고 있는 상황 아니오. 지원을 한 번 가준다면 그 빌미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소."

이지혁은 귀를 후비적후비적 파더니, 입으로 훅 불었다.

"아, 그거 자주 듣던 소린데… 뭐, 참신한 다른 뭔가 없어요?"

"……."

"자꾸 뭐 얻어온다, 이득이다 하는데, 난 막상 뭐가 좋아진 건지 모르겠거든요. 나만 개고생하고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단 말이죠."

"그게 그렇게 확확 변하진 않지요."

"확확 변하지도 않을 거 뭐하러 그 고생을 해야 되는데요?"

"……."

이 새끼는 말투가 왜 이렇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대통령인데, 꼭 이렇게 싸가지 없이 말을 해야 하나?

"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쪽만 좋겠죠."

그쪽이라니!

윤영민의 참을성이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끄으응, 그래서 못하겠다, 이건가?"

"넹."

이지혁은 비어 있는 소파로 다가가서 털썩 앉더니, 고개를 뒤로 헤 기대고는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긴 커피도 안 주나?"

"주, 준비하겠습니다."

"난 콜라."

"…예."

비서실장이 뒤로 슬금슬금 걸어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비서에게 속삭였다.

"콜라 가져와. 얼음 컵에다 이쁘게 담아서."

"코, 콜라는 없습니다만?"

"없으면 끝나?"

"사 오겠습니다."

"그래."

부리나케 달려가는 비서를 보며 비서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와대에 와서 콜라를 찾은 사람은 저 인간이 처음이다.

"왜 못하겠다는 겁니까!"

윤영민이 얼굴을 붉힌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 깜짝이야!"

이지혁이 깜짝 놀라 말했다.

"거, 아저씨, 목청 한 번 크시네! 왜 사람을 윽박지르고 그럽니까!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 아니……."

"뭔 이유도 없이 소리를 벅벅 질러 대! 갱년기 장애신가!"

"…저, 저!"

비서실장은 부리나케 대통령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이러다 숨이 넘어갈 기세다. 붉어진 얼굴이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꺽꺽 소리를 내도 이상하지 않다.

"진짠가?"

"아니야아아앗!"

"저 봐! 아니면 아니지, 자꾸 소리 지른다니까! 저거, 갱년기 장애 아니에요?"

이지혁이 물어보았지만, 그 말에 감히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도 애매하고 말이다.

"아니라고!"

"진정하시지요."

비서실장의 만류에 윤영민이 씩씩거리다가 심호흡을 했다.

"끄으응."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 양반, 왜 저리 흥분하신데요?"

"……."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까?

참 난감한 일이었다.

"일단 미국에서 요청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만, 저희 쪽에서 꼭 응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국방부 장관이 화제를 전환했다.

"무슨 소리요, 그게?"

"우리가 예전처럼 미국이 뭔가를 요청하면 득달같이 들어줘야 하는 상황도 아니잖습니까."

"언제는 그랬습니까?"

"미사일 방어 체계 갖출 때는 우리가 뭐 하고 싶어서 한 겁니까? 안 하면 답도 안 나오니 따라준 거지."

"……."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죠. 우리가 굳이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건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 이지혁 씨를 파견한다는 것은 스스로 우리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되는 겁니다."

"흐으음……."

윤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뭐, 다 좋은데요."

"네?"

"누가 간데요?"

"……."

"난 전혀 갈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들 하세요. 뭔 내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라는 사람인 줄 아나."

"…이지혁 씨,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 앞인데……."

"그래서 뭐?"

"아뇨, 뭐, 딱히 뭘 해달라는 건 아니고요."

이지혁은 코웃음을 쳤다.

대통령?

대에통령어엉?

전 세계에서 따지면 1%도 안 되는 국토와 1%에 겨우 근접한 인구를 가진 나라의 대통령이 이지혁에게 있어서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이지혁은 지구보다 두어 배는 더 큰 면적의 베라프 전체를 관리하는 황제 앞에서 엿을 먹이는 존재였고, 그 황제 이상의 권력을 지닌 라트렐의 교황에게 욕을 퍼 먹이는 존재였다.

권력이라면 지긋지긋하게 겪어보았단 말이다.

그러니 왕도 아니고, 겨우 임기 5년짜리 선출직 공무원의 권위라는 게 이지혁에게 작용할 리가 없었다.

"나, 나는 국민의 대표란 말입니다."

"그래서 뭐요?"

윤영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국민이 시키면 내가 해야 돼? 우리 엄마가 시키는 것도 안 해서 만날 처맞는데."

"그건 그렇죠."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고 만 비서실장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지혁만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만날 하는 소린 똑같다니까. 왜 자꾸 우리더러 희생해라 참으라고 하는데요? 본인들이 희생 좀 하시지."

"우리가 희생해 봐야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럼 돈이라도 적게 처받든가."

"크흐흠……."

이지혁은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하튼 제가 여기에 온 목적을 잊지 말아요. 그나마 일 잘하는 사람이 하나 옆에 있어서 지금까지 참고 있던 건데, 그 인간 과로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진짜 깽판이 뭔지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그리 알아요."

"협박하는 건가!"

"네."

"협박이라고?"

"네."

"……."

아니, 보통 이럴 때는 '협박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나?

뭘 저리 당당하게 협박이라고 하는 거지?

"협박하는 거 맞아요. 그러니까 알아서들 몸 사리시라고요."

"지금 일국의 대통령을 협박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건가?"

"네. 내가 바보도 아닌데 저 양반이 대통령이라는 걸 모르겠어요? 대통령 협박하는 거 맞는데요?"

"끄으으응."

저 미친놈의 머리에는 대체 뭐가 들어 있단 말인가.

저런 말을 태연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워낙 생각 못한 방향으로 나오다 보니 대처할 방법도 마땅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윤영민은 자신의 앞에서 대놓고 협박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네가 지금 한 발언만으로도 자네는 큰 죄를 지은 거야."

"헐? 그래요?"

"그래! 법을 모르나!"

"어, 그렇구나. 그래서 어쩔 건데요?"

"으응?"

"잡아 넣어보든가."

"……."

잡아넣는다?

누굴? 이지혁을?

비서실장은 웃고 말았다.

이지혁을 잡아넣을 수 있다면, 그 국가는 즉시 세계 최강국의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을 대한민국이 한다?

꿈같은 이야기다.

당장 대한민국이 가진 모든 전력을 투사한다고 해도 이지혁을 잡아넣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지수는 무슨.'

비서실장 박두진은 본인이 떠올리고도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미지수?

일단 지금 가용 가능한 병력은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 병력, 그리고 KSF다.

일반적인 군 병력은 이지혁 같은 능력자를 잡는 데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러니 결국은 KSF에서 해줘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KSF에게 이지혁과 싸우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살해당할 확률이 높았다.

기름을 지고 타는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차라리 살아날 확률이 높은 짓을 시키는데 고분고분 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차라리 타국의 능력자라면 시도할 가능성이라도 있겠지.

이지혁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바로 KSF였다.

그리고 그중 가장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NDF는 이미 이지혁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조사하고 파악한 바에 따르면, NDF는 이지혁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해도 그를 막아서기보다는 동조할 확률이 높은 세력이었다.

그런데 그 NDF에게 이지혁을 막으라고 한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와, 이거 뭐지?"

"응?"

"아,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지금 이지혁이 바로 윤영민의 목을 따버린다고 해도 대한민국으로서는 그를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제지는커녕 일이 벌어지고 나서 그를 재제할 방법도 없는 것이다.

'이게 초법인가.'

그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지만, 대한민국 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RRRRR.

그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윤영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보니 이지혁과 대치하는 국면이 되어버렸는데, 그 국면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전화기로 이지혁의 시선이 돌아가면서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여기 대통령 집무실 아니에요?"

"맞습니다."

"근데 무슨 중국집인가? 전화가 계속 와?"

"……."

비서실장은 헛기침을 하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네, 청와대입니다."

-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오. 지금 거기 이지혁 씨 있소?

"있긴 합니다만……."

- 당장 바꿔주시오. 이건 긴급 상황이오. 아니, 그 사람은 전화기는 왜 들고 다니는 거야! 전화도 받지 않을 거면서!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진짜 사람을 내버려 두지를 않네, 진짜.

* * *

크리스토퍼가 이지혁에게 전화하기 한 시간 전.

"분위기가 살벌하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지 않습니까."

상황이 상황이다?

그게 지금 할 말인가?

"그럼 애초에 잘 막을 것이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아니고……."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불가항력이라……."

크리스토퍼는 피식 웃고 말았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백악관 한복판에서 적의 손에 인질로 잡힌 상황을 불가항력이라고 한다면, 미군의 존재 가치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 역시 마찬가지지.'

이런 상황을 막아야 하는 것은 크리스토퍼였다. 하지만 그 역시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았을 뿐, 작금의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지 못했다.

그것이 크리스토퍼를 짜증 나게 만들고 있었다.

인류가 쌓아 올린 체계와 무력이 새로운 개념들 아래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순간에.

능력자라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수많은 의외성으로 뒤덮였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이들은 도태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말이야.'

지금 이런 상황을 직면한다는 것이 크리스토퍼가 세상에서 도퇴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과거 냉전시대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간이란 능력자들 앞에서 이토록이나 무력한가?"

"…능력자들 역시 인간입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저 안에 있는 것은 분명 인간은 아니겠지?

크리스토퍼는 백악관의 CCTV들을 확인하며 그 사실을 확신했다.

한 여자가 백악관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는 누구도 그녀를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모두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정신계 능력인가?"

흔한 능력은 아니지만, 비슷한 능력을 갖춘 능력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 많은 이들을 동시에 현혹시킬 수 있는 능력자는 결단코 없었다.

CCTV 안의 여자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통령을 의자에서 끌어내리고는 그 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발을 올렸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 이후로는 화면이 끊겼습니다."

"그래."

크리스토퍼는 시가를 꺼내 물었다. 시가 끝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초콜릿 향조차도 지금은 짜증스럽다.

느긋하게 시가에 불을 붙인 크리스토퍼가 연기를 뿜어냈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크리스토퍼의 모습이 너무 여유로워 보이자 부관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대통령을 구출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야지."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말과는 다르게 전혀 급한 마음이 없어 보였다.

"국장님?"

"알고 있다고."

"그런데 왜?"

크리스토퍼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가? 자네는 이 상황에 대한 대처가 가능한가?"

"…저는 어렵습니다."

"병력을 밀어 넣는다 해도 이미 대통령은 사정권 안이다. 왕 하나를 잃으면 사살을 해낸다고 해도 우리가 진 거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든 조건을 맞추고 대화를 해봐야 하는데, 말이 통할 상대 같지가 않아. 괜히 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도 매혹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되돌릴 수가 없어진단 말일세."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기랄."

크리스토퍼는 허벅지를 내려쳤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응 매뉴얼도 없다. 임기응변으로 어찌 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크리스토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 나설 사람이 자신밖에 없고, 생각을 할 사람도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 지금 미국의 가장 큰 문제였다.

새삼 그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일단은 기다려 보게. 다른 쪽의 움직임은?"

"펜타곤이나 CIA 쪽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쪽에다 미리 경고해 놔. 어설프게 저격 같은 거 시도하면 그 저격총으로 대가리를 날려 버릴 거라고."

"…예."

크리스토퍼는 바닥에 비벼 끈 시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한 모금 더 빨고 끌걸.

후회되었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구 조건이 뭐라고?"

"이지혁 씨를 찾아내라고 합니다."

"한국에 있다고 말을 해봤나?"

"예. 그런데 뭔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합니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끙……."

크리스토퍼는 짜증을 확 내고는 심호흡을 했다.

"내가 들어간다."

"국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안이 있어?"

"……."

"어차피 이미 진 상황이야. 대통령이 인질로 잡혔다는 상황 자체가 이미 우리가 진 거라고. 그럼 수습이라도 빨리해야지. 내가 들어가고 연락이 끊기면 백악관째로 날려 버려."

"그, 그럼 대통령은?"

"지금은 대통령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지. 저런 얼굴마담이야 얼마든지 대체할 사람이 있어."

"하지만 국장님을 대체할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이 사태를 처리하지 못하면 나를 대체할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물러나게 될 거다. 그토록 은퇴하고 싶었는데, 잘됐다고 박수라도 칠까?"

크리스토퍼는 연신 입으로 욕을 뱉어냈다.

"전역시켜 달라고 그리 빌 때는 안 해주더니, 불명예 전역으로 마무리하라더군. 차라리 뒈지기라도 하면 특진이라도 시켜주겠지."

"더 올라 갈 데는 있으시구요?"

"계급으로 따지자면 있겠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크리스토퍼가 부관에게 당부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해. 대가리를 씹어 먹어 버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휴……."

크리스토퍼가 깊게 한숨을 쉬고는 백악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켜!"

그를 알아본 지휘관들이 병력들 사이로 길을 터주었다.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아, 그리고!"

"예!"

"혹시 모르니까 한국에 콜 넣어서 이지혁 씨 좀 올 수 있냐고 물어봐."

"…그 사람이 오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자고!"

"예, 일단 알겠습니다."

"제길."

크리스토퍼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살아 돌아오면 죽어도 은퇴할 거다."

* * *

건물 안은 을씨년스러웠다.

백악관이라는 건물이 건물 크기에 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편이라 이런 느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의 백악관은 특히나 을씨년스러웠다.

'말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군.'

바닥에 부딪치는 크리스토퍼의 구둣발 소리가 거슬리게 울린다.

저벅저벅.

크리스토퍼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대통령 집무실을 향해 걸었다.

대통령이 인질로 잡힌 그 순간, 백악관에 있는 모든 인원이 철수했다. 그러니 이 큰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대통령과 그, 그리고 지금 대통령을 인질로 잡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까지 모두 셋이다.

"으으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애초에 그는 지금 안에 있는 여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 상대의 성향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대처 방법이 생길 텐데, 상대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 뭘 어쩌겠는가.

크리스토퍼는 총 한 자루 없이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이 크리스토퍼를 짓눌렀다.

"휴……."

낮게 심호흡을 한 그가 천천히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낡은 문에서 흘러나오는 마찰음을 들으며 크리스토퍼는 눈을 찌푸렸다.

관리라도 좀 할 것이지. 이런 순간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야.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한 광경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의외로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그 커다란 책상 앞으로 놓인 소파에 한 여자가 누워 뒹굴대고 있다.

크리스토퍼는 대통령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흐음?"

낮게 들려오는 숨소리.

그 숨소리를 듣는 순간,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마성이군, 마성이야.'

늙어 빠진 그의 심장이 바로 앞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포착했을 때만큼이나 격렬하게 뛰고 있다.

마누라가 알면 난리가 나겠지?

쓸데없고 어이없는 상상을 하며 크리스토퍼는 여인에게 집중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본다.

"아……."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는 생각은 그저 생각이었을 뿐, 그녀의 눈을 본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마음을 먹는 순간, 자신은 그녀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녀의 눈은 그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초점이 모이지 않은 그 눈을 보는 순간, 그녀를 위해서라면 심장이라도 뽑아서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누구?"

천진한 듯 자신을 보며 묻는 그녀.

"하……."

크리스토퍼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저기 저 대통령이 왜 아무런 위해를 받지 않음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녀가 말했겠지.

'거기에 있어.'

그것이면 충분하다.

남자라는 존재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저 여인의 마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토록 이질적이며 아름다운 여인.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결코 그들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 수 있음에도 그는 눈앞의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악마와 비슷한 그 어떤 존재일 거라고 미리 추측하고 들어왔음에도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존재는 왜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인가.

"크…리스토퍼입니다. 교섭을 하러 왔습니다."

"교섭?"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으……."

크리스토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려냈다.

그녀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은 매혹을 보이다가도 표정 하나가 변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듯한 폭발적인 염기를 뿜어낸다. 그리고 지금 고개를 조금 갸웃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바쳐 그녀를 지켜주어야 할 것 같은 보호 본능을 유발하고 있었다.

'요물이군.'

그제야 크리스토퍼는 여자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교섭입니다."

말 한마디를 하는 것도 힘들다. 너무도 힘들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교섭이라니?"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상하네. 나는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을 말했는데 말이야."

"당신이 원하는 것?"

"응."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이지혁을 찾아내라는 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입니까?"

"응."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혀로 입술을 핥는다. 붉디붉은 혀가 입술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축였다.

'까딱하면 심장마비로 순직하겠군.'

그만큼이나 그녀의 모습은 그를 빠져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그를 내게로 데려와. 그게 내가 원하는 유일한 일이니까."

* * *

이지혁을 데려오라고?

내가 들은, '찾아내라'는 말과는 조금 어감이 다른 것 같은데 말이야.

해결해야 할 일의 난이도가 순간적으로 열 배는 뛰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이지 모드인 줄 알고 온 사람에게 느닷없이 들이밀어진 하드 모드는 고소감이다.

이건 불공평하다고.

불평불만은 끝이 없지만, 크리스토퍼는 입술을 꾹 깨무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눈앞의 상대가 대화가 통하는 상대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눈치 정도야 몇 십 년 전의 전쟁에서 이미 익혔다.

그의 앞에 있는 존재는 완벽히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아마 그녀의 눈에는 지금쯤 자신이 지나가는 지렁이로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신에게 이곳으로 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이지혁을 끌어낼 수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 누굽니까?"

"으음?"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이 크리스토퍼를 바라보았다.

보통 이런 걸 묻나? 이런 상황에?

"글쎄, 당신들 말로는 펍이라고 하나? 근처의 술집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 눈이 풀린 인간이 내게 말해주더군. '그렇게 궁금하면 저 옆의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을 붙들고 물어보지그래?'라고 말이야."

"눈이 풀렸다라……."

어느 미친 마약중독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찾아내서 지옥을 보여주고 말겠다.

크리스토퍼는 그리 다짐했다.

"음,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그래?"

"네, 미스… 음, 실례지만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너 같은 꼬맹이에게 이름을 불린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이 세상에 익숙해지는 것도 좋겠지. 나를 에르카나라고 부르도록 해. 그리고……."

"네?"

"미스가 아니라 미세스야."

그녀가 고혹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알겠습니다, 미세스 에르카나. 그럼 정리하죠. 당신의 요구 조건은 이지혁 씨를 이리 데려오라는 것이군요."

"그렇지."

"그럼 대통령을 풀어주실 거구요?"

"응, 맞아."

"그럼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데, 당신은 이지혁 씨와 적대 관계입니까?"

"그게 왜 중요하지?"

"당신의 이름을 대고 그 사람에게 협조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안 돼."

"……."

"그럼 내가 그를 찾아내라고 하지 않았을 거야.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그에게 내 이름이 들어가서는 안 돼.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해서도 안 돼.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의 말을 해서도 안 돼. 알겠어? 그는 내 존재를 몰라야 해."

크리스토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그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시가를 꺼내 물었다.

뿌득.

손끝으로 거친 시가의 끝을 뜯어내고는 라이타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천천히 연기를 빨아들였다 내뱉은 그가 집무실 바닥에 재를 떨고는 소파에 앉았다.

"거, 재떨이 있습니까?"

"매우 건방진 질문이군, 먝클라렌."

"어차피 죽을 건데, 예의 차려 뭐하겠습니까. 재떨이 좀 주시죠."

"여기 있네."

대통령이 재떨이를 내밀자 크리스토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받아 들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흐음……."

크리스토퍼가 재떨이 뚜껑을 열어 재를 몇 번 털고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미세스 에르카나."

에르카나를 부른 그가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가 없겠군요."

"흐으응?"

콧소리를 낸 에르카가나 그 고혹적인 눈으로 크리스토퍼를 바라보았다.

"못하겠다?"

"당신의 말로 유추해 보았을 때, 당신은 이지혁 씨와 그리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겠죠."

"음……."

"그리고 당신의 말속에는 이곳에 이지혁 씨를 데려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이곳에 온 이지혁 씨는 갑작스레 등장한 당신을 맞이해야겠죠."

"그렇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그 꼴을 보느니 그냥 여기서 죽는 게 낫죠."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하던데, 아니었나?"

"얼간이를 대체할 얼간이는 넘쳐나지만, 이지혁을 대체할 능력자 따위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류에게 누가 더 중요한 인물인가는 두 번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일이죠."

에르카나는 재미있다는 듯 크리스토퍼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군. 인간이여, 하지만 말이다……."

"……."

"너는 나를 모르는구나.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네가 내 발밑에서 기며 그를 내게 데려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으음……."

"벌레만도 못한 인간 주제에 지금 내게 대항하겠다는 건가? 네 영혼을 빼앗고, 네 영혼을 짓밟아 99층 무간에 던져 끝없는 시간을 후회하고 고통 받게 해줄 수도 있다. 단순히 그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소름이 돋는다.

지금 저 여자가 하고 있는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개미에게 협박하는 인간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녀의 눈에 그는 개미보다 못한 존재일 것이다.

그런 크리스토퍼에게 협박을 할 필요는 없다. 그 사실을 크리스토퍼는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은 협박이 아니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을 뿐.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군요."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태연하게 시가를 빨았다.

"해보시길.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겠죠. 하지만 내가 내 의지로 이지혁을 이리로 불러올 일은 결코 없을 거요. 단순한 자기만족일지도 모르지만, 난 그에게 빚이 있거든. 아니, 인류 전체가 그에게 빚이 있지. 그러니 차라리 날 매혹하여 제멋대로 다루는 쪽을 선택하시지."

"흐응?"

그녀가 놀랐다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네게 있어서 이지혁이 그리 큰 의미인가? 그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호감은 얼어 죽을."

크리스토퍼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온다.

"그에게 호감을 가지는 인간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아니, 한국에는 많은 듯 보이더군. 하지만 한국이 아닌 곳에서는 그런 미친 인간은 찾을 수 없을 거요."

"그런데?"

"호감과 의리는 다른 거지. 나는 그를 인간적으로는 싫어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해준 것을 인정하고, 은혜를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면 사람의 자격이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인류에게 꼭 필요한 존재거든."

에르카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알고 있는가, 인간?"

"뭘 말이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그리 건방지게 입을 놀린 존재를 살려둔 적이 없다. 그대 역시 지금 나의 기분을 거슬렸어."

"사설이 길군. 죽이려면 빨리 죽이시오. 아까부터 무릎이 쑤시거든."

"좋은 자세야. 하지만 난 널 죽이지 않아."

"이용이라도 할 생각이오?"

"아니, 그것도 하지 않기로 했어."

"음?"

"아주 오랜만에 내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났군."

그러니까…….

어느 부분이?

자신이 한 말 중에서 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할 만한 말이 있었던가?

크리스토퍼는 눈앞의 존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하고 있군."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이지혁에게 적대적이지 않아."

"……."

"오히려 그를 돕는 쪽이라고 해야겠지."

"내가 평번한 인간이라고 해서 바보쯤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의 지능은 낮지 않소. 당신의 언행을 바탕으로 하면 당신과 이지혁 씨의 관계는 결코 무난해 보이지 않는데?"

"맞아."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껄끄러운 관계가 반드시 적대감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 미약한 인간의 뇌로도 그 정도의 사고는 할 수 있을 텐데?"

"으음……."

눈앞의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정리가 되는 것은 둘.

이 여자와 이지혁은 껄끄러운 관계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이지혁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그럼 왜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밝혀서는 안 되는 거란 말입니까?"

"그럼 모든 게 틀어지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이 비루한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게 풀어주시면 안 되겠소이까?"

"안 돼."

"……."

"나는 해줄 걸 모두 해줬어. 내 요구 조건은 하나야. 이지혁을 내게로 데려와. 그걸 해준다면 순순히 물러나 주지. 아니면 당신도, 이 남자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

"그걸 겁낼 거 같습니까?"

"이상한 질문이네? 설마 내가 그걸로 끝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저 시작일 뿐이야. 나는 이지혁이 내 앞에 나타날 때까지 이런 일을 반복할 거야."

"…그럴 거면 차라리 그대가 찾아가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으음, 사실 그게 아주 빠른 방법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 그게 현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아주 큰 문제가 있지."

"그게 뭡니까?"

"그건 내 약점과 관계된 일이라 말을 해줄 수가 없어. 자, 이제 내가 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줬어. 그러니 이제 네가 선택할 차례야. 그를 내게 데려오겠어, 아니면 여기서 죽겠어?"

크리스토퍼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매혹이라도 당한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눈앞의 이 존재가 이지혁에게 있어 꼭 나쁜 존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수가 없으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이지혁이 오길 바라는 인간이 아닌 존재라면 적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뭔가, 이 이상한 느낌은.

"약속하겠소?"

"뭘?"

"결코 이지혁 씨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를 이리로 데려와 드리지."

"약속하지."

"당신의 약속을 믿어도 되겠소?"

그 순간, 에르카나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지금까지 귀찮음과 나른함이 가득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하면서 음울하고 파괴적인 기운이 그를 향해 뿜어지기 시작했다.

"끄으윽."

그 기운이 육신으로 밀려들자 크리스토퍼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전신이 격통으로 조여드는 와중에도 크리스토퍼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 마왕!'

이건 마왕의 기운이다.

벨트레체가 보여주었던 그 기운과 비슷하다. 다만, 구체적인 느낌 자체는 조금 다르다. 가까이에서 홀로 느끼다 보니 좀 더 농밀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더 끈적하게 다가온다.

그럼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여자가 마왕이란 말인가.

그 괴물들과 전혀 다른 느낌인데?

크리스토퍼는 그의 육신을 조이던 기운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마족에게 있어서 계약이란 신성한 것이지. 당신의 그 세 치 혀로 함부로 언급할 것이 아니야."

"하아……."

"나는 내 입으로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지. 이걸로 충분할까?"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소?"

"흐음, 건방진 인간이로군. 좋아, 물어봐."

"당신……."

크리스토퍼가 힙겹게 말을 토해냈다.

"이지혁 씨와는 무슨 관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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