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1화 (51/118)
  • [■] 전화번호 하나만 알아다 줄래요? [■]

    ─────

    그는 패배를 모르는 생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자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가 이를 드러낸 상대에게는 언제나 승리를 거둬왔다.

    그가 사는 세계는 종의 격차가 너무도 컸다.

    아무리 강인한 개체라 해도 종의 격차는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슷하거나 동등한 개체를 상대로 그는 언제나 이기고 또 이겨왔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승리했다.

    짐승들은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고, 마수들은 그의 앞을 비켜서기 바빴다.

    인간?

    인간 따위는 그에게 한 끼 식사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는 파괴자요.

    그는 학살자요.

    그는 유린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 긴장한 눈으로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털이 곤두선다.

    눈앞에 보이는 저 하얀 생물체는 확실히 그와 상성이 맞지 않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분노가 절로 일고, 날카로운 그의 발톱이 움찔움찔한다. 저 새하얀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그 피를 핥고 싶다.

    파괴의 충동이 그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반대쪽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크르르르르.

    날카로운 소성이 들려온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 존재였다.

    언제나 마주치면 서로의 목을 탐하며 죽이지 못해 안달 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슬로 얽혀 있는 존재들.

    그 두 존재가 마침내 조우한 것이다.

    그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를 담아 거대하게 일갈했다.

    커엉!

    응? 이게 아닌데?

    왈!

    어! 이것도 아닌데?

    오식이는 자신의 목에서 나오는 귀여운 울음소리에 당황했다.

    이 몸은 우렁찬 하울링을 토해내기에는 너무도 나약하고 조그마했다.

    피식.

    건너편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늑대 같은 몸뚱아리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비웃다니!

    오식이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왈! 왈왈! 커엉!

    짜증이 난 오식이가 앙증맞은 발로 바닥을 후려쳤다.

    쿵! 쿵!

    입에서는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발끝에서는 강렬한 소리가 나온다.

    그제야 만족한 오식이가 고개를 들고 이를 드러냈다.

    건너편의 새하얀 늑대는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휘젓고는 천천히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오식이를 노려보았다.

    베히모스.

    신수와 마수가 섞이지 못하고 서로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크르르르.

    크르르.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경계하던 둘은 눈을 마주한 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신수의 정점인 베히모스와 마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오거.

    원래대로라면 감히 오거가 베히모스와 대적할 수는 없겠지만, 오거 중에서도 오거 로드급인 붉은 털 오거인 오식이는 베히모스에게도 밀리지 않는 존재였다.

    게다가 이지혁 덕분에 강화도 엄청나게 받지 않았는가.

    크르르.

    오식이가 자신감 넘치게 위협을 하자 베히모스도 조금은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앞의 작은 강아지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크륵.

    베히모스가 이를 갈았다.

    마수 따위가 그의 앞에서 이를 드러내다니.

    베라프에서 만났다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기 바빴을 놈이!

    베히모스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저 건방진 놈이 감히!

    하지만 오식이도 밀리지 않았다.

    아무리 베히모스가 오거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신수라고는 하나 그는 무려 이지혁의 밑에서 굴렀던 오거다.

    경험치가 다르다는 거다, 경험치가!

    오식이가 붉어진 눈으로 베히모스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늘씬하게 빠진 늑대와 조그마한 강아지의 대립이지만, 실제로는 한 대륙을 들었다 놓을 만한 마수와 신수의 대립이었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스슷.

    팟!

    순간, 두 마리 짐승이 서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크라라라라라라!

    커어어엉!

    둘의 하울링이 공명하며 울려 퍼진다.

    그런 후…….

    "아, 시끄러워!"

    깨갱.

    끼잉.

    이지혁은 허공으로 달려드는 늑대와 강아지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여기가 니들 안방이냐?"

    도리도리.

    신수와 마수가 일치단결하여 고개를 흔든다.

    "뭔 똥개 같은 것들이 아침부터 깽깽대고 울어 싸! 지키라는 집은 안 지키고! 니들 둘 다 오늘 굶어!"

    이지혁이 둘을 반대쪽으로 던졌다.

    베히모스는 순순히 날아갔지만, 오식이는 이지혁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어쭈?"

    이게 왜 이러나 싶었더니, 오식이가 필사적으로 이지혁의 손을 핥으면서 애교를 부렸다.

    밥도 쥐꼬리만큼 주면서 그것마저 굶으라니!

    베히모스는 오식이의 비굴한 태도를 보면서 갈등하는 듯했지만, 아직은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는지 입을 살짝 벌렸다 닫기를 반복하며 낑낑댔다.

    아니, 자존심이고 뭐고를 떠나서 애초에 저 인간 놈이랑 나는 적이었는데, 이리 애교를 부려도 되는 것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베히모스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긍지 높은 베히모스.

    악을 멸하고 신성을 지키는 베라프의 신수가 아니던가.

    아무리 다른 세계라고는 하지만 저런 사악한 기운을 줄기줄기 내뿜는 마도사에게 꼬리를 치다니!

    이건 있을 수 없…….

    "뭘 꼬나봐?"

    깽.

    치켜 올라가던 베히모스의 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이게 된장 바르려다가 불쌍해서 살려줬더니, 어디 사람을 꼬나봐? 너 오늘 초상 한 번 치를래? 가죽도 비싸게 팔릴 거 같아서 안 그래도 뽐뿌 엄청 오는 거 참고 있구만."

    베히모스의 슬픔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신수와 마수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한다. 덕분에 이지혁이 한국말로 말을 하고 있음에도 베히모스는 그 의미를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개를 번쩍 든 베히모스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충천했다.

    "어?"

    베히모스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이지혁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개 주제에 마치 모델이 워킹하는 듯한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뭐야?"

    또각또각.

    우아하고 또 우아하게 이지혁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베히모스가 고개를 들어 일별하고는 슬금슬금 다가와 손을 핥았다.

    살려주세요.

    의미가 너무 분명하고 확실해 헛웃음이 난다.

    "아오! 귀찮아!"

    이지혁이 두 동물을 발로 툭툭, 밀어 한쪽으로 모은 다음 입을 열었다.

    "니들이 여기서 무슨 쓸모가 있냐?"

    두 동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 무슨 사냥할 게 있기를 하냐, 몬스터가 침입해 오기를 하냐, 그렇다고 전쟁이 있냐? 밥만 축내는 식충이 같은 것들이 집이라도 제대로 지켜야 할 거 아냐. 밥도 트럭으로 먹는 것들이."

    끼잉.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진짜 다 된장 발라 버릴 거야. 알아들어?"

    왈!

    아우!

    "대답은 잘해요, 대답은."

    이지혁이 혀를 차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끼잉.

    오식이가 엉덩이를 바닥에 대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베히모스는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머리를 내렸다.

    그들이 누군가.

    베라프에서라면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베히모스는 교단들이 정립되기 전에는 작은 부족의 신으로까지 모셔진 신수였다.

    어떤 몬스터도, 어떤 마도사도, 어떤 신관도 그녀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어떤 지위에 있는 이라고 하더라도 무시하지 못했다. 마수들은 그녀의 밥이었고, 흑마도사들은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벌벌 떨기에 바빴다.

    마왕이 처들어왔을 때도 가장 앞에서 마왕과 대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동네에 오고 나서는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너저분한 마수 놈이 이를 드러내지를 않나, 베라프 최악의 악몽이 동네 노는 형처럼 어슬렁거리고 다니지를 않나.

    끼잉.

    베히모스는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토닥.

    낑?

    등에 뭔가가 닿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오식이가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짧은 발이 연신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다.

    이 마수 놈이 미쳤나?

    그녀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오식이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 위로 받는 기분은.

    하기야 따져 보면 이 마수 놈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베히모스도 그렇지만, 오거 로드쯤 되면 마수 중에서도 최상위의 마수라 할 수 있었다.

    베라프에 한 번 뜨기만 하면 대륙급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최상급의 마수가 이곳에서 집지키는 개 꼴로 살고 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서글픔이 몰려온다.

    어쩌다가 이지혁을 만나서리.

    그녀의 입장에서 보는 이지혁이 세상에 다시 없을 악마라면, 오식이의 입장에서 보는 이지혁은 마의 지배자였다.

    그야말로 그 세계의 황제나 다름없는 것이다.

    얼마나 부림을 당했을까.

    저 성격도 더러운 인간 밑에서 몇 백 년을 굴렀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종족을 초월하여 오식이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겨우 며칠 본 그녀가 이리 힘든데 오식이는 오죽했을까.

    끼잉.

    그녀가 긴 다리를 우아하게 들어 오식이의 등을 툭툭, 쳤다.

    오식이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베히모스는 그 광경에 당황하고 말았다.

    흉측하기 짝이 없는 오거 놈이 이리 귀욤귀욤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웃긴데, 그 오거 놈이 저리 우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그런데 이거, 은근 귀여운데?

    아니, 대놓고 귀엽…….

    끼잉.

    커엉.

    둘이 서로의 아픔을 위로 할 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아, 시끄러우니까 낑낑대지 말라고, 이 똥개들아!"

    시무룩해진 두 강아지가 고개를 푹 숙이자 이지혁이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며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귀신은 뭐하나, 저거 안 잡아가고.

    "어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는!"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었다.

    오식이 하나도 먹이기 힘든데 베히모스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니, 이게 무슨 짐 덩어리 폭탄이란 말인가.

    하이 엘프란 기집애가 얼마나 무능력하면 개 사료 살 돈도 없어서 이지혁을 찾아오는가.

    말이 하이 엘프고 엘프지, 이 동네에서는 이쁜 척하는 백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전처럼 능력자에 대한 인식이 좋을 때라면 특이 능력자라고 하고 연예인이나 시켜서 기둥서방짓이라도 할 텐데, 이제는 저 귀때기를 잘라내지 않고서는 연예인은 어림도 없었다.

    "포토샵인가 뭔가도 있더만."

    아니면 이걸 합성이라고 우기면 모델 일이라도 좀 할 수 있을 텐데.

    하기야 저것들한테 모피라도 입히면 거품 물고 기절하겠지.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엘프라는 것들은 참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니까.

    차라리 다크 엘프가 낫지.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혁 씨."

    "아! 좀! 그만! 좀! 제발!"

    "네?"

    "그 말투는 또 뭔가 '급한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합니까'라는 말투잖아요!"

    "귀신이신가?"

    "끄응……."

    이지혁이 인상을 팍팍 쓰자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최근에 이지혁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여기저기서 혹사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NDF의 전력의 90%가 이지혁인데.

    이지혁이 없는 NDF는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타국이나 정부에서 NDF에 요구하는 일도 보통은 이지혁이 있다는 가정하에 요청이 들어오니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뭔 일인데요?"

    "사실은……."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 *

    "거, 별일은 아닙니다."

    "항상 별일은 아니었죠."

    "진짜 별일은 아닙니다."

    "별일도 아닌데 왜 저한테까지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이만."

    "에헤이, 왜 이러실까."

    최정훈이 빙긋빙긋 웃으며 이지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요!"

    "하하하, 진짜 별일이 아닙니다."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진다.

    "이런 식으로 사설이 길 때는 항상 귀찮은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어쨌든 말을 해보세요. 듣고 나서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하니까요."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 말하자면, 자주 있던 일입니다마는."

    "네."

    "이번에 저희 쪽에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아시다시피 이번 게이트는 굉장히 힘든 케이스였죠. 이지혁 씨가 그때 딱 그 옆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니 타국은 어찌 됐겠습니까?"

    "……."

    이지혁이 손뼉을 쳤다.

    "망했겠죠."

    "하하하, 바로 그렇습니다. 특히나 일본은 연속적으로 계속 타격을 받다 보니 이제는 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하필이면 이번에도 도쿄에 게이트가 열렸다고 하더군요."

    "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동네는 입지가 안 좋은 모양이다.

    지진이란 지진은 다 얻어맞고, 헤일도 얻어맞고, 태풍은 패시브로 항상 머무르고 있는 느낌?

    "그 동네는 무슨 마가 꼈나?"

    좀비 드래곤도 도쿄에서 나타났던 거 같은데, 이번에도 도쿄라니.

    "그래서 뭐 어떻게 되었대요?"

    "하하하……."

    최정훈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뭐, 어찌 되긴 어찌 됐겠습니까, 박살이 나고 있죠."

    "노답."

    이지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쪽에서 도와달라고 했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는 좋다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말하자면요."

    이지혁이 환히 웃으며 최정훈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최정훈은 '이 인간이 왜 이러지?'라는 표정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최정훈 씨."

    "네?"

    "요즘 감이 많이 떨어지신 거 같던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거기, 거의 망할 판이라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뭘 얻어먹겠다고 굳이 거기까지 가서 도와줘야 한다는 겁니까? 뭐, 우리도 공짜로 장사하는 건 아니잖아요. 받아먹을 게 있어야 도와주든 말든 하죠. 안 그래요?"

    최정훈은 씨익 웃었다.

    "물론 받을 게 있습니다."

    "호오?"

    이지혁이 반색을 했다.

    그래, 이래야 최정훈이지.

    최정훈이 호구처럼 주기만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과연 자신이 인정한 남자.

    "이번에 받을 것들은 감히 돈으로는 살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오!"

    이지혁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뭔데, 뭔데?"

    "놀라지 마십시오. 무려 문화재입니다."

    "문화재?"

    최정훈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놈들이 마음이 급했는지 일제 강점기 때 몰래 빼돌렸던 우리 문화재들을 모조리 반환하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파악하고 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많더군요. 국보급도 수두룩합니다. 이걸 가져올 수만 있으면 역사에 길이 남을 외교적 쾌거를……."

    "응, 안 가."

    이지혁인 빙긋 웃으면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 이지혁 씨!"

    최정훈이 서둘러 이지혁의 뒤를 쫓았다.

    * * *

    이지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문화재는 얼어 죽을."

    먹지도 못하는 거, 뭐하러 반환 받겠다고 거길 쫓아가야 한단 말인가.

    문화재면 팔아먹지도 못하는 건데, 왜 나라 좋으라고 자신이 고생을 해야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지혁 씨!"

    최정훈이 득달같이 이지혁에게로 다가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찰칵.

    라이터가 불을 뿜자 이지혁의 담배 끝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

    이지혁이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는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안 가요."

    "그러지 마시고……."

    헤헤, 웃는 최정훈을 보니 기분이 미묘하다.

    "그런 거 말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들 없어요? 돈이 된다거나?"

    "자산 가치로 따지면 문화재들의 가격도 어마어마합니다. 그만한 돈을 받아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굉장한 이득이죠."

    "이득은 개뿔이."

    이지혁은 피식 웃었다.

    수많은 국가가 명멸하는 것을 보아온 이지혁에게 과거의 유물이란 그저 추억을 되살리는 장치에 불과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연구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거지.

    평화로운 시기라면 그 문화재라는 것들이 가치를 가질지도 모르지만, 당장 내일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런 문화재들이 무슨 필요가 있냐, 이 말이다.

    연구할 시간도 없을 텐데.

    "안 피곤해요?"

    "네?"

    "그렇게 일일이 온 동네를 다 뛰어다니는 게 안 피곤하냐구요.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가는 데마다 최정훈 씨도 같이 가고 있잖아요. 우린 능력자니까 체력도 좋고 회복도 빠르지만, 최정훈 씨는 일반인이잖아요. 나 같으면 쓰러져도 벌써 쓰러졌을 텐데."

    "관리하니까요."

    "그게 관리한다고 되는 건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최정훈은 쓰게 웃었다.

    그가 몸에 퍼붓는 영양제 가격만 따져도 웬만한 직장인 연봉은 쉽게 넘을 것이다.

    그런데도 살이 쪽쪽 빠지고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최정훈 씨도 어차피 이미 승진 레일 탄 거 아니에요? 그냥 대충 버티기만 해도 최정상까지는 쉽게 갈 길이 마련된 거 같은데, 일을 못해서 안달이네요."

    "천성인 걸 뭐 어쩌겠습니까?"

    "오르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죠. 더 좋아지기 위해서 오르는 거예요. 아닌가요?"

    "…그렇죠."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는 가끔 핵심을 찌른다.

    돌이켜 보니 자신도 최근에는 목적성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의무적으로 일을 해왔다.

    업적을 쌓아서 위로 오르고 또 오른다는 마인드였지, 왜 정상까지 올라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삶이라는 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요. 내가 뭘 하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을 안 하면 마지막에는 항상 후회하더라구요."

    "경험담입니까?"

    "제 경험은 아니지만요."

    이지혁이 담배를 쭈욱 빨아 당겼다.

    최정훈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수많은 인간을 만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삶에 대한 통찰도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겠지.

    그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이리 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말이다.

    "즐기며 살아요.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일만 하고 살다 보면 나중에는 왜 그리 살았나 한탄할 시간도 올 테니까요. 장가도 가야죠."

    "장가라……."

    그러고 보면 혼기가 꽉 차다 못해서 지날 기세였다.

    "그런데……."

    "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이지혁 씨는 혹시 결혼해 본 적 있으십니까?"

    이지혁이 입을 꾹 다물고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제가 실수했네요."

    "네?"

    "장가가지 마세요."

    "……."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래?

    "절대! 절대 가는 거 아닙니다! 결혼은 하는 게 아니에요.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제도가 바로 결혼이에요. 그건 나를 버리는 짓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절대로 결혼하지 마세요!"

    "아, 네……."

    뭐지? 이 설득력은?

    진심이 마구 전해지는 것 같은데?

    "해보셨구나."

    "……."

    역시!

    방금 그건 경험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말과 진정성이었다.

    "그건 하는 게 아니에요……."

    "참고하겠습니다."

    최정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간에 일단 일본에서 온 요청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해주셔야 합니다."

    "꼭 가야 하는 것처럼 말하시더니."

    "까라면 까야죠."

    최정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 최정훈 씨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네요?"

    "전 일개 공무원입니다. 그리고 제가 일개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본 적도 없습니다."

    "엄청 권력자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컨셉이죠, 컨셉."

    최정훈이 싱긋 웃었다.

    "저는 능력자도 아니고, 꼭 필요한 사람도 아닙니다. 저를 대체할 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죠. 그 사실을 잊어본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잘려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죠."

    "대체라?"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이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끔 보면 본인이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최정훈은 안 그런 줄 알았는데…….

    "너무 겸손하면 그것도 보기 안 좋아요."

    "겸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제가 이지혁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살 수는 없겠죠. 제 능력으로는 이미 정규 루트를 많이 추월해서 온 겁니다. 그러니 고개를 숙여야죠."

    그렇게 생각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고…….

    "윗분들에게 중요한 사람은 이지혁 씨와 서아영 씨 같은 능력자들입니다. 제가 중용 받는 이유는 그 사람들과 여러분을 잇는 다리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 그게 제 가치란 걸 잊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리란 언제나 새로 놓을 수 있는 거죠. 강남 가는 길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강남을 갈아엎을 수는 없지만, 언제나 새 다리를 놓을 수는 있으니까요."

    새 다리라…….

    이지혁은 피식 웃었다.

    그런 짓을 하는 놈이 있다면 미친놈이지.

    "그래서 누가 압박을 넣는 건가요?"

    "누굴 것 같습니까?"

    "모르니까 물어보죠."

    "저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저는 언제나 직속상관에게 전달을 받는 입장이니까요. 그런데 짐작 가는 것은 있죠. 이 일을 치적으로 삼을 수 있는 쪽에서 압력을 넣지 않았겠습니까?"

    "흠……."

    이지혁이 볼을 긁적였다.

    그 말대로라면 한 사람밖에 남지 않는군.

    "영감님이 그 안에서만 있더니,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네요. 그런 걸 치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 버렸는데."

    "현 사태에서 그 자리는 빛 좋은 개살구니까요."

    "뭐,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양반 이력에 한 줄 더 써 넣어주기 위해서 고생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 같네요."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음, 뭐… 그렇죠. 그렇긴 한데……."

    이지혁이 조금 고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냥 안 한다고 하면 곤란하다, 이거죠?"

    "곤란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본인이 안 한다고 했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냥 좀 잔소리나 늘어놓겠죠."

    "잔소리라……."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뭐, 그럼 그 잔소리 안 듣게 해드리면 되는 거네요."

    "네?"

    최정훈의 얼굴에 불안함이 내려앉았다.

    이지혁이 저런 얼굴을 할 때마다 사고가 터졌다.

    '이번 사고는 심상치 않을 것 같은데?'

    최정훈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어떻게 수습을 해보겠지만, 어디 이지혁이 그가 감당할 만한 일을 벌이는 사람이던가.

    "전화번호 하나만 알아다 줄래요?"

    "저, 전화번호요?"

    최정훈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전화번호?

    어디 전화번호?

    * * *

    "해외에서 요청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요?"

    사내는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실용성에서 조금 벗어나 보이는, 거대한 책상.

    그가 앉은 고급 의자 뒤로 황금색으로 새겨진 봉황과 무궁화의 무늬가 보인다.

    사내는 느긋하게 보고서를 읽다가 느릿한 동작으로 서류를 책상 위로 올려두었다.

    "아주 좋은 일이에요."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대통령이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아주 좋은 일이죠."

    사내의 표정에서는 여유가 넘쳐 났다.

    윤영민.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그의 이름이었다. 역대 최악의 시기에 대통령이 된 그는 의외로 역대 최고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열리는 게이트들과 국제 관계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냈어야 하지만, 몇 달 전 뜬금없이 나타난 복덩이 덕분에 그와 대한민국의 입지는 한없이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나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며 기웃대기 바쁘던 대한민국이 이제 다른 나라들의 굽신거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원을 요청해 오는 국가들의 면면이 그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비롯해 수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과거였다면 그가 타국의 정상들에게 손을 벌리기 바빴을 텐데 말이다.

    "러시아는 어떻습니까?"

    "우크라이나 병합은 거의 끝났습니다."

    "국제사회는요?"

    "규탄 성명을 계속 내고는 있지만, 자국 내에 벌어지는 일들도 처리하기 바쁜데 외국으로 손을 뻗을 수는 없습니다. 미국과 중국마저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없는데, 어느 나라가 우크라이나를 도우려 하겠습니까?"

    "멕시코 사태는 어떤가요?"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는 전력이었지 않습니까? 빠른 속도로 진화되고 있습니다."

    "그러게 왜 미국을 향해 진격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만 벌어진다면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비서실장은 입을 닫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다. 아무리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하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재미라는 말을 입에 담을 일은 아니었다.

    '품격이라는 게 있어야 할 텐데.'

    애초에 국가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사람이 당선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장 생명이 위험하다는 부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연일 과격한 발언을 늘어놓는 사람.

    평상시였다면 제일 먼저 배제되었을 후보가 불안한 정국에서는 심지가 곧고 위기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후보라 평가되었다.

    '무능하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간단했다.

    무능하다.

    심지어 악독하지도 않고, 기회주의적이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흠잡을 곳도 없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무능함이고, 그 무능함은 대통령으로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큰 단점이었다.

    "일본은 어떻게 됐습니까?"

    "지속적으로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총리 쪽에서 핫라인을 통한 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거절해 두었나요?"

    "예. 지금은 바쁘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연락을 피하다 보니 직접 방한하겠다고 나오더군요."

    "흐으음……."

    윤영민은 연신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대한민국은 현재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역사상 어떤 시대에도 한반도의 국가가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 전성기가 자신의 임기와 함께한다는 것이 더없이 즐거운 윤영민이었다.

    역사상 어떤 지도자가 그와 같은 권력을 누려보았겠는가.

    "총리가 애가 닳은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한 번 도와주기는 해야죠. 하지만 명분이 워낙에 부족하니까 총리급에서 해결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럼 더 윗선을 원하시는 겁니까?"

    일본에서 총리 위에 있을 사람이라 봐야 한 사람밖에 없다.

    천황.

    "그 정도 급에서 직접 요청하거나 과거사를 사죄해 준다면 이쪽에서 움직이기 편할 텐데 말이죠."

    "찔러보겠습니다."

    "음, 좋아요. 좋네요."

    운영민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기 위해서 애썼다. 아무리 측근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경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재미있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스트레스 때문에 위장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이 자리가 이토록이나 재미있고 즐거운 자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복덩이 덕분이죠. 물론 그 복덩이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내 능력이지만."

    "…그렇습니다."

    비서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대로 활용?

    대체 뭘 활용했다는 것인가.

    능동적으로 나서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껏 한 일이라고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요청을 들어준 것뿐이다. 제대로 된 협상을 펼칠 능력도 없어서 외국과의 협상을 일개 공무원이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 지금 대통령이었다.

    '한심하긴.'

    능력도, 실적도 없는 이가 이미지 하나로 자리에 앉으면 이리된다. 이래서 고위직에게는 실적이 필요한 것이다.

    "일단 일본과 북한 쪽을 주시해 주세요. 요즘 북한이 너무 잠잠한 것이 마음에 걸리네요. 국제사회가 분쟁을 자꾸 일으키는 것도 걸리고."

    "예, 대통령님."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온 것인가?

    대통령 집무실에 노크를 할 사람이야 빤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노크를 하느냐는 것이다.

    인터폰은 폼이 아닐 텐데.

    "들어오세요."

    윤영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비서실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예의 없게 저게 뭐하는 짓인가.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교육을 다시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이건 비서실을 총괄하고 있는 그의 자존심 문제였다.

    "저,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

    "예,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비서실장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화가 걸려온 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일본 총리나 미국 대통령의 직통 핫라인도 받지 않고 있는 판에 누가 전화를 했든 그게 어떻게 급한 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두말하지 않을 테니, 일단 나가 있게. 자네의 실수에 대한 처분은 내가 따로 내릴 테니."

    비서실장은 몸을 돌려 대통령을 향해 깊게 읍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랫사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으음……."

    대통령은 조금 불쾌한 기색이지만, 굳이 입으로 불편함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개 비서에 대해 불만을 토한다는 것도 대통령의 품격에는 맞지 않으니까. 이런 일은 비서실장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다.

    "그럼 저……."

    "그,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

    비서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그가 지금까지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적이 없는데,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라니, 저게 어떻게 대통령이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언사란 말인가.

    경박했다.

    "자네는 일단……."

    "전화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쯤 되자 화가 나기보다는 궁금증이 몰려왔다.

    대체 누가 전화를 걸었기에 저러는 걸까?

    "어디서 걸려온 전환가? 미국인가? 아니면 북한에서 직통이라도 내려왔는가?"

    생각할 수 있는 곳은 그 두 곳뿐이었다.

    하지만 비서는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젓더니 반쯤 찢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이지혁!"

    "응?"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누구라고?

    "NDF의 이지혁 씨가 대통령님과의 통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

    대통령 집무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 * *

    "으으으음……."

    그것은 기이한 광경이었다.

    커다란 원목 탁자 가운데 생뚱맞게 전화기 하나가 떡하니 올려져 있고, 검은 양복을 입은 중년인들이 그 전화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은은한 두려움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전화가 왔었다구요?"

    "예."

    "일단은 끊었군요?"

    "시간이 좀 걸리다 보니 짜증을 내고는 밥 먹고 전화를 하겠다며 끊었습니다."

    "듣던 대로군, 듣던 대로야."

    각부의 장관과 총리, 그리고 정권의 실세를 담당한다는 실장들과 국정원장까지.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정관계 인사들이 바로 이곳 대통령 집무실로 모여들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통령 윤영민의 말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 이 사태에 면역이 있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외교부 장관은 어디 있어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 호출인데, 연락이 안 된다니!"

    "이지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전화를 끊더니, 관사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현재 추적 중입니다."

    "끄응……."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구, 국방부 장관."

    "예, 각하."

    "대통령님이라고 하라고 했잖습니까. 시대가 어떤 시댄데. 여하튼 어떻습니까? 엄밀하게 따지자면, NDF는 국방부 산하단체 아닙니까?"

    국방부 장관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KSF와 NDF는 엄연한 대통령 직속 단체입니다. 명령권 좀 달라고 그렇게 말씀드릴 때는 국방부 산하가 아니라서 안 된다고 그리 자르셔잖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 국방부 산하라니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정부 조직도라도 변경되었습니까?"

    그냥 '아니다'라고 하면 되지, 꼭 저렇게 비꼬아야 하는 건가?

    군인 출신들은 화끈하고 직설적이라고 들었는데, 쟤는 어디서 가라로 장군 됐나? 왜 저리 비비꼬아 대지? 통신 출신인가?

    "그럼……."

    윤영민의 눈이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상황이 이리된 이상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원장."

    "…예."

    KSF의 총괄 원장 배정국이 미묘한 얼굴로 대통령을 마주 보았다.

    "원장은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소속이니까요."

    배정국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소속이라니.

    그럼 젠장, NDF 발족할 때 승인을 내주지 말든가.

    잘 있는 놈들 무슨 특수부대 만든다고 한곳으로 모아서 독립 명령권을 준 것도 배알 꼴려 죽겠는데, 이제 문제가 생기니 자신더러 해결하란다.

    "제 손을 떠난 지 오랩니다."

    "그게 원장으로서 할 말입니까? 부하 직원 하나 제대로 단속 못해서 되겠어요?"

    국방부 장관이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방위사와 KSF의 사이가 좋지 않은데, 둘의 사이가 좋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 직접 하시지요."

    "뭐요?"

    원장이 눈을 부라렸다.

    "애초에 독립 명령권을 줘서 제 휘하에서 이탈시킨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저한테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힘으로 걔들한테 명령을 내리겠습니까? 차라리 그냥 직속상관을 호출하시는 게 빠를 겁니다."

    "직속상관?"

    "서아영이죠."

    "……."

    모두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서아영이 이지혁의 책임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여기에 어디 있는가. 한국에서 고위직에 몸담으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정보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인상이 좋지 않은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지랄마녀.'

    겉으로야 플레임 위치지.

    그녀의 지랄 맞은 성격은 아주 유명하다 못해 이제는 공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소환하라고?

    무슨 굴욕을 당하라고 그녀를 마주한단 말인가.

    "크흐흠."

    RRRRR.

    그때, 전화벨이 우렁차게 울렸다.

    전화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 안이 긴장감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 *

    RRRRR.

    전화벨 소리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긴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하지만 윤영민은 그런 경험은 사양하고 싶었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이 기분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바, 받아봐."

    "받아야 합니까?"

    "그럼 안 받을 생각입니까? 받기는 해야죠!"

    "으음……."

    사람들의 시선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전화기 옆에서 대기하고 잇던 비서가 천천히 손을 뻗어 수화기를 잡았다.

    차라리 휴대폰이면 전화 받기가 수월했을 텐데, 아직도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무거운 수화기가 그의 마음을 두 배는더 짓누르는 것 같았다.

    꾸욱.

    수화기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준 비서가 힘차게 들어 올려 귀에 가져다 대었다.

    "예, 비서실입니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극도의 긴장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모두의 시선이 비서의 입으로 향했고, 귀를 쫑긋거리며 조그마한 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모아졌다.

    "예?"

    비서가 뭔가 심각하게 듣는 듯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

    비서가 귀에서 수화기를 떼더니 전화를 끊었다.

    "뭐, 뭔가?"

    비서가 조금은 뻘쭘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외교부 장관입니다. 오늘 아파서 참석을 못하겠다고 연락하지 마시랍니다."

    "이 무슨 병신 같은!"

    윤영민은 체통도 잊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대통령님, 진정하십시오."

    "으흐흐흠!"

    비서실장은 그 상황을 보며 웃음을 참으려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건 블랙코미디다.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 요인들이라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넘은 꼬맹이가 전화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꼴이라니.

    이게 코미디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리고 나도 그 코미디의 일원이고 말이지.'

    무척이나 슬픈 이야기였다.

    "이게 무슨 짓인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크흠……."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하기야 민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전화한답니까?"

    "그걸 누가 압니까?"

    "연락해 볼 사람도 없는 겁니까? 나름 중요인이라고 하면 최고 중요인인데,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 사람도 없습니까?"

    "…한 사람 있기는 합니다만."

    "한 사람이요? 겨우 한 사람에게 그 중요한 사람을 모두 맡긴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재부 장관의 말에 국방부 장관과 KSF 원장이 동시에 그를 노려보았다.

    "왜, 왜요?"

    "말을 참 쉽게 하십니다."

    "예?"

    "이지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하는 말입니까?"

    "……."

    "그 사람 주변에 정보원을 심어보겠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밖에 없냐구요? 한 명이라도 있는 게 다행인 줄 아십시오."

    "아니, 제가 뭐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국방부 장관이 코웃음을 쳤다.

    "이보세요, 장관님."

    "거, 말씀하십시오."

    "지금 이지혁 씨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 하나뿐인 것 같습니까?"

    "그건 아니겠죠."

    "지금 이지혁 씨를 따라다니는 군사위성이 몇 대인 줄은 알고 하는 소리예요? 미국은 이지혁 씨 전용으로 위성만 다섯 대를 배정했어요."

    다섯 대?

    한 사람에게 위성 다섯 대가 따라붙는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한창때의 러시아 국가원수도 그런 대접은 받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지혁 씨 주변으로 잠입하려고 했던 외국 요원들이 몇인지나 알아요? 그 사람들이 지금 다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이지혁이라는 사람이 그리 무서운 사람입니까?"

    "하! 이지혁 씨 주변에라도 갔으면 말도 안 하지. 이지혁 씨를 호위하는 도가윤이라는 능력자 하나에게 각국의 요원들이 다 쓸려 나갔어요. 자기들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릅디다."

    "……."

    "그런 사람인데 인간관계는 또 극도로 좁아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면 교류를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락책을 만들어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인데, 지금 뭐요? 하나라서 불만이다?"

    기재부 장관은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 잘 모르는 상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데, 괜히 입을 열었다가 망신만 당했다.

    이럴 때는 빠르게 말을 돌리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그 하나가 누굽니까?"

    "들어보셨을 겁니다, 최정훈이라고."

    최정훈?

    기재부 장관이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국방부 장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 나라의 경제를 담당한다는 사람이 저렇게 정보에 느려서야 어디다 써먹겠는가.

    아무리 그가 하는 일이 얼굴마담이 전부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중요 정보는 손에 들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직책이 뭡니까?"

    "NDF 부부장입니다."

    "부장도 아니고, 부부장이요?"

    "능력자도 아닌 일반인을 NDF의 부장으로 앉힐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부장은 서아영이지만, 실질적인 부장 업무는 최정훈이 처리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지혁의 연락책이라고?

    상관이 아니라?

    "이상한 일이네요. 그 사람이 이지혁 씨의 상관이라면, 그냥 명령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하……."

    "저런!"

    또 뭔가 말을 실수했나?

    주변에서 쏟아지는 비난 어린 탄식에 기재부 장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뭔 저런 양반이 장관이라고……."

    원색적인 비난마저 들려왔지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가 할 수 있는 변명은 없었다. 괜히 화를 냈다가 되레 욕만 더 먹을 상황이다 보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능력자가 말만 하면 '네네' 하고 말을 듣는답니까? 안 그래도 워낙에 반골들이라 법으로 누르고, 더 센 능력자로 누르고, 온갖 수를 다 써서 누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이지혁을 무슨 수로 누를 겁니까?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자와 모든 군경을 동원해도 막을 수 있을까 싶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청와대는 10분이면 날아갑니다."

    "시, 십 분 만에? 그렇게나 빨리?"

    국방부 장관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게 아니라 여기까지 오는 데 십 분이고, 청와대가 날아가는 건 3초면 됩니다! 아니, 3초나 걸리겠어?"

    KSF 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3초나 걸리면 다행이죠. 기도는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뭐? 그 사람을 어쩌자고? 명령을 내려?"

    국방부 장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양반 출장 한 번 보내려면 대가리를 얼마나 싸매야 하는지 아십니까? 지시야 쉽지요! '설득해 봐라' 해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 설득하는 게 보통 일인 줄 아십니까? 내가 그거 한 번 해보려 했다가 그 차관급도 안 되는 젊은 놈한테 얼마나 빌어 댔는지 아시냐구요!"

    "…진정하십시오."

    "그런데 뭐? 속편하게 명령? 며어어엉령?"

    "죄송합니다."

    기재부 장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상황을 좀 제대로 알고 말을 하세요. 아니, 웬만하면 그냥 최대한 말을 하지 말고 그냥 계세요. 속 답답하니까."

    "끄응……."

    "오죽하면 외교부 장관이 도망갔을까를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지혁.

    이지혁이 문제였다.

    그 이지혁이 대한민국에 영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이지혁은 통제할 수 없는 폭탄과도 같았다.

    분석된 자료만 보아도 웬만하면 상대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양반인데, 지난번에 외교부 장관이 탈탈 털린 이후로는 누구도 이지혁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미 훈장도 몇 번은 받았어야 하는데, 대통령을 위시로 훈장 수여자들이 이지혁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아직까지 미뤄지고 있는 것이었다.

    국교부 장관이 슬쩍 물어왔다.

    "그래서, 그 최정훈에게 연락은 해보셨습니까?"

    "연락을 안 받습니다."

    "짠 것도 아니고, 그래도 다시 한 번 해보시는 게?"

    은근한 압력에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돌려 KSF 원장을 바라보았다.

    "끙……."

    원장이 한숨을 내쉬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아무리 대통령 직속이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관리는 그가 하고 있다 보니, 최정훈에게 연락할 적임자는 누가 뭐래도 그 인 것이다.

    전화번호를 누르고 기다리고 있자 통화 연결음이 울렸다.

    "오!"

    연결됐다!

    원장은 반색하고 입을 열었다.

    "날세! 지금 이지혁 씨가 청와대에 연락을 하고 있는데, 이유가 뭔가?"

    - 네?

    "지금 이지혁 씨가 대통령실로 전화를 건단 말일세. 이유가 뭐라는지 알아보란 말이네!"

    - 누구신데요?

    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더위를 먹었나?

    "나 KSF 원장이다. 너 최정훈이 아냐?"

    - 아닌데요?

    아니라고?

    전화기를 뗴고 액정을 확인한 원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정훈 폰이 맞는데?

    "그럼 넌 누구야?

    - 이지혁인데요?

    "…네?"

    - 이지혁이라구요.

    "아, 이지혁 씨구나."

    원장이 어색한 얼굴로 웃다가 고개를 돌려 최정훈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한 국교부 장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다른 장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총질하고 사는 인간이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국교부 장관은 그저 바닥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았나.

    그리고 이 인간들 전화해 보라고 할 때는 같이 압력 넣더니,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하는 클라스 보소.

    한참 동안 국교부 장관을 노려본 원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이지혁 씨시군요. 그런데 왜 이지혁 씨께서 최정훈의 전화기를 들고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그냥 들고 있는데요? 그럼 안 돼요?

    안 될 거 없죠.

    당신이 그런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말리는 놈이 정신 나간 거지.

    "하하하… 아, 아닙니다. 그럼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겠습니다."

    - 그런데 아저씨 누구라구요?

    "저… KSF 원장입니다."

    - 원장이면 높은 건가?

    "제가 아마 제일 높을걸요?"

    - 아, 그럼 아저씨가 대장이네요. 잘됐다.

    뭐가 잘됐니?

    난 지옥 같은데.

    책상에 앉아서도 니가 벌인 수많은 일들은 아주 잘 보고 받았어요. 난 절대로 너랑은 엮이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 전화 좀 끊어주면 안 될까?

    - 아저씨.

    "예."

    이왕이면 원장님이라고라도 불러주지. 아저씨가 뭐냐, 아저씨가.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지혁에게 정상적인 예의나 반응을 바라서는 안 된다'가 KSF 제1수칙 아니던가.

    - 왜 자꾸 전화하고 해서 사람 귀찮게 해요?

    "네?"

    - 안 그래도 사람이 업무 때문에 죽어 나가는데, 인력 보충은 못해줄망정 왜 자꾸 사람 귀찮게 하냐구요.

    "아, 아니, 인력은 저번에도 보충을 했는데?"

    니가 외교부 장관을 탈탈 털어서 돈이고 인력이고 다 빼갔잖아.

    - …아저씨.

    이지혁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전신에 소름이 돋은 원장이 주먹을 입에 물고 낮게 소리를 질렀다.

    그 광경을 보는 이들도 긴장에 젖어 주먹을 꽉 쥐었다.

    "네, 말씀하시죠."

    이어 이지혁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 거기, 어디예요?

    "……."

    모두의 불타는 시선이 원장에게로 향했다.

    원장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시선을 느끼며 입을 달싹였다. 이 진득한 무언의 압력이 너무 강하다.

    아니, 대통령님. 책상 위에 골프채를 넣어놓고 계셨습니까? 집무실에서 골프 연습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국정원장은 품 안에서 손 좀 뺐으면 좋겠는데? 너, 그거 안에 그 벨트… 권총 벨트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압력을 이겨내지 못한 KSF 원장이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제 집무실입니다."

    - 잠시 후에 뵙죠.

    "예……."

    전화가 끊기고 KSF 원장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통령은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걱정 어린 어조로 말했다.

    "얼른 집무실로 가보게."

    쓰레기.

    인간쓰레기가 여기 있었다.

    KSF 원장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말없이 주위를 둘러본 그가 터덜터덜 걸어서 밖으로 걸어 나간다.

    "살아 돌아오시게!"

    "…개새끼들."

    뭔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지만, 정치인들답게 모두가 웃는 낯으로 그를 보냈다.

    RRRRRR.

    하지만 그 순간, 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 * *

    전화가 바로 온 것인가?

    모두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방금 나름 권력자 중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KSF의 수장이 단박에 굴욕을 당하고 버로우 타는 것을 눈으로 본 터라 부담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바, 받아야지요?"

    "예. 그렇죠."

    조용한 침묵 속에서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만이 한없이 메아리쳤다.

    "어, 어서 받아보세요. 안 받았다가 또 무슨 말 나올지 모르니까."

    "끄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들 아연한 얼굴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뭔 추태인가.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정계의 핵심들이 몰려서 이제 겨우 스무 살 넘은 애송이 하나가 무서워서 이 난리를 쳐야 하다니.

    "그깟 전화 뭐 그리 대단하다고!"

    국교부 장관이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다른 이들이 감탄하는 눈으로 국교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저 인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하지만 속내는 조금씩 달랐다. 어쨌거나 총대 메줄 사람이 직접 나선다는데 만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국교부 장관은 당당하게 걸어 전화기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힘차게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비서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 장관이란 사람이 전화를 저렇게 받지?'

    '비서실입니다'라든가, '청와대입니다'라든가… 좋은 말 다 놔두고 '여보세요'가 뭔가.

    하지만 장관에게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고, 이미 전화를 받아버렸으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끄응…….

    비서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런 인간을 장관이라고 뽑아 놓았다니.

    비서실장이 슬금슬금 전화기로 다가가 스피커 기능을 눌렀다. 당황해하는 국교부 장관에게서 수화기를 빼앗아 들다시피 하여 바닥에 내려놓고 낮게 심호흡을 했다.

    "청와대입니다. 전화하신 분께서 누구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 거 봐, 맞잖아.

    건너편에서 뭔가 투닥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비서실장은 가볍게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청와대에 전화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긴장하여 말을 더듬을 텐데, 이건 무슨 중국집에 전화한 것도 아니고… 뭐가 저리 여유롭단 말인가.

    '하기야…….'

    생각해 보면 이 전화를 한 사람이 이지혁이라면 긴장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미국 대통령 앞에서도 태연할 사람이다. 세상이 갑과 을로 관계가 나뉘는 곳이라 할 때, 지금의 이지혁은 절대적인 갑이었으니까.

    갑질을 안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이지혁 씨이십니까?"

    - 어? 저 알아요?

    알지.

    알다마다.

    너 모르고 여기서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겠냐?

    "전화 주신다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용건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오오!"

    주변에서 찬사가 나온다.

    이지혁을 상대하면서도 저 또박또박 정도를 잃지 않는 목소리하며! 역시 비서실장!

    비서실장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감탄의 시선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는 영감들을 저런 자리에 앉혀놨으니 나라 꼴이 이렇지 않은가.

    - 아, 뭐, 됐고. 거기 대통령 있어요?

    "……."

    있기야 하다.

    청와대에 대통령이 없으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은 갖추어줘야지. 아무리 지금의 대통령이 대통령 같지 않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비서실장이 고개를 돌려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영민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팔도 뭔가 휘적휘적 휘둘러지는 것이, 이지혁의 전화를 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예의는 안 지켜도 될지 모르겠군.'

    저런 걸 대통령이라고.

    비서실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외부적으로 보면 그도 저 인간의 오른팔로 보일 터인데, 저런 인간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것이 치욕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당을 잘못 선택했어.'

    저 인간이 당선될 줄 알았다면 이 당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텐데. 국민의 불안과 광기가 만들어낸 참사가 너무도 서글펐다.

    "아, 아니요. 지금 안 계십니다."

    - 언제 와요?

    "글쎼요."

    - 그래요? 흐음, 그럼…….

    무슨 말을 할까?

    살짝 고민하는 듯 말끝을 흐리는 이지혁의 기색을 느끼며 비서실장은 긴장했다.

    - 대통령은 휴대폰 안 들고 다녀요?

    "네?"

    어? 이건 생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당황한 비서실장이 돌아보니 대통령은 씨익 웃었다.

    '기책이 있으신가?'

    여유로운 얼굴의 대통령이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냉큼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

    기책이라면 기책이군.

    비서실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안 들고 계십니다."

    - 주변에 연락할 방법도 없구요?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 흐음…….

    낮은 한숨.

    비서실장은 영 못마땅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피한다고 뭐가 해결되는가. 당장의 불편을 뒤로 미룰 뿐이었다.

    하기야 저 사람의 방식이라는 것은 항상 이런 식이었지. 제대로 부딪혀서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만 화려하게 치장하기 바빴다.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안건들은 뒤로 미루기 바쁘고, 눈에 띄는 짓거리만 못해서 안달이었다.

    이지혁이 갑자기 등장하여 대한민국의 당면 문제들을 한 방에 뒤집어버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라 꼴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블루레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지혁이야말로 윤영민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먼저 찾아가서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은인의 전화를 저런 식으로 피해 다닌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 그럼 뭐 할 수 없죠.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연락도 안 된다, 이거죠?

    "…매우 송구스럽습니다만,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 네, 알겠어요. 그럼.

    비서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해결한 것이다. 다음에 전화가 걸려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건 이지혁은 너무 만만히 본 생각이었다.

    - 제가 그리 갈게요.

    "네?"

    비서실장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 언제 올지도 모르고, 연락도 안 되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 그렇긴 하지만……."

    - 그래도 대통령인데 청와대에는 오겠죠. 기다리다 보면 나타날 테니, 거기 가서 기다리죠. 뭐. 지금 가면 되나요?

    집무실이 순간 패닉에 빠졌다.

    "아, 아니, 일단 진정하시지요."

    당장에라도 날아올 기세로 보이자 비서실장은 일단 이지혁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럼 끝장이다.

    "제, 제가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굳이 불편하시게 여기에 와서 기다리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연락이 되는 대로 그쪽으로 연락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 흐음…….

    알아들었을까?

    -에이, 그건 아저씨가 힘들잖아요. 제 일인데 제가 해야죠. 지금 갈게요.

    예의도 바르지.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어찌 이리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 예의 차리지 말란 말이다!

    넌 사람 좀 부려먹어도 되는 위치라고!

    "괜찮습니다! 제 일이 그건데요!"

    - 오! 아저씨, 부지런하시네. 여기 있는 사람 같아.

    여기 있는 사람?

    최정훈을 말하는 건가?

    "감사합니다. 대통령님께는 제가 최대한 빠르게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 음, 그래주면 고마운데…….

    이지혁이 말끝을 흐렸다.

    비서실장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뭔가 말을 하면 할수록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혹시 이 인간… 여기서 대통령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 아닐까?

    "이지혁 씨는 하실 일이 많으시잖습니까."

    - 음, 할 일 없는데…….

    "할 일이 없기는 왜 없어!"

    - 네?

    헐.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 쯧쯧.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비서실장이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기 시작했다.

    - 진정해요. 안 잡아먹어요.

    이 새끼, 진짜 보고 있나?

    - 나는 그냥 전화나 좀 하려는 건데, 사람들이 나한테 왜 자꾸 이리 불편하게 대하는지 모르겠네. 미국 아저씨들도 그렇고.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미친놈아.

    그게 잘못의 문제냐!

    사람이 호랑이 옆에 앉아 있으면 긴장하는 게 호랑이가 뭔가 잘못해서가 아니잖아.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보통 사람은 불편하고 무서울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너에 비하면 호랑이도 고양이지.

    나 하나 죽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니까.

    - 음, 뭐, 여하튼 알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청와대에는 대통령이 없고, 연락이 안 되고, 연락이 되는 대로 저한테 전화를 주겠다, 이 말이죠?

    "그렇습니다."

    - 얼마나 걸릴까요?

    "얼마 안 걸릴 겁니다."

    - 음…….

    대화 패턴으로 보아 이 정도면 넘어가 줄 것도 같다. 임시 미봉책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결을 한 게 어딘가.

    - 그런데요.

    "네."

    - 생각해 보니 꼭 대통령이랑 통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네?"

    - 그냥 책임자 수준만 되면 되거든요. 예를 들면 총리라든가.

    총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좌우로 마구 저어 댔다.

    - 아니면 국방부 장관?

    국방부 장관이 슬그머니 모자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 정 안 되면 KSF 담당이라든가.

    "그분은 집무실로 가셨습니다만?"

    - 그럼 다른 사람들은 거기 있겠네?

    "아, 아니요.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말입니다."

    - 아, 그래요?

    건너편에서 이지혁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이 인간, 뭔가 능구렁이를 엄청 삶아 먹은 듯한 느낌인데?

    - 그럼 지금 연락 가능한 사람이 누구예요?

    "여, 연락이요? 그러니까……."

    비서실장이 고개를 돌리자 모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보고 뭘 어쩌라고.

    대통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비서실장을 가리켰다.

    "응?"

    저요?

    제가 고위층입니까?

    평소에는 부려먹기 바쁘더니, 이럴 때만 고위층이지, 이럴 때만!

    "저인 거 같습니다만?"

    - 누구신데요?

    "비서실장 박두진입니다."

    - 으음, 이상하게 아저씨는 괴롭히고 싶지가 않네?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괴롭히러 오는 거 맞구만!

    - 뭐, 알겠어요. 그럼 연락 되는 대로 전화 주세요.

    "가, 감사합니다!"

    - 그럼.

    전화가 끊겼다.

    비서실장 박두진은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뭔가 사람이 아닌 것과 통화를 한 느낌에 몸에서 탈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수고했네!"

    순식간에 집무실 안에 여유가 돌아왔다.

    '한심한 작자들.'

    아무리 상대가 이지혁이라고는 하나 방금 전에 이들이 보여준 추태는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한 국가의 수반들이라는 사람들이 저런 꼴이라니, 이 나라에 전쟁이라도 난다면 과거 한국 전쟁의 추태를 고스란히 재연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흠, 일단은 해결되었군."

    "그래도 혹여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왜 그러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일단은 그 최정훈이라는 사람에게……."

    그 순간,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테이블 위의 공간에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싶더니, 이내 검은색 유리 같은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 몬스턴가? 게이트야?"

    비서실장은 눈을 감았다.

    다른 인간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국방부 장관은 비서실장처럼 눈치를 챘는지 절망 어린 눈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우우웅!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하더니, 거기서 살짝 찢어진 눈을 한, 심통 가득한 얼굴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 다 있었네?"

    하하하하…….

    망했네.

    이지혁이 청와대 한복판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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