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3화 (43/118)
  • [■]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

    ─────

    "하지만 마왕이시여."

    아르고라스가 아래로, 아래로 머리를 조아렸다.

    "이 세계에는 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흐음?"

    델카란이 흥미롭다는 듯이 아르고라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자가 있다?"

    "이 세계에도 마력을 쓰는 자들이 존재합니다. 마나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하여 능력을 쓰는 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된다?"

    "그리고 베라프에서 드래곤 로드를 비롯한 일부의 인원들이 넘어와 있습니다. 벨트레체 님께서도 그들의 지원 앞에 결국 쓰러지고 마셨습니다."

    "열세 번째 마왕의 변덕에 쓰러진 것이겠지."

    "그렇긴 하옵니다만."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다."

    "감읍하옵니다."

    아르고라스는 머리를 조아렸다.

    "드래곤 로드라… 제 힘을 가지고 넘어온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 힘의 반의반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기에 몰렸을 때조차도 본체로 현신하지 않았습니다. 느껴지는 마력 역시 미약했습니다."

    "흐음……."

    델카란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드래곤 로드가 제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한다면, 충분히 위협이 된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드래곤 로드가 아니라 베라프의 모든 드래곤이 온다고 해도 나를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제힘을 되찾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델카란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저자가 우리를 지원하고 있다는 인간인가?"

    "그렇습니다."

    델카란의 눈이 알파에게로 향했다.

    "큭."

    알파는 델카란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지난번 벨트레체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마왕이란 것들이 가진 공통된 힘인지, 아니면 알파와 마왕들의 격차가 그만큼 크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눈앞의 이 마왕도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눈도 깜빡이기 전에 육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인간이여."

    "……."

    "우리를 돕는다고?"

    델카란은 재미있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마족에게 있어 인간이란 아주 흥미로운 존재였다.

    그들이 없다고 해서 살아가는 것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겠지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마이너스 에너지는 마계에 윤택함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마계가 세상을 농락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인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베라프에서는 흑마도사들이 그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마족들은 흑마도사들에게 마력을 공급해 주었고, 힘을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였던 것이다.

    하찮은 인간이라고는 하나 자신들을 돕는 이상 대가는 지불된다. 그것이 마족의 방식이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알파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인간이 악마를 도와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어?"

    "권력, 재력, 폭력."

    "…두 개나 더 있었군. 미안하다. 나보다 똑똑하군."

    알파는 정말 생각 못했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냥 힘만 있으면 되는데, 힘의 종류가 꽤나 다양한데 그래?

    "다른 둘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일단 폭력이지."

    "주어질 것이다."

    "저번 마왕도 같은 말을 하고는 덜컥 죽어버렸지. 이왕이면 선불로 해주면 이쪽도 좋겠는데 말이야. 마계에는 선불이라는 개념이 없는 모양이지?"

    순간, 검은 어둠에 휩싸여 표정을 볼 수 없는 델카란의 얼굴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델카란의 붉은 눈빛이 일렁였다.

    "재미있는 인간이로군."

    "같은 말을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마왕이라는 것들은 성격이 비슷비슷한 모양이로군."

    "이래서 인간은 재미있단 말이야."

    나약해 빠진 주제에 자신들이 마족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다.

    이 인간은 대놓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만, 자신들을 소환한 마도사들도 겉으로는 두려움에 떠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어떻게든 마족을 이용하려 했다.

    마족과는 다른 사고방식.

    마족의 삶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그리고 태어난 순간부터 서열이 어느 정도는 정해진다.

    최하위 마족으로 태어난 존재들이 최상위의 마족들과 비슷한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마족들은 자신들이 가진 위치를 자각하고 상위의 마족에게 복종한다.

    하지만 인간은 달랐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전쟁과 쿠데타의 반복이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 힘을 키우고, 어떻게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그래서 인간은 재미있는 존재인 것이다.

    마족이 인간에게 흥미를 가지는 것도 그래서일지 몰랐다.

    '그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는 말이지.'

    이지혁.

    아흔아홉 번째 마왕.

    지금까지 마족들이 인간에게 가지고 있던 인식을 한순간에 박살 내놓은 파괴자.

    인간은 나약하다는 인식을 파괴했으며, 인간은 어리석다는 인식을 파괴했으며, 인간은 마족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인식을 파괴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피식자에 불과하던 인간이라는 존재를 포식자의 입장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이레귤러.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고는 하나 인간의 손에 유린당한 덕분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마족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마족들은 힘이 곧 그 존재를 규정하는 요소라고 생각하기에 이지혁이라는 마왕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마왕의 위에 올랐다는 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델카란이 바로 그런 입장이었다.

    '인간 주제에 말이지.'

    이지혁이 마계를 종횡할 때였다면 감히 델카란이 그의 앞에 나설 수도 없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파괴하고, 으스러뜨리는 그 마귀의 눈에 띈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모시는 그분도 이지혁과의 다툼만큼은 피하려 하지 않았던가.

    "어이, 어이."

    한참 동안 이어지던 델카란의 상념을 알파가 깨놓았다.

    "선불로 주지 못한다면 나중에 달라고.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으면 내가 미안하잖아."

    델카란의 붉은 눈이 또다시 일렁였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군."

    델카란의 우수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인간이여, 마족은 약속을 지킨다. 어리석었던 여든두 번째 마왕이 지키지 못했던 약속까지 내가 대신 지켜주도록 하지. 나는 너에게 힘을 줄 것이다. 마족의 계약은 언제나 신성한 법이지."

    우우웅.

    델카란의 우수에 머물렀던 검은 마나가 알파를 향해 쏘아졌다.

    "흡?"

    자신의 육체 안으로 뭔가 파고드는 것을 느낀 알파가 몸을 떨었다.

    이건?

    "끄으으으으으."

    하지만 생각은 짧았고, 고통은 강렬했다.

    전신.

    몸의 안팎을 날카로운 비수로 수만, 수억 번 난도질하는 듯한 격통이 그를 찾아왔다.

    "으아아아아아!"

    참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알파는 바닥에 쓰려져 경련했다.

    "인간은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마력을 받아들이는군요."

    델카란은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인간들에게 부여하는 것의 열 배가 넘는 마력을 주었다. 정신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어야겠지."

    건방짐에 대한 대가로 조금은 가혹하다 싶은 정도의 마력을 부여했음에도 알파는 견뎌내고 있었다.

    '정신력이란 측면에서는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었군.'

    그것도 아득히.

    이지혁 같은 존재는 아니더라도 이 인간도 확실히 이레귤러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연구할 가치가 있단 말이야."

    나약한 존재는 더할 수 없이 약한 주제에 한 번씩 마족들도 경외할 만한 강함을 가진 존재들을 배출한다.

    현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들도 그 강함의 한계를 예측할 수 있는 반면, 인간들은 강함의 한계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끄으으으으……."

    바닥을 얼마나 긁어 댔는지 알파의 손톱이 모두 빠져 피를 흘려냈고, 입으로는 피거품이 계속 부글부글 끓어 댔다.

    "끄으……."

    그 고통의 신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델카란이 흥미롭다는 듯이 알파를 바라보았다.

    "적응하고 있는 건가?"

    놀라웠다.

    그가 부여한 마력이 체화되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더 필요할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야 할 텐데, 어느덧 알파의 경련과 신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마족들마저 견디기 힘든 고통을 이겨내고 있단 말인가.

    "확실히 인간은 재미있는 존재야."

    이러니 멸망시키는 것은 반대라니까.

    "후……."

    알파가 실핏줄이 모두 터져 붉어져 버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독하게 아프군."

    "겨우 그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을 텐데?"

    "확실히 그렇군요."

    아르고라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알파의 말투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고통을 받으니 이제 와 겁이란 게 생긴 것인가?"

    아르고라스의 말에 알파는 히죽 웃었다.

    "말은 바른말이지, 해주는 것 하나 없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징징대는 것들에게 경칭을 사용한다거나 존경을 표해 달라는 것도 웃긴 것 아닌가? 힘이 있으면 뭐하나, 빈대나 다름없는데."

    "흠……."

    역시 인간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가 없어.

    아르고라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지혁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인간은 참 이상한 존재들이군."

    "두 명의 대표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아줬으면 좋겠군. 게다가 나는 몰라도 그 이지혁은 인간 중에서도 정말 이상한 존재란 말이지. 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봐도 이상하니까."

    "그런가?"

    하기야 베라프에서도 이지혁을 인간으로 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지. 오히려 드래곤들이 이지혁을 인간으로 취급했고, 인간들은 이지혁을 죽여야 할 악마 정도로 취급했으니까.

    이곳에서도 취급이 딱히 달라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이레귤러로 취급한 알파조차 이지혁은 다른 존재로 보고 있으니 말이다.

    "우월하다고 해야 할지, 외롭다고 해야 할지……."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다."

    델카란은 그 말을 끝으로 알파를 다시 바라보았다.

    알파의 몸 안에서 동화되지 못한 흑마력이 요동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내부가 어떻든 겉으로 보이는 알파는 이미 태연함을 되찾고 있었다.

    "훌륭하군."

    델카란은 알파를 인정했다.

    마족 중에서도 이만한 고통을 이리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존재들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훌륭해."

    "감사드립니다."

    알파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정중함 속에 미묘한 조롱이 숨어 있다는 것을 놓칠 델카란이 아니었다.

    '그런 점도 마음에 드는군.'

    이 인간도 아주 재미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 인간이었다.

    뱃속이 검지만, 그 정도야 어떤 인간이든 그러한 면이 있으니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간이 무엇을 꾸민다 해도 상관없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계략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니까.

    "인간이여, 우리는 너에게 대가를 지불했다."

    "오래 걸렸지만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네가 다시 우리를 위해 일할 때다."

    "흠?"

    알파의 눈이 델카란에게로 향했다.

    그의 붉은 눈빛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자신의 착각일까?

    그 눈빛에 불길함이 내려앉았다.

    * * *

    "오라버니!"

    이지혁은 자신을 부르는 이예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응?"

    이년이 웬일로 이리 살랑거리며 온단 말인가.

    보통 이런 경우는…….

    "없어, 이년아!"

    "뭘 들어보지도 않고 없대!"

    "아무튼 없어!"

    보나마나 뭘 해달라고 하거나, 뭘 달라고 하거나, 뭘 사달라고 하겠지.

    이예원의 머릿속따위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빤히 알 수 있었다.

    "백 하나만 사 줘!"

    "백?"

    "응, 가방."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뭔 말을 하나 했더니……."

    그래도 이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백이라니.

    하기야 예원이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백 하나 정도는 들고 다닐 나이가 되었지.

    고등학교 졸업 전에는 필요 없다는 말은 고리타분한 아저씨나 하는 대사라는 것을 이지혁은 잘 알고 있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점은 세상은 항상 변한다는 것이고,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것을 후세대에게 강요하는 일은 꼰대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까?

    "오냐."

    "오오오오오!"

    이지혁이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이자 반색한 이예원이 와락 달려들어 매달렸다.

    "와! 진짜?"

    "그럼."

    싸가지 없고, 개념 없고, 못된 동생이지만, 백 하나 사 주는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이지혁 역시 좋은 오빠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능력 있는 오빠 정도는 되어줄 수 있으니까.

    "뭘 사고 싶은데?"

    "나, 이거."

    이예원이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이지혁에게 보여주었다.

    주황빛이 나는 가방을 보니, 뭔가 예쁜 듯 예쁘지 않은 듯 알 수가 없었지만…….

    '내 눈이 뭔 의미가 있나.'

    어차피 세상에서 제일 예쁜 백을 사다가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이지혁의 눈에는 시장에서 산 백 팩과의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폭력성은 만점이지만 심미성과는 철처히 담을 쌓은 사람이 이지혁이니까.

    "응, 자."

    이지혁이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를 넘겨주었다.

    "고마워! 오라버니!"

    "그러니 오라비에게 잘해라."

    "응응. 진짜 잘할게."

    "훗."

    제자리서 방방 뛰려고 하는 이예원을 보니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오라비가 버는 돈이 얼만데 백 하나에 저리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센 척은 해 대도 아직은 고등학생이었다.

    '은근히 귀엽기는 하네.'

    그래도 핏줄이라 이건가?

    이지혁은 폴짝폴짝 뛰며 결제를 하러가는 이예원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김다솜에게 목을 매는 김다현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듯하다.

    물론 그 정도는 병이지만, 이쁘면 이쁘다고 해줄 수 있는 정도?

    그 정도야 오빠로서 해줄 수 있지.

    "오라버니!"

    "응?"

    "휴대폰으로 승인을 해줘야 한데. 인증 번호 좀 알려줘."

    "어, 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휴대폰이 울리며 인증 번호가 날아왔다.

    이지혁은 번호를 확인하고 불러주었다.

    "2580."

    "응, 땡큐! 오빠, 진짜 고마워!"

    "하하하."

    이지혁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돈을 엄청나게 벌어오기만 했다.

    집이 바뀌긴 했지만, 이지혁이 산 것도 아니다.

    이지혁의 돈이라고 생각하면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나서서 옷이든 가방이든 좀 사 줬어야 하는 건데, 이리저리 굴러다니기만 했을 뿐, 가족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지 않았다.

    "…초심을 잃었어."

    처음 이 세계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가족들을 위해 해줘야 할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가져오기까지 했는데, 막상 돌아오고 나서는 어머니의 강력한 파워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이제라도 신경을 좀 써야지.'

    자신은 몰라도 가족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웅.

    그때, 휴대폰이 울리며 문자가 날아왔다.

    "오, 결제됐다."

    "꺄아아아악!"

    이예원이 자기 휴대폰을 붙들고 좋아 죽겠다는 듯 방방 뛰었다.

    '가방 하나 가지고…….'

    소박하기도 하지, 우리 동생.

    이지혁이 흐뭇하게 웃고는 문자를 확인했다.

    "보자, 결제 금액 240만 원……."

    240?

    이지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백사아십?

    뭔 놈의 가방이 이리 비싸단 말인가.

    아니, 뭔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중고 경차 한 대는 뽑겠네. 그걸 허리에 차고 돌아다닌다고?

    '제정신인가?'

    이지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지금까지 3만 원짜리 이상의 가방을 사본 적이 없는데, 뭔 놈의 가방이 240만 원이나 한단 말인가!

    이지혁은 자신이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진리를 되뇌며 인내했다.

    과거 자신의 삶을 강요하는 것은 꼰대질인 거다.

    240만 원짜리 가방을 팔지 않는다면 살 수도 없는 법.

    이예원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한 거겠지.

    5년 사이에 이리 많은 것이 변하다니! 무서운 세상!

    "역시 발전은 인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인가!"

    이지혁은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실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진짜 고마워!"

    "…응."

    이지혁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저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뭐. 얼마 한다고.'

    이지혁은 더 이상 용돈이나 받아 쓰던 고딩이 아니다. 경제 관념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통장에 수십억을 꽂아놓고 240만 원에 덜덜 떠는 것도 보기 흉한 짓이니까.

    뭐, 이 정도야.

    하지만 못내 찝찝한 기분에 입을 열고 말았다.

    "사 주기는 했지만, 니 나이에 좀 비싼 거 같기는 하다. 앞으로 이런 건 안 돼."

    "응! 나 이거 평생 들 거야."

    "……."

    은근 소박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래, 착하다."

    "응, 오라비."

    이예원이 이지혁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더니, 애교를 부렸다.

    "흠흠……."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미묘하게 기분이 좋은 것도 같고?

    언제나 징그럽기 짝이 없던 동생인데, 이리 애교를 부리는 걸 보니 귀욤귀욤하게 느껴진다.

    남자가 이래서 애교에 녹는다고 하는구나.

    "크흐흐흠!"

    이지혁은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다시 설교를 했다.

    "그래도 학생 신분에 240만 원은 과해!"

    "응?"

    이예원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고리타분하게 보였나?

    안 되는데!

    안 그래도 나이는 어린 게 사고방식이 늙었다는 소리 들을까 봐 은근 신경 쓰고 있었는데!

    천 년의 시간을 살았으니 영감님 소리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젊게 살고 싶었단 말이다.

    "이백사십? 아닌데?"

    "아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십사만 원을 잘못 봤나?

    휴대폰을 꺼내 결제 문자를 다시 켠 이지혁이 눈을 부릅떴다.

    이거 뭐지?

    공이…….

    하나, 둘, 셋…….

    "이… 이, 이천사아백?"

    이천사백?

    이천사아백?

    이지혁이 찢어질 듯한 눈으로 이예원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의 팔을 붙들고 애교를 부리던 이예원이 어색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알고 있는 줄 알고?"

    데헷, 하며 웃는 이예원을 보며 이지혁이 흐뭇하게 웃었다.

    "헤헤헤, 오라버니. 고마워요."

    "아냐, 고맙기는."

    이지혁의 손이 벼락같이 솟구치더니, 바로 이예원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이예원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이지혁이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니가 정신이 나갔구나, 이 미친년아!"

    귀욤귀욤은 얼어 죽을!

    이예원의 비명과 이지혁의 고함 소리가 집 안을 쩌렁쩌렁 메웠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손 똑바로 안 들어?"

    "힝."

    이예원이 무릎 꿇은 채 손을 들고 있는 광경을 보며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간이 아주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수술해 줘? 그 간 좀 넣어드릴까?"

    "왱."

    "왜? 왜? 이유를 알 때까지 처맞고 싶냐? 머리에 논리라도 좀 넣어드릴까? 내가 클 때는 논리야 놀자가 필독서였는데, 여기서도 세대 차가 나나? 응?"

    이지혁이 희번덕대는 눈으로 노려보자 이예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다른 애들도 백 다 들고 다닌다는 말이야."

    "이천만 원짜리?"

    "…아니."

    "하……."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천만 원짜리 백을 지르는 저 인간도 미친 인간이지만, 이천만 원짜리 백을 파는 놈들도 미친놈들이었다.

    무슨 옆구리에 차를 한 대 매고 다닌단 말인가.

    "말세여, 말세."

    게이트가 열려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그걸 파는 놈들이나, 사는 놈들이나.

    "왜 그러고 있니?"

    외출에서 돌아온 박선덕이 구석에서 무릎 꿇은 채 손들고 있는 이예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엄마아아아아아!"

    구세주를 찾은 이예원이 박선덕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이리 안 와!"

    이지혁이 분노의 샤우팅을 외쳤지만, 이예원은 박선덕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 뿐이었다.

    "너도 그렇다. 애가 잘못을 할 수도 있지. 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벌을 주면 안 되지."

    "끙……."

    이지혁이 가슴을 쳤다.

    "왜 그랬니?"

    "오빠가 백 사 달라고 했는데, 비싸다고 벌 주잖아!"

    "어머?"

    박선덕이 조금은 날카로워진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니 동생을 애로 볼 거야? 요즘은 고등학생들이면 다들 명품백 하나쯤은 들고 다녀. 나이에 안 맞으니까 안 사 주겠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거 사 달랬다고 애한테 벌을 주면 어떡하니? 너 그래서 장가는 가겠어?"

    박선덕의 말에 이지혁은 대답 없이 폰을 꺼내 결제 문자를 보여주었다.

    "응?"

    문자에 적힌 액수를 본 박선덕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이, 이천사백?"

    덥썩.

    박선덕의 손이 등 뒤에 숨어 있던 이예원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꺅!"

    박선덕이 눈꼬리를 한껏 끌어 올린 채 이지혁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너는 얘를 살려뒀니?"

    "고민 중이었어, 엄마."

    "…그래, 우리 지혁이가 착하구나."

    박선덕의 목소리에 살기가 묻어났다.

    "이 기집애가!"

    쫘아아아악!

    "꺄아아악!"

    박선덕표 등짝 스매싱을 얻어맞은 이예원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지만, 박선덕은 꽉 움켜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어디 헛바람이 들어서는 이천만 원짜리 백을 들고 다니겠다고! 저 돈이 어떤 돈인지는 알아! 니 오빠가 목숨 걸고 싸워서 벌어온 돈이야! 니는 니 오라비 목숨 값을 걸고 다니고 싶어?"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그래, 잘못했겠지. 그럼 벌을 받아야지!"

    쫘악! 쫘악!

    등짝으로 연신 날아드는 스파이크에 이예원이 불판에 올라간 마른오징어처럼 몸을 뒤틀었다.

    덜덜덜.

    그 광경을 보는 이지혁의 몸도 절로 떨렸다.

    이예원이 한 대씩 얻어맞을 때마다 이지혁의 몸도 움찔움찔했다.

    '나는 죄짓지 말아야지.'

    나라는 안 무서운데, 엄마가 너무 무섭다.

    드래곤 로드도 도마뱀 취급하는 이지혁이지만, 언제나 엄마 앞에서는 착한 아들로 남고 싶었다.

    아니면 뒈질 테니까…….

    털썩.

    이예원이 넋을 잃은 얼굴로 소파 위에 무너졌다.

    이예원의 난을 깔끔하게 진압한 박선덕이 짜증이 섞인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움찔.

    지은 죄도 없이 괜히 움찔하는 이지혁이었다.

    "취소했어?"

    "아니, 아직. 이제 취소하려고."

    "흐음……."

    박선덕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예원에게 다가가 뭔가 속닥댔다.

    이예원이 벌떡 일어나 휴대폰으로 뭔가를 마구 검색하더니, 박선덕에게 내밀었다.

    휴대폰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박선덕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으음, 뭐, 취소 수수료도 있으니까 굳이 취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으응?"

    "얘가 들기에는 좀 비싸서 그렇지만 뭐."

    엄마?

    내 눈을 봐야지.

    방금 엄마 내 목숨 값을 어깨에 메고 다니고 싶냐고 하지 않았어?

    엄마?

    엄마아!

    박선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지혁의 눈을 보지 않았다.

    "엄마아……."

    이지혁의 서글픈 목소리만 정처 없이 흘러갔다.

    "와, 왜! 팍, 씨!"

    "…아니에요."

    시무룩해진 이지혁이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아니, 엄마는 애초부터 그리 믿지 않았으니까 뭐…….

    그때, 이지혁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 * *

    - 목숨 걸고 가방 값 벌며 사는 이지혁입니다.

    "네?"

    - 그렇다고요.

    최정훈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지혁의 목소리에 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짐작했다.

    하지만 뭐 이지혁에게는 언제나 있는 일이지 않은가.

    "또 무슨 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 인생의 허무함을 알아가는 중이죠.

    어린놈이!

    …아니지. 어리지 않구나. 정신연령은 무생물급이니까.

    "그러시군요."

    뭔가 괴리감이 쩐다는 것을 느끼며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그래서, 무슨 일이죠?

    "게이트가 열리고 있습니다."

    -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연락까지 해요? 어차피 출근하면 알 건데.

    "좀 큽니다."

    - 끙…….

    이지혁은 신음 소리를 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부러 연락까지 해서 게이트가 크다고 말할 정도라면 이지혁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라는 걸 알아챘으리라.

    - 네, 일해야죠. 일해야 돈이라도 나오죠. 돈을 벌어야 우리 엄마 백도 사 주고…….

    최정훈은 눈을 딱 감았다.

    뭐 때문에 이 인간의 속이 뒤틀렸는지 알아챈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름 간단한 일이라 기분을 풀어주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좀 좀생이 같기도 하다.

    지가 버는 돈이 얼만데.

    월급이야 대기업급밖에는 안 된다고 해도 각종 수당이랑 뒤로 챙긴 돈을 합하면 빌딩을 사는 게 아니라 마천루도 세울 수 있을 텐데, 그까짓 백 하나 가지고 이렇게 꿍한 꼴을 보자니 같은 남자로서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거, 백 하나 얼마 한다고 그러십니까? 그것도 어머니께 사 드리는건데, 돈 아까워하시는 게 말이 됩니까?"

    이번만은 경우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여자 친구나 동생에게 사준다고 하면 말을 가려 할 필요가 있겠지만, 어머니께 사 주는 백을 아까워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실제보다 나이가 백배 많다고는 해도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효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이런 부분은 최정훈이 명목상의 연장자로서라도 확실하게 말 해주어야 했다.

    - 이천만 원짜리 백인데?

    "드래곤 가죽으로 만들었나……."

    - 거 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이지혁은 놓치지 않았다.

    실수다.

    최정훈은 헛기침을 하여 마음을 가다듬고는 이지혁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말했다.

    "이지혁 씨의 벌이라면 그 정도 돈은 돈도 아니잖습니까! 어머니 어깨에 힘 좀 들어가게 해드릴 수 있으면 그 정도 돈이야 쓸 수도 있는 건데, 뭔 놈의 백이 그리 비싸!"

    아차!

    본심이 나왔다.

    - 거 봐요! 그렇잖아!

    사실 인간적으로 너무 비싸잖아!

    뭔 백이 자동차 한 대 값이야!

    차라리 차를 사 주면 덜 아깝지!

    차 한 대 뽑아드리면 누가 봐도 각이 서는데, 백 하나가 차 값이라니… 이게 무슨!

    최정훈은 부들부들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걸 알긴 한데…….

    "그냥 차라리 차를 한 대 뽑아드리면 안 되는 겁니까? 그 돈으로요. 돈 조금 더 보태면 세단 한 대 나올 거 같은데."

    - 우리 엄마 면허 없어요.

    "아……."

    말문이 막힌 최정훈이 돌파구를 찾아냈다.

    "면허 따면 그만이죠! 그게 뭐 별거라고!"

    - 이미 주문했는데? 차도 또 사요?

    "아……."

    답도 없네.

    어쩌라고, 인마!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 도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웬 오지랖?

    "……."

    그래, 미안하다.

    내가 오지랖이 넘쳤구나.

    "일 이야기나 하시죠."

    - 네.

    * * *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도와줄 것처럼 하더니, 결국은 일 이야기였다.

    이 양반도 보면 은근히 허당이라니까.

    - 대구 쪽에 게이트가 발견되었습니다.

    "대전에는 발견된 거 없대요?"

    - 웬 대전요?

    "아주 서울, 대구, 부산으로 골고루 열리는 거 보니, 이제는 대전에도 열리지 않겠나 싶어서요."

    - 언젠가는 열리겠죠.

    "끙……."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큰데 그래요?"

    - 일단은 역대 최대입니다. 레벨을 명시해 드리고 싶은데, 지금까지 측정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게이트라서 뭐라고 말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레벨 8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나중에 따로 정해질 겁니다. 국제 규격을 새로 짜야 하니까요.

    "아니!"

    이지혁의 입에서 불이 뿜어졌다.

    "저 땅덩어리 넓은 나라들이 수도 없는데, 왜 그런 게이트는 여기만 열린답니까!"

    - 제가 알겠습니까.

    "진짜 이 땅덩어리는 마가 꼈나!"

    아래는 바다요, 좌우상으로는 강대국들이 포진해서 괴롭혀 대지를 않나!

    공룡들도 등신 같은 것들만 있어서 석유 한 방울 안 나지를 않나!

    그런 주제에 게이트도 제일 짜증나는 것들만 열려 대니, 사람이 열이 안 받을 수가 있나!

    - 그런데 그런 게이트들이 이곳에만 열리는 것에 대해서 혹시 아는 바가 없으십니까?

    "내가 뭘 어떻게 알아요."

    뜨끔한 이지혁이 괜히 역정을 냈다.

    사실 초반에는 게이트들이 이지혁을 따라 열린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일정 시점 이후로는 그런 현상들도 없어져서 한동안은 잊고 살았었다.

    '정말 관계가 있나?'

    관계가 있다고 하기에는 모호하고, 그렇다고 관계가 없다고 하기에는 찝찝하고…….

    애매한 뭔가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 정말 모르십니까?

    "모른다니까요!"

    이럴 때는 잡아떼는 게 최고다!

    - 흐음…….

    최정훈은 이지혁의 말을 다 믿지는 않는 눈치지만, 더 물어봤자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돌렸다.

    - 여하튼 알겠습니다. 지금 출동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꼭 내가 가야 되나요?"

    - 꼭은 아닙니다만…….

    "그럼 안 갈래요."

    - 아무리 봐도 다른 요원들을 해결하라고 보내놨다가는 일이 급해지고 나서 긴급 출동해야 할 상황이 100% 벌어질 것 같은데, 괜히 나중에 급해지지 마시고 지금 가서 관광이라도 하면서 기다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말은 항상 그럴싸하게 하네요."

    - 유일한 장기인지라…….

    이지혁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즘 제가 조금 호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꾸 사람들이 제가 뭔가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기 와서 이거 해결해라, 저거 해결해라, 백 사 달라."

    - 결국은 백입니까…….

    이지혁의 심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파악했다. 하지만 뒤끝이 좀 길다는 생각이 드는 최정훈이었다.

    막말로 최정훈에게야 그 돈이 큰돈이지만 이지혁에게는 껌 값 아닌가.

    보통 적당히 살던 사람들이 그만한 돈을 손에 넣으면 아주 졸부 기질이 살아나서 펑펑 쓰고 다닌다는 말도 들었는데, 이 인간은 통장에 돈이 그만큼 있으면서도 왜 이리 좀생이 같이 구는 거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차도 없네?'

    저 나이 대의 남자가 돈이 그만큼 꽂힌다면 일단 늘씬한 스포츠카부터 한 대 뽑고 시작할 텐데… 저 인간, 그러고 보니 아직도 뚜벅이로 살고 있지 않나?

    옷은 만날 퍼런 트레이닝복이나 입고 다니고.

    먹는 건 사내 식당밥에 집에서 차려주는 밥이나 먹고…….

    듣자하니 집에서 귀찮다고 자꾸 라면만 끓여주는 모양이던데, 그것도 좋다고 퍼먹으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 이지혁 씨…….

    "네?"

    - 힘내세요.

    "뭐예요, 뜬금없이."

    - 아뇨. 뭐, 갑자기 눈물이 나서…….

    최정훈은 뒤틀릴 대로 뒤틀려 버린 이 청년의 삶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일단 기본적인 인식을 바꿔야 하는 건데, 세상에서 말 안 들어먹기로는 세계 최고인 인간이 이지혁이다 보니 답도 나오지 않았다.

    - 지금은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럼 뭐가 중요하지?

    - 일단은 대구로 가시죠.

    "같이 가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 당연히 같이 가야죠.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지금 집이시죠?

    "네."

    - 바로 옆 착륙장에 헬기 대기되어 있습니다. 제가 집으로 모시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뭐, 자연히 가는 것처럼 되어버렸는데?"

    - 대구에 마약 옥수수빵이라는 게 그리 기가 막히다는데…….

    "뭔 사람을 못 먹어서 죽은 귀신으로 아나!"

    근데 궁금하긴 하네.

    어차피 갈 것, 적당히 튕길까?

    "알겠어요. 얼른 와요."

    -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걸까?

    이지혁은 전화를 끊고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딱히 생각은 안 했는데, 최정훈은 참 열심히 산다. 하는 노력에 비해 떨어지는 게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어떤 것이 저 사람에게 그런 열정을 가지게 해주는 것일까?

    "나도 그럴 때가 있었나?"

    있기야 했지.

    베라프에 있을 때.

    지구로 돌아오겠다는 목적 하나로 못할 것이 없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기억도 조금은 흐려졌고, 그때의 간절함이라는 게 어떤 감정이었는지 되돌려 볼 엄두도 나지 않지만 말이다.

    "흐음……."

    목적이라는 게 없어진 건가?

    이지혁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찰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응?"

    "오빠……."

    방 안으로 슬글슬금 기어 들어온 이예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왜?"

    이지혁의 대답이 쀼루퉁하다.

    "오빠, 내가 생각이 짧았어. 이 돈이 다 오빠가 힘들게 벌어온 건데……."

    "……."

    뭐지? 이 양심에 찔리는 기분은?

    내게도 아직 양심이라는 게 남아 있었나?

    그 남아 있는 양심도 얼마나 민감하신지 이런 일에도 반응한다는 말인가!

    미안하다, 예원아.

    오라비가 벌어온 그 돈, 거의 다 사기 쳐서 번 돈이다.

    오빠가 목숨 걸고 일했을 때, 받은 돈들은 아직 입금도 되지 않았단다.

    "그, 그렇지."

    하지만 말로는 못하지! 말로는!

    마음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주는 게 어디야!

    "그리 힘들게 번 돈인데 내가 생각 없이 막 쓰자고 했으니 오빠가 화날 만도 하지. 미안해."

    "응?"

    이 기집애가 또 왜 이러지?

    이럴 기집애가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라면 '드디어 동생이 철이 들었구나' 하고 감격의 눈물을 쏟을지 모르겠지만, 핏줄로 이어진 이지혁을 알 수 있었다.

    철이란 건 다른 사람에게 드는 것이지, 절대 이예원에게 드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본으로 택하는 테크 트리지만, 이예원은 그 쪽 테크 트리를 탈 수 없는 클래스였다.

    최대로 잘 타도 된장녀로 살 팔자였고, 까딱 잘못하다간 어마어마한…….

    "오빠!"

    "으응?"

    이예원의 부름에 이지혁은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깼다.

    그래, 뭐, 일단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그래서 뭐?"

    "응, 그래서 말인데……."

    "응?"

    이예원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 좀 싼 걸로 살게. 결재만 해주면 안 돼? 내가 다 고르고, 귀찮게 안 할게."

    "……."

    그럼 그렇지.

    "그래, 그래야 내 동생이지."

    이지혁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순간 애가 개념 있게 나오니까 소름 돋은 거 봐. 아직 팔에 닭살이 채 가시지가 않았네.

    이렇게 나와줘야 이예원이지!

    이지혁은 익숙한 개념 없음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라, 사."

    "정말?"

    "그래."

    이예원이 이지혁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슬슬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빠, 그럼 나 이십만 원짜리 골라도 돼?"

    "이백만 원짜리 사도 된다."

    "그럼 십 만원짜리로 사면 안 될까?"

    "이백만 원짜리 사도 된다니까."

    "…오만 원짜리 백은 없단 말이야."

    "……."

    이지혁의 몸이 부들대기 시작했다.

    "아니! 이년아! 사라고! 이백만 원짜리로 사라고! 사라고 했잖아!"

    이예원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안 사! 안 사! 더러워서 안 산다고!"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이지혁은 벙 쪄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혼자 뇌까렸다.

    "저게 미쳤나?"

    사라고 해도 지랄이야…….

    내가 뭐 잘못했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지혁이었다.

    * * *

    이지혁은 문을 열고 나와 이예원에게 소리쳤다.

    "아니! 사라고! 사라고 했는데 왜 난리야!"

    이예원이 도끼눈을 뜨고는 이지혁을 보며 마주 소리쳤다.

    "오만 원짜리 백이 어딨어!"

    "누가 오만 원짜리 사래! 이백만 원짜리 사라고 했잖아! 왜 부족하냐? 오백만 원짜리로 사 줘?"

    "니가 잘도 이백만 원짜리 사 주겠다!"

    "헐……."

    이지혁은 이예원의 반응에 움찔했다.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사실 그동안 벌어온 것에 비해서 집안에 이바지한 게 딱히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라도 좀 사 줄까 한 건데…….

    "사 줄 수도 있는 거지!"

    "하?"

    이예원이 고개를 삐딱하게 꼬았다.

    저거 참 익숙한 반응이기는 한데, 오늘따라 왜 이리 띠껍게 느껴지지?

    "폰 하나 바꾼다니까 학생한테 최신폰이 왜 필요하냐면서 효도폰이나 사서 쓰라던 사람이?"

    "…틀린 말은 아니지."

    학생이 기능 좋은 폰 있어봐야 공부하는 데 방해되는 것밖에 더 있나! 새 폰으로 바꾸게 해주는 게 어딘데!

    "전부터 폰 바꾸고 싶다고 노래를, 노래를 불렀더니, 기어코 휴대폰이 먹통될 때까지 쓰게 만들던 사람이?"

    "되면 써야지!"

    이지혁은 당당했다.

    그의 논리는 완벽했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럼 왜 다짜고짜 그 비싼 백을 지른 건데! 안 사 줄 거 알면서!"

    "욕 좀 먹어도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 엄마만 아니었으면!"

    "……."

    이 기집애도 보통 인간은 아니야.

    정말이지.

    "솔직히 오빠, 진짜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응?"

    "성격 더러운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이 왜 그리 쪼잔해?"

    쪼잔?

    지금 쪼잔이라고 했나?

    이게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나보고 쪼잔이라고 한 건가?

    이거 왜 이래!

    나는 바다와 같은 이해심을 가진 남자라고!

    "쪼잔이라니!"

    이예원이 특유의 벌레 보는 듯한 시선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와, 기분 더럽네!

    쟤는 저거 하나만으로 정신계 능력자로 인정해 줘야 한다, 진짜!

    수많은 정신 계열 마법과 저주들에 면역과도 같은 방어력을 가진 이지혁의 평정심을 표정 하나로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었다.

    "오빠, 돈 그거 묻어놓고 저승 갈 거야? 있으면 써야 할 거 아냐."

    "아끼면 좋은 거지!"

    "적당한 사람이 아끼면 좋은 건데, 있는 놈이 그리 아끼면 흉한 거야!"

    "으……."

    뭐라 반박할 말이 없다.

    비슷한 케이스를 수도 없이 보면서 왜 저리 사나 했는데,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지 않았는가!

    아니지, 아니지.

    자신은 아끼려고 그런 게 아니다. 딱히 돈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

    "그래서 사 준다니까! 사 준다는데 왜 그러냐! 사 준다고!"

    "이십만 원?"

    "이백만 원짜리 사 준다니까!"

    "겨우?"

    이지혁이 부들부들거렸다.

    이게 간이 처부었나?

    "학생이 이백만 원 넘는 가방이 왜 필요해?"

    "오빠,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응."

    "학생은 이십만 원짜리 가방도 필요 없어."

    "…응?"

    이게 뭔 소린가?

    "아니, 학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백만 원짜리 가방 필요 없어. 가방이 무슨 방탄 기능에 터치 액정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가방이 왜 필요해?"

    아니, 이 기집애가 뭔 말을 하려고 자꾸 바른말을 하는 거지?

    이예원의 입에서 바른말이 나오니 되레 공포스러워지는 이지혁이었다.

    얘는 그냥 개념 없을 때가 정상인 건데.

    "근데 왜 비싼 가방 사는 줄 알아?"

    "왜?"

    "비싸니까."

    "……."

    지금 원인과 결과가 역전된 거 같은데, 내가 잘못 이해했나?

    "비싸니까 사는 거야, 비싸니까! 기능이고, 디자인이고, 개뿔이 다 필요 없고, 그냥 비싸니까 나는 이거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여자라고 폼 재려고 사는 거라고! 알아?"

    "그, 그래?"

    "그래! 비싸서 사는 가방인데 왜 비싼 걸 사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 줄까?"

    할 말이 없겠죠.

    저도 지금 할 말이 없네요.

    "그냥 좀 사 달라고! 나도 잘나고 돈 잘 버는 오빠 둔 덕에 이런 거도 매고 다닌다고 좀 뻐기고 다니고 싶으니까 그냥 동생 목에 깁스 좀 채워준다고 생각하고 사 주면 안 되냐고!"

    "……."

    이지혁은 근 몇 백 년 만에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발상의 전환인가?

    "그래서!"

    이예원이 눈을 희번덕대며 말했다.

    "사 줄 거야, 말 거야!"

    "드, 드리겠습니다."

    "꺄앗!"

    이예원이 이지혁에게 달려들더니 팔을 잡고 늘어졌다.

    "오빠, 최고!"

    "허허허허……."

    뭐지, 이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은?

    분명히 동생이 좋아하고 있는데 왜 내 마음은 천근같이 무거운 것인가.

    "역시 오빠밖에 없다니까!"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이 기집애야.

    오빠밖에 없는 게 아니라 오빠 지갑밖에 없는 거겠지.

    "…근데 이런 건 원래 남자 친구한테 해달라고 하는 거 아니냐?"

    "남친은 안 되지."

    "왜?"

    "오빠 바보구나. 남자 친구는 결혼해서 살지도 모르는데 그럼 그 사람 돈도 내 돈이잖아. 내 돈으로 백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남이 사 줘야지."

    "…아, 그래?"

    이걸 개념이 있다고 해야 할지, 개념이 없다고 해야 할지.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견적이 잡히지 않는 이지혁이었다.

    이지혁이야 베라프에서 그 오랜 세월을 구르다 보니 성격 이상이 온 거라고 치자. 그럼 얘는 대체 이 동네에서 5년 동안 뭘 했기에 사람이 이렇게 된단 말인가!

    처음으로 베라프보다 이곳이 더 사람 살기에 해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이지혁이었다.

    "일단 나는 좀 나갔다 올 테니까……."

    "응. 내가 결제할 테니, 승인번호나 톡으로 보내줘."

    "…얼마짜리 살 건데?"

    "일단 뭐, 500만 원?"

    "좀 올랐다?"

    "좀생이처럼 또 그럴 거야? 이왕 쓰리고 했으면 기분 좋게 써야지! 엄마랑 같은 거 사려다가 참아주는 건데!"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랑 말싸움을 덜 하는 대가로 삼백만 원이면 쌀지도 모르겠다.

    "니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이리된 거, 기분 좋게 쓰게 해주는 게 낫다.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는데 왜 이리 기분이 미묘한 것인가.

    "하……."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더니…….

    RRRR.

    벨이 울리고 이지혁은 전화를 받았다.

    "예."

    - 집 앞입니다. 나오시면 됩니다.

    "예, 지금 나갈게요."

    차라리 일을 하러 가자.

    집에 있는 것보다 몬스터와 싸우는 게 차라리 마음이 좀 더 편하다.

    이지혁은 전화를 끊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비 일하고 올 테니, 알아서 사라."

    "응. 오빠! 돈 많이 벌어와!"

    "…망할."

    이지혁은 축 처진 어깨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 * *

    "무슨 일 있으십니까?"

    최정훈은 풀이 죽은 기색으로 차에 타는 이지혁을 걱정해 주었다.

    "최정훈 씨."

    "네?"

    "…돈이란 무엇일까요?"

    "허허허."

    최정훈은 웃고 말았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있으면 써야 하는 게 또 돈이지요. 벌어놓고 쌓기만 하면 언제 누립니까? 누리려고 모으신 것 아닙니까?"

    "그렇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따져 보면 이지혁의 '이씨 집안 부흥 계획'의 결말도 거의가 벌어놓은 돈으로 가족들을 풍족하게 먹여 살린다는 쪽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돈을 모아서 풍족하게 만드느냐에 대한 고민은 했지만, 풍족이란 무언가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문제였다.

    "차라리 차를 사지!"

    최정훈이 심각한 기색으로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절대 그 말은 하면 안 됩니다."

    "네?"

    "돈이 있다면 보통은 그런 경우 둘 다 하게 되는 법입죠."

    "…제가 큰일을 낼 뻔했네요."

    역시 이 남자는 현명하다!

    믿고 맡길 수 있다!

    그냥 이런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피로 이어진 혈연이라면 더더욱 좋겠지!

    '예원이 씀씀이를 감당할 수 있으려나?'

    어떻게든 돈을 더 잘 벌게 만들어야 불화 없는 가정이 되겠지!

    "…무슨 생각 하십니까?"

    "아니에요."

    최정훈은 갑자기 흐뭇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지혁에게서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뭐지?

    애써 무시하며 차를 몰지만, 자꾸만 옆에서 흐뭇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지혁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최정훈은 등 뒤로 돋는 식은땀을 느끼며 엑셀을 힘주어 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헬기장에 도착한 이지혁이 헬기 앞에 서 있는 정해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넌 또 왜 여기 있어?"

    "마커 다시 찍어야지. 마커만 찍고 올 거야."

    "쯧."

    하기야 정해민의 마커만 좀비 사태 때 올인하지 않았더라면 헬기 같은 건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그런데 정말 제가 가야 할 정도예요?"

    "파견 나가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요."

    "우리가 뭐 용역도 아니고, 남의 나라 일들을 왜 그렇게 해결 못해줘서 안달이래요?"

    "대가는 쏠쏠하게 받고 있습니다."

    "전쟁 나면 쓰지도 못할 돈."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받아놓은 대가들이 언젠가는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 대가라는 것들은 써먹지도 못할 공수표가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마 몇 년만 지나면 게이트가 수시로 열리는 세상이 되어버릴 텐데,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일단은 육성도 중요합니다. 저희가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으니 다른 능력자들이 클 시간도 벌어야죠. 내버려 두다가는 어느 순간 세계에 열리는 게이트들을 막아줄 주변국들이 모두 사라진 후일 겁니다."

    "끄응……."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그것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하는 일도 늘어난다는 것이 짜증날 뿐이지.

    '자꾸 뭔가 기분이 미묘한데?'

    이 불쾌감은 어디서 오는 거지?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나아져야 하는 건데, 자꾸 불쾌감이 증가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 수준이 아닌데 말이야.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지 최정훈이 헬기를 가리켰다.

    "타시죠."

    "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헬기에 올랐다.

    지금은 일단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니까.

    헬기가 이지혁을 태우고는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 * *

    "…뭐야, 이거?"

    천하의 이지혁이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규격 외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갔다.

    그만큼 지금 이지혁의 눈앞에 보이는 게이트는 거대했다.

    게이트 자체가 이지혁도 본 적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든가, 뭐 그런 건 아니었다. 베라프에서 이지혁의 만들어낸 게이트는 이보다 훨씬 더 컸으니까.

    하지만 흐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나름 이 정도씩 커진다는 개념이 어느 정도 잡혀 있었는데, 뜬금없지 지금까지의 과정을 모두 무시하고 족히 두 배는 커져 버린 게이트를 보고 있자니 절로 불안함이 밀려왔다.

    "이제 이런 게 계속 생기는 건가?"

    그렇지는 않겠지?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확실이 이건 자신이 와봐야 할 사태가 맞았다.

    이 게이트에서 어떤 것들이 넘어올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다른 요원들이 방비하다가 감당 못할 것이 넘어오기라도 한다면 이 주변은 순식간에 죽음의 땅이 될 것이다.

    "보고를 받기는 했는데, 눈으로 보니 어마어마하네요."

    "그렇겠죠."

    이지혁이 불쾌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단순한 이레귤러라기에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개입한 것 같은 위화감.

    '뭐지?'

    이지혁이 위화감의 정체를 찾으려 애쓸 무렵,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지혁 씨."

    이지혁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 * *

    "어? 아저씨?"

    이지혁이 최정훈을 '최정훈 씨'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 그가 아저씨라 지칭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요."

    "하하하……."

    군복을 입은 사내가 뒷머리를 긁으며 이지혁 앞에 서더니, 자세를 바로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내는 정인수 대령이었다.

    "얼굴 까먹겠어요."

    "실제로 까먹은 사람도 좀 있을 겁니다. 워낙 오랜만이라……."

    "네?"

    "아뇨, 아뇨."

    정인수는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그런 경례를 아무 사람한테나 해도 되는 거예요? 원래 상관한테만 하는 거 아닌가?"

    "받은 게 있는데 경례 하나 못한다면 그것도 문제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헤?"

    정인수는 아직도 이지혁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겸사겸사 구해준 것뿐인데, 이런 식으로 자꾸 나오니…….

    '사람이 이래야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 인간들은 은혜 입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한다는 개념이 너무 희박했다.

    베라프에서 이지혁이 이 정도로 뛰어다녔다면 지금쯤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자들이 일개 대대는 족히 이루었을 것이다.

    '아, 그거도 아닌가?'

    이종족이면 그럴지 모르겠는데, 인간이면 결국 이지혁을 돕지는 않았겠지. 거의 악마 취급을 받았으니까.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한국에 거의 없었으니까요."

    "네? 국토방위대가 한국에 없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두 사람이 동시에 최정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최정훈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네, 그러시겠죠."

    "말은 잘한다니까."

    "끄응."

    최정훈이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최정훈이 NDF를 해외로 돌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정말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상황이 그리 흘러가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애초에 상황이 이리된 원인은 이지혁 씨 아닙니까!"

    "헐?"

    이지혁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변했다.

    "열심히 일 좀 해달라고 해서 개처럼 뛰어다녔더니, 이제 와서 하는 소리가 나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됐다니? 시키는 대로 다 해줬더니!"

    "아니, 그런 말은 아니구요."

    최정훈이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따지고 보면 이지혁 때문에 상황이 이리된 것은 맞다.

    NDF는 원래 대한민국의 전국에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계획되었던 단체였으니.

    그런데 이지혁이 NDF에 합류하면서 상황이 급변해 버렸다.

    이지혁이 NDF의 레벨을 올렸고, 본인 스스로가 전 세계에 유일한 하나가 되어버려서 활동 영역 자체가 국내에 한정되지 않아버린 게 크다.

    '이게 강제 해외 진출인가?'

    무슨 연예계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그걸 이지혁의 잘못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이지혁이야 최정훈이 구슬리는 대로 열심히 일한 것이 전부니까. 열심히 한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사람하고는."

    정인수가 혀를 차며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이지혁 씨 잘못도 아니지만요."

    정인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자네, 예전에는 좀 뭐랄까……."

    "네?"

    "겸손한 맛이 있었는데, 요즘은 부쩍 어깨에 힘이 들어간 거 같네?"

    "……."

    최정훈은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 정인수가 하는 말이라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정인수야말로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도 부하들에게 공을 돌려 자기 자신은 일선에 남아 여전히 대게이트 전쟁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능력자를 병적으로 싫어하기에 KSF 소속인 최정훈과는 거리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인정하고 존경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소속이 다르다고는 하나 나는 자네보다 연장자 아닌가. 군인으로서 살아온 세월도 내가 더 많을 텐데?"

    "…그렇습니다."

    "그럼 경례는 어디다 팔아먹었나?"

    "……."

    최정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정인수가 먼저 이지혁에게 경례를 했다고 하나 경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최정훈도 정인수에게 경례를 하는 게 맞았다. 아니면 인사라도 하든가.

    하지만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 것이다.

    "글고 보니 내가 처음 봤을 때도 먼저 인사하러 갔던 것 같은데……."

    "아……."

    "햐, 사람 화장실 갈 때랑 나올 때 심정 다르다더니."

    "그럴 때는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저 봐! 저 봐! 한마디도 안 지는 거 보라니까! 대령 아저씨! 저 사람이 요즘 저래요!"

    "자네, 진짜 좀 변했구만."

    "끄응……."

    최정훈은 또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나름 초심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반성해야지.'

    보통 성공 가도를 달리던 사람이 무너지는 이유는 성공과 함께 찾아온 나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초심과 많은 부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보이는 경치가 달라지기에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밖에는 없겠지만,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별것 아닌 말이지만, 뼈아프게 다가온다.

    확실히 이런 부분에서는 상관이라는 존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최정훈도 상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서아영밖에 없고, 그 서아영이 최정훈에게 지적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풀어진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확실히…….'

    최정훈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정인수를 보았다.

    저 실전에 잔뼈가 굵은 야전 군인은 단숨에 최정훈의 변화를 알아챘고, 뼈아픈 소리도 해주었다.

    이런 사람이 상관으로 있다면 최정훈도 일하기가 편해질 텐데.

    하지만 없는 것을 바라서 무엇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참 싹싹했던 사람이었는데, 요즘 보면 사람이 거만해졌어."

    그리고 저런 부하도 없었으면 좋겠다.

    직급은 부하인데 상전인 사람 따위 누가 원하겠는가!

    평사원으로 입사한 사장 아들도 아니고!

    그보다 더해, 그보다! 어휴!

    저 인간은 사장보다 더 무섭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이지혁 중에 누가 더 껄끄럽냐를 묻는다면,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지혁을 택할 테니까.

    그런데 한낱 사장 아들이랑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뭘 그리 봐요?"

    "아뇨."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해 뭣하리.

    말해봐야 소용도 없는 것을.

    최정훈은 이지혁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실수라면 다행이지."

    "…제가 건방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생긴 모양입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마음이란 건 행동으로 나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지.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밖으로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 아니겠어?"

    "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지혁이 둘을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왜 이리 훈훈해?"

    정인수와 최정훈이 어색한 표정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게이트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최정훈이 말을 돌렸다.

    "보다시피 곧 열릴 기세네. 사방을 모두 경화 콘크리트로 도배해 놓기는 했다만, 저 정도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에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종잇장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손 놓고 있기도 뭐하지 않나."

    "그렇지요."

    "미지의 게이트다 보니 대처 방법이 여의치 않아. 그래도 이지혁 씨가 와줬으니 다행이지."

    "으……."

    이지혁은 정인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받고는 뒤로 움찔 물러났다.

    저런 아저씨의 선망이 담긴 시선이라니! 받고 싶지 않다!

    "그러지 않아도 안 오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역시나 위급할 때는 와주시는군요."

    찔린다.

    엄청 찔린다!

    방금 전까지 안 오겠다고 데굴데굴 굴렀던 사실이 너무 찔려서 저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게을렀던 자신을 반성한 이지혁이 헛기침으로 민망함을 감추었다.

    "그래서 언제 열린다구요?"

    "측정기대로라면 이제 두어 시간 남은 것 같습니다만… 요즘 측정기라는 것이 영 믿을 것이 못 되다 보니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러다가도 순간적으로 열려 버리거든요."

    우우우웅!

    이지혁이 게이트가 진동하는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렇게요?"

    "…네, 저렇게요."

    "하……."

    입은 만악의 근원이요, 화의 창이라…….

    괜히 말을 꺼냈다가 게이트가 진동하는 것을 본 정인수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거죠."

    근데 그 배가 좀 크다.

    많이 크다.

    잘못했다가는 떨어진 배에 맞아서 경추가 나가게 생긴 이지혁이 한숨을 쉬고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열릴 게이트, 조금 빠르나 늦으나 달라질 것은 없겠지.

    "문제는 저 게이트에서 뭐가 나오냐는 건데……."

    저 정도 크기의 게이트라면 이론상으로는 드래곤도 오갈 수 있었다.

    게이트의 크기는 단순히 이동 가능한 규모를 의미하지 않는다. 게이트가 클수록 더 많은 마나를 수용할 수 있다. 그러니 저 정도의 게이트라면 웜급 드래곤도 오갈 만한 크기인 것이다.

    '그렇다고 진짜 드래곤이 나오지는 않겠지?'

    아펠드리체도 감당하기 힘든데 다른 드래곤까지 넘어오면 정말 짜증이 제대로 날 것이다.

    더구나 아펠드리체는 정신 나간 드래곤이라 그나마 이지혁과 그리 으르렁대는 사이가 아닌 거지, 다른 드래곤이라면 이지혁과 서로 마주치는 그 순간 마법이 날아들겠지.

    드래곤 족에게 있어도 이지혁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니까.

    그나마 인간들은 세월이 많이 흘렀기에 직접적인 원한은 많이 사라졌겠지만, 드래곤이야 어디 세월이 간다고 잊는 존재들이던가.

    절대의 기억력과 절대 사라지지 않는 원한을 가지고 지금도 이를 갈아 붙이고 있는 드래곤들이 수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베라프에서 오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닐 확률이 높다.

    그럼 드래곤급의 새로운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차라리 더 무섭다.

    드래곤이야 나름의 대처 방안이라도 있는데다가 수틀리면 아펠드리체를 내세워서 어떻게 협상이라도 해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급의 힘을 가진 이지혁이 모르는 생물이라면, 감당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뭐가 나오냐고!"

    게이트가 열린 지 한참이나 됐는데 왜 나오는 게 없지?

    저거 그냥 뻥카인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 보려고 할 무렵, 게이트가 좀 더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응?"

    이제 뭔가 나오려고 하는 거 같은데?

    우우우우웅!

    게이트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게이트가 안에서 튀어 나오려는는 존재의 힘을 감당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대체 뭐가 나오는 거지?"

    이지혁이 그답지 않게 긴장된 눈으로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어?"

    이지혁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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