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2화 (42/118)
  • [■] 왜 한기가 들지? [■]

    ─────

    "으으……."

    게이트에서 나온 이지혁이 몸을 감싸 안고 부르르 떨었다.

    "왜 한기가 들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몸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렇게 한기가 든단 말인가.

    "뭔가 이상이 생긴 건가?"

    이지혁은 자신의 육체를 관조했다.

    "이상은 없는 거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한기가 들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느낌을 받아본 지가 좀 된 거 같은데 말이야.

    마치…….

    "…아니겠지."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절대로!

    "아니야!"

    김다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아니에요?"

    "끙……."

    게이트를 통과하며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김다현은 조금 전처럼 이지혁을 막 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쀼루퉁한 말투는 고쳐지지 않았다.

    저걸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지혁이지만, 지금의 김다현에게는 쓰기가 애매했다.

    '좀 켕긴단 말이지.'

    저지른 건 아펠드리체지만, 그 도마뱀이 누구 때문에 이곳에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이지혁도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끄응……."

    지은 죄만 없으면 저 건방진 주둥아리를 오리주둥이가 될 때까지 후려치고 또 후려칠 텐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건데요?"

    "사무실에 있어."

    "네?"

    김다현이 삐딱한 어조로 물어왔다.

    "애가 다쳤는데 왜 사무실에 있나요!"

    "그리 심한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거, 어차피 의사한테 간다고 고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야."

    "에이 씨!"

    '반박은 못하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를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는 김다현이었다.

    '그냥 팰까?'

    언제부터 내가 잘잘못을 따지고 승질을 부렸다고!

    그냥 눈 딱 감고 후려쳐 버릴까나?

    고민에 빠진 이지혁을 두고 김다현이 성큼성큼 걸어 사무실로 향했다.

    "에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이지혁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 * *

    "다솜아!"

    침대에 누워 있는 김다솜을 본 김다현이 눈물을 뿌리며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반쯤 잠이 들어 있던 김다솜이 눈을 뜨고는 김다현을 바라보았다.

    "오빠?"

    "그래, 다솜아! 오빠다!"

    "지혁이 오빠?"

    "……."

    김다솜의 눈이 김다현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졸지에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김다현이 처량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은 김다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이해한다.

    니 마음 아니까, 울지 마.

    "어."

    이지혁은 어설프게 대답을 했다.

    아프다니까 조금 다정하게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김다현의 눈에서 나온 레이저가 정말로 자신을 태워 버릴 거 같아서 도무지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어쩜 저렇게 원독을 품을 수가 있지?'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받아보았지만, 이런 이유로 저런 원한을 품는 인간을 보는 것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으드득.

    김다현의 이 갈리는 소리를 들은 이지혁이 저 인간의 머리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가를 고민할 때쯤, 아펠드리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충 상황을 들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이지혁의 말을 들은 아펠드리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마나 역류예요."

    "마법을 가르쳤어?"

    "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나도 없는 동네에서 어떻게……."

    "마정석이 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마정석이 있구나.

    마정석 안에서 추출해 낸 마나를 몸에 흘려 넣어 사용하게 하는 방식이라면 이 동네 인간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네.

    "언제부터 가르친 거야?"

    "얼마 안 됐어요."

    "그런데 마나 역류가 일어났다고?"

    "네."

    이지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마나 역류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마법사들만이 겪는 직업병 같은 것이었다.

    육체 안에서 컨트롤하는 데 실패하여 마나가 제 길을 벗어나 튀어버리는 현상을 마나 역류라고 한다.

    이상한 점은 마나 역류 역시 많은 양의 마나를 컨트롤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마법사에게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과 마나 역류가 일어났다는 말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가.

    "어쩌다가?"

    "자세히 말하자면 길어요."

    "으음……."

    이지혁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마법은 왜 가르친 거야?"

    "본인이 배우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왜?"

    "강해지고 싶대요."

    "……."

    이지혁은 이해가 어려웠다.

    왜 평범한 일반인인 그녀가 굳이 마법을 배워가며 강해져야 한단 말인가.

    "흐음……."

    문제의 원인이 아펠드리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지혁이 김다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솜아, 많이 아프지는 않니? 병원에는 가봤어? 의사는 뭐래? 언제 몸이 좋아진대? 안색이 창백한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검사를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면 오빠가 지금 가서 의사 하나 잡아올까?"

    "오빠."

    "응?"

    "정신 사나우니까 좀 나가 있어."

    "……."

    "얼른."

    "으응."

    꼬리 말린 개처럼 시무룩해진 김다현이 밖으로 쭐레쭐레 걸어 나갔다.

    "으흡……."

    뭔가 울음을 참는 소리까지 나자 이지혁이 안됐다는 눈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답도 없는 놈.'

    처음에는 폭력적인 동생을 같이 두었다는 동질감이 있었는데, 겪어보니 저 인간은 좀 더 맞아야 한다.

    되레 저런 오빠를 둔 김다솜이 불쌍했다.

    이지혁이 김다솜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왜 헛짓거리를 하고 그래?"

    김다솜은 대답 없이 살짝 이지혁의 시선을 피했다.

    "왜? 주변에는 다 능력잔데 너 혼자 일반인이라서 소외감이라도 느꼈어?"

    "아니요."

    "그런데 왜 그래?"

    "……."

    이지혁은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그놈의 능력자니 마법사니, 그거 좋아서 된 사람이 누가 있는 거 같아?"

    "네?"

    "사람은 자신다울 때가 가장 좋은 거야. TV에 능력자 놈들이 나와서 설쳐 대니까 무작정 좋아 보이지?"

    "……."

    "평범한 게 좋은 거야, 평범한 게."

    이지혁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본 김다솜이 가만히 손을 뻗어서 이지혁의 손을 잡았다.

    "음?"

    "…죄송해요."

    "뭐가?"

    "걱정 끼쳐서."

    "하?"

    걱정이라니.

    내가 왜 널 걱정해?

    내 인생 걱정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구만, 남 일을 어떻게 걱정한다고.

    이지혁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굳이 김다솜의 손을 뿌리쳐 내지는 않았다.

    환자니까.

    지금은 아프니까 조금은 다정하게 대해줘야지.

    "오버하지 마."

    "네."

    "그놈의 마법은 계속 배울 거야?"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니 인생이니 니가 알아서 할 일이지."

    사실 자신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아펠드리체와 김다솜 사이의 일이니, 자신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마법을 배운다는 것은 전장에서 살겠다는 말과 같다.

    지금 당장은 능력이 없다는 것에서 안타까움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피와 살이 튀는 걸 보게 되면 그런 생각은 싹 가실 것이다.

    좋아서 싸우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음대로 해라."

    이지혁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펠드리체가 김다솜에게 수면 마법을 걸어 재우고는 이지혁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뭔 짓을 하는 거야?"

    아펠드리체는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기에 가르쳐 줬을 뿐이에요."

    "그런데 마나 역류까지 일어났다고?"

    "…재능이 있어요."

    "뭐?"

    아펠드리체는 문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능이 있다구요. 이 세계 사람들이 마법을 배우면 다 이런가 싶을 정도로, 기하급수적으로 실력이 늘어요."

    "흠……."

    "재능만 따진다면 지혁 씨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좀 더 좀 더 하다 보니 한계를 넘어버린 거죠."

    "드래곤인데 그런 이성적인 판단도 못하나? 진짜 미쳐서 그런 거야?"

    "마나 역류가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마나 역류가 아니라 과도하게 늘어난 마나를 육체가 감당하지 못한 거니까요."

    "결론이 뭐야?"

    "천성적인 마법사예요.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어요."

    "하?"

    이지혁이 아펠드리체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도마뱀."

    "……."

    "그래서 그 천성적인 마법사가 지금 우리에게 전력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생각해 봤어?"

    "조금 걸리겠죠."

    "나만 한 재능? 나도 이렇게 되기까지 천 년이 더 걸렸어. 아무리 천재라도 실전에 투입하기까지 십 년은 더 걸린다. 드래곤의 개념으로 생각해서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모양인데, 객관적으로 보면 이 세계가 십 년은 더 버틸 수 있는지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야. 지금부터 가르쳐서 뭘 어쩌겠다는거야?"

    "일리가 있네요."

    "하……."

    이지혁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마. 내 주변을 더 이상 뒤흔들지 마.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참아주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아펠드리체가 의외라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네요."

    "뭐가."

    "당신에게도 주변이라는 개념이 있었나요?"

    "……."

    "나와 내가 아닌 자로 세상을 구분하던 당신이잖아요. 저 작은 아이에게 정이라도 느끼는 건가요?"

    "그럴 리가."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상관없잖아요."

    "이봐, 도마뱀."

    "네."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는 존재야.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

    "인간의 사회적 개념은 어쩌면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 사회적 개념에서 벗어나 있던 게 지혁 씨 아니었나요?"

    "벗어난 게 아냐."

    떨어져 있던 거지.

    이 빌어먹을 도마뱀아.

    베라프의 인간들은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안에서는 인간도 아니었다고.

    "머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법이지."

    아펠드리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당신과 대화하고 있으면 혼란스러워요."

    "다행이네.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거든."

    혼란스럽다.

    이지혁 역시 말을 하면서도 내면의 모순을 느끼는 중이었으니까.

    김다솜이 마법을 배우겠다고 나선 것도, 아펠드리체가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친 것도 사실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조금 다쳤다고 한들 그건 김다솜이 책임질 일일 뿐이다.

    그런데 왜 짜증이 나는 걸까?

    머리로는 짜증을 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자꾸 짜증이 난다.

    '오늘 영 기분이 별론데…….'

    기분이 좋지 않아서 짜증이 나는 건지, 짜증이 나서 기분이 좋지 않은 건지를 따질 만큼 머리가 맑지 못하다.

    불만스러운 기분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할 때,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네."

    - 이지혁 씨, 최정훈입니다.

    "저도 눈 있어요. 말씀하세요."

    - 미국에서 능력자들이 도착했습니다.

    "…그거 잘됐네요."

    마침 할 일이 필요했거든.

    이지혁의 얼굴에서 짜증이 사라지고 장난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많이도 모아왔군."

    아르고라스는 알파가 내민 구슬을 받아 들었다.

    검은색을 넘어 빨려 들어갈 듯 짙은 어둠을 내뿜는 구슬을 보니, 그의 영혼도 같이 뛰는 느낌이었다.

    마이너스의 정화가 가득 담긴 아티팩트.

    "그래서 이걸로는 뭘 할 생각이지? 또 그놈의 게이트인가?"

    "그렇다."

    "그 마왕이라는 놈으로는 이지혁 하나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된 것 아닌가?"

    "상황을 지켜봤으면서도 다른 소리를 하는군. 인간은 이상하게 비꼬는 것으로 자신의 기분을 풀려는 성향이 있어."

    "흠……."

    알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르고라스를 노려보았다.

    "마왕이라고 다 같은 마왕이 아니라는 것은 몇 번이나 설명했을 텐데?"

    "그렇지."

    알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다.

    그리고 일전에 지구로 온 놈은 마왕 중에서도 서열이 낮은 존재였다는 것도 이미 들었다.

    그 서열이 낮은 마왕이 미국을 초토화시키고 이지혁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다.

    결국은 이지혁 등이 이기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개입이 없었다면 죽은 것은 이지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상급의 마왕이 온다는 것인가?"

    "그렇다."

    "흐음……."

    알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말하는 마계에서 생각보다 지구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마왕들은 엉덩이가 무겁다고 하더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빨빨거리며 잘도 와대지 않아?"

    "그딴 말로 나를 화나게 해서 네가 무얼 얻는지 모르겠군. 그런 유치한 도발은 먹히지 않으니 그만두지."

    "재미없는 놈."

    알파는 가만히 아르고라스를 바라보았다.

    악마.

    알파로서는 이들에게 협조하는 일을 통해 얻을 것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 생각도 조금씩 무뎌져 갔다.

    그들이 약속했던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 네가 말한 보상이란 것을 난 언제쯤 받아볼 수 있는 거지?"

    "이제 곧이다."

    "그 말만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르겠군. 네 말대로라면 악마들은 계약에 대해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던데 말이야. 하기야 악마 놈들이 진실을 이야기할 리는 없으니, 내가 멍청하게 속은 건가?"

    "…네놈."

    아르고라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악마의 계약은 신성하다.

    계약은 악마의 근원이다.

    계약의 진정성을 의심 받는 것은 악마에게 있어서 커다란 모욕이었다.

    "지금이라도 네게 약속했던 것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네가 모아온 것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이것으로 게이트를 연다면, 너는 네가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지."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따라줄 뿐이지."

    "흐으음……."

    알파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뭐, 좋아. 열어봐라, 그 게이트."

    "나를 신뢰하는 건가?"

    "너를?"

    알파는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인간이 악마를 신뢰하다니, 그것참 우스운 일이로군. 미안하다. 생각해 보면 니가 이 세계에 있는 것이 내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랑 그리 다를 것도 없는데……. 지금쯤이면 니가 좀 미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했지."

    "응?"

    "이지혁이라는 인간의 입이 잠시도 쉬지 않는 걸 보고 인간이란 참 수다스러운 존재가 아닌가 했다. 하지만 개인의 특성이라는 게 있기에 일반화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네놈을 보니 이 세계의 인간은 수다스럽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군."

    "큭큭큭."

    알파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다가 말했다.

    "좋아. 뭐, 지금까지 내가 네게 해준 것은 큰 부분이 아니니까. 그 구슬을 들고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간 곳을 오가는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일이지. 이번 사태 덕분에 워낙 갈 곳이 많기도 했고."

    "쉽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할 뿐."

    "그래. 그러니 이번에는 게이트를 여는 걸로 하지. 지금 당장 보상을 받아도 좋겠지만, 사실 나도 게이트를 열어 이번에는 어떤 마왕이 나오는지 보고 싶거든."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해야 할지,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후회?"

    "그래, 후회다. 이번에 오실 분께서는 저번의 그분처럼 온화하신 분이 아니거든."

    "온화해?"

    그 도마뱀 같은 괴물이 온화하다고?

    마계라는 곳에는 다 정신 나간 것들만 사는 건가?

    어떻게 온화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는 거지?

    "…기대되는군."

    알파는 킥킥, 웃다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아르고라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에 든 아티팩트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짧은 여유를 즐겨라."

    알파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돕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계약을 믿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알파가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준다 해도 이 세상 자체가 마계로 떨어지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인간의 한계인가."

    아르고라스는 알파에게서 관심을 돌려 게이트를 여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델카란.

    그분이 온다.

    그분이 오면 이 세계는 진정한 마왕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경배하게 될 것이다.

    * * *

    "재미있어."

    알파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언제까지 저 괴상한 것들의 말을 들어주실 생각이십니까?"

    "재미있잖아?"

    알파는 환하게 웃었다.

    "인간과 인간의 싸움은 슬픈 일이지. 그래서 웬만하면 인간끼리 싸우는 경우는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라면 믿어주겠어?"

    "아니요."

    "아쉽군, 아쉬워."

    알파는 말은 아쉽다고 하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굳이 저들을 도우시는 이유가 뭡니까?"

    "재밌어서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진짜 이유가 궁금해서 그러는 겁니다."

    "흠……."

    알파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는 그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사내가 서 있었다.

    "비토."

    "네."

    "자꾸 그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재미가 없다니까."

    "죄송합니다."

    "으음, 안 맞아."

    알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입을 열었다.

    "좀 더 많은 혼란이 필요해."

    "혼란 말입니까?"

    "그래. 인간의 손으로 벌어지는 혼란이 아니라 몬스터를 통해 벌어지는 혼란이 필요하다."

    비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모순을 깨달아야 하는 시점이지."

    "모순."

    "몬스터를 통해 희생자가 늘어날수록 느끼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지금 희생을 바탕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면 누군가 튀어 오르겠지. 더 이상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될 거다."

    "…어렵군요."

    "어렵지 않은데 말이지."

    알파는 쿡쿡, 웃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 구경하자고, 저 악마란 것들과 인류의 수호신이 얼마나 잘 치고받고 싸우는지."

    "이지혁 말입니까?"

    "그래, 그 사람이다."

    "그 사람에 대한 회유는 포기하신 겁니까?"

    "회유는 포기했지."

    알파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왜 그를 회유할 수 없는지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 하면 반대로 튀어버리는 사람이니, 회유가 가능할 리가 없다.

    아무리 머리를 써서 붙들려고 해도 원하는 대로는 절대 움직여 주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

    그럼 다른 이들이 그를 건드리다가 피를 볼 테니까.

    알파는 그걸 즐기면 된다.

    "아직은 모르지. 적이 될지, 친구가 될지… 조금은 더 지켜보자고."

    "알겠습니다."

    알파는 비토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지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낡은 철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짜증난다.

    어두컴컴한 공간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는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니까.

    '조급할 필요는 없어.'

    언젠가는 그가 원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 웃기는 오월동주를 계속해야겠지.

    * * *

    "여기가 대한민국인가?"

    스테판 보쉬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는 것으로 불쾌감을 표현했다.

    "그렇겠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군."

    우선 이 추위부터 짜증이 났다. 캘리포니아 태생인 그는 추운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런 곳으로 제 발로 찾아온 게 아니라 반쯤 떠밀려 왔다면 더더욱 좋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망할 맥클라렌."

    이 작은 나라에 와서 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능력을 키우라고?

    능력자의 능력이 키우고 싶다고 키워지는 거라면 지금까지는 왜 그런 짓을 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드세게 반발을 해봤지만, NDF의 능력자들을 니 눈으로 보지 않았냐는 말에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눈이 있으니까.

    그 망할 데몬 놈을 상대했을 때나 이번에 좀비가 들끓었을 때, 그걸 해결한 존재는 자랑스러운 미국의 능력자들이 아니라 한국 놈들이었다.

    그 사실이 스테판의 자존심을 짓뭉개고 있었다.

    "빌어먹을."

    "너무 열 내지 말라고."

    "열 안 내게 생겼어?"

    동방의 소국 놈들에게 밀리는 것도 짜증이 나는 일인데, 이제 그놈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가르쳐 달라고 해야 한다니.

    이게 무슨 기술 이전도 아니고, 뭐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아니, 기술 이전이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건 주고받는 거니까.

    미국이라는 강대한 나라의 수호를 받던 그들이 언제 타국의 인물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는 처지가 되어보았겠는가.

    "원숭이 놈들이."

    "스테판!"

    "…미안해. 내가 흥분했어."

    "한 번만 더 인종차별 비슷한 소리를 지껄였다가는 네놈을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버릴 거야."

    "쯧."

    스테판 보쉬는 짜증 어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의 친구는 흑인이다 보니 인종차별에 민감했다. 보통 흑인들도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조롱에는 같이 낄낄대는 경우가 많은데, 이놈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결벽증이 있어 보일 지경이었다.

    '화도 마음대로 못 내겠군.'

    짜증이 자꾸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언제 오는 거야?"

    1차로 대한민국에서 연수 아닌 연수를 받기로 한 이들은 모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을 맞이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은 합류지로 정한 군부대의 연병장에 덩그러니 서 있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겠지."

    그의 친구인 워디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길."

    이곳까지 온 것도 짜증이 나는데, 지각하는 놈들을 기다려야 하다니.

    한 번 짜증이 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다 눈에 거슬렸다.

    이 추운 날씨도, 추운 주제에 느껴지는 습기도, 그리고 좁아 터진 연병장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다."

    다행히 짜증이 더 몸집을 키우기 전에 NDF들이 도착했다.

    스테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세 명.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서아영.'

    여자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구급 능력자라는 평가를 받는 여자.

    플레임 위치. 서아영.

    그리고 저 잘생긴 남자는 부관인 최정훈이겠지.

    어차피 이곳에 오면서 중요 인물들에 대한 숙지는 기본으로 했다.

    그러니 알아볼 수 있었다.

    가운데서 걸어오는, 저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의 주인공이 바로 이지혁이다.

    이지혁과 스테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 *

    스테판은 이게 기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는 초반이 중요하다. 초반에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호구 잡힐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자신을 어렵게 대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지혁이라는 인간을 그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사람 몇 정도 고문해서 죽이는 것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손짓만으로 결정해 버릴 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 이지혁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식은땀을 흘렸다.

    애초에 자신와는 격이 다르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그의 입장에서는 저승사자처럼 느껴지는 크리스토퍼가 이지혁 앞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비굴해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인간이 그리 군다는 것은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스테판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임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스테판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물러서게 되면 그는 크리스토퍼급도 되지 못한다.

    차후 이지혁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이었다.

    다행이라면 그에게는 비빌 언덕이 있다는 점이었다.

    우선 지금 그에게 힘이 되어줄 300의 동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지혁은 단 두 명만을 동행하여 그들 앞에 나타난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그중 한 명은 일반인.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이지혁이라도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교육이란 명목으로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데, 지금 재대로 포지션을 잡아놓지 못한다면 굴욕을 얼마나 겪어야 할지 뻔하지 않은가.

    스테판은 두근대는 가슴을 살며시 짓누르며 이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열이 받을 테지.

    본인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놈이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 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화를 내라.

    열을 내라.

    그러면 내가 이기는 거다.

    별것도 아닌 일에 나를 핍박한다면, 내 동료들도 부당함에 불만을 품을 테니까.

    스테판은 눈을 부릅뜨는 한편,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상대가 이지혁이라는 것이었다.

    * * *

    '오늘 점심은 뭐 먹지?'

    이지혁의 고민은 심각했다.

    간만에 그 삭막한 능력자 거주구에서 빠져나왔으니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정훈 씨."

    "네, 말씀하십시오."

    "이 동네에 뭐가 유명해요?"

    "네?"

    유명하다니?

    "뭐가 유명한지를 물으시는 겁니까? 특산물?"

    "아뇨, 맛집요."

    "아……."

    최정훈은 새삼 놀라지 않았다.

    이지혁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오늘은 좀 특이한 방향으로 뻗어가기는 했지만, 진행하고 있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 관심을 두는 것이야 흔한 일이었다.

    "글쎄요. 제가 그런 건 잘……."

    "부대찌개."

    대답은 반대쪽에서 나왔다.

    "……."

    최정훈이 빤히 서아영을 바라보자 그녀는 정면을 주시한 채 말했다.

    "부대찌개 유명해요."

    "오!"

    이지혁이 반색했다.

    한국 놈은 한식을 먹어야지.

    부대찌개라…….

    "그런데 그 부대찌개라는 게 미군 부대 때문에 나온 음식 아닌가요?"

    "그렇다고 들었죠."

    "미국 놈들 앞에 두고 부대찌개 이야기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한데……."

    "듣고 보니 그렇네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들린다고 하더라도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귀를 기울여 볼 만큼 지금 스테판은 그들이 하는 말이 궁금했다.

    '대책을 논의하는 건가?'

    표정 등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보아 그럴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럼 그렇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사람 같지 않다고 해도 자신들은 미국에서 온 능력자들이다.

    손대기는 껄끄럽겠지.

    크리스토퍼 맥클라렌도 이지혁에게 딱히 깍듯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강경하게.'

    맥클라렌은 이지혁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자신이 이지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

    "어느 집이 맛있대?"

    "검색해 볼까요?"

    "…아니, 아직 점심시간 되려면 멀었는데 뭘 그리 급하게 검색까지 하고 그럽니까! 부장님!"

    "아뇨. 저는 뭐, 이지혁 씨가 궁금하시다니까."

    "제일 신나신 게 지금 부장님 같습니다만!"

    "아니에요."

    서아영이 시치미를 뚝 뗐다.

    "어휴."

    얘는 대체 언제 철이 드나.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지가 5년인데, 아직까지 저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왜? 볼 수도 있죠."

    "……."

    이지혁의 추임새에 최정훈은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신이 있다면 이러면 안 된다.

    누가 그랬던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뒤따른다고.

    그런 점에서 이 인간에게 큰 힘이 주어진 건 진짜 실수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말고!

    "차라리 나에게 주지."

    "네?"

    최정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300명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일단 그 일부터 어떻게 처리를 하죠. 그 뒤에 맛집을 찾아보든 미국으로 밥 먹으러 가든 편한 대로 하시구요."

    "그러죠."

    서아영이 깔끔하게 대답을 해버리자 이지혁은 뭔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이지혁이 엎자고 한 걸 저 최정훈이라는 사람이 말리는 건가?'

    아무래도 상황이 그렇게 흐르는 것 같은데?

    스테판이 긴장된 눈으로 마지막 스퍼트를 올릴 때, 이지혁이 드디어 스테판을 발견했다.

    "쟤, 야리는데?"

    "누가요?"

    "쟤."

    이지혁이 턱짓을 하자 최정훈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스테판을 발견했다.

    이건 명백하게 시비를 거는 눈이었다.

    "죽이지는 않으실 거죠?"

    "아니, 누굴 살인마로 아나! 조금 야린다고 죽이게? 내가 무슨 고딩이에요!"

    맞긴 하지만.

    살인마인 것도 맞고, 고졸이 아니니 고딩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건 아니겠…….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고딩은 무슨!

    "근데 왜 야리지?"

    이지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스테판을 바라보았다.

    "내가 미국에서 죄지은 거 있나?"

    "…없죠?"

    이지혁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일반인의 기준으로 봐도 이지혁이 미국에서 잘못한 것은 없었다.

    한국에서라면야 좀 나오겠지만…….

    아니, 솔직히 많이 나오겠지만, 미국에서 이지혁은 나라를 구해준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저런 적대감을 보인단 말인가.

    "이지혁 씨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요?"

    "어, 그런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죠."

    덤덤한 이지혁의 반응에 최정훈이 넌지시 물어왔다.

    "화 안 나세요?"

    "내가 왜요?"

    "아니, 저리 적대감을 보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이상하다?

    이럴 인간이 아닌데?

    "그러다 혼자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죽어라고 팰 생각이시죠? 솔직하게 말합시다. 차라리 사람 있는 데서 패세요."

    "헐……."

    "있는 데서 패면 그래도 죽이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아니, 진짜 사람을 무슨 백정으로 아나!"

    이지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보다 어이없는 것은 이 정도로 자신이 기분 나빠 할 거라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내가 이런 걸 한두 번 보는 줄 아나?'

    천 년 봤다, 이 양반아.

    베라프에서는 자신을 사람으로 봐주는 시선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차라리 이종족들은 '아, 저거, 좀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구나'라는 시선으로 봐주기라도 했지.

    같은 인간들이 되레 이지혁을 더 괴물같이 봤다.

    적의?

    그런 건 기본이지.

    멸시와 공포가 어린 시선이 쏘아지는 기분을 지구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거다.

    그런 이지혁에게 저런 눈빛 따위는 말 그대로 어린애가 앙탈 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귀엽게 봐준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신경도 쓰이지 않는 수준이란 거다.

    "정말 화나신 거 아니죠?"

    "화 좀 내볼까요? 진짜?"

    "죄송합니다."

    최정훈이 급히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제 이 사람들 어쩌실 겁니까?"

    "왜 그걸 나한테 물어요."

    "…예?"

    "교육 받아온 건 최정훈 씨잖아요. 무슨 생각이 있어서 받아오신 거 아닌가요?"

    "제가 이지혁 씨한테 의뢰가 되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했죠."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이지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 그럼 재수 학원 원장 보고 학원에 등록하면 원장이 가르치나?"

    "그건 아니죠."

    "나한테 300명을 맡기면 그걸 나 혼자 다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아니죠."

    이지혁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받아먹기는 자기가 다 받아먹고, 가르치긴 나보고 가르치라고 하고! 와, 사람 하는 짓 보소! 사기꾼 클라스 지리구요."

    "받아먹은 거 없습니다!"

    이지혁이 가만히 최정훈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십 원짜리 하나 나오면 옷 다 벗겨서 광화문 광장에 거꾸로 매달아놓을 겁니다?"

    "…조금 받았습니다."

    "크……."

    이지혁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다.

    훌륭한 정치인의 새싹이 이곳에서 자라나고 있구나.

    말쑥하게 생겨서 말 잘하고, 사람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있는데다가 뒷돈도 잘 받지.

    "대통령감이네."

    "하하, 뭐, 그런 칭찬까지."

    "욕이거든요?"

    "……."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자신이 손을 대야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손을 적게 대느냐였다.

    이지혁은 통역 마법을 걸고 입을 열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대답은 없었다.

    "들리세요?"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어? 안 들리는 모양이네?"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거, 크리스토펀가 뭔가 하는 양반한테 전화 좀 해봐요."

    "네?"

    "별수 없잖아요."

    이 인간,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평소라면 말렸겠지만, 은근 최정훈도 이지혁이 무슨 일을 벌일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최정훈이 크리스토퍼의 번호를 누르고 이지혁에게 전화를 건넸다.

    - 무슨 일인가, 미스터 최.

    "전데요."

    - 이, 이지혁 씨!

    "문제가 있어요."

    - 뭐가 문제십니까?

    "얘들이 제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요."

    - 통역이 없나요? 통역을 지참해서 보낼 것을 제가 실수했습니다. 지금 당장 파견하겠습니다.

    "아니, 통역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 지금 대화하고 있잖아요. 그죠?"

    - 아…….

    이지혁이 별것 아니라는 어투로 말했다.

    "뭐, 말이 통해야 가르쳐 보든 말든 하죠."

    - 그 미친놈들이! 제가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아뇨. 뭐, 그러실 것 없구요. 그냥 반품할게요."

    - 반품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반품해야죠. 얘들 다 반품할 테니까. 다른 물건들로 보내시구요. 리퍼 제품은 안 받으니까 고쳐서 보내지 마세요."

    - 하, 하지만 이지혁 씨!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 문제는 제가 하루 내로 반드시 해결해 놓겠습니다. 아니, 제가 지금 당장 거기로 가겠습니다.

    "아저씨."

    - 네, 말씀하십시오.

    "배달 온 물건에 하자가 있는데 얌전히 반품하고 다음 물건 받아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죠. 안 그래요?"

    - 그렇습니다.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니까 그쯤하자구요. 괜히 귀찮게 굴지 말구요."

    - 알겠습니다.

    이지혁이 전화를 끊고는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이제 부대찌개 먹으러 가도 되죠?"

    니 맘대로 하세요.

    최정훈은 전화기를 받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걸 통쾌하다고 해야 할지, 대책 없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자신의 기분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최정훈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이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 *

    "이 미친놈아!"

    스테판은 쏟아지는 욕설에도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말을 했는데도 책임자라고 앉혀놓은 놈이 상황을 풀지는 못할망정 주도를 해서 구렁텅이로 몰고 가?"

    "그런 게 아니라……."

    "그 주둥아리를 놀릴 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니 주둥아리로 박힌 총알이 경추에서 멈출지, 아니면 뚫고 나오게 될지를 확인하게 될 테니까!"

    "……."

    스테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친놈.'

    이지혁의 사고방식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제정신인 놈이라면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상식? 상식이라고?"

    크리스토퍼가 재떨이를 잡아 스테판에게 집어 던졌다.

    일반인이 던진 재떨이가 능력자에게 뭘 얼마나 위협적이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스테판은 자기가 보기에 슬로우모션이나 다름없이 날아오는 재떨이를 보며 이걸 피해야 할지 맞아주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웬만하면 아프지도 않을 테니 맞아주고 싶지만, 재떨이 안에 가득 담긴 시가 재들을 보니 영 맞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슬쩍 몸을 돌려 재떨이를 피한 스테판이 크리스토퍼의 눈치를 살폈다.

    "끄응……."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스테판이 재떨이를 맞았는가, 맞지 않았는가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거칠게 시가 끝을 잘라내고 불을 붙인 크리스토퍼가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지?"

    2진이 투입되는 것은 적어도 한 달은 지난 다음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시가 아까워 재빠르게 2진을 구성하고는 있지만, 작정하고 골라서 보낸 1진에 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 대체 왜 그랬나! 왜!"

    "기 싸움을 하려 했던 것뿐입니다."

    "사람이 사자와 기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나!"

    "하지만 우리는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국력의 차이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도 왜 국장님께서 무작정 숙이라고 하시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 가?"

    "그가 강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미국보다 강하지는 않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크리스토퍼는 아무 말 없이 스테판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예?"

    "자네가 미국인가?"

    "……."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 네 일처럼 국가에 봉사할 때는 말이야. 하지만 네가 저지른 일을 국가가 모두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가면 갈수록 낮게 가라앉아 갔다.

    "이번에 자네는 선을 넘었어."

    "국장님!"

    "리더 격인 자네가 그렇게 대놓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는데 긍정적으로 이지혁 씨에게 배우겠다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에는 자네의 그 독단적인 행동 덕분에 300이나 되는 능력자들이 자신을 더 발전시킬 기회를 잃었어.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저는 그저……."

    크리스토퍼의 눈이 살기마저 띠기 시작했다.

    "잘못의 반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나는 적어도 자네가 머리 좀 돌아가는 인간일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니었어.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내가 잘못한 거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요즘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군. 자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걸 보니 말이야."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이지만, 내용은 그저 스테판을 탓하는 것일 뿐이었다.

    "국장님, 저는 억울합니다."

    "억울하겠지. 이상한 일이야. 이 방에서 나와 이런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꼭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하더군."

    '마지막으로!'

    스테판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앞으로 다시는 둘이 마주할 일이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예전처럼 비위를 거스른다고 사람을 잡아가서 죽이지야 않겠지만, 앞으로 다시는 능력자로서 이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뜻이리라.

    "마, 만회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자네는 만회가 아니라 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지를 고민하는 게 좋을 거야. 군사재판에 넘기고 싶지만 그럼 일이 복잡해지니, 일단은 영창에 들어가 있게. 처우는 그다음에 결정하지."

    "국장님!"

    "그만. 연행해 가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스테판의 양팔을 붙들었다.

    "국장님! 국장님, 저는!"

    "상투적인 시퀸스는 빼자고. 깔끔한 게 좋아, 깔끔한 게."

    크리스토퍼는 그 말을 끝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고, 스테판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다가 끌려 나갔다.

    "망할."

    성질 같아서는 당장 그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 넣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이 무슨 70년대도 아니고, 그런 짓을 했다가는 크리스토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대체 얼마나 피해가 커진 거지?"

    가늠조차 잘되지 않았다.

    우선 가장 큰 피해는 300명에 달하는 능력자들이 능력을 업그레이드시킬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이지혁만 있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은근슬쩍 끼워 넣거나 해서 수습해 볼 만하겠지만 최정훈도 함께 있은 이상 그런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제길."

    그럼 결국 그 300명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밀어 넣지는 않았지만, 나름 우수하다는 이들을 많이 섞은 조라 그런지 속이 더욱 쓰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이지혁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였다.

    사정사정해서 겨우 교육해 주겠다는 답을 받았는데 첫날부터 트러블이 생겼으니, 이제 교육을 하지 않겠다고 나온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른 애들을 보내라는 말을 했으니 아주 손을 떼지야 않겠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 그런가.

    "끄응……."

    크리스토퍼는 재떨이를 찾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책상에 비벼 꺼버렸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든 수습은 해야지.

    지금쯤이면 이지혁의 기분이 조금은 풀렸을까?

    "으음……."

    크리스토퍼는 F가 나온 성적표를 들고 부모를 만나러 가는 심정으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지혁은 뭘 하고 있을까?

    한국 시간은 지금 몇 시지?

    전화를 해도 괜찮을까?

    일단은 최정훈에게 전화를 해보는 게 맞을까?

    "진짜 죽겠군."

    냉전시대에도 이렇게까지 눈치를 보고 살지는 않았는데, 사람 하나 때문에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차라리 그 시절이 나았지."

    새삼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는 크리스토퍼였다.

    * * *

    그 시각, 이지혁은 매우 노곤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요?"

    "…스케줄이 공식적으로 취소된 것이니 할 일이 없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건 좀 그렇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서아영과 최정훈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뭐, 이게 싫은 건 아니다.

    사실 좋다. 아주 좋다.

    문제는 지금이 근무시간이라는 것이고, 잠시 짬을 내서 즐기기에는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너무 대놓고 노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어디냐고?

    "아, 역시 휴양은 여기가 짱이야."

    이지혁이 기지개를 쭈욱 켰다.

    남국의 태양이 내리쬔다.

    "크으……."

    수영복만 입고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이지혁이 볼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어?"

    김다솜이 주스를 들고 이지혁의 볼에 대고 있었다.

    "살 만한가 보지?"

    "이제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이지혁은 별말 없이 그녀가 내미는 주스를 받아 들고는 쭈욱 마셨다.

    "카아!"

    이게 파라다이스지.

    사람은 이래서 즐기고 살아야 한다니까.

    그 우중충한 도시에서 매일매일 어떻게 사는가.

    "미친 도마뱀 같으니."

    아펠드리체는 게임을 하겠다며 사무실에 남았다.

    최정훈이 차라리 집에 가서 하시라고 사정사정을 했지만, PC의 사양과 마우스 감도를 이유로 정중히 사양한 아펠드리체였다.

    "아우, 좋다."

    정해민도 수영복을 입고 이지혁의 옆에서 일광욕 중이었다.

    "역시 겨울에 오는 여름이 최고라니까."

    왠지 말이 안 되는 듯 되었다.

    원래 겨울에는 남국으로 해수욕을 떠나는 게 최고고, 여름에는 윗동네에 스키 타러 가는 게 최고의 여행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커는 찍었어?"

    "응, 찍어뒀어. 근데 너 진짜 음흉하다. 너도 올 수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날 부려 먹어 댄 거야?"

    "부려 먹은 게 아니라 효율을 중시한 거다."

    "웃겨."

    이지혁은 혀를 찼다.

    "네가 뭘 알겠냐."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효율 때문인 점이 컸다. 게이트는 한 번 여는 데 막대한 마나가 들어갔다.

    에테르로 치환하자면, 이곳으로 오는 게이트 하나를 여는 데 드는 마나는 정해민이 하루 종일 텔레포트하는 데 사용하는 에테르의 양과 비슷할 것이다.

    둘의 종류가 달라서 정확하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뭐, 이번엔 데리고 와줬으니 봐줄게."

    정해민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갸르릉댔다.

    그 모습을 보며 이지혁이 피식 웃자 정해민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또 왜 비웃는데!"

    "누워, 누워. 시끄럽다. 누워서 지지기나 해."

    "쳇."

    정해민이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김다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촤앗.

    이지혁의 머리맡에 커다란 파라솔이 세워졌다.

    "응?"

    일광욕하는데 웬 파라솔?

    "자외선은 안 좋아요. 얼굴 쪽은 피하시는 게 좋아요."

    "아, 그래?"

    그럼 뭐 그런 거겠지.

    그런데 너, 그 파라솔은 어디서 가져온 거냐?

    여기 무인돈데…….

    수영복이나 준비해 오라 그랬을 때, 바리바리 실리던 게 이거였나!

    "그리고……."

    이지혁의 머리맡에 뭔가가 마구 놓이기 시작했다.

    "이건 오일인데, 바르셔야 피부가 안 타요. 그리고 이건 영양제구요. 땀을 너무 흘리면 아미노산과 미네랄이 부족해질 수 있으니까 이거 챙겨 드시구요. 탈수가 올 수도 있으니 이것도 드시구요……."

    저기요.

    저 이지혁입니다.

    햇볕 좀 쬔다고 별일 있을 거 같았으면, 그 험난한 베라프에서 어떻게 버티고 살았겠어요.

    할 말은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김다솜이 무슨 생각으로 마법을 배우겠다고 했는지를 아펠드리체에게 대충 듣다 보니 싫은 소리를 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건……."

    "…그만."

    이지혁은 차마 말은 못하고 고개만 돌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인생을 통틀어서 자신에게 이리 잘해준 여자도 딱히 없지 않은가.

    "…아니, 있다."

    "네?"

    "아니, 아니."

    이지혁은 손을 휘젓고는 얼굴을 감쌌다.

    으아아아!

    내가 미쳤지!

    그 여자 생각을 내가 하다니!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해!

    망할, 이제는 기억도 사라져 가는데 왜 이 기억만은 사라지지도 않고 들러붙어서 나를 괴롭히는가!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을 즈음, 머리맡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폰을 들어 화면을 보니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이 떴다.

    "내가 저장해 놨었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귓가에 쏼라쏼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지혁은 급하게 소리쳤다.

    "웨이트! 웨이트! 웨이러 미니뜨!"

    "…What?"

    다급하게 통역 마법을 건 이지혁이 다시금 편안한 얼굴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스터 리. 접니다, 크리스."

    "아, 네. 뭐."

    이지혁이 거만하게 고개를 젖히며 물었다.

    "왜요?"

    "……."

    전화기 너머로 크리스토퍼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은 죄도 없이 이지혁에게 걸린 크리스토퍼가 망할 놈의 스테판을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 버리겠다를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 * *

    - 이번 일에 대해서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번 일요?"

    - 우리 요원들이 실례를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요?"

    이지혁은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고는 대답했다.

    "괜찮아요. 덕분에 잘 쉬고 있으니까요."

    -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다행입니다만… 앞으로는 결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관리하겠으니, 이번 한 번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또 그래도 괜찮아요."

    - 무슨 말씀이신지?

    "어차피 또 돌려보내면 되니까요. 굳이 받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갈 필요 없잖아요. 내가 뭐, 애들 성적 올라야 보너스 받는 강사도 아니고."

    - 그렇군요.

    크리스토퍼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났다.

    이지혁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세질 사람만 세지면 되는 거죠. 어차피 시간문제니까."

    -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굳이 이해 안 해도 돼요. 할 말은 그게 다인가요?"

    - 아, 다음 파견 일자를 정하고 싶습니다만.

    "바쁠 거 없으니까 천천히 준비해서 보내세요. 날짜는 최정훈 씨랑 이야기하시구요."

    - 감사합니다, 미스터 리.

    "별말씀을."

    이지혁은 통화를 끊고는 전화기를 내려놨다.

    "살짝 더운가?"

    살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리맡에서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김다솜이 그의 머리맡에 앉아서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헐, 너 왜 그러니?"

    "더우실까 봐요."

    덥기야 하지.

    그런데 내가 무슨 의자왕도 아니고, 이러면 매우 부담스럽잖니.

    '아니, 따져 보면 베라프에서는 매번 이랬구나.'

    방식이 조금 달라서 그렇지.

    아이스 위도우들이 주변 공기 자체를 얼려서 온도를 낮춰 버렸지.

    생각해 보니 그거 굉장히 효율적이기는 한데, 낭만이 없구나, 낭만이!

    에어컨 같은 것들.

    그건 그렇고, 얘는 요즘 들어 한층 더 부담스러운데…….

    예전 같은 음울함은 조금 사라진 것 같아 참 좋은데, 뭔가 예전보다 좀 더 적극적이 된 것 같아 무섭다.

    "끄응……."

    이지혁이 부담스러운 눈으로 김다솜을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그냥 신경을 끄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넌 안 덥니?"

    정해민의 목소리가 조금 하이 톤으로 나왔다.

    "네, 괜찮아요."

    반대로 김다솜의 목소리는 조금 낮았다.

    "몸도 아프다는 애가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그냥 집에서 쉬지."

    "아프니까 따뜻한 데서 쉬어야죠."

    "어머, 아픈 애가 바닷가 간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거 같네? 너 혹시 엄살이니?"

    "의사가 아프다는데 엄살이면 저도 연기해도 되겠네요. 아, 언니는 연기는 안 했죠? 아니, 못하셨나?"

    "뭐?"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고로 캣 파이트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등짝이 터져 나갈 뿐이었다.

    투닥대는 둘을 두고 이지혁은 먼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왜 이리 불안하지?

    평소에 쉬는 시간이 생겼으면 집에 처박히거나, 아니면 사무실에서 게임이나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정말 지겹다면 번화가로 나가서 맛집이나 투어링하며 잉여잉여하게 보냈겠지.

    그런데 뭔 바람이 불어 여기까지 왔을까?

    이지혁은 스스로가 이해 가지 않았다.

    자꾸 뭔가 불안한데?

    왜 불안한 거지?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자꾸 기분이 이상야릇하다.

    마치 뒤에서 누군가가 자꾸 쫓아오는 느낌.

    사람이라면 불안함을 느낄 수 있다.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때로는 이유 없는 불안함에 시달릴 것이다.

    문제는 지금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이지혁이라는 사실이다.

    이지혁의 간은 배 밖으로 나온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불안함이라는 것을 느껴본 것이 어언 삼백년은 넘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라 해도 이지혁에게 귀찮음을 느끼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불안함을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불안함이라니.

    이지혁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오한 와요?"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자 눈싸움을 하고 있던 정해민과 김다솜이 동시에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날씨에 오한이라니."

    "몸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냐, 괜찮아."

    일단은 얼버무렸다.

    자신이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스윽.

    그때, 이지혁이 누워 있는 비치 체어 아래서 고개를 빼꼼 내민 도가윤이 담요를 덮어주었다.

    "…어?"

    나, 더운데…….

    감기 걸린 거 아닌데…….

    "아니, 이건 괜찮……."

    "덮어."

    "덮고 있어요."

    "네."

    정해민과 김다솜의 합공 앞에 이지혁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사우나라고 생각하자, 사우나라고.

    한동안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최정훈이 넌지시 물어왔다.

    "그런데 이지혁 씨."

    "넹?"

    "이지혁 씨가 전에 말한 대로면, 이지혁 씨는 나름 그쪽 세계에서 오래 사셨잖습니까?"

    할아버지도 아니고, 거의 신선급으로.

    "그죠."

    "갑자기 든 의문인데……."

    "네?"

    "거기서 만난 여자는 없었습니까?"

    "……."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담요 덮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분명 이 순간 감기가 들었을 것이다.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 얼굴들이 이렇지?'

    잘하면 눈빛으로도 사람 하나는 죽이겠네.

    응? 내가 죽는 거야?

    "여자라……."

    이지혁이 아련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 거 없어."

    "거짓말."

    서아영이 날카롭게 짚고 들어왔다.

    "일 년, 이 년도 아니고, 그만큼을 살았는데 여자 하나 없다는 게 말이나 돼?"

    "없어. 없었던 거야."

    "…어감이 미묘한데?"

    이지혁이 살짝 질린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희는 모른다."

    "응?"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 말에 다들 의아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이지혁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지웠다.

    이젠 관계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아까부터 자꾸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 못내 불안한 이지혁이었다.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 먹어야겠어.'

    몸이 상한 거야.

    틀림없이 그럴 거야.

    이지혁은 한 번도 틀린 적 없던 자신의 육감을 애써 밀어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당연히 컸다.

    * * *

    "열리는 건가?"

    알파는 게이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저번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일전에 그가 보았던 게이트에 비해 게이트가 훨씬 크다는 정도?

    "그래, 열린다."

    아르고라스가 알파의 말에 긍정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게이트를 여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도 이전의 경우처럼 불완전한 게이트가 아니었다.

    알파가 모아온 음차원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이전과는 달리 완벽하게 마계와 이곳을 연결할 수 있었다.

    "아무리 열세 번째 마왕께서 개입하셨더라도 게이트만 완전했다면 벨트레체 님이 그리 허무하게 당하실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은 다르다.

    게다가 지금 게이트를 타고 이곳에 당도하는 분은 벨트레체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단순히 서열의 문제가 아니었다.

    벨트레체가 치밀한 계략과 마수들의 힘으로 마왕의 자리에 오른 존재라면, 지금 이곳으로 오고 계신 분은 오로지 스스로의 강대한 마력만으로 마왕의 위에 오른 이였다.

    물론 벨트레체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마계에서라면 벨트레체와 그분의 우열을 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이 마력에서 우위를 보인다면, 벨트레체는 통솔과 군략에서 우위를 보일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다르다.

    이곳은 휘하의 수하들을 사용할 수 없고, 오로지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곳.

    당연히 델카란이 벨트레체에 비해 우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에 완전한 마력으로 도착할 수만 있다면…….

    고오오오오!

    순간, 게이트가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문제가 생긴 건가?"

    "그분의 마력을 게이트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실패?"

    "아직은 알 수 없지."

    실패냐, 성공이냐를 아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 안으로부터 검은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오."

    아르고라스가 그 광경을 보다가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계의 마왕이 도착하는 자리.

    그의 시선이 알파에게로 향했지만, 알파는 여전히 빳빳한 목을 유지한 채 흥미롭다는 듯이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큭."

    인간 주제에 감히 마왕에게 존경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게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그는 명색이 계약자.

    아르고라스가 힘으로 핍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온다."

    알파의 말과 함께 희끗한 형체가 서서히 게이트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오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마왕이시여."

    스으으.

    끊어질 듯 뒤틀린 게이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신을 알 수 없는 검은 재질의 망토로 둘러싼 괴인의 모습이었다.

    '인간형인가?'

    일전의 벨트레체는 어설프게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놈은 겉모습일망정 인간과 같은 형태로 보였다.

    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 그리고 하나의 머리.

    마족임을 감안한다면 훌륭한 인간형이었다.

    스으으.

    델카란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르고라스."

    "마왕이시여!"

    "그분께서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목을 원하신다."

    "그분이라 하시면?"

    "너의 주인, 그리고 나의 주인. 마계에 오롯하신 그분께서 말이다."

    아르고라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그가 받은 명령이 이 세계를 마계의 본계로 만들기 위한 방법을 알아내는 것.

    이지혁과 적대하는 것은 그 과정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아르고라스의 의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말이 달라진다.

    그분이 이지혁의 척살을 원하신다면, 아르고라스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지상 과제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스으으.

    델카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둘러라."

    "……."

    "열세 번째 마왕께서 이 세계에 당도하셨다."

    "으……."

    아르고라스는 열세 번째 마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계의 이단아.

    그녀가 이지혁과 합류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막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약한 존재. 감히 열세 번째 마왕의 앞길을 막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방법은 간단하지."

    델카란의 망토 안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빛을 뿜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에게로 가겠다,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마왕의 뜻대로."

    "마계를 농락하던 그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줄 것이다. 이 세계를 그가 지키려 든다면, 철저하게 이 세계를 파괴하여 그에게 빚을 갚겠다."

    델카란의 음성이 유부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스산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또 하나의 마왕이 강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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