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9화 (39/118)
  • [■] 제가 훌륭한 사람으로 보여요? [■]

    ─────

    "몰려간다!"

    김다현이 다급함이 서린 눈으로 좀비 떼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정적으로 흐느적거리고 있던 좀비들이 갑자기 스위치가 들어온 것처럼 한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꽤 빠른 속도로 바리게이트를 향해 우르르 물려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좀비들이 바닥으로 쓰러져 순식간에 짓밟혔다.

    "제기랄!"

    그가 딱히 뭔가를 잘못한 상황은 아니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왜 이래 갑자기!"

    아니, 지금까지가 이상했던 거였지.

    원래 이랬어야 하는 건데, 바리게이트가 뒤로 밀리며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온 것뿐이니까.

    "어떻게 합니까?"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향해 소리 지르자 서아영의 쌀쌀맞은 음성이 들려왔다.

    - 앞쪽은 바리게이트에 맡기고, 뒤쪽으로부터 천천히 잘라서 정화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문제 아닙니까! 이걸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일백만에 달하는, 의식 없는 좀비들이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은 나름 산전수전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김다현의 간담마저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들을 그냥 처리하라고 해도 난감하다 못해 공포스러울 정도일 텐데, 상처도 입히지 않고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고?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 그건 김다현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이건 또 무슨 무책임한 소리냐?

    -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세요. 해야 할 것을 하시구요. 본인이 할 일이 아닌 것까지 신경 쓰다가 다른 일마저 망치지 말구요. 그렇게 걱정되면 지금 할 일을 좀 더 빨리해서 부담을 덜어주는 게 최선입니다.

    "큭."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서아영의 냉정한 발언 덕분에 순간적인 혼란에서 벗어난 김다현이 차가운 눈으로 좀비들을 바라보았다.

    "믿어야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정 힘든 일이 벌어진다면 저 위에서 노가리나 까먹고 있을 그 인간이 나서겠지.

    최후의 보루는 있으니까!

    김다현은 그리 믿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데…….

    진짜 도와줄까? 그 인간이?

    미묘한 의혹 한 점은 차마 버리지 못한, 현실적인 김다현이었다.

    * * *

    "쳇!"

    루드라와 스핏 파이어는 나름 고전 중이었다.

    "빌어먹을, 그냥 쓸어버리면 안 되는 건가?"

    스핏 파이어 윤혁규의 투정에 루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가는 외교 문제로 범죄자 인도가 될걸? 내가 대통령이면, 너 하나 깔끔하게 버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릴 거다. 그럼 너는 아마 1만 년형 정도를 받고 흑인 아저씨들이랑 감옥에서 쿵짝쿵짝을 해야겠지."

    "뭐야, 그 쿵짝쿵짝은?"

    "굳이 말로 설명해야 하나? 내가?"

    "아니, 안 듣는 게 나을 거 같군."

    왠지 등골, 아니, 등골 아랫부분이 저릿저릿해 오는 느낌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지.

    "하지만 이거 솔직히 너무 힘들다고!"

    공격계에 특화되어 있는 그들에게 다치지 않도록 좀비들을 밀어내 쪼개라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주문이었다.

    위험성이 별로 높지 않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지만, 그 위험성이라는 것도 완전히 없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좀비가 되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이들이 완전히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는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저 로아벨이라는 여자의 말만 믿고 일을 벌이고 있으니, 신뢰가 갈 리가 있나.

    게다가 그 여자의 말을 보증하는 사람이 그 이지혁이라는 것도 신뢰성을 급하락시키는 원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자보다 후자가 더 큰 원인이겠지만…….

    그 인간이라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은 뒤, 태연하게 걸어 나오고도 남았다.

    지금까지 겪은 인간성만으로도 인간의 바닥을 본 느낌인데, 그 이상이 있을 것 같다는 게 더 무섭다.

    "서둘러 움직이자고. 우리가 실적이 제일 안 좋아. 나중에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지랄마녀가 우릴 앞에 두고 너희가 제일 쓸모없다고 소리치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끔찍한 소리를."

    그래도 대한민국에서는 S급이라 불리는 그들인데,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자, 그럼……."

    스핏 파이어의 화염포가 바닥을 향해 쏘아졌다.

    쿠우웅!

    바닥이 파이고 진동하며 반쯤 터져 나간다.

    좀비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무너지자 루드라가 강풍으로 좀비들을 더더욱 짓눌렀다.

    "비효율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느리다면 느린 대로 꾸준하게 밀고 나가면 되는 거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면, 그거라도 해야지.

    스핏 파이어가 씨익 웃으며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의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나 혼자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물론 그 양반은 빼고.

    "어? 그런데……."

    "응?"

    루드라의 당황스런 목소리에 스핏 파이어가 고개를 돌렸다.

    "저기 뚫렸는데?"

    "응?"

    루드라가 가리킨 곳을 보자 장갑차가 뒤집어진 틈을 뚫고 우르르 밀려 들어가는 좀비들이 보였다.

    "어……."

    저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어쩌지?"

    루드라에 말이 스핏 파이어는 다시 손목을 들어 올려 입가에 댔다. 생각이야 그가 하는 게 아니니까.

    "저기, 저쪽이 뚫린 것 같은데요."

    -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해요.

    물론 그러시겠지.

    "아, 네. 뭐, 알겠습니다."

    루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래?"

    "하던 일 하래."

    "…그럼 뭐."

    스핏 파이어는 뚫린 바리게이트에게서 신경을 끄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머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생각이야 그가 하는 게 아니다.

    생각이야 서아영이 하겠지만…….

    "애초에 서아영이 지휘를 내리고 상황 판단을 할 만큼 머리가 좋았던가?"

    "……."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는 루드라를 보며 괜한 것을 물었다고 후회하는 스핏 파이어였다.

    * * *

    "이지혁 씨, 일단 저기 좀 어떻게 막아주세요!"

    최정훈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이지혁이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꺾더니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비번인데요."

    "비번?"

    이 전 지구적인 재앙의 한가운데에서 비번이라니.

    "소방관이 불났는데 비번이라고 다른 데 가는 거 보셨습니까?"

    "아뇨."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건 소방관이라 그런 거잖아요?"

    "네?"

    "훌륭하신 분들이니까 자기 비번도 반납하고 사람을 구하러 가시는 거죠."

    "그게 뭔 소립니까?"

    "제가 훌륭한 사람으로 보여요?"

    "……"

    와, 이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지금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그리 대답하려니 가슴속에 있는 양심이라는 놈이 '아이고, 이놈아. 나는 못한다'를 외치고, 머리가 제멋대로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자리가 자리다 보니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왔지만, 이처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거짓말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아, 아마도?"

    "와, 정치인 하면 굉장히 잘하시겠네요. 제가 후원할 테니, 정계로 진출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그냥 욕을 하지?

    아니, 저거 욕 맞지?

    차라리 대놓고 양심도 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쌍욕을 얻어먹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욕을 먹으니 기분이 이상야릇한 게 매우 더럽다.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저도 농담 아닌데요?"

    "비번이라니! 그걸 누가 정했단 말입니까?"

    "부장님이요."

    "……."

    이럴 때만 부장이지, 이럴 때만.

    평소에는 그 여자니, 정신 나간 노처녀니, 제멋대로 불러 대다가 이럴 때만 부장이지!

    그건 그렇고, 서아영은 대체 이지혁에게 무슨 말을 한 건가.

    "부장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이번에는 저 없이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줄 테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손대지 말고 얌전히 구석에 처박혀서 콜라나 먹으라고 하시던데요?"

    "…진짜?"

    "응."

    와, 뭔 말을 해도 그따위로 하냐?

    그런데 서아영이 말투가 원래 저렇지 않… 아니, 원래 저랬군.

    생각해 보니 서아영이면 정말 그렇게 말을 했을 거 같아서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손을 써요. 상관이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명령 불복종으로 영창 가면 최정훈 씨가 책임지실래요?"

    "우린 영창 없어요."

    "그럼 감옥이겠네! 감옥이라니! 자일! 저는 연약해서 그런 데 가면 숨도 못 쉬고 죽을 거예요. 어휴, 겁나라."

    "…예전에 분명 그거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곳이라고… 가서 몇 년 편히 쉬다 나올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요? 언제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되물어오는 이지혁을 보자니 눈알을 콕 찔러 터뜨려 버리고 싶었지만, 이젠 자동으로 발휘되는 이지혁 전용의 인내력 덕분에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아니,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떻게든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지혁 씨!"

    "저 아저씨는 또 나한테 왜 이러시나?"

    이지혁이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내가 무슨 도라에……."

    "에헤이!"

    "으음, 그렇지. 무슨 만물 상자 너구리도 아니고, 일만 터지면 와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다 큰 어른들이 부끄럽지도 않아요?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합시다!"

    '안 찾아주니 덜덜 떨던 걸 내가 봤는데!'

    최정훈은 가슴을 쳤다.

    조금 전까지 저기서 혹시나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자기 없이 정말 일이 잘 해결되어 버리는 것 아닐까 달달 떨고 있던 것을 분명히 이 두 눈으로 봤는데!

    막상 찾으니 갑질하는 클라스 보소.

    아니, 저건 갑질도 아니다.

    저러고 뭘 얻어내야 갑질인데, 저 인간은 상황 자체를 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성격 진짜……."

    "응? 뭐라고 했어요?"

    "…아닙니다."

    휴…….

    최정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쉬고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최적의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일단 삐칠 대로 삐쳐 버린 이 인간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한다.

    내가 보모도 아니고,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느냐는 회의감이 밀려왔지만, 뭘 어쩌겠는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이지혁인데.

    "일단은 막아야 할 것 아닙니까! 기분 나쁘게 한 것,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까! 일단은 좀 막읍시다! 예?"

    "와! 되레 화내는 클라스 보소. 아이고, 동네 사람들!"

    "확, 그냥 진짜!"

    "뭐요?"

    "…아닙니다."

    최정훈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나는 능력자가 아닌가.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얻어맞더라도 한 대라도 때려보겠다고 달려들었을 텐데. 나약한 일반인의 몸으로는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귀찮아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네?"

    최정훈이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귀찮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나서면 안 되니까 안 나서는 거예요."

    "어째서?"

    "겨우 특훈까지 하고 실력을 키워줬는데 망할 놈의 마왕 때문에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잖아요. 이제는 저들이 얼마나 능력이 커졌는지 실감해야 할 때예요. 이대로 계속 뒤치다꺼리만 하다 보면 정말 나중에는 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텐데, 그래도 좋아요?"

    "그건 안 되죠."

    물론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NDF는 영원히 이지혁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덜 위험할 때 해봐야 해요. 아니면 나중에 그것을 깨닫기 위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지혁의 진지한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가끔씩 본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게 마지막까지 이 사람을 어렵게 대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리라.

    하지만 한 가지는 좀 걸리는 게…….

    "이지혁 씨."

    "예?"

    "정말 귀찮아서 그러시는 건 아니죠?"

    "……."

    왜 대답이 없냐?

    왜!

    이지혁은 끝까지 최정훈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 *

    "물론 그런 것도 좋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저기 안 보이십니까? 저기 뚫렸다구요! 그걸 깨닫기 위해 수백만의 좀비들이 더 생겨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피해가 너무 크잖아요!"

    "어쩌면 말이죠."

    "뭐가 어쩌면입니까!"

    "당신의 대원들을 가장 저평가하고 있는 사람은 최정훈 씨일지도 모르겠네요."

    "네?"

    이지혁의 말을 뒷받침하듯 뚫린 바리게이트 한가운데로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박성찬 씨!"

    아이언 박성찬이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좀비들을 잡아 도로 좀비 떼들 사이로 집어 던졌다.

    "조심하세요! 그러다 다치면!"

    "아니!"

    박성찬이 눈을 부라렸다.

    "이 상황에서 한두 놈 다치는 게 문제야! 싫으면 지들끼리 해결하라 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아니, 한두 사람 다치는 게 아니니까 그러지.

    당신이 방금 던진 사람이 포탄처럼 쏘아져서 좀비 떼를 볼링핀처럼 날려 버렸거든?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해야지!

    물론 최정훈은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하는 사람이다 보니 입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여하튼 조심 좀 해주십시오!"

    "조심은 얼어 죽을!"

    박성찬이 바리게이트 뒤로 빠져나온 좀비들을 모조리 바깥으로 날려 버리더니, 장갑차를 번쩍 들어 똑바로 내려놓았다.

    "바리게이트 좀 튼튼하게 치라고! 이런 걸로 바리게이트가 되겠어?"

    "…당신을 막으려면 그랜드 캐니언이라도 가지고 와야겠네요."

    니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박성찬은 상황을 대충 정리하고는 장갑차를 뛰어넘어 좀비 떼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 좀! 또 어디로 가라고!"

    스마트 워치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박성찬을 보고 있으려니, 마누라에게 전화로 심부름 지시를 받는 남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마누라라니.'

    어딜 감히, 박성찬이!

    그런 생각을 하던 최정훈이 이내 머리를 휘휘 저었다.

    "나도 미쳐 가나?"

    "뭔 소리예요?"

    "아닙니다."

    최정훈이 슬쩍 얼굴을 붉히고는 저 멀리에 보이는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 * *

    "끝이 없네."

    서아영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자신만만하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거…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두 번의 정화야 어려울 것이 없지만, 그걸 만 단위로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만 단위의 반복이 이어지는 동안에 바리게이트가 버텨주느냐도 문제였다.

    "흠……."

    이대로는 어렵다.

    그녀가 스마트 워치를 가까이 대고 회선을 찾아 눌렀다.

    "최정훈 씨."

    - 네, 말씀하십시오.

    "일단 우리 대원들 반쯤은 바리게이트로 투입할 테니까 적절하게 분배 좀 해주세요. 지휘권 드릴게요."

    - 알겠습니다.

    대충 이렇게 맡겨놓으면 최정훈이 알아서 잘하겠지.

    사실 이번 일의 지휘도 최정훈이 맡았다면 지금보다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도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그 얄미운 이지혁에게 말이다.

    괜한 자존심을 부렸나 싶은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NDF의 수장으로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지혁의 등장과 함께 그녀의 존재 가치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으니까.

    남의 밑에서 말이나 듣고 시키는 일만 하는 플레임 위치는 필요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싸우는 서아영이었다.

    "말이야 쉽지."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화염을 뿜어 좀비들을 밀어내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 * *

    "정신이 하나도 없네."

    정해민이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 일을 위해 전 세계에 찍어놓은 마커를 모두 포기하고 이 주변에 죄다 박았다.

    한국에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마커를 제외하면 이 한 곳에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마커를 써버린 것이다.

    덕분에 동분서주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리 단거리에다 한 사람만 데리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텔레포트를 반복하다 보면 순식간에 지쳐 버린다.

    "헤에?"

    이지혁이 그녀를 데리고 하루 종일 텔포 타며 돌아다니는 특훈을 시키지 않았으면, 지금쯤 그녀도 바닥에 누워서 대낮부터 별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참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이상하게 고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이지혁이 가지는 특이성일 것이다.

    이지혁을 만나서 다들 강해지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 무시 받지 않을 만큼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도 하고, 일부 인원들은 스카웃 제의도 심심치 않게 받는다고 하니까 다 좋아지긴 했는데, 사람들은 왜 다 이지혁만 보면 이를 갈아대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하아……."

    정해민의 눈이 로아벨에게로 향했다.

    지친 것은 그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로아벨 역시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직 사분지 일도 못했는데……."

    죽어라고 날뛴 효과가 있었는지, 좀비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고, 바리게이트 뒤쪽으로 마련되어 있는 구호소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대고 있었다.

    앰뷸런스와 수송 차량이 일렬로 길을 가는 개미 떼처럼 쉴 새 없이 환자들을 날라대고 있었다.

    "괜찮겠어요?"

    정해민의 물음에 로아벨이 이를 으드득 갈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망할 흑마도사 놈… 죽일 거다, 죽일 거야."

    "……."

    얘는 생긴 건 엘픈데… 아니, 그냥 엘픈데 입이 왜 이리 험하지?

    보통 엘프는 자연과 벗 삼아 뛰어놀면서 '어머? 사슴아, 오늘은 조금 더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있구나'라든가 하는 이미지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 엘프는 뭔가 좀 전투적이었다.

    클래스도 회복 계열에다 들어보면 성직자라고 하는 거 같은데, 애 꼬라지가 왜 이렇지?

    '여하튼 이지혁이 데리고 오는 여자치고 제대로 된 애가 없다니까.'

    그 다솜인가 하는 애는 뭔 스토커 같고, 아펠드리체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가윤이야 원래는 착한 앤데 요즘은 좀 이상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걱정이고…….

    하…….

    제대로 된 여자는 나밖에 없구나. 그러니 지가 뭐 어쩌겠어.

    "모든 건 그 사악한 악마 때문입니다."

    "네?"

    "이 세계도 결국 그 악마 놈 때문에 홍역을 치러야 할 거예요."

    "……."

    얘 뭐지?

    신관이라더니, 사이빈가?

    말하는 투가 꼭 '조금 있으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옵니다'라고 할 것 같은 삘인데?

    "그가 있는 세계에는 멸망이 찾아옵니다."

    "역시."

    "…네?"

    "아니에요."

    어떻게 이렇게 귀신같이 예상한 대로 간다는 말인가.

    이 여자가 전형적인 건지, 정해민이 예측을 잘한 건지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뭐, 그렇다고 쫓아낼 수는 없는 사람이니까요."

    "확실히 이곳은 이상한 세계네요."

    "어떤 부분이요?"

    "그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구박해 대는 꼴이 이상하다고 할까요?"

    "그게 왜요?"

    이상하지.

    너무 이상해서 위화감도 들지 않을 정도니까.

    로아벨은 대답 없이 가만히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걸까?

    자신들이 쉽게 쉽게 대하고 있는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베라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이다.

    그나마 드래곤 로드급이나 되는 아펠드리체는 그를 대등한 존재로 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브즈고트의 일개 신관에 불과한 그녀는 그리 자연스레 이지혁을 대할 수 없었다.

    직접 겪지 못하고 지나는 풍월로만 들은 그녀조차도 이지혁의 앞에 서 있다면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인데, 그의 난동을 직접 겪은 이들은 얼마나 공포스러울 것인가.

    적어도 베라프에서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마왕보다 상급의 어둠이었고, 재앙, 그 이상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 인간 재앙이 이곳에서는 여기저기 치이면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갭이 너무도 크다.

    이제 막 베라프에서 도착한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의 이지혁의 모습은 천지가 개벽하는 수준의 충격인 것이다.

    "당신들은 속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그는 악마예요."

    "아, 뭐, 마왕이니 뭐니 하는 거 같긴 하더라고요."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안 건 아니고, 얼마 전에 이 동네에 마왕이 처들어왔는데, 지혁이가 때려잡았거든요."

    "아……."

    "그때 그러는 거 같던데. 지혁이도 마왕이니 어쩌고 하는 거 같더라고요."

    "알고도 그리 대할 수 있는 거예요?"

    "음?"

    듣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네.

    살짝 고민을 하는 듯하던 정해민이 입을 열었다.

    "뭐, 상관없잖아요. 호칭이나 뭐 그런 게 달라진다고 해서 지혁이가 지혁이가 아닌 것도 아니고."

    "마왕인데도?"

    "물론 정말 마왕급으로 성격도 나쁘고, 싸가지도 없고, 버르장머리가 없는 폐급의 인간이지만… 그래도 착하니까."

    로아벨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니면 번역 마법이 오류를 일으킨 건가요? 문장이 앞뒤가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은데요. 아, 그렇구나. 이게 반어법이라는 거죠?"

    "아닌데요?"

    정해민이 킥킥 웃었다.

    "착하긴 착해요. 그걸 표현을 잘 못해서 그런 거지."

    "이게 콩깍지인가?"

    "누, 누가 콩깍지가 꼈다고!"

    "걱정 마세요. 저는 자애의 신 브즈고트의 신관. 인간의 사랑은 축복 받아야 할 것이지, 감추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꺄악! 아니거든요! 됐거든요!"

    꺅꺅대는 둘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지혁이 말없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잘들 논다."

    저 미친것들은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저 난리들이란 말인가.

    귀빵맹이 한 대씩 후려갈기면 속이 편하겠네.

    "아, 위 쑤셔."

    위장이 콕콕 쑤셔오는 것을 보니,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래 봬도 내가 천 년 동안 스트레스를 모르고 살았던 사람인데 말이야!

    "어, 그런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느낌이 좀 이상한데?

    저기 안에서 느껴지는 이 기이한 감각은 뭐지?

    이지혁이 눈을 크게 뜰 때,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터지면서 한쪽에 있던 좀비들이 포탄에라도 얻어맞은 듯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련의 좀비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좀비네."

    같은 좀비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냥 좀비다.

    그런데 기분이 왜 이리 이상하지?

    뭔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

    그 순간, 안에서 걸어 나오던 좀비 중 하나가 양손에 불꽃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아……."

    그러네.

    일반인이 감염되면 좀비가 되는 거고… 능력자가 감염되면 능력자 좀비가 되는 거네…….

    저 등신 같은 것들이 능력자씩이나 되는 주제에 벌레한테 물려서 감염되다니!

    "쪽팔린 줄 알아야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긴 하지. 저 좀비들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게 우선이니까.

    "보자……."

    일반인이 좀비가 되면 일단 통각이 없어지고 근력이라든가 하는 부분이 거의 열 배 가까이 상승한다. 좀비에게 잡히면 팔이 뽑히거나 으스러지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버리니까.

    그럼 능력자가 좀비가 되면 어찌 될까?

    화르르르륵!

    좀비가 피워 올린 화염이 집채만큼 피어올라 하늘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음……."

    이지혁은 빙긋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망했네."

    그것도 아주 쫄딱 망했네.

    어휴!

    * * *

    그러니까 애초에 좀비라는 건 감염자다.

    단지 지금 상황은 바이러스나 독 같은 게 아니라 흑마력에 감염된 인간일 뿐이지만.

    인간이 흑마력에 중독되면 인지를 상실하기 시작하고, 육체가 변형된다. 그 과정에서 육체는 나약해지지만, 또 강건해진다.

    무슨 소리냐고?

    겉으로 낼 수 있는 힘은 강해지지만, 그 내구성이 약해진다는 뜻이다. 캐릭터로 예를 들자면, 공방 5대 5의 밸런스를 갖추고 있던 캐릭터가 흑마력에 중독되는 순간, 공방 9대 1의 비율로 변환된다고 해야 할까?

    물론 움직이는 속도 자체가 이전보다 줄어드는 측면이 있으니 공격력이 무작정 상승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일반인도 흑마력에 감염되면 보통 사람의 팔을 무난하게 분질러 버릴 정도의 힘을 손에 넣게 된다는 뜻이라고!

    그러니 능력자가 흑마력에 감염되면 어떻게 되겠어?

    콰르르르르!

    이지혁이 불타오르는 화염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로 저렇게 된다.

    인간 능력자들 중에서는 서아영만이 겨우 도달한 수준에 보통의 능력자가 손쉽게 도달해 버리는 것이다.

    "어휴……."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베라프에서는 고위 능력자가 좀비가 된다는 일 자체가 벌어질 수 없었다.

    워낙 저항력이 높은데다가 혹시나 감염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나가던 신관이 대충 정화수나 한 번 뿌리면 바로 치료가 되니, 그 귀하신 전사나 마법사들을 좀비가 되게 내버려 두겠는가.

    그러니 이런 경우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는데…….

    "그런데 쟤들은 어디에 숨어 있던 거지?"

    저런 것들이 있는 줄 알았다면 대충이나마 미리 대책이라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저리 갑툭튀를 하니 어찌할 수가 없다.

    하기야 좀비가 백만인데, 그 안에 능력자 좀비가 몇몇 섞여 있다고 해도 티나 나겠는가.

    능력자인지 아닌지 알려면 일단 부딪쳐 봐야 할 것 아닌가.

    저 인파… 아니, 좀비파를 뚫고 그중에서 능력자 좀비를 찾아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무난하게 흘러왔다는 건데 말이야.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지?"

    저 능력자 좀비를 상처 하나 나지 않게 제압하여 신성력을 퍼부어야 한다는 건데, 그게 쉬울 리가 있나.

    "쟤들은 예외로 치고 그냥 슥삭해 버리면 안 되나?"

    이지혁의 물음에 최정훈이 심각한 얼굴로 크리스토퍼를 돌아보았다. 대충 상황을 봐도 쟤들을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게 얼마나 힘들 것인가 감이 오지 않는가.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능력자도 국민입니다!"

    "거, 국민도 많은데, 하나둘쯤이야!"

    "안 됩니다!"

    크리스토퍼가 눈에 불을 켰다.

    "저 융통성 없는 인간 같으니."

    적당히 완고해야지!

    한국이었다면 적당적당히 두어 명 정도는 슥삭 묻어버렸을 텐데! 여하튼 미국 놈들이란!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온갖 게이트는 다 벌이면서!"

    "게이트요?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퍼게이……."

    "스탑."

    크리스토퍼가 정색하며 이지혁의 말을 끊었다.

    그 인간은 왜 아랫도리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해서 타국 놈들에게 이런 굴욕을 당하게 만드는가 말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과 크리스토퍼는 정신을 차렸다.

    크리스토퍼는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이 인간과 이야기만 하다 보면 삼천포로 빠진다니까. 도무지 직진이란 게 없는 인간이다.

    "저 아줌마… 열 받은 모양인데?"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쭈?"

    서아영의 앞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좀비 놈 주제에 불꽃을 부리는 것도 건방진데, 그 불꽃이 꽤나 크다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슬슬 긁고 있었다.

    아무리 흔한 게 불꽃술사라고는 하지만 하필이면 그 불꽃술사가 좀비가 되었고, 그 좀비가 지금 서아영의 앞에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고작 그것도 불꽃이라고!"

    좀비를 보며 눈을 부라리는 서아영을 보며 김다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좀비한테 경쟁심 가지지 말라고!

    사람은 사람끼리 경쟁심을… 아, 저 좀비도 사람이라고 쳐야 하나?

    그 미묘한 간극에 김다현이 고민을 하고 있을 시점에 서아영이 불꽃을 피워 올렸다.

    화르르륵!

    좀비가 만들어낸 화염의 족히 두 배는 넘는 불꽃이 피어오르자 이지혁이 그걸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재 혼자 화력발전소 하나는 돌릴 수 있지 않을까?"

    "……."

    최정훈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힐난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가능할 것도 같은데, 이거?

    저 정도 화력이라면 터빈 돌리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거고, 공급해야 하는 원료라고 해봐야 음식이 전부니까… 따져 보면 굉장한 효율 아닌가.

    '아니, 내가 지금 뭔 미친 생각이야!'

    최정훈은 이지혁의 페이스에 말려 버린 자신을 반성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을 해야지, 이게 무슨 짓인가.

    "혹시 핵분열 같은 거 하는 능력자는 없나요? 걔 하나 잡아다가 발전소 하나 돌리면 최골 거 같은데?"

    "…핵융합도 아니고, 핵분열이면 걸어 다니는 핵폭탄인데, 이미 사살됐거나 나라 하나는 날아갔겠죠."

    "캬, 그러네. 아쉽네요."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에 뭐가 들어 있으면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최소한의 인권 의식이라는 게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어, 저거 날리면 안 되는데?"

    이지혁의 목소리에 최정훈은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다.

    "안 됩니다!"

    서아영이 전력으로 공격을 한다면 그 여파만으로 저기 있는 좀비들 중 만 단위는 날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이지혁 씨!"

    "아이고, 저 히스테리 아줌마!"

    이지혁이 군말 없이 튀어올라 서아영에게 날아들었다.

    "와!"

    최정훈이 그 속도를 보고 깜짝 놀라 새삼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워낙 미적미적대서 실감하지 못했는데, 마음먹고 달리기 시작하자 김다현이 무색해할 만한 속도였다.

    저 인간… 육체파는 아니라더니, 정말 능력치가 어떻게 배분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인간이네?

    최정훈이 당황하는 동안 이지혁은 서아영 앞에 도착해서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야, 이 아줌마야! 정신 차려!"

    "뭐예요! 내가 나서지 말라고 했잖아요!"

    "안 나서게 좀 해줘! 응? 안 나서게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알아서 잘 해결을 해야지, 니가 나서서 뒤집어엎으면 뭘 어쩌자고?"

    "내가 뭘!"

    "답도 없다."

    이지혁은 혀를 쯧쯧, 찼다.

    사태가 영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회복될 수 있는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짜증."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능력자 좀비를 바라보았다.

    "야, 너희……."

    하지만 이지혁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좀비가 뿜어낸 화염이 이지혁과 서아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오!"

    이지혁이 서아영을 안아 들고 몸을 날려 불꽃을 피했다.

    화르륵!

    바닥에 닿은 불꽃이 일순간 피어오르며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열기를 뿜어냈다.

    "알 수가 없네, 제길."

    이지혁이 이를 으득, 갈았다.

    마나로 이루어진 생명체들이 흑마력에 감염되었을 때 능력치가 증폭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흑마력도 엄밀히 말하면 마나의 일종이었으니까.

    그 종류가 무엇이든 마나를 쓰는 이들에게 마나가 주입되었으니 강해지는 것이야 당연하겠지.

    그런데 이 좀비들은 마나 생명체가 아니란 말이다.

    마나가 아닌 에테르 베이스의 생명체들인데, 왜 흑마력에 강화가 된다는 말인가.

    "이럴 때 에라시오 같은 놈이 필요한데!"

    이지혁 같은 몸뚱아리형 법사가 아닌, 진짜 연구 법사가 하나쯤 있으면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한 규명을 깔끔하게 해줄 텐데!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데는 머리가 팽팽 도는 이지혁이지만, 학문적인 문제는 천 년 동안 젬병이었다. 마도서 한 권을 정독할 수 있는 정신력만 있었어도 베라프 탈출이 삼백 년은 당겨졌을 텐데!

    "누구 맘대로 사람을 안고 그래요! 안 내려놔요?"

    "이 여자가 미쳤나! 구해줘도 큰 소리야!"

    "구해줘? 그딴 성냥불, 받아치면 그만이지!"

    "…정정한다. 네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네."

    이지혁은 인상을 구기며 서아영을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야!"

    엉덩방아를 찧은 서아영이 이지혁을 향해 눈을 홀겼다.

    "어쩔 거예요?"

    "일단 뭐……."

    이지혁의 눈이 좀비들 사이에 둘러싸인 능력자 좀비들에게로 향했다.

    "저것들부터 어떻게 정리해 두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뭐."

    이지혁의 얼굴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리 힘든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좀비라는 것들은 이동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극명하고, 의식이 없기에 조직적인 움직임이 불가능했다.

    마왕급이나 최상위 악마급의 대가리가 있다면 백만의 좀비 대군은 끔찍한 존재가 되겠지만, 지금처럼 머리 없이 제멋대로 배회하는 좀비는 그리 짜증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저 능력자 좀비들만 처리하면 시간이야 걸려도 어떻게든 정화를 해나갈 수 있다.

    치익.

    그때, 이지혁의 스마트 워치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첫 정화자 회복 확인되었습니다. 정화에 효과가 있습니다.

    "아!"

    서아영은 반색했지만, 이지혁은 심드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화가 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저 미친년을 데려다 쓸 일이 없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신성력 하나는 베라프에서도 손꼽혔다.

    저기에 비견되는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빌어먹을 디오레 1세 정도?

    디오레 1세야 그 무지막지한 신성력에 성력 컨트롤과 응용도 최상급인 사기캐였으니 로아벨 따위와 비교할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다.

    "…영감님, 너무 일찍 죽었잖아."

    그 디오레 1세만 데려올 수 있었다면 이 고생은 안 해도 됐을 텐데.

    아마 혼자서 좀비 100만 대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겠지.

    이지혁이 그 끔찍했던 신성력의 세례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지혁급이나 되니까 짓누를 수 있던 것이지, 웬만한 고위 악마라면 한 방에 끔살이다.

    신성 군단과 함께라면 웬만한 마왕급은 희생도 없이 레이드를 뛸 수 있을 정도의 역대 최고의 신관.

    그가 바로 라트렐의 종복 디오레 1세였다.

    그 디오레 1세가 벌써 죽었다니…….

    "인간의 삶이란 참 허무하단 말이야."

    "네?"

    "아니."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없는 것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지금 가진 것들로만 해결을 해봐야지!

    "이제 지겹다."

    저 빌어먹을 좀비들 때문에 시간을 얼마나 끈 것인가.

    퇴근하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단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지혁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지금 몇 시지?

    어느 순간부터 퇴근이란 개념이 사라지지 않았나?

    이지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국에서 기업에 취직하는 신입들이 처음에는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퇴근 문화에 분노하다가 얼마 안 가서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더니!

    지금 이지혁이 딱 그 꼴 아닌가.

    서서히 끓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 꼴로 삶아지고 있던 것이다! 천하의 이지혁이 말이다!

    "이런 썩을!"

    이지혁의 양손에 검은 마나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집에 갈 거다, 이 새끼들아!"

    퇴근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이지혁이 지금 그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 * *

    이지혁이 마나를 마구 뿜어내자 서아영이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진정해요!"

    "뭘 진정해! 뭘!"

    생각하니 억울하다.

    안빈낙도를 목표로 돌아온 지구가 아니던가.

    그런데 언제부터 이지혁이 이리 꽁지에 불붙은 개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러면 지구로 돌아온 의미가 없지 않나!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이지혁은 반성했다.

    크게 반성했다.

    요즘은 이리저리 쏘다니느라 엄마 얼굴도 잘 못 보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하며 게임이나 하고 뒹굴대다가 천수를 다해서 죽는 게 목표였는데!

    몬스터니, 마왕이니!

    이젠 좀비까지 설쳐 대고, 그걸 해결하려 오뉴월 개처럼 쏘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니, 열이 머리끝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른 채 좋다고 이리저리!

    "내 인생이 휘말리고 있었어!"

    "뭔 개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지혁의 눈이 서아영에게로 향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다 이 여자와 최정훈 때문이었다.

    이 둘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자신은 집에 누워서 과자나 퍼먹으며 배를 두드리고 있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지금쯤 세계는 멸망직전까지 갔겠지.

    응?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 복잡 미묘한 심경으로 서아영을 노려보던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좀비 떼를 바라보았다.

    "짜증나."

    이런저런 것들을 고려하여 머리를 쓰고 다녔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이지혁의 천성과는 맞지 않았다.

    "다 불러봐요."

    "네?"

    "다 부르라고!"

    "네!"

    서아영이 군말 없이 무전을 날려 NDF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모든 요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바리게이트 요원들까지 빼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지혁이 귓가를 울리는 최정훈의 투덜거림에 눈을 가늘게 떴다.

    - 아니, 무슨 일을 진행하려면 상의를 좀 하시고, 그런 다음에 일을 진행해야 대처를 할 것 아닙니까! 매번 이런 식으로 자꾸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시면 곤란합니다!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꼬맹이."

    "으응?"

    "가서 저 인간 잡아와."

    "응."

    정해민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더니, 이내 최정훈의 팔을 잡은 채 다시 나타났다.

    "……."

    최정훈이 눈앞에 있는 이지혁의 얼굴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요즘 제가……."

    "네?"

    "좀 많이 얌전했죠?"

    "……."

    그게 얌전한 건가?

    니가 최근에 한 일만 따져 보면, 그러니까… 음? 어?

    얌전했나?

    설마 진짜로 얌전했나?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따져 들고 보니 최근에 이지혁이 딱히 사고를 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았다니.

    이 인간이 예전처럼 작정하고 설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위장에 구멍이 구공탄처럼 뚫리나?

    "조용조용히 좀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되레 조용히 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순간 깨달았어요. 이걸 뭐라고 하지? 돈오? 득도? 각성?"

    "발작……."

    "뒈질라고?"

    "아닙니다."

    최정훈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드립을 치면 받아주고 하는 맛도 있어야지, 딱딱하기는!

    니가 드립 치면 우리는 만날 받아주는데!

    "여하튼 이젠 속 시끄러워서 더 못 보고 있겠으니까, 이 시간부로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최정훈은 대답 없이 서아영을 돌아보았다.

    그런 문제는 그가 아니라 서아영이 결정해야 할 일이다.

    "조금 더 저희한테 맡겨주시면……."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삼만 년은 걸리겠네, 삼만 년은!"

    "…나름 노력한 건데."

    이지혁이 혀를 찼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잘못했다고 따져 들 정도로 일처리가 나빴던 건 아니다.

    미국의 그 많은 능력자들이 전혀 손도 못 대고 있던 일을 이만큼이나 끌고 왔다는 것은 서아영이 지휘하는 NDF의 능력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할 만큼 했어요."

    "네?"

    "그러니까, 이제는 좀 더 쉽게 하자고."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일단은 저 좀비 새끼들 모조리 저 바리게이트 쪽으로 처밀어 넣어요."

    "바리게이트로요?"

    이 인간이 미쳤나?

    그렇게 밀어 넣다 보면 바리게이트가 붕괴되잖아.

    "떼어내라구요?"

    "아니, 귀가 막혔나! 밀어넣으라고!"

    내 귀가 아니라 니 주둥아리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니?

    서아영은 의혹과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막고 있는 이들의 피해가 클 텐데요."

    "걔들은 전부 철수시켜요."

    "…네?"

    "말귀를 왜 이리 못 알아듣지? 귀 파줘요?"

    아니, 니 입을 어떻게 해야 한다니까.

    서아영이 도움을 청하는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하시려구요?"

    최정훈이 묻자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부터 당신들한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었죠?"

    처음에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주저리주저리가 아니라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죠. 협력 관계 아닙니까."

    "…협력은 얼어 죽을."

    똥오줌도 못 가리는 것들 사람 구실하게 해놨더니, 머리 굵었다고 협력이 어쩌고 하는 거 보라지.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시죠?"

    "넵."

    최정훈은 깔끔하게 이지혁에 대한 설득을 포기하고 물러났다.서아영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최정훈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답답하면 니가 하든가!

    내가 차라리 미국 대통령을 협박하라면 하겠다.

    저 인간이랑 언제 말이 통한 적이나 있었나?

    "움직여!"

    "넵!"

    말이 끝나자 서아영과 최정훈이 이지혁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팀을 짜고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다른 대원들도 둘을 중심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할 일이 없는 것은 이지혁과…….

    "넌 뭐하니?"

    "나 할 일 없는데?"

    정해민은 멀뚱멀뚱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너도 뭔가 지시를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나야 뭐, 가라는 데로 가면 그만이지."

    "……."

    이제 본격적으로 셔틀로 전직해 버린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 보면 얘도 참 웃긴 캐릭터라니까. 누구보다 필요한데 막상 전투 시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된다. 이렇게나 보조에 특화된 스타일은 베라프에서 찾아볼 수 없다 보니, 적응이 잘 안 된다.

    "끙……."

    이지혁이 정해민을 보며 한숨을 쉬자 저 뒤에서 아펠드리체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슬슬 정리해야 할 시점이에요."

    "뭘?"

    "저 좀비들요."

    "응?"

    아펠드리체가 모르냐는 듯 이지혁을 힐난했다.

    "육체의 구성력이 와해될 시점이 다 됐어요."

    "뭔 소리야?"

    "저절로 팔이 떨어져 나가고, 살이 갈라질 거예요."

    "아!"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베라프의 좀비들에 비하면 귀욤귀욤한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직 좀비가 된지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아 몸뚱아리가 온전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처리할 거니까 재촉하지 마."

    이지혁이 이죽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인간 따위 팔이 떨어져 나가든 머리가 떨어져 나가든 신경 안 쓰지 않으셨나?"

    "저야 신경 쓰지 않죠.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놓쳐서 피해가 커지면 지혁 씨가 자괴감이 들 테니까요."

    "걱정해 줘서 고맙군."

    "천만에요."

    비꼰 거야, 이 도마뱀아!

    이지혁은 더 이상 아펠드리체와 말을 섞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좀비 떼들에게 돌렸다.

    "이상한 기분인데."

    "네?"

    이지혁은 대답 없이 살짝 눈을 감았다.

    원래는 천천히 지켜보고 있으려고 했는데 자꾸 안달복달하지 못하게 된 것도 그렇고… 지금 자꾸 뭔가 불안하고 조급해지는 것도 이상하다.

    물론 과거의 절대평정심이야 사라졌으니 기분이 들쑥날쑥한다고 해도 이상하지야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자신의 상태는 뭔가 미묘했다.

    '내가 이렇게 성격이 급한 인간이었나?'

    예전의 이지혁이었다면 능력자 좀비가 나와서 불꽃을 피우는 걸 보고도 낄낄대며 '저기에 삼겹살 구워 먹으면 맛있겠다'고 입맛을 다실 사람이지, 지금처럼 짜증난다고 앞으로 튀어나올 사람이 아니었다.

    '변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베라프의 기억들이 인격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 과거의 이지혁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변화는 뭔가 그런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급함.

    불안함.

    그리고…….

    이지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거, 파괴 본능인가?'

    단어 선택은 거창하지만 풀어서 말하자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잡아 죽여 버리고 싶은 짜증이랄까?

    "왜 그래요?"

    "아니."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말한다고 뭔가 해결될 일도 아니고, 말하면 괜히 문제만 커질 뿐이다.

    이거…….

    아무래도 머리가 살짝 돈 거 같은데?

    흑마력을 그만큼 원 없이 쏟아부어서 몸이 개박살 났다가 회복되었으니 대미지가 없지야 않겠지만, 이지혁이 스스로의 성격 변화를 느낄 정도로 이상이 왔다는 것은 그때 입은 피해가 예상 이상으로 컸다는 뜻이 된다.

    정리하자면…….

    "가속화되었군."

    이지혁의 혼잣말에 아펠드리체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왕의 강림은 그녀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지혁에게 마력을 너무 써서는 안 된다고 잔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당장 죽을 판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물어나시는 게 어때요?"

    "이 정도는 별거 아냐."

    "…그러시겠죠."

    살짝 비꼬는 듯한 아펠드리체의 말투에 이지혁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젠 정말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군.

    "준비됐습니다."

    최정훈의 목소리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끌지 말고 시작해요."

    일단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들을 해결해 놓고 볼 일이다.

    이지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최정훈이 수신호를 날렸고, 그와 동시에 NDF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좀비들을 몰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김다현이 가공할 속도로 좀비들 주위를 돌며 그들을 안으로 몰아넣는다.

    "물러나요!"

    서아영이 고함을 지르자 바리게이트를 막아서고 있던 병력들이 우르르 뒤로 빠진다.

    "몰아!"

    서아영이 불꽃을 피워 올리고 다른 이들도 각자의 능력으로 좀비들을 바리게이트 쪽으로 밀어넣었다.

    그러자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길게 늘어져 있던 라인이 중앙으로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이지혁이 가만히 그 광경을 보며 마나를 피워 올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좀비 떼들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바리게이트와 한 덩어리처럼 뭉쳐지자 이지혁이 이를 악물었다.

    "하앗!"

    콰아아아아!

    이지혁의 육체에서 시커먼 마나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 같은 마나를 양손으로 휘저어 모은 이지혁이 조금은 붉어진 듯한 눈으로 좀비 떼를 응시했다.

    "길었다고."

    그러니 이제는 끝내야지!

    이지혁의 양손이 펼쳐지자 마나가 솟구쳤다.

    하늘이 검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다크니스."

    검은 듯하던 하늘이 아니다.

    실제로 하늘이 검어지고 있었다.

    …세상에 어둠이 내려왔다.

    * * *

    콰아아아아!

    검은 마나가 새파란 하늘을 질주하며 허공에 검은 문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끄으으!"

    육체를 헤집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나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고통을 참느라 꽉 깨문 이에서 비릿한 피 내음이 새어 나온다.

    지긋지긋하게 겪은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의 교훈만을 얻을 수 있을 뿐.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쾌감의 역치는 상승하여 반복되다 보면 작은 쾌감에는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던데, 고통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 걸 보면… 인간이란 참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다.

    "끅!"

    꽉 움켜진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피부를 찢어놓고 있었다.

    육체에서 빠져나간 마나가 허공을 수놓더니, 이내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환한 대낮이건만, 어둠이 세상을 가득 메웠다.

    "…이게?"

    서아영은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엇인가.

    이지혁이 그동안 보여준 것들을 생각하면 무슨 일을 벌여도 놀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이는 광경은 이제까지의 것들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낮밤이 바뀐 거야?"

    아니겠지.

    그런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순간적으로 지구를 반대로 뒤집어 버리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럼 뭔가.

    점점 어두워지는 이곳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크르르르르.

    좀비들도 어둠이 내리는 것을 깨달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일부의 좀비들은 주변을 채워가는 어둠의 마나에 영향을 받았는지 부르르 몸을 떨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뭔 일이 벌어지는 거야?"

    최정훈이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태양은 완벽하게 어둠 뒤로 숨어버렸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괴사.

    확실히 놀라운 일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저걸로 뭘 어쩌자는 거지?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랑 좀비들을 해결한다는 것에 뭔 연관성이 있다고?

    그 순간, 이지혁이 손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베일 오브 다크니스.

    하늘을 가득 메운 어둠이 아래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맙소사."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그의 의지력이 약했다면 지금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하늘이 내려온다.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늘을 메운 어둠이 아래로 하강하고 있었다.

    세상을 어둠으로 모두 채워 버릴 듯한 기세로 말이다.

    그 기묘한 광경에 최정훈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대체……."

    최정훈의 크게 떠진 눈이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저 인간은 대체 뭐지?

    알아가고 알아가도 자꾸만 뭐가 나온다.

    그가 살아온 시간과 가진 능력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어야 할 텐데,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상정한 능력치를 언제나 상회하다 보니 매번 이런 식으로 당황하게 된다.

    '그러니 제어가 안 되지.'

    알지도 못하는 존재를 무슨 수로 제어하라는 말인가.

    최정훈이 이지혁에 대해 또 한 번 경외를 느낄 때, 마침내 어둠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크륵?

    좀비들이 고개를 들어 자신들에게 내려앉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어, 어어?"

    내려앉는 어둠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서아영이 기겁을 하며 물러서다가 어둠에 둘러싸여 버렸다.

    "뭐야?"

    서아영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어둡다.

    검다.

    하지만 단순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없어?'

    손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의 빛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

    누구 없냐고 분명히 말을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외친 말이 그녀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뿐 아니라 소리조차도 완벽히 어둠에 먹혀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설마…….'

    손을 끌어당겨 몸을 감싸 안았다.

    '…촉각도 없어?'

    시각, 청각, 후각, 촉각까지…….

    미각이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오감 중 네 개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한 무(無).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스스로도 존재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세계가 그녀를 가두어 버렸다.

    '이게 뭐야, 대체!'

    이지혁 덕분에 삭막한 세계는 질리도록 맛보았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인간이 오감을 빼앗긴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그저 그 자리에서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에 닿는 느낌이 없으니, 허공을 유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몸이 어둠의 강에 둘러싸여 어디론가 계속 흘러가고 있는 듯 기묘한 위화감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서아영의 본능적으로 양손에 에테르를 모았다.

    그녀의 육체가 공격당한다고 해도 알아챌 수 없다는 공포가 그녀를 패닉으로 몰아세웠다.

    이대로 공격당하기 전에…….

    "아!"

    순간,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사라졌다.

    털썩.

    서아영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정신은 차려보니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두터운 외투가 흠뻑 젖어 있을 정도였다.

    "쯧."

    이지혁이 그런 서아영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게 왜 거기서 알짱대고 있어?"

    평소였다면 뭔 짓거리를 하기에 조준 하나 제대로 못해서 사람을 괴롭히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불덩어리라도 날렸을 서아영이지만, 지금은 그럴 힘이 없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불과 1분 남짓한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사람이 완전히 탈진해 버릴 만큼 말이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혀가 잘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서아영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본 최정훈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네."

    서아영은 뭔가 말을 하려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가 겪은 것을 말로 설명하자니 너무도 난해했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느낀 기분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사람에게 하늘을 나는 기분을 설명해야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서아영이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뭐야, 이거?"

    그녀의 눈에 커다란 어둠의 구가 들어왔다.

    마치 하나의 돔처럼 거대한 어둠이 좀비들이 몰려 있는 바리게트를 통째로 감싸고 있었다.

    '내가 저 안에 있은 건가?'

    저 안에 있으면 감각을 빼앗기게 된다.

    그 상태에서 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가겠지.

    직접적인 공격이 아님에도 이리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흠……."

    하지만 이지혁은 아직 만족한 눈치가 아니었다.

    "일단계는 됐고……."

    아무리 좀비라 하더라도 베이스는 인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는다. 그 모든 것을 차단해 버리면 이성이 없는 좀비는 대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멀쩡한 서아영도 일순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좀비라면 더욱 빤하지.

    그나마 서아영은 자신에 대한 보호 본능이 살아 있으니 주변을 공격하려 들기도 했지만, 보호 본능이 극도로 제한적인 좀비들은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해봤거든, 이미!

    좀비 처음 보나!

    나는 자주 봤거든?

    온갖 실험도 다 해봤어.

    이런 경우 좀비들이 택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보이지도 않지만, 일단 어디론가 이동하려 든다.

    그러니까…….

    "흡."

    이지혁의 우수가 다시금 마나를 머금기 시작했다.

    확실히 한 번 육체에 담긴 마나가 정순한 것으로 교체된 탓인지, 과거에 비한다면 아주 소량의 마나로도 마법을 발현할 수 있었다.

    "솟아올라라!"

    이지혁이 양손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서 대지가 밀려 올라왔다.

    콰드드득!

    우르르릉!

    천둥이라도 떨어지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대지가 밀려 올라가며 거대한 돔을 완전히 감싸 버렸다.

    "후읍."

    이지혁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자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돔을 흡족하게 바라보겠다.

    "어때요?"

    이지혁의 물음에 최정훈이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모 해설위원께서 매우 좋아하시겠네요."

    돔구장은 순식간에 만들겠네.

    "뭔 소리예요?"

    "아닙니다."

    최정훈이 거대한 돔을 바라보다가 이지혁에게 고개를 저었다.

    "끝난 겁니까?"

    "일단 격리는 끝났고, 이제는 아주 간단한 일만 남았죠."

    "간단한 일요?"

    이지혁이 돔 한구석에 나 있는 검은 구멍을 가리켰다.

    "저기요."

    "네?"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로아벨을 보며 말했다.

    "뭘 해야 할지 알지?"

    "알긴 하지만……."

    로아벨이 벌레라도 본 듯 질색하며 말했다.

    "저 어둠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는군요."

    "안으로 넣어주리?"

    "…어둠을 정화하는 것이 신관의 의무죠."

    서아영이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내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른가 봐요, 엘프?"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지, 아주 다르지. 쟤는 특히 다르고.

    로아벨이 한숨을 푹 쉬더니 이지혁이 만들어놓은 통로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통로 앞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하는 겁니까?"

    이지혁이 어꺠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좀비들은 웬만하면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없다 보니, 저래놓으면 안에서 계속 그냥 기어 다니겠죠. 그러다 보면 튀어나오는 거예요."

    "네?"

    "저 봐요."

    어둠 속에서 좀비 몇이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오자 로아벨이 바로 신성력을 퍼부어 제압했다.

    "응?"

    "이제 저기로 나오는 애들만 바로바로 정화해서 후송하면 되요. 그럼 끝나는 거죠. 나중에 수가 좀 줄어들었다 싶으면 조금씩 좁혀 나가면 됩니다."

    "아……."

    이리 쉬운 것을…….

    그 개고생을 했다니!

    최정훈이 안구에 찬 습기를 닦아냈다.

    애초에 기본 능력치가 다르니 당연히 할 수 있는 방법도 다르리라는 걸 이해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왠지 손해 봤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끝난 겁니까?"

    "쟤들만 정리하면요."

    이지혁이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용케도 이지혁이 날린 다크니스의 범위에서 벗어난 능력자 좀비들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통은 제자리에서 당하는데, 쟤들은 나름 이성이 좀 남아 있던 모양이네요."

    에테르가 있어서 그런 건가?

    일반적인 좀비들과는 좀 다른데?

    "호오?"

    서아영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기분이 더러웠는데, 마침 적당한 화풀이 대상이 나타난 기분이었다.

    "이젠 마음껏 해도 되겠죠?"

    "음, 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라저."

    불꽃을 넘실넘실 피워 올리며 좀비들에게 다가가는 서아영을 보며 이지혁이 혀를 찼다.

    저러니 아직 시집을 못 갔지.

    누가 데리고 살려나.

    "아, 왜 귀가 가렵지?"

    최정훈이 마구 귀를 긁어 대기 시작하자 이지혁은 섬뜩한 기분이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 설마?"

    "네?"

    "아뇨, 아니에요."

    그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되네, 처남!

    "네?"

    영문을 모르는 최정훈이 자꾸 고개를 갸웃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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