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8화 (38/118)
  • [■] 넌 그냥 돌아가라, 제발 좀! [■]

    ─────

    "백만이라뇨. 베라프 역사상 가장 많은 군세가 모였을 때도 백만을 겨우 넘었어요. 알고 하시는 말씀이죠?"

    "아냐."

    이지혁이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마지막에 데라 라트렐에서 나를 막겠답시고 모였던 군대만 해도 이백만은 훨 넘었어."

    "…영광스러우시겠네요."

    "헤헤, 뭐, 그 정도 가지고."

    칭찬 아니야, 이 인간아!

    "그런데 저 혼자 그 많은 좀비들을 막으라는 말이에요? 좀비 백만이면 베라프에서도 총동원령이 떨어질 만큼 끔찍한 사태예요. 그런데 저 혼자 그걸 어떻게 해요?"

    "그래서……."

    이지혁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못하겠다고?"

    "……."

    저 '못하겠다고' 뒤에 숨겨진 말은 무엇일까?

    '그 정도의 의욕도 없느냐'일까, 아니면 '그럼 이제 쓸모가 없겠네'일까?

    어느 쪽이든 로아벨에게는 그리 달가운 말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모, 못하겠다는 건 아니구요."

    "그지?"

    이지혁의 얼굴이 다시 화사해졌다.

    그 가증스러운 표정의 변화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속이 불편해져 온다.

    "못하겠다는 건 아닌데,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거죠."

    "아냐, 넌 가능해."

    응?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너는 가능하지. 다른 놈들이면 모르겠지만, 너는 브즈고트가 미쳐서 은총을 내린 엘프잖아. 제정신 박힌 신 놈이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얼마나 니가 좋았으면 그랬겠어."

    "브즈고트 님을 모욕하시는 건가요!"

    "그럼 어쩔 건데?"

    "으으!"

    "불러서 푸닥거리라도 해보시든가. 아, 여긴 베라프가 아닌가? 어쩌지?"

    "……."

    로아벨은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이지만, 저 얄미운 인간의 주둥아리를 셉터로 후려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평정심, 평정심…….

    "왜? 안 오신다나? 그 잘난 브즈고트 님께서는 차원도 못 넘으신데?"

    "시, 신께서는 전능하십니다."

    "얼마나 전능하시면 나 하나 감당을 못해서 애들한테 쟤 좀 때리라고 징징댔겠냐. 대단한 전능신 나셨네."

    로아벨이 입에 거품을 물기 직전까지 몰리자 이지혁은 그제야 그녀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안 그대로 미친 엘프인데, 더 가지고 놀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쁜 놈, 독한 놈, 싸가지 없는 놈… 다 무섭지 않지만, 솔직히 미친년은 무서운 거다.

    로아벨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래서 제가 뭘 해야 한다구요?"

    "백만 명 정화."

    "하죠! 하겠어요!"

    로아벨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딴 거 빨리 해버리고 돌아가겠어요. 아니면 제 속이 먼저 터질 테니까요."

    "좋은 마인드다."

    아주 좋은 마인드야. 이걸로 부려 먹기 좋은 노예 하나가 또 탄생했군.

    이지혁이 싱긋이 웃었다.

    * * *

    "대체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그의 앞에서 핏대를 세우고 있는 제10군 사령관을 보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거고 저거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 한 잔만 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악마도 그의 영혼은 살 생각이 없는지 계약을 제시해 오는 일은 없었다.

    "국민이지 않은가."

    "이 방어선이 뚫리게 되면 진정한 국민이 될 겁니다. 모든 국민이 저렇게 될 거니까요. 저게 병이든 뭐든 아직 멀쩡한 국민에게도 저리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저들을 다 죽이자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 뭐, 좋아. 그리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차라리 그런 결단력이 있었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지."

    미합중국의 사령관 앞에서 크리스토퍼는 태연하게 시가를 피웠다.

    직책 자체는 사령관에 미칠 수 없는 그지만, 실제로 가진 권력이라든가 경력은 감히 사령관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육군 원수쯤은 와야 맥클라렌에게 상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말까일 텐데, 사령관쯤이야.

    "하지만 지금 불만을 토로하는 대상이 잘못되었지 않나? 내겐 결정권이 없어. 그런 걸 따지고 싶다면 저 위에 계신 분에게 하지그러나?"

    "그 양반들이 허락을 해줄 리가 있습니까?"

    "그럼 어쩌자는 건가?"

    "선 조치, 후 보고죠."

    크리스토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영창에서 한 열흘 푹 쉬다 나올 생각 있는가?"

    "농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알지."

    "평가는 역사가 해줄 겁니다. 이대로 우물쭈물하다가 조국을 좀비 소굴로 만들어 버린 역적으로 역사에 남고 싶으신 겁니까?"

    '그럼 다행이지.'

    역적으로라도 기록되면 다행이었다. 그 말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 이후로도 존속했다는 뜻이 될 테니까.

    안타깝게도 이 방어선이 뚫리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속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일단 북아메리카 대륙이 죽음의 땅이 되는 것만은 확정적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국장님!"

    "알았다니까!"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자 사령관은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이 남자의 심기를 거슬려서는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체 뭘 그리 기다리시는 겁니까? 기다리자, 기다리자고 한 지 얼마나 된 줄은 아시는 겁니까? 방어선은 계속 뒤로 밀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밀리면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 '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설명드리지 않아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러니 기다리자는 걸세. 아직 선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니까. 선이 무너진 후에 박멸에 들어가도 늦은 건 아니지 않나!"

    "그때는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알고 있다.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중의 상황이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구나 국민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란 말이다!

    크리스토퍼는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언제 오는 거냐고, 썩을 놈들!"

    "이 아저씨, 또 욕하고 있네."

    등 뒤에서 아주 반갑고도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도 반갑고, 너무나 얄미워서 반가움을 가장하여 베어 허그로 허리를 꺾어버리고 싶은 감정이 드는 목소리랄까?

    "여하튼 자리만 비우면 욕이에요, 욕. 이러니 사람을 믿고 일을 할 수가 있나?"

    어?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데?

    난 방금 영어로 말했는데,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아니, 그전에… 쟤 말이 뭔지도 내가 알아듣고 있는 건가?

    지금 이지혁이 영어로 말하고 있는 것 맞겠지?

    "왜요?"

    "……."

    "뭐?"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짧은 시간에 영어를 그리 유창하게 구사하실 수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대단하십니다."

    "아, 그거요?"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넘어갑시다."

    "네?"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 말하신다면야……."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번역 마법의 존재를 삼 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면 사람을 뭘로 볼 것인가.

    '너무 속성으로 살았어.'

    일단 마음에 안 들면 때려 부수고, '니가 나와 말을 하고 싶다면 니가 내 말을 배워와라'라는 자세로 천 년을 살다 보니, 사람이 융통성이 없어졌다.

    "이제라도 사람답게 살아야지."

    "무리."

    "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최정훈의 목소리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닙니다."

    최정훈은 깔끔하게 이지혁의 의문 어린 시선을 외면했다.

    "해결책은 찾아오셨습니까?"

    이지혁의 만담을 듣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크리스토퍼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론이죠."

    이지혁의 배가 앞으로 쭈욱 내밀어진다.

    그 꼴이 이상하게 보기 싫었지만, 크리스토퍼는 속마음을 숨길 줄 아는 어른이었다.

    "어느 분이십니까?"

    일단은 이지혁과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여기요."

    이지혁이 가리킨 곳을 보자, 성스러워 보이는 법복을 입은, 눈부신 미녀가 서 있었다.

    무엇보다 머리 위에 씌워진 성관의 좌우로 삐죽 솟아 있는 긴 귀가 인상적인…….

    "엘프?"

    "오, 바로 아네."

    "엘프가 실존했다니……."

    크리스토퍼는 묘한 감흥이 담긴 시선으로 로아벨을 바라보았다.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다른 사람이라면 시간이 좀 더 걸렸을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토퍼는 재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은 이런 것으로 감흥을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방어선을 넘으려 하고 있는 좀비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저 좀비들을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까?"

    "제 눈으로 봐야 알 듯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가시죠."

    크리스토퍼의 말에 일행이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나름 전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군용 지프에 몸을 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늘어선 바리게이트와 그 뒤를 메우고 있는 군대를 볼 수 있었다.

    "비효율적이네."

    이지혁의 말에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저었다.

    "순간적으로 높고 튼튼한 바리게이트를 지어보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상처 입히지 않고 제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높이 쌓아올려도 결국은 넘더군요. 인간이라면 못 넘을 곳은 좀비들은 잘도 기어오릅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적당한 바리게이트를 치고, 무너질 것 같으면 전선을 뒤로 물리기를 반복해 왔죠.

    "적당히 포획해서 가두면 안 됩니까?"

    "그런 수용 시설이 있다면 참 좋겠군요. 안 그래도 일부를 포획해서 연구 중이기는 합니다만……."

    둘의 말을 듣고 있던 로아벨이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는 무리예요."

    "…안 되는 겁니까?"

    "정화 자체는 어렵지 않아요. 악마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마계 생물에게 당한 것이라 무척 쉬운 편이죠. 하지만 문제는… 저렇게 뭉쳐 있어서는 정화를 하자마자 다시 물리고 감염될 뿐이라는 거죠."

    "아……."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저리 뭉쳐 있다면 치료를 한다고 해도 수십만의 좀비 떼 가운데에 멀쩡한 사람을 던져 넣는 꼴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수십에서 수백 단위로 쪼개서 빼와야 해요. 그런 뒤에 정화하고 안정적으로 치료해야죠."

    "흐음……."

    크리스토퍼가 난색을 표했다.

    "말이야 쉽지만, 저들은 좀비입니다. 저 좀비들을 무슨 수로 통제해서 빼낸다는 말입니까?"

    "통제가 아니라 포획이에요. 그리고 그런 쪽이야 전문가가 계시잖아요."

    "전문가?"

    로아벨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향하자 크리스토퍼가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괴수도 다루시지 않습니까?"

    "…그거 분야가 전혀 다른 거거든요. 소 치는 목동한테 '너는 소도 치니까 사자 조련도 해봐라'고 하는 거랑 다를 게 없는 일인데, 무척 태연하게 말씀하시네요."

    "그래도 안 다뤄본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아저씨, 대학은 나오신 거 맞죠? 미국에서도 나름 엘리트니까 이 자리 앉아 계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으세요! 관계가 없다니까!"

    "뭐부터 준비하면 됩니까?"

    "귀에 뭐 박아놨나! 팍, 씨!"

    "이지혁 씨가 처리하신단다! 준비해라!"

    …진짜 귀가 막혔나?

    저 인간의 귀를 어떻게 뚫어야 할지 고민하는 이지혁의 귓가에 최정훈이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힘내십쇼."

    …나 그냥 집에 갈까?

    이런 것들을 믿고 일을 해야 한다니.

    베라프가 그립다, 베라프가.

    처음으로 말이야.

    …에효.

    * * *

    "에그머니, 저걸 어쩌나?"

    박선덕은 황망한 얼굴로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끝까지 가득 찬 좀비 떼가 각종 군용차량으로 막아둔 바리게이트를 향해 휘적휘적거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영어로 지껄이는 욕들을 묵음 처리했는지, 삑삑대는 비프음이 화면 안에서 자꾸 들려오고 있었다.

    비명과 욕설, 고함 소리가 복잡하게 들려오는 와중에도 경찰들은 긴 곤봉과 진압봉으로 차량에 들러붙는 좀비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아아아악! 갓뎀!"

    한 경찰이 좀비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가자 기겁한 주변 사랍들이 허리춤에 묶고 있던 안전 줄을 잡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겨우겨우 빠져나온 경찰이 헬멧을 내던지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 LA에서 시작된 이번 사태는 갈수록 격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태가 장기화 면서 미 정부는 사태의 해결책을 고심 중입니다.

    곧 화면에 반쯤 머리가 벗겨진 중년인이 나와 연설을 시작했다.

    - 정부는 이번 일의 해결책을 다각적으로 찾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 생물학적 연구와 의학적 연구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번 일을 재해로 규정하고는 있으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 역시 국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그들이 모두 온전한 몸으로 가족들의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시 화면이 상공에서 찍은 모습으로 전환되었다.

    - 정부는 이처럼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하고는 있지만, 현실적인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건이 장기화되면서 처음에는 원만한 해결을 바라던 미 국민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잡아 인터뷰를 진행한 모습이 나온다. 얼굴에 모자이크가 된 것을 보아하니, 좋은 내용은 아닌 모양이었다.

    - 사실 저 사람들이 다들 돌아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방안도 고민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무작정 막아내다 보면 언젠가는 뚫릴 것이고, 그럼 희생자가 더 생길 텐데…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희생자들을 구제해 봐야죠. 그들 역시 국민인데, 국가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제가 저리 좀비가 되어 있다면 저는 너무 무서울 것 같아요. 그러니 그 사람들도 구해야죠.

    - 현실적으로 저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산 사람들을 위험으로 빠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 그런데 능력자들은 대체 뭘 하는 건가요? 이런 사태를 해결하라고 비싼 세금으로 연봉 주고 고용하는 것인데, 평소에 별일 아닐 때는 으스대더니, 막상 이리 심각한 일이 벌어지자 손도 못 쓰고 구경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인터뷰 화면에서 다시 뉴스 룸으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 박상천 특파원, 그럼 현지에서는 강구한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겁니까?

    - 현재 미 정부에서는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좀비화 사태의 원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에 해결책을 강구할 수가 없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 그렇다면 지금 나돌아 다니고 있는 좀비들을 포획하여 가두는 것은 어떻습니까? 불가능합니까?

    - 그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일단은 좀비들이 벽을 쉽게 오른다는 점을 감안하여 돔형 경기장에 존비들을 밀어 넣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돔구장의 천장이 좀비들의 타격을 버틸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와 폐지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섬에 격리하거나 알카트라즈를 재활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현재는 좀비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 실용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 수를 줄인다거나 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는 있을 텐데요?

    - 미 정부 역시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하고는 있지만, 과거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소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외신들은 어떠한 방향을 선택하든 정치적인 타격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 예, 박상천 특파원. 수고하셨습니다.

    * * *

    "어쩌니?"

    박선덕은 뉴스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땅콩을 까먹고 있는 예원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하지만 이예원은 눈은 화면에 있으나 머리는 다른 곳을 향해 있는지 영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너는 걱정도 안 되니?"

    "바다 건너 일인데, 내가 걱정해서 뭐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거 처음 벌레가 출현했을 때에는 그 벌레가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 걱정했지만, 바다로 날아가던 벌레들은 허무하게도 모두 추락하여 물고기 밥이 되었고, 미 대륙으로 번져 나간 벌레들은 특정 시간 이후로는 힘을 잃고 더 이상 감염자를 늘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지금도 간간이 살아 있는 벌레들이 발견되고는 있지만, 최초의 흉포한 공격성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포획되더라도 며칠 버티지 못한 채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미국이 저리 망하면 우리나라도 타격이 있을 텐데……."

    "왜? 다른 나라 망하는데 우리나라가 왜 타격이 있어?"

    "……."

    누굴 탓하겠는가.

    딸내미라고 낳아는 놓고 키우지 못한 그녀의 잘못이지.

    이제 와서 '내 딸이지만 왜 이리 무식하니?'라고 말해봐야 제 얼굴에 침 뱉기밖에 안 되는 것이다.

    "너희 오라비가 이리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너는 동생이 되어서!"

    그리 욕할 수 없으니 괜히 꼬투리를 잡는 박선덕이었다.

    "오라비도 뭘 알아서 그러는 건 아닐 거야. 최정훈 아저씨가 해야 한다니까 뭣도 모르면서 그러고 있겠지."

    "아……."

    뭔가 납득이 되는 것이 서글프다.

    자식농사는 글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은 답이 없고, 하나밖에 없는 딸년은 바보가 되었다.

    "셋째를……."

    "응?"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은 건 아니겠지?

    어떻게든 하나 더 낳아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애로?

    "여보, 나는 좀……."

    응?

    박선덕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이철중이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뭐가요?"

    "…셋째는 무리 아닐까?"

    "……."

    고개 숙인 남성이여.

    오늘도 아버지는 그렇게 힘없이 박선덕의 시선을 피하고야 말았다.

    덕분에 다행히 이씨 집안의 셋째라는 인류적 재앙은 생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첫 번째 재앙이었는데…….

    * * *

    "뭘 어쩌자구요?"

    서아영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동안 이 인간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질리게 경험했다. 하지만 매번 색다른 미친 짓을 가지고 나와서 이야기하는 데는 이제 질려 버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 좀비들을 뿔뿔이 흩어서 소규모 군집으로 나눠서 정화하고 탈출시키기를 반복하자는 건가?

    저 좀비들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면서?

    "저, 이지혁 씨……."

    서아영은 오늘만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로 했다.

    더 이상 눈치 봐가며 이야기하다가는 그녀의 속이 먼저 타버리고 말 것이다.

    "그게 지금 가능하다고 하는 말은 아니시죠? 아니, 가능이야 하겠죠. 지금까지 미친 소리를 많이 하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안 되는 일을 하자고 한 적은 없으니까요."

    뭔가 칭찬 같은데 이상하게 비꼬는 느낌이 나는 것은 무엇인가.

    이지혁은 그 미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요?"

    "하지만 이건 우리가 끼어들기는 좀 애매한 일 아닌가요? 지금까지 정부의 요청에 제가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은 이 일이 실질적인 우리 대원들의 피해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다 보면 분명 피해가 나올 건데, 그걸 어떻게 하시려구요? 미 국민? 중요하죠. 사람은 다 중요하고, 인간은 다 중요해요.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월급 받는 한국인이에요. 전 이런 거 용납 못해요."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저……."

    "네?

    "그 피해라는 게 뭘 말하는 건가요?"

    "좀비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당연히 피해가 없을 수 없죠. 감염되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건데요?"

    "아, 감염."

    이지혁이 알겠다는 듯, 모르겠다는 듯한 눈으로 서아영을 슬쩍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턱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됐죠?"

    "……."

    그곳에는 로아벨이 새침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는 좀비한테 물린다고 치더라도 회복시켜 줄 사람이 있구나.

    그걸 생각 못했네?

    서아영이 순간 할 말을 잃고 머뭇대자 최정훈이 구원 타자로 나섰다.

    "따져 보면, 이제 힘들기는 하지만 위험도는 적은 일이 된 겁니다. 이때 이 사태를 해결해 주고 미국에 큰 빚을 지워두면 이득인 거죠."

    "정말요?"

    "안 그렇겠습니까?"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요……."

    "네?"

    "저번에도 미국에다 빚을 지워두면 우리가 얻는 게 있으니까 해야 한다는 식으로 계속 말씀을 하시던데……."

    "그렇죠."

    "그런데… 그 빚, 언제 받나요?"

    "…네?"

    서아영이 뚱하게 물었다.

    "자꾸 우리가 뭐 받아낼 게 있다고는 말씀하시는데, 따져 보면 자꾸 우리가 해줘야 할 게 생기는 상황이거든요. 앞으로도 게이트는 계속 열릴 거고, 문제는 계속 생길 텐데, 그런 식으로 언젠가는 '받겠지, 받겠지' 하다 보면 계속 받을 것은 못 받아내고 일만 계속해야 되는 상황이 오는 거 아닌가요?"

    "…아?"

    최정훈이 멍한 얼굴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그거…….

    아니, 냉정하게 따져 보면 서아영이 하는 말이 맞는 거 아닌가?

    "그게, 그리… 그……."

    천하의 최정훈조차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보니 지금 당장은 이럴지라도 앞으로 가면 갈수록 그들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다시 보면 앞으로도 그들이 도움을 줄 일이 많았으면 많았지, 딱히 도움을 받을 일이 그리 있을지는 모르겠다.

    경제원조 같은 거야 받을 수 있겠지만, 이지혁이 밖으로 돌며 한탕씩만 뛰어줘도 미국이 해주는 경제원조 이상의 것을 벌어들일 수 있을 테니까 실질적으로는… 에, 그러니까…….

    "흐으으으음?"

    순간, 등 뒤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받을 게 없다?"

    "하하……."

    "이 개고생을 하며 뛰어다녔는데, 내가 받을 게 없다? 개고생만 했다? 남 좋은 일만 시켜줬다? 그런 말은 아니시겠죠?"

    "그럴 리가요……."

    그럼 안 되죠.

    그럼요, 그럼 안 되는 거죠.

    그랬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라고 제가 그걸 좌시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죠?"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내가 살려면 반드시 결과를 내야 한다!

    최정훈은 그런 다짐을 했다.

    "결과를 얻어내는 건 최정훈 씨의 일이고, 일단 저는 자꾸 우리가 미국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 주고만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미국이 굽실대는 맛에 즐거웠는데, 따져 보면 쟤들은 고개만 숙이고 이득은 다 얻는 거잖아요?"

    최초로 최정훈의 무능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 볼 수도 있겠네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최정훈은 금세 쿨한 대처를 보였다.

    "그러니 보여 드려야죠."

    우드득.

    최정훈의 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서아영은 방금 생각한 쿨한 대처라는 말을 수정했다.

    '난리 났네.'

    자존심에 상처 입은 남자만큼 무서운 건 없는 법이다.

    그게 최정훈이라는 남자라면 더더욱!

    * * *

    "뭐라고?"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안 한다고?"

    "네."

    부관의 말에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왜 이러지?

    당장 얼마 전만 해도 어떤 식으로 작전을 짜야 할까 같이 고민하던 이들이 갑자기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뭔 일이 벌어진 거지?"

    조금 전까지는 적당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좋다고 헥헥대던 개들이 일순간 뒤로 돌더니 뒷발로 흙을 뿌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개가 행동 교육이 안 돼서 언제 사람을 물지 모른다는 측면은 있지만, 지금까지는 나름 말을 잘 듣던 사냥개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매우 황당한 일이었다.

    '이지혁인가?'

    그야 워낙에 변덕스러운 사람이니까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야 않지.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지 않은가.

    "연락해 봐. 내가 직접 만나야겠어."

    "미국으로 올 생각이 없다는데요?"

    "그럼 내가 가면 되는 거 아니야! 한국으로 갈 테니, 텔레포터 준비해."

    "아, 그게……."

    부관이 미묘한 얼굴로 크리스토퍼를 바라보더니, 어눌하게 말을 이었다.

    "한국에 마커를 해둔 텔레포터가 없습니다."

    "……."

    이런 미친!

    크리스토퍼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름 신경을 쓴다고 한 건데 지금 와서 보니 한국이라는 나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으면서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는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커조차 없다니.

    그가 조금만 신경 썼다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충 전화만 해도 워낙에 잘들 날아와 주다 보니 핫라인을 만들어두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멍청하게.'

    변덕스러운 게 사람의 마음이고, 그 사람의 마음보다 더 변덕스러운 게 국제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요즘 너무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그 관계들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것이다.

    '실책이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어떻게 다잡느냐다.

    "가장 가까운 마커가 어딘가?"

    "일본입니다."

    "씁."

    크리스토퍼는 속이 쓰렸다.

    일본이라니.

    현재 국제 관계로 따지자면 일본은 한국에는 비견조차 할 수 없는 국가다. 그런데 그 얼마 없는 텔레포터의 마커를 중국도 아닌 일본에다 낭비하고 있으면서 한국에는 마커를 찍어두지 않았다니.

    '처음부터 다시 밸런스를 잡아야겠어.'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일본으로 간다. 주일미군에 헬기 수배해 놔."

    "예."

    크리스토퍼는 씁쓸한 얼굴을 한 채 자리로 향했다.

    '얼마나 내줘야 하는 건가?'

    그의 눈앞에 사람 좋은 모습으로 웃고 있을 최정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끙……."

    이제 그가 얼마나 거물인지 확인해야 할 시점이었다.

    * * *

    "오셨어요?"

    NDF 건물에 들어서자 대뜸 이지혁이 크리스토퍼를 맞았다.

    크리스토퍼는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국의 땅에서 보니 느낌이 새롭군요. 반갑습니다, 이지혁 씨."

    "네, 반가워요. 이쪽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헬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능력자 거주구 쪽으로 헬기 진입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서 다시 차를 갈아타게 되면서 그의 짜증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외교관으로서 움직이는 거라면 이 정도의 힘 싸움이나 줄다리기야 흔한 일이지만, 최근 십여 년 사이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보니 저쪽이 갑이라는 생각이 실감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이지혁이라니…….

    말단을 내보내 맞게 하면서 기 싸움을 하는 경우야 흔하지만, 최정훈은 그가 껄끄러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이지혁의 얼굴을 보니 위장이 쿡쿡 쑤셔오는 기분이었다.

    "최정훈 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고 있어요."

    "네."

    딱히 더 할 말이 없다는 이지혁의 태도에 크리스토퍼는 쉽지 않겠다는 얼굴로 뒤를 따랐다. 조그만 건물이다 보니 멀리 갈 일은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의실로 이어지는 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지혁 씨는?"

    "전 뭐, 어차피 그런 거 들어도 잘 모르니까요. 들어가셔서 두 분이 이야기하시면 되죠."

    "최정훈 씨 혼자입니까?"

    "네."

    애송이군.

    크리스토퍼는 급해서 수행원도 제대로 못 끌고 온 참이었다. 이럴 때 수로서 압박하는 것이 협상의 기본인 것을.

    이런 일에는 여유가 기본인데, 불러들여 놓고도 자신이 여유가 없다는 것을 티 내고 있으면 안 되지.

    이지혁 덕분에 위치 자체는 거물급으로 성장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영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있군.

    그렇다면 적당히 구워삶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에 미국의 운명이 달렸으니 윽박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겠다고 다짐한 크리스토퍼가 헛기침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는 보았다.

    상석에 앉아서 다리를 꼰 채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최정훈을.

    어?

    저건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닌가?

    …보통 저렇게까지는 안 하는데?

    그런데 저거… 그림이 나오기는 하네?

    기럭지도 길고 잘생긴 놈이 검은 슈트를 입은 채 담배를 꼬나물고 있으니, 무슨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과거 즐겨 보던 홍콩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 크리스토퍼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어 버린 마음을 다독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여기서라면 다짜고짜 권총을 꺼내 머리를 날려 버리지는 않을 테니, 겁먹을 일은 아니겠지.

    "오셨습니까?"

    낮은 말투.

    크리스토퍼는 입술을 살짝 축였다.

    이상하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바, 반갑습니다."

    "먼 길 오셨는데, 서론은 적당히 하고 바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앉으시지요."

    "아, 네!"

    조금 당황하여 자리에 앉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이지혁은 씨익 웃으며 문을 닫았다.

    이지혁이 직접 나서서 압박하는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최정훈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향일 것이다.

    그렇기에 몇 가지 장치를 해두었고, 최정훈은 그것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었다.

    "고생하라고."

    …크리스토퍼 맥클라렌 씨.

    * * *

    "잘되고 있는 걸까요?"

    "아마두요?"

    김재범의 물음에 서아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둘이서 협상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최정훈 씨잖아요. 알아서 잘하시겠죠."

    "상대가……."

    너무 나쁘잖아.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란 말이다. 이쪽 계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입사와 동시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외워야 하는, 이 바닥의 전설이라고!

    블랙 먼데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세계의 정보계를 한 손에 쥐고 휘둘렀을 사람이다. 낮의 황제가 미 제국의 대통령이라면, 밤의 황제는 그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단 말이다.

    그런 사람과 독대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잘 알아서 할 거예요."

    "……."

    김재범이 영 못 믿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서아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지혁에게 물었다.

    "그렇죠?"

    "어."

    이지혁은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러시네."

    김재범의 투정에 이지혁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안 되면 그만이고. 지금 한 번 어떻게 얻어먹어 보겠다고 여럿이서 상대하다 보면 나중에는 호구돼. 비슷하게라도 들이밀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지 우리도 편해지지."

    "그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사자랑 늑대를 일대일로 붙이지는 않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지혁이 말을 이었다.

    "그리 밀릴 사람도 아냐."

    "네?"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최근 들어서 좀 호구스러운 이미지가 되기는 했지만, 그건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 벌어져서 그런 것일 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최정훈이라는 사람은 이지혁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이지혁이 껄끄럽게 느끼거나 이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낀 사람은 최정훈이 유일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의자에 드러누워 고개나 까딱거릴 이지혁이 그만큼이나 신경을 썼다는 것만 해도 최정훈의 능력은 증명된 셈이었다.

    요즘 하도 이지혁에게 휘둘리다 보니 사람이 좀 멍청해 보이는 것이지, 그가 진짜 멍청한 사람이었다면 이지혁이 상대나 했겠는가.

    "나옵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로 들어오며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본 이들은 협상이 어떻게 끝났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벌레라도 씹은 듯한 얼굴로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느라 눈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크리스토퍼와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대는 최정훈을 보면 결과야 빤했다.

    '확실히 능력 하나는…….'

    서아영이 그런 최정훈을 보며 감탄했다.

    이제 겨우 서른을 갓 넘은 나이로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다는 게 쉬운 일일 리 없었다.

    '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주겠지'라는 기대가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를 이해 못할 서아영도 아니었다.

    그녀도 젊을 때부터 그런 기대를 받아왔으니까.

    그런데 최정훈은 그러한 기대를 당연히 받고, 당연하다는 듯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끝났어?"

    저 인간이랑은 다르게 말이다.

    서아영의 눈에 귀찮음이 가득한 이지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 따져 보면, '이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주겠지'가 가장 심하게 기대되는 사람이 이지혁이고, 그러한 기대에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부응해 주고 있는 사람도 이지혁인데…….

    왜 저 인간에게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걸까!

    인식 디버프라도 있나?

    "왜? 뭐?"

    서아영의 눈초리가 이상하자 이지혁이 단박에 알아채고는 노려보았다.

    "말을 말아야지."

    "뭐, 뭐!"

    이지혁이 발끈하자 서아영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을 해서 무엇하리, 내 입만 아프지.

    "협상은 끝났습니다. 대한민국은 협상의 조건을 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크리스토퍼의 딱딱한 목소리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이제 이지혁 씨가 나서주실 땝니다."

    "안 할 건데?"

    "…네?"

    얻어낼 걸 얻어내라고 할 떄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냐, 이 미친놈아!

    욕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폭동을 일으켰지만, 최정훈은 타국의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을 몇 번이나 되뇌면서 참아냈다.

    "그럼요?"

    "댁들이 하면 되는 거죠."

    "……."

    이지혁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자꾸 내가 해주다 보니 의존병에 걸린 모양인데, 딱히 위험할 것도 없고, 대단할 것도 없이 그냥 귀찮기만 한 일이니까 알아서들 해봐요. 정화할 사람도 데려다 줬는데 어디까지 해달라고? 나중에는 기저귀도 갈아달라고 하겠네."

    "그건 아펠드리체 님께서……."

    "걔는 왜 왔는데?"

    "……."

    와, 할 말이 없다는 게 이리 짜증나는 일일 줄이야!

    최정훈은 한숨을 푹 쉬고는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 좀……."

    "왜요?"

    "저희끼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왜요?"

    "…네?"

    서아영이 당당히 말했다.

    "얻을 거 얻었으면, 이제 우리끼리도 할 수 있는 거죠.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최정훈 씨, 한국이 최강인 건 이지혁 씨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저 사람이 없어도 이제 우린 최강이죠. 이번에 그걸 증명해 드리죠."

    서아영의 당당한 발언에 최정훈이 감격에 젖은 눈을 했다.

    그래…….

    이게 플레임 위치 서아영이지!

    돌아왔구나.

    "어? 정말? 나 그럼 다른 나라 가도 돼?"

    …넌 그냥 돌아가라.

    제발 좀!

    * * *

    오랜만에 이지혁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동안 그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꼴을 보다가 이제 편히 앉아서 쉬려니, 무척이나 편안하고 즐겁고 아주 행복해야… 하는데!

    이지혁이 손톱을 물어뜯는 것을 본 정해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 걱정되면 나서서 뭐 좀 하든가."

    "걱정? 내가?"

    이지혁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피식 웃었다.

    "걱정이라니! 내가 왜 걱정을 해! 이제야 일 좀 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날아갈 것 같구만!"

    다리를 그렇게 떠시다가는 진짜로 날지도 모르겠네요.

    정해민은 전동기라도 매단 듯이 초고속으로 달달 떨리고 있는 이지혁의 다리를 보며 혀를 찼다.

    저리 못 미더울까.

    세상에 꼭 그런 사람이 있다.

    입으로는 귀찮다고, 귀찮다고 생난리를 치다가 막상 일에서 손을 떼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처리하는 것을 믿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사람.

    타고난 조장이자 조별 과제의 희생양이 되고 마는 인종들.

    아닌 줄 알았는데, 이지혁이 딱 그 과였다.

    "그리 못 미더워?"

    "응?"

    "그럴 거면 훈련은 뭐하러 시켰어? 사실 그만큼 고생해서 훈련시켜 놓고 제대로 부려먹지도 못하고 있던 거잖아."

    "으음……."

    사실 정해민도 그 훈련의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정해민의 눈에는 그 많은 대원들을 훈련시키느라 한시도 쉬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누비던 이지혁이 더 힘들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냉정하게 따져 봐도 참 착한데 말이야."

    "응? 뭔 개소리야?"

    "애들 다칠까 봐 훈련시켜 줘, 훈련시키는 6개월 내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죽어라고 동분서주해. 그러고 나서 현실로 돌아왔는데도 부려 먹기는커녕 다칠까 봐 뒤로 쭉 빼놓고 자기가 앞서서 다 싸워."

    아…….

    듣고 보니 그러네?

    나 지금까지 대체 뭐한 거지?

    "그렇게까지 했는데 대접은 못 받고, 만날 욕이나 먹고. 왜 그리 살아?"

    "그만!"

    거기까지.

    더 이상 했다가는 내 안구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으니, 거기까지 하자고.

    자꾸 안구에 습기가 차잖아!

    내가 욕이나 먹으며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데!

    자꾸 알아서 욕을 하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하지?

    내가 들어도 그렇고, 쟤가 말하는 거도 그렇고, 참 착하게 살았다 싶은데… 쟤들은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베라프에서 이 정도로 누군가에게 베풀어줬으면 은혜를 못 갚아 안달일 텐데.

    내가 배고프다 그러면 지 팔이라도 잘라서 구워 올걸?

    진짜로 말이야.

    그런데 여기서는 이만큼을 해주고도 욕이나 퍼먹고 있으니…….

    "베라프가 양반이었지."

    "응?"

    "아니야."

    그노무 동네 정말 싫다 못해 증오스러울 정도지만, 꿈에도 그리던 지구로 돌아와 몇 달 살다 보니 그래도 그 동네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 동네는 얼마나 명확하고 명쾌했던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그 명제만 기억하고 있으면 복잡할 것도 없고, 짜증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은혜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은혜가 되기도 하는, 이상한 곳이었다.

    '내가 너무 베라프에 젖은 걸까?'

    그동안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피해왔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지구로 돌아왔던 초기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거, 기억과 정신이 고정되어 있었을 때, 그에게 있어 베라프에서의 경험이라는 것은 그저 아는 지식이 더 늘어났다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책장에 아무리 책이 쌓여도 읽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이지혁에게 있어서 베라프에서의 경험이라는 것은 체화되지 않은 지식의 향연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구로 돌아와 고정이 풀리면서 베라프에서 겪은 경험이 이지혁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 베라프에서는 경험한 것을 체화할 수 없었기에 항상 어색하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베라프에서의 삶이 체화되기 시작하니, 되레 이 세상이 슬슬 이상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도 많이 변했지."

    "응? 뭔 소리야?"

    "니가 뭘 알겠냐."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말한다고 알겠는가.

    지구로 돌아온 초기의 이지혁이었다면 아펠드리체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찢어 죽여 버렸을 것이다. 지금처럼 옆에다 두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장난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지혁에게 있어서 베라프의 존재라는 것들은 증오스럽고, 또 증오스러운 존재들이었으니까.

    아펠드리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그에게 호의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앞을 끈질기게도 막아섰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러니 과거 멸망의 좌일 때였다면, 그녀의 목을 따는 것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망설인다.

    처음 본 그때 바로 죽이지 않고, 무슨 이유로 내 앞에 나타났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이지혁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이제야 나다워진 거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 길었던 경험들이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일 리가 없었다. 이제야 이지혁은 본래의 모습을 찾은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꺼워할 일이기는 하지만…….

    '나약해졌어.'

    과거였다면 정이라는 것에 휘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라프에서의 이지혁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고, 정이라는 것에 이끌려서 다른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 주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과연 이러한 변화가 이지혁이 천여 년 만에 진정한 '사람'을 다시 보게 되어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성격이 변한 것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쪽이든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정에 이끌리는 자는 파멸한다.

    수많은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며 이지혁이 얻어낸 교훈 중의 하나였다.

    "끙……."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질게 대하지 못한 것이 이지혁의 실착이라면 실착이었다.

    지금은 딱히 큰 문제가 없지만, 어설프게 만들어낸 이 관계는 언제고 이지혁의 목을 조여올 것이다.

    과거, 그렇게 쓰러져가는 거인들을 보면서 참 미련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지혁이 그 입장이 되어보니 그들이 왜 그리 미련하게 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의 관계라는 것은 칼로 끊듯이 확실히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뭔 생각을 그리해?"

    정해민의 부름에 현실로 돌아온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넌 좋겠다."

    "왜?"

    "생각 없이 살 수 있어서."

    "이게 누나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그리고 나 생각 없이 사는 거 아니거든? 나도 나름 복잡하거든?"

    "니가 왜 복잡해! 니가 생각할 게 뭐가 있다고?"

    "앞으로 뭐해서 먹고살아야 하느냐도 있고… 여하튼 복잡하거든?"

    "아이돌질이나 하면 되지."

    "요즘 능력자 아이돌들 다 해체하는 추세야."

    "왜?"

    "왜긴 왜야, 안 팔리니까 그렇지. 나도 CF 들어오던 거 다 없던 이야기됐고, 심지어 그전에 계약했던 CF들도 요즘 해지 들어오고 있어. 계약을 애매하게 해놔서 위약금도 딱히 못 받았단 말이야."

    "니가 뭔 걱정이야."

    "왜 걱정이 아냐."

    "정 아이돌질 못해 먹겠으면 택배 회사에 취직해. 해외 긴급 택배만 배송해도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 없을 테니까."

    "화내려고 했는데, 그거 솔깃해서 슬프다."

    한때는 그래도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한 아이돌인데, 국제 택배의 아이돌로 전직이라니.

    어쩌다가 처지가 이렇게 되어버렸나 싶은 서글픔과 그래도 먹고살 길은 확실히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뿌듯함이 공존하는,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정해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직업에 귀천이 어딨어."

    "그래도 나는 아이돌이 하고 싶었는데……."

    "아쉬워 안 해도 돼. 사실 그 나이에 아이돌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야. 말은 안 해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너 진짜 싫다. 한 대만 때려도 돼?"

    "안 돼."

    이지혁은 깔끔하게 정해민을 무시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연쇄살인 건도 대충은 잊혀졌을 텐데 아직도 능력자들에 대한 배척이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라는 것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언제까지 참아낼까?'

    사실 보통 사람들이 능력자를 배척하는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종이 자신과 다른 존재를 얼마나 배척하는지는 이지혁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능력자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지금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능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반인들에게 딱히 받는 것이 없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기반 시설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인이라는 사실 외에 그들이 보통 사람들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같은 인간이니 지켜야 한다는 말은 배척당하는 입장에서 들어줄 만한 말이 아니고, 일반인과의 밸런스가 깨지면 언젠가는 세계가 몬스터로 들어찰 거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와 닿지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정말 능력자들이 일반인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면?

    "멸망각이지."

    "너, 자꾸 혼자서 뭐라고 중얼대는 거야? 더위 먹었어?"

    "얼어 뒈지겠는데 더위는 무슨! 그리고 너, 할 짓 없으면 저리 가서 귤이나 까먹어! 왜 사람 옆에 찰싹 붙어서 귀찮게 하냐!"

    "…말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이해해……."

    얼마 전까진 나도 그랬거든.

    "시작하는 모양인데?"

    "흠?"

    이지혁이 눈을 빛내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서아영과 최정훈, 크리스토퍼가 뭔가 정리를 끝낸 듯 서로를 향해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저건 끝나고서 해야 하는 일이지."

    시작할 때 잘해보자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못해보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이지혁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셋은 각자의 포지션으로 향했고, 이내 작전이 시작되었다.

    "저러다 다 엎어지지."

    "악담을 해라, 악담을. 너는 잘되길 바라는 거야, 망하길 바라는 거야?"

    "…반반?"

    "진짜 성격 이상하다니까."

    솔직한 심정인데 어쩌라고?

    저렇게 잘들 알아서 나 없이 다 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반이고, 그래도 그러면 배 아플 거 같으니까 하다가 좀 삐끗했으면 좋겠다는 심정도 반이었다.

    인간이 그렇지.

    손에 든 걸 놓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놓지 못해서 쩔쩔매는 게 인간 아니던가.

    절대왕정을 만들어서 떵떵거리던 루이 14세가 살인적인 업무량 앞에서 과로사했듯이 말이다.

    응? 과로사 맞나?

    여하튼 일찍 죽었을 거야.

    "시작한다!"

    정해민의 말과 동시에 바리게이트 위에 있던 김다현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호오?"

    시작은 김다현인 모양이었다.

    김다현은 백만에 달하는 좀비 떼를 앞에다 두고도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어 대더니,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자, 그럼……."

    김다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속을 하기 시작했다.

    이내 한 줄기 검은 유성처럼 잔상을 긴 꼬리처럼 남긴 김다현이 좀비 떼의 한끝을 향해 돌진했다.

    * * *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

    대한민국을 넘어서 이제는 세계 최속을 자부하는 한국의 능력자.

    현실에서는 동생에서 치이고, 이지혁에게 치이는 서글픈 인생이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주변이 워낙 괴물 같은 인간의 집합소라 그렇지, 그 혼자만 따로 놓고서도 전 세계 최상위의 능력자라고 자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다현이 울분을 담아 소리쳤다.

    "사람 좀 무시하지 말라고오오!"

    음속을 초월한 상태라 파공음에 묻혀 그의 목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가공할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쯤은 좀비들도 알 수 있었는지, 좀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기에 거리는 너무 짧았고, 좀비들의 반응속도는 느렸으며, 패스 드리프터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차핫!"

    김다현이 주위의 좀비들을 좌우로 밀어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딱히 손을 쓰거나 걷어차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몸 주위에 형성된 바람의 장막이 알아서 흐느적대는 좀비들을 밀어내며 커다란 길을 만들어냈다.

    우선은 구석에 있는 소수의 좀비들을 무리에서 떨어뜨린다.

    "흠……."

    그 뒤를 박성찬이 부지런히 쫓아왔다.

    "으라차아!"

    김다현이 만들어낸 길 사이로 뛰어든 박성찬이 한쪽으로 분리된 좀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던지기 시작했다.

    구석에 미리 준비된 매트 위로 던져진 좀비들이 비척대며 일어날 즈음, 매트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미국의 능력자들이 좀비들을 매트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내리눌렀다.

    "언제 와!"

    날카로운 음성이 터져 나올 때쯤, 정해민이 로아벨을 데리고 그들의 앞에 텔레포트해 왔다.

    "어서!"

    로아벨이 입도 떼지 않은 채 셉터를 들어 올리고는 외쳤다.

    "브즈고트시여!"

    그녀의 셉터에서 물빛의 신성력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식하기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지혁이 혀를 찼다.

    세상의 모든 일은 효율이 기본이 아니던가.

    100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100의 힘만을 쓰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저 인간, 아니, 엘프는 100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몇 만의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콰아아아!

    신성력이 좀비들에게 쏟아진다.

    말 그대로 신성력으로 샤워를 한 좀비들이 전신을 뒤틀며 기괴한 괴성을 질러 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끝난 겁니까?"

    로아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펠드리체가 미리 걸어놓은 통역 마법 덕분에 대화를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이들을 한쪽으로 옮겨주세요."

    "라져."

    미리 이들에게 최대한 협조하라는 지시를 받아두었기에 다들 별 불만 없이 로아벨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또한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표출할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또 와요!"

    매트가 비워지기 무섭게 다시금 박성찬이 날려 버린 좀비들이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엄청 급하시네."

    하기야 이렇게 100단위로 좀비들을 끊어서 정화시킨다면 산술적으로 쳐도 만 번의 정화가 필요했다.

    이런 속도로 한다면 하루 종일 해도 정화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해민이 로아벨의 손을 잡았다.

    "시간 없어요."

    그러고는 깔끔하게 텔레포트를 하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하앗!"

    서아영의 방식은 간단했다.

    아무리 좀비들이 정신이 없다곤 하더라도 불덩어리가 다가오면 전진하지 않고 물러서는 정도의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는 듯했다.

    덕분에 서아영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쉽게 일을 할 수가 있었다.

    화염을 피워 올려 들이밀기만 해도 좀비들이 우르르 좌우로 물러섰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기름을 퍼부어서 화염 띠를 둘러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네요."

    최정훈의 말에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저었다.

    "누가 그런 걸 생각 안 했겠는가? 하지만 그러다가 저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건가? 플레임 위치는 좀비들이 다가오면 화염을 물릴 수 있으니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그런 짓을 했다가 누가 타 죽기라도 하면 전국적인 비난에 시달렸을 걸세."

    "원래 정치란 그런 거죠."

    "알고 있으니 문제지."

    크리스토퍼는 인상을 썼다.

    말이야 쉽지.

    저 많은 좀비들을 뒤로 물릴 만한 열기의 화염을 제 마음대로 뿜어낼 수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의 화염 능력자라면 자신의 머리통만 한 화염구도 만들어내기 힘들 터인데, 손가락 하나로 집채만 한 화염을 만들어 그걸 던지는 것도 아니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 플레임 위치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만약 플레임 위치가 처음부터 저 정도의 능력자였다면,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것 없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의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전까지 플레임 위치는 강하기는 하지만 딱히 희소성이 없는 화염계 능력자에 불과했고, 한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며 데려올 만큼 대단한 능력자는 아니었다.

    "끄응……."

    크리스토퍼의 눈이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저 인간은 대체 뭔 짓을 한 거지?

    아니면 몇 달 전까지 미 정보국이 헛짓거리만 했다는 건데, 서아영 한 명이면 이해해도 NDF 전원을 잘못 파악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 세계를 도청한다고 불리는 미 정보국의 이름이 아까울 테니까.

    서아영의 화염이 좀비들을 분리해 내자 어디선가 나타난 정해민과 로아벨이 그들을 향해 신성력을 퍼부어 댔고, 신성력 샤워를 마친 좀비들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미국의 능력자와 특수부대원들이 쓰러진 좀비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자 정해민과 로아벨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텔레포트를 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 크리스토퍼의 무전기가 울렸다.

    치익.

    - 국장님.

    "어떻게 됐나?"

    - 쓰러진 사람들이 피부색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확실히 회복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 겉으로는 완벽하게 사람으로 변했다고 하더라도 안심하지 말란 말이야. 모든 검사를 완벽하게 끝내서 재발의 위험이 없다고 판단된 사람만 격리를 풀고 병원으로 옮기도록."

    - 환자만 백만에 달할 텐데, 그 많은 이들을 수용할 병원이 없습니다. 분산 수용한다고 해도 한계가 극명합니다.

    "야전 텐트라도 치란 말이야, 이 새끼야!"

    거칠게 무전기를 끊어버린 크리스토퍼가 초조한 눈으로 좀비들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소강상태라 딱히 큰 움직임이 없지만, 만약 이들이 다급하게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그때, 좀비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리게이트를 뒤로 물리면서 좀비들이 달려드는 것이 잠시 멈췄는데, 능력자들의 공격이 자극을 주었는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바리게이트를 사수해라!"

    크리스토퍼가 목청이 찢어지도록 소리쳤다.

    일단은 막아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지금 정화가 되고 있다지만, 방어선이 뚫리게 되는 순간 좀비들이 퍼지기 시작할 테고, 그리된다면 하나하나 잡아서 정화하는 것보다 좀비가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빠를 수도 있었다.

    "이제 끝이다! 조금만 더 막으면 된다!"

    아직 저 많은 좀비들을 정화하려면 시간이 한참 더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인다고 해도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작업이다. 거기에다가 지금 정화를 하고 있는 로아벨이 그 시간 동안 끊임없이 신성력을 뿜어내 줄 수 있는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독려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막아라! 우측 방어선이 엷잖아! 추가 투입하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 능력자들이 구출 작전에 투입되어 있어서 인원이 모자랍니다."

    "제길."

    크리스토퍼는 통제 센터 가득한 모니터를 보며 이를 갈았다.

    방어선이 워낙에 넓다 보니 육안으로는 전체를 파악하고 효율적인 배치를 할 수가 없었다.

    각각에 통제관을 두고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으면서 모니터를 죽어라고 번갈아 봐야 겨우겨우 배치가 완료될 정도였다.

    그런 상황인데 구출 작전에 투입된 능력자들의 수가 빠져나가다 보니 지금까지 겨우겨우 유지해 오던 밸런스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도, 돌진! 좀비들 돌진합니다!"

    "맙소사……."

    크리스토퍼의 눈에 바리게이트를 향해 질주하는 좀비 떼가 들어왔다.

    전 라인으로 몰아치는 좀비들.

    저걸 막아낼 수 있다면 이 사태는 어떻게든 해결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괜히 벌집을 건드린 꼴이 될지도 모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고 해!"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도 못한 채 소리만 지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지만, 지금 이 사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정화 속도를 올릴 수는 없습니까?"

    그를 향한 다급한 목소리에 최정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돕고는 싶지만, 제가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그저 서둘러 달라는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거라도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크리스토퍼가 얼마나 속 타는 심정인지 알기에 딱히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크리스토퍼가 무전기에 대고 고함을 쳤다.

    "여기가 뚫리면 모가지를 잘라 가져오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막아내라! 알겠냐?"

    - 라져.

    깔끔한 대답이 돌아온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단단한 신뢰 관계가 느껴진다.

    최고의 장비와 물량이 갖춰졌다고 미국이 최강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쌓아온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저리 단호히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저리되어야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고개를 끄덕인 최정훈이 단말기에 대고 가볍게 말을 했다.

    "상황이 급박해지고 있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 니가 해봐, 이 새끼야!

    - 거기서 보고 있으니 편하냐? 응? 편해?

    - 너 어디야?

    - 좀비 구덩이에다 던져 버릴까 보다! 확, 그냥!

    최정훈은 단말기를 끄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라지게 맑네, 우라지게도 맑아…….

    "말은 전달했는가? 뭔가 급박하게 대답이 돌아오는 것 같던데, 상황이 많이 심각한가?"

    "…즐거운 마음으로 서두르겠답니다."

    "오. 자네들의 신뢰 관계가 부럽군. 우리도 좀 그리 격렬하게 호응해 주는 문화가 있었으면 좋겠단 말이지. 특수 코스라도 준비해야 하나?"

    "안 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삶의 회의가 드실 테니까요.

    최정훈은 자꾸만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으! 저기!"

    상황을 보고 화들짝 놀란 최정훈이 소리를 질렀다.

    "저기 뚫립니다!"

    "어디!"

    크리스토퍼가 다급하게 최정훈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군용 장갑차가 흉하게 뒤집어지며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갑차에 깔리지 않기 위해 물러서다 보니 공간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공간으로 좀비들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저거!"

    크리스토퍼가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순간, 머리가 텅 빈 느낌이 든다.

    막아야 하는데, 저거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하지만 어떻게 하지? 예비대가…….

    "와, 뚫렸다."

    아, 예비대 있네.

    예비대가 있긴 한데…….

    왜 하필 예비대가 저놈인가.

    세상에 그 많은 능력자들 다 놔두고 왜 하필 저 인간이 예비대란 말인가!

    망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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