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7화 (37/118)
  • [■] 흑마도사는 척결이 수순이죠! [■]

    ─────

    "수석 마도사님!"

    "으음?"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베라프 최고위 마도사 중 하나인 아나인 데페른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제자가 연구 중인 그의 방을 감히 침범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마도사에게 있어 연구 중인 방을 허락 없이 들어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불문율이다.

    더구나 제자라는 놈이 수석 마도사인 아나인의 연구실을 침범하다니.

    "연구 중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하, 하지만 큰일입니다!"

    "큰일?"

    "게,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아나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적군인가? 어디지?"

    "적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이냐. 답답하게 말을 끊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해보거라!"

    그의 제자가 심호흡을 하고는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차원! 차원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뭐라고?"

    아나인의 새하얀 수염이 거칠게 떨렸다.

    차원 게이트라니! 그런 것이 왜 갑자기 열린다는 말인가!

    타 차원에서의 침략?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베라프는 끝난 것과도 다름없었다.

    타 차원에서 대량의 군세를 끌고 올 만한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최강의 마도사일테니까.

    아나인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제자의 인도를 따라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 * *

    "음?"

    아나인은 허공에 떠 있는 작은 게이트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차원 게이트는 맞다.

    분명 차원 게이트는 차원 게이튼데… 저걸로 호들갑을 떨기에는 뭔가 미묘했다.

    무엇보다 저 크기.

    저만한 크기에서 나와봐야 뭐가 나오겠는가.

    사람 하나 겨우 통과할 만큼 작은 게이트를 보며 아나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이놈!"

    아나인의 제자 로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너도 이제 그 정도의 눈은 있을 터. 저만한 게이트를 보고 뭐가 그리 놀라워서 사람을 오라 가라 한다는 말이냐! 아직 연구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거늘."

    "작다고는 하나 차원 게이트여서……."

    "게이트의 마나 수용량을 계산해 봐야 할 것이 아니냐. 저기로 넘어오는 이는 위협이 될 수 없다."

    "아……."

    마나 수용량이라는 말에 로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는 사실에 당황하여 호들갑을 떨었는데, 따지고 보니 차원 게이트에서 넘어올 수 있는 존재의 한계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쯧, 아직 이런 것도 몰라서야……. 나 말고 또 누구를 불렀느냐?"

    "급하다고 생각되어 궁정 마도 부대를 모두 소환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취소하겠습니다."

    "되었다."

    "…네?"

    "뭐라도 넘어오는 것이 있을 테니, 그놈들더러 처리하라고 하거라."

    "알겠습니다."

    아나인이 살짝 짜증을 내며 돌아가려고 할 때, 게이트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끙……."

    아나인이 진동하는 게이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못 봤다면 모르겠지만, 게이트가 열리는 것을 지금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데도 그냥 가버린다는 것은 녹을 먹는 관리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시간도 없건만."

    마도사는 연구를 멈추는 순간이 정체되는 순간이다. 모두가 앞으로 치고 나가는데 거기서 멈춘다는 것은 퇴화한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나인은 그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존재에 대해 분노를 느끼면서 천천히 손에 든 스태프를 앞으로 내밀었다.

    감히 누가 이 베라프로 넘어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마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려줄 생각이었다.

    우우우웅!

    진동하던 게이트가 열리고…….

    "인간?"

    아나인이 눈을 크게 떴다.

    차원 게이트가 열렸건만, 그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가 튀어나온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의 머리에 박힌 차원 게이트라는 기준은 보통 마수들이 뛰쳐나오는 것이었으니까.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발.

    그리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누가 봐도 넋을 빼앗길 만큼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게이트 안에서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인간? 아니…….'

    인간일 리가 없지.

    보통의 게이트도 아니고, 차원 게이트라면 초고위 마법이다. 아나인조차도 웬만한 준비 없이는 시도조차 해볼 수 없는 마법인 것이다.

    물론 차원 게이트를 여는 방법이 마법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방법이든 엄청난 힘과 노력이 든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게이트에서 나온, 어려 보이는 소녀가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었다.

    "너는 누구냐?"

    음성 증폭 마법을 거쳐 사방으로 퍼져 나간 아나인의 거대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눈이 아나인에게로 향했다.

    "헉!"

    심혼을 꿰뚫는 듯한 그 눈을 보며 아나인은 눈앞의 여자가 감히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여인의 이름은 아펠드리체.

    위대한 드래곤 중에서도 로드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흐음……."

    아펠드리체는 베라프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지혁이 살고 있는 곳은 마나가 존재하지 않기에 항상 뭔가 빠진 듯하고 답답했는데, 베라프의 공기를 마시자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신해 볼까?"

    주변의 막대한 마나가 이미 그녀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는 지구로 넘어가면서 남겨두었던 그녀의 육신을 소환했다.

    고오오오오!

    "아아아……."

    아나인이 그의 머리 위에서 퍼져 나오는 거대한 마나의 파동에 벅찬 환희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서, 설마…….'

    고오오오!

    이만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존재라면 빤했다. 특히나 그것이 이처럼 선명하게 느껴지는 자연의 마나라면 더더욱 빤하다.

    마나로 이루어진, 가장 완벽한 생명체.

    드래곤!

    어느새 현신한 그녀의 육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머리에 돋아나 있는 열두 개의 뿔.

    박쥐의 그것 같은 네 개의 날개와 끝도 없이 뻗어진 긴 꼬리.

    황금으로 만든 듯한 화려한 동체가 세상을 뒤엎을 것만 같았다.

    무려 30m에 달하는 거대한 육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아나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 로드?"

    그가 알기로 저런 거대한 육체를 지닌 골드 드래곤은 베라프에서도 오직 단 한 개체뿐이었다.

    드래곤 로드 아펠드리체.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라트렐의 대행자.

    그가 마침내 베라프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드래곤 로드의 출현.

    그 사실이 베라프에 새로운 격동을 가져오지는 않을까 두렵고도 두려운 아나인이었다.

    [인간이여.]

    아나인은 자신을 부르는 드래곤의 용언에 무릎을 꿇었다.

    평범한 인간에게 드래곤이 그저 두렵고도 두려운 존재라면, 마도사인 그에게 있어서 드래곤이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이었다.

    마도의 길을 걷는 자이기에 드래곤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얼마나 위대한 마도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베라프 역사상 수많은 세월 동안 수많은 마도사들이 출현했다.

    개중엔 대현자라 불린 이도 있고, 대마도사라 불린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드래곤에 달하는 경지까지 올라간 이는 없었다.

    단 한 분야에서 전설적인 수준까지 오른 인간조차도 감히 드래곤과 마법을 논할 수는 없었다.

    길고 긴 베라프의 역사에서 드래곤의 수준을 뛰어넘은 마도사는 단 한 명.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그는 단순히 드래곤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멈추지 않고, 드래곤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오른 이였다.

    수많은 전설이 이제는 그저 과장된 이야기로 들린다.

    대륙 곳곳에 남아 있는 선명한 파괴의 흔적이 아니라면, 그 역시 그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교단은 어디에 있는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목소리에 아나인은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덜덜 떨었다.

    "위, 위대하신 존재시여……."

    아펠드리체는 가만히 아나인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질문에 즉각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가련한 마도사를 즉각 찢어발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 나약한 생명들이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고 만 것이다.

    이지혁과의 삶이 그녀가 가진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을 흔들어놓고 있었다.

    [다시 묻겠다. 교단은 어디에 있는가?]

    "어, 어떠한 교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트렐 교단이다.]

    "아!"

    아나인이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소리쳤다.

    "안내하겠나이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 * *

    데라 라트렐.

    라트렐의 대지라 불리던 데라 라트렐은 한때 그 위용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멸망의 좌가 베라프를 이름값 그대로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때, 데라 라트렐은 라트렐 성이 우뚝 솟아 있던 평온한 대지에서 말 그대로 평평한 대지가 되었었다.

    인간의 힘과 라트렐의 축복이 함께 모여 만들어낸 라트렐의 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와 함께 사라진 수많은 성직자들로 인해 대륙 제1교단의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은 라트렐 교단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겨우 그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해 낸 라트렐 교단은 데라 라트렐의 복구를 제1사명으로 삼았고, 그 첫 번째로 라트렐의 성을 복원하는 것에 그들의 모든 힘을 쏟았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들은 과거처럼 완벽하게 복원된 라트렐의 성을 보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

    "드디어!"

    라트렐 교단의 교황은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혹자가 본다면 교황쯤 되는 사람이 이런 일에 눈물을 보인다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

    데라 라트렐의 복원은 단순히 건물을 세우고 대지를 깎아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길고 길던 암흑기로부터 벗어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그 멸망의 날 이후 라트렐 교단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단 말인가.

    '이제 다시는 이곳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분의 이름에 걸고!'

    교황이 굳게 다짐하는 그 순간!

    우우웅!

    하늘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일더니, 그저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거대한 동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

    교황은 다짐을 한 지 불과 3초 만에 생각을 바꿨다.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 되지."

    "예?"

    "…아닐세."

    뭐,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란 게 있지 않은가.

    개미가 열심히 만들어놓은 집이 아이의 장난스런 발길질 한 번에 무너져 내리듯 말이다.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 그만인 거지.

    안 무너지겠답시고 개미가 사람과 싸우려 들면 쓰겠는가!

    "다음 대가 알아서 하겠지."

    "네?"

    자꾸 옆에서 들려오는 추임새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교황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성호를 그었다.

    저 거대한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극명하다는 말이다!

    뭐, 어떻게 준비를 잘 하다 보면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데라 라트렐에 모여 있는 전력만으로는 결코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드래곤도 쉽지 않을 텐데, 라트렐의 성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저것과?

    교황은 가볍게 웃어버렸다.

    그럼 문제는 저 드래곤이 왜 이곳에 왔냐는 것인데…….

    그때, 그의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울리는 거대한 목소리가 있었다.

    [디오레 1세는 어디에 있는가?]

    누굴 찾는다고?

    교황이 멍한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 드래곤이 미친 거 같아요.

    큰일인데?

    * * *

    교황은 머리 위를 가득 메운 드래곤의 형체를 보며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드래곤.

    최악의 생명체.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불가해의 존재.

    웜급 드래곤 하나만 떠도 까딱하면 일국이 날아가는… 사상 최악의 생명체다.

    물론 과거, 전 대륙에 걸쳐 깽판을 친 누구 덕분에 다른 이종족들은 최악의 생명체 1순위로 당당히 인간을 올려두는 것 같지만, 그건 매우 억울한 처사였다.

    어떻게 태어나든 최소 일개 국가급 전력을 갖추는 드래곤들과는 다르게 인간이란 아무리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해도 보통 죽을 때까지 드래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단 말이다.

    역사를 통틀어 딱 한 번 있던 이레귤러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었다.

    그리고 저 드래곤은 아마…….

    '로드인가?'

    저 거대한 황금빛의 동체.

    에이션트급의 골드 드래곤이라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드래곤 로드.

    인간의 왕과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드래곤 중 가장 대표성을 띠는 존재.

    기록에 남아 있는 드래곤 로드의 마지막 출현 시기는 그 멸망의 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죽었거나 멸망의 좌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고 요양 중일 것이라 예측되고 있었는데, 오늘 바로 이 자리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그럼 저 드래곤을 어찌해야 하나?'

    교황이 한숨을 푹 내쉬려는 찰나, 다시금 그의 머릿속이 쩌렁쩌렁 울렸다.

    [다시 말하겠다. 디오레 1세는 어디 있는가.]

    머릿속에 수저가 들어와 뒤섞는 느낌을 받은 교황이 구토를 억누르며 창가로 가 소리쳤다.

    "그는 없습니다, 로드시여!"

    드래곤 로드의 무시무시한 황금빛 눈이 정확히 교황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대가 입고 있는 것이 라트렐 교단의 교황을 상징하는 법복이 맞다면 그대가 교황이라는 것일 터. 나의 짐작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로드시여."

    [그렇다면 이전 교황이었던 디오레 1세는 어디에 있는가.]

    교황은 조금의 황당함을 담아서 말했다.

    "죽었는데요?"

    [응?]

    드래곤의 표정이 멍함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교황이 신기해하고 있을 때 아펠드리체의 육체가 환히 빛을 뿜어내더니, 인간형이 되어 교황의 창가로 떨어져 내렸다.

    턱!

    아펠드리체가 창틀에 몸을 내려앉히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교황은 뒤로 물러서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줘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말은 그거밖에 없었다.

    "죽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아펠드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강대한 신성력으로 무장하여 결코 쓰러질 것 같지 않아 보이던 디오레 1세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의 죽음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말인가.

    "어째서?"

    "그야 뭐……."

    조금 우물쭈물하던 교황이 속이 탄다는 듯 질러 버렸다.

    "그야 노화지요. 다른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노화?"

    "옙. 노화입니다. 자연사지요."

    "…인간이 아무리 짧은 삶을 산다고 해도 노화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기에?"

    "그분이 돌아가신 지도 어언 반백 년입니다."

    "에?"

    아펠드리체의 눈이 순간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날… 멸망의 날 이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교황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백 년입니다."

    "아……."

    망할 시간 축!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랑 거기랑 시간 축이 다르지! 그것도 엄청나게 다르다!

    "백 년이나 지났다고?"

    "네."

    아펠드리체가 휴양으로 몸을 추스르고 바로 이지혁을 따라갔으니, 도착했던 시간대로 역추정해 보면?

    "한 달에 삼십 년 꼴인가?"

    아펠드리체가 대체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교황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드래곤이 하는 말을 이해해 보겠답시고 들이댈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았기에 그저 멀뚱히 먼 산이나 바라보며 그녀가 생각을 정리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럼 디오레 1세는 더 이상 없다는 말이로군.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디오레 2세입니다."

    "…원래 이름을 그리 막 가져다 붙이나?"

    "로드께서도 제가 아는 드래곤과는 조금 언행이 다르신 듯합니다만……."

    "그렇겠지. 인간과 함께 생활을 했으니까."

    디오레 2세는 가만히 로드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과 같이 생활한다고 드래곤이 인간을 닮는다면, 개와 함께 생활을 한 인간은 개를 닮겠지!

    보통 사람이 개를 닮아가는 사람을 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미친놈.

    그게 딱 맞다.

    디오레 2세는 어쩌면 지금 눈앞의 이 로드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미쳐 버린 게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져야 했다.

    "뭐야, 그 눈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런 말투 하나하나가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마치 뭐랄까, 응. 그래.

    삼류 양아치랄까…….

    잘 낳아놓은 딸이 양아치 놈을 잘못 만나서 물들어가는 걸 본 심정이 된 디오레 2세가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전 교황님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신성력이 강한 자가 필요하다."

    "어디에 필요하신 겁니까?"

    "좀비를 정화할 거다."

    그러니까… 말투가 왜 이렇지?

    뭔가 미묘하게 거슬리는데… 이게 이상한 거 같기도 하고, 이상하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이 말투를 다른 이가 쓴다고 하면 이상할 것 하나 없는데, 그 말투의 주인이 드래곤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좀 이상하다.

    그것도 여성형 드래곤이자 드래곤 로드가 이런 말투를 쓴다는 게 좀… 아니, 많이 이상하다.

    "좀비 정화라… 그거야 굳이 디오레 1세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만? 적당한 성직자 하나만 데려가셔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니가 드래곤이면 드래곤이지.

    여기가 라트렐 교단인데.

    수천만 신도를 거느린 라트렐 교단의 교황을 데려다가…….

    뭐? 좀비 정화?

    이 드래곤은 확실히 미친 게 분명했다.

    드래곤들이 워낙 스케일이 커서 한 번씩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다고 하더니, 지금이 그런 케이스인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 극대 소멸 마법을 터널 뚫는 데 사용한다든가, 헬 파이어로 라면 끓여 먹는다든가.

    "좀비가 백만인데?"

    "아, 그럼 가야죠."

    교황이 가야지!

    놀면 뭐하나!

    무덤에서 꺼내서라도 가야지!

    순간적으로 아펠드리체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좀비가 백만이면 교황이 아니라 교황 할애비라도 가야지. 지금 체면이 문젠가, 대륙이 망하게 생겼는데.

    "…그런데 진짜 백만입니까?"

    "응."

    "어디 있습니까?"

    "타 차원에."

    "……."

    디오레 2세는 머리에 씌워진 성관을 내리고는 새하얀 머리를 마구 긁었다.

    "몇 명이나 갈 수 있습니까?"

    "한 명."

    음, 그렇구나.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리랑 전혀 상관없는 타 차원에 좀비가 백만 마리나 날뛰고 있는데, 그걸 상대하러 한 명이! 단 한 명이! 무려 단 한 명이 가서 해결을 해야 된다는 거로군.

    자꾸 말을 번복해서 미안하기는 한데…….

    이 드래곤 미쳤어.

    제정신 아냐.

    "아니, 그게 가능이나 한 이야깁니까! 혼자서 무슨 수로 좀비 백만 마리를 정화합니까?"

    "디오레 1세면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데리러 온 건데……."

    "그분은 교단 역사상 최강의 성직자셨단 말입니다! 성황포로 산도 날리시던 분인데!"

    "아, 그래?"

    비슷비슷해 보여서 그랬지.

    "너도 같은 교황인데, 그 정도는 못하는 건가?"

    "저는 행정형이란 말입니다! 당시에는 워낙 혼란했으니까 전투형 교황이 대세였던 거고, 저는 교단을 재건해야 했기에 돈 잘 벌고 일 잘하는 행정형 교황입니다!"

    "아……."

    아펠드리체는 디오레 2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뭐야? 무쓸모인 건가?"

    "……."

    내일부터 이야기를 조심스레 퍼뜨려야겠다.

    드래곤 로드가 미쳤다고.

    어쩌면 그날 이후로 베라프에 들이닥친 가장 거대한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넵."

    "그럼 그대 말고 신성력이 가장 뛰어난 이는 누구인가?"

    "…제 생각입니다만……."

    "으음?"

    "아마도 제가 지금 교단에서는 제일 뛰어나지 않을까 합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정말루요."

    아펠드리체가 빤히 바라보자 디오레 2세는 슬쩍 눈을 돌렸다.

    "행정형이라며?"

    "만능형이라고 해두지요."

    "약하다며?"

    "아, 전 교황님에 비하면 무지막지하게 약한 건 맞습니다."

    "그런데 니가 최강이라고?"

    "…안타깝게도."

    아펠드리체는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어떤 세력이라도 융성할 때 수많은 인재가 쏟아지는 것이고, 몰락했을 때는 인재의 인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따져 보면 당연한 것이, 융성할 때 더 많은 사람이 모이니 그 중 두각을 나타내는 이도 많은 것이고, 그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을 잘 교육하여 키워낼 여력이 있으니 역대급의 인재들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라트렐 교단은 과거 이지혁과의 싸움에서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기에 사람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수로 능력 있는 성직자를 키워내겠느냔 말이다.

    근성으로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

    그 초라해졌던 교단을 이만큼이나 다시 일으켜 세운 것만으로도 디오레 2세의 능력은 뛰어나다고 평가 받아야 했다.

    문제는!

    '그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지.'

    그녀에게도,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말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없는 방법을 어찌 마련하겠습니까?"

    "아냐. 내 생각인데, 그대는 반드시 방법을 마련하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펠드리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나더러 여기 와서 좀비 사태를 해결할 성직자를 끌고 오라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

    "모르죠."

    "멸망의 좌."

    "아, 네. 멸망의…….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멸망? 멸망의 좌?"

    그 이름이 여기서 왜 튀어 나오는 건가!

    우는 애들 달랠 때 튀어나오는 호랑이도 아니고!

    아니, 민간에서는 이미 그리 쓰이고 있다지?

    '너 자꾸 그렇게 울면 이지혁이 잡으러 온다'처럼?

    "며, 멸망의 좌가 살아 있습니까?"

    "응."

    "백 년이나 지났는데?"

    "그때 그대론데?"

    어디서 불로초라도 처먹었나!

    아니, 생각해 보면 천 년이 넘게 살아 있던 놈인데, 불과 백 년 지났다고 죽었으리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만.

    그의 무용은 마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그를 겪은 이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말 그대로 진짜 전설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득하게 느꼈는데… 생각해 보니 이거, 불과 백 년 전 사람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백 년 이전에도 기록으로만 1,200년 이상 베라프에서 살아온 존재다.

    따져 보면 죽는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러니까 서둘러 봐."

    "네?"

    "내가 여기서 우물쭈물 처리를 못하고 있으면 직접 오지 않을까? 그 성격에?"

    "아. 그러니까… 음… 네, 그렇네요."

    순간적으로 상황을 정리한 디오레 2세가 몸을 돌리더니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심장이 튀어 나올 기세로 소리쳤다.

    "교황들 다 모아아아아아!"

    디오레 2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라트렐의 성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베라프에서는 과거 멸망의 좌 침공 이후 무려 백여 년 만에 다시 전 교단 회의가 열렸다.

    * * *

    "다 모였습니다."

    12교단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친밀했던 시기는 역설적으로 가장 위기가 넘쳤던 시절이다.

    이지혁이 베라프를 침공했던 그때, 그들은 수많던 악연들을 접어두고 손을 잡았다. 이지혁이 전 대륙을 강제로 화합시킨 것이다.

    역대로 마왕이 강림한다든가, 대륙의 큰일이 있을 때마다 연합을 하겠지만, 12교단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였던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지금.

    일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2교단의 교황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라트렐 교의 호출에 코웃음을 치던 이들이 연이어 날아온 멸망의 좌라는 말에 만사를 제쳐 두고 데라 라트렐로 텔레포트해 온 것이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불의 신을 모시는 사람 아니랄까 봐 파로의 교황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디오레 2세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말 그대로라니요! 멸망의 좌가 다시 강림한다는 그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게 될 확률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내린 조건을 달성하지 않는다면, 아마 직접 이 세계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세계로?"

    디오레 2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그의 성격이 매우 관대하거나 선하거나 부드러워졌다면, 직접 오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릴지도."

    "오겠네."

    "온다."

    "오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일치단결되는 교황들을 본 디오레 2세가 흐뭇하게 웃었다.

    망할 영감들, 평소에도 좀 이럴 것이지. 평소에는 '너희, 새로 만든 옷소매에 들어간 색깔이 우리 교단 색이다!'를 외치면서 성전을 뿌려 대던 쓰레기 같던 것들이 이럴 때는 또 친한 척하는 거 보소.

    극혐.

    디오레 2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황들은 친목질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 끝에서부터 '그때 니들이 우리 구역에 들어와서 전도한 것을 잊지 않았다'느니 '양심상 세금은 3할 이하로 낮추지 말아야지, 상도의가 없다'는 등 온갖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슬슬 멱살을 잡으려는 듯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하자 디오레 2세가 입을 열었다.

    "그냥 성황포로 확!"

    "예?"

    "아, 아닙니다."

    속마음이 밖으로 나왔군. 조심해야지.

    "한시가 급합니다. 지금 멸망의 좌가 일백만의 좀비를 정화할 수 있는 고위 성직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자가 있는 교단은 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답은 없었다.

    "…정말 없습니까?"

    가베인의 교황이 되레 물었다.

    "교황이시여."

    "예, 말씀하시지요."

    "막말로 그 정도가 되려면 과거 귀 교단의 전설의 교황이셨던 디오레 1세급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죠."

    "우리 교단들도 다 망해 자빠졌다가 이제 겨우 숨 좀 쉬고 있는 격인데,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지.

    우리도 없는데 니들이라고 있겠냐.

    그 사실을 알고는 있는데, 알긴 아는데…….

    "차라리 성물을 드리죠."

    "그걸로 몇이나 정화한다고. 교단의 진짜 성물들은 모조리 박살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없는 거보다야……."

    "백만이라지 않습니까, 백만!"

    "흐음, 백만은 좀 무리긴 합니다."

    파로의 교황이 다시 물어왔다.

    "그런데 한 명이 해야 하는 겁니까? 그냥 여럿을 파견하면 될 텐데요."

    "차원 게이트를 넘어야 하는 일이라, 여럿은 무리입니다."

    "으음……."

    그때, 문이 열리며 아펠드리체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으음?"

    무례하게도 12교단의 교황들이 회의를 하는 곳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오는 여자를 본 교황들이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디오레 2세가 딱히 막아 세우지 않기에 누구도 먼저 나서서 그녀의 잘못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때, 구석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노인이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브즈고트의 교황.

    12교단의 교황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이자 유일하게 과거 멸망의 날을 겪고도 살아남은 교황이었다.

    "강녕하시었나이까, 로드시여."

    로드.

    그 말이 준 파급력은 컸다.

    불쾌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던 이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굳히고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세상에 수많은 호칭과 명칭이 있지만, 이 베라프라는 대륙에서 감히 로드라는 호칭을 쓸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들의 수장이자 신의 대행자.

    드래곤 로드.

    소문으로만 듣던 존재를 마주한 이들은 조금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멸망의 좌에다 드래곤 로드라니, 전설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하지 않은가.

    "그대의 얼굴이 나의 기억에 있는 듯하나 세월이 그대의 얼굴에서 많은 것을 앗아갔구나."

    "앗아간 것이 아니라 준 것이지요."

    "홍안의 소년이 노인이 될 만큼 시간이 흘렀군. 찰나와 같은 시간의 흐름이다."

    브즈고트의 교황은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가만히 아펠드리체를 응시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과거 같지 않으십니다."

    "그대가 과연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까?"

    "위대하신 분들의 기억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인간에게는 인간 나름의 기억이 있나이다."

    "그래, 그대가 보기에 나는 무엇이 바뀌었는가?"

    "이해하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인간을?"

    "모든 것을 말입니다. 과거의 당신은, 아니, 드래곤이라는 존재들은 알려 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이해라는 것을 알게 되셨군요."

    아펠드리체는 비릿하게 웃었다.

    "인간이 나를 가르치는 것인가?"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좋다. 그대는 홍안의 소년이었던 시절부터 한 교단의 책임을 맡은 자. 그 후로 백 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왔으니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고, 누구보다 많은 것을 이해해 왔겠지. 그렇다면 너는 내가 찾는 답을 내줄 수 있을까?"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오오……."

    "오!"

    다른 교황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과연 브즈고트의 교황!

    저 드래곤 로드와 당당히 대화를 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전혀 찾아내지 못했던 답을 알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 답은 무엇이지?"

    "정화는 물이 하는 것. 브즈고트는 일백만이 아니라 일천만의 사악한 존재라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정화와 회복의 브즈고트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가? 그대가 그 노구를 이끌고 차원의 문을 넘을 수 있겠는가?"

    브즈고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어렵습니다. 제가 버틸 수 있다 하더라도… 저는 그만한 신성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럼?"

    "제가 아니라 다른 자가 있습니다."

    "다른 자?"

    "로드시여, 그대의 명확한 기억 속에 존재할 것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신성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알려질 수 없던 존재를 말입니다."

    "아!"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곳으로 올 일이 아니었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다."

    아펠드리체는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브즈고트의 교황은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나직이 아펠드리체를 불렀다.

    "로드시여."

    아펠드리체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

    "인간은 물의 방향을 바꾸고 큰 둑을 세워 물을 틀어막기도 하지만, 한때일 뿐이지요. 결국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갑니다. 그 누구도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로드께서는 지금 흐름대로 가고 계십니까?"

    "건방지구나, 인간이여."

    아펠드리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녀의 말투에서 싸늘한 한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위압하려 했다면 굳이 목소리를 낮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목소리가 싸늘한 이유는 뭘까?

    그녀의 감정?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를 것이다. 나는 그 순리를 조금 앞당기려 할 뿐이다."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당긴다 하셨나이까?"

    "그렇다."

    "로드께서 원하는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흐르기를."

    아펠드리체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조롱.

    어쩌면 비꼼.

    하지만 이상하게도 멸시당했다는 분노가 일지 않는 것은 저 인간이 가진 연륜의 힘일까?

    인간의 백 년과 드래곤의 백 년은 전혀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아무리 많은 일을 겪어도 바뀌지 않는 사람.

    드래곤이 가졌다 착각했던 불멸성을 그 작은 육체에 지녔던 사람.

    그래서 그 인간을 놓을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남은 짧은 생에 축복이 함께하기를."

    아펠드리체가 작은 보석 하나를 브즈고트의 교황에게 던지고는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흐음……."

    브즈고트의 교황이 아펠드리체가 던진 보석을 받아 들고는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뭔가 새끼손톱보다 몇 배는 작아 보이는 보석 같기도 하고, 열매 같기도 한, 이상한 물건이었다.

    "이게 뭔가?"

    그때, 보석을 주시하던 드란의 교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로아의 눈물!"

    모두의 시선이 드란의 교황에게로 향했다.

    "로아의 눈물?"

    "그, 기억 안 나십니까! 불사의 명약이라 소문이 났던, 그 로아의 눈물이란 말입니다! 젊은이가 먹으면 평생을 무병장수하고, 늙은 자가 먹으면 수명이 늘어나고, 웬만한 병은 한 번에 낫는다는 로아의 눈물이란 말입니다! 엘릭서의 재료라구요!"

    "에, 엘릭서!"

    엘릭서.

    죽지만 않으면 사람을 강제로 부활시켜 버린다는 그 전설의 약.

    교단마다 한 병씩은 꼬박꼬박 숨겨놓고 가보… 아니, 교보처럼 내린다는 명약.

    그 엘릭서도 아니라 엘릭서의 재료가 되는 것이라니!

    모두가 눈을 희번덕대며 다시 고개를 돌릴 때였다.

    꿀꺽.

    "……."

    뭔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드셨……."

    한 손을 입 위로 들어 물의 권능을 발휘, 꼴깍꼴깍 물을 마신 브즈고트의 교황이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잘못 보셨겠지요."

    "……."

    저 영감이 저리 오래 산 이유가 있었구나.

    어쩐지 더럽게 안 죽는다 싶더니, 좋은 건 다 처먹고 다녔겠지.

    주변 교황들의 미묘한 시선을 느끼면서 브즈고트의 교황이 능청스레 말했다.

    "그건 그렇고……."

    "말 돌리시깁니까?"

    "멸망의 좌가 다시 강림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디오레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온다라……."

    드래곤 로드 앞에서도 평온을 유지하던 브즈고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전설의 명약을 먹었음에도 안색은 가릴 수 없던 모양이다.

    "대책을 세워야지요."

    "오면 막으면 될 일 아닙니까. 이전에도 쫓아냈으니 다시금 쫓아낼 수 있겠지요."

    "쫓아내?"

    브즈고트의 교황이 웃고 말았다.

    누가 누굴?

    "그는 추방된 자가 아니라 원해서 간 자요. 모든 교단의 힘을 집중하고 모든 왕궁의 힘을 모으고, 거기에 드래곤과 몬스터, 이종족의 힘까지… 모든 것을 들이부었음에도 유유히 그 모두를 제압하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 자란 말입니다."

    그날.

    이지혁이 마지막 순간에 손을 멈추지 않았다면…….

    이 세계는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지.'

    신들은 그를 멸망의 좌라 불렀다.

    하지만 그는 이 세계를 파멸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라 하지 않았던가.

    신의 뜻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불경한 일이지만, 뭔가 개운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그에게 내려진 이름은 이제부터 그 의미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브즈고트는 뱃속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 * *

    신관.

    성직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개념은 하나.

    신의 힘을 육체로 받아들여서 발현하는 이들.

    마나와는 다른 개념이다. 치료 마법이 마나를 이용하여 육체를 활성화시켜 재생을 촉진하는 개념이라면, 신성력은 신의 힘을 바탕으로 근원으로 돌아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에서라면 신관이나 성직자는 신을 모시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베라프에서는 우선 신성력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다 보니 신성력의 양이 곧 신앙의 척도가 되기 마련이었다.

    신성력이 어떻게 발현되는가는 베라프에서도 다 규명되지 않은 미스테리다.

    신앙이 강할수록 신성력도 강해진다는 모호한 개념을 잡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교황급들이 가장 신앙이 강한가는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으니까.

    축척하고, 쌓고, 연구해야 하는 마나와는 다르게 신성력이라는 것은 단순하지만 랜덤성이 강하다.

    종파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뒷골목에서 성녀가 발견된다든가, 이제 막 신입으로 들어온 어린 수도사가 교황급의 신성력을 뿜어내는 등의 일은 딱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비일비재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말한다.

    신이란 변덕스러운 존재라고.

    믿음이 강한 존재에게 신성력을 내려주기도 하지만, 전혀 믿음이 없는 이에게 평생을 참오해 온 이들 이상의 신성력을 내려준다.

    그 변덕스러움이 가장 극한으로 발휘된 적이 있다.

    베라프에서 가장 유명했던 신관.

    물의 신 브즈고트를 모셨던 그녀는 교황 정도는 씹어 먹을 정도의 신성력을 마치 물처럼, 그녀가 모시는 브즈고트의 이름에 걸맞게 정말 물처럼 펑펑 뿜어 댔다.

    브즈고트의 교단은 마침내 그들을 라트렐의 이름 위로 올려줄 사자가 나타났다고 환호했고, 사람들은 물의 신의 이름이 대륙을 뒤덮을 거라 축복했다.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따지고 보자면 정말 사소한 문제였다.

    아주 사소한 문제.

    그냥 종족이 조금 문제였을 뿐이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엘프.

    그녀의 종족을 다른 종족들이 부르는 명칭.

    일반적인 인간의 개념으로 보자면, 엘프가 성직자인 게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일반적인 RPG 룰에서는 엘프가 성직자인 경우도 빈번하니까.

    긴 금발의 엘프가 선사해 주는 힐링이야말로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 아니던가.

    아니라고?

    아님 말고.

    여하튼 지구에서라면 그랬겠지만, 베라프에서는 이게 조금 문제가 되었다.

    아니, 사실은 굉장히 문제가 되었다.

    엘프란 자연과 함께하는 존재다. 나무와 함께 살아가며 열매를 따먹고, 동물을 해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두며 어울리는 존재다.

    하지만 신성력은 본질적으로 세상에 역행하는 힘.

    상처가 자연스레 치료되게 두지 않고 강제로 원래의 상태도 되돌리며, 생물이 원래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내게 만들고, 죽는 게 당연한 상황을 되돌려 살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신의 힘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다 포장하는 것이다.

    그 힘에 '신성력'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다면, 인간들조차 악마의 힘이라 말했을 터.

    하지만 엘프는 본질을 보는 자들.

    그들은 그런 포장에 속지 않았다.

    신에게서 났으나 신의 품을 떠나 자연에 정착한 이들에게 자연과 역행하는 힘을 사용하는 동족이라는 것은 혐오를 넘어 증오의 대상이었고, 마침내 그녀의 신병 양도를 브즈고트 교단에 요청하게 된다.

    엘프들과의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에 짓눌린 그들은 고민에 빠졌지만, 당사자가 순순히 엘프들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나서자 말릴 수 없었다.

    불과 몇 백 년 전에 있던 일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게이트 너머로 나타난 이를 본 이지혁이 뒷목을 잡았다.

    "이 빌어먹을!"

    이지혁의 눈에 은발이 눈부신 엘프의 얼굴이 들어온다.

    물빛의 법복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엘프.

    "오랜만에 뵙습니다, 멸망의 좌시여."

    "야, 이 미친 도마뱀아!"

    이지혁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미친 도마뱀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어 죽겠는데 끼리끼리 논다고, 어디 또 미친년을 데리고 왔어!"

    최정훈이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미친년?

    저 여자가?

    "그럴 리가 있나……."

    저 얼굴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뭐랄까. 저 얼굴은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자애로움과 신비로움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얼굴이라고 할까?

    아펠드리체의 눈부신 화려함과는 분명히 다른 매력이었다.

    외모로만 보면 워낙 화려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와!' 하고 놀랄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없는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존재했다.

    타입으로 따지자면, 아펠드리체보다 이쪽이 되레 최정훈의 취향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뭐?

    미친년?

    최정훈은 알 수 없는 발끈함에 소리쳤다.

    "미친년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휙!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이지혁의 눈이 최정훈에게로 향했다.

    뜨끔한 최정훈이 호기롭게 나섰던 것과는 달리 찔끔하여 고개를 돌렸다.

    "최정훈 씨."

    "아, 네."

    "저기 길 밖으로 나갔다 쳐요. 저 옆에 산에 놀러 갔다 칩시다."

    "…네."

    "그런데 멧돼지가 나왔네? 거대한 멧돼지야."

    "무서운 일이네요."

    "그런데 그 옆에 지나가던 토끼가 그 멧돼지의 목을 물어뜯더니 피를 빨고 '카하하'거리면서 고기를 뜯어먹는 걸 보면 기분이 어떨 거 같으세요?"

    "다이나믹하겠네요."

    다이나믹하겠지 아주.

    "그 토끼가 어떤 토낀 거 같으세요?"

    "전투 토끼요?"

    "미친 거죠?"

    "…부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가 그런 거라고, 저 여자가! 정신 나간 엘프란 말이야! 엘프면 엘프답게 마법이나 쓰고 활이나 쏠 것이지, 신성력은 무슨 얼어 죽을 신성력이야!"

    "신성력도 엘프다운 것 같은데……."

    그런데 말하다 보니 이 사람이 엘프구나.

    성관 옆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긴 귀를 보니 티가 확 나네.

    내가 진짜 엘프를 보게 되다니.

    사람이 아닌 엘프네.

    앞으로는 이쁜 사람 보고 엘프라고 하지 말아야겠다.

    급이 다르네, 급이!

    "엘프답기는 얼어 죽을! 눈앞에서 엘프가 고기를 미디움 레어로 퍼먹어도 '하하, 엘프답게 잘 드시네요' 할 인간 같으니."

    "…그건 좀."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니긴!"

    이지혁이 최정훈을 한 번 흘기고는 아펠드리체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야, 너… 쟤 미친 거 알아, 몰라?"

    "알죠."

    "근데 미친 걸 왜 데리고 와!"

    "그럼 어떻게 해요. 데리고 올 수 있는 건 하난데, 혼자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디오레 없어? 디오레는 뭐한다는데? 나 여기 있다니까 안 온대?"

    "죽었데요."

    "아,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이지혁이 뭔가 침울해하려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잠깐만? 내가 디오레 1세가 죽었다고 침울해할 이유가 없잖아!

    "영감 잘 죽었다! 근데 왜 죽었대?"

    "노환이래요. 그쪽 세계에선 벌써 100년이 지났더라구요."

    "…시간 차 클라스가……."

    나 정말 무시무시한 곳에 있었구나.

    하기야 그러니까 거기서 그리 오래 있었는데도 여기서는 5년밖에 지나지 않았겠지.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필 저걸……."

    이지혁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빛의 법복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도,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저 초롱초롱한 눈망울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싫다. 그냥 싫다.

    "강녕하셨는지요."

    "너만 아니면 강녕했지."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래. 니가 날린 아쿠아 버스터에 허리가 분질러질 뻔한 이후로 처음 보는 거니 오랜만이지. 뒈진 줄 알았는데, 용케도 살아 있었네?"

    "무언가를 살해한다는 것 역시 엘프들의 이치에는 맞지 않으니까요. 조금 오래 감금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얼른 해결하고 돌아가야지? 휴가 나왔다고 생각하고 싸게싸게 처리하고 다시 감금되러 가자."

    "그리하는 게 도리에 맞겠지만,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나오면서 일족에게서 추방당했거든요."

    "……."

    이지혁이 머리를 마구 긁었다.

    "괜찮아. 다시 받아줄 거야! 엘프는 그렇잖아."

    "아닌 거 아시지요?"

    "응."

    엘프들이 얼마나 융통성이 없고, 고리타분하고, 생각 없이 사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명은 먹을 수 없다니.

    미친놈들. 그리 따지면 니들은 살아 있는 애들이 자라나길 기다렸다가 평생 옆에 붙어서 손가락 하나하나 잘라 먹는 거나 마찬가진데!

    식물은 생명도 아닌가!

    그놈의 엘프 숲을 싸그리 불 질러 버려야 정신을 차리지!

    아… 이번에 해버리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

    데라 라트렐로 향하기 전에 엘프 숲을 이지혁 평야라 개명하고 다 밀어버리려고 했는데…….

    "웬만하면 몇 백 년 만에 만나면 반가워야 하는데, 넌 정말 정이 안 간다."

    "보통 인연은 아니었으니까요. 제겐 임무였을 뿐이에요. 그때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임무는 썩을!"

    이지혁이 아직 멸망의 좌라 불리기 이전.

    풋내기 흑마도사였을 때, 흑마도사 사냥에 나선 교단의 몰이에 몰린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전방에서 이지혁을 죽어라고 쫓은 이가 바로 이 여자였다.

    바닥에서 기고 구르고 온갖 짓을 다해서 기어 올라가다가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대륙이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별 꼴을 다 당했었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마나가 아니라 계약해서 마나를 얻어 쓸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해 흑마도사로 전직을 했는데, 아직 뭔가를 제대로 배워보기도 전에 저 망할 년이 신성력을 폭포처럼 쏟아부으며 달려들어 개박살이 났었지.

    불멸이 아니었다면 정말 그날 초상 치렀을 것이다.

    그날 경험한 죽음만 해도 열댓 번은 넘었으니까.

    그것만 해도 싫은데, 저 여자는 성직자란 말이다.

    성직자!

    이지혁의 천적!

    나중에야 흑마력도 신성력의 반대되는 힘이다 보니 겁화가 물을 증발시키듯 상성을 역전시켜 휩쓸어 버렸지만, 비슷한 신성력과 흑마력이 충돌하면 흑마력이 처발리는 게 상식이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진다고! 본능적으로!

    그런데 하필 왜 저 여자를 데리고 왔냐고!

    부들부들대며 아펠드리체를 노려보자 그녀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나?"

    "물론이죠."

    "거짓말은 아니겠지?"

    "어머, 드래곤은 거짓말을 못한다니까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하죠?"

    "진실만을 말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은근히 속여 먹는 그런 개념은 아니겠지?"

    "랄라~"

    저 썩을 도마뱀 년이!

    세상에 믿을 사람, 아니, 믿을 아종족 하나 없다더니, 끝까지 사고를 치는구나.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

    은발에 엘프는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 못하시나 봐요. 저는 잘 기억하고 있는데."

    "기억해?"

    "네. 그때 하시던 말씀요. '망할 년, 죽여 버리겠다'라든가, '넌 나중에 보면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아놓고 회초리로 때려죽인다'든가."

    "…내가?"

    빡치긴 엄청 빡쳤나 보네.

    아니, 그전에 '발가벗겨'가 나온 순간에 쓰레기 아닌가?

    좌절하고 있는 이지혁을 향해 엘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로아벨, 잊으신 제 이름이에요."

    "로아벨. 그래, 로아벨……."

    "그리고 또 하나 잊으신 게 있는 거 같은데……."

    "응?"

    순간, 로아벨의 양손에서 물처럼 넘실거리는 신성력이 무지막지하게 터져 나왔다.

    "흑마도사는 척결이 순리죠!"

    이지혁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신성력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 봐.

    이 여자 미쳤다고.

    내 말 맞잖아!

    하…….

    * * *

    흑마력이란 마이너스 에너지와 같다. 부정적이고 암울한 모든 것이 반실체화하여 동력화한 것이 흑마력이다. 암흑 마나라든가, 음속성 마나라든가 하여 불리는 이름은 여러 가지지만, 그 근원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원이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백마력과 크게 활용에 차이를 보이지 않고 파괴와 소멸, 그리고 저주에 특화되었다는 것 정도가 특이점이다.

    다른 하나의 특이점이라면…….

    백마력과는 서로 반발하는 수준이지만, 신성력에게는 쥐약이라는 점 정도?

    과거에 죽어라고 실감했던 것이지만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지금 새록새록 기억이 돋아나고 있었다. 눈앞을 가득 메우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신성력을 보니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와, 나… 트라우마 생기려고 해."

    예전에 이 미친 신성력에게서 달아나던 기억이 마구마구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는 저 신성력에 스치기만 해도 허리가 부러지고, 속이 타오르고, 뱃속에 달군 숯을 넣은 듯이 사람이 바닥에서 부비부비 댄스를 추게 되는 효과가 있었지.

    아, 생각하니 빡 치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이지혁은 과거의 그 어설펐던 흑마도사가 아니다!

    대륙과 마계를 모조리 뒤집어엎은, 바로 그 멸망의 좌가 아닌가.

    지금 그는…….

    어?

    지금 내가 가진 마나량이나 그때 내가 가졌던 마나량이나 별다를 것 없지 않나?

    어?

    생각하니 그러네?

    그럼 지금 내가 저걸 맞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지혁은 곧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펼친 실드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깔끔하게 뚫어버린 신성력이 이지혁을 덮쳤다.

    "아아아아악!"

    신성력이 육체를 파고들며 이지혁의 몸 안에 있는 흑마력을 태우기 시작한다.

    이제 곧 피가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전신에서 끓어오르며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 느껴져야 하…는데?

    이지혁의 몸 안으로 파고든 신성력이 힘을 쓰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있었다.

    응?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전에는…….

    이 정도의 신성력이 몸에 파고들었으면 이지혁은 완전히 박살이 났을 것이다.

    칠공으로 피를 뿜으면서 바닥에서 부비부비를 췄겠지.

    그럼 저 여자가 그동안 약해진 것인가?

    …아니, 내가 눈으로 본 신성력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나. 아니겠지!

    그럼 뭐가 달라진 거지?

    이지혁은 자신의 육체를 다시금 점검했다.

    "어? 이거 뭐야?"

    이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몸 안에 머무르는 마나량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딱히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기분이었다.

    "헐?"

    거기에 마나의 질도 뭔가 달랐다.

    이전까지는 흑마력을 머금은 몬스터들에게서 뽑아낸 마나라 그런지 같은 흑마력이라도 하더라도 뭔가 불순물이 이리저리 섞여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 그의 육체에 머무르는 마나들은 정제되고 또 정제된, 순수한 마나에 가까웠다.

    과거, 마의 근원에서 이지혁이 끌어다 쓰던 흑마력에 근접한 마력인 것이다.

    "이거 뭐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것은 이지혁뿐만이 아니었다.

    "뭐, 뭐죠?"

    로아벨도 이지혁을 보며 의문에 잠겨 있었다.

    신성력을 이만큼이나 쏟아부었는데 이지혁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채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 동네는 브즈고트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신성력이 약해진 것인가?

    로아벨은 자신의 손끝에 신성력을 집중했다.

    물빛의 신성력이 가득 피어오른다.

    "아닌데?"

    신성력을 보충하는 게 힘들지는 몰라도 이미 갖고 있는 신성력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흐으음?"

    이지혁이 거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아벨의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마도 육체 안에 머무르는 마나가 모조리 교체되면서 두세 배는 더 강해진 상황이다 보니 신성력과 흑마력의 상성이 역전된 것이겠지.

    그 말인즉슨.

    "다 까불었냐?"

    눈앞의 저 여자는 이제 자신의 밥이라는 의미였다.

    낄낄낄낄.

    이지혁이 음흉하게 웃으며 천천히 로아벨에게 다가갔다.

    "덕분에 생각이 났지. 내가 예전에 너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말이야."

    "으응?"

    로아벨이 움찔하여 뒤로 물러섰다.

    이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신성한 브즈고트의 신성력을 저 사악한 흑마법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받아낸다는 말인가.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로아벨은 다시금 신성력을 모아 분출하기 시작했다.

    물빛이 담겨 이제는 아주 새파랗게까지 보이는 신성력들이 그녀의 전신에서 넘실넘실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성력의 흐름이 물줄기를 이루고 개울을 넘어 작은 강의 수준까지 이르렀을 때, 폭주하듯 이지혁을 향해 흘러들었다.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물줄기들이지만, 워낙 그 양이 많고 도도하게 흘러나오기에 거칠거나 두렵다기보다는 부드럽게 감싸 안는 느낌이었다.

    브즈고트의 신성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머니의 손길처럼 따뜻하게 느끼겠지만, 그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스틱스 강처럼 음산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담담히 그녀의 신성력을 받아들였다.

    "흐음……."

    신성력의 강이 이지혁을 덮친다.

    "으!"

    이지혁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효과가 있나?'

    '그럼 그렇지'라는 심정으로 주시하던 로아벨은 이지혁이 어깨를 쫙 펴며 내뱉는 말에 좌절했다.

    "야, 이거… 찌릿찌릿하니 좋은데? 안마 받는 줄."

    피로감이 싹 가신 듯한 얼굴로 이지혁이 싱긋 웃어 보이자 로아벨은 손에 든 셉터를 축 늘어뜨렸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 광경을 보며 이지혁이 낄낄대며 다가온다.

    "흑마도사는 어쩐다고?"

    "…처, 척결이요."

    "으응? 뭐라고? 신성력도 잘 못 쓰는 찐따라 잘 안들리는거얼?"

    "처, 척결한다구요!"

    "안 들려, 안 들려."

    이지혁이 낄낄 웃으며 천천히 로아벨에게 다가갔다.

    그 광경을 본 아펠드리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 진짜 나쁘다."

    "새삼스럽게 그러시는군요."

    최정훈은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이지혁의 성격 나쁜 것이 어제오늘 일인가.

    항상 나빴고, 지금도 나쁘며, 앞으로도 나쁠 것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성격이 더러웠다.

    하지만 그 사실이 영 달갑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아니, 잠시만요."

    로아벨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멸망의 좌.

    엘프의 뇌옥에 몇 백 년 동안 갇혀 있는 동안 그 이름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지나가는 정령들이 속삭이기도 했고, 간수장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몇 번이나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멸망의 좌의 정체가 그 이지혁이라는 것을 알고는 두 가지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녀가 이지혁을 쫓을 때, 확실하게 끝을 내지 못해서 대륙에 혼란이 찾아왔다는 자괴감과 뇌옥에서 나가게 된다면 확실하게 끝을 내겠다는 의지.

    그 두 가지가 있었기에 드래곤 로드가 이지혁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따라온 것인데…….

    '너무 쉽게 생각했어.'

    확신은 있었다.

    만약 그가 베라프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멸망의 좌라면 로아벨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라고 해도 상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 생각할 수 있는 머리는 있었다.

    하지만 아펠드리체에게서 얻어낸 정보대로라면 지금의 이지혁은 과거 그녀가 쫓았던 그에 비해 딱히 더 강하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나중에 다시금 멸망의 좌가 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기 전에 깔끔하게 척결을 해버리겠다는 생각이었을 뿐인데…….

    "안 들려어~"

    이지혁이 낄낄대며 다가오는 것을 본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망했어.'

    이지혁의 얼굴이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똑바로 안 들어?"

    이지혁은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는 로아벨을 보며 패악질을 부려 댔다.

    "어쭈? 팔 각도 보소? 정직과 신뢰를 모토로 삼고 사는 엘프 주제에 팔이 180도도 아니고 178도률 유지한다, 이거지? 평형감각에 이상이 생기셨나?"

    부들부들.

    로아벨은 굴욕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지금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이 세계에 뚝 떨어진 존재인 것이다.

    아펠드리체와 눈꼽만 한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사람과 엘프의 싸움 같은 건 인간이 개와 고양이가 투닥거리는 걸 보는 것과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딱히 한쪽의 편을 들 이유도 없고, 그럴 의욕도 없을 터.

    그러니 로아벨 혼자 이지혁을 감당해야 하는데…….

    "회개하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뭘?"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죄요."

    "너나 나한테 준 고통을 회개하시지?"

    "브즈고트께서 용서하셨습니다."

    "그래? 그것참 편리한 종교로군. 당사자와 상관없이 잘못을 용서 받을 수 있다니 말이야. 나도 종교 하나 만들까? 이지혁교로? 거기에 잘못을 빌었고, 용서하셨으니 이제 괜찮아."

    "신성모독입니다!"

    "응, 모독했다. 그래서 어쩔 건데?"

    "으으……."

    "신성모독이고 자시고, 그래서 뭐 어쩔 거냐고?"

    단죄도 힘이 있는 인간들이 하는 거지.

    역대로 힘없는 종교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역사에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종교 역시 힘이 없으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이지혁이 벌을 받고 있는 로아벨을 보며 고민했다.

    성질 같아서는 팔다리를 다 부러뜨려서 상자에다 넣고 물에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 망할 여자가 지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데리고 와도 꼭 이런 걸 데리고 와서는……."

    "다른 방법이 있나요?"

    "방법은 언제나 있지. 찾아볼 생각을 안 해서 그런 거고."

    "그럼 직접 찾아보시면 되는 거죠."

    이지혁이 가늘게 뜬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노려보았다.

    이게 가면 갈수록 반항적이 되는 것 같은데… 내 주변 여자들은 왜들 하나같이 날이 가면 갈수록 거칠고 폭력적이 되어가는 것일까?

    원인이 무엇인지는 고민하지 않고 결과만을 고민하는 이지혁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이지혁이 로아벨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네?"

    "좀비 정화할 수 있지?"

    "어떤 상태냐에 따라 다르죠."

    "벌레에 물리더니 좀비가 됐어."

    "음……."

    로아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악마가 직접 좀비로 만든 케이스가 아니니 딱히 어려울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야 가능할 듯합니다."

    "그것도 못하면 안 되지."

    '그러라고 살려두는 건데'라는 말이 아주 작게 들린 것 같지만, 로아벨은 필사적으로 그 음성을 무시했다.

    악마 퇴치 여행이라는 심정으로 이계로 넘어왔더니, 넘어온 지 십 분 만에 생존 게임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몇 명인가요?"

    "백만?"

    "…네?"

    잘못 들었나?

    "백만 좀 넘을 거야. 아니, 지금쯤이면 한 백오십만쯤 됐으려나? 별로 안 돼."

    "아, 백만요."

    "응."

    "백만 명인 거죠?"

    "응."

    로아벨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죽여라, 이 사악한 악귀야."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펠드리체를 돌아봤다.

    "봤지? 얘 미쳤다니까?"

    아니면 이제 곧 미치겠지.

    낄낄낄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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