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6화 (36/118)
  • [■] 뭐야, 너… 영혼이 없잖아? [■]

    ─────

    아펠드리체가 복잡한 표정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서.]

    그녀의 목소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지혁을 구할 수 있는 자는 아펠드리체가 아니라 그녀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넘겨주고 싶지 않은 이 껄끄러움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

    그녀가 머뭇대자 목소리가 그녀를 재촉했다.

    [시간이 없다. 내가 연 게이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으……."

    아펠드리체는 속이 좋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만 살아오던 그녀의 두뇌와 최근 들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그녀의 감성이 충돌하며 육체의 이상을 불러온다.

    그녀는 생전처음으로 속이 메스껍다는 감정을 느끼며 이지혁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디디며 이지혁을 게이트 앞에 내려다 놓았다.

    [후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저 웃음소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아펠드리체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많이 컸네? 내 앞에서 그런 표정도 짓고 말이야.]

    "나이 많아서 좋겠네요."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정말 많이 컸구나.]

    아펠드리체는 이를 악물었다.

    드래곤 로드를 이처럼 아이 다루듯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었다.

    최고위 마왕의 이름은 신이 아니라면 감히 비길 데가 없으니까.

    더구나 그녀는 마왕이라는 사실 이전에 아펠드리체에게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이지혁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많이도 상했네. 쉽게 죽이지 말 걸 그랬어.]

    그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난다.

    이미 껍데기만 남아버린 벨트레체임에도 그녀의 분노는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살릴 수 있죠?"

    [내게 한 말이니?]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절대적인 자신감과 확고한 의지를 느낀 아펠드리체는 두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올라 이지혁을 감싼다.

    이지혁의 전신 상태를 점검한 기운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게 뭐하러…….]

    지금까지 아펠드리체에게 하던 것과는 다른 말투.

    고혹적이고 달뜬 음성이 사라지고, 걱정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온다.

    아펠드리체는 그 음성을 들으며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치료나 하시죠."

    [자꾸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짜증나면 확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

    [흐음…….]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이지혁의 몸을 완전히 감싸기 시작했다.

    "설마……."

    아펠드리체의 목소리에 짜증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아니겠죠."

    그래. 다른 마왕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아닐 것이다.

    만약 다른 마왕이라면 이 기회에 이지혁을 언데드나 마족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흑마력만 적당히 주입하면 알아서 가속화될 테니,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다른 마왕이 아닌 그녀이기에 아펠드리체는 그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우우우우.

    이지혁을 둘러싼 검은 구름들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저거, 지금 뭐하는 거죠?"

    정해민이 불안한 눈으로 묻자 아펠드리체는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치료 중이에요."

    "저게요?"

    "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저런 치료로는 프랑켄슈타인이나 만들어낼 것 같은데, 저게 치료라고?

    이지혁이라는 인간과 흑마력이라는 존재의 상관관계를 모르는 정해민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저 광경을 보고 누가 치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진짜 치료예요?"

    "믿기지 않겠지만."

    "그런데… 누가 치료하고 있는 거예요?"

    "……."

    아펠드리체는 입을 다물었다.

    그 '누가'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

    저 사람을 뭐라고 규정하여 이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지혁 씨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네?"

    생뚱맞은 대답에 정해민이 놀라 되물었다.

    소유권?

    "여러 의미에서 말이에요."

    아펠드리체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닫았다. 더 이상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을 얼굴로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기색을 읽은 정해민도 그 이상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무슨 상황이지?'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도가윤을 느끼며 정해민은 가만히 이지혁을 둘러싼 검은 구름들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십 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이지혁을 감싸고 있던 구름들이 천천히 흩어졌다.

    "아……."

    정해민은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이지혁을 보며 반색했다. 끊겨 나갔던 팔도 깔끔하게 재생이 되어 있었다.

    "정신은?"

    아펠드리체의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은 괜찮아.]

    아펠드리체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저 '아직은'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많은 것이 남지는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때, 게이트 안에서 새하얀 손이 천천히 이지혁을 향해 내밀어졌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손이 이지혁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러게 사서 고생은.]

    아펠드리체가 퉁명스레 말했다.

    "당신이 싫어서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의 가정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다. 나이를 그만큼이나 먹고도 그 진리를 모르는구나.]

    "안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죠."

    [뭐, 좋아.]

    그녀의 손이 이지혁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그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만나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이지혁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아펠드리체를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아펠드리체는 조심스레 그의 몸을 받아 들었다.

    [잘 모시고 있어.]

    "당신보다야."

    [후후후, 그럼…….]

    그 말을 남기고 게이트가 점점 줄어들더니,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아펠드리체는 그 광경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곳에 와서는 엮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 엮이고 말았다.

    베라프에서도 껄끄럽기 짝이 없는 존재였는데, 이곳에서까지 마주하게 되다니…….

    꾸욱.

    아펠드리체의 손가락이 의식을 찾지 못한 이지혁의 볼을 꾸욱 잡아 늘렸다.

    나쁜 놈.

    "으으……."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지혁의 손이 허공을 휘젓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정해민의 물음에 아펠드리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 여자들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멀쩡할 거예요."

    그 사람이 치료했으니까.

    생기를 빨아먹는 존재이니만큼 이지혁에게 불어넣어 줄 정도의 생기는 넘치도록 소유하고 있겠지.

    그게 아니라도 방법은 마련할 것이다.

    그녀의 강함은 그 마왕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정도이니까.

    "그럼 이제?"

    "네."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어요."

    지구에 강림한 첫 번째 마왕.

    벨트레체는 결국 인간이 아닌, 마왕의 손에 그 최후를 맞이했다.

    승리는 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최정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막아는 냈다.'

    의식 잃은 이지혁을 바라보며 최정훈은 깊은 불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끝일까?

    앞으로는 더 큰 문제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어쩌면 이것은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최정훈은 애꿎은 돌멩이만 걷어찼다.

    * * *

    [뭐야, 너… 영혼이 없잖아?]

    "응?"

    이지혁은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이 보인다.

    "여긴?"

    저 천장, 어디서 많이 보던 천장인데? 우리 집인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방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의자에 앉아 침대에 기대 자고 있는 정해민이 보였다.

    "흐음……."

    "일어났어요?"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이지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베개 대신 느껴지는 이 물컹한 건 어떤 도마뱀의 다리겠지.

    "듣기 싫은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의식은 없었어도 알아채긴 한 모양이네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내가 의식을 잃은 와중에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터진 건가?"

    "아마도?"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건 아니네요."

    "휴……."

    이지혁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어디 갔어?"

    "넘어오진 못했어요. 마왕이 연 게이트로 잠시 이 세계로 화신을 보낸 듯했어요. 벨트레체를 껍데기만 남기고 다 빨아들이고는 돌아갔어요."

    그 와중에 그를 치료해 주었다는 말을 빼는 아펠드리체였다.

    말하지 않은 것은 거짓이 아니니까 괜찮다.

    "망할."

    이지혁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엮이기 싫은 존재가 자신에게 다녀간 것이다.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는 그 '라트렐' 이상 가는, 이지혁 최악의 천적이 말이다!

    "내가 미쳤지……."

    의식은 왜 잃어 가지고는.

    의식만 있었으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천 리 밖으로 도망쳤을 텐데.

    "은근 보고 싶어 했던 것 아닌가요?"

    심통이 살짝 담긴 목소리가 도발을 해오자 이지혁이 도끼눈을 뜨고 아펠드리체를 노려보았다.

    "농담이에요."

    "그런 끔찍한 농담은 다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한 번만 더 그런 소리를 한다면 네 앞에서 잡아온 도롱뇽들을 하나하나 죽여가며 고문을 해주지."

    "…그것참 무서운 고문이네요."

    나는 파충류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리고 도롱뇽은 양서류라고, 양서류!

    "끄응……."

    이지혁이 몸을 일으켰다.

    "어때요?"

    "괜찮은 것 같은데?"

    몸 안에서 마력을 터뜨린 만큼 죽거나 거의 죽음과 같은 상태로 겨우 유지될 거라 생각한 몸이건만, 오히려 싸우기 이전보다 더 좋은 상태가 된 것 같았다.

    하기야 그녀가 다녀갔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머리는요?"

    "흠……."

    이지혁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했다.

    "모르겠군. 이전과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아. 좀 더 거칠어졌다면 방금 네 도말에 발끈했을 텐데 말이야."

    …발끈하긴 한 것 같은데?

    아펠드리체는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좋아요. 그럼 큰 산을 하나 넘었네요. 이리된 이상 마왕들도 이제 더는 함부로 이곳을 넘보지는 못할 거예요."

    마왕이 이계에서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은 매우 큰 사태였다.

    그러니 그들도 이제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직접적으로 죽인 자가 마계에 있으니 그녀에 대한 반감도 강화되겠지만, 굳이 그 부분을 이지혁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쯧."

    생각지도 못한 빚 하나를 더 졌다는 생각에 이지혁은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에게만은 빚을 지고 싶지 않단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에이, 관둘래.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어 상념을 날려 버릴 때, 문이 열리더니 도가윤이 물을 들고 들어와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어, 땡큐."

    이지혁은 물을 받아 들고 마셨다.

    시원한 냉수가 들어가자 찝찝했던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내가 기절했던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아펠드리체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평온했죠."

    "그래?"

    하기야 마왕도 잡았는데, 평온했겠지.

    "뭐, 사소한 문제야 항상 있는 거니까요. 벌레들이 사람들을 공격해 언데드 군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쯤은 베라프에서는 일상적인 일이잖아요?"

    "일상적으로 처맞아볼래, 이 미친 도마뱀아!"

    그게 베라프에서야 일상이지, 여기서는 세계 멸망의 징조라고!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정훈은?"

    "여기 있습니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최정훈이 굳은 얼굴을 한 채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 * *

    "마왕께서 당하다니."

    아르고라스는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부르르 떨었다.

    "잘난 듯이 말한 것치고는 별거 없군. 마왕 하나만 소환되면 이 세계는 파멸할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큭."

    알파의 비꼼에 아르고라스는 이를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알파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마주 볼 뿐이었다.

    "그래, 인정하지. 예상외의 일이었다. 설마 그분이 움직일 줄이야."

    그분이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일에 나설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세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쪽에서 연 게이트를 활용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벨트레체가 게이트를 연결하려 드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그 게이트에서 열세 번째 마왕이 튀어나올 줄이야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이제 다음 계획은? 아니, 계획이란 게 있긴 하나?"

    "…물론이지."

    아르고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이 있냐고 묻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지금 이 세계는 그들이 일을 벌이기 이전보다 몇 배나 많은 마이너스 에너지가 가득하다. 이 기운을 활용한다면 못할 것이 없을 텐데,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이제 시작일 뿐이지. 확실히 그분이 당하신 건 예상외지만, 하위급 마왕 하나 당했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게다가 실제로 이지혁에게 당해 쓰러진 것도 아니니까.

    "우선은 있는 것들을 좀 더 활용해 볼까?"

    혼자서 생각에 빠져든 아르고라스를 바라보는 알파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벨트레체가 마지막에 쓰러지기는 했지만, 마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위험한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홀로 쓰러뜨린 것은 아니지만, 그 마왕을 빈사 상태까지 몰아간 이지혁이라는 존재도 충격적이었다.

    인간임에도 그러한 존재감이라니.

    알파 역시 인간의 정체성은 벗어난 존재라고 스스로 자평했지만, 그 이지혁은 정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맞나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 이지혁 말이다만……."

    "음?"

    "그는 대체 뭐지?"

    아르고라스가 히죽이는 듯한 얼굴로 알파를 보며 말했다.

    "왜? 이상한가?"

    "그 벨트레첸가 하는 괴물은 이해할 수 있다. 누가 봐도 괴물이니까. 몬스터라는 존재가 있으니 그보다 상위의 존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하지만 이지혁은 인간이지 않은가?"

    아르고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여."

    알파는 대답 없이 가만히 아르고라스를 바라보았다.

    "착각하고 있군. 마족에게도 마왕이란 불가해한 존재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그렇게 될 존재들이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태생적인 힘으로 버텨낼 수 없는 곳이 마계다."

    "흐음……."

    "이지혁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이었으나 인간을 초월하여 마왕의 위에 오른 자다. 너나 나 같은 일반적인 존재들의 눈으로 보자면 불가사의한 존재들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되는 존재들이다."

    "빤한 소리군."

    "빤한 말이지."

    알파는 가만히 이지혁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미묘한 기분이군."

    이지혁이 자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 이지혁이 인간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지혁 없이 마왕이란 존재를 보았다면, 벗어날 수 없는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지혁은 적이지만 동경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 이지혁이 과거에는 훨씬 더 강했다는 건가?"

    "지금 그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런데 마왕과 대등하다고?"

    아르고라스가 쿡쿡, 웃었다.

    "벨트레체 님께서는 마왕이긴 하지만 하위의 존재다. 상위의 마왕들은 그분과는 급을 달리하시고, 상위 13위의 존재들은 다른 마왕들과 격이 다르다."

    "음……."

    "그리고 아흔아홉 번째 마왕은 한때 그 모든 마왕들을 짓누르고 마계에 정점에 올랐던 존재다."

    "모두 쓰러뜨렸다고?"

    "물론 그런 것은 아니지. 최상위의 마왕과 직접적으로 부딪쳤다면 마계가 남아나지 않았을 테니까. 다만, 최상위의 마왕들조차도 그와는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명실상부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존재였다."

    알파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으로서 그런 위치에 오른 자가 있던 것이다.

    "지금 남은 것은 과거 너무도 강했던 그의 편린일 뿐, 그 편린조차도 인간이라기에는 너무도 강하지."

    알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이지혁이 어쩌고는 사실 감이 잡히지 않는다. 도무지 힘의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이 인간이라기에는 너무도 강하다는 것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어느 쪽으로 봐야 하는 거지?'

    인간인가?

    아니면 능력자인가?

    알파의 기준을 모호하게 오가는 이였다.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알파는 아르고라스가 내미는 검은 구슬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부려먹는군. 썩을 악마 놈."

    "보답 받게 될 것이다."

    "악마를 믿고 무보수로 일을 해줘야 한다니, 누가 봐도 미친 짓이겠지."

    말과는 다르게 알파는 순순히 아르고라스가 내민 검은 구슬을 받아 들었다.

    * * *

    방 안으로 들어온 최정훈이 이지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멀쩡하네요."

    "팔은?"

    "잘 붙어 있네요."

    이지혁은 별말 없이 팔을 휘둘렀다.

    최정훈은 그의 팔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분명 끊어져 나간 것을 봤는데도 저리 멀쩡한 모습이 된 것을 보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 세계에도 치료사라는 능력자들이 등장하면서 과거의 의료 체계를 뒤흔들어 놓기는 했다.

    하지만 잘라진 것을 깔끔하게 접합한다든가, 현대 의학으로는 어려운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정도지, 이지혁처럼 완전히 팔이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 재생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지혁 씨가 있던 곳에서 그 정도는 당연한 건가요?"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더 심하죠."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베라프의 신성 마법이었다.

    디오레 1세급의 신관은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떤 상태든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세계에도 부활이라는 개념은 없어서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이들은 없지만,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베라프였다.

    "그만큼 돈을 받아 처먹었지만."

    "네?"

    "아니요."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그랬으니 교단이 그만큼 활성화가 되는 거겠지.

    지구에서도 누군가가 잘려 나간 팔을 신의 힘으로 고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는 당장 신의 현신이라 추앙 받을 것이다.

    동영상 사이트에 동영상 몇 개 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조작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된다면,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종교들을 전부 사이비로 만들어 버릴 만큼의 파급력이 일 것이다.

    아니, 이제는 능력자들이 있으니 그 정도는 아니려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할 때, 최정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마주 갸웃대다가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이 중요하죠."

    "그건 그래요. 그래서 상황이 어떻죠?"

    "최악입니다."

    최정훈은 두말없이 들고 있던 패드를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재생되는 영상.

    이지혁은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잘 찍었네요. CG가 엄청 발전했네."

    "현실입니다."

    "에이, 거짓말."

    "진짜요."

    이지혁이 화면을 몇 번이고 힐끔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에이, 좀비 영환데?"

    "아닙니다……."

    "진짜?"

    "네."

    "정말루요?"

    "네."

    이지혁은 패드를 최정훈에게 다시 던져 놓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거참, 심각하게 됐네."

    "별로 안 심각해 보이십니다만?"

    "제 손을 떠났으니까요."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저도 곤란해요."

    이지혁은 순진한 얼굴을 하며 빙긋이 웃었다.

    "어쩌라고?"

    "……."

    최정훈은 얼굴을 감쌌다.

    이 인간, 또 왜 '배 째라'인가.

    "그나마 저들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이지혁 씨 아닙니까!"

    "모르는데요?"

    "…아니, 남들보다야……."

    "아무것도 몰라요."

    "좀 비어 보이기는 합니다만."

    "네?"

    "네?"

    최정훈이 의뭉스레 얼버무리자 이지혁의 눈꼬리가 평소보다 더 올라갔다.

    '더럽게도 생겼다.'

    "뭐?"

    "네?"

    이 인간이 자꾸 남의 속을 읽네?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생각도 좀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최정훈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모른다니까 그러시네."

    "미국은 그나마 대처를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멕시코까지 좀비들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멕시코는 현재 카르텔에 지배당한 상황이라 대처 능력이 떨어집니다. 이대로라면 좀비 국가가 되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과테말라와 니카라과까지 순식간에 전멸할 겁니다."

    "니, 니가… 뭐? 니카?"

    "니카라과입니다……."

    "그게 뭔 소리래요? 외계어인가?"

    "…나라 이름입니다."

    "처음 들어보네."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모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으니까.

    "콜롬비아에서 방어선을 펼치기에는 용이하겠지만, 혹시라도 뚫리게 된다면 남아메리카도 위험합니다."

    "그렇겠죠."

    "그러니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겠죠."

    "그러니까! 대책을 내놓으시죠!"

    "내가 왜!"

    이지혁이 발끈했다.

    "생각해 보니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보고 해결하라고 하네! 나는 그냥 지나가는 청년이라구요! 자꾸 나보고 이거저거 하라고 하지 마세요! 세금 받고 하는 게 뭐냐고!"

    "이지혁 씨 쪼는 거요."

    "…위에서도 알아요?"

    "제 공식 임무가 변경되었다는 말씀을 제가 안 드렸던가요?"

    뭐야, 이 막장 국가는?

    사람 쪼는 게 공무원의 임무라니.

    잠깐 다른 데 갔다 온 사이에 언제 나라 꼴이 이리되었다는 말인가!

    "투, 투표를 했어야 하는데!"

    "네?"

    민주 시민의 의무를 저버린 대가가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달은 이지혁이 눈가를 훔쳤다.

    다음 투표일이 언제더라?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최정훈이 얼굴을 굳혔다.

    "병을 전파시키던 벌레들은 어젯밤부로 힘을 잃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에 이미 수많은 중독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무작정 쓸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미국도 바리게이트를 펴 이들을 막아내고 있지만, 국토가 너무 넓다 보니 모조리 막아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새어 나가는 좀비들이 존재합니다. 이러다가는 미국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갈 겁니다. 그럼 다 끝입니다."

    "흠……."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좀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좀비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다른 모든 이들이 이해한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지혁은 아마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뭐, 그런 게 껄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야."

    이지혁이 아펠드리체를 보며 물었다.

    "뭔 방법 없어?"

    아펠드리체는 살짝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죠."

    "그게 뭔데?"

    "지혁 씨는 싫어하실 텐데요?"

    "응?"

    이지혁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 * *

    "설마?"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그렇지."

    "그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와야죠."

    "끄으응."

    이지혁이 침대에 머리를 퍽퍽, 찧었다.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막상 실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없어요."

    "끄응."

    이지혁이 얼굴을 마구 짓눌렀다.

    세상에는 알아도 하기 싫은 것이 있는 법이다.

    지금의 이지혁이 딱 그런 상태였다.

    최정훈이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이지혁을 재촉했다.

    "방법이 있습니까?"

    "아뇨."

    이지혁은 정색하며 말했다.

    "없어요."

    "있는 거 같은데!"

    "없다니까!"

    최정훈이 이지혁을 설득하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아펠드리체에게 물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아펠드리체는 대답 없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방법이 있든 없든 그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대답으로 알아들은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달려들의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지혁 씨!"

    "아, 왜!"

    "방법이 있으면 해결을 해야죠! 이렇게 손 놓고 있어서야 되겠습니다."

    "아니, 당신, 미국에 돈 받아먹었어?"

    "…네?"

    순간,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움찔했죠?"

    "아, 아니에요!"

    "이상한데?"

    "진짜 아닙니다! 저는! 그저! 순수하게!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지혁이 혀를 찼다.

    "받았네, 받았어!"

    "아니라니까요!"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 최정훈을 보며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에서 돈 받고 미국 일을 처리하나! 매국노냐! 아이고, 동네 사람들! 여기 매국노가 있어요!"

    "감사원이지!"

    어느새 눈을 뜬 정해민이 아직 반쯤 풀린 눈으로 정확히 지적을 해주었다.

    "전화할까?"

    "제발 좀!"

    최정훈의 다급한 태도에 정해민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리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미국 일은 미국이, 멕시코의 일은 멕시코가, 우린 우리 일이나 잘 알아서 하죠."

    "그리 단순히 생각하실 게 아닙니다."

    "왜요?"

    "미국 동부가 날아가면서 지금 경제지표가 말도 안 되게 박살이 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IMF 사태 이상의 타격이 올 겁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

    "에헤이, 거기까지."

    이지혁이 최정훈의 말을 끊었다.

    이 양반이 미쳤나, 어디서 그런 민감한 발언을!

    "그러니 어떻게든 빨리 해결을 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인류 전체의 위기입니다. 단순히 어느 나라의 문제로 한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흐음……."

    이지혁이 아펠드리체의 머리에 무릎을 기대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뭐, 생각해 보면 꼭 나쁜 건 아니에요."

    "네?"

    "보기에 좀 나빠서 그렇지, 좀비 정도면 신인류죠."

    "…미치셨어요?"

    "확, 그냥!"

    "아니, 너무 엉뚱한 말을 하시니까."

    "엉뚱한 게 아니라니까. 생각해 봐요. 죽지도 않지, 아프지도 않지, 생각도 없지. 얼마나 편해요. 사람보다 좀비가 더 편할지도 모른다니까."

    "번식이 안 되잖습니까, 번식이!"

    "어차피 내가 안 죽는데 자식이 왜 필요해!"

    "…어?"

    듣고 보니 그런 듯?

    아, 아니지!

    설득될 뻔했다.

    "이상한 주장은 나중에 하시죠."

    "이상한 말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내 말이 맞잖아요. 그냥 좀 내장이 뚝뚝 떨어지는 게 흉해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영생을 얻는 좋은 방법이죠."

    "그래서 말씀대로 먼저 좀비가 되어보실 생각은?"

    "내가 미쳤어요?"

    …응, 미친 거 같아.

    제정신은 아닌 게 확실해.

    최정훈은 한숨을 푹 쉬었다.

    비협조적으로 나올 것은 알았지만, 이리 귀찮아할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최근의 이지혁이 이상하게 협조적이었던 것이지,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없어요."

    이지혁은 단호히 최정훈의 말을 잘랐다.

    "사실 이제 와서 당신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죠. 그러니 일단은 좀 내버려 둬봐요. 나도 생각이 복잡하고 정리해야 될 것도 많은데 기절했다 깨자마자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하다 보니 머리가 아프니까."

    "끄응……."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급박하기는 하지만,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 눈을 뜨자마자 일 이야기를 하는 것도 못할 짓이기는 했다.

    "그럼 사태를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조금 안정을 취하신 다음에 뵙도록 하죠."

    "뭐, 일단 알았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최정훈이 문밖으로 나가자 이지혁은 한숨을 쉬며 뒤로 등을 기댔다.

    스륵.

    아펠드리체의 손이 이지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이미 결정은 난 거잖아요."

    "알아."

    알고 있으니까 자꾸 쿡쿡 찌르지 말라고.

    그 아는 걸 하기가 싫은 거니까.

    "여전히 심통 맞네요."

    "굳이 말 안 해줘도 알거든? 내 성격 나쁘다는 것쯤이야 천 년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지적해 주지 않아도 돼."

    "그때는 나름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드래곤도 기억 미화를 하는군."

    새삼스러운 사실이군.

    성격이라는 것이 머리에서 나온다고 했을 때, 이지혁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고는 하지만, 그의 성격은 대책 없던 고등학생 시절에 비해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그것을 보완하는 것은 경험들이 몸에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일까?

    "여하튼……."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엮이고 싶지 않다.

    베라프와 엮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올 지경인데, 하필이면 교단과 엮여야 하다니!

    말 그대로 교단에 있어서 이지혁은 제1숙적이자 반드시 숙청해야 할 존재란 말이다.

    이 세계에서 따지자면, 사탄이 추기경에게 도움 좀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격이었다.

    제정신 박힌 추기경이라면 성수를 페트병으로 처부으며 당장 꺼지라고 하겠지.

    "그쪽도 제정신 아닌 인간들이 천지라 그렇지."

    "그건 공감해요. 인간 같지 않죠."

    "너도 나름 라트렐의 신도가 아닌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이상 그분들을 따르는 것은 이상하지 않죠. 하지만 인간들은 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를 자신들이 편한 대로 해석하고 신을 뒷배로 만드는 것이 문제예요."

    "음……."

    "라트렐께서 왜 그것을 지켜보고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라면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인간을 그리 만든 것도 라트렐이니까."

    "……."

    이지혁의 말에 아펠드리체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주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 불완정성 역시 주신이 의도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이지혁이 조금은 달리 보였다.

    "가끔씩 찌르는 말을 하네요."

    "가끔이라니! 난 항상 이성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남자란 말이다!"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인정해 주고 싶지는 않지만, 이지혁이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야, 받아 쳐야지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사람 어색하게 말이야.

    "하지만 말로만 그러지는 않으시겠죠?"

    "끙……."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대화 끝났어?"

    이지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정해민이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응. 뭐, 대충."

    "그래?"

    근데 얘도 김다솜 닮아가나?

    뭔가 한기가 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둘이 사귀어?"

    "…돌았니?"

    이지혁이 진심으로 빡 친 얼굴로 정해민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정해민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근데 왜 그러고 있어?"

    "응?"

    이지혁은 자신의 자세를 돌아보았다.

    침대에 누운 채 아펠드리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뭐, 딱히 이상할…….

    …이상하기는 하겠다.

    "치료야, 치료."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렵지만 말이야.

    뇌에 흑마력이 차고 넘쳐서 이러다가 언제 미쳐 날뛸지 모르니까 그나마 마나를 통제할 수 있는 도마뱀 년에게 머리를 맡기고 상황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서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상황은 너무 명확하지만, 설명은 너무도 모호했다.

    "흐음, 치료?"

    정해민의 눈이 뚱하다.

    그야… 뚱하겠지. 설명이 안 되니까.

    "여하튼, 뭐, 이상한 관계는 아니라는 거지?"

    "응."

    "그럼 저 여자는 왜 이 집에 살아?"

    "어?"

    듣고 보니 그런 듯?

    돈 벌려면 방법도 많고…….

    그리고 애초에 처음에는 잠깐만 머물렀다가 집 알아보고 나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너, 왜 여기 죽치냐?"

    이지혁의 눈이 향하자 아펠드리체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기억 못하는 일이 없는 드래곤이 자신이 한 말을 잊을 리는 없을 테니,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하…….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뭐? 드래곤은 거짓말을 안 해?"

    "거, 거짓말은 안 했어요."

    이지혁의 눈이 희번덕댔다.

    "이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아, 알아본다고 했지, 나간다고는 안 했으니까. 알아는 봤어요!"

    궁색한 변명에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빛을 본 아펠드리체의 이마에 식은땀이 돋아났다.

    저거, 완전 사람 같은데?

    "미필적 고의라는 말을 알고 있나?"

    "……."

    "드래곤이 상위 존재라고 만날 어깨에 힘주고 살던데, 그 잘난 상위 존재는 하위 존재를 속여 먹는 모양이지? 응?"

    "아, 아니에요."

    "아이고, 잘나신 분들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야지. 힘없고 멍청한 인간이 뭘 안다고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아니겠지요."

    "으으……."

    아펠드리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잖아요! 저는 정말 알아봤다구요."

    "뉘에뉘에."

    "진짠데!"

    "그러시겠죠."

    이지혁의 뚱한 얼굴을 본 아펠드리체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럴 의도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요."

    "쯧."

    이지혁이 혀를 찼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와 '속이지 않는다'는 다른 말이다. 진실만을 이야기하면서도 수많은 인간을 장난 삼아 파탄으로 몰아넣은 드래곤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러니 거짓을 말하지 않는 존재라 해서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우러 왔다는 아펠드리체의 말에도 이지혁이 의도가 무엇이냐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죄를 지었으면 속죄를 해야지."

    "네?"

    "다녀와."

    "네?"

    "가서 고위 성직자로 하나 물어오면 되겠네."

    "제가 부른다고 올까요?"

    "방법은 중요하지 않아. 결과가 중요한 거지."

    "…공주도 아니고."

    졸지에 공주도 아니라 성직자를 납치하게 된 드래곤 로드의 깊은 한숨이 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왕이면 남자로 하라고."

    "어째서요?"

    "그래야 용사가 구하러 오지 않을 테니까. 남자 구하는 용사 본 적 있어?"

    "…없죠."

    "용사란 그런 존재지."

    남자 성직자를 납치하는 드래곤과 그를 구하러 오지 않는 호색한 용사.

    베라프의 이미지가 무너지고 있었다.

    '엮이지 말 걸 그랬나.'

    아펠드리체는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후회일 뿐이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통쾌하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얄밉다는 감정이 이런 거였군요."

    "그래? 좋은 거 하나 알았네."

    "…꼭 보답하죠."

    "그러시든지!"

    낄낄대는 이지혁을 보며 아펠드리체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후회하게 해드리죠.'

    그녀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 * *

    "흐아아……."

    제레미는 눈앞에서 비척비척 다가오고 있는 좀비를 보며 넋을 반쯤 놓아버렸다.

    잿빛으로 물든 피부와 텅 빈 동공.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그로테스크하게 육체가 손상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특징만으로도 이 개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실감할 수 있었다.

    "으으……."

    결코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근육이 퇴화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릿하게 걷는 속도로 다가오는 이가 두려운 것은 저 모습에서 보이는 이질감 때문이리라.

    제레미는 바닥에 들어찬 차가운 물을 손으로 느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달아나야 한다.

    하나의 좀비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다른 좀비들도 곧 들어찬다는 뜻이리라.

    TV와 인터넷에서 하루 종일 나오고 또 나오는 좀비에 대한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코 빠르지 않으니 당황하지 말고 달아나기만 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어디로?"

    제레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그의 등 뒤로 가득 차 있는 좀비들이 보인다.

    앞도, 뒤도… 어느 곳도 도망갈 곳은 없었다.

    "흐……."

    이 절망적인 상황에 제레미는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어차피 좀비에게 물리는 일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 마지막이 비참하지 않길 신에게 기도했다.

    무릎을 꿇은 제레미의 주변으로 좀비들이 가득 몰려들었다.

    "주여……."

    그때, 제레미의 귀에 퉁명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신을 찾을 시간이 있으면 발악 한 번이라도 더 하라고, 이 멍청아!"

    "헉?"

    퍽퍽퍽!

    깔끔한 격타음과 함께 제레미의 주변을 둘러싸던 좀비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결코 강한 타격은 아니었는지, 바닥으로 쓰러진 좀비들이 곧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쯧."

    제레미는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과하게 크지 않지만, 단단하다 못해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탄탄한 구릿빛 근육이 인상적인 동양인.

    "누구?"

    제레미가 멍하게 묻자 사내 박성찬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왜? 신이 보내준 사자쯤 되는 것 같은가?"

    "뭐라구요?"

    박성찬은 마뜩찮다는 듯 웃다가 제레미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도망갈 테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혹시 아나, 당신의 기도를 듣고 신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걸지도 모르잖아?"

    "대체 무슨 소리를……."

    박성찬은 제레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건물 위로 띄워 올렸다.

    "헉!"

    제레미의 헛바람 소리를 들으며 박성찬은 가만히 가라앉은 눈으로 도시를 포위해 오는 좀비 떼를 바라보았다.

    '안 좋아.'

    저런 좀비들 따위 수백 구가 달려든다고 해도 박성찬의 육체에 이빨자국 하나 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통각을 잊은 존재들이라고는 하나 기본적인 힘이 인간보다 그리 강해진 것이 아니니까.

    단단한 박성찬의 육체는 저들의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문제는 저들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이다.

    좀비에 대한 연구 결과, 아직 그들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고, 질병의 일종이라면 치료 시도가 가능하다는 결론도 나왔다.

    그러니 무작정 죽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박성찬의 생각으로 그건 멍청한 짓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감염자의 수는 늘어나고 있고, 뒤로 가면 갈수록 해결이 버거워질 것이다.

    아무리 능력자들이 강하다고는 하나 한 손이 열 손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보통의 인간들은 이미 남아나질 않겠지.

    "문제군."

    박성찬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머리 쓰는 일은 애초에 그의 전문이 아니다.

    그는 그저 누가 시키는 대로 떄려 부수는 쪽이 취향에 맞았다. 생각이야 남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내, 내려주시오."

    "음?"

    박선찬은 자신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제레미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참 기침을 해 대던 제레미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해왔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말씀을."

    "그런데 영어를 잘하시네요?"

    박성찬이 씨익 웃었다.

    "안 그러게 생겼는데 말이죠?"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네 맘 다 안다는 듯 제레미를 향해 웃어준 박성찬이 가만히 좀비 떼를 보며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으라라라라!"

    김다현은 다리가 부서져라 달렸다.

    그의 눈에 도망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급격히 브레이크를 걸며 눈앞에 있던 여인의 허리를 감싸고 그대로 내달린다.

    "꺄아아악!"

    성희롱이라도 당했다 생각하는지 소리를 지르는 금발 여인을 보며 김다현은 여유롭게 말했다.

    "돈 워리! 돈 워리! 파인 땡큐."

    "……."

    그래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여자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김다현을 바라보는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다.

    '초기 환자?'

    아니,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하…….

    이 상황에서도 그러고 싶은가?

    잘생긴 게 죄지, 잘생긴 게 죄야.

    "폰 넘버?"

    김다현이 싱긋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여자는 안겨 있는 자세 그대로 손을 뻗어 김다현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꼭 낮에 전화해요. 저녁부터는 동생이 있으니까?"

    "What?"

    "콜! 데이! 선라이즈!"

    순간적으로 콩깍지가 벗겨진 여자가 썩은 얼굴로 김다현을 바라보았다.

    김다현은 그런 줄도 모르고 여자를 끼고 안전지대로 벗어났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야?"

    우선은 미국 측의 요청대로 민간인 구조를 돕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도 아닌 미국의 요청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미묘하게 건드렸다.

    마왕까지 잡아줬으면 됐지, 이런 시답잖은 일로 NDF를 부린다는 말인가.

    은혜를 베풀었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은인을 이런 식으로 부려먹다니!

    한국 정부는 대체 뭘 하기에 미국이 NDF를 이렇게 부려 먹게 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형님 깨어나면 두고 보자."

    김다현의 머릿속은 이지혁이 깨어나면 바로 달려가서 일러바칠 생각으로 가득했다.

    "형님이 쓰러져 계시니 그런 거지."

    이지혁이 정신이 있다면 어딜 감히 미국 놈들이 NDF를 부려먹을 생각을 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지!

    안전지대에 여자를 내려놓은 김다현이 윙크를 하고는 돌아섰다.

    "다른 놈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려나?"

    김다현이 낮게 한숨을 쉬며 다시 좀비 접경지대로 달려갔다.

    * * *

    [미 동부로부터 시작된 사태에 미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사태가 직접 벌어지자 미 정부는 대책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지혁아, 저거 어쩌니!"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국 측에서 마련한 벙커에 대피해 있던 가족들은 정해민을 통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좋은 곳에 있었는지 집이 돼지우리같이 느껴진다고 말 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이지혁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은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의 특별 지시로 각종 요리와 서비스가 무한으로 제공되었으니, 피서 다녀온 기분일 테지.

    "자식은 개고생을 했는데!"

    "누가 하랬니?"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엄마가 하라고 한 적은 없잖아?

    근데 그래도 명색이 자식인 내가 죽을 뻔했는데, 조금 신경은 써줘야 하는 것 아닌가?

    "엄마."

    "응?"

    "혹시 최정훈 씨나 다른 사람들이 나 많이 다쳤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더라."

    "근데 왜 그래?"

    박선덕이 혀를 찼다.

    "그 사람들도 오버가 너무 심해. 아무리 봐도 몸 멀쩡히 잘 있더만. 의사도 이상 없다고 하고."

    "아……."

    그렇지.

    의사가 보면 멀쩡하겠지. 육체는 완벽하게 정상을 되찾았을 테니까.

    지구의 의사들이 이지혁의 육체가 흑마력에 찌들어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을 테니, 겉으로야 멀쩡하다 못해 완벽한 건강체로 보이겠지.

    "그런데 쟤들은 왜 저리 달달댄다냐?"

    "그거야……."

    쟤들은 내가 팔이 떨어지고, 배에 구멍 뚫리고, 죽기 직전까지 간 걸 봤으니까 그렇지.

    엄마도 그걸 봤으면 지금처럼 태연하지는 못하겠지!

    "엄마, 나 많이 다쳤었다니까!"

    "응, 그래."

    "팔도 떨어졌었어!"

    "아, 그래? 용케도 다시 붙였구나."

    "……."

    뭘까, 이 기분은?

    자식이 그런 꼴이 된 걸 엄마가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기분과 그래도 알고 좀 걱정해 줬으면 하는 심정이 교차하는 이 미묘함은 무엇인가!

    너무 많이는 아니라도 조금은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싶은데 말이야.

    "아니, 엄마……."

    "저런, 저거 어쩌니!"

    박선덕이 TV를 보며 놀라 소리쳤다.

    TV 화면에는 마침 좀비 떼가 도시로 밀려 들어가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바디 벙커와 버스들로 바리게이트를 쳐 막아내고는 있지만, 끝없이 밀려오며 전진하는 좀비들을 모조리 막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수히 쏟아지는 물대포와 최루탄 등에도 좀비들은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

    "흐음……."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볼을 긁었다.

    미군 역시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지 못해서 저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미국은 저 좀비들을 질병의 일종이라 판단하여 저 좀비들조차 보호해야 할 자국민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화기를 사용할 수 없고 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답이 나올 상황이 아닌데……."

    애초에 마력으로 벌어진 일을 의학으로 해결하겠다고 접근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병원균으로 벌어진 일이 아닌데, 연구를 한다고 무슨 답이 나올 것인가.

    "쯧."

    이대로 희생자가 계속 나오는 것도 큰일이었다.

    이지혁이 전화기를 들었다.

    라라라라.

    신호가 가고 전화가 울리자 건너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이지혁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 미국 아저씨한테 말 좀 전해줘요."

    * * *

    크리스토퍼는 진지하게 은퇴를 고민하고 있었다. 급박하게 변해가는 현장의 상황을 일일이 대응하기에 그는 나이가 너무 많이 먹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맛이 있었다만, 지금은 권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도 버티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지금 이곳에 그라도 없으면 순식간에 체계가 무너질 테니까.

    소방관과 경찰에 군 병력과 능력자들을 모조리 동원하여 펼치고 있는 바리게이트다.

    그런 와중에도 중간중간 빠져나가는 좀비들을 찾아 처리해야 한다.

    그 일을 맡을 사람이 지금으로서는 크리스토퍼밖에 없었다.

    CIA나 FBI 국장들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능력자 전력을 다룰 수 없으니까.

    "이번 일만 끝나면!"

    은퇴해서 삶을 찾아야지!

    라라라라.

    "응?"

    그때, 전화가 울렸다.

    크리스토퍼는 찡그린 표정으로 전화를 들었다.

    최근에 걸려오는 전화라고는 안 좋은 소식뿐이니 기분이 좋을 수가…….

    최정훈!

    크리스토퍼가 반색하여 전화를 받았다.

    "미스터 이지혁은 깨어났소, 미스터 최?"

    - 안 그래도 연락하라는 말을 듣고 전화드렸습니다. 지금 위치가 어디십니까?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여기가……."

    크리스토퍼가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부관이 위치 정보를 최정훈의 휴대폰으로 전송했다.

    - 잠시만요.

    스슷.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최정훈이 이지혁과 정해민을 데리고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 * *

    "어서 오십시오, 이지혁 씨."

    크리스토퍼의 환대에 이지혁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 일이래요?"

    "아시지 않습니까."

    이지혁은 크리스토퍼의 어색한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못 고치는 거 아시죠?"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빨리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뭐하세요?"

    크리스토퍼는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그 말을 일반 국민들도 이해할까요?"

    "으음……."

    이지혁은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인상을 굳혔다.

    "물론 그래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은 거죠. 백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감염되었습니다. 그런데 회생 가능성이 없답시고 그 백만을 쓸어버린다면, 지금의 정권이 유지가 되겠습니까? 계엄령이라도 선포하지 않는다면 당장에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하기야 뭐……."

    사람들이 좀 그런 면이 있으니까.

    "게다가 사실 무작정 방법이 없다고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방법을 모조리 찾아보았냐고 묻는다면, 저희도 할 말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크리스토퍼가 주위를 살짝 돌아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통수권자가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미루고 있습니다. 저라도 그러겠지만요."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방법이 없다고 해도 그만한 대량 학살을 벌인다면 책임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당장 대한민국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야당은 책임론을 들고 일어날 것이고, 순식간에 정권이 힘을 잃겠지.

    그런 부담을 짊어지고 싶은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방식은 안 되는 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크리스토퍼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은 이해하지만, 어디까지나 이해할 뿐이다. 용납이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기서 좀 더 나간다면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데, 개개인의 사정을 봐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크리스토퍼가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도와주십시오."

    "음……."

    "국가의 문제이기 이전에 세계의 문제입니다."

    "둘이 짰어요?"

    "네?"

    "같은 말을 하시네. 짠 것처럼."

    "사실이니까요."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뭐, 어차피 쟤들이 바다 건너서 넘어오는 것도 아니고, 따져 보면 아메리카 대륙의 문제지, 세계의 문제는 아니죠. 걱정 마세요. 아시아와 유럽은 건재하니 인류는 괜찮아요."

    "…미국이 무너지면 아시아와 유럽도 같이 무너집니다. 세계는 이제 거리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경제로 이어져 있죠."

    "왜요?"

    크리스토퍼는 일생일대의 난관에 부딪혔다.

    이 인간에게 경제 세계화를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는가.

    차라리 강아지에게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이 인간을 이해시키는 것이 쉬울까.

    통역을 하던 최정훈조차 난감한 얼굴로 크리스토퍼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혁이 인상을 확 썼다.

    "누굴 바보로 아나! 저도 다 알거든요?"

    "진짜?"

    "리얼리?"

    "확! 마! 씨!

    둘은 놀랍다는 얼굴로 바라보았고, 이지혁은 코웃음을 쳤다.

    이 인간들이 진짜 사람 무시하나.

    내가 한때는 대륙의 경제를 한 손에 쥐고 흔들던 거상이었던 몸이다. 마지막에는 다 말아먹기는 했지만… 한때나마 대륙 최고의 거부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 니들이 감히 내 앞에서 경제를 논해?

    "뭐, 어쨌든 됐고."

    이지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단은 의학 쪽으로는 답이 없으니, 쓸데없는 연구는 중단시켜요."

    "그건 좀 어렵습니다."

    "왜요?"

    "생색은 내야죠.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겠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대가리를 쪼개러 오겠지.

    납득 간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크리스토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이 지경인데, 의사 놈들 보고 놀라고 하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죠. 결과는 안 나오더라도 눈 시뻘게져 가며 며칠 밤은 새면서 고통에 동참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아저씨… 성격 나쁘네?

    뭔가 동류를 발견한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마, 마음대로 하세요."

    이럴 거면 난 뭐 하러 온 거지?

    이지혁이 헛걸음을 했다고 생각할 때, 크리스토퍼가 물어왔다.

    "그런데 이지혁 씨."

    "예."

    "방법은 있는 겁니까?"

    "음……."

    이지혁이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자 크리스토퍼가 은근히 이지혁을 재촉했다.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말을 꺼내신 것 아닙니까?"

    이 아저씨, 예리하네?

    "그만 말씀해 주시죠.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최정훈이 살며시 이지혁에게 물었다.

    "말해줘도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네. 뭐, 딱히 숨길 일은 아니니까요."

    이지혁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아저씨."

    최정훈이 통역을 시작했다.

    "쟤들은 의학이나 현대 방법으로는 어떻게 못해요. 솔직히 저도 방법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천하의 크리스토퍼조차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이나 지금의 좀비 사태는 어떻게 해결할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 난관이었다.

    "그래서 지금 일단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불러오는 중이에요."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의학이나 현대의 기술로 해결할 수가 없는데,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게 누굽니까?"

    이지혁은 당당히 말했다.

    "나도 모르죠."

    "네?"

    크리스토퍼의 맹한 되물음.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가볼게요. 잘 막아봐요."

    "아니… 이지혁 씨! 이지혁 씨!"

    하지만 이지혁은 크리스토퍼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정해민과 최정훈의 손을 잡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끙……."

    크리스토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저놈의 이지혁이라는 놈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인간이다.

    위가 콕콕 쑤셔오는 기분을 느끼며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오셨어요?"

    이지혁은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서아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애들 다 어디 갔어요?"

    "파견요."

    "파견?"

    "미국에서 지원을 요청해 와서요. 대통령 쪽으로 직접 요청이 들어왔어요. 영악하다고 해야 할지……. 덕분에 대통령님이 파견을 명하셨죠."

    "누구 맘대로."

    이지혁의 말에 서아영이 머리를 긁었다.

    "우리야 뭐, 대통령령이 내려오는데 뭘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야죠. 반은 군인인데."

    "헹!"

    이지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지혁이 기사단장이던 시절에는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기사단을 제 맘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건 이지혁에게 주어진 권리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지혁의 기사단은 NDF였다. 그 NDF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이지혁을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다 불러들여요."

    "하지만……."

    "당장."

    이지혁의 단호한 목소리에 서아영이 움찔했다.

    최근 들어 줄기차게 대들고 있긴 하지만, 그건 이지혁의 기분이 적절할 때를 맞춰서 적당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지금처럼 이지혁이 기분이 좋지 않다거나 진지하게 나올 때는 딴지를 걸지 않는 게 좋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하고 불러들여요? 이미 지원을 나갔는데, 불러들일 때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이지혁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이유야 빤하지."

    "뭐요?"

    "내가 불렀다고 해요."

    "…네?"

    "다른 이유가 왜 필요해? 내가 불렀다고 하면 되지!"

    "아니, 그게 무슨 이유가 돼요."

    "…됩니다."

    최정훈은 조금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이유가 없다. 막말로 이유라는 것은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이지혁이 불렀다는 말을 납득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설사 납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지혁에게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이지혁이 나서서 보복을 할 필요도 없다. 다음에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뚱하게 고개 한 번 가로젓는 것만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누가 이지혁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겠는가.

    "확실히 가능하겠네요. 하지만 그걸 가장 불편해할 사람은 아마 미국이 아니라……."

    우리 쪽 높으신 분일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최정훈이 고민 어린 얼굴을 했다.

    "웬만하면 그대로 두시죠."

    "제가 왜요?"

    "어차피 곧 해결될 일인데, 굳이 얼굴 붉힐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금세 내저었다.

    "아뇨. 불러요."

    "그래도……."

    "최정훈 씨."

    "…네."

    이지혁의 낮은 목소리에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한 번 넘어가 주면 사람은 두 번 해보게 되고 결국에는 당연해져요."

    "알겠습니다."

    이지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최정훈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만한 관계라는 것은 동등한 입장에서 추구하는 거죠. 난 그럴 필요 없어요."

    "그 말도 맞네요."

    이지혁이니까.

    오로지 이지혁만이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이지혁은…….

    "난 또라이니까."

    또라… 아니, 그게 아니지!

    거기서 그 말이 나오는 게 아니지!

    뭔가 멋지게 하나 나올 타이밍이었는데!

    "또라이니까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럼 편해지는 거죠."

    "…합리적이시네요."

    "음……."

    뭔가 대답하려고 하던 이지혁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지혁이 바라본 자리에서 붉은 게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몬스터 게이트?"

    최정훈이 얼떨떨한 얼굴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아니에요."

    이지혁이 최정훈의 생각을 정정해 주었다.

    몬스터 게이트는 무슨.

    일 시켜놓은 도마뱀이 돌아온다고 게이트를 연 것이었다.

    우우우웅!

    게이트가 크게 진동하더니, 중앙 부분이 열리며 이계와 연결된 통로가 드러났다.

    "후우……."

    아펠드리체가 낮은 한숨을 쉬면서 게이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데리고 왔어?"

    "…인간의 상식으로는 먼저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게 우선 아닌가요?"

    "어, 수고했어. 데리고 왔어?"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인간에게 예의를 바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걸 천 년 전부터 알고 있었건만, 어설픈 기대를 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인간은 학습하는 존재이고, 드래곤은 기억하는 존재.

    알고 있는 상식에서 다시금 실패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아펠드리체가 조금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데리고 왔어요."

    아펠드리체는 두말없이 게이트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붉은 게이트 안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물빛의 법복이 인상적인 자.

    "…어? 너?"

    이지혁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 도마뱀이 미쳤나!

    대체 누굴 데리고 온 거야?

    그 수많은 신관들 중에서 하필이면 누굴 데리고 온 거냐고!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자 게이트 안에서 걸어 나온 자가 이지혁을 가만히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멸망의 좌이시여."

    이지혁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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