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5화 (35/118)
  • [■] 기대하라고, 도마뱀 [■]

    ─────

    이지혁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마치 불꽃처럼 주변을 감싸고돌기 시작했다.

    "으!"

    서아영은 그 압력에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예전에는 이지혁이 무엇을 해도 이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더없이 불길하고 강력하다는 느낌만을 받았을 뿐, 그 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력이 직접 그녀의 몸을 겁박하고 뒤트는 듯한 느낌.

    이지혁의 마력을 주입 받으면서 그 힘을 직접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강해져서 이제는 이지혁의 힘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괴물 같은 새끼.'

    서아영은 전율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지혁에게 덤벼들었지만, 그때마다 손쉽게 제압당했다.

    그때마다 이지혁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강한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서아영과의 다툼 따위, 이지혁에게는 세 살짜리 어린아이의 투정을 받아주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진심이 된 이지혁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정도의 투기를 뿜어내는, 진정 전장의 화신이었다.

    "그게……."

    벨트레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고작 그게 전부인가?"

    이지혁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어, 지금은."

    "하하하!"

    벨트레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이없는 기분을 넘어서 분노가 치밀 정도다.

    과거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그의 땅을 침공했을 때, 그는 팔다리가 뽑히고 바닥에 처박혀 이지혁의 발바닥을 핥아야 했다.

    절대의 복종을 맹세하고 배를 갈라 내장을 잡아 뽑히고 나서야 겨우 그에게 대항했다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마왕이 죽어 나갔음에도 벨트레체는 자존심을 버리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치욕과 굴욕을 안겨준 저 이지혁의 지금 모습을 보라.

    너무도!

    너무도 초라하지 않은가!

    "이지혀어어어어어억!"

    분노에 찬 벨트레체의 고함 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우우우웅!

    그저 화를 냈을 뿐인데도 대지가 제멋대로 진동하고, 바닥을 메우고 있던 흙과 모래, 자갈들이 허공으로 부유한다.

    이것이 인세에 강림한 마왕의 힘!

    이지혁이 혀를 찼다.

    "뭐, 너도 정상은 아니구만. 피차일반 아냐?"

    "끅끅끅."

    벨트레체가 조이는 듯한 음성으로 웃어 젖혔다.

    "너를 찢어 죽이면 통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만, 그것도 아니구나. 죽어라, 이지혁이여. 차라리 내 손에서 죽어라. 그것이 한때 마계를 뒤흔들었던 아흔아홉 번째 마왕에게 내가 베풀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다."

    "서사시 쓰고 자빠졌네, 미친 새끼가."

    이지혁이 바닥에다 침을 퉤, 뱉더니, 소매를 걷어붙였다.

    멸망의 좌?

    아흔아홉 번째 마왕?

    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희가 제멋대로 이름을 붙여서 사람을 규정했을 뿐이지, 나는 변한 게 없다.

    이지혁을 이지혁답게 만드는 것은 그 강대했던 힘이 아니다.

    절망의 바닥에서 끝까지 기어 올라간, 그 꺾이지 않는 의지가 바로 이지혁이다.

    "도마뱀 새끼가 혓바닥은 청산유수네. 길어서 그런가?"

    그러니까 혀 내밀어서 눈알 핥지 말라고, 이 파충류 새끼야!

    아주 징그러워 죽겠어, 진짜!

    이지혁이 우수를 내밀었다.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진이 빠질 정도로 말이야.

    우수에서 빠져나온 마나가 허공에 마법진을 연성해 냈다.

    개전의 신호로는 적당하지.

    "열어라!"

    이지혁의 외침과 함께 마법진이 거대한 게이트를 만들어낸다.

    그와 동시에 게이트가 검은빛을 뿜어내더니, 소용돌이치듯 열렸다.

    "쏟아져라!"

    카아아아악!

    키에에에엑!

    거친 짐승의 울부짖음과 함께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끝도 없이 튀어 나와 벨트레체에게 달려들었다.

    붉게 물든 눈동자와 입가에 맺힌 피거품들이 지금 몬스터들이 지금 얼마나 광포화되어 있는지 알려주었다.

    카아아아아아아!

    몬스터들이 제멋대로 얽히며 벨트레체에게 달려들었다.

    "하등한 것들이."

    벨트레체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뒤로 당겼다.

    뒤로 살짝 당겨진 손이 앞으로 가볍게 튕기자 공기가 폭발할 듯 진동하며 앞으로 뿜어져 나간다.

    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공기의 충격파에 휘말린 몬스터들의 육체가 그야말로 분쇄된다.

    고체가 액체가 되고, 액체가 순식간에 기화되며 붉은 핏빛 연기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하나하나가 강철보다 강한 강도를 가졌을 몬스터들이 단순한 공기의 파동 앞에서 물속에 빠진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

    서아영들은 그 광경을 보며 그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대체 무슨 광경인가.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마왕?

    카아아아악!

    하지만 광포화한 몬스터들은 눈앞에서 다른 몬스터들이 분쇄되고 있음에도 달려듦을 멈추지 않았다.

    "열어라!"

    그와 동시에 이지혁이 게이트를 더 열어젖혔다.

    커어어어엉!

    오식이가 완전한 육체로 튀어나와 벨트레체에게로 달려든다.

    히드라와 대망도 몸을 돌보지 않고 벨트레체에게로 달려들었다.

    "흐음……."

    벨트레체가 그 광경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세뇌를 한다고 해도 하급 몬스터는 상위의 존재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의 종속의 인이 찍힌 몬스터들은 그런 모든 것을 잊어버렸는지, 마왕인 자신에게도 거침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이 신기하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새 자신에게 바짝 다가와 아홉 개의 머리를 들이미는 히드라를 보며 벨트레체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감히?

    벨트레체의 우수가 가볍게 앞으로 튕겨졌다.

    퍽.

    아주 작은 소음이었다.

    하지만 그 소음의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앞에서 보면 히드라의 몸뚱아리에 주먹만 한 구멍이 났을 뿐이다. 하지만 뒤에서 보는 이지혁의 눈에는 소용돌이처럼 파여 집채만 한 구멍이 나버린 히드라의 등이 보였다.

    "큭."

    단 일격인데…….

    그것도 힘을 싣지도 않은 단 일격에!

    육체형 마족의 힘.

    드래곤조차 손으로 찢어 죽인다는 마왕의 힘 앞에 몬스터는 너무도 무력했다.

    일반적인 물리 공격에는 거의 면역이라고 봐야 하겠지.

    "티리에!"

    소리 높여 외치자 이지혁의 등에서 고혹적인 미소를 띤, 흐릿한 미녀의 형체가 흘러나왔다.

    "가라!"

    아아아아아아!

    실제로 들리는지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아리아가 울려 퍼지며 어둠의 정령 티리에의 육체에서 검은빛이 작렬하듯 뿜어져 나온다.

    "세티?"

    타락한 세티인가?

    별걸 다 가지고 다니는군.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벨트레체가 자신에게 날아드는 빛의 덩어리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어둠의 정령이라는 것은 수만 년을 살아온 그로서도 보기 힘든 희귀한 존재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뿐.

    콰콰콰쾅!

    세티가 뿜어낸 빛 덩어리들이 벨트레체의 육체에 작렬하며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냈다.

    커어엉!

    폭발에 휘말린 오식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댄다.

    "쯧."

    이지혁의 촉수가 뻗어져 나가 오식이의 몸에 틀어박힌다.

    순간적으로 공급된 마나가 상처 입은 오식이의 육체를 수복해 낸다.

    "시간을 끌어!"

    어차피 이들의 공격으로 놈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만 끌어주면 된다.

    시간만!

    이지혁이 제대로 영창에 들어갔다.

    육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나가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낸다.

    "아아아아아!"

    목과 이마 위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핏대가 솟아오른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운무 같은 마나가 마구 뿜어져 나와 허공의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끄윽……."

    마나가 빠져나가며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송곳으로 난도질하는 듯한 격통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지혁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은 잠시.

    놈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고통보다 더한 것을 겪게 될 것이다.

    마왕이란 본디 그런 존재들이니까.

    이지혁이 만들어낸 마법진이 빛을 내뿜었다.

    "흐음……."

    그 거대한 폭발 속에서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벨트레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 않……."

    그 순간, 벨트레체의 눈에 상공에 새겨진 마법진이 들어왔다.

    "호오?"

    이지혁이 저런 식으로 마법을 쓰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예전의 이지혁은 마나의 변형이 필요 없는 존재였다.

    마왕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마나를 뭉치고 뭉치고, 짓누르고 또 짓눌러 마나 자체가 알아서 변형하여 소용돌이치게 만들어 직접 날려 버렸다.

    이지혁만의 마법이었고, 이지혁만이 가능했다.

    마법에 관한 한 마왕들조차도 범접하지 못할 지경에 올라 거의 마신급이라고 불려야 할 정도의 이해도와 활용도를 보이던 자가 바로 이지혁이다.

    그런 이지혁이 지금 마나를 변형하고 있었다.

    어떨까?

    효율이 올라간 만큼 더 강해질까, 아니면 단순히 과거처럼 할 수 없기에 만들어낸 호구지책인가.

    그 어느 쪽이든 간에…….

    "받아주지."

    벨트레체는 오만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이지혁의 양팔에 달린 드래곤 하트들이 검게 물들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끅……."

    이지혁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용 용량을 넘어버린 마나가 역류하면서 육체를 제멋대롤 찢었다가 잇고, 뼈를 부수고 다시 잇는다.

    순간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보아 뇌조차 제멋대로 휘젓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멈추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아!"

    촛불이 꺼지기 직전에 좀 더 밝게 불타오르듯이, 이지혁의 육체에서 전보다 더 많은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끄……."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가 혈안이 된 눈으로 이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몸뚱아리가 강하다지?"

    벨트레체를 보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받아보시지."

    이지혁의 손짓과 함께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더니, 하늘에 거대한 먹구름을 생성했다.

    "흐음?"

    먹구름이 벨트레체를 향해 날아든다.

    벨트레체는 그 먹구름이 자신의 머리 위를 가득 메울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먹어라!"

    이지혁의 고함 소리와 함께 먹구름이 파직거리더니, 새까만 빛이 땅으로 떨어졌다.

    낙뢰!

    검은 벼락이 벨트레체의 머리로 떨어졌다.

    콰르르릉!

    천둥치는 소리가 끝도 없이 터지고 또 터지고, 새카만 뇌전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일천 번의 낙뢰.

    일반적인 번개가 가진 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에너지를 품은 뇌전들이 일천 번이나 벨트레체의 육체를 관통했다.

    에인션트급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단숨에 숯 덩어리로 구워버릴 만큼의 낙뢰가 벨트레체에게 모조리 떨어졌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는 완벽한 적중.

    그야말로 낙뢰의 비[雷雨].

    이지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나를 과도하게 뽑아낸 부작용으로 인해 그의 몸은 성한 곳 하나 없이 전신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이지혁의 등 뒤에서 그의 머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진다.

    "아펠드리체."

    아펠드리체는 말없이 이지혁의 머릿속으로 순결한 마나를 밀어 넣었다.

    뇌를 침식하던 흑마력이 천천히 밀려나며 분노와 흥분으로 가득했던 정신이 맑아져 온다.

    하지만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게 다인가?"

    그 재수 없는 목소리를 더욱 똑똑히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 * *

    그의 형체는 이미 숯이 되어 있었다.

    벨트레체.

    여든두 번째 마왕의 목소리가 마치 검은 숯으로 만든 조각상에서 새어 나오는 듯했다.

    투둑.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여든두 번째 마왕이 그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탁, 탁.

    껍질을 뒤덮은 숯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흡!"

    가벼운 기합성과 함께 벨트레체의 몸을 뒤덮고 있던 숯들이 일제히 뿜어지듯 튕겨 나간다.

    "흐으음……."

    벨트레체가 그 샛노란 눈으로 자신의 육체를 살폈다.

    비늘들이 모조리 숯이 되어 떨어져 나가고, 옅은 노란빛 속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곳곳에서 진물이 흘러내리고, 미약한 핏줄기들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뿐.

    비늘이 상한 정도라면, 곧 회복될 상처에 불과하다.

    오히려 마법을 사용한 이지혁 쪽이 더 많은 대미지를 입었다.

    무리한 공격에 흑마력의 반발로 육체가 망가져 버린 이지혁이 더 많은 타격을 받고 만 것이다.

    "하……."

    이지혁은 낮은 신음을 흘려냈다.

    이 정도가 아닐 텐데…….

    아무리 약해졌다고는 하나 마나에 대한 감각과 전투본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법은 정확히 계산한 대로 펼쳐졌다.

    그렇다면 겨우 저런 정도의 타격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격에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심대한 타격 정도는 주었어야 하는데…….

    "나약하군."

    벨트레체의 몸에서 다시금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육체를 덮고 있던 것에 비해 조금은 연한 듯한 비늘들이 벨트레체의 몸을 채워 나가더니, 이내 딱딱하게 말라붙어 과거와 완벽할 정도로 동일한 신색을 회복해 냈다.

    "나약해!"

    벨트레체가 고함을 질렀다.

    "이게 지금 너의 모습인가, 이지혁!"

    "썩을 도마뱀 새끼가……."

    이지혁의 몸이 휘청였다.

    당당히 서서 소리치고 싶지만, 제멋대로 뒤틀려 버린 근육이 그의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한 방에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

    이지혁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한 방으로 안 되면, 두 방으로…….

    두 방으로도 안 되면, 세 방, 네 방…….

    끝도 없이 퍼붓고 또 퍼붓는다.

    그것이 이전부터 지켜온 이지혁의 방식이었다.

    과거라면 지금쯤 벌써 같은 마법 수십 개를 난사하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되니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가며 마법을 쌓고 또 쌓아 대미지를 축적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전에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은데?'

    공격하는 쪽이 대미지를 더 받는 상황이라니.

    불합리하다.

    내장이 모두 타버린 듯 목구멍 안에서 피 내음과 열기가 치밀어 오른다.

    "지혁 씨."

    걱정스런 아펠드리체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 여자…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지?

    지금이 누굴 걱정하고 말고 할 상황인가?

    "물어뜯어라!"

    이지혁의 외침이 들리자 사태를 주시하던 몬스터들이 다시 일제히 벨트라체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잡스러운 짓을."

    벨트레체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한낱 파충류 주제에 짜증이라는 감정을 얼굴로 표현한다는 것이 건방지다는 생각을 떠올린 이지혁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벨트레체가 가장 먼저 달려든 몬스터를 움켜잡아 몬스터 떼를 향해 집어 던졌다.

    콰아아아아!

    몬스터의 육체가 공기와 충돌하며 갈려 나간다.

    순간, 음속을 초월하며 소닉붐이 일어난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

    멈추지 않는 가속!

    콰아앙!

    몬스터의 육체와 육체가 충동하며 폭음이 일더니, 가로로 눕혀진 토네이도처럼 회전하는 몬스터가 길게 폭풍을 일으키며 다른 몬스터들을 휩쓸어 버렸다.

    "으아아!"

    그러는 사이, 이지혁의 등에서 촉수가 마구 뿜어져 나온다.

    "이지혁 씨!"

    상황을 파악한 NDF들이 이지혁의 주변으로 모였다.

    "큭!"

    이지혁이 촉수를 조종하여 그들의 육체를 휘감았다.

    그러고는 흑마력을 밀어 넣는다.

    "끄으으윽!"

    "으아아아!"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온다.

    우드득.

    이지혁의 육체가 뒤틀리다 못해 살이 터져 나가며 검은 피를 왈칵왈칵 쏟아내고 있었다.

    "시간!"

    "라져."

    낮게 가라앉은 눈을 한 서아영이 소리친다.

    "대형으로!"

    "우오오오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성찬이 붉어진 눈으로 앞으로 돌진한다.

    그 뒤를 레드락 김명운과 강화계 능력자들이 뒤따랐다.

    하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벨트레체에게 달려든 것은 누가 뭐래도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이었다.

    "타앗!"

    김다현의 발이 공기가 찢어지는 파공음을 남기며 벨트레체의 얼굴에 틀어박힌다.

    "오?"

    벨트레체가 여유롭게 그 발차기를 한 손으로 막는다.

    콰앙!

    폭음이 터지며 김다현의 다리가 정강이부터 부러져 반대쪽으로 완전히 꺾여 버렸다.

    "크아아아!"

    비명을 지르면서도 김다현은 멈추지 않고 허공에서 반대쪽 다리를 휘돌려 벨트레체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콰앙!

    분명히 정수리를 제대로 가격했다.

    하지만 제대로 들어간 공격이라 하여 제대로 된 대미지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우드득.

    섬뜩한 소음과 함께 김다현의 다리가 또 정강이부터 부러져 반대쪽으로 꺾여 버렸다.

    "빠르긴 하다만……."

    그뿐이다.

    벨트레체의 우수가 이번에는 김다현의 명치를 노렸다.

    "으아앗!"

    그사이에 도착한 박성찬이 김다현의 허리춤을 움켜잡고 뒤로 몸을 날린다.

    얼마나 세게 움켜잡았는지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고 살이 뜯겨나갈 지경이지만, 덕분에 김다현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박성찬의 육체가 그대로 벨트레체에게 노출되었다.

    붕!

    벨트레체의 정권이 박성찬의 육체에 틀어박힌다.

    콰득.

    강철을 넘어 이제는 다이아몬드급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던 육체가 종잇장처럼 꿰뚫린다.

    박성찬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자신의 명치에 팔꿈치까지 틀어박힌 손을 보았다.

    "끅……."

    박성찬이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의 명치에 박힌 벨트레체의 팔을 부여잡았다.

    다른 손이 재차 후려치자 박성찬이 가슴이 움푹 꺼진 채 뒤로 포탄처럼 튕겨져 나간다.

    벨트레체의 팔을 움켜잡은 손이 순간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아아아!"

    군데군데 검은 기운이 보이는 서아영의 불꽃이 허공을 날아 벨트레체에게로 떨어진다.

    벨트레체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화르르륵!

    온도를 측정할 엄두도 나지 않는 고온의 화염이 벨트레체의 육체를 집어삼키고 불태운다.

    하지만 벨트레체는 가벼운 손짓으로 풍압을 일으켜 몸을 둘러싸고 있는 화염을 날려 버렸다.

    "뭔가 조금 신기하군. 마법도 아닌데 이러한 능력이라니. 능력자라고 불리는 족속들은 차라리 인간보다 마족에 가까운 것 같은데?"

    고유의 능력을 타고나 그 방향으로 강해져 나간다는 점.

    그건 인간보다는 정령이나 마족에 가깝지 않을까?

    '인간이라고 해도 같은 인간은 아니니…….'

    겉모습이 같다고 하여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베라프의 인간과 이곳의 인간은 다른 종족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루드라의 칼날 같은 폭풍이 벨트레체를 휩쓸고, 스핏 파이어의 화염 대포가 벨트레체에게로 날아들었다.

    쾅!

    콰아앙!

    폭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비산한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피 내음이 사방에서 흘러 들어온다.

    "아아아아!"

    그사이, 주문을 완성한 이지혁의 우수가 허공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섬뜩한 검은 마력의 칼날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벨트레체의 육체로 떨어진다.

    콰드득!

    이지혁이 이를 악물었다.

    마나를 있는 대로 응축한 마력의 칼날임에도 벨트레체의 비늘을 가르고 육체에 조금 틀어박히는 데 그치고 말았다.

    "흐음……."

    벨트레체가 얼굴 가운데로 길게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혀를 내밀어 핥았다.

    자신의 피를 맛보면 흥분이 치솟는다.

    "그 정도의 마력밖에 소유하지 못했는데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겨우 그 정도의 마력을 소유했기에 나의 몸에 생채기밖에 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까? 어느 쪽일까, 이지혁?"

    "흐……."

    이지혁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안타깝다고?

    뭐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해도 내가 아쉬울 게 있어 보이나?

    난 죽으려고 여기 온 사람이다, 이 도마뱀 새끼야.

    이지혁의 양손에 다시금 마나가 뭉쳤다.

    "물러나!"

    신호가 떨어지자 벨트레체를 둘러싸던 능력자들이 일제히 몸을 띄워 그 주변에서 물러났다.

    "오식아!"

    커어어어엉!

    마나를 있는 대로 때려 박아 몸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오식이가 벨트레체의 몸을 짓눌렀다.

    "오거 따위가……."

    벨트레체가 눈살을 찌푸리며 팔을 휘두르자 오식이의 한 팔이 걸레 조각처럼 찢겨 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커어엉!

    하지만 광포화한 오식이는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지. 다른 한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벨트레체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까강!

    오거의 이빨과 벨트레체의 비늘이 충돌하며 강렬한 쇳소리를 만들어냈다.

    오식이의 이빨은 벨테레체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이지혁이 오식이의 몸에 박아 넣은 촉수를 빠르게 잡아 당겼다.

    파아앙!

    촉수 끝을 박아 넣은 채 회수하자 이지혁의 육체가 허공을 뛰어넘어 오식이에게로 날아들었다.

    공기의 벽이 육체를 짓눌러 대지만, 이지혁은 육체를 보호하는 것도 포기한 채 다른 한 손에 마나를 응축하고 또 응축했다.

    "우아아아아아!"

    입에서 피거품이 뿜어진다.

    내장이 뒤틀린다.

    하지만 이지혁은 멈추지 않았다.

    "벨트레체에에에에에에!"

    이지혁의 우수가 응축된 마나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격하여 타격을 줄 수 없다면, 직접 때려 박는다!

    "으아아아아아!"

    음속을 초월하여 달려든 이지혁이 오식이가 잡고 있는 벨트레체의 가슴을 향해 우수를 찔러 넣었다.

    콰드드득!

    섬뜩한 소음과 함께 이지혁의 우수가 벨트레체의 가슴 비늘을 뚫고 손목까지 파고들었다.

    끄윽…….

    손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극심한 격통이 일었지만, 이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이게 끝일 리가 없잖아!

    "터져라!"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귀가 멀어버린 듯.

    오식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으로 보아 굉장한 폭음이 터진 모양이었다.

    벨트레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벨트레체의 입이 열린다.

    아주 천천히.

    아.쉽.군.

    아쉽군?

    쿵!

    몸이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이거,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인데?

    이지혁의 시야에서 벨트레체의 몸이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왜?

    이상하게…….

    그런데 지금 치솟은 핏줄기는 누구 거지?

    설마 이거… 내 핀가?

    내 몸에서 이렇게 피가 솟을 곳이 없는데?

    이지혁의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뻥 뚫린 채 피를 마구 뿜어내고 있는 옆구리가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얻어맞고 충격에 날아가고 있는 건가?

    어쩐지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었다.

    현실감을 되찾아준 것은 슬로우 모드가 끝난 듯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한 세상과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격통, 그리고 울음이 반쯤 섞여 있는 정해민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지혁아아아아아아!"

    시끄럽게 소리 지르기는.

    누가 죽기라도 했나.

    이지혁의 눈앞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왜 검어지는 거지?

    아직 낮인데?

    이지혁은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죽음인가?

    죽음?

    콰득.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거의 혀가 잘려 덜렁댄다.

    혀를 깨문 통증으로 정신을 되돌린 이지혁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 아니야.

    이 정도가 아니야.

    쿵!

    바닥에 추락한 이지혁이 꿈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살아 있는가? 벌써 죽을 리는 없겠지?"

    잘 보이지도 않는 시야.

    하지만 아직 귀는 뭔가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 대답해야지.

    죽는 한이 있어도 대답은 해야지.

    입이 죽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이지혁이 아니니까.

    "이제……."

    "흐음?"

    "그 모가지를 뜯어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도마뱀."

    "큭큭큭큭."

    유쾌한 벨트레체의 웃음과 이지혁의 낮은 신음만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려온다.

    * * *

    "큭큭큭큭."

    이지혁은 혼자 웃고 말았다.

    죽음이라…….

    수도 없이 겪었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이지 못한, 그 친숙하고도 낯선 개념이 지금 그에게 내려앉고 있었다.

    수만 번의 죽음을 겪었지만, 단 한 번도 죽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그 죽음이라는 것을 느껴볼 줄이야.

    '위기감이 다르긴 하네.'

    베라프 초반에는 이런 심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죽음과 부활 속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실감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이런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해줘서 말이야.

    벨트레체는 이지혁의 핏발 선 눈을 보며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지혁에게 죽음이라는 감각이 생소하듯이, 벨트레체에게 안타까움이라는 감정 역시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벨트레체는 확실히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대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정점에 선 인간이 굴러 떨어지는 광경을 본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이다. 인간들 역시 그 광경을 보고 즐기는데, 악마인 벨트레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정점에서 떨어져 바닥에 구르고 있는 존재를 본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었다.

    평소라면 침을 뱉고 조롱했을 벨트레체조차 지금의 이지혁에게는 연민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악마인 그조차도 말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이지혁."

    벨트레체는 씹어뱉듯 말했다.

    "모든 생물은 자신의 격을 높이기를 원하지. 인간이든 악마든 드래곤이든… 하찮은 몬스터라고 해도 말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그 무엇이든.

    "그런데 너는 왜 너의 격을 스스로 떨어뜨렸지? 멸망의 좌여,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올랐던 이여, 그저 힘만으로 신성의 영역에 다다랐던 자여, 그런 자리에서 왜 스스로 구렁텅이로 내려갔는가?"

    이지혁은 대답 없이 벨트레체를 노려보기만 했다.

    "대답해 보라,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네가 스스로 택한 그 자리에 만족하는가? 너는 무엇을 얻기 위해 그곳에 있는가? 마계마저 떨게 만든 힘이 없어진 지금의 너를 보라. 너는 이제 멸망의 좌도 아니고, 불멸의 혼도 아니며, 아흔아홉 번째 마왕조차 아니다. 대답해 보라, 이지혁이여. 어째서 그러한 길을 선택했는가?"

    이지혁은 피식 웃었다.

    지가 다 말해놓고는 뭘 대답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 난 이지혁이지."

    그걸 원했던 거다.

    멸망의 좌니, 불멸의 혼이니… 빌어먹을,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원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이름 붙여서 경배하고 두려워한 건 너희지.

    나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어.

    내가 원한 것은 그저 돌아가는 것.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곳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이뤄질 수 없다는 것쯤은 너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거야.

    "그저 이지혁이다."

    "이해할 수가 없군."

    벨트레체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으로 돌아와 신성을 잃는다 해서 이지혁이 되는가?

    그곳에 있을 때도 그는 이지혁이었다.

    존재를 규명하는 어떠한 요소를 적용한다고 해도, 그가 이 세계로 돌아온다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보라."

    퍼엉!

    벨트레체가 장난스레 휘두른 손짓에 풍압이 눈에 보일 듯 실체화되어 날아든다.

    위태롭게 서 있던 바닥이 터져 나가면서 이지혁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붕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것이 너의 현재다."

    이지혁이 덜덜 떨리는 팔로 몸을 바닥에서 밀어냈다.

    금방이라도 팔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처박힐 것 같지만, 이지혁은 결국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뭐?"

    이지혁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의 이지혁?

    꼴사납고, 신경질적이고, 약해 빠졌다.

    베라프에 있을 때는 그가 가진 힘과 격이 그 모든 것을 덮어주었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그저 히스테릭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

    나는 그저 나로 돌아오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여기서 네 손에 죽는다고 해도 여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살 만큼 살았다.

    겪을 만큼 겪어보았다.

    그러니 이제 죽지 않기 위해서 발악할 이유도 딱히 없다.

    다만, 딱 하나 거슬리는 것은…….

    "그런데 네 손에 죽으려니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데?"

    이지혁의 이죽거림에 벨트레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입은 정말 보관하고 싶을 정도야."

    "좋은 생각이야. 남은 삶 내내 옆에서 잔소리를 해주지. 혹시 알아? 덕분에 마계 일통이라도 하게 될지 말이야. 낄낄낄."

    이지혁은 벨트레체를 조롱하면서 양손에 마나를 모았다.

    죽는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이런 도마뱀 따위에게 죽는 것은 영 자존심이 상한다.

    적어도 고위급 마왕에게는 죽어줘야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할 말은 있을 것 아닌가.

    옆구리에서 격통이 느껴진다.

    구멍이 뚫린 채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는 상처를 보는 것이 영 어색하다.

    보다 못한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옆구리에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끄윽."

    이지혁의 육체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뒤틀린다.

    죽음에 직면한 상황이라 힐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흑마력에 찌들어 있는 이지혁의 육체는 쏟아지는 빛의 마력을 적이라 간주하고 들끓기 시작했다.

    육체는 수복되고 있지만, 마나가 몸 안에서 싸우면서 절로 식은땀이 흐를 만큼의 고통이 이지혁을 괴롭혔다.

    으득.

    꽉 다물어진 이가 부러져 나갈 듯 기긱대고, 손발이 절로 덜덜 떨린다.

    "됐어요."

    걱정과 단호함이 반쯤 섞인 아펠드리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빛의 마나가 육체에 잔존하여 계속해서 어둠의 마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되레 부상을 입히는 행위지만, 지금은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힐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정도로 육체의 손상이 심각했다.

    "고맙군."

    고마워 해야 할지, 욕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맙다고 해두지.

    "하지만 더는……."

    아펠드리체가 말끝을 흐렸다.

    안다.

    이제 더 이상은 몸이 버티지를 못하겠지.

    힐을 받는 것도 흑마력을 더 끌어 쓰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다만…….

    이지혁의 눈이 벨트레체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저걸 내버려 두면 모두가 죽겠지.

    이지혁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서아영!"

    "네!"

    서아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수를 써서든 잠시만 잡아둬라. 잠시면 된다."

    "네."

    서아영은 평소처럼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라면 지휘자의 명령을 듣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이해한 건지, 아니면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인지는 이지혁도 알 수 없었다.

    "리체."

    "네."

    "저들을 도와줘."

    "하지만……."

    "도와!"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행동 원칙은 이지혁의 보호와 케어가 최우선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이지혁에게서 눈을 떼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는 것을 그녀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알겠어요."

    아펠드리체의 육체가 빛을 뿜으며 광역으로 힐을 날려 댔다.

    "으으……."

    박성찬의 육체에 난 구멍이 순식간에 수복되고, 꺾였던 김다현의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 참지 못할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일어나요."

    아펠드리체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 역시 이지혁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이들을 돕는 것이 더 편했다.

    마나가 부족하다 보니 베라프에서처럼 광역 마법을 펑펑 뿌려 댈 수가 없다.

    이 세계에서 가장 부족한 치료 마법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이 그녀가 가장 효율적으로 내부에 가진 마나를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에게 치료 마법은 치료이기도 하지만, 치명적인 독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지혁이 아닌 쪽을 돕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일인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아펠드리체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옳다고 생각한 방향을 행하는 것에 껄끄러움이 느껴진다.

    이성으로 사는 생명체인 드래곤에게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녀 스스로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이 이렇게까지 진행되고 있었을 줄은…….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위태하게 서서 마나를 모으는 그의 모습이 두 눈에 아프게 박혀든다.

    한 줌 가치도 없는 이 세계를 지키겠답시고 저러고 있는 그도 짜증이 나고, 멀찍이서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어지지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정해민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짜증이 난다.

    '내가 이렇게 감정적인 생물이었나?'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감정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완벽하게 이성적이게 생각하고 사고한다는 것은 신의 영역이니까.

    알고는 있지만…….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런 사소한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 마왕을 상대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가능할까?

    그녀가 본체로 현신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상대다.

    마왕이란 언제나 한 번 소환되는 것만으로 대륙의 절반은 날려 버릴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였으니.

    드래곤들이 연합하여 상대해도 쉽지 않은 존재를 반쪽도 되지 못하는 그녀와 인간들의 연합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

    결과가 빤히 보이는 싸움이지만, 하지 않을 수 없다.

    변수가 있다면…….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그저 믿어보는 수밖에.

    "간다!"

    서아영의 외침에 박성찬이 앞으로 뛰어 나갔다.

    이미 한 번 고비를 넘겼음에도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인 것마냥 들소처럼 뛰쳐나간다.

    "배리어."

    아펠드리체의 영창과 함께 박성찬의 몸 주위에 새하얀 빛무리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의 육체 안에 머물러 있는 흑마력에 최대한 영향을 주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확실하게 그의 몸을 보호한다.

    드래곤이기에 할 수 있는, 정밀한 마력 조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지혁의 몬스터들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한 팔을 잃은 오식이도 거슬리는 괴성을 지르며 벨트레체에게 달려들었다.

    '이 와중에서도?'

    벨트레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의 손상이 정신까지 갉아먹고 있을 텐데도 아직 몬스터들에 대한 통제가 저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위의 몬스터들을 마왕에게 달려들게 만든다는 것은 완벽한 통제가 필요하다. 가진 힘과 관계없이 인간의 정신으로 그것을 해낸다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저 상태에서마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찬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저 꼴이 되어서도 멸망의 좌는 멸망의 좌라는 건가?

    이지혁은 벨트레체의 미소를 보며 이를 갈았다.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지?'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닐 거야.

    이지혁의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이리된 이상 별수 없지."

    정상적인 방법으로 대처할 수 없다면, 모험을 하는 수밖에.

    그 모험의 결과가 어떨지는 이지혁 또한 알 수 없지만…….

    "죽기밖에 더하겠어?"

    이지혁이 키득키득 웃으며 천천히 벨트레체에게 다가갔다.

    * * *

    저벅.

    저벅.

    발이 천금처럼 무겁다.

    '역대 최악인가?'

    항상 최상의 상태를 강제적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던 이지혁이다 보니 이런 상태에서 누군가와 전투를 이어 나간다는 것 역시 생소한 경험이었다.

    전투에 대한 경험이야 썩어 넘치다 못해 반쯤 덜어낸다 해도 역사상 유례없는 전투광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쌓여 있지만… 새삼 느낄 수밖에 없다.

    그의 경험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한정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아아아!"

    서아영이 뿜어낸 화염이 벨트레체를 뒤덮었다.

    하지만 벨트레체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화염을 털어냈다.

    "지겹군."

    그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적어도 다른 세계의 인간들은 나를 조금은 즐겁게 해주었는데 말이야. 이 세계의 인간들은 겨우 이 정도인가?"

    절대의 방어력.

    타입 자체가 방어 타입이 아님에도 인간 능력자들의 공격은 벨트레체의 비늘조차 뚫지 못했다.

    서아영의 화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지혁의 흑마력을 받아들여 더욱더 강화된 그녀의 화력도 벨트레체에겐 먹히지 않았다.

    "제길!"

    그 순간, 상황을 주시하던 최정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리스!"

    그의 외침과 동시에 크리스토퍼가 소리쳤다.

    "알겠다고!"

    크리스토퍼가 신호를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미국 측 능력자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큭! 왜 이제야!"

    원망스런 서아영의 외침을 들으며 최정훈은 눈을 빛냈다.

    어차피 이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아무리 달려든다고 하더라도 벨트레체의 공격을 받아내는 역할 이상은 할 수 없다.

    NDF가 총알받이라면, 이들은 그 총알받이를 지켜내는 총알받이인 것이다.

    그 사실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크리스토퍼는 자국의 능력자들을 내주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최정훈은 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여기서 막아내지 못하면 영원히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함 소리와 욕설 소리.

    분노와 증오가 쏟아진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백, 수천의 능력자들을 보며 벨트레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척이나 이상했다.

    자신의 힘으로 결코 닫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달려드는 것일까?

    몬스터와 악마는 본능 앞에 충실하다. 그렇기에 자신이 당해낼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면 결코 대항하지 않고 납작 엎드리거나 도주한다.

    그것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지혁조차 몬스터들을 종속의 인을 찍어 행동을 강제하지 않는가.

    그러나 인간은 이상한 행동을 한다.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하며 적에게 대항한다.

    이것은 정신이 발달한 고위 생명체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행동이다. 개미나 벌과 같은 군집 생명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행동이 홀로 독립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단위 생명체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리석지.'

    벨트레체가 손을 떨치자 손끝에서 발현된 풍압이 달려드는 인간들을 마치 종잇장처럼 날려 버렸다.

    크아아아아!

    그 와중에 달려든 몬스터들이 벨트레체의 육신을 할퀴고 이를 박아 넣는다.

    벨트레체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스읏.

    몬스터의 목이 날아가는 것에는 파공음조차 일지 않았다.

    처음부터 머리가 없던 것처럼 움직이던 몬스터는 이내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하등한 것들이……."

    벨트레체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마왕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이지혁과 로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자신의 앞을 이런 하등한 것들로 막아선다는 말인가.

    잊었다면 기억하게 만들어 줘야지.

    마왕이 무엇인지!

    "크르르……."

    벨트레체의 입에서 새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의 육신에서 약동하는 힘이 느껴진다.

    두 개의 팔과 네 게의 다리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꿈틀댄다.

    퍼어어엉!

    그저 앞으로 뛰쳐나갈 뿐인데 공기가 갈라지는 폭음과 함께 소닉붐이 인다.

    "큭!"

    전방에서 방어를 맡고 있던 박성찬이 순식간에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벨트레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버텨낸다!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고,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배리어!"

    그의 앞으로 겹겹이 실드가 쳐진다.

    바디 벙커를 몇 겹이나 둘러친 것처럼 투명한 실드가 그의 앞을 막아서고, 박성찬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바닥으로 박고 서서 체중을 최대한 앞으로 당겼다.

    하지만 그뿐!

    콰아아아아아앙!

    단순한 정권 찌르기.

    어떠한 기교나 기술도 들어가지 않은, 그 단순한 일격이 가져온 파괴력은 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버렸다.

    일격에 모든 실드가 조각나고, 그의 어깨가 함몰되어 내장까지 짓이긴다.

    기도가 박살 났는지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뒤로 튕겨난 박성찬의 육체가 말 그대로 쏘아진 포탄이 되어 동료들을 날려 버린다.

    "커억!"

    "크아아악!"

    헛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박성찬에게 부딪친 이들이 휘말려 튕기고 얽힌다.

    "힐!"

    아펠드리체가 다급하게 박성찬에게 힐을 퍼부어 댔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는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즉사했을 것이다.

    "우오오오!"

    벨트레체가 빈틈을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 미국의 능력자 '바디 샷'이 검게 물든 주먹을 벨트레체의 머리에 쑤셔 박았다.

    우드드득.

    하지만 그의 주먹은 벨트레체의 머리에 닿는 순간, 조각조각 으스러져 버렸다.

    촤악!

    휘둘러진 벨트레체의 손이 그의 육신을 반으로 가르고, 그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 버렸다.

    "막아아아앗!"

    크리스토퍼의 고함과 함께 미국의 능력자들이 벨트레체에게 달려든다.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겠다는 기세로 달려드는 능력자들의 눈에는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특공이라니, 빌어먹을."

    크리스토퍼가 이를 갈았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정신력에 의존한 희생 전략을 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뭉개고 있었다.

    이건 합리적이지 않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저 괴물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퍼부을 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무너지는 것이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멀었나!"

    그의 눈이 이지혁을 응시했다.

    이지혁이 원거리 공격 타입이라는 것이야 이미 파악했다.

    그리고 그 공격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파악이 끝나 있다.

    그의 입으로도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이지혁이 준비할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 정도였다.

    그렇지만!

    크리스토퍼의 눈에 또 하나의 능력자가 사지가 갈가리 찢겨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달려들기 시작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백에 가까운 이들이 시체조차 찾기 힘들 만큼 처참한 모양새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버티던 NDF와의 전력 차.

    그리고 그 차이조차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마왕 놈과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크리스토퍼를 절망하게 했다.

    "너무 늦잖아! 이 빌어먹을 놈아!"

    어떻게 좀 하란 말이다! 어떻게든!

    "낄낄낄."

    크리스토퍼의 고함 소리를 들은 이지혁이 낄낄대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조급하기는.

    마왕이라는 놈을 쓰러뜨리는 데 이 정도 희생이면 싸게 먹히는 거지. 베라프에서라면 왕국 몇 개 날아가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을 텐데 말이다.

    배가 부른 게지.

    이지혁이 천천히 벨트레체에게로 다가가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마나를 허공이나 자신의 앞에 모으는 것을 즐겼다면, 지금은 증폭된 마나를 자기 자신의 육체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것.

    육체를 매개로 삼아 마나를 회전시킨다.

    하늘에서 터지고, 끓어오르고, 진도하며 솟구치던 마나들이 이지혁의 육체 안에서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다.

    퍽!

    퍽!

    가죽 북 치는 소리와 함께 이지혁의 몸 이곳저곳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상완이 길게 터지며 피 분수가 뿜어진다.

    허벅지가 터져 나가며 몸 전체가 휘청인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마나의 폭풍을 육체 안에 가뒀으니, 육체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로 가두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마나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벨트레체를 쓰러뜨린다고 하더라도 그 끝이 좋지 않으리란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뭘 어쩌겠는가.

    이미 브레이크는 부숴 버렸다.

    이지혁의 눈이 타오른다.

    그의 눈에 일격으로 수십의 능력자들을 그야말로 분쇄해 버리는 벨트레체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왕.

    세계의 종말자.

    강림이 곧 지옥을 의미하는 자.

    하지만 아무리 마왕이라 하더라도 이지혁을 내려다볼 수는 없다.

    지금 이지혁이 그 사실을 가르쳐 줄 것이다.

    껍데기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격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벨트레체에에에에!"

    순간, 벨트레체가 고개를 돌리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음?"

    벨트레체의 눈이 순간 커졌다.

    '저게 뭐하는 짓이지?'

    보인다.

    그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손으로 빠져나온 마나가 양팔에 달려 있는, 드래곤 하트로 만든 증폭기를 통해 몇 배로 커져 다시 육체 안으로 파고들어 간다.

    증폭기를 통해 광포해진 마나가 이지혁의 육체를 찢고, 가르고, 부숴놓았다.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입으로는 이죽거리고 있지만, 벨트레체 역시 신중한 자세로 이지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증폭된 마나의 양이 심상치가 않다.

    그리고 그 마나를 사용하는 이가 이지혁이라는 것도 무척이나 껄끄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불멸성을 잃었다고는 하나, 그는 신성의 영역에 도달했던 마도사.

    마나가 부족하여 약해졌을 뿐, 저 정도의 마나를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마왕급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단 일격.

    단 일격일 뿐이겠지만, 지금 이지혁은 마왕의 위세를 되찾고 있었다.

    "위협적이군."

    처음으로 벨트레체가 긴장한 기색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다만, 이번뿐이다.

    이 일격만 막아낸다면 이 세상에 그를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뿐이다.

    "서아영!"

    하지만 이지혁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이지혁의 신호를 받은 서아영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화력으로 벨트레체를 공격해 왔을 뿐이다.

    "무의미한!"

    벨트레체가 짜증스런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고는 날아드는 불덩어리들을 마구 쳐내기 시작했다.

    "다현!"

    김다현이 이지혁의 등 뒤에 나타나 그의 배를 끌어안았다.

    "루드라!"

    동시에 이지혁의 등 뒤에서 광포한 바람이 불어 그들을 통째로 쳐 날렸다.

    "가자아아아아!"

    이지혁을 잡은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이 전력으로 속도를 올려 벨트레체에게로 날아들었다.

    "크아아앗!"

    김다현은 팔이 빠져라 이지혁을 잡아 한 번 빙글 돌리고는 날아드는 속도 그대로 벨트레체에게로 집어 던졌다.

    음속을 초월한 저항을 고스란히 머리로 받은 이지혁의 얼굴 피부가 쭈욱 갈라지며 피 보라를 피워냈다.

    "이지혀어어억!"

    그 광경을 보며 벨트레체가 괴성을 질러 대며 마주 뛰쳐나왔다.

    한 번!

    단 한 번이다.

    과거와 달리 무작정 마나를 난사할 수 없는 이지혁은 이 한 번의 공격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고, 또 반드시 격중시켜야 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거리.

    초근접에서 직접 때려 박는다.

    "으아아아아!"

    달려드는 벨트레체를 보며 이지혁이 절규했다.

    그와 동시에 이지혁의 육체에서 눈부신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하얀빛?"

    아펠드리체가 놀라 소리쳤다.

    이지혁의 마나는 흑마력이고, 흑마력은 검은색이다.

    그건 기술이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지혁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하얀 기운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놀람이 진정되자 그 기운의 정체가 아펠드리체의 머리에도 떠올랐다.

    저건 이지혁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그 힘이다.

    마나 생명체인 베라프인들과는 다르게 이지혁의 안에 숨어 있던 힘.

    하지만 너무나도 미약하여 도저히 활용할 수 없던 그 힘이 지금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

    저 기운이 언제 저렇게 커졌지?

    이지혁이 가지고 있던 양은 분명 도저히 써먹지 못할 정도였는데…….

    물론 이곳의 인간들이 저 기운을 마치 마나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지혁의 주변인들도 모두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가지고 있는 기운의 양이 이지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지혁의 기운은 일반인의 그것과 별다를 것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지혁이 뿜어내는 기운의 양은 분명 저 서아영이라는 여자가 가진 기운에 필적할 정도였다.

    어떻게?

    '아…….'

    아펠드리체의 눈에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증폭기를 통해 증폭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기운 자체가 늘어난 것도 맞지만, 지금 보이는 이 힘의 정체는 증폭기를 통해 부풀려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아무리 증폭기를 통해 기운 자체가 커진다고 하더라도 저 기운은 겨우 서아영급.

    이지혁의 전력을 다한 공격도 통하지 않는 벨트레체에게 저 미약한 기운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때, 이지혁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들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빠른 속도로 다시 이지혁의 육체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

    아펠드리체는 경악했다.

    이지혁의 오른팔이 검고 하얀 빛으로 뒤덮이며 부풀어 올랐다.

    '그만!'

    미처 입으로 외칠 시간도 없이 이지혁의 육체 안에서 거대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것이 보인다.

    "벨트레체에에에에!"

    벨트레체 역시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긴장한 기색으로 한 손에 모든 마나를 끌어 올려 육체를 강화했다.

    "흐아아압!"

    그의 주먹이 과도한 마나를 담아 강철처럼 굳어진다.

    이지혁과 벨트레체가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이지혁의 부풀어 오른 팔과 벨트레체의 팔이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폭음과 충격파가 사막 전체를 마치 진흙처럼 비틀고 뒤흔들어 놓았다.

    "꺄아아아아!"

    충격파에 휘말린 정해민이 저 멀리 날아가자 김다현이 이를 악물고 날아 그녀를 움켜잡았다.

    "괜찮아요?"

    "어, 응."

    대답을 하면서도 정해민의 눈은 흙먼지로 자욱하게 가려져 버린 이지혁의 흔적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흙먼지가 가라앉고…….

    "아아……."

    정해민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이지혁은 흙먼지로 새하얗게 뒤덮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전신이 제멋대로 뒤틀려 있고, 오른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깨 부분부터 끊어져 있었다.

    그 절단면에서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 지혁이가……."

    정해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기로, 저기로 가야 하는데…….

    그때, 그녀의 눈에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도가윤이 보였다.

    "아……."

    뭐가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도가윤의 전신 역시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등 쪽이 심하게 찢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충격의 순간에 뭔가를 한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도가윤이 떨리는 손으로 이지혁의 입가에 손을 대더니, 옷을 찢어 상처를 틀어막았다.

    "마왕은?"

    김다현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해민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기 구석!

    김다현의 눈이 바닥에 웅크린 채 쓰러져 있는 벨트레체의 몸을 찾아냈다.

    "죽었…나?"

    벨트레체는 전신이 쩍쩍 갈라져서 푸른빛의 피 웅덩이 안에 쓰러져 있었다.

    사람이라면 죽어도 백번은 더 죽었을 상처다.

    하지만 쓰러져 있는 이가 마왕이다 보니 안심할 수가 없었다.

    "마무리를!"

    김다현의 외침에 서아영이 소리쳤다.

    "퍼부어요!"

    그러자 정신이 남아 있는 모든 능력자들이 벨트레체가 쓰러져 있는 구덩이를 향해 에테르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콰아앙!

    폭발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더 터졌다.

    몸속에 남아 있는 에테르 한 방울까지 모조리 퍼부어 댈 기세로 능력자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치료사아아아아아!"

    도가윤의 절박한 외침이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최정훈은 도가윤이 고함을 질렀다는 위화감을 느끼기도 전에 마주 소리를 질렀다.

    "크리스! 크리스! 치료사를! 어서!"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지혁의 상태는 심상치가 않았다.

    "지미!"

    크리스가 다급히 치료사를 찾아댔다.

    "비켜요!"

    아펠드리체가 도가윤을 밀어내며 이지혁의 상태를 살폈다.

    "…안 좋아."

    겉으로 보이는 외상만으로도 안 죽은 게 이상할 정도지만, 실제로는 내부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폭발로 날아가 버린 오른팔은 그렇다 치고, 어깨에서부터 세포가 모조리 죽어버렸다. 게다가 남아 있는 마나가 없다 보니 흑마력에 찌들어 있던 육체가 굉장한 기세로 변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아, 안 돼!"

    이대로라면 이지혁의 존재가 사라진다.

    어떻게든 방법을…….

    그 순간!

    파아아아앙!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공격을 퍼붓던 일련의 능력자들이 실 끊어진 연처럼 튕겨 나갔다.

    "아!"

    아펠드리체의 동공이 떨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섬뜩할 만큼의 충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벨트레체는 몸을 일으켜 그 샛노란 눈으로 아펠드리체와 이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신이 거미줄이라도 친 것처럼 쩌적쩌적 갈라져 있고, 왼팔은 두 개로 쪼개져 허연 뼈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서 있고, 이지혁을 쓰러진 것이다.

    명백한 이지혁의 패배였다.

    "으… 이지혁……."

    하지만 그 역시 상태가 온전치는 않은지 몸을 휘청이며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 꼴로도 나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가다니!"

    벨트레체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했다.

    마력이 회복되지 않고 소모되기만 한다.

    마치 근원이 깨어진 것 같은, 가공할 피해였다.

    이대로라면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육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겼다."

    벨트레체는 당당히 선언했다.

    그러고는 우수를 들어 바닥에 댔다.

    "열려라!"

    남아 있는 모든 마나를 모아 게이트를 열었다.

    시커먼 동공이 악마처럼 입을 쩌억 벌렸다.

    "큭큭큭."

    그는 마족.

    마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육체와 생명을 복원할 수 있는 존재.

    마계와의 연결만 다시 할 수 있다면, 이까짓 상처를 복원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게다가 마계에는 남겨둔 그의 반신도 있지 않은가.

    이 사막에 가득 찬 불온함과 공기에 실려 오는 음의 기운을 받아들여 게이트를 여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실체가 아닌 기운만 넘어올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게이트라면!

    많이도 필요 없다. 딱 육체를 회복시킬 만한 소량의 마력만 끌어오면 되는 것이다.

    "마침내 내가 너를 이겼다."

    발밑에 열린 게이트에서 뭉클뭉클 어둠의 마력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 벨트레체가 승리를 선언했다.

    어둠의 마력이 그의 육체로 파고들며 빠른 속도로 육신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큭큭큭큭!"

    이지혁은 회복 수단이 없고, 그에게는 회복 수단이 있는 이상 이미 승부는 끝난 것이다.

    그의 눈에 환희가 차오르고, 사태를 파악한 아펠드리체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제 끝장을 내주지."

    아펠드리체가 결연한 얼굴로 이지혁의 앞을 막아섰다.

    도가윤과 어느새 다가온 정해민도 쓰러진 이지혁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너무도 미약해 보이는 저항 앞에 벨트레체는 그 긴 혀를 내밀어 얼굴을 핥았다.

    저항하는 것을 짓누르고 목적을 달성할 때의 쾌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니까.

    '음?'

    하지만 벨트레체는 계속 기뻐할 수가 없었다.

    '뭐지?'

    흘러 들어오는 마력이 이상하다.

    그가 연 것 이상의 마력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

    아니다.

    이지혁은 지금도 의식이 없다. 그리고 그의 육체 주위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지혁이 무슨 수를 쓴 것은 아닐 테고, 이지혁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흑마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이 감각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마치 뭐랄까…….

    이쪽이 아닌, 반대쪽에서 게이트를 강제로 잡아 벌리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냐!"

    당황한 벨트레체가 아래를 바라볼 때,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귀를 뚫고 뇌리에 박혀드는 목소리.

    매혹적이고, 또한 고혹적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심혼을 뒤흔드는 그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벨트레체의 눈이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의 뇌리에 그 존재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아! 안 돼!"

    벨트레체가 벗어나려는 그 순간, 게이트 바닥에서 마치 유령과도 같은, 새하얗고 반투명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벨트레체의 다리를 움켜쥐었다.

    "크아아아악!"

    코끼리의 그것처럼 굵고 굳건했던 벨트레체의 다리가 마치 종이로 만든 것마냥 찌부러지며 푸른 피를 뿜어냈다.

    다리를 움켜잡은 팔이 천천히 벨트레체를 게이트로 끌어당겼다.

    "왜! 왜, 당신이! 왜!"

    끌려가면서도 벨트레체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끊임없이 소리쳤다.

    "그는 이제 그가 아닐 터! 왜 당신이 그를 보호하는 겁니까! 왜!"

    그의 처절한 외침에 낮은 화답이 돌아왔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머리를 통해 직접 울리는 그 음성.

    그 고혹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벨트레체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반쯤은 달뜬 듯 들리는 그 목소리가 지금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분노를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줘! 열세 번째……."

    으드드득!

    벨트레체의 육체가 아래에서부터 말랑해져 간다. 껍데기만 남기고 속이 모두 비어버린 것처럼 그의 몸이 쭈그러들었다.

    "아아아……."

    벨트레체의 샛노란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껍데기만 남아버린 벨트레체의 육체가 바닥에 철퍽, 쓰러졌다.

    모두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고, 그 이지혁조차 한 팔을 날려가며 싸웠음에도 어찌할 수 없던 마왕이 지금 정체도 알 수 없는 존재에게 너무도 무력하게 당해 버린 것이다.

    그 믿지 못할 사실이 가져오는 너무 커다란 충격 앞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아펠드리체는 시커먼 게이트 아래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존재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최악의 마왕.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펠드리체.]

    아펠드리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를 이리로.]

    그녀가 지금 이지혁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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