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4화 (34/118)
  • [■] 당신은 여전히 거짓말이 서툴러요 [■]

    ─────

    - 문제는 그게 제일 어렵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오, 그게?"

    - 이지혁 씨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거죠. 지금 이 사태에서는 말입니다.

    "어째서?"

    - 성향이죠. 지금 이지혁 씨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가족들을 데리고 칩거했습니다. 집에 틀어박힌 상태입니다.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이오?"

    - 이지혁 씨의 행동 방식은 생각 외로 단순합니다. 우선 자신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성향이 있죠. 지금 이지혁 씨의 본능이 이만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가족들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겁니다.

    "으음……."

    - 결국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이지혁 씨는 가족들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할 겁니다. 문제는 그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을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요. 그 이지혁 씨조차도 말입니다.

    크리스토퍼는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말이오! 적당한 방공호라도 찾아서 집어넣어 버리면 되지!"

    - 그겁니다.

    "으응?"

    최정훈의 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국에는 주요한 인사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쓰기 위해 만들어놓은 벙커가 있지 않습니까? 꽤나 호화롭다고 들었는데?

    "있기야 하지."

    - 거길 개방하십시오. 그리고 이지혁 씨의 가족을 수용한다고 하세요. 그럼 그 핑계로 이지혁 씨가 미국에 발을 들일 겁니다.

    "으음……."

    크리스토퍼가 머리를 긁었다.

    물론 그런 곳이야 몇 곳 된다. 크리스토퍼의 권한으로 요청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매우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안배되어 있는 벙커가 있다.

    "하지만 그곳은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단 말이오. 법이 그렇소."

    - 맥클라렌 국장님.

    "말하시오."

    최정훈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그럼 그 법을 바꾸십시오.

    "뭐요?"

    이 작자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것인가.

    법이라는 게 그리 필요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라면, 국가의 체제가 유지될 리가 없지 않은가.

    - 지금 상황은 크리스토퍼 국장님께서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심각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 묻겠는데……."

    - 예.

    "이렇게까지 나를 도우려는 이유가 뭐요?"

    - 미국이 무너지면 세계가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소리군. 빌어먹을."

    - 맥클라렌 국장님.

    "크리스."

    - 예?

    "크리스라고 부르시오. 전에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 깜빡했군요. 좋습니다, 크리스. 제 생각입니다만, 이번 사태는 우리가 겪었던 그 어떤 사태와도 다릅니다.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겁니다.

    "그렇겠지."

    - 그러니 당장 움직여 주십시오. 당신에게 전 세계가 달려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소."

    애송이 주제에.

    크리스토퍼는 살짝 이를 갈았다.

    인정한다.

    이 남자는 유능하다. 그리고 도움이 되는 사내다.

    그 이지혁을 조금이라도 통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 쉬는 것조차 국제 질서에 영향을 줄 정도로 거물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반도 살지 않은 어린놈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으려니 속이 뒤집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지혁이 미국인이었다면…….'

    잠시 생각을 해본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저었다. 그로서는 이지혁을 통제할 수 없다.

    그가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에는 훌륭한 결단력이나 개인의 능력 역시 한몫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 덕이 컸다.

    스스로의 판단에 따르면, 이지혁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크리스토퍼는 최정훈을 인정했다.

    어떤 사람도 감히 통제를 시도할 수 없는 사람을 저만큼이라도 붙들고 있는 남자니까.

    이지혁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바닥부터 정상까지 기어 올라왔을 사람이다.

    "일단은 원하는 대로 해보겠소. 그리 알고 그쪽도 이지혁 씨에게 교섭을 진행해 주시오."

    - 예.

    "그리고……."

    - 말씀하시죠.

    "이번 일의 대가는 무엇이오?"

    - 물론 없습니다.

    "저번에는 그렇게까지 뜯어 가놓고?"

    - 먹어야 할 때와 먹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닙니다.

    "후후, 알겠소."

    전화가 끊어지자 크리스토퍼는 깊은 한숨과 함께 시가의 끝을 잘랐다.

    시가 전용 성냥으로 골고루 불을 붙인 크리스토퍼가 깊이 연기를 빨아들이고는 내뱉었다.

    "국방부 연결해."

    "예."

    크리스토퍼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책상 위 비전으로 뜬 지도에 찍힌 점들을 주시했다.

    마지막 목격지들이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십 일 내로 미국 전역이 영향권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럼 끝이다.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벌레를 발견하는 것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럼 답이 안 나온다.

    "일단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잡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크리스토퍼는 입안을 가득 채운 진한 시가의 향을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 * *

    "어딜 가자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입니다."

    "미쳤어요?"

    다이렉트로 튀어나온 욕에 당황할 만도 하건만, 최정훈은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깔끔하게 이지혁의 반응을 무시했다.

    "물론 제정신입니다."

    "그런데 뭐 어쩌자고요?"

    미국으로 가자고?

    지금 마물들이 날뛰고 있는 미국으로?

    그것도 가족들을 다 데리고?

    이지혁은 최정훈이 정신을 놓아버린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위험하니까요."

    "음?"

    진지한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 없이 말을 할 사람은 아닌데, 앞뒤가 안 맞다면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뜻이겠지.

    "자세히 말 좀 해줘요."

    "여기에 있는 것도 위험합니다."

    "……."

    "언제까지 이지혁 씨가 밀착 감시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그럼 우선은 가족분들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사태의 해결을 바라는 것이 먼저죠."

    "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대로 발목이 잡혀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최정훈이 눈을 빛냈다.

    "이지혁 씨가 알고 있는 정보가 필요합니다."

    "정보요?"

    "그 벌레들에 대해 알고 계시죠?"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몰라요."

    "…정말 모르십니까?"

    "어디에서 왔고 어떤 특성을 가질지 짐작은 가는데, 비슷한 종류들이 워낙에 많은데다가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아서 어떤 증상을 가지는지, 대처는 어찌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단 하나도 없어요."

    "흐음……."

    최정훈이 고민에 빠진 듯하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 봐요,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아뇨. 그걸로도 도움은 됩니다. 그러니 일단은 미국으로 넘어가시죠."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박선덕을 보며 의사를 타진했다.

    이지혁의 시선을 받은 박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는 조용한 곳에 가 있는 게 나을 듯싶구나. 그게 너도 편하지?"

    "그렇기야 한데… 안 불편하겠어, 엄마?"

    "어차피 집 안에만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진데, 여기나 거기나 뭐가 그리 다르겠니?"

    "응, 그래. 그럼 지금 가자. 얼른 준비해."

    최정훈이 말을 거들었다.

    "편의 시설은 거기 다 있으니 옷가지만 챙기시면 될 겁니다."

    "네, 알았어요. 그럼 잠시만."

    박선덕이 옷을 챙기러 가자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미국이랑 뭔 거래를 하셨기에?"

    "아닙니다."

    "에이, 왜 이러셔? 선수끼리?"

    최정훈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지금은 유례없는 위기 상황입니다."

    "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지혁조차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박선덕이 커다란 옷가방 여러 개를 든 채 이예원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럼 이제 가면 되나?"

    "뭔 소리니? 기다려. 아버지 준비 덜하셨잖아."

    "아……."

    맞다, 아빠도 데리고 가야지.

    큰일 날 뻔했네.

    "…여보!"

    위에서 급하게 내려오던 이철웅이 박선덕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여보, 나를 잊지 않……."

    "시끄럽고, 빨리 내려와요!"

    "네."

    시무룩한 이철웅까지 준비를 마치자 이지혁이 정해민을 불렀다.

    "가자."

    "응."

    정해민이 그들을 부여잡고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방공호는?"

    "저희가 가족분들은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직접 이지혁을 맞았다.

    최정훈이 통역을 해주니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불안한데……."

    이지혁의 말에 맥클라렌은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뭐하는 겁니까?"

    최정훈이 당황하여 소리쳤지만, 이지혁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맥클라렌이 준비되어 있는 자동차에 권총을 쏘았다.

    탕!

    총탄은 방탄유리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선덕을 바라보았다.

    "먼저 가 계세요."

    "괜찮겠니?"

    "네, 금방 따라갈게요."

    가족들을 차에 태워 보낸 이지혁이 크리스토퍼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뭘 듣고 싶다는 거죠?"

    "그전에……."

    "네?"

    크리스토퍼가 조금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뭐가요?"

    "가족들을 저리 보내는 게 말입니다. 막말로 저희가 가족분들을 인질로 잡아 협박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아저씨는 그리 멍청해 보이지 않으니까요."

    "칭찬입니까?"

    "뭐, 그것도 그렇고……."

    이지혁이 가만히 크리스토퍼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벌레 따위 무서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 어디 한 번 해보시죠?"

    "그저 농담일 뿐입니다."

    "그래야 할 거예요."

    이지혁의 음산한 눈빛에 크리스토퍼는 식은땀을 흘렸다.

    확실히 이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 가장 두려운 존재라고 평해놓고 그 역린을 자기가 건드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겠지.

    "가족분들은 세상 가장 안전한 곳에서 가장 편안하게 생활하실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뭐, 괜찮아요. 지금은."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실내로 안내 받아 들어간 이지혁이 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차가 나오고 나서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벌레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말을 하며 내민 비전에는 점점 LA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벌레들이 보였다.

    "추적기라도 달았나요?"

    "육안으로 목격한 위치 정보를 표기한 겁니다. 그 작은 벌레를 추적할 방법 따위는 없죠."

    "그렇겠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지혁 씨, 이 벌레들을 처리할 방법에 대한 정보가 있으십니까?"

    최정훈이 정신없이 동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이지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음……."

    크리스토퍼의 눈이 실망으로 물들어갈 무렵에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이 벌레에 대한 정보는 잘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뭘 해야 할지는 알겠네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지혁이 가만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게이트가 어디에서 열렸는지도 파악 못한 게 문제인 거죠. 지금까지의 게이트와는 양상이 달라요."

    "음, 확실히……."

    "작위적으로 게이트를 연 자들이 있을 거예요. 그쪽을 처리 못하면 게이트가 또 열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우선 처리해야 할 것은 그쪽이죠."

    "음!"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종적을 쫓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이지혁이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어요."

    "응?"

    이지혁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마계의 생물을 다룰 수 있는 자라면 빤하지 뭐.

    "마왕인가?"

    이지혁의 주먹이 꽉 움켜쥐어졌다.

    * * *

    마왕.

    명칭은 존재하지만, 그 명확한 뜻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

    이지혁 역시 베라프에 떨어지기 전까지 마왕이라는 말을 막연한 개념으로 이해했을 뿐이지, 실질적인 것이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베라프에서 마계로 엮이게 되면서 마왕이란 존재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 개념으로 보자면, 사실 마왕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왕이란 악마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이들을 뜻하는 말이니까.

    그 종족이 무엇이 되었든 마계에서 강하다고 인정을 받고 다른 악마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라면 누구든 마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끝없는 마계의 역사에서도 마왕의 자리에 오른 자들은 이제까지 모두 아흔아홉뿐.

    마지막으로 마왕의 자리에 오른 이가 바로 이지혁인 것이다.

    "마왕이라……."

    아펠드리체가 마계와의 게이트가 연결되고 있다고 했으니, 마계에서 누군가가 넘어왔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보통은 최상급 악마 정도가 넘어왔을 거라 생각했다마는…….

    최상급 악마 정도로는 마수들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

    이지혁 역시 마왕의 위를 얻고서야 마수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인간과 마족의 태생적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최상급 마족이 마수들을 수족처럼 다룬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게이트를 열어서 소환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럴 경우 자신이 원하는 종족을 끌고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마왕급의 존재가 자신의 종속을 불러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흐음……."

    어느 놈일까?

    꼭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러 차원을 이동하면서 알게 되었다. 베라프와 지구가 존재하듯이, 마계도 이지혁이 알고 있는 곳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비록 그 하나의 마계가 베라프와 지구를 모두 합친 것을 다시 수천 배는 넘을 만큼 끝없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누굴까?"

    혹여나 그 마계에서 왔다면 이지혁도 알고 있는 존재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이가 누가 있을까?

    상급 마왕은 아닐 것이다.

    상급의 마왕이 이동할 만한 게이트가 열린다면, 그 게이트 자체만으로 차원에 충격을 주게 된다.

    괜히 마왕의 강림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의 파동이 일었다면 이지혁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최하급의 마왕이거나 그 최하급의 마왕조차 온전하게 넘어오지 못했다는 건데…….

    "음……."

    이지혁은 그 경우 어느 정도의 힘이 강림할 것인가를 계산해 보았다.

    "으으음……."

    대충 계산이 끝난 바대로 라면…….

    "멸망이네."

    답이 안 나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왕이 아니라 최상위급 악마 하나만 온전하게 강림해도 지구는 그것을 막아낼 수 없다.

    최상위의 악마라면, 그 자체로 거의 현신한 드래곤급이었다.

    에이션트급 고룡이나 되어야 막을 수 있을 만한 존재란 말이다.

    그런데 마왕?

    마왕과 최상급 악마의 차이는 아주 간단하다.

    마왕이 손짓 한 번으로 최상급 악마를 척살할 수 없다면, 미쳤다고 악마들이 마왕의 명령을 따르겠는가.

    아무리 나약한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휘하의 악마들과는 그 급이 다르다.

    그렇기에…….

    그 차원이 다른 강함이 있기에 그들은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돌연변이든 고위 종족이든 뭐든 상관없다.

    심지어 인간이라도 상관없다.

    그 강함만이 오로지 자격이다.

    그렇기에 인간인 이지혁이 마왕의 이름을 얻을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강함'을 가진 존재가 지금 이 지구에 강림했을 확률이 높았다.

    "망했다."

    생각해 보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금의 이지혁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존재일 텐데.

    "대체 어느 미친놈이 온 거지?"

    마왕들의 얼굴을 쭈욱 떠올려 본 이지혁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누가 와도 답이 없다.

    애초에 강함의 극한에 올랐다는 것은 한 분야를 평생에 걸쳐서 끝도 없이 파고들어 갔다는 의미이고, 보통 세상은 그런 존재를 미친놈이라 부르기 마련이다.

    당연히 마왕치고 제정신인 놈은 없었다.

    누가 오든 똑같은 거지.

    "어휴, 얼마나 미친놈이 왔을까나?"

    * * *

    "그 미친놈이 안 움직인다고?"

    벨트레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제정신이 돌아온 건가?

    마계 역사상 최악의 또라이가 이런 일에 안 움직일 리가 없는데…….

    "눈치를 챈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는 그 새끼가 몰라서 미친 짓했다고 생각하는가? 알면서도 미친 짓을 하니까 미친놈이었던 거지."

    "그렇습니다."

    벨트레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마계 역사상 최악의 미친놈이 인간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계의 인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고 말았다.

    그전까지는 적당히 가지고 놀다 음기를 만들어내기 좋은 지성체라는 느낌이었다면, 그 이후로는 가지고 놀기 좋기는 한데 맛이 가버리면 악마보다 더 막나가는 종족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예전의 그라면 이런 일들을 절대 참아내지 못했을 텐데……."

    마계에서 활동할 당시 이지혁은 폭군이자 침략자였으며, 사소한 일에도 결코 참지 않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과거의 이지혁이라면 자신의 영역 내에서 다른 존재가 소란 피우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로 소란을 떨었는데도 큰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분명 그가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이겠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건가?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그라면 짐작할지도 모르겠군. 내가 아니라도 대충은 말이야.

    "아니면 지금 대책을 고심하는 건가?"

    벨트레체 역시 생각을 조금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

    "이 정도로 나약할 줄이야."

    베라프에 벌레들을 풀어놓는다 해도 이런 식으로 파급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성력을 바탕으로 정화를 쓸 수 있는 신관들과 벌레들을 추적해 낼 수 있는 마법사들이 수도 없이 깔려 있는 곳이 바로 베라프니까.

    잠시 혼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모두 정리가 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해를 모두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 나약하다니……."

    그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 세상은 베라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곳이었다. 특히 그 화력에 있어서는 베라프 이상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그렇지만 다른 부분이 너무 취약했다.

    이 세상을 뒤집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위 정치인들을 마법으로 세뇌시켜 버려 전쟁을 벌여도 그만이고, 적당히 언데드 군단을 풀어놓아도 정화가 안 되는 이 세계에서는 말 그대로 불사의 군단이 될 것이다.

    "재미있는 곳이란 말이지……."

    게다가 베라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인구가 있고, 인간들의 욕망과 마이너스 에너지가 가득했다.

    진즉에 이곳을 알았더라면 모계를 베라프로 하지 않고 이곳으로 했겠지.

    "재미있는 곳임은 틀림없지."

    아니, 다른 건 다 접어 두고서라도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곳은 재미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적당히 벌레라도 풀어놓으면 알아서 이지혁이 이곳을 찾아올 것 같았는데,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베라프와 지구의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벨트레체의 잘못이기도 하고, 예전처럼 재빠르게 반응하지 않는 이지혁의 변화가 가져온 문제기도 했다.

    틀어졌다면 다시 돌리거나 더 틀어버리면 그만이다.

    벨트레체는 TV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이 매체를 통해 보이는 인간들의 당황이 그를 즐겁게 해주었다.

    공기에서 풍겨오는 불안함이 그의 육체를 강화시키는 기분이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이 세계는 불안이 퍼져 나가는 속도도 베라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말과 말로 퍼져 나가는 불안함도 재미있지만, 이런 식으로 매체를 통해 한 번에 퍼져 나가는 불안함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다만, 하나 이상한 것은…….

    "이만큼이나 떠들어 대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군."

    그렇다면 이 매체가 되레 사람들의 불안함을 낮춘다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벨트레체는 흥미를 느꼈다.

    확실히 이 세계는 베라프를 대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 아흔아홉 번째 마왕은 어디에 있나?"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으음……."

    "마왕이시여, 감히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어째서 시간을 끄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벨트레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파충류의 갈라진 혀가 슬그머니 튀어나와 입술을 축인다.

    "시간을 끄는 것으로 보이는가?"

    "벨트레체 님의 능력이라면 당장에라도 그 오만한 아흔아홉 번째 마왕을 징벌할 수 있으시잖습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왜 이리 참으시는 것입니까?"

    벨트레체가 고개를 우득우득, 꺾었다.

    "참는 것이 아니다, 참는 것이 아니야. 나는 그저 즐기고 있을 뿐이다."

    "무슨 의미이신지……."

    "그 아흔아홉 번째 마왕에게 시달린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무 간단히 끝내 버리면 분이 다 풀릴 리가 없지. 생각 같아서는……."

    벨트레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 그를 살려둔 채로 천참만륙을 내 그 기분을 물어보고 싶군. 어떤 기분인지 말이야."

    "그렇습니다."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맛이 있는 법이지."

    "위대한 마왕의 뜻대로 하소서."

    하지만 모르는 일이지.

    그가 과연 끝까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인가 말이야.

    천성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법이거든.

    벨트레체는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를 음습하게 빛냈다.

    * * *

    "마왕이라구요?"

    서아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마왕이라니.

    이게 무슨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그게 무슨 소리야?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니세요?"

    이지혁이 되레 황당해져 말했다.

    "아니, 몬스터가 이리 돌아다니는 세상인데, 마왕이 뭐가 이상해!"

    "듣고 보니……."

    하기야 오크고, 오거고, 트롤이고 다 돌아다니는 세상인데, 마왕 한 마리쯤 나타난다고 뭐가 이상하겠는가.

    "그러니까, 이 사태가 그 마왕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거죠?"

    "네."

    이지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마왕을 잡으면 해결되는 거예요?"

    "모르죠, 그건."

    "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럼 뭐하러 그런 데 힘을 빼요?"

    "미리 잡아놓지 않으면 기껏 다 해결했는데 한 무더기가 더 소환되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

    확실히 그랬다.

    이 생물들이 소환된 것이라면 재소환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 부분을 먼저 잡아놓지 않는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방법은 있어요?"

    이지혁이 되물었다.

    "그 마왕을 찾을 방법이요? 그거야 있죠."

    "아, 그래요? 그럼 가서 잡으면 되잖아요."

    "잡을 방법이 없어서 문제죠."

    "…네?"

    이지혁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노답이에요."

    "……."

    아니, 이 시키야! 니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니가 처리 못하면 다 못하는 건데…….

    "진짜 방법이 없어요?"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음, 굳이 방법을 찾자면 없는 건 아닌데……."

    "네. 그럼 그렇게 하면 되죠."

    "안 하는 게 나을걸요?"

    "왜요?"

    "더 끔찍해질 테니까."

    이지혁의 얼굴이 사악하게 물들었다.

    * * *

    "톰! 어디로 가니, 톰!"

    브라이언은 물가로 달려가는 그의 아들을 따라 발을 재촉했다.

    "저 녀석이?"

    물가로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물가로 간다. 그쪽에서 놀다가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위험하다고 그동안 몇 번이나 말했는데.

    브라이언이 황급히 톰을 따라 달려갔다.

    "아빠!"

    그런데 톰이 방향을 틀어 그에게로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톰!"

    "벌레! 벌레!"

    "벌레?"

    톰이 가리킨 곳을 보자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새카만 날벌레가 그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헛웃음을 지었다.

    "벌레 하나 가지고 호들갑이라니, 이 녀석."

    브라이언이 톰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날아드는 날벌레를 손으로 후려쳤다.

    따끔.

    하지만 뭔가 쏘인 듯한 느낌에 브라이언이 서둘러 고개를 내려 손을 바라보았다.

    "으!"

    손바닥 한가운데가 움푹 패어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뭐야! 제기랄!"

    그냥 벌레 한 마리 후려쳤을 뿐인데 이런 상처라니.

    재수가 더럽게 없다고 생각하며 손의 상처를 누르려는데, 순간 머리가 핑 돈다.

    '뭐지?'

    어질어질하더니 이내 구토가 밀려오고, 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토, 톰! 엄마…를."

    브라이언은 의식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빠아아아아!"

    미국 전역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퍼가 우려하던 2차 피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 *

    "그래서!"

    크리스토퍼가 전화기를 부러질 듯 움켜잡았다.

    투둑투둑거리는 소리가 절로 들릴 정도였다.

    "이런 제기랄!"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벌레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일제히 불이 붙은 것처럼 그동안 얌전하게 전진하던 벌레들이 인간을 공격해 댔다.

    그와 동시에 상황판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피닉스에서 세 명 추가 발생입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도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알아!"

    크리스토퍼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고는 전화기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런 빌어먹을, 뭐 어쩌라는 거야!"

    대책이 없다.

    "벌레 새끼들을 어떻게 잡으라고!"

    인류가 쌓아 올린 수많은 방호 체게와 게이트 대응 체계가 순식간에 무쓸모로 돌아갔다.

    그 거대한 몬스터들과의 싸움에서도 결국은 이겨내던 인류가 지금 작은 벌레들에게 완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크리스토퍼는 썩어가는 속을 감당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국장님!"

    "빌어먹을!"

    진정하라는 것임은 알고 있다.

    진정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이 안 되는데 어쩌라는 말인가.

    진정할 상황이 아닌데, 뭘 어떻게 진정하라는 말인가.

    "방역팀은 어찌 됐어?"

    "안 먹힙니다!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살충제가 소용이 없습니다. 이 이상 농도를 올리면 살충제가 아니라 살인제가 되어버릴 겁니다."

    "손으로라도 때려잡으라 그래!"

    "강철과도 같은 강도라고 합니다. 채집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총과 같은 화력이 아니면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데, 총으로 벌레를 어떻게 맞추겠습니까."

    "으……."

    "그마나 화염방사기가 효과가 조금 있다고는 하는데, 사거리가 짧다 보니 한계가 극명합니다. 네이팜으로 벌레가 서식하는 곳을 조질 수밖에 없는데, 지금 벌레가 단체로 서식하는 곳이 없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 일일이 따라다니며 투하하다가는 벌레를 다 잡기 전에 국토가 박살 날 겁니다."

    크리스토퍼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첩첩산중이다.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냥 손 놓고 있자고? 여기가 무슨 재난 집계소인 줄 알아, 이 빌어 처먹을 새끼들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란 말이야!"

    "예!"

    "독을 쓰든, 방사능을 처먹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 방법이 없다면 진행 방향에 화염 벽을 둘러서라도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아내란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알겠습니다!"

    "국장님!"

    "왜!"

    "이거… 보셔야겠습니다."

    "뭘?"

    "이게……."

    크리스토퍼는 부하가 내민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돌려보았다.

    "……."

    그러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지금 상황이라고?"

    "예."

    말문을 잃은 그가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가의 끝을 쥐어 뜯어버리고는 불을 붙인다.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는 성냥에 불이 잘 붙지도 않았다.

    "이런 제기랄!"

    시가를 던져 버린 크리스토퍼가 씩씩대다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정말 신은 인간을 버린 건가?"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우선 텔레포터 불러. 내가 가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입에서 욕 말고는 나올 것도 없군."

    제기랄.

    * * *

    "제기랄."

    이지혁이 유리창 너머를 보며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최정훈의 물음에 이지혁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생각하는 최악의 방향으로 일이 치닫기 시작했다.

    총 세 가지 방향이 있었다.

    벌레에게 물린 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죽거나, 살아남거나, 혹은…….

    "언데드."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그의 눈앞에 육체가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빠지고 입술 주변의 피부가 짓물러진다.

    발작을 시작한 이들은 이미 구속구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이를 드러내며 의료진들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절대 물리면 안 된다고 해요."

    "예."

    언데드가 무슨 병원균의 집합체도 아니고, 한 번 물린다고 해서 바로 언데드로 변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좀비들의 경우는 물어뜯은 이들이 죽어야만 발현하는 거니까.

    죽지만 않으면 자연 치유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저리 언데드로 변하는 것은 경우가 달랐다.

    흑마력이 육체를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지혁은 씹어 먹을 듯 욕설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속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어디 처갔다가 이제야 얼굴을 들이미는 거지?"

    "기분이 많이 나쁘네요? 그렇죠?"

    조금의 높낮이 변화도 없는 아펠드리체의 목소리에 이지혁이 이를 드러냈다.

    "알면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남의 일이 아니니까?"

    "그 목 뜯어내 버리기 전에 닥치지?"

    아펠드리체는 어깨를 으쓱했다.

    입만 열면 독설을 내뱉는 남자.

    이지혁이 극한까지 내몰려 멸망의 좌라 불리기 시작하던 시점의 모습이었다.

    이지혁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모습이 드러났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지 알 수 있었다.

    "이해가 안 가네요. 그래봐야 타인 아닌가요? 타인이 언데드가 되든 안 되든 당신이 흥분할 일이 아니죠."

    "객체로서 살아가는 너희 도마뱀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칭찬인가요?"

    "욕이다."

    아펠드리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쩔 셈이죠?"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어쩌긴 어쩌겠어, 원인이 된 놈을 찾아 죽이고 마력이 흩어지는 요행을 바라봐야지."

    "차라리 벼락을 열두 번 정도 연속으로 맞는 게 확률이 더 높지 않나요?"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연속으로 맞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이것도 가능하겠지."

    "열두 번 맞는 확률과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의 확률이 다르듯이, 당신이 그를 죽일 수 있는가도 다른 이야기일 텐데요?"

    "그렇겠지."

    이지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지."

    "선택권?"

    "모두가 죽고 내가 마지막에 나서든가, 아니면 내가 죽고 다른 이들이 따라 죽는가의 문제일 뿐이야. 선택을 하라면 후자가 좋다."

    "전자가 현명해 보이는데요?"

    "인간이라면 후자를 택하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도 있거든."

    "보통의 인간이라면 무조건 전자를 택하겠죠."

    "내가 좀 특별하잖아?"

    "……."

    아펠드리체는 무슨 말로도 그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싸울 셈이군요."

    "그래."

    "마왕과?"

    "그래."

    아펠드리체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정신 차려요, 지혁 씨! 당신은 지금 한낱 인간일 뿐이에요. 당신에게 머물렀던 불멸성과 영원성은 사라졌어요. 당신은 이제 불멸의 혼도 아니고, 멸망의 좌도 아니며, 아흔아홉 번째 마왕은 더더욱 아니에요. 상처 입으면 쓰러지고, 칼에 찔리면 죽는,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고요."

    "알아."

    "안다고요? 지금의 당신이 마왕의 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될지도 잘 알고 있겠죠? 10초도 버티지 못하고 고기 조각이 되어버릴 거예요. 그걸 모르는 건가요?"

    "안다니까?"

    "그런데 왜요!"

    "말했잖아, 선택권이 없다고."

    "겨우 이런 일로……."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일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 땅에 마왕이 강림한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찾아올 테고, 나는 목을 빼고 그걸 기다리고 있어야겠지. 그건 내 스타일이 아냐."

    "그래요, 그건 당신이 아니죠."

    "…또 욕할 줄 알았는데?"

    "어차피 아무리 말을 해봐야 들어먹지 않을 걸 아니까요. 당신은 과거부터 단 한 번도 내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까."

    "니가 항상 불가능한 것들만 바라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 해두죠."

    이 와중에도 더 이상 말싸움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죠?"

    "봐."

    이지혁이 유리창 안에서 언데드로 변해가고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변이가 완료될 때까지 얼마가 걸릴 것 같아? 여기만이 문제가 아냐. 지금 밖에는 벌레들이 수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어. 아마 마력을 공급 받지 못하니 수명에야 한계가 있겠지. 길어야 한 달?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저들을 정화시킬 방법이 없는 한 인류는 보름 내로 초토화된다. 그땐 이미 늦어."

    "……."

    "전력을 보존시키지 못하면 지는 싸움이야. 그렇게 겨우 버텨낸다고 해도 그다음에 열리는 게이트들과 싸울 여력이 사라진다."

    "확실히."

    "그러니 지금 싸워야지."

    "딴엔 맞는 말이지만, 당신은 여전해요."

    "뭐가?"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안 믿는군요?"

    "……."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전 세계의 능력자들을 미국으로 결집시켜서 벌레를 잡으려 들 거예요. 수백만의 벌레라지만, 전 세계의 능력자들을 합하면 그 정도야 할 수 있겠죠."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럼에도 여전히 가장 짧은 길로 홀로 가는 길을 택하는군요."

    "……."

    "그게 싫어서 이곳으로 온 거 아닌가요?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

    "난 죽고 싶어서 왔다니까."

    "당신은 여전히 거짓말이 서툴러요."

    "고맙군."

    쓴웃음을 짓는 이지혁을 바라보며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게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죠?"

    "몰라."

    "다른 이들도 함께 갈 수 있다는 건 알죠?"

    "난 죽어도 거기로는 안 돌아가, 이 빌어먹을 도마뱀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아펠드리체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새하얀 공간이 열렸다.

    "응?"

    그 새하얀 공간 안에서 무언가가 허공을 부유하며 이지혁에게로 천천히 날아들었다.

    "어?"

    이지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물건이 그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 * *

    "이거?"

    이지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걸 가져오느라 제 마나의 반을 쏟아부었어요.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안 줄 수가 없게 되었네요."

    "선물 하난 끝내주는 걸로 가져왔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손 위에는 베라프에서 그가 즐겨 쓰던 아티팩트가 들려 있었다.

    손수 에이션트급 드래곤을 네 마리나 때려잡아 하트를 뽑아 만든 마력 증폭기.

    수많은 아티팩트들 중 이지혁이 가장 즐겨 쓰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차원을 넘어올 때 거부반응으로 소멸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그녀가 들고 올 줄이야!

    "당신이 떠난 곳에 남아 있었어요. 아마도 차원에 머무르려던 하트의 성질이 이동을 거부한 듯싶더군요."

    "죽어서도 의지가 남아 있었다는 건가?"

    "하트가 드래곤이고, 드래곤이 하트죠."

    "흠, 뭐, 아무래도 좋아."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손에 다시 들어왔으니까 말이야.

    이지혁은 서로 다른 색의 드래곤 하트들을 바라보다가 양팔에 채웠다.

    달칵!

    이음새가 맞물리며 양팔에 드래곤 하트가 채워지자 뭔가 충족감이 일었다.

    하나하나 되찾아가는 느낌이랄까?

    "메인 하트는 없던가?"

    "남의 어머니 심장을 내놓으란 소리를 잘도 하는군요."

    "드래곤에게 그런 유대감이 있는 줄은 몰랐군. 어머니라고 인식은 하는 건가, 너희가?"

    "내가 이상한 드래곤인가 보네요."

    "낄낄낄낄."

    이지혁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서 이 여자와는 가까워질 수가 없다.

    인간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을 계산해서 움직이는 존재와 진심으로 마음이 통할 리가 없으니까.

    "없었어요."

    "흐음, 그거 아쉽군."

    메인 하트가 있어야 성능이 전부 발휘되는데 말이야.

    뭐, 없다면 없는 대로 쓰면 그만이다.

    메인 하트가 없어도 이것만으로 이지혁의 전력은 몇 배로 불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거 그렇고… 잘도 가져왔군, 동족의 심장을 말이야."

    "내 것이 아닌데 뭔 상관이겠어요."

    "그래, 너흰 그렇지."

    내가 말해놓고도 적응이 안 되는군, 드래곤의 사고방식이란 것은 말이지.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죠?"

    이지혁은 뭘 묻느냐는 듯한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힐난했다.

    "찾아서, 싸우고, 죽인다."

    "어떻게가 모조리 빠져 있네요. 어떻게 찾아서 어떻게 싸울 거며, 어떻게 죽일 셈이죠?"

    "잘."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드래곤 주제에 기분이라니, 우스운 이야기군. 그 냉철하신 머리로 잘 생각해 보시지."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응?"

    "아마 전쟁이 끝난 뒤에 제가 계속 거기에 있었으면 지금쯤은 미친 드래곤이라고 동족들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낄낄낄."

    그럴지도 모르지.

    확실한 것은 처음 보았을 때의 아펠드리체와 지금의 그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과거의 그 얼음여왕 같던 아펠드리체의 존재는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뭐가 달라졌냐고?

    드래곤이 인간을 이해하려 든다는 것 자체가 미쳤다는 증거지.

    사람이 개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개미의 행동을 따라 하고 개미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해 보라니까?

    그게 미친 거지.

    이지혁은 아펠드리체를 보며 혀를 차더니, 양팔을 쫙 벌려 스트레칭을 했다.

    "이젠 내 일이야."

    "아뇨."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일이죠."

    "흥."

    이지혁이 가만히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아펠드리체."

    "네."

    "지긋지긋하게 나를 막아온 나의 숙적이여, 이제는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못할 것도 없죠."

    "어째서?"

    "당신 말대로 나 역시 안전하지 않으니까. 베라프로 돌아갈 게이트를 열 만한 마나가 부족한 이상, 살아남으려면 당신과 함께 싸우는 쪽이 확률을 몇 배는 더 올릴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에 싸우는 게 남는 거라더니?"

    "당신이 마지막에 싸우지 않으니까."

    "…찝찝한 기분이군."

    뭐, 좋아.

    어제의 적은 오늘의 아군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야. 흔한 일이지.

    다만, 이 도마뱀이 자신의 아군이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어서 어색할 뿐.

    "어색하군."

    "어색할 거 없어요. 언제나 나는 당신의 편이었으니까."

    "…개소리 잘 들었다."

    이지혁은 몸을 돌렸다.

    그래도 속이 쓰린 것은,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향이 다를 뿐, 그녀는 언제나 그를 도와주려 했다.

    이지혁이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그를 도우러 왔다는 말은 진실일 수밖에 없다. 드래곤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지혁은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뒤틀렸다니까.'

    인간으로도, 생물로도, 악마로서도 그는 뒤틀려 있으니까.

    "발목이나 잡지 말라고."

    "나는 로드예요."

    "그래."

    그 말이면 충분했다.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가자 어느새 NDF의 모든 요원들이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뭐야?"

    "싸우러 간다면서요?"

    서아영이 퉁명스레 말했다.

    누가 말한 거지?

    이지혁이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도가윤이 찔리는지 슬그머니 빠져나와 서아영의 뒤로 숨었다.

    이지혁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야죠."

    "뒈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네. 어딘 줄 알고 따라오겠다는 거지?"

    "죽으러 가는 길요."

    "…미쳤나?"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죽겠다고 설치지는 않을 테고…….

    "듣자하니 당신도 힘들다면서요? 이번만은?"

    "아마도?"

    "그럼 같이 가야죠."

    "왜? 같이 죽어줄 의리라도 있나 보지? 정이라도 들었나?"

    삐딱하게 나오는 이지혁을 보며 서아영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말아요, 이지혁 씨. 우리에게 그런 의리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우린 그냥 얄팍한 계약관계니까."

    "그렇지."

    "그냥 단순히 당신이 혼자 가서 죽어버리면 그 뒤는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현명하다.

    매우 현명한 결론이다.

    그럼에도 뭔가 탐탁지 않은 것은… 그 말끝에 어려 있는, 석연치 않은 감정 때문일 것이다.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 알고 있나?"

    "총알받이는 되겠죠."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총알받이야 할 수 있겠지.

    "알아서 해."

    이지혁은 더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이럴 때를 위해서 수고를 들여 가르친 것 아니던가.

    그러니 써먹을 때는 써먹어야 한다.

    "죽어도 날 원망하지 마. 아니, 원망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신경 안 쓸 테니까."

    "바라지도 않았어요."

    서아영은 그리 말하고는 인원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정훈이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찾으실 셈인가요?"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찾을 필요 없어요."

    "네?"

    "자기가 알아서 올 거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요?"

    이지혁은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먹을 일도 아니고, 설명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아니다.

    마왕의 호전성을 이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서 납득시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겠지.

    "알게 될 겁니다."

    이지혁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어떤 마왕이든 찾아오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마계에서 마지막 마왕의 지위를 손에 넣고 멸망의 좌로 완성되기까지 이지혁이 마계에서 쳐놓은 깽판이 얼마던가.

    끝없는 마나를 공급해 줄 마계의 핵을 손에 넣을 때까지 이지혁의 발아래에서 죽어간 악마들이 얼마던가.

    인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수한 숫자의 악마들이 있었지만, 이지혁이 마지막 승자로 올라섰을 때, 그 악마들 중 살아남은 수는 채 반수가 되지 않았다.

    악마들에게 있어서 이지혁이란 종족의 절반을 지워 버린, 전설의 학살자인 것이다.

    물론 서로에 대한 유대감이 약한 악마들이니만큼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는 않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지혁에게 개인적인 악의로 넘쳐 나는 악마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이지혁을 찢어 죽이고 싶어 안달일 것이다.

    그 부분만 살살 긁어주면 당연하다는 듯이 튀어 나오겠지.

    "긁는 방법이 문젠데……."

    "네?"

    이지혁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말했다.

    "가장 피해가 크지 않을 것 같은 곳이 어디죠?"

    "네?"

    최정훈이 재빠르게 통역을 했다.

    하지만 통역을 듣고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 소리란 말인가.

    "마음대로 날뛰어도 피해가 가지 않을 곳을 수배해 주세요."

    "일단 알겠습니다."

    뭔가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지혁의 분위기가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이지혁인가?'

    크리스토퍼는 진지함을 넘어 진중함까지 보이는 이지혁의 갭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꼬맹이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결전을 준비하는 전사의 모습이 보인다.

    "아, 근데……."

    이지혁이 그 순간 입을 열었다.

    "중계진도 부르죠?"

    "네?"

    크리스토퍼가 멍하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건 뭔 소리야?

    * * *

    벨라레체는 손에 든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새빨간 혀가 슬며시 튀어나와 투명한 유리잔 속에 담긴 와인을 가볍게 핥는다.

    그러더니 곧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찌푸려진다.

    "인간의 와인은 형편없군."

    술이란 것을 딱히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과일주라면 엘프가 만든 것이 좋았고, 맥주는 드워프들이 만든 것들을 최고로 쳤다.

    베라프에서나 여기서나 인간이 만든 술은 도무지 먹을 게 되지 않았다.

    가장 고급이라는 것을 구해왔다는데도 이런 맛인 걸 보면, 이 동네에서 술맛을 본다는 것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움직였다고?"

    "예. 하지만 뭘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현상만."

    "현재 소노라라 불리는 사막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틀들에 대한 대처는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포기라……."

    아무리 벌레들이 수없이 많고 광범위하다고 하나 이지혁이라면 처리 못할 것도 없었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결국에는 모조리 솎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손톱만큼도 안 되는 흑마력이라 해도 찾아낼 수 있는 탐지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벌레들을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다?

    '무슨 생각이지?'

    그때, 벨트레체가 보고 있던 TV 화면이 일시에 전환되었다.

    "으음?"

    벨트레체는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화면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인간의 습성을 알기 위해서 보는 TV일 뿐, 채널에 딱히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를 놀라게 한 것은 TV 속에 나오는 인물이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벨트레체가 이지혁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 TV 화면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건 도발인가?

    굳이 벨트레체가 TV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협조자가 있을 거라는 사실쯤은 이미 짐작했다는 건가?

    과연 아흔아홉 번째 마왕.

    "그런데……."

    벨트레체의 노란빛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저건!"

    이지혁의 머리 위로 작은 게이트가 점점 커지는 것이 보인다.

    "안 돼에에!"

    벨트레체가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 * *

    "이런 제기랄!"

    벨트레체가 격하게 고함을 토해냈다.

    치졸한 도발 따위에 움직일 그가 아니었다.

    어떤 도발을 하더라도 천천히 말라 죽는 것을 지켜봐 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그가 풀어놓은 비틀, 벌레들이 인간들을 하나하나 언데드로 만들 것이고, 결국에는 불사의 군단이 이 세계에서 되살아나게 될 것이었다.

    벨트레체는 그때까지 상황을 끌고 가다가 고통에 겨워할 이지혁의 목줄을 끊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게이트!"

    지금 이지혁이 열고 있는 것은 분명 게이트였다.

    그것도 현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이동 게이트가 아니라 차원 게이트가 분명했다.

    차원 게이트!

    이지혁이 차원 게이트를 만들어서 넘어갈 곳이야 빤하지 않은가.

    베라프.

    이지혁은 지금 베라프로 통하는 게이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지금의 이지혁이니까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혹여나 베라프로 돌아가서 과거의 영원성을 회복하고 마계와의 연결을 복구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멸망의 좌가 부활한다.

    불멸의 혼이자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다시 강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지혁은 가장 먼저 벨트레체를 찾아올 것이다.

    그런 후 남는 것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영원한 고통의 지옥에서 방황하고 또 방황하는 것뿐이다.

    "그럴 수는 없지!"

    단순히 자신 혼자만의 안녕을 위한 일이 아니다.

    이지혁이 마계를 휘저어놓은 그 기간 동안 마계가 얼마나 황폐해졌던가.

    아니, 단순히 마계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밸런스가 뒤틀리는 수준까지 가버리지 않았던가.

    모두가 공멸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지혁이 멸망의 좌로 되돌아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저기가 어디지?"

    벨트레체는 그의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알파를 향해 일갈했다.

    "소노라는 워낙에 넓어서 말이야."

    "그래서 모르겠다는 건가, 인간?"

    알파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소노라라고 말을 했을 텐데? 당신들의 능력이라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그 사막에서 저 정도의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내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지 않나? 아니면 밥상을 차려주고 스프까지 떠먹여 줘야 할 정도로 악마라는 존재들이 무능한 건가?"

    벨트레체의 샛노란 눈이 가만히 알파를 노려보았다.

    "그래, 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말귀는 알아먹는 모양이군."

    "그래, 그렇지. 인간아."

    그때, 벨트레체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퍼엉!

    "큭!"

    알파가 몸을 뒤틀었다.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격통이 그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툭!

    바닥에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알파는 자신의 팔이 잘려 바닥에 떨어지는 생소한 광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조언에는 감사하지. 상으로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제멋대로의 셈법이로군."

    "다음에는 그 입을 어떻게 해봐야겠군."

    알파가 입을 다물었다.

    "좋다, 아르고라스."

    "예, 마왕."

    "찾아라. 이지혁이 있는 곳을 찾아라. 내가 직접 가겠다."

    "하오나 마왕이시여……."

    "멸망의 좌가 강림하는 것을 그 두 눈으로 다시 보고 싶은 것인가?"

    바닥에 엎드린 아르고라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광경만은 결코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찾아라. 내가 직접 간다.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알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아르고라스가 뒷걸음질 쳐 방에서 벗어났다.

    아르고라스가 방 밖으로 나가자 벨트레체는 혓바닥으로 얼굴을 핥으며 알파를 노려보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참 재미있군."

    "악마란 존재도 재미있기는 마찬가지야."

    "나는 강단 있는 인간을 좋아하지. 그 강단이 영원한 고문 속에서 조금씩 깎여 나가는 것을 지켜보면, 그 이상의 유희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

    "내 강단은 그 정도로 꺾이지 않아."

    "그래, 다들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말이다… 인간이여, 그 말을 뱉은 이들 모두가 삼백 년의 시간을 넘지는 못했다."

    "……."

    알파는 벨트레체의 어마어마한 스케일 앞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삼백 년 동안 고문을 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걸 유희로 즐겼다고?

    새삼 알파는 악마라는 이름이 가지는 잔혹성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끔찍하군."

    "후후후후."

    벨트레체는 유쾌하게 웃었다.

    "지켜보게 될 것이다. 내가 이지혁을 찢어 죽이고 이 세계를 주계로 삼는 모습을 말이다."

    알파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벨트레체를 바라보았다.

    잘려 나간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를 괴롭혔지만, 고통이란 익숙한 것이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말이다.

    * * *

    이지혁은 허공에 뜬, 거대한 게이트를 보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

    아무리 마왕 놈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의 손으로 베라프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게 될 줄이야.

    웬만한 방식으로는 마왕을 속일 수 없으니, 진짜 게이트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아까워 죽겠네."

    차원을 넘는 게이트를 만드는 데는 막대한 마나가 소모된다.

    예전의 멸망의 좌에게라면 별것 아닌 소모겠지만, 지금의 이지혁에게는 허리가 부러질 만큼의 막대한 지출이었다.

    "끙……."

    이지혁이 게이트 아래에서 빛나는 마정석들을 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급한 마정석 몇 개일 뿐인데 뭐가 그리 아까운 거죠?"

    "못 구하니까 그러지, 못 구하니까!"

    물이 천지인 계곡에서 살다가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지면 새벽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도 소중한 법이거든!

    이번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게이트에 사용된 마정석은 이지혁이 모조리 회수했다.

    그 회수한 마정석 중 질이 좋지 않은 일부만 사용했지만, 그래도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뭐랄까…….

    커다란 금덩이와 작은 금덩이 중 작은 것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는 기분이랄까?

    겨우 이지혁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지만, 그만한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이러다 열리겠는데요?"

    "끙……."

    이지혁이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온다.

    안 올 리가 없다.

    이대로 이지혁이 베라프로 가버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장 잘 아는 것이 마족 놈들이니까.

    마왕급쯤 된다면 지금 똥줄이 타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하는데…….

    "모르는 거 아냐, 이 새끼들?"

    친절히 알려준다고 방송까지 했는데, 그래도 모르면 대체 어쩌라고!

    이지혁이 크리스토퍼를 보고 역정을 냈다.

    "방송 제대로 내보낸 것 맞아요?"

    "가능한 모든 방송에다 송출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일인데, 대충 하겠습니까!"

    "흐음……."

    그 말도 맞긴 한데…….

    그럼 이 새끼들은 왜 안 오는 걸까?

    그때, 이지혁의 눈에 저 멀리서 날아드는 묘한 비행 생물체가 포착되었다.

    "호오?"

    저거, 악마 같은데?

    이지혁이 입술을 축이고는 미묘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안 올 리가 없지.

    마왕이란 놈들이 그렇게 멍청하다면 내가 더 실망했을 거야.

    예전에 내가 꽤 쓸 만한 놈들이라고 평가했단 말이지. 한데 그 평가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까.

    아르고라스는 상공에서 이지혁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게이트를 열었다.

    그가 직접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다 일이 틀어질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이지혁에 대한 징벌은 그가 아닌 벨트레체가 직접 내려야 할 일이었다.

    이지혁은 게이트가 열리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눈앞의 아르고라스 따위가 아닌, 마왕이 이곳에 오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우우우웅!

    게이트가 마구 진동하더니, 그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진다.

    쿠웅!

    상공에서 바닥까지 단숨에 착지한 생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어?"

    이지혁이 그 생물을 보며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야, 너 오랜만이다. 어디 보자, 네가 아마……."

    벨트레체는 넉살 좋게 인사를 하는 이지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참 변하지 않는 놈이다.

    "여든두 번째다."

    "그래, 맞다. 그랬지. 이름이 아마……."

    "벨트레체."

    "미안. 내가 기억력이 좀 후달려서 말이야. 워낙 특이하게 생긴 얼굴이라 얼굴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 이해 좀 부탁할게."

    벨트레체는 이지혁의 넉살을 들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힘을 모두 잃었음에도 과거의 그 성격이 그대로라는 것이 짜증과 즐거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감히 나약해 빠진 주제에 자신의 앞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다는 점이 짜증을 불렀지만, 이내 그것은 즐거움으로 바뀌어갔다.

    그래야지.

    변하지 말아야지.

    힘이 없다고 살려 달라고 질질 짜대는 아흔아홉 번째 마왕을 보는 것도 별로 유쾌하지는 못한 일일 테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까?"

    벨트레체가 혀로 얼굴을 핥았다.

    "으, 그거 좀 안 하면 안 되나? 여하튼 파충류들은!"

    이지혁이 말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려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아펠드리체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파충류 아니라니까요! 용족이란 말입니다!"

    "파충류과 용족이겠지. 어차피 조상은 개구리인 거 똑같잖아!"

    "드래곤의 조상은 드래곤입니다!"

    "너도 진화론을 좀 배워야겠어."

    "그건 이 세상이구요!"

    벨트레체가 그 광경을 보며 낮게 이죽거렸다.

    "과연…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가 싶었더니, 로드인가? 오랜만이로군. 보자, 대충 삼천 년 만에 보는 건가?"

    아펠드리체가 새침하게 답했다.

    "별로 반갑지는 않네요."

    "나는 반가운데 말이야."

    벨트레체는 세로로 길게 찢어진 샛노란 눈동자로 아펠드리체의 위아래를 훑었다.

    "하지만 너는 로드가 아니로군."

    "힘이 없는 드래곤의 화신체가 로드를 지칭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래요, 아펠드리체라 부르면 되겠군요."

    "아펠드리체라……."

    벨트레체가 키득키득 웃었다.

    "겨우 저런 것을 믿고 당당한 것인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뭐래?"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슬프구나. 그대의 강대한 힘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마계의 하늘을 갈랐던 그대의 위엄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야 그대를 짓밟을 수 있게 되었음에도 내게는 기쁨보다 슬픔이 우선하는구나. 멸망의 좌를 그토록 증오했음에도 그 강대했던 존재가 겨우 이런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음이 슬프구나! 마왕을 슬프게 하는 존재가 다른 마왕이라니, 이것 또한 코미디가 아닌가."

    이지혁이 귀를 후비고는 훅, 불었다.

    그러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할 말 다 했냐?"

    벨트레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변하지 않는군, 변하지 않아. 하지만 그건 그저 객기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언제부터 마왕이란 것들이 이리 말이 많았는지 모르겠네? 요즘 마계에서는 아가리 털어서 영역 다툼하는 모양이지? 아쉽네. 내가 있었으면 바로 대마왕인데!"

    벨트레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나서 벨트레체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무엇을 믿는 것이냐,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편린이여."

    "뭘 믿느냐고?"

    이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탄식을 토하더니,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잘 안다는 듯 지껄이더니, 아무것도 모르는군."

    "으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존재다. 하지만 단 하나 같은 것이 있다면 말이야……."

    하나뿐이지.

    "언제나 내가 믿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거다, 이 도마뱀 새끼야."

    이지혁의 육체에서 시커먼 마나의 연기가 뭉클뭉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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