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1화 (31/118)
  • [■] 어차피 처리할 수 있잖아? [■]

    ─────

    화르르륵!

    서아영의 화염이 하늘로 충천했다.

    마치 악마의 혓바닥처럼 붉은 화염이 사방에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으… 아……."

    추이펑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화염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그 역시도 중국의 능력자들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

    능력자들이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는 위치에 있었다.

    중국의 수많은 능력자들 중 가장 뛰어난 이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도 알고, 그들의 한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지.'

    그래, 이건 아니다.

    이건 그가 생각하는 능력자의 범주에 도저히 포함될 수 없었다.

    이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새끼들이 사람 열 받게 하고 있네."

    "…뭐래?"

    놀라운 건 놀라운 거고, 못 알아먹는 건 못 알아먹는 거지.

    부관이 헐레벌떡 달려와 추이펑에게 소리쳤다.

    "한국말 같습니다!"

    "한국?"

    그럼 저 여자가 한국의 능력자라는 건데, 그럼…….

    "플레임 위치?"

    저 온갖 짜증은 다 담고 있음에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얼굴과 충천하는 화염을 보고도 누군지를 알아채지 못하면 계급장 떼고 은퇴하는 게 맞다.

    "플레임 위치가 여긴 웬일이야!"

    우리가 요청한 사람은 이지혁이란 말이다!

    저 성질 더러운 노처녀를 부른 적은 없다고!

    서아영이 들었으면 발악을 하고, 최정훈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쳤을 생각을 잘도 하는 추이펑이었다.

    그리고 추이펑이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서아영은 지금 극도로 짜증이 나 있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버티는 것만으로 살인 충동이 극으로 올라와 있는데, 돌아오자마자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그것도 서아영을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굴려 대던 이지혁은 쏙 빠지고 말이다.

    "이 개새끼!"

    서아영이 손이 아니라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짜증을 제대로 부리자 추이펑은 움찔하여 말했다.

    "야, 빨리 좀 통역 불러와 봐."

    "부른다고 저걸 뭐 어쩌겠습니까?"

    추이펑의 눈에 서아영의 몸을 마구 감싸고도는 불꽃의 용이 보였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바로 수배하겠습니다!"

    통역을 불러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 불꽃 속으로 통역을 밀어 넣으며 통역을 하든 통구이가 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해야 하나?

    '왜 하필 저 인간이…….'

    대한민국이라는 소국에서도 단 한 명.

    전 세계급으로 인정받는 능력자.

    아름다운 외모와 강력한 화염, 그리고…….

    '개떡 같은 성질머리.'

    머릿속에 있는 서아영의 프로필을 모두 확인한 추이펑이 대책 방안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뭐야?'

    생각해 보니 대책이고 뭐고, 저 여자는 왜 갑자기 여기 나타나서 깽판을 치고 있느냔 말이다!

    외교 마찰이 두렵지도 않은가!

    어떻게 뒷감당을 하겠다고!

    추이펑이 멍해 있는 동안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저 아줌마 또 시작이네."

    "으응?"

    추이펑이 다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등 뒤에는 거지꼴의 남자가 있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짰나?'

    저 여자도 그렇고, 이 남자도 그렇고.

    몰골은 진짜 무슨 아프리카 오지에서 석 달은 헤맨 것 같은 꼴이면서, 뭐 이리 이쁘고 잘생겼나.

    추이펑에게 인생의 불공평함을 알려준 사람은 물론 김다현이었다.

    몰골이야 최악이지만, 원판이 어디로 가겠는가.

    "조심하세요, 아저씨. 저 아줌마가 지금 보통이 아니거든요? 잘못 걸리면 뼈까지 웰던으로 구워줘요."

    '중국인한테 한국말로 말하지 마, 이 미친놈아!'

    한국 능력자들은 다 이런 건가?

    정상적인 놈들이 없어!

    저 멀리서 통역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말 좀 해봐. 여기 왜 왔는지!"

    통역이 뭔가 쑥덕대자 김다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담히 말했다.

    "모르는데?"

    "……."

    통역이 멍한 눈으로 김다현을 바라보았다.

    김다현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통역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전했다.

    "모른답니다."

    "…뭐?"

    추이펑이 가만히 통역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한국어 할 줄 아는 거 맞아?"

    "마, 맞습니다."

    "똑바로 전달하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흐음……."

    추이펑이 김다현의 해맑은 얼굴을 보다가 다시 말했다.

    "왜 왔는지 다시 물어봐."

    "예옙!"

    통역이 긴장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저, 왜 오셨는지 다시 말해주십시오."

    김다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말했잖아요. 모른다니까요. 나도 이유는 알고 싶은데, 모르니까 어쩔 수가 없지. 모른다고 할 수밖에요."

    "으음……."

    통역이 곤란한 얼굴로 김다현을 바라보다가 추이펑에게 번역을 했다.

    "모른다는데요?"

    "몰라?"

    "예."

    추이펑이 통역을 가만히 보다가 그의 멱살을 쥐더니 끌어당겼다.

    "야, 너 진짜 한국말 할 줄 알아?"

    "무, 물론입니다!"

    "그럼 저 새끼는 뭐라고 길게 씨부리는데, 니가 한 말은 모른다 하나인 게 말이 돼?"

    그거야 쓸데없는 말들이니까 그렇지!

    "이 야매 새끼야, 니가 살고 싶으면 이유를 들어서 니가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라. 아니면 내일 아침은 황하 바닥에서 처먹게 해주지!"

    "네! 넵!"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통역이 김다현을 붙들고 사정을 했다.

    "제발 이유 하나만 만들어주십시오! 저 이러다가 죽습니다!"

    "아니, 왜 그래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어쨌든 여기 왜 오셨는지 이유 하나만 만들어주십시오."

    "이유, 이유라……."

    김다현은 적당한 이유를 생각해 냈다.

    "그냥 쉽게 말하면, 지하철을 탔는데 내리고 보니 부산이었다. 뭐, 이런 거죠."

    "…음."

    통역이 미묘한 얼굴로 고민을 하더니, 결심을 굳힌 듯 추이펑을 보며 말했다.

    "알아냈습니다."

    "뭐?"

    "잘못 왔답니다."

    "……."

    추이펑은 두말없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누군가 다가와 통역의 팔을 움켜잡았다.

    "끌어내."

    "아니! 진짜라니까요! 정말입니다!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요! 제가 없어지면 여기서 통역은 또 누가 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진짭니다아아아!"

    질질 끌려가던 통역의 처절한 외침에 추이펑이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야, 다시 데리고 와봐."

    풀려난 통역이 광속으로 뛰어와 추이펑의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진짜야?"

    "예, 진짭니다."

    "뭐 이런 개……."

    추이펑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김다현과 서아영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그럼 저 여자는 왜 저러는 건지 좀 물어봐."

    김다현과 쑥덕대던 통역이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 진짜 그대로 전하는 겁니다."

    "말해봐."

    "원래 저렇다는데요?"

    "……."

    "……."

    한국 쪽으로 향하고 있는 미사일이 있었나?

    이 새끼들, 이거 해결만 되어봐라. 내가 다 폭파시켜 버릴 거다, 진짜!

    "통신병 와서 한국 연결하라 그래!"

    "예."

    자국의 능력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서아영을 바라보는 추이펑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몬스터도 다가오고 있는데, 쓸데없이 이런 데다 심력을 낭비하고 있어야 하다니!

    '아니, 거꾸로 보면…….'

    저들이라도 있다면 전력이 더 강화되겠지. 특히나 플레임 위치는 무시할 수 없는 능력자였다.

    그녀가 있다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저 상태만 아니라면 말이지.

    "뭐, 이 새끼들아! 지금 욕하는 거야?"

    '아가씨, 진정하세요'가 욕이 되어버리다니, 언어의 장벽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냔 말이다.

    "다 태워 버릴까 보다, 아주 그냥!"

    서아영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김다현은 그 광경을 보고는 뒤로 슬슬 물러났다.

    이지혁이 등장하고부터는 좀 얌전하게 살았다지만, 저 여자… 원래 저랬었지.

    한 번 저렇게 되면 아무도 못 말리는데…….

    바로 그때였다.

    "연결됐습니다."

    "누구야?"

    "NDF라는데요? 최정훈이라는 사람입니다."

    "최정훈?"

    아, 그래. 들어본 적 있지.

    요즘 이지혁이라는 이름과 함께 자주 들리는 이름이었다.

    "여기서 너희 능력자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국제 문제가 될 줄 알라고 해! 당장!"

    "예!"

    수화기를 붙들고 목소리를 높이자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뭐래?"

    "기다리랍니다."

    "응?"

    기다리긴 뭘 기다려?

    여기는 지금 당장 해결이 안 되면 막장으로 치달을 판인데!

    "기다릴 시간 없다고 해."

    "끊었는데요?"

    "…니가?"

    "설마 제가 그랬겠습니까?"

    "진짜 미쳤나?"

    배짱도 정도껏 부려야 귀엽다고 해주는 것이다.

    한데 이건 배짱도 아니고, 정말 엿 먹이는 수준 아닌가.

    "그리 나왔다, 이거지?"

    이지혁이라는 변수 때문에 웬만하면 좋게 넘어가고 싶었는데, 이리 나온다면 말이 다르지.

    "니들 간판이 찢겨 죽어도 기다리라고 할 수 있는가 한 번 보자."

    추이펑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야, 비켜!"

    "응?"

    머리 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추이펑이 움찔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비키라고!"

    "으아아아아아!"

    사태를 파악한 추이평이 옆으로 몸을 날렸고, 그 자리에 세 사람이 사뿐히 착지했다.

    "적당히 높은 데로 가라? 응?"

    "뭐? 왜! 싫으면 타지 말든가!"

    "……."

    "왜, 왜?"

    최정훈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얼굴을 감쌌다.

    타지 말라니, 이제 완전 정체성이 셔틀로 굳어버렸다.

    이걸 어찌하면 좋은가.

    "너희 뭐야, 이 새끼들아!"

    추이펑이 소리를 지르자 아차 싶은 최정훈이 인사를 건넸다.

    "NDF의 최정훈입니다. 저희 요원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해서 진압차 왔습니다."

    "최정훈?"

    이지혁이 유창한 중국어로 쏼라쏼라대는 최정훈을 보며 인상을 썼다.

    잘났다.

    매우 잘났네, 진짜.

    영어도 하고, 프랑스어도 하고, 이제는 중국어까지 하는구나.

    쟤 소말리아에 데려다 놓으면 소말리아어도 하는 것 아닌가?

    "끙……."

    이지혁이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지. 잘나면 좋은 거지.

    어차피 매제 될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래, 좋은 거지.

    이제 곧…….

    "후후후."

    최정훈이 뭔가 불안한 얼굴로 뒤를 두리번거렸다.

    하여튼 눈치는 빨라서는!

    "예상대로의 상황이군요. 우선 사과의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희도 매우 처치 곤란한 사람이다 보니……."

    "말만 하지 말고 어떻게 좀 해보시오."

    "예, 그럼."

    최정훈이 이지혁을 빤히 보았다.

    "왜요?"

    "이지혁 씨 아니면 누가 저 사람을 막습니까? 표정만 봐도 제대로 빡 돌았는데."

    "그날이래?"

    "확, 마!"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고 그래요! 내가 뭐 못할 말 했나!"

    이걸 때릴 수도 없고 진짜.

    최정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따지고 보면 다 당신 탓 아냐!"

    "내가 뭘!"

    "당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애가 맛이 갔잖아!"

    "원래 맛이 가 있던 거 아니고? 처음 봤을 때부터 정상은 아니었는데?"

    "……."

    뭐지? 반박할 말이 없는데?

    최정훈이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거대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발소리?'

    최정훈의 시선이 지평선 끝으로 향했다.

    "…와."

    이해가 가지 않는 느낌이다.

    어째서 저리 멀리 있는데도 이런 거대함이 느껴진다는 말인가.

    인식의 아이러니함이 최정훈에게 위화감을 가져왔다.

    "너무 큰 거 아닌가, 저거?"

    최정훈의 목소리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 * *

    "뭐가 저리 커?"

    김다현도 입을 쩌억 벌렸다.

    이곳으로 출동할 예정도 없이 무작정 끌려오다 보니 어떠한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는 정보를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미리 알았다면 충격이 덜했을까?

    아니, 그랬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상식 이상의 것을 보았을 때는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몸이 반응을 해버리니까.

    눈앞에 사람만 한 바퀴벌레가 나타난다면, 그게 거대 바퀴벌레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순간, 몸이 굳고 두려워질 뿐.

    아니, 징그럽겠지. 많이.

    지금이 그랬다.

    인간의 형체를 한 것이 20m 가까운 크기로 걸어오고 있다면 그걸 보는 사람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아……."

    최정훈은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현실감이 사라지고, 멍하게 압도되기만 할 뿐이다.

    쿵!

    쿵!

    아직 지평선에서 얼마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바닥을 내딛는 진동이 최정훈의 전신을 뒤흔든다.

    "…저걸 어쩌라는 거지?"

    최정훈은 처음으로 막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좀비 드래곤을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건 분명 거대하기는 했지만, 네 발로 바닥을 걷는 형태였으니까.

    이족 보행 생물이 거대하다는 게 얼마나 압도적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자이언트?"

    신기해하는 목소리에 최정훈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아십니까?"

    "어, 뭐, 비슷해 보이기는 한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좀 작은데?"

    "네?"

    최정훈이 멍하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작아? 저게?

    넌 무슨 대인국에서 왔냐? 걸리버여?

    이지혁이 뚱하게 말했다.

    "제가 아는 거면 저거보다 훨 더 클 텐데, 뭔가 작은 느낌이네요. 미니어처라고 해야 하나?"

    "……."

    최정훈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물었다.

    "그래서 어떤가요? 강합니까?"

    "비슷하기만 해서 잘 모르겠는데, 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약해 빠졌죠."

    "네?"

    저게 약하다고?

    손가락만 스쳐도 사람은 쥐포가 될 거 같아 보이는데, 약하다고?

    당신, 약함과 강함의 개념이 좀 이상한 거 아닐까?

    "당연히 약하죠. 덩치가 크잖아요. 사람 몸인데."

    "네?"

    그게 뭔 개소리야?

    사람 몸인데 덩치가 크면 센 거지!

    "사람의 몸에는 허점이 많거든요."

    모르겠다.

    저 인간 하는 말을 언제는 잘 알아들은 적이 있었나.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그보다……."

    최정훈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온몸 주위로 불을 피우고 있는 서아영이 보였다.

    "저분부터 어떻게 좀 해주시죠."

    "왜요. 뜨끈하고 좋구만. 불가마 온 줄."

    "찜질방은 제가 따로 데려가 드릴게요."

    "약속 지키세요."

    이지혁이 히히덕거리며 서아영에게 다가갔다.

    "야!"

    서아영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화르르륵!

    동시에 서아영의 몸 주위를 타고 돌던 화염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네, 이거."

    이지혁이 혀를 쯧쯧, 차더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자이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아니고, 저기. 저기에다가……."

    화아아악!

    서아영의 화염이 이지혁을 향해 화염방사기처럼 뿜어지기 시작했다.

    "아, 뜨!"

    이지혁이 몸을 쭈욱 빼며 소리쳤다.

    "아니, 이게 적이랑 아군도 못 알아보나!"

    제대로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저거, 확실하게 노리고 뿜은 건데?

    최정훈은 서아영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기야……."

    최정훈도 그곳에 있으면서 이지혁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럼에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이지혁이 죽는다면 그 세계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반란이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빠져나왔으니 쌓아온 원한이 폭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능력자들이 모두 물러나고 이지혁만이 서아영이 폭풍처럼 날려 대는 불덩어리들을 슬쩍슬쩍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엄청 익숙해 보인다?

    "얘 또 이러네, 또."

    이지혁이 혀를 찼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거기서도 한 번씩 발악을 해 대더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네.

    "너 혹시 미쳤니?"

    "죽어어어어어!"

    음, 그래…….

    평소와 다름없는 서아영이군.

    다행히 미친 건 아니니까.

    그럼… 음, 어떻게 할까?

    "흡……."

    짧게 호흡을 들이마신 이지혁이 순간적으로 서아영이 날린 불덩어리들은 튕겨내며 그녀에게로 파고들었다.

    "칫!"

    예전이었다면 그것 하나로 품을 내주고 끝났을 서아영도 나름 발전이 있었는지 자신의 주위를 불로 뒤덮어 이지혁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으……."

    이지혁도 차마 불로 뛰어들지는 못했다.

    다른 것이라면 그냥 대충 실드로 보호하고 뛰어들겠지만, 불은 껄끄럽다.

    '제길.'

    예전 베라프 시절 초기에 악마라 몰렸을 때, 광장 한가운데에 묶여서 화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지혁의 몸은 계속 재생하기에 불타 죽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더 문제가 되었다.

    불에 탄다는 것은 인간이 아는 그 어떤 고통보다 끔찍하다. 한데 그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죽을 수가 없다.

    결국 무려 일주일이나 타올라 그 마을 주변의 모든 땔감을 집어삼킨 후에야 이지혁은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고정되어 흔들릴 리 없는 이지혁의 뇌가 그 이후로 화염만큼은 꺼리게 되어버린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끙……."

    다행히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고, 날아오는 불을 피하거나 막아내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공포증 수준까지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처럼 타오르는 불에 직접 뛰어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화르륵!

    서아영의 몸 주위를 타고 돌던 화염이 일제히 이지혁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이 아니라 마치 용암처럼 밀도 높은 불꽃들이 타고 넘치듯 이지혁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아, 싫다."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것처럼 뒤로 물러난 이지혁이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진짜…….

    많이 강해지기는 했네.

    이지혁이 껄끄러움을 느낄 만큼의 불을 뿜어내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숙련된 파이어 메이지도 이지혁에게 껄끄러움을 주지는 못했다. 원소계 최상위 마법사 중에서 화염에 특화되어 있는 이들인데도 말이야.

    그러니 이 정도면 거의 아크 메이지급 아닌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고 힘들고 짜증나는 시간이지만, 그 결과가 확실하게 느껴진다는 게 어딘가!

    "훌륭해."

    이지혁이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뭐…….

    아직은 안 되지.

    이지혁의 몸이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응?"

    순간적으로 이지혁의 종적을 놓친 서아영이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디 봐?"

    당연하다는 듯 이지혁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

    덥썩.

    이지혁이 서아영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는, 다른 한 손으로 배를 감아 들어 올렸다.

    "아줌마, 제발 좀 히스테리 좀 부리지 마세요! 시집가라고!"

    "읍읍!"

    서아영이 반항했지만 이지혁의 손은 강철 렌치처럼 그녀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적을 똑바로 보라고."

    이지혁이 서아영을 들어 올려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자이언트에게로 집어 던졌다.

    "으라차!"

    서아영이 허공을 부웅 날았다.

    "야아아아아아!"

    이지혁이 비명을 지르는 서아영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김다현!"

    "네!"

    패스 드리프터가 알고 있다는 듯이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신에, 혹시 갔다가 불에라도 타면 산재해 주셔야 합니다?"

    "여기 있다 처맞아서 다치면 산재도 안 될 텐데?"

    "…갑니다."

    김다현의 모습이 순간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허공에 나타나 서아영을 낚아챘다.

    "모시러 왔습니다."

    "닥쳐!"

    "네."

    김다현은 입을 쭉 내밀었다.

    그대로 놔뒀으면 자이언트의 입까지 일직선으로 날아갈 사람 잡아줬더니 말버릇하고는!

    그래도 일단은 얌전히 바닥에 내려놔야겠지?

    김다현이 허공을 박차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편안한 여행 되셨기를."

    "넌 클레임이야."

    "아, 왜!"

    이지혁에게 그리 당하고도 딸랑딸랑대는 꼴이라니!

    서아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당장 눈앞에 몬스터를 두고 김다현과도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김다현이 머리를 위로, 위로, 위로 젖혔다.

    "진짜 더럽게 크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클까?"

    "그건 아니죠."

    "그럼 뭐, 별거 없잖아."

    김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눈앞에 있는 몬스터가 강해 보이기는 한다만…….

    '그 안에서 이런 건 그냥 평범했지.'

    약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평균에 수렴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 겁날 것도 없다.

    하지만…….

    "솔직히 좀 쫄리긴 하는데요?"

    "그래, 나도 사실."

    김다현과 서아영은 괜히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뒤로 슬그머니 돌렸다.

    "이지혁 씨?"

    하지만 이지혁은 이미 어디선가 의자까지 구해 가져다 놓고는 정해민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이지혁 씨이!"

    "응?"

    이지혁이 멀리서 들려오는 서아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요?"

    "…이거, 어떻게 좀 해주시죠."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불덩어리 죽어라고 날릴 때는 언제고, 지가 급해지니까 손 벌리는 거 봐라!

    가정교육이 잘못됐어, 가정교육이!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죠."

    "왜 내 일인데! 내가 상관인데, 시키면 해야지!"

    "꼬우면 짜르든가."

    "으!"

    서아영이 부들부들거리자 이지혁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차피 처리할 수 있잖아?"

    "……."

    "그것도 처리 못하면 그 안에서 보낸 반년이 굉장히 후회스러울 텐데?"

    "처리해도 후회스럽거든요?"

    "뭐, 그럼 그러시든가."

    "이……."

    서아영이 이를 우득우득, 갈고는 고개를 돌려 자이언트를 노려보았다.

    "이건 그냥……."

    화르르륵.

    그녀의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단순한 화풀이야!"

    화염이 그녀를 휘감고 돌더니, 이내 거대하게 부풀고 또 부풀어 올라 자이언트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퀘르륵?

    자이언트가 자신에게 날아드는 불덩어리를 보고는 기겁하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불덩어리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방향을 틀어 자이언트의 몸을 휘감았다.

    카아아아아아!

    고통스러워하는 자이언트의 비명이 울리자 서아영은 귀를 틀어먹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막이……."

    저 정도 소리면 가히 음파 병기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혁이 정해민에게 외쳤다.

    "야, 대항해!"

    "응?"

    정해민이 멍해서 물었다.

    "뭔 소리야?"

    "음파에는 음파지! 울어!"

    "…죽을래?"

    이지혁이 입맛을 다셨다. 인류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음파 병기가 있는데 이럴 때 써먹지 못한다니.

    서아영이 다시 비척거리며 일어날 시점에 김다현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보자."

    저 정도면 아주 놀 곳이 많겠는데?

    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걷던 걸음이 뜀박질이 되고, 이내 질주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빛살이 된 김다현이 공간을 가르며 자이언트에게 다가가 거대한 동체를 타고 올랐다.

    "하하핫!"

    웃음을 터뜨린 김다현이 자이언트의 육체를 등산하듯 올라 자기 몸보다 더 큰 자이언트의 눈동자를 걷어찼다.

    카아아!

    "와, 무슨 눈알이 강철 같아?"

    휘둘러 오는 손을 피해 허공을 박찬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이 다시금 음속을 초월하여 자이언트에게 달려들었다.

    "모기가 빠르면 그것보다 무서운 것도 없거든?"

    이지혁이 혀를 찼다.

    "자랑이다."

    뭔 생각으로 저런 말을 크게 외치는 건지 모르겠네. 애가 좀 띨한가?

    그 시각,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박성찬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다시 반년이다!

    저 번에도 반년이었는데, 이번에도 무려 반년만에 겨우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이게 뭔가.

    박성찬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몬스터를 보며 이를 갈았다.

    나오자마자 보는 게 사람도 아니고, 몬스터라니!

    "일부러겠지?"

    "백푸롬다."

    이지혁, 이 개새끼!

    분명 일부러 여기로 보낸 것이겠지! 오자마자 몬스터 앞에 떨궈놓다니! 이게 뭐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박성찬은 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더럽고 찝찝한 느낌에 치를 떨었다.

    마치 일주일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책상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느낌이랄까?

    "이 쓰레기 새끼!"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갈아 마셔 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상하게 당한 건 많은데, 더 덤빌 수가 없다.

    그 안에서 본 이지혁의 모습이 박성찬의 뇌리에 너무 강렬하게 남아버린 것이다.

    육체계 강화 능력자 중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하는 박성찬이 체술과 힘만으로 말 그대로 짓밟혔다.

    뭐 어떻게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쓰러지고 밟히고 얻어맞다가 끙끙대며 일어나기가 일쑤였다. 그게 두어 번 반복되고 또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이지혁에게 덤벼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지.

    힘으로 봐도, 육체의 강함으로 봐도…….

    몸과 몸으로 밀린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는 일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끄응……."

    박성찬뿐만이 아니었다.

    반년이란 시간 동안 NDF의 요원들은 이지혁이라는 인간 하나에게 정말 철저할 정도로 당하고 또 당했다. 나중에는 이렇게 사람을 패면 쟤도 귀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당하다 보니 이제는 이지혁에게 반항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년은 또라이야."

    서아영을 생각하자 진저리가 쳐진다.

    그만큼 당했으면 사람이 포기가 되어야 정상이지, 처맞고 또 처맞아서 나중에는 공중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아놨는데도 입으로 불을 뿜으며 난리를 치던 모습을 생각하니 무서울 지경이다.

    "으……."

    지랄마녀, 지랄마녀하더니…….

    사람들은 그 지랄마녀가 얼마나 지랄 같은지 알고나 하는 소리일까?

    그만큼이나 난리치는 그년도 그년이지만, 그걸 다 받아주면서 낄낄대며 괴롭히던 이지혁을 생각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여하튼 미친놈들뿐이야."

    박성찬은 하루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찬 씨."

    "음?"

    박성찬이 고개를 돌려 그의 등 뒤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윤혁규를 바라보았다.

    "왜요?"

    "저거 어쩔 겁니까?"

    박성찬은 스핏 파이어 윤혁규가 가리킨 거대한 거북이 같은 몬스터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뭘 어쩌긴 어쩝니까?"

    기분도 아주 더럽고 좋은데.

    화풀이하기 딱 좋구만.

    "등껍질이 얼마나 딱딱한지 한 번 봐야지."

    박성찬이 주먹을 쾅쾅, 마주 부딪치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 * *

    "저건 또 뭐야?"

    레드 락 김명운은 눈앞에 보이는 짐승을 보며 짜증을 부렸다.

    오자마자 이게 뭔가.

    "그냥 두고 갈까?"

    보아하니 한국도 아닌 것 같은데, 두고 간다고 해서 KSF 조약에 딱히 저촉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가면…….

    "일부러 여기로 던진 것 같은데, 그냥 가면 이지혁 씨가 가만히 있을까?"

    "……."

    루드라 신정아의 말에 김명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지혁.

    그 세 음절의 단어가 김명운의 뇌를 꽉 움켜잡고는 제멋대로 흔들어 버리는 느낌이다.

    끌려간 이들 모두가 이지혁에게 호되게 당했다지만, 그중 누구고 감히 김명운만큼 당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에야 '내가 미쳤지'하고 후회했다.

    이지혁이 그렇게까지 지독하고 집요한 인간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 번 뒤집자고 했을 때 그 미묘하던 선배들의 반응을 재빠르게 캐치해야 했는데, 나는 왜 그리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던가.

    덕분에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이지혁은 매우 위험하며 끔찍한 인간이고, 무엇보다 뒤끝이 아주! 아아주! 아아아아아~주 긴 인간이었다.

    그 미친놈, 한 번 대들었다고 사람을 반년이나 집요하게 괴롭혀 댈 줄이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차라리 죽이라고 자포자기하기를 2개월, 너 죽고 나 죽자고 대든게 또 이 개월, 나중에는 해탈에 이르러서 '그래, 니 마음대로 하라'고 한 지를 2개월.

    괴롭힘의 극한에 이르러서 이제 겨우 다 끝났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이지혁과 엮이라고?

    김명운의 양팔에 새파란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어느 놈부터 족치면 됩니까?"

    김명운이 건물이라도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말하자 루드라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젠 반항도 못하겠네.'

    트라우마가 깊게 박혔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별 설명도 하지 않고 게이트를 나눠 능력자들을 몬스터 앞에 뿌려 버린 이지혁의 행동이 그가 NDF를 완벽하게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리 틀린 사실도 아니지.'

    반박할 말도 없고 말이야.

    루드라는 바람을 일으키며 전방에 있는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뭐, 어찌 되었든 눈앞에 몬스터가 있으면 일단은 해결하고 봐야 한다. 굳이 이런 사소한 일로 튈 필요는 없으니까.

    "죽인다아아아아아!"

    눈을 희번덕대며 앞으로 달려 나가는 김명운의 모습에 신정아는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살아."

    * * *

    "차아아아아!"

    화염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예전에도 집채만 한 화염 덩어리를 마구 집어 던져 대던 서아영이지만, 확실히 그 짧은 시간 만에 화력이 급상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좋다."

    이지혁은 서아영에게서 뿜어지는 열기를 전신으로 받으며 거의 사우나를 하고 있었다.

    "불가마네, 불가마."

    최근 에테르가 상승하며 단련된 이지혁이다 보니 웬만큼의 열기로는 과거와 같은 개운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전에야 당연히 지금보다야 비교할 수 없이 강했지만 육체는 일반인이나 다름없었기에 불편함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몸뚱아리가 어떻게 된 것인지 웬만한 열탕에 들어가거나 눈앞에서 불을 피워도 뜨겁다는 느낌을 잘 받을 수 없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간만에 머리까지 치솟는 열기를 정면에서 받게 되자 땀도 나고 아주 노폐물이 쭉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아줌마! 온도 좀 더 올려줘요!"

    서아영은 숫제 드러누워 반신욕이라도 시작할 기세의 이지혁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더 뜨겁게요?"

    이 불을 집어 던져 버리면 뜨거울 텐데, 그지?

    아주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데!

    그녀가 부글부글 끓을 동안 이지혁은 태평하게 의자에 푹 늘어져서 지적질을 해 댔다.

    "어, 저러다가 김다현 맞아 죽겠는데, 지원 안 해줘도 되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쯤은 한 방 날려줘야 애가 편할 텐데. 알아서 하시려나? 뭐, 잔소리하려던 것은 아니고."

    저 주둥아리에!

    죽빵 한 대만!

    날릴 수 있으면 세상에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서아영은 부들부들 떨다가 삐걱대는 목을 억지로 뒤틀어 이지혁에게서 시선을 뗐다.

    이렇게 보고 있다가는 속이 뒤집어질 테니, 차라리 머리에서 삭제해 버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착하게 말도 잘 듣네요!"

    "카아아악!"

    서아영은 모았던 불꽃을 이지혁에게 날리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몬스터고 뭐고, 저 인간부터 죽여야 된다!

    몬스터가 따로 있는가!

    인간 같지 않고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면 몬스터지!

    그런 의미로 따지면 이지혁이야말로 당장에 퇴치해야 할 몬스터가 아니던가!

    완벽한 이론을 끌어낸 서아영이 거침없는 공격을 이지혁에게 퍼부었다.

    "또 시작이네, 저 미친년이."

    이지혁이 하품을 하면서 실드를 쳐 서아영의 공격을 튕겨냈다.

    무슨 PTSD라도 앓고 있는지, 이지혁이 뭐만 하면 발작하고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뭐, 앓을 만도 하지.'

    나름 능력자들도 일반인에 비해서는 강건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어서 버티는 거지,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면 육체의 고통과 관계없이 그 무미건조한 세계 자체를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어디 건방지게!"

    이지혁의 촉수가 바닥을 뚫고 튀어나와 서아영에게로 날아들었다.

    * * *

    "잘하는 짓이다."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은 자이언트의 머리 위에서 투닥대는 둘을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찼다.

    "아주 그냥 판 깔고 싸우는구만."

    그것도 몬스터 앞에서 말이야.

    아니, 몬스터는 냅 두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야 그 안에서 심심하면 했던 일이니 새삼스럽지는 않다 쳐도, 적어도 말이야…….

    '다른 나라 놈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쪽팔리게!

    아아, 국격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얼마나 막장으로 볼 것인가.

    "쪽팔린 줄도 모르고!"

    김다현이 쯧쯧, 혀를 차는 동안 중국의 능력자들은 이지혁과 서아영이 아니라 김다현을 보고 있었다.

    '뭐지, 저 미친놈은?'

    앞에서 싸우고 있는 능력자 놈들이야 막장이라 그런다 치고, 저 거대한 자이언트의 머리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혀를 차고 있는 저놈은 또 얼마나 미친놈이란 말인가.

    추이펑은 그 광경을 가만 보다가 옆의 정보장교에게 물었다.

    "이봐."

    "예."

    "혹시 한국 관련 정보에 능력자 새끼들이 전부 사이코란 이야기가 있나?"

    "그런 정보는 없습니다."

    "그래?"

    "예."

    추이펑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 내용 추가하고, 한국 정보 담당하는 새끼들 전부 다 집합시켜."

    "…예."

    추이펑이 이를 으득으득, 갈고는 말했다.

    "그리고 당에 말해서 공식적으로 항의 준비해."

    "…예."

    저 망할 새끼들, 내가 꼭 엿을 먹인다.

    추이펑은 그리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어?"

    지금 뭐 하는 거지?

    저만한 몬스터가 눈앞에 있는데 당장 저걸 어떻게 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이미 해결된 듯이 굴고 있지 않은가.

    추이펑은 자신의 인식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그의 눈에 자이언트의 머리 위에서 혀를 차는 김다현과 이지혁에게 불의 비를 내리고 있는 서아영이 들어왔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이 맞을 텐데, 어느새 저들에게 동조하여 반쯤은 장난을 치는 기분으로 보고 있었다.

    능력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그들의 전력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말이다.

    "믿음이 간다는 건가?"

    저것들이?

    추이펑의 눈에 어느새 서아영을 거꾸로 들어 올려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 이노무 지지배야! 상황을 봐가면서 까불어야지!"

    "뭐, 인마? 지금 내가 상황 보게 생겼어? 죽일 거다!"

    그 상황에서도 서아영은 어떻게든 이지혁을 깨물어라도 보겠답시고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것들이?

    "아, 놀래라, 이 시키야!"

    김다현은 자이언트가 후려친 손을 피해서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징징대고 있었다.

    "……."

    음, 그러니까… 내가 무의식적으로 저 인간들이 믿음이 간다고 판단했다, 이건데…….

    추이펑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은퇴할까?

    추이펑은 자신의 판단력에 초래된 장애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추이펑이 고민을 할 동안 김다현은 소리를 질렀다.

    "거, 일단 여기부터 어떻게 좀 해주시죠?"

    서아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하나 알아서 못해요?"

    "…어쩌라고, 내 화력이 조룬데."

    김다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능력자로서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빠르기만 할 뿐 화력 자체는 별다를 것이 없는 그로서는 이 거대한 몬스터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신경 거슬리게 잡고 있는 거야 삼 일 밤낮을 할 수 있겠지만, 결정타가 영 애매한 것이다.

    "남자가 쪽팔리게."

    "거기서 남자가 왜 나와!"

    "결정력이 있어야지!"

    "있거든! 있거든!"

    김다현이 분노에 차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며 추이펑이 조용히 물었다.

    "쟤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안 듣는 게 나으실 텐데요."

    "그래?"

    추이펑은 대답없는 통역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으면 어디 건방진 짓거리냐며 호통을 쳤겠지만, 지금은 그냥 그 말을 따르는게 옳을 것 같았다.

    아까부터 왼쪽 머리가 콕콕 쑤시는 게 심상치가 않다. 뇌출혈로 실려 가지 않으려면 마음을 다스려야지.

    "일단 구급차 좀 불러놔라."

    "부상자입니까?"

    "…일단 불러놔."

    "예."

    김다현의 징징거림에 서아영이 짜증을 확 부리더니, 이지혁에게 소리쳤다.

    "일단 놔봐요."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네!"

    "됐고!"

    "네이, 네이."

    이지혁은 손을 놓고 물러나며 혹시나 다시 서아영이 공격하지는 않는지 살폈다.

    하지만 서아영은 심호흡을 하더니, 자이언트를 바라보았다.

    여유 부릴 만큼 부렸으니, 이제 해결부터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흐읍!"

    그녀의 손에서 화염이 거칠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흠……."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화력은 좋다, 화력은.

    고구마 하나 넣어서 구우면 딱 좋겠는데 말이야.

    이지혁이 입맛을 다시거나 말거나 서아영은 신경 쓰지 않고 집중했다.

    웬만한 건물 크기로 피어올라 거칠게 일렁이던 화마가 서아영의 손을 향해 모여들었다.

    고오오오!

    화염이 일렁이는 소음이 울려 퍼지자 지켜보던 이들은 그 힘의 약동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이 진정한 플레임 위치인가?"

    강하다는 말은 들었다.

    그 작은 나라에서도 세계적인 강자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강하다는 것이야 알고야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랄까…….

    그들이 예상하던 강함의 범위를 뛰어넘어 버린 느낌이 아닌가.

    추이펑은 순간적으로 서아영의 힘과 중국의 능력자들의 힘을 비교했다.

    '잡을 수야 있겠지.'

    서아영 같은 존재가 세 명 있다 해도 사살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들이 내놓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거의 궤멸을 각오해야 한다.

    서아영 하나 잡겠다고 능력자들을 모조리 갈아넣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럼 못 잡는 거지.'

    잡을 수 있지만, 잡을 수 없다.

    이길 수는 있지만,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게 된다.

    게다가…….

    "한국에는 저런 능력자들이 얼마나 많은 거지?"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다.

    하는 짓이 한심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저 거대한 자이언트에게 겁 없이 달려들어 농락하고 있는 저놈도 보통의 능력자는 아니었다.

    웬만한 급의 능력자라면 그의 그림자조차 잡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서아영을 30초 만에 제압하여 거꾸로 들고 털어버린 이지혁이라는 자의 존재감이 너무나 어마무시했다.

    생각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서아영 하나를 잡기 위해서 중국 전체 능력자의 절반 정도는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을 거라는 분석이 나왔는데, 그런 서아영을 단 30초 만에 털어버리는 사람이라니!

    그럼 대체 전력 차가 얼마나 나는 건가.

    어느 정도의 전력을 투입해야 저 밉살스럽게 생긴 인간을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추이펑의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분명 저 인간은 자신의 전력을 모두 내보이지도 않았겠지.

    요즘 들어 미국이 한국에 매우 신사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그놈들은 벌써 이지혁에 대한 파악이 완전히 끝났을 것이다.

    겪어보았을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추이펑의 머릿속에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하는 혼란스러움이 찾아들었다.

    지금껏 제후국 수준이었던 나라가 대등, 아니, 그 이상의 전력을 보유했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이지혁이라는 인간 하나가 너무 위험하니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아니면 솔직하게 이지혁이 도와주지 않으면 앞으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테니, 저자세로 나가는 것이 옳아 보인다고?

    그 말을 하고도 추이펑의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을까?

    추이펑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서아영은 양손에 집중한 화력을 자이언트에게 퍼붓고 있었다.

    "차아아앗!"

    서아영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은 이제 화염의 색을 넘어 거의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핏빛처럼 붉은 불꽃이 작은 농구공 크기로 응축되어 자이언트에게로 날아든다.

    그 거대한 육체로 농구공 크기의 화염을 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자이언트는 결국 자신의 발로 날아드는 불꽃을 놓치고 말았다.

    화아아악!

    불꽃이 자이언트의 다리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폭발적으로 피어오른 불꽃이 자이언트의 다리 전체를 뒤덮었다.

    우오오오오!

    자이언트의 목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비명이 대지마저 진동시켰다.

    지진이라도 난 듯 우르르 떨리는 바닥을 느끼며 추이펑은 이를 악물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건물만 한 다리가 타오르며 자이언트가 바닥을 굴렀다.

    "와, 놀래라!"

    순간적으로 자이언트가 바닥을 구르자 한순간 허공에 떠버린 김다현이 허공을 박차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말을 하고 하라고요!"

    "너도 굴러볼래?"

    "죄송합니다."

    힘이 깡패다.

    김다현은 궁시렁거렸지만, 서아영에게 대들 만한 담량은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뭐가 이리 오래 걸려?"

    김다현이 뭔가 말을 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목소리에 적절하게 짜증을 싣는 것도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워낙 크잖습니까."

    "크긴 무슨! 애기구만!"

    "…눈은 있으시죠?"

    이지혁이 혀를 찼다.

    저게 뭐 커!

    자이언트에서 저 정도면 소인종이지! 아직 덜 큰 애기구만!

    아니, 애초에 종이 달라 보이니까 애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작은 편이지.

    "빨리 끝내라고! 니들끼리 처리하고 오라고 보냈더니 사고만 쳐서 사람 불러들이더니!"

    누가 불렀나?

    니가 설명도 안 하고 마음대로 데려다 놔놓고 지금 누굴 탓하는 거야!

    할 말은 너무도 많았지만!

    김다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인간하고 말다툼을 해서 끝이 좋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별수 없지. 내가 좀 도와주지."

    "…네?"

    김다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돕는다고?

    지금 돕는다고 했나?

    "음, 그 돕는다가 제가 생각하는 그 돕는다가 맞나요?"

    "응. 아마?"

    김다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공동 전선을!'

    서아영과 함께라면 이 상황을 어찌 넘길 수도…….

    근데 이 여자… 어디 갔지?

    순간 사라져 버린 서아영의 자취를 찾던 김다현이 어느새 이지혁의 등 뒤로 가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입을 쩌억 벌렸다.

    "시원해요?"

    "응응!"

    이지혁은 배부른 강아지 같은 얼굴로 갸르릉대고 있었다.

    "손에 열기를 머금어서 주무르면 시원할 거 같아서 연구했어요."

    "응. 이거 좋다."

    저 가증스러운 년!

    방금 전까지 이지혁을 씹어 먹을 기세더니, 지금 저게 뭐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굳이 도울 필요까지야 있겠어요?"

    서아영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는 도와달라더니."

    "방식이 다른 거죠, 방식이. 지금 하려는 거 하시려면 굳이 둘이나 할 필요는 없잖아요."

    "으응, 그거도 그렇지."

    "저런 잡 몹 하나 잡는 데 한 명이면 충분하죠."

    "응."

    이지혁이 서아영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쩌죠? 제가 나가서 싸워야 하면, 그사이에는 안마를 하기가 힘든데……."

    "어, 그러네?"

    이지혁의 눈이 김다현에게로 향했다.

    김다현은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더니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저, 저는!"

    "할 거 없지?"

    "제 동생이라도 데려올까요?"

    이지혁이 영혼 없는 눈으로 바라보자 김다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포츠 마사지라도 배워둘걸.

    "…제가 하겠습니다."

    "좋은 자세다."

    반쯤 타버린 다리를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키고 있는 자이언트를 보며 이지혁이 김다현에게로 손을 뻗었다.

    "얼른 처리해."

    "하아……."

    김다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건 정말 할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고.

    이지혁의 손에서 뻗어나간 촉수가 김다현의 육체를 감싼다. 그러고는 마력을 쑤셔 박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으!"

    김다현이 몸을 뒤틀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마력이 몸으로 파고드는 고통은 사람이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하아……."

    촉수가 빠져나가자 김다현의 입에서 깊은 심호흡이 흘러나왔다.

    "기분이 아주……."

    엿 같고 좋다.

    "으아아아아아!"

    김다현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신났네."

    서아영이 혀를 찼다.

    그녀도 몇 번이나 경험한 것이지만, 마력을 주입당했을 때는 아주 이상한 감각이 몸을 지배한다.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충동과 악의, 그리고 살의.

    눈앞의 모든 것을 증오하게 되는 적의.

    무엇이라도 부숴 버리고 싶은 파괴 본능.

    마치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내가 튀어나와 몸을 통제하는 것 같은, 아주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김다현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검은 탄환처럼 길게 꼬리를 만들어낸 김다현의 잔상이 자이언트의 명치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든다.

    콰아아앙!

    인간의 몸이 강철과도 같은 거인의 육체로 파고들며 마치 거대한 폭탄이라도 투하된 것 같은 묵직한 폭음이 울려 퍼진다.

    오오오오!

    자이언트의 입이 한껏 벌어지며 그의 육체가 허공으로 살짝 솟아오른다.

    신장이 20미터나 되는 그 거대한 육체가 허공으로 뜰 만큼의 어마어마한 충격력이 작용한 것이다.

    "으아아아아!"

    김다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이언트의 육체를 박차며 뒤로 튕기듯 떨어지더니, 다시 가속하여 허공에 떠 있는 자이언트어 얼굴을 걷어찼다.

    콰아아앙!

    거대한 괴물의 몸이 허공을 날아 산을 반쯤 부수고 파고든다.

    "후우우욱!"

    눈에 잔뜩 핏발이 선 김다현이 악귀와도 같은 형상으로 다시금 파묻혀 있는 자이언트에게로 날아들었다.

    쾅! 쾅! 쾅!

    치고, 치고, 또 친다!

    추이펑의 눈에는 마치 검은 말벌이 사람을 찌르고 또 찌르는 것처럼 보였다.

    김다현에게는 독침이 없지만, 대신 더욱 무서운 파괴력이 있었다.

    콰득!

    김다현의 발이 마침내 자이언트의 육체를 부수며 목을 찢어놓았다.

    "그마안!"

    이지혁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자 김다현이 흥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쯧."

    이지혁이 이성을 잃은 김다현을 보며 천천히 촉수를 풀어냈다.

    "아직 통제가 안 된다니까. 미쳤으면 맞아야지."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 * *

    시작은 간단했다.

    버프.

    예전에는 즐겨 썼지만 지금은 잠시 잊어버린 그 개념이 이지혁의 머리에서 부활하자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한계가 극명한 인간 능력자들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지금 이들은 분명히 강해지고 있지만, 확실히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파워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능력자들도 보통의 인간과 그리 다를 것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버프를 걸어줄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나약하던 베라프의 전사들도 축복과 버프를 아낌없이 받게 되자 이지혁이 이끄는 몬스터 대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지 않았던가.

    지금껏 지구로 넘어온 나약한 몬스터들 따위, 베라프에서 이지혁이 직접 끌고 다니던 마계의 마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런 마수들의 떼를 맞아서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싸울 수 있게 만들어준 힘의 원천.

    '방향이 달랐으니까.'

    사실 이지혁은 그런 쪽은 관심이 없었다.

    다른 이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으니까.

    강해져야 한다면 본인이 강해지고, 마수들이 죽어간다면 보충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버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을 수밖에.

    그러던 참에 버프라는 것을 떠올리고 나서는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이지혁은 입에 거품을 문 채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김다현을 보며 혀를 찼다.

    "내가 그렇지."

    버프는 얼어 죽을.

    디오레 1세가 버프를 걸면 신성 병사가 만들어지는데, 이지혁이 버프를 거니 언데드가 되게 생겼다.

    "아, 진짜 흑마력… 더럽게 귀찮네, 정말."

    베라프에 있을 때는 흑마력만큼 편한 게 없었다.

    대충 던져도 되고, 변환해서 써도 되고, 사람에게라면 대충 마나 자체만 밀어 넣어도 언데드로 변해 버리는 수준이니, 활용도가 극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공격 마법의 경우, 동일한 양의 백마력을 사용했을 때보다 파괴력이 몇 배나 강하게 나오니 이지혁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마력이었다.

    방어 마법의 경우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지혁에게 방어라는 건 전혀 필요 없는 개념이었으니까 뭐.

    그런데 상황이 이리되자 흑마력이라는 것이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버프를 건다고 해도 지속력이 떨어지고, 잘못 걸면 애가 미쳐 버리고…….

    적절한 양을 조절해서 걸어야 하는데, 그 적절한 양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엄청 신경을 써야 했다.

    게다가…….

    "크아아앗!"

    김다현의 주먹이 포탄처럼 뻗어져 온다.

    "실드."

    콰아아아아앙!

    이지혁의 실드와 김다현의 주먹이 충돌하며 폭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신경을 써서 건다고 해도 이 꼴이니…….

    이지혁은 뒤로 튕겨 나가며 혀를 찼다.

    너무 약하게 걸면 효과가 없고, 너무 강하게 걸면 사람이 미친다.

    그렇다고 해도 적절히 걸면 되느냐?

    적절히 걸어도 광포화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적의가 없는 쪽에는 달려들지 않으니 다행이기는 하다만…….

    "귀찮단 말이지."

    그렇다고 자신이 저리 만들어놓았는데 짜증난다고 때려죽일 수고 없는 노릇이고…….

    적절히 제압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귀찮음을 피하려다 보니 새로운 귀찮음이 생겼다.

    "하, 인생 참……."

    영원이 편히 쉴 시간이라는 건 오지 않는가!

    마음을 다잡은 이지혁이 손을 뻗어 촉수를 뿜어냈다.

    "크아아아아!"

    저항하는 김다현의 육체를 잡아끌고, 묶고, 억누른다.

    "크아! 으아아아앗!"

    바닥으로 강제로 짓눌리자 김다현이 피거품을 물며 발버둥을 쳤다.

    그나마 김다현은 나은 편이었다.

    이성이 날아가니까 속도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고, 속도가 활용되지 않는 김다현이야… 뭐, 별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박성찬 같은 애들은 그 단단한 육체가 더 단단해지다 보니 제압도 쉽지 않아진다. 힘은 또 얼마나 센지.

    "쯧……."

    몇 번 겪다 보면 방법이야 생기고 어떻게든 대처법이 나오겠지만, 당장이 귀찮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

    이지혁이 김다현을 짓누르고 그의 육체에 촉수를 틀어박았다.

    "끄윽……."

    그러고는 그의 몸을 휘도는 흑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김다현이 몸을 벌벌 떨어 댄다.

    마력을 모두 회수하고 촉수를 뽑아냈는데도 여전히 김다현은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서아영이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며 눈을 돌렸다.

    이지혁이 뭔가를 주입하면 평소보다 몇 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어찌 보면 기꺼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피하게 되는 것은 바로 저것 때문이다.

    마력이 빠져나가게 되면 강화되었던 육체가 부작용에 시달린다. 마력을 주입당할 때도 상상하기 힘들만큼 괴로운데, 빠져나갈 때는 그 몇 배의 고통이 찾아온다.

    서아영은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고, 이지혁은 이미 김다현에게서 눈을 뗀 채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자이언트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잘 먹겠습니다."

    포식의 시간이다.

    서아영은 촉수를 든 채 천천히 자이언트에게로 다가가는 이지혁을 보며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일까?

    서아영의 눈이 이지혁의 등을 쫓았다.

    * * *

    "이런 게 도움이 된다는 건가?"

    알파의 손에 들린 검은 구슬을 본 아르고라스가 미묘하게 얼굴근육을 뒤틀었다.

    "잘 모아왔군. 칭찬해 주지."

    "기쁘다고 해줄까? 감사하다고?"

    알파의 이죽거림에도 아르고라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 인간은 건방지기는 하지만 이용가치가 충분하다.

    지금도 시킨 일을 아주 잘해왔다. 생각 같아서는 상이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만약 본체라면 충분한 상을 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형태로는 그저 칭찬밖에 줄 것이 없었다.

    아니, 그것도 이제는 달라지겠지.

    알파가 가져온 구슬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르고라스의 얼굴이 움찔했다.

    그가 내준 아티팩트에는 흑마력의 원천이 되는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주 잘 모아오기는 했다만…….

    "모자란가?"

    원래는 더 모였어야 한다. 그가 예상한 것에 비해서 양이 작았다.

    "가장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 둘을 누군가가 재빠르게 처리해 버려서 말이야."

    "그인가……."

    아르고라스의 눈이 일그러졌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마왕이되, 마왕이 아닌 자.

    그리고 마왕이 아니되, 그 누구보다 마왕이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렸던 자.

    마계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 마침내 그 정점에 선 자.

    인계의 멸망의 좌이자, 마계의 아흔아홉 번째 마왕.

    "그 정도 방해는 예상했지."

    그자에게 이 세계를 지켜내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을 리는 없지만, 일단 자신의 영역에서 뭔가 날뛰는 것을 참아내는 타입도 아니었다.

    '영역이 넓군.'

    우선 그가 살고 있는 나라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과거 성향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그가 속한 나라는 자신의 것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지만 타국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은 그가 잡고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 아르고라스의 생각 이상으로 방대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상관없지."

    이제는 말이야.

    지금까지라면 몰라도 이제부터는 그를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과거의 영광뿐.

    손짓 하나로 대륙의 지형을 뒤틀고 하늘에 구멍을 뚫어버리던 절대적인 마도사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남아 있는 것은 과거 그의 편린을 지닌 껍데기뿐.

    마왕은 인격이 아니라 힘이 규정하는 것이다.

    "후후."

    지금의 그는 그저 인간 이지혁일 뿐이다.

    물론 그저 과거에 가진 힘의 잔영을 지닌 인간 이지혁이라도 아르고라스에게는 위협적이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아니지."

    아르고라스가 손에 든 구슬을 움켜쥐어 터뜨렸다.

    스스스.

    곧 희끗하고 검은 무언가가 아르고라스의 손 주위를 맴돌았다.

    "흐읍……."

    짧은 기합성과 함께 아르고라스가 음기를 집어삼켰다.

    수천, 수만을 넘어 수십만에 달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들이 아르고라스의 육체를 가득 메웠다.

    악마에게는 최상급 마약 이상의 쾌락을 주는 원천이자 에너지의 근원. 아르고라스는 새카만 혀를 날름거리며 그 여운을 음미했다.

    "자……."

    빨아들인 기운들을 마나로 변환시킨 아르고라스가 눈앞에 있는 작은 게이트에 손을 뻗었다.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이 정도면…….

    "흐읍!"

    아르고라스의 우수에서 뻗어져 나간 마나가 스며들자 게이트가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농구공만 했던 게이트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사람 하나가 들락거릴 만한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끝난 건가?"

    알파의 물음에 아르고라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겨우 오갈 정도는 되겠군. 어느 분이 오시느냐의 문제지."

    "흐음……."

    알파가 턱을 긁었다.

    뭔 짓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딱히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그 순간, 게이트가 뒤틀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르고라스는 그 광경을 보며 서둘러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어라, 미천한 인간아! 위대하고 위대한 존재께서 이곳에 오신다."

    "미안하지만, 내 무릎은 그런 데 꿇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알파가 어깨를 으쓱하자 아르고라스는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알파는 그 눈빛을 가볍게 흘려냈다.

    아르고라스는 곧 알파에게서 신경을 껐다.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우우우웅.

    압력에 찌부러진 듯 제멋대로 뒤틀리던 게이트가 화악 열리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습한 기운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알파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악마라는 존재가 이미 있으니 믿지 않을 수는 없지만, 진짜로 지옥일지도 모르는 곳이 지구와 연결된다는 것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현실과 환상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

    "음?"

    순간, 알파의 눈에 희끗한 형상이 들어왔다.

    게이트 저 멀리서 무언가 다가오는 느낌,

    "후우……."

    무저갱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음성과 함께 게이트 안에서 무언가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산양의 그것과도 같은 굽은 뿔.

    검다기보다는 검붉은 빛을 띤 뿔이 보이더니, 이내 파충류 같은 형태의 얼굴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왔다.

    세로로 갈라진 샛노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알파는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몸을 떨었다.

    악마.

    그래, 악마다.

    다른 생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언가를 느끼며 알파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악마들과 손을 잡는다는 것이 정말 잘하는 짓일까?

    스스로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마침내 악마가 게이트를 빠져나와 그들의 앞에 섰다.

    파충류 같은 얼굴과 그 위로 솟아난 세 개의 뿔.

    그리고 인간의 형태를 한 우람한 상체와 네 게의 다리.

    아르고라스가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조아렸다.

    "위대하신 여든두 번째 마왕을 뵙습니다."

    마왕이라 불린 이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입김이 마치 뿜어낸 담배 연기처럼 짙게 허공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곳이 그가 있는 곳인가?"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여."

    여든두 번째 마왕.

    벨트레체는 쇠를 긁는 듯 거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인간의 심혼을 뒤흔드는 그의 음성이 알파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 이지혁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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