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0화 (30/118)
  • [■] 아니, 왜 도망가고 그래요? [■]

    ─────

    "꾸엑!"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김명운이 대포알처럼 튕겨 나가 벽에 틀어박혔다.

    쾅!

    사람이 벽과 닿아서 나면 안 될 소리가 울리자 최정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성질이 났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이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최정훈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이지혁의 시선이 최정훈에게로 향했다.

    최정훈은 분노와 울분을 담아 잡아먹을 듯 소리쳤다.

    "벽 조심하란 말입니다! 벽!"

    야, 이 미친놈아! 사람을 걱정해야지, 사람을!

    다른 능력자들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건가! 사람이 저리 날아가서 벽에 박았는데, 한다는 말이 뭐?

    저 사람도 처음에는 안 저랬던 것 같은데.

    "새로 올린 건물인데! 금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건물에 피해 안 가게 조심해서 패란 말입니다!"

    "으응……."

    최정훈의 박력에 이지혁마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건물 값은 땅 파서 나오는 줄 알아요! 저거 수리 한 번 하려면 올려야 할 서류가 몇 갠데!"

    당장에라도 입에서 불을 뿜을 것 같은 최정훈의 외침에 이지혁이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그 순간, 아펠드리체가 움찔했다.

    사과했다?

    저 이지혁이?

    마법 실험하다가 실수로 황제궁을 날려놓고도 그러게 왜 거기에 있었냐고 소리치던 그 이지혁이?

    아펠드리체가 묘한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어떤 업적을 쌓아 올렸는지 알고는 있을까?

    이건 정말 인류가 아니라 차원에 남을 업적이었다.

    "들었지?"

    이지혁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김명운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고 끌어 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비를 걸었으니 받아줄게."

    박성찬이 혀를 찼다.

    니가 이유를 모르면 안 되지!

    "끙……."

    이지혁이 우수를 휘젓자 시커먼 게이트가 우측에 나타났다.

    "으……."

    동시에 그 게이트를 보고 식은땀을 흘리는 이들이 있었다.

    "으쌰."

    이지혁이 멱살을 잡은 김명운을 끌어당겨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아아아아……."

    게이트로 밀려 들어간 김명운의 비명 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어느새 끊겼다.

    김다현이 몸을 살짝 떨고는 물었다.

    "저번… 거기로 간 겁니까?"

    "응?"

    "호, 혼자 가면 죽을 텐데?"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 아냐."

    "휴, 그럼 죽지는 않겠네요."

    "응. 죽이지는 않을 거야."

    "네?"

    이지혁이 게이트 위로 한 발을 걸치더니, 화사하게 웃었다.

    "다녀올게."

    "어?"

    이지혁이 게이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이제 눈앞에는 검은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게이트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왜 간 걸까?"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의문은 의문이 아니었다.

    "패러."

    "때리러."

    "죽이러."

    박성찬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죽이지는 않는다고 했잖아."

    "입만 열면 거짓부렁인데!"

    "하기야."

    게이트 안에서 벌어질 일이 너무도 선했다.

    특히나 직접 당해본 적이 있는 스핏 파이어 윤혁규는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는지 아까부터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크흠……."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 역시 그리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 역시도 짧지만 굵게 당한 적이 있지 않는가.

    회의실 안이 천천히 조용해졌다.

    원래 직접 보는 것보다 상상하는 것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대체 저 안에서 김명운이 무슨 꼴을 당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입을 열기가 무척이나 버거워진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상들이 각자의 머리에서 파노라마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아니겠지."

    아펠드리체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실소했다.

    '인간이란 재미있는 생물이라니까.'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상상하고, 스스로 두려워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때, 게이트가 우웅- 진동하더니, 이지혁의 얼굴이 빼꼼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래 안 지났지?"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금방이었습니다."

    "응."

    이지혁이 밖으로 몸을 완전히 빼내고는 다시 게이트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김명운을 잡아 끄집어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김명운에게로 집중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김명운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멀쩡한데?"

    박성찬이 되레 놀라 말했다.

    "반은 죽어 나올 줄 알았는데……."

    "일단 장애는 확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아 돌아오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박성찬이 김명운의 풀려 있는 동공을 보고는 몸을 떨었다.

    잠깐만!

    박성찬이 천천히 김명운에게 다가가서 얼굴 앞에다 손을 흔들었다.

    "……."

    "반응이 없는데?"

    박성찬이 등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김명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괜찮냐, 너?"

    "헤?"

    "……."

    박성찬이 매우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지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합니까?"

    "아마도?"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글쎄요."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그게 할 말이냐! 뭘 그리 대단하게 잘못했다고!

    "좀 심하신……."

    박성찬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지혁이 그런 박성찬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걱정 말아요. 주변에도 영향이 갈까 봐 일부러 데려가서 한 거니, 얼마 안 지나서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진짜요?"

    "언제 제가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봤다고 말하고 싶은데,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억울할 데가!

    이지혁은 풀린 동공으로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김명운을 보며 혀를 찼다.

    '이거, 생각보다 부작용이 심한데?'

    딱히 괴롭히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인간이 흑마력을 주입당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알고 싶어서 조금 밀어 넣어보았을 뿐.

    뭐, 부작용이야 좀 있기야 하지.

    다발성 장기 손상이라든가, 몸이 뒤틀린다거나, 뼈가 제멋대로 부러진다든가 하는 것 정도는 약과라고 할 수 있고, 진짜로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문제인데…….

    '아주 맛이 가진 않았네.'

    흑마력은 부정(不正)의 정화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음울함이 모여 있는 것이 바로 흑마력이고, 그 흑마력을 주입 받은 인간의 정신은 어둠으로, 어둠으로 침체되고 만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흑마력을 제거했음에도 무너진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폭력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점인데…….

    "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나?

    이지혁은 실험 결과를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지혁 씨?"

    "네?"

    "시작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 내가 불렀지."

    이지혁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음, 일단 미국에서 요청이 왔데요."

    "……."

    "훈련을 시켜 달라는데, 제 생각에는 제가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가르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

    "그러니 여러분을 훈련시킬게요. 아시겠죠?"

    모두가 빙긋 웃으며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하……."

    한국어를 번역해야 할 줄이야.

    최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해맑게 웃고 있는 이지혁의 어깨를 두드려 자리로 돌려보내고는 자세를 잡았다.

    "미국에서 자국 능력자들의 교육을 요청해 왔습니다. NDF의 전력 강화를 보고는 이지혁 씨에게 뭔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으……."

    박성찬이 치를 떨었다.

    그 비밀이 뭔지는 알고 해달라는 거냐, 이 미친놈들아!

    박성찬은 그 부탁한 놈을 끌고 와 이지혁의 게이트에다 밀어 처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가 안 겪어보니 그딴 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는 거지!

    게이트 안을 겪어본 이들은 다들 같은 심정인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요? 한다는 겁니까? 그게 저희랑 무슨 상관이죠?"

    "이지혁 씨의 뜻은 여러분이 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상위 능력자들이 상위 능력자를 가르치고, 상위 능력자들이 중위 능력자를 가르치는, 피라미드식 시스템으로 전체적인 전력을 업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지혁 씨라도 전 세계 모든 능력자들을 일일이 가르칠 수는 없잖습니까?"

    그것도 피해 없이 말이야.

    대충 게이트 안으로 때려 박으면 될 것 같지만,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김다현이 상황을 정리했다.

    "음, 그러니까, 미국 놈들이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네."

    "우리가 가르쳐야 한다?"

    "그런가 봅니다."

    "…뭐, 우리랑 그 양반들이랑 뭐가 그리 큰 차이가 난다고 우리가 뭘 가르치겠어?"

    그것도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능력자들을 말이야.

    그 유명한 '스나이퍼'라든가, '레드 피버' 같은 놈들이 우글우글거리는 미국 능력자들을 가르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래서 이지혁 씨가 여러분을 모은 거죠."

    뭔가 불안함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한 것을 느낀 김다현이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설마?

    아니겠지.

    "지금 그럴 능력이 없다면, 강해지면 되는 거죠."

    이지혁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그러니까…….

    강해지면 된다는 거냐?

    그 말을 듣고 내가 무슨 꼴을 당했더라?

    "서, 설마, 또!"

    이지혁의 게이트를 겪어본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지혁에게서 우르르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 되지."

    이지혁이 그들을 막으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서아영이 문밖으로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어라?"

    설마 서아영이 도망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이지혁이 허탈하게 웃더니, 손끝에서 촉수를 뽑아 문밖을 향해 쏘아냈다.

    "꺄아아악!"

    서아영이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왔다.

    촉수로 서아영을 대롱대롱 거꾸로 매단 이지혁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빙긋 웃었다.

    "아니, 왜 도망가고 그래요?"

    "야, 이 미친 새끼야! 또 거기 넣으려고 그러지? 안 가! 안 가! 절대로 안 갈 거야!"

    "아니, 저번에는 내가 실수를 해서 그런 거고, 이번에는 시간 계산도 잘했다니까?"

    "안 간다고오오오오!"

    이지혁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귀를 후비적대더니, 손을 훅 불고는 휘저어 게이트를 열었다.

    "싫어어어어어어!"

    "아니, 이번에는 다른 거니까, 저번 거기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요."

    "정말?"

    "거긴 너무 편했지."

    "이 개……."

    서아영이 뭔가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촉수가 휙 움직이더니 그녀를 게이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쌍욕이 날아들었지만, 이지혁의 귀는 자체적으로 욕설 필터링이 존재했다.

    그런 건 안 들려.

    "이, 이지혁 씨, 다시 한 번 생각을……."

    "음, 시간이 아까우니까……."

    이지혁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이지혁의 촉수가 뻗어 나가 요원들을 하나하나 잡아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차라리 죽여, 이 새끼야!"

    아는 이들은 알기에 공포에 떨었고, 모르는 이들은 몰라서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 차곡차곡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은 이지혁이 남아 있는 이들을 보았다.

    최정훈, 그리고 정해민, 도가윤, 아펠드리체.

    …마지막으로 김재범.

    "나, 나도 가야 돼?"

    정해민의 말에 이지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해민의 목덜미를 잡고 게이트 안으로 던져 넣었다.

    뭔가 '으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환청이겠지.

    응. 이제 그럼…….

    "너도."

    도가윤은 두말없이 안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당신도."

    "저, 저도요?"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왜!"

    나는 일반인이란 말이다! 이 새끼야!

    "고통을 함께해야 진정한 팀인 법이죠."

    "사표 내겠습니다."

    "다녀와서 내시든가."

    이지혁이 달랑 들어 올려 안으로 던져 넣자 최정훈이 고함을 빽빽 질러 댔다.

    "으아아아아! 난 사무직이란 말이다아아아!"

    이지혁이 키득키득대더니 김재범을 보고 말했다.

    "잘 지켜요."

    "네? 네!"

    "가자."

    아펠드리체와 이지혁이 안으로 몸을 던지자 게이트가 천천히 소멸되었다.

    "…이게 뭔 일이래?"

    텅 빈 회의실에 홀로 남은 김재범만이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허……."

    김재범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오는 연락을 어떻게 혼자 감당해야 하나.

    그래도 끌려가는 것보다야 뭐…….

    김재범이 반쯤 웃고, 반쯤은 울상이 된 얼굴로 사무실로 걸어갔다.

    * * *

    "안 계십니다!"

    "없습니다."

    "저도 모른다니까요!"

    김재범은 사방에서 울려 대는 전화기와 휴대폰을 번갈아 받으며 부재중을 외쳤다.

    "아! 없다고요! 지원 갈 사람이 없다니까요!"

    이지혁 등이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지도 이미 삼 일째.

    이지혁을 찾아대는 전화가 불나게 걸려오고 있었다.

    "아니, 오면 제가 말씀드린다고 했잖습니까! 하루에 다섯 번씩 전화하지 마시라고요! 말귀를……. 예? 저요? 죄송합니다. 예,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요. 죄송합니다, 차관님."

    김재범은 울고 싶었다.

    없는 사람을 어디서 찾아내란 말인가. 연락할 방법도 없고, 연락 한다고 올 사람도 아니다.

    애초에 컨트롤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기들도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자꾸 연락하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그냥 화풀이로밖에 볼 수 없었다.

    "죽겠네, 진짜."

    김재범은 한숨을 푹푹 쉬며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인데도…….

    이상하게 뭔가 쓸쓸하다.

    혼자 있으니 자꾸 한기도 느껴지는 것 같고.

    이렇게나 빈자리가 컸나?

    사무실에 이지혁 등이 다 있을 때는 하루라도 좋으니 제발 저 인간들 얼굴 좀 안 봤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계속 한기가 드는 게…….

    몸이 안 좋은가?

    "으응?"

    아니, 진짜 추운가?

    정말 한기가 드는…….

    "으아아! 뭐야!"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한 김재범이 비명을 질렀다.

    저 여자 뭐야! 언제 들어왔어!

    아니, 문 앞은 오식이가 지키고 있을 텐데?

    저번에 외교부 장관이 왔다 간 이후로 잡상인 들어온다고 이지혁 씨가 분명히 오식이보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라고 했단 말이다!

    그런데 여기 들어왔다는 것은 오식이를 제압할 정도의 능력자거나, 아니면…….

    그때, 김재범의 눈에 오식이가 여자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는 모습이 들어왔다.

    "……."

    김재범이 영문을 몰라 사태를 파악하고 있을 때, 여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지혁 씨 안 왔어요?"

    "응?"

    이지혁 씨?

    "어?"

    김재범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너 혹시 다현 씨 동생 아니니?"

    끄덕.

    김재범이 멍한 눈으로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그래, 쟤 김다현 씨 동생이었지.

    "오빠 찾아왔니? 아직 안 왔는데?"

    도리도리.

    김다솜이 고개를 젓자 김재범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쟤는 뭔 정보를 안 주… 아, 이지혁?

    이지혁 안 왔냐고 물었지?

    "지혁 씨도 안 왔는데?"

    김다솜이 자신의 발에서 머리를 부비고 있는 오식이를 슬쩍 발로 밀어내며 물었다.

    "언제 와요?"

    "그야… 나도 잘 모르지. 그 사람이 뭐 남한테 설명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잖아."

    시키기만 시키지.

    일방통행 같은 사람.

    "……."

    김다솜은 뚱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둘러보더니, 한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응?

    쟤 뭐하는 거지?

    이지혁의 자리에 도착한 김다솜이 가만히 책상을 내려다보더니, 개판 오 분 전인 책상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쟤 이지혁한테 마음이 있나?

    김재범은 순간 이지혁이 부러워졌다.

    저리 이쁜 애가 찾아오는 것도 부러워 죽겠는데, 저리 마음씨까지 곱다니!

    저런 애가 왜 이지…….

    김다솜이 하는 짓을 보고 있던 김재범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얘야, 너 뭐하는 거니?

    쓰레기를 남의 책상으로 넘기면 안 되지.

    그리고 너 지금 청소를 하는 거니, 조사를 하는 거니?

    그 서류 한 장, 한 장 왜 다 읽고 있니? 응?

    컴퓨터 켜지 마!

    그거… 니 거 아니잖아!

    "헐……."

    말려야 하는가?

    다현 씨, 대체 동생을 어떻게 키운 겁니까!

    그리고 그 동생이 지금 이지혁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당신, 알고는 있는 거야?

    김다현이 들었다면 '알고 있다'를 외치며 어딘가로 달려갈 만한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김다현은 지금 여기에 없었다.

    대충 책상을 치운 김다솜이 어디선가 찾아온 걸레로 닦더니, 다시 입구로 가 박스를 들고 왔다.

    저 박스는 또 뭔가 하는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김다솜이 안에서 이런저런 물품을 꺼내더니, 이지혁의 책상을 꾸미기 시작했다.

    "……."

    그냥 저 행동들만 보면 참 뭐랄까…….

    가슴이 따뜻해지는 광경이어야 하는데, 왜 자꾸 소름이 돋는가.

    첫 번째 서랍에 빈틈없이 과자까지 채워 넣은 김다솜이 뿌듯한 얼굴로 이지혁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여성스럽게 꾸미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단정하게 꾸미면서도 은근 그녀의 취향을 반영한, 완벽한 세팅이었다.

    "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김다솜이 자신의 다리에 달라붙은 오식이를 가볍게 뻥, 걷어찼다.

    오식이가 허공을 날아 바닥에 떨어지더니, 헥헥대며 다시 김다솜에게로 붙는다.

    '쟤는 또 왜 저러냐…….'

    오히려 이지혁보다 더 주인으로 모시는 느낌이었다. 동물은 서열 관계에 민감하다더니…….

    "그럼……."

    "으응?"

    "여기……."

    김다솜이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메모지를 김재범에게 내밀었다.

    "오면 연락주세요. 꼭이요."

    "그래……."

    김다솜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몸을 돌려 총총 걸어 나갔다.

    김재범은 끝도 없이 울리고 있는 전화벨을 배경음 삼아 그 모습을 보았다.

    '이쁘긴 이쁜데…….'

    이쁘기만 하다, 이쁘기만.

    '가만 보면 그 양반 주변에도 정상적인 여자가 잘 없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가.

    이지혁의 주변에도 예쁜 여자가 넘쳐 나지만, 가만히 보면 그리 좋을 것만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부럽다."

    김재범은 눈물을 삼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다들 뭐하고 있으려나?"

    힘들까?

    많이?

    * * *

    "으아아아아아아!"

    박성찬이 고함을 지르며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이 개새끼야아!"

    눈앞에서 새까맣게 밀려오는 작은 새 같은 것들이 박성찬의 주먹에 맞아 우수수 떨어진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것은 마치 날개 달린 거미처럼 생긴 생명체들이었다.

    욕을 미친 듯이 뿜어내면서 박성찬은 정신없이 팔을 휘둘렀다.

    이 끔찍한 것들은 몸이 퍽퍽, 터져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박성찬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박성찬이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

    얼마 가지 않아 박성찬의 몸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거미들이 독니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박성찬이 고함을 지르며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콘크리트 이상의 강도를 자랑하는 육체임에도 거미들의 독니는 너무도 쉽게 피부를 꿰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제기랄!"

    박성찬이 몸에 달라붙은 거미들을 필사적으로 후려치고 떼어냈지만, 산처럼 쌓여 밀려오는 거미들을 모두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끄아아아아!"

    이내 거미의 독이 육체를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끅… 끄윽……."

    박성찬의 육체가 경련한다.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육체가 덜덜 경련을 일으키고, 핏줄이 피부 밖으로 튀어오를 듯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죽는…….'

    그때, 박성찬의 눈앞에 씨익 웃고 있는 이지혁의 얼굴이 나타났다.

    "너무 일찍 당했는데?"

    "……."

    이지혁이 손을 휘젓자 거미들이 필사적으로 물러나 저 멀리로 우르르 몰려갔다.

    "끄으으……."

    "독이 잘 들어갔군. 흠……."

    이지혁이 박성찬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고는 싱긋 웃었다.

    "아파요?"

    혈관이 조여오는 느낌에 진저리치던 박성찬의 눈이 불을 뿜었다.

    머리만 움직일 수 있다면 눈앞에 있는 이 악마 새끼의 목을 물어뜯어 버릴 텐데!

    정말 이 새끼 목에 이를 박아 넣을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기분이었다.

    "어디 볼까?"

    이지혁이 박성찬의 목을 움켜잡았다.

    손간, 목으로 무언가가 스며드는 느낌이 들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육체에 격통이 밀려왔다.

    "끄으, 끄으……."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몸이 알아서 끅끅대는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대체 내 몸에 뭘 하는 것인가!

    "흐음……."

    이지혁이 다시 손을 떼더니, 미묘한 표정으로 박성찬을 바라보았다.

    "될 것도 같고 말이야."

    "……."

    "자, 일어나야죠? 언제까지 놀려고?"

    이지혁의 박성찬의 머리에 손을 대더니, 육체에 가득 들어찬 독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뭔가 빨려 나가는 느낌에 전율하던 박성찬은 몸이 움직여지는 것을 깨닫자마자 벼락같이 몸을 돌리며 이지혁에게로 달려들었다.

    "이 개새끼야아아!"

    박성찬의 주먹이 이지혁의 머리를 날려 버리겠다는 기세로 휘둘러졌다.

    "워워."

    이지혁이 날아드는 팔을 팔꿈치로 튕겨내고는 박성찬의 턱을 그대로 후려갈겼다.

    "컥!"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박성찬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 되죠, 안 돼."

    "이!"

    박성찬이 비틀거리는 몸 그대로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이지혁은 달려드는 박성찬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 날려 버리고는 혀를 차며 걸어갔다.

    이지혁이 바닥에 쓰러진 박성찬의 목을 발로 밟으며 말했다.

    "도와주고 있는 건데, 이를 드러내면 안 되는 거예요."

    "…차라리 죽여, 이 개자식아."

    "그럼 지금까지 한 게 아깝잖아요.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요. 이제 다시 오니까."

    "으으……."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저 멀리서 다시금 윙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버텨보라고요."

    그 말을 남기고 이지혁의 모습이 퍽, 꺼지듯 사라졌다.

    "…썩을."

    박성찬이 자신에게로 몰려오는 거미 떼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새끼는 악마가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일주일이 넘도록 사람을 이리 몰아붙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드득!

    꽉 쥐어진 박성찬의 주먹이 동굴 벽을 후려쳤다.

    우르르릉!

    주먹이 닿은 곳이 움푹 파이듯 터지며 금방이라도 동굴이 무너질 듯한 공명성이 쩌렁쩌렁 울린다.

    '강해지긴 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해지고는 있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 박성찬이 달려드는 거미 떼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강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는 싫다. 끔찍하다.

    "난 거미가 싫단 말이다! 이 개자식아아아!"

    이지혁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낄낄댔다.

    "재밌나 봐요?"

    아펠드리체의 말에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남의 고통은 언제나 나의 행복인 법이지."

    "신경 엄청 써주고 있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여전하군요."

    "신경?"

    "딱 죽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느라 심력 소모가 엄청나잖아요? 제가 잘못 본 건가요?"

    네가 잘못 봤다고 말할 수 있겠지. 네가 드래곤만 아니라면 말이야.

    이지혁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아펠드리체를 외면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오래 걸릴 텐데요."

    "알아."

    "더 쉽고 빠른 방법은 많을 텐데요."

    "응, 알아."

    "그런데 왜 굳이 이런 방식을?"

    이지혁이 머리를 긁더니 손을 내저었다.

    "생각하는 게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둬."

    "그러죠."

    아펠드리체가 부드럽게 웃었다.

    "쯧."

    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미소가 영 거슬린다.

    효율이 다가 아니다.

    그는 이제 인간이니까.

    "흑마력에 찌든 머리나 잘 정리해 줘."

    "맡겨주세요. 이런 정도라면 저는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말이죠."

    "음?"

    "대가는 없나요?"

    "대가?"

    이지혁의 눈이 멍해졌다.

    대가라, 대가…….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일을 시키면 언제나 대가를 줘야 한다더군요. 아닌가요?"

    "…그렇지."

    이지혁이 뚱하게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뭔데?"

    "간단한 거예요. 아주 간단한 거."

    아펠드리체의 미소가 득의양양해 보였다.

    * * *

    아펠드리체가 천천히 이지혁에게로 다가왔다.

    "뭐! 뭐!"

    불안함을 느낀 이지혁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인간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하더군요."

    "…여기 와서 인간 처음 봤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줄래?"

    "여기 와서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베라프의 인간과 이곳의 인간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라서요."

    그건 그렇지.

    그래서 이지혁이 결국 마지막까지 베라프의 인간에게는 정을 붙이지 못한 것도 있으니까.

    "베라프의 인간은 맹목적이죠. 하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자유로워요. 묶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죠."

    "너희의 그 썩을 신들이 막아놓은 결과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호오, 예전이라면 신성모독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여긴 그분이 없잖아요."

    "썩을 라트렐?"

    "불경한 말이네요. 하지만 확실히 당신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네요. 인간의 과학이라는 것은 당신 말대로 놀라웠어요. 허풍인 줄 알았는데."

    "뭐, 이 도마뱀아?"

    아펠드리체는 쿡쿡, 웃더니 이지혁에게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하던 이야기 마저 해도 되나요?"

    "으응?"

    뭐야? 얘 왜 이래?

    이지혁이 주춤 뒤로 물러나자 아펠드리체가 다시 한 번 이지혁에게로 다가왔다.

    "뭐, 뭐! 왜!"

    "인간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내가 그걸 왜 너한테 해줘야 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이 내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니까."

    "끙,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당신은 내게 애정 표현을 할 정도로 충분히 날 좋아하니까?"

    "어디서 개수작이야!"

    도마뱀 따위가 인간을 넘보다니!

    "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했지! 당연히 했지!

    내가 충분히 널 좋아하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넌 아직도 내가 가장 죽여 버리고 싶은 셋 중의 하나거든? 이해 못하나?"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군요. 증오와 애정은 반비례하지 않아요. 당신은 누구보다 날 증오하지만, 또한 날 좋아하기도 하죠."

    "그게 뭔 개소리야?"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잘 모른다고 하더니, 그 말도 맞네요."

    "너 그런 건 어디서 듣고 다니는 거냐? 만날 게임만 하면서!"

    "제가 누군가요, 지혁 씨?"

    "도마뱀?"

    아펠드리체의 어깨가 축 처진다.

    "로드 아펠드리체라고 해주시죠!"

    "니가 로드 아니라며?"

    "아, 그렇지?"

    이지혁이 뱁새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얘가 인간형으로 줄곧 있더니, 머리도 너프되었나?

    "아무래도 좋아요. 그럼 두 번째 이유는 없던 것이라 치고, 첫 번째 이유만으로도 가능하겠죠?"

    "물론 가능하지 않다."

    이지혁은 단호했다.

    "가벼운 일이죠, 아주 가벼운."

    "가볍지 않거든?"

    아펠드리체가 쿡쿡, 웃었다.

    "왜 그래요, 처음 하는 사람처럼. 내가 다 아는데."

    "처음이 중요한 게 아니야."

    "이종 간에도 자주 하지 않았던가?"

    "아니거든?"

    아펠드리체는 쿡쿡, 웃더니 말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는 건가요?"

    "당연하지!"

    "음, 조금 뭐랄까… 상처 받은 기분?"

    "드래곤의 강철 같은 멘탈이 이 정도로 흔들릴 리가 있나?"

    "그만큼 상처가 크다는 거겠죠?"

    "…하, 고놈의 주둥아리."

    "입의 다른 말이죠. 관심 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할 줄도 아네요?"

    "아오!"

    이지혁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아펠드리체가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농담이니 거기까지만요. 흑마력이 어디까지 침범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데요."

    "내가 잠들면 매번 가지고 노는 것 아니었어?"

    "그럼 깨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못했어요."

    "흐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아, 이 일이 끝나면 해주지."

    "미리 해도 괜찮은데요?"

    "일이 끝나면 해주지."

    "그러시다면."

    아펠드리체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지혁이 코웃음을 치며 먼저 걸어가자, 아펠드리체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눈이 이지혁의 등에 묻고 있었다.

    두려운 건 아니죠?

    당신.

    * * *

    "아아아악!"

    서아영이 비명을 마구 질러 댔다.

    "죽여 버릴 거야, 진짜!"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슬라임 같은 생물을 보며 치를 떨었다.

    젤리처럼 흐물거리는 육체가 과격하게 움직이며 서아영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양손에서 뿜어진 화염이 슬라임을 뒤덮는다. 슬라임의 육체가 요동치더니, 녹색 빛의 물줄기를 마구 뿜어냈다.

    "으아아아!"

    아름다운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린 서야영이 연신 욕을 뱉어내며 불꽃을 날려 댔다.

    "꺼지라고! 꺼져어어!"

    화염이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쳤지만, 슬라임이 내뿜은 물줄기에 닿을 때마다 불꽃은 확연히 약해졌다.

    서아영은 이를 악물고 불꽃을 계속 뿜어냈다. 이내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이지혀어어어억!"

    독기에 찬 서아영의 고함이 퍼져 나간다.

    "응?"

    그리고 이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서아영의 시선이 획 돌아갔다.

    핏발이 선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이지혁은 빙긋 웃었다.

    "돌아볼 여유가 있나 보네?"

    "으아아아아! 너어어어!"

    "귀 안 먹었다."

    서아영이 당장에라도 씹어 먹을 듯한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시선이 분산되어 화력이 약해지자마자 슬라임이 뿜어낸 물줄기가 화염을 집어삼키고는 그대로 서아영을 휩쓸었다.

    "꺄아아아악!"

    강력한 수압의 힘에 서아영이 트럭에라도 치인 사람처럼 부웅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지면에 부딪치며 한 번 튀어 오른 서아영이 다시금 바닥에 떨어졌다.

    슬라임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본 서아영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든다.

    "훠이."

    하지만 이지혁이 손을 한 번 휘젓는 것만으로 슬라임은 꿈틀대며 뒤로 물러났다.

    "으……."

    서아영이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었지만, 그녀의 몸은 의지를 거부하고 여전히 그녀를 바닥에 널브려 놓았다.

    "꺼…져."

    "흐음……."

    이지혁이 서아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댔다.

    "어디 보자……."

    "너……."

    흑마력이 머리를 통해 파고들자 서아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통을 참아내는 듯 질끈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끄윽."

    서아영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지만, 이지혁은 그녀의 머리에 흑마력을 쑤셔 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인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확인한 이지혁이 밀어 넣은 흑마력을 뽑아냈다.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나약하군.'

    그나마 박성찬이 나았다. 서아영이 받아들이는 흑마력은 무척이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해는 한다.

    아무리 능력자라고는 해도 보통의 인간이 흑마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지혁조차 무한 재생되는 육체를 가지지 않았다면, 흑마력을 육체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흑마법사는 계약 대상으로부터 마나를 끌어들여 쓰는 수준이니까.

    "쯧."

    이지혁이 서아영의 육체에 머문 흑마력을 모조리 빨아들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래 걸리겠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이지혁은 암담함에 눈을 찌푸리고는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최정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이지혁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막아낼 수는 없다.

    아니, 가능이야 할지도 모르지.

    죽어라 이동하면서 막고, 또 막고, 또 막다 보면 결국에는 막아낼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이 열이 아니고, 백이 아니고, 천이 아닌 이상 모든 곳을 동시에 막아낼 수는 없다.

    이지혁이 제때 도착하지 못한 곳은 무너지게 된다. 그게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결국에는 이지혁이 막아내느냐와 관계없이 세계는 파괴되어 갈 것이고, 무너지고 말 것이다.

    "끙……."

    주변만 지킨다?

    그건 불가능한 소리다.

    사람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을 지켜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들도 지켜내야 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지혁 혼자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지혁이 도착할 때까지 막아내 줄 이들이 필요하다.

    "이리 보니 디오레 1세도 참 대단한 인간이었군."

    지금의 침공 따위 이지혁이 베라프에서 이끌었던 몬스터 군단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디오레 1세는 그 엄청난 침공이 이어지는 순간에도 병력을 끌어모으고 집결시켜 이지혁에게 대항했다. 지금의 이지혁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베라프 인간들도 대단했네."

    따져 보면 말이다.

    그때, 서아영이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독기에 찬 서아영의 눈빛이 이지혁에게 향했다.

    인간의 반응이란 항상 이렇게 동일하다니까.

    이지혁이 혀를 찼다.

    "이러면……."

    "응?"

    "강해질 수 있는 건가요?"

    "으음?"

    아, 다 똑같지는 않은가?

    이지혁이 서아영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 올라가는 사람들.

    보통 세상의 정점에 서는 이들은 저런 타입들이다.

    "물론이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아영도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강해지고 싶은 이유라도?"

    "언젠가……."

    서아영이 이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그 주둥아리에 불덩어리를 처박아줄 거야."

    "아주 좋은 생각이야."

    이지혁이 낄낄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

    하지만 다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니까. 어떠한 이유든 강해지겠다는 의욕이 충만한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을 괴롭히는 게 즐거워요?"

    "응?"

    "당신 말이에요."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괴롭힌다고?

    "음, 안타깝지만……."

    전혀 틀렸어.

    "나는 사람을 괴롭히기보다는 죽이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야. 지금도 꽤 많이 도와주고 있는 거라고."

    "이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지혁이 가만히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눈.

    서아영이 바라본 이지혁의 눈은 너무도 깊게 가라앉아 있어서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대면한 이지혁의 실체 앞에 서아영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을 알려줄까?"

    "……."

    "너희를 모조리 죽이고 언데드로 만들어 버리는 거지. 사령 쪽은 특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따져 보면 역대로 나 이상의 사령술사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너희는 죽지도 않는 나의 병사가 되어 몇 배는 더 강해질 거야."

    서아영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섬뜩함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서 이 사람이 싫어.'

    한없이 장난스럽다가도, 때로는 한없이 무서워진다.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인격이 있는 것처럼.

    그 경계가 확실하다면 차라리 상대하기가 쉬울 텐데, 그 경계를 너무도 쉽게 오가다 보니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리 번거로운 방법을 써주고 있잖아. 그러니 고맙지 않아?"

    "한마디 해도 돼요?"

    "응."

    "당신은 미쳤어요."

    "암, 잘 알고 있지."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야.

    이지혁의 낮은 웃음이 서아영의 귀를 파고들었다.

    서아영은 진저리를 치며 혼자 키득대며 웃고 있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미쳤어.'

    오늘따라 그의 모습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서아영이었다.

    * * *

    "약속은 약속이죠."

    거대한 회색의 세계.

    이지혁은 그 세계 안에서 아펠드리체와 마주했다.

    "꼭 해야 하나?"

    "약속은……."

    "끙."

    이지혁은 한숨을 쉬고는 양손을 들어 올려 항복을 표했다.

    "뭐, 좋아. 말 그대로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이쪽으로."

    아펠드리체가 손을 휘젓자 바닥이 솟아오른다 싶더니, 이내 커다란 돌침대가 만들어졌다.

    "이불은?"

    "…드려요?"

    농담이 안 통한다니까.

    이지혁은 눈앞의 돌침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인터넷에서 본, 암에 대한 증상이 나와 완전히 일치하는 상황에서 MRI를 찍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확정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종양이 얼마나 큰지, 전이는 얼마나 이루어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이나 멜랑꼴리했다.

    "누우세요."

    "뭔가 의사 같네, 아펠드리체."

    아펠드리체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너와의 말장난으로 상황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지혁이 한숨을 쉬고는 미적미적 돌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편안히."

    "의사나 너나 자꾸 편안하게 있으라고 하는데, 이 상황에 편해지면 그게 사람이냐? 부처지?"

    "부처?"

    "…됐다. 말을 말자."

    온갖 인간에 대한 지식은 다 습득하고 다니면서 부처가 뭔지 모른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이 여자의 방식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

    초등학교부터 보내든 해야지.

    가만히 자리에 누운 이지혁의 머리 쪽으로 아펠드리체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러더니 침대 위로 올라와 이지혁의 머리를 살짝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고는 이마에 손을 댔다.

    "이거, 밤이랑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인간 남자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자세라고 하던데요?"

    그거 누가 뱉어낸 정보인지는 몰라도 매우 정확한 정보이기는 하군.

    "아플지도 몰라요. 아니, 아플 거예요."

    "응."

    "많이 아파요."

    "응."

    아펠드리체는 뚱한 이지혁의 반응을 보며 웃음 지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 바로 눈앞의 이 사람이 아니던가.

    아펠드리체는 두말없이 이지혁의 이마에 댄 손으로 마나를 모았다.

    우우웅.

    마나가 공명하며 아펠드리체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으……."

    이지혁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저 새하얀 빛의 마나를 느낄 때마다 전신에서 격렬한 거부감이 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육체는 이미 흑마력에 축축하게 젖어버린 상태니까 말이다.

    "죽겠군."

    "참으세요."

    이지혁의 머리로 새하얀 마나들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우으……."

    이지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고통에는 거의 면역이 되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이지혁이지만, 머릿속에서 흑마력과 백마력이 충돌하는 것만은 참기가 힘들었다. 머리 안에서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눈이 아득하게 시력을 잃어가고, 귀가 멍해진다. 몸이 제멋대로 뒤틀리고, 전신에 개미 떼가 올라타 물어 대는 것 같은, 끔찍한 감각이 든다.

    입조차 열지 못하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댄 아펠드리체가 눈을 감고는 천천히 마나의 충돌을 음미했다.

    "흐음……."

    아펠드리체의 얼굴이 낮게 가라앉는다.

    이지혁의 머리에 밀어 넣은 백마력을 회수한 아펠드리체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시간에 전신이 모두 식은땀으로 푹 젖어버린 이지혁이 깊게 심호흡을 한다.

    "후우……."

    아펠드리체가 물의 정령을 소환하여 이지혁의 전신을 깨끗하게 씻어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지혁은 고통의 여운에 시달리는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엽게도…….'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통 인간은 흑마력을 어느 정도 주입하는 것만으로 육체의 밸런스가 꺠져 버린다. 그대로 마나에 지배당하여 미치거나 과격한 경우에는 언데드로 강제 전직해 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지혁은 흑마력을 모아두는 배터리와도 같은 존재. 전신이 이미 흑마력에 동화되어 있다.

    원래라면 인간의 육체에 이만한 흑마력을 모아두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멸망의 좌 시절, 전 세계의 모든 흑마력을 모아야 할 만큼의 흑마력을 육체 속에 품고 다니던 이지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에 달한 마력 컨트롤과 동화율이 있기에 침식을 최저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었다.

    아펠드리체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이지혁이 눈을 번쩍 뜨여졌다.

    "어떤가요, 선생님. 저 죽나요?"

    "생명을 가진 존재는 누구나 죽어요, 지혁 씨."

    "그게 언제이냐가 중요한 거겠지."

    "지금처럼 마나를 써 대다가는 5년 내로 당신의 육체는 완벽하게 흑마력에 지배당하게 될 거예요."

    "역시 그런가……."

    이지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계속 이런 미련한 짓을 할 생각인가요?"

    "5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지. 게다가 지금처럼 계속 마나를 써 댄다는 보장도 없고."

    "내가 말하는 것이 그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 텐데요?"

    "흠……."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것 아니던가요? 이 세상이 얼마나 가치 있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존재 자체와 바꿔서 지킬 가치가 있을까요?"

    생명뿐만이 아니다.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가졌던 모든 것이 부정되고,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게 될 것이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지혁 씨."

    "이봐, 아펠드리체."

    "……."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발악했던 건 나야. 그리고 여기서 죽겠다고 다짐하고 돌아온 것도 나고."

    "그런 건 알고 있어요."

    이지혁이 빙긋 웃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여기서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설치다가 죽어도 되는 거 아닐까?"

    "미련한 소리예요. 오래 산다고 해서 삶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그렇지 않나요?"

    "뭐, 그렇다고 해두든가."

    이지혁은 별말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내려섰다.

    "나라고 죽는 날만 잡아놓고 살겠다는 게 아냐. 그러니까 이 짓도 하고 있는 거지."

    "……."

    아펠드리체는 묘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답네요."

    "흥."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도움이 될까요? 저는 회의적인데요. 무엇보다 저들이 이지혁 씨의 생각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알 게 뭐야."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 되면 그만인 거지."

    어차피 큰 기대를 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도움이 된다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대로 해결해 나가면 된다.

    그게 이지혁의 방식이니까.

    아펠드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세계로 온 이후, 이리 격렬하게 감정을 표현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휴,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일이니……. 하지만 기억해 둬요."

    아펠드리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지혁은 아펠드리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변하는 순간,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지혁의 심장을 뜯어낼 것이다.

    차원을 넘어설 수 있는 마왕의 출현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안 아프게 부탁하지."

    "당신……."

    아펠드리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지혁이 멍하게 물었다.

    "뭘?"

    "결국 결론은 하나죠. 이지혁 씨가 마나를 조금이라도 덜 쓰게 하려면 이곳에 와 있는 이들이 더 강해져야 한다. 그렇죠?"

    "으응? 뭐, 그렇지."

    "그럼 어떻게든 더 강해져야죠."

    그녀의 눈에 어린 확고한 의지를 보며 이지혁은 이 세계에 와 있는 NDF 요원들을 마음속 깊이 애도했다.

    * * *

    "또 왔어?"

    김재범은 가만히 김다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러다 정들겠다."

    "전 아니에요."

    "…그래."

    미안하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나댔구나.

    김재범은 벌써 일주일을 넘게 보고 있는데도 철벽과도 같은 그녀의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뭐, 어찌해 보고 싶은 생각으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니었다.

    김다현의 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거기에 이지혁과 어울리는 여자에게 미쳤다고 손을 뻗겠는가.

    죽고 싶으면 방법은 많다.

    약을 먹어도 되고,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된다.

    그런데 뭐하러 개중에서 가장 더럽게 죽는 방법을 선택하겠는가.

    "오늘도 여기서 기다릴 거니?"

    "네."

    "…그래라."

    원래 여기는 너 같은 민간인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한두 번 그러려니 했더니, 이젠 아주 집인 양 눌러앉았네.

    오식아!

    니가 여길 지켜줘야지, 거기서 같이 하품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니?

    "한가하구나."

    "네?"

    "아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재범은 슬쩍 김다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상했네.'

    불과 일주일인데 사람 얼굴이 반쪽이 된 느낌이었다.

    이지혁의 자리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이 뭔가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그리 걱정이 되나?

    하기야 나도 슬슬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김재범이 한숨을 쉬었다.

    1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연속적으로 울려 대던 전화기도 이제 좀 잠잠해졌다.

    이쪽에서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납득한 것이다. 그사이 사무실에 쳐들어왔던 이들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들 낙담하여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도 김다솜만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학교가 끝나면 바로 저리 사무실로 와서 죽치고 앉아 있다가 김재범이 퇴근할 시간이 되어야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밥은 챙겨 먹고 있나?'

    벌써 일주일이나 저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밥을 먹기는커녕 제대로 된 음식은 입에도 못 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면 사람이 불과 일주일 만에 저리 홀쭉해질 리가 없지 않은가.

    "너 괜찮아?"

    "네?"

    "아니, 초췌해 보여서."

    김다솜이 가볍게 웃었다.

    '표정도 있네.'

    항상 무표정한 얼굴만 보다가 저리 웃는 모습을 보니 참 예쁘긴 하다.

    "곧 돌아올 거니까요."

    "그래, 뭐, 별일이야 있겠어?"

    지가 지 발로 훈련하러 간 건데, 별일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사실 니가 너무 심하게 걱정하는 거라고.

    김다솜이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자체로도 뭔가 그림이 나온다.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됐을 텐데……."

    이지혁이 대책 없이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가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이유가 있고 대책이 있다는 것쯤은 이제 김재범도 알고 있다.

    그가 없는 사이에 게이트가 출현하여 사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일주일 이상 시간을 끌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기는 하는데……."

    모르지.

    진짜 대책 없을 수도 있잖아.

    이지혁이니까.

    사실 이지혁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언제나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인데.

    "아?"

    그 순간, 김다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김다솜이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사무실 한쪽 구석의 벽면.

    "왜 그러……."

    우우우웅!

    허공에 아주 작은 검은색의 무언가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그 크기를 불려 사람이 충분히 오갈 만한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의 게이트.

    붉고 푸른 몬스터 게이트와는 다른 이지혁만이 사용하는, 검은 게이트가 보인다.

    헐?

    김재범이 놀라 게이트와 김다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게이트가 생성되는 찰나간의 변화를 순식간에 알아채고 반응하다니, 얼마나 민감하다는 것인가!

    게이트 안에서 뭔가 흐릿하게 나타난다 싶더니, 누군가의 머리가 게이트에서 빼꼼 튀어나왔다.

    "이지혁 씨!"

    김재범이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 * *

    "으라차!"

    이지혁이 게이트에서 밖으로 뛰어내렸다.

    "돌아오셨군요."

    김재범은 진심으로 이지혁이 반가웠다. 이지혁이 없는 동안 그를 찾아대는 연락 때문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최근에는 연락이 좀 뜸해졌지만, 반대로 혹시 이지혁과 연락이 안 되는 사이에 거대 게이트라도 열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함 때문에 잠도 잘 안 올 지경이었다.

    "왜 갑자기 친한 척이에요?"

    "……."

    와, 어찌 저토록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나?

    웬만큼 잘 골라서는 이렇게 듣자마자 사람 기분을 확 보낼 수는 없을 텐데.

    "반가워서 그러죠, 반가워서."

    "어때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겠죠? 사람이 있다가 없으니까 티가 확확 나죠? 나의 소중함을 좀 느꼈어요?"

    난 자리가 어쩌고는 모르겠는데,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겠다.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니 입으로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왜 이리 정이 떨어지냐.

    다다다다.

    그때, 이지혁의 육감에 어떤 것이 빠르게 접근하는 기색과 소리가 느껴졌다.

    습격?

    고개를 돌리자 김다솜이 이지혁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반사적으로 김다솜을 안아 든 이지혁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니가 여기 왜 있냐?"

    "……."

    김다솜은 아무 말 없이 이지혁을 꽉 끌어안았다.

    "왜 그래?"

    이지혁이 멀뚱멀뚱 묻자 김재범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슴을 쳤다.

    이 답답한 놈아!

    니가 그러니 여자 친구가 없지!

    …아니, 쟤는 여자 친구가 없는 게 아니구나. 안 만드는 거지.

    어쩐지 서러워진 김재범이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자자, 진정해."

    이지혁이 김다솜의 허리를 잡고 달랑 들어 올리고는 옆으로 내려놓았다.

    "응?"

    김다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것을 본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해민이야 만날 빽빽 울어 젖히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는지라 눈물이라는 것에 면역이 있는 편인데, 얘는 안 그럴 것 같던 애가 갑자기 우니까 뭔가 좀 이상하다.

    "왜 그래? 오빠 찾아다 줄까?"

    도리도리.

    고개가 돌아가자 이지혁이 살짝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왜?"

    "……."

    "말을 해야 알지."

    "…속상해서."

    "응?"

    속상하다고? 뭐가? 속상하다는 거지?

    기다리면 뭔가 말이 더 나올 것 같아 이지혁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도움이 안 되니까."

    "흐음……."

    뭐랄까, 눈앞에서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고 있는 것을 보니 굉장히… 음, 그러니까…….

    '곤란하다.'

    매우 곤란하다! 이런 것은 좋지 않다!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지만, 여기는 딱히 도망 갈 만한 곳도 없었다.

    "도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래도."

    어쭈? 말대답도 꼬박꼬박 하는 거 봐라, 이거?

    이지혁은 피식 웃고는 김다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는 거야."

    니가 아니라 다른 애들이라고 해도 딱히 내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단다. 이 몸이 워낙 잘나셨어야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지혁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너한테 물은 적 없는데?"

    "음, 대답이라기보다는 조언이라든가, 그런 쪽으로 이해해 주세요. 인간의 말이 서툴러서 그런 건지도 모르니까."

    서투를 리가 있나!

    말싸움으로 나도 이기는 것이!

    저 요망한 도마뱀 보소!

    김다솜이 얼굴을 쓱 문질러 닦더니,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가만히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음……."

    아펠드리체가 그 시선을 받더니 얼굴을 살짝 굳히며 몸을 뒤로 뺐다.

    뭐지?

    정신계 마법도 아니고, 물리계 공격도 아닌데, 왜 주춤하게 되는 것일까?

    아펠드리체는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당황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대체 이 싸늘한 것은 뭐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로군.

    그리고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아펠드리체와 김다솜이 시선을 마주치며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뒤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캣 파이트에는 끼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

    발톱 자국이 남기 싫다면 말이야.

    그 순간, 다행히 상황을 환기시켜 주는 존재가 있었다.

    "끄으응……."

    게이트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더니, 최정훈이 비척비척 기어 나왔다.

    허공에 살짝 떠 있는 게이트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최정훈이 허리를 부여잡더니 귀신 같은 눈초리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전 왜 끌고 간 겁니까!"

    최정훈의 통렬한 외침에 이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나는 비능력잔데!"

    "차별 없는 세상."

    "도움도 안 되는데!"

    "당신을 응원합니다."

    "무슨 표어 짜요!"

    말이나 못하면!

    아니, 말을 못해도 밉기야 하겠지! 솔직하게!

    최정훈이 이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다른 사람이야 단련이라도 하고 강해지기라도 하는 거니 감수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최정훈 자신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몇 걸음 지나가다 보면 몬스터가 발에 채이고, 물 한 잔 먹으려고 해도 물 안에서 몬스터가 맞아주는 그런 험악한 세상에 연약한 일반인을 끌고 가다니!

    "뭐, 그래도 얻을 게 아주 없던 건 아니잖아요."

    "끄응……."

    할 말이 없어진 최정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야 뭐, 그래도 심하게 당한 건 아니니까."

    "네에?"

    김재범이 최정훈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그 잘났던 몰골이 반쪽이 된 것이, 무슨 전쟁터라도 나갔다 온 느낌인데?

    그런데 고생을 덜했다고?

    "그럼 다른 분들은?"

    그 순간, 게이트에서 뭔가 작은 생물체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야아아아아!"

    그리고 그 생물체는 가공할 속도로 이지혁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텁!

    맹렬하게 달려들던 생물체가 이지혁이 내민 우수에 잡혀 버둥대기 시작했다.

    "놔! 안 놔!"

    김재범이 힘없이 말했다.

    "정해민 씨……."

    그래, 저 사람… 아이돌이었지.

    그러고 보면 이지혁 찾는 전화 중에 처절히 절규하는 정해민의 매니저 전화도 간간이 걸려왔던 거 같은데…….

    뭐, 그거까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까.

    김재범은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정해민 매니저의 목소리를 지워 버렸다.

    이미 이리된 거, 뭐.

    그러고 보면 저 인간도 참 대책 없네.

    현역 아이돌을 말도 안 하고 일주일이나 빼돌리다니, 납치로 신고당해도 할 말이 없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왜왜! 뭐!"

    "진짜 나빠!"

    김재범은 묘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지금 정해민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 부리는 투정이랑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뭔 짓을 한 거지?'

    NDF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공식 이지혁바라기인 정해민이 저러고 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지혁이 대놓고 인간쓰레기 짓을 저질러도 흐뭇하게 엄마 미소를 지으며 토닥이던 여자가 아니던가!

    "이 멍청아!"

    "그래그래."

    이지혁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어 정해민을 쫓아냈다.

    정해민이 화가 난 작은 생물처럼 푸다다닥댔지만, 이지혁은 그런 정해민의 목덜미를 잡아 대롱대롱 들어 올렸다.

    "훠이!"

    "안 놀 거야! 너!"

    "그래그래."

    이지혁이 귀를 후비더니, 정해민을 적당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일련의 광경을 지켜본 김재범이 이상함을 느끼고는 이지혁에게 물었다.

    "그런데……."

    "네."

    "다른 분들은 어디 있습니까?"

    이지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밥값 하러 갔어요."

    "네?"

    "사람이 일을 해야지."

    "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한 김재범이 멍청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 * *

    중국.

    추이펑은 긴장한 얼굴로 국경 지대를 바라보았다.

    인도에 출현했던 몬스터가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마침내 이제는 중국의 국경까지 진입하고 있었다.

    중국 당국은 전체 비상령을 내렸고, 가용한 능력자들을 모조리 동원하여 티베트에 진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몬스터는 인도를 꿰뚫고 정확하게 카트만두를 지나 티베트로 진입하고 있었다.

    '네팔도 참 안됐지.'

    수도를 직격당했으니 한동안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나마 인도야 땅덩어리도 워낙에 넓은데다가 인구도 많고 중심 시가지라고 할 곳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니 금방 회복하겠지만, 수도가 날아가 버린 네팔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우리라고 그리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지.'

    저 괴물의 이동 경로에 베이징이 미묘하게 포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한국 쪽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

    "안 돌아왔답니다."

    "빵즈 새끼들이."

    추이펑은 이를 갈았다.

    상황이 이리되자마자 바로 지원을 요청했건만, 한국은 이지혁이 자리를 비웠다는 말로 모든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자리를 비워도 어디 갔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지원하기 싫다는 속내를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 걸 보면 한국의 외교력이 얼마나 막장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태만 지나고 나봐라.'

    정말 제대로 보복이 뭔지 알게 해줄 테니까!

    추이펑은 나직하게 이를 갈고는 전방을 주시했다.

    인도도 능력자 전력으로는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능력자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은 랜덤이나 다름없고, 그 힘의 강약 역시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능력자 전력이라는 것은 보통은 인구수에 비례하기 마련이었다.

    그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두 개의 나라가 바로 미국과 대한민국이었다.

    미국은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능력자들의 능력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구를 해왔고, 이 년 전쯤부터는 확고부동한 최강의 전력을 구축했다.

    막대한 자금을 말 그대로 퍼부어서 이루어낸 성과.

    하지만 다른 한 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 놈들."

    대한민국.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력으로는 논외의 대상이었던 대한민국이 최근에 세계의 중심 국가로 급격하게 부상했다.

    레벨 5 사태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해 버리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더니, 최근에는 미국과 프랑스를 박살 내고 있던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세계 최강의 능력자 보유국임을 인증했다.

    "이지혁……."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이가 바로 이지혁이었다.

    미국으로부터 지뢰라는 코드네임을 부여 받은, 현세대 최강의 능력자.

    혼자만의 힘으로도 미국 전체의 능력자들을 압도할 수도 있다는 평을 받는, 전무후무한 능력자.

    소문이야 대개 어느 정도 과장이 섞이는 법이라지만, 그 소문 속에 반의반만이라도 진실이 담겨 있다면 그가 최강의 능력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

    그래서 문제였다.

    왜 하필 그런 능력자가 저 소국에서 등장하느냔 말이다!

    바로 옆에 중국이 있는데!

    "망할 조선 놈들."

    "이게 뒈질라고."

    "…음?"

    추이펑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웬 거지꼴을 한 여자가 껄렁대며 서 있었다.

    "뭐야!"

    어떻게 작전구역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인가.

    "끌어내!"

    바로 소리를 지르자 추이펑을 호위하던 능력자들이 우르르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화르르륵!

    그 순간, 여자의 주변에서 광포한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 열기에 질린 이들이 뒤로 주춤 물러나자 여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 질렀다.

    "너희, 다 죽고 싶어?"

    종로에서 맞은 뺨은 한강에서 풀어야 제맛이지!

    열 받은 서아영이 화염을 더더욱 크게 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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