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8화 (28/118)
  • [■] 넌 오빠잖아. 그렇지? [■]

    ─────

    "이상하게 기분이 좀 더러운데?"

    이지혁은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뭔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가슴속에서 울컥울컥거리는 느낌이었다.

    왜 이리 기분이 이상하지?

    이지혁은 찝찝함을 뒤로하고 문을 나섰다.

    깔끔하게 정령 한 마리 때려잡았으니 상쾌해야 하는데, 뭔가 미진함이 자꾸 남는다.

    "흐음……."

    그런 이지혁의 눈에 살랑거리는 금발 머리가 들어왔다.

    저 벽 뒤에서 살랑이는 금발은… 이제는 뭐랄까, 일종의 클리셰로 보일 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여긴 또 왜 왔니!'

    그리고 방금 도착했는데. 여기 온 줄은 또 어떻게 알았지?

    무작정 계속 기다린 건가?

    의심과 귀찮음을 걷어내며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웬일이야?"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들떴다 가라앉는다.

    마치 그것이 인사같이 보여서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났다.

    "헤."

    김다솜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오빠 보러 왔어?"

    김다현이라면 안에 있을 텐데?

    "불러줄까?"

    이지혁의 말에 김다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의 밝아졌던 얼굴이 살짝 굳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응?"

    그녀에 손에 들린 봉투를 본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하얀 봉투는 뭐지?

    "으음……."

    일단 주는 거니 받아야지.

    봉투를 받아 든 이지혁이 안의 내용물을 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보자…….

    이건 자양강장제고, 비타민제, 피로회복제?

    이 정체불명의 검은 한약은 뭐지?

    그리고 이거…….

    "정력제?"

    김다솜이 살짝 고개를 돌려 이지혁의 시선을 외면했다.

    뭐지?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대체 이 정력제의 의미는 뭔가!

    남자한테는 참 좋은데!

    직접 보여줄… 아, 이게 아니지.

    "고, 고맙다."

    어느 부분에서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지혁이 봉투를 주섬주섬 챙겼다.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말이 날아오고 이런 것까지 받게 되는 것으로 보아 최근의 자신이 피곤해 보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딱히 무리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아니, 아니지.'

    과거의 이지혁이라면 무리가 아니겠지만, 지금의 이지혁이라면 무리일 수도 있다.

    사실 지금의 자신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가는 본인 스스로도 잘 모르니까.

    "잘 먹을게."

    "챙겨 드세요."

    "으응……."

    이지혁이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집에 갈 거야?"

    "네."

    "그럼 가자……."

    "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데려다 주는 이지혁을 보며 김다솜이 흐뭇하게 웃었다.

    '얘도 표현이 다양해졌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얼굴은 변화라는 것을 거부하는 전통 보존 지역 같았는데 말이다.

    지금은 웃기도 잘 웃고, 가끔 심통 난 표정도 보이는 게 좋은 변화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상하게 으스스하단 말이야.'

    먼 조상을 잘 살펴보면 빙한 계열의 뭔가와 섞이지 않았을까?

    이지혁이 베라프로 끌려갔듯이 과거의 누군가가 이계로 갔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테니까.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어느 순간 김다솜이 멈춰 섰다.

    "응?"

    "여기예요."

    김다솜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라고?"

    "네."

    "여기?"

    "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여기가 집이라는 게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지.

    거주구 안이라면 어디든 집이 될 수 있는 거고, 그녀와 이지혁은 이사 온 날짜도 비슷했으니까.

    그런데…….

    "이거, 우리 집 근처 아닌가?"

    저기 보이는 게 우리 집 같은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뭐, 물론 집이 근처라는 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말이다.

    "너 저번에 데려다 달라고 했을 때는 여기로 안 왔잖아."

    이지혁의 물음에 김다솜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야……"

    "……."

    말을 말아야지.

    시선은 피하며 싱긋 웃고 있는 김다솜의 모습에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뭐, 됐다. 나는 갈 테니……."

    "저……."

    "응?"

    김다솜이 머뭇대더니 입을 열었다.

    "비타민제는 아침에 한 알. 위장 아플 수 있으니까 같이 넣어둔 위장약이랑 함께 드시구요. 식사하고 드실 수 있으면 더 좋아요. 한약은 저녁에 드시구요……."

    그 후로도 한참을 뭔가 떠들어 대는 김다솜을 보며 이지혁은 눈을 감았다.

    얘야.

    내 뇌는 그 정보를 모두 기억할 수가 없단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아셨죠?"

    "으응."

    알긴 뭘 알아!

    약이 뭔 복용법이 따로 있어! 그냥 처먹으면 약이지!

    솔직히 이런 거 가져가도 안 먹는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갈게."

    "네."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몸을 돌려 집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무섭다고!

    데려다 줬으면 얼른 집에 들어가!

    왜 뒤에서 그렇게 보고 있냐고!

    특별하게 민감한 육체 때문에 등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문제였다.

    "에휴……."

    요즘은 몬스터보다 다른 것들이 더 문제다.

    쟤들이 몬스터야, 쟤들이.

    * * *

    "다녀왔습니다."

    이지혁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박선덕이 소파에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왔어?"

    "응."

    "밥은?"

    "안 먹었지."

    "밥도 안 먹고 들어오니? 귀찮게……."

    "……."

    엄마?

    엄마, 나 지혁이야!

    나한테 이러지 않았잖아.

    나 돌아온 지 몇 달도 안 됐어!

    이지혁의 간절한 시선을 느낀 박선덕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려주면 되잖아, 차려주면!"

    "흑……."

    이지혁은 눈가를 훔쳤다.

    처음 돌아와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밥과 고기를 차려주시던 그 어머니는 어디로 갔는가.

    이제는 돈도 벌어오고 열심히 사는데, 대접은 더 못해지다니!

    아, 인생의 아이러니여.

    "예원이는?"

    "위에 있다."

    "근데 걔는 야자도 안 하나?"

    "요즘 애들이 무슨 야자야."

    "학원은?"

    "학원을 보내면 뭐하겠니."

    "왜? 대학 가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지."

    "쟤가 어쩌고 다니던 앤지 기억해 보렴."

    "아……."

    잊고 있었다.

    그렇지, 우리 예원이지.

    그래, 우리 예원이…….

    지나가던 깡패가 오금이 저려서 도망갈 우리 예원이!

    "하……."

    그러고 보면 쟤도 참 마음 잘 잡고 사네.

    쿵쿵쿵.

    "응?"

    이지혁이 위에서 내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호랑이도 아니고, 쟤도 지 말만 하면 나타나는 기분이야.

    "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쟤는 근데 왜 저리 심통이 났는가.

    이예원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현관으로 향하지 이지혁이 불렀다.

    "너 어디 가?"

    "미용실."

    "왜?"

    "염색하러 갈 거야."

    하…….

    이거 또 시작이네.

    "왜!"

    "아, 됐어! 비켜! 나 갈 거야!"

    이예원이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자 이지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았다.

    이놈의 집구석은 도대체가 조용할 날이 없어.

    "또 왜 그러냐? 말을 해봐."

    "아니!"

    이예원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좀 보라고!"

    "응?"

    이지혁이 이예원을 쭉 훑었다.

    뭘 보라는 거야?

    그냥 좀 뭐랄까, 통통하니 아주 풍요로워 보이고 좋구만.

    음, 그래. 근데 그 옷은 너한테 아주 꽉 끼는 것 같구나.

    돈도 많이 벌어왔는데 애 옷도 안 사 입히고!

    "엄마! 얘 옷 사 달래!"

    "그게 아니야, 이 멍청아!"

    이예원이 소리를 빽! 질렀다.

    "너 때문에 살이 뒤룩뒤룩 찌잖아! 이래서 뭐해! 어차피 몸매도 망가졌는데, 누가 만나주기나 해! 이럴 거면 뭐하러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살아! 나 그냥 내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너 진짜 질풍노도인 척하다가 질풍노도로 처맞는 수가 있다."

    "왜? 패게?"

    패기만 하겠냐.

    "예원아, 왜 그러니!"

    "엄마아아아아!"

    이예원이 박선덕에게 달려들어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뭐 이리 뜬금이 없어?

    "왜 그러니, 우리 딸?"

    "엄마, 나 이제 힘들어."

    "응?"

    "학교에서도 얌전히 살기 힘들고, 친구들도 없고… 여기 싫어! 나 원래 살던 데로 가면 안 돼?"

    박선덕의 눈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떨렸다.

    "…예원아, 그건……."

    뭐라고 해야 하지?

    "우리 집 이제 돈도 많잖아."

    우리 집이 돈이 많은 게 아니라 내가 돈이 많은 거지!

    언제부터 돈이 우리라는 개념으로 잡힐 수 있는 것이었던가!

    분노에 찬 말을 늘어놓기도 전에 이지혁의 기운을 감지한 박선덕의 눈빛이 입을 틀어막았다.

    '한마디만 더 씨부리면 그 주둥아리를 틀어막아 버리겠다'를 눈으로 읽게 만들어주는 능력에 이지혁이 전율하는 동안, 박선덕은 이예원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그래그래, 우리 예원이, 힘들었구나! 엄마가 그걸 몰랐네."

    "엉엉, 엄마……."

    "그래그래, 안 되면 가면 되지. 원래 살던 데로 갈까?"

    "……."

    대답이 없다?

    이지혁이 급변하는 분위기에 당황하는 순간, 박선덕이 눈을 빛냈다.

    "우리 예원이가 참 얌전하게 살았지. 그래, 엄마는 기뻤단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였더라?

    "지혁아."

    "으응?"

    "그때 그분은 요즘 잘 안 보이는구나?"

    최정훈인가…….

    이지혁은 박선덕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바, 바빠서요."

    "그래도 예전에는 집에도 자주 오고 하더니, 여기 오고 나서부터는 코빼기도 안 보이네. 사람이란 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지만, 그래도 좀 그렇지 않니?"

    "…맞아."

    잠깐?

    지금 작은 목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결론은 그건가?

    결론이 그거야?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이 난리를 친 이유가 최정훈이 잘 안 보여서다, 이건가?

    "엄마, 그……."

    "지혁아."

    "응?"

    "사실 엄마는 그 사람이 참 괜찮아 보이더라. 아들 삼고 싶지만, 아들은 이미 있잖니."

    "…이런 자식이라 죄송합니다."

    이지혁은 습기가 차오르는 눈을 훑었다.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는 사람은 아닌데, 하필 비교 대상이 최정훈이라니!

    대한민국에 최정훈을 가져다 대 멀쩡할 사람이 어딨는가!

    살아 있는 오징어 제조기 같은 인간인데!

    "하지만, 아들은 못 삼아도 같이 지낼 방법은 있잖니."

    "네?"

    설마…….

    "엄마,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가……."

    "띠동갑이 별거니?"

    더 나요!

    더 난다고!

    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란 말이야!

    "에이, 그래도 너무 심하니까……."

    "어린 여자 좋아하는 남자도 많은 법이야."

    보통은 띠동갑 남자를 데려온다고 하면 그놈을 패 죽여 버리고 싶어 하는 게 부모 아닌가?

    그런데 띠동갑도 넘는 사람에게 못 보내서 안달이라니.

    "엄마, 그래서……."

    진짜로?

    설마 하는 이지혁의 시선에 박선덕은 근엄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니 동생 주제에 어디서 더 나은 남자를 찾겠니."

    "……."

    "넌 오빠잖아. 그렇지?"

    그래.

    나는 오빠다.

    우리 예원이가 지금은 이렇지만, 한때는 천둥만 치면 오빠랑 잘 거라고 울면서 파고들던 때도 있었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고는 심쿵한 심정에 이지혁이 이예원을 바라보았다.

    피둥피둥…….

    아니야!

    저 예원이와 그 예원이는 같은 예원이야!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라고, 이 썩어버릴 뇌야!

    "하……."

    이지혁이 이를 악물었다.

    "그렇구나. 내 동생의 행복은 나의 행복. 내가 잠시 현실이라는 이름 앞에서 꿈을 포기했구나."

    "오빠는 동생의 행복을 위해 못할 게 없는 거야."

    "…그건 아니죠, 어머니."

    "밥 처먹기 싫은가 보지?"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든 계획을 짜보겠습니다."

    "파이팅!"

    그렇게 이씨 집안 한쪽 구석에서 대한민국 최정상 훈남을 옭아매겠다는 어둠의 계획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그 계획의 희생양은 지금 서류 더미 속에서 이상한 한기를 느끼며 자양강장제를 들이켰다.

    "뭐, 뭐지?"

    불길한데…….

    * * *

    [샌프란시스코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의 몬스터들은 전혀 진압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로 입은 경제적인 피해는 막대할 것이라 예상되며, 그에 따라 국내 경기에도 큰 악영향이 끼칠 것이라 분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어이구."

    박선덕은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것 같은 파리 시내의 전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몬스터 때문에 파괴된 도시들을 수없이 보기는 했지만, 최근 보이는 장면들은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이제까지의 피해는 거의가 인적 피해였다.

    고블린이나 몽키 같은 몬스터들은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는 하지만 건물을 통째로 파괴할 만한 힘은 없었다.

    레벨 3 몬스터라고 해도 결론적으로 생활 터전 자체를 박살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TV를 통해 보여지는 파리는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건물의 흉한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차라리 편평한 콘크리트의 사막이란 말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박선덕이 한숨을 쉬었다.

    화면 안에서 엄마를 잃고 울면서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 사태로 인하여 발생한 사상자는 최소한 삼만 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블랙 먼데이 이후 가장 큰 피해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아직까지 이 사태에 대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유일하게 사태를 해결한 미국에서는 관련 정보와 영상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어서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썩을 놈들, 지들이 해결했으면 얼른 도와야지!"

    "뭐가?"

    이지혁이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미국 놈들이 몬스터 잡아놓고도 영상과 정보를 공개 안 한다잖니. 저것들은 항상 저런다니까. 외계인 정보도 공개 안 하고 말이야."

    "엄마, 드라마 그만 봐……."

    공개하고 싶어도 공개를 못하겠지.

    이지혁이 몬스터 떼를 부려서 되레 선량해 보이는 정령을 때려잡는 영상을 공개했다가는 파장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그건 차라리 공개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밥 차려놨다."

    "응."

    이지혁은 옷장을 열었다.

    줄줄이 걸려 있는, 미묘하게 다른 모양의 푸른색 트레이닝복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갈아입는다. 그러고는 구석에 박혀 있는 로브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것만 멀쩡했어도…….'

    고칠 방법은 전혀 없나?

    이지혁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만들기보다는 빼앗아 쓰는 타입이었다. 제작을 아주 못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이만한 급의 아티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건 아펠드리체의 전문인데, 그녀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봐서는 방법이 없다고 봐야 했다.

    "쩝."

    아쉽단 말이지.

    스륵.

    그때, 등 뒤에서 낮은 소음이 들려온다.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아펠드리체가 잠에서 깨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거 자고 괜찮아?"

    "네."

    아펠드리체는 흑마력의 부작용에 침식당하지 않도록 밤새도록 지키다가 이지혁이 일어난 뒤 씻고 나오는 삼십 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잠을 잔다.

    "인간의 육체라는 건 역시 불편하군요. 반드시 잠을 자야 뇌가 활성화되다니."

    "니들은 몇 백 년씩 처자면서 그게 할 말이냐?"

    "현명한 거죠."

    일주일 치 잠을 한 번에 몰아 자는 사람을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면 그것도 현명한 거겠지, 망할 도마뱀아.

    "쯧."

    이지혁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떠 쏘아붙이고는 싶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 해주고 있는 것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네?"

    "그 도마뱀 새끼들이 로드가 없으면 얼마나 날뛸지 모르는 거야? 베라프에는 로드가 필요하지. 그리고 너는 베라프에 애정이 있잖아."

    "그렇죠. 아무래도 나고 자란 곳이니까요."

    "그런데 베라프를 내버려 두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이지혁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이고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자 아펠드리체가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들었는데요."

    "내게 에티켓을 바라는 건가?"

    "제가 실수했네요."

    급 인정해 버리는 아펠드리체를 보며 이지혁은 피식 웃었다.

    원래 이런 농담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는데…….

    로드라는 자리를 내려놔서인지, 아니면 주변 다른 인간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펠드리체는 확실히 과거의 그녀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여기 왜 온 거지? 이제 말 그만 돌리고 대답을 해보지."

    "말했을 텐데요, 당신을 보기 위해서라고."

    "언제까지 말장난을 할 셈이지?"

    아펠드리체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장난을 하는 건 지혁 씨죠. 드래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계시잖아요."

    "끙……."

    이지혁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말 그대로 드래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나를 보기 위해 차원을 넘어왔다고?"

    "네."

    "어째서?"

    아펠드리체의 황금색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몰라서 묻나요?"

    "응."

    곤란한 남자다, 정말.

    "당신이 힘들어하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

    "그러니 내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은 딱히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요."

    "너와 나 사이에 그럴 정도의 의리가 있었던가?"

    으르렁대는 이지혁을 보며 아펠드리체는 미소를 지었다.

    애정을 받으면 되레 반발하고 이를 드러내는 남자.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어린애 같은 남자.

    그것이 이지혁이었다.

    "있어요, 적어도 내게는."

    "이제 와서 그럴 것이었다면 차라리 좀 일찍 그래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럼 적어도 이삼백 년은 일찍 돌아왔을 텐데.

    "그곳에서는 제게 주어진 의무가 있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아무리 로드라도 라트렐 님의 의지를 거스를 간담은 없다구요."

    "…확실히 그건 그렇군."

    베라프에서의 라트렐은 절대자니까.

    "여기서야 그냥 망할 년이지만."

    "네?"

    "아니, 아니다."

    이지혁은 손을 젓고는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있을 셈이지?"

    "언제까지라…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대책이 없군."

    "생각하는 쪽이 이상한 거죠. 지금의 지혁 씨라면 남아 있는 수명이 채 백 년도 되지 않을 테니까요. 백 년 정도면 그냥 놀이 삼아 지낼 수 있는 기간이죠."

    "…듣고 보니 우울해지는데?"

    그렇겠네.

    나 백 년이면 죽는구나.

    수명이라는 것을 딱히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현대로 돌아왔다.

    그 원하던 죽음이라는 것을 손에 넣었건만, 막상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기분이 미묘했다.

    이런 이중적인 것이 인간이랄까?

    "아펠드리체."

    "네."

    "난 널 믿지 않아."

    아펠드리체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얇은 침의를 입은 그녀가 천천히 걸어오자 마치 여신이 강림한 듯한 아름다움이 빛났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지혁의 눈은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는 게 아니죠."

    "……."

    아펠드리체의 팔이 의자에 앉아 있는 이지혁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것뿐."

    이지혁은 대답 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는 싫다.

    끔찍하고 지긋지긋하다.

    관심이 호의로 변하고, 호의가 우정으로 변하고, 우정이 애정으로 변해도 마지막 하나의 선만은 결코 넘어주지 않는 자.

    그녀와의 관계가 진척되어 가는 동안에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이지혁의 의지만은 결사적으로 막아섰던 여자.

    애정으로 인해 변하지 않는 여자.

    그래서 그 애정마저 가식이라 느껴지게 만드는 여자.

    일천 년 동안 교감하고 증오하고 싸워왔지만, 결코 미워할 수는 없던 여자.

    그래서 지긋지긋하다.

    "하……."

    이지혁이 노곤한 몸을 그녀의 품에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짧은 백 년의 유희인가?"

    "당신이 원한다면 백 년이 아닐 수도 있겠죠."

    "나는 인간이야."

    "아직은, 아직은 말이죠……."

    인간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라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 그것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조금이나마.

    "언제까지 놀이를 할 셈인가요?"

    "놀이?"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

    놀이, 놀이라…….

    "남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는 버릇은 여전하군?"

    "그게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임은 인정하지 않았던가요?"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드는 것도 여전해."

    "변하는 게 이상하죠. 나는 드래곤인걸요."

    "그래, 너희는 그렇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기에 스스로의 성격조차 변화시킬 수 없는 존재들.

    그게 드래곤이지.

    "그래, 가지고 놀아라. 제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가져다 놔."

    "전 언제나 당신을 제자리에 두려고 노력하는 드래곤이었으니까요."

    "말로는 한 번을 안 지네."

    "거짓말쟁이. 만날 이겼으면서."

    아펠드리체의 고운 손이 이지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작다.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도 작고 미약하다.

    특히나 이지혁이라는 인간은 여리디여린 속내를 가리기 위해서 단단한 껍질로 자신을 둘러싸고 또 둘러싸 버렸다.

    아니.

    상처 입고 상처 입어 여리던 마음이 딱지로 무수히 뒤덮여 딱딱해져 버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비자의적 고슴도치?

    살아가기 위해, 아니, 지금껏 살아오며 강제로 만들어진 무수한 가시가 몸 주위를 둘러싸고 있기에 사람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된 사람?

    "가여운 사람."

    그녀의 손이 이지혁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내가 이리된 것에 대한 지분이 너에게도 있지 않나?"

    그것도 꽤 많이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제멋대로 위안하지 말라고."

    "그래서 이리 왔잖아요."

    당신 곁에.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원한다면."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그게 내가 너를 찢어 죽이는 일이라고 해도?"

    아펠드리체 역시 부드럽게 웃었다.

    "기꺼이."

    이지혁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비틀려 있다.

    제멋대로 비틀려서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어져 버린 관계들.

    "베라프……."

    놓아주질 않는구나.

    여기까지도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어 사람을 괴롭히는군.

    "아무래도 좋아."

    지금은 말이야.

    지금은 그냥 이대로 좋으니까…….

    이지혁이 손을 뻗어 아펠드리체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만만히 보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로드 아펠드리체."

    아펠드리체는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베라프에서 한 번이라도 숨을 쉬었던 자라면 감히 당신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멸망의 좌이시여."

    "낄낄낄낄."

    이지혁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도 너희잖아.

    안 그래?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엄마가 밥 처먹으……."

    아침부터 의자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둘을 본 이예원의 눈이 과격하게 흔들렸다.

    "벼, 변태들!"

    "오해다!"

    이지혁이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니야!"

    "꺄아아아아아아아아! 엄마! 얘들 봐아아!"

    이예원의 떠나갈 듯한 비명이 집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언제나와 같은 평온한 일상의 시작이었다.

    * * *

    최정훈은 최근 보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무수한 업무량과 산더미처럼 쌓이는 서류 더미는 여전하지만 과거에는 조직을 이루는 톱니바퀴로서 살았다면, 지금은 그 조직을 손짓 하나로 이끄는 입장이 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흐음……."

    핸드 드립한 모닝커피의 부드러운 향을 느끼면서 최정훈은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의 따뜻함을 즐겼다.

    "평화롭군."

    커다란 머그컵에 담긴 향긋한 모닝커피 위로 박카스를 졸졸 부으며 최정훈은 미소를 지었다.

    "혀, 현실도피하지 마십시오!"

    "응?"

    김재범이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로 징징댔다.

    "전화기 선 뽑지 마시라구요!

    "으응?"

    "휴대폰도 켜세요! 자꾸 저한테 전화 오잖습니까! 제가 뭘 안다고! 전 잡무 담당이란 말입니다!"

    최정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가 야망이 있어야지! 고작 잡무 담당으로 만족하다니!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그 기회가 무슨 기회입니까! 제가 이지혁 씨를 어떻게 감당해요!"

    그건 그렇네.

    나도 죽겠는데.

    최정훈은 자신의 의식이 점점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좌절했다.

    "거물은 얼어 죽을."

    이게 무슨 거물인가! 전화 상담원이지!

    휴대폰이 동시에 연결되는 회선을 감당하지 못해서 계속 불통이 될 지경이었다.

    미국 사태가 해결된 이후로 몬스터가 출현한 나라의 지원 요청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거의 국력을 쏟아붓는 듯한 느낌으로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특히나 모 국가는 전쟁도 불사할 기세라 외교부 직원들이 단 한 명도 퇴근하지 못한 채 비상이 걸렸고, 그 비상의 대가가 최정훈에게 고스란히 쏟아지고 있었다.

    그나마 최정훈의 위상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라 이 정도였다.

    잡찌끄레기들은 감히 전화도 걸지 못하고 있기에 이 정도지, 그게 아니었다면 최정훈의 옆에 새로 전담 기지국을 세워야 할 정도였을 것이다.

    "후후후."

    최정훈은 부재중 전화 238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그래.

    아주 좋아.

    좋은데…….

    "이러면 다를 것이 없잖아!"

    거물이 되면 커다란 책상이랑 안락한 의자에 누워서 시가나 뻑뻑 피워 대면서 손짓 하나로 모든 것을 처리하게 될 줄 알았지, 자양강장제 구입 비용이 두 배로 늘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정작 월급은 늘지도 않았어!

    최정훈이 부들부들하는 순간, 김재범이 울상을 지으며 전화기를 들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넵?"

    김재범이 문을 열고 밖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가 다시금 얼굴이 시뻘개진 채 들어왔다.

    "자, 장관님 오셨습니다."

    "장관님?"

    "네, 외교부 장관님이요!"

    외교부 장관?

    그 양반이 여긴 또 왜?

    최정훈이 주변으로 눈길을 주자 서아영을 비롯한 이들은 장관이 왔다는데도 그저 지나가던 개라도 들른 듯이 관심 하나 주지 않고 있었다.

    "하……."

    앓느니 죽지.

    최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관을 맞으러 나갔다.

    마침 현관으로 들어서던 희끗한 머리의 중년인이 문을 열고 나오는 최정훈을 보고는 살짝 인상을 썼다.

    "어서 오십시오, 장관님. NDF의 부부장을 맡고 있는 최정훈입니다."

    "자네가 최정훈인가?"

    "예, 그렇습니다."

    최정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장관은 뭔가 탐탁지 않은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 어색함을 느끼며 최정훈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푸닥거리를 하러 온 모양이다.

    "안으로 드시지요."

    "크흠."

    최정훈이 안내를 하자 장관은 별말 없이 최정훈의 뒤를 따랐다. 한쪽에 준비된 회의실로 장관을 안내하자 그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손님 맞을 곳도 없는 건가?"

    "실용성을 중시했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자연스레 상석에 앉는 장관을 본 최정훈이 김재범에게 커피를 타 오라 주문하고는 옆자리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

    하대석 외교부 장관은 요 맹랑한 젊은 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 태도가 눈에 밟혔다.

    감히 하급 공무원 주제에 말이다.

    "몰라서 묻나?"

    알면 묻겠냐?

    그리 반문하고 싶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

    사실 뭐, 알고도 물은 것이기도 하고.

    "이지혁 씨입니까?"

    "그래, 그 이지혁이라는 인간 말이야. 지금 있나?"

    이거, 큰일 날 사람이네?

    이지혁이라는 인간?

    그걸 이지혁이 들었으면 지금쯤 니 주둥이에 니가 신은 명품 구두가 틀어박혔을 거다.

    좋은 틀니 해주는 집을 알아봐야 했을 거야.

    "언행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뭐라?"

    "그 사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입니다. 함부로 그렇게 툭툭, 쳐 대다가 터지게 된다면, 그 뒷감당은 온전히 장관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걸로 들리는데, 아닌가?"

    "걱정이죠. 걱정입니다."

    그렇다고 하자고.

    하대석 장관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최정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 좋아. 내가 직접 만날 필요도 없겠지. 어쨌든 지금 상황이 영 좋지 않아.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적어도 내일까지는 한 군데의 문제를 더 해결해 줘야겠어."

    "어렵습니다."

    "어려워? 미국은 해결하지 않았나."

    "그 사람이 할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럼 다른 곳은 해결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국민으로서 국가의 요청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니가 국가야?

    장관 주제에 국가가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이 인간도 답이 없는 족속이다.

    하지만 뭐 자리가 자리니 대접은 해줘야지.

    최정훈은 자세를 고치며 대답했다.

    "그 사람은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국민으로서의 의무 아닌가!"

    "장관님."

    최정훈이 가만히 하대석을 보며 말했다.

    "그 하나의 국민을 잃고 싶으십니까?"

    "……."

    "지금 이지혁 씨가 귀화라도 하겠다고 나서면 전세기가 아니라 비행기를 사서 보낼 나라가 널렸습니다. 아니, 아예 자기들 텔포 능력자를 대동해서 데리러 오겠죠."

    "끄응……."

    "특히나 미국은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겁니다. 그 국민이 언제까지 우리의 국민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대석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 말이 거짓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럼 뭐 어쩌자는 건가? 계속 이대로 손을 놓은 채 보고만 있겠다는 건가?"

    "기다림의 미덕이 필요한 시기지요."

    "그럼 자네는 대체 하는 게 뭔가? 그러고도 월급은 받아먹겠다는 말이 나와?"

    "제 업무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지혁 씨를 특별 관리해야 한다는 업무 지시도, 그에 따른 수당도 받지 못했으니, 지금 저도 국가에 대한 의무감으로 봉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제게 물으신다면 불합리한 일이죠."

    그러니 월급이라도 올려주고 부려 먹으라고, 이 빌어먹을 놈들아!

    "자네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군. 부장을 불러와."

    "장담합니다만, 차라리 저와 이야기하는 쪽이 속이 편하실 겁니다."

    서아영과 이야기하겠다고?

    그러다 당신 속이 먼저 터질 텐데?

    "그렇다면 자네 입으로 NDF는 이지혁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건가?"

    "네."

    "뭐라고?"

    "네, 그렇습니다."

    최정훈은 담담히 말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말이야!"

    "부끄러울 일이 아닙니다. 전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조직도 그를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잡아놓고 있는 것도 굉장한 일이죠. 매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대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최정훈이 한숨을 쉬었다.

    말이 막히면 화를 내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한 나라의 장관이라는 사람이 이런 빤한 행태를 보인다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저는 지금 장관님의 화를 돋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죠. 막말로 제가 무슨 수로 그 사람을 통제하겠습니까? 명령을 할까요, 아니면 부탁을 할까요?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져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저도 이미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안 되는 걸 어쩌겠습니까."

    "그 이지혁이라는 사람을 내게 데려오게."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를 해도 내가 하는 것이니,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게."

    "……."

    최정훈은 관 안에 들어가서 어서 못질을 하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는 심정이었다.

    "아직 이지혁 씨가 출근을……."

    그때, 회의실 밖에서 누군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 소리가 미처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문이 부서지며 사람 하나가 튕겨 들어와 데굴데굴 굴렀다.

    "아니, 이 새끼들이!"

    그러고는 문 안으로 심술 가득한 얼굴이 등장했다.

    "끄응……."

    최정훈은 얼굴을 감쌌다.

    사고는 당연히 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리도 빠르고 과격하게 사고가 벌어질 줄이야!

    이지혁이 심통이 가득 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화났나?'

    아니, 저게 평소 얼굴이지?

    다행이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평소의 이지혁이다.

    생긴 게 저래서 그런 것뿐이야.

    최정훈은 나름 안심했다.

    "남의 회사에 들어왔으면 얌전히 구석에서 커피나 처먹을 것이지, 어디 남의 앞을 가로막아!"

    앞을 가로막는다고 사람을 저 꼴로 만들어놓는가.

    하기야 이지혁이니까.

    이젠 놀랍지도 않아.

    이지혁이 볼을 부풀리더니, 최정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최정훈 씨!"

    "네……."

    나 찾지 마…….

    그러지 마, 제발.

    니가 날 찾을 때마다 위장에 1㎜씩 헐어버리는 것 같아.

    최정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순간, 이지혁의 시선이 최정훈의 앞에 앉아 있는 하대석 장관에게로 향했다.

    "이 아저씨는 누구신지?"

    예의도 바르지.

    그 순간, 문밖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와 이지혁에게로 달려들었다.

    "안 돼에에에!"

    최정훈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외쳤다.

    "이지혁 씨! 건물은 부수면 안 됩니다!"

    사람을 걱정해야지, 이 미친놈아!

    이지혁은 착하게도 최정훈의 말을 들어주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퍽퍽퍽퍽!

    일인 일타.

    한 대씩 얻어맞은 사람들이 깔끔하게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졌다.

    "휴……."

    최정훈은 식은땀을 닦아냈다.

    제때 소리치지 못했으면 쟤들도 지금 붕붕 날아 벽에 금을 쩌적쩌적 만들어냈겠지. 신축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잡아!"

    그때, 건물 안에 있던 능력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장관의 경호원들을 제압해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짓들이야!"

    분노한 하대석이 소리치자 최정훈이 의자에 앉으며 턱을 살짝 들었다.

    "장관님."

    "이!"

    "이곳은 대통령 직할 기구이며, 무력 도발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법적으로 이곳에서는 누구도 명령을 내릴 수 없고, 소속 인원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요?"

    "으……."

    좋은 분위기다!

    내가 이 내가 일국의 장관을 몰아치고 있구나!

    최정훈이 막 감동하려는 찰나,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아니, 됐고. 내가 할 말이 있다니까?"

    …이 순간 저 인간만 여기 없다면 참 좋을 텐데.

    최정훈에게 있어 이지혁은 스팀 팩 같은 인간이었다.

    그를 이용해 능력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만큼 많은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와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하는 존재.

    "자, 자네가 이지혁인가?"

    이지혁이 하대석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저 아세요?"

    "알다 마다! 알지! 자네, 나와 이야기 좀 하세!"

    "난 아저씨랑은 할 말이 없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바뀔 걸세."

    "흐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뭐, 당장 안 급하니까……. 일단 말을 해보세요."

    하대석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자신보다 급이 낮다고 생각하는 최정훈에게는 더없이 거만했지만, 지금 이지혁이 가진 위치를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자네, 해외에 파견 한 번 다녀올 생각 없는가?"

    "있어요."

    "내가 최대한 모든 편의와 성의를… 응?"

    하대성이 멍하게 물었다.

    "뭐라고?"

    "있다고요."

    이지혁은 담담히 말하고는 최정훈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근데 조건이 있는데……."

    최정훈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 * *

    "조건이라고 했나?"

    "네."

    이지혁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대석은 그런 이지혁을 보며 반색했다.

    조건이 걸리지 않아서 문제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바라는 게 생긴다면 컨트롤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조건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 그 대가는 타국에서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으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국가 기반 시설이 파괴되고 있는 그들이라면, 나라를 넘기라는 조건이 아닌 한 어떠한 조건도 수용할 기세가 아니던가.

    "어떤 조건인가? 말을 해보게."

    하대석은 흥분하여 소리쳤다.

    "돈인가, 아니면 권력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여자? 어떤 조건이라도 상관없네!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뤄주지."

    이지혁이 그 말을 듣고는 게슴츠레한 얼굴로 하대석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이지혁의 뚱한 목소리에 하대석은 입을 닫았다.

    "자꾸 귀찮게 하지 말고 좀 나가주실래요?"

    "…뭣?"

    하대석이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나가라고?

    나를?

    내가 외교부 장관인데, 나를 내보내고 누구와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인가.

    그 순간, 하대석의 눈에 미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최정훈이 들어왔다.

    하대석의 몸이 미묘하게 떨렸다.

    감히!

    일국의 장관인 그를 제쳐 두고 저런 하급 공무원과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하대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네?"

    "내가 외교부 장관일세."

    이지혁이 눈을 크게 떴다.

    "장관?"

    "그래. 내가 외교부 장관 하대석일세."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장관님이시구나!"

    "크흠……."

    하대석이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여기서 흐뭇하게 웃어버리면 없어 보이니까.

    남들이 치켜세워 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지혁이 그런 하대석을 보며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알았으니 나가주세요."

    하대석의 눈이 크게 떨렸다.

    내가 외교부장관이라고 밝혔는데도 나가라고?

    "자네, 뭔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모양인데, 해외의 국가와 협상을 하고 조건을 받아내는 것은 내가 주도하는 일일세.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일이란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이지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가."

    "……."

    미친놈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하대석이 눈앞에 보이는 이 기묘한 생물을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최정훈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해보라고?'

    뭘 어떻게 하는가.

    저 인간을!

    말이 통하고, 상식이 통하고, 구속력이 통할 때에야 사람은 대책이 생기는 것이다.

    말도 안 통하고, 상식도 안 통하고, 통제는 꿈도 못 꿀 사람을 데리고 뭘 한다는 말인가!

    당해보면 그런 말 못하지.

    당해보면!

    그런데 아까부터 왜 이리 한기가 들지? 몸살인가?

    "자네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도 없나?"

    이지혁이 멍한 눈으로 하대석을 바라보았다.

    연장자?

    고작 50년 남짓 살아온 인간이 지금 이지혁의 앞에서 나이를 논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먹은 밥을 쌓으면 너는 깔려 죽는다, 이 어린 노무 시키야!

    "하……."

    말해 뭣하겠는가.

    설명하기도 귀찮고,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사람도 흔치 않다.

    이지혁에게 슬슬 짜증이 오르는 것을 알아챈 최정훈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자자, 장관님, 우선 진정하시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되었는가!"

    최정훈이 하대석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장관님."

    "……?"

    "저 사람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시겠습니까?"

    "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장관님과 이지혁 씨는 감히 중요도를 비교한다는 게 우스울 지경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계시겠지요?"

    극도로 무례하고 직설적인 언행에 하대석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능력자 놈들.

    그가 평생을 고생하여 올라온 자리를 우연히 얻어진 능력으로 뛰어넘어 버리다니.

    속이 쓰리고 짜증이 났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정하게 따져서 지금 이지혁이란 존재의 가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우선했다.

    일개 장관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는 낮게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지혁 씨."

    하대석의 부름에 이지혁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눼?"

    …대답이라도 똑바로 해야지!

    "다시 한 번 정중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대한민국의 외교부 장관인 하대석입니다."

    "네."

    "어떤 요구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저의 소관입니다. 제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저씨."

    "예!"

    "제가 뭐 바라는 게 있을 것 같으세요?"

    "…글쎄요."

    "어차피 나라에서 나한테 해줄 것도 없잖아요. 난 뭐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니까. 그쪽에서 나한테 바랄 것만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어차피 그쪽이랑은 관계가 없거든요? 자꾸 한 다리 걸쳐서 뭐 해 먹으려고 하지 말고, 저기 나가 있어요."

    하대석은 한숨을 푹 쉬고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나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군.'

    하대석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문밖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최정훈의 안쓰러워하는 시선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한 사람을 멀리 보내 버린 이지혁이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부드러운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최정훈 씨."

    "……."

    최정훈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하지 마!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대체 뭐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목소리 한 적 없었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목소리를 하는 거야!

    "최정훈 씨?"

    "…네."

    최정훈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심정으로 힘겹게 대답을 했다.

    뭔가 이상한,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자꾸 든다.

    "타국에 지원을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가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인생이 날아갈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왜요?"

    "우선적으로 한 번의 지원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이 막대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유사시에 타국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타국에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죠."

    "음……."

    "국제 역학 관계에서 그러한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이 패권국을 자처할 수 있던 것도 단순히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힘의 여력만으로 해외의 분쟁에 개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으음!"

    "그러니 지금 같은 게이트 위기 사태에 타국에 지원을 해줄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위상은 극도로 치솟을 것이고, 유무형적인 이득은 수치화하기도 힘들 만큼 막대합니다."

    "근데 그건 결국 나라의 이득이잖아요."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국가의 이득이 개인의 이득이기도 하죠. 국가에 힘이 있어야 이지혁 씨의 삶도 편해지는 겁니다."

    "그렇군요."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정훈 씨가 제 입장이면 두말없이 파견을 가겠군요?"

    "물론입니다."

    "그게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해도?"

    니 목숨?

    니가 그 정도에 목숨이 위험할 리가 있나. 정말 위험해지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거면서!

    하지만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지.

    "물론입니다."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생명에 우선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거, 엄청 위험한 발상인 거 같은데?"

    "그건 아닙니다. 생명이 위험하다면 저도 하지 않겠죠.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죠?"

    뭔 말을 듣고 싶은데 이리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일까?

    수렁으로 점점 빠져든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서 한발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최정훈 씨가 내 입장이라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도 국가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다. 뭐, 이런 이야기죠?"

    "…말이 그렇게 됩니까?"

    계속 아니라고 한 거 같은데, 왜 결론이 그리 나지?

    "사람을 사지에 밀어 넣으려면, 밀어 넣는 사람도 그럴 만한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요?"

    "그럼 여기 또 누가 있나?"

    "제가 언제 이지혁 씨를 사지에……."

    이지혁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라고?"

    "……."

    아니지.

    아닌데…….

    지금 아니라고 말하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본 최정훈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찾아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아이고, 의도도 없이 사람 죽이려 드네, 이 사람!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나!"

    …누가 죽었는데, 이 시키야!

    최정훈은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이지혁 씨."

    "네."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호오?"

    개떡같이 말해도 참 찰떡같이 알아듣는군.

    이지혁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은 상부상조죠."

    "인정합니다."

    "제가 최정훈 씨와 협상을 해서 파견을 한 번 다녀온다면, 최정훈 씨도 얻는 게 있겠죠?"

    "물론입니다."

    그것도 막대하지.

    단순히 금전적인 이득만이 아니었다.

    이지혁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일국의 대통령 이상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처음 NDF를 세우겠다 마음먹으며 짰던 계획을 20년 이상 당길 수 있는 기회를 이지혁이 준 것이다.

    '확실히 그 부분은 감사하고 있지.'

    "그러니 말이에요."

    "네."

    "제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주실 수 있겠죠?"

    "……."

    부탁?

    이지혁의 부탁?

    최정훈의 머리가 멍해졌다.

    그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스케일일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게 얼마나 쪼잔한 부탁일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부탁이라고? 부탁?

    저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필요가 있는 사람인가? 세상에 못할 게 없는 인간인데!

    "그, 그게 뭡니까?"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 최정훈이 물었다.

    "뭐, 간단한 거예요. 아주 간단한 거. 그냥 하루만 시간 좀 빼주면 되는 일이죠."

    "굉장히 쉬운 듯하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군요."

    한 시간만 낭비해도 일이 두 배가 되는 느낌인데, 하루라니…….

    "그 하루 동안 뭘 하게 되는 거죠?"

    "놀이공원 갈 건데요?"

    "…네? 저하고 이지혁 씨가요?"

    "아뇨. 우리 가족이랑."

    "이지혁 씨와 이지혁 씨의 가족과 제가요?"

    "아뇨. 우리 가족이랑."

    "……."

    이 새끼, 대체 대가리에 뭐가 들었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지혁의 요구에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뭘까?

    이 찝찝함은?

    "꼭 해야 하는 겁니까?"

    "흐음……."

    이지혁이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왜 고민을 하는 거지?

    "뭐, 확실히 밸런스가 안 맞는 감이 있으니. 저도 뭔가 하나 정도는 더 들어드려야죠."

    "네?"

    "저기 아저씨 와 있는데, 잘됐네요. 뭐 필요한 거 없어요?"

    필요한 거?

    그걸 말로 해야 하나?

    "인력, 자금, 시간, 명령권."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오케이."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씨익 웃었다.

    "약속은 지켜요."

    "네?"

    이지혁이 영문 모를 말을 남긴 채 밖으로 나가 주뼛대며 기다리고 있는 하대석에게로 다가가더니, 뭐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불과 5분 만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안으로 들어온 하대석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최정훈에게 말했다.

    "원하는 게 뭔가?"

    "네?"

    "그냥 말하란 말일세! 필요한 게 뭔가! 어서!"

    "네?"

    최정훈은 안절부절못하는 하대석을 보며 미간을 문질렀다.

    '뭔 말을 했기에 장관이 이리되는가.'

    새삼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다시금 깨닫는 최정훈이었다.

    * * *

    프랑스는 딱히 급할 것이 없었다.

    아니, 이제는 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파리에서 시작된 몬스터의 진격은 이미 프랑스를 직선으로 관통해 버렸고, 몬스터는 이미 스위스 국경에 거의 다가간 상태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나마 미국에 출현했던 세티와는 달리 이동 속도가 느리다는 점이 위안이지만, 더욱 확실하게 주변을 파괴하고 전진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소름 돋는군."

    자비에 중장은 망원경으로 보이는 말미잘 같은 몬스터를 보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저 망할 놈이 자국의 국토를 박살 내버린 원흉이다.

    프랑스 육전대를 모조리 동원하고 능력자들을 있는 대로 끌어다 퍼부었음에도 저놈의 말미잘은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나마 공격성이 좀 낮은 부류라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지만…….

    "건물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말미잘의 뒤로 길게 이어져 있는 크레이터를 보니 욕이 절로 나왔다.

    저 거대한 덩치로 지나가는 족족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나마 속도가 느려 사람이 뛰어서 피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피해가 끝도 없었을 것이다.

    "국경 밖으로 꺼져 버리길 기대해야 한다니……."

    국토를 유린한 놈을!

    드높은 그의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입었다.

    국토를 유린한 적을 처리하지 못하고 그저 얌전히 국경 밖으로 빠져나가길 바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

    "제기랄."

    자비에 중장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스위스 측에서는 뭐라고 하고 있나?"

    "이쪽으로 최대한 지원을 하겠답니다.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썩을 새끼들."

    막상 프랑스가 박살이 나고 있을 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것들이 자기들이 위험해진다 싶으니 국경을 넘는 걸 필사적으로 막아서겠다는 거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속이 끓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음?"

    "한국에서 지원을 온답니다!"

    "한국?"

    자비에 중장의 머리에 이지혁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능력자.

    미국의 그 빌어 처먹을 몬스터를 단숨에 처리해 버린 자.

    말 그대로 인류 최종 병기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자였다.

    그에 대한 정보는 극소수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지만 다행히 자비에 중장은 그 극소수 중 하나였고, 파리에 몬스터가 나타난 그 시점부터 온갖 외교 채널로 그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는 바였다.

    다만…….

    "왜 이제 와서!"

    나타나려면 좀 더 빨리 오든가.

    빌어먹을 놈.

    이제는 그 능력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딴소리는 못하겠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동양인 놈이."

    "욕인 거 같은데, 저거?"

    "음?"

    자비에가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서 좌우를 살폈다.

    "머리 위입니다!"

    "흠?"

    자비에가 고개를 위로 들자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뭐지?

    낙하라도 한 건가?

    아무런 장비 없이 허공에서 뛰어내리는 이들을 본 자비에가 입을 꽉 다물었다.

    여하튼 이 능력자라는 놈들은 상식을 간단하게 초월해 버린단 말이다.

    나타난 몇몇의 동양인 중 가장 말쑥해 보이는 놈 하나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대한민국 NDF 소속의 최정훈입니다."

    "자비에 중장이오. 프랑스어가 능숙하시군."

    "유럽에서 프랑스어는 기본 교양 아니겠습니까?"

    "혀만큼이나 당신의 성격도 달콤하기를 빌겠소."

    "물론입니다."

    아주 입이 잘 돌아가는 사내로군.

    게다가 꽤나 핸섬하지 않은가.

    "최정훈이라, 최정훈……."

    그러고 보니 몇 번 들어본 적 있었다.

    현장을 중시하는 그의 귀에까지 들려온다는 것은 이 사내도 나름 거물이라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자비에의 관심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가?"

    "아……."

    최정훈이 자비에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는 바로 한쪽을 가리켰다.

    "이지혁 씨입니다."

    "…저 사람이?"

    자비에의 눈에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귀찮다는 듯 쪼그려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 대고 있는 애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나름 해외에 나오는 건데, 저 슬리퍼와 트레이닝복은 뭐란 말인가.

    '이탈리아 놈들이 보면 거품을 물겠군.'

    패션에 죽고 사는 이탈리아는 아니더라도 나름 패션을 중히 여기는 국가의 힘이던가.

    자비에도 그런 이지혁의 꼴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저 애송이가 우리가 그렇게 요청하고 또 요청한 이지혁이란 말인가?"

    "쉿, 듣겠습니다."

    "어차피 프랑스 말은 못 알아먹겠지. 아무리 봐도 똑똑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말은 몰라도 뜻은 압니다. 눈치가 귀신을 넘어 입신급이거든요."

    확실히 잔머리는 팽팽 돌아가게 생겼군.

    그런데…….

    이지혁과 눈을 마주친 자비에가 움찔했다.

    뭐지?

    "저자의 나이가 몇이라 했나?"

    "생년월일로 따지자면, 이제 20대 초반이죠."

    "진짜인가?"

    "너무 어려 보이죠?"

    "아니, 그게 아니라……."

    자비에는 이지혁의 모습에서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저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눈.

    동류의 느낌.

    지금이야 자비에도 사령관의 삶을 살고 있다지만 처음부터 그도 지휘관은 아니었던 바, 수많은 국가의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온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류의 냄새가 난다.

    '저 나이에?'

    아니, 이지혁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 이상이었다.

    저 나이에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분위기가 이지혁에게서 풍기고 있는 것이다.

    첫 전투에 나섰을 때 그를 이끌고 욕하던 부대장에게서나 느껴본 안정감과 노련함.

    그런 것을 지금 새파란 아이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 눈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을 텐데.'

    노망이라도 났다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자비에는 자신의 눈을 신뢰했다.

    "음?"

    가만히 바라보던 자비에가 천천히 이지혁에게로 다가갔다.

    최정훈은 그 상황을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노군인을 막을 수는 없으니, 제발 이지혁이 사고를 치지 않아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저벅저벅.

    자비에가 쪼그려 앉아 있는 이지혁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들어 경례를 붙였다.

    "프랑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간단한 프랑스어지만, 이지혁이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최정훈이 황급히 통역을 하려는 순간, 이지혁이 입에 문 담배를 바닥으로 내던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그러고는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지혁입니다."

    "……."

    최정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맹세코 저 인간이 저리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던가.

    둘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통역을."

    "예!"

    최정훈이 황급히 다가오자 자비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희가 무능해서 이지혁 씨의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정훈이 통역을 해주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시죠."

    …이 인간, 왜 이러지?

    최정훈이 복잡한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럴 인간이 아닌데?

    뭔 꿍꿍이가 있는 것인가?

    자비에가 몇 가지 작전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자리로 돌아가자 최정훈이 넌지시 물었다.

    "이지혁 씨."

    "네?"

    "왜 그러세요, 갑자기?"

    "뭐가요?"

    "보통 안 그러시잖아요. 태도가 너무 정중하신데……."

    "아……."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접을 해줘야죠."

    "무슨 말씀이신지……."

    "어차피 말해줘도 모를 거예요."

    "……."

    이지혁은 가만히 자비에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삶은 짧고 덧없다.

    이지혁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베라프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은 다들 뭔가를 이루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잊혀지고 사라져 갔다.

    이름을 남긴 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기도 했고, 결코 그렇게 사라져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 역사의 힘 앞에 짓눌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고작 백 년.

    세월의 흐름에 백 년이란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하지만 되레 그렇기에 더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명심이 아니라 확고한 자신만의 주관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인물들.

    누구는 어리석다고 하고, 누구는 멍청하다고 손가락질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사람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이지혁은 존중했다.

    그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지혁의 머릿속에 그런 이들이 떠올랐다.

    "벨튼."

    "네?"

    "…아니요."

    이지혁이 강해지겠다고 몸부림치던 시절.

    왕국의 멸망을 눈으로 보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우고 또 싸우다 죽어간 사람.

    왕궁의 정문을 가로막은 그의 시체를 치워내기 전까지는 단 한 명도 지나가지 못하게 했던 사람.

    '닮았군.'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가 닮았다.

    저런 사람은 존중 받아야 한다.

    "이지혁 씨는 그러고 보면 묘하게 군인들이랑 친하네요."

    "그러게요."

    정인수 대령도 그렇고 말이야.

    오히려 능력자 쪽보다는 군대 쪽이랑 궁합이 잘 맞는 거 아닐까?

    이지혁은 마법사이기도 하지만, 몬스터 대군을 이끌던 최강의 사령관이기도 했으니까.

    따져 보면 인간들과 어울려 살 무렵에는 일군을 지휘하는 장군였던 시절도 있고 말이야.

    "감상에 빠질 시간은 아니죠."

    "그렇습니다."

    이지혁이 저 멀리서 천천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 말미잘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종륜데?'

    타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나 몬스터가 있든 간에 생명체라는 것은 나름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는 이지혁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하겠지만…….

    '군단을 쓸까?'

    탐색으로는 몬스터 군단을 밀어붙여 보는 것이 가장 편하겠지만, 아직은 지난번 미국 사태에서 받은 정신적 대미지가 온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흠……."

    그렇다고 다른 능력자들을 밀어 넣어보는 것도 조금 문제고.

    "여기."

    "흠?"

    최정훈이 이지혁 앞으로 전자 패드를 내밀었다.

    "녹화 영상입니다."

    "호오?"

    역시 이 사람… 똑똑하다니까.

    이지혁의 눈에 프랑스 능력자들과 몬스터의 교전 영상이 들어왔다.

    형형색색으로 뿜어지는 능력자들의 공격을 모조리 몸으로 받아내며 시커먼 액체를 좌우로 휘날리는 몬스터의 모습이 보인다.

    "산성액인가?"

    주변으로 뿜어진 산성액이 바닥을 매캐하게 태우고 있었다.

    "딱히 특별할 건 없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패드를 다시 최정훈에게로 넘겨주었다.

    "딱히 어려울 게 없네."

    상성이 안 맞으니까.

    이지혁이 가장 상대하기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유?

    아주 간단하지.

    느려 터졌으니까!

    주문을 완성하는 시간을 버는 것이 전투의 핵심인 이지혁에게 먼 거리에서 주문을 퍼부을 수 있는, 속도 느린 타입들은 그야말로 한 끼 식사거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비켜봐요."

    간단하게 처리해 볼까?

    이지혁의 양손에서 시커먼 마나가 줄줄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양손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연기처럼 허공으로 흘러들더니,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라?"

    이지혁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응?"

    뭔가가 바닥에서 슬그머니 튀어나와 이지혁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저게 마치… 뭐랄까?

    "촉수?"

    그래, 촉수 같네.

    저 말미잘 촉수처럼 말이야.

    하하하하…….

    "썩을."

    순간, 이지혁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아아!"

    "이지혁 씨!"

    놀란 이들의 비명이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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