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7화 (27/118)
  • [■] 자, 오랜만에 날뛰어보자 [■]

    ─────

    - 누구냐? 누구 부캐야?

    - 저건 솔직히 프로다. 아니, 프로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분임?

    아펠드리체는 채팅창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 누구냐? 진짜 사람이냐?

    - 이건 솔직히 인간이 아니다. 아니, 원숭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다.

    - 혹시 혀로 게임하세요?

    주르륵.

    이지혁은 채팅창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눈가에 차오르는 습기를 닦아냈다.

    "취급이 이리 다르다니……."

    게임이란 분야가 아무리 실력이 전부인 세상이라고는 해도 사람이 아닌 도마뱀에게도 밀리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아펠드리체가 살짝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더니,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피식, 웃는다.

    저년이!

    지금 비웃은 건가! 비웃은 거야?

    감히 하등한 도마뱀 따위…….

    아, 쟤 좀 우월하지?

    드래곤이랑 인간을 비교하면 인간이 많이 좀 열등하지.

    제길, 비만 도마뱀 따위에게 밀리는 영장류라니!

    이지혁은 패배 버튼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이 짓도 이제 못해먹겠네. 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리 계속 지는데…….

    응?

    어라?

    잠시만…….

    나 지금 모든 것의 해결책을 옆에 두고 있던 것 아닌가?

    "도마뱀."

    "네?"

    "내가 말할 것이 있다."

    깔끔하게 승리 버튼을 누르고 몸을 빙글 돌린 아펠드리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언제든지."

    이지혁이 미묘한 표정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내, 내게!"

    "으음?"

    이지혁의 굴욕이 뒤섞인 얼굴로 부르르 떨다가 소리쳤다.

    "게, 게임을 가르쳐라!"

    아펠드리체가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자존심덩어리인 이지혁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뭔가 부탁하는 것인데…….

    그게 게임?

    "인간에게 있어서 게임이란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건가요?"

    "따, 딱히 그렇지는 않을걸?"

    "그런데 그런 부탁이라……."

    아펠드리체는 후음, 입술을 만지작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요. 첫 부탁이 겨우 이런 것이라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니 얼마든지 해드리죠."

    "아펠드리체!"

    이지혁의 눈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그랬다.

    서로 칼을 겨누고 대적한 지 어언 천 년!

    일천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그들이 화합의 첫발을 뗀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이때는.

    * * *

    "뒤로 뺴라고요! 뒤로! 뒤가 무슨 말인지 몰라요?"

    "…하고 있잖아."

    "달팽이관에 이상이 있나요? 청각 신호를 뇌에서 해석하는 단계에 문제가 발생한 건가요?"

    "……."

    뭐지?

    내가 원한 건 이런 그림이 아닌데…….

    "거기선 맞딜을 할 게 아니라 회피를 해야죠, 회피를! 왜 자신보다 강한 적과 무작정 싸우는 건가요? 쥐도 고양이를 보면 도망가는 법인데, 당신은 뭔 배짱으로 일단 싸우고 보는 건가요?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죠? 최소한 인간이라면, 아니, 생물이라면 상대방과 나의 강약을 파악하려는 생존본능이 있는 것 아닌가요?"

    와!

    얘 말 진짜 많았구나.

    아니, 예전에도 말이야 많았지만 이런 수다쟁이 같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얘가 언제부터 이리 다다다 쏘아붙이는 타입이었지?

    본성이 나오는 건가?

    "물러서는 것은 남자의 수치!"

    "몇 백 년이나 구석에 숨어서 도망 다니던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그런 적 없어."

    살짝 기억이 나려고도 하지만, 이지혁은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아니다, 이 악마야!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지금도 그때처럼 도망치란 말입니다! 시궁창을 기어 다니는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란 말입니다! 이기지 못할 적을 보면 도망쳐야지, 왜 싸우는 겁니까! 왜!"

    야!

    너 그럼 막판에 나 왜 막았는데!

    양심도 없나?

    그리고 시궁창을 기어 다니는 쥐새끼라니!

    "내, 내가 언제 그랬어!"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것은 매우 부정확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베라프에 있는 동안의 지혁 씨의 기억이라는 것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 중 하나였을 텐데요. 고정이 풀리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인가요? 제게 묻지 마시고 자신의 뇌에 되물어봐야죠."

    "…나쁜 년."

    이지혁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저 게임 한 번 배워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순서를 생각하고 스킬을 쓰라는 말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칠 거면 뭐하러 게임을 해요! 피아노나 칠 것이지! 하? 이제 보니 뇌가 아니라 손가락에 문제가 있던 건가요? 그 손가락이 잘 안 움직이시는 모양이죠? 잘 움직이게 해드려요? 말을 하시지! 언제든 힐을 해드릴 수 있는데!"

    뭐야, 쟤 왜 저래?

    무서워…….

    "그만 배울게."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운전과 게임은 지인에게 배우는 것이 아닌 것을!

    이지혁은 남편에게 운전을 배우는 초보 마누라가 된 기분이었다.

    운전을… 아니, 게임을 배워봐야 본 성격을 알 수 있다더니, 저런 사람이었나!

    내가 이제까지 속았구나!

    "뭘 그만 배워요! 적어도 원숭이급으로는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마우스 똑바로 안 잡아요?"

    "그, 그만둬!"

    이지혁은 금방이라도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날뛰는 아펠드리체에게서 고개를 쭉 뺐다.

    쟤 용이잖아.

    진짜 브레스라도 나올라.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데! 보통 사람급으로는 해야 할 것 아니에요! 자존심도 없어요?"

    "그래서 배우려고 했는데……."

    "시끄러워요!"

    이지혁이 얼굴을 감쌌다.

    나는…….

    베라프의 멸망의 좌이며…….

    불멸의 혼을 가진 자이자…….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로다.

    그런데 이 꼴이 무엇인가.

    "하, 인생……."

    내 인생이 이리될 줄 누가 알았던가.

    "저……."

    아펠드리체와 투닥거리는 동안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던 최정훈이 천천히 이지혁을 불렀다.

    "응?"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 든 저건 뭐지?

    사전인가? 대형 사전?

    "협상이 대충 끝났습니다."

    협상?

    "미국과의 협상 말입니다."

    "응?"

    그런 게 있었나?

    이지혁이 관심을 보이자 최정훈이 손에 든 서류 뭉치, 아니, 서류 덩어리라 불러야 할 그것을 이지혁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뭔가요?"

    "오늘 작성이 완료된 조건들입니다."

    "……."

    이게?

    이게 조건이라고?

    얼마나 사람이 디테일하고 많이, 그리고 자세하게 뜯어냈으면 뭔 놈의 서류 뭉치가 사전만 할 수 있는가.

    이지혁이 서류를 뒤적뒤적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최정훈 씨."

    "네, 말씀하십시오."

    "이건 그냥 외교 문건 같은데요? 제가 받는 건 없나요?"

    "물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최정훈이 몸을 돌려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있으면 그리 가지 말고 여기서 이야기를 해야죠.

    그런데 저건 뭐지?

    최정훈의 손에 조금 전의 두 배는 될 듯한 두께의 서류 뭉치가 들렸다.

    "설마?"

    퉁!

    잠깐만! 서류를 내려놓는데 효과음이 퉁이면 안 되지!

    인간적으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것이 이지혁 씨와 관련된 조건들입니다!"

    이지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최정훈과 시선을 마주쳤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씨익 웃는 최정훈을 보자 그냥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그래서 음……."

    이지혁이 서류를 슬쩍슬쩍 넘기기 시작했다.

    "이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무료 이용권이라는 건 뭐죠?"

    "말 그대로입니다."

    "카지노도 입장료가 있나요?"

    최정훈이 음흉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카지노라는 것은 좀 더 은밀한 곳을 지칭하는 은어지요. 그 서류에 쓰여진 은어들의 실재적인 의미를 지칭하는 서류가 여기에 또……."

    "그만둬……."

    이지혁이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서류가 더 추가된다면 불살라 버리고 싶어질 것이다.

    "…최정훈 씨는 전자 서류가 뭔지도 모르시나요?"

    "물론 전자 서류야 존재하죠. 하지만 원래 국가 간의 협의라는 것은 종이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뭐, 다 좋아요."

    이지혁이 서류를 슬쩍 밀어놓고는 말했다.

    "조건은 대충 알겠고, 일단 조건이 크고 자세하고 효율적이며, 쓸데없이 디테일하다는 것까지도 이해는 했어요. 그래서……."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뭐죠?"

    "물론 미국을 뒤집어놓고 있는 괴물의 퇴치입니다."

    "괴물의 퇴치라……."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은 엄청 쉽게 한다만, 이 사람 이지혁이 좀비 드래곤이랑 싸우다가 무슨 꼴이 되었는지 기억 못하는 건가?

    조건도 좋고, 다 좋다.

    심지어 이지혁 입으로 조건을 한 번 받아보라고 말까지 했지만, 영 내키지가 않았다.

    "음, 별로 안 가고 싶은데……."

    이지혁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최정훈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지혁에게 다가왔다.

    "으응? 왜 이래?"

    그 미소에서 불길함을 느낀 이지혁이 주춤했지만, 최정훈은 개의치 않고 다가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보시죠."

    최정훈이 내민 폰의 화면을 본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도?"

    "네, 지도입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몬스터의 위치가 바로 여기죠."

    "네."

    "어제는 여기였습니다."

    이지혁의 눈이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제는 여기였죠."

    세 점이 일렬로 이어지자 진행 방향이 보인다.

    "이거, 설마……."

    "이해하셨습니까?"

    "모르겠는데요."

    이지혁이 귀를 후비고 입으로 훅, 불었다.

    "뭔 소리래? 이게 왜요?"

    "…이게 평면 지도라서 감이 잘 오시지 않겠지만, 지금 이 방향이 서울로 오는 직행 루트입니다."

    "방향이 안 맞는데?"

    "원래 지도라는 게 구 형태의 지구를 평면 위에다 펼쳐 놓은 것이라서 이리 보면 방향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으로 오는 거란 말입니다."

    "이쪽으로 안 오는데?"

    최정훈은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바보에게는 바보의 방식이 있는 것을…….

    "이지혁 씨, 방금 본 것은 잊으세요."

    "네."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 미국의 몬스터가 한국으로 오고 있습니다."

    "헐… 그래요?"

    바로 이해하지 마!

    뭔가 의도한 대로 됐는데도 기분 나빠!

    최정훈은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샌프란시스코를 지나서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부수고 한반도로 직행할 것입니다."

    "잠깐, 직행이라고 하기에는 중간 경유처가 너무 많은데? 미묘한 완행이 아닌가!"

    "…날카롭긴."

    최정훈은 헛기침을 했다.

    "게다가 우연히 경로가 겹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럴 리는 절대 없습니다."

    "응?"

    "다른 곳의 몬스터들도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으응?"

    "사실 따져 보면 저번에 처치한 드래곤도 한국으로 돌진했잖습니까?"

    "꿀 발라놨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출현한 모든 몬스터들이 한반도로 돌진 중입니다. 쟤들이 바다로 나서는 순간 저희는 협상 대상을 잃게 됩니다. 저희끼리 방어해야 하느라 허리가 부러지는 것은 기본이구요."

    "그렇겠네요."

    "그러니 아직 미국 땅을 벗어나기 전에 가서 때려잡아 주고, 얻어낼 것을 얻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그러하다. 그런데……."

    "네!"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나도 사람인데 뭔 치트키 쓰듯이 써먹으려 그래!

    "어차피 이지혁 씨가 잡아내지 못하면 아무도 못 잡습니다."

    "하……."

    이지혁이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거, 대책이 필요하겠는데?'

    "미국이면 쉬워요."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아펠드리체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쉽다도 아니고, 미국이면 쉽다고?"

    뭔 말이야, 그게?

    이지혁의 의문에 아펠드리체는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 *

    펜타곤.

    "빌어먹을,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목표물, 계속 이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아직 연락이 없나?"

    "공식 채널로는 답변할 수 없다는 말뿐입니다."

    "망할 놈들!"

    "그래도 비공식 채널로는 이지혁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들어왔습니다."

    "이지혁……."

    그놈의 이지혁이라는 이름을 최근 며칠 사이에 아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정말 그놈만 오면 다 해결되는 건가?"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지금 막고 있는 몬스터는 과거의 그 X1을 능가하는 악마였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고, 어떤 방어도 무시한다.

    그야말로 현세에 떨어진 파괴신이었다.

    미국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하여 막고 있는데도 방어선을 모조리 돌파하며 전진하고 있는 저 괴물을 무슨 수로 막는다는 말인가.

    그 말대로라면 이지혁 하나가 미국이 가지고 있는 힘을 초월한다는 것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미국에 능력자가 없으면 모를까, 전 세계 최상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능력자들조차 하지 못한 일을 극동의 일개 능력자가 혼자 해낼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거꾸로 그가 해내지 못한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자존심을 떠나서 당장 샌프란시스코가 날아갈 판이었다.

    LA에서는 그렇게까지 큰 피해라고 할 수 없었지만, 혼란을 겪는 듯한 모습이 지나고 방향을 튼 이후로는 눈에 띄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전진하고 있었다.

    인정해야 했다.

    그 이지혁이 저걸 처리해 주지 못한다면 샌프란시스코는 흔적도 없이 날아갈 것이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비프음과 함께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야?"

    "와, 왔습니다."

    "뭐?"

    "이지혁이 지금 도착했답니다!"

    "상부 보고 올려!"

    망할!

    두 가지 심정이 동시에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어느새 비전에 뜬 이지혁의 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차라리 날 열 받게 해줘라!"

    "흠……."

    이지혁은 눈앞에 있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건 괴물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말이야.

    "너, 저거 컨트롤 안 되냐?"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무리예요."

    "니 권속이나 다름없잖아."

    "글쎄요. 제가 빛의 정령을 주로 다루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들을 권속이라고 할 수는 없죠. 그들과 저는 명백하게 계약관계니까요. 게다가 저와 계약한 정령도 아니고, 설사 계약을 했다 하더라도 저 정도 상위급 정령은 지금으로서는 다룰 수가 없어요."

    "흐음……."

    이지혁이 멀리 보이는 새하얀 빛 덩어리를 보며 턱을 긁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그곳에 있는 것은 빛의 상급 정령인 세티.

    부릴 수 있다면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존재지만, 이렇게 적대한다고 쳤을 때는 정말 골 치아픈 존재였다.

    특히나 이지혁에게는 더더욱.

    본래라면 세티보다 좀비 드래곤이 좀 더 까다로운 존재여야 하겠지만, 이지혁에게 있어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암흑의 힘을 주로 사용하는 이지혁에게 있어 빛의 정령은 상극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신성력으로 온몸을 둘둘 감싸는 하이 프리스트급은 아니겠지만, 빛 역시 어둠을 물리치는 존재니까.

    얼마 전이었다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손을 털어버리고 물러섰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이지혁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세티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하…….

    이지혁이 옆에서 세티의 외모에 감탄하고 있는 정해민을 보며 눈살을 확 찌푸렸다.

    "너 좀 가라."

    "돌아오기 힘들 텐데?"

    "끄응."

    그냥 입 닫고 셔틀이나 할 것이지!

    "저게 예쁘냐, 예뻐?"

    "솔직히 예쁘잖아."

    그래, 뭐, 빛 덩어리가 새하얀데다 몸매 빵빵한 여자 실루엣이니 이뻐 보이기도 하겠지.

    근데 저 이뻐 보이는 게 사람을 얼마나 죽였을지는 생각해 봤니?

    희생자 유가족이 니 말을 들었다면 니 조동아리를 잘라서 튀겨 먹겠다며 방방 뛰었을 거다, 이 청순한 것아.

    이지혁이 혀를 쯧쯧, 차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세티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래서 회유는 불가능하다?"

    "네, 절대로."

    "그럼 제거해야지."

    정령계를 떠난 정령은 세상에 오염된다.

    계약으로 보호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소환자에게서 마나를 공급 받기 때문에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테지만, 어떠한 경우에서든 계약자 없이 현세에 떨어져 버린 정령의 말로는 둘 중 하나뿐이었다.

    마나를 얻지 못해 소멸되거나…….

    아니면 외부의 마나를 받아들여 타락하거나.

    순수한 마나의 결정만을 받아들이던 정령에게 현세의 탁한 마나는 불순물이 잔뜩 낀 혈액과도 같은 것이다.

    거부반응을 일으켜 소멸하거나, 적응해 타락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도 마나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

    이곳에는 마나가 없다.

    그러니 남은 것은 소멸뿐이다.

    진로를 한국으로 잡은 이유도 아마 간단할 것이다.

    마나의 향기가 그곳에서 가장 강렬하게 흘러나올 테니까.

    이지혁의 마나가 말이다.

    '아니, 좀비 드래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닌가?'

    뭐, 여하튼 아무려면 어때?

    "결론은 간단하네."

    소멸시켜야지.

    도움이 안 된다면 말이야.

    우우우웅.

    공명하듯 우는 세티를 바라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정령이라는 게…….'

    이리 자주 보이는 거였나?

    애초에 정령이란 게 베라프에서도 흔한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나 소환되지 않고 배회하는 정령이라는 것은 길 다가 옆을 지나가는 데스 나이트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벌써 몇 번째인가.

    '정령이 쉽게 넘어온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지혁이 고민하는 동안 뭔가 눈앞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날아와요."

    아펠드리체의 말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아펠드리체의 실드가 펼쳐진 것이다.

    "역시 드래곤 로……."

    응?

    왜 내 앞에는 없…….

    파아아아아!

    거대한 빛의 파동이 그들을 덮쳤다.

    빛에 덮쳐진다는 이상한 감각에 모두가 전율할 때, 등 뒤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미친!"

    하지만 그 소리는 끝도 없이 멀어져 갔다.

    빛이 명멸하고 사라진 자리에 모두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아펠드리체는 한 번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는지 몸을 살짝 숙인 채 긴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후……."

    심호흡을 한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돌리니 모두가 등 뒤를 돌아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음?"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저 멀리 뭔가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으음?"

    뭐지, 저 솟아 있는 두 개의 파란 기둥은?

    끝에 보이는 것이…….

    신발?

    저거 다리야? 다리? 사람 다리?

    그럼 저 파란색 바지의 주인공이야 뭐…….

    두둑! 두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꺾이더니, 앞뒤로 반동을 준다.

    "으아아아앗!"

    겨우 바닥에서 빠져나온 이지혁이 머리에 가득한 흙을 털지도 않고 소리쳤다.

    "이 망할 도마뱀 년아! 막으려면 같이 막아야 할 것 아냐!"

    "굳이 지혁 씨 앞에까지 실드를 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효율적이니까요."

    "그노무 효율!"

    저 드래곤은 머리에 계산기가 들었나!

    "막을 수 있으시잖아요. 지금도 딱히 피해가 크지 않아 보이고."

    "그냥 좀 닥쳤으면 좋겠다."

    "원하신다면."

    마지막까지 영 마음에 안 드는 마무리로군.

    이지혁이 고개를 좌우고 꺾고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세티를 보았다.

    "가볍게 인사나 한 것 같은데, 이 정도인가?"

    "지금의 우리로서는 쉽지 않은 상대죠. 냉정하게 말한다면, 저는 절대 못 이겨요."

    "쯧, 드래곤 로드 체면이 있지."

    "전 지금 로드가 아니니까요."

    아펠드리체의 눈이 묻고 있다.

    당신은 이길 수 있나요?

    이지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못 이기지."

    "……."

    "나 혼자서는 말이야."

    하지만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방법이야 있지.

    이지혁이 양손을 휘저었다.

    "뭐, 좀 더 놀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내가 좀 들떴거든.

    그게 몇 달 안 된 거 같은데도 참 오래된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가 봐?

    그러니…….

    나를 좀 상대해 줘야겠어.

    우우우우!

    다시금 공명을 시작한 세티를 보며 이지혁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이지혁의 우수가 그린 문양이 허공에 거대한 검은 홀을 열기 시작했다.

    이지혁의 머릿속으로 아펠드리체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 * *

    "모두 데려왔어요. 어차피 그 세계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니까요. 당신에게 종속된 마물들. 물론 베라프에 남아 있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지금의 당신에게는 그 소수도 소수가 아니겠죠?"

    당연하지.

    몇 만 단위를 넘어, 백만이 넘는 마수의 군단을 이끌던 이지혁에게는 극소수에 불과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도 그게 소수일까?

    "열려라!"

    이지혁이 외치자 허공에 세 개의 게이트가 열렸다.

    그중 가장 중앙에 위치한 게이트에서 무시무시한 핏빛 눈동자가 빛나더니, 검은 육체를 지닌 생명체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커엉!

    뛰어나온 생명체는 너무도 귀엽고 깜찍했다.

    "오식아!"

    이지혁의 몸에서 뽑혀져 나온 촉수가 오식이의 육체를 파고들어 마나를 공급하기 시작한다.

    커어어엉!

    거대한 오거의 형태를 되찾은 오식이가 포효했다.

    음, 저 목줄… 특수 고무로 하길 잘했지. 변신할 때마다 목줄 사야 될 뻔했네.

    좌측의 게이트에서는 섬에다 박아놓은 대망과 히드라가 뛰쳐나왔다.

    "자, 오랜만에 날뛰어보자."

    오식이가 이지혁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어…….

    우측의 게이트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으음?"

    정해민이 조금 불안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떨리던 게이트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보인다 싶더니, 이내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입가에 피거품을 물고 밖으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꺄아악!"

    정해민이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몬스터들은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저 멀리 보이는, 여인의 형상을 띤 빛의 정령이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거지.

    이 광경을 보고 싶었어.

    크아아아아!

    게이트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오던 괴수들이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몬스터의 물결에 얽히고 바닥을 구르면서도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그 광포한 파도 앞에 세티의 육신마저 미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하지만 더 질릴 일은 따로 있었다.

    "대체 저게 뭐야!"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관계자들이 사방에서 욕설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자는 악마인가!

    세티에게 덮쳐드는 몬스터 떼를 보며 이지혁은 간만에 배를 잡고 웃어 댔다.

    "길낄낄낄."

    마나를 얻고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던 무언가가 충족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랬지.

    아니! 미약하다!

    이게 아니다! 이게!

    좀 더 많은!

    저런 저열한 몬스터가 아니라, 정말 심층의 마수들의 떼를 풀어놓…….

    "지혁 씨!"

    이지혁이 아펠드리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끙……."

    뭔가, 순간 사로잡힌 기분이었는데?

    이지혁이 고개를 흔드는 순간, 끝도 없는 마수의 무리가 세티에게 덮쳐들었다.

    동시에 거대한 빛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 * *

    고오오오!

    순결하다고까지 생각될 만큼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빛에 닿은 몬스터들의 육체가 반쯤 녹아 들어가며 비명을 질러 댔다. 거칠고 높은 탁성이 마구 터져 나온다.

    "아……."

    정해민은 귀를 틀어막았다.

    비명 소리가 중창으로 울리고 또 울려 마치 지옥에라도 온 듯한 끔찍한 소음들을 만들어냈다.

    반쯤 녹아든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앞으로 돌진하고 또 돌진한다.

    "낄낄."

    하지만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되레 눈을 빛냈다.

    정령과 몬스터는 상성이 맞지 않다.

    물리 공격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는 정령을 몬스터로 잡아낸다는 것은 멍청한 짓거리임이 틀림없다. 마치 거대한 호수에 불덩어리를 던져 넣어 증발시켜 버리려 하는 짓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 비효율적인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효율?

    그런 건 아펠드리체에게나 어울리는 말.

    이지혁의 방식은 간단했다.

    압도적인 물량과 압도적인 마나를 바탕으로 효율 따위는 무시하고 쏟아붓는 것.

    그것이 바로 베라프를 지배했던 이지혁의 방식인 것이다.

    지구로 돌아온 이후로는 할 수 없던 방식을 조금이나 되찾은 이지혁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멍청한 짓이면 어떤가.

    불을 던지고, 던지고… 수천 번, 수만 번, 수억 번 던져 대다 보면 언젠가는 호수가 마르기 마련이다.

    콰아아아!

    다시 한 번 빛이 터져 나오고 몬스터들이 그 자리에서 증발하며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를 새로 밀려오는 몬스터들이 다시금 채워 넣었다.

    사라진 몬스터보다 더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키에에에엑!

    카아아아악!

    몬스터들이 세티에게 도달하여 발톱을 휘두르고 물어뜯는다.

    날카로운 발톱은 물이라도 가른 것처럼 허무하게 세티의 몸을 뚫고 나가고, 뾰족한 이빨은 허공을 물어뜯은 것처럼 과격하게 맞물렸다.

    부르르.

    하지만 타격이 아주 없지는 않은지, 세티의 몸이 잠시 일렁이더니 뒤로 쭈욱 물러났다.

    "쫓아라."

    이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떨어지자 몬스터들이 뒤로 물러서는 세티를 향해 질주했다. 네 발이 바닥을 긁으며 매캐한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아……."

    정해민이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아영 역시 질린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해민이 머뭇머뭇대다가 서아영을 살짝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심정을?

    "기분 이상해."

    "으응."

    서아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새하얀 빛으로 몸을 감싼 아름다운 여인의 형태를 가진 정령과 몬스터를 부리며 검은 연기를 전신으로 줄줄이 뿜어내는 괴인.

    누가 봐도 악당은 이지혁이다.

    그 악당이 지금 얼굴 가득 기분 나쁜 미소를 마구 새긴 채 낄낄대며 정령을 몰아치고 있었다.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서아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혼자 흘린 말이건만, 귀신같이 캐치한 정해민이 조금 뿌루퉁한 얼굴로 대답한다.

    "착하잖아."

    "으응?"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내 귀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은 맞나?

    서아영이 손가락을 들어 귀를 마구 후볐다.

    "뭐라고 했어?"

    "왜? 착하잖아."

    "……."

    서아영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이 언니… 미쳤어.

    맛이 가도 이 정도면 많이 갔다.

    이지혁과 착함이라는 것은 조합되어서는 안 되는 단어다.

    조합하는 순간, 세상이 멸망해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단어라고!

    이대로는 안 된다!

    그래도 나름 좋아하는 언닌데, 이렇게 사람이 망가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서아영이 어떻게 해서든 정해민을 이지혁과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이지혁은 세티를 더욱 몰아치고 있었다.

    "도주?"

    지상에서 밀려오는 몬스터의 웨이브를 감당하지 못한 세티가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안 되지."

    이지혁의 양손이 허공을 가르자 바닥에서 검은빛이 일렁였다.

    잡아라!

    세티의 발아래 지면이 검게 물들더니, 강철 같은 강도를 가진 검은 가시덩굴이 줄기줄기 솟아올라 세티의 전신을 휘감았다.

    아아아아!

    비명과도 같은 아리아가 울려 퍼진다.

    콰득콰득!

    바닥에서 튀어 오른 가시덩굴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세티를 쫓던 몬스터들도 가시덩굴에 꿰뚫리고 갈라져 피를 토해냈다.

    하지만 이지혁은 몬스터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세티를 옭아매고 또 옭아맸다.

    마나가 담긴 넝쿨은 실체가 불분명한 세티마저도 가둔 채 조이기 시작했다.

    세티가 마구 일렁인다.

    빛이 명멸하듯 밝았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한다.

    "물어뜯어라."

    유부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음성이 파고들자, 몬스터들이 그 두 눈으로 흉성을 뿜어내며 입으로는 거품을 문 채 가시덩굴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돋아난 가시들이 넝쿨을 타고 오르는 몬스터들의 손발을 꿰뚫고 살을 갈라 댔지만, 몬스터들을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넝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카아아아악!

    기어오르고 떨어져 얽힌다.

    몬스터들이 좀비 떼처럼 전진하는 모습은 공포를 넘어선 그 무언가를 불러일으켰다.

    정해민이 그 광경을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서워.'

    이지혁을 본 이후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초반에 싫다거나 짜증나는 놈이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단 한 번도 그가 무섭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진 힘에 비해서 조금은 만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지금 몬스터들의 웨이브 가운데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이지혁의 모습은 뭔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보기만 해도 불길함이 절로 이는 검은 마나를 줄줄이 뿜어내며 미칠 듯이 펄럭이는 옷과 거꾸로 솟구친 머리카락,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까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이지혁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형태와 표정이 어우러져 사람을 소름 돋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몸이 떨려온다.

    정신이 아찔하고 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그녀의 어깨를 서아영이 꽉 잡아주었다.

    "언니!"

    어깨를 꽉 누르는 손길.

    "으응."

    정해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차려야지, 지금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위험한 상황이 닥쳐오면 바로 모두를 대피시키는 것이 그녀의 임무니까. 상황을 항상 주시해야 한다.

    '눈을 돌려서는 안 돼.'

    그녀가 가진 역할에 대한 의무감.

    그리고 이지혁을 조금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

    정해민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서아영은 몸을 살짝 떨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저 몬스터들이 이지혁 씨의 말을 듣는 거지?"

    저번부터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히드라나 대망 같은 것들이야 어떻게 굴복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그것도 말은 안 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그러하니 믿지 않을 수가 있나.

    하지만 저 몬스터들은 지금 처음 보는 것들이다. 이지혁의 행동반경이야 빤하고, 그가 출근하지 않으면 뭔 짓을 하고 사는지도 눈에 잡힐 듯이 빤하다.

    딱히 다른 곳에서 사전 공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들이 이지혁의 말에 죽음도 불사하고 있으니 그녀들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것이니까요."

    그런 그녀들의 의문을 풀어준 것은 역시나 아펠드리체였다.

    그리고 그녀가 이지혁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티를 내자 즉각적으로 정해민이 반응했다.

    "무슨 말이죠?"

    정해민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 작은 생물은 왜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지는 것일까?

    딱히 그녀에게 해악을 끼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말 그대로예요. 저들은 그의 것이니까요."

    "저 몬스터들이?"

    "네."

    서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 여자?

    "어떻게 몬스터들이 이지혁 씨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아펠드리체의 대답은 그녀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웠다.

    "세상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죠."

    "네?"

    "그는 모든 것을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 다시 말하자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존재. 한 세계를 그 손 안에 넣고 신과도 싸운 자."

    서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여자…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동문서답이 이런 건가 생각하는 서아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펠드리체는 자신의 할 말만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가 가졌던 것의 극히 일부분만이 온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에 위협이 될 만한 힘으로는 충분하죠."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극히 일부분?"

    저게?

    서아영의 눈에 끝도 없이 밀려가는 몬스터들의 행진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가 아니라 나라 하나를 파괴하고도 남을 듯한 몬스터들의 웨이브가 펼쳐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전신이 떨려올 정도인데, 저 몬스터들이 극히 일부분이라고?

    그럼 대체 전체는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서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저 여자의 말은 어쩐지 신뢰가 간다. 사람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여자였다.

    "대체 그 다른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펠드리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높은 그녀의 지적 수준으로도 그 세월을 짧은 언어로 축약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장 낮은 곳에 떨어져서 오로지 그 자신의 힘만으로 세상 전체와 싸운 이지혁의 삶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겠는가.

    그건 그야말로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드래곤 로드인 그녀마저 그를 전력으로 막고 또 막아냈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오르고 또 기어올라 마침내 신들의 방해마저 뚫어내고 자신이 갈망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그 결과는…….

    아펠드리체가 가라앉은 눈으로 몬스터 떼를 조종하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녀에 눈에는 딱히 좋아 보이지 않지만, 그가 원한 것이다.

    "그는 세상과 싸웠고, 신의 의지와도 싸웠어요. 홀로 모두와 투쟁한 자죠."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 소리예요?"

    "알아듣기 힘들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이해시킬 자신도 없네요.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말하라면 정보를 나열할 수 있겠지만,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말하라면……."

    그건 무척이나 슬픈 이야기가 되어버리니까.

    아펠드리체가 낮은 한숨을 쉬는 동안 이지혁의 몬스터 떼가 세티를 가르고 찢고 물어뜯었다.

    "아!"

    반유체 상태라 물리적 타격이 거의 먹히지 않음에도 이지혁의 넝쿨에 짓눌리고 끝도 없는 몬스터들의 러시 앞에서 세티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남은 것은 소멸.

    좀비 드래곤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힘을 뿜어낼 수 있는 상급 정령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패배였다.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시체를 뜯어먹는 까마귀처럼 세티를 물어뜯던 몬스터들이 우르르 뒤로 밀려났다.

    이지혁이 낄낄대며 천천히 세티에게 다가갔다.

    세티의 새하얀 육체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 * *

    최상위의 정령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존재다.

    차원을 넘어 세상 전체에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정령왕급은 아니지만, 하나의 세계 속에서는 그 이상 가는 힘을 찾기 힘들 정도의 절대적 존재.

    특히나 빛의 상위 정령인 세티의 경우에는 그 특유의 성스러운 느낌으로 규모가 작은 세계에서는 신으로 추앙될 만큼 위대한 존재 중 하나였다.

    그런 세티가 지금 이지혁의 발아래 짓눌리고 있었다.

    아펠드리체는 그런 이지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능력.

    그저 덮치라 지시하고 보조격으로 마법 한 번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 장난과도 같은 손짓에 빛의 상위 정령이 무력화되어 버렸다.

    이것이 이지혁.

    베라프를 할퀴어 찢어발겨 버린 자의 힘이다.

    좀비 드래곤을 잡아내는 데는 그리 고생을 하던 이지혁이건만, 아주 소수의 몬스터 군단이 주어지는 순간… 과거 그 '멸망의 좌'의 위용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부르르.

    아펠드리체는 몸을 떨었다.

    거의 완벽하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그녀의 정신력으로도 과거의 그 이지혁을 떠올리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마계의 코어와 완전하게 동조하여 수백만의 마수를 부리고 무한의 마나를 뿜어내는 이지혁은 인간의 몸으로 신격에 오른 이였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농밀한 마나를 뿜어내며 세상을 마수와 마나로 뒤덮어 버린 존재였다.

    그야말로 멸망의 권좌.

    그냥 붙은 말이 아닌 것이다.

    "자자, 어디 보자고."

    이지혁이 소름 돋는 미소를 지으며 세티의 목 언저리를 발로 짓밟아 눌렀다.

    "으……."

    정해민이 그 광경을 보며 치를 떨었다.

    꼭 저렇게 악당처럼 굴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머리로야 이지혁이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는 쪽이고, 저 새하얀 정령이 세상을 파멸시키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반대이다 보니 괴리가 상당했다.

    아아…….

    괴로워하는 세티의 얼굴을 보자 정해민은 덩달아 마음이 아파졌다.

    하지만 그뿐.

    이지혁의 눈동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지혁이 입을 살짝 벌려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는 세티의 귓가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알고 있어?"

    물론 세티의 대답은 없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정령이 있지. 빛의 정령, 불의 정령, 물의 정령, 얼음의 정령 등등……"

    하지만 자연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는 정령이 있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은 없지. 왜일까?"

    아주 간단하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어둠이란 것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뜬구름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어둠의 정령이라는 것은 없는 거야. 하지만 말이야……."

    어둠이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듯이…….

    어둠의 정령 역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빛의 부재가 어둠을 만들어내듯이 말이야.

    "낄낄."

    이지혁의 손이 세티의 목을 움켜잡았다.

    "자, 나를 고생시킨 대가는 치러야지?"

    딱히 고생한 것은 없지만… 뭐, 그래도 사람이 기분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디 버텨봐라."

    소멸하든가.

    아니면…….

    타락하든가.

    이지혁의 우수에서 검은 마나가 뭉클뭉클 피어올라 세티의 육체 안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같은 울음이 허공을 찢어버리듯 울려 퍼진다.

    "낄낄낄."

    이지혁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세티의 얼굴을 보며 낄낄댔다.

    빛의 정령에게 어둠의 마나를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

    티끝 하나 없이 투명한 물에 검은 먹물을 뿌려 넣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먹물은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그 양이 많으면 물은 어느 순간 먹물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이지혁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순백의 불순물 없는 백마력에 이지혁의 농축된 흑마력을 밀어 넣자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흑마력이 세티의 육신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세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투툭!

    검은 마력이 마치 부풀어진 혈관을 타고 흐르듯 유영하자 세티의 새하얀 육체가 들썩였다.

    부풀어 오르고 다시 가라앉고, 새하얀 눈이 검고 하얗게 바뀌기를 반복했다.

    아아아!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

    상급 정령.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괜찮은 전력이 되겠지.

    마나 반발로 소멸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뭐 나쁠 것 있나.

    어차피 처치해야 할 존재였으니까 말이야.

    쨍그랑!

    이윽고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음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세티의 육신이 일순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흠……."

    이지혁이 낮게 휘파람을 불고는 세티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새하얗던 육체는 새카맣게 바뀌었고, 순결해 보이던 얼굴은 더없이 고혹적으로 바뀌어간다.

    몸 주위를 빛내던 새하얀 빛 덩어리들이 사라지고… 목 뒤로부터 다리 끝까지 길게 늘어지는, 하늘하늘해 마치 천 같은 날개들이 그녀의 육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타락을 축하하지."

    어둠의 정령이여.

    이지혁이 세티, 아니, 세티였던 존재의 얼굴을 쓰다듬자, 그녀는 고혹적으로 새빨간 혀를 내밀어 이지혁의 손을 핥았다.

    "이름을 붙여줄까?"

    뭐가 좋을까?

    그냥 거꾸로 해서 티세?

    음, 이건 촌스럽고…….

    "티리에로 하자."

    이름이 붙어 기쁘다는 듯 허공을 한 바퀴 빙글 돈 티리에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이지혁에게로 다가와 그의 등으로 스며들었다.

    본능적으로 가장 어둠이 충만한 곳을 찾아드는 것이다.

    "흠……."

    이지혁도 거부 없이 그녀를 받아들였다.

    이지혁의 마나를 받아들인 이상 그녀는 이지혁과 일종의 계약관계가 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약관계라기보다는 종속 관계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아펠드리체가 천천히 이지혁에게 다가와 조금은 날이 서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 버릇은 변하지 않았군요."

    "응?"

    "존재의 소멸이 차라리 축복일 수도 있는 거예요."

    이지혁이 혀를 찼다.

    "고리타분한 건 여전하군. 뒈지는 것보다야 존재가 바뀌더라도 살아 있는 게 좋은 거야. '뒈질래, 변할래?'를 물으면 누가 변하지 않겠다고 하겠어? 너처럼 천년만년 사는 것들이야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니까 그따위로 말하는 거고."

    "죽으려고 신살기를 심장에 찔러 넣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야…….

    나는 특별케이스니까 말이지.

    일반적인 경우를 나에게 대입하면 안 되잖아, 멍청한 도마뱀 씨?

    "뭐, 그래도 본인은 기뻐하는 것 같은데?"

    이지혁의 어깨 위로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 티리에가 이지혁의 볼을 살짝 핥더니 아펠드리체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마치 연적이라도 보는 듯한 그 적의 어린 시선에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 축복을 받던 존재가 타락하여 암흑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유쾌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언제나 그러했다.

    자신의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 버린 반동인지, 언제나 기회만 생기면 다른 존재들을 타락시키길 즐겨했다.

    그런 성향이 있으니까 수백만의 마수를 지배할 수 있던 것이겠지만.

    "카악!"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들썩이자 이지혁이 세티의 머리를 잡아 아래로 내리눌렀다.

    그러자 세티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지혁의 등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육체 안에 보관할 건가요?"

    "마땅히 둘 데가 없으니까."

    "그것 역시 이제는 마의 존재. 마의 존재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요?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하게 하는 거죠?"

    "알긴 아는데, 그렇다고 밖에 두면 소멸할 테니 방법이 없잖아?"

    "하……."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을 휘저었다.

    우웅!

    아펠드리체의 앞에 작은 공간이 열렸다.

    그녀가 손을 안으로 쭉 밀어 넣더니 뭔가를 잡아 뺐다.

    "아공간 연결되는 거야?"

    "원래 공간은 못 열어요. 따로 준비한, 아주 작은 공간이죠."

    "……."

    그래도 저 안에 있는 거 아무거나 꺼내서 팔면 떼부자 되겠지? 평생 놀고먹어도 남을 만큼의 돈이 생길 거야.

    누가 뭐라고 해도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들만 챙겨 왔을 테니 말이야.

    아펠드리체가 아공간에서 꺼낸 팔찌를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여기 넣어두세요."

    "얘 암흑 정령인데?"

    "무속성이에요."

    "그럼 뭐."

    이지혁이 팔찌를 받아 손에 차더니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뭔가 새파란 트레이닝복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굵은 금속 팔찌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거 분명히 아티팩트겠지?

    그러고 보니…….

    이지혁이 팔찌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템에도 누구보다 관심이 많던 이지혁이다.

    신발 한 짝만 해도 베라프의 고위 법사라면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구하고 싶어 하는 신급의 아티팩트로 전신을 둘둘 두르고 살아왔는데…….

    이지혁의 머릿속에 집 장롱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로브가 떠올랐다.

    이사 오면서 엄마가 버리는 바람에 새벽에 그 쓰레기장을 이 잡듯 뒤져서 겨우 다시 찾아온 이지혁의 보물.

    하지만 이제는 그저 쓰레기일 뿐인, 쓰레기 같은 보물.

    "너 혹시 아티팩트 수리 가능하냐?"

    "가능하겠어요?"

    "하……."

    쓸모없는 도마뱀 년!

    이지혁과 아펠드리체가 투닥투닥거리는 동안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 정해민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거, 이제 데리고 다니는 거야?"

    저거?

    "어. 이제 내 종이야."

    정해민이 다시금 이지혁의 등 쪽에서 몸을 내민 티리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사람이 아니다.

    물론 사람은 아니다.

    그래…….

    그런데…….

    저 뭔가 길쭉길쭉하고 쭉쭉빵빵한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까 전에도 예뻤는데, 지금은 그 예쁨을 넘어서 뭐랄까…….

    "색기가……."

    이지혁의 눈이 커졌다.

    "너 지금 욕했냐?"

    "아니! 그 색기 말고!"

    "그럼 무슨 색긴데!"

    "…아냐. 말을 말아야지."

    정해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 너무 야한 것 같은데?"

    "이게?"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진짜 야한 걸 못 봤구나?"

    "……."

    정해민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너, 너는 뭐 많이 봤어?"

    "나?"

    이지혁이 거만한 정치인 같은 얼굴이 되어 한껏 배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 너 같은 꼬맹이와 말해 뭐하겠냐. 입만 아프지."

    "…너."

    정해민이 뭔가 부들부들 하려는 찰나, 아주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그는 많은 것을 보았죠."

    "응?"

    아펠드리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인간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향락의 극치를 보았을 테니까요. 특히나 이 세계의 인간이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하렘의 극에 오른 사람이니까요."

    "하, 하렘?"

    정해민의 눈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떨렸다.

    하렘이라고?

    그 하렘이 내가 알고 있는 그 하렘인가?

    "으……."

    정해민이 시동을 거는 것도 모른 채 이지혁은 피식 웃었고, 아펠드리체는 부연을 했다.

    "수많은 이종과 환상체들에 둘러싸여 살았죠."

    "이, 이종?"

    "말하자면 엘프라든가, 다크 엘프… 뭐, 그런 애들?"

    부르르르.

    정해민의 등이 크게 떨리는 것을 본 서아영이 기겁하여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뭐야!"

    "꺄아악!"

    기겁을 하여 뒤로 물러난 이지혁과 로드의 체면이고 뭐고 비명까지 질러 버린 아펠드리체가 경악을 담은 눈으로 통곡을 하고 있는 정해민을 보았다.

    쟤는 무슨 사이렌 혼종인가?

    음파 공격도 정도가 있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겨우 정해민에게 사일런스를 걸어버린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저 여자는 정말 연구 가치가 있네요."

    "에휴……."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상이 없어, 정상이!

    * * *

    이지혁 일행이 그렇게 투닥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 인간들은 대체 뭐지?"

    미국을 뒤흔들어 놓은 몬스터를 상대하며 긴장감 없는 모습으로 터덜터덜 접근할 때만 해도 미친놈들을 불렀구나 했는데,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딱히 무슨 힘을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신들이 손도 대지 못했던 몬스터를 순식간에 제압해 버렸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크리스토퍼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마인(MINE)이 위험인물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한국 놈들만 아니라면 크리스토퍼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그의 존재에 대해 주목했을 것이다.

    그만큼 크리스토퍼는 이지혁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위험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위험도는 이런 게 아니었다.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지혁 개인의 강함이었다.

    이지혁은 개인만 두고 봐도 세상에 둘도 없는 능력자다.

    그 강함만으로도 세계의 감시를 받고 있는 존재란 말이다.

    혼자 움직인다고 가정했을 때도 이지혁은 X등급이라는 경계도를 새로 만들어낼 만큼 위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이 군단을 이룬다면, 거기에서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크리스토퍼의 눈에 멀뚱멀뚱 선 채로 이지혁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몬스터들의 군단이 보였다.

    '이미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었어.'

    저 이지혁이 가진 힘의 총량을 어느 정도로 파악해야 할 것인가.

    이미 웬만한 국가가 가질 수 있는 힘은 아득히 초월했다.

    상성의 문제가 있겠지만, 이미 홀로 강대국급의 무력을 갖췄다고 봐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크리스토퍼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지혁이 열어놓은 게이트로 몬스터들이 하나하나 들어가는 모습을 본 크리스토퍼가 전화기를 들었다.

    "몬스터 보관 구역 확인해. 그리로 몬스터들이 가고 있나? 뭐? 안 온다고?"

    크리스토퍼가 전화기를 꽉 움켜잡았다.

    "제길!"

    최초 아펠드리체가 나타났을 때, 그녀와 함께 나타났던 몬스터들은 인간에게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펠드리체의 요구대로 그들을 보관해 준 것 역시 크리스토퍼였다.

    인간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몬스터들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혹시 이들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 마지막으로 아펠드리체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 뒤섞여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런데 그 몬스터들이 지금 모조리 이지혁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잘만 활용하면 정말 세계 정복이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던, 무시무시한 몬스터의 군단이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크리스토퍼는 복잡해진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지혁…….

    이지혁!

    저 골칫덩어리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 같아서는 아예 존재 자체를 지워서 상황을 깔끔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지만, 오늘 보았듯이 이지혁이 없다면 결국 저 몬스터를 잡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류를 위해서는 이지혁이 필요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이지혁이 있기에 인류는 위험해질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크리스토퍼는 개인이 강대한 힘을 가졌을 때 어떠한 결과가 생겨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크리스토퍼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저 이지혁을 통제할 수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막말로 그가 어느 순간 독하게 마음먹고 저 몬스터 떼를 미국에 풀어놓기만 하더라도 미국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어야 할 것이다.

    제정신이라면 같이 죽자고 그런 짓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인간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은 생물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크리스토퍼의 눈에 자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양손을 올려 리젠트를 쭉 밀어 다듬은 남자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최정훈.'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인물이다.

    일개 국가 공무원 주제에 이지혁을 손에 넣어 일국의 수장 이상의 권력을 손에 쥔 자.

    그 스스로는 자각하고 있지 못한 듯하지만, 지금 저자의 영향력은 크리스토퍼조차 아득하게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창한 영어 발음에 크리스토퍼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입니다."

    최정훈은 빙긋 웃으며 호감을 드러냈지만, 크리스토퍼의 눈에는 그 모습마저 왠지 얄밉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시죠?"

    "확인은 해야 하니까요."

    "확인?"

    최정훈이 왼손에 든 묵직한 서류 가방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간 크리스토퍼가 한숨을 내쉬며 서류 가방을 받아 들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약속은 이행될 겁니다. 미합중국의 이름으로 한 약속을 어길 만큼 저희는 신의 없지 않습니다. 꽤나 불쾌하군요."

    "저도 못 믿는 건 아닙니다."

    "확실한 게 좋다는 겁니까?"

    최정훈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이내 한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을 시, 저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무서워서 그런 거죠."

    물론 최정훈이 가리킨 곳에는 이지혁이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는 서류 가방을 뒤로 밀었다.

    그의 부하들이 서류 가방을 받아 들었다.

    "확인해, 꼼꼼하게."

    "예."

    귀찮은 일을 떠넘겨 버린 크리스토퍼가 날카로운 눈으로 최정훈을 노려보았다.

    "이지혁 씨가 껄끄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변에도 신경을 쓰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미묘한 어감에 최정훈이 무섭다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저 사람은 귀찮은 것을 매우 싫어하니 손에 익은 것이 사라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매우 쪼잔하고 소심해서 원한을 풀 대상을 반드시 찾아내죠."

    소심하고 쪼잔하다라…….

    기억해 둬야 하겠군.

    이지혁에 대한 정보 하나를 더 기억한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테니까. 앞으로 또 언제 손을 벌려야 할지 모르는데, 굳이 이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관계를 틀어버릴 필요는 없지."

    하지만 너는 조심해야 할 거야.

    크리스토퍼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최정훈은 멋쩍게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이어진 비꼼에도 최정훈은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크리스토퍼는 눈앞의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정말 어떻게든 제거를 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인간은 결국은 거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거물이지.'

    새삼 눈앞의 젊은 남자의 힘을 실감하며 크리스토퍼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건 그렇고, 다른 국가들은 어쩌실 셈입니까?"

    미국의 몬스터는 해결되었다지만, 아직 다른 몇몇 국가들은 새로 출현한 몬스터들을 감당하지 못해서 버거워하고 있었다.

    미국의 능력으로도 어찌하지 못한 몬스터들을 다른 나라들이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글쎄요."

    최정훈은 머리를 긁더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워낙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양반이라……."

    "당신 입장에서는 되레 그게 좋은 것 아닌가?"

    "예리하시네요."

    이지혁이 날뛸수록 최정훈의 입지는 올라간다.

    최정훈도. 크리스토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하튼 좋습니다. 당신을 인정해야겠지. 그러니 새로운 제안을 하는 바요."

    "네?"

    "양국에 모두 긍정적일 수 있는 일이지요."

    크리스토퍼가 활짝 웃었다.

    * * *

    "하……."

    상황을 대충 정리해 놓고 한국으로 돌아온 일행은 알 수 없는 피로감에 모두 늘어졌다.

    "끄응."

    특히나 이지혁은 머리를 부여잡고 의자에 늘어졌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종속의 인장을 박아 넣은 몬스터들을 움직이는 데는 마나가 딱히 크게 필요하지 않지만, 대신 극도의 정신력이 소모된다.

    그들의 의지를 한곳으로 모으고 명령을 따르게 하는 것은 막대한 심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베라프에서는 수백만의 대군을 이끌어도 머리에 무리가 간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기야 이지혁의 뇌는 고정되어 있으니까 피로가 생긴다 해도 바로바로 리셋이 되었으니.

    '그래서인가…….'

    겨우 천이 넘는 몬스터를 다뤘다고 뇌가 노곤노곤하게 녹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다니… 썩었다, 썩었어.

    '더럽게도 약해졌네.'

    자신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실감이 확 났다.

    마법의 경우는 지금까지 마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으니 그리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만, 이 경우는 전혀 달랐다.

    지금 이지혁에게 과거의 몬스터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 리도 없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십만 단위만 넘어가도 머리가 터져 버리지 않을까?

    '나 정말 사기였네.'

    새삼 베라프에서의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실감이 갔다. 지금의 이지혁과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힘들어?"

    이지혁의 썩어 있는 얼굴을 보고는 정해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러다 짜증이 어린 표정을 보고는 흠칫 놀라 갑자기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왜 이러지?'

    이지혁이 보여준 그 모습이 뇌리에 남아버린 건가?

    고민에 빠진 정해민을 제쳐 두고 뭔가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가윤이?

    어느새 정해민을 지나친 도가윤이 시원한 음료수를 이지혁의 앞에다 내려놓았다.

    "응?"

    도가윤은 말없이 음료수와 이지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시라고?"

    끄덕.

    이지혁이 씩 웃더니 음료수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하……."

    뭔가 시원한 게 들어가니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지혁은 묘한 눈으로 도가윤을 바라보았다.

    이런 눈치가 있던 애가 아닌데?

    "힘들어 보임."

    "…내가?"

    끄덕.

    이지혁은 가만히 도가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되돌아온 지구에서 자신과 가장 오래 붙어 있던 사람이 도가윤이니, 진짜로 피곤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도 도가윤이겠지.

    "고맙다."

    도가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금 이지혁의 그림자 안으로 동화되어 사라졌다.

    "으!"

    뭔가 져버린 기분을 느낀 정해민이 막 무슨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최정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지혁 씨."

    "네?"

    "현재 해외에서 연락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왜요?"

    "자기들 것도 좀 해결해 달라는데요?"

    "……."

    이지혁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쌌다.

    하…….

    "나중에 해요, 나중에."

    "지금도 실시간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만……."

    "아니, 내가 게이트 열었나?"

    이지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디 가세요?"

    "퇴근! 퇴근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살아!

    퇴근 시간은 지켜야지!

    이지혁은 콧바람을 뿜으며 밖으로 나갔다.

    "이지혁 씨!"

    최정훈이 이지혁을 잡으려는 순간, 아펠드리체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지금은 그냥 두세요."

    "네?"

    "아마 속이 뒤집어졌을 테니까."

    영문을 몰라 하는 최정훈을 뒤로한 채 아펠드리체는 문밖으로 나가는 이지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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