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6화 (26/118)
  • [■] 안 되는 인간은 뭘 해도 안 되는 법이지 [■]

    ─────

    부상을 핑계로 며칠의 휴가를 얻어낸 이지혁은 아침부터 컴퓨터를 붙들었다.

    아니, 붙들려고 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니?"

    "네?"

    "아니, 그 정도 했으면 이제 피곤할 때도 되지 않나 해서."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풀타임을 돌렸으니, 이제는 좀 쉬고 싶을 때도 되지 않았니?

    나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피곤하진 않은데요?"

    그야 그렇겠지.

    드래곤 로드가 게임 몇 판 했다고 피곤하다는 게 말이나 되겠냐고!

    그런데 내가 진짜 피곤하냐고 물어본 거 아니잖아!

    "재밌냐?"

    "재미로 하는 게 아닙니다. 오해 말아주셨으면 하네요! 저는 지금 인간의 행태와 사고를 분석하고 있는 겁니다. 이 게임 속에 인간의 많은 것이 녹아 있거든요! 그래서 그걸 분석하는 것이지, 이 게임을 즐기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하등한 인간이 만들어낸 게임 따위를 즐긴다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불쾌하네요."

    "…나도 인간이거든."

    하등하다니!

    이 썩을 도마뱀이!

    "아, 그랬죠. 실례했어요. 솔직히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지혁 씨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서요.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와서 도와야 하는 건데, 왜 안 오는 걸까요?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네요. 돌고래 정도의 지능만 있어도 알 수 있을 일을 모른다는 걸 참아낼 수가 없어요."

    "……."

    그냥 프로 게이머 해라.

    아주 자리를 잡았네, 자리를 잡았어.

    이지혁이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이지혁이 전화기를 들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컴터 한 대 짜주세요."

    - 저… 이지혁 씨, 저도 나름 보면 고급 인력입니다. 지금 매우 바쁘거든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세요?

    "수고비 얼마면 되는데?"

    - 백?

    "드릴 테니, 한 대 짜줘요. 나 죽겠어요."

    - …알겠습니다.

    일단 이건 해결했다.

    저 도마뱀에게서 컴퓨터를 빼앗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다. 그냥 한 대 더 놓는 게 서로에게 이롭다.

    그건 그렇고…….

    집안 분위기가 왜 이렇지?

    뭔가 축축 처지는데?

    거실로 슬그머니 걸어간 이지혁의 눈에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뭐해?"

    박선덕이 조금은 딱딱해진 얼굴로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일어났니?"

    "응, 엄마. 밥 줘."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저거 좀 보렴."

    아니, 지금 밥보다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인가!

    "응?"

    박선덕이 가리킨 TV를 본 이지혁의 눈에 처참하게 무너진 도시의 형상이 들어왔다.

    "어……."

    옆구리가 뜯겨 나간 자유의 여신상을 보니 뭔가 잠이 확 깨는 기분이다. 철근이 제멋대로 휘어져 삐죽삐죽 튀어 나와 있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왜, 왜 저래?"

    "몬스터가 그랬대."

    "잡았대?"

    박선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음…….

    아직 못 잡았나?

    하기야 만약에 좀비 드래곤이 이지혁이 없는 상황에서 한반도에 상륙했다면, 아주 난리가 났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박살 나는 데 채 하루나 걸렸을 것인가.

    TV에서는 처참히 파괴되어 버린 도시들을 여럿 비춰주고 있었다.

    헬기 위에서 찍은 듯한 모습이 생생히 현장을 전달했다.

    "심하네."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도 대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몬스터를 맞은 것 같았다.

    아마 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대로 피난도 못한 채…….

    다시 화면이 바뀌고 일본의 모습이 나왔다.

    얼어붙은 도시의 모습.

    이미 좀비 드래곤은 죽었지만 하루 만에 그 냉기를 모두 해소할 수는 없었는지, 제대로 접근도 하지 못한 채 멀리서 찍은 새하얀 도시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떡하니?"

    박선덕의 탄식.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리가 부러져서 바닥으로 나뒹군 에펠탑의 모습이라든가, 어딘지 알지도 못할 도시들도 하나같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전하는 기자들 역시 얼굴이 굳은 채 침중한 어조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시작이군.'

    처음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이지혁은 뭔가 붕 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몬스터가 침공하고 사람이 죽어가는 세상이건만, 사람들의 삶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다.

    아무리 게이트를 잘 막아내고는 있다지만, 위기의식 자체가 그리 크지 않다는 느낌.

    정부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능력자를 띄워주는 방법을 통해서 갈등을 완화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통할 리가 없는 방법이었다.

    "게임이 아니야."

    이건 현실이다.

    당장 내일 감당 못할 게이트가 집 앞에 열려서 모든 것을 앗아갈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을 보면 해결하려 들기보다는 의식에서 지워 버린다.

    당장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도 전 세계에는 핵무기가 가득했고, 아주 간단히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상황을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게이트라고 다를 것도 없지.'

    해결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잊는다.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유리해 버리면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해지니까.

    지금 그 회피해 버린 현실의 칼날이 피부를 베고 속살까지 뚫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되면 실감하겠지.'

    게이트라는 현상이 그들의 목에 들이밀어진 칼날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어떻게 될까?

    이지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이고 폐 속으로 깊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다.

    겪어본 적 없는 일이라 예상은 할 수 없지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대중만큼 무서운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체계가 잡혀 있는 세상이다 보니 여파가 그리 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 나랑은 관계없지."

    자신에게만 피해가 오지 않으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혁아."

    "아, 엄마. 걱정 마세요. 별일 아닐 거예요."

    "그래도……."

    "큰일이야 있겠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이 안 되는구나."

    "괜찮을 거예요, 엄마."

    "아니, 나는 안 괜찮다."

    어?

    뭔가 대화가 이상한데?

    고개를 돌려보니 뭔가 눈꼬리가 이지혁처럼 말려 올라간 박선덕이 그를 보고 있었다.

    '아, 내 눈이 저기서 나왔구나.'

    우리 엄마 맞네.

    확실하네.

    가족의 정을 물씬 느낀 이지혁이 막 감격하려는 찰나, 박선덕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거실에서 담배 피우라고 했니?"

    "……."

    말문이 막힌 이지혁이 입에 문 담배를 빼서 끌 곳을 찾았다.

    어? 여기 마땅히 끌 데가…….

    "국민 금연 시대에 담배 피우는 것도 이해해 줬더니, 이제 마루에서 담배를 피워?"

    이지혁은 박선덕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끼고는 두말없이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이놈 자식!"

    아, 안 돼!

    쫘악!

    등짝에 오랜만에 스매싱이 들어오자 이지혁이 입을 쩌억 벌렸다.

    이게 허리가 뒤로 접힌다는 느낌인가!

    마법이고 개뿔이고, 이걸 전수 받는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한 방이면 마왕급도 데굴데굴 구르겠네.

    이지혁이 등을 한 손으로 움켜잡으면서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한 대 라도 덜 맞아야지!

    "거기 안 서?"

    "아악! 엄마! 내 나이가 몇인데!"

    "시끄러워!"

    쫘악! 쫘악!

    한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잡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등짝을 내려치는 연계기 앞에 이지혁은 피를 토했다.

    그 악명 높던 베라프 타마 산의 어새신들도 이런 스킬은 없었는데!

    겨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이지혁이 현관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전율하며 중얼거렸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다."

    엄마가 문제지.

    예전에 황제의 신분으로도 어머니를 어찌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인간들을 보며 혀를 찼는데, 막상 겪어보니… 이게 욕할 게 아니었다.

    힘이 문제가 아니다, 힘이!

    힘 있다고 엄마를 뭐 어쩔 거냐고!

    "으……."

    이지혁이 주저앉아서 등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안 닿아!

    그러자 눈치를 챈 오식이가 부다다 달려와서 이지혁의 등을 조그마한 앞발로 톡톡, 두드린다.

    "크흡."

    오식아.

    우리 이쁜 오식이.

    너밖에 없다, 너밖에 없어.

    왜 남자가 나이가 들면 애완견에 집착하는가를 절절히 느낀 이지혁이 오식이를 부둥켜안았다.

    뭔가 필사적으로 쭉 내민 앞발이 가슴팍을 밀어내는 게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야 뭐.

    이지혁이 뭔가 섭섭함과 감동을 동시에 느끼면서 오식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응?

    끼잉끼잉.

    바닥에 내려선 오식이가 밥그릇을 긁는다.

    저건 밥그릇이라기보다는 드럼통에 가깝지만.

    사료 안에서 수영도 할 수 있겠네.

    그런데…….

    아니, 사료는 충분히 줬잖니.

    …더 필요해?

    끼잉.

    오식이의 눈빛 공격에 이지혁은 뭔가 이 사료가 오식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먹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강렬한 의심에 시달렸다.

    "이 새끼, 두 집 살림 하나?"

    오식이가 슬쩍 이지혁의 눈을 피했다.

    "휴……."

    그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명품백 하나 안 사 주면 연애도 못한다는 세상인데, 개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아, 오식이… 개 아니지.

    이지혁은 쌓아둔 사료 포대를 따서 오식이의 밥그릇에 부었다.

    오늘 돌아올 때는 갈비라도 좀 챙겨 먹여야겠다. 그래도 얘가 따지고 보면 육식동물인데, 자꾸 이렇게 사료만 먹여서는 될 일이 아니겠지.

    "집 잘 봐라."

    컹!

    …컹이라니.

    이젠 훌륭한 강아지가 아닌가!

    훌륭하긴 하다만, 뭔가 그… 그 뭔가… 뭐라고 해야 할까, 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지혁이 오식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말했다.

    "본체로 돌려줄까?"

    잠시라도?

    오식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이 담담한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본체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가?

    아니면 이제 포기한 걸까?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나 나나 별로 처지가 다를 게 없네.

    왕처럼 떵떵거리고 살 수도 있는데 본신 능력을 잃고 사는 게 말이야.

    좀 가여운데?

    오식이를 보며 결심을 굳힌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고는 구역질을 했다.

    한 손으로 배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괴로운 듯 꽥꽥거리기 시작한다.

    컹?

    한참 구역질을 하던 이지혁이 손에 뭔가를 들더니, 오식이의 목에 채워진 개목걸이에 묶기 시작했다.

    "오식아."

    끼잉?

    "이거 마정석이니까, 위험하거나 나 없이도 뭘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삼켜라. 그러면 본체로 돌아갈 거다. 딱 그 정도만 남겨놨다."

    끼잉?

    "그래그래."

    오식이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잠깐만. 이거… 내가 어디서 나온 건지 봤는데, 이걸 삼키라고?

    이건 뭐지? 새로운 고문인가?

    어디까지 괴롭히려는 건가, 이 주인 놈은!

    "그래그래, 그리 감격하지 않아도 돼."

    감격은 뭔 놈의 감격이야!

    "그래그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두 생물의 오해가 깊어졌다.

    이지혁은 오식이의 등을 툭툭, 쳐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현관이 열리고 밖으로 나서자 이제는 익숙하다고 해도 될 기운이 느껴졌다. 튀어나온 현관 벽돌 뒤로 바람에 살랑이는 황금색 머리카락이 보인다.

    "끙……."

    이지혁이 당연하다는 듯 그쪽을 보며 물었다.

    "오늘 근무는 무탈하신가? 현관의 지박령?"

    "헤……."

    김다솜이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 * *

    "나오셨어요?"

    당연하다는 듯 인사 받지 마!

    니가 뭐 우리 집 경비원이냐!

    이지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그래."

    시간 체크 하지 말라고!

    그리고 나… 오늘 노는 날인데 뭔 늦고 말고가 있어!

    어쩌면 이지혁의 행동 패턴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김다솜이 아닐까?

    그런 느낌에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죠?"

    듣고 보니 날씨가 쌀쌀하다.

    벌써 겨울인가?

    응?

    얘, 이 날씨에 여기에 계속 서 있던 건가?

    "…언제부터 나와 있었니?"

    "금방 왔어요."

    그럼 왜 볼은 빨갛게 얼었니? 손도 다 얼었네?

    얘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던 거지?

    그동안은 껄끄러웠는데, 막상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뭐가 좀 안되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이거요."

    "응?"

    김다솜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응?"

    이지혁이 김다솜이 내민 상자를 받아 들었다.

    얘 자꾸 너무 뭐 많이 주는 거 아닌가?

    남자가 자꾸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 건데…….

    그래도 뭐, 일단 주는 거니까.

    역학 관계에 대한 계산보다 거지 근성이 더 컸다.

    이지혁은 넙죽 김다솜이 내민 상자를 받아 들었다.

    손바닥에 겨우 올라올 것 같은 상자.

    뭘까?

    "고마워."

    상자를 주머니에 넣으려 하자 김다솜이 고개를 저으며 이지혁의 손을 잡았다.

    "지금 열어보세요."

    "지금?"

    "네."

    이지혁이 김다솜의 눈을 슬쩍 보았다.

    단호한 그 눈을 보자 대충 얼버무리기가 어려웠다.

    "으응."

    뭐지? 이 꿀리는 것 같은, 이상한 심정은?

    이지혁은 주섬주섬 상자를 열었다.

    "어……."

    상자 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뭔가 목도리라든가, 아니면 장갑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받아왔는데, 당장 금속이 눈에 띄자 당황하게 된다.

    "뭐야, 이거?"

    "목걸이요."

    그걸 몰라서 내가 너한테 묻겠니?

    뜬금없이 웬 목걸이냐고 묻는 거거든?

    음,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목도리나 장갑 같은 거랑은 다르니까.

    그렇다고 저번에는 옷을 한 세트로 받았는데, 이제 와서 이런 건 못 받는다고 말하는 것도 뭔가 어색하고.

    "내가 원래……."

    "반지 같은 것은 일하실 때 불편하실 거 같아서요."

    "……."

    "팔찌 같은 것도 거추장스러울 것 같고, 오빠한테 물어보니 그래도 목걸이 같은 게 제일 나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김다현, 네 이놈!

    목을 따버리겠다!

    "그래도 이건 좀……."

    김다솜은 말없이 이지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으음……."

    지그시.

    그저 지그시.

    그 흔들리지도 않는 눈동자가 이지혁의 이마에 식은땀을 만들어냈다.

    "아니, 그, 다른 건 몰라도 목걸이 같은 건……."

    김다솜은 여전히 말없이 가만히 이지혁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차라리 소리를 지르라고!'

    그렇게 사람을 가만히 보지 마!

    나 혼자 움찔움찔하잖아!

    "아, 알았어."

    결국 패배를 선언한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게, 한다."

    상자를 닫으려는 이지혁의 손을 다시금 김다솜의 손이 잡았다.

    "…지금?"

    끄덕.

    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대한민국 정부는 대체 하는 일이 뭔가!

    얘를 데려다가 외교관으로 쓰라고!

    그냥 서류고 뭐고 필요 없이 가져다 놓기만 해도 원하는 건 다 얻어올 텐데!

    왜 인재를 못 알아보는가!

    아, 얘 아직 학생이지.

    "으응."

    이지혁은 떨떠름한 얼굴로 목걸이를 들어서 목에 찼다.

    "됐어?"

    김다솜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귀엽다고 느낀 이지혁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근데, 너 학교 안 가?"

    "……."

    뭐지?

    방금 그 미묘한 떨림은?

    "학교 가는 날이냐?"

    아니, 그렇지. 그렇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예원이가 학교를 갔으니까!

    그런데 이 시간까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할 건 해야지? 그렇지?"

    물론 이지혁이 할 말은 아니지만, 김다솜에게는 대미지가 있은 모양이다.

    철혈의 여인과도 같던 그녀가 움찔움찔하는 게 보인다.

    "너, 성적은 잘 나오니?"

    도리도리.

    휘젓는 머리를 따라 금발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그래, 어차피 너도 공부 안 해도 먹고는 살겠다."

    그 얼굴로 못할 게 뭐가 있겠니.

    "연예인만 해도 꼬맹이 정도는 찜 쪄 먹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응?"

    이지혁은 등 뒤에서 날아온 반박에 몸을 돌렸다.

    "넌 왜 또 여기 있어?"

    새하얀 패딩에 빵모자를 쓴 정해민이 차갑게 언 손을 불며 대답했다.

    "그냥 출근하는 길이거든?"

    "…가엽게도."

    드디어 연예인으로 먹고살 길이 막힌 거로구나. 매니저가 출근도 안 시켜주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요즘 살 쪄서 운동 삼아 그냥 걸어서 출근하는 거거든!"

    "그래그래."

    그 자존심을 지켜주마.

    "뭐야, 그 표정은?"

    "아니다, 아니야. 그 짧은 다리로 걸어오기 힘들었을 텐데, 고생했다."

    "안 짧거든! 키가 작아서 그렇지, 다리는 길어서 평균이거든?"

    이지혁이 말없이 정해민에게 다가가서 다리를 들이밀었다.

    이지혁의 허벅에 겨우 걸치는 정해민의 골반이 애처롭다.

    "응, 짧아."

    "하지 마아아!"

    정해민이 이지혁을 확 밀쳐 냈다.

    "그리고! 연예계가 그리 쉬워 보여? 얼굴 하나 반반하다고 뜰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도 잘 못하는 애들 세워놓는다고 뭘 할 수 있겠어!"

    "그래그래, 무명 생활 힘들었구나."

    "아, 아니야!"

    "그래그래."

    "우우……."

    정해민이 뭔가 시동을 걸기 시작하자 이지혁이 그녀의 머리를 한 손으로 꽉 잡고 말했다.

    "그만둬. 아침부터 그러는 거 아니야.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

    "으응."

    "가자."

    이지혁이 휘적휘적 걸어가자 정해민이 김다솜에게 눈빛을 슬쩍 준 다음, 뒤를 따라나섰다.

    조금은 분한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김다솜이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스마트폰 액정 너머로 지도가 뜨고, 천천히 이동하는 점이 보인다.

    김다솜은 천천히 이동하는 점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학교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워 보였다.

    * * *

    "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재범이 이지혁을 맞았다.

    "출근 안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지혁은 두말없이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를 켰다.

    "게임하러 왔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

    아니, 미친놈아! 누가 게임하러 출근을 해!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냐!

    다른 일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가!

    김재범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이지혁은 컴퓨터를 켜고 게임에 접속했다.

    최정훈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지혁 씨."

    "네?"

    "휴가 중이시라 따로 연락을 드리지는 않으려 했습니다만, 출근을 하셨으니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네, 다음에요."

    "…급한 일입니다."

    "네, 저도 급해요."

    "정말 급한데……."

    이지혁의 눈이 살짝 올라갔다.

    "대한민국은 이게 문제라니까! 이게! 아니, 쉬는 날이면 사람을 쉬게 해줘야지! 자꾸 전화하고, 일 시키려 하고, 이러니까 쉬는 날도 쉬지를 못하잖아요! 급한 일이 한두 갠가! 그렇게 급할 때마다 쉬는 사람 찾아 제끼면 사람은 언제 쉬나! 언제!"

    "그럼 사무실에 나오지 마, 이 미친……."

    "부부장님!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미친?"

    "거기! 갱 옵니다."

    "어디! 어디!"

    간단하게 이지혁의 시선을 돌려 버린 최정훈을 보며 김재범이 감탄했다.

    과연 이지혁 컨트롤러.

    "그런데, 진짜 좀 중요한 문젭니다."

    "흐음……."

    이지혁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뒤로 쭉 빠졌다.

    "응?"

    "잠깐 대신하고 있어 봐요."

    김재범이 자신의 의자를 끌고 이지혁의 자리로 들어가자,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대 피우면서 이야기하죠."

    * * *

    찰칵.

    최정훈이 라이터를 켜주자 이지혁이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흐음……."

    한 모금 담배를 빤 이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어디서요?"

    최정훈이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었다.

    "일단은 미국, 프랑스, 터키입니다."

    "강대국들이네?"

    "그렇죠."

    그런 강대국들이 감당하지 못해서 지원을 요청할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압박은요?"

    "굉장합니다."

    "제일 심한 곳은?"

    최정훈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미국이죠. 급파해 주지 않는다면 군사적인 도발도 서슴지 않을 기세입니다."

    "그 군사로 몬스터를 잡지."

    "방향성이 다른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음……."

    그런 거야 뭐, 알고는 있지만.

    백만의 대군으로 막을 수 없는 몬스터 하나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는 반면, 그 능력자는 백만의 대군을 당할 수 없다.

    이 절묘한 균형이 이어져서 그동안 큰 대립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만, 이지혁의 등장 이후로는 그 균형이 깨져 가고 있었다.

    몬스터와 능력자의 균형이 깨졌고…….

    능력자와 일반인의 균형이 깨졌다…….

    이 깨진 균형이 어찌 작용할 것인가는 두고 봐야 할 일이겠지만, 아무래도 좋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안 가겠다고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최근의 이지혁은 뭔가 미묘하게 사건들을 해결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 말이다.

    '정의감이라도 생긴 건가?'

    이지혁이?

    최정훈은 자신이 생각해 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런 부류는 정의감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최소한의 정의감이야 있겠지.

    내 능력이 닿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간다면 그걸 해결하려 드는 정도는 할 수 있다.

    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그 사람이 착하든 나쁘든 일단은 아이를 향해 달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지혁에게 정의감이 있다는 것이 꼭 그들에게 중요하게 작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단은 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태를 주시하고 있어보죠."

    "흠, 애태우시는 건가요?"

    "내놓을 건 다 내놓으라고 해보세요. 알아서 하실 수 있죠?"

    "이름만 빌려주신다면야."

    "마음대로 가져다 쓰세요."

    "라져. 알겠습니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들어가죠?"

    하늘로 날아오른 불똥을 보며 최정훈도 이지혁을 따랐다.

    '그러고 보면…….'

    항상 요구만 받던 입장의 대한민국이 요청을 받게 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 사람 때문이지.'

    단 한 사람이 나라의 위상을 바꾸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시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전 세계를 주무르는 기업가라든가, 세계를 움직이는 수준의 정치인들도 감히 오르지 못했던 위상에 이 남자가 서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공식과 비공식적인 채널 모두에서 건너오는 목소리가 얌전해졌다는 말도 나오고 말이다.

    "재미있는 일이지."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정훈은 씨익 웃고는 이지혁의 뒤를 따랐다.

    * * *

    "답변은 없나!"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의 얼굴이 배어 나온 땀과 흩날린 담뱃재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의 깔끔하고 자신감 넘쳤던 모습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청결을 유지할 만한 여유조차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 넓은 미국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몇 개의 도시가 박살이 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전 세계에 자랑하던 미국의 우월한 능력자 전력과 미군조차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저번 X1 사태마저 버텨냈건만, 이번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사막에 진입한 틈을 타서 전술핵까지 사용했건만, 전술핵도 씹어 먹은 몬스터는 계속해서 북진하고 있었다.

    사태의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이지혁.

    그 말도 안 되는 거대한 드래곤을 일격에 박살 내버린 전무후무한 능력자.

    위험 등급 S를 넘어 최초의 위험 등급 X등급을 만들어낸 역사상 최강의 능력자.

    "한국에 다시 외교 채널로 요청을 해. 정 안 되면 대통령의 방한도 고려하라고 해."

    "하지만 그건……."

    "나라가 있어야 자존심도 있고, 체면도 있는 거야!"

    "으음……."

    현실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말이었다.

    미국의 자존심을 꺾으라니.

    100년 내로 이러한 일이 있었던가.

    "중요한 건 국민이다. 대통령 따위야 바뀌면 그만이고, 체면이야 나중에라도 회복할 수 있어. 하지만 국민이 사라지면 국가도 사라진다."

    "…예."

    지금도 캐나다로의 탈출 러시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 이상 사태가 심각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지혁을 확보해! 최대한 빠르게!"

    "어차피 빠르고 늦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머저리 같은 놈! 그러다가 프랑스 쪽에 빼앗기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동맹국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크리스토퍼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저놈의 머리가 잘 돌도록 주둥아리에 포도당을 쑤셔 박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역학 관계 따위는 다 잊어! 상황이 이리된 이상 질서는 재편된다! 저 망할 작은 동아시아의 나라가 전 세계의 명운을 움켜쥐는 거다! 정말 모르겠나?"

    "……."

    설마 그렇게까지?

    "역학이라는 건 아쉬운 쪽과 아쉽지 않은 쪽으로 나뉘는 것이다. 부탁하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우위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알면 움직여!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라는 말이다! 아니면 너나 나나 옷 벗는 거야! 아니, 옷을 벗기 이전에 기구 자체가 남아 있지 않을 거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나도 움직일 테니, 바로 시작해."

    크리스토퍼는 밖으로 나가는 부하를 보며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은 자존심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일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외교 채널은 국가 설립 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었다.

    담당자들은 죽을 맛이었고, 그들을 관리하는 이들도 웃을 수가 없었다.

    * * *

    "어쩐답니까?"

    "…퇴근했다는군요."

    "네?"

    외교부 장관은 머리를 움켜잡았다.

    "퇴근? 퇴근? 이런 상황에 퇴근이요?"

    "뭐, 딱히 막을 방법이 없잖습니까, 장관님."

    "그게 할 말입니까! 그래도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전혀 통제가 안 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리 잘 아시면 직접 어떻게 해보시죠.

    입 끝까지 나온 말을 억지로 밀어 넣는다.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을 무슨 수로 통제하겠습니까? 자른다고 하면 옳다쿠나 나간다고 하지, 돈은 욕심도 없다 하고 이미 썩을 만큼 있지요. 권력? 관심도 없답니다."

    "여자는?"

    "보시겠습니까?"

    이지혁 주변에 머무르는 여자들의 신상 명세를 바닥에 내려놓자 장관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뭐, 대책이 없는 겁니까? 지금 압박이 너무 심해요. 게다가 지금이 적기입니다. 이때를 놓치면 받아낼 것이 줄어든단 말입니다."

    "일단은 지금은 그 사람에게 기대는 수밖에요."

    "최정훈 말입니까?"

    "네."

    "흐음……."

    최정훈, 최정훈이라…….

    젊고 능력 있는 기대주이긴 하다만, 그에게 국운을 걸 수가 있겠는가.

    아니, 그가 할 수 있다고 해도 큰일이다.

    아직은 햇병아리건만, 그에게 국가 중대사에 대한 컨트롤 능력이 들어가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으음……."

    불편한 심경이 침음이 되어 나왔다.

    "해결할 수 있답니까?"

    "이지혁은 자신도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확답을 줄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답니다."

    "끄응……."

    이지혁, 이지혁…….

    대한민국에 최상급의 능력자가 출현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로 인해서 편해졌다기보다는 머리만 더 복잡해진 느낌이었다.

    "이게 참……."

    왜 하필이면 자신의 임기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 이지혁은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답니까?"

    "…감시는 하고 있습니다."

    "어디냐구요."

    "저… 그게……."

    "말씀을 해보세요."

    "오락실……."

    "네?"

    장관의 얼굴이 멍해졌다.

    * * *

    YOU WIN!

    "후후후."

    이지혁이 승리 화면을 보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다!

    이것이 승리다!

    이 맛을 못 본 게 얼마던가!

    화면 속에서 승리 포즈를 취하는 캐릭터를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나의 힘이다!"

    장르가 달라지니 힘이 나오는구나.

    AOS가 아니라 대전 격투로 바꾸자 과거의 게임 마왕 이지혁의 힘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오락실을 정복하고 살았는데!

    자신과 붙기 위해 다른 오락실에서 원정도 오고 했더랬지.

    하…….

    이리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어서 승패가 나뉘는 장르가 이지혁과는 잘 맞는…….

    "야, 이 새끼야!"

    어?

    이지혁이 날아오는 의자를 보고는 그 짧은 시간에서도 생각에 빠졌다.

    저거, 의잔가?

    이게 그럼 그 말로만 듣던 체어 샷인가?

    헐.

    고딩 때도 못 받아본 체어 샷을 이 나이가 되어서 받다니!

    신선한 경험인데?

    아니! 이게 아니지!

    이게 미쳤나!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지금 어디다 감히 의자를 던지는 것인가!

    이지혁이 날아드는 의자를 잡아 바닥으로 내렸다.

    "하?"

    이지혁의 눈에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우락부락한 고딩 놈이 보였다.

    고딩 놈. 그래, 고딩 놈.

    저리 교복을 입고도 당당하게 의자를 집어 던지다니!

    이 나라의 교육은 어디 갔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를 서글피 여기면서 이지혁은 바닥에 내려놓은 의자를 꽉 움켜잡았다.

    예로부터 교육이란 몸과 몸으로 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베라프식 교육에 대해서는 전문가다!

    "이 새끼가? 생긴 대로 노네."

    울컥!

    안 그래도 요즘 주변에 꽃미남들밖에 없어서 본의 아니게 오징어 취급을 받느라 빡쳐 있던 이지혁인지라 그저 별것 아닌 도발이 굉장히 아프게 들어왔다.

    생긴 대로?

    내가 생긴 게 어때서!

    "사내새끼가 게임을 그리 얍삽하게 하고 싶냐? 어?"

    하…….

    이 새끼가 뭘 모르네.

    게임이고 뭐고, 일단 이기는 게 최곤 거야!

    지고 나서 정정당당이 어딨어!

    아, 말이 필요 없다.

    이지혁은 의자를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응?"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 오식이… 아니, 창식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더니, 이지혁의 눈앞에 있는 고딩을 플라잉 니킥으로 갈겨 버렸다.

    "꾸웨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고딩이 허공을 날아 오락실 바닥을 쭉 타고 의자 더미에 처박혔다.

    "……."

    죽일 셈인가!

    아무리 이지혁이라고 해도 힘도 없는 고딩에게 저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창식이는 헥헥대며 심호흡을 하더니, 구석에 박힌 고딩에게 욕을 내뱉었다.

    "이 미친놈이 뒈지고 싶으면 혀 깨물고 죽으면 되지, 미쳤나 진짜! 누굴 건드려! 곱게 죽지도 못할 생각이냐!"

    아니, 그렇게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다니까!

    내가 무슨 괴물이냐!

    주변 시선들이 자신에게 몰리는 걸 느낀 이지혁이 입맛을 다셨다.

    이게 아닌데…….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엉."

    저리 폴더 인사를 하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거참.

    이지혁이 움켜잡았던 의자를 자리에 내려놓았다.

    아, 뭔가 찝찝한 게 아쉽네. 대가리를 깨놨어야 하는데.

    "웬일이냐?"

    "잠깐 놀러 왔다가 봤습니다."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오락실이나 다니고."

    "헤헤."

    창식이가 혀를 내밀고 웃었다.

    그 얼굴로 그리 웃지 마라…….

    내가 무섭다, 창식아.

    오식이 때문에 좀 익숙해졌어야 하는데, 오식이가 워낙에 귀욤귀욤해지다 보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야.

    "형님, 그… 능력자 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응. 예원이가 말하디?"

    "예. 형님, NDF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진짜십니까?"

    "뭐, 그리됐다."

    국가 차원에서 NDF는 굉장히 홍보되고 있고, 웬만한 구성원들은 대부분 매스컴 한두 번 정도는 탄 상태였다.

    그나마 카메라를 안 받은 것이 이지혁과 도가윤 정도였다.

    "형님!"

    "응?"

    뭔가 간절한 창식이의 눈빛에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고기를 탐하는 오거의 눈빛이 아닌가!

    이 새끼는 진짜 왜 이렇게 생겼지?

    얼굴에 죽빵 두어 번 갈겨서 성형이라도 시켜주면 인생이 좀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진지하게 후배의 인생을 고민하던 이지혁에게 창식이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저 거기 한 번만 데려가 주시면 안 됩니까?"

    "으응? 니가 가서 뭐하게?"

    "꼭 뵙고 싶은 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누구?"

    "저번에 제가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 서아영인가 하는 분……."

    서아영?

    니가 서아영한테 도움을 받았다고?

    설마…….

    이지혁의 눈에 살짝 붉어진 창식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그만둬!

    그 얼굴로 부끄러워하지 말란 말이다!

    제기랄, 역대 최고라 불리던 정신계 대마법사 볼란푸츠에게 정신 공격을 받았을 때도 이런 대미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 나 정신 공격 면역이었지.

    "그, 그래?"

    "예, 형님! 한 번만 데려가 주시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냥 내가 전해 주면 안 될까?"

    "꼭 제 입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으응, 그렇구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게 부탁이 아니라 협박으로 들리는 건 내 착각인가?"

    창식이가 팔을 마구 저었다.

    하지 마……. 공격하는 거 같아.

    "아닙니다, 형님! 제가 어떻게 감히! 형님께 협박을 하겠습니까? 저도 목숨 하나인 건 아는 사람입니다!"

    니가 지금 그 덩치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뭐가 되겠니.

    이지혁은 이미 숙덕거리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오락실도 이제는 못 오겠네.

    이제 이지혁이 게임을 하면 누가 대전을 걸어오겠는가.

    하, 진짜…….

    "그래, 가자. 내일 우리 집 앞에 와라."

    "진짭니까, 형님?"

    "내가 너한테 농담할 군번이겠니?"

    "그런데 형님……."

    "응?"

    "저 혼자서는 거주구에 못 들어가는데 말입니다."

    "……."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내가 너희 집으로 데리러 가마."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창식이가 의자 더미에 묻혀서 기절해 있는 놈의 뒷덜미를 잡더니, 질질 끌고 갔다.

    그 모습이 마치 오거가 먹잇감을 채가는 것처럼 보여서 소름이 돋는다.

    저 멀리 사라지는 창식이의 모습을 보며 이지혁이 아차 하는 얼굴로 말했다.

    "집이 어딘지는 말해주고 가야지, 창식아!"

    하지만 이미 창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휴, 안 되는 인간은 뭘 해도 안 되는 법이지."

    * * *

    "사격 개시!"

    커다란 구령과 함께 총탄이 무수히 날아들었다. 총탄이 그리는 궤적이 길게 이어지며 마치 비가 쏟아지는 것 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

    "쏴! 쏘란 말이다!"

    하지만 목표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총탄은 물론, 지원화기의 세례에도 목표물은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은 채 그저 앞으로 전진할 뿐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해 피닉스로 이어진 괴물의 행진은 유타를 지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었다.

    네바다에 필사의 방어막을 쳤지만, 괴물의 전진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능력자 놈들은 뭐하는 거야!"

    고오오오오오!

    순간, 괴물의 육체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엎드려어어어어어어!"

    파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빛의 칼날이 세상을 갈라 버릴 듯이 뿜어져 나온다.

    콰콰콰콰콰!

    미 제10군 게이트 군단 소속의 존 베리 일병은 바닥에 납작 업드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막으라고?

    저 괴물을?

    무슨 수로 저 괴물을 막으란 말인가.

    파공음이 가라앉고 고개를 들어보자 반듯하게 잘려 나가 버린 산맥이 보였다.

    저 멀리 있는 산맥조차 깔끔하게 깎아버리는 존재를 무슨 수로 저지하란 말인가!

    "지원하라고!"

    등 뒤에서 절망 어린 목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굉음이 울려 퍼진다.

    쾅! 쾅! 쾅!

    폭격기의 공습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괴수는 새하얗게 명멸할 뿐, 별다른 타격 없이 앞으로, 또 앞으로 전진했다.

    "안 돼……."

    괴물이 향하는 곳.

    샌프란시스코는 아직 피난하지 못한 이들이 남아 있다.

    "어떻게든 해보란 말이야아아!"

    존 베리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는 순간!

    우우우웅!

    또 한 번의 빛이 세상을 덮쳤다.

    * * *

    "이게 편한 건지, 힘든 건지 아리송하네."

    김재범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머리를 박박 긁었다.

    현재 한반도에 열리고 있는 게이트들은 역대 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숫자 자체는 과거보다 줄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레벨 1 게이트가 주로 열리던 한반도에 이상할 정도로 고위급 게이트들이 마구 열리고 있으니, 위험도는 확실히 더 올라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레벨 3 게이트 하나에도 온갖 난리가 났을 텐데, 이제는 레벨 3 게이트 정도는 점심시간에 나가서 처리하는 은행 업무 같은 기분이었다.

    게이트 자체를 처리하는 시간보다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긴… 뭐, 그런 느낌?

    김재범은 슬그머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고 있는 사람들.

    상석에 앉아서 손톱을 정리하고 있는 서아영.

    나른해 보이는 모습들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듀얼 모니터도 아니고, 무려 네 대의 모니터와 두 개의 키보드를 빛살처럼 오가고 있는 최정훈!

    손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오가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텀블러에 담긴 노란색 액체를 쭉쭉 들이켜는 모습을 보면 눈물도 난다.

    가여운 사람.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역시나 이지혁이었다.

    "정글러어어어어어!"

    제발 좀 닥치고 게임해라!

    사무실에서 게임하는 것도 속이 터지는데, 그렇게 '나 게임하고 있소' 하고 온 동네에 떠들어야 하냐?

    하…….

    더 무서운 것은 저리 게임을 해 대고 있는데도 그를 터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소 닭 보듯, 아니, 애초에 이 사무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듯이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게 속이 편하지.

    김재범도 최대한 이지혁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저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때, 김재범의 화면에 알람이 뜨고 전화기에서도 비프음이 울렸다.

    삐삐삑.

    알람을 확인한 김재범이 고개를 들어 서아영에게 보고했다.

    "목포 쪽 레벨 3 게이트가 활성률 95%에 도달했습니다."

    "그래?"

    손가락을 훅, 불고 여기저기 둘러보던 서아영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말했다.

    "해민아."

    "이게 진짜!"

    새하얀 토끼 인형이 서아영에게로 날아갔다.

    탁!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토끼 인형을 쳐낸 서이영이 정해민에게 말했다.

    "김다현 씨 좀 목포로 보내줘."

    "언니라고 해!"

    "응. 그래, 언니. 쟤 좀 보내줘."

    "우우우!"

    정해민이 볼을 마구 부풀리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김다현에게로 다가갔다.

    "또 접니까?"

    반쯤 졸던 김다현이 불만 어린 어조로 말을 하자 서아영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뭐라구요?"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야죠."

    마녀.

    저러니 시집을 못 가지.

    "나… 지금 뭔가 기분이 확 나빠졌는데?"

    서아영이 미간을 찌푸리자 김다현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가죠. 갑시다!"

    "흐음……."

    정해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김다현이 내민 손을 무시하고 그의 어깨 쪽에 아주 살짝 손을 올리며 텔레포트를 했다.

    스슷.

    "음……."

    "으음……."

    사람들의 시선이 홀로 남겨져 버린 김다현에게로 향했다.

    "뭐, 뭐야!"

    스슷.

    정해민이 다시 나타더니 혀를 쏙 내밀었다.

    "너무 살짝 잡았나?"

    "…뭡니까, 그 바퀴벌레에라도 손대는 듯한 반응은?"

    김다현이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바퀴벌레라니!

    김다현 정도면 어디 가도 여자들이 줄줄 따르는 꽃미남이건만, 이런 취급이라니!

    "그 언니가 남자 몸에 손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해해요."

    뭐?

    저번에 보니 이지혁 손은 아주 덥썩덥썩 잡고 다니던데!

    나와 이지혁이 뭐가 다른가!

    "아……."

    김다현은 납득했다.

    남자와 남자가 아닌 자의 차이겠지.

    사람이란 건 호감이 있는 이성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진짜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한 저 표정은 뭐지?

    내 착각이겠지?

    처음 겪는 일도 아니건만, 왠지 찝찝하고 서럽다.

    다시금 김다현의 어깨에 손을 아주 살짝 올린 정해민이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러고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홀로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김다현 씨는?"

    "두고 왔는데? 알아서 하겠지."

    서아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서비스의 여왕이라 불리는 정해민이건만, 자신의 팬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부류, 그중에서도 남자에게는 너무도 가혹했다.

    자신의 팬에게는 간이라도 빼줄 것같이…….

    응?

    생각해 보니 끝도 없이 이야기를 한다거나 선물을 마구 퍼준다거나 사진을 같이 찍는다거나 하는 모습을 본 거 같긴 한데, 스킨십은 거의 없던 것 같은데?

    인터넷을 켜서 정해민 폭풍 팬서비스를 검색한 서아영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남자 팬들과는 일정 이상의 거리를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다현을 대하는 태도도 딱히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지혁이 이상한 거지.'

    톱 연예인을 발로 뻥뻥 걷어차는 인간.

    저 예쁜 정해민을 꼬맹이라 부르며 괄시하는 인간.

    그런 인간이니…….

    "뭐해?"

    정해민이 이지혁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런 인간이니 멀리하란 말이다!

    서아영이 속에 나는 천불을 식히느라 씩씩댔다.

    "아, 왜!"

    한창 게임 중에 방해를 받은 이지혁이 인상을 썼다.

    "밥 먹으러 안 가?"

    "안 가! 안 가! 게임할 거야!"

    "곧 끝날 거 같은데?"

    그동안 이지혁이 게임하는 것을 지켜봐 온 대로라면 저런 표정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면 몇 분 내에 '으아아아! 망할 아군 놈들!'을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된다.

    "으아아아! 대체 왜! 왜 지는 거냐고!"

    조금 달랐나?

    "밥 먹자."

    "아! 꺼졍! 나 한 겜 더 할 거야."

    "밥 먹고 해야지. 그래야 착하지."

    "하……."

    이지혁이 패배의 고통에 축 늘어져 절망했다.

    "괜찮아. 질 수도 있지."

    "오늘 다 졌거든?"

    주르륵.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자 정해민이 그런 이지혁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게임이 전부는 아니잖아."

    서아영이 그 광경을 보며 벌레라도 씹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조금 전 김다현에게는 손도 대기 싫어하던 사람이 저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여보세요?"

    그때, 최정훈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니."

    최정훈의 표정이 일순 거만해졌다.

    "그건 제게 말씀하셔도 별 소용 없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해가 안 가십니까?"

    상사에게 말하는 듯한 존대와 아랫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어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말이다.

    저것이 그 유명한 갑질 어투인가!

    "제가 뭐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 어쩌겠습니까? '그분'이 생각이 없으시다잖습니까. 하, 그러다가 그분이 화라도 내시면 어쩌시려구요? 네? 자리를 만들어 달라구요? 이거, 큰일 나실 분이네."

    서아영의 미간이 가늘어졌다.

    저 인간, 어쩐지 신나 보이는데?

    최정훈은 특제 자양강장제 드링크를 쭈욱 들이켜고는 캬! 탄성을 내뱉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기다리시지요. 제발 뭔가 해보겠답시고 그분을 자극해서 일을 꼬아놓지 마시구요. 꼭 그러시더라. 네? 아, 뭐, 일단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정훈이 배부른 강아지 같은 표정이 되어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갸릉갸릉 콧소리를 냈다.

    "누구예요?"

    "아, 별거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데요?"

    "차관님이요."

    "……."

    이 미친놈이! 어디까지 가려는 거냐!

    "장관도 아니고, 겨우 차관인데요, 뭐."

    니 계급은 뭔데!

    니가 차관까지 가려면 몇 년을 더 굴러야 하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지금!

    서아영은 벙 찐 표정으로 최정훈을 보다 입을 닫았다.

    그럼 '그분'이?

    서아영의 눈에 정해민의 위로를 받고 있는 이지혁이 들어왔다. 이제는 숫제 안길 기세였다.

    게임 졌다고 좌절하는 놈이나 그런 애를 불쌍하다고 위로하는 저 언니나…….

    개판이다.

    개판.

    그런 놈을 또 '그분'이랍시고 무기 삼아 상사에게 갑질 시전하는 놈이나…….

    "여기 어쩌다 이렇게 됐나……."

    "네?"

    "…아니에요."

    이런 의도로 만든 곳이 아니었단 말이다!

    "하, 언제쯤 제대로 돌아가려나."

    김재범이 옆에서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사실 역대급으로 잘 돌아가고 있기도 합니다만?"

    "으응?"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사실 NDF 설립 이후로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지만, 별다른 피해 없이 모조리 틀어막고 있다.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NDF의 창설이 의의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사무실을 한 번 쭉 훑은 서아영이 얼굴을 감쌌다.

    "이건 아니야."

    그녀가 원한 NDF는 이런 게 아니었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정해민의 토닥토닥을 받고 있는 이지혁을 보니 한숨과 짜증이 절로 일었다.

    어쩌다 저런 인간이…….

    그러고 보니…….

    "이지혁 씨."

    이지혁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넹?"

    "저번에 묻다 말았는데, 이지혁 씨는 대체 어디서 그런 능력을 얻은 거예요?"

    "응?"

    저 여자가 이제 와서 왜 이러나?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최정훈이 지원사격을 했다.

    텀블러를 탁, 내려놓은 최정훈이 눈을 빛냈다.

    "이제 그만 속 시원히 풀어주시죠."

    * * *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데요."

    서아영의 신호를 받은 최정훈이 눈을 빛냈다.

    "그동안은 딱히 캐묻지 않았습니다만, 이제는 그만 말을 해주셔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요?"

    "저희의 유대 관계도 이제 그 정도의 비밀은 공유할 사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으……."

    보통 이렇게 대놓고 돌직구를 던지면 민망해서라도 그렇다고 하기 마련인데, 역시 저 인간은…….

    일격에 큰 충격을 받은 최정훈이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지혁에 대한 것이라면 언제 화장실에 가는가 하는 일도 정보가 되었다.

    정보를 얻는 것이 힘!

    최정훈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리 큰 비밀도 아니잖아요!"

    "그걸 왜 당신이 정하죠?"

    "사실 이지혁 씨 성격에 큰 비밀이랄 게 있을 것도 없죠."

    어?

    뭐지, 저 사람? 나보다 날 더 잘 아는 거 같은데?

    이게 무슨 기분이지?

    뭔가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이지혁이 슬쩍 뒤로 몸을 빼냈다.

    "어쨌든 뭐,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중요한 이야기 아니니 그냥 해주시죠."

    "으음……."

    이지혁이 침음을 내뱉었다.

    하기야 따져 보면 딱히 말할 일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베라프에서 있던 일들을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럼 일단 자리 좀 비워주시죠."

    어?

    자리를 왜 비우지?

    "보안이 확실한 분만 남기고 모두 나가겠습니다."

    "응?"

    그리 중요한 이야긴가, 이거?

    나 방금까지 엄청 쉽게 생각했거든?

    이러면 내가 부담되잖아!

    그렇게 해서 회의실 안에 남은 인원을 둘러본 이지혁이 마구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최정훈과 서아영은 그렇다 치자.

    뭐, 좀 더 나가서 도가윤까지는 그렇게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래. 그렇다고.

    "넌 왜 여기 있냐?"

    그러나 '중요 인물'이라는 카테고리에 정해민이 낀 것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중요 인물인가!

    그냥 셔틀인데!

    "왜! 왜! 나도 여기서 밥 좀 먹었거든? 서열 높거든?"

    "그 밥이 아니라 진짜 밥을 좀 먹었어야 키가 컸을 텐데. 안타깝게도……."

    "너, 씨!"

    이지혁이 달려드는 정해민의 이마를 쭉 밀어내며 말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듣겠다 그래요?"

    "지금까지라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그분이 문제죠. 아펠드리체?"

    "걔가 왜요?"

    최정훈이 가만히 이지혁을 보다 말했다.

    "이곳 사람이 아니죠?"

    "음……."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 들더군요. 확실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이곳의 인간이 아니라는 느낌. 아니, 그분, 인간이기는 한 겁니까?"

    날카로운데?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저 사람이 능력이라도 갖췄으면 어찌 되었을까?

    '마법이라도 좀 가르쳐 볼까?'

    마나를 구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억지로라도 가르쳐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잘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서요?"

    "흠……."

    이지혁이 살짝 말을 돌리자 최정훈이 다시 방향을 잡았다.

    "지금까지라면 이지혁 씨가 어디서 뭘 했든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아펠드리체라는 분은 이지혁 씨의 공백의 시간과 관련이 있겠죠?"

    "그렇죠."

    이지혁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제 와서 말을 돌린다고 될 일도 아니고, 딱히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뭐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이 지구로 이지혁 씨가 갔던 세계의 존재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건데, 그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있어야 대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세계로 갔었다는 이야기를 했나?"

    "이계에서 넘어온 존재와 이지혁 씨의 게이트를 여는 능력을 감안한다면 간단히 추론 가능하죠."

    "혹시 똑똑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말 들어봤어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닌데? 들어봐야 할 텐데?"

    이지혁이 히죽히죽 웃더니 입을 열었다.

    "뭐, 숨길 일도 아니니까요. 맞아요, 저는 이계에 있다 왔어요."

    "역시!"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이계가 이곳과 시간 축이 다릅니까?"

    "시간 축이라… 그 표현이랑은 뭔가 다르긴 하지만, 시간의 흐름이 다르긴 해요."

    "저번에 우리 대원들이 갔다 왔던 곳처럼 말이군요."

    그렇다면 이지혁도 5년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있었다는 말이겠군.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나이대가 오히려 더 어려 보이는데?

    최정훈이 이지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젠 거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버린 삼디다스와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어서 무척 어려 보인다.

    아니, 그걸 빼고도 얼굴이 나이에 비해 더 앳되어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도 학생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던가.

    분명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온 사람일 텐데, 얼굴은 되레 어려 보인다니.

    이거, 소설에나 나오는 반로환동이니 뭐, 그런 건가?

    나이가 실제로는 100살 가까이 되었다든가?

    "저, 그런데……."

    "네?"

    "거기서 얼마나 있다 오신 겁니까?"

    "음……."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이것만은 뭔가 좀 곤란했다.

    "대략 뭐……."

    "네."

    "나라가 여러 번 망하고, 다시 열리고 또 망하고 하는 정도?"

    "……."

    이해가 굉장히 힘든 말이군.

    그러니까 나라가 여러 번 망했다라…….

    전국시대 같은 때라면 몇 년 사이에도 가능한 일이니, 뭔가 애매했다.

    "좀 더 명확하게?"

    "음……."

    이지혁이 머리를 긁다가 대답했다.

    "강산이 한 백 번 바뀌는 정도?"

    어디 보자, 십 년이 백 번이면…….

    최정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그러더니 갑자기 허리를 푹 숙이며 이지혁을 향해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뭐! 왜 이래요!"

    "연세가 있으시니까."

    "됐거든! 아니거든! 누굴 영감으로 만들어!"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이지혁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마음만은 십 대란 말이다! 마음만은!

    이세계에 끌려가서 천 년을 넘게 개고생만 하다 온 것도 억울한데, 먹지도 않은 나이 때문에 영감 대접이라니!

    "그래도……."

    "민증 까든가! 민증!"

    이지혁의 격렬한 반항 앞에 최정훈이 입맛을 다셨다.

    "네. 그럼 일단은 뭐, 이십 대인 걸로."

    "그래요. 제발……."

    이지혁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지구로 돌아온 이후 가장 강렬한 타격인 것 같다.

    "…뭔 소리야?"

    이해하지 못한 정해민의 고개가 갸웃했다.

    이지혁이 그런 정해민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런 뇌가 청순한 여자 같으니라고.

    "응? 왜?"

    "아니야."

    굳이 말로 할 건 없지. 청순함은 그 자체로 소중한 법.

    "여하튼 그래서 그럼 이계에서 그 오랜 시간을 계셨던 겁니까?"

    "네."

    "…음."

    최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가끔 이지혁이 나이에 안 맞게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사람 같다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천 년이라니.

    아니, 정확하게 천 년도 아닌 것 같은데.

    인간이 그렇게나 살면 '이리'되는 것인가?

    뭔가 저 구멍 뚫린 듯한 뇌의 비밀이 밝혀진 것 같아 후련하기도 하면서…….

    '다른 세계에서 천 년이라…….'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생각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타지만 가도 향수에 시달리는 것이 사람이고, 해외만 나가도 애국자가 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애초에 다른 세상이라니.

    그곳에서 천 년을 산다는 것은 대체 얼마만큼의 고통을 동반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군요."

    "네?"

    한 번씩 이지혁이 정말 무섭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가 세상을 파괴할 만한 힘을 가져서가 아니라 저 머릿속에서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하기 힘든 끔찍한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 기분이 그저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은 경험할수록 알게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지.

    그것을 천 년이나 겪어왔다면 얼마나 많은 악의를 경험해 왔다는 말인가.

    "으음……."

    최정훈이 할 말을 잃자 이지혁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즐겁게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서 인증을 올렸는데, 모두가 그것을 보고 통곡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뭐지? 자꾸 눈에 습기가 차는데?

    "언제 간 겁니까? 역시 블랙 먼데이에?"

    "예. 뭐, 그땐 거 같더라고요. 저야 블랙 머시기는 모르고, 여하튼 끌려갔다 돌아오니 그날 게이트가 여기저기 열렸다고 하더라고요."

    최정훈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그때 열린 게이트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 통행이라는 건가?

    "혹시 이지혁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끌려갔을 확률이 있나요?"

    "저야 모르죠. 그런데… 음, 있지 않을까요?"

    "흐음……."

    아무래도 이지혁에게만 특별히 그런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으니까, 비슷한 경우를 겪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다만, 그중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면…….

    '무리겠지.'

    이지혁조차 천 년이 넘게 걸려서 신과 대적해서 얻어낸 방법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식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지혁은 알고 있다.

    이계로 넘어가며 그의 혼이 고정된 것은 당연히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이루어진 일일 뿐.

    이계로 넘어간다고 모두 혼이 고정된다면 이곳으로 넘어오는 몬스터들 역시 불멸의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지혁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였다.

    그렇지 않다면 넘어가자마자 몬스터 밥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만약 아주 운 좋게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갔다고 해도 3년 이상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 것인가.

    "어렵겠지."

    "네?"

    "아니에요."

    옆에서 듣던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 갔다가 왔다는 거야?"

    "응."

    "…왜 그걸 말 안 했어?"

    "꼭 말해야 하나?"

    "아니, 그게 아니라… 말하면 좋을 텐데."

    "왜?"

    정해민이 뭔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지혁은 그런 정해민을 보며 코웃음 쳤다.

    "내가 힘이 있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 나 아니고 다른 놈이 이계에 갔다 왔다고 했어봐! 지금쯤 정부 으슥한 곳에 끌려가서 해부당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닌데?"

    "응?"

    정해민은 한심하다는 듯이 이지혁을 보고는 인터넷을 켜더니, 메인에 있는 인터뷰 동영상을 클릭했다.

    영상 안에는 한 남자가 수많은 마이크에 둘러싸여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이세계에서 돌아오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물론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있으셨던 겁니까?]

    [이십 년쯤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시간이 다르더군요.]

    * * *

    이지혁은 멍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거 뭔데?"

    "며칠 전에 이계에서 돌아왔다고 화제가 된 사람이야. 지금 각종 인터뷰와 촬영 요청이 쇄도하고 있고, 각 기획사들마저 달려들고 있어. 톱 연예인급 관심을 받고 있는데?"

    이지혁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해부 안 당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으응?"

    정해민이 한심하다는 듯 이지혁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면, 그거 KSF에서 주관하는 거 아닌가?"

    "으응?"

    "쟤들이 그런 거 할 거 같아?"

    "……."

    털썩.

    이지혁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 난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마음의 땀이 흐른다.

    마음의 땀이.

    최정훈은 얼굴을 감싼 채 어깨를 들썩이는 이지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천 년을 살았든 말든 바보는 바보다.

    * * *

    "누구?"

    그 목소리는 더없이 높았다.

    아주 매혹적이며 끈적이는 목소리가 어둡고 음습한 공간에 높이 울려 퍼졌다.

    누구라도 매혹될 듯한 목소리건만, 그 음성을 들은 존재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머리를 낮췄다.

    "아, 아흔아홉 번째 마왕, 그분을 찾았다고 합니다."

    "누구라고?"

    고오오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세상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길게 자라난 두 개의 뿔, 어깨에서 돋아난 두 개의 날개, 검고 검어 빨려들 것 같은 검은 흑발.

    굴곡진 몸에 바짝 달라붙은 검은 레오타드.

    그와 대조적으로 새하얘서 얼어붙을 것만 같은 피부.

    그리고 온통 희고 검은 색감 속에서 유일하게 달리 돋보이는, 피처럼 붉은 입술.

    그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고혹적인 혀가 슬며시 밖으로 나와 입술을 핥는다.

    "마왕이시여!"

    "거기 있었구나, 이지혁!"

    열세 번째 마왕.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더없이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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