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5화 (25/118)
  • [■] 심장이 멎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최정훈의 혼잣말에 아펠드리체는 친절히 대답을 해주었다.

    "이계와 연결된 겁니다."

    "네?"

    아펠드리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지혁 씨의 주특기는 공격 마법과 게이트죠."

    그랬나?

    공격이야 그렇다 치고…….

    아니, 그전에… 마법?

    저게 마법이란 건가?

    이지혁이 사용하던 것들이 능력이 아니라 마법이라고?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늘어났다.

    하지만 최정훈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아펠드리체는 설명을 계속했다.

    "게이트를 변형한 거예요. 쉽게 말하면, 저 검은 홀 전체가 거대한 게이트의 내부인 거죠."

    검은 달을 중심에 두고 크게 회전하고 있는 매.

    그 위에 납작 엎드린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저게 게이트라면, 저번 NDF 대원들처럼 다른 세계로 보내 버리기라도 했다는 건가?

    "이계로 보내 버린 겁니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매우 효율적인 처리법이다.

    "아뇨. 게이트에 대한 이해도가 최고급에 달한 지혁 씨라도 저 정도 생물을 의지에 반해 이계로 날리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럼 무슨 의미죠?"

    "데리고 오는 거죠?"

    "네?"

    "이 세계에 살 수 없는 생명들을 저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전혀 이해하지 못한 최정훈이 눈을 부릅뜨고 검은 달 안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야?"

    최정훈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도가윤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자면 NDF에서 가장 침착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녀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들을 보면서도 평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한 마리의 드레이크가 또다시 끌려 들어간다.

    으득, 으드득.

    피와 비명을 흩뿌리며 드레이크가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세상을 가득 메운, 그로테스크한 짐승들은 드레이크를 뼈 한 점 남기지 않고 모조리 뜯고, 핥고, 마시고, 집어삼켰다.

    세상이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것도 잠시.

    그 검은 벽면에서 하나하나 튀어나오기 시작한 괴물들 덕분에 세상이 온통 괴물들로 뒤덮여 버렸다.

    괴물로 이루어진 벽.

    그 벽이 천천히 좁혀지며 드레이크들을 집어삼킨다.

    크롸롸롸롸롸롸!

    이와 손톱과 흘러나오는 산성의 위액들이 드레이크들을 집어삼킨다.

    벽에 닿는 그 순간, 1초도 걸리지 않아 온몸이 갈가리 찢기고 뜯겨 먹힌다.

    마치 아귀들 사이에 던져진 양처럼 말이다.

    후드드득!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린다.

    피와 살점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바닥을 가득 채운 짐승들이 그걸 받아 마시며 환호하고 소리친다.

    도가윤이 덜덜 떨며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지옥이란 게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세상이 모두 악귀와 악마로 들어찬 것만 같았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그저 유희거리에 불과한 것만 같다.

    도가윤 자신조차도 말이다.

    우웅.

    마력이 다했는지 도가윤의 몸을 허공에 띄우고 있던 발판이 스르륵 사라진다.

    도가윤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직 날고 있는 드레이크라도 잡아보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아……."

    그녀의 눈에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아귀 떼가 들어왔다.

    이미 떨어지는 그녀를 발견한 아귀 떼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팔과 촉수를 뻗고 있었다.

    저기에 닿는 순간, 그녀의 육신은 수천 조각으로 나뉘어 아귀들의 뱃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죽음?

    죽는 순간에는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는데…….

    거짓말이었나 봐.

    도가윤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죽음은 쉽사리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청승 떨고 앉아 있네."

    "아……."

    도가윤의 눈이 다시 번쩍 떠졌다.

    눈앞에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리고 있는 이지혁이 보였다.

    "이지혁……."

    "님이라든가 씨라든가 붙이시지? 어린 게 어디 오라비 함자를 함부로 불러 제끼냐. 처맞을라고."

    '입을 닫으면 좋음.'

    그냥 닫고 있는 게 좋다, 이 남자는 말이야.

    입을 떼면 영 좋지 않다.

    그래도…….

    도가윤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하?"

    이지혁이 도가윤의 반응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아주 쇼를 하고 자빠졌네. 던져 버릴까 보다."

    하지만 이 여자가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지.

    인간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몇 백 년 만이지?

    이지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미묘한 기분인데 말이야.

    아니, 지금은 그런 것보다…….

    이지혁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직 반수가 넘는 드레이크들이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육지형이라면 모를까, 비행 생명체라면 지쳐서 떨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이지혁의 입가에서 유부에서 들릴 것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먹어라."

    먹어 치워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이지혁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나에 세상을 채우고 있던 아귀들이 동조하며 거대한 괴성을 질러 댔다. 그와 동시에 벽면에서 아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끅끅끅."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숨이 넘어갈 듯 웃어 제꼈다.

    이 아귀들은 결코 이 공간 밖으로는 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 공간 안에서라면 그 무엇보다 잔인하고 광포하며 두려운 존재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지혁은 그들의 왕이었다.

    아귀의 왕이자 세계의 왕.

    이 작은 세계 안에서 이지혁은 절대자이자 지배자이자 신이었다.

    이지혁의 눈을 타고 검은 마나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온다.

    선홍빛 입술이 피에 젖어 말라붙는다.

    도가윤은 등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전율했다.

    이게 이지혁인가…….

    이게 자신이 몇 달 동안 감시했던 그 이지혁이라는 말인가.

    다른 사람.

    아니, 사람이 맞기는 한가?

    지금 이자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악마.

    그저 악마일 뿐이다.

    숨기지 않고 드러낸 그 흉성 앞에 도가윤은 한낱 연약한 인간이 되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응?"

    이지혁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도가윤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잡아먹는다?"

    "……."

    어쭈?

    이년 보게? 눈을 감아?

    그것도 그렇게 질끈?

    아니! 내가 진짜 잡아먹을 리가 있나!

    머리 뒤로 빼지 말라고!

    나 흡혈귀 아니라고!

    이거도 웃기네, 진짜?

    이지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얘, 뭐야?

    안 그러던 애가 이러니 더 이상하네?

    "눈 안 떠?"

    "……."

    도가윤이 슬며시 눈을 뜬다.

    "진짜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끄덕.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사람을!

    내가 식인종쯤으로 보이냐!

    맛있는 거 많은데 뭣하러 사람까지 먹겠냐고.

    이지혁이 쩝, 입맛을 다셨다.

    그 와중에서도 아귀들은 저들끼리 뭉쳐서 마치 거대한 생물인 것처럼 솟아올랐다.

    아마존의 개미 떼가 얽히고 얽혀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아귀들이 한데 뭉쳐 마치 거대한 이무기처럼 드레이크들을 집어삼킨다.

    크롸롸롸롸!

    드레이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듯 비행했지만, 사방이 아귀로 막혀 닫힌 공간에서 달아날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마지막 남은 드레이크까지 아귀들의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지혁과 도가윤.

    그리고 아직 만족하지 못한 아귀들만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끼이이이잇!

    까아아아!

    아귀들의 악다구니가 들려온다.

    명백한 굶주림의 호소.

    "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것들이 지금 나를 보고 침을 흘리는 건가?

    설마…….

    이지혁이 주변을 가만히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하기야 내 지배력이 예전 같지는 않겠지.

    눈빛 하나로 만마를 제압하던 멸망의 좌는 더 이상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아귀 따위가…….

    이지혁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차피 결과야 같지.'

    "뭘?"

    "아, 너 말이야……."

    "네?"

    이지혁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한다.

    "눈 감는 게 좋아."

    "……?"

    "심장이 멎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 말이 신호였다.

    이지혁의 손 앞에 만들어진, 작고 검은 공 형태의 마나 뭉치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싶더니, 이내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빨아들여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공할 인력이 발생했다.

    세상을 가득 메운 아귀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마나로 만들어진 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악!

    그곳에 빨려 들어가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는 건지, 아귀들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어둠의 벽에 발톱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그뿐.

    저항할 수 없는 인력 앞에 아귀들이 빛살처럼 빨려 들어온다.

    비명이 쩌렁쩌렁 울리고…….

    체액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수천수만은 되어 보이는 아귀들이 일제히 발버둥을 치며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

    이런 광경을 또 어디서 보겠는가.

    도가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건 너무도 파괴적이고…….

    또한 흉포하고…….

    끔찍했다.

    세상이 이지혁의 손 앞으로 빨려 들어온다.

    그리고 이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아아아아악!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아귀까지 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이지혁은 손을 뻗었다.

    마나의 홀은 그 많은 아귀들을 집어삼킨 게 거짓인 것처럼 그저 검고 영롱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이어 검은 마나의 홀이 이지혁의 왼손으로 파고들었다.

    "흐읍!"

    순간,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입에서 피가 튀어 나왔다.

    "끅!"

    마치 몸 안에 수십 개의 작은 공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이지혁의 몸 이곳저곳이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아씨, 더럽게 아프네. 진짜. 씨."

    몇 번이고 투덜거리던 이지혁이 원래대로 돌아온 팔을 보더니, 손을 몇 번 쥐었다 폈기를 반복했다.

    '흠…….'

    마나를 빨아들인 것만으로 복원이 이루어진다.

    딱히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만큼이나 흑마력에 육체가 찌들어 있다는 뜻이겠지.'

    보통 사람이라면 이지혁이 지금 지니고 있는 마력의 천분의 일이라도 몸에 받아들이는 순간, 전신이 폭발해서 죽을 것이다.

    흑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극한 데 다다른 이지혁이기에 이 정도 부작용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육체는 점점 더 흑마력에 물들고 있고, 그의 정신 역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마지막 순간이 닥치면…….

    이 세계에 진짜 마왕이 강림하게 될 것이다.

    근데…….

    나 지금도 마왕 아닌가?

    상관없잖아, 그러면.

    "안 그래?"

    "네?"

    "아니, 아니, 너한테 한 말 아니야."

    이지혁이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마나가 차오른 느낌이 든다.

    이 정도면?

    보자, 보자… 그 정도 드래곤은 상대할 수 있으려나?

    아니, 조금 모자란데…….

    드레이크만으로는 부족했다.

    아귀들은 마나가 없는 생물들이라 먹어도 별 도움이 안 된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마나들을 빨아들이느라 어쩔 수 없이 먹은 건데, 덕분에 불순물이 목까지 차오른 느낌이었다.

    퉤.

    바닥으로 침을 뱉은 이지혁이 손을 휘저어 공간을 해제했다.

    검고 검었던 세계가 서서히 밝아온다.

    "저기!"

    이지혁의 모습이 나타나자 검은 매가 날아온다.

    이지혁은 가볍게 매 위로 올라타 도가윤을 내려놓았다.

    "지혁 씨."

    아펠드리체의 조금은 날이 선 듯한 목소리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싸움은 나중에."

    지금은 니가 아니라 저 도마뱀을 처리해야 할 때거든.

    아, 너도 도마뱀이지?

    아무려면 어때.

    "가자!"

    이지혁을 태운 매가 가공할 속도로 바다를 향해 날아들었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좀비 드래곤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외친다.

    "야, 이 새끼야! 너 거기……."

    "그거 아까 했어요."

    "아, 그래?"

    그럼… 그냥 쫓아가야지, 뭐.

    …그런데 사람 엄청 민망하게 만드네?

    확 엎을까?

    최정훈은 알 수 없이 돋아나는 식은땀에 이마를 훔쳤다.

    * * *

    "빨리 설치하라고!"

    서아영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대원들의 발이 빨라졌다.

    '썩을 마녀.'

    서아영의 고함을 듣는 이들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서아영에게 반발할 만한 용기를 가진 이는 없었다.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을 때, 서아영에게 반항했다가 통구이가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 신은 그녀에게 위대한 능력과 지랄 같은 성격을 함께 주셨는가!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증거가 있다면, 바로 저 여자일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서아영은 다급했다.

    "제길."

    휴대폰에 표시되고 있는 드래곤의 위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동원된 위성이 몇 대인가.

    문제는 그만큼의 위성을 동원하고도 정확한 항로를 예상할 수 없다 보니, 커버해야 할 지역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울진부터 삼척까지의 길고 긴 해안을 모조리 커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금 서아영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 했다.

    "아우우우."

    서아영이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완전히 축 처져 늘어진 정해민이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고생했어."

    "고생했어요! 고생했어요! 내가 언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언니 말 똑바로 안 들을래?"

    "아직 기운 있으면 몇 사람만 더 옮겨줄래요?"

    "아우우우, 나 죽는다."

    데구루루 구르는 반응에 피식 웃은 서아영이지만,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원 배치를 해낼 수 있던 이유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능력의 한계까지 해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다.

    "나중에 고기 사 줄게요."

    "진짜?"

    강아지처럼 꼬리라도 흔들 듯한 그녀의 반응에 서아영은 웃고 말았다.

    "뭔 아이돌이 고기에 그리 환장을 해요?"

    "너도 이 바닥에 있어봐. 밥이나 제대로 먹나."

    "그러네. 그럼 먹으면 안 되겠네."

    "…그럴까?"

    시무룩하기는.

    귀여운 언니다.

    하기야 따져 보면 가윤이도, 최정훈 씨도 그렇고,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남미녀에 좋은 사람들뿐이다.

    그나마 그중 성격이 나쁜 사람이 자신이고.

    또…….

    으득.

    그 망할 인간.

    갑자기 그녀의 인생에 나타나 고춧가루가 아니라 캡사이신을 들이붓고 있는 망할 인간!

    귀신은 뭐하나! 대체 귀신은!

    "이지혁… 진짜!"

    "응?"

    저 반응은 또 뭐지?

    이지혁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뿐인데 왜 또 꼬리가 흔들리는가.

    이지혁은 자신이 고기와 동급의 취급을 받는다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 좋아요?"

    "뭐, 뭐가? 내가? 뭔 소리야! 내가 왜! 하, 너 진짜 이상하다? 내가 누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건데?"

    "…고기, 고기, 언니."

    "응? 고기? 고기야 좋지……."

    뭔가 얼굴이 새빨개진 게 귀엽다.

    서아영은 쿡쿡,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끝났어요?"

    "말씀하신 대로 배치는 했습니다."

    김재범의 대답에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것은 날아오는 루트를 따라서 조금씩 포위망을 좁히는 일뿐이다.

    하지만…….

    서아영의 뇌리에 하늘로 날아오르던 좀비 드래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막을 수 있을까?'

    그 압도적인 위용.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혼이 얼어버릴 것 같은, 그 거대한 공포 앞에 대항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들이 인간의 영역을 넘어버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녀만의 착각일까?

    지랄 맞지만, 이럴 때 의지가 되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는 없다.

    따져 보자면 그가 없었다면 이미 대한민국은 없어졌거나 근근이 명맥만을 유지하며 타국에 휘둘리고 있었겠지.

    나라의 입장에서나, 그녀의 입장에서나 분명 은인은 확실한데…….

    왜 고맙지가 않을까?

    왜 짜증만 나는 것인가!

    어쨌든 지금 믿을 건 이지혁밖에 없었다.

    서아영이 휴대폰에서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흐르고…….

    - 으아아아아!

    아, 씨! 뭐, 받자마자 고함이야!

    "최정훈 씨?"

    - 부장님! 우아아아! 이 미친놈아, 하지 말라고! 부장님이이이임!

    "거기 대체 뭔 일이에요?"

    - 저 미친놈이! 아! 아! 아뇨, 미친놈이라고 한 게 아니구요. 네.

    서아영은 머리를 감쌌다.

    여하튼 한 번을 곱게 넘어가는 일이 없구나, 곱게!

    "뭔 상황인지 브리핑이나 좀 해요!"

    - 브리핑이요? 브리핑? 어차피 미친놈이 미친 짓 하는데 뭔 브리핑이 필요합니까! 그냥 미친 거죠!

    뚝.

    서아영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야기를 더 한다고 뭐가 나오지도 않는다.

    "…지혁이야?"

    이 언니는 또 왜 이러나.

    "좋은 사람들은 개뿔이."

    다 또라이밖에 없어, 또라이밖에.

    "재범 씨."

    "예!"

    "처음 계획한 대로 움직이세요. 이동 경로에 따라서 사람들 모으는 거 잊지 말구요."

    "알겠습니다."

    서아영은 불안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지혁 씨."

    어쨌든 믿을 사람은 이지혁밖에는 없었다. 믿으면 안 될 사람이기도 하지만.

    * * *

    "아니이이이이!"

    최정훈이 검은 매의 등을 움켜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이지혁은 귀를 후비적후비적 파내고는 대답했다.

    "그럼 뭐 어쩔까요?"

    그러게 누가 따라오랬나?

    이지혁은 매를 움직여 좀비 드래곤의 턱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쾅!

    지나간 자리 바로 뒤로 드래곤의 입이 과격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들은 드래곤의 배 속에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느린데?"

    최정훈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니! 왜 이러냐고! 왜!"

    이유가 딱히 있을 리가 있나.

    "시간도 끌고, 적당히 약점도 알아보고… 겸사겸사 하는 거지, 뭐."

    "그건 혼자 하라고요오오!"

    촤아아앗!

    매가 드래곤의 배 아래를 스쳐 지나가자 사람 몸통보다 더 큰 손톱이 날아들었다.

    "헛!"

    이지혁이 매의 방향을 틀며 아슬아슬하게 손톱을 비껴 지나갔다!

    "아이고, 나 죽는다!"

    최정훈의 우는소리에 이지혁이 혀를 찼다.

    "그러게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이 뭐하러 따라와서는!"

    지금이라도 보내 버릴까?

    아서라, 그랬다간 영원히 가는 일이 벌어지겠지.

    이지혁은 매를 조종하여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고민에 빠졌다.

    "하, 저걸 어째야 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못해도 100m는 되어 보인다. 에이션트급은 아니어도 웜급은 되어 보이는데, 저 거대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일격에 산이라도 날려 버릴 기세였고, 이곳저곳 찔러보기는 했지만 아무리 반쯤 썩었어도 드래곤은 드래곤. 웬만한 공격으로는 비늘에 흠집도 나지 않았다.

    일단 드래곤 자체가 마법에 대한 면역도가 높아서 공격이 잘 안 먹히는 면도 있고.

    '겨우 좀빈데도 이 정돈가?'

    새삼 드래곤이라는 생명체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들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던 바는 아니지만…….

    이지혁이 그의 옆에 있는 아펠드리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 뭐, 음… 저딴 드래곤도 저리 설치는데, 우리 로드님은 대체 뭐하시나 싶어서."

    "베라프에서였다면 저런 잡몹쯤 훅 불면 날아갔겠죠."

    "지금은 니가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데?"

    "좀 날씬해서?"

    도마뱀 주제에 날씬이 뭔지나 아나?

    할 말은 많지만, 말 섞는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마음 좋은 자신이 참아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농담할 때가 아니야."

    이놈을 막지 못한다면 정말 서울이 반파될지도 모른다. 서울을 지나쳐 간다면 모르겠지만, 거기에 자리를 잡게 되는 순간 서울이라는 도시는 사라질 것이다.

    물론 그냥 지나간다고 해도 반쯤은 박살이 나겠지만 말이야.

    이지혁은 멍청하게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자신을 찾고 있는 드래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내가 쓰면 병신이고 남이 쓰면 사기라는, 그런 케이스인가?

    좀비 드래곤이나 본 드래곤 역시 이지혁의 군단에 있던 몬스터들이다. 하지만 공통점은 둘 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것 정도겠지.

    신성 마법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베라프에서 궁극 언데드 몬스터 따위는 교황 놈들의 한 끼 식사에 불과했다.

    좌우에서 날아드는 턴 언데드에 눈 녹 듯이 사라지는 언데드 군대를 보며 피눈물을 흘린 이후로 다시는 언데드에 손을 대지 않았지.

    베라프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절대로 주식과 도박, 언데드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법이다.

    뭐?

    베라프에 주식이 있냐고?

    …그건 나도 모르겠다. 있겠지, 뭐.

    그건 그렇고!

    이걸 어찌한다?

    이지혁이 좀비 드래곤을 보며 턱을 괴었다.

    놈이 좀 느릿해서 당하지 않을 수 있던 거지, 전력 차가 너무 난다.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대신 공격할 방법이 없다.

    이지혁 일행이 가진 어떠한 공격으로도 저 드래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계의 문을 연다고 하더라도 저 거대한 덩치가 날뛴다면 아귀고 뭐고 박살이 날 터였다.

    "어쩌나, 어쩌나?"

    "이지혁 씨."

    "네?"

    "저 날개를 어떻게 해보면 안 됩니까?"

    "하?"

    이지혁이 펄럭대고 있는 드래곤의 날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난 날개가 펄럭이는 데도 날고 있는 것을 보면 감을 잡아야 할 것 아냐.

    "날개로 나는 것 아니에요."

    "네?"

    "마법이죠. 마법으로 날……."

    이지혁이 말하다 말고 손뼉을 쳤다.

    "아, 그러네!"

    이 인간, 은근 도움이 된단 말이야?

    어쨌든 못 날게만 하면 시간은 일단 버는 거잖아?

    이지혁의 양손이 움직였다.

    "디스펠!"

    순간, 이지혁의 양손이 환히 빛나더니, 좀비 드래곤의 몸 역시 환하게 빛났다.

    크롸롸롸롸!

    그러고는 좀비 드래곤의 그 거대한 육체가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만약 진짜 드래곤이었다면 비행 마법을 쓰기 이전에 이미 디스펠에 대한 대처를 했겠지만, 좀비가 된 덕분에 멍청해진 드래곤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콰아앙!

    엄청나게 거대한 소리와 함께 좀비 드래곤이 바다를 뚫고 들어갔다.

    동시에 하늘까지 치솟는 거대한 하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좋아!"

    최정훈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지혁은 떨떠름할 뿐이었다.

    "뭘 그리 좋아해요?"

    "네?"

    그 정도로 대미지가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좀비라도 드래곤인데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드래곤은 머리를 빼꼼 바다 밖으로 내밀더니 브레스를 뿜어냈다.

    촤아아아!

    브레스가 닿자 바다의 표면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머리가 나쁜 건 다행이긴 한데……."

    때로는 그게 더 무서울 때도 있는 법이지.

    지금처럼 말이야.

    나름 공격을 퍼붓고 시선을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리 한 목적만 가지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자니…….

    '후음…….'

    이걸 못 막아내면 서울이 날아간다!

    "이거 안 되겠네."

    서울에는 박선덕과 이예원이 있다. 혹시 대피령이 떨어져서 이미 서울을 떠났을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일단 한 번 제대로 막아볼까?"

    이지혁의 우수가 검게 빛나더니, 이내 바닥으로 거대한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나와라!"

    카아아아아!

    투기 넘치는 괴성과 함께 게이트에서 익숙한 것들이 튀어나왔다.

    "대망?"

    종속의 인이 찍힌 이지혁의 몬스터들이 뛰쳐나와 드래곤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히드라와 대망이 동시에 잡고 늘어지는데도 거대한 드래곤의 육체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한국을 향해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드래곤의 반쯤 썩은 눈동자에 해안을 점거하고 있는 능력자들이 들어왔다.

    스으으으으!

    드래곤의 입가에 새하얀 서리가 어리고…….

    이지혁의 눈이 순간 불을 뿜었다.

    "피해에에에에에에!"

    드래곤의 브레스가 KSF 요원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아……."

    서아영은 자신 쪽을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빛의 기둥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도쿄에서 날아올랐을 때 저 드래곤이 보여준 아이스 브레스.

    도시를 통째로 얼려 버린 한기의 집약체가 지금 그녀를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저항?'

    어떻게?

    그녀가 뿜어내는 미약한 불꽃으로 저 한기의 저주를 막아낸다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피해?

    브레스의 범위를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어렵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

    이토록 많은 능력자들을 모은다고 고생한 것이 허무할 정도였다.

    '이렇게나…….'

    대한민국은…….

    아니, 인류는 저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서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그게 뭔 의미가 있는가, 어차피 자신은 지금 죽을 텐데.

    그렇다고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아. 마지막 순간까지 이 두 눈으로 담아주겠어!

    하지만 서아영이 눈에 담은 것은 그녀의 죽음이 아니라 익숙한 사람의 뒤통수였다.

    이지혁?

    "아오!"

    블링크로 나타난 이지혁이 양손을 마구 휘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자면 그냥 발악을 하는 것 같겠지만, 이지혁은 지금 다급하게 수식을 짜고 있었다.

    "오픈!"

    이지혁의 양손이 쫘악 벌어지자 그 앞에 거대한 검은 홀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그 바로 위에 동일한 크기의 게이트가 하나 더 열렸다.

    "처맞아라!"

    날아든 브레스가 이지혁의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바로 위쪽에 열린 게이트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브레스는 드래곤을 향해 그대로 되날아갔다.

    크륵?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대가로 드래곤의 육체에 자신의 브레스가 틀어박혔다.

    카아아아아아!

    거대한 비명과 함께 드래곤이 바다째 얼어붙기 시작했다.

    거대한 빙하가 생겨나는 것처럼 새하얗게 얼어붙는 바다와 드래곤의 모습은 기괴하고도 장엄했다.

    "카운터다, 이 자식아!"

    이지혁이 쾌재를 불렀다.

    입구 게이트의 각도와 출구 게이트의 각도를 완벽하게 계산해서 받아쳤다.

    베라프에서도 오직 이지혁만이 할 수 있던 신기.

    아펠드리체가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떨었다.

    저게 쉬운 일이라면 게이트가 최강의 방어 마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공격에 대한 용량을 계산하고 적절한 게이트를 단시간 내에 만들어서 대처한다는 것은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이란 놀라운 존재다.

    언뜻 미약하고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 같지만…….

    한 번씩 저런 인간이 출현한다.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가는 드래곤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만한 재능을 한 몸에 타고나는 존재들.

    짧게 살아가는 만큼 더없이 화려하게 빛나고 명멸하는 존재들이 말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마법에 대해 비할 바 없는 재능을 타고났으면서도 긴 세월을 살아가는, 기이한 존재였다.

    덕분에 그의 재능은 만개하다 못해 넘쳐 썩어버릴 정도로 피어났다.

    덕분에 드래곤들조차 그의 마법을 두려워하고 경외했다.

    마법에 있어서는 인간뿐만이 아닌, 어떠한 존재도 도달한 적 없는 경지에 오른 존재.

    그가 바로 멸망의 좌.

    이지혁이었다.

    '마나만 공급된다면…….'

    불멸의 육체 따위는 없어도 된다.

    예전처럼 끊이지 않고 마나를 공급할 수 있는 원천을 얻기만 한다면, 이지혁은 다시금 신의 영역까지 오르겠지.

    그리된다면 세상의 어떤 존재도 그를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베라프 전체가 달려들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듯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나가 없는 이 지구에서 그런 원천을 얻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지혁 씨!"

    서아영이 반가움과 고마움, 그리고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이리 늦……."

    "쉿."

    이지혁이 서아영의 입을 막았다.

    "안 끝났어."

    끝날 리가 없지, 이제 시작인 것을.

    드래곤을 둘러싼 얼음에 쩌저적, 금이 가더니, 금세 분노에 가득 찬 포효가 사방으로 울렸다.

    크롸롸롸롸롸!

    얼음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고개를 높이 쳐올린 드래곤이 피어를 토해냈다.

    "꺄아아아아아악!"

    서아영조차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단 한 번의 피어에 절명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하……."

    이지혁조차 배 속에서 피가 울컥울컥 토해져 나올 정도의 충격을 얻어맞았다.

    "와, 이거 장난 아니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소모되는 육체를 가지고 받아보니 피어도 충격이 엄청났다.

    보면 볼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드래곤이라는 생명체는 끔찍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더욱 알게 된다.

    "나 좀 쩔었네."

    저런 좀비가 아니라 진짜 드래곤 떼를 가지고 놀았으니까 말이야.

    아, 옛날이여.

    하지만 이제 와 뭘 어쩌겠는가.

    그걸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온 건 이지혁 자신이다.

    이 세계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라 생각해서 버릴 수 있던 걸까?

    이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다면 버리지 않았을까?

    아니.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그곳에 영원히 박제된 채 살 수는 없으니까.

    지금의 이지혁조차 경외롭다 생각할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졌던 멸망의 좌로 박제되어 사느니, 드래곤 한 마리 처리 못해서 낑낑대는 인간으로 살겠다고 결정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지혁 스스로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이지혁이 눈짓을 하자 최정훈 등을 태운 매가 옆으로 날아들어 내려앉았다.

    "준비해."

    아직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아영을 향해 소리치자 그녀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스의 여파로 바다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얼음 위에서 싸우는 게 껄끄럽기는 하지만, 물 위에서 싸우는 것보다야!

    "물어뜯어라!"

    이지혁의 고함과 함께 대망과 히드라가 좀비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크롸롸롸롸롸!

    크오오오오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오식이의 뒷목을 잡았다.

    끼잉?

    오식이의 눈이 커다래진다.

    "밥값 해야지! 밥값! 그치, 오식아?"

    크르르륵?

    이지혁이 오식이의 육체에 마나를 불어넣으면서 냅다 드래곤에게로 집어 던졌다.

    파앙!

    오식이가 마치 탄환처럼 드래곤에게로 쏘아져 갔다.

    "밥값을……."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드래곤이 고개를 돌리더니, 날아 들어오는 오식이를 확인했다.

    점점 부풀어 오르며 제 형체를 되찾아가는 오식이.

    드래곤이 입을 쩌억 벌리더니, 오식이를 그대로 꿀꺽 삼켰다.

    어?

    "……."

    이지혁이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며 말했다.

    "…그 밥이 아닌데."

    이지혁이 벙 쪄 있거나 말거나 드래곤은 오식이를 통째로 삼켜 버리고는 입맛을 다셨다.

    "오, 오식아아아아!"

    이지혁의 눈이 지진이라도 만나 것처럼 떨렸다.

    "아이고, 오식아! 오식아아아!"

    이럴 수가… 이게 뭐야!

    어떻게 얻은 애완동물인데, 저리 허무하게!

    내 오식이 살려내라, 이노무 자식아!

    "오식아, 기다려라! 형이 구해줄게!"

    콰아아아아아!

    순간, 이지혁의 몸 주위에 검은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마법 함부로 쓰지 말라니까요!"

    아펠드리체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지만, 이지혁은 되레 인상을 썼다.

    "우리 오식이가 먹힌 것 못 봤어?"

    "시체가 소화시키는 건 봤어요?"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시체가 음식을 통째로 삼키면 어찌 되는 거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은 건가, 그러면?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위험할지도!

    "일단 때려눕혀 놓고 생각하자!"

    이지혁의 깔끔한 결론에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부터 대책이 없는 것은 어떻게 고쳐지지가 않는구나.

    이지혁의 우수에서 뿜어져 나간 마나가 거대한 검은 마법진을 허공에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체라도……."

    그래도 드래곤인데.

    급은 좀 맞춰줘야지.

    이지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게다가 조건도 갖춰졌고.

    "가라."

    이지혁이 만들어낸 검은 마법진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드래곤을 향해 날아갔다.

    우우우웅!

    드래곤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선 마법진이 진동하더니, 주변의 얼음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서아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 인간이 하는 짓은 언제나 놀랍다.

    그러니 이제는 그냥 보고 있으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법진은 주변의 얼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후드드드!

    얼음들이 부러지고 으스러져 마법진으로 빨려들더니, 이내 하나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거대한 인간.

    아니, 인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인간형의 갑주를 갖춘 그 무언가로 변해갔다.

    "골렘."

    아펠드리체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 이지혁이 이끌던 군단의 선봉에 섰던 강철의 거인들.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갖추고도 마법에는 거의 면역이나 가까웠던, 악마 같은 군단.

    그 강철의 군단 앞에 얼마나 많은 나라와 얼마나 많은 드래곤들이 무참하게 쓰러져 갔던가.

    싫은 기억이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얼음의 거인.

    거거거거걱!

    관절이 마찰하며 기괴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신장이 최소 30m는 될 듯한 엄청난 크기의 얼음 거인이 드래곤의 머리를 후려쳤다.

    콰앙!

    산만 한 크기의 드래곤이 일격에 붕 떠오르며 튕겨 나갔다.

    "크!"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거지! 그래, 이거지!

    아오, 속이 다 시원하네!

    "짓밟아 버려!"

    얼음의 거인이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리더니, 바닥에 추락한 드래곤을 그대로 짓밟았다.

    콰드득!

    드래곤의 가슴 부위가 움푹 꺼지며 입가로 검은 피가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그렇지!"

    그때, 최정훈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그런데……."

    "응?"

    "저렇게 밟아대면 안에 있는 오식이는?"

    이지혁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아이고, 오식아아아아아아!"

    최정훈이 혀를 찼다.

    이 새끼는 생각을 해주는 건지, 마는 건지… '이리된 이상 내 손으로 죽여주겠다'도 아니고.

    "으아아아아, 이 썩은 드래곤 놈! 오식이의 원수를 갚아주마!"

    니가 한 거야, 이 미친놈아!

    크롸롸롸롸!

    드래곤의 입에서 새하얀 브레스가 뿜어져 나와 얼음의 거인을 뒤덮었다.

    "얼음에 얼음을 끼얹는다고 그게 뭐… 어? 어네?"

    얼음도 어네?

    헐…….

    이게 뭔 상황이지?

    극한의 냉기에 얼음 거인의 육체가 쩌적쩌적 갈라진다.

    "여하튼 저 드래곤이란 것들은 진짜……."

    저러니 천 년이나 이지혁을 막았지.

    이지혁이 양손을 들어 허공에 다시 하나의 마법진을 띄웠다.

    저 드래곤을 처리하려면 더더욱 큰!

    "큭!"

    찰나, 이지혁이 양손을 내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지혁 씨!"

    "쿨럭!"

    검붉은 피가 입과 코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온다.

    '모자라.'

    마나가 딸린다.

    드레이크를 그만큼이나 퍼먹었는데도 마나는 부족하고 또 부족했다.

    이지혁이 흔들리는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직면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라니.

    마나가 없다면 이지혁은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생각해라.

    이 상활을 타개할…….

    "게이트?"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아펠드리체!"

    "네."

    "저 게이트 여는 데 필요한 게 뭐라고 했었지? 커지는 게이트 말이야."

    "마정석이나 아티팩트."

    "그래, 그거다!"

    어느 쪽이든 마나의 덩어리지!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서아영을 불렀다.

    "서아영!"

    "네."

    "잠깐만 막고 있어!"

    "헐."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더러 저걸 막으라는 건가?

    저걸?

    서아영이 허탈하게 웃었다.

    객기 안 부리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객기를 최대한으로 부려서 자살이라도 하라는 건가?

    "무리죠."

    "잠깐이면 된다, 잠깐이면!"

    "그 잠깐이……."

    하, 말을 말자.

    그렇다고 이지혁더러 혼자 다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도 웃긴 이야기지.

    서아영의 눈에 전신이 쩌적 갈라진 채 드래곤을 덮쳐누르려 애쓰는 얼음의 거인, 그리고 드래곤의 몸을 친친 감고 있는 대망과 물어뜯는 히드라가 들어왔다.

    "꼬맹이!"

    정해민이 저 멀리서부터 쪼르르르 이지혁에게로 달려왔다.

    이지혁은 정해민이 손을 내미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았다.

    "가자!"

    "어, 어디로?"

    "도쿄! 게이트가 열린 곳으로!"

    "응!"

    정해민과 이지혁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퍽, 꺼졌다.

    서아영이 둘이 사라진 곳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텅 빈 눈빛을 띤 대원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막을 수 있지?"

    "……."

    "있겠지?"

    "……."

    "있을 거야, 아마……."

    망할 새끼.

    서아영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 * *

    "일단 최대한 물러서서 싸우란 말이야! 스쳐도 죽는다고오오!"

    서아영이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스쳐도 죽는다. 코끼리 다리에만 스쳐 맞아도 죽는 게 인간인데, 저 드래곤의 중량은 코끼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코끼리는 무슨.

    발톱 하나가 코끼리만 한데!

    크롸롸롸롸롸!

    날뛰는 드래곤과 싸운다는 것은 정말 지옥 같은 일이었다.

    중간에 적절히 도움을 주는 아펠드리체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이미 빠른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저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뭐지?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 쪽에서 좀 더 정보를 얻어내는 건데.

    아니, 이지혁을 좀 더 닦달하는 건데.

    이지혁… 그래, 이지혁!

    "언제 와아아아! 이 미친놈아!"

    이러다가 다 죽는다고!

    퍼엉!

    슬쩍 휘두른 앞발에 사람이 스치자마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며 눈으로 인식이 되지 않을 거리까지 튕겨 나간다.

    즉사.

    볼 것도 없다.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아무리 조심하고 있다고는 해도 자꾸 피해가 커진다.

    "언제 오냐고, 이 새끼야!"

    "이게 미쳤나?"

    너무도 짜증나면서,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였다.

    "이지혁!"

    "하……."

    어느새 정해민과 함께 나타난 이지혁이 목을 우득우득 꺾었다.

    "푸닥거리를 덜했나? 자리 얼마 비웠다고 욕지거리야? 그냥 콱, 마!"

    서아영이 움찔하여 슬금슬금 물러났다.

    "뭐, 됐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중요한 건…….

    "흐……."

    이지혁이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 손 위에는 새하얀 보석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너 이제 뒈졌어, 새꺄."

    이지혁은 손에 들린 마정석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순도가 아주 높은 마정석이다.

    이 정도면 베라프에서도 구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급의 마정석이다.

    이걸 구하려면…….

    "아오, 마계 새끼들."

    게이트를 연 놈이 누군지 더 확실해졌다.

    예전 같으면 마왕 놈들 모조리 불러 처모아서 줄빳다를 내려쳤겠지만, 지금의 이지혁으로서는 이를 가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니, 괜히 까불다가 마왕이라도 하나 강림하면 맞아 죽는다.

    "근데 그거 뭐야?"

    정해민이 해맑게 물었다.

    "예쁘다… 보석."

    이년은 진짜 뭔 때와 장소를 모르나?

    이지혁이 카악, 하고 정해민을 걷어찼다.

    "꺼졍!"

    엉덩이를 걷어차인 정해민이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빼액! 소리를 질렀다.

    "이용만 해먹고! 필요하달 때는 언제고!"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런 거야."

    "나쁜 남자!"

    "시끄러워!"

    서아영이 그런 정해민을 다독였다.

    "울지 마, 언니. 내가 그래서 남자 조심하라고 했잖아. 특히 놈팡이는 조심했어야지!"

    "흑!"

    "누가 놈팡이야!"

    급히 딴청을 피우는 서아영을 보며 이지혁은 이를 살짝 갈았다.

    일단 니들이 급한 거 아니니까 두고 보자.

    지금 급한 건 오식이니까.

    이지혁이 마정석을 빤히 보다가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헐?"

    그 광경을 본 두 여자가 모두 입을 쩌억 벌렸다.

    저 예쁜 보석을 먹으려 들다니!

    아니, 그전에 저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엄청 크던데?

    "우우우웁."

    이지혁이 목을 부여잡고 꽥꽥대더니, 이내 눈물을 콸콸 쏟으며 고개를 들었다.

    "와, 죽겠다."

    "…제발 상식적으로."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정석은 내부에서 흡수할 때 효율이 가장 높단 말이다.

    예전에야 어차피 재생되니까 대충 칼로 어디 한 군데 째서 밀어 넣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먹는 수밖에!

    하지만 두 번 먹었다가는 식도가 다 찢어질 기세였다.

    이게 다 저 시체 드래곤 때문이야!

    이지혁이 눈을 부라리다가 심호흡을 했다.

    "후읍."

    지금은 일단 이걸 흡수하는 게 먼저다.

    우우웅.

    이내 이지혁의 몸 주위로 알 수 없는 기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쿵!

    묵직한 소음이 터지며 이지혁의 위 속으로 들어간 마정석이 녹아내리며 가공할 마나의 파도가 육체 안을 질주했다.

    "흐음……."

    이지혁이 기꺼운 탄식을 토해냈다.

    순도가 높다.

    아주 정갈한 마나가 몸 안을 타고 돌다가 이지혁이 안배한 흐름에 이끌려 정착하기 시작했다.

    감았던 눈을 뜨자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

    서아영이 움찔하고, 정해민이 신기해한다.

    "눈으로 불도 뿜네, 이제."

    "별걸 다 한다, 진짜."

    반응이 좀 이상한데?

    살짝 상처 받은 이지혁이 고개를 틀어 좀비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아직 움직임이 멈추지 않은 얼음의 거인이 드래곤을 짓누르려 노력 중이었고, 그 주위를 다른 몬스터들이 받치고 있었다.

    "하, 기특한 것들."

    능력자란 것들 수백을 모으면 뭐하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이지혁이 육체 안에서 진동하는 마나를 느끼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지구로 온 이후 가장 충만하게 느껴지는 마나였다.

    이 정도면…….

    이지혁의 양손이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오랜만에 해볼까?"

    우우우웅!

    손끝에서 뻗어 나간 불길한 마나가 어둡게, 더 어둡게 물들어간다.

    허공 한 점을 향해 모인 마나가 응축된 검은 구체를 만들어냈다.

    "흐읍."

    그와 동시에 이지혁의 육체에서 연기 같기도 하고, 불꽃 같기도 한 검은 마나의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래로 깔리고 위로 솟으며 뿜어져 나온 마나가 천천히 허공에 자리한 구체를 향해 흘러 들어간다.

    우우우웅!

    구체가 마나를 빨아들이며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물러서요!"

    아펠드리체가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저걸 여기서 하다니!

    "네?"

    영문을 모르는 서아영이 되묻자 아펠드리체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라고!"

    "…다들! 다들 물러서!"

    불길함을 느낀 서아영이 퇴각 명령을 내리자 모두가 빠르게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에게서 물러나요!"

    그 사람?

    이지혁?

    서아영이 이지혁을 바라보더니 움찔하여 소리쳤다.

    "반대로 도망쳐어어!"

    이지혁의 몸 주위로 뭔가가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서아영 역시 기겁을 하여 정해민을 들쳐 업다시피 하고는 달렸다.

    저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흐음……."

    이지혁의 입가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래, 이거지.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이라고.

    검은색 연기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와 이지혁을 감싸고 돌았다.

    연기는 조금씩 더 빨리 움직이더니, 이내 맹렬한 소용돌이가 되어서 그 끝을 허공의 구체에게로 향했다.

    콰콰콰콰!

    뿜어져 나온 마나가 끊임없이 밀려들더니, 구체는 점점 커져 거대한 구름의 형태가 되기 시작했다.

    구름.

    거대한 어둠의 구름.

    검은 연기가 맥동하고, 검은 뇌전이 벼락을 내리친다.

    화염이 불타오른다.

    세상의 모든 빛을 삼켜 버릴 듯한 태고의 어둠이 그 안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펠드리체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지혁의 독문 마법.

    오로지 세상에서 단 하나, 이지혁만이 쓸 수 있던 마법.

    베라프의 모든 전력이 모여 있던 빛의 군대를 일격에 완전히 박살 내버린, 그 저주 받은 마법이 이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멸망의 좌가 사용했던 마법에 비한다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저것이 구현된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하아아……."

    이지혁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마치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악마의 숨소리와 같이.

    그러고는 허공의 검고 불길한 구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 이거지.

    바로 이거라고!

    "비켜!"

    이지혁의 목소리를 들은 히드라와 대망이 기겁하며 몸을 빼냈다.

    "죽어라아아아아아앗!"

    이지혁이 손이 아래로 내리그어지고…….

    파멸의 구름이 드래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크롸롸롸롸롸롸!

    드래곤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구름을 보며 괴성을 질렀다.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다.

    이미 언데드가 되어 감정이 거세된 드래곤조차 공포를 느끼는지 날카로운 비명성이 세상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파멸의 구름이 드래곤을 집어삼킨 순간.

    콰아아아아!

    맹렬하게 소용돌이쳐 부딪치고 폭발하는 마나의 혼돈 앞에 드래곤의 육체는 그저 종잇장에 불과할 뿐이었다.

    콰드드득!

    육체가 분자 단위로 산산이 분해된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소리쳤다.

    "지혁 씨! 오식이! 오식이!"

    "응?"

    오식이?

    "으아아아아아! 오식아아아아아아!"

    이지혁이 깜빡했다는 듯 꺄악! 소리를 질렀다.

    "안 돼애애애!"

    간만에 힘을 얻었더니 흥분해 버렸다!

    잊어버렸어!

    아이고, 우리 오식이… 이제 어떡해…….

    그 순간, 이지혁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저기다!"

    이지혁의 우수가 한 곳을 가리키더니, 그 자리에 검은 게이트가 생겨났다.

    아직 파멸의 구름이 닿지 않은 드래곤의 위장 안으로 게이트를 연 것이다.

    출구는 바로 앞!

    이지혁의 발 앞에 게이트가 열리더니, 시커멓고 붉은, 거대한 괴물이 튀어 나왔다.

    크아아아아아!

    괴수가 흉포한 괴성을 마구 질러 댔다.

    "하, 인마. 좀 잊을 수도 있지. 형이 그래도 구해줬잖아."

    크아아아아아아!

    "…뒈질래?"

    끄응.

    냉큼 꼬리를 만 오식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등을 돌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삐치긴 한 모양이다.

    '새끼.'

    좀 귀엽네, 좀.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파멸의 구름은 상처 입은 아귀처럼 드래곤의 살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쥐어뜯고 있었다.

    가라라라락.

    믹서기가 갈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뼈 한 점 남기지 못한 드래곤의 육체가 마침내 모두 분해되어 세상으로 흩어졌다.

    "하……."

    이지혁의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드레인!

    잔존 마나와 검은 구름을 이루던 마나까지 모조리 빨아들인 이지혁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눈앞에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새하얗게 얼어붙어 끝도 없이 펼쳐진 얼음의 바다뿐이었다.

    "이번엔 힘들었다."

    정말로 말이야.

    마정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멸망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끝난 겁니까?"

    최정훈이 멍하니 묻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에 손을 대고 마나를 빨아들여 강아지 크기로 되돌린 이지혁이 오식이를 들어 어깨에 올렸다.

    오식이도 고개는 돌리고 있지만,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이지혁의 어깨에 올랐다.

    "마, 실수였다니까. 고기 사 줄게."

    "고기?"

    정해민이 반응하자 이지혁이 인상을 팍 썼다!

    "아, 넌 좀 꺼져!"

    "왜! 왜! 넌 만날 필요할 때만 사람 써먹고 필요 없어지면 구박하더라! 사람이 그러면 안 돼!"

    "어리석은 것. 그게 셔틀의 본분인 것을."

    이지혁이 조금은 씁쓸한 눈으로 드래곤이 사라진 얼음의 바다를 응시했다.

    까딱했으면 이번에는 끝장이 날 뻔했다.

    '이대로는 안 돼.'

    앞으로 더 강한 몬스터들이 넘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진짜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고기 사 줘! 고기!"

    "아오!"

    정해민을 번쩍 들어 냅다 던져 버린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다. 그래, 고기나 먹자."

    "사 줄 거면서 왜 던져!"

    "넌 꺼지라고오!"

    "아, 왜에!"

    "하! 너……."

    투닥투닥거리던 이지혁이 갑자기 멈춰 섰다.

    "응?"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푸웃!

    급히 고개를 숙인 이지혁의 입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쿨럭!"

    이지혁이 피를 토해내더니,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이지혀어어어억!"

    비명을 지르며 정해민이 달려들어 이지혁을 끌어안았다.

    '이거…….'

    멀어져 가는 의식 끝에서 이지혁은 생각했다.

    '안 좋은데…….'

    * * *

    또 하나의 생명이 그에게 달려든다.

    푸욱!

    녹슨 대검이 아랫배를 뚫고 척추를 끊고 등 뒤로 삐져나온다.

    "끄윽……."

    이지혁은 배에 틀어박힌 검을 움켜잡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손을 가르고 뼈에 박혀든다.

    하지만 괜찮다.

    이지혁은 죽지 않으니까.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다.

    검이 몸에 박힌 정도로 죽을 리가 없다.

    "이 괴물 놈!"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눈을 보자 실소가 나온다.

    검을 들어 찌른 것은 그쪽일 텐데, 왜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스그극.

    검이 몸에서 빠져나오면서 섬뜩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이지혁은 뽑아낸 검을 거꾸로 들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의 목을 그어버렸다.

    촤아앗.

    대동맥이 잘리면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핏줄기가 세상을 붉게 물들인다.

    또 하나.

    이지혁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채 앞으로 걸었다.

    그의 눈에 세상을 가득 메우며 달려드는 인간들이 보인다.

    악귀, 악마, 괴물…….

    식상하다.

    뭔가 조금 더 특별하게 사람을 환기시켜 줄 만한, 그런 호칭은 없는가.

    퉁투투, 퉁!

    시위 놓는 소리와 함께 하늘 가득 화살이 솟아오른다.

    '저건 좀 아프겠는데…….'

    이지혁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화살들을 보며 고개를 살짝 돌리며 눈을 가렸다.

    푸욱, 푸욱!

    섬뜩한 소음이 귀를 파고든다.

    안타까운 것은 이 소음이 지금 이지혁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 정도?

    "끙……."

    이지혁이 입안에 틀어박힌 화살을 잡아 뽑았다.

    "아흐네."

    아프다고…….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화살이 날아들고, 마법으로 만들어진 화염이 몸을 불태운다.

    긴 창이 그의 심장을 꿰뚫고, 칼이 팔다리를 자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는 죽지 않는 자.

    반쯤 떨어져 나간 안구를 잡아 끼우며 이지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지루하다.

    지루해.

    이 광경이 너무 지루하다.

    아니, 차라리 지루할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뇌는 계속해서 리프레싱된다. 잔존한 감정들을 계속 날려 항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다.

    지루하지 않고, 화도 나지 않는다.

    분노도 하지 않고, 괴롭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다.

    그저 평온할 뿐.

    그 평온함이 몇 백 년을 이어져 오는데도 재미있는 점은… 미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그저 잠시 지나가는 시간일 뿐.

    남는 것은 그저 약간의 고통뿐.

    "악마아아!"

    "죽어어어!"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종교로 지배 받는 이 세상에서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악마라 불릴 만한 일이라는 걸 납득하고 있으니까.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고…….

    적대하고 싶은 대로 적대한 뒤에…….

    욕하며 죽어가겠지.

    이제껏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어 온 것처럼 말이야.

    이지혁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몸에서 화살들이 후드득 뽑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아……."

    그런 이지혁의 모습을 본 이들의 눈이 절망과 공포로 물들어간다.

    저 눈이군.

    또 저 눈이야.

    어떻게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다 한결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까?

    지긋지긋하다.

    그저 지긋지긋해.

    저 눈은…….

    * * *

    눈을 뜨자 세상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깊고 또 깊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끝없는 황금색의 세상.

    아늑하고 또 뭔가 아련히 그리운, 그런 세상이다.

    "일어났어요?"

    아펠드리체의 눈동자.

    눈뜨자마자 보게 되니 기분이 미묘하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쓰러졌었어요."

    "내가?"

    "네, 당신이요."

    아주 오랜만에 겪는 일이군.

    의식을 잃는다는 건 정신이 무너진다는 건데, 정신력으로 따지자면 만렙을 찍은 그가 정신을 잃는 일은 웬만해서는 벌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고정이 풀리면서 정신력이 약해졌거나, 아니면 그만큼이나 이지혁의 머릿속이 닳아버렸다는 뜻이겠지.

    아펠드리체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헤집는다.

    그럼 눈을 뜰 때가지 계속 이러고 있었다는 건가?

    뒷머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허벅지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얼마나 지났지?"

    "하루? 그 정도."

    "흠……."

    그 정도나 의식이 날아가다니, 그의 육체가 과도한 흑마력을 버텨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흐음…….'

    이대로 계속 흑마력을 써 나가다 보면, 말 그대로 뇌가 흑마력에 절여져 버릴 것이다.

    온갖 마이너스적인 요소의 집합체나 다름없는 흑마력에 정신이 오염된다면, 결국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저급하게는 언데드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고, 이지혁이라면 언데드까지는 떨어지지 않을 테니, 마족으로 타락해 버릴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왕인데, 뭐."

    "전혀 다른 거 알고 있죠?"

    "뭐가 그리 다르다고……."

    "마족이 되는 순간, 당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것을 보는 듯 느끼겠죠. 지금까지 사물에 대해, 사람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모두 달라지고, 생각이 바뀐다는 거죠."

    "어렵군."

    "간단히 말해 지금까지의 이지혁이라는 인격은 사라져요. 그것을 그 무언가가 대체하겠죠."

    그럼 그건 죽음이랑 다르지 않겠는데?

    알고는 있는 이야기였지만, 이제 슬슬 실감이 난다.

    이론이 현실이 되어 이지혁을 덮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셔야 해요."

    "어차피 세상이 멸망하면 죽는 거잖아?"

    "당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잖아요."

    돌아가?

    내가?

    "그거, 진짜 재미없는 농담이네……."

    그리고 끔찍한 저주기도 하고 말이야.

    내가 이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제 발로 다시 돌아가라고?

    "여전히 그러네요, 당신은."

    "그걸 확인하러 왔나, 로드?"

    "리체."

    "흠……."

    "도마뱀이 차라리 나아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난 여기서는 로드가 아니니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아펠드리체.

    내 앞을 천 년 동안 막아온 나의 숙적이자 대적자.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발목을 잡아채던 베라프의 수호자.

    증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순간, 아펠드리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지혁의 머리를 쓸었다.

    "그래서 푹 잤나요?"

    "기절도 잔 거라고 친다면, 아주 푹 잤지. 몸이 날아갈 것 같은데?"

    "다행이……."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지."

    정해민과 서야영, 도가윤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다 멈춰 섰다.

    "아!"

    "어……."

    "……."

    뭔가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은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쓰다듬고 있고, 반쯤 옷을 벗은 이지혁은 그녀의 부드러운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아……."

    서아영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왜 하필…….

    하, 저 인간은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네.

    "뭐하는 거예요!"

    서아영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은근슬쩍 옆으로 움직여 정해민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아, 차거!"

    등 뒤에서 뭔가 차가운 한기가 서아영의 등을 찔렀다.

    어느새 그녀들을 따라붙은 김다솜이 차가운 눈으로 침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얘는 뭐, 겨울 왕국인가? 뭐가 이리 서늘해?'

    서아영이 식은땀을 흘릴 즈음 좀처럼 열리지 않던 도가윤의 입이 열렸다.

    "하기 전? 후?"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서아영이 소리를 빽! 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런데 보통 저건…….

    "나른해 보이는 게… 후가 아닐까?"

    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우우우……."

    등 뒤에서 진동이 시작되자 서아영이 기겁하여 정해민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언니!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니니까 진정……."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모닝콜이 시작되었다.

    * * *

    "하……."

    이지혁은 담배를 뻑뻑 피었다.

    그런 그녀를 다른 여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 왜! 왜! 내가 뭐 어쨌는데!"

    하지만 이지혁은 당당했다.

    지은 죄도 없는데 이런 취급은 사양이다.

    아니, 따져 보면 사고를 쳤다고 해도 자신이 욕을 먹을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실토해 보시죠?"

    "네? 뭘요?"

    근데 얘는 또 왜 여기 껴서 이러고 있나?

    저 표정은 뭐지?

    여기 어디 바퀴벌레라도 나왔나?

    "왜 이지혁 씨의 방에서 저분이 그러고 있던 건지 말입니다."

    "뭔 죄졌나? 그럴 수도 있지!"

    "하?"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이거, 왜 이래. 한때는 내 방에 거주하던 여자가 수십이 넘던 시절도 있었는데.

    물론 그 여자라는 게 서큐버스라든가, 데미 리치라든가…….

    아,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근데 니가 왜?"

    나름 논리적인 반격에 서아영이 움찔했다.

    하기야 그녀가 여기서 이럴 이유는 없다.

    이지혁이 뭔 짓을 하든 그게 그녀와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서아영이 퉁퉁 부은 눈을 한 정해민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보 같지만 착한 언니다.

    조금 멍청하고, 생각 없고, 나잇값을 못하지만…….

    "들려, 이 기집애야!"

    "헐, 그래?"

    요즘 자꾸 생각하는 게 입 밖으로 나오네?

    서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이지혁을 압박했다.

    "둘이 무슨 관계인가는 궁금하지 않아요. 하지만 NDF의 책임자로서 이지혁 씨의 과거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일은 알아야겠어요! 그러니 둘이 무슨 관계인지를 이야기하세요."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이지혁이 반항했지만, 여성진들은 강력했다.

    "뭔 사이인데?"

    정해민은 돌직구를 던졌다.

    "궁금."

    도가윤 역시 그녀를 도왔다.

    "…과거는 중요치 않아요."

    도가윤과 정해민의 시선이 김다솜에게로 향했다.

    김다솜은 어느새 차분한 모습이 되어 담담히 말했다.

    "중요한 건 앞으로죠."

    얘야…….

    그런 말은 그런 눈을 하면서 하지 마렴.

    언니가 심장이 약하거든.

    서아영은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지혁이 좌우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눈빛에 슬금슬금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지혁의 '살면서'는 다른 이들의 '살면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몸이 쪼그라드는 것을 보면, 압박이 장난이 아니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왜 지혁 씨를 공격하는 거죠?"

    쟤는 자꾸 지혁 씨라고 하네!

    가깝다고 티 내나?

    정해민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그런 거네요, 그런 거."

    아펠드리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혀 예상밖의 발언을 꺼냈다.

    "그런 부분이라면 여러분은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돼요."

    "네?"

    "왜냐면……."

    아펠드리체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지혁 씨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여자는 따로 있거든요."

    "네?"

    서아영조차 그 의외의 발언에 눈이 떨렸다.

    또 있다고?

    여기서 또?

    저 새끼는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저와 지혁 씨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반대에 가깝죠. 지금도 지혁 씨가 힘만 온전하다면… 음,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네요. 여하튼 그래요. 지혁 씨와 그런 관계인 사람은 지금……."

    "그, 그만!"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하지 마! 소름 돋는다!"

    "네? 하지만……."

    "그만하라니까!"

    "그럴게요."

    아펠드리체는 납득했지만, 다른 이들은 전혀 납득한 눈치가 아니었다.

    "뭔 말을 하다 말아!"

    "사람에게는 말이다……."

    이지혁이 일그러진 얼굴로 운을 뗐다.

    "트라우마라는 게 있는 거야! 뇌에 박히는 트라우마!"

    니가 지금 그걸 우리한테 주고 있어!

    "여하튼 너희 다 가! 쉴 거야!"

    "하루 종일 쉬어놓고!"

    "꺼지라고! 확!"

    자리에서 일어난 이지혁이 머리를 획획 돌리며 방으로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아펠드리체에게 꽂혔다.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그럼."

    아펠드리체마저 윗방으로 올라가 버리자 남아 있는 여자들은 미묘한 시선으로 아펠드리체의 발언을 곱씹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대책이……."

    "필요하겠어."

    세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공간에서 서아영은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아니, 나는 왜…….'

    도대체가 빠져나갈 수가 없다.

    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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