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4화 (24/118)
  • [■] 제가 설마 혼자 먹겠습니까? [■]

    ─────

    "일본?"

    이지혁이 책상에 다리를 떡하니 올리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눈에 최정훈의 얼굴이 들어온다.

    '뭐지?'

    저 얼굴에 피어난, 미묘한 느낌은?

    자부심? 자존감? 자신감?

    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동안 쭈그리처럼 지내던 최정훈이 되살아났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호오?"

    이지혁이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는 의자째로 몸을 빙글 돌렸다.

    그곳에는 어깨가 활짝 펴진 최정훈이 있었다.

    그야말로 'THE 남자'라는 느낌.

    발끝부터 쭉 뻗은 긴 다리, 살짝 들어간 허리와 대조적으로 넓게 펴진 어깨.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선 굵은 얼굴.

    이지혁은 뭔가 부들부들하는 심정을 느꼈다.

    안 그래도 오징어 취급 받는 게 서러운데, 이 인간은 뭐가 이리 잘났는가.

    더구나 그 잘난 얼굴에 자신감마저 어리자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얼굴, 좀 미묘한데?

    뭐랄까… 그래!

    예전에 란델 왕국에서 일할 때 부하 놈이 유부녀랑 붙어먹고 온 다음 날의 얼굴이 딱 저랬지.

    미묘한 죄책감을 자신감이 뒤덮는 얼굴인데 말이야.

    그래도 설마 최정훈이 불륜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돈 받아먹었어요?"

    "…진짜 귀신인가?"

    "네?"

    "아, 아닙니다."

    최정훈이 손사래를 치며 헛기침을 하고 손부채질을 하더니, 넥타이를 잡아 느슨히 푼다.

    '받았네, 받았어.'

    저렇게 티를 내서 어떻게 하나?

    "얼마?"

    "아, 아니라니까요."

    "서아영 씨!"

    업무를 보던 서아영이 고개를 들었다.

    "네?"

    "감사팀에 전화해요! 여기 루팡이 있어!"

    "체포하겠습니다."

    "에헤이!"

    최정훈이 손을 좌우로 내저었다.

    그러고는 미묘한 얼굴로 이지혁의 귀에 입을 바짝 대더니 속삭였다.

    "제가 설마 혼자 먹겠습니까?"

    "감사팀은 일단 스톱."

    이지혁은 빙긋 웃으면서 최정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정훈 역시 미묘하게 웃으면서 이지혁의 손을 잡았다.

    꾸욱.

    하지만 예상보다 더 강한 힘이 최정훈의 손을 덮쳤다.

    "……?"

    "거, 어디……."

    이지혁의 미소가 짙어졌다.

    "얼마나 드셨는지 한 번 읊어보실까?"

    "…악마."

    최정훈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 * *

    사락.

    이지혁이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는 최정훈이 내민 서류를 넘겼다.

    "하, 많이도 드셨네, 진짜."

    "……."

    "세상에, 어떻게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이만큼을 뜯어낼 수가 있지? 진짜 대단하긴 대단하네. 그만큼 양심도 없네."

    니가 양심을 논하면 안 되지.

    내가 세상 사람 전부한테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지!

    내가 이걸 다 누구한테 배웠는데!

    마지막 남은 팬티 한 장까지 벗겨갈 기세로 달려들던 사람이 누군데!

    나 원래는 굉장히 정직한 사람이었거든?

    "하, 이건 또 뭐야? 아키하바라 무상 쇼핑권?"

    "……."

    이지혁이 가늘어진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덕이 있으신……?"

    "아니에요오! 건프라 조립하는 취미가 있는 것뿐이라구요! 오타쿠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오타쿠와 본인이 생각하는 오타쿠라는 개념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모양인데, 보통 그런 사람들을 세상은 오타쿠라고……."

    "아니라니까아!"

    "음……."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것도 관계를 위해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이지.

    "그래서 최덕후 님."

    "아니라고!"

    각설하고!

    "그래서 대체 뭘 넘겨주기로 하시고 이런 걸 덕지덕지 받아 오셨죠?"

    "간단한 일입니다."

    "간단?"

    그 최정훈이 눈가를 살짝 주무르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죠. 정말 간단한 일 하나로 국가와 개인과 단체에 극도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계획이 있습니다. 이지혁 씨께도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어떠십니까, 이쯤 들으면 구미가 당기시지 않습니까?"

    "응, 듣고 싶지 않다. 끌어내!"

    "아니! 잠깐만!"

    좌우에서 달려든 이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최정훈이 비명을 질렀다!

    "정말! 저엉∼말 간단한 일입니다! 생각해 보시라고요! 이 최정훈이가 따 온 일입니다! 얼마나 간단하고, 얼마나 쉽고,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올지 정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안물안궁."

    "잠까아안!"

    최정훈이 팔을 뿌리치고 서더니 의복을 다시 다듬었다.

    "이러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음, 후회라, 후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쳤다.

    "저 범죄자를 당장 유치장에 처넣어라!"

    "히익!"

    최정훈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어디, 뇌물 받아먹고 온 인간이 당당하게 머리를 들고 있어! 콩밥을 처먹어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요즘 감옥에 콩밥 안 주는데!"

    "사식으로 넣어줄 테니, 편히 가세요."

    "아니, 이지혁 씨! 이지혁 씨!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최정훈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소리치자 서아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한 번 들어나 보죠."

    "하……."

    귀찮은데.

    범죄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감옥에 처넣거나 몬스터 밥으로 던져 주면 되는 것이건만.

    "말해보시죠."

    최정훈이 다급히 소리쳤다.

    "어차피 결국에는 도와줄 거 아닙니까!"

    "응?"

    "밀당하고 어쩌다 하다가 결국에는 도와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럴 바에야 얻을 거라도 확실하게 얻어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왜 결국에는 도와줘야 하는데요?"

    "사람이 한둘 죽는 것도 아니고, 결국에는 나라가 망할 판이 될 건데, 그걸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둡니까. 못 이긴 척하고 가서 도와주실 거 다 압니다."

    "아닌데?"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난 안 갈 건데?"

    "으응?"

    최정훈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왜 도와요?"

    "아니, 그래도… 혹시 일본에 악감정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거 없죠. 내가 뭐 피해 본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말이네. 내가 도와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사람이 죽어가잖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지금 아프리카에서도 실시간으로 몬스터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게 내 책임인가요?"

    최정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그런데 내가 왜 도와요?"

    "지금까지야 못 이긴 척 도와주셨으니까요."

    "그건 한국이니까. 여긴 내 구역이니까 그런 거죠. 바다 건너서까지 도와주러 가고 싶은 생각 없어요."

    영역 짐승이었나?

    "으음……."

    최정훈이 눈가를 훔쳤다.

    "그럼 이것들은 돌려드려야겠네요."

    "네? 왜요?"

    "아뇨. 돕지 않기로 결론이 났으니까요."

    "그거랑 뭔 상관이에요?"

    "돕기로 하고 받은 거니까요."

    이지혁이 혀를 찼다.

    "거, 어차피 받은 거는 그냥 두시면 돼요."

    "돌려 달라 소리 나올 텐데요."

    "누가요?"

    "네?"

    "거, 상황 들어보니 어차피 조금 있으면 일본이 반쯤은 사라지겠던데, 누가 그걸 돌려 달라고 해요. 신경도 못 쓸 텐데."

    아…….

    그러네?

    얘 뭐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그 와중에 내막을 알고 있는 애들이 싹 사라지면 좋고, 아니어도 뭐 그때 되면 이거 돌려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못하겠지.

    비슷한 게이트가 한 번만 더 나타난다면, 말 그대로 멸망할 테니까.

    그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려면 이지혁과의 관계를 경색시키지 않아야 한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고 말하는 건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따지자면 1억의 인간을 담보로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일인데, 저리 쉽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섬뜩하다.

    "일본에 뭔 큰일 났어?"

    정해민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극비 정보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치고 중요 인물이 아닌 사람도 없었다.

    "게이트가 열렸답니다."

    "흔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 게이트가 좀 이상합니다."

    "좀 잘 알아듣게 설명을 해보세요."

    "흠, 그러니까 새로 게이트가 출현했는데, 이 게이트가 지금 점점 커지고 있답니다."

    "그런 일도 있어요?"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일본뿐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같은 게이트가 출현했습니다. 아직 파악이 덜 돼서 그렇지, 이런 게이트가 몇 개나 출현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은 이게 일시적인 일인지, 아니면 게이트의 특성이 전체적으로 변화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하다 이지혁을 보고 물었다.

    "심각한 일인 거야?"

    "니가 알지, 내가 아냐! 넌 텔레포터로 5년을 굴러먹었다는 게 말만 듣고도 모르냐?"

    "그야 나는 방송 일로 바빴으니까."

    "쩌리 주제에 바쁠 게 뭐가 있어!"

    "때릴 거야!"

    "디질라고, 진짜."

    "이익!"

    이지혁이 달려드는 정해민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밀어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봐요. 게이트가 커졌다고?"

    "네. 처음에는 사람 하나 들락거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레벨 6 게이트 급으로 커졌답니다. 또 아직도 커지는 중이랍니다."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녀는 게임을 하느라 이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브리핑해라, 도마뱀!"

    "이따 하면 안 될까요? 지금 중요한 한탄데."

    "한타가 중요한가, 전원선이 중요한가?"

    "…전원선이죠."

    작게 칫, 불만을 토해낸 아펠드리체가 설명을 시작했다.

    "게이트는 애초에 공간 연결 마법이에요. 크기는 최초 설정에서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죠. 하지만 보통은 처음 설정한 크기에서 게이트의 크기를 바꾸지는 않아요. 이런 경우는 보통 초반에 설정한 크기를 충족시킬 마력이 부족하여 아티팩트나 마정석 등에서 마나를 끌어들여 천천히 완성하는 경우죠. 물론 그 게이트가 제가 알고 있는 게이트와 다를 확률도 있지만요."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정석?

    아티팩트?

    그게 뭔 소리지?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다시 말해서 저 게이트에 인위적인 행위가 가미되었다는 거군, 아티팩트나 마정석을 이곳에 가져올 만한 존재의."

    "그렇겠죠. 아마도."

    "그래, 마계겠군."

    이지혁이 인상을 썼다.

    마계.

    익숙하고 친숙하고 더없이 반가운 곳이기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끔찍한 곳이기도 했다.

    힘은 그렇다 치고, 그놈들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악의는 이지혁도 치를 떨 정도였으니까.

    "마계가 관련된 게이트라……."

    하…….

    속 시끄럽네, 진짜.

    "그럼 도쿄도 없어지는 거야? 안 되는데! 거기 내 팬들 많은데."

    '아펠드리체한테 말하면 안 죽이고도 쟤 머릿속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거기 내가 좋아하는 라멘집 있단 말이야!"

    이지혁의 눈이 빛났다.

    "마, 맛있냐?"

    "응."

    "그럼! 오늘 점심은 거기로 간다!"

    "…응?"

    사람들이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거기 게이트가 열리고 있다니까요."

    "열리면 도망 오면 되지!"

    "그렇긴 합니다만."

    "이제 없어지면 다신 못 먹어볼 테니까,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납득했다."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쑥덕대며 라멘 메뉴를 찾아보기 시작한 서아영들을 뒤로하며 이지혁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마계라, 마계…….'

    조사를 조금 해봤다면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런데도 수작질을 부린다는 건가.

    '나도 많이 죽었네.'

    어떤 놈이 넘어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못한다면 그 뇌에 직접 다시 새겨줘야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기억을 말이야.

    * * *

    도쿄.

    우웅.

    허공이 살짝 뒤틀리며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지혁을 위시로 한 NDF 일원들이 도쿄에 도착한 것이다.

    "…너무 많아!"

    정해민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텔레포트 한 번 쓰는 데 얼마나 힘든지 알아? 요즘은 사람도 너무 많아서 힘들어 죽겠다고!"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포함해서 서아영, 최정훈, 도가윤, 아펠드리체, 그리고 통역이란 이유로 끌려온 기타무라 렌.

    많아?

    괴수도 나르던 여자가 사람 다섯 때문에 힘들다고?

    웬 엄살이지, 이게?

    "글고 얘는 왜 데려왔어!"

    이지혁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꼬리를 치고 있는 오식이를 보고는 히죽 웃었다.

    "사람 입만 입인가! 오식이도 일본 사료 좀 먹어봐야지."

    "…사람 나르는 것도 서러운데, 개 셔틀까지 해야 하다니……."

    쟤, 개 아니거든?

    오거거든?

    개랑 같은 취급하지 마시죠. 오거 체면 상하게.

    "힘들어?"

    "으응~"

    뭐지, 이 콧소리는?

    이게 미쳤나?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번 하면 힘들다니까……."

    "그래?"

    이지혁이 목을 우드득, 꺾었다.

    "저번에 그만큼 단련을 시켜줬는데도 부족한가 보구나?"

    "응?"

    "또 세계 일주 한 번 해야 하나?"

    "아니! 아니! 나 안 힘들어! 진짜야! 하나도 안 힘들어!"

    "그럼 왜 징징대?"

    "…아니야."

    정해민이 바닥을 걷어찼다.

    진짜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그래서 일단 오긴 왔는데……."

    이지혁의 머릿속에 지난번의 고생이 떠올랐다.

    "그놈의 라멘집, 찾아갈 수는 있는 거냐?"

    "응."

    "확실해?"

    "응. 이번에는 진짜 확실해! 잊어버릴 수가 없어!"

    뭔 자신감이지?

    가이드라도 불렀나? 네비 켜고도 못 찾아가던 것들이?

    "저기로 가면 돼!"

    정해민이 가리킨 곳을 본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했다.

    아무리 등신이라도 저걸 보고도 못 찾아갈 수는 없지.

    이지혁의 눈에 높이 솟은 스카이 트리가 들어왔다.

    아무리 길치에 방향치라도 눈에 저렇게 딱 보이는 타워가 있는데, 그걸 보고도 못 찾아갈 일은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가자!"

    "응. 저리로 가자."

    뒤를 따라오는 최정훈이 조금 불안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자꾸 이리 바로 오면 밀입국이 된단 말입니다. 입국 심사장으로 갈 수는 없습니까?"

    "심사장이 어디 있어요?"

    "보통은 공항이죠."

    "두 번 와야 해서 귀찮은데."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분명 문제다! 잘못하면 국제 문제가 된단 말이다!

    저번 미국 때도 까딱했으면 지옥같이 시달릴 뻔했는데, 이번에도 똑같다니!

    그것도 도쿄 한복판이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일본 능력자 관리소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박혀 있다면 이지혁의 움직임에 대해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을 것이고, 이지혁이 도쿄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서아영의 얼굴도 웬만큼은 알려져 있을 것이고, 거기에 게이트 문제도 얽혀 있다.

    "하……."

    이리된 이상 빨리 먹고 도주하는 수밖에!

    "그 라멘집이 어딥니까?"

    "타워 안에 있어요."

    "가시죠."

    최정훈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사고뭉치들을 데리고 다니려니 위가 쿡쿡 쑤셨다.

    '아, 약 먹어야지.'

    최정훈이 품 안에서 위장약을 꺼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러다 약물중독되겠네.'

    약물 오남용 방지 캠페인에 쏟아부은 세금이 연기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 직장의 부조리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정훈의 바람은 당연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 *

    "이거 뭐야?"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눈앞으로 완전무장한 기동대가 긋고 있는 라인이 보였다. 일 열로 쭈욱 늘어선 경찰들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뭐야? 데모라도 한대?"

    최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저거 때문 아닐까요?"

    "저거?"

    최정훈이 가리킨 곳을 보자 건물 틈 사이로 불그스름한 게이트가 존재했다.

    '크네?'

    크기로만 따지면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최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오식이가 나온 게이트도 저리 크지는 않았는데…….

    크르르.

    "응?"

    이지혁이 고개를 숙이자 오식이가 게이트 쪽을 향해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에비, 지지. 그러는 거 아냐."

    끼잉.

    엉덩이를 툭툭, 차주자 오식이가 뒤로 슬쩍 물러나더니, 이지혁의 다리에 찰싹 붙었다.

    게이트라니.

    도쿄에 나타났다는 말은 들었지만, 지금까지 걸어오는 동안 사람들이 너무 평온하게 지나다니고들 있어서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못 들어가는 거예요?"

    "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은 없나?"

    "타워 쪽 전체가 봉쇄된 것 같습니다."

    "음, 그렇다는 건……."

    허탕이군, 허탕이야!

    내가 이년을 탕으로 만들어 버리든 해야지!

    이지혁이 시무룩해 있는 정해민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넌 어떻게 처먹자는 것마다 제대로 된 게 없냐!"

    "…나도 이럴 줄 몰랐지."

    "하, 진짜."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바리게이트를 칠 바에야 여기 전체를 대피 시키는 게 낫지 않은가.

    역대 최대의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데도 주변에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침착한 건지, 미련한 건지.

    대피시지키 않는 정부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대피하지 않는 시민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굳이 묻는다면 '정부를 믿기 때문에'라고 할까?"

    "응?"

    "아닙니다."

    국민성이 다르기에 벌어지는 일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하튼 간에 기껏 밥이라도 먹어보겠다고 왔는데, 이게 뭔…….

    기타무라 렌이 앞으로 나서 뭔가 말을 해보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전 구역 통제랍니다."

    그의 말에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못 간대?"

    "예."

    "그냥 모르게 지나가면 어떨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어차피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갔을 테니, 저 안에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가게도 문을 닫았다는 말이구나. 그럼 뭐, 깔끔하게 포기해야지.

    이지혁이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가자."

    그때였다.

    뭔가 우락부락하다 싶은 사내 여럿이 이지혁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최정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거, 뭔가 목적이 있어 보이는 움직임인데?

    "뭐야, 너희?"

    렌이 그래도 통역이랍시고 먼저 말을 건넸다.

    "NDF?"

    하지만 통역은 필요 없었다.

    저 말이야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 비록 발음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정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알고 왔다?

    이곳에 도착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들의 존재를 감지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미 NDF 전체가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뜻과 동일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건물 자체를 감시할 수는 없을 텐데?'

    제한구역 안을 감시한다. 위성으로 감시한다고 해도 건물 안에서 움직였는데 이리 바로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말인즉, 내부에 그들의 움직임을 전해주는 조력자가 있다는 건데…….

    최정훈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누구냐?'

    하지만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맞는데?"

    그리고 답도 없는 인간도 있었다.

    '아니, 그걸 인정하면 어떻게 해! 밀입국인데!'

    죽어도 아니라고 해야지!

    "이…지혁?"

    "캬, 일본까지 퍼진 명성 보소."

    좋아할 일인가.

    그게 좋아할 일이냐고!

    좋은 뜻으로 오지는 않았을 게 이리 확실하게 보이는데!

    그게 좋아할 일이냐고!

    최정훈이 부들거리든 말든 이지혁은 뚱한 얼굴로 눈앞의 덩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다, 함께."

    어설픈 한국어가 튀어나오자 이지혁이 손짓으로 기타무라 렌을 불렀다.

    "얘들 패치 좀 해줘."

    "…네."

    그렇게 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하더니, 기타무라 렌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따라오라는데요?"

    "뒈지고 싶냐?"

    "아니, 제가 한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전하라고."

    "…네."

    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쁜데?

    기타무라 렌이 그 말을 그대로 전하자 예상대로의 반응이 돌아왔다.

    "조용히 따라오지 않으면 다칠 거랍니다."

    "진짜 뒈지고 싶나, 쪽빠리 새끼가?"

    "물론 제게 한 말씀이 아니시겠죠?"

    "너한테 한 말인데?"

    "네?"

    "농담이야, 농담."

    농담 아닌 거 같은데?

    왜 내가 여기 껴서 이 꼴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하늘이 원망스러운 일이지만, 하늘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를 도울 이는 따로 있었으니까.

    "이지혁 씨."

    최정훈이 다급하게 이지혁에게로 다가왔다.

    "넹?"

    대답이 살짝 삐딱한 걸로 봐서 지금 살짝 열이 받은 상태인 것이 분명했다.

    이지혁 전문가인 최정훈이 그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파악하고는 바로 기분 풀기에 나섰다.

    "하하하하. 이지혁 씨, 기분 좋게 해외로 놀러 나왔는데 굳이 저런 조무래기들 때문에 기분 잡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서아영에게 눈짓을 하자, 그녀가 즉각 이지혁과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오는 시비는 받아야죠!"

    "에헤이, 그런 작은 일에 일일이 나서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쓸 필요는 없죠."

    "난 원래 하나만 쓰는데?"

    그 뜻이 아니잖아!

    이 인간은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감을 못 잡겠네!

    "어쨌든 여기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최정훈이 신뢰와 자신감이 가득 담긴 얼굴로 당당히 말하자 이지혁이 감탄하며 대답했다.

    "또 돈 받아먹으려고?"

    "…아닙니다."

    "지켜보고 있다?"

    "네."

    귀신같은 놈.

    최정훈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서아영이 견제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책임자가 누굽니까?"

    최정훈의 눈치를 살짝 살핀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선다.

    "반갑습니다."

    일단 악수부터 하잡시고 손을 내밀자 망설이던 남자가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기타무라 렌이 통역을 했다.

    어느 정도의 일본어는 가능하지만, 미묘한 어감이 중요한 이런 민감한 자리에서 자신의 일본어 실력을 뽐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최정훈은 신중한 남자니까.

    기타무라 렌은 생각보다 긴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최정훈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자신이 누군지 밝히는 것이 좋지 않은 상황일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잘 해결하고 빨리 귀환하여야 한다.

    "하, 하지메 마시테. 도조 요로시쿠!"

    순간…….

    퍼억!

    인사를 하던 사내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아……."

    최정훈이 절망 어린 눈으로 사내가 있던 자리에 긴 다리를 뻗고 있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욕을 해, 이 새끼가!"

    그거 욕 아냐, 이 미친놈아!

    물어라도 보고 차야지!

    분위기가 싸하게 식으면서 주변 사내들이 이지혁을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동료가 마치 가스 넣은 풍선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는데 왜 안 그렇겠는가.

    "어쭈? 야리냐?"

    이지혁이 고개를 까딱까딱하더니 손을 흔들어 풀었다.

    "그래. 와라, 이 새끼들아. 오늘 푸닥거리 좀 하자!"

    "이, 이지혁 씨!"

    이지혁이 앞의 사내들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그거 그런 데다 쓰지 마!

    언제나처럼 최정훈의 마음이 울부짖었다.

    * * *

    퍽! 퍽! 퍽!

    뭔가 손을 써볼 틈도 없이 사내들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져 나갔다.

    '죽었네, 저거 죽었어.'

    그냥 튕겨 나가기만 했으면 그러려니 하겠건만, 피 분수가 길게 이어져 있는 걸 보니 과다출혈로라도 사망각이다.

    '근데 저 인간, 좀 이상한데…….'

    이지혁이 폭력적이고, 개념 없고, 싸가지 없고, 생각 없고, 대책이 없…….

    이지혁의 고개가 획 돌며 최정훈과 눈이 마주쳤다.

    '아, 뜨거라.'

    뜨끔한 최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거,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귀신이 따로 없네.

    귀에 무슨 독심 장치라도 달렸나, 진짜!

    "착각인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하튼 이지혁이 여러 가지가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동안의 행동을 가만 생각해 보면 결코 먼저 누군가를 공격하는 경우는 없었다.

    필드에 출현하는 보스몹이지만 철저히 후공, 선공하지 않는 나름 안전한 몹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별것도 아닌 일로 닥치고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이상했다.

    "이지혁 씨!"

    "왜요."

    "지, 진정하시죠!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뭐가요?"

    "뭐 그리 잘못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리 과격하세요?"

    이지혁이 하, 하고 탄성을 뱉더니,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말했다.

    "저 새끼들이 마음에 안 드니까?"

    "……."

    와, 이거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가장 얼토당토않으면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뭐라고 반박할 여지도 없네.

    "왜, 왜 마음에 안 드시는데요?"

    이지혁의 눈이 희번덕댔다.

    "한국 사람이 일본 놈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요?"

    필요 없지.

    사실 그렇긴 하지.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일 뻔한 자신을 책망했다.

    저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넘어가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런데 묘하게 납득은 가잖아?

    "아니! 아니지!"

    "뭐가 아니야?"

    "여하튼 안 됩니다!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라지 뭐."

    "네?"

    이지혁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나랑 상관없잖아?"

    "……."

    그야 뭐, 그렇긴 하지. 해결은 다른 사람이 하는 거니까.

    그래도 그거 너무 무책임… 아, 원래 그렇지?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새삼 떠올린 최정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 하시죠."

    "라져."

    상황을 알아챈 기동대들이 우르르 이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원래는 공권력이랑은 척지지 않는 사람이거든."

    하지만 지금은 예외야!

    왜?

    저 게이트가 열려도 너희 공권력이 살아 있을까?

    난 조금 의심되는데 말이야.

    오식이급이 하나만 떨어져도 답이 없을 텐데, 저 게이트는 아무리 봐도 최소가 오식이급이 나온다.

    "그러니 거리낄 것도 없거든?"

    텅!

    바디 벙커 위를 걷어차자 묵직한 소음과 함께 사람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아주 청명하다.

    이지혁이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뒤틀었다.

    "아, 너희 보통 사람이지?"

    능력자랑은 차별을 둬서 때려야지.

    그런데 어쩌나?

    "난 평등주의자라서 말이야!"

    남녀노소를 안 가리거든!

    스읏!

    이지혁의 손에서 뿜어져 나간 촉수가 바디 벙커들을 꿰뚫었다.

    "으……."

    바디 벙커를 꿰뚫고 들어와 얼굴 바로 옆에서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촉수를 본 이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촉수가 조금만 옆으로 찔러왔어도 얼굴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흠……."

    바디 벙커를 휘감은 촉수가 뒤로 쭉 당겨지며 수십 개의 바디 벙커들이 이지혁의 앞으로 모였다.

    "이거 고물상에 팔면 얼마나 받죠?"

    최정훈이 자포자기한 어투로 대답했다.

    "뭐하러 고물상에 파십니까. 경찰이나 방위사에 파세요. 돈 좀 받겠네요."

    "좋은 생각이지만……."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또 양심은 있어서 절도는 안 하는 사람이잖아요."

    니가 아는 양심과 내가 아는 양심에는 대체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가.

    "그러니 돌려줘야지."

    터엉!

    이지혁이 앞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바디 벙커를 걷어차자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갔다.

    비명과 고함 소리가 뒤섞이며 울려 퍼진다.

    바디 벙커에 얻어맞은 기동대원들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니 왜 덤비냐고?

    …아무리 봐도 시비를 건 건 이쪽이지만, 일단 우리 편이니 무시하자.

    그런데 우리 편은 맞나?

    따지고 보면 시비도 저쪽이 먼저 건 것 같기는 하지만, 이건 이미 정당방위를 넘어선 것 같은데?

    그 순간, 기동대들이 쫘악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각양각색의 복장을 갖춘 이들이 뛰쳐나왔다.

    "호오?"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진짜가 나오고 있네."

    "하……."

    최정훈은 얼굴을 감쌌다.

    '이제 나도 몰라.'

    게이트에 대비하던 일본의 능력자들이 소란을 듣고 뛰쳐나오고 있었다. 저들과도 충돌하게 된다면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멈춰요!"

    한국말?

    최정훈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안에서 이토 사나가 사색이 되어 뛰쳐나오고 있었다.

    이지혁의 앞까지 달려와서 헉헉대던 이토 사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응?"

    "뭔가 오해가 있던 모양이네요. 도와주러 오신 분들께."

    "으으응?"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은 여러분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겁니다."

    "으으으으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데. 난 그냥 시비 걸어서 싸운 건데……."

    "그럼 시비를 건 사람들을 처벌해야겠군요. 누구죠?"

    이거 봐라?

    "…내가 걸었는데? 시비?"

    "그럴 리가요! 여기까지 도와주러 오신 분이 일부러 시비를 걸 리가 없죠."

    "으응?"

    이지혁이 미묘한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쟤 바보야, 아니면 똑똑한 거야?'

    최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어디, 조금만 더?

    "그냥 기분 나빠서 때렸는데?"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이 잘못이군요. 누굽니까?"

    "…왜 이러세요?"

    "이지혁 씨가 도.와.주.러 오셨는데,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

    이지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 여자 하는 짓 좀 보소?

    귀엽다, 귀여워.

    "그런다고 돕지는 않아요."

    "부탁드립니다."

    "이만큼 깽판을 쳤는데, 자존심도 없나?"

    이토 사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존심이야 넘친다. 하지만 그 자존심을 억눌러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더 구할 수 있다면 제 자존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죠."

    "…와, 이거… 진심 같아서 더 무서운데?"

    이지혁이 너스레를 떨며 몸을 돌렸다.

    "가자, 가. 여기 못 있겠다."

    "라멘은?"

    이지혁이 정해민의 머리를 부여잡고 탈탈 털었다.

    "넌 이 상황에 라멘이 넘어가냐?"

    "하지 마! 배고픈데 그럼 어떻게 해!"

    "니가 배는 왜 고프냐! 쪼그만 게!"

    "내가 누나야아!"

    "하, 이거 텔레포터만 아니면 버려두고 가는 건데……."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게이트 열면 되지 않나요?"

    "…야, 그렇게 정색해서 말하면 내가 뭐가 돼?"

    "이해 못하겠어요."

    "넌 평생 이해 못할 거다."

    이지혁이 투닥거리며 돌아갈 채비를 하자 마음이 급해진 이토 사나가 황급히 뛰어왔다.

    "도와주시지 않을 거예요?"

    "내가 왜?"

    "이미 저희는 대가를 지불했어요."

    "응, 그랬더라. 근데 난 받은 게 없는데?"

    이토 사나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최정훈은 고개를 돌렸다.

    '미안.'

    하지만 난 최선을 다했어.

    "뭘 드리면 될까요?"

    "난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

    컴퓨터만 있으면 되는데, 저 망할 도마뱀 년이 그걸 뺐어갔지.

    컴퓨터 한 대 달라고 할까?

    "제발 부탁드려요!"

    "저기요, 제가 제발 부탁드릴 테니 이러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아, 안 돼요!"

    "너도 부탁한다고 안 들어줄 거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나한테만! 내가 호구냐? 앙?"

    이지혁이 성질을 확 내고는 정해민에게 다가갔다.

    "집에 가자."

    "라멘……."

    "이걸 그냥 확!"

    "헤헤."

    이지혁이 게이트를 가리켰다.

    "저 봐라. 라멘은 무슨!"

    "…게이트 열리네?"

    이토 사나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렸다.

    "헉!"

    과연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지혁이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저 게이트에서는 대체 뭐가 나올까?

    우우우웅!

    물결처럼 진동하던 게이트가 열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드러났다.

    "호?"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생명첸데?

    거대한 박쥐와도 같은 날개!

    파충류의 육체!

    날카로운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

    날아다니는 도마뱀 같은 저것은?

    "드래곤?"

    "드레이크예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아펠드리체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거나 그거나."

    "다르거든요? '원숭이나 사람이나'라고 하면 기분 좋겠어요?"

    기분 많이 나쁜데, 이거?

    이 미묘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하나, 둘…….

    게이트 안에서 드레이크들이 마구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뭐, 드레이크야 날아다닌다는 점만 빼면 별것 없는 몬스터니까 잡는 거야 별문제 없겠지.

    그런데…….

    저게 다가 아니겠지, 아마?

    아니나 다를까.

    게이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왜 저래?"

    서아영이 소리쳤다.

    5년을 넘게 게이트에 맞서 싸워왔지만, 결단코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크롸롸롸롸롸롸!

    게이트 안에서 탁하고 거대한 굉음이 토해져 나온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어?"

    궁극에 이른 생명체만이 발할 수 있다는, 순수한 투기의 울림.

    오식이조차 겨우 흉내만 낼 수 있던 피어였다.

    그런데 지금 들려오는 것은 확실히 제대로 된 피어였다.

    "에이, 아니겠지."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선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얘도 본체를 포기해 가며 넘어왔잖아. 그렇지?

    이지혁의 기대는 반쯤은 맞았다.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확실히 드래곤은 아니었다.

    아니,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죽은 드래곤.

    반쯤 썩어 곳곳으로 뼈가 보이는 드래곤이 그 묵직한 걸음으로 게이트 밖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그그극.

    거대한 육체가 게이트와 맞닿으며 소음을 터뜨렸다.

    "저, 죄송한데……."

    이지혁이 중얼거렸다.

    "지금 단계에 저게 나오는 건 좀 밸런스 붕괴거든요."

    아무리 좀비라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

    그 육체만으로도 일국을 멸망시키는 것은 누워서 떡… 아니, 누워서 링거 맞기였다.

    이지혁이 부르르 떨더니 몸을 돌렸다.

    "집에 가자."

    "네?"

    "아프지 말고."

    저거랑 싸우라고?

    난 싫다.

    이지혁이 몸을 돌리자 이토 사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그의 옷을 잡고 늘어졌다.

    딱 봐도 각이 선다.

    저건 못 막는다.

    이지혁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 어떻게 좀!"

    "고갱님, 죄송하지만 제 능력을 넘어섭니다. 다음 기회를 이용해 주십시오."

    "다음 기회가 어딨어요! 다 망할 판인데!"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펄럭!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드레이크 떼와 함께 좀비 드래곤이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천천히 떠올랐다.

    "와, 저게 날기도 하네."

    좀비 주제에 말이야.

    이리되면 포위망 짜놓은 것도 아무 의미가 없네.

    고오오오오!

    거대한 바람과 함께 하늘로 떠오른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한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자알 난다."

    한쪽으로, 또 한쪽으로.

    "저, 이지혁 씨?"

    "넹?"

    최정훈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안 도와요. 저 말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최정훈이 휴대폰을 이지혁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휴대폰 위에 그려진 지도에 선을 쭉 그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으응?"

    그러니까, 저 방향으로 가면…….

    음, 그래. 저기로 가면… 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집으로 가지 마!"

    제기라아아아아알!

    서울이잖아, 서울!

    왜 또 서울이냐!

    이 새끼들아, 서울에 꿀 발라놨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좀비 드래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너 거기 안 서?"

    어?

    이거, 나 전에도 한 번 한 거 같은데?

    착각인가?

    * * *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좀비 드래곤을 보며 이지혁의 눈이 타올랐다.

    "뭔 시체가 하늘을 날아!"

    최소한 기본은 지켜야지. 세상에는 설정이라는 게 있는 법 아니던가!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 정도야 익스큐즈한다 치더라도 날아다니는 건 아니지!

    게다가!

    "드래곤이고 개뿔이고, 살 만큼 살았으면 죽어야지, 왜 죽지도 않고 걸어 다니냐고!"

    이지혁이 고함을 치자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죠."

    "순리를 지켜야 할 것 아니냐고, 순리를!"

    "훌륭한 자아비판이에요."

    어?

    뭔 소리야, 저 도마뱀?

    자아비판이면 나?

    듣고 보니 또 그렇네?

    사람이 천 년을 살면 안 되지…….

    "너희 종족이니까 니가 좀 알아서 해봐."

    도마뱀, 아니, 아펠드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이지혁 씨 보고 좀비가 너희 종족이라고 말하면 어떠실 거 같아요?"

    "애들이 많이 삭았네, 하겠지!"

    절레절레.

    저 사람에게 올바른 반응을 기대한 게 잘못이지.

    "어쨌든 좀 어케 해봐! 쟤들 날아가잖아!"

    "지금의 저로서는 버거운 일이에요."

    "…아니, 너 로드잖아."

    "지금의 저는 로드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본체로 현신할 수 없는 이상 저는 로드라 불릴 자격도 없는 몸이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내용은 '안타깝다'인데 어투에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쉬울 것 하나도 없다는 느낌.

    "쓸모가 없네, 쓸모가."

    하. 진짜…….

    뜯어낸 커피믹스 뚜껑 같은 것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진짜.

    "어, 저거?"

    그 순간, 이지혁의 눈에 드래곤의 입가로 엄청난 마나가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그냥은 안 가나?"

    콰아아아아아아!

    이내 좀비 드래곤의 입가에 서리가 어리더니, 새하얀 빛의 창이 대지를 꿰뚫었다.

    이지혁조차 입을 다물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브레스가 바닥에 닿고 퍼져 나가며 건물과 사람들을 모조리 새하얗게 얼렸다.

    콰아아아아!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으며 지나간 뒤로 얼음의 대지가 길게 만들어졌다. 촘촘히 솟아 있던 마천루들이 새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제길."

    이지혁이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되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빤했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해도,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다짐했다고는 해도 눈앞에서 수천 명의 사람 목숨이 순식간에 날아간 것은 역시나 껄끄러운 일이었다.

    '껄끄러워?'

    누가?

    이지혁이?

    웃기는 소리.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천만 단위의 인간을 일시에 학살해 버린 이지혁이다. 그런데 뭐?

    껄끄러워?

    "웃기고 있네."

    베라프에서 죽은 사람들이 들었다면 자신의 귀를 파내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 가식 떨 뻔했다. 아, 오글거려."

    이지혁은 저 드래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학살자고, 몬스터이자 악마다.

    그럼 포지션을 잘 잡아야지.

    이지혁이 눈을 일그러뜨리며 멀어져 가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 나와바리에서 설치면 안 되지."

    여긴 아니지만.

    거기로 가고 있단 말이야, 너 이시키야.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정훈 씨!"

    "예!"

    "저거 잡아야 하는데, 루트 좀 짜봐요. 어디로 상륙하는지."

    "예! 지금 안 그래도 분석 중입니다.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위성이고 뭐고 다 동원하고 있어요."

    "오키. 서아영!"

    "네."

    "해민이 델꾸 가서 애들 다 모아. 방어선 세워야 해."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걸 무슨 수로 막아요!"

    "그럼 손가락 빨고 처노시든가! 심심하면 옆에서 오징어 씹으면서 박수라도 치시지 왜?"

    "…노력해 볼게요."

    서아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푸라기 해도 의지가 있는 사람이 잡을 수 있는 것이니까.

    기적은 움직이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이다.

    무엇보다 저런 말을 듣고도 '그러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저런 말을 듣고도 '못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지혁이 서아영의 대답을 듣고 몸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그의 옷을 잡았다.

    "나는?"

    이지혁은 자신의 옷을 잡고 있는 도가윤을 보며 입술을 꽉 다물었다.

    "따라와!"

    이지혁의 우수에서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대한 검은 매가 튀어 나와 날개를 쫘악 벌렸다. 이지혁이 매의 등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타!"

    아펠드리체와 도가윤이 매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최정훈도!

    "어?"

    이지혁이 빤히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 뚱한 시선을 받은 최정훈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왜요?"

    "아니… 거, 같이 가서 뭐하시게?"

    "지시를 내리려면 파악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왜 이래요! 일반인이라고 괄시하는 겁니까?"

    "일반인이라고 괄시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가서 뭐하게?

    뒤에서 치어리딩이라도 하나?

    응원단 출신이세요?

    "와, 저 지금 눈빛으로 말하는 걸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축하드려요."

    "감사해야 합니까?"

    최정훈은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매의 등을 꽉 붙잡았다.

    "그러다 떨어지면 죽어요."

    "어차피 이지혁 씨 옆에서 죽을 위기 넘긴 거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가시죠!"

    "네이, 네이."

    이지혁은 매의 머리로 올라섰다.

    "오식아!"

    오식이가 다다다 뛰어 훌쩍 매 위로 뛰어올랐다.

    "꽉 잡아."

    이지혁을 태운 검은 매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가공할 속도로 드래곤을 쫓아서 날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 순간적인 가속에 뒤로 날아갈 뻔한 최정훈이 매의 꼬리를 잡고 매달렸다.

    "자, 잠깐마안!"

    "꽉 잡으라니까!"

    이지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아니, 그래도 돌아보는 척은 해야 할 것 아냐! 내가 날아가면 어쩔 건데!'

    최정훈이 이를 악물고 매의 등으로 타고 올랐다.

    뭐가 이리 빨라?

    "멀리도 갔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미 드래곤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을 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닥에 늘어진 새하얀 서리의 길이 그들을 안내하고 있었으니까.

    나름 편리하기는 하지만, 저 서리에 길에 희생되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대 한국에 닿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이야 쉽지!"

    이지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 인간은 드래곤이 뭔지도 모르는구나.

    아무리 좀비라지만,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생전에 가진 힘의 반만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재앙이나 마찬가지인 생물이란 말이다.

    물론 뭐…….

    예전이었다면 엄살이겠지만, 지금은 또 엄살이라고 할 수가 없다.

    지금의 이지혁은 저 좀비 드래곤조차 벅차다.

    마나만 충분하다면야 저딴 도마뱀 시체 따위야 한 방이겠지만, 그 마나가 없다.

    '이거 위험해.'

    충분히 위험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것.

    갈수록 더 강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는데, 지금 상태로는 막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몬스터라면 어찌어찌 막겠지.

    마왕이라든가 베라프의 진정한 강자들이 넘어온다면?

    어느 쪽이든 이지혁의 대가리를 깨지 못해서 안달인 놈들이니, 생명의 위기다.

    디오레 1세 같은 놈이 넘어오기라도 한다면 이지혁은 1초 만에 라트렐을 영접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마나! 마나!"

    이지혁이 마나 부족에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 옆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없는 것을 구하려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요."

    "누가 그걸 몰라?"

    "알면 해야죠."

    "니 친구 패 죽였다고 울지 마라?"

    "누가 친구예요! 저런 저급한 좀비를 감히 드래곤 로드와 비교하다니!"

    "로드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며?"

    "그래서… 어떻게 잡을 생각이죠?"

    "캬, 말 돌리는 클라스 보소? 로드님 말 돌리신다아아!"

    "아니거든요!"

    이지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떻게 잡느냐고?

    하, 그러게. 뭔가 이상한 기분이네.

    한동안 어떤 존재를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 영 감이 안 잡히는데…….

    그게 벌써 300년은 지난 일이니까 말이야.

    그 이후로는 냅다 때려 부수면 대충은 다 해결되다 보니 이렇게 생각이란 걸 할 필요가 없었다.

    "좀비 드래곤이라, 좀비……. 좀비의 약점이 뭐지?"

    최정훈이 소리쳤다.

    "멍청하다!"

    "어디서 욕지거리야!"

    이지혁이 뒤로 돌아 겨우 매의 등까지 기어 올라온 최정훈을 뻥! 걷어찼다.

    "으아아아!"

    최정훈이 붕 뜨더니, 겨우 다시 매의 꼬리를 부여잡았다.

    "왜! 왜! 좀비가 멍청하다는 건데!"

    "아, 그래요?"

    나야 몰랐지.

    잘 설명하지그랬어.

    이지혁이 고개를 다시 돌렸다.

    뒤에서 최정훈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바람 소리에 섞여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중간 중간 개가 어쩌고, 새가 어쩌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오식이를 이용하라는 건가?

    아닌가?

    "저기!"

    아펠드리체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과연 좀비 드래곤의 뒷모습이 작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좀비 드래곤을 호위하던 드레이크 떼가 이지혁들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리체!"

    "네."

    "처리해!"

    "가능한 일을 부탁해 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하겠는데요."

    "비슷한 애들이잖아!"

    "누누이 말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지혁 씨는 원숭이죠."

    내가 저년을 언젠가는 찜 쪄 먹고 말 거야.

    "알았으니까! 어떻게든 하란 말이야."

    "마나 생명체라는 것이 이리 불편할 데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마나 충전이 안 되다니."

    본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외부 마나가 아니라 하트를 이용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하트에서 마나를 빼 올 수가 없었다.

    아펠드리체가 수인을 맺었다.

    "체인 라이트닝!"

    전격계 마법이 그녀의 손에서 떠나 드레이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번쩍이는 빛들이 드레이크들 사이를 누빈다.

    "통했나?"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통하네요. 애초에 통할 리도 없구요."

    "하, 진짜 도움이 안 되네."

    "그러지 말고……."

    "응?"

    "뛰어올라 봐요. 제가 보조할게요."

    호오?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인데?

    이지혁도 비행은 가능하지만 비행 마법이 워낙에 마나를 잡아먹는데다가 속도가 잘 나지 않는 마법이다 보니, 드레이크와의 공중전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도마뱀이 돕는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지혁이 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파앙!

    그와 동시에 아펠드리체가 허공에 작은 공기의 판을 만들어냈다. 그곳에 발을 디딘 이지혁이 용수철처럼 몸을 숙였다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기를 두어 번 반복하여 삽시간에 드레이크 떼 한중간으로 뛰어든 이지혁이 양팔을 쫘악 벌렸다.

    "잘 먹겠습니다!"

    이지혁의 육체에서 시커먼 촉수가 다발다발 뿜어져 나와 사방을 휘감았다.

    키에에에엑!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촉수에 먹힌 드레이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자, 얌전히……."

    어?

    촤아아아악!

    그 순간, 드레이크의 발톱이 이지혁의 촉수를 갈라냈다.

    "하?"

    아무리 많은 수를 뽑아내야 하는 탓에 하나하나에 넣은 마나량이 많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지혁의 촉수가 갈라진 것은 이곳에 돌아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젠 쉽지 않다는 건가?"

    이지혁이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인상을 썼다.

    모두가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드레이크들이 이지혁의 촉수를 찢고 나왔다.

    "음, 그럼 어쩌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당신! 추락한다고!"

    아, 그래? 누가?

    음, 추락이라, 추락…….

    그게 떨어지는 거니까…….

    아, 나구나!

    이지혁이 비행 마법을 펼치며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 * *

    비행 마법으로 날아오른 이지혁이 아펠드리체를 향해 외쳤다.

    "발판 깔아라, 발판 셔틀!"

    "셔틀?"

    "번역기 패치는 나중에 하고!"

    아펠드리체가 발판을 만들자 이지혁이 앞에 생겨난 발판을 밟고 다시 뛰어올랐다.

    카아악!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는 이지혁을 보고 드레이크들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얼레?"

    쟤들… 브레스도 뿜을 수 있었나?

    아니.

    나야 모르지, 저런 잡몹 따위.

    드레이크야 뭐 손짓 한 번이면 다 날아갔는데, 쟤들이 불을 뿜든 안 뿜든…….

    이지혁이 촉수로 몸을 휘감아 보호했지만, 열기는 촉수를 뚫고 들어왔다.

    "아악! 뜨거!"

    몸이 확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에 이가 절로 갈린다.

    내가 보스 몹도 아니고, 겨우 이런 잡몹들에게!

    내가!

    이지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해보자, 이거지?"

    이지혁의 몸에서 검은 마나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나 배분이고 뭐고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지혁의 자존심이 다쳤다는 것이다.

    화륵!

    연기가 불꽃처럼 피어오르며 이지혁의 양쪽 어깨에 거대한 불꽃 날개를 만들어냈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날개까지 만들어내다니, 과연 이지혁!

    성격은 최악이지만, 그 능력만은 인류 최강!

    그야말로 환상적인 불꽃의 날개였다.

    자, 이제 날아올라라!

    "도마뱀! 발판 깔아라아아아아!"

    "…못 날아?"

    그럼 날개는 왜 만들었겠냐.

    아니, 잠깐만.

    그걸 따지기 전에… 저 날개 없어도 날 수 있었잖아?

    그럼 저거, 왜 만든 건데?

    폼인가? 그냥 폼인가?

    저 얼굴에 피어난 미묘한 미소를 보니 폼이 맞는 거 같은데?

    …좀 멋진 거 같기는 한데…….

    이지혁이 날개를 단 채 발판을 딛고 뛰어올랐다.

    폴짝폴짝 뛰는 모습을 보니, 그 뭐랄까…….

    "뭔가……."

    최정훈의 말에 도가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가 되어야 하는데…….

    닭이 된 느낌이랄까?

    멋들어진 날개를 달고도 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뭔가 좀 처량하고 안쓰럽고… 그냥 그렇다.

    "미묘하다, 미묘해."

    가만히 서 있으면 각이 잘 살았는데 말이야.

    이지혁에게 브레스들이 집중되어 날아들기 시작했다.

    "큭!"

    한 발, 한 발은 그리 위력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그 브레스들이 모이니 무시할 위력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어린 드래곤 급은 되지 않을까?

    촉수와 실드로 후려치고 갈라 치고 밀어내고는 있지만, 한계가 있었다.

    "큭!"

    브레스 하나가 실드를 뚫고 들어와 다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스친 곳의 피부가 갈라지면서 타오른다.

    예전 같았으면 1초도 안 되어 회복될 작은 상처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그런 재생 능력이 없었다.

    으드득.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다.

    이따위 것들에게 시간을 끌리다니!

    게다가 상처까지?

    화끈거리며 밀려오는 다리의 극통에 이가 으득으득 갈린다.

    "하아아아!"

    이지혁의 양 날개에서 검은 화염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고 불길하게 날름대는 불꽃이 피어오르며 드레이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쏘아지던 브레스들이 이지혁의 검은 불꽃에 휩싸이며 그 열기를 잃었다.

    카아아아아악!

    검은 지옥의 불꽃에 격중된 드레이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큭!"

    수십 마리의 드레이크 떼를 일격에 격살시켰지만, 아직 태양을 가릴 만큼의 드레이크들이 이지혁게에 브레스를 뿜어 대고 있었다.

    "으!"

    이지혁이 브레스에 밀려 발판을 밟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순간적으로 비행 마법을 펼치기는 했지만, 뜨거운 열기와 은근히 작용하는 물리력이 이지혁을 뒤로, 또 뒤로 밀어냈다.

    "으아아! 짜증나!"

    이게 지상이었다면 저따위 놈들쯤은!

    * * *

    "안 돼."

    도가윤이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발판을."

    아펠드리체는 가만히 도가윤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인간이 뭐라고 말하는 걸까?

    발판을 만들어주면 저기로 뛰어들겠다는 건가?

    인간이?

    브레스 한 방이면 재가 되어버릴 인간이?

    우웅.

    아펠드리체는 두말없이 그녀의 앞에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감사."

    "가윤 씨!"

    도가윤이 발판을 향해 뛰어오르자 최정훈이 비명을 질렀다.

    "위험해요!"

    "다녀옴."

    발판을 밟은 그녀가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리자 아펠드리체가 새로운 발판을 만들었다.

    팟! 팟! 팟!

    생각 외로 날렵한 도가윤의 움직임을 본 아펠드리체가 발판을 비스듬히 기울였고, 도가윤이 발판을 좌우로 박차며 허공을 뛰어놀기 시작했다.

    '재규어 같군.'

    저런 움직임이라니.

    최정훈이 탄성을 내뱉었다.

    언제 저렇게… 도가윤이 저런 능력이 있었던가?

    은신과 잠입은 최상급이지만, 딱히 전투 능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도가윤의 모습은 확실히 이전까지의 도가윤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발판들을 박차며 순식간에 이지혁의 반대편을 향해 날아올랐다.

    크롸롸!

    도가윤을 발견한 드레이크들이 브레스의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지혁에게 여유를 돌려주기는 충분했다.

    "이 도마뱀 새끼들이!"

    그 작은 여유를 틈타 이지혁이 날개를 쫘악 펼치며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브레스가 비처럼 쏟아진다.

    "감히!"

    이지혁의 눈이 붉게 물들어간다.

    잔뜩 선 핏발이,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려낼 것만 같다.

    크롸롸롸롸!

    이지혁을 향해 한 마리의 드레이크가 입을 쩌억 벌리고 단숨에 삼켜 버리겠다는 듯 날아든다.

    "하……."

    아무리 통제력을 잃었다지만!

    이런 잡몹 따위가 이렇게 적의를 보이면서 날아들다니!

    더 이상 생존 따위는 상관없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간 촉수들이 드레이크의 육신 곳곳을 꿰뚫었다.

    크롸롸롸롸!

    마치 철사에 꿰인 인형처럼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드레이크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다.

    "드레인."

    콰드득!

    드레이크의 육신 내부에서 뒤틀린 소음이 흘러나온다. 그와 동시에 드레이크의 마나가 울컥울컥, 촉수를 타고 이지혁에게 흘러들기 시작했다.

    순도 높은 마나가 몸 안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마나를 채웠다고 말하기에 민망한 수준이다.

    이지혁의 눈이 탐욕스럽게 다른 드레이크들을 향했다.

    촉수가 껍데기만 남아버린 드레이크에게서 뽑혀 나와 다른 드레이크들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라, 드레이크들을 꿰뚫었다.

    "흡!"

    드레이크를 꿰뚫은 촉수를 지지대 삼아 이지혁이 순간적으로 드레이크 떼 안으로 뛰어들었다.

    카아아악!

    이지혁이 뛰어들자 드레이크들이 일제히 발톱을 휘두르고 이를 들이민다.

    "큭!"

    대부분은 피해냈지만, 몇 개의 발톱이 이지혁의 등판에 틀어박힌다. 이가 부러지도록 질끈 깨문 이지혁이 앞으로 몸을 굴리듯 날렸다.

    촤아악!

    끔찍한 소리와 함께 등이 길게 갈라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아프다.

    아파.

    지독하게 아프네, 진짜!

    이런 고통이란 것도 정말 오랜만이야…….

    이지혁이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입매를 비틀었다.

    오랜만이야.

    베라프에서는 항상 이랬지.

    그 불사의 몸도 고통에서 그를 구원해 주지는 못했다.

    천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다른 이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수십 배를 당연하다는 듯이 겪어온 그였다.

    그래서 고통에 내성이 생겼냐고?

    천만에.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아!

    천 년이 아니라 만 년, 십만 년이 지나도 고통은 고통일 뿐이야.

    아니,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다만, 이지혁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정신마저 항상 재생되었으니까.

    익숙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가 생생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오랜만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자 되레 이성이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거지……."

    이젠 '상처 입는다'로 끝나지 않는다.

    '아팠다'로 끝나지 않아.

    정말 죽는다.

    그 사실이 이지혁의 세포 하나하나를 들끓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지혁의 우수에서 검은 마나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우수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이지혁의 앞에서 뭉쳐 들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아아!"

    과도한 마나를 뿜어낸 대가로 이지혁의 우수가 마치 고목처럼 비틀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육체에 담겨서는 안 될 흑마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였다.

    하지만 감수해야 할 일.

    우드득!

    팔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이지혁의 우수가 기이한 각도로 뒤틀렸다.

    예전이었다면 뒤틀리는 즉시 회복이 되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극, 그극.

    아주 느릿하고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팔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지혁은 우수에서 눈을 떼고 마력의 컨트롤에 집중했다.

    콰득!

    그 순간, 또 한 번 실드를 뚫은 드레이크의 발톱이 아랫배에 틀어박힌다.

    아펠드리체가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지혁 씨!"

    이지혁의 몸에서 흑마력이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마력을 끌어 쓰다 보면 문제가 가속화된다.

    육체의 손상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강도에 재생까지 하던 그의 정신은 이제 없다!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흑마력이 이지혁의 정신을 천천히 장악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육탄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는데…….

    "그만둬요!"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지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약해 빠졌어.

    너무나도 나약해.

    나란 존재가 너무 약해서 실소가 나온다.

    "그러니까!"

    마나들이 뭉치고 회전하기 시작한다.

    고오오오오!

    광포한 소음과 함께 검은 마나가 점점 그 덩치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지혁의 얼굴 위로 악마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니 처먹어야지."

    먹고 또 먹어서 불린다.

    불리고 또 불린다.

    그러다 보면 닿겠지.

    그곳에 다시 말이야.

    그때까지 먹고 또 먹고 또 처먹어야지. 그렇지?

    검은 마나가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검은 베일처럼.

    밝은 대낮이었던 하늘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지혁에게서 시작된 어둠은 천천히 뻗어져 나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뭐, 뭐야!"

    최정훈이 기겁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 어둠의 물결이 허공 한가운데에 나타난다 싶더니, 이내 주변의 모든 드레이크들을 뒤덮어 버렸다.

    오직 아펠드리체만이 그 마법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얼굴을 굳혔다.

    확실히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마법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낮에 검은 달이 뜬 것만 같았다.

    드레이크 떼를 모조리 집어삼킨 검은 달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대한 문처럼 보였다.

    "뭔 일이 벌어지는 거야?"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 * *

    도가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판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어둠이라는 것이 이전의 세계와 격리되지는 않았다는 뜻일 텐데?

    그런데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가.

    "후……."

    그런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이지혁?"

    화악.

    마치 넘실거리는 듯한 검은 불꽃에 세상을 밝힌다.

    "아……."

    눈과 귀와 모든 것을 틀어막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고…….

    이지혁이 만들어낸 세상을 본 도가윤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광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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