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3화 (23/118)
  • [■]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

    ─────

    "꺄아아아아아악!"

    이예원의 손에 들린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무슨 일이니!"

    박선덕이 깜짝 놀라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보통 예원이는 저런 반응을 보이는 얘가 아니었다.

    바퀴벌레가 튀어나와도 맨손으로 때려잡고 슥슥, 문질러 닦는 아이가 아니던가!

    그런 아이가 저런 찢어지는 비명이라니!

    박선덕이 당근을 자르던 식칼을 손에 든 채 달려갔다.

    그러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네?"

    이지혁 방의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본 이예원이 손을 벌벌 떨면서 아펠드리체를 가리켰다.

    왜 저 여자가 이지혁의 방에서 나오는가!

    그것도 이 아침에!

    이거, 설마… 그건가? 그거!

    어머! 어머!

    "어, 어떻게… 첫날부터!"

    "네?"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등 뒤에서 이지혁이 하품을 하며 걸어 나왔다.

    "뭐? 왜?"

    "더러워!"

    "뭐가 더러워? 이게 돌았나? 니 머리가 더 더러워."

    "어떻게 집 안에 사람이 다 있는데 이럴 수가 있어!"

    "뭔 얘기야? 꿈꿨냐?"

    "다솜이한테 다 이를 거야."

    지가 왕따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대?

    여자들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뭔 얘기야? 알아듣게 말을 해!"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예원이 삿대질을 마구 해 대며 이지혁에게 씩씩댔다.

    "그나마 장점이라고는 순진한 거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라니!"

    내가 얼마나 장점이 많은 사람인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넘어가자!

    "헛소리하지 말고 비켜. 화장실 갈 거야!"

    "헐, 씻으려고? 아침에 씻는 꼴을 못 봤는데, 눈뜨자마자 씻으시네요! 역시!"

    "오줌 싼다, 이년아! 오줌! 너한테 갈겨줄까!"

    "더러워!"

    이게 진짜 사람 성질 제대로 긁네.

    진짜 더러운 게 뭔지 보여줄까?

    그때였다.

    딩동! 딩동딩동!

    벨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멍해 있던 박선덕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 아침에 누구지?

    인터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박선덕이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세요?"

    - 어머니! 저예요, 해민이! 문 좀 열어주세요!

    "응?"

    얘가 이 아침부터 웬일이지?

    문을 열자 두 여자가 득달같이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이지혀어억!"

    "헐……."

    아침 댓바람부터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온 정해민과 김다솜을 본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것들 둘이 원래 저리 친했나?

    같이 다닐 만큼?

    여자들이야 원래 금방금방 친해지고, 금방금방 사이가 나빠진다고는 하지만, 쟤들은 거의 견원지간 아니었나?

    "다솜아!"

    이예원이 김다솜에게 뛰어들 듯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확 잡았다.

    "저, 저 여자가 오빠 방에서 나왔어! 방금!"

    "…뭐?"

    김다솜이 무채색의 동공으로 아펠드리체를 응시했다.

    어디서 나왔다고? 저기서? 이 아침에?

    단 하루 만에?

    김다솜의 얼굴이 되레 무뚝뚝해졌다.

    "그렇구나……."

    그런 김다솜의 표정을 본 이예원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헐, 이게 아닌데?

    뭔가 대형 사고를 친 듯한 이 기분은 뭐지?

    얘… 왜 이러지? 무섭게?

    "어디서 나와?"

    정해민이 덜덜 떨면서 물었다.

    아니, 저 여자는 얼굴도 저리 이쁜데, 뭐가 아쉽다고 이리 빠르다는 말인가!

    이게 서양 스타일인가!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개방적인 거 아냐?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그래도…….

    그렁그렁.

    정해민의 눈가에 뭔가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자, 이지혁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야, 울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오전 여섯 시.

    서울 능력자 거주구의 모든 주민이 강제로 눈을 떴다.

    * * *

    이지혁은 너덜너덜해져 머리를 처박았다.

    '죽겠네, 진짜.'

    아침부터 이게 뭐냐!

    간만에 잠 좀 잤는데!

    그렇게 풀린 피로가 삽시간에 다시 쌓이는 느낌이었다.

    "왜… 왜 그러냐, 대체……. 나한테 왜!"

    훌쩍.

    여전히 훌쩍대고 있는 정해민을 보니 두통이 마구 몰려온다. 게이트로 집어넣어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막상 집어넣으려고 하자 이예원을 필두로 한 여성진들이 꼬리에 불붙은 고양이처럼 달려들어 왔기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고 달래기를 십 분이 넘게 해서 겨우겨우 울음이 그쳤다.

    이지혁도 이지혁이지만, 정해민도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이거 들어요."

    "훌쩍, 고맙습니다……."

    정해민이 박선덕이 내민 주스를 홀짝댔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김다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은 건지……."

    에어컨 켰나?

    왜 한기가 들지?

    "제 귀로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별말도 아닌데 왜 이리 소름이 돋지?

    얘는 뭔 러시아에서 왔나, 패시브로 한기가 기본 장착이야.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별일?"

    그 귓구녕은 골라 듣기 기능이라도 있나?

    아주 그냥 귓구멍을 뚫어버릴까 보다!

    도무지 이 사태가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아펠드리체가 손뼉을 쫙! 쳤다.

    "아!"

    "응?"

    저건 또 왜 저래?

    "왜 그러시는지 알겠습니다."

    "응?"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생식 행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새, 생식 행위!"

    뭔가, 이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노골적인 단어는!

    김다솜마저 입을 쩌억 벌렸다.

    "물론 그 비슷한 것은 있었습니다만……."

    비슷?

    비슷하다고?

    희번덕 눈을 부라린 정해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슷하다니.

    뭐가 비슷하다는 말인가.

    "뭔 개소리야, 또 너는!"

    이지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뭔가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포옹이라든가 하는 것은 생식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인류의 전형적인 패턴이 아니던가요?"

    "포옹?"

    이게 뭔 소린가?

    "그저 포옹 단계지만, 그래도 밤새도록 안고 있었으니 인류의 감정적 단계로 본다면 꽤나 깊은 교감이 이루어지는 행위인 걸로……."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나! 빌어먹을……."

    겨우 진정시켜 놨더니 3분 만에 다시 터트리냐!

    그리고 저건 무슨 진짜 주둥아리에 뭘 달았기에 이렇게나 우렁차단 말인가!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아, 좀 닥치라고! 좀! 왜 남의 집에 아침부터 쳐들어와서 이 지랄들이냐고, 진짜!"

    "과하네요."

    우웅.

    아펠드리체가 살짝 손을 휘젓자 빼액대는 정해민의 목소리가 음 소거라도 한 것마냥 사라졌다.

    정해민은 자신의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입을 벌려 통곡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병기급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새로 알았습니다. 굉장한 일이군요. 소음 마법에 대해 연구를 해봐야겠어요."

    "…니 맘대로 하세요."

    아, 진짜 다 꺼졌으면 좋겠다.

    이지혁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이 지옥 같은 현실은 언제쯤 바뀌는 것인가.

    하, 인생…….

    * * *

    컹!

    오식이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몸을 부르르 떨고는 미친 듯이 뛰어나가 두 발로 섰다.

    깽!

    이 집이 진짜 무슨 마굴도 아니고…….

    멸망의 좌 하나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 드래곤 냄새를 풀풀 풍기는 여자는 또 뭐란 말인가.

    그것도 웬만한 드래곤의 냄새가 아니었다.

    최소 에이션트급.

    눈빛 하나로 오식이를 찌부러뜨릴 수 있는, 진짜 거물의 냄새가 났다.

    그러니 기합이 바짝 들어갈 수밖에.

    이제 겨우 이지혁이랑 좀 친해졌는데, 상전이 하나가 더 생겼다.

    리체는 차렷 자세로 바짝 긴장해 있는 오식이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얘는 키우시는 건가요?"

    "어."

    "가디언으로 오거를 쓰는 경우는 많지만, 이리 약하게 만들어놓으면 집이나 지키겠어요?"

    "필요할 때마다 마나 공급하고 있어."

    "음, 그렇군요."

    "그리고 오식이는 가디언이 아니야. 애완동물이지."

    "애완동물?"

    "그런 거 있잖아. 개 키우듯이 이뻐하며 키우는 거지."

    오거를?

    리체는 가만히 오식이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더 귀여운 생물은 많을 텐데요?"

    "정 한 번 주면 바꾸는 게 쉽지 않다."

    아펠드리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혁 씨가 이곳을 비웠을 때 누군가가 쳐들어온다면 저 연약한 오거만으로는 가족들을 지키기가 힘들지 않을까요? 본체라고 해도 불안한데… 저런 작은 몸으로?"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럴 때면 즉각 이지혁이 날아오겠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게다가 요즘 들어 흉흉한 일이 자꾸 벌어지니까.

    "방법이 있어?"

    "당신이 원한다면."

    그냥 할 수 있으면 하면 그만이지, 꼭 이렇게 사람한테 빚을 지우는 척한다니까.

    "해."

    "알겠어요."

    빙긋 웃는 저 미소가 영 얄밉다.

    얄밉기는 한데, 뭔가…….

    이거, 이상한 기분이네?

    뭔가 그리운 느낌이 든다.

    …하기야 저 얼굴을 천 년을 보고 살았으니까.

    한 백 년 동안은 매일 보고 산 적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 냉정하게 돌이켜 보니, 저 망할 도마뱀이 없었다면 영원히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지혁은 고개를 획획 저었다.

    "내가 죽을 때가 됐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감상적이 된다더니…….

    뭐, 저 도마뱀이 그리웠다고?

    에헤이! 아서라!

    내가 저 도마뱀 때문에 겪은 고생을 떠올리면 아직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야!

    그거 말고!

    진짜 일어난다고, 진짜!

    아펠드리체가 손을 휘젓자 새하얀 홀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투명한 것들이 나와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령?"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 정도면 도움이 될 거예요. 무엇보다 제게 바로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흠, 그렇지."

    그런데 이 세계에서도 정령이 소환 가능했나?

    "어차피 정령계에서 넘어오는 것이니 어느 세계인가는 관계가 없죠."

    "사람 마음 읽지 말라니까!"

    "그런 건 마법으로도 안 된다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더 싫다고!

    사람 얼굴만 슬쩍 보고 무슨 생각하는지 읽어내지 말란 말이야!

    "너, 진짜 사람 성질 긁는 데는 일가견이 있네."

    "그 말도 벌써……."

    "닥쳐! 몇 번 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보나마나 엄청나게 해 댔겠지!"

    "그리 많지 않은데?"

    "아, 그래?"

    그럼 말을 하지.

    아니, 내가 닥치라고 했나?

    이지혁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출근을 하기 위해 걸었다.

    그런데 그런 이지혁의 옷을 잡아끄는 이가 있었다.

    "응?"

    정해민이 울상이 돼서 옷을 잡고 늘어졌다.

    "왜?"

    정해민이 뻐끔뻐끔거리더니,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아직 안 풀어줬냐?"

    "풀어드려야 하나요?"

    "그럼 평생 말도 못하고 살라고?"

    "글쎄요. 합리적으로 따졌을 때, 음파 병기를 남발하는 입은 막아두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롭지 않을까요?"

    "헛소리하지 말고 풀어줘."

    "확실히 인간은 불합리한 종족이에요."

    "도마뱀에게 그런 평가 따윈 받고 싶지 않으니, 잔말 말고 애 입이나 뚫어줘."

    "알겠어요."

    아펠드리체가 손을 휘두르자 정해민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뭐, 뭐야? 이건 또 대체!"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입 다시 막아버리기 전에 조용하는 게 어떨까?"

    "딸꾹."

    겨우 입을 다문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발…….

    아침만이라도…….

    조용히 좀 살자!

    이 썩을 것들아!

    앞으로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을 예감하며 이지혁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 * *

    [이번 연쇄살인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범인을 외국으로 도주시킨 KSF에 항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KSF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화가 난 군중들이 KSF의 청사 앞에 모여들어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거, 청장님 속 좀 썩겠는데?"

    서아영은 씨익 웃었다.

    그 반대머리가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며 창문 밖을 바라볼 모습을 생각하니,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그거야 뭐……. 그렇죠."

    대중이 능력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은 도무지 유쾌하게 볼 수가 없었다.

    "우리 잘못도 아닌 것을."

    "그리 관대하게 생각해 주면 좋겠지만, 사람이란 게 꼭 그렇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번 시위는 단순히 연쇄살인범을 놓쳤다고 항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쌓이고 쌓인 것이 그냥 터져 나온 것이다.

    반감.

    불안함.

    그리고 적대감.

    같은 곳에서 시작했으나 이제는 방향이 갈려 버린 두 인종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눈치챈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죠?"

    최정훈은 빙긋 웃었다.

    "답 없죠."

    "무책임하네."

    "제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사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없지.

    인간이란 능력 밖의 일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여하튼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어제 보고드렸잖습니까."

    "뭐라고 했더라?"

    하…….

    이러니 보고를 해봤자 뭔 의미가 있냐고! 그냥 보고 받지 말라고!

    "이지혁 씨 집으로 갔다니까요."

    "장난 아니다. 뭔 첫날부터 집으로 쳐들어가?"

    그게 아니지.

    그 이지혁이 집에 온다는 여자를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거지.

    다른 여자 같으면 현관에서 걷어차였을 것이다.

    '이상해, 확실히.'

    이지혁과 그녀, '리체'의 관계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유대감이었다.

    그런데 그 유대감이라는 것이 단순한 친근함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함께 뭔가를 많이 겪은 이들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겨우 5년 만에?'

    이지혁이 실종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것은 5년.

    그 짧은 기간 동안 저 정도의 유대감을 쌓으려면 뭔 짓을 해야 하는가…….

    "아니, 잠깐만."

    "네?"

    "부장님, 그 안에 있을 때! 시간이 느리게 갔다고 했죠?"

    "네?"

    "게이트 안에서요. 이지혁 씨가 이상한 곳으로 보냈다면서요?"

    "그랬죠. 반년쯤은 지났을 텐데, 돌아오니 겨우……."

    "아!"

    이지혁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럼 그 5년이 5년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뭔가 달관한 태도라든가, 이해가 가지 않는 폭력성들이 모조리 해결되는 가설이었다.

    "그런 건가?"

    그러고 보면 처음의 그 미친 반응도 이해가 간다.

    확실히…….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이지혁은 이지혁이다.

    안다고 뭔가 달라지지 않는다.

    예전에 알았다면 뭔가 대처를 강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뭐…….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최정훈은 깔끔하게 신경을 껐다.

    이지혁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 따윈 낭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벗어날 수 있는 건 또 아니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이지혁이 온갖 짜증이 다 어린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쟤는 또 왜 아침부터 저러냐?

    "으응?"

    그리고 그 뒤로 들어오는 정해민과 도가윤의 얼굴도 영 심상치가 않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뒤에서 들어오는 아펠드리체를 본 최정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사람 얼굴이라는 게 몇 번 보면 익숙해져야 할 것 아닌가!

    하루 정도 봤으니 이제 좀 익숙할 만도 하건만,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걸 제어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뭐지?

    하루 만에 한국어를 배운 건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루 만에 배운 수준이 아닌데?

    "뭘 잘 부탁해! 얼굴 봤으니 너희 집으로 꺼지라고!"

    "게이트 열 마나가 없어요."

    "뭐? 그럼 너… 집에 안 가?"

    "네."

    "그럼 뭔 대책으로 여기에 온 거야!"

    "지혁 씨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진짜 대책 없네."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책이 없는 게 아니죠. 사실 저는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세계 정복이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죠."

    저거, 농담으로 안 들리는데?

    최정훈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려고 마음먹으면 막을 방법이 있는가.

    "마나도 없는 세상인데 내가 무슨 수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줄 알았어요."

    "난 집에 오고 싶었던 거지, 이 동네를 어떻게 해보고 싶던 게 아니라고. 오자마자 갑자기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나오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뭐, 아는 거 없어?"

    "차원의 틈이 갈라졌어요."

    "응?"

    "틈이 갈라져서 게이트가 열리는 거예요. 목적의식이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 것 같지만요."

    "해결 방법은 있나?"

    "차원의 틈을 닫으면 되지만, 그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본체로도 어려운 일인데, 지금으로서는 저도 방법이 없어요."

    "흐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원의 틈이 갈라졌다고?

    그게 보통 일어나는 일인가?

    "확률이 희박한긴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베라프에서도 벌어진 적 있었나?"

    "베라프는 신들이 지배하는 땅이에요. 차원의 틈이 벌어진다 해도 바로 막겠죠."

    "그렇군."

    어? 듣고 보니 이상한데?

    "우리 동네에는 신이 없나? 하느님, 부처님, 알라 님……."

    아니, 알라를 알라 님이라고 하나?

    "신성은 찾을 수 없어요. 미약하게 뭔가 느껴지기는 하는데, 이걸 신성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정도예요. 만약 존재했다 해도 과거에 사라졌겠죠. 아니면 너무 거대해서 제가 그 의지를 느낄 수 없는 수준이거나."

    "모 아니면 도라……."

    그럼 어차피 없는 거나 마찬가지네.

    인간이 몸 안의 미생물을 신경 쓰지 않는 정도의 격차가 난다는 말이니까.

    "뭐, 상관없지. 있으나 없으나 별 도움 안 되니까."

    최정훈은 빙그레 웃었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으니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이지혁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아펠드리체는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건축양식부터 시작해서 온갖 쇠로 만들어진 기기들까지. 이곳은 그녀가 알던 세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왔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제는 그게 실감이 났다.

    특히나 그 이지혁이 저렇게 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신기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이지혁이 앉아 있는 모습은 옥좌에서 거들먹거리거나 지루함을 참아내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지금…….

    "아씨, 점멸 썼는데! 왜 이게 안 써지냐고! 진짜 미치겠네!"

    "아니, 거기서 점멸이 써졌다고 삽니까?"

    "뭐? 지금 그거, 나한테 지적질하는 건가?"

    "웬만큼 못해야 입을 안 떼지!"

    "내가 못한다고? 그래서 님 티어가?"

    "골드입니다."

    "지금 골드 따위가 지적질을 하는 건가? 골드 따위가? 어디 게시판에 당당히 밝히지도 못하는 골드 따위가?"

    "당신, 브론즈야, 브론즈! 최하위! 심지어 브론즈 중에서도 제일 못하잖아!"

    "하, 내가 지금 손이 덜 풀려서……."

    "그 손만 석 달을 풀었는데, 대체 언제까지 풀어야 하는 겁니까? 파킨슨병이라도 있으신가?"

    "하아?"

    이지혁과 최정훈의 눈빛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작렬하며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런데 그게 뭐하는 거죠?"

    "게임."

    "게임이요?"

    그녀가 아는 놀이라는 것은 사람이 저런 식으로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체스 같은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음……."

    하,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나?

    안 그래도 과거 아펠드리체와 체스를 붙어 1,000연패쯤 한 뒤에 땀구멍에서 스팀 증기가 뿜어져 나올 정도로 열이 받아서 바둑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룰을 깨우친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에게 다시 1,000연패를 안겨주었다.

    '재밌을 거 같기도 한데?'

    "앉아봐."

    "네?"

    "여기 앉아보라고."

    이지혁이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네."

    아펠드리체는 별말 없이 이지혁이 시키는 대로 앉았다.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내가 너에게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정점을 알려주지."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흐으……."

    사내는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기 위해서 이들과 손을 잡았다. 아니,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목줄이 채워진 강아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잘한 걸까?'

    물론 이들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에게 미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몇 번이고 후회하고 후회할 만큼 이들은 두려운 존재였다.

    하찮은 텔레포트와 은신이라는 능력 정도는 이들에게 그저 이용하고 버릴 뿐인 잡기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그러니 철저하게 이용하려 들 것이다.

    '나 역시 적당히 이용하다가 도망가 버리면 된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게 도망칠 수 있는 능력자였다.

    지금이야 감시가 삼엄하지만, 조금 더 비굴하게 굴종하는 모습을 보이다 보면 감시가 조금은 허술해질…….

    "잡생각이 많은가 보군요."

    사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 목소리는 사람을 절로 불안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생각이 많은 건 좋지 않습니다. 결단력이 줄어들게 되죠.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것은 나중으로 미뤄두세요."

    "예."

    사내.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범이라 불리던 나장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물어야 할 것인가, 묻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파."

    "말씀하시죠."

    "왜 저를 데리고 오신 겁니까?"

    빤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자신을 바라보는 알파의 시선에 언제나 낮은 경멸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으니까.

    혐오할 것이라면 뭐하러 데려왔단 말인가.

    "당신을 데려온 이유라……. 글쎄요,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까요?"

    의외였다.

    그저 '필요하니까'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뭔가 설명하려 든다는 것 자체가 의외였다.

    "음, 솔직히 나는 당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살인자이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아니요. 살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살인자이기 때문이죠."

    "네?"

    이게 무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사람을 죽였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도 살인자라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흠……."

    알파는 볼을 긁었다.

    "아무래도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힘든 일이군요. 간단히 말해서… 음, 그렇죠. 히틀러는 살인자인가요?"

    살인자?

    히틀러가?

    나장호는 눈을 찌푸렸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나 따지고 보면 그는 살인자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살인자가 일정 단계를 넘어버리면 더 이상 살인자라 불리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살인이라는 시시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수준이 되죠. 당연한 것을 의식하지는 않잖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시시한 연쇄살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건가?

    100명 가까이를 죽인 내가?

    알파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당신을 아직 붙잡고 있는 그 저열한 굴레를 벗겨 드리죠."

    알파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장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손을 내밀이 알파가 주는 것을 받아 들었다.

    "이건?"

    나장호의 손안에서 영롱한 푸른 보석 다섯 개가 보였다.

    "당신을 역사에 길이 남겨줄 선물입니다."

    알파가 비릿하게 웃었다.

    * * *

    "거기서 맨 앞 스킬을 쓰… 그래, 잘하네."

    "아니, 거기서는 뒤로 물러서야……. 그렇죠, 잘 잡으셨네요……."

    이지혁과 최정훈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뭐지, 이 여자?

    이거 뭐지? 게임하는 기곈가?

    처음 시작할 때는 마우스와 키보드에도 적응 못해서 버벅대더니, 단 두 판 만에 눈이 쫓아가지 못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재능인가!

    베라프의 드래곤 로드는 랜선 안에서도 최강이란 말인가!

    "나, 나는……."

    베라프의 진정한 최강자였던 이지혁의 마음속으로 진땀이 흘러내렸다.

    "흐음……."

    깔끔하게 트리플 킬을 달성한 아펠드리체가 어깨를 으쓱했다.

    "복잡해 보이기는 하지만, 딱히 어려울 것은 없네요. 이동과 공격, 회피. 세 가지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 세 가지가 어려운 거지!

    이건 무슨, 서울대 간 놈이 교과서 위주로 예습과 복습만 철저히 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걔들이야 뒷구멍으로는 과외라도 받겠지.

    그런데 이 여자는 지금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잖아!

    빌어먹으으으을!

    석 달 동안 하위 3%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이지혁의 울분이 얼굴로 올라왔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

    "열이 오르는데……. 음, 감기?"

    "그냥 너만 꺼져 주면 싹 나을 것 같은데."

    "이상한 농담이네요."

    농담 아니라고! 진심이라고!

    쓰잘데기없을 때는 작두 타던 년이 왜 이럴 때는 마음을 못 읽는 거냐고!

    하, 진짜 꺼졌으면 좋겠다! 진짜!

    이지혁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모니터에서는 그야말로 무쌍난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캐릭터가 흘리는 피가 너무나 리얼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이거, MMORPG가 아니라 AOS인데?

    적 캐릭터가 왜 잡몹처럼 보이는가.

    챗 창은 난리가 나 있었다.

    - 아니! 저거 헬퍼 아냐? 적당히 해야지! 어떻게 이걸 다 피하냐고!

    - 부캐인 듯. 근데 부캐가 왜 여기 있나?

    - 나 아까 내가 왜 죽었는지 모르겠더라.

    - 화도 안 남.

    - 눈이 못 쫓아가.

    '나랑은 반응이 좀 다른 거 같은데.'

    보통 이런 경우에는 욕이 나오지 않나?

    나는 적이 미쳐서 날뛰면 전체 챗으로 욕했는데…….

    쟤들은 왜 다 저런 반응이지?

    "으음……."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아요."

    "읭?"

    "기본적으로 보편타당하게 예상되는 움직임으로 가지 않네요. 오른쪽으로 움직여야 살 수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지 않아요. 미리 예측해 두었던 움직임에서 자꾸 오류가 발생해요. 순차적으로 단계를 짜서 다음 단계로 즉시 수정하고는 있지만, 로스가 발생해요. 확실히 인간이란 예측하기 힘든 존재군요."

    "…그냥 니가 미친 거야."

    "네?"

    그 짧은 시간에 그런 걸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최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면 인간이 아니지!

    프로 게이머도 그건 못하겠다, 이 썩을 도마뱀아!

    하!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지만, 밸런스는 좀 맞아야 할 거 아니냐고!

    원숭이가 인간의 하위 호환이라지만, 적어도 원숭이는 인간보다 나무는 잘 타잖아!

    사람이 드래곤보다 잘하는 게 대체 뭐가 있냐!

    이젠 하다못해 게임까지!

    "으음, 이거 할수록 어렵네요."

    마우스질로 더블 킬 하고 나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뭐가?"

    "알면 알수록 뭔가 적과 아군, 모두의 움직임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왜 저기에 있는 건지, 지금 노리는 게 무엇인지… 혼란이 가득해요. 확실히 인간이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아채기가 힘든 존재들이네요."

    …아무 생각 없는 거지, 뭐.

    딱히 뭔 이유가 있겠어.

    집에서 강아지가 갑자기 미친 듯이 우다다 달리다가 바닥에 몸을 굴린다고 해도 거기에 뭔 의미가 있겠냐.

    지 나름으로는 뭔가 하려고 한다 쳐도 사람이 보면 뻘짓인데.

    지금 저 여자가 같이 게임하는 인간들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겠지?

    이지혁은 미니 맵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을 보며 애도했다.

    만약 자신이 저런 취급을 받는다면 굴욕감에 모니터를 부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확실히 행동의 일관성이 없네요. 동일한 상황에서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이것이 카오스인가요?"

    뭔 게임에서 카오스까지 나와!

    얘도 가만 보면 좀 나사가 많이 빠졌어.

    "언제까지 할 건데?"

    "연구 중이에요."

    "그러니까, 그 연구 언제까지 할 거냐고."

    "학구열에 불타는 사람은 막는 게 아니에요."

    "…그거 내 자리거든?"

    "네."

    '네'가 아니잖아, '네'가!

    "비키라고!"

    "다… 다 끝나가요."

    "알았으니까 비키라고!"

    "다 끝나간다니까요! 조금만 더 하면 돼요! 다 이겼다니까요!"

    어, 뭐지?

    데자뷰인가?

    이런 케이스를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착각인가?

    "전선 뽑아버리기 전에……."

    어? 뭐지, 자꾸?

    기분이 이상한데, 이거!

    "아! 다됐다니까요!"

    …하지 마.

    나 왠지 지금 매우 우울해졌어.

    하, 우리 엄마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이지혁은 서글픈 얼굴이 되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펠드리체는 손을 벼락처럼 움직이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여자, 뭐하는 거래?"

    정해민의 말에 서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서인지 멘탈이 터져서 축 늘어진 이지혁과 차분한 눈과는 대조적으로 초스피드로 손을 움직이고 있는 아펠드리체를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바보가 둘이나 있어.'

    하나도 아니라…….

    어휴.

    * * *

    "게이트 출현?

    이토 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게이트가 출현했다는 것이야 흔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굳이 자신을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그녀더러 게이트를 막으라고?

    설마.

    능력자인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전투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게이트를 막으러 가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멀찍이 떨어져 개인화기나 난사해 주는 정도뿐일 것이다.

    그 정도는 지나가는 아줌마를 데려다가도 할 수 있는 일이니, 굳이 사나를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우선 이걸 보게."

    사나의 눈에 모니터 안에서 재생되고 있는 CCTV 화면이 보였다.

    사람 몸 크기만 한 작은 게이트가 보인다.

    "저게 문제라는 건가요?"

    어째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빠르게 재생되는 화면만이 보일 뿐이다.

    "으음?"

    순간, 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화면 속의 게이트가 점점 커지고 있다.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하게.

    "지금 커지고 있는 건가요?"

    "그래."

    사나가 입을 쩌억 벌렸다.

    게이트가 커진다고?

    그럼 저 게이트가 몇 레벨인지는 어떻게 판독해야 하는가.

    "지, 지금은 얼마나 커졌죠?"

    사내는 말없이 리모컨을 눌렀다.

    모니터의 화면이 실시간 화면으로 전환되자 사나의 눈에 화면 전체를 뒤덮을 것 같아 보이는 거대 게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몇 레벨?"

    "지금까지는 아슬아슬하게 레벨 5에 걸쳐 있지만, 이 속도대로라면 오늘 저녁에 맞춰서 아마도 레벨 6을 돌파하게 될 거다."

    "레벨 6……."

    사나의 목소리에서 혼이 빠져나갔다.

    레벨 6이라니!

    일본은 아직 레벨 5 게이트조차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레벨 6이라고?

    지난번 레벨 5 게이트의 대량 출현 사태에서도 일본은 다행히 타깃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는데, 레벨 5도 아니고, 레벨 6이라고?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얼마나 더 커질지 모르는 이 게이트를 막아낼 수 있는가에 일본의 운명이 걸려 있네."

    "그렇겠죠."

    그건 세 살짜리도 알겠다.

    저 게이트를 막아낼 계획이 뭔지를 말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빤한 이야기 말고!

    "타국의 지원은요?"

    "일단은 지원이 약속되기는 했다."

    "일단은?"

    사내의 낮은 한숨이 '일단은'이라는 말 뒤에 숨겨져 있는 뜻을 짐작하게 만들어주었다.

    "안 오겠네요."

    "표면적으로 본다면 자기들의 게이트도 언제 확장되기 시작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지원하기가 쉽지 않겠지."

    "속내는요?"

    "망하면 좋다는 거지. 나 같아도 그럴 테니까."

    적당히 난리가 나서 국토가 박살 날 시점에 도와준답시고 난입해서 일본을 속국 비스무리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사회 기간 시설이 파괴되고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 경제에 영향이 크겠지만, 그래도 한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을 때 얻는 이득은 그 이상일 테니까.

    "그래서 결론은 뭔가요? 우리 힘만으로 막아야 한다, 그걸 설명하러 부르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네."

    "그게 뭐죠?"

    사내는 씨익 웃었다.

    "한국에 다녀와야겠네."

    "설마?"

    "그래."

    "…이지혁 씨를 끌고 오라는 것은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 바로 그건데."

    아니, 이 인간은 보고도 못 받았나?

    그 인간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실시간으로 보고가 올라오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그 인간을 데려오라고?

    "진짜 일본 침몰이라도 보고 싶은 모양이신가 보네요."

    "자네가 이지혁을 데리고 오는 데 실패한다면 정말 일본 침몰이 뭔지 알게 될 걸세."

    "아니……."

    "이토 사나."

    "하!"

    사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 내가 하는 건 설득이나 토론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가?"

    "예!"

    "가서 이지혁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그러지 못한다면 굳이 본국으로 돌아올 필요도 없다. 거기서 일본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테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사내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희망은 있다. 기타무라 렌의 보고에 따르면, 렌 역시 NDF에 꽤나 녹아든 것 같더군. 게다가 이지혁과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사실을 잘 이용해 보도록."

    "하!"

    경례를 붙이고 나서 뒤로 돌아선 이토 사나의 표정이 더없이 단호했다.

    그런데…….

    기타무라 렌이라고 했나?

    * * *

    "…오식이 왔니?"

    기타무라 렌은 자신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오식이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건물 옆에 쌓여 있는 사료 더미에서 한 포대를 꺼내 열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놓인 거대한 세숫대야에 사료를 붓자 오식이가 까드득까드득, 사료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라."

    기타무라 렌.

    일본 굴지의 치료사이자 국가를 대표하여 한국으로 파견된 엘리트 중의 엘리트.

    그는 지금 개밥 당번이 되어 있었다.

    "…많이 먹어."

    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부터 그가 이렇게 찬밥 신세였던 것은 아니다.

    그가 없었다면 아무리 NDF들이라고 해도 그 무시무시한 게이트 안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그 무시무시한 게이트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뭔가 좀 과도하게 강해졌고, 덕분에 곳곳에서 출현하는 게이트들을 상처 하나 없이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처음에는 기타무라 렌도 그 상황을 반겼다. 할 일이 줄어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이 없어도 너무 없어졌다.

    사람들이 다치지 않자 그는 순식간에 찬밥이 되었고, 눈총을 받기 시작했다.

    파견직이니 놀아도 될 만도 하지만,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워온 유대감이 그가 노는 꼴을 결코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배 아픔으로 발전했다.

    '망할 놈들.'

    그러다 보니 온갖 잡무가 기타무라 렌에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이런 기밀 정보를 자기한테 줘도 되나 싶은 문서도 귀찮아 죽겠다는 서아영의 의지 아래 렌에게 날아들었다.

    "하, 내 처지가……."

    "아주 난리도 아니군."

    "으응?"

    기타무라 렌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이토 사나가 서 있었다.

    * * *

    "무슨 일이지? 지령은 폰으로 내리면 될 일인데 말이야."

    "당신, 대체 뭐하고 있는 거죠?"

    "보다시피."

    기타무라 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대일본 제국의 유일한 치료사예요. 그런 고급 인력이……."

    "그런 고급 인력을 이런 데다 처박아놓은 게 누군데!"

    설마 이런 대접 받고 있을 줄 알았나.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줄 알았지.

    "관두자."

    렌은 화를 내려다 그만두었다.

    따져 보면 그녀에게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국가가 그에게 딱히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 역시 타당한 작전이라 생각하고 동의한 것이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는 이레귤러가 이레귤러 수준이 아니라 룰 브레이커였다는 것이다.

    이지혁만 아니었다면 이리 꼬일 일이 없었을 테니, 원망하려면 이지혁을 원망하는 게 맞았다.

    "복귀 명령이라도 나왔나?"

    "복귀가 아니에요. 그전에 먼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

    "이지혁이란 사람… 어떤 사람이죠?"

    렌이 한숨을 푹 쉬었다.

    "보고서만 봐도 알지 않나?"

    "당신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듣고 싶은 거죠. 걸러진 텍스트가 아니라."

    "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설명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있는 반면, 때로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되는 사람이 있다.

    그를 뭐라고 설명해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자석?"

    "네?"

    "자석 같은 인간이지, 주변으로 사건을 끌어모으는."

    "으음……."

    뭔가 알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하다.

    "그래서 그 이지혁 씨가 우리 쪽에 협조를 할 가능성이 있나요?"

    "그건 무슨 소리야? 본토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러니까……."

    사나의 설명을 모두 들은 렌이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어렵나요?"

    "…무리다."

    "네?"

    "이지혁은 어떤 방법으로도 공략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돈도 필요 없고, 명예도 필요하지 않아. 외교를 통해서 상부를 압박한다 해도 그 상부가 이지혁을 압박하려 드는 순간 박살이 날 거다. 건드리면 되레 터지는 폭탄 같은 인간이지. 상부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일본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사람이다."

    "그, 그럼 답이 없다는 말이잖아요."

    사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답은 언제나 있지!"

    "네?"

    "폭탄은 폭탄 처리반에게 맡겨야지."

    "…뭔 소리예요?"

    기타무라 렌이 씨익 웃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지혁을 꼬드길 수 있는 인간이 있다. 그것도 능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인 주제에 말이야."

    "아!"

    "우린 최정훈을 공략한다!"

    긴 시간을 뛰어넘어 마침내 그의 능력이 발휘될 시간이 돌아오고 있었다.

    * * *

    미국 LA.

    "아무리 봐도 말이야……."

    "네."

    "저 빌어 처먹을 게이트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눈이 틀린 건가?"

    "물론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죠. 저와 같이 안과에 가보시면 되겠군요."

    크리스토퍼는 지끈대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안과가 아니라 정신과부터 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러다가 어느 날 내가 내 넥타이로 목을 졸라 자살해 버릴지도 모르겠거든."

    농담이 아니라 말이야.

    저 게이트란 것들이 안정되고 매뉴얼이 확립되어서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어졌는데, 최근 몇 달 사이에 세상이 다시 급변하고 있었다.

    열리자 마자 몬스터를 뿜어내는 게이트가 나오질 않나, 레벨 5 게이트가 온 동네에 열리지를 않나!

    이제는 점점 커지는 게이트까지 나오고 있었다.

    "아주 골고루 처열리는군.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도 아주 가지가지야."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게이트에 대처하는 방법이야 빤한 거 아닌가. 군에 협조 요청하고 이쪽으로 화력집중해. 그리고 능력자 놈들도 모조리 끌어모으라고."

    "저번처럼 말입니까?"

    "그래, 저번처럼."

    그래도 저번에는 거대 게이트에서 사람이 나와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행…일까?

    '미친 일이지.'

    게이트 너머에 지적 생명체가 있다.

    일단 최대한 정보를 틀어막고는 있지만, 본 눈이 워낙에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게이트 너머에 지적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 퍼져 나갈 것이다.

    '안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영 칙칙한데 말이야.'

    전 세계적으로 능력자와 일반인 사이의 대립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북반구의 국가들에서는 충돌의 수준이지만, 정부의 통제력이 약한 곳에서는 이미 국가 체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에 대항하느라 자기들끼리 싸울 여력이 없던 이들이 게이트 사태가 안정화되자 서로에게 이를 드러냈다.

    그런 상황에서 게이트가 다시 불안정해지고 있다.

    그럼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뭉칠까?

    아니면 와해에 가속도가 붙을 것인가.

    어떤 식이든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걸 크리스토퍼도 잘 알고 있었다.

    '더없이 중요하지만, 손을 댈 수가 없다. 어설프게 손댔다가는 시대의 역적이 되어버리겠지.'

    이 시대를 기억할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야.

    "타국의 상황을 알아봐. 일본뿐 아니라 우리도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더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냄새가 난다.

    뭔가 인위적인 손길이 닿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이 주변 CCTV 다 가져와."

    * * *

    "네?"

    최정훈은 눈앞에 놓인 커다란 선물 상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토 사나 씨?"

    "네, 최정훈 씨."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이 선물을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 기타무라 렌을 바라보았다.

    '친하시니 말 좀 해보세요.'

    '저는 저 양반이랑 안 친한데요?'

    그 미묘한 눈빛을 교환한 뒤에 사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최정훈 씨."

    "네."

    "까놓고 말해서 저희 정부는 최정훈 씨를 대한민국 막후의 실력자라 파악하고 있습니다."

    "매우 당황스런 말씀이시군요."

    "현재 대한민국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방위사와 NDF의 실질적 실력자들이 다들 최정훈 씨에게만큼은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흐음……."

    최정훈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감출 수 없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얼마나 서러운 세월이었던가.

    행정고시를 깔끔하게 수석으로 통과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관료로 성장하겠다는 야망을 가졌건만!

    기재부로 배정되어 능력을 인정받고 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절도 있었는데!

    얼토당토않게 KSF로 배정이 나서 나이 어린 상관을 모시고 개고생을 하질 않나, 그 생활이 조금 편해진다 싶었더니 하늘에서 재앙이 떨어졌다.

    '그때 내가 지각만 안 했어도…….'

    그럼 이지혁이랑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최정훈은 갑자기 눈가로 차오르는 습기를 훔치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앞에서는 다른 이들이 얼굴을 들이밀지 모르겠지만, 그들 모두가 최정훈 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따져 보면 최정훈 씨는 지금 대한민국의 중심입니다."

    "하하하, 정말 듣기 힘들군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최정훈의 입이 귀까지 찢어질 듯한 기세로 벌어졌다.

    원래 그가 이렇게 칭찬에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한 몇 달을 욕만 처먹다 보니…….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최정훈은 가만히 이토 사나를 바라보았다.

    띄워주는 것은 띄워주는 것이고, 외국의 관료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장난으로 받을 일이 아니었다.

    "저희에게 한 가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도움이라……."

    최정훈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인 최정훈이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그럴 능력이 될지 모르겠네요."

    자세는 뭔 블랙 머천트 급인데?

    말만 잘하면 F-15도 구해줄 기세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사안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최정훈이 슬그머니 선물 상자를 잡아 당겨서는 뚜껑을 천천히 들었다.

    뭐가 들었을까?

    쿵짜라짜짝~

    인삼?

    아니면…….

    어쩌면 고급 와인이나 양주가 들었을지도 모른…….

    살짝 열린 뚜껑 안을 들여다본 최정훈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거 뭡니까?"

    커다란 상자 안에 달러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본 최정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뚜껑을 덮었다.

    이 정도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그렇다면 부탁하겠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라는 건데?

    기타무라 렌이 가만히 최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내지 않으십니까?"

    "네? 화요?"

    "보통은 나를 뭘로 보고 뇌물을 가져왔냐고 할 타이밍 아닙니까? 의례히 그러던데."

    "전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건 나쁠 게 없는 거고, 제가 못해서 받지 못할 일이라면 그냥 가지고 가지 않으면 될 일인데, 괜히 청렴한 척 실랑이 벌인다고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죠. 다만……."

    최정훈이 다리를 꼬며 허리를 폈다.

    "본론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시간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이토 사나는 새삼스런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상자를 닫은 그 순간부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전까지야 이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냐 싶은 심정이었는데, 지금은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든다.

    딱히 위압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사람이 최정훈…….'

    가끔씩 듣던 이름이지만, 설마 이런 사람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래서 보고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타무라 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이토 사나가 최정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젠틀하게 올린 리젠트와 선 굵은 얼굴.

    미남인데 센스도 좋다.

    그런 남자가 이리 막후 실력자의 포스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뭔가 가슴에서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중요 인물이었어.'

    본국에서도 반드시 알아야 할 주요 인물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라면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네."

    "일본 게이트 사태에 이지혁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지고 가!"

    최정훈이 1초의 딜레이도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기타무라 렌에게 집어 던졌다.

    "헐……."

    "이것들이 미쳤나! 안 그래도 요즘 속 시끄러워 죽겠는데, 누굴 뭐 어쩐다고? 외교관만 아니면 진짜 내가!"

    "지, 진정하세요!"

    "진정? 진정?"

    최정훈이 눈을 희번덕대면서 렌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나는 그래도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했다!"

    "…저, 저도……."

    "친구가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있지? 차라리 내가 보증을 서달라면 서줬어."

    왈칵.

    보증까지 서준다니, 이 얼마나 좋은 남자란…….

    아, 이게 아니지.

    "내가 어떻게 당하고 사는지 빤히 보면서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

    그러니 내가 말 안 했지.

    쟤 시켰지.

    "어려운 부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 몰라. 꺼져. 난 할 말 없어!"

    "이대로라면 일본은 무너집니다. 일본을 무너뜨린 몬스터가 어디로 향할지는 빤하지 않습니까."

    "으음……."

    최정훈이 기타무라 렌의 멱살을 풀고는 자리에 앉아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끄응……."

    "부탁드립니다."

    "먼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이거, 정부 공식 입장입니까? 일본 정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거냐구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그만큼 절박합니다."

    "아니, 뭐, 어차피 정부 공식 입장이라고 해도 콧방귀도 안 뀔 사람이니 그런 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최정훈이 고개를 까딱까딱 했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넘어가 엮이지 않고 싶지만,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본이 무너지면 한국도 무사히 끝나지는 못할 것이다.

    어차피 손을 뗄 수가 없다면…….

    "이 상자는 일단 받겠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이건 뭐, 그냥 심부름 값도 안 되겠네요."

    "…네?"

    "문서부터 작성하시죠."

    "네?"

    최정훈의 눈이 빛났다.

    아주 영혼까지 털어 먹어주마.

    너희, 사람 잘못 봤어.

    * * *

    "다 했냐?"

    이지혁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 판만요."

    "…그 말만 지금 여섯 번짼데?"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의 극치를 체험하게 해준다고 한 사람은 지혁 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너어∼무 체험하는 거 아닌가?

    너 혹시 체험이 뭔 뜻인지는 알고 있니?

    번역기에 오류가 났나?

    그건 체험의 수준을 이미 한참 넘은 거 같은데?

    뭔 놈의 체험을 하루 종일 하냐!

    그리고 농가 체험을 가도 잡초나 뽑고 벼나 베어봐야 농가 체험이지, 밭뙈기에 트랙터 몰고 들어가면 그건 이미 농가 체험이 아닌 거지! 이 도마뱀아!

    "몇 판째인지는 아냐?"

    "27판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직 이해가 덜 갔어요."

    "그게 모두 이해가 갈 때면 이미 체험이 아니지 않을까?"

    "이 판만요."

    음, 그래. 이젠 일곱 번째구나.

    사무실에서 엄청난 실랑이 끝에 퇴근을 할 수 있었지만, 퇴근하자마자 이지혁의 컴퓨터를 익숙하게 부팅시키고 게임을 켜는 아펠드리체를 보고 이지혁은 자신의 행복한 게임 라이프가 끝나감을 느꼈다.

    "…밥이라도 처먹고 해라."

    "이 판만요."

    "넌 할 줄 아는 말이 그거밖에 없냐?"

    "다 끝났어요."

    엄마…….

    엄마, 미안해.

    내가 나쁜 놈이었어. 용케도 날 아직 살려뒀구나.

    이게 어머니의 사랑인가!

    강렬한 살의를 느끼며 이지혁은 미친 듯 움직이는 마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종료시켜 버려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카앙!

    그 순간, 이지혁의 오른손이 쇳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아악!"

    비명을 지른 이지혁이 붉게 달아오른 손을 보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도마뱀아! 지금 너 뭐했냐! 와! 이 도마뱀 보소! 그 손 막겠다고 앱솔루트 배리어를 쳐? 마왕이라도 나타났냐!"

    절대방어라니!

    마나가 썩어 나나!

    아니, 마나가 문제가 아니지!

    내가 무슨 브레스라도 뿜었나!

    손 하나 막겠다고 절대방어를 치다니, 정신 나갔나 진짜!

    "마왕 맞잖아요."

    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

    아니, 마왕보다 좀 더하긴 하지.

    그런데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

    "손모가지 잘라 버리기 전에 그만하지?"

    "다 끝났다고요!"

    "어디다 되레 소리를 쳐!"

    "진짜 다 이겼다니까요!"

    "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아펠드리체에 대한 강렬한 빡침이 뒤섞여 뒷목을 타고 올랐다.

    "쟤는 왜 계속 게임만 한대? 그것도 지혁이 방에서?"

    "그러게요."

    "씻지도 않고… 더러워."

    "그러게요."

    "넌 그러게요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니?"

    "그런가 봐요."

    "이게 진짜!"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빼액! 질렀다.

    "너흰 왜 남의 집에 와서 죽치고 있냐! 집에 가라고!"

    "왜 쟤는 죽쳐도 되고, 우린 안 되는데?"

    "그러게요. 불합리해요."

    이지혁이 만담을 나누는 둘을 보며 얼굴을 감쌌다.

    얘들은 언제부터 저렇게 콤비가 되어서 쌍으로 사람을 괴롭힌다는 말인가.

    이것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나대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이지혁은 책임을 통감했다.

    요즘 너무 풀어줬다. 지금이라도 좀 더 강력한 철권통치를!

    "제발 나도 퇴근하면 좀 쉬자."

    "출근했다고 일을 하는 거 같지는 않던데?"

    "넌!"

    이지혁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갔다.

    "너는! 너는 일 안 하냐? 아이돌이라더니, 행사도 안 뛰냐! 가서 일을 해라, 일을! 발악하고 일을 해도 아이돌로 먹고살 날이 얼마 안 남아 보이는구만, 뭘 믿고 여기서 죽치고 있는 거냐고!"

    정해민이 시무룩해서 고개를 숙였다.

    "…이제 행사도 잘 없어."

    "끝났네."

    "아니거든! 이번에 사람들이 능력자들한테 화가 나 있어서 그런 거거든! 이 사태만 해결 되면 금방 원래대로 복귀할 거거든!"

    "그사이에 다른 애들이 치고 올라오겠지."

    "능력자 아이돌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단 말이야!"

    "그럼 다른 젊은 능력자 아이돌이 치고 올라오겠지."

    "그, 그럴지도……."

    "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이리 쉽게 인정해? 너 사실 속으로는 니가 늙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나 동안이거든!"

    "너 턱에 주름살 생겼다."

    "아니야아아아!"

    비명을 지르면서 거울을 꺼내 확인하는 정해민을 보고 있자니 왠지 서글퍼진다.

    '내가 저런 것들이랑 놀고 있다니.'

    이곳은 대체 뭐하는 곳인가.

    멸망의 좌가 노땅 아이돌과 말싸움을 하고, 드래곤 로드가 게임을 하고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카오스인가.

    이지혁은 서글픔이 밀려와 눈가를 훔쳤다.

    아니, 그거야 그렇다 치자.

    저 도마뱀 년은 대체 뭐하는 인간… 아니, 뭐하는 드래곤이기에 저리 컴퓨터를 붙들고 사느냔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을 알려주는 게 아닌데.

    "엄마, 쟤 좀 어떻게 해봐요!"

    이지혁이 결국 박선덕에게 헬프를 청했다.

    "음, 그래. 좀 그렇구나."

    역시!

    믿을 건 엄마밖에 없다!

    박선덕이 주방으로 가더니 과일을 깎아 나왔다.

    "헐?"

    이지혁을 무시하고 아펠드리체에게 다가간 박선덕이 게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책상 한쪽 구석에 과일을 내려놓았다.

    "드셔가며 하세요."

    "감사합니다."

    이지혁이 진한 배신감에 무너져 내렸다.

    "엄마! 엄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보고는 게임하면 손모가지를 잘라 버린다고 했잖아! 모니터도 부숴 버린다고 했고!"

    박선덕이 뚱하게 대답했다.

    "그건 너니까."

    "쟤랑 나랑 뭐가 다른데!"

    "…얼굴?"

    아…….

    다르기야 많이 다르지…….

    응, 뭐… 좀 다르지. 그래, 다르긴 한데…….

    "게임은 얼굴 이쁜 사람만 해야 하는 건가! 응? 잘생긴 사람이 게임하면 실력이 더 좋아지기라도 한대? 이게 말이나 되냐고!"

    박선덕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혁아."

    "응?"

    "잘 보렴."

    박선덕이 아펠드리체를 가리켰다.

    이지혁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아펠드리체를 보았다.

    "왜?"

    "어떻니?"

    "어떻냐니……. 뭔 소리야, 엄마?"

    "예쁘지?"

    그야 뭐…….

    예쁘기야 하지.

    근데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잘 들으렴, 지혁아. 세상은 공평하지 않단다."

    "응?"

    "쟤는 게임만 해도 돼. 아니, 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아도 된다. 거지가 돼도 지폐가 동냥 그릇이 우그러지도록 쌓일 거고, 정 귀찮으면 길거리 나가서 한 번 웃어주기만 해도 3년 치 점심식사권을 확보할 수 있단다."

    "……."

    "그런데 너는 아니야."

    어, 엄마!

    "너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 먹고살려면 열심히 해야 돼!"

    틀린 말은 아니다.

    납득은 간다.

    그런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걸까?

    "엄마, 왜 날 오징어로 낳았어?"

    "나는 너를 포유류로 낳았다. 중간에 연체동물로 종 전환을 한 것은 내 책임이 아니란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지."

    "아니, 엄마… 그럴 땐 오징어가 아니라고 해줘야지."

    "미안하구나. 엄마가 거짓말은 잘 못하잖니."

    주르륵.

    이지혁의 눈에서 마음의 땀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괜찮아, 아들. 오징어라도 좋다고 해주는 사람이 있잖니."

    "엄마?"

    "으응? 난 아니고."

    그렇게 단호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떨떠름한 박선덕의 표정을 보니 서글픔이 밀려온다.

    엄마, 그래도 내가 자식인데…….

    "여하튼 그러니 너는 게임할 생각 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려무나."

    "눼."

    이지혁은 침몰하여 구석으로 처박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해민과 김다솜, 박선덕, 이예원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 집인데……."

    남은 놀고 이지혁은 구박 받고, 방이랑 컴퓨터는 빼앗기고.

    베라프의 멸망의 좌는 죽었노라.

    "하……."

    이지혁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껑.

    이지혁을 발견한 오식이가 꼬리를 마구 흔들며 달려들었다.

    "그래, 너밖에 없다."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서 그 개고생을 했건만, 이곳에서 자신을 가장 반겨주는 것이 이 몬스터라니.

    "하, 인생……."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 법이다.

    이지혁은 구석에서 사료 포대를 꺼내서 오식이에게 밀어주었다. 오식이는 귀를 쫑긋거리더니 알아서 사료 포대를 뜯고는 사료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나이가 들면 챙길 게 개밖에 없다더니."

    이러다가 나 이사 갈 때 오식이라도 안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완전 버림받을 기센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지혁이 허공을 향해 물었다.

    스슷.

    그러자 허공이 일렁이더니 도가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넌 왜 안 들어와?"

    "……."

    "집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끄덕.

    이지혁이 도가윤의 반응에 혀를 찼다.

    얘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지?

    "들어와도 되겠다 싶으면 알아서 들어와서 놀아. 밤이슬 찬데 밖에서 그러지 말고. 글고 너희 상관들은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냐? 이제 와서 나를 감시하는 게 뭔 의미가 있다고 애를 자꾸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네."

    "고생 아님."

    "그래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어차피 얘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 바보들하고 어울리지 마라. 바보 옮는다."

    서아영도 충분히 바보지만 말이지.

    도가윤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움찔하다가 입을 닫았다.

    이지혁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이지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야, 이리 와봐."

    "……?"

    "오라고."

    손짓을 하자 도가윤이 조금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천천히 이지혁에게로 다가갔다.

    이지혁이 도가윤의 팔을 잡아 들더니 옷을 위로 쭉 밀었다.

    훤히 드러난 맨살에 선명하게 긴 흉터가 박혀 있었다.

    "하……."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저번에 그 치료사 놈한테 치료 받으라고 하지 않았었나?"

    "…불가능."

    "그 쓸모도 없는 인간이!"

    이지혁이 도가윤의 팔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이지혁이 한 손에 아펠드리체의 뒷목을 잡아 대롱대롱 든 채 밖으로 나왔다.

    "밴 해야 하는데요!"

    "나도 너를 밴 하고 싶은데 참고 있으니까, 너도 참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그런 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군요. 타인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는 사회성이 필요하다고 제가 말한 것만 이미 3,552회째인데."

    "내가 닥치라고 한 게 몇 번인지는 세어놨냐?"

    "상당히 높은 숫자가 나올 거라는 건 알겠네요."

    "치료해."

    "상처가 없는데요?"

    "흉터."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흉터를 없애 달라는 건가?

    자신이 아는 멸망의 좌가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나?

    베라프에서 멸망의 좌가 어린 여자아이의 흉터를 없애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하면 그것참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배를 잡고 뒹굴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변했나?'

    변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랬던 사람인데 베라프에서는 달리 행동했던 것인지.

    그럼에도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의 안에 이런 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아펠드리체가 우수를 들어 도가윤의 팔에 가져다 댔다.

    우우웅.

    새하얀 빛이 확 뿜어져 나오고, 아펠드리체가 팔을 뗐다.

    "다 됐어요. 이제 게임하러 가도 되죠?"

    "…적당히 해라. 컴퓨터 부숴 버린다, 진짜!"

    "네."

    듣는 둥 마는 둥한 얼굴을 한 채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펠드리체를 보며 이지혁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든 게이트를 열어서 저 망할 도마뱀을 집어 처넣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이지혁이었다.

    "여하튼 들어오든 말든 알아서 해."

    "저……."

    "응?"

    이지혁이 돌아보자 도가윤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싱겁기는."

    이지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도가윤은 그대로 가만히 이지혁이 들어간 현관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상처가 사라진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꺼엉.

    어느새 발밑으로 다가와 비벼 대는 오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도가윤의 눈은 현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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