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2화 (22/118)
  • [■] 니가 왜 여기 있어? [■]

    ─────

    "왜 이리 으슬으슬하지?"

    이지혁은 불현듯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추워?"

    정해민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상하게 한기가 드는데."

    "날이 좀 추워지기는 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닐 텐데. 혹시 몸살이라도 걸린 거 아냐?"

    "으응?"

    몸살?

    감기를 말하는 건가?

    그런 게 이지혁에게 걸릴 리가 있…….

    아, 있구나, 있네.

    이제는 몸이 고정되어 있지가 않으니까.

    하, 이거…….

    절대 고정이 편하긴 했구나. 감기도 안 걸리고, 늙지도 않고.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능력잔데, 감기라니!"

    "보통은 잘 안 걸리지만, 몸이 많이 안 좋으면 걸리기도 하더라. 요즘 무리한 거 아냐?"

    무리?

    음, 무리라…….

    그래도 양심이 쥐꼬리만큼은 남아 있어서 무리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게 없는데!

    뭘 했다고 내가 무리를 했다는 건가! 얘도 정신이 나갔나?

    "일찍 퇴근해야겠어."

    최정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점심도 안 먹었습니다!"

    "몸이 안 좋다니까."

    "차라리 코끼리가 연약하다는 말을 믿지!"

    코끼리… 연약하지 않나?

    톡, 치면 피 토할 텐데?

    "그리고 점심 메뉴 좀 어떻게 해줘요! 왜 만날 먹던 거만 먹어."

    직장인이 다 똑같지!

    주변에 식당도 없는데, 그럼 뭘 어쩌란 건가! 출장 뷔페라도 불러주리?

    하기야 좀 밀리긴 한다.

    생각하니 좀 그렇다.

    짜장면만 며칠째인가.

    "잘됐다! 오늘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요!"

    "이건 못 처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왜 자꾸 먹는 타령이야!"

    "왜에! 사람이 먹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데."

    "…듣고 보니 그러네."

    하기야 이지혁도 이 세계에 처음 돌아오고 나서는 미친 듯이 먹어 댔으니까.

    아니, 지금도 먹기는 미친 듯이 먹고 있다.

    소처럼 먹어 대고 있는데 살이 잘 안 찌는 것뿐이지.

    "아, 뭐지?"

    이지혁이 어깨를 부여잡고 부르르 떨었다.

    뭐지, 이 불안함은?

    아까부터 뭔가 사람이 자꾸 안절부절못하게 되는데, 이게 뭔 일이지?

    지금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뭔가 공포나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발끝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껄끄러움이 자꾸 몸을 파고든다.

    뭘까, 이건?

    이지혁의 눈이 불안함으로 흔들렸다.

    오랫동안 위기를 함께 헤쳐 나온 그의 육감이 경고를 하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으으음……."

    영 안절부절못하던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 이건 안 되겠다. 집에 갈래."

    "아니이이이! 퇴근을 그렇게 마음대로 정하지 말란 말입니다!"

    전국 구백만의 직장인이 들으면 피를 토할 소리가 아닌가!

    "몸이 안 좋다니까!"

    "진단서를 첨부하시라고요! 저는 상부에 근무표 내면서 뭐라고 말을 합니까!"

    "그럼 자르든가!"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마음대로 자를 수만 있었으면 벌써 잘랐거든!

    니 얼굴 별로 안 보고 싶거든!

    "하……."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요!"

    "밥 먹으러 갑시다, 밥! 시간이나 보고 말해요!"

    "아,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

    최정훈이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합시다."

    시켜 먹을 사람이야 알아서 시켜 먹을 거고, 최정훈이 서아영을 보자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 밖으로 나온 이는 이지혁과 정해민을 포함해 서아영과 최정훈이었다.

    "뭐 먹지?"

    "난 햄버거."

    서아영의 말에 이지혁이 눈을 확 찌푸렸다.

    "뭔 또 버거야! 대낮부터!"

    "…버거는 저녁에 먹어야 하는 건가요?"

    누가 그런 법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대낮에 누가 버거를 먹어! 안 그래?"

    "전 괜찮습니다."

    "나도 좋은데?"

    "……."

    뭐야? 이것들 짰나?

    "야."

    이지혁이 발을 탁, 구르자 그림자에서 머리가 빼꼼 나왔다.

    "너도 버거 괜찮냐?"

    끄덕.

    하, 이것들.

    말이 안 통하네, 말이!

    "그럼 우리 버거 먹으러 가자."

    "어디에?"

    "쉐이크 버거에."

    "…그건 어느 나라 버거냐?"

    "미국."

    "어? 진짜 외국 버거였어?"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냥 처음 듣는 거라 한 말인데…….

    "미국에만 있는 햄버거집은 아니지?"

    "맞는데?"

    "……."

    뭔가 대화가 아귀가 안 맞다.

    이지혁이 한 소리 하려는 순간, 정해민이 반격했다.

    "미국이 뭐 별건가, 가면 그만이지."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얘 텔레포터잖아. 그러고 보면 얘만 데리고 있으면 점심시간에 터키든 중국이든 파리든 다 갈 수 있는 건가?

    쩌는데?

    "너만 있으면 점심시간에 중국 가서 짜장면 먹고 올 수 있는 거였어?"

    "중국에 짜장면 없어, 바보야."

    그게 뭔 소리야?

    중국집에서 파는 건데, 중국에 왜 없어?

    하여간 얘는 왜 이렇게 멍청하지?

    "여하튼 가자, 그럼."

    "응. 손잡아."

    정해민의 손을 잡은 이지혁이 최정훈의 손을 미묘한 얼굴로 살짝 짚었다.

    "…뭡니까, 이 반응은?"

    "남자 손잡고 싶지 않거든요?"

    "나도 싫거든요! 나도!"

    "그럼 이쪽으로 오지 마요. 아, 진짜. 더러워."

    하느님.

    이 새끼 죽빵 한 대만 칠 수 있게 해주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영혼이라도 드립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빈다고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었다.

    "아, 뭐해요!"

    "끙……."

    그 순간이었다.

    덥썩.

    "와, 씨, 와! 아놔!"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이지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와! 너 뭐야!"

    식겁한 이지혁이 놀라 소리쳤다.

    어디선가 나타난 김다솜이 배시시 웃으며 이지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너 여기 왜 있어?"

    "오빠 도시락 가져다 드리러 왔어요."

    "너희 오라비?"

    "네."

    김다현이 도시락을 먹었던가?

    여하튼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왜?"

    "저도 배고파요."

    "너도?"

    "네."

    그래. 뭐, 배고프면 밥 먹어야지. 그런데 왜 여기 끼는 거냐?

    "니 도시락은 없니?"

    "네."

    그럼 니 손에 들린 건 뭔데?

    이지혁이 도시락 통을 슬쩍 보고 고개를 들자 김다솜의 시선은 이미 허공으로 돌아가 있었다.

    뻔뻔한 년.

    "…넌 뭔데?"

    한기가 든다.

    고개를 돌려보자 정해민이 웬만해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시선으로 김다솜을 보고 있었다.

    "네가 뭔데 껴?"

    화, 포스 보소.

    이게 연예인들이 후배 갈굴 때 나온다는 그 어투인가?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장난 아니구나.

    얘도 후배 여럿 화장실로 보냈겠네. 여자는 여자끼리 있을 때랑 남자랑 있을 때 다르다더니.

    "제가 끼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왜?"

    "주문은 어떻게 하시게요?"

    "응?"

    "영어 되세요?"

    "……."

    정해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주문이야 매니저가 하는 거지, 내가 해봤을 리가 있나.

    "영어 되시는 분이 없어 보이는데……."

    그 미묘하게 흐린 말끝에 짜증이 난 정해민이 획 서아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서아영은 뒤통수만을 보여줄 뿐, 절대 정해민과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휙.

    정해민의 고개가 아래로 향하자 도가윤의 머리가 그림자 속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 무식한 것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최정훈 씨 있잖아! 최정훈 씨!"

    정해민이 최정훈을 가리키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이 우민들아.

    21세기에 영어도 못하는 한심한 잡것들.

    이 몸의 능력치를 인정하고 경배하라.

    "토익이 990이라잖아! 당연히 할 줄 알겠지."

    "하하, 당연히……."

    김다솜의 시선이 천천히 최정훈에게로 향했다.

    뭔가 조용한 침묵이 잠시 스쳐 지나가고, 최정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험이랑 회화는 다른 겁니다. 저 영어 안 됩니다."

    "거짓말!

    거짓말이고, 나발이고!

    나도 살아야지! 니가 저 눈빛을 봤어?

    와! 와!

    차라리 이지혁이 노려보는 게 속이 편하겠다.

    어떻게 사람 눈에서 저런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지?

    "그렇게 됐으니 같이 가는 걸로."

    "이……."

    정해민이 이를 살짝 가는 순간,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겠어."

    "응."

    반색한 정해민이 이지혁의 손을 잡고는 확인을 했다.

    "다 잡았지?"

    그림자 속에서 튀어 나온 손이 이지혁의 다리를 잡은 것까지 확인한 정해민이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 * *

    스슷.

    "여기가 미쿡인가?"

    이지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번화가 느낌이 확 나는데?

    한국과는 뭔가 미묘하게 다른 건물들의 생김에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저쪽일 거야."

    정해민이 앞장서서 걸어가자 다른 이들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점심시간에 미국에 와서 버거를 먹는다니.

    캬, 이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텔레포터! 찬양하라! 텔레포터!

    * * *

    "…죽인다?"

    이지혁의 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니, 분명 이쪽 맞았는데."

    김다솜이 머리카락을 꼬며 데헷, 웃었다.

    "아오, 이걸 그냥 아오!"

    이지혁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최정훈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니가 때리면 스쳐도 죽는다!

    "에헤이! 이지혁 씨,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 있어? 그럴 수가 있다고? 이런 젠장, 해 지는 거 안 보여? 당신 눈 없어?"

    있지, 있기야.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면 되나!

    "아니! 버거를 먹여준다더니, 엿을 처먹여? 야! 이게 점심이냐! 점심이야? 저녁이지!"

    "이상하다. 분명 이쪽이었던 거 같은데……."

    이지혁이 눈을 희번덕대며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아저씨는 왜 못 찾는데!"

    "…왜 또 접니까!"

    "뭐든 할 수 있어야 할 거 아냐! 최라에몽! 네비게이션은 폼이야?"

    "…네비 찍으니까 거기가 어딘지야 나오죠."

    "그런데?"

    "우리가 어딘지를 모르겠어요."

    "아……."

    최정훈이 마음의 땀을 흘렸다.

    길치라니! 내가 길치라니!

    내게 이런 약점이 있었을 줄이야!

    최정훈이 좌절하는 동안 김다솜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쓸모가 없네요."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아, 죄송해요. 혼잣말이었는데… 들렸나 보죠?"

    "하? 얘 봐?"

    이지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니들이 처싸울 때야? 그냥 집에 가자! 짜장면이라도 먹게."

    "조금만 더 하면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말이 세 시간째거든? 바늘 어딨냐? 바늘! 저 조동아리를 꿰매 버려야 해!"

    그때였다.

    허기와 아픈 다리에 지쳐 축 늘어져 있던 그들에게 일련의 무리들이 우르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것이, 뭔가 위협적인 분이를 팍팍 풍겼다.

    "뭐야?"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정훈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왜 저래요? 우리 뭐 죄졌어요?"

    "죄는 죄죠."

    "뭐? 밥 못 먹고 헤맨 거도 죈가!"

    "불법 입국이니까요. 밀입국."

    "응?"

    "비자가 없잖습니까."

    "뭐야? 그럼 저번에 돌아다닌 것도 다 범죄란 거야? 이 여자, 큰일 날 여자네?"

    "니가 가자고 했잖아!"

    "시끄러워."

    정해민의 반항을 무시한 이지혁이 그들에게 몰려오는 검은 무리들을 보며 살짝 고민에 빠졌다.

    그냥 지금이라도 날려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지만 아직 뭔가 위협적인 행동이 들어온 건 아니니까…….

    '일단 말만 들어볼까?'

    수틀리면 째지 뭐.

    "아아, 외교 문제가……."

    남은 건 저 양반이 해결할 테니까.

    그들을 우르르 둘러싼 검은 양복들 중에 하나가 이지혁에게로 걸어오더니 물었다.

    "이지혁 씨죠?"

    "헤, 헬로? 파인 땡큐, 웬 유?"

    "……."

    최정훈이 얼굴을 감쌌다.

    심지어 저거마저 틀렸어.

    "한국어로 하셔도 됩니다."

    "아, 오케이. 와, 왓?"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검은 양복은 미묘한 시선으로 이지혁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응?

    나를?

    왓 더…….

    * * *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싫은데?"

    "…네?"

    "싫은데?"

    너무도 당연하다는 그 태도에 사내는 이지혁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약간 말라 보이는 몸에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단련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듯한 그 몸을 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거기다 얼굴은 또 어떤가.

    동양에서는 얼굴에 인격이 드러난다고 했다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저 인간의 인격이 어떤지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사내는 스마트폰을 꺼내 어플을 열었다.

    가장 위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이지혁이라는 인물의 자료가 보인다.

    꾹.

    가볍게 누르자 이지혁에 대한 신상 명세와 대처 요령이 나온다.

    이지혁.

    음, 그러니까… 특 S급 위험인물.

    뭐라고 막 쓰여져 있는 것들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아래에 있는 '취급 주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인물과 마찰을 일으키는 자는 코로 버거를 먹는 이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사내는 조용히 폰을 끄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당당히 말했다.

    "헤헤, 그러지 마시고……."

    "뭐야? 갑자기 왜 비굴해!"

    그럼 니가 코로 버거 먹어보든가!

    국장 놈이 처먹는 버거 크기를 봐야 그 말이 안 나오지.

    "꼭 가셔야 합니다. 아니면 제가 죽습니다."

    "그건 니 사정이고."

    "아, 좀요!"

    "너, 한글 패치 왜 이리 잘됐어? 버전 쩐다?"

    "헤헤, 제가 좀……."

    일본 놈들도 이걸 좀 배워야 하는데!

    역시 선진국의 기술력 패치 클라스!

    "그러니 잠시만 같이 가주신다면."

    "싫은데?"

    …얜, 뭐 여지도 없냐.

    이지혁의 눈치를 가만히 살피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좀 해보는 게 좋을 텐데?'

    "음……."

    그 눈빛을 받은 최정훈이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자면 밀입국을 한 처지인데다 그는 NDF의 요원이다. 입장 바꿔 해외의 능력자가 밀입국을 했다가 걸렸다면 그는 가만히 있을 것인가.

    천만에.

    일단 박살을 내고 생포한 다음에 인질 삼아 본국에다가 엄청난 외교문서들을 실시간으로 날려 대겠지.

    한국이 그 꼴을 당한다면?

    멀쩡히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윗대가리들이 그의 목을 잘라서 축구를 하고 싶어 하겠지.

    부르르.

    그런 꼴은 당하고 싶지 않아.

    "이지혁 씨?"

    "아, 왜!"

    "한 번 가보시는 게……."

    "이 아저씨, 또 나 팔아먹네! 당신 정말 내 편 맞아?"

    아닌데요?

    내가 왜 당신 편인데! 처음부터 그런 적 한 번도 없었거든?

    사람 마음대로 한편 만들지 마시죠!

    "넌 그리고 왜 내가 아니고 저쪽에다 협박하는데?"

    "죄, 죄송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최정훈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지혁 씨!"

    "야!"

    "쓰읍."

    정해민이 묘한 표정으로 셋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 뭐하는 거지? 트라이앵글 대형인가?

    "아, 씨!"

    이지혁이 쳇바퀴 돌 듯 도는 상황에서 탈출을 선언했다.

    "야!"

    이지혁의 눈길에 사내는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가 오라 그래. 왜 나보고 오라는 건데?"

    그거,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꼭 데리고 갈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확보하라 했으니까?

    "그, 그럼 여기 좀 계시겠습니까?"

    "아니, 너 말이야……."

    "네?"

    이지혁이 정해민을 보며 뭔가 쑥덕쑥덕대더니 입을 열었다.

    "쉐이크 버거가 어딨는 줄 아냐?"

    "…예?"

    * * *

    눈물이 차오른다.

    이 버거가 뭐라고…….

    다섯 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먹어야 하는 것인가!

    이지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버거 세트를 보며 눈가를 훔쳤다.

    "맛없으면 죽일 거다. 진짜."

    "…맛있을 거야."

    지은 죄는 아는지 풀 죽은 정해민이 그렇게 말하며 이지혁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이리 안 와?"

    "왜! 왜!"

    이지혁이 정해민을 잡으려 하자 슬그머니 그 사이를 김다솜이 파고들었다.

    오픈 박스에 든 버거를 앞에다 내려놓은 김다솜이 말없이 이지혁에게 콜라를 잡아 내밀었다.

    "오?"

    안 그래도 마침 음료가 쉐이크였던 것이 불편했던 이지혁이 반색하며 콜라를 받아 들었다.

    싱긋 웃으며 이지혁의 쉐이크를 자신의 앞으로 당기는 김다솜의 짓거리를 본 정해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은근 여우 짓 쩌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어머, 얘 모르는 척하는 것 봐?"

    둘이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바닥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도가윤이 이지혁의 반대쪽 옆자리를 차지했다.

    "가윤아!"

    정해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도가윤은 개의치 않고 자신 몫의 버거를 앞으로 당겼다.

    정해민이 씩씩대더니 이지혁의 건너편에 앉았다.

    "니들, 자꾸 이럴래?"

    정해민이 으르렁대자 둘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묵묵히 버거를 먹었다.

    "내가 가만히 있……."

    "아, 시끄러! 밥 좀 먹자!"

    "헐, 누나한테 시끄럽대."

    "나잇값 좀 해라, 아줌마."

    "아, 아줌마……."

    정해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김다솜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웃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서아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테이블에 앉아서 투닥대는 그들의 주변을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이 넓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신경도 안 쓰고 잘도 놀고먹는 걸 보면 쟤들도 신경이 여간 굵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저거, 수라장 아닌가?

    서아영의 눈에 이지혁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는 셋이 들어왔다.

    "이게 뭔……."

    하나같이 예쁜데…….

    하나는 연예인이고, 하나는 연예인 귓방망이를 왕복으로 후려칠 만큼 이쁜데다 어리고, 가윤이도 저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는 급은 아닌데…….

    왜 하필 이지혁인가.

    얼굴이 잘생겼나.

    그렇다고 성격이 좋기를 하나.

    싸가지라고는 밥 말아 먹은 지 오래에다 게으르고 입도 더러운데…….

    최악의 남친상 아닌가?

    그런 놈을 저리 예쁜 애들 셋이서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런 놈에 비한다면야…….

    서아영의 시선에 그녀의 앞에서 한입 가득 버거를 물고 우물대는 최정훈의 모습이 들어왔다.

    "왱?"

    "아니요."

    이 사람도 처음엔 안 그랬는데, 가면 갈수록 사람이 실없어진다.

    이지혁이 나타나고부터인가?

    "맛있어요. 드세요."

    "…네."

    서아영은 버거를 입에 물었다.

    맛은 있네, 맛은!

    이 고생을 하고 먹어서인지 맛은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너무 많아서인지 잘 넘어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리 감시 받는데 버거가 넘어가요?"

    "편하게 해드립니까?"

    "네?"

    최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지혁에게로 가서 뭔가 말을 했다.

    이지혁이 고개를 들더니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 새끼들이 감시를 해? 대가리 안 돌려?"

    그 말이 끝나자 이지혁들을 감시하던 이들이 하나같이 몸을 반대로 돌렸다.

    "밥도 안 넘어가게."

    궁시렁대던 이지혁이 다시 자리에 앉아서 버거를 처묵처묵하기 시작하자 최정훈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어떻습니까?"

    무서운 인간.

    이지혁을 저리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른 사람 말은 코로도 듣지 않는 이지혁이 최정훈 말은 은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미묘한 관계였다.

    뭐, 어쨌든 좀 낫긴 하네.

    시선이 사라지자 입에서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아영이 버거의 맛을 느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을 포위하던 양복들의 한쪽이 열리더니, 중후한 얼굴을 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사내는 서아영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정해민의 입을 벌리고 버거를 쑤셔 넣고 있던 이지혁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고는 뭐라 말했다.

    거의 실시간으로 옆에 선 인물에게서 통역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미국 CPO의 국장을 맡고 있는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입니다."

    이지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끔 보더니, 이내 무시하고는 그대로 정해민의 입에 버거를 밀어 넣었다.

    "맛있냐? 이게 맛있어?"

    "읍읍!"

    "느끼하기만 하구만! 여긴 불고기버거 없어?"

    정해민이 버거를 뱉어내고는 소리쳤다.

    "니 입맛이 싸구려인 걸 나보고 뭐 어쩌라고!"

    "진짜 싸구려가 뭔지 보여줄까?"

    "…죄송."

    정해민을 괴롭히던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을 바라보았다.

    "크리스… 뭐?"

    "그냥 크리스라고 부르십시오."

    "근데 왜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지혁 씨. 미국을 이리 방문하실 것이었다면 미리 연락 주셨으면 최대한 편의를 봐드렸을 텐데요."

    "밥 먹으러 왔는데 연락은 무슨. 그나저나 다른 밥집 없어요? 이거 너무 느끼한데?"

    크리스토퍼는 휴대폰을 꺼내서 이지혁의 정보를 다시 읽었다.

    * * *

    마이페이스. 남 말을 죽어도 듣지 않음. 대화 불가.

    정확하군.

    조사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성과급과 휴가를 보장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크리스토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원하신다면 최고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드리죠. 세계 어디의 음식이라도 이곳에는 있으니까요."

    "그럼 나 된장찌개 집에 좀 데려다 줘요."

    "……."

    아니, 이 미친놈아. 너 한국인이잖아. 왜 미국 와서 한식을 먹고 가!

    그건 너희 집에 가서 처먹어!

    "그, 그건 본국에서 드시는 게……."

    "난 한식이 좋은데?"

    "그러니까 너희 집에서 처먹으라고!"

    통역을 하는 이가 멍하니 크리스토퍼를 바라보았다.

    이걸 통역하라는 건가? 설마?

    "국장님?"

    흥분하던 크리스토퍼가 헛기침을 했다.

    "'한식이 좋으면 한식을 드리죠'라고 해."

    "네."

    통역이 말을 전하자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뭐래?"

    "…귀찮다고 이제 집에 간답니다."

    "뭐, 새끼야?"

    "아니, 제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배부른 강아지처럼 하품을 하는 이지혁을 본 크리스토퍼가 심호흡을 했다.

    그래, 저 인간은 대화가 불가능하다. 괜히 열 내지 말자.

    이지혁이 뭔가 또 말을 했다.

    "뭐래?"

    "…비행기 표 좀 구해줄 수 있냡니다."

    "텔레포터가 있는데 비행기 표가 왜 필요해?"

    "그게… 비행기 한 번도 못 타봤다고, 비행기 타보고 싶답니다. 일등석에서 밥은 주냐고 묻네요."

    "저기 책임자가 누구냐……."

    가만두지 않겠다!

    실시간으로 영어를 다 알아듣던 최정훈이 슬쩍 서아영의 뒤로 몸을 숨겼다.

    "응?"

    서아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헤헤."

    능글맞은 웃음으로 상황을 넘긴 최정훈이 사태를 주시했다.

    보자.

    저 크리스토퍼가 내가 알고 있는 그 크리스토퍼인가?

    중앙 능력자 기구의 그 크리스토퍼 맥클라렌?

    거물 중의 거물이군.

    최정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 세계의 수많은 능력자와 관련된 인물들 중 그 영향력으로는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자였다.

    그런 자가 굳이 이리 찾아와서 이지혁을 만나려 한다는 건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이지혁이 크리스토퍼를 무시하고 상자의 버거 하나를 더 집어서 베어 물었다.

    아, 이거 느끼하기는 한데… 묘한 중독성이 있는 맛인데?

    우물우물.

    "맛있어요?"

    "그럭저럭?"

    "원래는 그런 거 안 좋아했잖아요."

    "여기 있다 보니 넘어가더라고."

    응?

    근데 나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지?

    익숙한데, 이거?

    이지혁이 고개를 슬쩍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이를 보았다.

    "어?"

    툭.

    이지혁의 손에서 버거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모두의 시선이 이지혁과 그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이지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여자를 가리켰다.

    "너, 너, 너……."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오랜만이에요."

    "니가 왜 여기 있어! 니가 왜!"

    "물론……."

    여자가 이지혁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당신을 찾아왔죠."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를 본 이지혁이 부들부들 떨다가 고함을 질렀다.

    "꺼져어어어어어어어!"

    쩌렁쩌렁한 이지혁의 목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졌다.

    * * *

    이지혁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진다 싶더니, 정해민의 등 뒤에 나타났다.

    "응?"

    덥썩.

    이지혁이 정해민의 목을 살짝 움켜잡았다.

    "어머! 야, 너 뭐하는……!"

    "다들 움직이지 마!"

    이지혁이 눈을 희번덕대며 말했다.

    "움직이면 이 여자의 목숨은 없다."

    "뭐래, 미친놈아!"

    정해민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이지혁은 정해민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한국으로. 어서!"

    "응? 다른 사람들은?"

    "알 게 뭐야, 젠장. 빨리 가!"

    얘가 왜 이러지?

    미친 짓이야 매일 하는 거라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이지혁이 오뉴월에 한강을 얼리고 스케이트를 탄다고 해도 여기 있는 사람 중 놀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해민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이지혁의 얼굴에서 무려 '초조함'이 엿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니, 불안? 설마 공포는 아니겠지?

    여하튼 이런 얼굴의 이지혁은 본 적이 없다.

    얼마 전,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군대개미처럼 굴러 나왔을 때도 심드렁했던 이지혁이 아닌가.

    그 이지혁이 지금 불안에 떨며 동료들을 모조리 버리고 한국으로 텔레포트를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정해민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이지혁의 안색을 살폈다.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갑작스레 등장한 서양인이 보인다.

    어떻게 저런 색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짙은 금발에 뭔가 신비로움이 절로 묻어나는 황금색의 눈동자.

    '아…….'

    정해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아름답다.

    그저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예쁘다는 사람을 숱하게 보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저 사람의 아름다움은 그런 속세의 아름다움을 초월한 뭔가가 있었다.

    천사가 세상에 강림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이……."

    이지혁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정해민을 현실로 끌어 올렸다.

    "뭐 얻어 처먹을 거 있다고 여기까지 쫓아와! 이 스토커야! 넌 지겹지도 않냐?"

    금발의 여자는 환히 웃었다.

    "반갑지 않아요?"

    "반가워? 반가워어어? 와, 진짜 저 대가리 깨버리고 싶다, 진짜! 넌 양심도 없냐?"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저거 어느 나라 말이지?

    대체 무슨 말로 서로 대화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물론 최정훈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알고 있지야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이 최정훈이 모르는 언어를 알고 말한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저거… 언어가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데?

    마치 전혀 다른 체계의 언어를 듣는 기분이었다.

    "저는 반가운데, 당신은 다른가 보군요. 이렇게 힘들게 찾아온 사람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네요. 섭섭하게."

    "다정? 다정이라고 했나?"

    저 미친 도마뱀을 찢어 죽여 버릴까, 진짜!

    아, 내가 찢겨 죽겠지.

    하…….

    왜 쟤가 여기 있는 거냐고! 왜!

    천 년이 넘게 보고 살았으면 이제 그만 볼 때도 됐잖아, 썩을!

    "다정은 얼어 죽을! 니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진짜 양심이란 게 없냐? 도마뱀이라 그런 게 없는 건가? 응? 으으응?"

    "유치해요."

    "하……."

    난! 이래서! 저 도마뱀이! 싫다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이지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지.

    이리 개기다가 순식간에 끔살당한다.

    자신은 지금 베라프의 멸망의 좌가 아니니까.

    그녀를 한 손으로 찢어 죽일 수 있던 힘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그녀와 자신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면…….

    '뭐가 견적이 안 나오냐.'

    3초는 버티려나?

    아니, 3초 못 버티겠는데?

    생각하니 어이없네!

    드래곤 하나만 넘어와도 멸망각이었는데… 양심도 없지, 무슨 드래곤 로드가 넘어오냐고!

    왜 드래곤 로드가 오냐고오오!

    "아펠드리체."

    "예전처럼 리체라고 불러주세요, 지혁 씨."

    "하……."

    이 세계는 이제 망했어.

    이지혁이 절망 어린 눈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뭐하는 거래요?"

    "글쎄요?"

    서아영과 최정훈의 눈에 주위를 모두 물린 채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의 주위를 CPO가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다 보니 어떻게 들어가 볼 여지조차 없었다.

    "우리 엄청 찬밥이네?"

    우리라기보다는 당신이겠지.

    그래도 플레임 위치라면 미국에서도 나름 국빈 대접을 받을 만한 능력잔데, 시기가 워낙 안 좋다. 하필 이지혁이랑 함께 왔으니까.

    "저 여자 뭐지?"

    정해민이 볼을 부풀렸다.

    예쁜 거야 그렇다 치자.

    아니, 예쁜 거도 그렇다고 넘길 수준은 아니지. 저건 해도 너무했으니까.

    하지만 그거보다 껄끄러운 점은 아무리 봐도 둘이 서로 아는 눈치라는 것이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까부터 둘이 뭔가를 쑥덕댔으니까.

    정해민의 눈에 다리를 꼬고 몸을 뒤튼 채 불편해 죽겠다는 기색을 엄청나게 뿜어 대는 이지혁과 턱을 괸 채 그런 이지혁을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는 여자가 보였다.

    이상한 그림인데…….

    이상하게 또 그림이 된다.

    뭔가 낯설면서도 익숙해 보인다고나 할까?

    '기분 나쁜데…….'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휘잉.

    "으……."

    정해민이 옆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한기에 몸을 떨었다.

    뭐지? 여기 왜 갑자기…….

    그녀의 눈에 비너스 상처럼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김다솜이 들어온다.

    아, 이 기분!

    뭔가 사이다다.

    그러게, 얼굴 하나 이쁜 거 믿고 설치더니 잘됐다!

    김다솜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저 여자에 비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거지?'

    * * *

    쪼르륵.

    눈앞에 놓인 콜라를 한 모금 빨아들인 아펠드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당신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콜라인가요?"

    "어."

    "이상하네요. 그저 단맛. 그리고 이 부글거리는 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죠? 이 맛을 그리워했다고요?"

    "니들이 처먹는 밍숭맹숭한 주스보다야 훨씬 났겠지."

    "이상한 취향은 여전해요, 당신."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니들이 이상한 거라고, 이 도마뱀아!"

    "외향적인 측면에 집착하는 것도 여전하네요. 드래곤은 신성적 존재라 외향적인 파충류 종족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이해하시겠어요? 아마도 3,123회 정도는 이야기한 것 같은데?"

    "있잖아……."

    "네, 지혁 씨."

    "난 니가 너무 싫다."

    "그 말도 삼천 번은 들은 듯하네요."

    이지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하…….

    살려줘.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얘랑 대화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간만에 이런 대화를 하니 머리에서 뇌세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기분이었다.

    이 끔찍한 일을 다시 겪어야 하다니!

    이 세계에는 신도, 부처도…….

    아니, 이쪽 세계 신들은 그렇다 치고, 라트렐은 뭐하는데 이 여자를 이리 보낸 거지?

    "그런데 너 왜 왔냐?"

    "말했을 텐데요. 남의 말을 안 듣는 버릇은 여전하네요. 당신을 보러 왔다고요."

    "너와 나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던가?"

    "끝났다고 생각하세요?"

    "끝났거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기랄."

    끝내자, 좀!

    이제 좀 끝내자고, 이 빌어먹을 년아!

    "천 년이나 봤으면 이제 그만 좀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정확하게는 1,632년이에요."

    "헐, 진짜?"

    "네."

    그렇게나 오래됐나? 그럼 내 나이가 몇이야?

    "거기에 그곳에 있던 시간을 합치면 배로 늘어날지도 모르겠네요. 계산해 볼까요?"

    "아니, 그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아.

    "그래, 뭐, 천육… 천 년이라 치자! 그만큼이나 봤으면 됐잖아. 뭐 얻어먹을 거 있다고 여기까지 쫓아오냐! 제발 사람 좀 내버려 두라고! 내가 베라프에 멸망을 가져올 자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증명했잖아!"

    확 그냥 다 터뜨려 버릴 걸 그랬나!

    애초에 멸망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단정적인 것인지 모르는 건가?

    베라프의 모든 인간을 죽인다고 해도 베라프가 멸망한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를 말살한다고 해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면 멸망한 것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난 너희를 멸망시킬 의지도, 능력도 없단 말이다!

    그러니 이제 좀 놔달라고!

    진드기만 먹고 살았나, 왜 사람을 놓아주지를 않아, 놓아주지를!

    천 년이 넘게 그렇게 사람을 괴롭혔으면…….

    순간, 이지혁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진짜 다 죽여 버릴 걸 그랬나?'

    지금이면 몰라도 그때였다면 힘은 들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증명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라고?"

    "아무것도 증명된 것은 없어요, 지혁 씨."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뒤흔들었다.

    풍성하게 물결치는 블론드.

    익숙하고…….

    뭔가 그립기도 했던…….

    그 광경을 보며 이지혁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뭐가 끝나지 않았다는 거야?"

    "이미 이곳으로 그들이 넘어오고 있어요. 저는 그 흔적을 찾아 급하게 당신을 쫓아왔죠."

    "그들?"

    "당신이 아는 자들이죠."

    내가 아는 자들이라…….

    "하나둘이어야 맞춰보지."

    "당신이 속했던 그곳."

    이지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계에서 게이트가 열렸어요."

    이지혁은 입을 다물었다.

    * * *

    "어이가 없군."

    알파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게이트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걸 만들어낼 수 있는 거였나?"

    "게이트라는 마법은 아주 보편적이며 흔한 마법이다. 그저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이을 뿐인 마법이지. 아주 간단해."

    "그런가?"

    작은 악마.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한 '아르고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이 게이트를 어디로 연결하느냐다. 바로 앞에 게이트를 연다면 작은 마법을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세계의 반대편에 연다면 큰 힘이 소모되겠지. 그리고 지금처럼 차원을 넘어서 게이트를 연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막대한 마나가 소모된다."

    "흐으음, 그럼 별 쓸모가 없는 것 아닌가? 넌 대부분의 마나를 소진했다며? 본체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렇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 작은 게이트 하나를 여는 것이 고작이지."

    아르고라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거지?"

    아르고라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원래대로라면 의미가 없는 짓이겠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지. 그저 작은 게이트라도 열어버리면 된다. 그럼 저쪽에서 알아서 마나를 공급해 게이트 자체를 키울 테니까."

    "음?"

    "한쪽에서 여는 게이트와 양쪽에서 여는 게이트는 그 급이 다른 법이다. 나 혼자라면 저번에 본 것 같은 저급한 게이트밖에 열 수 없다. 하지만 양쪽이 호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저번에 본 저급한 게이트?

    그 이지혁을 상대할 때 서울에 열었던 게이트들을 말하는 건가?

    그 레벨 4 게이트가 저급하다고?

    "물론 당시에는 마계로 직접 연결한 것이 아니니 적은 마나를 소모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있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그때 연 게이트가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마계로 여는 게이트는 차원과 차원의 틈새에 존재하는 환상에 현실을 이어 붙이는 것과 같다."

    "복잡하군."

    "엄청나게 어렵다고만 생각하면 된다. 아무리 마족이라고 하더라도 굉장히 힘든 일이지."

    그 힘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던 '인간'도 있었지만.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지금 이 게이트는 마계로 연결되고 있는 건가?"

    "그렇다. 하지만 부족하군. 마나가 부족해. 게다가 음차원의 기운도 있으면 좋겠군."

    "뭔 말인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결론은 내가 뭘 하면 된다는 거지?"

    "그야 간단하지."

    아르고라스가 이를 드러냈다.

    "학살."

    "명쾌하군."

    알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말이야, 악마."

    "음?"

    "이용해 먹는 건 좋지만, 적당히 하는 게 좋아."

    "명심하지."

    알파가 떠나가자 아르고라스는 가만히 눈앞에 보이는 검은 게이트를 응시했다.

    "이용해 먹는 게 아니야, 멍청한 놈아."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거다.

    그 이지혁이 이곳에 있으니까.

    * * *

    "이 세계의 음식은 이상해요."

    "뭐가?"

    "음식에 뭘 이리 많이 넣은 거죠? 이 기름 같은 것과 이 광물 맛은 뭐죠? 미개해요."

    "니 주둥아리가 미개한 거지."

    "이런 음식들을 먹고 살다니, 가엽네요."

    너희가 미개한 거라고, 이 도마뱀 년아!

    감히 지구의 식문화를 까내려? 빵 하나 제대로 못 구워서 망치로 두들겨서 깨먹게 만드는 것들이?

    이지혁은 접시에 담긴 새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는 아펠드리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이런 좁은 곳에서 식사라니, 정말 이상한 방식이에요."

    "그럼 기내식을 자리 깔고 먹을까?"

    "그리고 왜 이런 철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죠? 날아가면 될 텐데?"

    "니가 타고 싶다며, 이 망할 년아!"

    "음, 이 소스는 독특?"

    "사람 말을 처들으라고! 들어! 들으라고!"

    기겁을 한 스튜어디스가 달려와 이지혁을 말렸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예의를 지켜주어야죠, 지혁 씨. 벌써 345회는 말한 것 같은데 여전히 고쳐지지 않네요."

    "와, 와! 이거, 진짜… 와! 확, 마!"

    "손님!"

    서아영이 그 광경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어떻게 좀 해봐요."

    "모른 척합시다."

    "……."

    최정훈은 그들을 외면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상황이 어찌어찌 정리가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자연스레 저 '리체'라는 여자가 따라붙었고, 이지혁과 투닥투닥(물론 이지혁 혼자 열을 올리는 거 같았지만)대더니 뜬끔없이 비행기를 타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자 크리스토퍼가 어딘가에 전화를 하더니 바로 비행기를 대기시켜 버렸다.

    심사고 뭐고 비행기에 바로 사람을 집어 처넣으며 짓던, 그 속이 후련하단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미국 놈들… 죽일 테다.'

    이지혁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거 같은데, 또 폭탄을 던지다니!

    대체 네놈들의 피는 무슨 색이라는 말인가.

    최정훈이 이지혁의 옆자리에 앉아 이지혁이 뭔 짓을 하든 담담히 받아들이는 여자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 이지혁을 저리 만들다니…….'

    정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은 공포스럽다. 다른 사람들도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드가 자리 비워도 되나? 베라프 요즘 한가한가 보지?"

    "언제나 한가했죠. 새삼스럽게 그러세요."

    "그건 너나 되니까 하는 말이고!"

    만 년은 사니까 항상 한가하지! 급할 일이 뭐가 있냐!

    이래서 도마뱀이랑은 말이 안 통한다니까.

    "그리고 왜 따라오는데?"

    "그럼 연고지 하나 없는 사람을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 그냥 버려두고 갈 생각이셨어요? 나는 그래도 이지혁 씨 고생할 때 거둬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는데."

    "사람을 백 년이나 가둬두고 그게 할 말이냐!"

    "백 년이면 금방이죠."

    "사람은 백 년이면 죽는다! 이 도마뱀아!"

    "안 죽잖아요, 지혁 씨는."

    "하……."

    열과 짜증으로 부들부들 떠는 이지혁이었다. 얄미워 죽을 것 같다.

    라트레에에엘! 왜 이년을 이곳으로 보낸 거냐! 자꾸 이러면 나도 생각이 있어!

    "너 왜 왔는데, 진짜?"

    "이지혁 씨를 보러 왔다니까요."

    "우리 인연은 이미 끝났을 텐데? 구질구질하게 찾아온다고 내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지켜보던 최정훈이 입을 쩌억 벌렸다.

    저게 대체 뭔 소린가.

    마치 뭔가 매달리는 여자를 밀어내는 발언 같지 않은가. 이지혁 주제에!

    옆에 여신이 앉아 어떻게 저따위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쟤는 눈도 없나! 저건 취향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인데!

    아니야. 뭔가 잘못 들은 거겠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니,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거예요."

    "왜 이리 질척거려!"

    최정훈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야, 저 시추에이션은!

    망해라!

    몽땅 망해 버려!

    난 아직 이 나이까지 장가도 못 갔는데, 저 새끼는 왜 인기가 있는 거지!

    "말했잖아요, 평생 놓아주지 않는다고."

    "꺼져어어어어어!"

    이지혁이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헐, 쟤 미쳤나 봐."

    서아영마저 입을 쩌억 벌렸다.

    맛이 가지 않고서야 저 상황이 나온다는 게 말이 되는가.

    우우우웅.

    "어, 뭐지? 휴대폰?"

    그럴 리가… 꺼놨는데?

    그럼 이 진동은 뭐지?

    "헐."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정해민이 부들부들 떨며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너 왜 그래!"

    "망할."

    "으응?"

    잘못 들었나?

    분명 욕을 들은 것 같은데?

    뜬금없이 욕이라니,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근데 이 한기는 뭐지? 얘는 또 왜 이래?

    반대쪽에서는 김다솜이 정말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얼굴로 리체를 노려보고 있었다.

    '얘들아, 정신 차리렴.'

    저기 있는 놈은 그럴 가치가 있는 애가 아니란다.

    이젠 슬슬 장난 같지 않아서 이 언니는 걱정이 된단다.

    "진짜 뱀술을 담가 버릴까 보다, 이 망할 도마뱀!"

    "그러고 보니 여기에는 뱀술이라는 것도 있다 했는데, 한 번쯤 맛보고 싶네요."

    "사람이 말을 하면……."

    아니, 됐다.

    천 년 동안 안 고쳐진 게 이제 와서 고쳐질 리가 있나. 애초에 드래곤이란 생명체는 그냥 완전체다. 그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 타인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 자체를 그저 튕겨낼 뿐, 받아서 소화하지 못하는 존재. 그게 바로 드래곤이다.

    그나마 아펠드리체 같은 경우는 이지혁과 천 년을 투닥댄 전적이 있어서 그런 면이 많이 줄었는데, 그게 이 정도다.

    다른 드래곤과는 그냥 대화가 필요 없다.

    보는 족족 때려잡아 죽여 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은 존재들인 것이다.

    "진짜, 너 왜 왔냐?"

    이지혁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 모습을 아펠드리체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최정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뭘까?

    저 얼굴은?

    마치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섞인 듯한 저 얼굴은?

    '보통 관계가 아닌 건가?'

    그럴 일이야 없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저 둘의 관계는 분명 뭔가 이상했다.

    일방적으로 짜증과 화를 부리는 이지혁도 그렇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받아주며 바라보는 저 아펠드리체라는 여자도 그렇고.

    뭔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유대와 적의가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가족?'

    따지자면 그런 것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가족이 아니라면 저런 얼굴로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을까?

    콰앙!

    그 순간,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작은 창 밖으로 보이는 좌측 날개에 불꽃이 일고 있었다.

    "저거 터진 건가?"

    최정훈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설마 일부러?

    아냐. 크리스토퍼가 그리 멍청하지는 않겠지.

    자신들을 이런 식으로 암살한다는 것은 백치나 할 만한 생각이다.

    그럼 사고?

    아니, 사고라고 해도 너무 공교로…….

    그때, 최정훈의 눈에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뭐지, 저건?"

    작은 점 같아 보이는 것들이 점점 커지며 다가온다.

    '새? 아니!'

    고서에서나 나오는 악마의 형상을 한 것들이 박쥐 같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비행기 주변을 날고 있었다.

    "가고일?"

    이지혁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원래 가고일이 이리 높이 나나?"

    "저도 처음 봐요."

    "흔한 일은 아니겠지?"

    "아마도요."

    "흐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알 게 뭐냐, 저런 잡몹. 아펠드리체, 피어 한 방 쏴줘."

    "못해요."

    "응?"

    이게 뭔 소리야? 드래곤이 피어를 못 쏜다니?

    차라리 새가 못 날고 말이 못 달린다는 게 현실감이 있지, 드래곤이 왜 피어를 못 쏴!

    "왜 못해?"

    "본체로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돌아가면 아주 재미있지 않겠어요?"

    "블링크 후에 본체로 돌아가서 쫓아내고 돌아와도 되잖아."

    "좋은 방법이지만, 오류가 있어요."

    "뭐?"

    "저 본체로 못 돌아가요."

    "으응?"

    그게 뭔 소리야?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마나를 너무 많이 소비했어요. 여기서는 마나를 충전할 방법도 없거든요. 본체로 돌아갈 마나가 없어요."

    "아, 그래?"

    이지혁의 눈이 희번덕댔다.

    "그럼 너 지금 엄청 약하겠다, 그지?"

    "그래도 지금의 지혁 씨라면 5분 내에 때려잡지 않을까요?"

    시무룩.

    이지혁이 의기소침하여 서글프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 어두컴컴하니 좋구나. 내 마음 같아.

    베라프에서는 내가 얘를 3초면 때려잡았는데, 여기서는 5분 만에 박살이 나는구나.

    내가 딱히 더 세지고 싶다는 건 아닌데, 뭐랄까… 음…….

    있다 없으니까?

    그런 느낌 같은 느낌?

    시무룩하게 하늘을 보자 리체가 이지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게 베라프에 있으라니까."

    "하지 마!"

    최정훈이 이지혁을 보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두 분 말씀 나누는 것도 좋지만, 저것들 좀 해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넹?"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라고요?"

    "처리를……."

    "헐."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날아다니는 애들을 나보고 뭘 어쩌라고?"

    "어떻게든 하실 수 있잖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내가 무슨 도라에……."

    "에헤이, 저작권!"

    "아, 무슨 만능 상잔 줄 아나. 뭘 어쩌라는 거예요, 이 하늘 위에서! 비행기 뚫을까?"

    "해민 씨 데리고 잠깐 나갔다 오면 되잖습니까? 날 수 있는 거 압니다. 저번에 봤어요."

    "이거, 큰일 날 사람이네? 그렇게 나가서 처리한다고 치자. 그럼 나는 비행기로 어떻게 돌아오나?"

    "마커 찍고 가면 되죠."

    "시속 1,000킬로로 이동하는 곳에다 텔을 타라고?"

    "…아?"

    "사람 공중분해되는 꼴 보고 싶나. 내가 돌아오는 순간 시속 1,000킬로로 이동하는 비행기가 다가오는 거랑 똑같은 건데, 그거 충격력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나야 그렇다 치고, 쟤는 아마 순식간에 원자 단위로 분해될걸?"

    정해민이 도끼눈을 뜨고 최정훈을 노려보았다.

    "그, 그건 생각을 못했네요."

    "이래서 문돌이는 안 돼."

    거기서 문돌이가 왜 나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방법이 왜 없어요?"

    "네?"

    "처리 안 하면 그만이지. 그냥 냅 두고 가자고요."

    "헐? 아니, 지금 공격 받고 있다니까요?"

    "하, 이 사람… 언제부터 머리가 이리 안 돌아가셨나. 비행기째로 냅 두고 가면 되죠."

    "어?"

    말 되는데?

    "승무원은요?"

    "데리고 가면 그만이지."

    "…그럼 비행기가 추락할 텐데……."

    "바다 위니까 괜찮잖아요."

    "이거 비싼데……."

    "우리 거도 아니잖아."

    자꾸 옳은 소리만 하네?

    그러고 보니 비행기가 터지든 말든 내 거도 아닌데 뭔 상관이지? 한국 항공도 아니고?

    "그럼?"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장 오라고 해요."

    "……."

    이 인간… 머리가 이상한 쪽으로는 정말 잘 돌아가는데?

    귀찮은 거 피하는 데는 최고야!

    "아니, 잠깐만. 그럼 항로에 남아 있는 저 가고일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그래도……."

    "한국 항공사한테 이쪽 피해서 가라고 해요. 글고 정보를 타국에도 줘요. 답답한 쪽이 토벌하겠지."

    아마 민간 항공이 가장 많이 운용되는 미국이겠지.

    "진짜 그래도 될까요?"

    "싫으면 남든가."

    "…가겠습니다."

    이지혁이 정해민을 불러 손을 잡았다. 어느새 불려온 승무원들도 사태를 깨달았는지 서로 손을 잡고 정해민에게 엉겨 붙었다.

    "갈게요."

    스슷.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비행기는 깔끔하게 바다로 추락했고, 상황을 연락 받은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시가 통을 마구 집어 던지며 발악을 했지만, 사라진 비행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가는 순간까지 왜 사람을 빡 치게 만드냐고, 그 망할 놈은!"

    크리스토퍼는 다시는 이지혁과는 엮이지 않으리라 맹세했지만, 그 맹세가 지켜질 일은 없었다.

    * * *

    "그러니까……."

    박선덕은 눈앞에 보이는, 눈 돌아가는 미녀를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저 놈팡이 같은 놈이 어디서 자꾸 덥썩덥썩 물고기를 물어온다 싶더니, 이제는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월척을 물어왔다.

    아니, 이걸 월척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나?

    낚시하러 간다던 바보 아들놈이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가서 고래를 낚아온 기분이랄까?

    "우리 집에서 좀 머무르신다고?"

    도무지 믿기지를 않는다는 기색으로 박선덕이 묻자 이지혁이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다.

    '안 된다고 해, 엄마!'

    박선덕은 이지혁의 눈빛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도 자식인데, 이 정도야 뭐!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아요! 어차피 방도 남으니까."

    "엄마!"

    걱정 마, 우리 아들!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눈물 나는 모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선덕 입장에서는 같은 여자로서도 눈 돌아가는 이 여자를 이지혁이 밀어낼 거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장가가라고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고, 잠깐이라도 같이 지내보면 좋겠지.'

    평생 추억이 될 급이다.

    이지혁에게는 평생 악몽이었지만.

    "집을 구할 때까지만 머무르겠습니다."

    "아니에요. 편한 만큼 있다 가세요. 계속 있어도 괜찮아요."

    "엄마, 그게 아……."

    "넌 조용히 해. 생각은 엄마가 한다."

    "응."

    시무룩해진 이지혁이 구석으로 박혀서 바닥을 긁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아펠드리체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방약무도.

    신을 앞에 두고서도 감자바위를 처먹이던 이지혁이다.

    그의 머리 위에 어떠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드래곤 로드라는 지고한 신분이던 그녀조차도 비만 도마뱀이라든가, 도마뱀 년이라던가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퍼먹이던 게 이지혁인데…….

    그런 이지혁이 말 한마디에 쭈구리가 되어 구석에 박히는 모습을 보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어머니라는 존재인가?'

    한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갈 급의 힘을 가진 인간조차 말 한마디로 제압할 수 있는 존재.

    모정이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드래곤인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감정적 동조는 몰라도 이성적 파악은 가능한 법.

    그녀는 순식간에 이 집안의 실세를 파악했다.

    "네, 어머니.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번역 마법 패치가 얼마나 잘됐는지, 누가 보면 이름이 리체가 아니라 김덕순쯤 될 거 같다.

    "왜! 왜!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괴롭히는 거냐고! 돈도 많은 게!"

    "돈은 있는데, 신분이 없으니까요."

    "대충 아무 호텔이나 잡아서 살라고."

    "…여자 혼자 위험하니까."

    헐?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이지혁이 귀를 마구 팠다.

    피가 나올 정도로 귀를 긁어 젖힌 이지혁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주면 안 될까? 내가 요즘 기가 허한지 자꾸 헛소리가 들리는데?"

    "헛소리……."

    살짝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얼마나 처량한지 저도 모르게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였다.

    "이노무 자식이 어디 여자한테 그런 소리를!"

    "와! 와! 내가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진짜 미치겠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시끄러워!"

    엄마, 속으면 안 돼!

    저년이 이뻐 보이는 건 폴리모프를 해서 그런 거고, 원래는 보면 기절할 정도로 이상하게 생긴 도마뱀이란 말이야!

    이게 여우한테 홀린다는 것인가!

    박선덕이 저 불여시의 원래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거참, 송곳니가 아름다우시네요?

    비늘이 반질반질하니 참 좋네요?

    하나만 얻어갈 수 있을까요?

    어차피 저 예쁜 모습은 마법으로 만든 거란 말이다!

    그런 거에 속으면 안 돼! 엄마!

    "헐."

    한바탕 소란에 마루로 나온 이예원이 리체를 보고는 입을 쩌억 벌렸다.

    털썩.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이예원이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다솜이랑 해원이 언니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디서 왜 벌써 끝판왕이 나오는가."

    아직 중간 보스도 클리어 못했는데.

    "엄마! 나 왜 이렇게 낳아줬어!"

    "그 정도면 괜찮지!"

    "옆에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크흐흠."

    자식이 오징어로 보일 줄이야.

    그래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내미였는데…….

    미안하다, 딸아. 내가 봐도 얘는 좀 심하다.

    "네 오빠가 데려왔다. 한동안 같이 살게 될 거야."

    "동거?"

    이지혁이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아니야아아아아!"

    난 인간이란 말이다! 도마뱀과 동거라니!

    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동거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데 로딩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

    그녀가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전에도 같이 산 적이 있으니까요."

    "……!"

    "……!"

    우리 엄마 눈이 저렇게 컸구나.

    …엄마, 그만 부릅떠. 찢어지겠어. 진짜로.

    너는 왜 그런 눈으로 보니, 예원아. 오라비가 그리도 못 미덥더냐?

    "말도 안 돼……."

    그래도 내가 니 오라비인데…….

    그렇게까지 경악을 하면 내가 기분이 좀 그렇잖니. 그지?

    "…그러니 눈깔 찔러 버리기 전에 돌려라."

    "나?"

    "그럴 리가요, 어머니."

    박선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뻗어 아펠드리체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네?"

    "식은 언제 올릴 예정이니?"

    "아니라고오오오오오오!"

    이지혁의 울분에 찬 고함 소리가 집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 * *

    "집에 안 가?"

    "……."

    "너, 나 마음에 안 들지?"

    "지금까지는요."

    이지혁의 집 앞.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던 정해민과 김다솜이 마침내 한 시간 만에 대화를 시작했다.

    "나도 너 마음에 안 들거든?"

    "어련하시겠어요?"

    어린 게 말하는 거 보게?

    승질 같아서는 머리채를 잡고 싶지만, 그래서 남는 게 뭐가 있겠는가. 지금은 포용력을 기를 때다.

    "너… 지혁이 앞에서는 온갖 이쁜 척 다 하더니, 안 보이니까 입에서 말이 아주 제멋대로 튀어나온다?"

    포용력은 얼어 죽을!

    "그쪽에게 많이 배우고 있어요."

    정해민이 부들부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 아이돌.

    침착성은 언제나 아이돌의 덕목이 아니던가.

    "나도 네가 싫다."

    "알아요."

    "그래도 지금은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닌 것 같다. 인정하지?"

    김다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외모적 측면으로는 자신이 있었는데, 아펠드리체인지 머리채인지 모를 여자가 등장하고는 그 자신감도 산산이 깨졌다.

    "아는 사람인 눈치야. 알지?"

    "네."

    "게다가 집에도 데리고 들어갔단 말이지."

    김다솜이 눈에 띄게 부들대기 시작했다.

    아직 한 번도 못 들어가 봤는데!

    저 여시 같은 것은 프리 패스라니, 불공평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러니 한동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공동전선이 필요해."

    "네, 인정해요."

    "가윤이, 너도!"

    정해민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도가윤이 미묘한 표정으로 집 안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어딜 가든 따라가는 게 그녀의 일이지만, 저 집 안으로만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뿌득.

    "가윤아, 진정하렴."

    끄덕.

    도가윤을 진정시킨 정해민이 입을 열었다.

    "뭐, 딱히 지혁이랑 뭔가 해보자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식으로 굴러온 돌을 인정하는 건 자존심 문제야."

    "전 해볼 생각인데요."

    "…넌 빼는 법도 좀 배워야겠다."

    "그러다 늙으면 누가 채가요?"

    이년이?

    나 두고 하는 말인가?

    정해민이 도끼눈을 뜨려다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 공동전선을 깨서는 안 된다!

    "일단은 저 여자가 누군지부터 알아내야 해. 가윤아, 알았지?"

    끄덕.

    "그래."

    가장 조그만 정해민이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굴러먹던 가락이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기도 했다.

    "일단 저 뱀 같은 여자의 정체부터 알아내자고!"

    반쯤은 맞췄다.

    * * *

    "후……."

    새벽이 되어 침대에 누운 이지혁이 복잡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미치겠네."

    왜 온 걸까?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나 인간 같은 하등 종족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드래곤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확히는 하지 않는다보다는 할 수 없다에 가까운 일이기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나를 보러 왔다고?'

    그 무슨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말인가.

    천 년을 넘도록 투닥투닥했으면 됐지!

    그리고…….

    마계에서 게이트가 열렸다고?

    이곳과 이어졌다는 건가? 마계가?

    '끔찍한 일이군.'

    마계가 이 세계로 침공을 시작한다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이지.

    우선 지금 열리는 산발적 게이트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수들이 튀어나올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것까지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이지혁조차 라트렐의 눈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열 수 없던 게이트다. 마계와 직통으로 게이트가 열린다고 해도 이 먼 차원의 간극을 넘어설 만한 게이트라면 진실한 마왕급은 넘어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잔챙이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뭘까?

    이 불안함은?

    스멀스멀 뱃속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불안함과 위화감이 이지혁을 괴롭히고 있었다.

    "잠이 안 오는 모양이죠?"

    이지혁이 이를 드러냈다.

    "침실로 기어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펠드리체는 조금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예전 같은 말투네요."

    "나를 자극하지 마."

    차갑게 가라앉은 이지혁의 눈이 아펠드리체를 응시했다.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하는 게 좋아. 이 꼴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작정하면 너 하나 찢어 죽일 힘 정도는 남아 있으니까. 본체로 돌아가지 못하는 너라면 더더욱."

    아펠드리체는 섬뜩한 이지혁의 말에도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미소가 이지혁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어떤가요?"

    "네가 보기엔 어떻지?"

    "편해 보여요."

    "정확히 봤군. 아주 즐겁게 지내고 있지."

    아펠드리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죠?"

    "……."

    "지금 당신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겠죠?"

    "누구보다 잘 알지."

    "흑마력은 인간을 갉아먹죠. 베라프에서의 당신은 그 강대한 마력을 소유하고도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어요. 육체와 정신이 끊임없이 재생하니까. 하지만 그 불멸의 혼을 가지고도 당신은 여러 번 미칠 뻔했죠."

    "그래서?"

    "지금 당신은 더 이상 불멸의 존재가 아니에요. 알고 있죠? 이대로 흑마력을 써 나가다 보면 곧 그 시기가 올 거예요. 그리고 그때가 이 세계가 멸망하는 순간이겠죠."

    "그래서 그걸 막겠다는 건가? 나를 죽여서?"

    그럼 지금이 딱 좋을 때인 거 같긴 한데?

    어쩔까… 목을 내줄까?

    그때,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머리맡으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머리를 끌어안았다.

    "뭐하는 짓이지?"

    "지금 내 능력으로 당신을 정화시킬 수는 없어요. 아니, 본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쉬게 해주는 정도는 가능하죠."

    아펠드리체의 육체에서 따뜻한 기운이 이지혁의 머리로 흘러 들어왔다.

    "…졸리군."

    "몇 달 동안 자지 못했을 테니까. 잘 자요. 편히 쉬길."

    "이거, 자…세가 좀 쪽팔……."

    이지혁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빠진 그의 낮은 숨소리를 들으며 아펠드리체는 가만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가여운 사람.'

    편히 쉬길.

    그대가 쉴 수 있는 날도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날이 새도록 이지혁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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