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1화 (21/118)
  • [■] 내가 어떤 놈인지 정말 알고 있어? [■]

    ─────

    사내의 인상은 묘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일단 동양인이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 동양인 같았다.

    여러 인종이 한 얼굴에 섞여 있는 느낌이랄까?

    쭉 뻗은 코와 붉고 얇은 입술, 그리고 커다란 눈에서는 확실히 서구적인 느낌이 났으나, 그 모든 것을 한곳에 모아보니 묘하게 동양적이었다.

    그 얼굴 위로 내려앉은, 짧게 깎은 백발이 사내의 인상을 더욱 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백발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결코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내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사내에게서 풍기는 그 이상한 감각은 단순히 생김새로 인해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여유와 불안이 뒤섞여 있는 듯 이상한 감각.

    최정훈은 사내에게서 그러한 것을 느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을.

    "누구냐!"

    보통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정훈이란 남자는 말이다.

    이런 빤하고 통속적인 대사를 늘어놓으면서도 최정훈은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행동 패턴의 선택권이라는 것은 보통 여유에서 나온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낙석이 일어난다면 차를 세운다든가 길을 돌아간다든가, 아니면 옆으로 비켜갈 곳을 찾는다든가 하는 여러 방법을 고민할 수 있겠지만, 바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바위를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빤해진다.

    최정훈은 자신이 지금 그런 상태라고 판단했다.

    사내를 본 순간, 이상하게 초조하고 불안하고 당장에라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지혁에게서 느껴지는 불안함과는 다른 종류.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최정훈은 깨달았다.

    …그 차이를.

    이지혁이 걸어 다니는 폭탄이라는 느낌이라면, 저 사내는 그저 악의(惡意)가 뭉쳐 형상화된 존재 같았다.

    "누구냐고 묻는 말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대답할 말을 찾는 것도 쉽지 않네요. 음, 하지만 첫 만남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지금 제가 불리는 이름은 아마 이것이 가장 유명할 겁니다. 알파. 예, 제 이름은 알파입니다."

    알파라고 자신을 지칭한 사내는 싱그럽게도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최정훈의 머리카락이 쭈뻣쭈뻣 섰다.

    뭘까.

    대체 뭐가 이리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흐음?"

    이지혁이 옆으로 한 발 디디며 알파를 향해 몸을 돌렸다.

    "뭐야, 너?"

    후우…….

    최정훈은 그 순간 깊게 숨을 쉬었다.

    숨을 멈췄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만큼 긴장하고 있던 것이다.

    이지혁이 앞을 막아주면서 겨우 알파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었다.

    '나만 이런가?'

    최정훈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해민도 얼굴이 살짝 질려 있고, 김다현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오히려 최정훈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서아영마저 은은하게 몸을 떨었다.

    태연한 것은 오직 이지혁뿐이었다.

    아니.

    그 이지혁조차 평소보다 확연하게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저런 표정을 처음 본다고 느낄 정도로.

    "뭐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사람입니다' 정도로 대답이 될까요?"

    "아, 싫은 타입이네."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물었다.

    "됐고, 뭐가 곤란하다는 건데?"

    "그 앞에 계신 분은 제가 데려가야 하거든요."

    "하?"

    "텔레포터는 매우 귀중한 인재입니다. 제게 꼭 필요한 사람 중 하나죠. 그러니 죄송합니다만, 그의 처분을 제게 일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아주 창의적인 개소리를 들려준 보답으로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혹시 죽빵 좋아하나?"

    "싫어하지는 않는 편입니다만, 지금은 별로 당기지 않네요. 그런데 여러분, 제 말이 잘 이해가 되십니까?"

    "…뭐?"

    "음, 이거… 편리한 능력이네. 외국인과 소통이 이리 쉬울 줄은 몰랐어요. 재미있네요."

    뭐라는 거야, 저거?

    최정훈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이지혁의 얼굴에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데려갈 생각이면 데려가 보지?"

    "물론입니다."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변화가 일어났다.

    콰득!

    바닥이 갑자기 솟아오르더니, 이지혁의 촉수를 후려쳐 날렸다.

    "흠?"

    바닥을 뚫고 나타난 이가 이지혁의 촉수를 날려 버리고는 남자를 잡았다.

    "타깃 확보. 텔레포트 시전."

    그 말을 듣자마자 사내가 텔레포트를 시전하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

    최정훈이 멍한 목소리로 탄식을 내뱉었다.

    어떻게 확보한 놈인데 이리 쉽게 놓치다니!

    이지혁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알파를 바라보았다.

    텔레포트 시전 전에 막으려는 의도였으나 매우 시기적절하게 압박이 들어왔다. 그게 아니라면 이리 간단히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생 좀 한 놈 같아서 웬만하면 좋게 대우해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 다만, 이왕이면 제가 저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주둥아리에 기름칠한 것도 마음에는 드는데……. 왜 기분이 좀 나쁜 것 같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데?

    그런데도 이지혁이 아직 놈을 박살 내버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분명 거슬리기는 하는데,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싸우러 온 자를 구분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었다. 이지혁은 언제나 적의에 노출되어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이놈에게서는 악의는 느껴지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뭘 하자는 건지 확실하게 해주면 좋을 텐데?"

    "아, 실례했습니다. 제가 직접 나서는 것은 거의 일 년 만인 것 같네요. 뭘 해야 할지 저도 조금 애매했습니다. 그쪽이 이지혁 씨죠?"

    "어, 그래."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지혁 씨. 저는 알파라고 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단체 하나를 이끌고 있죠."

    "여기서?"

    "아뇨, 아뇨. 본거지는 미국입니다. 아메리카죠. 어, 이 어감이 전달되었나 모르겠네요. 사실 지금 저는 영어로 말하고 있거든요."

    "알아. 어떤 놈이 번역 마법을 걸었군. 오랜만이야."

    "그럼 대화가 쉽겠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지혁 씨, 저희와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일단 명심해야 할 걸 알려주지."

    "예?"

    "첫 번째로 언어 이전에 니 대가리가 매우 멍청해서 그런지 앞뒤 설명을 자꾸 빼먹고 나불대는 거 같은데, 말은 사람이 알아들으라고 하는 거란다, 아가야."

    "……."

    "둘째, 사람이 뭔가 제안할 때는 두 가지를 먼저 해야 하는 거란다. 첫째는 제안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이득으로 제안을 하는 것인가."

    "그렇군요."

    "그 통역 마법으로 잘 알아 처먹었으면 머리를 다시 굴려보는 게 어떨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현명하신 분이시군요."

    내가 현자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아.

    "음, 우선 첫 번째를 답변드리자면, 저는 혁명군 R. F를 이끌고 있는 알파입니다. 저희의 혁명이라는 것은 딱히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정당한 권리를 받아내자는 거죠."

    "권리?"

    "능력자들의 권리."

    알파의 눈이 빛났다.

    "전 세계의 능력자들은 일반인에 비해서 우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주도권을 쥐지 못한 채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죠. 우선은 뭉치지 못해서 화력 병기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가족은 능력자가 아니기에 쉽사리 인질이 된다는 것 정도? 그 외에도 이유는 많지만, 거의가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있는 실정이죠."

    "그거, 간만에 공감 가는 발언인데?"

    "그 비상식적인 상황을 바꾸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음, 뭘 드려야 할까요? 자유와 권리라고 하면 비웃으실까요?"

    "이미 충분한데?"

    "그렇네요. 재산도 충분하신 것 같고. 음, 그럼 저희가 드릴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왠지 이거… 알 거 같은데?"

    "네, 목숨이죠. 살려드리겠습니다."

    이지혁은 낄낄대며 웃었다.

    살려준다라…….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단어란 말인가.

    뭔가 화가 나기보다는 그리운 감정까지 드는 말이었다.

    "흐음……."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된 이지혁이 알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결국은 날 영입하고 싶으시다?"

    "정확합니다. 소문은 많이 들었거든요."

    누구한테?

    이지혁이 돌아보자 최정훈이 손사래를 쳤다.

    "저 아닙니다."

    "…맞는 거 같은데?"

    "요즘 자꾸 저만 걸고 넘어지시는데! 저, 생각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게이트가 열리는 족족 피해 없이 사라지는데, 이상하게 생각 안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각국 위성이 한국 게이트는 다 찍고 있을 겁니다."

    "아… 그건 생각 못했네."

    확실히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저번에 일본에서 다녀간 건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내가 한 말도?"

    "예."

    "그럼 내가 할 대답도 똑같다는 거 알겠네?"

    "흐음……."

    알파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넘길 것도 없는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으로 보아 습관인 듯했다.

    "금전적으로는 딱히 드릴 게 없습니다. 대신 우리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가지고 계신 금전이 제 기능을 잃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막대한 부에 상응하는 것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채권은 안 받는 주의인데?"

    "아쉽네요. 그럼 결렬인가요?"

    "결렬이라……."

    이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한 가지 말하겠는데……."

    "네?"

    "데려간 놈을 지금 당장 이곳으로 되돌려 놓지 않으면 네 모가지를 뽑아주겠다는 건 장담하지. 나는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거든?"

    이쪽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아니, 백 년 정도 전부터는 이런 대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보니 좀 신선했다.

    그래서 개소리를 들어주고 즐겨주었다만, 이제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으음, 글쎄요. 가능하실까요?"

    "뽑아줄까?"

    "아뇨, 아뇨. 저를 죽이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이지혁 씨는 다른 능력자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무언가가 있으니까요."

    "……."

    "그럼에도 지금은 저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나와보시죠?"

    알파는 여유롭게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죠?"

    "가보죠."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텔레포터라 하더라도 빠져나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정말 단숨에 사지를 찢어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 마음이 그저 생각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지혁도 알게 되었다.

    알파를 따라 밖으로 나가고부터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심 한복판.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수십 개의 게이트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하나 죽이는 거야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장담하건대, 저는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지혁 씨가 저를 죽이려 한다면 저 게이트에서 몰려나온 몬스터들이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걸 방관해야 하죠."

    이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선택하시면 됩니다. 저를 죽이실지, 사람을 살리실지. 아주 간단하죠?"

    알파의 환한 미소와 함께 게이트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

    이지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새끼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 * *

    빛을 발하며 열리기 시작하는 게이트를 보며 이지혁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급할수록 사람은 침착해야 한다.

    그 확고부동한 진리를 육체가 먼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전투 속에서 터득된 긴장이 절로 살아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이나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니까.

    이지혁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가슴속에서 들끓던 열이 순간적으로 식으며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움직여야 피해를 줄일 수 있는가.

    "결정하셨나요?"

    그리고 저 이죽거리는 놈의 주둥아리를 어떻게 해야 뭉개놓을 수가 있는가!

    고민은 짧았다.

    "정해민."

    "으응?"

    "최정훈과 상의해서 지금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능력자를 최우선적으로 확보, 이리로 합류시켜라. 당장."

    "응! 알았어!"

    "서아영."

    "예."

    "우측 게이트 밀집 구역으로부터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보이는 인구 밀집 구역으로 통하는 길을 방어해. 한 마리도 뒤로 넘기지 마."

    "예!"

    이지혁이 김다현을 보았다.

    "패스 드리프터."

    "예, 형님."

    "넌 뛰어. 몬스터들이 향하는 것보다 더 빨리 움직여서 걸리는 사람은 모두 구해내라."

    "알겠습니다."

    "최정훈 씨는 정해민과 함께 움직여요. 최대한 빠르게 협조 요청해서 대피 통제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준비는 끝났다.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알파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리를 꼬고 건물 벽에 기댄 채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이트를 여는 능력?

    아니, 아니야.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럼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어떤 것과 최소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인데…….

    "넌 나중에 두고 보자."

    "하지만 그게 쉬울까요? 저 게이트를 모두 막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미국이라 해도 피해 없이 막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당신 혼자서 막을 수 있나요?"

    "너 나를 안다고 했지."

    "물론입니다."

    "정말 알아?"

    "…네?"

    "내가 어떤 놈인지 정말 알고 있어?"

    이지혁의 물음에 알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여주지."

    특별하게 말이야.

    그 두 눈 뜨고 잘 보라고.

    웬만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

    이지혁의 육체에서 검은 마나의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다.

    이런 기분.

    진짜 마음껏 날뛸 수 있는, 그런 기분 말이다.

    게이트에서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몬스터 떼를 보며 이지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으허어어어!"

    최창식은 전력을 다해 달렸다.

    뒤를 힐끗 돌아보자 입에 거품을 문, 푸른 돼지 같은 것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뭐냐고오오!"

    이게 뭔 일인가!

    게이트가 열렸으면 대피 명령을 내릴 것이지, 다짜고짜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뛰어나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최창식은 욕과 비명을 번갈아 지르며 다리가 부서져라 달렸다.

    그냥 어두워진 김에 번화가로 놀러 나왔을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 만만해 보이는 놈들 두엇쯤 구석으로 끌고 들어가 용돈이나 좀 충당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이런 꼴을 당해야 할 정도로 큰 죄는 아니잖은가!

    "살려줘어어!"

    그리고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자신을 쫓아오는가.

    기분 탓인가? 정말 이거… 기분 탓인 거겠지?

    최창식이 골목으로 몸을 꺾었다.

    그러자 돼지머리들이 최창식을 따라 방향을 꺾어 쫓아오기 시작했다.

    "기분 탓이 아니잖아아아!"

    왜!

    최창식이 뭔 죄를 그리 지었다고!

    아무리 열심히 달리고 달려도 거리가 벌어지기는커녕 점점 좁혀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다리에 힘이 풀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그 순간, 다리에 뭔가가 걸렸다.

    "큭!"

    최창식의 몸이 바닥으로 마구 굴렀다.

    구르는 와중에도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아프고 자시고 간에 멈추는 순간 죽는다! 어떻게든 일어나서 다시 달려야…….

    카아아아아아!

    하지만 몸을 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돼지머리들이 그의 등을 뒤덮었다.

    "으아아아아!"

    날카로운 이빨이 어깨를 파고들며 가져다주는 극통 앞에 최창식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다.

    "숙여!"

    "어?"

    그 순간, 그를 향해 불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이 미친!

    욕이 절로 나왔지만, 그가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최청식은 돼지머리를 한쪽 팔꿈치로 최대한 밀어내며 다른 팔로는 머리를 감쌌다.

    화르르륵!

    끼에에에에엑!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압력이 줄었다는 걸 느끼자마자 최창식은 필사적으로 앞으로 기었다.

    "후욱, 후욱……."

    솜이 차다 못해 의식이 반쯤 희미해질 지경이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팔다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니 현실감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요."

    "네? 아! 네!"

    최창식이 멍한 얼굴로 눈앞에 서 있는 미녀를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와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몸매, 그리고 아름답기 짝이 없는 얼굴까지.

    '서아영?'

    TV에 매일 나오다시피 하는 그 얼굴이 지금 최창식의 앞에 있었다.

    아픔조차 잊혀질 만큼 뭔가 강렬한 느낌이 최창식을 휩쓸고 지나간다.

    망할 텔레비전.

    실물의 반도 표현 못하잖아!

    "저쪽으로 도망가세요."

    "네?"

    서아영이 인상을 확 썼다.

    "저쪽으로 가라고! 새끼야!"

    "아… 네."

    TV는 그녀의 얼굴을 반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소문은 그녀의 성격을 완벽하게 옮기고 있었다.

    지랄마녀.

    그 말 그대로의 성격을 드러내는 서아영을 힐끔 바라본 최창식이 절뚝이며 뛰기 시작했다.

    그런 최창식의 등 뒤로 거대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 * *

    "어이쿠!"

    김다현은 전력으로 달렸다.

    패스 드리프터라는 말처럼 그의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지혁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팬텀 스티드로 쓰겠다고 할 만큼이나 빨랐다.

    이지혁에게는 불행이고, 김다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지금 역대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김다현을 이지혁은 보지 못했다.

    파아아앙!

    공기가 몸과 부딪치며 엄청난 파공음을 만들어냈다.

    육체가 공기의 벽에 충돌하면서 미친 듯이 떨려왔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으아아앗!"

    김다현이 또 하나의 사람을 달려드는 몬스터의 이빨에서 끌어당기며 몸을 날렸다.

    "큭!"

    워낙 빠른 속도다 보니 팔로 사람을 끌어내는데도 팔이 부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구해지는 사람도 비슷한 충격을 받겠지.

    하지만 죽는 것보다야!

    또 하나의 사람을 위기의 순간에서 건져 내 몬스터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려놓은 김다현이 이를 악물었다.

    노력하고 있다!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다.

    그런데 빌어먹을!

    구해내는 사람보다 구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으아아아!"

    "진정해, 새끼야!"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혁규!"

    "혁규 형이지. 이……."

    스핏 파이어의 불꽃의 대포가 몬스터들을 향해 날아든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아!"

    콰아아앙!

    불꽃의 대포가 몬스터들을 휩쓸며 거대한 폭음이 터진다.

    "제기랄, 늦었잖아!"

    "내가 뭔 예언자냐! 갑자기 터진 게이트 막으려고 대기하게? 연락 받고 최대한 빨리 온 거야!"

    "어떻게 좀 해봐!"

    "말이야 쉽지."

    눈이 없나?

    안 보이나?

    저기, 미칠 듯이 쏟아져 나오는 괴수들이 보이지도 않냐고!

    이건 까딱하면 서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날아갈 각이다.

    "제기랄!"

    절망과 공포가 어린 눈으로 윤혁규가 다시 한 번의 대포를 준비할 때 즈음.

    카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듯 거대한 비명성과 함께 거대한 검은 매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저거?"

    그도 분명 알고 있는 매였다.

    이지혁의 소환수!

    "저게 저리 컸나?"

    단순히 커진 게 아니다. 외형조차 달라졌다.

    그들과 훈련을 할 때는 그저 검은 매의 형태였으나, 지금은 뭐랄까…….

    매와 괴조를 반쯤 섞어놓은, 전설에나 나올 것 같은 괴물의 모습이랄까?

    '저쪽에 있는 건가?'

    이지혁의 위치를 짐작한 스핏 파이어가 은근히 반대 방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지금은 저곳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흐음……."

    이지혁의 육체가 검은 연기로 뒤덮이는 것을 본 알파가 흥미롭다는 듯 주시했다.

    '이건 뭐지?'

    수많은 능력을 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이적을 보고 실행해 왔다.

    그럼에도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지금껏 알고 있던 것들과는 뭔가 그 궤를 달리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전혀 다른 능력.

    지금 그게 알파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가지고 싶군.'

    저 능력을 말이지.

    알파가 가볍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 순간.

    이지혁을 뒤덮고 있던 검은 연기들이 용권풍처럼 휘돌아 승천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다.

    그 힘의 근원도, 그 힘이 가진 파괴력도…….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다.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육체 구석구석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하고 소리치고 발악한다.

    도망쳐라!

    저기에서 최대한 멀어져라!

    * * *

    평소 알파는 본능에 충실했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 본능을 무시하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본능에 충실한 걸지도 모른다.

    위험하다는 경고신호보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니까.

    '자, 보여줘 봐라.'

    네가 도대체 누구인지.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야.

    고오오오오오오!

    용권풍처럼 회전하던 마나들이 이지혁의 주변에 검은 홀들을 만들어냈다.

    우웅!

    홀들이 열리며 그 안에서 시커먼 짐승이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거대한 검은 매와 검은 재규어들. 네발 달린 것들과 하늘을 나는 짐승 수십 마리가 뛰쳐나와 몬스터들을 향해 광포하게 달려들었다.

    까가가각!

    귀청을 뒤트는 마찰음과 함께 이지혁의 발아래에서 강철과도 같은 수십 줄기에 촉수들이 뻗어 나간다.

    크륵!

    자신에게 다가오는 촉수를 본 오식이가 이를 드러냈다.

    푸욱!

    육체에 꽂히는 촉수.

    짧은 고통이 지나고, 육체 깊숙이 들어차는 마나를 느끼며 오식이가 거대한 포효를 뿜어냈다.

    커어어어어엉!

    순식간의 원래의 육체를 회복한 오식이가 붉은 안광을 줄줄이 뿌려내며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키에에에엑!

    또 다른 게이트에서는 종속의 인을 박은 몬스터들이 차례차례 등장하여 괴성을 뿜어냈다.

    "아니……."

    저게 뭐지?

    알파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능력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했다. 자세히는 듣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저건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적어도 인간과 몬스터의 싸움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저건 군단과 군단의 싸움이 아닌가.

    몬스터와 몬스터가 서로 이를 드러내고 들이닥친다.

    살이 갈라지고, 피가 뿜어지고, 목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 전율적인 광경에 알파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 엘타."

    그 순간, 이지혁의 양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우우우웅!

    느껴진다.

    이지혁의 발아래로 뻗어 나간 촉수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더니, 이지혁의 육체로 쑤셔 박고 있었다.

    그런 후, 이지혁은 그 힘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전환한다.

    우우우웅!

    이지혁의 머리 위로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생겨나더니, 점차 그 덩치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저걸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하하하……."

    정도를 벗어난 힘 앞에서 알파는 허탈하게 웃었다.

    "장난 아닌데?"

    알파는 전신을 파고드는 소름에 전율하며 소리쳤다.

    "그래, 좀 더! 좀 더 보여 달라고! 하하하하핫!"

    이지혁의 육체를 타고 오른 마나들이 머리 위에서 뭉쳐 화염처럼 타올랐다.

    세상을 모조리 불살라 버릴 겁화처럼.

    * * *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라는 게 있다.

    압도적인 전율.

    알파는 그것을 느끼며 환희에 차올랐다.

    이게 힘이다.

    그래, 이것이 힘이다.

    이지혁이 만들어낸 검은 마나의 덩어리들이 화염처럼 타오르더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쓸어라."

    낮고 묵직하고…….

    감정의 편린이라고는 한 조각도 담기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마나의 덩어리들이 살짝 응축했다가 퍼지더니, 거대한 화염의 비를 세상에 내리기 시작했다.

    크에에에에에에!

    키아아아아아!

    화염의 비에 고스란히 얻어맞은 몬스터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어설프게 빗맞은 것들은 꿈에 나올까 두려울 만큼 절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고 긁으며 절규했다.

    군단?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명백한 착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의 방식은 군단을 만들어내서 싸우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가 소환한 것들이 너무도 강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아니다.

    저 끔찍한 능력자의 진정한 방식은, 저 힘으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몬스터와 소환수들은 단지 그사이의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하……."

    스무 개가 가까운 게이트가 열렸으나, 거기서 쏟아져 나온 구름 같은 몬스터들이 일순간에 너무 깔끔하게 정리되어 버렸다.

    아니, 깔끔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체액과 피와 거품을 줄줄이 흩뿌리며 요동치는 저 괴수들이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어울리겠는가.

    지옥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지옥이 있다면 아마 이런 곳이겠지.

    알파는 육체를 파고드는 흥분에 몸을 전율했다.

    "하. 하. 하."

    메마른 웃음이 나온다.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능력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다.

    어떻게 이런 자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지?

    그것도 감쪽같이 자신을 숨기면서 말이다.

    "놀라워."

    "그래?"

    "하?"

    알파는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맹수가 목 바로 뒤에서 이빨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순식간에 목이 달아날 것 같은 긴장감? 공포?

    아니, 아니야.

    그런 저급한 감정이 아니야.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근원적인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경외감?

    조악하다.

    이 기분을 표현하기에 인간의 언어 따위는 너무나도 조악했다.

    "감탄했습니다."

    "그래?"

    "예, 정말 감탄했습니다. 당신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군요."

    "개소리지. 난 인간이다. 누구보다 더."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인간을 초월하지 않았나요?"

    피식.

    이지혁은 웃어버렸다.

    인간을 초월해?

    평범한 인간이고 싶어서 그 끔찍한 세월들을 버텨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칭찬일지 모르겠지만, 이지혁에게 있어 인간을 초월했다는 말은 그저 모욕일 뿐이었다.

    그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세계와 싸워온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좋아. 너를 설득하는 것도 웃기는군."

    "어떠십니까?"

    "뭘?"

    "저와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직 그 소린가?"

    알파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이지혁을 향해 양팔을 쫘악 벌렸다.

    "당신은 세계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흠?"

    "당신이 앞에 서고 제가 돕는다면, 이 세계를 손에 넣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당신의 이름 앞에 모든 것이 재편되겠지요.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지 않습니까?"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쾌락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쾌락도 권력이 가져다주는 달콤함만은 못하지요. 세상의 정점에 선 이들이 마지막에 무엇을 탐했는가를 본다면, 결과는 빤하지 않습니까? 제가 돕겠습니다. 당신이 정점에 서도록, 당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물들일 수 있도록. 어떻습니까?"

    이지혁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해."

    "…네?"

    "안 해."

    "그러지 마시고……."

    알파는 조금은 비굴한 어투로 살랑거렸다.

    "그리 어렵지 않다니까요. 제가 돕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니가 뭔데?"

    "제가 생각보다 능력 있습니다. 보좌관으로 딱이지요."

    "그리 능력 있으면 니가 하지?"

    "하, 사람이 그릇이란 게 있다 보니……."

    "어, 그래. 주제 파악은 잘돼서 좋은데, 난 안 하니까 다른 데서 알아봐."

    "…진짜요?"

    "응."

    "에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시지."

    "응, 안 해."

    "…하."

    알파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왜 안 하겠다는 겁니까?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데!"

    "필요 없어."

    "…예?"

    이지혁이 손사래를 쳤다.

    "야, 그거 진짜 힘든 거다. 신경 쓸 게 한두 갠 줄 아냐. 어휴, 두 번은 못한다."

    알파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니, 이 새끼…….

    대체 뭐하는 새끼지?

    "그리고……."

    이지혁이 가만히 알파를 보며 말했다.

    "너도 어차피 세계를 손에 넣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하잖아?"

    "……."

    "니가 하고 싶은 건 소유가 아니라 파괴지?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거잖아."

    알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지혁의 말은 분명히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을 한둘 본 게 아니다. 개중에는 능력이 있는 편인 거 같은데, 음……."

    이지혁이 남은 마수들을 정리하고 있는 소환수와 오식이들을 슬쩍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이용당해 주고 싶기는 한데, 내가 워낙 눈치가 빨라서 유감이네. 그래서 할 말은 다 했나?"

    "후회하실 텐데요."

    "잔정도 많으시지, 남 걱정도 다 해주시고. 그런데 보통은 말이야……."

    턱.

    이지혁의 손이 알파의 목을 움켜잡았다.

    "이럴 땐 자기 걱정부터 하셔야지요, 오지라퍼 씨."

    우드드드득!

    목뼈가 비틀리며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끅, 끄윽!"

    알파의 몸이 마구 뒤틀렸다.

    이지혁의 팔을 움켜잡은 양손에 잔뜩 핏줄이 섰다.

    바짝 세운 손톱이 이지혁의 팔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이지혁은 개의치 않았다.

    "다 좋은데 말이야, 첫 단추를 잘못 뀄어. 내가 돌려놓으라고 했을 텐데? 우선 그거부터 했어야지."

    그게 아니었으면 죽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지.

    게이트 때문에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 같은데, 죽기는 죽어야지.

    "크으으윽!"

    알파의 손에서 새하얀 뇌전이 튀어 올랐다.

    "얼씨구? 실드."

    이지혁이 실드를 펼쳐 알파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바닥에서 숨을 몰아쉬는 알파를 보며 이죽거렸다.

    "아팠어?"

    "크흐흐흐."

    알파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지혁 씨,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저도 가만히 참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참지 말라니까 그러네."

    "…말로는 안 되겠군."

    알파가 허리를 세웠다.

    "반쯤 죽여서 끌고 가보죠. 두개골이 열려서 거울로 내 뇌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할 상황이 되어서도 싫다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음, 좋은 방법인데… 내 생각은 좀 달라."

    "뭐가 말입니까?"

    "죽이진 마라."

    "네?"

    커어어어어엉!

    거대한 울부짖음과 함께 알파의 등 뒤에서 오식이가 튀어 올라 그대로 어깨를 물어뜯었다.

    "크아아아악!

    오식이의 이빨이 알파의 목부터 옆구리까지를 그대로 뜯어냈다.

    으드드득.

    오식이의 입 앞에서 잘려 나간 몸뚱아리의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혼난다?"

    퉤!

    오식이가 입 안에 물고 있던 알파의 팔을 뱉어냈다.

    "그래, 착하지."

    오식이를 칭찬해 준 이지혁이 알파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남은 한 팔로 상처를 필사적으로 짓누르며 바닥을 기던 알파가 자신의 얼굴 앞에 다가온 발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입으로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가 그의 미소를 깔끔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많이 아파?"

    "크크큭, 육체적인 고통 따위는… 쿨럭! 익숙한……."

    "아, 그래?"

    이지혁이 알파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뭐를?"

    "당해보면 알지."

    이지혁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알파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 대던 알파가 이내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눈을 까뒤집더니, 소리 없는 절규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육체적인 고통이 익숙하다니, 정신적으로 괴롭힐 수밖에 없잖아. 그지? 그런데 이만큼 효과 있는 애들은 잘 없던데, 너… 트라우마가 굉장히 심하구나."

    이지혁은 이죽거리며 알파를 툭툭, 걷어찼다.

    "참, 어느 동네나 힘 좀 있다 싶으면 마왕 흉내 한 번 내보고 싶어 하는 놈들이 많아서 문제라니까. 아서라, 나는 진짜 마왕이거든."

    자격증도 있어.

    진짜야.

    아니, 진짜라니까?

    허참, 보여줄 수도 없고, 진짜!

    "자, 어디까지 버틸까? 5분 이상 버티면 칭찬해 줄게."

    어차피 들리지도 않겠지만 말이야.

    알파는 크게 몸을 뒤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경련할 뿐이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남아 있는 마수들을 향해 촉수를 날렸다.

    그나마 레벨 5가 없어서 빨리 끝낼 수 있던 게 다행이었다.

    아니, 레벨 5가 있었으면 종속의 인으로 군단을 늘릴 수 있었는데…….

    아쉽다.

    "흠……."

    남아 있는 잔존 마나와 마수들을 모조리 빨아들인 이지혁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반쯤 초토화되어 버린 도시의 경관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민간인의 피해가 크지 않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탁.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경련하던 알파가 축 늘어졌다.

    하아, 하아…….

    낮은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뭐, 분명 너도 어디선가 심하게 당해서 반감을 품은 거겠지만, 복수는 목적과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하는 거란다."

    이지혁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알파의 목에 발을 가져다 댔다.

    "그걸 잘못 정하면 이리되는 거지."

    우드득.

    목뼈가 으스러진 알파의 몸이 천천히 굳어갔다.

    죽음.

    간단하나 절대적인 상태 이상.

    "음, 너무 쉽게 죽인 것 같긴 하지만."

    죽기 전에 저주를 통해 적어도 수십 년은 고통 받았을 테니, 뭐, 이 정도로 끝내주지.

    베라프였다면 깔끔하게 마계로 영혼째 넘겨 버렸을 테지만 말이야.

    이지혁이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이들에게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밥 먹자. 배고프다."

    깊고 길었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쿨럭."

    사내는 마른기침을 토했다.

    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소매로 훔쳐 낸, 긴 백발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하군."

    "말했을 텐데?"

    사내의 앞에는 작은 아이 같은 이가 서 있었다.

    하지만 긴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말려 올라가 있는 머리와 어깨에 돋아난 박쥐의 날개가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에이트가 죽었다. 손도 한 번 못 써보고 말이야."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도 있군. 네가 말한 정도는 아니야. 지금이라도 목을 따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경계하라는 거지? 오히려 네가 더 강하지 않나?"

    "아니. 나는 지금 그저 허세만 부리고 있을 뿐이지. 본체가 아닌 정신체를 다스릴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고."

    "그래? 아쉬운 소리군."

    "그리고 한 가지 더 경고하자면……."

    "음?"

    아이가 음산한 어투로 말했다.

    "그를 얕보지 마라. 그는 아흔아홉 번째 마왕, 지옥의 강탈자, 그리고 세계에 멸망을 가져오는 자다. 지금은 비록 그가 예전 모습에 비할 바 없이 비루하고 약하다고는 하나 그를 이루고 있던 정신만은 예전과 다르지 않을 터."

    "흐음……."

    "본디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악마인 너로는 할 수 있고?"

    "그가 자신의 힘을 오롯이 되찾는다면, 나 역시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처분을 기다려야 할 티끌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군. 좋아, 저자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어쩔 셈이지?"

    "간단해. 저자가 힘을 모두 되찾으면 못 막는다면서?"

    "그렇다."

    "그럼 힘을 되찾기 전에 죽여야지."

    긴 백발의 사내는 싱긋 웃었다.

    "한 번의 죽음에 대한 복수도 할 겸 말이야."

    그의 이름은 알파.

    하나이되, 하나가 아닌 자였다.

    * * *

    [이번 게이트 출현 사태의 사상자는 총 일천에 달할 것이라 집계되고 있습니다. 실종자와 아직 신고가 되지 않은 이들을 감안한다면, 피해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 예상됩니다. 정부는 이번 사태에 유감을 표하며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어이쿠."

    박선덕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블랙 먼데이 이후 이렇게 사상자가 많이 난 적은 없었다.

    TV만 틀면 그 이야기뿐, 드라마고 예능이고 모조리 취소되고 모든 채널에서 생중계로 희생자들의 구출에 대한 방송만이 나오고 있었다.

    희망의 끈을 버리지 못하고 채널을 돌리자 또 다른 뉴스가 나온다.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결국 능력자인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KSF 측은 경찰에 최대한 협조하여 범인을 쫓았으나 결국은 마지막 순간에 놓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경찰은 경찰과의 공조를 하지 않은 KSF의 독단적인 행동이 범인의…….]

    * * *

    삑.

    박선덕은 TV를 꺼버렸다.

    어디를 틀어도 속 시원한 일이 없었다.

    이런 큰 악재가 연속으로 터지다 보니 비리 정치인들만 좋아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었다.

    게다가 보도 방향이 뭔가 교묘하게 이 사태를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KSF, 까놓고 말해 NDF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쩜 저렇지?"

    단 하루 만에 세상이 달라진 기분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TV에서 능력자들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비난의 말을 쏟아내고, 예능을 가득 채우던 능력자 출신 아이돌이나 배우들은 일절 볼 수가 없다.

    예능이 모두 정지된 상황이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휴대폰을 켜서 포털에 들어가 보니 댓글이 모조리 능력자들의 무능에 대한 성토로 가득 차 있었다.

    개중에는 연쇄살인범 같은 놈들이라고 다짜고짜 적의를 보이는 부류가 있는 한편, 저런 식으로 능력자들이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면 막을 방법이 있는가 하는, 진지한 성토가 오가는 곳도 있었다.

    다만, 어느 쪽이든 간에 능력자들에게 우호적인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아들."

    박선덕은 조심스레 일어나 아들의 방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결과가 이러니, 얼마나 상심이 클까.

    '안 봤으면 좋겠는데.'

    악성 댓글은 안 보는 게 가장 좋았다. 괜히 보면 마음만 상한다.

    그나마 어떻게 고쳐 볼 수 있는 부분이라면 쓴 약이라도 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악성 댓글들은 그저 감정의 분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박선덕은 조심스레 이지혁의 방에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아들?"

    이지혁의 자세를 본 박선덕은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 한 손은 마우스를 잡고, 다른 한 손은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저 자세.

    지난 몇 달간 봐온 이지혁의 시그니처 무브였다.

    "또 게임하니?"

    "하! 좀! 제발 좀! 갱 오지 말라고!"

    "으응?"

    "오지 말라는데 왜 자꾸 오냐고! 같이 죽는다고, 이 등신아!"

    "…엄마가 괜히 왔구나."

    "아,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가라고!"

    "그래, 엄마가 미안하……."

    "꺼지라고오!"

    "이 새끼가?"

    박선덕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 * *

    "휴……."

    정해민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스케줄이 없어졌다고요?"

    "그렇게 됐다."

    "아니, 방송이 안 나가더라도 녹화는 해야 하는 거잖아요. 녹화까지 취소된 거예요?"

    "녹화는 예정대로 진행되는데……."

    "네?"

    "우리만 빠졌다. 말을 해도 안 통하네. 땜빵이라도 잡아보려 했는데, 같이하겠다는 곳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우리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더라. 다른 팀들도 비슷한 처지인 모양이야. 어쩌겠니, 여론이 안 좋은데. 일단 지나가는 소나기는 피해야지. 너희도 좀 자숙하고 있어."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자숙을 해요?"

    "연예인이란 건 원래 잘못을 하고 안 하고와 관련이 없어. 그냥 욕한다 싶으면 숙이는 게 최선이야."

    "불합리해……."

    매니저의 말이 현실적으로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가 간다고 해서 감정마저 따라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화가 나고 답답하다.

    이럴 때는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하는데, 갈 곳도 마땅히 없었다.

    이런 시기에 놀러 다닌다고 사진이라도 찍히면 비난 여론이 한번에 날아들 테니까.

    마녀사냥할 거리를 일부러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는 너무 갑갑해서 나온 곳이, 결국 능력자 거주구였다.

    이곳에는 일반인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파파라치도 따라붙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건데…….'

    왜 또 정신차려 보니 여기인가.

    이지혁의 집 앞에서 발을 멈춘 정해민이 한숨을 푹 쉬고는 문을 바라보다가 저벅저벅 걸어 현관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한참을 기다렸는데 반응이 없다.

    지잉~

    인터폰은 반응이 없는데, 뭔가 열리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갸웃한 정해민이 바라보자 문이 서서히 열렸다.

    "으응?"

    열린 문 뒤편으로 뚱한 표정을 한 오식이가 네 발로 서 있었다.

    "…너 언제 여기로 옮겼니?"

    NDF 정문을 지키고 있지 않았니?

    오식이는 쩌억 하품을 하더니 쫄래쫄래 걸어 마당 한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개집 안으로 들어갔다.

    "목줄도 없는데, 착하기도 하지."

    오거가 말이야.

    이 집에 도둑은 못 들겠네.

    문 앞에 써놔야 하는 거 아닌가?

    오거 주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사람이 문을 안 열고 오식이가 여는 거지?

    안에 사람이 없나?

    현관으로 가 손잡이를 돌려보자 다행히 잠겨 있지는 않았다.

    정해민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보았다.

    바로 어제, 지도에서 사라질 뻔한 서울을 구해낸 지상최강의 사나이를.

    "아, 엄마! 귀! 귀귀! 귀!"

    "아이고! 내가 이런 거를 배 아파서 낳았지! 내가 이런 거를!"

    "아니, 엄마… 그게 아니고! 저 새끼가 갱 오지 말라는데, 자꾸 오잖아! 아, 귀! 엄마, 귀!"

    "니 나이가 몇 갠데 아직까지 게임이나 하고, 이놈아! 응! 철 좀 들어라!"

    "아니, 요새는 나이 쉰 돼서도 게임하는 시댄데! 내 나이가… 아, 좀 많긴 한데! 여하튼!"

    귀를 잡은 채 등짝을 후려쳐 대는 무시무시한 콤비네이션 앞에서 멸망의 좌는 불판 위 오징어처럼 몸을 돌돌 말았다.

    "…어머님."

    "응?"

    정해민을 발견한 박선덕이 어색한 얼굴로 이지혁의 귀를 놓았다.

    "어머, 왔어요?"

    "네."

    조금 전에요.

    제가 너무 일찍 왔네요. 아니, 차라리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봐요.

    "연락도 없이. 응? 문이 열려 있었나?"

    "오식이가 열어줬어요."

    "오식이?"

    "…강아지요."

    "오호호호홋, 해민 씨도 농담 잘하는구나. 재밌게."

    농담이라, 농담…….

    정해민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어머니.

    마당에 오거가 살아요.

    모르시죠?

    예. 모르시는 게 나을 거예요.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예원이 있나 보러 왔어요."

    그제야 대미지를 회복한 이지혁이 소리를 빽! 질렀다.

    "니가 예원이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아침부터 남의 집을 들락거려!"

    퍼억!

    사랑하는 어머니의 미들킥에 침을 뿌리며 침몰한 이지혁을 두고 박선덕이 차갑게 말했다.

    "내 집이다."

    그렇습죠.

    이지혁은 갈비가 나가지는 않았는지 만져 보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 갈수록 폭력적이야."

    "니가 나를 이렇게 만들고 있어."

    "남도 보는데!"

    "어머? 그렇지. 오호호홋, 미안해요. 너무 편해서……."

    "아니에요, 어머니.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보고 있으니 너무 좋아요."

    "응? 그래요?"

    "네. 제가 어머니가 없거든요."

    "어머?"

    박선덕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요."

    "아, 괜한 걸 물었네요."

    "아니에요. 저 신경 안 써요. 그런 걸 신경 쓴다는 게 왠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아서…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어요, 항상."

    박선덕이 미소를 지으며 정해민의 등을 쓸어내렸다.

    "착하기도 하지."

    "아니에요. 어차피 이지혁 씨도 마찬가지죠."

    "…네?"

    정해민이 눈가를 슬쩍 훔치며 말했다.

    "어머니가 너무 좋으신 분 같아서 정말 저희 어머니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오죽하면 제가 어머니께 저희 아버지를 소개시켜 드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겠어요?"

    "네?"

    쨍그랑!

    접시가 깨지는 소리에 정해민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웬 중년의 남자가 놀란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 소개?"

    "누구세요?"

    남자의 반응에 놀란 정해민이 소리쳤으나, 남자는 정해민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박선덕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여보! 이게 무슨 소리야! 소개라니! 이게 뭔 말이야?"

    "…아, 당신 있었구나. 없는 줄 알았지."

    "내가 왜 없어! 집에 계속 있었는데!"

    박선덕이 떨떠름한 얼굴로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너 알고 있었니?"

    "몰랐어. 오늘 출근 안 하는 날인가? 아부지, 언제부터 계셨어요?"

    "뭐, 인마? 아까 내가 과일도 가져다줬잖아!"

    "아… 웬 과일인가 했네."

    정해민이 멍하게 말했다.

    "아버님이 계셨네요?"

    그런데 왜 몰랐지?

    지금까지 한두 번 왔다 간 것도 아닌데!

    "여보오오오오!"

    박선덕의 다리를 잡고 매달리는 아버지를 보며 이지혁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왜 결혼은 하셔 가지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이지혁이었다.

    * * *

    "알파와 마인이 접촉을 했다고?"

    "예."

    "빌어먹을, 그 상황만은 반드시 막으라고 했잖은가."

    "아시다시피 알파는 막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되는 일이 없군."

    거칠게 뜯어내듯 시가의 끝을 자른 사내가 불을 붙이고는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후, 그래서 결과는?"

    "알파가 마인을 회유하려 하였지만, 되레 마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물론 본체는 아닐 테고?"

    "예. 기생체인지 복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본체는 아닌 듯합니다."

    "본체는 아니겠지. 아무리 마인이라고 하더라도 알파의 본체는 그리 만만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사이게 틀어졌겠군.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아직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호적인 관계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으음, 일단 이차 접촉은 최대한 막아보게. 그 둘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게이트 출현 상태의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상태 이상?"

    "예. 레벨 5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한 시간 전부터 말입니다."

    "레벨 5란 말이지. 그래 몇 개나 되는가?"

    "스무 개 정도입니다."

    "…뭐?"

    "그리고 레벨 6 이상이라 추정되는 게이트도 출현했습니다."

    "그래, 그렇군. 하필 우리 땅에 말이지……."

    "지원을 요청합니까?"

    "지원?"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지원을 요청하면 와줄 곳은 있고? 레벨 6이라며?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대체 누가 도와주겠다고 나서겠냐, 이 말이야. 러시아? 영국? 좋다고 박수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한국이 있지 않습니까?"

    "…마인?"

    "네. 그가 와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한국, 한국이라……."

    외교 관계를 감안했을 때 한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매우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

    "하지만!"

    "아니, 아니야. 마인을 부른다는 건 알파와의 접촉 확률을 높인다는 뜻도 되는 거지. 세상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나는 그 사태만은 피하고 싶네."

    "나라가 없으면 알파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마인은 말 그대로 마인이야. 지뢰라고. 터질 확률이 높은 지뢰를 국내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영 부담스럽군."

    "잘 관리해 보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영입 의사도 타진해 볼 수 있구요."

    "흠……."

    사내는 깊이 고민하다가 이윽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임하지. 하지만 사태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자네가 감당해야 할 짐이 가볍지는 않을 거야. 알고 있지?"

    "몰론입니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투를 빌지."

    그렇게 이지혁의 지원이 요청되었지만,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지혁조차도 말이다.

    * * *

    "미국에서 지원 요청이 왔단 말입니까?"

    "네, 그렇다네요."

    최정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에서?

    블랙 먼데이 이후로 세계의 역학관계가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미국은 전 세계 유일의 최강국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능력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나 영국, 일본, 중국 등이 능력자 세계에서 강국으로 인정받고는 있지만 그들의 힘은 결코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 미국의 능력자 수와 그들의 질, 무엇보다 앞서 나가는 기술력은 타국에게 그 그림자조차 내어주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원?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지원을 해달라는 겁니까?"

    "서류에 그냥 세 글자만 볼드체로 박혀 있었다네요."

    "세 글자?"

    "이.지.혁."

    "……."

    아니, 듣고 보니 이상한데? 걔들은…….

    "심지어 한글로."

    하…….

    독한 새끼들.

    공문에 영어가 아닌 한글을 쓰다니, 얼마나 간절하다는 이야기지?

    "이지혁 씨를 지원해 달라니… 미친놈들."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우선 첫째로는 대한민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능력자를 지원해 달라고 하는 것부터가 결례고, 두 번째로는…….

    "뱃속에 수류탄을 넣어보고 싶다는 건가?"

    최정훈이라면 절대로 그 사람이 자신의 국토를 밟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좀 이상하네요. 아무리 이지혁 씨라고는 해도 미국이 타국의 지원을 받을 일이 있나요? 인재 헌팅입니까? 입국시켜서 회유해 볼 생각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노골적인데……."

    "아니요.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서아영이 가지고 온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으음……."

    최정훈이 침음을 삼키며 서류를 읽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벨 6?"

    "최저 추정이죠. 어차피 지금까지 레벨 6 이상은 출현한 적 없는데, 그 레벨 6보다도 크다, 이런 거니까."

    "뭐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예. 아무래도요."

    "확실히……."

    이런 상황이라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하는 게 옳았다. 단 한 번도 출현한 적 없는 역대 최대 크기의 게이트가 출현했으니까.

    그곳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동맹국이라지만 이지혁을 해외로 반출(?)하는 것은 부담이 너무 심했다.

    회유?

    딱히 그런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이페이스가 워낙 강하다 보니 막아도 자기가 가고 싶으면 갈 것이고, 가라고 가라고 고사를 지내도 자기가 가기 싫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니까.

    문제는 이 인간이 해외에서 무슨 사고를 칠지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반드시 밖에서도 샌다! 아니, 밖으로 나가면 더 샌다!

    그리고 이지혁이라는 바가지는 새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걸 바가지로 쓰라고 가져다준 놈의 죽빵을 날려 버리고 싶은,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위에서는 뭐랍니까?"

    "네? 위라고요?"

    "네, 윗선요?"

    "어머, 지금 혹시 대아메리카 제국의 딸랑이이자 충성스러운 신하이신 그분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

    보내라고 하는구나.

    하여튼 이 새끼들은 우리 편이 맞나, 진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최정훈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뭐, 일단 본인한테 이야기 한 번 해보죠."

    국가적으로야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전 세계적인 위기 상황이다. 협조를 해야 한다면 협조를 하는 게 옳다. 그 뒷감당은 온전히 미국이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미국에 버거가 맛있다고 하며 가려나?"

    * * *

    "응, 안 가."

    사무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게임을 돌리고 있던 이지혁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이지혁 씨."

    "아! 진짜 대체 왜 안 오냐고! 적 탑은 탑에 사는데! 정글러어어어어!"

    일단 사람이 말을 하면 들으라고 이 새끼야!

    그리고 탑이니까 탑에 살지!

    넌 게임을 왜 하냐, 대체!

    만날 욕하고 화내고 성질내고 짜증이란 짜증은 다 부리고! 거기다가 열 판 하면 한 판 이길까 말까 하는데, 왜 굳이 게임을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냐!

    메저키스튼가!

    "들려요."

    "아, 제가 말로 했나요?"

    "팍, 씨!"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이야기해 버린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여하튼 안 가요, 안 가."

    "이지혁 씨,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잘못하면 미국이란 나라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헐, 중계 카메라 뜨나요? 스펙터클할 듯."

    "……."

    이지혁이 화면에 뜬 '패배' 버튼을 클릭하고는 짜증이 확 어린 얼굴로 몸이 돌렸다.

    "거, 미국이 사라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상관이야 있지.

    상관은 넘친단다, 얘야. 전 세계는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거든. 막상 미국이 사라지면 니가 불편할 게 한두 갠 줄 아는 거니?

    "그래도 한 번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귓구멍 파드릴까요?"

    "묘하게 욕처럼 들리네? 이상한걸?"

    꺄르륵대며 웃는 이지혁을 보고 최정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해민이 쪼르르 달려와 이지혁에게 물었다.

    "우리 미국 가는 거야?"

    "내가 아니라 얘 귀를 파라고! 넌 대체 뭘 들었냐, 뭘!"

    "나 미국 투어가 꿈이었어! 미국 가자! 미국!"

    "하……."

    이지혁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얘는 왜 사람 말을 안 듣지? 진짜 귀가 막혔나? 귓구멍을 뭘로 뚫어야 잘 뚫었다는 말이 나올까?

    "미국 투어?"

    "응."

    "관광하게?"

    "야!"

    정해민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내가 그래도 가수거든! 미국에서도……."

    "응, 지나가는 동양인 1."

    "아니, 아니야……. 나 저번에 미국에서 온 소포도 받았단 말이야."

    "응, 지나가는 동양인 1."

    "아니라고!"

    "응, 지나가는 여자 1."

    "우우우……."

    정해민의 눈이 글썽대기 시작했다.

    "너, 혹시 동남아 쪽 가수 아는 애들 있어?"

    "으응? 모르는데?"

    "그게 미국에서 바라보는 너다!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뭘 한지도 모르는 가수라고 주장하는 여자!"

    "……."

    "걔들 기준으로 보면 이렇게 되겠지! 아 한국이란 나라는 취향이 독특해서 호빗도 가수를 하는구나!"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우웅!

    말 없이 게이트를 열어젖힌 이지혁을 보며 정해민의 울음이 단박에 멈췄다.

    "딸꾹."

    이지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니, 넌 대낮부터 할 짓도 없이 왜 여기서 죽치고 있냐! 아이돌이 그렇게 한가해?"

    "응."

    "어?"

    "스케줄이 없어. 능력자들 스케줄 안 넣어준대."

    "왜?"

    "몰라. 민감하대."

    "별 지랄을 다하네."

    이지혁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그래서 나 할 짓 없는데,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

    "아무나 먹으면 어때! 나 심심하단 말이야!"

    "심심하면 게임이나 해!"

    최정훈의 마음이 다시 절규했다.

    '회사에서 그런 대화 하지 마! 이것들아!'

    아, 다 꺼졌으면 좋겠다. 진짜.

    * * *

    "으……."

    존 브레이브(John Brave)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게이트 대비 작전에 참가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베테랑이라면 나름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그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게이트에는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레벨 5 작전에도 동원되었지만, 그때 본 게이트도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게이트처럼 거대하지는 않았다.

    그 게이트에서 나온 X1이 맨하탄을 초토화시키고 핵무기의 사용 승인 직전까지 미국을 몰아넣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번 게이트에서 나올 그 '무언가'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가운데에 있는 거대 게이트의 주변으로 적어도 레벨 4는 넘어 보이는 게이트 수십 개가 함께 공명하고 있었다.

    '멸망인가?'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존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미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능력자들과 타국에서 지원 온 능력자들, 거기에 미국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대게이트 진압 부대가 모조리 동원되어 게이트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걸 막을 수 있을까?

    전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찌 막는다 치더라도 다음에 더 큰 게이트가 열린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여, 열린다!"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전방의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열린다.

    주변의 게이트들이 공명하며 물결치기 시작했다.

    "준비해!"

    능력자들이 자세를 낮추고 등 뒤에서 무기를 장전하는 소리가 마치 파도처럼 밀려온다. 오케스트라의 한 장면처럼 갖가지 장전소리가 음악처럼 울리고, 게이트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에 지휘관들이 숨을 죽였다.

    게이트들이 열리자마자 미친개처럼 튀어나오던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몬스터는 맞으나 그것들은 마치 정렬된 군대처럼 천천히 걸어 나왔다.

    "…대기."

    당장 화력을 퍼부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저곳에 선공을 퍼붓는다는 것이 꺼려진다. 그게 자신들의 목줄을 끊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함.

    그 불안함이 애써 손을 잡아두고 있었다.

    몬스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인간의 군대가 몇 겹으로 그들을 포위하고 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크게, 또 크게 둘러싼 포위망에 꽉 들어찰 정도로 몬스터들이 쌓여간다.

    바로 눈앞까지 몬스터들이 들어차자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 자들 때문에 포위망이 점점 뒤로 벌어져 갔다.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이 상황에서?

    공격할까, 아니면 달아날까?

    저기 안 보이나?

    저만한 괴수들이 일시에 달려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그때였다.

    움찔.

    괴수들 사이에서 파문이 퍼져 갔다.

    끼이이잉, 끼잉.

    마치 강아지가 앓는 것 같은 소리가 떼로 울려 나오며 괴수들이 바닥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뭐, 뭐야?"

    우우우웅.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던 거대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아……."

    모두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 압도적인 게이트에서는 대체 무엇이 나오는 걸까?

    인류를 학살할 악마?

    아니면 세상을 구원할 천사?

    그것도 아니면…….

    우우우웅!

    물결처럼 파문이 일던 게이트가 열리고, 모두의 시선이 텅 빈 허공을 쫓았다.

    "저, 저기!"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 거대한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작았다.

    아니, 작다기에는 이상했다.

    보통 사람을 두고 작다고 하지는 않으니까.

    안에서 걸어 나오는 존재는 누가 봐도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그, 아니, 그녀를 보는 이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저건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저럴 수는 없으니까!

    그린 듯한 금발이 찰랑인다. 그 금발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은 사람의 심혼을 빨아들일 듯 깊었다.

    저벅저벅.

    그녀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을 때마다 몬스터의 군단들이 움찔움찔 떨다가 고개를 더더욱 아래로 조아렸다.

    뭔가.

    대체 이 광경을 뭐라고 해석해야 하는 거지?

    모두가 혼란스러워 할 때,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분명 그것은 말이었다.

    언어였고,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대기를 타지 않고 지켜보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똑똑히 울렸다.

    [이지혁은 어디 있지?]

    그녀가 이 세계에 도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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