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20화 (20/118)
  • [■] 귀신은 뭐할까요? 직무 유기 아닌가요? [■]

    ─────

    우우우웅.

    정인수는 긴장한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수십, 수백 번을 겪은 일이지만, 게이트가 열릴 때가 되어가면 언제나 긴장된다.

    최근 들어 레벨 5 게이트도 심심찮게 열리다 보니 긴장이 덜한 것이지, 얼마 전만 해도 레벨 4 게이트가 출현하면 전 국민적 관심사가 집중될 만큼 중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 그랬는데…….

    정인수가 옆을 슬쩍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진짜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보조 의자를 가져다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서아영을 보며 정인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플레임 위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능력자.

    블랙 먼데이 이후 어린 나이임에도 순식간에 두각을 드러내며 나타나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능력자가 된 여자.

    일반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정부와 각을 세우며 대립하던 시기 때부터 적극적으로 정부에 협조하며 스스로 정부 아래로 들어가 KSF의 중심이 된 인물.

    확고한 능력과 정부 친화적인 마인드.

    그리고 무엇보다 지랄 맞은 성격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능력자의 자리를 꿰찬,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이지혁의 등장 이전에는 움직이는 폭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감당이 어려운 여자였다.

    KSF와 사이가 좋지 않던 방위사 소속인 정인수로서는 더더욱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그런데…….

    호로록.

    지금 정인수의 눈에는 해탈이라도 한 듯한 서아영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게이트 근처에서 볼 때마다 '지금 내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으니, 어설프게 나를 건드렸다가는 지옥불 속에서 댄스를 추게 만들어주겠어'라는 기운을 풍기던 그 서아영이 오후 따뜻한 햇살에 하품하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

    저 얼굴에서 느껴지는 평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정인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쩍 말을 건넸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무척이나요."

    정상적인 질문에 정상적인 대답이라니.

    이게 과연 서아영과의 대화가 맞는가.

    항상 눈을 부라리며 서로 욕을 해 대기 바쁘던 사이였는데,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여기 나와 있잖아요."

    "네?"

    서아영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커피를 마시더니, 나른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이게 자유지."

    "……."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여자?

    그건 그렇고… 저 여자가 진짜 내가 아는, 그 걸어 다니는 폭탄, 지랄마녀 서아영이 맞는 건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안 그래도 우월하던 미모가 확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게이트는 언제쯤 열릴 것 같나요?"

    "한 이삼십 분은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제길, 휴식이 삼십 분밖에 안 남았어."

    서아영이 절망 어린 눈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마구마구 헝클이더니, 문득 희망을 되찾은 듯 말했다.

    "처, 천천히 잡다 보면 시간이 좀 늘지 않을까요?"

    …얘, 왜 이리됐나?

    "NDF 일이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아뇨, 일은 더 쉬워졌어요. 예전처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잔소리하는 윗대가리들이 줄었으니까요."

    "그럼 부담감이나 책임감?"

    "흐음~ 딱히 그런 건 느껴본 적 없는 듯?"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서아영이 움찔하더니, 예전의 그 날카로운 눈으로 정인수를 노려보았다.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그럼 아는데 묻겠습니까?"

    "휴……."

    서아영이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떼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품 안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아영은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죽기보다 싫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네? 네……. 아니, 그 인간, 왜 또 지랄이래요! 네? 아… 들려요? 아……."

    축 처진 서아영의 어깨가 안쓰럽다.

    "네? 네, 알겠어요. 여기만 정리하고 갈게요……."

    힘겹게 전화를 끊은 서아영이 숨 죽은 미역처럼 축 늘어졌다.

    "하……."

    가슴속에서부터 울컥 뿜어져 나오는 그 한숨 소리가 어찌나 서글프게 들리는지, 정인수는 뭣도 모르고 일단 위로부터 시작했다.

    "기운 내십쇼."

    "하, 대령님……."

    "예."

    서아영의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촉촉?

    화륵화륵도 아니고, 촉촉이라니.

    이런 미친… 이 여자는 지랄마녀란 말이다!

    예전에 방위사와 KSF가 정면으로 한 번 붙었을 때, 화염덩어리를 폭풍우처럼 날려서 방위사를 초토화시킨 전적이 있는, 정신 나간 여자라고!

    그런데 촉촉이라니!

    바늘로 찌르면 피가 아니라 욕이 나온다는 여잔데!

    "귀신은 뭐할까요? 직무 유기 아닌가요?"

    "네?"

    "왜 그 인간을 안 잡아가는 거냐고요!"

    그 인간이라…….

    정인수의 뇌리에 심술 맞은 눈꼬리가 떠오른다.

    아, 그거네.

    그 양반이네.

    "왜에에에에에에에!"

    좌절해 절규하는 서아영을 보며 정인수는 눈가를 훔쳤다.

    대체 이지혁은 뭘 하고 다니기에 플레임 위치를 이렇게 만드는 가.

    당당하던 KSF의 대표 능력자 서아영은 어디 갔는가.

    "이지혁 씨가 그렇게… 답이 없나요?"

    정인수의 물음에 서아영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답?"

    "…네."

    "세상에서 가장 이지혁 씨와 안 어울리는 말이 또 하나 있었네요."

    서아영은 한숨을 쉬었다.

    답도 없다, 답도 없어.

    그때 그 난리를 치고는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왜 또 비상을 건단 말인가.

    제발 사람 좀 쉬게 해달란 말이다!

    반년을 개고생하고 오자마자 업무 때문에 퇴근도 못하고!

    오죽하면 출동이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

    여기까지 와서 겨우 휴식다운 휴식을 하고 있었는데, 빨리 해결하고 집합하라니. 이게 뭔 개소린가.

    "개새끼……."

    증오와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 찬 그 목소리에 정인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개……."

    그 순간.

    우우우웅.

    게이트가 크게 진동하더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서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양손에 거대한 화염을 피워 올렸다.

    "뭐야! 다짜고짜!"

    "죽어어어어어어엇!"

    서아영이 게이트를 향해 화염을 미친 듯이 쏘아내기 시작했다.

    '아! 이 미친년!'

    역시나 플레임 위치는 플레임 위치.

    지랄마녀 어디 안 간다는 듯 미친 듯이 화염을 뿜어내는 서아영의 위용에 정인수는 공격 명령이고 뭐고 없이 몸을 뒤로 날려 바닥으로 굴렀다.

    "말을 하고 불을 피우라고! 이 미친!"

    반쯤 그을려 버린 옷을 보며 정인수가 욕을 질러 댔지만, 그러든 말든 서아영은 들리지도 않는지 핏발 선 눈으로 게이트를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죽어어엇! 죽어! 죽어!"

    미쳤나, 진짜?

    "죽어어엇! 이지혀어어어어억!"

    마지막이 좀 이상한데?

    몬스터 상대하는 중 아니었나?

    그 공격이 향하는 곳은 어디였는가!

    한참 동안 마치 기관총처럼 불꽃의 덩어리를 마구마구 뿜어내던 서아영이 거칠게 호흡하며 손을 내렸다.

    "하아, 하아……."

    "……."

    정인수는 게이트를 보며 눈만 껌뻑댔다.

    게이트 정면에 새카맣게 재가 되어버린 잔해들을 보니 황당하기만 하다.

    대체 튀어나온 몬스터가 뭐였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저렇게 재만 남다니, 이게 무슨 허무한 결말이라는 말인가.

    '레벨 4인데…….'

    예전 같았으면 능력자들이 총동원되어서 막아야 할 수준의 게이트다.

    혼자 덜렁 와서 여유 부리기에 그래도 뭔가 대책이 있겠지 했는데…….

    서아영이 이렇게 강했었나?

    예전에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능력자로 세계에 인지도가 있는 급이기는 했지만, 혼자서 레벨 4 게이트를 이렇게 박살 내버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거의 전 세계에서도 최상급으로 꼽힐 수준 아닌가.

    우우웅.

    "으으으……."

    서아영이 울리는 전화기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좀 내버려 두라고오……."

    레벨 4 게이트를 순식간에 박살 내버린 서아영과 전화기를 붙잡고 절규하는 서아영의 갭이 너무 크다.

    "처음에는 우리 쪽에서 채가지 말라고 견제하지 않으셨나요?"

    "시간을 세 달만 돌이킬 수 있다면……."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서아영이 처량한 어조로 정인수에게 말했다.

    "저… 대령님."

    "네?"

    "실수로 너무 빨리 끝내 버렸는데, 상황 종료 좀 늦게 됐다고 보고해 주시면 안 될까요?"

    "……."

    "사, 삼십 분만요. 삼십 분이라도 늦게 가고 싶어요. 제, 제발!"

    "그러겠습니다."

    정인수는 눈물을 훔쳤다.

    대체 이지혁은 NDF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가.

    천하의 플레임 위치를 순정 만화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가 아닌가.

    그때였다.

    스슷.

    정인수의 앞에 뿌연 형체가 나타나더니, 이내 완벽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헉!"

    깜짝 놀란 정인수는 뒤로 물러났고, 서아영은 그 광경을 보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깊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왜 왔어?"

    정해민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데리고 오래."

    "누, 누가!"

    "지혁이가."

    서아영이 정해민에게 삿대질을 했다.

    "너, 너 언제부터 이지혁 꼬붕이었다고 사람 데리러 다니고 그래! 나 잡아 오라디!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뭐래?"

    깔끔하게 반항을 무시한 정해민이 서아영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서아영은 정해민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어? 왜 그래? 안 가?"

    "안 가! 안 갈 거야! 너흰 양심도 없어? 제발 하루라도 쉬게 해주고 부려 먹든가! 안 간다고오!"

    "응? 잘 안 들리는거얼?"

    "악마!"

    정해민은 서아영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는 그녀를 잡아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하."

    홀로 남겨진 정인수는 초토화가 되어버린 게이트의 앞과 사라져 버린 서아영이 있던 자리를 번갈아 보았다.

    "말이 안 되는 수준이군."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전군 비상이 걸렸을 사태를 홀로 와서 단숨해 해결해 버리는 서아영도 놀라웠고, 그런 서아영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정해민도 놀라웠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서아영을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게 만드는 이지혁이었다.

    "대체 그 사람은 뭐지?"

    볼 때마다 자꾸 새로운 모습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 같은 사람이다.

    확실한 것은 이지혁이 나타나고서부터 KSF, 아니, NDF의 전력이 급상승했다는 것이다.

    서아영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최근 게이트에 투입되어서 압도적인 전과를 보이고 있었다.

    "좋은 일이기는 한데……."

    그 압도적인 전과를 올리는 능력자들이 하나같이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문제겠지.

    정서 불안이라든가, 공황장애라든가.

    이지혁 공포증이라든가…….

    인정하긴 싫지만, 국내 최고의 전력인 NDF가 한 사람의 손에 너무 휘둘리는 건 아닐까?

    아니, 이건 너무 나간 걸까?

    이지혁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심술투성이의 맹한 얼굴에서 야심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이지혁에게 개인적으로야 좋은 감정이 있다지만, 정인수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해야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일단 보고를 해야겠어."

    상부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정인수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는 그저 보고할 뿐,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런데 대책이 있을까?"

    NDF가 국가에게서 돌아선다면 과연 막을 방법이 있나?

    정인수가 낮은 침음을 내뱉었다.

    * * *

    스슷.

    서아영과 정해민이 NDF 사무실에 나타났다.

    이미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피로에 찌든 서아영이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불만이 가득가득한 얼굴이지만, 딱히 대놓고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가 어쩌다 이리되었나.'

    야심만만하게 창설한 NDF가 한 사람 손에 좌지우지되다니.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 중심은 서아영이거나 최정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굴러온 악마 같은 인간이 NDF를 이리 만들 줄이야.

    벌컥.

    문이 열리며 오식이를 데리고 이지혁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 왔어요?"

    "옙."

    최정훈이 이지혁의 곁으로 붙으며 보고를 했다.

    '아니, 당신 내 부관인데…….'

    거기에서 그러면 안 되잖아!

    상석에 선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제군들."

    그놈의 제군!

    히틀러 같은 새끼, 진짜!

    "본관은 현재 참담함을 감출 수가 없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다. 이 끔직한 살인범이 우리의 국토를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니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이것은 대한민국과 우리 NDF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이 연쇄살인범을 잡아 처단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안정과 NDF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다."

    어째서?

    의문은 넘쳤지만 말을 할 수가 없다.

    저 오른손에서 만들어지는 시커먼 게이트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생각해 보면 몸에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내가 고통 받았다고 증명할 방법도 없어서 고소도 안 되는 최고의 체벌법이다.

    "음……."

    최정훈이 이지혁의 말을 거들었다.

    "확실히 이게 좀 심각한 문제이기는 합니다."

    브리핑이 이어졌다.

    "현재 사회 전반적으로 능력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보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 언론들을 중심으로 이번 연쇄살인범이 능력자라는 말이 퍼지고 있고, 그에 따라 여론이 굉장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박성찬이 손을 들었다.

    "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입니까?"

    "능력자니까요."

    박성찬이 인상을 확 썼다.

    "이런 젠장, 그럼 일반인이 살인 저지르면 일반인 전체가 욕먹어야 하나? 능력자가 하나둘도 아니고, 그게 연대책임으로 돌아오면 뭘 어쩌자는 거야?"

    "이성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존재였다면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가 되지는 않았겠지.

    사람이란 언제나 이성을 외치면서 결국에는 감성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그게 대중이 된다면 더더욱!

    "현실은 이렇습니다."

    최정훈이 켠 화면 이곳저곳에서 캡처한 댓글들이 보였다.

    차마 입에도 담기 힘든, 증오 가득한 악플들이 보인다.

    눈살을 찌푸린 이들, 분노로 얼굴이 달아오른 이들.

    여러 반응이 나왔다.

    "씨발, 그게 우리 잘못인가. 미친놈 하나가 저지른 일을 왜 우리 가지고 탓하냐고!"

    KSF와 능력자들을 노골적으로 욕하는 댓글들을 보며 박성찬이 욕설을 내뱉었다.

    "어차피 이 일 때문이 아니니까요."

    그저 계기였을 뿐.

    인간은 원래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배척한다.

    피부색이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역사적으로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던가.

    국적, 인종, 성별, 심지어 같은 국가 내의 지역까지.

    나눌 수 있는 것은 모두 나누어서 자신과 다른 자를 배척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인간과 능력자로 나뉘어진 카테고리가 별문제 없이 지금까지 융화되어 왔다고?

    웃기는 소리.

    단지 억누른 것뿐이다.

    미디어에서는 계속해서 능력자들을 포장해서 내보낸다.

    영웅으로, 아이돌로,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상대해서 일반인들을 지켜내는 수호자의 포지션으로.

    정해민이 그러하고, 서아영이 그러하듯.

    능력자가 없으면 게이트 때문에 이미 세상이 멸망했을 거라는 식의 정보를 계속해서 주입하는 한편, 능력자들은 강력한 통제력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억압한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스레 이어져 온 균형이 최근 무너지기 시작했다.

    타국에서는 이미 능력자들이 국가를 전복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고, 증오 범죄에 휘말리는 것 정도는 일상적인 일이다.

    그나마 겨우겨우 현상을 유지하고 있던 대한민국에 이 연쇄살인범이라는 계기가 던져진 것이다.

    한 번 부서진 살얼음이 주변의 얼음들까지 계속해서 뜯어내고 있었다.

    "상식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파급력이 얼마나 크냐의 문제죠. 하루라도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문제가 얼마나 커질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박성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개처럼 부림당하는 것도 열 받는데, 이제는 그러고도 욕을 처먹는군. 뭘 잘못했다고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

    "……."

    아무도 박성찬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 모두가 은연중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최정훈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 방에 있는 유일한 일반인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음음, 일단 범인의 정보를 보자면……."

    최정훈의 브리핑이 모두 끝나자 대원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누군지도 모르고, 짐작 가는 바도 없는데, 어디든 나타나 살인은 저지른다. 그런데 살인현장을 덮쳤다 하더라도 텔레포트로 슉 날아가 버리면 쫓을 수도 없다?"

    "…말하자면."

    "이걸 잡으라는 겁니까? 애초에 이건 우리 소관도 아니잖아요. 경찰이 할 일을 왜 우리가 해야 합니까? 우리야 정보나 대충 확인해 주고 조언만 해주면 끝날 일인데."

    "경찰은 절대 못 잡습니다."

    "그거야 알지만,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박성찬의 말에 최정훈은 말없이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그걸 나라고 모르겠냐.

    저게 하자고 하는데 뭘 어떡하겠어.

    이지혁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박성찬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뭐, 잡을 수는 있겠죠. 나쁜 새끼 잡는 거니까 할 수 있다면 협조하고 싶기야 하죠. 그런데 저걸 어떻게 잡습니까? 정보고 뭐고 하나도 없는데……."

    "우선은 경계를 강화하는 수밖에요."

    "우리끼리? 여기가 무슨 제주도인 줄 아는 겁니까? 아니지, 울릉도쯤은 되어야 여기 인원으로 통제가 되겠네."

    최정훈이 말없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었다.

    "까라면까지, 말 더럽게 많네."

    "……."

    "거, 다 도움되는 거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해요! 언제 내 말 들어서 잘못된 거 있었어?"

    잘된 게 뭔지를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잘된 게 뭔지를!

    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도 없냐!

    "아무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모두를 위해서라도 이 새끼는 꼭 잡아야 한다니까, 그런 건 줄 알아요!"

    "꼭입니까?"

    "이 미친놈이 금발 여자애만 노린다잖아!"

    "아……."

    그게 뭔 상관인데.

    이쯤 되면 어느 쪽이 미친놈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금발 여자애에에에?"

    김다현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이건 또 뭐하는 미친놈인가?

    박성찬은 얼굴을 감쌌다. 그도 어디 가면 한 미친 하는 인간인데, 여기에 오면 정상인이 되는 것 같아서 서글펐다.

    "그 새끼 어디 있어!"

    그걸 모르니까 이러고 있잖아.

    제에발 생각을 좀 하고 살라고.

    흥분하여 씩씩대는 김다현을 보며 이지혁이 묘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넌 동생이랑 별로 사이좋은 것도 아니잖아."

    "그거랑 그거랑 같습니까! 욕을 해도 내가 욕을 하는 거지, 누가 감히 내 동생을 건드려어!"

    저것도 시스콤이네.

    하지만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이지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다현의 손을 잡았다.

    "그 마음 알 것 같다."

    싸가지는 더럽게 없고, 예의는 고릿적에 가져다 버린데다가, 심술투성이에 오라비를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는 썩을 여동생이지만…….

    남이 내 여동생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우리 집 개가 맞고 돌아온 기분이랄까!

    "대책은 있습니까, 형님?"

    "물론이지."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결국 문제는 하나잖아."

    "네?"

    "범인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것. 그리고 달아나 버리면 쫓을 방법이 없다는 것."

    "하나가 아닙니다만?"

    "팍, 씨."

    "죄송."

    김다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 해결하면 간단하지."

    "그런데 그게 제일 해결하기 힘든 문제 아닙니까?"

    "왜 힘들어? 제일 쉽지."

    "네?"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다른 이들이 모두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최정훈이었다.

    "진짜 방법이 있습니까, 이지혁 씨?"

    "네, 있어요."

    "그 방법이 뭐죠?"

    이지혁이 별것 아니라는 듯 발밑에서 서성대는 오식이의 목덜미를 잡아 들었다.

    "얘요."

    "네?"

    "얘요."

    최정훈의 시야에 대롱대롱 매달려 배가 드러낸 오식이가 들어왔다.

    오거?

    저걸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오식이가 범인을 잡는다구요?"

    "사냥감은 사냥개로 쫓아야 하는 법이죠."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오식이의 후각은 도시 단위로 사람을 구분해 낼 급이다.

    대도시 주변에서 움직이는 범인의 체취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때부터는 절대 도망갈 수 없다.

    타 지역으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이쪽에 텔레포터가 있으니 놓칠 일은 없다.

    적당한 마커로 옮겨 다니면서 추적하면 되니까.

    "오식아."

    껑?

    뭔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오식이를 보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내가 방법을 한 번 찾아보마."

    꺼엉?

    "그거 있잖아, 그거. 니 여친."

    크륵?

    오식이 목소리의 톤이 바뀌었다.

    '헐…….'

    저 작은 몸에서도 저 목소리가 나오는구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오식이를 보며 다들 움찔하여 뒤로 물러섰다.

    뭔가, 저 강렬한 의욕은?

    대체 여친이라는 게 뭐지?

    "일단은 이 새끼부터 찾아야겠지."

    이지혁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었다.

    * * *

    우우우우웅!

    그것은 작은 게이트였다.

    레벨 1이라 명명된 게이트보다도 훨씬 작은, 겨우 어린아이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듯 작은 게이트.

    깊은 산속과 작다는 조건이 맞물리자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까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우웅.

    게이트가 열리고, 그 안에서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한 존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흐음……."

    칡덩굴처럼 얽혀 촉수처럼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색 눈동자가 보인다.

    아이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더니, 일그러진 얼굴로 혀를 찼다.

    "겨우 이 정도인가?"

    나름 준비를 많이 했음에도 차원을 뛰어넘어 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급한 몬스터들이야 능력의 감소 없이 게이트를 넘어올 수 있지만, 그와 같은 고위 마족을 통과시키기에는 아직 이 세계로 연결된 게이트의 힘이 충분치 않았다.

    원래대로였다면 좀 더 기다렸어야 하는 일이지만…….

    상황이 조금 급박했기에 이런 형태로라도 일단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있다, 이거지?"

    아흔아홉 번째 마왕.

    이지혁.

    "흐읍……."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꼬리가 말려 올라온다.

    전신을 부르르 떤 아이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는 예전의 이지혁이 아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었던 그 이지혁은 이제 없다.

    남아 있는 것은 그의 흔적이 담긴 인격뿐이다.

    "그리고 그 인격이 방해가 되는 거고……."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아이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다 눈을 감았다.

    우선은 찾아볼까? 이용할 수 있는 자를 말이야.

    어깨에서 돋아난 검은 날개가 쫙 펼쳐지며 아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흐음."

    오식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목줄이 없어도 알아서 쫄래쫄래 걸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오식이를 보니 이제는 정말 강아지 같았다.

    엉덩이를 툭툭, 차니 고개를 빼꼼 돌리는데, 뭔가 귀욤귀욤하다.

    저 동글동글한 얼굴하며, 저 초롱초롱한 눈빛하며…….

    '이게 심쿵인가!'

    오거한테 심쿵이라니.

    어쩌다 보니 이지혁이 만들어내게 됐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귀여움의 산물?

    마구 쓰담쓰담을 시전하려던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저건 오거지……."

    원래 얼굴로 따지면 못생기기가 창식이에 버금가는 놈이다. 이런 식으로 속으면 안 된다.

    "그래도 뭐……."

    본모습이 못생기면 어떠냐, 귀여우면 그만이지.

    어차피 요즘은 성형도 마구 하는 세태인데, 그것보다야 낫지.

    성형하면 어떠냐, 이쁘면 그만이지.

    그런 의미에서…….

    이쁘면 그만이긴 한데…….

    정말 이쁘면 그만이기는 한데…….

    왜 나는 쟤가 무서운가…….

    마왕 같은 뇨자.

    이지혁은 집 현관 옆에서 휘날리는 금발 머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숨으려면 똑바로 숨든가.

    왜 항상 저리 어설프게 반쯤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인가.

    알아달라는 건가?

    커엉!

    오식이가 우다다 앞으로 뛰어간다.

    크, 용맹한 녀석.

    그래, 물어라! 네 주인의 앞을 가로막는 저 적을 물리쳐라!

    맹렬하게 달려가던 오식이가 슬라이딩하듯 몸을 뒤집고는 새하얀 다리 앞에서 배를 까고 드러누웠다.

    …뭐야?

    그러더니 헥헥대며 꼬리를 흔들기 시작한다.

    저건 복종의 의미가 아닌가!

    왜 오거가 저기에 복종을 하는가. 진짜 지가 강아진 줄 아는 건가!

    아니!

    강아지도 지 주인하고 주인 아닌 사람은 가리는 법이거늘.

    "넌 이제 사료 없어, 이 새끼야."

    배신감을 느낀 이지혁이 오식이를 뻥! 걷어차려고 하자 김다솜이 손을 뻗어 오식이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뭐, 왜?"

    "……."

    "하……."

    아니, 이 여자야. 니가 안고 있는 그게 진짜 강아지가 아니에요. 강아지의 탈을 쓴 그 무언가라고.

    그거 삼박 사일 동안 걷어차도 생채기도 안 난다니까?

    내가 무슨 마나라도 실었을까 봐?

    하. 저 눈 보소.

    순식간에 동물 학대하는 인간 됐네.

    "사,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봐?"

    오식이를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은 김다솜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동물 학대는 죄악이지만, 몬스터 학대는 권장해야 할 일이다!"

    아니, 권장 정도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

    김다솜은 말없이 오식이를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고는 뒤로 손을 뻗어 커다란 상자를 끌고 왔다.

    "뭐, 뭐야?"

    상자를 연 김다솜이 말없이 이지혁의 몸에 뭔가를 치덕치덕 두르기 시작했다.

    두터운 오리털 파카부터 시작해서 신발, 셔츠…….

    아니, 이거 세트인가?

    멍하게 서 있는 이지혁에게 입을 수 있는 것은 입히고, 여기서 못 입는 것은 손에 들려준 김다솜이 상자를 정리하더니,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으응?"

    뭔가를 강요하는 듯한 그 시선에 이지혁이 움찔했다.

    "……."

    "고, 고마워."

    눈빛에 져버린 이지혁이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자 김다솜의 새침하던 표정이 확 폈다.

    '…진짜 이쁘긴 하네.'

    웬만한 여자는 정말 돌같이 보던 이지혁도 순간 인정할 만큼 김다솜의 얼굴은 빛났다.

    아이돌 정해민의 얼굴이 평범하게 생각될 정도로.

    평소에도 저리 자주 웃으면…….

    아니, 난리가 나겠네.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이지혁이 고개를 획획 저어서 상념을 날려 버리는 동안 김다솜은 오식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더니, 이지혁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었다.

    "으응?"

    "……."

    "들어가라고?"

    끄덕.

    그냥 말로 하면 되는 건데, 얘도 캐릭터 참 이상하네.

    처음에는 이거보다 말을 잘했던 거 같은데, 가면 갈수록 말수가 없어진다니까.

    보통은 반대 아닌가?

    "으응, 그럼 다음에 보자."

    끄덕.

    살짝 미소 지은 김다솜이 인사를 하자 이지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컹.

    이지혁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김다솜이 자신의 다리에 볼을 비비고 있는 오식이를 내려다보았다.

    껑?

    뻥!

    가볍게 걷어차 오식이를 날려 버린 김다솜이 싸늘한 시선으로 콧방귀를 뀌더니, 종종걸음으로 현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히익!'

    급하게 창문으로 뛰어와 그 광경을 지켜본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봤더니, 아까 그 그렁그렁이 모두 연기였던 것인가!

    걷어차인 오식이마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다.

    세상에!

    "진짜 소름 돋네, 쟤. 진짜!"

    그런 애가 왜 하필 자신의 주위에서 맴도는 것인가!

    세상에는 신도 부처도 없는가!

    "무서워서 살 수가 없네."

    "뭐가?"

    갑자기 들어와서 마구 뛰어 올라가더니 창문을 부여잡고 부르르 떨어 대는 오라비를 한심한 눈으로 지켜보던 이예원은 이지혁의 혼잣말에 대꾸를 해주었다.

    자상하게도.

    "아니, 쟤가……."

    근데 이건 또 왜 금발이냐?

    이지혁이 김다솜의 머리채를 후려잡았다.

    "꺄아악! 뭐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야! 내가 대가리 염색하라고 했지? 오빠 말이 말 같지 않냐?"

    "놔! 안 놔? 깨버리기 전에 놔라!"

    깨? 뭘?

    이지혁이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츠렸다.

    아니, 딱히 쓸 일은 없지만, 그래도 없어서 못 쓰는 거랑 있는데도 안 쓰는 거랑은 다른 이야기니까.

    "염색을 하라고! 차라리 튀고 싶으면 빨간색으로 하라고, 이 계집애야! 연쇄살인범이 금발만 노리고 다닌다고 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금발 다시 염색한다는데, 넌 대가리에 뭐가 들었기에 다시 금발로 염색을 하고 난리냐!"

    "걔가 여길 어떻게 들어와! 능력자 거주군데!"

    그놈이 능력자라고!

    사람들 다 알던데, 너는 인터넷도 안 하냐!

    대체 하루 그 많은 시간 중에 하는 게 뭐냐, 하는 게!

    순간, 허탈해진 이지혁은 김다솜의 머리채를 놔주었다.

    "어쨌든 염색해라! 이번에 검은색으로 잘했더만, 왜 다시 하고 난리야!"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검은 거 하면 뭐해!"

    "보여줄 사람?"

    "……."

    하, 이 맹랑한 것 보게?

    너 따위가 감히 최정훈을 노려?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지!

    "…검은색으로 다시 해봐."

    "응?"

    "자리 한 번 만들어볼게."

    "…진짜?"

    "그러니까 검은색으로 해서 조신하게 보여야 돼. 그런 타입 좋아하는 것 같더라."

    "응! 나 다시 검은색으로 할게."

    "그래."

    미안해요, 최정훈 씨.

    그래도 어쩝니까, 나도 오빤데.

    동생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물론 당신의 불행이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그래도 내 동생이 행복해야지.

    * * *

    같은 시각.

    오늘도 퇴근을 하지 못하고 서류를 미친 듯이 밀어 넣던 최정훈은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요. 갑자기 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나서."

    "부부장님, 너무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쉬셔야죠."

    "그런가 봅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최정훈은 자양 강장제를 하나 더 까서 텀블러에 부어넣으며 몸을 떨었다.

    '왜 한기가 들지?'

    그 한기가 어디에서 온 건지 알아낼 방법이 당장에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런데 오빠."

    "응?"

    "나만 그렇게 잡을 게 아니지."

    "그건 또 뭔 소리야?"

    "다솜이도 금발이잖아."

    "어. 뭐, 그렇지."

    "그리고 걔는 예쁘잖아."

    "응."

    뭐, 이쁜 건 사실이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 돌아가게 예쁘지.

    인류의 미를 가뿐하게 뛰어넘은 환상종들을 상대해 오던 이지혁이다 보니 인간의 미모에는 덤덤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솜이가 예쁘다고 느껴지는 것을 보면 정말 과하게 예쁜 것이다.

    엘프나 마족들이 얼마나 눈 돌아가게 예쁜가.

    그런 애들을 항상 봐오던 이지혁이 예쁘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아이돌인 정해민보다 훨씬 예쁘니, 말 다했지.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 기획사들은 다 뭐하는 거지? 저런 애 연예인 안 만들고?

    "그러니 걔도 염색시켜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왜?"

    "오빠가 챙겨야지."

    "지 오빠가 챙기겠지."

    "하……."

    이예원이 허탈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뭐라는 거지, 이 오징어 같이 생긴 게?

    김다솜급 되는 애가 저렇게 신경을 써주면 고맙다고 눈물을 뿌리면서 알몸으로 춤이라도 춰야 할 인간이 뭐가 이리 덤덤하지?

    "그러다 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쩔 거야?"

    "안타깝겠네."

    "다시 못 보면?"

    "그것도 안타깝겠지."

    "…됐다."

    말을 안 하는 게 낫다.

    속이 터져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결국 이예원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했다.

    "쟤, 오빠 좋아하는 거 몰라?"

    "아는데?"

    "…알아?"

    "응."

    이지혁은 황당하다는 듯 이예원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기본적인 눈치, 아니, 그냥 눈만 있어도 그걸 모르겠는가.

    눈이 없어도 알겠다.

    "사람을 무슨 등신으로 아나."

    "그런데 왜 그래?"

    "응? 뭐가?"

    "저만큼 눈 돌아가게 예쁜 애가 오빠 좋아해 주는데, 뭔가 막 보답하고 싶다거나 고맙다거나 그런 거 없어?"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데?"

    "에라이, 이 화상아!"

    격한 반응이로고.

    제가 더 열이 받아 씩씩대는 이예원을 보며 이지혁은 혀를 찼다.

    "오빠! 주제를 좀 알아야지! 쟤가 오빠 수준에 가당키나 해?"

    "그래, 가당치 않지."

    "알고도 그래?"

    "저 정도로는 안 되지."

    "헐……."

    어처구니없는 말에 이예원은 멍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는 오징어, 아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 미친 건가?

    "하, 진짜 맛이 갔나 보네?"

    "너랑 뭔 말을 하겠냐."

    내가 베라프에 있을 때만 해도 한 번 만나 달라는 여자가…….

    아, 그런 여자는 없었네.

    여하튼 정복해서 얻은 여자가 삼열 종대 앉아 번호로 대륙 한 바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이쁜 애들.

    그것도 엘프 같은 애들만 상대하던 사람인데, 저 정도 얼굴을 보고 간을 뺴 바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가 무섭다."

    진짜 너무 무서워.

    마왕보다 여자가 더 무섭다, 진짜!

    예쁜 거?

    그거 몇 년이나 갈 것 같은가. 이십 년만 지나면 얼굴은 아무것도 아냐.

    마음 착한 것?

    착한 것도 한순간이다. 남편이 돈 못 벌어오는 순간, 착한 여자가 악한 여자 되는 거야.

    "큭."

    "…왜 울어?"

    "옛날 일이 생각나서……. 아무것도 아니야."

    "……."

    이지혁은 눈가에 차오른 습기를 훑어내고는 말했다.

    "여하튼 그러니까 괜히 엮으려고 하지 마. 난 생각 없어."

    "그게 마음대로 될까가 문제네. 쟤는 거의 미친 것 같던데."

    "…하지 마라. 무섭다."

    "근데 진짜 좀 위험한 거 아냐?"

    "응?"

    "쟤 말이야. 지금도 혼자 보냈는데, 저랬다가 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

    "하… 너 잘 모르는 모양인데, 세상일이란 게 그리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벌어지지는……."

    벌어지지.

    그래, 보통 그렇게 벌어진다.

    천 년쯤 살면 백 년에 한 번은 꼭 그런 일이 있다.

    "에이, 설마……."

    "어디 가?"

    "…확인만 할게, 확인만."

    문을 닫고 나간 이지혁을 보며 이예원이 낄낄 웃었다.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본데?"

    쫄래쫄래 뛰쳐나간 이지혁이 간만에 귀엽게 느껴진 이예원이었다.

    * * *

    김다솜은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집으로 걸어갔다.

    새하얀 오리털 파카를 걸친 이지혁의 모습이 오늘따라 귀엽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흐흐흠."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그 살짝 올라간 눈매가 부르르 떨릴 때의 귀여움이란.

    이러게 하나하나 옷을 입히고 선물하다 보면 결국에는 옷이란 옷은 모두 자신이 사 준 것이 될 테고, 결국 어떻게 골라 입어도 그녀의 스타일대로 입게 될 것이다.

    요즘은 모든 일이 다 잘 풀리는 것 같아 행복하다.

    이지혁 일가가 보호구로 들어간다는 정보를 얻자마자 바로 김다현을 설득(?)해 NDF에 합류하게 했고, 보호구로 따라 들어올 수 있었다.

    덕분에 이지혁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더더욱 많아졌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

    다만…….

    그 옆에 거슬리는 조그만 여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정해민이라고 했었나?

    정해민?

    이상도 하지.

    생긴 것도 예쁘지 않고, 나이도 많은데…….

    그런 여자를 왜 자꾸 지혁이 오빠는 데리고 다니는 것일까?

    이상해.

    김다솜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물론 객관적으로 보아도 자신이 우월한 것은 사실이니까, 곧 이지혁도 깔끔하게 자신의 말을 듣게 되겠지만.

    그래도…….

    김다솜의 걸음이 멈춰졌다.

    음, 그런 거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김다솜이 살짝 고민하는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음?

    뭔가 싸한 느낌이 든다.

    여기가 그러고 보니 골목길인가…….

    어두워.

    살짝 소름이 돋은 김다솜이 슬쩍 걸음을 재촉한다.

    탁. 탁. 탁. 탁.

    그녀의 발소리에 다른 발소리가 겹쳐진다. 천천히 그 발소리가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든다.

    돌아볼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잖아.

    하지만 김다솜의 선택은 반대였다.

    걸음을 좀 더 빨리해서 걷기 시작했다.

    탁탁탁!

    거의 반쯤 뛰기 시작한 김다솜의 등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후욱, 후욱…….

    그와 함께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김다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김다솜의 귓가에 처음 듣는, 거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 가?"

    "꺄……."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아교라도 칠한 것처럼 입이 꾹 다물어졌다.

    "조용."

    묵직한 팔이 등 뒤에서부터 김다솜의 배를 휘어 감는다.

    "쉿. 내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거든."

    "……."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좋아, 넌 최고야. 보통 내가 이렇게 대화를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런데 너와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 머리는 정말… 그래, 최고야."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감촉이 느껴지자 김다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더러운 벌레가 머리카락을 타고 오르는 것 같은 소름이 전신으로 번져 간다.

    '사, 살려줘…….'

    김다솜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움켜잡은 남자가 뉴스에 나오는 그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널 꽤나 오래 지켜봤어. 참을 수가 없었지. 하지만 나는 맛있는 음식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먹는 타입이라서 지금까지 참았어. 오래 참았어, 아주 오래.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어."

    "……."

    "흥분되는군. 아주 흥분돼. 너도 그렇지만, 이곳에서 네가 죽어갔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의 표정이 어떨까?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려서 주체가 안 돼."

    다른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죽어갔다.

    그 말만이 귓가에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죽는다.

    "자, 좀 더 거칠게 반항해 봐. 살아 있다는 것을 내게 보여봐. 그 약동이 극에 달하도록 말이야. 꿈틀꿈틀거리며 살아 있던 게 싸늘히 식어갈 때, 그때가 진짜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거든. 그러니 더 반항하라고."

    김다솜은 목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더운 숨과 몸을 움켜잡아 오는 강한 힘을 느끼며 절망 어린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등에 닿은 뾰족한 날붙이의 감촉이 너무 선명해서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살려줘.'

    도와줘.

    제발.

    '오빠!'

    보통은 이런 순간이면 김다현을 찾았는데, 눈앞에 이지혁의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니 참 이상했다.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그렇지.

    이런 순간에까지.

    '지혁 오빠.'

    생생하기도 하지.

    저 심퉁 맞은 얼굴.

    올라간 눈꼬리와 이런 순간마저도 귀찮아 죽겠다는 저 얼굴이라니.

    사람이 이미지가 얼마나 확실한 걸까.

    그리고 그 이미지를 이리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김다솜도 참 문제였다.

    …그런데 저 얼굴 왜 자꾸 커지지?

    어?

    "아나, 이 새끼가!"

    말도 하는데?

    퍼억!

    뭔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커다란 격타음이 들리면서 이지혁이 김다솜을 끌어안아 당겼다.

    김다솜은 상황 파악도 못한 채 덜덜 떨며 이지혁의 품에 안겼다.

    "……."

    "굳었나?"

    멍한 얼굴을 보며 갸웃대던 이지혁이 김다솜의 입가에 머무른 에테르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접착 능력인가?

    아주 그냥 살인에 최적화되었구만.

    접착에 텔포라니.

    이지혁은 손에 에테르를 끌어 올려 김다솜의 입가에 묻은 것을 제거했다.

    "입 열어봐."

    "아……."

    "말은 나오네. 그럼 됐어."

    "아……."

    "응?"

    "아아!"

    김다솜이 탄식을 내뱉으며 이지혁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

    이지혁이 김다솜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자연스레 놀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드레인.'

    웬만한 사람은 이런 일을 겪으면 몇 년간 제대로 된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이지혁은 김다솜의 머릿속에 차오르는 부정적 감정들을 빨아 당겼다.

    "아……."

    "뭘 자꾸 아아야. 정신 차려."

    "네."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김다솜이 얼굴을 붉혔다.

    환상이 아니었어.

    퉁명스러운 얼굴이지만 제대로 자신을 걱정해서 와주었다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조여온다.

    "자자, 위험하니 저리 가 있어. 저리… 아니, 웬만하면 그냥 집에 가라."

    저 퉁명스러운 말투라니.

    혹시라도 험한 꼴을 볼까 봐 얼굴에 일부러 귀찮음을 잔뜩 드러내는 것도 귀엽다.

    "가라고!"

    뭔가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짓궂게 구는, 어린아이 같은 측면이 있다.

    "아, 좀!"

    이지혁이 김다솜의 얼굴을 잡고 밀어냈다.

    얼굴이 찌그러지면서도 김다솜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 옆으로 가라고!"

    "네."

    그제야 이지혁의 말을 듣고 종종걸음으로 구석을 향한다.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저거… 진짜 독특하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지혁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갔다.

    이 새끼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설쳐 대는 거지?

    하마터면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쟤가 어떤 앤데.

    배고프면 과자 가져와.

    추우면 옷 가져와.

    손 시릴까 봐 장갑 가져와.

    그런 건 엄마도 안 해주는데!

    …엄마?

    그러고 보니… 엄마, 왜 나한테 그런 거 안 해줘? 엄마?

    아, 이게 아니지!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살인범을 바라보았다.

    "아, 진짜 살인범처럼 생겼네. 이 새끼."

    뭔가 야비해 보이는 인상이, 정말 대놓고 '내가 뭔가 저지를 놈이다'라고 쓰여져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야, 이리 와봐."

    "……."

    살인범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몸을 풀더니, 이지혁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뭘 봐? 팍, 씨!"

    살인범이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뭐지, 이 미친놈은?

    "살아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어, 그래그래. 다음 대사 빨리 쳐라."

    "…뭔 소리지?"

    "그다음 대사는 보통 '여기에 나타난 게 니 실수다'라든가, '내 얼굴을 본 놈을 살려 보낼 수는 없지'라든가, 좀 맛이 많이 간 놈이면 '네 눈을 원망해라'라는 식으로 대사 치지 않나?"

    "……."

    저놈… 천잰가?

    아니, 얼굴 보면 절대 천재 얼굴은 아닌데!

    "너 같은 새끼를 내가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에요. 살인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데. 내가 아는 살인범… 아, 이건 너무 많다."

    일단 나부터 말이야.

    "그러니……."

    스슷.

    그 순간, 살인범의 모습이 사라졌다.

    "흠……."

    이지혁이 뒤로 빙글 돌며 허공을 걷어찼다.

    퍼억!

    "컥!"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모습이 드러난 살인범이 허공을 부웅 날아서 벽에 그대로 처박혔다.

    "하, 이 새끼가!"

    원래 대사를 치는 도중에는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정도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자고로 아무리 긴 대사라 하더라도 끝나기 전에는 공격을 하지 않는 법이다!

    대사 중에 공격을 하면 캐릭터는 뭘로 잡으라고!

    "이 기본도 모르는 놈!"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이 보면 아주 치를 떨 성격이었다.

    이지혁이 살인범을 보며 혀를 찼다.

    이걸 어떻게 죽이지?

    그냥 죽여 버리려니 그것도 문제였다.

    이놈이 살인범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지금 그걸 증명할 사람이라고는 이지혁과 김다솜밖에 없다.

    될 수 있으면 살려놓은 채로 데려가서 자백을 하게 만들어야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벌어진 살인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텐데…….

    경찰도 다 파악을 하지는 못했다니까 실종자들도 있을 것이고, 그 실종자가 이놈에게 얼마나 죽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흐음……."

    방법이 뭐가 좋을까나?

    정신 제압?

    아니면 저주를 걸어서 뇌를 노릇노릇하게 만들어 버릴까?

    저주와 공격 마법만큼은 경지에 오르다 못해 입신에 오른 이지혁이다.

    아니면 사십팔 일 동안 지옥 같은 악몽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었다.

    응?

    게이트?

    그거도 방법이지.

    그런데… 잘못하면 쟤가 죽어버리잖아.

    "야, 니가 생각하기에 절대 죽지는 않고 미치지도 않는데 진짜 괴로울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게 뭐가 있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미친놈아.'

    그도 어디서 제정신이라고 말할 자격은 없는 사람이지만, 눈앞의 이놈 역시 맛이 가도 한참은 가 있는 것 같았다.

    '잘못 걸렸어.'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살인범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다."

    스슷.

    그 순간, 살인범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어딜."

    이지혁의 우수에서 뻗어 나간 촉수가 살인범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크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그게 전부.

    이지혁은 사라져 버린 살인범을 보며 멍하니 말했다.

    "왜 취소가 안 되지?"

    보통은 이러면 취소가 되는데?

    본체에 타격이… 아, 그건 마법사구나.

    능력자이니 매커니즘이 다르겠지.

    "하… 정말 대가리가 굳었나? 이런 기본적인 것도 놓치고 말이야."

    천 년이 넘게 법사들을 상대해 왔으니 어느 정도 고정관념이 쌓일 만도 하지만, 그래도 이건 영 문젠데…….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실수를 했으면 고치면 되는 거니까.

    "오식아!"

    커엉.

    이지혁의 부름에 저 멀리서부터 짧은 다리를 가진 강아지처럼 생긴 생물이 짧은 다리를 필사적으로 놀려서 쫓아왔다.

    "자……."

    촉수 끝을 내밀자 킁킁대며 냄새를 맡은 오식이가 고개를 들어 이지혁을 본다.

    "찾았어?"

    끄덕.

    "좋아, 협상은 유효한 거야. 쫓아라!"

    커엉!

    오식이가 달려 나가는 것을 본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오거는 먹이를 포기하는 법이 없지."

    살고 싶으면 바다라도 건너서 도망가는 게 좋을 거야.

    물론 그런다고 해도 찾아내겠지만 말이야.

    이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 * *

    "괜찮아?"

    이지혁의 말에 김다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일을 겪었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숨도 쉬기 힘들 정도였는데, 이지혁의 품에 안겨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이 사람이라서 그런 건가?'

    사정을 모르는 김다솜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오빠."

    "그러니까 해 졌는데 왜 돌아다녀? 자꾸 집 앞에 그러고 있지 마!"

    걱정돼서 쫓아와 놓고는.

    저렇게 틱틱대는 게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마냥 좋기도 하고 그렇다.

    "웃어?"

    이지혁은 부드럽게 웃는 김다솜을 보며 혀를 찼다.

    이게 미쳤나.

    너 방금 뒈질 뻔했어.

    내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뒈졌겠지.

    하…….

    맛이 얼마나 가면 뒈질 뻔하고도 저리 웃을 수가 있는 거지?

    …무서운 여자.

    "일단 집에 가라."

    "…못 가겠어요."

    "왜?"

    "무서워서."

    그렇게 생글거리면서 무섭다고 하지 마!

    내가 무서워! 내가!

    너희 집 국어사전은 중국산이냐?

    그 무섭다가 내가 알고 있는 무섭다와 같은 말은 맞냐?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데려다 줘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야, 나와봐."

    스슷.

    그 말과 동시에 이지혁의 등 뒤 그림자에서 한 여성의 형체가 생겨났다.

    도가윤이 가만히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누구?"

    화들짝 놀란 김다솜이 도가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지?

    아니, 쟤는 왜 저기서 나오지?

    능력자인 건 알겠다. 은신 능력이야 많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저기서. 나오는가.

    이지혁의 그림자라니.

    그럼 하루 종일 저리 가까운 거리에서 쫓아다닌다는 건가?

    그럼 지금까지 이지혁과 자신이 만날 때도 항상 같이 있었다고?

    이지혁의 집에도 들어가고?

    으득.

    김다솜이 도가윤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하지만 도가윤 역시 담담하지만 미묘한 시선으로 가만히 김다솜을 마주 보았다.

    "뭐해?"

    팽팽하던 긴장을 끊어버리는 말에 도가윤이 먼저 시선을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용건은?"

    "쟤 집에 좀 데려다 줘라."

    "불가."

    "뭐? 또 왜?"

    "보호 대상에서 어긋난다. 내 임무가 아니다. 거부."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사람이 유도리가 있어야지! 유도리가!

    "그럼 지키고 있다가 경찰이든 뭐든 불러서 집에 데려다 주라고 해."

    "내 임무가 아니다."

    "…니 임무가 뭔데?"

    "이지혁의 보호와 감시."

    "감시야 그렇다 치고, 니가 뭔 수로 날 보호할 건데?

    "보이지 않는 칼은 보이는 총보다 무서운 법."

    "뭔 개소리야? 총이 백배는 더 무섭지."

    "……."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듯 외면하는 도가윤을 보며 이지혁이 짜증을 냈다.

    "그러니까, 못 도와주겠다?"

    "그렇다."

    "그럼 너도 여기 있든가. 나 혼자 갈 테니까."

    "불가. 떨어지지 않는다."

    "아오, 이걸 확 그냥 마! 확!"

    머리채를 잡고 날려 버리고 싶은 감정을 필사적으로 참아낸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얘한테는 말해봤자 소용이 없겠지.

    이지혁이 전화를 꺼냈다.

    "접니다."

    - 네. 말씀하시죠.

    "잡았어요."

    - 네?

    "살인범 새끼 종적 잡았다고요. 지금 오식이가 쫓고 있으니까 정해민 확보해 주시고, 이쪽으로 지원 보내줘요."

    - 예, 당장 확보하겠습니다.

    "그리고……."

    - 예!

    "가윤이한테 김다솜이 집에 좀 데려다 주라고 명령 좀 해줘요."

    - …….

    "지금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미친놈아'라고 생각했죠?"

    - 아, 아닙니다.

    "목소리가 떨리는데!"

    - 전화 바꿔주십시오.

    "하, 말 돌리는 클라스 보소."

    이지혁은 투덜대면서도 지체 없이 도가윤에게로 전화기를 넘겼다.

    뭔가 미묘하게 표정이 꿈틀대던 도가윤이 전화를 잡았다.

    삐빅.

    "……."

    "……."

    이지혁이 통화가 종료된 전화기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도가윤을 보았다.

    하지만 도가윤의 눈은 결코 이지혁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실수야?"

    "그렇다."

    그래,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지.

    액정 잘못 잡아서 전화 꺼버리는 정도야 누구나 하는 실수니까.

    그런데 전화가 다시 걸려오는데 진동 소리 안 들리게 하려고 그렇게 꽉 움켜잡는 건 실수가 아니잖아!

    전화기 부서져!

    "그냥 받지?"

    "무슨 소린지?"

    "…좋은 말로 할 떄 받아라."

    "흠……."

    아쉽다는 얼굴로 도가윤이 전화를 받았다.

    뭔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에 도가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화를 끊고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뭐래?"

    "임무 변동 없음."

    "…야."

    도가윤이 다시 이지혁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싫나?

    그렇게?

    이건 명령 불복종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진짜 그렇게 싫은가?

    그냥 여자애 하나 집에다 데려다 주는 게 뭐가 그리 싫은 거지?

    "그냥 좀 하지?"

    "…싫다."

    하? 싫어?

    그 말이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뭐가 그리 싫은데!"

    "그냥 싫다."

    "아, 관둬라, 관둬! 내가 데려다 준다! 아오, 속 시끄러워, 진짜."

    그 순간, 도가윤이 이지혁의 옷깃을 잡았다.

    "왜?"

    "명령을 이행한다. 저 아이를 집까지 데려다 준다. 정해민이 집 앞 마커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다. 확보 바람."

    "어?"

    갑자기 왜 이래, 이거?

    맛이 갔나? 뭐가 이리 휙휙 바뀌지?

    "음, 뭐……."

    일단은 그래 주면 이지혁이야 편하니까.

    "부탁하지.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이지혁이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날려 멀어지자 도가윤이 감정 없는 시선으로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김다솜도 한기가 뿜어져 나올 듯한 눈으로 도가윤을 노려보았다.

    "데려다 준다."

    "됐거든요?"

    "명령. 이행한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나도 당신이랑 가기 싫은데요?"

    "동감."

    둘은 한동안 서로를 그리 노려보며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흐으으윽."

    옆구리가 뻥 뚫린 남자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상처에 거즈를 마구 밀어 넣었다.

    "흐……."

    보통 사람이라면 일격에 즉사했을 만한 상처였다.

    그럼에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죽인다. 죽인다. 죽여 버리겠어."

    하지만 사내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능력자의 강인한 육체와 범인을 아득히 초월하는 회복 능력 덕분에 버티고는 있지만, 쉽사리 회복될 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병원에라도 간다면 또 모르지만, 이 상처를 입고 병원을 간다는 것은 나 잡아 잡수라고 범 아가리에 대가리를 들이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윽."

    남자의 뇌리에 심술이 툭툭 박혀 있는, 눈꼬리 날카로운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혁이라고 했나?'

    그 금발 여자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내 얼굴을 봤어.'

    그 여자와 함께 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놈을 죽여서 몽타주 그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지 않으면 수사망이 좁혀져 올 것이고, 도망은 칠 수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지금같이 자유로운 삶은 꿈도 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즐기는 삶의 이유도 사라지겠지.

    "죽인다."

    죽여야 한다.

    어떻게든!

    컹.

    "흐?"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에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뭐지?'

    어느새 그의 아지트에 작은 개 한 마리가 들어와 있었다.

    아니, 저거… 개는 맞나?

    개와 곰을 반쯤 섞어놓은 것 같은, 붉고 검은 털의 짐승이 눈을 빤히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

    평소라면 짐승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하필 지금 그의 눈에 띈 게 불운이라면 불운이겠지.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나이프를 집어 들어 짐승에게로 던졌다.

    까앙!

    "응?"

    까앙이라고?

    이게 뭔 소린가?

    이건 금속과 금속이 부딪칠 때나 나오는 소리 아니던가?

    그 소리가 왜 여기서 나오지?

    남자가 눈을 비비고 다시 짐승을 바라보았다.

    짐승은 처음 본 그 모습 그대로 남자를 빤히 보며 서 있었다.

    그 광경에 기묘한 공포를 느낀 남자는 남아 있던 나이프를 움켜잡았다.

    "뭐, 뭐야?"

    아니겠지.

    아까 거기서부터 여기는 최소한 백 킬로는 떨어져 있는 곳이다.

    순간적으로 힘이 달려서 멀리는 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단 십 분 만에 백킬로가 넘는 거리를 좁혀 쫓아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저 이상한 짐승도 그 지혁이라는 놈과는 관계가…….

    순간, 짐승의 목에 채워진 목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헛?"

    깜짝 놀란 사내가 뒤로 몸을 날렸다.

    스슷.

    그와 거의 동시의 사내 앞에 다섯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개새끼가……."

    증오로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김다현이 금방이라도 사내에게 달려들 듯 움찔댔다.

    "워워."

    그런 김다현을 제지한 최정훈이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비등록인데요?"

    "그래요?"

    "제가 등록자는 얼굴 보면 대충 기억합니다."

    "하, 잘나셨네. 그걸 다 기억하고."

    "…죄송합니다."

    이런 상황까지 그리 삐딱하게 나올 필요는 없잖아!

    뭐 어쩌겠는가. 생겨 먹은 게 저런데.

    최정훈은 침음을 삼키고는 다시금 사내를 바라보았다.

    "얘 맞습니까?"

    "옆구리 안 보여요? 시원하게 뚫어놨잖아요."

    "혹시 다른 놈인데 실수로 뚫으신 건?"

    "실수로 뚫는 게 뭔지 보여 드려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옆구리 보지 마.

    식은땀을 주르륵 흘린 최정훈이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김다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농담 따먹기 할 때입니까?"

    하, 저 시스콤.

    지 동생 죽을 뻔했다는 소리 듣더니, 이성이 날아갔네, 이성이.

    감히 내게 소리도 지르고 말이야.

    하지만 그 심정만은 절절히 이해가 간 이지혁이 굳이 따져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잡자."

    잡아놓고 시작해야지.

    "큭!"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사내가 다시 한 번 텔레포트를 하려는 순간, 이지혁의 손에서 뻗어 나간 촉수가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멈추는 게 좋을 텐데? 이번에는 대가리에 구멍이 뚫리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

    "텔포 좋지. 어디든 가고 말이야. 하지만 실체가 이동하기 전에 죽어버리면 끝이지. 그렇지?"

    "……."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어디 겁도 없이 내 집 앞에서 설치냐고. 하… 그것도 금발만 노리고 말이야. 그럴 거면 외국 가서 설치지."

    이지혁의 이죽거림에 남자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같이 가자고. 널 어떻게 해야 구속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하니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뭔가 방법이 있겠지.

    뭐, 어차피 머리 쓰는 거야 최정훈이 할 일이니까.

    "…빌어먹을."

    "걱정하지 마. 정중하게 모실 테니까 말이야."

    죽지 못한 게 후회될 만큼.

    이지혁의 촉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자에게 김다현이 천천히 다가설 즈음이었다.

    "그건 좀 곤란하네요."

    미묘한 억양.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결코 급하지 않은, 느긋한 목소리가 이지혁의 귀로 너무도 생생하게 파고든다.

    그 작은 목소리의 파급력은 무척이나 컸다.

    이지혁이 이 세계에서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야말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 앞.

    그곳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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