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9화 (19/118)
  • [■] 잘생긴 놈만 대접 받는 더러운 세상 [■]

    ─────

    촵촵촵촵촵!

    꿀꺽꿀꺽꿀꺽!

    촵촵촵촵촵!

    이예원이 질린 듯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저게 인간인가, 과자 분쇄긴가.

    옆으로 끊임없이 쌓여가는 과자 봉투와 PT병들을 보자니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먹는데도 살이 안 찌지?'

    불가사의한 소화력과 불가사의한 흡수력, 거기에 불가사의한 육체 유지 능력이었다!

    아무리 기초 대사량이 높다고 해도 그렇지, 저만큼을 처먹는데 살이 안 찐다는 게 말이 되나!

    자신의 배를 슬그머니 만져 본 이예원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그만 처먹어, 이 돼지야!"

    "헐, 돼지가 말을 한다?"

    "누가 돼지야!"

    "아, 미안하다. 돼지가 말하면 오크지!"

    이예원이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이렇게 예쁜 오크 봤어?"

    "그거 오크들이 들으면 화낼 소리다. 걔들도 나름 미적 기준이 있어서 너같이 생긴 건 쳐주지도 않아."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다 알지.

    모를 수가 있나, 내가 누군데.

    그런데 너한테 그걸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길고 지난한 일이구나, 썩을 동생아.

    "자. 저리 가서 놀아라. 훠이~"

    "훠이는 무슨 훠이야! 내가 새야! 말이야!"

    "닭?"

    "죽인다! 진짜!"

    "알았으니 좀 꺼지라고! 왜 사람 간만에 노는데 붙어서 귀찮게 구냐! 너 나 좋아해?"

    "미쳤어?"

    "그래. 나도 니가 싫어서 지긋지긋하니까! 되도록 한집이라도 마주치지 말고 우리 서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자꾸나. 알겠니?"

    "나도 볼일 없으면 너 보러 안 왔어!"

    근데 이 계집애가?

    보자보자 하니까 자꾸 너너 해 대네?

    이것도 대충 게이트에 반년만 던져 놓으면 애가 좀 고분고분해지려나?

    어휴, 앓느니 죽지.

    당장 이 계집애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뭔 의미가 있을까.

    마음에 안 든다, 귀찮다, 짜증 난다 등의 이유로 사람을 하나하나 자신에게 복종하는 이들로 바꿔 나가다 보면, 결국 세상에는 자신에게 대들 사람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한 명쯤은 이지혁이 누구든 바락바락 달려들어 자기 할 말을 할 사람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가족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렇긴 한데…….

    참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지.

    이게 이성과 감정이 안 맞는 건 어떻게 할 수 없는 건가?

    이성은 이게 좋은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감정은 지금 당장 저 텅텅 빈 머리에 하이킥을 꽂아 넣으라 유혹하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이지혁은 움찔거리는 오른 다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볼일 있으면 빨리 볼일 보고 꺼져!"

    "와, 오빠라는 인간이 말하는 꼬락서니 봐라!"

    "이럴 때만 오빠지, 이럴 때만! 니 필요할 때만! 내가 무슨 즉석 밥이냐! 니 필요할 때만 한 번씩 꺼내서 돌리게!"

    "웃겨? 언제 내가 써먹은 적이나 있나?"

    이지혁은 손을 휘휘 저었다.

    어째서 가족에게는 그의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뭔데, 뭐!"

    "나랑 좀 나가."

    "응?"

    "좀 같이 나가자고."

    이지혁은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예원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은 없는데?"

    "안 아프거든!"

    "응.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 어디 보자……."

    이지혁이 이예원의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정신 나간 것도 아니거든!"

    "거, 이상하네. 제정신이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나도 안 하고 싶어! 나도!"

    "그런데 왜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자세하고 디테일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니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어지잖아?"

    "끙……."

    이예원의 설명은 단순했다.

    이번에 전학 온 학교가 워낙에 능력자와 관련된 곳이다 보니, 가족이 어떤 능력자이냐에 따라 서열이 은근히 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싸움에서 지기 싫어서 늘어놓다 보니 오라비가 NDF에서 일한다는 걸 말하게 되었고, NDF가 어떤 곳인지를 아는 애들을 중심으로 화제가 됐다고 한다.

    여기까지야 그냥 별문제가 없는데…….

    그래서 그 NDF에서 일한다는 이지혁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에 문제가 발생했다.

    안타깝게도 이지혁이라는 능력자의 이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고, 그 사실을 의심한 이들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해왔던 것이다.

    결국 그 분위기에 휘말려서…….

    "나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했다고?"

    "응."

    "나를?"

    "응!"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이예원의 양쪽 어깨를 잡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아아아! 뭐하는 거야!"

    소리를 지르든 말든 이예원을 들어서 방 밖에다 내려놓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응, 안 가."

    문밖에서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 번만! 한 번마안! 응?"

    "응, 안 가."

    "야! 사람이 이렇게 부탁을 하는데!"

    벌컥!

    문이 열리고 이지혁과 이예원의 눈이 마주쳤다.

    "……."

    한동안 이지혁과 눈을 마주친 이예원이 꼬리를 내렸다.

    "잘못했어요."

    쾅!

    다시 시원하게 닫혀 버린 문에 이예원이 태도를 바꿔 간드러진 애교를 시작했다.

    "아아아아잉, 오빠아아아아."

    "히이이익."

    다시 컴퓨터 앞에 앉으려던 이지혁이 밖에서 들려오는 지옥의 울부짖음에 소름이 돋아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 마!"

    "오빠아아아아아!"

    "하지 말라고!"

    차라리 욕을 해!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나 이러다 왕따당한단 말이야! 사랑하는 동생이 왕따당하는 꼴을 봐야겠어?"

    "누가 너를 왕따시켜! 니가 시키면 시켰지!"

    왕따도 사람을 가려 하는 거지. 니 옛날 대가리로 돌아가기만 해도 괴롭히려고 얼쩡대던 애들도 다 사라질 거다.

    "제바아알! 뭐든지 다 할게. 한 번만 좀 도와줘!"

    "니가 나한테 해줄 게 뭐 있어!"

    "과자 사다 줄게."

    "어?"

    "한 달 동안 내가 심부름 다 할게. 진짜야! 진짜!"

    이거… 괜찮은 딜인데?

    노예 하나 생기는 대가로 하루를 버린다라…….

    "각서 써라?"

    "하겠습니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뭐, 한 번 움직여 볼 만도 한가?

    "일단 한 달 동안 나의 셔틀이 되겠다는 서약 동영상을 찍고 시작하자."

    "…악마!"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시에는 동영상을 너희 학교와 니가 아는 모든 지인들의 메일로 날려 버리겠다."

    "나쁜 놈!"

    낄낄낄, 욕이야 마음대로 하라고.

    "꼭 이렇게 입어야 하는 거냐?"

    "그럼? 또 추리닝에 슬리퍼 질질 끌면서 나가려고?"

    "추리닝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컴퓨터는?"

    "가장 위대한 의복이라 정정하지."

    이지혁은 목을 죄어오는 셔츠의 감촉에 연신 옷을 잡아 당겼다.

    "아, 하지 말라고! 각 맞춰놨으니까."

    "하, 불편해 죽겠네."

    간단하게 면바지에 셔츠를 입었을 뿐이건만, 익숙하지 않은 재질과 뻣뻣함에 불편이 마구 밀려왔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거울 좀 볼래?"

    "응?"

    이지혁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어?"

    이거… 꽤 잘생긴 거 같은데?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보던 이지혁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멋지냐?"

    "그냥 사람 같아, 그냥 사람."

    무덤덤함 속에 숨겨진 단호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아… 그래?"

    그냥 사람이 어디냐.

    베라프에서는 마귀, 괴물, 짐승 등이라 불렸으니까 그냥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도 감지덕지다.

    그런데 왜 자꾸 눈에서 뭐가 흐르지?

    "저기야."

    이지혁은 이예원이 가리키는 카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 싫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나와 있던 예원이의 친구들이 이지혁을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응, 반갑다."

    이예원에게 신신당부를 들었기에 일단은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리기로 했다.

    이 운 좋은 것들.

    그가 만난 가장 높은 사람이었던 서아영조차 초면에 이런 예의를 받아보지는 못했는데, 고딩 찌끄래기들이 이런 대접을 받다니, 세상 참…….

    "뭔 생각 해?"

    "어, 아냐."

    "마실 것 좀 물어보고."

    "그래? 뭐 마실 거야?"

    "카펜데 당연히 마시겠지!"

    어쩌라고!

    내가 소속 보여주러 나왔지, 선보러 나왔냐!

    내게 더 이상 뭘 바라는 거야!

    "저희 아메리카노 먹을게요."

    짧은 단발머리에 귀염상을 한 아이가 이지혁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아, 그래?"

    "네."

    "그럼……."

    이지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이예원이 귀에다 대고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주문하고 진동 벨 받아 와. 더 이상 어리바리를 타면 죽여 버리겠어. 아메리카노 셋이랑 오빠 마실 거 하나."

    "응."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친구들이 이예원에게 바짝 다가와 소건댔다.

    "너희 오빠 귀엽다."

    "귀여워?"

    "왜? 귀여운데……."

    이예원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그녀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니가 저 인간의 진면목을 알게 되고도 과연 귀엽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귀여울 수는 있어도 저 인간만은 귀여워서는 안 돼. 절대로!

    이예원의 눈에 메뉴에 넋이 나가 종업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거, 저러다 카페 다 뒤엎는 거 아닌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싶어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극적 타결이 일어났는지 카운터의 종업원과 격하게 악수를 하는 이지혁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고, 머리야.

    이래서 데리고 나오기 싫었는데.

    어쩌겠는가, 제 손으로 판 무덤인데.

    진동 벨을 가지고 오랬더니 꿋꿋하게 그 자리에서 기다리던 이지혁이 음료들을 들고 자리로 왔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응."

    이지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프라페를 빨아 먹기 시작했다.

    "오빠."

    "응?"

    "오빠, 정말 NDF에서 일하세요?"

    "응."

    "와, 진짜요? 거기서 뭐하세요?"

    개 키우고…….

    애새끼들 괴롭힌다.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걸까?

    "그냥 뭐, 사무직 같은 거지."

    "NDF에 사무직도 있어요?"

    최정훈이 알면 피눈물을 흘릴 소리를 너무 쉽게 하네, 얘.

    "겸사겸사 출동도 하고."

    "NDF 소속 능력자들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던데! 그럼 받는 돈도 많겠네요?"

    "박봉이지, 박봉."

    "와, 겸손하시다."

    겸손은 얼어 죽을.

    진짜 박봉이다, 이 가스나야.

    얘가 뭔 현실을 몰라. 공무원 월급이 다 그게 그거지.

    근데 아까부터 얘는 왜 자꾸 눈이 초롱초롱하지?

    내가 뭐 빨아먹을 거 있게 생겼나?

    "오빠, 전화번호 좀 주시면 안 돼요?"

    "왜?"

    "NDF시니까 굉장히 세잖아요. 위험한 일 있으면 전화드리게요."

    "아니, 나는……."

    순간, 옆구리에 칼날 같은 수도가 꽂힌다.

    "큭."

    "어? 오빠, 왜 그러세요?"

    "아니다."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지만, 이예원은 딴청을 부릴 뿐이었다.

    무서운 계집애.

    아무리 상대가 고딩이라지만, 눈치도 못 채게 이런 강렬한 일격을 박아 넣다니.

    피는 어디 가지 않는 것인가.

    이예원의 손끝에서 어머니의 향기를 느낀 이지혁이 찌그러졌다.

    "응, 여기."

    힘없이 번호를 찍은 이지혁이 폰을 다시 내밀자 단발머리 아이가 좋아라 하며 폰을 받았다.

    "톡할게요."

    "답장 잘 안 하는데……."

    "괜찮아요. 헤헤."

    이지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나 좀 인기 있는 거 같지 않나?

    특히나 얘는 정상인 같은데?

    오랜만에 정상적인 여자애랑 대화를 나누니 좀 간질간질하긴 하지만 뭔가 뿌듯…….

    "오빠."

    …하지 않아.

    이 귀신같은 여자야,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이지혁의 눈에 금발 머리를 찰랑거리며 다가오는 김다솜이 보였다.

    "어, 다솜아!"

    "다솜이 왔어?"

    이예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이야, 너?"

    "…너희 같은 학교야?"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묻자 이예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몰라. 쟤도 전학 오더라고. 근데 너 웬일이야?"

    "우리 오빠도 보여주려고."

    "오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라면, 그러니까…….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온다.

    칼날 같아서 베일 것만 같은 콧등, 짧게 찰랑거리는 금발, 사진을 찍어서 길게 늘여놓은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기럭지.

    "형님!"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김다현을 본 이지혁이 힘없이 웃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눈에 하트를 박은 예원이의 친구들과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다솜이 보인다.

    하하하…….

    절묘하군, 절묘해.

    아니, 야…….

    그렇다고 방금 받은 번호를 지울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것도 보고 있는 앞에서?

    내 번호가 더럽니?

    하…….

    "잘생긴 놈만 대접 받는 더러운 세상."

    확 망해 버려라.

    의자에 반쯤 몸을 묻은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김다현을 보며 말했다.

    "야."

    "예, 형님!"

    "박아."

    "……."

    김다현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 * *

    "하하하! 형님, 농담 재밌습니다."

    "농담으로 들리니?"

    아니요.

    하지만 제발 그렇다고 해주세요!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오빠, 진짜 재밌으시다!"

    뭔가 말을 하려는데 바로 치고 들어오는 리액션에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년 보소?

    벌써 감싸는 건가?

    아무리 잘생긴 놈이라도 이제 겨우 처음 인사하고 눈 마주쳤는데!

    농담으로 적당히 상황을 넘긴 김다현이 자리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지혁의 건너편에 앉았다.

    이지혁의 좌우에는 이미 이예원과 김다솜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앉을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안녕, 만나서 반갑다. 다솜이 오빠인 김다현이라고 해."

    "안녕하세요!"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톤이 조금 다른데?

    아니, 좀 많이 다른가?

    왜 같은 사람이고, 같은 친구의 오빠인데, 환영하는 방식이 다른 것 같지?

    이건 내 동생이 성격이 더럽기 때문인가?

    그래서 나도 거기에 영향을 받은 건가?

    현실도피를 하는 이지혁이었다.

    "오빠도 NDF에서 일하신다고요?"

    "아, 그래. 거기서 일하지."

    "와, 진짜 멋있다."

    어?

    같은 말인데 또 반응이 다른데?

    저기… 나도 NDF에서 일합니다마는?

    왜 같은 사람이 같은 곳에서 일을 하는데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인가!

    불합리하다!

    불합리해!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것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그 사실이 아프게 박혀드는 기분이었다.

    "오빠, NDF에서 일하시면 엄청 강하신 분 아니세요?"

    "하하하, 내가 감히 형님 앞에서 어딜 감히. 이분이 진짜 세지."

    "…아."

    슬쩍 이지혁을 본 아이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단 0.1초도 머무르지 않는 그 시선의 가벼움이란.

    "중요한 건 센 게 아니죠."

    몬스터 잡는데 센 게 안 중요하면 뭐가 중요하냐! 어?

    친화력이 중요해?

    몬스터랑 친목이라도 할까?

    이지혁이 부들부들하자 이예원이 이지혁의 팔을 꽉 잡았다.

    '진정해라.'

    '큭!'

    이예원은 안쓰럽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오징어는 아니었는데 김다현이 등장한 순간 누가 봐도 자연스레 사람과 오징어로 종이 나뉘어 버렸다.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사람의 종을 바꿔 버리는 저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흉기가 아닌가.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다.

    자신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보면 연예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선이 너무 얇아. 남자라면 댄디함이 있어야지.

    하, 최정훈 오빠…….

    근데… 응?

    쟤는 왜 저러고 있지?

    이예원의 눈에 이지혁의 옷깃을 꼭 잡고 있는 김다솜의 손이 들어왔다.

    하기야 쟤는 지 오빠니까 별달리 감정이야 안 생긴다 치지만, 그래도 만날 저런 얼굴을 보는데 이 인간에게 저러고 싶을까?

    참 알다가도 모를 애다.

    "중요하지, 왜 안 중요해? 너희가 저 형님 싸우는 모습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같은 남잔데도 얼마나 멋있게 보이는데."

    "으음?"

    그제야 이지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모이자 갑자기 이지혁의 옷깃이 팽팽해졌다.

    김다솜의 미묘한 시선이 향하자 김다현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지더니 서둘러 말을 돌렸다.

    "하, 하하,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죠."

    "맞아요."

    순식간에 시선을 다시 모은 김다현이 김다솜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포근한 얼굴로 돌아온 김다솜이 이지혁의 옷깃을 더욱 꽉 잡았다.

    "야, 옷 늘어나!"

    하…….

    이예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여자도 문젠데, 이 남자도 문제다.

    오징어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나 오징어 주제에 저런 눈 돌아가는 미녀를 밀어내다 못해 걷어차는 남자나…….

    왜 이리 한심한 것들밖에 없단 말인가.

    그리고 이 인간은 왜 아까부터 이리 심통이 나 있지?

    깔깔대는 셋을 보는 이지혁의 얼굴에 심통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와 있다.

    "그래서 제가 엄청 고생했잖습니까. 그죠, 형님?"

    "그게?"

    "응? 왜?"

    그제야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지혁의 테이블에 몰려 있었다.

    "왜 보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예원이 이지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 거주구 아니잖아."

    "그게 왜?"

    "보통 사람들은 능력자들 별로 안 좋아해."

    "그래?"

    그거야 뭐, 빤히 짐작한 사실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반응이 좀 유별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정도로 관계가 안 좋았던가?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시선에서 얄팍한 적의가 섞여 나온다.

    이지혁은 혀를 찼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베라프에서도 마법사나 기사는 애초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인종으로 분류되었으니까.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는 인간과 보통 인간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같이 살 수는 없는 법이라는 걸 알고는 있다.

    문제는 베라프에서는 그 공존의 기간이 워낙 길었기에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립이 되었고, 능력자에게 일반인이 대항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에 능력자는 경외의 대상으로 정착이 되었다는 것.

    하지만 이곳은 이제 막 섞이는 과정이다 보니 시선에서 질시와 두려움, 그리고 경계가 동시에 섞여 나오고 있었다.

    껄끄럽다?

    그 단어가 가장 잘 맞을까?

    한숨 소리조차 쩌렁쩌렁 울릴 만큼 조용해진 카페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다 주변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 테니까.

    "휴……."

    이지혁이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일 줄이야.

    이지혁이 생각하는 것보다 능력자와 일반인들 사이의 간극이 먼 느낌이었다. 그동안은 항상 KSF나 NDF와 어울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집에서 틀어박혀 있었기에 실감을 못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능력자 박해 분위기를 보기는 했지만, 인터넷이야 항상 그러니까.

    외노자, 여자, 타국.

    일단 깔 거리를 찾아서라도 까대는 사람이 득실득실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닌가 보다.

    "나가자."

    "예, 형님."

    "응."

    자리에서 일어난 이지혁이 밖으로 나오자 다른 사람들이 쪼르르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높아진 청각이 문 너머서 수군대는 소리를 모두 이지혁에게로 가져왔다.

    "앞에서는 말도 못하던 게……."

    이지혁이 혀를 차자 김다현이 기분을 풀어주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기분 나쁘시죠? 자주 있는 일입니다."

    "기분 안 나쁜데?"

    "네?"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전 세계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 이지혁이다.

    그런데 능력자라는 카테고리 분류도 애매한 집단에게 쏟아지는 적의를 같이 나눠 받는다고 해서 그게 뭐 신경이나 쓰이겠는가.

    귀찮은 게 싫으니까 나온 것뿐이다.

    "남 눈 일일이 신경 쓰면서 어떻게 사냐."

    '하기야.'

    남 눈을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인간이라면 이렇게 살지는 않겠지.

    괜히 걱정해 줬네.

    능력자로 살아가게 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겪는 혼란이 바로 이런 것이다.

    본인은 스스로 딱히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인들이 바뀐다.

    그동안 친했다고 생각하던 친구가 어느 순간 거리를 둔다든가, 심지어는 가족과도 서먹해진 사람도 많다.

    그러다 보니 능력자는 더욱 자신을 이해해 주는 능력자들과 어울리게 되고, 일반인과 능력자의 단절감은 더욱 커졌다.

    이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김다현만 해도 가족이 아니면 능력자가 아닌 사람들과는 말조차 잘 섞지 않는 수준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이제 집에 가면 되나?"

    "네. 딱히 할 일도 없고, 용건도 끝났고……."

    이예원도 더 할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할 건 했다.

    오라비가 오징어가 되어버린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뭐.

    이예원이 껌딱지처럼 이지혁의 옆에 붙어 있는 김다솜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애들 여럿보다야 저런 거 하나 딱 붙어 있는 게 낫지.

    눈이 삔 애라 좀 아쉽긴 하지만, 그녀의 오라비도 상태가 좋지는 않으니까.

    음, 쟤라도 잡아야지.

    막말로 그녀의 오라비 성격과 외모로 어디서 저런 애를 잡겠는가.

    그 순간이었다.

    우웅.

    이지혁의 휴대폰이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능도 있었나?"

    순간, 빛이 환해지더니, 그의 앞에 여자의 형체가 나타났다.

    "어?"

    이지혁이 나타난 여자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뭐야?"

    "최정훈 씨가 오래."

    "내가 오라면 가야 해?"

    "아마도?"

    이지혁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직접 전화할 용기가 없으니 사람 보내는 거 보소.

    거, 이 인간… 처음엔 안 그랬다는 데 갈수록 사람이 좀 얄팍해지네?

    연락하면 내가 뭐 잡아먹나?

    근데 이거 뭐냐?

    왜 아까부터 사람이 좀 으슬으슬하지?

    정해민이 나타난 순간부터 공기가 좀 내려간 느낌이 난다.

    "아, 뭐야?"

    이지혁이 그의 옆에서 한기를 뿜어내고 있는 김다솜을 보고 '앗, 뜨거라' 물러섰다.

    "네?"

    김다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시선은 정해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흐응?"

    정해민도 고개를 살짝 도도하게 들고는 그 시선을 받았다.

    둘의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동안 사건의 중심인 이지혁은 최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욕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하……."

    그 광경을 지켜본 이예원이 혀를 찼다.

    수라장이라니…….

    이 인간 주변에 수라장이라니…….

    세계가 멸망할 징조인가…….

    이예원은 자신과 피가 이어진 오징어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연쇄살인요?"

    "예."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NDF가 무슨 경찰도 아니고, 연쇄살인이 일어났는데 왜 이쪽으로 협조 요청이 온단 말인가.

    "왜 우리한테?"

    "그게……."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능력자가 연관된 것 같답니다. 지금 뉴스고 뭐고 그 일로 난리지 않습니까."

    "그야……."

    그거야 서아영도 알고 있는 일이고.

    TV를 켜기만 하면 그 이야기고, 출근길에 라디오만 틀어도 그 이야긴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가.

    지금까지야 뭐 딱히 관련이 없었으니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공문이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협조해야 하는 거예요?"

    애초에 능력자들도 관리하려고 만든 NDF지만, 독자적 루트로 움직이는 것과 경찰의 협조 요청을 받아 협조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방식의 문제도 있거니와, 주변의 인식도 문제다.

    첫 움직임을 이래 버리면 대외적으로 NDF가 경찰의 하부 조직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좀 복잡합니다. 돕기는 도와야 하는데, 무작정 움직이기는 좀 그런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결론은요?"

    앞뒤 다 접고 깔끔하게 스트레이트로 들어오는 서아영의 질문에 최정훈은 헛기침을 했다.

    반년 고생하고 오더니, 사람이 좀 변한 듯싶다.

    "조커를 쓰죠."

    "예?"

    "한 번 개고생을 해보면 다시는 이리 쉽게 요청하지 못할 겁니다."

    개고생과 조커라…….

    이 인간, 설마…….

    "네, 이지혁 씨입니다."

    최정훈이 밝게 웃었다.

    "이것들이!"

    이지혁은 부글거리는 얼굴로 NDF로 향했다.

    아주 오라 가라 하는구나.

    아니, 그래. 오라 가라 할 수는 있지!

    그래도 명색이 상관이고, 일이 터졌으면 해결은 해야 하는데 이지혁이 없으면 해결이 안 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럼 자기가 연락을 해야지.

    어디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애 하나 덜렁 보내서 오라 가라 한다는 말인가!

    "정신교육이 덜됐나?"

    특히나 요즘 최정훈이 문제다.

    처음 보았던, 그 모든 것을 씹어 먹을 듯한 엘리트의 포스는 어디 가고, 이제는 능글능글한 만능 잡부가 되고 있다.

    물론 그게 다 이지혁 때문이기는 하지만.

    처음 이지혁을 KSF에 영입하겠다고 나댔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형님, 진정하시지요."

    "진정은 얼어 죽을."

    김다현이 만류했지만, 이지혁은 코웃음을 쳤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똑같은 놈이다.

    잘생긴 놈은 다 죽어야 해.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면 NDF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이리 외로울 수가 있는가.

    베라프에 있을 때만 해도!

    주변에 마음이 맞는…….

    …마수들.

    아, 그래. 마수들밖에 없었지.

    사람이야 마음 맞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어차피 다 이지혁을 증오하거나 두려워했으니까.

    베라프에서 나름 마음이 맞았다 싶은 사람들은 초반을 지나 중반쯤. 이지혁이 베라프에 적응은 했지만 아직 멸망의 좌라 불리기 이전에 만난 사람들이었고, 그들도 결국에는 죽거나 늙지 않는 이지혁을 두려워하며 멀어졌다.

    그럼 뭐야?

    달라진 게 없잖아!

    새삼스러운 현실에 좌절한 이지혁이 현관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도 내게는 오식이가 있다.

    오식이는 예전과 다른 신뢰 관계를 쌓지 않았던가!

    물론 좀 반항을 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어, 저거 뭐지?

    그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한 마리가 아닌데?

    분명 두 마리 같은데, 이거?

    저 멀리 보이는 현관에 개(?) 두 마리가 다정하게 앉아서 하트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

    이지혁이 눈을 비비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하, 저 새끼……."

    뭔가 예쁘장하게 생긴 커다란 개가 오식이의 털을 핥아주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사람과 사람이 아무리 다정하게 지내는 것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저 광경을 보니 왠지 알 수 없는 복장이 터져 온다.

    하물며 개도 저러고 사는데!

    아, 오식이 개 아니구나.

    "야!"

    이지혁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오식이가 신호를 주자 앞에 있던 강아지가 번개처럼 질주해 사라졌다.

    그게 애정 행각을 마치 엄마에게 들킨 고등학생 같은 모습이라 기분이 이상야릇하다.

    "…야."

    끼잉.

    오식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꼬리를 흔든다.

    "너 여친 생겼냐?"

    낑.

    "…오식아, 하……."

    너 개 아니잖아, 오식아.

    너 오거야.

    왜 이러니, 정체성을 찾아야지!

    너 이러지 않았잖아.

    그 수많은 말을 삼키며 이지혁은 눈가를 훔쳤다.

    누굴 탓하겠는가.

    "너 개 아니라고 이야기는 했니?"

    오식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힘내라."

    이걸 금단의 사랑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이지혁은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원래 모습으로 돌려줄까?"

    머뭇대다가 결국 고개를 내젓는 오식이의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 이지혁이 시큰해진 코끝을 훔치며 오식이를 쓰다듬었다.

    "힘들면 형한테 말해. 술이나 한잔하자."

    커엉.

    "그래. 사료는 비싼 걸로 챙겨놓으라 할 테니까. 잘 먹이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커엉.

    "그래그래."

    이지혁이 눈가를 훔치며 오식이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안으로 향했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하… 니가 사랑을 알겠냐."

    "예?"

    사랑은 뭔 개소리야, 쪼그만 게!

    이지혁의 실제 나이를 모르는 김다현은 속으로 욕을 내질렀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최정훈이 밝은 미소로 이지혁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사람이 왜 그래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에이, 진짜."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한껏 의자에 기대 책상 위에 발을 올린 이지혁이 물었다.

    "그래서 또 왜요?"

    "경찰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무슨 협조?"

    "이번 연쇄살인범이 아무리 봐도 능력자인 것 같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범인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하는군요."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요?"

    "아셔야죠."

    "내가 왜?"

    "모르시면 더 화낼 거니까요."

    "예?"

    "당연히 아셔야죠. 저희가 협조한다고 자리 비웠는데 없으면 또 난리 치실 거 아닙니까?"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이놈의 NDF 다 잡아먹었다고 생각했더니, 또 이런 부작용이 있나?

    그럼 이제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일일이 보고를 받아야 하는 건가?

    이지혁의 머릿속에 관료제의 정점에 올랐던 시기가 떠올랐다.

    보고 받고, 보고 받고, 또 보고 받다가 잠잘 시간도 없이 보고 받고, 또 보고 받…….

    뭐지? 나 실수한 건가?

    이게 뭐야? 지옥인데?

    "음, 으음, 그래요.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요?"

    "아무래도 협조를 아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적당히 생색만 내다가 돌아오면 되겠죠."

    "뭐, 그래서… 누가 가요?"

    "그야 제일 한가한 사람이죠."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김다현을 보았다.

    "너?"

    "에이, 형님. 제가 얼마나 바쁜데……."

    "그래?"

    만날 처노는 거 같던데? 니가 왜 바빠?

    "잘생기면 바빠도 되는 거냐?"

    "아니, 그게 왜 또……."

    "고개 돌려."

    "옙."

    이지혁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엄마, 왜 날 이렇게 낳았어…….

    "그런데 연쇄살인이라… 심해요?"

    "아주 심각합니다."

    "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능력자와 연쇄살인이라…….

    이거, 잘못 얽히면 진짜 최악의 사태가 터질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좌시하기에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보내죠. 그래서 누굽니까? 확실하게 말해보세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응?"

    대답이 이상한데?

    나야?

    "나?"

    "그렇습니다."

    "헐……."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아, 나 그런데 못 가요! 내가 얼마나 부끄럼을 타는데. 모르는 사람이랑 만나면 어색하다고."

    너 유치장 창문에 하트 그리던 애야.

    정신 차려야지.

    "일적인 것이니까 어색하고 그런 건 없을 겁니다."

    "걱정되는데?"

    "걱정은 이지혁 씨가 할 일이 아니죠."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니가 아니라 걔들이 걱정해야지. 폭탄이 가는 건데.

    "흠……."

    이지혁이 살짝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겠습니다."

    "어? 진짭니까?"

    지금까지 가라고 어깃장 놓을 때는 언제고! 막상 간다니까 왜이래!

    "그럼 지금까지 나랑 농담한 거예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쿨하게 간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안 그러시던 분이 그러시니 이상하네요."

    쿨하게라…….

    이지혁이 살짝 굳은 얼굴로 최정훈이 보고 있던 자료를 뺏어 들었다.

    "흠……."

    이거, 느낌이 좀 이상하다.

    이지혁의 육감은 대체로 잘 맞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건에서는 노골적인 비린내가 났다.

    이 사건이 뭔가 큰 것으로 이어질 것 같다는 느낌?

    "일단은 좀 파봐야겠네요. 그래서 저랑 또 누가 가죠?"

    "그건 아직……."

    "최정훈 씨요."

    등 뒤에서 들려온 서아영의 목소리에 최정훈이 몸을 떨었다.

    누구?

    나?

    "아, 아니, 제가 왜……."

    "그럼 이지혁 씨 혼자 보내려구요? 가서 자료나 제대로 보겠어요?"

    당신,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사람 능력치 은근 쩔거든요?

    제가 없어도 되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왜……."

    "중요한 곳이니 중요한 사람을 보내는 거죠."

    "아니, 왜 내가……."

    "그리고 해민이랑 가윤이도 같이 갈 거예요. 그럼 됐죠?"

    "안 됐는데요?"

    "남자가 궁시렁궁시렁! 떼요! 떼!"

    뭘 떼!

    아직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는데!

    "일단 그렇게 결정 난 거니까 빠르게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미 결정난 사안에 반박해 봤자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 최정훈이 빠른 포기를 선언했다.

    "그럼 두 시간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지혁은 궁시렁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일 가면 안 되나?"

    하지만 모두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스슷.

    이지혁 일행이 경찰청 청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예요?"

    이지혁이 삐까번쩍한 청사의 모습을 보고 와, 입을 벌렸다.

    "어디랑 디게 비교되네."

    "…저희는 소수 정예라……."

    "외관부터 바른 돈이 다른데?"

    "언제나 예산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죠."

    최정훈의 눈가가 반짝 빛났다.

    "으응, 그래요."

    아저씨의 눈물 따위 보고 싶지 않아!

    서둘러 말을 돌린 이지혁이 건물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같이 가죠."

    최정훈과 정해민, 그리고 그림자에 스며든 도가윤이 그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그때,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최정훈이 뭔가 설명하려는 순간, 이지혁이 삐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냥 왔는데?"

    앞을 막아선 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냥이요?"

    "왜? 경찰청은 꼭 용무가 있어야 오나? 그냥 올 수도 있는 거지. 어차피 세금으로 지은 건물인데?"

    "흠……."

    최정훈이 이지혁의 말에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면 경찰청에 들어가려는 사람을 막아선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알고 막은 듯한 느낌?

    '기 싸움인가?'

    그러면 실수한 거지.

    세상에는 절대로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이지혁 씨?"

    "예?"

    최정훈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건물은 날리지 말아주시죠. 세금이니까요."

    만약 이게 시비를 건 거라면…….

    너희 실수했어.

    그것도 아주 큰 실수를 말이야.

    최정훈은 그가 안고 있던 폭탄이 경찰청으로 굴러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간사하다, 간사해.

    * * *

    이지혁의 고개가 삐딱해지자 앞을 막아선 이들의 얼굴에 노기가 차올랐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했습니다만?"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시비 걸려면 그냥 확 들어오세요. 적당히 선 그어놓고 간 보지 마시구요."

    "뭐라는 거야?"

    "한국말도 못 알아듣나?

    조지웅은 이지혁을 위아래로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이 새끼는?

    사실 따지자면 이 인간의 말이 맞았다.

    이들이 왜 왔는지, 무슨 용무로 왔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능력자 놈들이 온다기에 적당히 기 싸움 한 번 해보려는 의도였다.

    이곳이 누구의 홈그라운드인지 보여주고 어설프게 선을 넘는 것을 자제시키려는 의도였을 뿐.

    그런데 반응이 이상하다.

    이지혁은 한쪽 다리를 삐딱하게 짚고 달달 떨면서 말했다.

    "왜요? 막상 엎으려니 쫄리나?"

    쫄리지.

    능력자랑 싸우고 싶은 일반인이 누가 있겠냐고.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공무 집행 방해죄를 적용하겠습니다."

    "공무?"

    공무, 공무라…….

    아, 그러면…….

    이지혁이 물었다.

    "경찰이세요?"

    "물론입니다."

    "하……."

    어이가 없다.

    경찰이라니, 경찰이 이지혁의 앞을 막아서다니…….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최정훈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너희, 잘못 걸렸어.

    한 번 뒤집어엎으라는 신호를 주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형사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희도 강압적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강압적이라니?"

    하하하.

    이지혁이 고개를 깊게 끄덕이고는 당당히 입을 열었다.

    "NDF에서 협조 요청을 받고 나왔습니다. 저는 이지혁이에요."

    "그게 아니잖아!"

    급공손해진 이지혁의 태도에 최정훈이 소리를 빽! 질렀다.

    저 인간, 갑자기 왜 저래!

    "공권력이라잖아!"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어……."

    그러고 보니 저 인간… 공권력에 약했구나.

    처음 KSF에도 순순히 잡혀왔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총구 몇 개 겨눴다고 수갑 차고 끌려오다니!

    "우린 공권력도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지! NDF에서는 그렇게 깽판 치면서!"

    "그거랑은 다르죠. 경찰이잖아요, 경찰!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한, 유구한 공권력과 어디서 튀어 나온지도 모를 잡 집단이랑 같을 수가 있나!"

    "하……."

    어쩌다 KSF의 권위가 이렇게까지 떨어졌는가.

    사회에서는 이제 '경찰 따위는'이라고 하고 다닐 급이건만!

    "…NDF에서 오셨다구요?"

    "옙! 요청 받고 왔습니다."

    "네……."

    친절하고 고분고분한 이지혁의 태도에 시빗거리가 사라진 조지웅이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아닌데…….

    어떻게든 분란을 만들어서 대기하고 있던 기동대를 모조리 불러들여 사건을 크게 일으켜 볼 생각이었다.

    경찰청에서 NDF가 난동을 일으켰다는 뉴스가 퍼지면 사회적 비난 여론도 형성될 것이고, NDF의 협조를 얻겠다던 윗대가리들도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이러면 멀리서 찍고 있는 카메라와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경찰기동대까지 숨겨놨는데.

    이대로는 안 돼! 조금 더 나가자.

    "요청, 요청이라……. 당신들이 뭐라고 도움이 되겠어."

    "넵.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이, 이 정도로 포기하면 안 된다! 다시 한 번!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라는 걸 알고는 있나? 여하튼 능력자니 뭐니 하는 것들치고 도움이 되는 놈들은 본 적이 없다니까."

    그 말을 들은 이지혁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천천히 조지웅에게로 향했다.

    "뭐, 뭐야?"

    긴장한 자세로 이지혁을 바라보던 조지중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떨리기는 하지만, 의도하던 대로 일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쳐라.

    최소한 멱살이라도 잡으라고.

    그래도 설마 죽이지야 않겠지.

    병원에 몇 달 누워 있을 각오 정도는 했다!

    몸이 아픈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니까.

    과연 이지혁이 굳은 얼굴로 그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귓가에 입을 대고는 속삭였다.

    "사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이 동네에는 제정신인 인간이 없어요."

    "아……."

    "마음이 잘 맞네요."

    "하?"

    뭐냐?

    이 새낀 대체 뭐야! 뭔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절대 낚여주지 않는 이지혁의 태도에 절로 이가 갈린다.

    '썩을 능력자 놈들.'

    제멋대로 설쳐 대는 놈들 때문에 일반인들이 피해를 얼마나 보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그런 주제에 사법기관의 통제에는 따르지 않고 지들끼리 솜방망이 처벌이나 날려 대는, 쓰레기 같은 것들.

    이번 연쇄살인만 해도 그렇다.

    능력자 놈 하나가 미쳐서 날뛴 결과로 경찰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던가.

    경찰이 범인 하나 잡을 능력이 없냐면서 날아든 비난을 다 생각하자면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들끼리 해결을 못해서 하필이면 능력자 놈들의 손을 빌려야 하다니, 자존심이 상하고 속 터지는 일이었다.

    저 안하무인인 놈들이 주도권을 잡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빤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미리 콧대를 꺾어놓겠다고 벌린 일이었는데…….

    '능력자는 안하무인이니까.'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이곳에서 크게 난동을 부리지는 못할 테니까.

    최소한의 상식이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건 무슨 상황이지?

    이 새끼는 대체 뭐하는 놈이냔 말이다.

    그리고 이 난리를 치는데도 소 닭 보듯 하고 있는 저놈들은 또 뭐고!

    "아니, 이 새끼들이! 진짜 나랑 한 번 해보자는……."

    조지웅의 입이 닫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탓에 이지혁의 눈이 똑똑히 보였다.

    '뭐지?'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범죄자들을 봐왔다. 그렇기에 분위기만 보아도 이 사람이 얼마나 큰 사고를 칠 놈인지 대충은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새끼는 대체 뭐지?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면 저런 분위기가 나온단 말인가.

    대한민국을 주름잡았던 전국구 조폭이라든가,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거물 정치인들도 많이 봐왔지만, 단언컨대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사람을 하나하나 죽이는 게 아니라 개미굴을 짓밟듯 대량으로 학살한 사람이라면 이런 분위기가 날까?

    사진과 영상으로밖에 볼 수 없던 희대의 학살자들이 눈앞에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문제는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였다.

    그저 음울하고 공포스러운 것뿐 아니라 언제라도 터질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정함이 느껴진다.

    폭탄.

    그래, 맞다. 이 인간은 폭탄이다.

    '어떻게 저런 인간과 저렇게 대수롭지 않게 지낼 수 있는 거지?'

    이지혁도 이지혁이지만, 이지혁을 보면서 실실 웃고 있는 주변인물들이 더 정상인 같지 않아 보였다.

    모르는 건가?

    저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다.

    위험인물에 대해 누구보다 익숙한 조지웅이지만, 아니, 그런 조지웅이기에 눈앞의 이 인간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심술이 툭툭 묻어나는 날카로운 눈매라든가, 부풀어 오른 볼 같은 것을 보면 그나마 성격 나쁜 젊은 놈 정도로만 치부할 수 있을 텐데.

    그 뒤로 보이는 것이 너무 많다.

    "…실례했습니다."

    "네?"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 바랍니다."

    "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제가 또 뭘 잘못했나요?"

    "잘못이라뇨. 잘못은 저희 쪽에서 한 거죠.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뭐야, 이 양반? 태세 변환 클라스 보소?

    너무나도 정중하게 변한 조지웅의 태도에 이지혁이 입맛을 다셨다.

    적당히 받아주다가 수틀리면 뒤집어 엎어버리려고 했는데, 영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이리 나오는 사람을 팰 수도 없고.

    "잘 부탁드려요."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지웅이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자 되레 당황한 것은 최정훈이었다.

    저 사람 뭐지?

    저게 뭔 반응이라는 말인가.

    "기 싸움 하려던 것 아닙니까?"

    원래는 묻지 말아야 할 말이지만, 최정훈은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조지웅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가려야죠."

    왜 나는…….

    저런 통찰력을 가지지 못했던가.

    그걸 알았다면 지금 이리 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최정훈이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냈다.

    "그럼 안으로 가시죠. 회의실에 브리핑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으음……."

    이지혁은 찝찝하다는 얼굴로 조지웅의 위아래를 훑었다.

    저 표정이… 뭐라고 할까?

    베라프에서 많이 보던 표정인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에 대해서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는 건가?

    '능력치가 좀 있네.'

    사람 알아보는 눈은 있는 인물인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신경 쓸 건 없겠지.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으니까, 어깨에 힘 좀 풀어요."

    "네넵!"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짓하자 조지웅이 앞장서서 안내하기 시작했다.

    정해민이 살금살금 이지혁에게 다가와 귓가에 대고 물었다.

    "저 사람, 왜 저래?"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설명한다고 니가 알겠니?

    괜히 힘 빼느니 무시하는 게 낫다.

    이지혁은 성큼성큼 걸어 조지웅의 뒤를 따랐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으로 향하자 회의실이 나왔고, 회의실 안에는 사람들이 이미 모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정훈이 앞으로 나서 인사를 했다.

    "NDF의 최정훈입니다. 협조 요청을 받고 왔습니다. 아무쪼록 많은 지도 편달을 바라겠습니다."

    "경찰청 수사과 박지원입니다. 일단은 책임을 맡고 있지만, 대부분의 일은 저기에 조지웅 형사와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희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으니, 많은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걱정 마십시오."

    착석이 끝나자 비전이 들어오고 대략적인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현재 전국 곳곳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표시된 지도 곳곳에 빨간 점이 찍혔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고는 있지만, 일정한 흐름 없이 마구 흐트러진 점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현재 확정된 것만 28건. 언론에는 알리지 않았지만, 최소 10여 건의 살인이 더 벌어졌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파악하지 못한 살인까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미친놈이네."

    정해민의 말에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돌이 미친놈이 뭐냐, 미친놈이."

    "아이돌은 미친놈 보고 미친놈이라고도 못하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아, 꺼졌으면 좋겠다.

    얘는 여기 왜 온 거야?

    셔틀이면 셔틀답게 구석에서 대기나 할 것이지.

    "가장 큰 문제는 범인의 종적을 전혀 살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 현장이나 살인 방식에서 추정에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CCTV에는 전혀 찍히지 않아 도주 경로가 불명확합니다.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서 사람을 죽이고 사라진다고 해서 유령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고스트라……."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큼이나 사람을 죽이고도 종적이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확실히 종적이……."

    "거, 빤하네."

    최정훈이 뭔가 말을 하려던 순간,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저런 식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야 빤하지."

    "네?"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텔레포터네."

    "…응?"

    모두의 시선이 정해민에게로 모였다.

    * * *

    "아, 아니에요! 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정해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지혁을 원망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던 정해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실이 그러하다."

    이지혁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난잡해 보이는 지도도 대도시 중심으로 마커가 찍혀 있다고 생각하면 정리가 쉽지."

    "확실히."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계가 있다면 마커를 사람들이 많은 쪽에다 찍어두는 것이 유리할 테니까.

    얼핏 난잡해 보이지만, 대도시를 중심으로 반경을 계산하면 그 안쪽에 대충 걸려든다.

    "아, 아니야!"

    정해민이 소리를 빽! 지르더니, 그르렁대기 시작했다.

    "이게 어디서 또 시동을 걸어! 뚝 안 해!"

    뚝.

    "누가 니가 했다 그랬냐. 넌 그동안 하루 종일 나랑 붙어 다녔는데, 니가 가서 사람 죽이고 올 시간이 어딨어?"

    미묘한 시선이 둘을 향한다.

    하루 종일 붙어 다녀?

    저 여자… 정해민 아닌가?

    에스 걸스이자 국내 유일의 텔레포터인 그 정해민이랑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고?

    왜?

    해석이 미묘한 발언이 나오자 공기가 애매해졌다.

    에스 걸스의 삼촌 팬인 사람들은 대놓고 부들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내, 내가 언제 너랑 하루 종일 붙어 다녔어!"

    "그럼 살인자 하든가."

    "아니, 그건 아니고……."

    얼굴이 확 붉어진 정해민이 허둥지둥대자 최정훈이 한숨을 쉬고는 상황을 정리했다.

    "그렇네요. 확실히 텔레포터라고 생각하면 상황이 좀 정리가 됩니다. 하지만……."

    보통은 그런 생각을 안 하겠지.

    텔레포터는 그만큼이나 희귀하니까. 한 나라에 하나 있기도 힘든 텔레포터가 저런 사건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가 트여 있는 건가?'

    아니, 그냥 사고방식이 남들이랑 다른 거겠지.

    간단한 결론을 내린 최정훈이 짝! 박수를 쳐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럼 이제 일이 좀 쉬워지겠네요."

    "하?"

    …와, 저 한마디로 사람 빡 치게 하는 능력 좀 배우고 싶다.

    어떻게 사람이 저리 간단하게 시비를 걸 수 있다는 말인가!

    "쉬워요?"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야……."

    이지혁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범인이 텔레포터라 치죠."

    "네."

    "어떻게 잡을 건데요?"

    "…네?"

    이지혁이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정해민의 뒷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꺄아! 뭐야! 하지 마!"

    "이런 상황이면 잡을 수 있겠지. 근데, 야."

    "응?"

    "너 여기서 나는 두고 너만 텔레포트 할 수 있냐?"

    "응, 가능하지."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았다.

    "들었죠?"

    "……."

    와, 이거… 생각지도 못한 문제인데?

    텔레포터가 범인이라고 치면, 그놈을 대체 어떻게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수틀리면 다른 지역으로 날아가 버리는 사람을 무슨 수로 잡는가.

    수갑을 채워도 수갑만 두고 날아갈 것이고, 고정을 시킬 방법이 없다.

    "난감하군."

    일단 추적을 좁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전전한다면 수사망을 좁히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좁혀들었을 때 텔레포트로 도망가 버린다면 방법이 없다.

    해외에 마커라도 찍어놨다면 더 암담하다. 뭔가 해결이 좀 된다 싶었더니, 상황이 더 힘들어졌다.

    "일단 텔레포터라고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요."

    조지웅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까지는 추측일 뿐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꾸 찝찝한 감정이 남는다.

    "만약 텔레포터가 아니라고 하면, 어떤 능력이 있어야 이렇게 종적도 없이 움직일 수 있을까요?"

    "우선은……."

    최정훈이 몇 가지 가정을 했다.

    "투명화나 은신 능력이 있을 경우, 종적이 밝혀지지 않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최정훈이 지도를 가리켰다.

    "부산과 광주에서 한 시간 차이로 일어난 범행을 감안한다면, 은신이나 투명화 능력만으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헬기나 비행기라도 지원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지요."

    침음을 삼키는 경찰 관계자들에게 최정훈이 물었다.

    "이게 한 명이 아닐 가능성은 없나요?"

    "범행 흔적이나 방식이 완전히 동일합니다. 공범이 있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성향이 나뉘기 마련이죠. 범행 방식은 지문 같은 거라 아무리 모방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동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동일범이라는 건데…….

    최정훈은 고개를 까딱까딱하다가 깊이 끄덕였다.

    "그럼 일단은 텔레포터거나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가진 이라고 생각해야겠군요. 적어도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는 사람일 텐데……."

    이지혁이 가만히 최정훈의 말을 듣다가 물었다.

    "그런데 그거… 조사하면 나와요?"

    "무슨 말씀이시죠?"

    "등록제니까 대부분의 능력자에 대한 능력은 파악이 되어 있을 거 아니에요. 나름 비슷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를 추려보면 뭔가 가닥이 잡힐 것 같은데."

    "…그렇겠네요."

    이성적인 방법이지만, 그리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기도 했다. 협회에 소속된 능력자들을 범인으로 몰아간다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니까. 하지만 감정적인 문제는 접어둬야 할 시점이다.

    이 연쇄살인의 파급력은 너무도 거대했다.

    만약 범인이 능력자라 확정된다면, 사회에 끼칠 영향이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범인을 체포하는 데 그들이 한 팔 거들지 않는다면, 비난의 눈총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은 그런 식으로 수사 방향을 잡아보겠습니다. NDF분들께서는 비슷한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이들을 확보해 주십시오."

    "여기요."

    이지혁이 정해민의 뒷목을 잡고 대롱대롱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야! 하지 마!"

    "확보."

    "……."

    아, 저 또라이 새끼.

    조지웅은 이 일이 결코 깔끔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휘말렸다. 질척하고 음습한 악의가 느껴진다.

    아무리 NDF의 협조를 얻는다고는 해도…….

    "내려줘! 내려 달라고!"

    "가만히 있어봐! 확보하라잖아!"

    "나 범인 아니라고! 내가 사람을 어떻게 죽여!"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거지."

    "너……."

    정해민이 시동을 걸기 시작하자 이지혁이 '앗, 뜨거라' 손을 놓고 물러났다. 하지만 반응이 좀 늦었다.

    "흐아아아아아앙~!"

    지옥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이지혁은 귀를 막고 뒤로 물러났다.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울음소리에 경찰들도 기겁을 하며 귀를 틀어막았다.

    "저게 뭐지!"

    최정훈이 소리쳤다.

    "아니, 그러게 왜 사람을 괴롭히고 그래요! 어떻게 좀 해보세요!"

    "잘 안 들리는데?"

    "왜 사람을 울리냐고! 빤히 알면서어어!"

    "뭐라고오?"

    "으아아! 이 썩을 놈아!"

    "그건 들리거든? 확, 그냥!"

    찔끔한 최정훈을 두고 이지혁이 정해민에게 다가가더니, 시커먼 홀을 만들어 그대로 집어삼켰다. "헐……."

    최정훈이 손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어디로 보낸 겁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

    "……."

    "한참 울고 나면 진정되겠죠."

    아니, 서러워서 우는 사람을 격리 수용해 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그러다 트라우마가 더 심해지면 어쩔 거야!

    너무 과도하게 합리적이잖아!

    "제 생각인데, 빼 오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뭐…….

    이지혁이 손을 뻗어 게이트를 다시 만들어냈다. 그러자 스르륵 정해민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딸꾹."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된 정해민이 이지혁을 보더니, 달려들어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너, 날 어디로 보낸 거야아아!"

    "또 가기 싫으면 앉지?"

    "히끅."

    또 보낸다는 말에 겁이 났는지 정해민이 얌전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착하다."

    걔가 니 누나야, 이 예의라고는 밥 말아 처먹은 인간아.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은 날 텐데.

    어휴.

    하기야 저 인간에게 예의를 바라는 게 미친 짓이지.

    "저……."

    그들의 장난기 어린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조지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 상황을 잘 이해 못하신 모양인데,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네?"

    "살해 간격을 보시죠."

    "음……."

    사건 일지를 살펴보니 확연하게 드러난다. 사건이 벌어지는 간격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범인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잡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겠죠. 공권력이 그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 고삐가 완전히 풀릴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는 역사상 가장 끔찍한 연쇄살 인마의 출현을 보게 될 겁니다."

    이미 반쯤은 그렇지만.

    조지웅의 말에 모두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이지혁은 빼고.

    '알 게 뭐야.'

    살인마든 뭐든, 그런 사소한 일을 이지혁이 신경 쓸 일은 없다.

    이지혁이 죽인 사람에 비하면 그런 연쇄살인마 정도는 차라리 천사나 다름없다.

    이제 와서 그런 범죄에 부들부들 떨며 분노하는 착한 인간 코스프레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이지혁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니 뭐…….

    "그런데 동일범이라는 이유가 뭐예요? 그 비슷하다는 이유가 뭔데?"

    "우선 등 뒤에서 날카로운 흉기로 폐를 노린다는 측면이 가장 비슷하고……."

    "네."

    "노린 대상이 모두 젊은 금발의 여성이라는 것이 동일합니다."

    "금발?"

    "네."

    "젊은?"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금발의 젊은 여자라……. 금발…….

    뭐?

    이지혁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댔다. 금발의 젊은 여자면…….

    음, 뭐, 이제는 우리 예원이는 금발이 아니니까 괜찮겠지. 검은색…….

    어? 오늘 이상한 걸 본 거 같은데? 이지혁이 휴대폰을 꺼내 톡으로 들어갔다.

    이예원의 아이디를 클릭해 들어간 이지혁의 눈에 갈색도 아닌, 샛노란 머리의 이예원이 들어왔다.

    오늘 다시 염색. 역시 나는 금발이 어울리는 듯. 하, 왜 나는 파리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꾹.

    통화 버튼을 누른 이지혁이 전화를 귀에 댔다.

    - 왜?

    "야, 이 미친년아! 대가리 당장 원래대로 못 돌려?"

    - 왜 다짜고짜 전화해서 시비야!

    "됐고, 그 대가리 당장 염색해!"

    - 내 마음이거든? 니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그 대가리 당장 염색 안 하면 싸그리 다 불태워 버릴 줄 알아!"

    - 꺼져, 미친놈아! 뚝.

    끊긴 전화기를 보며 부들부들 떨던 이지혁이 브레스를 뿜듯 소리쳤다!

    "대체 얘는 대가리에 뭐가 든 거야! 으아아아아!"

    제에발 뉴스라도 좀 보라고오!

    하기야 이지혁도 몰랐으니 할 말은 없다만. 휴대폰을 던지듯 내동댕이친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그래, 내 죄지.

    다 내가 지은 죄지!

    "그 살인범 새끼가 능력자라고?"

    "아, 네!"

    이지혁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어디서 뭘 하고 다니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그 타깃이 잘못됐어! 많이 잘못됐다고!

    "잡아……."

    "네?"

    "총력을 동원해서 잡는다! 서아영한테 연락해서 하던 거 다 멈추고 이 새끼부터 쫓으라고 해요." "갑자기 왜?"

    "돌부리가 있으면 치워야지."

    그게 비록 내가 먼저 때려죽이고 싶은 동생 년 앞에 있는 돌부리일지라도 말이야.

    "원래 사람이란 게 내가 때리는 건 참아도 남이 때리는 건 못 참는 법이죠."

    "네?"

    "여하튼 연락해서 대책 강구하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너, 이 새끼. 잘못 걸렸어. 이지혁이 눈에서 불을 피워올렸다.

    "근데 못 잡는다며? 텔레포터라……."

    정해민의 물음에 이지혁이 멍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이걸 어쩌지?

    음음…….

    이지혁이 정해민의 뒷덜미를 잡았다.

    "너, 나랑 실험 좀 하자."

    "응?"

    "어디까지 도망가지는지 말이야."

    "…나랑?"

    불안함에 물드는 정해민의 얼굴을 보며 이지혁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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