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5화 (15/118)
  • [■] 약 팔지 마시고 시작하시죠. [■]

    ─────

    익숙한 얼굴들과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이 보인다.

    서아영, 최정훈, 도가윤, 정해민까지야 고정 멤버니까 그렇다 치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낀 금발 머리와 처음 보는 남녀도 안에 있었다.

    마스크를 쓴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지혁에게 과격하게 달려와 직각으로 허리를 꺾었다.

    "나오었습니까."

    "누구세요?"

    "김다혀입니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도 채 다 가리지 못한, 퉁퉁 부은 얼굴이 보였다.

    "붓기 덜 빠졌어?"

    "옙."

    "그러게 조심하지그랬어."

    나를.

    나를 조심해야지, 나를.

    "에가 몰아와……."

    "웅얼대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제가 몰라뵈었습니다."

    "고러취."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한 번 두들겨 놓으면 사람이란 건…….

    어? 이 반응이 아닌데?

    보통은 사람을 마주치면 부르르 떤다거나 그러지 않나?

    눈도 못 마주쳐야 정상적인 반응인데, 지금 이 반응은 뭐지?

    순간, 이지혁의 머리에 어제 김다현을 질질 끌고 가던 가녀린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뭔 짓을 당한 거야?'

    얼마나 정신 공격을 당했으면 사람이 저리되는 건가.

    "김다현이라고?"

    "예!"

    "혹시 니 동생이……."

    움찔.

    동생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움찔하는 김다현을 보니 더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지혁은 김다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무겁게 말했다.

    "힘내라."

    "…예."

    "어려운 일 있으면 이야기하고. 동생 삼아줄게."

    "예."

    김다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의문에 빠졌다.

    그런데 저 새끼… 몇 살이지?

    이지혁은 김다현과의 감격의 상봉을 끝내고 나서 삐딱한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뭐 얼마나 급한 일이 있다고 잘 쉬고 있는 사람까지 불러냅니까? 그것도 쥐똥 보내서."

    "쥐똥이라고 하지 마!"

    발끈한 정해민이 소리쳤지만, 통할 사람이 있고, 통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 법이다.

    "너, 너희 가족들 반응 못 봤어?"

    "봤지."

    "그런데도 계속 이럴 거야?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알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내가 사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뉘에, 뉘에."

    코를 후빈 이지혁이 뭐라 빽빽! 소리치는 정해민을 무시하고는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새로 오신 분들과 인사를 나눠야겠지만, 일단 자료 화면부터 보시죠."

    불이 꺼진 사무실 벽면으로 빔 프로젝트가 쏘아졌다.

    "와우."

    이지혁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곳에는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닥치는 대로 건물을 후려치고 때려 부수는 괴수의 모습이 있었다.

    "어, 저거?"

    검은 동체.

    파충류와 같은 비늘.

    거대하고 묵직한, 마치 공룡을 연상케 하는 저 거대한 괴물은?

    "저거 고지……."

    "에헤이!"

    "아니, 고지……."

    "에헤이! 저작권, 저작권! 소중한 겁니다! 지켜주세요!"

    "그럼 용가……."

    "에헤이! 고소 들어와요!"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이는 이지혁이다.

    저작권은 소중한 거니까.

    "그럼 용지라라고 합시다. 합쳐서."

    "…이름은 이미 붙었습니다. X1이라고요."

    "센스 더럽네."

    이지혁이 투덜댔지만 최정훈은 깔끔하게 그 발언을 무시했다.

    저 인간의 투정에 발맞춰 주다가는 하루 종일 회의를 해도 끝나지 않는다!

    "맨해튼에 출현한 X1입니다. 레벨 5 게이트에서 출현했습니다."

    정해민이 손을 들었다.

    "예."

    "저리 큰 게 레벨 5에서 나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처음 출현할 당시에는 크지 않았으나 교전을 거듭하며 성장한 모양입니다."

    "음……."

    정해민은 침음을 삼켰다.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게이트의 크기로 레벨을 판단해 왔던 근거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이니까.

    이리된다면 레벨 1 게이트에서 오거가 출현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장 문밖에 오식이의 예도 있으니까.

    '먹은 건가? 마나를?'

    이지혁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대한민국의 굵직한 게이트는 이지혁이 모조리 잔존 마나를 먹어 치우고 있는 중이지만, 대한민국 밖으로 나가면 남아 있는 잔존 마나가 분명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뭉쳐 있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걸 먹고 거대화했다면 저 비정상적인 덩치가 이상하지 않다.

    "현재 들어온 정보대로라면 미 국방부가 핵 투하를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맨해튼에요?"

    "나라가 날아갈 판이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빔 프로젝트의 화면이 분할되며 십여 개의 화면이 동시에 떴다.

    "영국, 프랑스, 인도, 중국, 터키, 호주 등 수많은 곳에서 동시에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침공이네요."

    문이 열리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말했다.

    "어?"

    이지혁이 반색을 했다.

    "오, 너 여기 있었구나! 잘 지냈어?"

    "그럼요."

    이지혁 때문에 인간 기둥이 되었던 아이언 박성찬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웃었다.

    악감정이 조금 남아 있기는 했지만, 털어버린 후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햐, 이거 보게? 마녀에, 텔레포터, 드리프터에 거긴 스핏 파이어인가? 루드라까지 왔군? 이거, 내가 낄 곳이 아닌 것 같은데……."

    최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긴급입니다."

    "긴급이 아니면 감히 못 올 곳이지만, 긴급 상황이라서 끼워준다는 거군요. 자존심이 상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이 자리에 낄 수 있다는 건 영광이니까요. 그런데……."

    박성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넌 왜 여기 있냐, 그러고 보니?"

    "그러게요."

    이지혁이 동의했다.

    "여기 있으면 이상한 이름 붙을 거 같아서 껄끄러운데. 나 그냥 가면 안 되나?"

    "이지혁 씨……."

    "아, 알았어요. 엄살은."

    "설명을 계속하자면……."

    이지혁을 진압한 최정훈이 말을 계속 이었다.

    "세계 각지에 대형 게이트가 출현하여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상황입니다."

    "그래서 뭐? 지원이라도 가자는 거요?"

    "NDF는 대한민국을 지키는 단체입니다. 다른 나라 사정에 도움을 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편도 아니구요."

    "그럼 뭐가 문젠데?"

    "간단합니다."

    최정훈이 비전을 켜자 십여 개의 화면이 모조리 게이트를 비추고 있는 영상으로 바뀌었다.

    "저 게이트들은 뭔데요?"

    "보시는 바대로 게이트입니다. 유형에 따라 레벨 4에서 5라 추정되는 게이트들 열 개입니다."

    "이게 이번에 출현한 게이트라는 겁니까?"

    최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게이트들은 현재 대한민국 영토에 나타난 게이트들에 대한 실시간 영상입니다."

    "어디?"

    "대한민국이요."

    사무실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화면으로 집중되었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이해해 버린 것이다.

    한 명 빼고.

    "그게 왜요?"

    이지혁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은 최정훈이 아니라 서아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전 세계를 뒤집어놓은 수만큼의 게이트가 대한민국에 출현했다는 거죠."

    "아, 그 말이야?"

    김다현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형님, 그냥 조용히 하시는 게 이미지에 좋을 것 같습니다."

    "덜 맞았어?"

    "…아닙니다."

    조용히 찌그러진 김다현을 뒤로하며 이지혁이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요? 여기 이 사람들로 저걸 다 막아보자고? 그냥 빨리 이민이나 알아보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옆 나라 중 멀쩡한 곳은 없어요?"

    울 엄마랑 예원이부터 보내야지.

    응? 뭔가 빠진 듯한 기분이 드는데?

    아…….

    아, 오식이! 오식이!

    오식이도 보내야지.

    미친 소리 같지만, 가장 현실적인 소리기도 했다.

    블랙 먼데이 이후로 능력자 전력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지금 침공 받고 있는 나라들에 비해 나을 것이 없었으니까. 아니, 저들과 비교하자면 오히려 못한 편에 속할지도 몰랐다.

    한 나라가 하나의 게이트를 막는 것도 빠듯한데 열 개의 게이트를 막아야 한다?

    배를 버리는 게 차라리 현명하다.

    "물론 상황이 심각하긴 하지만, 최악은 아닙니다. 레벨 5 게이트에서 저런 괴물이 나오듯이 이 게이트 전부에서 고위급 몬스터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의외로 잔챙이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위로가 되네요, 참."

    최정훈은 헛기침을 했다.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헛소리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일본요."

    "에헤이! 이지혁 씨!"

    "이거 놔요!"

    이지혁이 최정훈을 뿌리쳤다.

    "잘 놀고 있는 사람 데리고 오더니, 이게 뭔 소리야! 이럴 거면 나라 뜨는 게 빠르지!

    저걸 어쩌자고!"

    "어떻게든 해야지요! 어떻게든! 그래서 우리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누가 우리야!"

    "정리 못하면 몇 천 명이 문제가 아닙니다. 천만 명 단위가 죽어 나가요! 대한민국이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거, 그래도 다 새 나라 생기고 새로 다들 잘살더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뭐긴 뭐야, 경험담이지.

    나라 망하는 것 따위야 백 단위로 봤다.

    뭐, 새삼스러운 거라고 안 망해보겠다고 발악을 하는가.

    "여하튼 저는 휴가 중이니 갈게요. 알아서 잘해보세요."

    "에헤이! 이지혁 씨."

    최정훈이 이지혁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왜 이러십니까?"

    "아니, 그건 내가 물어야죠!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

    최정훈이라고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최정훈의 모든 계획도 이지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지혁에게 막대한 부담이 지워지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꼬실 방법이 없다면 사정이다.

    이건 웬만한 먹이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비는 수밖에.

    "내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자꾸 해결하라, 해결하라 하는데, 이러지 마시죠. 저보다 받는 돈도 많으실 텐데, 힘 좋으신 분들이 해결하라고 해요."

    "돈이 문제면 준비하겠습니다."

    "얼마?"

    "네?"

    "게이트 하나당 얼마 줄 건데요?"

    최정훈이 난색을 표했다.

    "…아무래도 이지혁 씨의 신분이 준공무원이다 보니 그리 많이 준비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럼 관두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최선이고 뭐고, 그 돈 받고 개고생하느니 그냥 안 할래요. 내가 돈이 뭔 필요가 있어."

    컴퓨터만 있으면 되는데.

    밥이랑.

    오식이 사료 값이랑.

    엄마 옷값하고…….

    예원이? 예원이는 뭐 사 주지?

    지금 가진 돈만으로도 떡을 치고도 남는다. 그런데 미쳤다고 괴물이랑 목숨 걸고 싸우겠는가.

    "이지혁 씨, 전 국민의 목숨이 이지혁 씨의 두 어깨에 걸려 있습니다."

    "그럼 다른 데 걸라고 하면 되겠네."

    "…이거 안 통하네."

    "누굴 호구로 보나! 팍, 씨!"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은근히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지혁 씨. 사실 돈만 있으면 대한민국보다 살기 좋은 곳도 없습니다."

    "…네?"

    "제가 뽑아낼 수 있는 대로 뽑아내 보겠습니다. 그럼 이지혁 씨는 편히 살 수 있는 거죠."

    "아니, 돈이 뭐 그리……."

    "중요합니다."

    너무도 확신 어린 그 말에 이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하셔서 그런 모양인데, 지금 세상에서 돈은 권력이고! 힘이고!

    편리이고! 사랑입니다."

    "사, 사랑?"

    "돈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데……."

    "그건 푼돈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이지혁 씨는 선을 하나 넘게 되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그 세계를 알고 싶어지지 않으십니까?"

    "…조금?"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아, 예."

    최정훈에게 이끌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며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기분을 어디서 느껴봤더라?

    "저, 그런데 왜 여기서 일하세요? 약 팔면 진짜 잘 파실 거 같은데……."

    "…퇴직하면 해야죠."

    "네?"

    "아닙니다."

    최정훈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퇴직?

    그것도 좋지. 이지혁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박성찬 씨랑 굉장히 친해 보이시던데?"

    "그야 좋은 타입이라 그렇죠."

    "안 좋아할 타입 같았는데, 아닌가 보군요."

    "그런 타입 좋아해요. 머리 나쁘고 몸만 쓰는 타입. 앞에다가 던져 놓으면 알아서 잘 막거든요. 이용해 먹기도 좋고."

    "…그렇군요."

    최정훈은 눈물을 삼켰다.

    혹시 이 새끼… 나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이지혁을 자리에 앉힌 최정훈이 빔 프로젝트의 화면을 바꾸며 말했다.

    "여러분."

    "……."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꿀 작전이 시작됩니다."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이지혁의 목소리만이 천천히 울렸다.

    "약 팔지 말고… 시작하시죠."

    최정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이 새끼야.

    서글픈 시작이었다.

    * * *

    국방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현재 가용한 전 병력을 동원한 상태입니다."

    "타국의 지원은요?"

    "현재 일본과 중국, 러시아 모두 여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여력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목소리가 더없이 날카로웠다.

    여력이 없는 게 아니라 돕고 싶지 않은 거겠지.

    도우려는 생각만 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방치해 두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요?"

    "아시다시피 가장 심각합니다. X1이 뉴욕을 무너뜨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 넓은 국토에 게이트 하나 열렸다고 비상이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대치할 수 있는 병력의 수가 한계가 있는데, 전 병력 동원이라니!"

    국방부 장관 서충식은 책상을 내려치고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그래서 막아낼 수는 있답니까?"

    "최선을 다하겠다고는 합니다만……."

    "결과가 중요합니다! 결과가!"

    서충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으로 걸어갔다.

    '망할.'

    십여 개의 레벨 5 게이트가 동시에 생겨났다는 것은 한 국가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우리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한민국을 파괴한 몬스터들이 어디로 향할지를 생각한다면 주변국의 지원은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국들은 자국에 출현한 게이트를 핑계로 일절 손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적당히 파괴되고 나면 그제야 느지막이 도움을 주는 척하겠지.

    그때쯤이면 대한민국은 홀로 자립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타이밍이 조금만 틀어지면 자립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만한 위기인데도!"

    서충식의 시야에 책상 위에 놓인 서류가 들어왔다.

    게이트 생성을 기점으로 국외로의 탈출 러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이 걸려 있는 판국에 애국심을 운운할 생각은 없다. 내가 살아야 국가도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가장 먼저 탈출하고 있는 사람이 이 국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기득권층이라는 사실이 서충식을 더욱 속 쓰리게 하고 있었다.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내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나라를 떠난다. 이곳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라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서충식은 휴대폰을 들어 KSF를 찾아 전화 버튼을 눌렀다.

    국가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오늘도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야 했다.

    진정으로 희생해야 할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곳을 지키기 위해서.

    '썩었어.'

    서아영은 가라앉은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코끼리도 집어삼킬 듯 거대한 크기의 게이트를 보고 있자니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봐온 게이트지만, 오늘의 게이트는 유난히 섬뜩했다.

    이 게이트는 언제까지 열리는 걸까?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지는 것일까?

    그럼 나중에는 어떤 몬스터들이 튀어나올까?

    서아영이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준비는요?"

    - 출현 게이트 전역에 병력 배분 완료했습니다.

    "이지혁 씨는요?"

    - 테스팅 텔레포트를 끝내고 대기 중입니다.

    서아영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용케 움직여는 주는군요."

    - 핑계거리를 만들어줬습니다.

    NDF 지하 작전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최정훈은 전화기에서 고개를 살짝 떼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지혁이 정말 할 의도가 없었다면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지혁의 입장에서는 가족을 데리고 대피해 버리는 게 백배는 더 편한 방법이니까.

    속아 넘어간 척 넘어와 준 이지혁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 그럴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데…….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니면 잃은 것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잃고 싶지 않거나.

    최정훈은 문득 이지혁에 대해 떠올려 봤다.

    종잡을 수 없는 행동들.

    일관성 없는 움직임.

    집착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손에 넘어온 것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방식.

    '대체 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은 거지?'

    이지혁이라는 인간을 완전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공백의 5년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으나 이지혁의 5년은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 오거가 열쇠겠지.'

    분명 서로 알고 있는 눈치였다.

    타 차원에서 넘어온 오거를 알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정훈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 여하튼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피해가 끝도 없을 테니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부탁해요.

    통화가 끊기자 최정훈은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NDF가 완전해졌을 때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훨씬 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망할 윗대가리 새끼들."

    그래서 진즉에 해야 한다고 그렇게나 말했거늘.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갖춰진 게 다행이었다.

    최정훈은 다시 전화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눌러다.

    "정해민씨?"

    - 네, 준비 중입니다.

    "신호대로 완벽하게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 네, 걱정하지… 야! 내가 누나라고 부르라 그랬지! 어딜 만져! 손만 잡으란 말이야!

    손만! 그러지 마아!

    "…정해민 씨?"

    - 아,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 하지 말라니까아아아!

    전화기 너머로 훌쩍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최정훈은 심장을 움켜잡았다.

    심장에 좋지 않아, 심장에.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니…….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이지혁 씨 좀……."

    - …네.

    뭔가 투닥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심통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요?

    하… 정말 예의 바르기도 하지.

    그래도 존댓말은 써주잖아.

    "이지혁 씨,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모든 작전의 성패는 이지혁 씨에게 달려 있습니다.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제압을 해야 합니다.

    - 뭐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뭘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탁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 말은 청산유수지! 말은!

    "끊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정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하겠다는 말은 아직 안 하네.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이지혁은 인상을 확 쓰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뭐가?"

    "쥐똥은 몰라도 된다."

    "쥐똥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너, 내 팬들이 내가 이런 취급 받는 줄 알면 뭐라고 할지 생각해 봤어?"

    "쥐똥이구나 하겠지."

    "우…우웁."

    정해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자 가슴이 아파진 이지혁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또 울어 젖히면 옥상 밖으로 던져 버릴 테니까, 생각하고 울어."

    뚝.

    "오올치."

    이지혁은 현재 NDF 건물 옥상에 마련된 텔레포트 존에서 정해민과 함께 대기 중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게이트에 대응하기 위해서 열리는 순서와 강약의 정도를 파악하여 최정훈이 텔레포트 콜을 하면 정해민이 즉시 이지혁을 해당 지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하……."

    이지혁이 불만 어린 눈으로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얼핏 들으면 좋은 작전 같지만, 따져 보면 정해민은 텔레포트 능력을 제외하면 그냥 잉여 인간이다. 일반인보다야 훨씬 강하지만, 실질적으로 전투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혹 덩어리를 달고 몬스터들 사이를 뛰어다녀야 한다는 건데, 이게 뭔 작전이라고…….

    "하, 진짜 때려치우고 싶네."

    사실 그가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가 도망가면 저 몬스터들은 대한민국을 초토화시키고 대륙으로 몰려간다. 그럼 일순간 현 상태의 균형이 무너지게 될 것이고, 추가로 소환되는 몬스터들이 즉시 제거되지 못하고 모이게 된다.

    그럼 끝이다.

    하나하나 추가되는 몬스터들은 인류를 말살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베라프에서도 그랬으니까.

    원래 균형은 작은 곳에서부터 무너진다.

    그 꼴을 수도 없이 봐온 이지혁에게 있어서 해외라는 곳은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지구 전체로 본다면 지금 이곳이 막아야 하는 최종 방어 지대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왜 내가 막아야 하냐고!"

    약해 빠진 것들!

    따져 보면 이게 다 저놈들이 약해 빠져서 몬스터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러다가 고위 몬스터가 아닌, 고위 마족이나 드래곤이라도 넘어온다면 인류는 그냥 끝이다.

    뭐, 어떻게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이 날 것이다.

    "안 되겠어."

    프리한 라이프를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자신이 혼자서 춤추고 노래하고 드럼까지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베라프에서라면 그게 가능했다. 하지만 베라프에서도 마수의 군단을 활용할 수 없었다면 활동 폭이 반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도 그의 힘을 되찾고 마수의 군단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으니까.'

    오거.

    베라프에서도 최상위급 몬스터였다. 베히모스 같은, 몇 마리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인 수나 그 힘으로 볼 때 육상의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몬스터다.

    그런 놈들이 넘어온다.

    그럼 앞으로 더 강한 것들도 넘어올 수 있다는 의미였다.

    처음 게이트에서 고블린 같은 것들이 넘어올 때는 같잖지도 않았지만, 이젠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미묘하게 뭔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베라프와는 연결 고리가 없을 거라고 여겼지만, 이번에 오식이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곳을 침공하고 있는 차원 중 베라프도 있을 수 있다.

    그럼 대체 왜 이곳으로 저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있느냐가 문제인데…….

    "끄응, 알 수가 없네."

    이지혁 때문은 아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침공은 그가 돌아오기 전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이지혁이 침공을 일으킨 게 아니라 그 침공에 이지혁이 휘말렸을 확률이 높았다.

    이지혁이 베라프로 넘어간 시점과 침공이 시작된 시점이 동일했으니까.

    "일단 그런 건 모르겠고……."

    이지혁의 눈이 빛났다.

    "내 집을 다른 놈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아, 저거 때릴까?

    이지혁이 진정한 남녀평등을 실천할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에 정해민 역시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진짜 믿어도 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각자 게이트를 막으라는 명령을 들었을 뿐이다. 이 작전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 사람을?'

    작전의 실체를 알고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정해민이었다.

    그가 본 거라고는 오거를 두들겨 패고 사람들을 바다에 날려 버리는 이지혁의 모습이 전부였다.

    오거를 두들겨 패는 모습 하나로도 설명이 끝나야 맞겠지만, 그게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와 닿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캐릭터가 워낙 진지하지 않다 보니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해민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휴대폰 화면에 불이 들어오며 날카로운 비프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작전 모드로 전환되며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K4! 반복한다! K4! 즉시 이동!

    이지혁은 뚱한 얼굴로 정해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지혁의 손을 움켜잡은 정해민이 그 자리에서 퍽, 꺼졌다.

    * * *

    이지혁과 정해민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게이트가 열린 곳의 하늘 위였다.

    몬스터 군단이 어떤 식으로 퍼져 있을지 모르기에 가장 합리적인 위치를 지정한 것이다.

    문제는…….

    "왜 하늘 위야?"

    "문제 있어?"

    "나야 없지. 그런데 너는?"

    자신을 향해 과격하게 다가오고 있는 지면을 보며 정해민이 몸을 굳혔다.

    "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은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얘가 왜 아이돌이지?'

    돌아이가 맞지.

    정해민을 잡아 허공으로 띄워 올린 이지혁이 몬스터의 군단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가 최정훈에게 요구한 것 첫 번째.

    가장 처음은 조무래기가 많은 곳으로.

    저번에 시간 역행을 펼친다고 마나를 모조리 탕진해 버렸기에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게이트에서 바글바글 튀어나오는, 각다귀 같은 생명체들을 보며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다.

    저걸로는 모자라.

    "제길!"

    하지만 당장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이지혁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두어 마리의 각다귀가 피떡이 되면서 바닥으로 납작하게 처박혔다.

    카아악!

    이지혁의 존재를 발견한 각다귀들이 우르르 달려든다.

    이지혁은 손을 털었다.

    간만에 좀 진지하게 해볼까?

    이지혁이 날아드는 각다귀들의 앞발을 스치듯 피해내며 좁은 관절에 킥을 차 넣었다.

    콰득! 콰득!

    관절이 역으로 뒤틀리며 각다귀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드레인!"

    빨려 들어온 마나가 다시 손으로 밀려 돌아온다.

    우우우웅!

    손 앞에서 공명하는 마나가 검게 일그러지다가 빛처럼 뿜어져 나간다.

    "터져라!"

    화아악!

    폭탄이 터지듯 검은 마나의 섬광이 각다귀들을 집어삼킨다.

    "……."

    허공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정해민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검은빛이 각다귀들을 집어삼키더니, 잠시 후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흠……."

    이지혁은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모자라다.

    레벨 5라고 해서 나름 기대했는데,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좀 더 많은 마나가 필요했다.

    '그런데 내 주먹이 이리 셌나?'

    내려치는 것으로 주변을 박살 내버릴 정도라니.

    예전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지혁이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안에 뭔가 커진 게 느껴지는데…….'

    에테르인가?

    확실히 육체 쪽으로는 과거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지기는 했다.

    잃은 것이 너무 커서 갈증이 난다는 점만 없다면 차곡차곡 전진하고는 있다는 말인데…….

    "꺄아아아아! 어딜 봐! 여기 보라고! 나 떨어지잖아!"

    "에이, 저거 진짜……."

    이지혁이 양손을 앞으로 뻗어 정해민을 받아 들었다.

    턱!

    일명 공주님 안기.

    손을 낮추며 반동을 줄여 정해민을 받아 든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화악.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정해민이 두 손으로 이지혁을 밀어냈다.

    "내, 내려줘!"

    "너… 쥐똥만 한 게 왜 이리 무거워?"

    "안 무겁거든!"

    "근육근육하네. 춤도 운동이라서 그런가?"

    이지혁이 정해민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인간 여자를 안아 드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가 보다. 매번 다크 엘프나 악마들만 안아 들다 보니 생소한 감각이었다.

    인간과는 접점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여자한테 무겁다는 소리를 하냐! 진짜 너… 생각 없구나?"

    "여자는 무슨."

    이지혁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저리 떨어져 있어. 셔틀 날아가면 나도 귀찮으니까. 아직 안 끝났다."

    "콱! 물어 뜯겨 버려라!"

    저게 미쳤나?

    쪼르르 달아나는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찔끔찔끔 튀어나오기는."

    게이트에서 또다시 각다귀들이 밀려 나온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빨리 끝내야 하는데, 제대로 정리가 안 됐다. 그렇다고 여기서 시간을 계속 끌 수는…….

    그때, 벌 떼가 웅웅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게이트 건너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호?"

    체고가 7m는 넘을 듯 거대한 사마귀 형태의 괴물이 앞발을 쩌억 벌린 채 게이트를 막아선 이지혁을 관찰했다.

    "맨티스?"

    이지혁이 알던 맨티스에 비한다면 크기가 좀 크고 색이 다른 듯하지만,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자꾸 미묘하게 사람 신경 거슬리게 하네."

    하지만 맨티스는 이지혁의 마음까지 신경 써줄 생각이 없는지 앞발을 휘둘러 공간을 갈라왔다.

    톱날처럼 삐죽이며 튀어나와 있는 앞발의 돌기가 섬뜩하다. 잡히기라도 한다면 인간의 피육 따위는 순식간에 찢어지고 갈라져 버릴 테지.

    "후웁."

    하지만 이지혁은 이지혁!

    평소였다면 피해내고 물러섰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했다.

    이지혁이 짧은 기합성을 토해내고는 마나로 육체를 강화했다.

    몸 안팎으로 마나를 두른 이지혁이 맨티스의 앞발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끄그그극!

    반동을 이기지 못한 맨티스의 앞발 관절에서 녹이 슬어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으하아압!"

    이지혁이 맨티스를 그대로 들어 올려 바닥으로 메다꽂았다.

    콰아앙!

    맨티스의 육체가 버둥거리는 순간, 이지혁이 맨티스의 위로 몸을 띄워 올렸다.

    손에서 뻗어 나온 검은 마력 줄기들이 맨티스의 몸을 그대로 삼켰다.

    "드레인!"

    막처럼 퍼진 마력들이 맨티스의 몸을 조이고 뒤틀었다. 맨티스의 앞발이 마나의 막을 마구 후려치고 찔러 댔지만, 마나의 막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맨티스를 짓눌렀다.

    키아아아!

    맨티스가 괴성을 질렀다.

    마나의 막이 맨티스의 육체를 우그러뜨리자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광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우득, 우드득.

    정해민의 얼굴이 새파래져 갔다.

    갖가지 능력으로 쓰러지는 몬스터들을 많이 봐와서 나름의 내성이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저 광경은 지금까지는 보지 못한 종류의 공포와 메스꺼움이 있었다.

    태연한 얼굴로 맨티스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모습은 그녀가 봐오던 이지혁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몬스터를 집어삼키는 인간.

    그건 몬스터보다 더 몬스터 같았다.

    그 괴리감에 몸을 떨던 정해민의 눈에 마나째로 작게 우그러져 빨려 들어가는 맨티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지혁은 맨티스를 흡수하고는 포만감에 취한 강아지 같은 얼굴로 배를 두드렸다.

    "그래, 이래야지."

    하지만 이지혁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삐이이익!

    - K1! K1으로 이동! K1!

    "잠깐을 쉬게 안 두네."

    불평불만을 한가득 내뱉고 싶었지만, 지금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정해민이 이지혁에게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가자."

    이지혁이 손을 뻗어 정해민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정해민이 손을 살짝 뺀다.

    "응?"

    자신이 먼저 손을 빼고 나서 스스로의 행동에 당황한 듯 움찔대는 정해민의 눈에서 미약한 공포과 거리낌을 읽어낸 이지혁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또 이건가?'

    지겹도록 봐온 광경이다.

    이곳에서는 겉모습이라도 닮았기에 그나마 덜하지만, 베라프에서는 겉모습을 보고 그를 배척하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 중 겨우 어느 정도 마음을 연 인간들 역시 이지혁이 능력을 드러내 보이면 저런 눈으로 멀어져 갔다.

    자신과 다른 이를 배척하는 것.

    인간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이지혁이 그 '다른' 인종에 속했다는 것이고.

    항상 벌어지던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저 한 사람과의 인연을 지워 버리고 타인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그때, 입술을 꼭 깨문 정해민이 다시 손을 뻗어 이지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에?"

    "가자."

    "…응."

    이지혁은 정해민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신기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따뜻한데, 이거?

    "너… 열 있어?"

    "누나라고 부르라고!"

    빼액! 소리를 지른 정해민이 지정된 지역으로 텔레포트했다.

    "아니! 왜 자꾸 하늘이냐고!"

    "겹치면 난리나! 이번에는 잘 잡고 내려가 줘!"

    "내가 뭔 낙하산인가!"

    입으로는 궁시렁대면서도 정해민을 안아 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까마득한 거리임에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거대한 몬스터가 방위사의 화력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푸닥거리가 벌어졌는지, 곳곳에 파괴된 전차와 쓰러진 방위사 군인들의 시체가 보였다.

    "제길!"

    좀 더 서둘렀어야 했나!

    바닥에 내려선 이지혁이 정해민을 내려놓고 소리쳤다.

    "물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고릴라와 비슷한 형상을 한 거대 몬스터가 이지혁을 향해 팔을 휘둘러 왔다.

    "실드!"

    쾅!

    이지혁이 만든 실드가 몬스터의 팔을 막아내며 부르르 진동했다.

    "이 정도야!"

    쾅쾅쾅!

    하지만 연속적인 두드림에 실드가 유리처럼 깨져 나간다.

    이지혁이 정해민을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바닥에 주먹이 떨어지며 귀를 멀게 할 것 같은 폭음이 터져 나온다.

    흙먼지와 돌 조각이 파도처럼 솟아오르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진다.

    "으……."

    이지혁의 입가로 한 줄기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괘, 괜찮아?"

    "저리로……."

    "응?"

    "저 옆으로 가라고!"

    "으응."

    정해민이 달아나자 이지혁은 입가를 훔치며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바닥에 뱉었다.

    "퉤."

    피가 섞여 나온 것을 보자 이가 갈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거대 몬스터가 그를 내려다보며 양팔을 바닥으로 마구 내려찍으며 데몬스트레이션을 한다.

    차마 몬스터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군인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간다.

    "히이익!"

    총도, 전차포도, 화력을 위해 가져온 대공포마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눈앞에 처음 나타난 레벨 5 몬스터의 위용에 인간은 그저 벌벌 떠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

    이지혁이 탄식을 뱉고는 앞으로 나섰다.

    고작 몇 번의 타격을 막아냈을 뿐인데 무거운 충격이 실드를 뚫고 들어와 내장을 헤집어 놓았다.

    예전이었다면 단번에 복귀되었을 대미지가 회복되지 않고 발을 잡아끌었다.

    우오오오오오!

    자랑하듯 데몬스트레이션을 하는 몬스터를 보며 이지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보자는 건가?

    나랑?

    "자존심 상하네."

    저따위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것도, 그 상처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저런 하찮은 미물이 자신 앞에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지혁의 몸에서 검은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나는 연기처럼, 불꽃처럼 이지혁을 휘감고 돌았다.

    검은 마나의 불꽃에 완전히 휩싸인 이지혁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쇠 맛이 나는 피가 짭짜름하게 느껴지자 이지혁의 눈이 번들대기 시작했다.

    "찢어 죽여주마."

    이지혁의 몸이 쏘아진 탄환처럼 앞으로 튕겨 나갔다.

    길게 마나의 꼬리를 남긴 이지혁의 육체가 검은 마나의 유성이 되어 거대 고릴라의 배에 틀어박혔다.

    콰드드득!

    인간의 육체가 강철보다 단단한 몬스터의 육체를 뚫고 틀어박힌다.

    완전히 관통하지 못한 충격력은 거대한 몬스터의 몸뚱아리를 종잇장처럼 허공으로 날려 버린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튕겨 나간 고릴라에게 따라붙은 이지혁의 손이 검게 타올랐다.

    이놈만이 아니다!

    최소 여덟 더!

    뭔가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이렇게 게이트가 열리지는 않겠지.

    이놈만이 아니다!

    이놈들뿐이 아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내가 이곳에 있다고.

    바로 내가!

    나 이지혁이 이곳에 있다고 말이야!

    이지혁의 양쪽 어깨에서 검은 마나가 사신의 날개처럼 피어올랐다.

    * * *

    불꽃처럼 피어난 이지혁의 마나가 바닥으로 떨어진 거대 고릴라를 향해 무수한 마나의 덩어리들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비처럼 쏟아지는 마나탄들이 고릴라 몬스터의 전신을 꿰뚫고 들어갔다.

    캬아아아아!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는 고릴라에게 마나의 막을 날려 뒤집어씌운 이지혁이 다시 한 번 라이프 드레인을 펼쳤다.

    우드드득! 우득!

    비명과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는 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퍼억! 퍼억!

    고통에 겨워하던 고릴라가 주먹을 마구 내질렀지만, 마나의 막은 부드럽고도 끈질기게 집어삼켰다.

    이내 비명이 사라지고, 사람의 주먹보다 작게 줄어든 마나의 막이 이지혁에게로 되돌아왔다.

    "흠……."

    몸 안에 차오르는 마나를 느끼며 이지혁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처참하다.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는데도 게이트에서 추가적으로 튀어나올 몬스터에 대비하느라 부상자와 사상자의 후송이 되지 않고 있었다.

    바닥에서 신음하는 이와 엉망으로 박살이 난 채 우그러진 전차들.

    바닥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작약 내음이 피비린내를 뒤덮었다.

    아주 잠깐이었는데도 이만한 피해라…….

    이대로라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하나하나 잡아대다가는 마지막쯤에는 이미 날아가 버린 도시들 위에서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삐이이익!

    - K5! K5!

    이지혁이 전화기를 들었다.

    "최정훈 씨."

    - 예, 이지혁 씨.

    "포인트 중에 제일 넓고 인적이 드문 곳이 어디죠?"

    - K2입니다.

    이름 한 번 마음에 드네.

    산꼭대기에서 싸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인걸?

    이지혁이 정해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짓의 의미를 알아들은 정해민이 전력으로 달려와 이지혁의 손을 움켜잡았다.

    "잠시."

    이지혁이 텔레포트를 제지하자 정해민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왜?"

    "너 텔레포트 능력이 어느 정도냐?"

    "무슨 뜻이야? 그리고 너라고 하지 말……."

    평소처럼 톡 쏘아 말하려던 정해민이 이지혁의 눈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말려 올라가 날카롭게 보이던 눈이 평소와 같은 장난기가 아니라 엄중한 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해줘. 어느 정도 크기까지 전송할 수 있는 거야?"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사람이면 100명 정도는 무리하면 한 번에 옮길 수 있어.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하지만."

    "중도에 취소되면 어떻게 되지?"

    "…음, 중간 지점에서 바닥으로 추락할 거야. 딱 한 번 그래봐서 자세히는 모르겠어."

    "좋아, 가자."

    "K2로?"

    "아니.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지혁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뭐가 더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잘 막아요!"

    스슷.

    바로 직후, 이지혁과 정해민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군인들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장난감처럼 휩쓸던 몬스터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황량한 공터를 보자니, 가슴속에서 뭔가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게 능력자인가……."

    능력자. 사이커.

    여러 가지 말로 불리기는 하지만…….

    지금 같은 심정으로는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군대로도 감당할 수 없는 괴수를 단숨에 처리해 버린 저런 능력자가 그 칼날을 인간에게로 돌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어쩌면 괴수보다 무서운 것은 능력자가 아닐까?

    지금은 알 수 없는 대답을 구하며 침묵에 잠긴 군인들은 황량한 대지를 바라보았다.

    "저기!"

    허공으로 텔레포트한 이지혁이 아래에 보이는 괴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제기랄, 하나같이 다 왜 저리 커?"

    "왜 그리로 가!"

    이지혁이 괴수 쪽으로 하강하자 깜짝 놀란 정해민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지혁은 방향을 틀지 않은 채 그대로 괴수에게로 돌진했다.

    허공에서 날아드는 존재감을 파악한 괴수가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카아앙!

    입에서 불덩어리가 뿜어져 나온다.

    이지혁은 실드로 전방을 틀어막으며 그대로 돌진하여 괴수의 머리에 손을 댔다.

    "이동해!"

    "응?"

    "K2로!"

    "아!"

    이지혁의 말을 알아들은 정해민이 그대로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스슷.

    갑자기 괴수가 사라지자 어리둥절해진 능력자들이 비어버린 공간을 보며 눈을 껌뻑댔다.

    "뭐지?"

    K2의 허공에 나타난 이지혁이 괴수를 걷어차며 거리를 벌렸다.

    "떨어져라!"

    카아아아아!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날개가 없다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거대한 동체를 본 이들이 기겁하며 분분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아아아앙!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충돌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꺼지며 괴수가 파묻혔다.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네."

    바닥에 내려선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지혁 씨!"

    K2 지점을 맡고 있던 서아영이 이지혁을 보고 소리쳤다.

    저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지금 한 마리도 감당하지 못해서 피해가 큰데, 또 한 마리를 데리고 오면 어쩌자는 건가!

    아니, 그걸 떠나서 대체 어떻게 여기로 몬스터들을 끌고 온 거지?

    텔레포트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한 서아영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심정이었다.

    '대체 저 인간은 뭐지?'

    무식하게 힘만 센 인간은 다룰 수 있다.

    하지고 힘세고 똑똑한 인간은 무섭고, 힘세고 똑똑하고 얍삽하기까지 하면 재앙이다.

    그런데 이지혁은 보면 볼수록 새로운 모습이 계속 나온다.

    서아영이 이를 악물 때, 이지혁이 소리쳤다.

    "다 물려!"

    "네?"

    "여기 있는 사람들 싹 다 물리라고!"

    "뭔 소리예요? 그러다 쟤들이 다른 데로 가버리면 어떻게 하라고! 조금만 가도 민가란 말이에요."

    "머리 좀 쓰자, 머리 좀! 장식으로 달아놓은 것은 아닐 텐데!"

    "네?"

    이지혁에게 저런 말을 듣는다는 건 굴욕적인 일이지만, 곧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을 공격하던 K2 지점의 몬스터가 고개를 돌려 하늘에서 떨어진 괴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곧 낮은 그로울링으로 위협을 한다.

    "옆에 사자가 떨어졌는데 개미한테 신경 쓸 수는 없는 법이지."

    이미 오식이 사태 때 넘어오는 몬스터들 사이에 서로 유대감이 없다는 것은 확인했다.

    게이트가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어서 그렇지, 막상 한곳으로 모이면 이리되는 것이다.

    저급한 몬스터들이야 그런 개념이 없겠지만, 하나하나가 지역의 패자라 자처할 만한 고위 몬스터들이니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연히 서로를 경계하는 것이다.

    "자, 다음!"

    이지혁이 서아영에게 시선을 떼고 정해민의 손을 잡았다.

    "자, 잠깐만."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을 쓴 탓인지 정해민이 비틀거렸다. 사람 한둘 옮기는 것과 저런 거대 괴수를 텔레포트시키는 데서 오는 부담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이지혁이 눈을 찌푸렸다.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

    "그래, 해라."

    힘내라든가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든가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사람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말은 무책임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고 쓰러져."

    "알았어."

    정해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찌푸린 눈에서 의지가 엿보인다.

    '얘는 왜 이리 열심히 싸우는 거지?'

    오랜 무명 생활에서 겪은 게 많아서 그런지, 의외로 멘탈이 단단했다. 일반적인 여자같았으면 이쯤에서 못하겠다고 했을 텐데.

    발목은 안 잡는다는 건가?

    이지혁이 씩 웃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신호를 이해한 정해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텔레포트를 했다.

    "이번에는 이놈!"

    날아드는 얼음의 광선을 피한 이지혁이 괴수를 잡고는 텔레포트해 K2 지점에 던져 놓는다.

    하나, 또 하나.

    이지혁은 조금씩 조급해졌다.

    한 번씩 텔레포트를 반복할수록 정해민의 상태가 더더욱 안 좋아졌고, 피해는 커졌다.

    어떤 괴수는 방어 라인을 돌파하고 이미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후였다.

    두말없이 괴수를 터치하고 텔레포트한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을 하고 나자 전 국토에 퍼져 소환되었던 괴수들이 모조리 K2에 몰아넣어졌다.

    키에에에에!

    카아아아아!

    원래라면 난리가 나야겠지만, 서로를 경계하느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괴수들 덕분에 아비규환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핵심 인력들까지 모두 데리고 온 정해민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구토를 했다.

    현역 아이돌이 구토하는 모습이 민망하기도 하련만, 아무도 그런 정해민을 보며 더럽다거나 꼴 보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생했어."

    서아영이 정해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내…가 언니야!"

    "으, 이쪽 보고 말하지 마. 튀어."

    "힝."

    이지혁이 비틀대는 정해민의 뒷목을 잡아 달랑 들어 올렸다.

    "너, 던지려고 그러지!"

    "허, 눈치 보소."

    "날 좀 더 소중하게 대해 달라고! 소중한 인력이잖아!"

    "소중한 셔틀이지."

    이지혁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더니, 저 멀리 나타나 정해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치니까 여기에 있어."

    "정말 저거 정리할 수 있는 거야?"

    "아, 맞다. 그래서 말인데……."

    "응?"

    "가서 오식이 좀 데리고 와."

    "……."

    비틀대는 정해민을 뒤로하고 이지혁은 다시금 NDF 무리의 한 중간에 나타났다.

    "자, 어디 보자……."

    이지혁의 눈에 서로를 경계하며 거리를 벌리는 여덟 마리의 괴물들이 들어왔다.

    "뭔가 친숙한데?"

    사실 마물이라는 것은 이지혁에게 있어서는 인간보다 더 익숙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이지혁이 알던 마물이 아닌 종류가 반쯤 섞여 있어서 그렇지.

    과거 저것보다 더 위험한 괴수들은 수천 단위로 끌고 다녔으니 이런 걸 본다고 해서 새삼 별다른 느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죠……."

    "저걸 뭐 어쩌라고?"

    서아영과 박성찬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괴수 여덟이지, 저거 하나하나가 지금 각국의 전 병력이 동원되어서 막고 있는 재앙덩어리였다.

    그런 놈들은 여덟이나 한곳으로 모아놓았다.

    군대와 다른 능력자들의 지원으로 겨우겨우 발길이나 잡고 있었는데, 그 병력들은 데려오지도 못했다.

    "대책은 있는 거예요?"

    서아영이 그녀답지 않게 불안이 가득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그런 서아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야 그렇다 쳐도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뭔 일이 터질 때마다 이지혁, 이지혁을 외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약해 빠져서는……."

    베라프에서 약하다는 것은 곧 존엄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았다.

    이지혁은 대륙 최약의 존재에서 기어오르고 올라 결국은 정점에 섰다.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지.

    그러니까…….

    이지혁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일단은 보여줘야지.

    찍소리도 하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힘을 말이야.

    이지혁의 육체에서 검은 마나가 불꽃처럼 피어오르자 여덟 마리의 괴수가 일제히 돌아보았다.

    그들이 서로 경계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지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시작해 보자고.

    * * *

    시작은 하늘이었다.

    이지혁의 고개가 하늘을 향하자 그곳에 오식이를 데리고 텔레포트해서 나타난 정해민이 보였다.

    "말 참 잘 듣네?"

    이지혁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뻗어 나간 두 개의 촉수가 오식이와 정해민을 감쌌다.

    촤아아악!

    정해민을 움켜잡은 촉수는 가공할 속도로 잡아끌어 이지혁의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우웁!"

    "에구, 저리 가서 토해."

    이지혁이 발로 툭툭, 정해민을 밀었다.

    손도 아니고 발이라니!

    사람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건가! 이 개고생을 했는데!

    왠지 서러운 기분에 정해민이 울먹거릴 때, 이지혁이 그녀를 잡아 뒤로 밀었다.

    "다친다."

    꽉 움켜잡은 손이 어쩐지 따뜻하다.

    정해민은 이상하게 달아오르는 볼을 느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꾸 방해하지 말고 저리 떨어져 있어. 쥐똥만 해서 보이지도 않으니까. 휩쓸린다."

    걱정을 하려면 걱정만 하고!

    욕을 하려면 욕만 하고!

    애매하게 섞지 말라고!

    애꿎은 바닥을 걷어찬 정해민이 쪼르르 달려 멀리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이지혁이 아직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오식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자아, 그럼… 같이 놀아보자."

    촉수를 통해 마나를 불어넣는다.

    커엉!

    육체에 차오르는 마나를 느낀 오식이가 붉은 눈을 빛내며 짖어 댔다.

    육체가 울룩불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면에 이르렀을 무렵엔 태초의 위용을 되찾은, 붉고 검은 털의 오거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쿠오오오오오오!

    세상이 떨린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다른 몬스터들도 몸을 낮추고 오식이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같은 레벨 5에서 나온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육지 최강의 몬스터인 오거의 위용은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파괴력이 있었다.

    크르르르.

    오식이의 눈이 붉게 번들거렸다.

    "자, 그럼……."

    "이지혁 씨, 저희는……."

    이지혁이 손을 들었다.

    "접근하지 마."

    "……."

    "휩쓸리면 내 책임 아니니까, 제 목숨은 알아서 챙기라고. 나도 간만에 좀 풀어놓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서아영이 다른 이들을 뒤로 물렸다.

    그러면서도 살짝 입술을 깨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움은커녕 방해만 하고 있는 처지.

    그것이 그녀가 만들어놓은 NDF의 현실이었다.

    '이걸로는 안 돼.'

    구상하던 처음의 구도 그대로 목적이 이루어졌다면 이렇지 않았겠지만, 현재의 상황은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이지혁이 아니었다면 균형은 깨졌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멸망했을 것이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녀 스스로도 아직 그것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저기, 서아영 씨."

    스핏 파이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 사람, 대체 누구예요?"

    서아영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눈앞에 아홉 마리의 괴물이 있지만, 이 말보다 지금의 이지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괴물이요."

    그래, 괴물.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이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거대한 히드라였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징그러운 파충류가 그 머리를 쉭쉭대며 오거를 물어뜯으려 다가온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몬스터들도 일제히 오식이에게 달려들었다.

    쿠오오오오!

    오식이가 포효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히드라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쥐어뜯었다.

    전신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히드라의 머리가 그대로 뜯겨 나간다.

    두 개의 머리가 뜯겼지만, 아직 일곱 개의 머리가 남아 있다. 일곱의 머리가 각각 뻗어져 오식이의 전신을 물어뜯는다.

    크륵!

    짧은 신음을 토한 오식이가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히드라의 몸통을 내려쳤다.

    콰아앙!

    반쯤 곤죽이 된 육체가 푸른 피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박혀든다.

    히드라를 마무리하려던 오식이가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몸을 굴렀다.

    크르륵!

    어느새 등까지 접근한 커다란 샤벨 타이거가 오식의의 허리에 긴 송곳니를 박아 넣고 있었다. 오거의 질긴 가죽이 아니었다면 구멍이 뚫리는 게 아니라 살점째 뜯겨 나갔을 것이다.

    입맛을 다시는 샤벨 타이거와 재생하고 있는 히드라.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는 대망(大?)과 기다란 촉수들을 잔뜩 늘어뜨린 이름 모를 괴물까지.

    여덟이나 되는 괴수가 포위를 좁혀오자 오식이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크…크륵!

    그러고는 이내 오식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느껴진다.

    …죽음이.

    키이이익!

    오식이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선 채 몸을 벌벌 떨었다.

    단 한 걸음의 후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컸다.

    마귀의 군단에 후퇴란 없다.

    앞으로 달려들고 또 달려들어 쓰러뜨리든가, 우물쭈물 나가다가 밟혀 죽는 결과만이 있을 뿐.

    뒤로는 갈 수가 없다.

    뒤에는 그가 있으니까.

    그는 물러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존재였다.

    벌벌 떠는 오식이의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여긴 베라프가 아니니까.

    이지혁은 그때의 이지혁은 아니니까 그렇게 떨 것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물러서면 안 되지. 그렇지?"

    크르륵!

    오식이의 눈에 다시 흉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광전사처럼 고함을 질러 댄 오식이가 앞으로 돌진했다.

    그 광경을 보며 이지혁도 목을 좌우로 꺾었다.

    너나 나나…….

    예전처럼은 되지 않겠지.

    그래도 기분은 내볼 수 있어야지.

    전방을 틀어막는 존재가 있으면 이지혁은 마도사로서 움직일 수 있다.

    이지혁의 양손이 빛을 발했다.

    하지만 오식이 혼자로는 좀 모자라겠지.

    그럼 어쩔까?

    검은 마나의 연기가 허공에 문양을 그려낸다.

    기괴하게 그려진 문양이 이지혁의 손짓에 따라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와라."

    문양이 회오리처럼 일그러지며 시커먼 공동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림자처럼 거대한 검은 야수가 튀어나갔다.

    흔한 울부짖음도 없이, 거대한 동체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하고 은밀하게 질주하는 검은 야수가 샤벨 타이거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고 머리를 짓눌렀다.

    거대한 검은 재규어의 형태를 한 야수.

    반쯤은 흐릿하고, 반쯤은 검은 육체가 명멸했다.

    "하나 더."

    마법진에서 또 하나의 야수가 튀어나왔다.

    야수는 마법진에서 나오자마자 그 거대한 날개를 쫙 펴며 하늘로 비상했다.

    창공을 날아오른 검은 매가 바닥을 향해 강습하더니, 건물을 뒤덮을 듯 거대한 이무기를 움켜잡고 날아올랐다.

    이무기가 전신을 뒤틀었지만, 검은 발톱은 이무기의 비늘을 간단히 찢고 들어가 단단히 움켜잡았다.

    높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검은 매를 보며 이지혁이 입맛을 다셨다.

    '증폭이 없으면 이 정도인가?'

    마계와의 연결 통로를 열 수 없으니, 그에게 종속되어 있는 몬스터들의 직접 소환은 불가능하다.

    소환할 수 있는 것은 마나로 만들어진 생명체뿐.

    이지혁의 전공도 아니고, 즐겨 쓰지도 않는 마법이지만, 이곳에서 사용하기는 적절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마나량의 제한이 있다 보니 그가 원하는 만큼의 강한 마나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베라프에서라면 저 매의 날개가 하늘을 덮었겠지.

    하지만 아쉬워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다.

    이지혁이 다시 양손을 모았다.

    "자, 그럼……."

    오랜만에 한 번 날뛰어볼까.

    발끝부터 마나를 끌어모았다.

    육체에 가둬져 있던 검은 마나가 들끓는 피처럼 날뛰며 손으로 모여들었다.

    "큭."

    신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인간의 육체를 거부하는 암흑의 마나가 육체를 손상시킨다.

    이제는 회복의 한계가 있으니 적당히 조절을 해야겠지.

    그래도 과거보다 강건해진 육체다 보니 피해는 크지 않았다.

    늘어난 에테르가 그의 육체를 보호해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양손 앞에 모여든 검은 마나가 회전하며 공명했다.

    원래라면 그대로 모으고 또 모아 날려 버리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곳은 한계가 있으니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편이 좋다.

    뭐가 좋을까?

    이지혁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마법이 떠올랐다.

    우수가 마나를 휘젓는다.

    엿가락처럼 늘어난 마나가 이지혁의 손을 따라 허공을 수놓았다.

    일단은 발을 묶고…….

    "바인딩!"

    콰드드득!

    검은 나무뿌리 같은 촉수들이 바닥을 뚫고 나오며 몬스터들을 묶었다.

    키에에에!

    카아악!

    갑자기 나타난 촉수들에 놀란 몬스터들이 발악을 해 댔지만, 그 어떤 광물보다 단단한 나무뿌리는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찌른다.

    나무뿌리에서 십여 미터 길이의 가시들이 쭉쭉 뻗어져 나오며 몬스터들의 육체를 꿰뚫었다.

    몬스터들의 비명이 세상을 메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대망이 바닥을 가득 메운 가시나무의 덤불을 보고 몸을 뒤틀었지만, 아쉽게도 이무기에게는 날개가 없었다.

    콰드드드득!

    길게 자라난 가시가 이무기의 육체를 꿰뚫고 박혀든다.

    고통에 겨워 몸을 뒤틀수록 더 많은 가시들이 육체를 파고든다.

    덤불에 둘러싸인 오식이가 몸을 떨었다.

    가시가 기묘하게 비껴갔기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움직일 방법이 없다.

    그때, 가시나무가 스르륵 움직이며 오식이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반색한 오식이가 몸을 날려 덤불 사이를 빠져나왔다.

    스스슷.

    하지만 반쯤 투명한 재규어는 가시덤불 사이를 기묘하게 누비며 사로잡힌 몬스터들을 물어뜯었다.

    집요하게 이를 들이대는 재규어의 공격에 몬스터들이 전신을 뒤틀었지만, 그럴수록 강철 같은 가시들은 더 깊게, 더 많이 박혀든다.

    이지혁이 손을 다시 휘저었다.

    이 정도로 끝나면 섭섭하지.

    털어낸 손끝에서 스파크가 튄다.

    변환!

    가시덤불들이 파지직, 스파크를 튕기더니, 이내 검은 뇌전으로 화해 몬스터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거대한 벼락의 숲으로 변해 버린 공간 안에서 매캐한 악취와 공포에 질린 울부짖음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다.

    서아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을 감고 싶다.

    그런데 눈을 뗄 수가 없다.

    세상을 지옥으로 밀어 넣을지 모를 몬스터들이 지금 이지혁 하나에게 당하고 있다.

    피가 튀고 살이 튀는 격전이었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저건 그저 농락이다.

    고양이가 구석에 몰린 쥐를 가지고 놀듯이…….

    사자가 발아래 깔린 새끼 노루를 핥듯이…….

    그저 농락하고 있을 뿐이다.

    검은 마나를 연기처럼 피워 올리고 있는 이지혁의 뒷모습이 더없이 섬뜩했다.

    일상에서의 게으르고 말 많은 그의 모습과 전장에 섰을 때의 무자비한 그의 모습 사이에 갭이 너무 커서 적응이 되지 않는다.

    마치 다른 사람 같기만 해서 두렵고 또 두렵다.

    "드레인."

    뇌전이 사그라들고…….

    처참하게 타버린 괴물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쓰러졌다.

    대지를 짓밟는 거인의 발소리 같은 소음이 울리고, 이지혁이 양손을 펼쳐 들었다.

    "드레인."

    죽어버린 몬스터들에게서 흘러나온 마나를 빨아들인 이지혁이 아직도 살아서 꿈틀대는 몬스터들에게 손을 뻗었다.

    튼튼한데?

    어찌할까?

    음…….

    이지혁이 더없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남은 몬스터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해석할 수 없는 문양이 나타나 몬스터들에게 날아들었다.

    끼에에에에엑!

    죽음에 임박해 있던 몬스터들이 뇌전에 꿰뚫릴 때도 지르지 않던, 마치 지옥에 내던 져진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전신을 미친 듯이 뒤틀었다.

    피와 거품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오식이가 그 광경을 보더니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는 몸을 벌벌 떤다.

    종속의 인.

    영혼마저 놓아주지 않는 종속의 인이 그들의 육체를 지배하고 정신을 지배했다.

    몬스터들의 떨림이 잦아들자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지하에 숨어 있어."

    벌떡벌떡 몸을 일으킨 몬스터들이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면서 바닥을 파 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손을 털고는 몸을 돌렸다.

    누군지는 모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주지.

    이대로라면 나의 군대가 이곳에서 부활하게 될 거야.

    이지혁이 어째서인지 벌벌 떨고 있는 서아영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쉬 마려?"

    "야, 이 빌어먹을 인간아!"

    "아, 왜!"

    저 인간은 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

    서아영은 차마 이지혁이 무서워서 떨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 버렸다.

    뜬금없이 욕을 먹은 이지혁이 억울하다는 듯 토로할 때, 멀고 먼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검고 아주 작은 인간의 형태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손 앞에 아주 작은 게이트가 열리고, 인간의 일부가 새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가서 알려라.

    쇠가 마찰하는 듯한 기괴한 음성이 퍼진다.

    - 이곳에 그가 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그가 이 세계에 있다.

    평화가 끝나가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