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4화 (14/118)
  • [■] 에이, 설마 물겠어요? [■]

    ─────

    "물러서라고!"

    평소답지 않은 다급한 이지혁의 목소리에 최정훈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다급할 수도 있나?

    눈앞에서 오거를 보고도 개 다루듯 하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저리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보니 순간적으로 공포가 밀려온다.

    "피해요!"

    최정훈도 소리를 질렀지만, 밀집대형에서 순간적으로 흩어져 피하기에는 스펙터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으아아아아!"

    "뭐야!"

    "날아온다! 피해!"

    투두두두두!

    날아오는 스펙터를 향해 반사적으로 총을 갈겨 대는 사람도 있지만, 총알은 스펙터의 몸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고 뚫고 지나가 버렸다.

    히이이잉.

    기이한 괴음과 함께 스펙터 떼가 사람들을 덮쳐들었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썩을."

    스펙터 자체는 무서울 것이 별로 없다. 브라드와 같이 물리 면역이기는 하지만, 역으로 따져 보면 물리적인 공격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스펙터는 베라프에서는 하급 몬스터로 분류되었다.

    만약 저 스펙터가 이지혁이 알고 있는 존재와 같다면 문제는 간단하면서도 심각해진다.

    스펙터는 사람에게 빙의하는 몬스터니까.

    스펙터에 빙의된 사람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잃은 광전사가 되거나, 아니면 단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에 따르는 것.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투두두두!

    "아아아악!"

    "으아악!"

    스펙터에 씐 군인들이 사방으로 총을 난사했다.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은 이들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 새끼들, 왜 이래!"

    "야! 잡아! 잡으라고! 몸으로 눌러!"

    차마 아군에게 총을 갈길 수가 없던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몸으로 제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펙터에게 씐 이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제압이 어려워 진다.

    "이지혁 씨!"

    자신을 부르는 최정훈의 목소리에 이지혁이 소리쳤다.

    "신성 계열! 신성 계열 능력자 없어요?"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생각해 보면 베라프에서 스펙터가 하급 몬스터 취급을 받는 이유는 빤했다.

    베라프에는 신관이 득실득실하니까.

    이 세계의 종교?

    신성력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베라프에서 종교의 힘은 지구에서와는 차원이 달랐다.

    지구에서 특정 종교가 가장 강성했을 때의 권위가 베라프의 가장 하급신을 모시는 종교만도 못할지 모른다. 베라프는 그만큼 신성으로 지배되는 사회였고, 그러다 보니 지나가는 거지보다 신관 수가 더 많았다.

    그러니 스펙터 따위는 홀리 라이트 한 방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버릴 수 있는 잡몹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이 세계에서 스펙터를 정화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을까?

    "신성 계열이요?"

    "예!"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망했다.

    이지혁은 이 끔찍한 상황에 순간 대처해야 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선의 방법?

    간단하다.

    스펙터에 씐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된다.

    실제로 베라프에서는 희귀한 확률로 파티에 신관이 없을 경우에 스펙터에 씌인 사람을 정리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대처법이 없으니까.

    그 외에 신성이 가득 담긴 성물로 정화하는 방법이 있기도 하지만, 이 지구에서 성물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제기랄!"

    이곳에서 그런 식으로 대량 학살을 벌여 버리면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의 설명을 이해해 줄 사람이 있겠냐는 문제도 있고, 설사 이해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좋게 끝나면 대량살인마겠지.

    '보는 눈만 없으면…….'

    아니.

    보는 눈이 없어도 찝찝하다.

    사람을 죽인 수로 따지면 지구의 역대 학살자들을 다 끌어모아도 감히 이지혁과 비등할 수 있을 놈이 없을 정도로 많이 죽였다.

    이지혁은 악마이고 마귀다.

    이지혁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지혁이 살인에 껄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베라프와는 다르다는 건가?'

    이지혁이 이를 악물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는 것은 언제나 진리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진리를 실천하기에 너무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이지혁.'

    그나마 스펙터들에게 통하는 것이 뭐가 있었지?

    마늘?

    이건 아니고.

    십자가도… 아니고!

    소금…….

    소금?

    이지혁의 눈이 바다로 향했다.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순간, 이지혁의 몸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더니, 군인들의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헉!"

    총구가 순간적으로 들이밀어졌지만, 이지혁은 태연하게 바닥에 눌려 있는 빙의 군인을 잡았다.

    "아저씨."

    입에 거품을 문 군인이 이지혁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수영 잘하시면 좋을 텐데……. 원망은 말라고요!"

    살려주는 거니까.

    이지혁이 군인을 잡은 그대로 바다를 향해 집어 던졌다.

    사람이 사람을 집어 던졌는데 마치 대포에 넣어 쏜 것처럼 무려 100m 가까운 거리를 날아간다.

    "으아아아악!"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는지 비명성이 찢어질 듯 터져 나왔다.

    "세상에……."

    주위의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난다."

    사람이 새처럼 날아서 수면을 향해 떨어졌다.

    퍼엉!

    사람이 수면에 떨어졌는데, 무슨 고래라도 뛰어올랐다 떨어진 듯한 소리가 났다.

    "죽었네."

    "죽었지."

    "죽었겠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모두가 일순 손을 멈출 정도로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놔두면 죽을 거!"

    최소한 실드라도 씌워놨으니 충격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상어밥이 되거나 익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런 최정훈의 일이다.

    "비켜요!"

    이지혁이 사람들을 밀어내며 빙의체들을 잡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휙! 휙!

    사람들이 새처럼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커어어!"

    분명 이성이 없는 빙의체인데도 이지혁이 다가오자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달아나려 한다.

    "엄살은!"

    이지혁이 또 하나의 빙의체를 날리며 말했다.

    "아니, 엄살이 아닌 것 같은데……."

    군인 하나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나 같아도 도망가겠다, 이 미친놈아!

    "으라차!"

    이지혁이 마지막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을 잡아 던졌다.

    "그, 그 사람은 아닌데!"

    "어?"

    마지막으로 던져진 사람은 입으로 쉴새없이 쌍욕을 뱉으면서 허공을 날아갔다.

    개와 소를 끔찍이도 찾아대는 그를 보며 이지혁이 헤, 웃었다.

    "말을 하지."

    말할 틈을 줘야지!

    일단 대충 상황을 정리한 이지혁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 짧은 시간에 갈겨진 총과 격투로 이미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쩝."

    도와줄 수 있을 만큼은 도와줬다.

    그 이상의 일은 이지혁이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었다.

    "어디 보자……."

    우리 오식이는 일 잘하고 있나?

    이지혁의 눈에 양 떼 사이에서 날뛰는 늑대처럼 무쌍난무를 펼치고 있는 오거가 보였다.

    평소라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이며 농락을 하겠지만, 지금은 오식이도 필사적인 상황이다 보니 거의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잘한다!"

    크와아아아!

    이지혁의 목소리를 들은 오식이가 더욱 미쳐 날뛰었다.

    공포에 질린 잡몹들 중 도망치는 몬스터도 꽤 나왔지만, 남은 KSF 대원들이 잘 정리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까딱했으면 크게 벌어질 뻔한 상황이었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잘 풀린 턱이었다.

    가장 잘 풀린 것은 아무래도 오식이였다.

    오식이가 아닌 다른 오거급 몬스터라면 지금의 이지혁으로서는 상대하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마나를 대량으로 퍼부어야 정리할 수 있는데, 가진 마나도 애매하고 수급도 여의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오거는 민첩하기 때문에 대형 마법 한 방으로 정확하게 격중시켜 쓰러뜨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지혁이 알고 있는 오거가 넘어왔기에 이렇게 쉽게 굴복을 시킬 수 있었고, 지금 일석이조로 써먹고 있는 중이었다.

    "쟤 어떻게 잘 데리고 다니면 앞으로 내가 일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이지혁이 행복한 상상으로 몸을 떨 때, 등 뒤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 돼!"

    "막아! 막으라고!"

    "빌어먹을! 벌써 끝났어!"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이게 뭔 소리지?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자 발전소 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뭐야? 왜 그래요?"

    급히 달려간 최정훈이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사색이 된 얼굴로 이지혁에게 소리쳤다.

    "하, 한 사람이 발전소 안으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한 사람?"

    "그 이상해진 사람 있지 않습니까?"

    이상해진 사람? 빙의체?

    음, 그래. 빙의체는 주변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일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성향이 있으니까.

    만약에 내가 빙의체라면…….

    주변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음, 그래. 그럼 분명히…….

    "……통제 불능이랍니다."

    그래, 뭐, 그렇겠지.

    이지혁이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체르노빌 아시죠?"

    "거기까지."

    대충 이해한 이지혁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음, 음…….

    푸시시시.

    이지혁의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르겠다."

    마법학이면 빠삭하지만, 물리를 알 리가 있나!

    애초에 원자력이 물리 분야는 맞나?

    이지혁은 솔직하게 물었다.

    "그래서 해결 방법이 뭐죠?"

    "저기 2호기 보이시죠?"

    "눈은 있으니까요."

    "해수로 가져와서 식히든가 콘크리트로 덮어버려야 합니다."

    "그럼 다시 쓸 수는 있는 거예요?"

    "어림없는 소리죠."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진행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완전 난장을 쳐놨어요!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아니면 곧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예요!"

    음, 그렇다는 거군.

    그럼 말이지…….

    음…….

    "어쩌라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최정훈이 질린 얼굴로 이지혁의 멱살을 잡았다.

    "아니, 저거… 2호기 어떻게 좀 해보라고, 이 양반아! 부산이 날아간다고!"

    "이 양반이 미쳤나! 왜 가만히 있는 사람 멱살을 잡아! 톡, 쳐도 뒈질 거 같지만 않았어도 그냥!"

    "쳐도 되니까 일단 저거부터 어떻게 해달라고요!"

    "내가 뭔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무작정 해결하라고 하면 이지혁이라고 무슨 방법이 있겠냐.

    "제발! 휴가 열흘로 늘려줄 테니까!"

    "진짜죠?"

    "지금 이 상황에서 거짓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정치인?"

    "…이 상황에서 공감 가서 매우 안타깝긴 하지만, 전 정치인이 아니잖습니까!"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가 열흘이면 세계 평화라도 지켜야지!

    그런데 잠깐?

    이지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저거 쓸 수 있게 해놓으면 어떻게 돼요? 휴가 보름?"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며칠 해줄 거냐고요!"

    "보름이라도 해드리죠!"

    "정치인 지망이 아니길 빌어요."

    이지혁이 손을 뻗어서 오식이가 만들어놓은 마나덩어리들을 끌어당겼다.

    크륵?

    오식이가 기이한 느낌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촤아아아악!

    키이익!

    오식이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자 검은 촉수들이 날아와 남아 있던 몬스터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항의하는 듯 고함 지르는 오식이를 보며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어쭈?"

    키익.

    오식이가 다시 꼬리를 말자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인생을 복불복이야, 새꺄. 살았으면 됐지."

    마나를 박박 긁어모은 이지혁이 몸을 돌려 원자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해볼까?"

    이지혁의 눈이 붉게 빛났다.

    * * *

    이지혁의 우수와 좌수가 허공에 수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발전소를 날려 버린다거나 뒤덮는 수준이라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만, 지금 이지혁이 하려는 것은 최고 난이도의 마법이었다.

    정밀한 마력 계산과 경험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이지혁 정도의 마도사만이 도달할 수 있는 마법의 극한.

    수식을 계산하던 이지혁의 눈이 찌푸려졌다.

    "모자라!"

    베라프에서라면 절대 모자라지 않았을 마력이 모자란다. 파괴력을 만들어내는 마법이라면 이곳이 되레 더 적은 마나로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연동 마법의 경우는 주위의 마나를 이용할 수 없기에 더 큰 마나가 필요하다.

    하지만 몬스터도 다 잡아먹었는데 마나를 채울 만한 곳이 마땅히 없었다.

    게다가 모자란 마나를 채우려면 적어도 최상위급 몬스터…….

    "응?"

    크륵?

    이지혁과 오식이의 눈이 마주쳤다.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오식이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크르륵.

    불안함을 느낌 오식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오식아, 형이 마나가 좀 필요한데 말이다."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양심상 설명은 했다.

    "그냥 집어 먹으면 깔끔하겠지만, 내가 또 정이 많은 사람이잖아."

    "하?"

    서아영의 코웃음을 무시한 이지혁이 오식이의 손을 움켜잡았다.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하는 오식이에게 이지혁의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틀어박혔다.

    "뒈진다?"

    크륵.

    오거의 그로울링 소리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면 다들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지.

    최정훈은 지금 이 장면을 촬영해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적당히만 뽑을게, 적당히만."

    캐앵! 캥!

    늑대 짖는 소리를 내며 도망치려던 오식이의 손끝으로 마나가 분수처럼 뽑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흐음……."

    이지혁이 간만에 맛보는 순수한 흑마력에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오식이는 빠져나가는 마나를 느끼며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그렇게 개처럼 일했는데!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몇 번 마나를 뽑혀서 쪼그라들어 죽는 것들을 본 적 있기에 불안함은 더욱 증폭되었다.

    쭈욱쭈욱 빨려 나가던 마나가 치사치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오식이가 강아지처럼 비명을 질렀다.

    깨갱!

    "아?"

    이지혁이 손을 떼었다.

    "아… 야, 미안하다. 생각보다 더 뽑아버렸네. 간만이다 보니……."

    홀쭉해진 오식이가 힘없는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어딘가!

    오식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준 이지혁이 몸을 돌렸다.

    "다시!"

    이지혁의 손이 허공에 수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담은 손길이 스쳐 간 허공에 선명한 마나의 흔적이 남아 투명하게 빛을 뿜어냈다.

    "저게 뭐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해민이 몽롱한 눈으로 이지혁이 그려낸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문양으로 가득한 마법진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이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법진을 마저 그려냈다.

    효용성은 쓰레기고, 어렵기로는 최고 난이도이기에 베라프의 역사를 통틀어도 마스터한 사람이 셋을 넘지 않는 마법.

    같은 시간을 다른 마법에 투자한다면 대가가 될 수 있을 정도기에 누구도 익히려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남아도는 이지혁은 익힐 수 있던 마법.

    이지혁의 손이 멈추고 입에서 영창이 흘러나왔다.

    "시간 역행!"

    이지혁의 몸과 마법진이 공명하며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녹아내리고 있던 2호 발전소도 새하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예쁘다."

    박해민의 그저 순수한 감상을 뒤로하고 한동안 이지혁과 발전소가 빛을 뿜어냈다.

    이윽고 그 빛이 사그라들자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하니 어렵네."

    서아영이 이지혁에게 다가와 물었다.

    "된 거예요?"

    "넹."

    "이게 끝이에요?"

    "넹."

    미심쩍다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본 서아영이 물었다.

    "뭘 한 건데요?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다 변했죠. 들어가 봐요, 멀쩡해져 있을 테니까."

    "예?"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이지혁을 보며 의혹에 찬 서아영이 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이석우를 보고 눈짓했다.

    "저 말입니까?"

    "또 누구 있나요?"

    '마녀!'

    이석우는 눈물을 머금고 발전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머, 멀쩡합니다! 내부가 다 멀쩡하게 변했어요."

    이석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하기야 그런 광경을 누가 봤겠는가.

    총으로 난사하여 박살 난 구동부들이 모두 멀쩡하게 변해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세상에!"

    서아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이게 능력으로 되는 일인가……."

    사람들이 불가해한 인간을 보는 눈빛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최고 난이도 마법이자 최고의 무쓸모 마법.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는 최강의 마법이지만, 그 대상이 무생물로 한정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마법.

    그것이 바로 시간 역행의 정체였다.

    혹시 이 마법으로 세상을 되돌리면 베라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연구한 마법인데, 실체를 알고 나서는 제대로 써본 적도 없는 마법이다.

    무생물로 이루어진 기계나 건물을 고친다거나 방전된 마정석을 재충전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면 어마무시한 효용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 마법을 터득할 정도의 고위 마법사가 뭐한다고 그런 짓을 하고 있겠는가.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더니.'

    그래도 배워두니 다 쓸데가 있다는 생각에 나름 뿌듯한 이지혁이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예요?"

    "이지혁인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서아영이 하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더 말을 한다고 해서 뭔가를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지긋지긋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이지혁을 보던 서아영이 손을 내젓고는 고개를 돌렸다.

    물에 빠졌던 사람들이 힘들게 해안에서 비틀대며 걸어오고 있고, 미리 준비된 앰뷸런스는 사상자를 실어 나른다고 분주했다.

    난장판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발전소는 사수했다.

    '사수라…….'

    서아영이 발전소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너무 쉽게 일이 해결되어서 딱히 큰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따져 보면 오늘 이 자리에 이지혁이 없었다면 적어도 부산은 다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웬만한 강대국이라도 출현 즉시 전 국토에 비상이 걸릴 만한 오거가 출현했고, 그 뒤로도 스펙터와 몬스터 떼 때문에 발전소가 날아갈 뻔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서 깔끔하게 정리 된 것이다.

    요즘에야 매번 얼굴을 보고 같이 투닥거리기도 하다 보니 느끼지 못했지만, 새삼 생각해 보면 눈앞의 이 못되게 생긴 청년은 정말 어마어마한 인간이다.

    하는 짓이 더 어마어마해서 그렇지!

    하는 짓이!

    이지혁이 배부른 곰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제 휴가 보름은 확정인 거죠?"

    최정훈이 뭔가 입을 뗐다 닫았다 하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여기서 줄여보려 하다가 다음에 급한 상황이 터졌을 때 배를 째버리면 더 손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대신 급한 출동일 때는 나와주시는 걸로 해주십시오! 그날만큼의 휴일은 더 보장하겠습니다."

    "하루 추가."

    "으으으!"

    최정훈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허락을 했다.

    이지혁이 낄낄 웃으며 어디로 관광을 갈까 고민할 때쯤, 정해민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말했다.

    "그런데 왜 다들 다 끝난 것처럼 그러고 있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저기 저거."

    정해민이 가리킨 곳에는 처음 보는 생물체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저거 뭐야?"

    "개? 개 같은데?"

    "아니, 잘 보면 곰 같아."

    "저도 개 같은데?"

    일행들은 모두 각자의 의견을 내며 사람 반만 한 동물의 정체를 품평하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그 붉고 검은 털이 뒤섞인 작은 짐승을 보며 커다랗게 웃었다.

    오식아! 오식아! 왜 그렇게 귀여워졌니!

    마나를 있는 대로 빨아들였더니 육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작아진 모양이었다.

    이지혁이 오식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운데?"

    끼잉.

    오식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덩치가 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는데, 이리 작아진 것을 보니 적당히 데리고 다녀도 될 것 같았다.

    필요할 때 마나만 공급해 주면 다시 뻥튀기(?)도 할 수 있고, 마나를 빼놓으면 개처럼 데리고 다닐 수도 있고…….

    "적당히 키우면 타고 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교통수단의 발견에 즐거워하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이 사색이 되어 말했다.

    "그걸 키우신다고요?"

    "네. 귀엽죠?"

    귀여워?

    최정훈이 오거를 바라보았다.

    뭔가 동글동글한 눈매와 동그란 코와 동그란…….

    귀엽긴 하다.

    진짜 귀여운데?

    아니!

    이게 아니지!

    아무리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저건 오거다!

    제대로 설치기 시작하면 나라 하나를 뒤집어놓을 수도 있는 악마 같은 몬스터란 말이다.

    그걸 키운다니!

    "어디다 키운다는 말입니까! 밥은 뭘 주고!"

    "건물 현관에 묶어놓으면 되죠. 밥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료 주면 되지 않을까?"

    "사료?"

    "개 사료."

    오식이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러다가 최초로 개 사료 먹는 오거가 탄생할 기세였다.

    "그러다가 사람이라도 잡아먹으면 어떻게 합니까?"

    "에이, 안 그래요. 지도 뒈지고 싶지는 않겠지. 그치, 오식아?"

    말귀도 못 알아듣는 짐승이 살기를 느끼고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면서 오거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쥐가 사자를 걱정해 주는 급이다.

    지금이야 쪼그라들었다지만, 본체를 생각한다면 최정훈은 오식이의 손가락 하나도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저거… 지금은 어느 정도로 센 거지?'

    개 크기로 줄어들었다고 정말 개는 아니니까.

    생각해 보면 지금도 일반인 정도는 앞발로 슬쩍 후려쳐도 요단강 익스프레스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놈을 목줄 채워서 키우겠다고?

    최정훈의 눈이 암담함으로 물들어갔다.

    "그러면 집에다 키우시면 되잖아요!"

    "헐, 이 사람 말하는 것 좀 보소? 그러다가 쟤가 미쳐서 우리 엄마라도 물면 책임지나?"

    "우리는 물려도 됩니까!"

    "에이, 설마 물겠어요?"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앞뒤가!

    이지혁은 낄낄 웃으며 오식이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너도 좋지?"

    끼잉.

    '우는데?'

    그냥 우는 것 같다가 아니라… 저 촉촉한 저거, 눈물 아닌가?

    살다 보니 오거가 우는 것도 보는구나.

    말세야, 말세.

    허허허허허.

    "하하하, 좋은가 보네."

    왜 그게 그렇게 해석이 돼! 왜! 왜에에에!

    최정훈이 속으로 울부짖거나 말거나 이지혁은 오식이를 들어 올려 허공으로 던졌다 받으며 깔깔댔다.

    서아영은 그 광경을 보며 두통이 오는지 머리를 부여잡았고, 박해민은 은근슬쩍 다가와 오식이의 등을 조심스레 슬슬 쓸어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최정훈은 이 짐승을 살려두는 것을 대체 어떻게 숨겨야 할지, 서류는 어찌 꾸며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평화로운 광경 속에서 이 상황이 진정한 침략의 전조라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직은 아무도 없었다.

    * * *

    인간에게 휴가란 무엇인가.

    일상에 찌든 삶의 힘겨움을 휴식과 힐링으로 풀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휴가가 끝나고도 한동안 삶에 매진할 수 있도록 충전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휴가의 사용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곳에 가장 잘못된 휴가를 즐기고 있는 인간이 있었다.

    박선덕은 썩은 얼굴로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바라보았다.

    타다다다다!

    키보드를 내려치는 손이 현란하기 그지없다.

    혹시 다른 일이라도 한다면 일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고 흐뭇할 수 있는 광경일 수도 있겠지만, 그 열정이 오로지 게임에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광경이었다.

    차라리 건설적으로 프로 게이머를 한다고 하면 응원할 수 있다!

    그런데 저건 프로게이머를 할 재목도 아닌 게 분명하다.

    왜냐면!

    "아! 왜 안 되냐고!"

    "분명히 내가 클릭했는데! 왜 안 돼, 왜!"

    "이 새끼가 진짜! 내가 너 찾아간다!"

    게임하면서 저런 말을 외치는 놈이 게임을 잘할 리가 없으니까.

    박선덕은 한숨을 푹 쉬고는 이지혁에게 다가갔다.

    "아들."

    "아, 이 새끼들이!"

    "아드으으을."

    "엄마, 잠깐만 내가……."

    "아.들."

    "넵!"

    사태를 재빠르게 파악한 이지혁이 헤드셋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는 부동자세로 박선덕을 바라보았다.

    "너 휴가가 며칠이라고 했지?"

    "보름."

    "이틀 출근하고 보름 동안 쉬다니……."

    복지가 좋다 못해서 거의 백수급이었다.

    어느 미친 회사가 이틀 출근에 보름 휴식을 준다는 말인가.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안 봐도 총천연색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래서 니가 집에 있은 지 얼마나 되었지?"

    "일주일?"

    "그래. 일주일이란다, 아들아."

    깨끗하고 더 넓어진 새집과 깨끗하고 더 넓어진 새 방을 만끽해야 하는데, 게임만 하다니!

    무려 일주일을!

    "일주일을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는데, 그놈의 엉덩이는 짓무르지도 않니?"

    "의자 쿠션이 빵빵해서 괜찮아!"

    의자를 불편한 걸로 사줬어야 하나.

    아주 그냥 가시방석을 깔아놨어야 하는 건데!

    박선덕은 책임을 통감했다.

    이 자식 놈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하려면 그 정도의 옵션은 고려했어야 하는 건데!

    "아들, 너 개인가 뭔가 키운다고 하지 않았니?"

    "응, 오식이."

    "그 개, 어딨니?"

    "직장 앞에 매달아 놨는데?"

    "…일주일을 그러고 놔뒀으면 밥은 어쩌고?"

    "아?"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딱히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네.

    뭐, 마수를 천만 마리씩 데리고 다니면서도 밥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 뭐 당연한 거긴 하지만.

    "가서 밥 주고 와."

    "내가?"

    "그럼 니가 가지, 누가 가!"

    "거기 있는 애들이 알아서 챙기겠지."

    "니 개라며?"

    "그렇긴 한데……."

    이지혁이 의자에 몸을 있는 대로 기대고는 푸념했다.

    "귀찮아."

    박선덕이 손을 들어 올리자 이지혁이 팔을 좌우로 저으며 반항했다.

    "아, 왜! 왜!"

    "빨리 가서 개 밥 주고 와! 그리고 너도 그 김에 산책도 좀 하고! 꽃다운 나이에 집구석에만 틀어박혀서 뭐하는 거야!"

    "길 잃어! 여기 복잡해!"

    "지도 앱은 폼이니?"

    "그게 뭔데?"

    박선덕은 한숨을 쉬었다.

    얘는 왜 어린애가 이리 영감 같을까?

    아니, 차라리 그냥 영감 같을 것이지, 애와 영감의 안 좋은 것만 반씩 섞여 있다.

    앓느니 죽지.

    박선덕은 이지혁의 폰에 지도 앱을 깔아주고는 집과 직장을 다 즐겨찾기로 지정까지 해주었다.

    "이대로 보고 가면 되는 거야. 알겠니?"

    "이렇게까지 해서 가야 하는 건가!"

    "또 안 가봤다가 나중에 출근할 때 지각하지 말고! 너 첫 출근부터 두 시간씩 늦었다며! 내가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그거 다 엄마 욕 먹이는 거야!"

    "누가 엄마를 욕해! 누가!"

    "니가! 니가, 이놈아! 니가!"

    등짝에 다시 불이 나자 이지혁은 의자에서 탈출해 바닥으로 굴렀다.

    "갈게! 갈게!"

    "얼른 다녀와. 가는 김에 사무실 사람들한테 이거도 전해 주고."

    "그게 뭔데?"

    "과일하고 좀 쌌어. 일하면서 드시라고."

    "엄마는 걔들한테 뭐하러 이런 걸 다 줘, 귀찮게."

    "그래도 내 자식 놈 사람처럼 봐주는 건 그 사람들밖에 없다. 고마워서 그런다."

    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듣고 보니 미묘하게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미묘한데, 이거?

    "얼른 일어나서 다녀와."

    "…응."

    이지혁은 꾸물대며 옷을 챙겨 입고 밍기적밍기적 현관으로 나갔다.

    "다녀올게."

    "응."

    이지혁이 밖으로 나가자 박선덕은 어깨를 쭉 펴고 집을 돌아보았다.

    전에 살던 집보다 넓고 깨끗한 것이 딱 마음에 들었다. 이제 집 안의 유일한 오점이 사라졌으니 깨끗하게 청소라도 할 요량으로 청소기를 들었다.

    "끙……."

    이지혁이 현관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았다.

    현대식으로 건축된 집이 보인다. 최정훈이 마련해 준 거주지다. 전의 집보다 좋은지는 잘 모르겠는데, 엄마는 좋아하니까 그걸로 된 거겠지.

    집이 별로면 헐어버리고 새로 지어버릴 생각도 했지만, 좋다니까 뭐.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온 이지혁이 기지개를 쭉 켜다가 몸을 굳혔다.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여기에도 있을 리가 없는데?

    이지혁이 로봇처럼 뻑뻑하게 고개를 돌렸다.

    불룩 튀어나온 현관 벽돌담 뒤쪽으로 살랑거리는 금발이 보였다.

    "너, 너!"

    이지혁이 부들대며 삿대질을 하자 벽돌담 뒤에 있던 금발머리가 슬금슬금 밖으로 나왔다.

    "여,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여기 민간인 통제구역인데!

    김다솜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무서워.'

    저게 무섭다.

    이지혁은 천 년 동안 부어 터져서 밖으로 빼놓았던 간덩어리를 밀어 넣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지, 얘?

    현관의 요정인가? 지박령?

    "여기 들어와도 돼?"

    분명히 최정훈이 이 지역은 능력자나 능력자들 가족 아니면 못 들어오는 곳이라고 했는데!

    "이거……."

    김다솜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응?"

    이게 뭐지?

    이지혁이 김다솜이 내민 것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쿠키랑……."

    가방에서 뭔가 또 나온다.

    "초콜릿이랑요……."

    뭐가 자꾸 계속 나온다.

    저 조그만 가방에 대체 뭐가 이리 많이 들어 있는 건가!

    아니, 그걸 떠나서… 이거!

    먹이고 먹여서 돼지처럼 살찌워 잡아먹을 생각인가?

    뭘 자꾸 이리 먹여!

    "고맙다. 잠깐만."

    이지혁은 어색하게 받아 든 선물을 집 안에다 넣어두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는 김다솜을 보니 기분이 미묘했다.

    무섭기도 한데, 이런 일방적인 호의라는 것을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받아본 적이 없다 보니 대응이 잘 안 된다.

    "그럼……."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려는 김다솜을 이지혁이 불렀다.

    "아, 혹시 너 여기 잘 알아?"

    "네?"

    "이 주변 가게라든가……."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럼 물을 게 있는데……."

    "네."

    김다솜이 가만히 이지혁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 애견 센터가 어디야?"

    "네?"

    "으차."

    어깨에 커다란 개 사료를 짊어진 이지혁이 터덜터덜 걸어서 NDF로 향했다.

    이사를 오면서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가 되었기에 출퇴근의 부담은 사라졌다만.

    "직장이 가까운 것은 꼭 좋은 게 아니란 말이지."

    이렇게 노는데도 출근해야 할 일도 생기고 말이야.

    저 멀리 NDF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현관에 이지혁이 매어놓은 그대로 죽치고 앉아 있는 오식이가 보인다.

    "오식아."

    드러누워 있다가 이지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오식이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쉬어."

    그제야 축 늘어진 오식이가 힘없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마나도 다 빼가 안 그래도 힘없어 죽겠는데, 일주일 동안 밥도 안 주고 방치하다니!

    크륵!

    "멍이라고 해야지. 넌 이제 개야."

    크륵!

    "사실 난 안 해도 좋긴 한데, 오거라고 하면 널 산 채로 해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트럭으로 열 트럭은 더 나올 거다."

    멍.

    "그러취."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료 포대를 내려놓았다.

    "배고플 때 먹어."

    이지혁이 내려놓은 포대를 본 오식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처음 보는 건데…….

    이지혁이 포대를 뜯어주자 안에서 풍겨오는 냄새에 오식이가 고개를 들이밀더니, 입에 대보고는 반색하며 사료를 퍼먹기 시작했다.

    "그래, 잘 먹는다."

    개나 오거나.

    애매하게 사람 말 알아듣는 짐승인 거지, 별다를 거 있나.

    이지혁은 룰루랄라대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정훈이 이지혁에게로 달려왔다.

    "이지혁 씨!"

    "헐, 과도하게 반가워하시네!"

    "저 오거 좀 어떻게 해주세요!"

    "예? 왜요?"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 물어뜯으려 한단 말입니다!"

    현관 앞에 떡하니 저런 게 드러앉아 있는데 무슨 간으로 사람이 지나다니겠는가!

    창문 타 넘고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배고파서 그래요, 배고파서. 이젠 괜찮아요."

    "밥 주셨어요?"

    "예."

    "…사람을 던져 준 건 아니시죠?"

    "내가 아무리 정신머리가 없어도 그렇지, 그런 짓이야 하겠어요? 사료 줬어요."

    사료?

    이 인간, 진짜 오거한테 개 사료를 준 건가!

    개 사료 먹는 오거라니, 이게 대체 뭔 소린가. 해외 토픽이 아니라 우주 토픽에 나올 일이다.

    "그리고 그러면 구석으로 좀 데려다 놓지그랬어요?"

    "거기 이지혁 씨 말고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귀여운데."

    귀엽기야 귀엽지! 엄청 귀엽지!

    북극곰도 생긴 건 귀여워! 콜라도 잘 먹고! 3초 만에 목이 물어뜯겨서 그렇지!

    그런데 쟤는 북극곰보다 더 위험하잖아!

    "제대로 묶어라도 놓지! 오거를 노끈으로 대충 그리 묶어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거 끈 절대 안 풀려요."

    "뭔가 수를 써놓으셨나요?"

    "아뇨."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가 뒈지기 싫으면 끊을 리가 없죠."

    그게 더 무서워.

    뭐야, 이 인간?

    "여하튼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음, 저쪽 마당으로 옮겨놓을게요."

    "그리고 이제 사료를 먹으면 나오는 것도 있을 텐데! 그것도 누군가는 치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별로 큰일 아니에요. 지가 치울 테니까."

    "네?"

    "줄을 좀 길게 해놓으면 화장실도 쓸 텐데, 아마?"

    이쯤 되면 정체성이 흔들린다.

    대체 앞에 있는, 저 검고 붉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오거가 화장실을 간다는 것을 학계에 제출하면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가.

    "아아아악!"

    그때, 바깥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최정훈이 사색이 되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저 망할 오거가 드디어 일을 쳤구나!

    바깥으로 나와 보니 사료를 퍼먹고 있는 오거와 그 앞에 바짓단이 찢어진 채 주저앉아 있는 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이, 이거 대체 뭐예요? 이거 뭐냐고!"

    최정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제가 터질 줄은 알았지. 그런데 그게 왜 하필 지금이냐고.

    "뭔 개가… 아니, 개가 아니지. 개가 이럴 리가 없지! 개가 어떻게 내 능력을 다 받아치냐고! 그것도 사료 처먹으면서!"

    이해합니다, 그 심정.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최정훈은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이런 위험한 걸 여기 둔 사람이 누굽니까!"

    최정훈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지혁이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전데요?"

    그 귀찮음과 지루함이 뒤섞인 표정을 본 남자가 얼굴을 굳혔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 * *

    "딱히 하는 일은 없는데요?"

    이지혁은 솔직했다.

    하는 일이라고는 게임하다가 소설 보고 딩굴대는 게 전부인데, 다른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했다!

    이지혁은 당당했다!

    "나랑 지금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금발의 남자는 벌떡 일어나 이지혁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잘생겼네?"

    "헤헤, 감사합… 이게 아니고!"

    최정훈과는 다른 맛이 있는 미남이었다.

    최정훈이 선 굵은 훈남형이라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잘생긴 미청년 같은 타입이다.

    '그러고 보면 여긴 뭐 얼굴로 사람 뽑나?'

    스쳐 가는 인간들 하나하나가 다들 잘생겼다.

    따져 보면 서아영도 보통 기준으로 봤을 때 눈이 돌아가는 미녀고, 최정훈은 잘생겼고, 정해민은 아이돌에…….

    순간,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해 보니 이 인간들이랑 다니면 내가 오징어로 보이는 것 아닌가!

    어쩐지 어딜 가도 시선이 곱지 않더라니만!

    이유를 찾았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을 방법을 깨달은 이지혁이 금발의 남자를 삐딱한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신데?"

    남자가 흘러내린 머리를 슬쩍 넘기더니 말했다.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입니다. 오늘부터 이곳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패드리퍼?"

    "아니야아아아아!"

    이지혁이 귀를 막았다.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이 양반?

    김다현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지혁을 보며 소리쳤다.

    "당신, 내가 누군지 몰라?"

    "넹."

    "어떻게 여기 관계자가 내가 누군지를 몰라!"

    "관계자 아닌데요."

    "그럼 여기 왜 있는데?"

    "개 밥 주러 왔어요."

    "……."

    남자가 최정훈과 이지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지혁에게는 적의의 시선을, 최정훈에게는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함께 일하게 될 이지혁 씨입니다. 이지혁 씨, 이쪽은 패스 드리프터라 불리는 김다현 씨입니다."

    "패드리퍼?"

    "아니라고오오오!"

    김다현이 이를 갈았다.

    "이봐."

    "넹?"

    "당신 능력자지?"

    "아닌데요?"

    "아, 그래요?"

    최정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허무함에 잠겼다.

    왜 이곳에는 이런 인간들만 오는 것인가.

    "여하튼 능력자든 아니든……. 아니, 그게 아니지! 당신이 능력자가 아닌데 저런 괴물을 어떻게 키워! 지금 날 농락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김다현이 팔을 걷어붙이며 이지혁에게로 다가갔다.

    "한 번 해보자는 거야? 이 바지 어쩔 거야? 당신이 주인이라니, 당신이 물려야겠지?"

    "주인이긴 한데, 소유권이 없으니 직접 청구하시죠."

    "직접? 누구한테?"

    "보고 있잖아요."

    김다현의 눈에 사료 포대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오식이가 들어왔다.

    "장난하나! 바지 값을 물려내고 사과하든가, 오늘 걸어서 집에 못 들어가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좋을걸?"

    "날아갈까?"

    "이 작자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듣다 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잠깐… 어?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

    "그래, 시비 건다. 어쩔 건데?"

    이지혁이 허허 웃었다.

    그래, 이게 시비였지.

    먼저 건 적은 있어도 걸린 적은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다투는 거였지. 그래, 그랬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시비를 걸어온 사람을 보통 어떻게 했더라?

    처음에 힘이 좀 생겼을 때는 일일이 죽을 때까지 팼다가, 나중에는 귀찮아서 게이트 열고 마계로 그냥 던져 넣은 거 같은데…….

    그 뒤로는 시비를 걸어오는 미친놈이 없었고.

    자, 그럼 이 미친놈은 어떻게 할까?

    이지혁은 고개를 돌려 사료를 퍼먹고 있는 오식이를 바라보았다.

    "오식아."

    크륵?

    사료 포대에서 머리를 꺼낸 오식이가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새 지 이름이 뭔지 알았구나.'

    최정훈은 오식이의 영특함에 뿌듯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꼈다.

    얼마나 똑똑하면 그새 지 이름을 알아듣고, 얼마나 무서우면 그 오거가 저리되었을까.

    최정훈이 뭔 생각을 하든 말든 이지혁은 오식이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그의 앞까지 다가온 오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앞의 김다현을 가리켰다.

    "물어!"

    크르르륵!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오식이가 김다현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김다현이 사색이 되어 빛살처럼 뒤로 물러났다.

    "오, 빠른데?"

    하지만 그것뿐.

    오거는 목표를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반드시 찢어발겨 놓는 몬스터다.

    냄새를 지울 수 없는 이상 남은 것은 체력 싸움뿐.

    "그리고 오거도 빠르지."

    몸이 큰 거지, 결코 느린 게 아니다.

    엉덩이에 이를 드러내고 바짝 따라붙은 오식이를 본 김다현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이게 뭔 짓이야! 이 미친놈아아아아!"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낄낄댔다.

    아마 오늘 저 엉덩이에 바람구멍이 나지 않고서는…….

    어? 바람구멍?

    오거가 물어뜯으면 바람구멍이 나는 게 아니라 엉덩이째로 뜯겨 나갈 텐데… 그럼 죽지 않나?

    "오식아, 이리 와, 이리."

    크르르르.

    그 자리에 멈춰 선 오식이가 입맛을 다시며 이지혁에게로 돌아왔다.

    '아니, 근데 쟤는 왜 저렇게 말귀를 잘 알아들어?'

    알고 보면 사람보다 똑똑한 거 아닐까?

    머리를 쓰다듬자 오식이가 낑낑대며 이지혁의 손을 핥았다.

    '개네, 개야.'

    이젠 그냥 개다.

    저게 뭔 오건가.

    아니, 따지고 보면 저 오거를 저리 만들어 버린 이지혁이 무서운 인간이라는 거겠지.

    새삼 이지혁의 존재감을 느낀 최정훈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고민할 때 즈음, 김다현이 핏발 선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너 뭐하자는 거야?"

    "새끼?"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아니, 나이가 많은데, 무지하게 많은데… 새끼라고 불릴 상황은 아니지 않나?

    새끼라는 것은 어린 존재를 칭하는 말이니까.

    그게 아니면…….

    "음, 욕이구나."

    욕이야.

    욕이구나.

    음, 그러니까… 나한테 욕을 한 건데… 그러면 내가…….

    이지혁이 빙긋 웃으며 김다현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뭐야?"

    "이쪽으로 잠시만."

    "응? 이 새끼, 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

    "잠시만, 잠시만."

    구석진 곳으로 김다현을 끌고 가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성호를 긋고 양손을 가슴앞으로 모았다.

    '부디 살아서 돌아오길.'

    그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잠시 후.

    "좨셩함이앙."

    "한국 말로 해, 한국 말로!"

    "죄성함미당."

    얼굴이 호빵처럼 부풀어 오른 김다현이 부어터진 입술로 연신 사과를 했다.

    "안 들려, 안 들려. 뭐라고?"

    "죄성함미앙."

    "안 들려어어어어."

    최정훈은 등 뒤로 돋아나는 소름에 진저리를 쳤다.

    악마.

    어떻게 사람을 저리 만들어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잘생겼던 얼굴이 저렇게 부풀어 오르다니!

    붓기가 가라앉는다고 해도 제 얼굴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더 무서운 점은 얼굴 말고는 다친 데가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그럼 얼굴만 집요하게 때렸다는 건데…….

    왜 그런 무서운 짓을 하는 건가! 왜!

    "여하튼 잘생긴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다시 말해봐! 이제 얼굴이 못나졌으니 싸가지가 생겼겠지?"

    싸가지 있게 살아야지.

    최정훈은 혹시나 잃어버린 싸가지가 있지 않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좀 편해졌다고 막대한 것 같기도 하고…….

    느슨해지던 정신 줄을 한껏 조인 최정훈이 이지혁을 뒤에서 잡으며 말렸다.

    "하하, 이지혁 씨. 이제 그만 진정하시죠."

    "팍, 씨!"

    마지막까지 김다현의 멱살을 탈탈 털어버린 이지혁이 손을 털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여기 엘리트만 모이는 곳 아니에요? 애들이 왜 이리 매가리가 없어! 몇 대 패지도 않았는데."

    "사람은 보통 그렇게 맞으면 죽어요, 이지혁 씨."

    "살아 있잖아요."

    "그야 저 양반도 능력자니까. 웬만큼 맷집은 있는 거죠."

    "쯧쯧, 이리 약해 빠져서 뭔 몬스터를 잡는다고."

    대한민국에 몇 없는 7급 능력자가 약해 빠진 인간 취급을 받고 있었다.

    최정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는 김다현이 이지혁을 몰아붙이다가 역으로 당해야 맛이 나기 마련인데, 뭘 해볼 새도 없이 피떡이 돼서 돌아오니 되레 불쌍하기만 하다.

    "죄성함니다."

    이제 겨우 사람 말을 하기 시작한 김다현의 어깨를 툭, 두드린 최정훈이 속삭였다.

    "병원 안 가보셔도 되겠어요?"

    "서, 성형외과렁."

    "그래요, 고치면 되죠. 고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힘내세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삼킨 최정훈이 다시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 제가 분명히 이지혁이라는 사람하고는 엮이지 말라고 공문 보냈는데… 못 보셨어용?"

    "바닸능데……."

    "예."

    "안 일겄서여."

    "……."

    현관 앞에 써놔야 하나?

    개 조심.

    이지혁 조심.

    특히 개랑 같이 있는 이지혁 조심.

    농담이 아니라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젠데?

    에고 덩어리인 고위 능력자들이 하나하나 올 텐데, 걔들이 지금처럼 일일이 이지혁과 시비가 붙었다가는 대한민국 능력자들의 씨가 마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기는 하다.

    아무리 욕은 했다지만, 이지혁을 더 귀찮게 한 건 자신과 서아영이 더 했을 텐데.

    '우린 왜 안 맞았지?'

    저 성격에?

    최정훈은 그 행운에 감사했다.

    일반인인 자신이 얻어맞았다가는 성형외과가 문제가 아닐 테니까.

    "그런데 이 색… 아니, 얘는 왜 온 거래요?"

    "제가 다른 고위 능력자들도 올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얘는 머리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말을 해도 해도 기억을 못해.

    "이런 게?"

    이 상황에서 사람을 가장 상처 줄 수 있는 말을 고르라면 딱 저거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얻어맞아 힘겹게 서 있던 김다현이 그 자리에 무너지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어어어어엉."

    "야, 시끄러! 팍, 씨!"

    뚝.

    공포에 질린 김다현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음을 멈췄다.

    이지혁이 뭔가 더 김다현을 갈굴 만한 것이 없는가를 고민할 때,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헐."

    왜 이 목소리가 들리지?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 입을 쩍 벌린 김다솜이 서 있었다.

    그런데 오빠? 나보고 하는 말인가?"

    김다솜이 후다닥 달려오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김다현의 팔을 움켜잡았다.

    "오빠, 왜 이렇게 됐어?"

    "다솜아! 어어어어엉!"

    남매야?

    어쩐지 더럽게 잘생겼더라.

    동생이 저리 이쁘니 오빠면 당연히 잘생겨야지.

    그런데 가족이란 게 참 대단하긴 하구나. 얼굴이 저리됐는데도 바로 알아보네?

    이지혁이 김씨 집안 유전자의 위대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일 때, 김다현이 김다솜을 잡고 통곡을 했다.

    "다솜아아아아!"

    "누가 이랬어! 오빠! 누가 그랬어!"

    김다솜이 앙칼진 목소리를 뿜어내자 이지혁은 괜히 움찔하여 뒤러 물러섰다.

    "저……."

    김다현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이지혁을 가리킨다.

    저 새끼도 양심이 있으면 여자를 때리지는 않겠지. 이 상황에서 저 인간에게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의 동생인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의 동생이 좀 이쁜가!

    남자라면 찍소리도 못하는 게 당연한 거다.

    "…이분?"

    "어."

    "싸웠어?"

    "어."

    "이분이랑?"

    "응."

    김다솜의 발이 순간 주저앉아 있는 김다현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김다현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천하의 이지혁도 이 순간만큼은 말문을 잃고 멍하니 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김다솜이 몸을 돌려 머리를 매만지더니, 이지혁을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빠가 폐를 끼쳤어요. 죄송해요."

    "아……."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세요. 제가 확실하게 말을 해놓을게요."

    "아……."

    김다솜은 그 말을 남긴 채 쓰러진 김다현의 팔을 잡고는 두 손으로 낑낑대며 끌고 갔다.

    "아……."

    이지혁은 입을 쩍 벌린 채 멀어지는 둘을 보며 양팔로 몸을 감쌌다.

    "정상적인 애가 없어, 정상적인."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주변에 저런 것들만 꼬이는 건가.

    어머니…….

    * * *

    "하아……."

    이지혁은 지루함에 빠져 있었다.

    게임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지겨워서 더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산 게 대체 몇 달이던가.

    좋은 음식도 매일 먹다 보면 물리듯이 재미있는 게임도 이제는 무감각할 지경에 올랐다.

    "에휴."

    그렇다고 소설을 보자니 짜증이 난다.

    수많은 선작 중에 새로 올라온 것이 단 한 편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론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게임하고, 읽고, 게임하고, 또 읽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작가라는 놈들이 돈을 벌려면 팍팍 글을 올려야 할 것 아닌가!

    "돈을 써주겠다는데! 이럴 수가 있나!"

    이지혁은 인터넷 창을 닫고 한숨을 푹 쉬었다.

    재미난 게 필요하다!

    뭔가 재미난 게!

    베라프에서 거의 식물의 영역까지 갔던 뇌가 활성화되면서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마구 생겨나고 있었다.

    "야!"

    "응?"

    이지혁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예원을 바라보았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모니터를 스캔한 이예원이 피식 웃었다.

    "야동 봤지?"

    "이게 미쳤나?"

    "니가 게임도 안 하고 인터넷도 안 할 리가 없지. 동작 빠르기는."

    하…….

    저거, 동생만 아니면 어제 그놈 꼴로 두들겨 패는 건데.

    '아니, 그래도 살짝 손만 볼까?'

    이지혁은 살짝 간을 보는 마음으로 이예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느껴지는 어머니의 기운을 알아채고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예원의 버릇을 고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 뒤에 어머니의 손에서 살아남는 것은 그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그러다 처맞고 울지 말고."

    "여자를 때리겠다고? 야만인."

    여자를 때리면 야만인이라고?

    저걸 베라프에다 던져 버릴까?

    남자를 손가락으로 찢어 죽이는 여자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한걸?

    따져 보면 베라프의 최상위 존재들은 거의 여자였다. 시기가 적절하게 맞물린 건지, 아니면 여자 쪽이 마나 적응도가 높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었으니까.

    "근데 왜? 용건을 말해."

    "요즘 거기 출근하지?"

    "거기? NDF?"

    "응."

    "넌 내가 출근한 지가 언젠데 이제 물어보냐, 그걸? 눈이 없어?"

    "집에서만 뒹굴대던데?"

    어?

    듣고 보니 그러네?

    나 이틀은 출근했나?

    "그래, 출근한다. 그게 왜?"

    "나도 한 번 가보면 안 돼?"

    "거기가 놀이터냐, 놀이터야? 어디 오라비의 신성한 직장에 발을 들이겠다고! 공부나 해!"

    "한 번만, 응? 한 번마안!"

    이지혁은 눈을 찌푸렸다.

    이 기집애가 왜 이러는지 눈치 못 챌 이지혁이 아니었다.

    최정훈을 한 번이라도 보겠다는 거겠지.

    그러니 그 금발이었던 머리도 검게 다시 염색하고 조신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야, 사람을 봐가며 들이대라."

    "왜! 내가 뭐 어때서!"

    "말로 할까? 말로? 정말? 말로 해서 그나마 실 한 가닥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는 남매 관계를 불질러 버려도 괜찮겠냐?"

    "콱! 뒈져 버려라!"

    이지혁이 욕을 내뱉고 밖으로 나가는 이예원을 보며 머리를 감쌌다.

    아이고, 두야.

    영화만 봐도 남매들은 다 사이좋던데, 왜 저런 게 동생이라고 태어나서는!

    어떻게든 엄마한테 못 이르게 정신교육을 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야!"

    "한 번만 더 오라비를 야라고 부르면 그 혓바닥이 반쯤 짧아졌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겠다."

    "나와봐. 손님 왔대."

    "손님?"

    "엄마가 손님 왔다고 나오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자신에게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을 텐데?

    거실로 나가자 어머니와 함께 현관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어?"

    이지혁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웬일인데?"

    "내가 누나야! 존댓말 쓰라고 했잖아!"

    "쥐똥만 한 게 누나는 무슨."

    내가 너보다 살아도 천 년은 더 살았다.

    이지혁을 찾아온 이는 의외로 정해민이었다.

    "왜?"

    "최정훈 씨가 데리고 오래."

    "날?"

    "응. 가자."

    이지혁이 배를 훅 내밀고는 말했다.

    "나 휴가 중이거든? 내가 왜!"

    "필요할 때 오기로 했었다며?"

    "그건 내 마음이지. 안 가."

    "데리고 오라고 했단 말이야! 나도 여기까지 오는 거 싫었거든? 실랑이하기 싫으니까 빨리 가! 나 바빠."

    "니가 왜 바쁜데? 남보다 한가하면서."

    "나 바쁘거든! 진짜 바쁘거든!"

    "웃기시네!"

    텔레포트가 얼마나 편한 능력인지 이지혁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동 시간이 없어지는 것만으로 하루가 두 배는 늘어난 느낌이 들 거다.

    "그런데……."

    이예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서 보는 어머니도 뭔가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에스 걸스 정해민 언니 아니세요?"

    순간, 정해민의 얼굴이 화사한 꽃처럼 피어났다.

    그 확연한 변화에 이지혁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네, 맞아요."

    "어머어어! 언니! 웬일이야! 이게 웬일이야! 우리 집에 에스 걸스가 왔어! 어떡하지!

    어떡해! 일단 사인부터 좀 해주세요! 여기요, 여기!"

    "비켜봐! 어머, 해민 양, 반가워요! 출출하지 않으세요? 뭐라도 좀 드시면서 이야기하실까요?"

    이지혁은 두 모녀의 터질 듯한 반응을 보며 썩은 얼굴로 인상을 썼다.

    "뭐 이리 호들갑이야?"

    "넌 에스 걸스도 몰라?"

    "놔둬라. 아는 게 뭐 있겠니."

    모녀의 합동 공격에 이지혁은 찌그러졌다.

    그러더니 세 여인은 이지혁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지들끼리 꺅꺅대며 이야기꽃을 피우더니, 이제 숫제 집 안 모든 물건들을 매직으로 도배해 버릴 기세로 사인을 해 대고 있었다.

    바쁘다더니!

    저 가증스러운 것!

    이제 아예 판 깔고 앉을 기세네!

    "바쁘다며?"

    "안 바빠, 안 바빠."

    "바쁘다더니?"

    "사인할 시간은 언제나 있어!"

    프로페셔널하시네요.

    근데 얘가 그렇게 유명한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변 반응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사람들 취향도 참 이상하지, 저리 쪼그만 게 뭐가 좋다고 물고 빤단 말인가.

    "이번 타이틀 너무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준비했어요."

    "언니, 너무 예쁘게 나오시더라고요! 그런데 실물이 열 배는 더 이쁜 것 같아요. 아니, 열 배가 뭐야! 백 배는 더 예뻐요!"

    "에이, 설마 그러려구요. 호호호호."

    호호호는 얼어 죽을.

    사람이 호호 웃는 게 어딨냐!

    가증스러운 것.

    "불렀다며?"

    "아, 좀 저리 비켜봐! 좀 더 있다 가도 돼."

    이 증상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칭찬중독증?

    뭔지 모르겠지만, 얘도 뭐랄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수준 아닐까?

    현대인이 정신적으로 힘들다더니, 멀쩡한 인간을 찾기가 어렵네, 진짜.

    "급함."

    "아, 깜짝이야! 씁!"

    이지혁이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어느새 도가윤이 그곳에 서 있었다.

    "기척 좀 내고 다니라고! 기척 좀!"

    하지만 도가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할 말만을 했다.

    "본부에서 지원 요청. 빠르게 합류 바람."

    "아니, 거……."

    뭔가 또 반항을 하려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가윤의 팔에 뭔가 익숙해 보이는 천이 친친 감겨 있었다.

    "너, 그거 뭐냐?"

    "……."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어?

    저거… 내 추리닝 1호 아닌가?

    그때, 게이트가 왁 열렸을 때 찢어져서…….

    아, 저거 때문에 찢었었지.

    때가 꼬질꼬질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대로 묶어놓은 것은 아닌 듯싶고, 빨아서 다시 감은 것 같은데…….

    "너, 그거 왜 감고 다니냐?"

    도가윤이 살짝 미묘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 반응은?

    "붕대. 효율적."

    "돈이 없는 건 아니고?"

    "……."

    여기 또 착취당하는 서글픈 영혼이 있구나. 붕대 살 돈도 없어서 옷을 아직 감고 다니다니.

    안구에 습기가 차올랐다.

    "내가 붕대 살 돈 정도는 빌려줄 수 있으니까. 이야기해."

    통장에 돈이 억억대는 인간이 그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빌려준다니.

    새삼 이지혁의 쪼잔함을 느낀 도가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잡담할 시간 없음. 이동해야 함."

    "가야 해?"

    "반드시."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집었다.

    "오, 아들. 출근하는 거야?"

    "할 짓도 없는데 갔다 오면 하루 더 쉬게 해주니까 가야죠, 뭐."

    "요새 우리 아들이 부지런해진 것 같아서 엄마가 참 뿌듯해."

    "하하, 내가 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이예원이 썩은 얼굴로 내뱉었다.

    "열흘을 처놀았으니 좀이 쑤셔 죽을 만도 하겠지."

    "…너, 나랑 잠깐 둘이 나갈래?"

    "싫은데?"

    이예원이 박선덕의 등 뒤에 숨어서 혀를 쏙 내밀었다.

    하!

    귀엽다.

    얼마나 귀여운지 깨물어 죽여 버리고 싶네.

    으득으득, 이를 간 이지혁이 정해민을 보며 말했다.

    "야, 셔틀. 준비해!"

    "누가 셔틀이야! 누가!"

    "그럼 버스? 택시?"

    "…셔틀할게."

    "진즉에 그럴 것이지."

    이지혁이 정해민에게 다가가 덥썩 손을 잡았다.

    "야!"

    정해민이 붉어진 얼굴로 손을 확 뺐다.

    "뭐야? 손잡아야 같이 가지는 거 아냐?"

    "응, 그렇지."

    "그럼 왜? 혼자 가게?"

    "아니."

    정해민이 손부채로 얼굴의 열을 식혔다. 전에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연결을 했기에 직접 손을 잡을 일이 없었는데, 막상 손을 잡으려니 어색했다.

    "내가 잡을게, 내가."

    정해민이 눈을 질끈 감더니 이지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휴, 한숨을 쉰 정해민이 눈을 뜨고는 옆에 있는 도가윤의 손도 마저 잡았다.

    "그럼 가볼게요."

    "네?"

    영문을 몰라 하는 두 모녀를 두고 셋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머!"

    "텔레포트야! 완전 좋아!"

    감격에 겨워하는 이예원에게 박선덕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얘."

    "응?"

    "쟤들… 분위기 은근 좋아 보이지 않니?"

    양손의 꽃이라니.

    못난 자식 놈의 인생에 봄날이 오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뭔가 가슴이 훈훈해 온다.

    "분위기? 하!"

    이예원이 썩은 얼굴로 탄식을 내뱉더니 말했다.

    "엄마, 엄마가 처녀라고 치자."

    "응?"

    "쟤랑 사귈래?"

    "……."

    싫다.

    너무 싫다.

    너무 싫어서 온몸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그냥 분위기만 좋은 거구나."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일 없으니, 기대하지 마."

    "이씨 집안 대가 여기서 끊기는구나."

    저런 자식을 낳아서 죄송합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 박선덕이 힘없는 걸음으로 주방으로 걸어갔다.

    "엄마, 우리도 거기 놀러 가보면 안 돼?"

    "확 그냥!"

    "왜에에에에!"

    이런 자식도 죄송합니다.

    박선덕은 왠지 서글퍼졌다.

    스슷.

    NDF 건물 옥상의 텔레포트 존에 나타난 세 사람이 계단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두 사람은 계단으로 향했고, 이지혁은 건물 밖으로 뛰어내렸다.

    쿵!

    현관에 내려서자 오식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지혁에게로 달려왔다.

    "잘 있었지?"

    끼잉! 끼잉!

    이젠 누가 뭐라고 해도 개라고 할 수 있다!

    이지혁은 뿌듯함을 느끼며 오식이를 쓰다듬어 주고는 사료 포대를 보았다.

    "헐, 이게 뭐냐?"

    오식이의 옆에 산더미 같은 포대가 쌓여 있었다. 분명히 저번에 하나 챙겨 준 것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자급자족까지 하는군. 더욱 마음에 들어!"

    이지혁은 사료도 알아서 가져다 먹고 화장실도 알아서 가는 충견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불렀어요?"

    "일이 터졌습니다."

    최정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본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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