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3화 (13/118)

[■] 퇴근 시간입니다. [■]

─────

"이지혁 씨, 아직 안 왔어요?"

서아영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더없이 경사스러운 날.

드디어 5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전 국토 기동 방위대가 창설되는 역사적인 날이건만, 서아영의 기분은 영 떨떠름했다.

딱히 창단식이 없어서라거나 축하 화환이 복도를 가득 메우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사람이 대충대충이라도 그렇지, 첫 출근을 두 시간이나 어기는 게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신경 줄이 느슨하다 못해 무슨 다 늘어져 축축 처져 있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집에 전화해 봤어요?"

"벌써 나갔답니다."

"휴대폰은요?"

"안 받네요."

서아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그 인간이 얌전히 출근해 줄 리가 없지."

"지당하신 말씀."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김재범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이지혁 씨가 출근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김재범이 쪼르르 달려 나가더니 이지혁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오는 이지혁을 본 서아영의 눈동자가 커졌다.

볼이 잔뜩 부풀어 있는 심통 가득한 얼굴이나 올라간 눈꼬리 같은 거야 괜찮다. 항상 그러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입고 오셨어요?"

추리닝 입고 출근하는 건 아니지!

그리고 추리닝을 입어도 첫 출근인데 좀 단정한 색으로 새로 사 입고 오든가.

돈도 많은 인간이 왜 목 다 늘어난 파란 추리닝을 그대로 입고 온단 말인가!

"복장 규정 있어요?"

"…없죠."

"그럼 됐지."

"……."

그렇기야 하지. 아이언 박성철처럼 반쯤 벗고 다니는 인간도 있으니까.

그런데 왜 그녀의 눈에는 그 박성철보다 저 이지혁의 복장이 좀 더 정신이 나가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냉정하게 보자면 박성철이 더한데.

"그래도 첫날인데……."

"첫날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이상한 거죠. 하루하루를 새롭게 느낀다면 첫날을 딱히 중요히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틀린 말은 아니건만…….

왜 저 인간이 말하면 다 개소리로 들리는가.

"그래요, 됐어요. 그런데 왜 늦었죠?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지혁이 인상을 확 썼다.

"아니, 여기 찾기 너무 어려워! 지하철도 몇 년 만에 타는데 다 바뀌었어!"

예전에 지하철을 탔을 때는 원래 타던 노선이라 헷갈리지 않았는데, 처음 찾아오는 곳을 신노선으로 오려니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지하철에서 내려서도 건물을 못 찾아서 한참을 돌고 돌아 지금 열이 받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사 끝나면 출근한다고 했잖아요!"

"여기가 뭔 애들 소꿉장난하는 데예요? 이지혁 씨 마음대로 출근 일을 잡게?"

"헤헹,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

"…이제 곧 생길겁니다."

"혼자 출근하기 싫다고 다 출근시키는 심보 보소."

"카악!"

서류 더미를 잡은 서아영을 최정훈이 만류했다.

"약속한 지 보름도 안 됐습니다. 진정하세요, 진정!"

"후욱! 후욱!"

서아영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미쳤지, 내가 미쳤지.

무슨 생각으로 저 인간을 데리고 왔을까?

몬스터들을 잡기 전에 속병으로 서아영이 먼저 잡힐 판이었다.

"그래서……."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이지혁이 말했다.

"제가 할 일이 뭐죠?"

"일단은 대기죠."

최정훈이 서아영을 대신해 대답했다.

"대기?"

"네. 소방서 같은 느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소방서야 출동 요청이 없어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지만, 저희야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딱히 할 일도 없죠."

"할 일이 없다라……."

마음에 든다.

바람직한 회사다.

"그런데 인원은 이게 전부인가요?"

뭔가 건물은 커다란데 사람이 없다.

이지혁의 눈에 보인 건 이 자리의 세 명이 전부였다.

"일단 가윤이는 있고."

눈에 안 보이는 사람까지 합치면 네 명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인사이동이 아직 안 끝나서 앞으로 계속 합류할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부터 그냥 대기를 타라는 건데, 그럼 제일 중요한 게 남았군요."

"네?"

이지혁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아영을 바라보며 똑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 컴퓨터는 어디 있죠?"

없다는 대답은 듣지 않는다.

절대로!

최정훈은 미묘한 표정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자리를 안내 받자마자 컴퓨터를 켜 세팅만 삼십 분을 넘게 하더니, 이제 아주 제 집처럼 들어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을!

회사에서!

저 멀리 부들부들하는 서아영이 보였지만, 딱히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할 일 없으니 대기 타라고 한 사람도 서아영이고, 그렇다고 눈꼴 시려서 일을 가져다 주자니 저 인간에게 맡긴 일이 어떤 꼴이 되어 돌아올지 두려워서 차마 맡길 수가 없었다.

'능력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 법률 조항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 들던 걸 생각하면 절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기적절하게 사람을 밀어붙이던 걸 생각하면 굉장히 똑똑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일을 시키고 싶어지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똑똑하게 깽판 놓겠지.'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최정훈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이지혁은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타타타탁!

'타자 속도 보소.'

천 타는 나올 기센데…….

그게 게임하면서 나오는 속도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더럽게 못하네, 진짜!'

격투 게임은 곧잘 하던 사람이 왜 마우스를 잡으면 바보가 되는가.

그리고 왜 하필 저 모니터는 내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것인가.

'신경 쓰인다.'

한마디 하고 싶다.

'거, 거기서 그리 가면 안 되지!'

눈이 없나? 왜 적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아서 들어가는 건가! 이 멀리서 보는 최정훈은 보는데, 왜 이지혁은 못 보는 건가!

최정훈의 몸이 들썩들썩했다.

"진정하자, 진정."

최정훈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면 안 된다.

출근 첫날, 회사에서 게임하는 것도 기가 찬데, 자신까지 관심을 주다 보면 저기에서 부들대고 있는 마녀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기념비적인 첫날!

NDF의 창립일 아닌가!

이런 날에 사건을 만들어서는…….

"으아아! 못 참겠다!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이 멍청아!"

"에?"

"눈이 없어요? 거길 왜 가냐고! 미니 맵 안 보이냐?"

"응?"

"응이 아니고!"

멍한 이지혁을 보고 답답한 최정훈이 PC로 달려가 마우스를 빼앗아 들고는 마구 클릭을 해 댔다.

"여기 있잖아, 여기! 왜 들어가서 포위 당하냐고! 적이 많으면 피해야지!"

"사나이 인생, 도망이란 건 수치일 뿐."

"이건 게임이잖아!"

"게임이라도 후퇴는 없다! 남자의 일생!"

"…제정신인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이지혁을 위아래로 훑은 최정훈이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움찔해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서아영이 악귀처럼 보였다.

"……아, 저……."

"나.가."

"옙."

최정훈은 두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같이 가요."

이지혁이 희희낙락하며 최정훈을 따라 나섰다.

담배 탐이다, 담배 탐!

문밖으로 나가는 둘을 보며 서아영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망했어."

시작부터 망삘이다.

"그러게 왜 훈수는 두셔 가지고."

담배를 입에 문 이지혁이 히히대자 최정훈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었다.

"근데 저 여자… 진짜 히스테리 심하네요."

"팀장님요?"

"네."

물론 서아영이 좀 과격하고 히스테릭하긴 하지.

하지만!

니가 말할 처지는 아닐 텐데!

최정훈이 꼬나보자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연이 많으신 분이에요. 겉으로는 히스테릭해 보여도 잔정도 많구요."

"잔정 두 번 많았다간 사람 죽이겠네."

"…진짭니다."

"네네."

그냥 안 믿는다고 해라.

"일단은 최대한 팀장님의 의견에 따라주셔야 일이 편합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네?"

"밥은 언제 먹어요?"

듣는 척이라도 해라, 제발.

최정훈은 앞으로 버텨내야 할 시간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어느 미친놈이 저 미친놈을 데려오자고 한 건지 말씀 좀 해보시죠."

너요! 너!

최정훈은 하고픈 말을 삼키고 또 삼켰다.

이지혁은 근무 시간 내내 게임을 하고 놀다가 시간 맞춰 밥을 먹고는 어느새 사 온 과자를 폭풍흡입하며 유머 사이트를 보고 낄낄대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보다 못한 셋이 밖으로 나와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어떻게든 해주십시오. 이거, 영 근무 분위기가 안 나잖습니까!"

김재범의 투정에 최정훈이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냥 그렇다고요."

김재범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자 최정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일단 최선의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격리하죠."

"예?"

최정훈은 더없이 합리적이었다.

"폭풍은 피하는 게 최선입니다. 휘말리면 피해가 커지죠. 그러니까, 그냥 독방 하나 내주고 거기서 놀라고 합시다."

"…좋은 의견으로 들려서 슬퍼요."

"저도 서글프지만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망할 놈의 계약서.

그것만 아니었어도 어떻게 해볼 텐데.

사무직인지 현장 직인지 확실히 하라는 협박 앞에 그들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그럼 현장 직으로 말뚝 박을 것이지, 컴퓨터는 또 왜!

하…….

어머니.

최정훈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어머니…….

마녀 비위 맞추기에 익숙해지니까 괴물이 왔습니다.

저 괴물은 감당도 안 돼요.

우우우웅.

그 순간, 울리는 진동 소리에 김재범이 휴대폰을 꺼냈다.

"아무래도 독방 감금은 나중에 하셔야겠는데요?"

둘의 시선이 김재범에게로 향했다.

"출동입니다."

첫 일이다.

"하……."

이지혁은 게이트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첫날부터 출동이라니!

이게 뭔 개소리인가!

조금만 더 뻐기면 됐는데,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출동 요청이 온다는 말인가.

"왜 오늘 출동이 있는 거죠? 왜?"

밑도 끝도 없는 이지혁의 물음에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열리는 걸 뭐 어쩌겠습니까?"

"그것도 왜 하필 여기냐고."

"생성된 건 며칠 전인데, 이제 게이트 열릴 때가 다 됐으니 지원해 달라더군요."

"여긴 담당도 없어요?"

"있긴 합니다만……."

새로 만든 조직 실력도 볼 겸 상부에서 밀어 넣었다고 말하면 화내겠지?

불합리하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아직 인원이 다 차지도 않았는데 뭔 놈의 실력인가, 실력은.

그래도 공무원인 이상 까라면 까야 했다.

"열려요."

서아영의 말에 최정훈이 긴장된 얼굴로 소리쳤다.

"이지혁 씨!"

"알아요, 안다고."

이지혁이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더니, 게이트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무턱대고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그를 보고 방위사와 지역 KSF 요원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야!"

"미쳤어?"

여기저기서 소란스런 고성이 터져 나왔지만, 이지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게이트로 걸어갔다.

위이잉!

게이트가 비명성을 지르며 열린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뭘 어쩌란 거야, 이 미친놈들아!"

이지혁이 누군지 모르는 방위사는 총격을 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혼란에 빠졌다.

쏘긴 쏴야 하는데, 저리 사람이 있으니 발포를 할 수가 없다!

우우우우!

짐승의 울부짖음과 함께 거대한 송곳니를 가진 이족 보행 늑대들이 쏟아져 나온다.

"웨어울프?"

최정훈이 눈을 찌푸렸다.

저만한 게이트에서 나올 몬스터가 아닌데!

웨어울프들이 떼로 뛰쳐나오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 개냐?"

이지혁이 혀를 찼다.

우우우우!

하울링과 함께 달려드는 웨어울프들을 살짝 피해낸 이지혁이 옆으로 슬쩍 몸을 날렸다.

최정훈과 이지혁의 눈이 마주쳤다.

"발포!"

최정훈의 고함 소리와 함께 방위사의 총격이 웨어울프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지혁을 쫓던 웨어울프들이 총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밟아!"

쾅! 쾅!

크레모아가 터진다.

파편과 폭풍에 상처 입은 웨어울프들이 흉성을 뿜어내며 붉은 눈을 번들거렸다.

'이 정도론 안 되나?'

최정훈의 시선이 이지혁을 향했다.

이지혁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웨어울프 두 마리를 툭툭, 걷어차며 상대하고 있었다.

"끙……."

한 방에 날려 버리지, 왜 저러고 논단 말인가.

"팀장님!"

"요원들 투입해 주세요."

서아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자 대기하고 있던 KSF 요원들이 웨어울프를 향해 달려들고, 원거리 능력자들이 각각의 능력으로 웨어울프 떼를 요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웨어울프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강한데? 이거, 좀 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귀가 떨어질 것 같은 폭음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기겁한 최정훈이 놀라서 폭음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지혁이 그의 주위를 둘러쌌던 웨어울프 떼를 육편으로 만들어 버리고 서 있었다.

방위사도…….

능력자들도…….

심지어 웨어울프 떼마저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웨어울프의 피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는 공간 한가운데서 이지혁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팀장님."

"…네? 네!"

서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사람, 갑자기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이지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퇴근 시간입니다."

"…야, 이 미친놈아……."

서아영의 목소리에 힘이 쭉 빠졌다.

* * *

"이 상황에서 퇴근하겠다는 말이 나와?"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전쟁이 일어나도 퇴근은 해야지! 직장인한테 퇴근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은근슬쩍 초과 근무 시키지 말라고!"

여섯 시가 퇴근 시간이면 여섯 시에 퇴근해야지!

업무 마무리 한답시고 은근슬쩍 좀 더 일하게 하는 건 사양이다.

부들부들 떨던 서아영이 소리쳤다.

"지각했잖아, 지각! 지각했잖아!"

최정훈이 서아영을 보며 얼굴을 감쌌다.

떼를 쓰면 안 되고 명령을 해야지, 이 사람아. 지금 이 상황에 부하 직원이랑 싸우면 어떻게 하자고!

"지각했다고 퇴근도 늦어야 하나! 월급에서 까든가!"

"진짜 깔 거야!"

"쥐꼬리만 한 봉급 까인다고 티나 나나!"

통장에 돈이 지금도 억억대고 있는데 그깟 공무원 월급!

이지혁은 코웃음을 쳤다.

"…저기."

최정훈은 아픈 가슴을 이끌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웨어울프들도 매우 당황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서아영은 단호했다.

"못 가! 못 가요! 갈려면 여기 다 정리하고 가!"

"싫은데?"

서아영의 손에 불덩어리가 피어올랐다.

"에헤이! 에헤이!"

최정훈이 서아영을 잡아 말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농담 따먹기나 하고 그럴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현장이에요, 현장!"

"농담? 농담? 이게 농담으로 보여요? 산재 처리 준비나 해요! 우연히! 그저 우연히!

불이! 거기로 날아가서 다쳤다고!"

"거, 무슨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서아영이 불을 끄고 가슴을 퍽퍽, 치더니 소리쳤다.

"빨리 퇴근하고 싶으면 빨리 정리하라고요!"

이지혁은 귀를 후비며 삐딱하게 서더니…….

"일할 시간 지났는데."

손가락을 훅, 불고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억울하면 출근 시간도 늦추시든가."

그럼 대체 몇 시에 출근하겠다는 건가!

아홉 시 출근인데도 점심시간 다 돼서 나오는 주제에!

"이……!"

서아영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최정훈이 작게 서아영에게 속삭인다.

"대충 다 해결된 거 아닙니까?"

"어?"

그러고 보니?

이지혁이 일으킨 폭발로 반이 넘는 웨어울프가 박살 났다. 남은 웨어울프들도 겁에 질렸는지 구석에서 꼼짝 않고 있는 중이었다.

"할 일은 다 한 거 같으니 정리하시죠."

서아영이 최정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것들이 미쳤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타 대원들을 보니 여기서 더 싸우고 있는 것도 안 될 일 같았다.

이러다가 창설 하루 만에 미친놈 집단으로 몰릴 기세였다.

"끙……."

서아영은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휘저었다.

"그래. 가요, 가. 가버려."

이지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퇴근할게요. 고생하셨습니다."

예의도 바르지.

예의도…….

꾸벅 인사를 한 이지혁이 휘파람을 굴면서 가벼운 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우리끼리 이걸 정리하려면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는데……."

앓는 소리를 내는 서아영을 보며 최정훈이 미소를 지었다.

"방법이야 항상 만들면 되는 겁니다."

"네?"

최정훈이 퇴근하는 이지혁을 향해 달려가더니 뭔가 속닥대기 시작했다.

"응?"

서아영은 둘이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웨어울프들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정면에 있는 웨어울프를 걷어차 하늘 높이 띄워 버린 이지혁이 소리쳤다.

"다 이리와, 이 새끼들아!"

발악을 하며 웨어울프를 개 잡듯 때려잡는 이지혁을 보며 서아영이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간단합니다."

최정훈이 씨익 웃었다.

"지하철 타고 또 두 시간 걸려 퇴근할 생각이냐고 했죠."

"네?"

"저거 다 잡으면 태워준다고 했어요."

"……."

"빨리 잡으면 퇴근이 빨라진다고도 했죠."

서아영이 멍한 얼굴로 웨어울프의 주둥이를 붙들고 혀를 잡아 뽑고 있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퇴근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그거 좀 빨리 가겠다고 저리 난리를 친단 말인가.

"무서운 인간."

서아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데 최정훈 씨 차 없잖아요."

순간, 최정훈의 몸이 휘청거렸다.

내 차.

스위트 마이 카.

아직 할부도 못 갚았는데 천장이 날아가 버린 불쌍한 내 차.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

"네?"

"이게 사고라고 할 수 없는 케이스라서 보험이 애매하다는데, 회사에서 업무상 청구가 가능할까요?"

"최정훈 씨?"

"예?"

"현장에서 안 되는 거 빤히 알면서 찔러보지 마세요."

"…네."

최정훈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서아영은 등 뒤에서 남자의 슬픈 들썩거림을 느끼며 안타까움에 젖어들었다.

'비싼 찬데…….'

폐차장은 어느 차에게나 동등한 법이다.

최정훈이 눈물을 참고 있는 사이, 이지혁이 웨어울프들을 모조리 개 패듯이 패버리고 어느덧 마지막 웨어울프를 걷어차고 있었다.

"마무리!"

뻐엉!

마지막 웨어울프의 머리를 축구공처럼 걷어차 버린 이지혁이 손을 탁탁, 털고는 최정훈에게 다가왔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왜 울어요?"

"우는 거 아닙니다."

"울고 있는데?"

"아닙니다."

"아니, 분명 물기가……."

"잘못 보신 거예요."

"…그런 걸로 하죠."

사나이는 홀로 울 때도 있는 법이다.

사정사정 끝에 서아영의 차를 빌린 최정훈이 이지혁을 싣고 집 앞에 내려주었다.

"갈게요."

"이지혁 씨, 내일은 제발 제시간에 출근을……."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라니까."

"조금만 더 일찍 나오시면 됩니다! 조금만!"

"네, 알겠어요."

잔소리 좀 하지 말라는 듯 인상을 쓰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대체 언제부터 제시간에 출근해 달라는 말이 잔소리가 되었는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도 정도가 있지!

최정훈은 집으로 들어가는 이지혁을 보며 가슴을 쳤다.

"왜 괜히 데리고 와 가지고는……."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최정훈은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아, 진짜 싫다."

아홉 시에 집에서 나선 이지혁은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짜증을 냈다.

출근이란 걸 만든 놈은 누구인가!

잡아 죽여 버려야 해!

오늘도 엄마가 등짝을 후려패지 않았더라면 느긋하게 침대에서 뒹굴대고 있었을 텐데.

"하, 지하철은 또 어떻게 타나……."

직장인의 비애에 가슴 쓰려 하던 이지혁을 환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빵빵.

"응?"

클랙슨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새하얀 쓰리 도어 차가 보였다.

저거… 어제 타고 온 차 아닌가?

창문이 열리더니 최정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타세요."

"헐……."

이 직장 미쳤어.

상사가 사원 태우러 와!

소름 돋는다!

이지혁은 질린 얼굴로 최정훈을 보다가 질린 얼굴로 차에 탔다.

아무리 그래도 지하철보다야…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

"웬일이세요?"

"또 늦으실까 봐 태우러 왔습니다."

"이미 늦었는데."

"…한 시간 반 정도는 기다렸지만, 괜찮습니다."

"괜히 죄송해지네요."

괜히가 아니다.

국어도 모르나?

거기서 '괜히'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되지!

직장 상사가 집 앞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는데 괜히 죄송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이 인간아!

할 말은 많지만 그저 마음뿐.

언제나처럼 최정훈은 빙긋이 웃었다.

'정신과에 가봐야겠어.'

스트레스로 쓰러지기 전에 말이다.

"근데 거기 완전 개판이던데요?"

"네?"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아, 아직 정비가 덜돼서 그렇습니다. 합류할 사람도 아직 덜 왔고요. 안 그래도 오늘 한 명 더 올 겁니다."

"그래요?"

"보면 놀라실걸요?"

"네?"

"보시면 압니다."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도 세포 크기만 한 내 인간관계를 알 텐데, 내가 보고 알 사람이라고?

이지혁의 머릿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관계가 쫙 정리되었다. 너무도 협소한 인간관계 속에서는 능력자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사무직인가?

이지혁의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 NDF에 도착했다. 새하얀 현대식 건물을 보며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지나가다 봤다면 디자인 좋은 건물이라고 봐줄 수도 있는데, 왜 그게 내 직장이 되면 감옥같이 느껴지는 건가!

인식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이지혁은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서아영이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제발 제시간에 좀 와요."

"부팀장님 차 타고 왔는데요."

뻔뻔한 이지혁의 대답에 서아영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최정훈은 억울했다.

'아니, 집에서 안 나오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가 해야 할 일이 얼만데 이제는 인간 배달까지 해야 하다니!

'생각해 보니… 내가 왜 이걸 해야 하지?'

사람 하나 태워 오는 거 정도야 누가 해도 되는 일 아닌가!

그런데 자신 같은 고급 인력이 왜 이걸 해야 하는가!

밑에도 사람이 있는데!

최정훈이 김재범을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열렬한 시선을 느낀 김재범이 찔끔하여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거 내 잘못이 아니잖아!'

원인을 따지면 잘못은 이쪽이 한 게 아니지 않은가! 원인을 따지자면…….

김재범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지…….

"뭐?"

"아닙니다."

…혁을 보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안타깝게도 순환 고리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찔끔하고 고개를 돌린 김재범을 보며 이지혁이 기지개를 쭉 켰다. 몸이 괜히 뻐근하고 피곤한 느낌이다.

"아, 죽겠네."

이지혁이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가자 서아영이 소리쳤다.

"출근하자마자 어디 가요?"

"화장실요. 왜? 따라오시게?"

"끙……."

사실은 담배 피우러 가는 거지만.

문을 닫고 나온 이지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아예 건물 밖으로 나가려 했다.

"여기서는 숨이 안 쉬어져!"

공기가 다르다, 공기가!

망할 놈의 직장.

똑같은 공기인데 왜 복도를 통과한 공기는 이리 답답하게 느껴지는가!

"야."

아, 진짜 때려치우고 싶다. 이제 출근한 지 딱 이틀 됐는데 왜 이렇게 지겹지?

다른 사람들은 평생 출근하기를 원한다는데, 이걸 어떻게 버티는지 존경스러운 수준이었다.

"야!"

"아, 베라프로 돌아가고 싶다."

거기선 왕처럼 살았는데 내가 왜 다시 말단으로…….

"야아아아!"

이지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누가 부르는 거지?

주변을 살펴도 사람이 없다.

"환청인가?"

"아니거든?"

"응?"

이지혁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이지혁의 가슴팍까지 오는 키의 작은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꼬마야, 길을 잃었니?"

"꼬마? 하……."

꼬마가 화를 낸다.

천성적으로 아이와 친하지 않은 이지혁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저리 가서 놀아."

"야. 너, 나 몰라?"

"응?"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선밴데, 지금 뭐하는 거야?"

"응? 선배? 나이가 많아?"

이지혁이 꼬마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사실 이지혁이 키가 큰 편이라 그렇지, 여자 평균 키에서 약간 작은 정도였다. 너무 마른 감이 있고 얼굴이 동안이라 어려 보이는 것뿐.

그래도 그렇지…….

"장난치면 혼난다."

이지혁의 말에 꼬마가 얼굴을 확 찡그리더니 다리를 들어 걷어차 왔다.

퉁!

그러고는 저 멀리 날아갔다.

"헐, 미안.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반격기가 나갔네."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어투로 말한 이지혁이 담배를 들고 룰루랄라 걸음을 옮겼다.

"야! 너 거기 안 서!"

어디서 개가 짖나.

* * *

담배에 불을 붙인 이지혁이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출근하고 나니 나른하고 잠이 온다.

집에서 게임하려고 깼을 때는 정신이 말똥말똥했는데, 출근만 하면 잠이 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생각을 잘못했나?"

이 짓을 앞으로 한동안은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야!"

"하……."

안 그래도 기분 꿀꿀한데 이게 자꾸 엉기네.

"와! 너 뭐하는 애야? 사람을 막 집어 던지네? 내가 능력자 아니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어떡하긴 뒈지겠지. 내가 알 게 뭐야."

"말이 안 나오네, 진짜. 야, 너, 나 몰라?"

"어."

"…이렇게 말하면 보통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응, 안 알아봐. 돌아가."

"너, 진짜 나 몰라?"

"야."

"응?"

이지혁이 인상을 확 쓰며 말했다.

"안 궁금하고, 앞으로도 궁금할 일 없고 엮이기 싫으니까, 저어어~기 안에 들어가서 히스테리 아줌마랑 놀아."

귀찮아 죽겠는데 자꾸 말 거네, 진짜.

말이 끝났는데도 꼬마는 가지 않고 가만히 서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안 가?"

"…진짜 몰라?"

에휴, 상대를 말아야지.

이지혁은 담배를 문 채로 뚜벅뚜벅 걸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러우면 내가 피하면 그만이다.

괜히 거기에서 투닥대 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거지. 사람은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꼬마가 따라온다는 거였다.

"꿀 발라놨어? 저리 안 가?"

"…내가 누나야! 존댓말 써!"

"쥐똥만 한 게 어딜 감히!"

내가 나이를 먹어도 너보다 적어도 천 살은 더 먹었다.

그런데 누나는 무슨.

안 그래도 요즘에 엄마가 애같이 느껴져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중인데 별게 다 귀찮게 하네.

"진짜 몰라?"

"어, 몰라."

"TV에도 많이 나오는데……."

"어, 안 봐."

"CF도 찍었어. 입간판도 많은데……."

"어. 집에서 안 나가."

"……."

통곡의 벽을 마주한 꼬마가 부들부들 떨더니, 몸을 쌩 돌려 사무실 안으로 막 뛰어갔다.

이지혁은 그 꼴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상적인 것들이 없어, 정상적인."

인생에 꼬이는 여자는 다 왜 저러냐?

진짜 울고 싶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난리가 나 있었다.

구석에 박힌 그 꼬마가 엉엉 울고 있고, 그녀를 달래느라 서아영이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지혁이 들어오자 서아영이 도끼눈을 뜨고 소리쳤다.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요!"

"내가 언니야!"

우는 와중에도 나이는 확실하게 짚고 가는 꼬맹이였다.

이지혁은 서아영과 꼬마를 번갈아 보더니, 곧 관심도 없다는 듯 자리로 가 컴퓨터를 켰다.

게임이나 해야지.

최정훈이 은근슬쩍 다가오더니 물었다.

"정말 몰라요?"

"누구요?"

"저분요. 유명한데… 에스 걸스라고……."

"에스 걸스? S? 뭔 이름이 그리 촌스러워?"

그 순간, 울음소리가 두 배로 커졌다.

최정훈이 기겁해서 이지혁을 잡아끌었다.

"잠시만."

"응?"

질질 끌려 복도로 나간 이지혁에게 최정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분이 정해민 씨인데, 조금 그런 부분에 민감하거든요?"

"뭐요?"

"아이돌인데, 요즘 엄청 유명해요. 에스 걸스라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돌?

그러고 보니 TV에 능력자 애들이 붕붕 뛰며 날아다니는 걸 본 거 같은데, 그런 애들 중에 한 명인 모양이었다.

"아이돌이면 아이돌이지, 왜 저런데요?"

"그게… 해민 씨가 원래 능력자로 각성하기 전부터 아이돌 지망이었는데, 데뷔도 몇 번 했고 그런데 10년이 넘게 계속 무명이었거든요."

"그런데요?"

"그러다가 능력자로 각성하면서 갑자기 인기를 얻은 케이스라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거에 좀 트라우마가 있어요."

"별 거지 같은 소리 다 듣겠네."

이지혁이 시답잖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팔다리 떨어져 나가도 잘 살아가는 사람을 수도 없이 봐왔더니, 그런 걸로 트라우마니 뭐니 운운하는 애들을 보면 어이가 없었다.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사람의 스타일이라면 이해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른 사람의 사소함은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알은체를 해주시면……."

"제가요?"

"부탁드립니다. 저희 쪽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분이라……."

"…음."

귀찮다.

너무 귀찮다.

하지만 저걸 저대로 내버려 두는 게 더 귀찮다.

결국 이지혁은 앓는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해민이 고개를 들어 이지혁을 보았다.

뭔가 기대하는 눈치.

"아, 음,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너 연예인이라며?"

"응."

"잘 나간다던데?"

"응."

더 할 말이 없다.

뭔가 기대하며 바라보는 정해민의 눈빛에 이지혁이 식은땀을 흘리다가 마침내 할 말을 찾았다.

"느, 능력자라서 인기도 좋다며?"

정해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울음이 멈췄다.

"그래서 그 능력이 뭔데?"

"텔레포트."

"텔레포트?"

"응."

이지혁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남들은 불 뿜고 얼음 날리고 난리가 나던데, 그걸로 뭔 메리트가 있다고 연예인을 하냐?"

정해민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이지혁 씨!"

당황한 얼굴의 최정훈이 이지혁의 팔을 움켜잡았다.

순간, 기지를 발휘한 이지혁이 말했다.

"아! 맞다! 행사 뛰기는 좋겠네. 차도 필요 없을 거 아냐. 그룹에 하나쯤 넣어놓으면 편하고 좋겠네."

곧 창문이 깨질 것 같은 울음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이지혁은 밖으로 도망 나왔다.

"저게 미쳤나?"

뭔 음파 공격도 아니고!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엄마의 등짝 스매싱 말고도 자신에게 대미지를 주는 건 처음 봤다.

성량이 장난이 아닌 게, 아이돌은 아이돌인가 보다.

아니, 아이돌이라고 꼭 성량이 좋은 건 아닌가?

"진짜 여기는 정상적인 인간이 없어."

이지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최정훈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이지혁을 잡고 늘어졌다.

"이지혁 씨이이이! 제가 그만큼 말씀드렸는데!"

이 사람도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아니, 전 최선을 다 했어요."

"그냥 아는 척만 해주면 되는 건데!"

"아는 척했는데……."

그렇게 아는 척하지 말라고!

트라우마 있다는 애 약점을 쑤시고 비트는 게 아는 척이냐!

최정훈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런데 진짜 모르세요? 요즘 제일 잘 나가는데?"

"쟤가요?"

"예."

"말센가?"

오밀조밀하니 귀엽기는 하지만 딱히 이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지혁의 눈이 너무 높은 것이 아니었다.

이지혁의 눈이 높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게까지 미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더라도 예쁜 걸로 따지면 김다솜이 훨씬 예쁘게 생겼다.

이 동네도 취향이 많이 독특해졌구나.

"여하튼 저는 할 거 다 했으니 알아서 하세요. 제 일 아니잖아요."

"그렇기야 하지만……."

일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도 같이 생활해야 하는데 이렇게 최악의 첫인상으로 시작하면 안 되는 거다.

NDF의 중심은 서아영과 최정훈이지만, NDF의 핵심은 이지혁과 정해민이었다. 정해민이 있기에 전 국토 방위가 가능해지는 거고, 이지혁이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의 케미가 중요한데…….

'케미는 얼어 죽을.'

원수가 안 되면 다행이었다.

이럴 줄 알고 조심스레 만나게 하려고 차로 데리고 온 건데, 화장실 가는 사이에 만나서 일이 터질 줄이야.

최정훈은 자신의 실수를 통감했다.

"그리고 아이돌이면 가서 노래나 할 것이지, 여긴 왜 왔대요?"

"텔레포터니까요."

"그게 왜요?"

"텔레포터는 정말 희귀합니다. 한 나라에 한 명도 잘 없어요. 그러니 대한민국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인재예요."

"텔레포터가?"

이지혁은 코웃음을 쳤다.

베라프에서라면 개나 소나 게이트를 이용해 대량으로 옮겨 버릴 텐데, 그깟 텔레포터가 귀한 인력 취급을 받다니.

정말 이 동네 마법의 저열함이란.

'아니, 사실 정확하게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는 거니까.'

속단은 금물이었다.

대량의 인원을 순식간에 옮겨 버릴 수 있는 텔레포터라면 전시에는 악몽과도 같을 것이다.

전선을 제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네?"

"왜 하필 쟤가……."

"하지 마십시오. 금언입니다."

"이해해요."

"감사합니다."

최정훈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능력자들 중에 정상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거야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중에서도 여기에 모이는 인간들은 나사가 한두 개씩은 더 풀려 있는 인간들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위가 쓰려왔다.

"부팀장님!"

그때, 김재범이 달려왔다.

"왜요?"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급한가요?"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위치가……."

위치?

최정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급하다니 일단 들어가 봐야겠다.

"가시죠."

"저도요?"

그럼 나만 가냐?

이지혁은 최정훈의 눈빛 공격에도 느긋하게 담배를 폈다.

"아 쫌!"

"알았어요, 알았어."

말로만 하지 말고, 그거 끄라고!

이지혁이 궁시렁거리며 최정훈을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심상치 않은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흠……."

조금 진정한 듯한 정해민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지혁을 꼬나보았다.

이지혁이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눈 안 깔아? 확 먹물을 뽑아버릴라."

"헐."

정해민이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

'나에게 이렇게 대한 남자는 니가 처음이야' 컨셉은 안 통하네? 연예인들한테 이게 잘 먹힌다는데.

약했나?

그럼 싸대기를 날리면…….

"이지혁 씨, 지금 무슨 생각 하시는 거죠?"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볼까 하고."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자제해 주세요."

"네."

귀신 같네, 저 인간.

이지혁은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어디래요?"

서아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산이요."

"와, 머네."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멀어도 너무 멀다. 퇴근 시간은 맞춰야 하는데…….

"부산이면 거기 애들끼리 해결하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부산은 부산인데……."

"예."

"기장군."

"네?"

기장군. 기장이면 뭐가 있더라?

멸치랑…….

순간, 최정훈의 눈이 커지더니 서둘러 지도를 켰다.

기장에 분명…….

"아니겠죠?"

"맞아요."

"원자력발전소?"

최정훈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커져서 튀어나왔다.

"이거, 진짜 비상사태예요. 100m 전방에 출현했답니다."

"망할."

잘못하면 부산 일대가 죽음의 땅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수많은 포인트 중에 왜 하필 거기란 말인가!

최정훈이 한숨을 푸욱 내쉴 때, 눈치를 보던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예?"

"지금 가면 퇴근은 제시간이 되는 거 확실한가요?"

"……."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지금 퇴근이 문제예요?"

"내가 망하게 생겼는데, 나라가 문젠가?"

그 확고부동한 가치관에 감탄하며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야 알아요."

"나 안 갈래!"

"해민아, 저 사람 잡고 부산으로 가자."

"재랑 꼭 가야 돼? 그리고 내가 언니라니까!"

"응. 알았으니, 저 사람 잡아."

"안 간다고!"

투닥대는 셋을 보며 최정훈은 안주머니에서 두통약을 꺼내 물도 없이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저런 인간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걸 생각하니 입보다 속이 더 쓰렸다.

"이 나라는 망했어."

옆에서 들리는 김재범의 한탄이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그만하시고 일단 출발하시죠."

"네."

"알았어요."

이지혁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관광 시간은 보장해 주나요?"

제발 이 인간아!

사람답게 좀 살자.

최정훈은 두통약을 한 알 더 꺼내서 입으로 털어 넣었다.

* * *

"이게 뭔 일이야?"

KSF 부산 지부의 타격팀장 이석우는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게이트를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망할.

넓고 넓은 대한민국에서 하필이면 왜 이곳인가!

썩을 놈의 게이트. 차라리 청와대 앞에나 열릴 것이지.

"준비 끝났습니다."

"뭐? 지원 왔어?"

"그쪽은 아직······"

"그런데 뭔 준비가 끝나! 정신 안 차려?"

"시정하겠습니다."

이석우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초조하게 핸드폰을 들었다.

이 새끼들은 지원 요청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안 온다는 말인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명색이 국토 방위 기동 타격대라면 헬기라도 잡아타고 두 시간 내로는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전화 다시 해봐."

"곧 도착한다고······."

"곧이 언제냐고! 그러다가 게이트 터지고 발전소 날아가면 니가 책임질래? 부산 사람들 니가 다 비울 수 있어?"

"전화하겠습니다."

"빨리해 봐, 빨리!"

이석우는 괜스레 부하 직원에게 화를 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Lv. 5.

대한민국 역사상 단 두 번만이 열렸던 고위 게이트다. 저 안에서 어떤 끔찍한 괴물이 튀어나올지 상상도 안 가는 상황인데, 대처마저 늦어지고 있었다.

"예상 시간은?"

"한 시간 내로 열립니다."

"뭐가 그리 빨라!"

"요즘 게이트 열리는 시간이 빨라졌잖습니까."

"되는 일이 없네."

이석우는 전투모를 벗어 움켜잡았다.

"아니, 그런데 이 새끼들··· 진짜 언제 오는 거야?"

그때, 이석우와 게이트 사이에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설마 게이트가 열리는 건가 싶어서 눈을 크게 떴던 이석우의 앞으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우우웁."

"끅."

서아영과 최정훈이 바닥을 보며 헛구역질을 해 댔다.

"이건 타도 타도 익숙해지지가 않네, 진짜."

"멀미약 먹었는데."

이석우는 눈앞에 나타난 네 사람을 보며 인상을 확 썼다.

한 쌍의 남녀는 바닥을 보며 구역질을 하고 있고, 중간에 자리한 작고 귀여운 여자는 신기하다는 듯이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놈은······.

"바다다!"

또라이였다.

이지혁이 양팔을 벌리며 바다가 잘 보이는 곳으로 뛰어가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캬, 비린내. 좋구나."

이석우는 이지혁을 보며 입을 벌렸다.

뭐지, 저 또라이는?

진짜 맛이 갔나?

지금 이곳에 나타난 인간들이 그가 알고 있는 '그' 족속들이라면 당연하게 이곳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을 텐데, 저 반응은 뭐지? 소풍이라도 왔나?

"저번에도 봐놓고 뭘 그리 좋아해요! 그땐 고래도 잡아놓고!"

그래, 그게 옳은 반응이······.

아니, 잠깐만.

고래? 고래를 잡았다고?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이석우에게 최정훈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NDF의 부팀장을 맡고 있는 최정훈입니다."

"KSF 부산 지부 타격팀장 이석우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런데······."

넷을 유심히 살핀 이석우가 의심스런 어투로 물었다.

"넷이 전부입니까?"

"정확하게는 다섯······ 우웁! 이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NDF는 소수 정···예를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예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예면 구역질하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하란 말이다!

"제대로 듣고 온 거 맞습니까? 레벨 5입니다, 레벨 5! 이 정도면 거의 재앙이란 말입니다."

'그게 재앙이면 저 인간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최정훈이 이지혁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장소도 최악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 시간부로 이곳의 지휘권은 저희 NDF에서 맡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규정이 내려왔으니 따르기야 해야죠. 그런데 정말 이 인원으로 되는 겁니까?"

최정훈이 가볍게 웃었다.

"이 사람들로 안 되면 대한민국의 모든 능력자들이 달려들어도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겨우 다섯으로 말입니까?"

"다섯이라고는 해도 저희 팀장님의 명성이야 익히 들으셨겠죠?"

"지랄마녀··· 아니, 플레임 위치의 명성이야 들었습니다. 물론이죠."

이석우가 말실수를 하고는 순간 서아영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아직 배를 부여잡고 있는 걸로 봐서는 못 들은 듯싶었다.

'방금 죽을 뻔한 거야.'

그 지랄마녀의 명성대로라면 그 말실수 한 번으로 이석우로 깔끔히 태워 버린다고 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분은 국내 유일의 텔레포트 능력자이십니다."

"소문의?"

이석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텔레포터는 유용한 대신에 전투 능력이 미약하지 않은가.

"그럼 저 사람은?"

이석우가 바다를 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 이지혁을 보며 물었다.

"···핵심 전력입니다."

"핵심 전력? 저 또라이가?"

"···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 또라이가 국내 최고의 능력자입니다.

최정훈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른 한 명은?"

"주위에 있습니다만, 지금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겠죠."

이석우는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조합이다마는 NDF에게 최대한 협조하라는 공문이 내려온 이상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좋아요, 좋습니다! 우리가 뭘 하면 됩니까?"

"간단합니다. 방위사와 협의하여 발전소 쪽으로 최대한 바리게이트를 쌓아주십시오."

"그거야 기본이고."

"다른 쪽으로 몬스터가 탈출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마시고, 무조건 발전소를 막아주세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대피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당신은 부산 시내를 비우라고 할 수 있소?"

"못하죠. 주변은요?"

"반경 5㎞는 비웠소만, 그걸로 충분할지······."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지혁 씨······."

"네?"

"사진 그만 찍고 이리 좀 오세요. 거, 바다 배경으로 셀카 찍는 정도는 언제든 할 수 있잖아요."

"낭만을 모르시네."

정해민이 그 광경을 보고 발끈했다.

"야, 나를 두고 어떻게 바다나 찍고 있을 수 있어? 잘 부탁하면 같이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줄지도 모르잖아?"

"내가 너랑?"

"그래!"

이지혁이 가당찮다는 듯 하, 웃었다.

"쥐똥만 해서 같이 사진 찍으려면 앉는 게 아니고 엎드려야 할 수준인데, 무슨 수로 같이 사진을 찍어주시려고?"

정해민의 눈가에 다시 습기가 차올랐다.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 이지혁이 소리쳤다.

"음파 공격 또 했다가는 바다로 던져 버릴 줄 알아!"

뚝.

이미 한 번 복도 끝까지 날아가 본 적이 있는 정해민이 입을 꾸욱 다물었다.

저놈은 한다면 진짜 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니가 날 모른다는 건 알겠어."

"이제라도 이해했으니 정말 다행이네. 원숭이보다는 빠르겠어."

"···그렇지만 너도 내가 누군지 알면 지금처럼 날 대하지는 못할 거야."

"뉘에뉘에, 알겠씀니다."

대충 정해민을 굴복시킨 이지혁기 서아영을 보며 인상을 썼다.

쟤는 왜 자꾸 헛구역질인가.

한참 헛구역질을 하던 서아영이 이지혁을 보고 되레 물었다.

"이지혁 씨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요?"

"울렁거린다거나, 구역질이 난다거나?"

이지혁이 삐딱한 시선으로 서아영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임신하셨어요?"

"야! 이! 우웁!"

뭔가 소리를 지르려던 서아영이 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쯧쯧."

이지혁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정도 텔레포트의 유동으로 저렇다면, 대단위 게이트라도 탔다가는 아주 바닥에 누워서 분수를 뿜겠네.

이지혁이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옮길 수 있는 인원의 제약이 크지만, 게이트에 비해서 즉각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애매하긴 하지만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마크가 있어야 한다는 것.

자기가 가본 곳을 중심으로 일정 구역으로만 텔레포트가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너, 여긴 언제 와봤냐?"

"왜? 이제 내 능력이 좀 대단하다는 걸 알겠어?"

"아니. 원자력발전소에서 위문 공연이라도 했는가 싶어서. 아주 전 국토로 행사를 다니네. 연예인도 할게 못 돼."

"···너, 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독설학과 연수라도 받았나?

뭔 입만 열면 사람 속을 이리 뒤집어놓는다는 말인가!

"해민아, 상대하지 마."

"해민 언니라고 해야지! 니가 제일 미워!"

최정훈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품 안에 든 약통에서 약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위장약이 이거였나?'

이러다가 위에 구멍이 뚫려 쓰러지면 산재 처리는 되는 건가?

앞으로 스트레스성 질병에 대한 증거 자료를 미리 모아둬야겠다고 다짐하며 약을 삼킨 최정훈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자, 그만하시고··· 이제 준비해야 합니다. 일단 팀장님은 후방 지원을 해주시고요.

해민 씨는···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저 멀리서 대비해 주십시오. 긴급 탈출을 해야 할 경우도 있을 테니까요. 가윤이는 해민 씨 지켜주시고. 그럼······."

최정훈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이지혁씨는 하시던 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잠깐!"

이지혁이 몸을 돌려 멀어지려는 최정훈의 팔을 잡아챘다.

"무슨 일이죠!"

"이게 뭣이여? 지금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뭔 말입니까?"

"자, 보자고. 얘는 후방 지원, 얘는 후방 감시, 그리고 얘는 후방 감시의 보호!"

이지혁의 눈이 희번덕 번들거렸다.

"그럼 나는? 나 혼자 전방에서 다 뒤집어쓰라는 말인가?"

"···조합이 어쩔 수가 없잖습니까?"

"그럼 이게 무슨 NDF여? 이지혁과 아이들이지!"

정해민이 반색했다.

"아이돌?"

"이년이 미쳤나? 자꾸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고 끼어!"

시무룩한 채 구석으로 찌그러지는 정해민을 보며 최정훈도 움찔했다.

'뭐야? 쟤는 벌써 적응한 건가?'

현역 톱 아이돌이 온갖 욕을 퍼먹으면서도 그러려니 하게 만든다는 게 이지혁의 진정한 마력 아닐까?

"배 째! 나 안 해!"

"이지혁 씨, 지금 아직 인원이 덜 와서 그렇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아, 모르겠고, 나 이거 노동청에 제소할 거야."

"상황이 상황이지 않습니까! 잘못해서 저거 터지면 부산이 날아갑니다. 제발 좀요!"

"그게 내 잘못인가? 내가 게이트 열었냐고! 그걸 왜 내가 책임져요! 됐고, 난 이리 부당한 대우를 참을 수 없어요. 노조 결성할 거야."

'사람이 다섯인데 뭔 놈의 노조!'

따지고 들려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제 어느 정도 성향을 파악한 최정훈이 이지혁의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 말을 했다.

"삼 일."

"이틀."

"삼 일!"

"···삼 일!"

고개를 끄덕인 이지혁이 군말 없이 게이트로 갔다.

서아영이 물었다.

"삼 일이 뭐예요?"

"···휴가요."

서아영이 도끼눈으로 소리치려다 현실적으로 이지혁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생각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러게 제가 다시 한 번 고려해 보자고 했잖습니까!"

"언제?"

"캬, 안 통하네, 이거."

야바위를 치려다 걸린 최정훈을 보며 서아영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이 양반도 갈수록 이지혁을 닮아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내 착각인가?

"긴장감이 너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때, 보다 못한 이석우가 일침을 날렸다.

이석우의 불만은 타당성이 있었다.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니까 말이다.

최정훈은 가벼운 미소로 그의 불만을 받았다.

물론 최악의 상황이다.

하지만 저 이지혁이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는가.

수틀리면 이 앞 지형을 바꿔서라도 해결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이지혁인데.

"열립니다!"

마침내 게이트가 열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힘겹게 게이트를 통과한 괴물이 양팔을 들어 올린 채 하울링을 토해냈다.

크아아아아!

최정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위사의 군인들과 일부 능력자들도 몸을 뒤틀었다.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듣는 순간, 전신이 공포에 빠져들어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게 만드는 저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오··· 오거!'

최정훈의 손이 벌벌 떨렸다.

붉고 검은 털로 뒤덮인 육체, 수북한 털에 가려져 있음에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거대한 근육질, 날카로운 이와 찢어진 눈, 그리고 6m에 달하는 체고!

붉은색의 털이 섞여 있었다는 것만 다를 뿐, 예전 유럽의 한 나라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궁극의 몬스터, 오거가 분명했다.

아무리 레벨 5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장소에 대한민국을 혼자 뒤집어놓을 만한 괴물이 출현하다니.

최정훈이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지혁이 없었더라면 발전소가 어떻게 되든 일단은 후퇴해야 한다!

하지만 이지혁이라면!

이지혁이라면 혹시!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이지혁이 오거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소리쳤다.

"야, 너 혹시 나 아냐?

···저 새끼, 또 뭔 짓 하는 거야?

거품이라도 물고 싶은 최정훈이었다.

* * *

크아아아아아!

오거가 다시금 큰 하울링을 토해냈다.

사람들이 귀를 막고 바닥에 쓰러져 몸을 뒤틀었다.

상위 몬스터의 권능인 '피어'가 발동된 것이다.

"그, 그만!"

일부 능력자들조차 피어 한 번만으로도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바닥에 쓰려져 귀를 틀어막았다.

"제, 제발 저것 좀!"

최정훈이 오거를 가리키며 신음했다.

이지혁은 오거에게 다가가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크륵?

오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지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조그마한 생명체가 감히 두려움도 없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오거도 흥미롭게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크르르······.

흥미는 잠시.

오거는 곧 그 작은 인간에게 흥미를 잃고 팔을 들어 올렸다.

한 번의 휘두름.

그것만으로도 이 작은 생명체는 사지가 찢겨져 날아갈 것이다. 그 후에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찢어서 굶주림을 해결하면······.

크륵?

인간이 자꾸 다가온다.

어느새 오거의 바로 앞까지 온 인간이 입을 열었다.

"야, 너 나 몰라?"

오거가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데?

"이 새끼가?"

쿵!

귓가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자 오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듯이 숙이고는 벌벌 떨었다.

키이이이이!

그러고는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헐······."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입을 헤, 벌렸다.

지금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그의 명석한 머리로도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았다.

크륵?

오거 역시 자기가 왜 바닥으로 몸을 찧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쭈?"

오거가 다시 눈앞의 인간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본 오거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인간이 오거를 일일이 구분하기 힘들 듯이 오거가 인간의 생김새를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하지만 뭔가 느껴지는 익숙함에 오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럴 리가 없다.

오거가 알고 있는 '그'는 그 주변에 흐르는 기운만으로도 자신의 강인한 육체를 찢어발길 수 있는 절대자이자 신이다.

이 힘도 없어 보이는 작은 인간이 '그'일 리는 없는 것이다.

그는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뭔가 비슷한 느낌이 든다는 것만으로도 오거는 감히 눈앞의 인간에게 덤벼들 수가 없었다.

"아는 것 같은데? 너 베라프산이냐?"

크륵.

오거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 이 새끼?"

답답함을 느낀 이지혁이 한 손을 뻗어 검은 마나를 피워 올렸다.

"이걸 보······."

키에에에에에엑!

순간, 귀를 찢을 듯한 비명성과 함께 오거가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치타 정도는 찜 쪄 먹을 속도로 게이트를 향해 뛴 오거가 몸을 게이트 안으로 날렸다.

"헐······."

이지혁이 황당한 눈으로 오거를 바라봤다.

몇 번이고 게이트 안으로 몸을 던진 오거가 자꾸 몸이 튕겨 나오자 이제 숫제 게이트를 붙들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서아영이 한숨을 쉬었다.

"대체 저 인간은 뭐하는 인간이지?"

오거다.

저 오거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 동원된 군대와 능력자가 얼마던가.

그걸로도 해결을 못해서 핵 투하까지 고려되었던 최상급 몬스터가 아니던가!

레벨 5에서 만날 수 있는 최악의 몬스터가 바로 오거였다. 동일한 레벨 5로 분류되는 몬스터와도 차원이 다른 강함을 자랑하는 개체다.

그 강건한 육체는 전차의 철갑탄마저 콩알처럼 튕겨내고, 그 압도적인 힘은 일격에 전차를 하늘로 날려 버릴 정도였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수준의 강함.

그것이 오거의 상징이 아닌가.

그런데 저게 대체 뭔가.

무슨 사자 만난 강아지도 아니고, 저 큰 덩치가 낑낑대는 꼴을 보자니 놀랍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상황이 대체 왜 이리 돌아가지?"

서아영은 오거와 이지혁을 번갈아 보며 의혹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최정훈은 다른 부분을 보고 있었다.

'알고 있다?'

두려워한다는 감정도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저 오거는 분명히 이지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타 차원?'

오거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지혁이 타 차원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건데······.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이지혁의 지난 5년에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오거는 여전히 게이트를 붙든 채 울부짖고 있었고, 이지혁은 천천히 다가가더니 오거를 무시하고는 게이트에 손을 댔다.

"흠······."

뭔가 이질적인 마나의 느낌이 느껴졌다.

'베라프나 마계에서 직접 넘어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최소한 타 차원으로 소환되었다가 그쪽에서 넘어오는 이중의 과정을 거쳤다.

마계가 베라프 한 곳으로만 연결이 되어 있지는 않으니 이런 일도 생기는가 보다.

"신기한 일이네."

묘한 향수를 느낀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자 입을 쩌억 벌린 채 그의 머리를 노리고 있는 오거가 보였다.

"헐, 너 지금 나 씹으려고 한 거야?"

오거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관심이 돌아간 틈을 타서 기습을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이리된 이상!

오거의 양손이 그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빛살처럼 이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허허."

이지혁이 오거의 팔을 피해 허공으로 몸을 띄우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다.

아니, 자존심이 상한다.

다른 몬스터들이라면 이해한다.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오거는 그도 분명히 알고 있는 개체였다.

자신이 마계에서 소환하는 종속체들 중에서도 특히나 강인하고 잔인하여 부대장 격으로 쓰던 놈이었다.

딱히 이름을 지어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안면이 있었다.

백 년 정도는 부려 먹었으니까.

그런 놈이 자신을 공격한다?

이등병에게 걷어차인 사성 장군의 심정이 된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끄집어내 줘야지!"

이지혁의 오른손이 검게 물들었다.

그러고는 벼락처럼 아래로 떨어져 오거의 머리통을 그대로 내려쳤다.

쾅!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거대한 굉음이 세상을 쩌렁쩌렁 울렸다.

"······."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일을 지켜보던 서아영이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할 말이 없는 건 최정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앞에서 이지혁이 오거를 말 그대로 개 패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깨갱!

서아영이 귀를 문질렀다.

깨갱?

세상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두 단어를 조합하라면 서아영은 서슴없이 깨갱과 오거를 조합할 것이다.

저 오거가 개처럼 깨갱대며 처맞고 있었다.

"꿈인가?"

아니, 차라리 꿈인 게 낫다.

이건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 악몽급이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근데 저 오거··· 반응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안 이상한 걸 찾는 게 더 빠를걸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만큼이나 처맞고도 아직 깨갱대며 몸을 뒤튼다는 건 대미지가 그리 크게 박히지 않는다는 건데······.

그런데 왜 반항은 안 하고 머리를 감싸고 몸을 구른다는 말인가.

"어쭈? 피해? 피해? 미쳤지?"

이지혁이 오거를 걷어차면서 소리쳤다.

"하, 이 새끼 진짜······. 내가 웬만하면 이해해 보려고 했다. 여긴 베라프가 아니니까··· 반가워서 멀쩡히 돌려보내 줄 방법이 없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둥아리를 들이대?

와, 인심··· 아니, 괴물심 각박한 것 보소!"

패든지 잔소리를 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해라.

흑마력으로 직접 타격을 받으며 이지혁이 누구인지 몸으로 깨달은 오거는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뒤틀 뿐이었다.

"일어나."

크륵?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아, 이게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일어나."

마족어로 말하자 오거가 몸을 벌떡 일으킨다. 직접 대화를 할 지능까지는 없어도 말귀는 알아듣는다. 개보다는 지능이 높은 급이니까.

이지혁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쏜살같이 튀어온 오거가 바닥에 몸을 넙쭉 엎드렸다.

"아··· 나도 참 많이 착해졌다. 옛날 같았으면 지금쯤 팔이랑 다리가 어디 있는지 찾고 있었을 텐데. 어휴."

이해는 안 가도 어감은 안다.

오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괴물도 식은땀을 흘리네.'

최정훈이 황당해하는 동안 이지혁은 '앉아', '일어서', '앉아', '손'을 차례대로 시켜보고는 곧잘 따라 하는 오거를 보며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일단 뭐가 안 통하면 패면 된다.

세상 모든 일은 대부분 그걸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이지혁 씨······."

"넹?"

"그 괴물 말인데요······."

"네."

"처리 안 하십니까?"

"얘를요?"

그럼 또 누가 있는데!

소리를 빽! 지르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억누른 최정훈이 최대한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어, 어떻게든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음, 그렇긴 한데······."

이지혁이 이제는 누워서 배를 드러낸 오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귀여운데 죽이기는 좀······."

귀여워?

귀여워어?

눈깔에 헬로 키티라도 처박으셨나?

세상 모든 것이 핑크빛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그걸 귀엽다고 할 수 있나?

"키우면 안 될까요? 나름 사연이 좀 있어서··· 죽이려니 좀 그런데."

무려 백 년을 이지혁 밑에서 구르고 또 구른 놈이다.

이지혁의 마음 아주 깊고 또 깊은 균열의 끝과 또 끝에 마이크로그램쯤 남아 있던 양심이 꿈틀댔다.

그만큼이나 부려 먹고 죽여야 한다니.

"아무리 죽도록 일하고 마지막에는 고기가 되는 것이 가축이라지만 불쌍하잖아요. 제가 워낙 감수성이 예민해서."

"감수성··· 그렇죠, 감수성."

니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세 살짜리가 상대성이론을 읊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기분이야.

"그런데요······."

"네?"

"보통 지금까지 게이트 보면 다 떼거리로 나오지 않았어요? 큰 게이트는 다른가?"

"어?"

그 말을 들은 최정훈이 아차 싶어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오거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잊었는데, 레벨 5라면 거의 군대급의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게이트에서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헐······."

지금까지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참 찔끔찔끔도 나온다고 생각했던 이지혁도 놀랄 정도로 끝없이 몬스터들이 밀려나왔다.

이 정도면 거의 이지혁의 게이트급이다.

물론 몬스터의 질은 다르겠지만!

그 몬스터 떼를 보던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이렇게 하죠?"

"예?"

"예로부터 공을 세운 말은 그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 이 미친놈아!

욕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지금은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공을 세워야 한다! 오식아!"

순간적으로 이름까지 지어준 이지혁이 오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왜 오식이냐고?

창식이랑 닮았거든.

쿠오오오오오!

말은 안 통해도 뜻은 통하는 것인지 오거, 아니, 오식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몬스터 떼를 향해 달려갔다.

"그렇지. 음음, 잘한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가 나오는 족족 찢어발기는 동족상잔(?)의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오거를 보며 최정훈은 약통을 그냥 병째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렇게 먹으면 속 버릴 텐데?"

니가 양심이 있으면 그리 말하면 안 되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최정훈의 위장이 들썩였다.

그때, 이지혁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뭔가 음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스펙터?"

이지혁이 멍한 눈으로 하늘을 뒤덮은 유령 같은 형체를 보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물러서!"

"에?"

최정훈이 영문을 몰라 하는 사이, 스펙터 떼가 방위선을 만들고 있는 군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