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2화 (12/118)
  • [■] 승부라면 종목은 단 하나밖에 없지! [■]

    ─────

    투투투투투!

    헬기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보시는 바와 같이 게이트가 출현한 곳은 풍비박산이 나 있습니다.

    상공에서 비추는 영상에 엉망이 된 아파트촌의 모습이 드러났다.

    - 바리게이트 라인을 탈출한 몬스터들이 도심에 출몰하였습니다.

    이어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것처럼 엉망이 된 도심가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 정부는 이번에 발생한 몬스터 사태에 유감을 표했으며 사망자와 부상자들에게 보상을 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불신은…….

    * * *

    "난리도 아니네."

    "그러게."

    박선덕은 TV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TV에서 나오는 광경이 그녀의 집 앞 광경이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그랬다.

    일단 대충 사태가 해결되기도 했고, 집에는 이지혁이 함께 있었기에 셀터로 대피하는 일은 미루기로 했다.

    몬스터가 출현하는 곳에 남아 있는다는 찝찝함이 있기도 했지만,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한다는 부담감이 있기도 했고, KSF와 이지혁이 지켜준다는데 별일이야 있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적 탑은 탑에서 사는데! 정글러어어어어!"

    박선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셀터에 아직 인터넷이 안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지혁이 KSF를 폭파시킬 기세로 반항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열이 받은 최정훈이 인터넷 회사에 전화를 해 당장 선을 넣지 않으면 그 회사를 뒤집어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던 것은 잊기로 하고.

    "그러고 보면 참 능력 있는 아들인데……."

    "그렇긴 한데……."

    박선덕과 이예원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고는 함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 늘어난 트레이닝복을 입고 헤드셋을 낀 채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게임을 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자니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인재?

    "인재 다 얼어 죽었지."

    "엄마, 그래도 자식인데."

    "내 자식이니 하는 말이다."

    "그렇긴 해."

    너도 이년아.

    니가 할 말이니, 그게?

    열 살 차 나는 남자 좋다고 헤벌레 하는 게 뭐 잘났다고 지 오빠를 걱정해! 난 니가 더 걱정이야.

    하기야 좀 멋있긴 하더라.

    박선덕을 혀를 차면서 방 안을 다시 보았다.

    입으로는 마구 욕을 뱉으면서 불꽃같은 키배를 하고 있는 이지혁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쟤를 믿어야 할지……."

    믿으시면 안 됩니다, 어머님.

    "이 사태를 어떻게 할 거냐고!"

    서아영은 당당했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을 그 정도로 막아낸 것은 되레 칭찬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보너스라도 주려고 부르신 건 줄 알았는데요."

    "보너스? 지금 너 미쳤어?"

    "아뇨, 제정신입니다만?"

    서아영은 그녀의 앞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이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세계 어떤 이들도 그 상황을 그 정도의 피해로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조커 카드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본부장님들께서는 사망자 수를 세느라 정신이 없으셨을 텐데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예. 말이니까 하는 겁니다."

    "이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서아영이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상황을 똑바로 보세요. 저는 괜한 화풀이나 들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뒷수습을 하느라 골치가 아프다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바쁜 사람을 불러서 화풀이해 대신다고 상황이 달라지나요?"

    "이……!"

    다시 발작하려는 이를 가운데 앉은 이가 손을 들어 막았다.

    "서아영 팀장."

    "예, 본부장님."

    "귀관이 상기 작전에서 이루어낸 성과는 높이 평가한다."

    "감사합니다."

    "다만, 귀관도 알고 있다시피 게이트의 출현 방식과 생성 방식에 대한 매뉴얼이 무너졌다.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매뉴얼의 확립과 대처를 귀관에 손에 맡기고 있다. 그 책임을 진다는 자각은 있는가?"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모든 승인은 내가 해주지. 윗선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최선의 조직을 만들어보도록."

    "부서장은 누가 되는 겁니까?"

    "물론 자네겠지. 승진이 필요하면 해야지."

    "감사합니다."

    "다만……."

    낮은 목소리가 서아영의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지위가 올라간다는 것은 그에 따른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지금은 자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으로 이해 받을 수 있겠지만, 지위가 올라간다면 결과만이 중요해질 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런데 하나 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이거, 예산이 이상하게 과다 청구된 거 같은데? 이만한 돈을 쓸 일이 뭐가 있었지?"

    "…그게요."

    지금까지 당당하던 자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서아영의 어깨가 움츠러들고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그게……."

    망할 이지혁!

    망할!

    서아영이 보이지 않게 이를 갈았다.

    "정신이 없네, 정신이."

    최정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말했다. 그러면서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은 쉬지 않았다. 이럴 때면 두벌식 키보드가 아니라 세벌식 속기 키보드를 익혀서 일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아니, 그 자양강장제 좀 적당히 드시라니까요."

    김재범의 한탄에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맛있어요."

    "맛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최정훈이 서류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세요?"

    "예. 외근입니다."

    "일이 아직 많으실 텐데."

    "제일 중요한 일이 아직 덜 해결되었거든요."

    최정훈이 눈을 빛냈다.

    서아영의 특명이기도 하지만, 최정훈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는 끝장을 볼 시간이다.

    최정훈이 자리 뒤에서 커다란 박스를 꺼내 들었다.

    "그건 뭡니까?"

    "흠……."

    최정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비밀 병기죠."

    "비밀 병기요? 누굴 상대하러 가시는데요?"

    "있습니다."

    최정훈이 잘생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했다.

    "비열함의 끝판왕 같은 인간이."

    "아니, 이 새끼가!"

    이지혁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 발로 함?

    - 너 어디 사냐?

    - 왜? 알면 찾아오게? 아서라. 너 형 만나면 피똥 싼다.

    "피똥 진짜 한 번 싸게 해줄까?"

    이지혁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거, KSF에 의뢰하면 사는 지역이 나오나?

    "왜! 대체 왜!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인가!"

    사나이의 눈물을 흘리며 이지혁은 좌절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자신이 게임을 못할 리가 없는데…….

    마음에서 알고 있는 그와 현실의 이지혁이 괴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안 해! 안 해!"

    이지혁이 게임을 끄고 인터넷 창을 켰다.

    "스트레스 좀 풀어야지."

    자연스레 음악 프로그램을 켜고 걸 그룹 모음 재생을 누른 뒤, 장르 문학 연재 사이트에 들어가서 선호작을 뒤지기 시작했다.

    와작와작.

    그와 동시에 과자들이 입으로 흡입되기 시작했다.

    '이 생활이 좋기는 한데…….'

    이젠 슬슬 끝물이다.

    이지혁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평온함은 이제 끝을 고하고 있다는 것을.

    '놀 만큼 놀기도 했지.'

    처음 예상했던 시간에 비하면 과도하게 짧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어찌 보면 이지혁이 느끼고 있는 시간의 괴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예전엔 일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이 흘러도 급할 것이 없었다.

    죽지 않으니까.

    죽을 일이 없고 한정된 시간이 없으니까 일이 더디게 진척되어도 급하지 않았다. 시간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으니까.

    그런 생활 습관이 알게 모르게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들어서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채 백 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노는 것도 지겹고."

    매일 게임이나 하고 소설이나 보고 살다 보니 이제 좀 지루하기도 했다.

    어제 대단위 전투를 한 번 겪고 났더니 그런 마음이 좀 더 심해졌다.

    자극의 단위가 다르니까.

    아무리 즐거운 놀이가 있다고 해도 눈앞에서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실전을 겪게 되면 게임이라는 것이 시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슬슬 낚아봐야 하는데……."

    막상 움직이려니 귀찮기도 하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딩동!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찾아온 이가 누군지 짐작한 이지혁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빙고."

    방금 회를 뜬 듯한 신선한 먹잇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또 뵙습니다, 어머님."

    "아이고!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박선덕이 그사이 또 수줍은 소녀가 된 이예원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요망한 것.

    아무리 자신의 딸이라지만 도무지 곱게 봐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집이라고 핫팬츠나 입고 뒹굴거리던 게 그새 번개같이 옷 갈아입고 나온 것 봐.

    제 오라비보다 더 빠르네.

    "자꾸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신경 써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오늘은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왔습니다."

    "마무리요?"

    최정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꽂혔다.

    "이제는 그만 결정을 해주시죠, 이지혁 씨."

    "호오?"

    이지혁이 의자를 빙글 돌리며 오만하게 등을 기댔다.

    "이 나를 설득시킬 만반의 각오를 하고 오셨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나를?"

    "훗."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스파크를 일으켰다.

    남자 대 남자의 자존심이 충돌했다.

    "실패한다면 전 절대 KSF와는 엮이지 않을 거예요.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그 자신감은 좋군요. 하지만……."

    이지혁에게서 위엄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쉽지 않을 텐데?"

    "쉬운 일은 도전하는 맛이 없는 법이죠."

    훌륭하다.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 양반은 어떻게 야금야금 먹어 치워볼까?

    이지혁이 휘파람을 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해보실 생각?"

    "사실……."

    최정훈이 이지혁을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이미 마음을 정하셨죠?"

    "하?"

    "제가 이지혁 씨라도 이미 결론이야 빤할 겁니다. 이지혁 씨가 뭘 노리든 KSF와 함께 하는 것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테니까요. 심지어 이지혁 씨가 세계 정복을 노리고 있다고 해도 지금은 KSF에 합류하는 게 최선의 루트가 되는 거죠. 물론 여기까지 계산이 끝나셨겠죠."

    아닌데요?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뭐야, 이 양반?

    왜 이렇게 앞서 나가?

    머리 좋다더니, 허당인데?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합류하기 어려우시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방법을 찾고 계시겠죠."

    "아닌데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진짜 아닌데요?"

    "제가 그 방법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네?"

    어디까지 갈 셈이지?

    달아오른 최정훈의 얼굴을 보며 이지혁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뭔가 저 진지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는 부담되었다.

    "그래서 뭘 어쩌시겠다는 건가요?"

    "승부하는 거죠."

    "승부?"

    "예. 제가 이기면 KSF에 들어오십시오. 제가 지면 다신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러면 조건이 이상하니 제가 지면 한동안 무보수로 이지혁 씨를 도와드리죠."

    "흐흠……."

    승부?

    지금 승부라고 했나?

    감히 자신과의 승부라니.

    이지혁은 코웃음을 치며 최정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최정훈 역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좋아요. 그래서 뭘로 승부하실 생각이죠?"

    "당신과 나의 승부라면……."

    최정훈이 당당하게…….

    그러나 크지 않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종목은 단 하나밖에 없지!"

    "이해했다."

    이지혁과 최정훈.

    지금 남자의 승부가 시작된다.

    * * *

    늦은 밤이 되어 겨우 퇴근을 한 서아영은 지끈지끈한 머리를 누르며 차를 몰았다.

    "그런데 그 영상에 나온 사람은 누군가?"

    "확실하게 확보한 거겠지?"

    "세간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건 귀관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망할 영감탱이들.'

    서아영은 액셀을 꽉 밟았다.

    "말은 쉽게 한다, 말은!"

    근엄하게 앉아 거들먹대면서 입으로 말한 건 모두 이루어져야 만족하는 인간들을 상대하고 나면 전신이 나근나근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오는 느낌이다.

    "잘하고 있으려나?"

    이지혁의 확보.

    무엇보다 중요한 그 지상 명제를 이루기 위해 최정훈이 담판을 지으러 갔다.

    서아영은 최정훈을 믿었다.

    그가 하려고 해서 못한 일은 없었으니까.

    서아영이 상관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실질적인 업무는 그가 처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아영 역시 위급할 때는 최정훈에게 가장 의지하게 된다.

    이번에도 멋지게 일을 성공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아?"

    아까부터 전화를 계속하고 있는데 받지 않는다.

    평소의 그라면 전화를 받지 않는 정도로 걱정할 일은 없겠지만, 하필 간 곳이 '그' 이지혁의 집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뭔가 이지혁과 엮이면 항상 상황이 이상해진다. 주변에 디버프라도 거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겠지."

    그렇게 위안을 하면서도 서아영은 이지혁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최소한의 확인은 해야 잠이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의 폐허로 변해 버린 아파트 앞에 대충 차를 대고 내린 서아영이 고개를 들어 이지혁의 집을 바라보았다.

    "불이… 켜져 있네?"

    지금 시간이 몇 시더라?

    서아영은 불안한 눈으로 불이 켜진 이지혁 집의 창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얼굴로 현관으로 향했다.

    어쩌면 굉장한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확인을 해야 한다.

    서아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이지혁의 집 문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새벽이 다 된 시간에 남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정말 큰 실례였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상상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더 큰 실례가 될 것이다.

    "휴!"

    깊게 한숨을 내쉰 서아영이 벨을 눌렀다.

    짧은 기다림이 지나자…….

    - 누구세요?

    "야심한 밤에 죄송합니다. KSF의 서아영이라고 하……."

    뚝.

    다짜고짜 인터폰이 꺼지는 소리가 들리고… 서아영은 순간 멍해졌다.

    "뭐지?"

    디리리릭.

    도어 록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박선덕이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 어머님, 안녕하세요."

    미묘한 얼굴의 박선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들어오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여기 최정훈 씨가 왔나요?"

    "들어와 보시면 알겠네요."

    "네?"

    서아영이 박선덕의 안색에서 불길함을 감지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서아영은 보았다.

    '데자뷰인가?'

    아니, 데자뷰일 리가 없지!

    그런데 왜 한 번 본 광경을 또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 하는 걸까?

    서아영의 눈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마냥 떨렸다.

    "자꾸 이쪽으로 붙지 말란 말입니다!"

    "레이싱 게임 안 해보셨나? 원래 격하게 하면 머리가 따라가는 법이죠."

    "이게 레이싱 게임이 아니잖아요, 이게! 어허! 그 컨트롤러 선에서 발 떼시죠! 발모가지 날아가기 전에!"

    "아이고, 화면에 집중하셔도 이길까 말까 하는 판에 그런 걸 보니까 지는 겁니다. 자자, 마무리."

    "아니,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남자의 승부잖아요! 남자의 승부! 정정당당하게 하잔 말입니다!"

    "이기면 장땡이지."

    "와, 진짜 게임 뭣같이 하네!"

    왜…….

    여기서까지…….

    저런 꼴을 봐야 하는 것인가.

    서아영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뭐하자는 짓인가.

    왜 남의 집에서 남의 TV를 차지하고 게임을 하고 있단 말인가!

    좋다.

    다 좋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지금 시간이 새벽 두 시다.

    어느 미친놈이 새벽 두 시에 남의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최정훈 씨."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이걸로 20승 3패네요. 그만 승복하시죠?"

    "승복? 승복?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대체 그 20승 중에 실력으로 이긴 게 몇 판이나 됩니까! 100선승 가죠!"

    "밤새겠네, 밤새겠어."

    "와! 진짜! 와! 와아! 정말 더럽다, 진짜! 사람이 정도껏 더러워야지!"

    서아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최.정.훈. 씨."

    "응?"

    최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보았다.

    흉신악살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는 서아영을.

    "아니, 팀장님. 언제……."

    서아영은 두말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주먹을 움켜쥐고 최정훈에게 달려들었다.

    "죄송합니다."

    최정훈은 얼굴 가득 억울함을 품으며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고, 그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은 서아영이 고개를 푹 숙여 박선덕에게 사과했다.

    "…아니, 뭐 딱히 사과하실 것까진 없는데……."

    "네, 괜찮아요."

    이예원이 방긋방긋 웃으며 대신 사과를 받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책임자로서 대신 사과를 드립니다."

    "괜찮아요, 정말."

    박선덕은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하겠는가, 이 상황에.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되지도 않는 승부를 건 게 잘못이죠."

    최정훈의 눈이 불을 뿜었다.

    "원격으로 합시다! 원격으로! 옆에 붙어서 하지 말고 원격으로 하자고요!"

    "최정훈 씨."

    "…네?"

    "한마디만 더 하면 진짜 죽일 거예요."

    "네."

    최정훈이 침몰하자 이지혁은 더없이 우쭐해졌다.

    "대체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믿었는데!

    이번에야말로 믿었는데!

    "그만큼이나 이지혁 씨와 함께하고 싶다는 저희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음, 네, 뭐……."

    그 떨떠름한 반응에 서아영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빠르게 후퇴해서 최정훈을 갈구고 정비해 다시 도전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끝장을 볼 것인가.

    '더는 끌 수가 없어.'

    이제는 정말 시간이 촉박했다.

    "이지혁 씨."

    "네?"

    "이제는 그만 결정을 내려주세요."

    "뭔 결정을요?"

    "저희와 같이 일하실 생각이 아직도 없으신가요?"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사실…….

    얘들이랑 엮이는 게 꽤 재미있기는 하다. 다만, 그런 이유로 선택할 일은 아니었다.

    '이쯤 되면 피하긴 힘들지.'

    이미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내보인 상황이다. 그가 아무리 엮이지 않으려 한다 해도 앞으로 평생을 KSF의 감시를 받으며 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아니면 KSF를 박살 내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몬스터는 누가 막나.

    이지혁이 일일이 날아다니면서 막을 것이 아니라면 KSF는 필요했다.

    들어가는 것에 딱히 거부감도 없다.

    하지만 들어가는 방식이 문제였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예.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제가 만약 KSF에 들어가게 된다면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 건가요? 정식으로인가요, 아니면 계약으로?"

    서아영이 최정훈을 보았다.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진짜 말 못하게 해줘요?"

    최정훈이 헛기침을 하고는 설명을 했다.

    "대부분의 능력자들이 KSF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 모두가 정식으로 KSF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관리의 형식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죠. 다만, 이지혁 씨 같은 경우는 KSF로 가지 않습니다."

    "네?"

    "새로 창설되는 기구로 배치될 것입니다. KSF의 통제마저도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기구죠.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기구를 통해 전 국토와 능력자들을 관리하게 될 겁니다."

    이지혁이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걸 이 여자가 관리하는 건가?

    대한민국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근무 조건은요?"

    "그건 이 팸플릿을……."

    이지혁은 최정훈이 내미는 팸플릿을 받으며 전율했다.

    대체 이건 또 언제 만들어서 준비했다는 말인가.

    이 양반은 왜 보험을 안 하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팸플릿을 차근차근 읽어본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전에 약속드린 부분들도 다 지켜질 것입니다. 이지혁 씨, 저희는 최상의 조건을 준비했습니다. 이 이상은 해드리고 싶어도 해드릴 게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권유드리겠습니다."

    최정훈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십시오. 지금 대한민국은, 그리고 세계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네네."

    이지혁은 최정훈의 심혈을 깃들인 권유를 한 귀로 흘리고는 팸플릿을 내려놓았다.

    "…대답은요?"

    "음, 대답 좋죠. 대답 좋은데… 그전에 하나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 있거든요?"

    "네?"

    "지금 이 자리에서 하기는 그렇고, 내일 아침에 다시 뵙죠. 집에서는 좀 그러니까 적당한 장소를 알아주세요."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나온다는 것은 이미 거의 넘어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니 굳이 딴지를 걸 필요는 없다.

    "그럼 그렇게 알고 일어나보겠습니다."

    "배웅 안 해요."

    최정훈과 서아영은 거듭 사과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찰칵.

    최정훈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뭐가 말입니까?"

    "왜 거기서 게임을 해요?"

    최정훈이 씨익 웃었다.

    "이지혁 씨를 설득해야 하니까요."

    "무슨 말이죠?"

    "지금 중요한 건 이지혁 씨입니다. 제가 어머니께 계속 설명을 드린 것도 옆에 있는 이지혁 씨에게 설명을 한 거죠. 그 양반은 자기한테 설명하면 들을 생각도 안 하는데, 어머니에게 설명하고 있으면 꼭 와서 듣더군요. 천성적인 청개구리죠."

    "듣고 보니……."

    "어머니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문제에서만큼은 이지혁 씨가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가 중요합니다. 다만, 첫 단추가 잘못 꿰어져서 이지혁 씨가 KSF에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죠. 그러니 그 거부감을 해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요?"

    "결과는 좋았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게임을 해서 제가 이겼다면 져서 들어오는 것이니 모양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적당히 져주면서 기분을 맞춰준 거죠. 덕분에 이젠 친근감이 생겼을 겁니다."

    "애도 아니고……."

    "아뇨. 애인 거죠. 생각해 보세요. 이지혁 씨는 어린 나이에 실종이 되었다가 기억을 잃은 겁니다. 그럼 정신연령은 거의 고등학생 수준인 거죠. 게다가 예전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에도 그리 조숙한 타입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애에게는 애에게 맞는 방법이 있는 거죠."

    뭔가 설득이 될 듯 말 듯했다.

    '이 사람, 가만 보면 사짜 기질이 있어.'

    뭔가 그럴싸했다.

    "그래서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요?"

    "내일 이지혁 씨는 못 이기는 척 KSF에 합류할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승리의 미소를 짓는 최정훈을 보며 서아영은 마음을 놓았다.

    그래, 내가 잘못 믿은 게 아니었어.

    이 사람은 최정훈이다!

    이제 내일이면 이 길고 길었던 줄다리기가 끝난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상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이지혁이 어떤 인간인지.

    이지혁을 협상 대상으로 생각한 순간부터 그들의 패배는 이미 확정되어 있던 것이다.

    알아야만 할 것을 모른 대가는 더없이 거대했다.

    * * *

    "쟤가 뭐하는 거지?"

    박선덕은 의아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 시간쯤 한창 게임을 돌리며 키보드를 불나게 두들겨야 할 애가 진지한 눈으로 웹사이트를 검색하고 있었다.

    소설을 보나 싶었더니 그런 것도 아니다. 소설을 보는 자세는 한껏 몸을 젖히고 다리는 책상에 올린 채 과자를 흡입하는 걸로 정해져 있었으니까.

    "지혁아, 벌써 네 시야. 얼른 자야지."

    "응, 엄마. 이것만 보고."

    "뭘 보는 거니?"

    이지혁은 대답 없이 씨익 웃었다.

    "그냥 좀 이것저것."

    박선덕은 자식의 얼굴을 보며 불안함에 빠졌다. 뭔가 사악한 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 내일 그 사람들 만난다고 했잖니."

    "응."

    "잘할 수 있겠어?"

    "그런 애들 상대하는 데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어? 다 호군데."

    "그래도……."

    결국 박선덕은 마음에 있는 말을 꺼냈다.

    "이게 정말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

    "뭐가?"

    "꼭 그런 데서 일해야 하니? 엄마는 니가 다칠까 봐 너무 걱정이 돼."

    이지혁은 걱정스런 박선덕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오물거렸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가, 이거.

    "음, 엄마……."

    "그래."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거기 간다고 피해 볼 일은 없으니까."

    걔들이 피해를 보겠지. 게이트를 미친 듯이 끌고 갈 테니까.

    혼자서 그걸 상대하려면 잠도 잘 못 잘 텐데, 주변을 능력자들로 바리게이트 쌓아버리면 이지혁의 부담이 극도로 줄어들 것이다.

    물론 KSF 놈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나타나고 나서 좀 이상해졌다는 건 생각하겠지.'

    아니, 최정훈이면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다. 게이트와 이지혁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걸 감안하고도 이지혁을 끌어들이겠다고 판단했다면 뭔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겠지만… 뭐, 상관없다.

    '내가 놀아나게 해본 적은 있지만, 놀아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거든.'

    "왜 피해 볼 일이 없어?"

    "진짜 피해 볼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으응……."

    박선덕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됐어, 엄마. 그동안 고생했는데, 이제 호강 좀 해야지. 나도 효도도 해야 하고."

    "…엄마 고생한 적 없어."

    "아… 그랬지."

    착각했다.

    그러고 보면 멀쩡히 잘살던 울 엄마… 내가 돌아오고부터 인생이 꼬이고 있는 거 아닌가?

    아버지는 회사에서 짤리고 죽을 뻔도 하고.

    돈이야 엄청 벌어왔으니까 괜찮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스트레스가 늘어났겠지.

    살짝 죄책감을 느낀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엄마."

    "징그러우니까 손 떼."

    "응."

    3초 만에 찌그러진 이지혁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갑작스레 이사도 가야 하고, 가게도 정리해야 하는 것 같아서 엄마는 좀 어리둥절해.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내가 돈 벌 텐데 엄마가 가게를 뭐하러 해."

    "그래도 사람이 놀고먹으면 안 되는 거야."

    "엄마 집안일 하잖아."

    "그게 뭐 별거라고."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별거지.'

    혼자 밥을 해 먹거나 다른 사람 밥도 차리며 살아본 것이 몇 백 년이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귀찮고 짜증나는 일인지 이지혁은 잘 알고 있었다.

    "엄마,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만 살 수가 없는 거야. 항상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하면서 살아야지."

    오래 살아봤으니 하는 말이었다.

    "우리 아들 많이 컸네? 엄마한테 그런 말도 하고."

    많이 컸지.

    내 나이가 천 살이 넘었는데.

    정확하게 몇 살인지도 잘 모른다. 일단 천 년은 넘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기억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은 뇌가 녹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정신병에 걸렸거나.

    인간의 뇌가 천 년의 기억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잘 해결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으응, 우리 아들 믿어."

    "응, 엄마."

    박선덕은 이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런데 아까 뭘 보고 있던 거니?"

    "그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합리적이게 호구되지 않는 방법."

    "응?"

    무슨 말인가 싶어 박선덕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날 아침.

    이지혁은 간만에 옷장을 열었다.

    "으으으음……."

    옷을 좀 사야 할 것 같다. 저번에 백화점에서 쇼핑한 것 말고는 사놓은 옷이 없다 보니 입을 게 없었다.

    "나가는 길에 사야 하나?"

    "여기 있다."

    "응?"

    등 뒤에서 들려온 박선덕의 목소리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박선덕이 손에 옷을 든 채 들어오고 있었다.

    "헐… 엄마, 웬 옷이야?"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고 하니까 혹시나 몰라서 한 벌 사놨어. 보나마나 너 같이 안 갈 거니까."

    고마워요, 엄마.

    그런데…….

    제 사이즈는 어떻게 아셨죠?

    이지혁은 의혹이 가득 담긴 얼굴로 정장을 받아 들었다. 고딩 때 사놓은 정장이 있긴 했지만, 지금 다시 보니 그건 도저히 입을 것이 못 됐다.

    '내가 뭔 정신으로 저걸 입고 다녔지?'

    맛이 가도 한참 갔던 모양이다.

    이지혁은 문을 닫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왔다.

    "옷만 바꿔 입어도 사람이 달라 보이네."

    "잘생겼지?"

    "내 자식이지만 그건 좀……."

    얼굴을 와락 구긴 이지혁이 궁시렁대며 현관을 나섰다.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와."

    혼자 남겨진 박선덕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흠……."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보며 옷을 단장한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말끔한 세미 캐주얼로 옷을 입고 나니 인물이 확 사는 느낌이다.

    "내가 베라프에서도 인기 좀 있었지."

    이상한 것들만 들러붙어서 그렇지.

    사람 아닌 것들이랑 정신 나간 것들.

    이지혁은 문득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베라프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라면 서슴없이 첫손에 꼽을 만한 기억들이다. 그 미친것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이지혁이 별생각 없이 걸어가려 하다가 멈춰 서서 좌우를 살폈다.

    "아니겠지?"

    아니어야지.

    설마… 오늘도?

    에이.

    사람인데…….

    "저……."

    이지혁이 움찔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금발 머리가 수줍수줍하며 기둥 뒤에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다.

    "너, 너! 너, 왜 또 있어! 너, 왜!"

    이러지 마.

    무슨 현관에 사는 요정도 아니고!

    "이거……."

    "응?"

    이지혁이 김다솜이 내민 물건을 받아 들었다.

    '목도리?'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요."

    "으응."

    어색하게 대답한 이지혁이 물었다.

    "그런데 너 학교 안 가니?"

    "학교 쉬는데요?"

    "아, 그래?"

    하기야 난리가 났으니까.

    "그런데 왜 아침부터 여기 나와 있니……."

    "전해 드리러 왔어요. 그럼."

    김다솜이 고개를 숙여 푹 인사를 하더니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으으음……."

    이지혁이 부담 가득한 눈으로 목도리를 보다가 자기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상하다.

    이거 깔 맞춤 같은 느낌인데?

    누가 봐도 이 옷에 두르라고 있는 목도린데?

    내가 이 옷을 입을 줄 어떻게 알고?

    나도 오늘 처음 본 건데?

    "우연이겠지."

    허허.

    허허허허…….

    * * *

    서아영은 조금 초조한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30분밖에 안 지났습니다."

    "30분이나 지난 거죠."

    "어차피 그 사람이 제시간에 나올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시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일인데, 최소한의 시간은 맞춰서 나와야지!

    속이 탄 서아영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먹을 때쯤 이지혁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흠?"

    "호오?"

    매번 시퍼런 추리닝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던 꼴을 보다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걸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드디어 정상인을 만난 느낌?

    '방심하지 말자.'

    아무리 그래도 알맹이는 똑같다. 그들이 지금부터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지상 최강의 또라이였다.

    "일찍 나오셨네요."

    일찍?

    그래, 너보다 일찍 나오기는 했지.

    약속 시간 30분 전에 나와서 기다리느라 한 시간을 죽치고 있었으니까.

    "…많이는 안 늦으셨네요."

    서아영이 부글대는 속을 억누르며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동안 최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혁이 앉을 자리의 의자를 빼주었다.

    "뭐 드시겠습니까?"

    "프라프… 뭐더라? 슬러시요."

    "적당한 걸로 주문해 놓겠습니다."

    최정훈이 고개를 돌리자 대기하고 있던 요원이 쪼르르 달려와 주문을 받아갔다.

    편한데?

    새삼 권력의 유용함을 느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자신도 손짓 하나로 대륙 건너편에서 얼음을 캐 오라 시키고는 했었지.

    마법으로 얼리기 귀찮으니까.

    이지혁의 마실 것이 나오자 최정훈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오늘 이곳에 나오셨다는 것은 저희와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최정훈의 강렬한 시선이 이지혁을 압박했다.

    "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역시!"

    최정훈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낚았다!

    낚았어!

    이 지느러미만 살랑살랑 흔들어 대던 까다로운 월척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최정훈은 자꾸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여기서 크게 웃어버리면 안 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지혁 씨에게도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라 자부합니다."

    "음, 그건 좀 더 봐야 하는 거구요."

    "제가 그리 만들어 드리죠."

    "그런데……."

    이지혁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사실 저도 좀 걱정이거든요."

    "뭐가 말입니까?"

    "뭐랄까, 그런 거 있잖아요.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

    "……."

    "입대하는 신병 다룰 때, 가족들이랑 함께 있을 때는 여러분의 아드님들은 저희가 잘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방송하다가 사람들 못 보는 코너 돌자마자 쌍욕 날아오는, 그런 시추에이션?"

    "에이, 저희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전에 다른 사람들이 저분 대하는 거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은 거 같던데?"

    최정훈이 '저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분은 고개를 돌리고 최정훈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건 그냥… 음……."

    마땅히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최정훈이 다시 서아영을 노려보았다.

    서아영은 고개를 돌린 채로 음료를 추가했다.

    '일생에 도움이 안 돼.'

    그러니까 성질 좀 작작 부리라고 그만큼 이야기했는데!

    일단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사실 지금 이지혁 씨께서 오해하시는 부분도 있구요."

    "그렇겠죠. 그런데 저도 사람이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더라고요."

    "절 믿어주십시오."

    "믿음이라… 그거 참 좋죠. 그런데 사람 믿음이라는 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어서."

    경험담이다.

    믿다가 코 베인 사람이 아니라 믿다가 목이 날아간 사람을 수없이 봐왔다. 이지혁이 눈으로 본 케이스만 따져도 일렬 종대로 도시 하나는 돌릴 수 있을 거다.

    "음, 그래서요?"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마음이야 좋게 좋게 하고 싶지만, 사람 일이란게 또 안 그런 거니까. 확실한 게 좋은거죠."

    "확실한 거?"

    "그러니까… 이런 거죠."

    이지혁이 들고 온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마음이란 단어를 텍스트로 바꿔서 서로 영원히 변치 말자는 약속을 나누는, 인류의 바람직한 방식이죠."

    "네?"

    이지혁이 내민 서류를 본 최정훈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러니까… 이게?"

    "네."

    이지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근로 계약서입니다."

    "……."

    최정훈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 * *

    "근로 계약서요?"

    "네."

    "웬 근로 계약서……."

    "원래 입사할 때는 다 쓰는 거 아닌가요?"

    법으로야 그렇지.

    그런데 이걸 쓰는 경우가 얼마나 있다고!

    블랙 먼데이 이전에도 공무원조차 근로 계약서를 안 쓴다고 뉴스에 뜨고 그랬는데, 그 이후로야 뭔 말이 필요하겠는가.

    "제가 뭐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공무원이잖아요. 그렇죠? 공무원.

    그런데 공무원이신 분이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그죠?"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치고 나오면 할 말이 없긴 했다.

    "뭐, 무리한 걸 적어놓은 건 아니에요. 사실 저야 입사한다고 해도 계약직이니까요.

    비정규직의 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하는 거죠."

    비정규직의 설움?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너 때문에 지금 퇴근 못하고 주말에도 일하는 정규직이 몇인지나 알고!

    어찌 걸어 다니는 휴무 폭파범이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검토해 보시죠. 조정하면 되는 거니까요."

    능글능글 웃으면서 말하는 이지혁을 보니 이마에 핏대가 솟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은 일.

    최정훈은 한숨을 쉬고 계약서를 읽어보았다. 계약서를 읽는 내내 최정훈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 이지혁 씨."

    "예."

    "웬만하면 저도 다 받아들이고 싶지만,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네? 뭐가요?"

    "우선 이 부분. 을의 근로 시간은 1일 여덟 시간, 주 40시간을 기본으로 한다. 이 부분 말입니다만……."

    "네, 당연한 거죠."

    이지혁은 여유로웠다.

    "사실 저희가 언제 게이트가 열릴지 모르고 언제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다보니 이런 식으로 정해진 시간 근무는 할 수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서아영이 거들었다.

    "그러다 야간에 게이트가 출현하면 어떻게 해요.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지혁이 귀를 후벼 입으로 훅 불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제가 착각한 모양이네요. 세상이 이리 변했을지는 미처 몰랐어요."

    "어떤 부분이 변했다는 겁니까?"

    "아, 저는 5년 사이에 교대 근무라는 개념이 사라졌을지는 몰랐네요. 그럼 요즘은 소방서나 경찰서도 24시간씩 근무하는 모양이죠?"

    "……."

    "아이코, 내가 그걸 몰랐네. 검색해 봐야지."

    "물론 교대 근무가 있기는 하지만, 저희는 일단 최정예로 계획을 잡고 있기 때문에."

    "그건 제 알 바 아니죠."

    "……."

    "왜 입사하는 사람이 회사 사정까지 생각해 줘야 하나요? 그건 회사가 알아서 할 일이고, 저는 제 일이나 알아서 잘하면 되죠."

    "그렇습니다."

    최정훈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관행이라는 부분을 빼버리면 불법이란 이름으로 불러야 할 수많은 케이스들이 횡행하는 게 현장이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군.'

    막상 그도 3일에 한 번 퇴근할까 말까인데 남의 근무 시간 따위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럼 일단 이 부분은 넘어가더라도 토요일과 일요일을 출근하지 않겠다는 건 안 됩니다. 주말이라고 게이트가 출현하지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럼 휴무일 알아서 잡아주세요. 주 2일로요."

    "아니, 그게……."

    이지혁은 피식 웃었다.

    이것들이 사람을 우습게 보나.

    "그거 보고 벌써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예?"

    "진짜는 따로 있는데."

    이지혁이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건 기본 계약서고, 저희는 특이 케이스니까 따로 설정해야 할 부분이 많죠. 그렇죠?"

    "……."

    이지혁이 책상 위에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검토하시죠."

    최정훈의 얼굴이 암담해졌다.

    쪼오오옥.

    한 손에 스무디를 들고 밖으로 나온 이지혁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디 사람을 호구 잡으려고."

    무려 천 년 동안 계약을 했는데!

    행정 처리와 서류 작업 하며 보낸 시간만 합쳐도 오십 년은 넘는다.

    아무리 최정훈이 잘난 인간이라고 해도 짬이 다르다! 짬이!

    귀찮아서 안 한 거지, 못해서 못한 게 아니라는 말씀!

    이지혁은 머리를 싸맨 채 서류를 보고 있는 최정훈을 보며 스무디를 쪽쪽 빨았다.

    꿀맛이다!

    이게 꿀맛이지!

    애초에 조직 생활에 이지혁을 끌어들이려고 했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여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최저의 환경에서 세계의 정상까지 올라가 본 이지혁이다.

    한 왕국의 행정관으로 나라를 뒤집어놓은 적도 있다.

    KSF?

    "호구지, 호구."

    적당히 보태줄 거 보태주고, 달래줄 거 달래주다가 이용해 먹으면 그만.

    시작은 이지혁이 들어가는 거지만, 나중에는 이지혁의 손발이 되어줄 귀여운 것들이다.

    "더구나 저 여자가 대장이고 말이야."

    이런 호구 집단이 따로 있을까.

    최정훈이라면 상대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서아영이야 적당히 옆에서 뽐뿌만 좀 넣어주면 이용해 먹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이지혁이 사악하게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주 그냥, 오늘은 담배 연기도 시원하네.

    "…이거, 어떻게 해요?"

    서아영의 물음에 최정훈도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근무 시간 등은 어떻게 조절해 볼 수 있고, 나중에라도 은근슬쩍 없던 일처럼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이지혁의 집안에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을 하나하나 문서로 만들어 온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컸다.

    "이거 들어주면 어떻게 돼요?"

    "난리 나겠죠."

    "안 들어주면요?"

    "그래도 난리가 나겠죠."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지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예상도 못했다.

    다른 사람이면 그래도 이런 경우를 예상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예전에도 계약을 하겠다면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온 능력자들이 없던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이지혁이 이런 문서를 꼼꼼하게 작성해서 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이지혁인데!

    "어제 애는 애라고 하지 않았어요?"

    "……."

    "애니까! 애에게 맞는 방법이 있다며!"

    "……."

    "이 사람, 사기꾼 아냐? 솔직하게 말해봐요! 그냥 게임해서 이겨서 해결 보려다가 지니까 둘러댄 거죠?"

    "아닙니다……."

    "진짜? 진짜로?"

    마음의 땀이 흐른다.

    최정훈은 눈가를 문지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 인생…….

    어제와 오늘이 다르구나.

    "일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이걸 해결을 해야죠!"

    "말 돌리지 마시죠."

    아, 이거 안 통하네.

    입맛을 다신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말을 돌리는 게 아니라……."

    "아니, 나는 모르겠으니까! 최정훈 씨가 다 알아서 해요. 나 이번에 이지혁 씨한테 줄 돈 마련한다고 위에서 얼마나 깨졌는 줄 알아요? 이번 일로 줘야 할 돈은 아직 얘기도 못 꺼냈어요. 그런데 이런 거까지 가져가면 저 진짜 박살 나거든요?"

    '저는 지금 박살 나고 있습니다만.'

    뭔가 말을 하려던 최정훈이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결론을 굳혔다.

    "결론 났나요?"

    "이지혁 씨."

    "말씀하세요."

    최정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희 입장에서는 이 계약서를 작성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조건적인 부분은 그렇다 쳐도 이런 문서를 작성해서 남긴다는 건 저희 입장에선 큰 무리수입니다. 나중에 공개라도 되면 자금 문제와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될 수 있으면 요구하신 조건들은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믿으시고……."

    이지혁이 주섬주섬 서류를 챙겼다.

    "이지혁 씨?"

    "얘기 끝났으면 가봐도 되나요?"

    "예? 어딜 가십니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장 못 찍으면 얘기 끝난 거죠. 파토 난 거니까 이제 안 찾아오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아니요! 이지혁 씨, 잠시만요!"

    "또 할 말이 남으셨나? 저는 할 말 다 했는데요. 서로 피차 쉬어야 하는 일요일에 자꾸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넌 어차피 매일 놀잖아!'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며 최정훈은 이지혁을 잡았다.

    "이야기를 해보죠, 이야기를! 서류에 도장 못 찍는다고 결렬이라는 건 너무 성급한 이야기니까요."

    "성급할 거 없어 보이는데……."

    이지혁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뭘 어쩌시려고요? 말씀해 보세요."

    "……."

    막상 잡아놓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이지혁에게 내밀 수 있는 당근이 없다.

    내밀 수 있는 건 없는데 얻어내야 할 것이 있으니, 굽히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언제 이런 입장에 처해본 적이 있던가.

    최정훈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을 풀었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

    "이지혁 씨."

    "예."

    "결국은 합류하실 거죠?"

    "조건만 맞으면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죠."

    "네?"

    최정훈이 돌직구를 던졌다.

    "진짜로 원하시는 게 뭡니까? 말씀해 주세요."

    "흠?"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남자,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에 태어났더라도 최정상 권력층까지 갈 사람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런 세상이기에 더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개인 능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세상이니까.

    "진짜로 원하는 것이라……."

    이지혁의 눈이 한곳으로 향했다.

    "…네?"

    이지혁의 시선을 받은 서아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도 이지혁의 뜨거운 시선이 계속 이어지자 서아영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정신 나갔나 봐.'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데.

    아무리 또라이라도 상황은 파악하고 들이대야지.

    서아영이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다시 고개를 들어 이지혁의 시선을 받았다.

    미인계든 뭐든 좋다. 일단 저 인간을 끌어들일 수 있으면!

    "저……."

    "네, 말씀하세요."

    서아영의 목소리에 콧소리가 섞였다.

    최정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둘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진지하게 말한다.

    "저… 아줌마가 저를 구박하고, 짜증내고, 화내고, 부려먹지 않는다면!"

    "누가 아줌마야, 이 새끼야!"

    "저 봐, 저! 아니, 최정훈 씨 같으면 저런 아줌마 밑에서 일하고 싶겠어요?"

    "공감합니다."

    "뭘 또 공감이야! 당신은 누구 편인데!"

    "지금만은 이지혁 씨의 편이죠!"

    드디어 최정훈의 울분이 폭발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 자꾸 팀장님이 성질을 부리니까 될 일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시집도 못 가는 거지!"

    "내가 안 가는 거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한껏 비꼼이 담긴 목소리에 서아영의 라이트가 최정훈의 옆구리로 틀어박혔다.

    "끅!"

    뼛속까지 전해져 오는 타격감에 최정훈이 정신을 차렸다.

    "여하튼 저 아줌마가 저를 소중하게 대해준다고 약속하면 합류할게요."

    "그 정도야!"

    최정훈이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왜요?"

    "빨리 약속드려요!"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걸 약속해요!"

    "그럼 약속 안 하고 파토 내든가!"

    서아영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생각하니 이상하네! 제가 언제 이지혁 씨를 함부로 대했나요?"

    "자각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더니, 양심도 없지."

    최정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서아영은 한숨을 푹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예.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됐죠?"

    "진정성이 없는데?"

    "영혼도 없고."

    아니, 근데 이 인간이 자꾸?

    서아영이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최정훈이 찔끔하여 고개를 돌렸다.

    몇 번 심호흡을 해 마음을 진정시킨 서아영이 다시 이지혁을 보고 똑똑히 말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이지혁 씨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이지혁 씨가 착각하고 계신 게,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이지혁 씨 비위를 거스를 깜냥이 없어요. 사실 당신… 좀 무섭거든요."

    "제가요?"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당신과 같이 일을 하려는 이유도 당신이 필요해서라기보다 당신이 폭주할까 무서워서예요. 그러니 이지혁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만들 새로운 조직에 합류해 주세요. 그게 인류를 위한 길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그런 거 난 모르겠고,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죠."

    "약속드립니다."

    "그럼 합류하겠습니다."

    최정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환영해요!"

    이지혁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예?"

    이지혁이 다시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 계약서는 없던 걸로 하고,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간략형 문서로 민감한 부분을 배제한 걸 따로 만들어 왔으니 여기에 사인하시죠."

    최정훈이 책상 위의 서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악마 같은 새끼…….

    여하튼.

    길고 긴 협상 끝에 이지혁은 드디어 KSF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안타깝게도 훗날 최정훈은 이날 협상이 파토 나지 않은 것을 평생 동안 후회했다.

    * * *

    입사는 결정되었지만 이지혁은 할 게 없었다. 서아영이 창설하는 새 기구가 출범되어야 출근하기로 이야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지혁은 하릴없는 나날들을 느긋하게 즐겨야… 했었지만…….

    "이거도 싸자."

    "엄마아아아."

    이지혁은 어머니를 만류했다.

    새로운 거주 구역으로 이사가 결정 났기에 박선덕은 이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예원이는 등교하고 아버지도 새 직장 문제로 바쁘시기에 이지혁이 부림당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문제는 어머니에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마, 우리 포장 이사 불렀잖아!"

    왜 포장 이사를 불러놓고 짐을 직접 다 싸는가.

    외식 가서 요리를 시켜놓고 주방으로 쳐들어가 직접 음식을 해서 나오는 것이랑 뭐가 다른가!

    이 끝없는 불합리에 이지혁은 절망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믿어!"

    그럼 포장 이사를 부르지 말아야지.

    왜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럴 거면 용달차나 부를 것이지.

    이지혁은 불합리에 저항했지만, 점령군의 폭압은 무지막지했다.

    "자꾸 궁시렁거릴래? 컴퓨터 가져가기 싫은가 보지?"

    "제가 포장만 백 년은 했습니다. 또 뭘 싸면 됩니까?"

    "백 년은 무슨."

    자신을 무시하는 어머니를 보며 이지혁은 오기가 발동했다.

    백 년만 했을까 봐.

    포장이 따로 있나, 옮기기 좋게 싸면 그게 포장이지. 야영과 이동을 반복하는 군대에서 영혼이 썩다 못해 승천할 지경으로 살았던 이지혁이다.

    이까짓 짐 따위!

    '그런데 너무 힘들다.'

    생각해 보니 손가락으로 시켜 먹기만 했지, 직접 싼 적은 많지 않구나.

    아, 내가 잉여 인간이었다니.

    "엄마, 이거도 싸야 해?"

    "넌 그저 모든 것을 싸면 된다. 생각은 내가 할 테니까."

    "…넹."

    철저하게 부림당하던 이지혁에게 구세주가 강림했다.

    딩동!

    "누구 왔어! 누가 왔다고!"

    "이 시간에 누구지?"

    주로 밤이 되어야 쳐들어오는 KSF 사람들은 아닐 거고. 지금 시간이 오후니까.

    "인터폰 받아봐라."

    "넹."

    이지혁은 사뿐사뿐 뛰어 인터폰을 들었다.

    "누구세요?"

    - 이지혁 씨 집 맞습니까?

    "안 사요."

    뚝.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이지혁은 인터폰을 끊었다.

    "뭔 대낮부터 잡상인이야?"

    딩동!

    이지혁이 과격하게 인터폰을 들었다.

    "아! 안 산다니까!"

    - 그게 아닙니다! 이지혁 씨! 이지혁 씨! 접니다, 정인수.

    "넹?"

    이지혁이 화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군인 아저씨?"

    - 예! 접니다.

    "안 사요."

    -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인사?"

    - 저번 일로……. 그런데 저 들어가면 안 됩니까?

    "으음……."

    이지혁은 인터폰을 끄고 문을 열었다.

    사복 차림의 정인수가 손에 뭔가를 잔뜩 든 채 그곳에 서 있었다.

    "와! 아저씨, 사복 입으니까 인물이 사네요."

    "저는 군복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젊어 보여요."

    "감사합니다."

    정인수는 빙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시니?"

    박선덕이 경계 어린 눈초리로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이지혁을 찾아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뭔가를 바라다 보니 영 껄끄럽다.

    "군인 아저씨야."

    "군인?"

    박선덕의 목소리가 쌀쌀맞다.

    "약소하지만 이것……."

    정인수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뭐죠?"

    "한우입니다. 뭘 사 올까 하다가 무난한 것 같아서……."

    "어머! 뭐 이런 걸 다. 목마르지 않으세요? 이리로 앉으세요. 지혁아, 손님 음료수 좀 내오거라."

    "엄마, 너무 속 보여."

    "호호호,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등을 살짝살짝 두드리는 손길에 살기가 묻어났다.

    '우리 엄마가 드디어 촌경까지 익혔구나.'

    이지혁은 툭툭, 치는 손길에서 묵직한 파워를 느끼며 두말없이 냉장고로 가 음료를 꺼내 왔다.

    "괜찮습니다. 뭐 이런 것까지……."

    "손님이시니까요."

    이지혁은 음료를 내려놓고 정인수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저 군대 안 가도 되는데?"

    "역시 미필이셨군요.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저번에 있던 일을 감사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번?"

    "이 앞에서 게이트가 열렸을 때 말입니다."

    "아, 그때요. 그런데……."

    내가 감사 받을 일을 했었나?

    고개를 갸웃하는 이지혁이었다.

    "그때 저희 앞을 막아주신 덕분에 제 부하들이 하나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정인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러실 거 없는데……."

    "은혜가 너무 커서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약소한 선물로 해결할 생각은 아닙니다.

    갚을 길은 지난하겠지만, 어떻게든 이지혁 씨에게 보답할 날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에이……."

    이지혁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이래야지.'

    꼴랑 그거 도와줬다고 저렇게 공손히 인사하는 거 봐라. 사람이 되어 있다는 거다.

    그에 비하면 KSF 인간들은 양심에 털이라도 난 게 틀림없다. 그동안 자신이 해준 게 얼만데 부려 먹을 길만 찾고 있질 않은가.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꿔서 입대할까?'

    생각해 보면 복지고 뭐고 KSF보다는 정인수 밑에서 일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사람이 기본도 되어 있고 말이지.

    "사실……."

    정인수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의외였습니다."

    "넹? 뭐가요?"

    "그런 상황에서 방위사, 그러니까 일반인을 돕겠다고 나서는 능력자들은 없거든요.

    자기끼리 뭉치기 마련이죠."

    "…지들은 힘이 있잖아요. 알아서 싸우면 되죠."

    "힘이 있는 쪽에 있어야 생존 확률이 올라가니까요. 그래서 그런 사태가 터지면 능력자는 몰라도 저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 마련인데, 이지혁 씨 덕분에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애들도 KSF를 다시 봤다고 하더군요."

    "저 거기 소속 아닌데요. 계약직이에요."

    "역시 그러셨군요. 거기 소속이면 저희를 도울 리가 없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생각보다 골이 깊은 거 같은데?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베라프에서는 수천 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서 능력자와 일반인 사이의 경계가 완성되었고 규칙이 생겼다.

    하지만 이 세계는 능력자가 출현하기 시작한 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을 감안하면 두 계층 사이에 당장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지금처럼 사이좋게 협력하여 몬스터를 잡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다.

    "그럼 이지혁 씨께서는 KSF와는 관련이 없으신 겁니까?"

    "예. 근데 곧 들어가기로 했어요."

    "그러시군요."

    정인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쉽기는 하지만 일단 능력자로 분류된 이상 방위사는 이지혁의 신병을 요구할 권한이 없었다. 혹여 방위사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이지혁의 관리는 정인수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별 전담반이라도 생겨야 할 테니까.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앞으로도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자주 보지 않겠어요?"

    "KSF에 들어가신다면 저희와 얽힐 일은 많겠지만, 지금 같은 관계는 쉽지 않을 겁니다.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래도 조직이란 게……."

    "원래 조직이란 건 사람이 모여서 만든 거예요. 조직을 사람이 신경 쓸 게 아니라 사람을 조직이 신경 써야죠."

    정인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으니까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말이다 싶다가도 뭔가 깊은 통찰이 느껴지는 것 같다.

    신기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오셨어요?"

    "일단 뭐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아직 소속이 없으시면 같이 일해보자는 말도 하고 싶었는데, 제가 좀 늦은 거 같네요."

    "어? 능력자는 입대 안 하는 거 아니었어요?"

    "입대했다가 발현하는 케이스도 있으니까요. 저희 쪽도 나름 능력자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편입니다. KSF보다 소속 능력자 수는 적지만 실전 투입이 완성되어 가는 단계죠."

    "군대 갔다가 발현한다고요?"

    하기야 그런 케이스도 있겠구나.

    "예. 그렇게 부대로 징집해서 훈련 중입니다. 준비 기간만 이 년이 넘었죠."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 년?"

    "예?"

    "전역은?"

    정인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국가가 긴급사태지 않습니까."

    이지혁이 얼굴을 감쌌다.

    군대 간 것도 억울한데 능력이 발현돼서 전역도 못하고 굴려진다니.

    세상에, 이게 무슨 막장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인권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정식으로 임관하는 겁니다, 정식으로요."

    "임관 안 할 방법도 있나요?"

    "그런 케이스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악마."

    "어차피 전역해도 KSF에 끌려가는 건 똑같은데, 그럴 바에 차라리 교범대로 교육 받을 수 있는 군에 있는 게 낫죠. 생존률을 생각한다 하더라도요."

    틀린 말은 아닌데…….

    "여하튼 할 말은 그게 전부시죠?"

    "으음……."

    정인수가 신경 쓰인다는 눈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어요."

    "믿으시면 안 될 텐데."

    "진짜 아무도 없어요."

    정인수는 이지혁의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와 그의 능력을 가늠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믿어야죠. 다름이 아니라 KSF에 들어가게 되시면 말입니다……."

    "네."

    정인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석훈이라는 사람을 주의하십시오."

    "박석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일어나 봐야겠네요."

    "아, 예."

    이지혁은 할 말만 남기고 일어나는 정인수를 배웅했다.

    "이지혁 씨, 다시 한 번 감사드리겠습니다."

    "아저씨 참……."

    이지혁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항상 피와 죽음을 접하는 군인이 저렇게 다른 이에게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거다.

    오랜 기간 전장에서 살아본 이지혁은 그런 정인수의 섬세함이 기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했다.

    저 사람은 아마 남들과는 다른 지옥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저런 성격의 사람은 버티고 버티다 마지막에는 무너지게 된다.

    부하 하나하나를 너무 아끼는 사람은 그 상실감을 이겨내지를 못하니까.

    "아저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예?"

    "아저씨 잘못이 아니에요."

    "……."

    정인수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미미하게 떨리는 어깨가 이지혁의 눈에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다른 말 없이 그 말만을 남긴 정인수가 그 자리에서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뭐하는 사람이니?"

    박선덕이 물어왔다.

    "방위사 대령."

    "그럼 엄청 높은 사람 아니야?"

    "높은 사람이지."

    그만큼 많은 것을 버텨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지금의 세상은 뭔가 좀 이상하다.

    몬스터와 능력자가 출현하고 있는데 사회는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뭐가?"

    "아냐, 엄마."

    이지혁의 눈에 세상을 가른 거대한 균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 균열은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 세상을 천천히 집어삼킬 것이다.

    "배고프다. 엄마, 밥 줘."

    "넌 어떻게 된 애가 세 시간마다 배가 고프냐?"

    "그런 걸 어떻게."

    "기다려. 차려 줄게."

    "응."

    어쩌면 이 평범한 일상도 얼마 남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이지혁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여유를 최대한 즐기기로 했다.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할 시기가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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