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1화 (11/118)
  • [■] 중졸도 거기 취직할 수 있는 건가요? [■]

    ─────

    우우우웅.

    게이트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날카로운 눈으로 게이트들을 노려보았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제 이유나 원인을 따질 상황을 넘어섰다.

    그가 가는 곳마다 게이트가 열리고, 이젠 십여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생성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설마 설마 하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겠지······.

    게이트 생성 단계에서 취소가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신성급의 의지가 개입된 게이트를 취소한다는 것은 이지혁으로서도 무리였다.

    최상의 상태라면 막대한 마나를 활용하여 공간 자체를 무로 되돌려 버리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건 베라프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여기서는 그 막대한 마나를 얻을 곳이 없었다.

    그럼 이 상황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건데······.

    저 게이트가 빨갛게 익기(?) 전까진 할 수 있는 게 없다.

    "끄응."

    이지혁은 게이트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향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혀를 찼다.

    "이제 그만 봐도 될 거 같은데······."

    왠지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기분이다.

    망할 놈의 KSF.

    "엄마, 나왔어!"

    도어 록을 해제한 다음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리모콘이 날아온다.

    "훗."

    이지혁은 자연스레 리모콘을 받아 들었다.

    이제 이 정도야 껌이지. 나를 얕보지 말라고!

    "이놈의 자식이 외박을 해!"

    "내 나이가 몇인데! 외박 좀 할 수도 있지!"

    "또 그러다가 5년씩 안 들어오려고!"

    "에이, 설마······."

    이지혁은 걱정과 화가 반쯤 섞인 얼굴로 그를 나무라는 박선덕 여사의 팔을 잡고 소파로 끌고 갔다.

    "엄마, 엄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응?"

    "이거 봐, 이거!"

    "왜 그러는데?"

    이지혁이 휴대폰을 꺼내 들어 화면을 가리키자 박선덕은 의아해하면서도 휴대폰을 보았다.

    그러자 이지혁의 계좌 정보가 보였다.

    "이게 뭐니?"

    "돈이지, 돈!"

    "돈이라고?"

    그럼 이게 몇 자리냐.

    하나, 둘, 셋······.

    박선덕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시, 십사억?"

    이지혁의 팔을 잡은 박선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지혁은 박선덕의 반응을 보며 씨익 웃었다.

    "놀리는 거지? 장난이 너무 심하다, 너."

    "아냐, 엄마. 이거 봐. 엄마가 깔아준 계좌 어플이잖아. 진짜라니까."

    "···진짜네."

    몇 번이고 어플을 확인하는 박선덕을 보며 이지혁이 어깨를 폈다.

    "엄마, 내가 이 정도야."

    "지혁아!"

    "응, 엄마! 자, 칭찬해 줘!"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응?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되나?

    "그냥 돈 벌어온 건데."

    "대체 뭔 일을 하면 하루 만에 돈이 이만큼이 꽂혀! 너 뭐했어! 솔직하게 말해! 너 나쁜 짓 했니?"

    이게 아닌데······.

    "아냐. 나쁜 짓 안 했어."

    "그럼 어디서 났어! 솔직하게 말 안 해?"

    어머니의 눈에 의구심과 의심이 잔뜩 어려 있었다.

    이상하다.

    뭔가 취조 받는 분위긴데?

    뭔가 범죄자 취급 받는 것도 같고······.

    이지혁은 빨리 이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몬스터 잡고 받았는데?"

    어머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뭐?"

    목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이지혁은 불안함을 느끼면서 엄마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나쁜 짓 한 게 아니고 그냥 몬스터 좀 때려잡고 받은 돈이야. 진짜야, 엄마!"

    "몬스터를 때려잡아?"

    눈에 불이 들어온 박선덕 여사가 이지혁에게 달려들어 등짝을 후려쳤다.

    쫘악!

    "꺼윽!"

    범고래한테 맞았을 때보다 더 아프다!

    이것이 사랑의 힘인가!

    "몬스터를 잡아? 몬스터를? 얘가 미쳤어!"

    "엄마, 왜!"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엄마가 너보고 돈 벌어오라 그랬어? 어디 목숨을 함부로 내다 굴려!"

    "그게 아니고······."

    "시끄러워!"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등짝에 불이 나고서야 이지혁은 어머니의 분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똑바로 앉아."

    "네."

    무릎을 꿇고 앉은 이지혁이 잔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치면 누가 책임져!"

    "죄송합니다."

    "엄마가 너 다쳐서 벌어온 돈 받으면 좋아할 것 같아? 넌 엄마가 그렇게밖에 안 보여?"

    "아니요."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왜!"

    "아니······."

    뭔가 항변하려던 이지혁은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고는 입을 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지금은 반항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다시는 이러지 마! 알았지?"

    "응, 엄마."

    "그래, 우리 아들."

    박선덕이 이지혁을 꽉 끌어안았다.

    '어, 이거 뭐지?'

    이지혁은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 오는 것을 느끼며 어색해 했다.

    이상한 감정인데, 이거······.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응, 엄마. 봐봐, 말짱해."

    "그래, 그럼 다행이고······."

    병원에 다녀왔다는 건 말하면 안 되겠지?

    등짝에 불나는 건 괜찮은데, 왠지 말하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응?"

    "으응······."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이런 신파 분위기를 원한 게 아니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한 게 뭔가 뿌듯하기는 하지만, 태생적으로 이런 건 맞지가 않다.

    "엄마, 엄마! 어쨌든 그건 됐고! 봐봐, 돈이 이만큼 있어!"

    이지혁이 해맑게 웃으며 다시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휴, 엄마는 실감이 잘 안 난다. 이게 대체 얼마니?"

    "이것만 있으면 이제 우리 아버지 감옥 안 가도 되는 거지?"

    "으음······."

    어머니.

    왜 고민하시는 겁니까······.

    아니, 거기서 고민을 하시면 안 되지요.

    흑, 불쌍한 우리 아버지.

    "그건 일단 접어두고··· 너, 정말 이거 몬스터 잡아서 벌어온 돈 맞아?"

    "그렇다니까."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래."

    "호구 좀 족쳤어."

    "호구?"

    "있어, KSF라고."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KSF?

    그거 능관부 아닌가?

    능관부가 호구라고?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박선덕은 떨떠름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내 배로 낳은 자식이지만, 가끔 보고 있다 보면 정말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허풍인가 싶다가도 KSF 사람들이 와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사정하는 걸로 봐서는 허풍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몬스터 잡았다고 돈을 이렇게 많이 줘?"

    "원래 더 받아야 하는데, 깎아준 거야."

    이지혁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칭찬해 달라고 하는 것 같다.

    박선덕은 떨떠름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칭찬을 해줘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저 표정을 보고 있자니 칭찬해 주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14억이라니.

    14억.

    그래, 14억이지?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뻗어진 손이 이지혁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런데 왜 움찔하는 거지?

    이노무 시키가?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도 움찔움찔 떠는 자식 놈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엄마, 근데······."

    "응?"

    "먹고 싶은 건 나중에 먹어야 할 거 같아."

    "왜?"

    "지금 밖에 게이트가 쫙 깔렸어."

    "으으응?"

    "우리 도망가야 돼."

    이지혁이 해맑게 웃었다.

    어머니도 해맑게 마주 웃으며 소리쳤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이 꼴통아!"

    돈을 벌어온다고 딱히 대접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집 안이 난리가 났다.

    어머니가 짐을 싼다고 다급하게 이곳저곳을 누비는 동안 바깥도 점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하기야 게이트가 하나도 아니고, 무려 열 개 가까이 눈으로 보이는 상황인데 누가 진정할 수 있을까.

    주변의 모든 집에 불이 켜지고, 골목 바깥은 경찰 사이렌과 군용 장갑차들의 소음으로 시끌벅적했다.

    "대피소가 어디지? 이런 경우에 어디로 가야 하더라?"

    어머니가 휴대폰으로 대피소를 검색했다.

    "엄마, 그럼 나 학교 안 가도 돼?"

    이예원의 물음에 어머니가 한숨을 푹푹 내쉰다.

    "철 좀 들어라, 철 좀. 너는 애가 정신머리가 있니, 없니?"

    "그냥 물어본 건데······."

    "짐이나 싸!"

    딩동.

    그때, 벨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어머니가 인터폰을 들고 방문자를 확인했다.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어머니. 또 뵙네요. KSF의 서아영입니다. 저번에 인사드렸었죠?

    "아, 그때 그 아가씨."

    박선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내가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 비상사태라 각 가정을 방문해서 대피 권고를 드려야 해요.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흠······."

    박선덕이 떨떠름한 얼굴로 인터컴 속 서아영을 바라보다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서아영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박선덕에게 인사를 했다.

    "또 뵈어요, 어머님."

    "···들어오세요."

    박선덕의 눈치를 살짝 살핀 서아영이 이지혁을 보며 미소 지었다.

    "또 뵙네요."

    "그만 좀 보죠, 그만 좀."

    쟤는 왜 항상 저리 삐딱할까?

    서아영은 이지혁을 최대한 무시하며 박선덕을 따라가 자리에 앉았다.

    "지혁아, 음료수 좀 내와라."

    "그냥 대충 이야기하고 보내면 되지, 음료수는 뭐하러."

    "혼날래?"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시무룩해져 음료수를 가지러 가는 이지혁을 보며 서아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세계를 뒤집어놓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마마보이인데.

    그러고 보면 쟤도 참 캐릭터가 독특해.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예. 다름이 아니라··· 대피령이 내려졌어요. 다섯 시간 내에 모두 대피하셔야 해요.

    알고 계시죠?"

    "네, 알아요. 그 말 하러 오신 거예요?"

    "이 지역은 이런 경우 16쉘터로 대피하는 게 매뉴얼이긴 한데, 다른 곳을 안내해 드리려고요."

    "다른 곳요?"

    "네. 이번에 정부에서 새로 만들고 있는 곳입니다. 우선은 정부 소속 능력자들의 가족분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조성하고 있는 곳이죠. 편의 시설이 좋고 안전한 곳이라 지내시기 괜찮을 거예요."

    "왜 저희를 거기에 넣어주시는 거죠?"

    서아영은 당연하다는 듯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아드님 때문이죠."

    "우리 아들은 그쪽 소속도 아니잖아요."

    "예. 하지만 저희가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이렇게나마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아니, 저번에도 말했듯이······."

    "엄마, 잠깐만."

    "으응?"

    이지혁이 박선덕의 말을 끊었다.

    살짝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이지혁이 물었다.

    "거기, 진짜 안전해요?"

    "물론이죠. 가장 많은 능력자들이 상주하는 곳이니까요."

    "그깟 얼치기들이 많아봤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지혁이 게이트를 끌어들인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이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들의 안전이다.

    사태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다 보니 가족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이지혁의 활동에 제약이 걸린다.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는."

    안타깝지만 지금과 같은 놀자판은 이제 끝났다는 것을 이지혁도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얼마나 편히 움직일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쪽으로 가죠."

    "지혁아!"

    "음··· 엄마, 일단은 안전한 게 제일이야. 안전해야 돈이라도 쓰고 편히 살 수 있잖아."

    "난 반대다."

    "엄마."

    "내가 자식 팔아서 나만 안전하게 살고 싶을 리가 있겠어?"

    "······."

    "절대 안 돼! 꿈도 꾸지 마!"

    방에서 튀어나온 이예원도 소리를 질렀다.

    "나도 싫어!"

    "지지배야, 너는 또 왜!"

    "그럼 이사 갈 거 아냐! 나 전학 가기 싫다니까!"

    "어휴."

    이지혁이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서아영을 보았지만, 그녀도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무능하기는!'

    이런 일 하나 해결 못하면서 어떻게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그때!

    벨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해하며 문을 연 이지혁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커다란 키.

    몸에 살짝 달라붙는 패셔너블한 정장.

    그리고 댄디한 마스크.

    후광이라도 비추는 듯한 느낌과 함께 최정훈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지혁은 구세주라도 본 것마냥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KSF의 최정훈입니다."

    "아, 예. 어서 오세요. 이쪽, 이쪽으로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박선덕의 눈이 뭔가 몽롱하다.

    이지혁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럴 수가!

    서아영이 왔을 때와 대접이 너무 다르잖아!

    엄마, 이러기야!

    사람이 좀 잘생길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지!

    아들내미도 저런 눈으로 보지는 않았잖아!

    "KSF 소속이시라구요?"

    "예, 어머님. 부족하나마 KSF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나랏일하신다고 얼마나 고충이 많으세요."

    이지혁의 얼굴이 꿈틀꿈틀했다.

    서아영은 나랏일 안 하고 집안일 하나!

    이래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하는 거구나.

    이지혁도 잘생겼더라면 게임한다고 구박 받는 게 아니라 엄마가 스킨을 사 줬을지도 모른다!

    지금 기세 같아서는 아주 풀 템을 맞춰줄 기세네!

    난 왜 오징어로 태어났는가!

    "일단 KSF에서 지원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팀장님보다는 저와 이야기하시는 쪽이 빠를 겁니다."

    "아······."

    "우선 저희가 마련한 대피처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박선덕이 홀린 듯이 최정훈이 내민 팜플렛을 보며 설명에 빠져들었다.

    저 양반, 왜 이 일 하지?

    보험이나 다단계하면 떼돈을 벌겠는데?

    재능 낭비야, 재능 낭비!

    한참 동안 최정훈의 설명을 들은 어머니가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정말 좋아요."

    최정훈이 환히 웃었다.

    "예, 어머님. 최상의 선택이 되실 겁니다."

    "하지만요······."

    "예."

    "그래도 안 되겠어요. 나는 아들내미를 위험한 곳에서 일하게 할 수는 없어요."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님을 생각하시는 그 마음을 저희가 감히 짐작할 수는 없지요.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다만······."

    최정훈은 슬쩍 이지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이곳에 계속 계시는 것이 이지혁 씨에게 부담이 갈 수도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런 셀터가 괜히 따로 조성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능력자 가족분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야 이지혁 씨가 능력자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런 것을 겪지 않으셨을 테지만, 앞으로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나면 상황이 달라지실 겁니다."

    "능력자 아니라니까."

    최정훈은 이지혁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지혁 씨가 일을 하기 위해서도 가족들이 가장 안전한 곳에서 보호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망설이는 박선덕을 보며 최정훈이 쐐기를 박았다.

    "어머니, 지금 집안에 우환이 많으신 걸로 압니다."

    "예?"

    "아버님께서 오랜 기간 에너지 회사에서 근무하셨더군요. 한국 에너지 관리 공단이면 새로 옮겨갈 직장으로 괜찮은 곳이 아닐까 합니다."

    "에너지 관리 공단······."

    더구나 한국.

    공기업!

    박선덕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물론 이지혁 씨가 능력이 있으니 금전적인 부분이야 별문제가 없겠지만, 아직 아버님이 왕성하신 나이인데 사회적으로 봐도 좋은 직장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게다가 이곳이 학군도 괜찮습니다. 따님께서도 슬슬 입시를 준비해야 할 나이가 아닙니까."

    "제 딸이 워낙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서."

    지 오빠 닮아······.

    박선덕은 무심코 뒤에 붙을 만한 말을 자제했다.

    "사람은 환경이 달라지면 바뀌는 법이지요. 공부는 환경이 가장 중요합니다."

    서아영이 추임새를 넣었다.

    "행정고시 수석 합격자세요."

    "아··· 그래서 잘 아시는구나."

    박선덕이 이제는 거의 선망의 시선으로 최정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최정훈이 박선덕을 보며 씨익 웃었다.

    치아에서 광이 나는 것 같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부들부들댔다.

    뭔가 남자로서 자존심 상한다.

    저 인간은 게임 말고는 못하는 게 없네.

    "어머님, 그리고 무엇보다······."

    최정훈의 눈이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아드님도 이제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할 나이가 아닙니까?"

    박선덕이 찌푸린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와, 시선 달라진 거 봐.

    저게 아들을 보는 눈이라니!

    누가 보면 아들 바뀐 줄 알겠네.

    "위험한 일이라는 인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인식일 뿐입니다.

    실제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은 KSF가 아니라 방위사일 뿐, KSF 소속의 사망자 비율은 일반 회사의 사망자 비율보다 낮습니다. 여기 관련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뭔가 알지도 못할 숫자들이 마구 나열되어 있는 서류 더미를 보며 박선덕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알아듣는 척해야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박선덕은 손으로 얼굴을 훑으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정할 수는 없네요. 바깥양반과 상의도 해 봐야 하고, 우선 저희 딸이 워낙 싫어하는데다······."

    "엄마, 난 괜찮아."

    박선덕이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이예원을 바라보았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이예원이 보인다.

    다소곳?

    이게 무슨 고양이가 수영하는 소린가.

    이예원과 다소곳이란 말이 매치가 되는 말이었나?

    '저게 미쳤나?'

    이지혁도 기겁한 얼굴로 이예원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더니, 불치병이라도 걸렸나?

    "학군도 괜찮다고 하니까, 나도 공부해 보려고."

    "네···가?"

    사자가 풀 뜯어먹고 산다는 게 현실성이 있지, 이예원이 공부를 한다고?

    박선덕은 자신도 모르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기야 아직 해가 뜰 시간이 아니니 서쪽에서 뜨는지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일 아침에는 분명히 서쪽에서 뜨겠지.

    "아니, 너는······."

    뭔가 말을 하려던 박선덕이 입을 다물었다.

    이예원의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

    최정훈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다.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한 박선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죄인이지.'

    자식이 하나만 엇나가면 애 잘못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식들이 줄줄이 나사가 풀린 건 부모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박선덕은 책임을 통감했다.

    "엄마, 나 공부 해보고 싶어! 저기로 가자."

    "일단 너는 그냥 조용히 있어."

    "엄마!"

    "확!"

    박선덕이 눈을 부라리자 이예원은 앙칼지게 뭔가 반발하려 하다가 최정훈의 눈을 의식하고는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입을 다물었다.

    그 가증스러운 광경을 본 이지혁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지만, 금세 핏발 선 이예원의 눈빛 공격 앞에 진압되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 꼴을 더 보고 있다가는 화병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우리 대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제까지 이렇게 죽칠 건데?"

    서아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직 시간이 있어요."

    "당신들, 저번부터 좀 너무 널널한 거 아니에요?"

    "모르시나 본데, 게이트란 게 생성되었다고 바로 열리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대게이트 방진은 우리보다는 방위사가 전문가예요. 어설프게 끼어서 지휘하려다 충돌하느니, 방진이 완성될 때까지는 책임자는 피해주는 것도 방법이거든요?"

    "사회생활이죠."

    아주 죽이 착착 맞는구나.

    이지혁이 혀를 차는 동안 최정훈이 다시 박선덕을 설득했다.

    박선덕은 이미 거의 넘어간 모양새였다.

    이제는 현실적으로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KSF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설득으로 상황이 진전되자 뭔가 배알이 꼴린다.

    "다 좋은데······."

    박선덕이 입을 열었다.

    "우리 애를··· 그러니까, KSF에 취직시키겠다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KSF는 공무원 아니에요?"

    "물론입니다. 연금도 빵빵하죠."

    "그런데 내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요."

    "예, 어머님."

    "중졸도 거기 취직할 수 있는 건가요?"

    "······."

    예상 못한 난제에 최정훈이 난감한 얼굴로 서아영을 돌아보았다.

    "글쎄요······."

    답이 영 시원치 않다.

    도가윤의 임무는 언제나 간단하다.

    이지혁의 감시.

    하지만 이지혁에게 너무 많이 다가가는 것이 그를 자극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도가윤의 감시처는 최근 이지혁의 아파트 1층 현관 앞으로 고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모습을 숨기고 시간을 떼우면 되는 일이라 딱히 어려울 것은 없었다. 지루하다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그런데 최근 도가윤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생겼다.

    '쟤는 뭐지?'

    아까부터, 그전부터, 정확하게 말하자면 며칠 전부터 계속 그녀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었다.

    저기 현관 너머 수풀 쪽에 앉아 있는 아이.

    그 여자라고 지칭하기에는 나이가 어리고, 그 소녀라고 하기에는 뭔가 성숙한. 성인과 아이의 경계에 서 있는 듯 미묘한 여학생.

    '김다솜이라고 했었나?'

    분명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이지혁의 주변에 다가오는 인물들은 모조리 조사하고 있으니 틀릴 리 없다.

    분명 얼마전에 이지혁에게 쿠키를 주었던 아이다.

    아마 이지혁 동생의 반 친구라고 했었나?

    한데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저 아이가 그날 이후로도 계속 저 현관을 집이라도 되는 양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남의 눈에 띄지 않은 채.

    '굉장한 재능.'

    분명 능력자는 아닌데, 아까부터 현관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김다솜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기술이랄 게 없는 일반인인데도 사람들의 시야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사각에 파고드는 능력이 천재적이다.

    게다가 저 아이, 아까부터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의식하지 않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다는 것.

    그건 정말 대단한 재능이다. 비슷한 계통에서 일하는 도가윤이 보기에는 더욱더.

    그런데 문제는······.

    '쟤는 왜 여기서 저러고 있는 걸까?'

    대체 왜?

    무슨 우렁각시도 아니고.

    도가윤은 도무지 김다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사고방식으로는 지금 김다솜이 하고 있는 행위의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었으니까.

    '이해 불가.'

    이지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뭘 노리는 건지를 모르겠다. 악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단 배제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악의는 없는 것 같다.

    그럼 사흘을 남의 집 앞에서 잠복하는 저 엄청난 근성으로 대체 뭘 노리는 걸까?

    도가윤이 김다솜에게 접근해 볼까 말까를 고민하는 사이, 등 뒤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뭐지?'

    그때, 도가윤에 눈에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일시에 색이 변하는 게이트가 들어왔다.

    순간, 몸을 부르르 떤 도가윤이 지급된 폰을 꺼내 긴급 버튼을 부러질 듯 급하게 눌렀다.

    그러고는 김다솜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십여 개의 게이트가 모두 동시에 붉게 변하고 있었다.

    재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님······."

    현란하게 어르고 달래고 살짝 겁주었다가 다시 어르고.

    중졸이어도 딱히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만약 문제가 있다고 해도 특별 계약직으로 어떻게든 해결을 하겠다며 호언장담하고,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 버리면 그것도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며 은근 겁을 주고!

    혼자서 상황을 하드 캐리하고 있는 최정훈을 보며 이지혁은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젠 지금 상황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떠나서 저 남자의 능력이 너무도 위대해 보일 지경이었다.

    '사기꾼이 따로 없네.'

    공부를 잘했으니 망정이지, 출세 못해서 암흑의 길로 빠져들었다면 대형 사고를 쳤을 인간이다, 저거.

    삐이이이익!

    "뭐야!"

    순간, 서아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휴대폰이 주머니 속에서 붉게 점멸하며 울리고 있었다.

    "긴급?"

    서아영이 두말없이 창가를 향해 달렸다.

    최정훈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열린다고? 벌써? 그럴 리가 없는데! 아직 열 시간도 안 지났잖아!"

    서아영이 절망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떡······."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활짝 열린 창문을 넘어 한 사내가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지혁 씨!"

    깜짝 놀라 그를 부르는 서아영을 뒤로한 채 이지혁이 바닥으로 하강했다.

    붉게 달아올라 열리기 시작하는 게이트들을 보며 이지혁이 소리쳤다.

    "아직 우리 식구들 여기 있다고, 이 새끼들아!"

    이지혁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날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우우우웅!

    게이트에서 진동음이 울리더니, 물결치듯 가운데가 벌어지며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전열이 정비되지 않은 방위사의 군인들은 사방에서 열리는 게이트 탓에 어디를 겨눠야 할지 혼란스런 총구를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침착해!"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이트 전체를 둘러싸려 했으나 아직 인원이 충분히 충원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긴다.

    "간격을 넓혀! 최대한 포위한다! 뒤로 물러나면서 간격을 벌리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아무리 인원을 넓게 배치한다고 해도 열 개의 게이트를 모두 포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제기랄!"

    정인수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욕지기를 억지로 억눌렀다.

    아직 사람들이 채 대피하지도 못했는데 게이트가 열려 버리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아무리 간격을 넓혀 상대한다고 해도 한쪽을 틀어막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럼 반대쪽은?

    정인수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아파트 창에 반쯤 걸쳐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서아영을 보자 짜증이 확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게이트가 일시에 열리며 몬스터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게이트가 열리는 방향이 중앙으로 집중되어 있어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한곳에 뭉치며 저들끼리 얽혀 있다는 것이다.

    "갈겨!"

    정인수가 소리를 지르자 총구들이 불을 뿜었다.

    아직 배치가 덜 된 MG-50 대신 수류탄이 몬스터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키에에에엑!

    수류탄이 퍽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들의 괴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도 짐을 팽개치고 전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십여 개의 게이트에서 서로 다른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불꽃을 뿜는 거대 도마뱀과 기다란 촉수를 뻗어 대는, 문어같이 생긴 몬스터, 갑피가 검게 번들거리는 거대한 곤충들, 늑대의 형상을 한 거대한 짐승과 거대한 근육이 번들거리는 인간형 괴물까지.

    몬스터들은 자기들끼리도 물어뜯고 후려치며 아비규환을 만들고 있었다.

    "쏴! 쏴! 갈기란 말이야!"

    정인수가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눈으로 보아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화력으로 쓰러뜨리는 괴물들보다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이 배는 많다는 것을.

    아니, 배는 무슨!

    몇 배는 될 수준이었다.

    감당이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새끼들아, 어떻게 좀 하라고!'

    정인수가 다급한 눈으로 KSF를 찾았다.

    "꺄아아악!"

    하지만 그를 반기는 것은 KSF가 아니라 날카로운 비명성이었다.

    몬스터를 확인한 일반인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그 날카로운 하이 톤이 몬스터들의 이목을 끌었다.

    키에에에엑!

    카아악!

    오오오.

    낮고 높은 울부짖음이 울려 퍼지며 몬스터들이 방향을 반대로 틀기 시작했다.

    총알을 쏟아내는 정면이 아니라 미처 포위하지 못한 아파트 쪽으로 몬스터들이 웨이브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쏴! 쏴라! 막아! 저거 막으란 말이야!"

    정인수가 비명을 질렀다.

    저 뒤에는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저 몬스터 떼를 이대로 놓친다면 블랙 먼데이 이후로 최악의 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막아아아앗!"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 댔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 절망 어린 눈으로 손을 벌벌 떠는 정인수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뭔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다.

    쿠웅!

    아스팔트가 부서지며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흙먼지가 피어오른 그곳에 검은 연기를 휘장처럼 휘감고 있는 이지혁이 서 있었다.

    이지혁이 자신을 향해 광란의 질주를 하는 몬스터들을 보며 혀를 찬다.

    동시에 이지혁의 양손 위로 검은 불꽃이 화르륵 피어오른다.

    범고래를 때려잡으며 몸 안에 쌓아뒀던 마나가 이지혁의 손을 타고 솟구쳤다.

    정인수가 반쯤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놈!

    저놈, 분명히 저놈이!

    이지혁이라고 했었나?

    "어떻게 좀 해줘! 어떻게든 하라고!"

    다행히 그런 정인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이쪽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니!

    이지혁의 양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화르르륵!

    그것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해일이었다.

    검은 불꽃의 파도가 혀를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명멸하고 이글대는 불꽃이 몬스터의 웨이브를 집어삼켰다.

    마치 쇳소리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끔찍한 광경에 총을 쏘던 방위사의 군인들마저도 질끈 눈을 감을 지경이었다.

    불꽃은 계속해서 몬스터들을 집어삼켰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고,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일게 만드는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정도란 게 있는 법이지."

    이지혁은 간만에 진지한 얼굴이었다. 지금 그의 등 뒤에는 아직 대피하지 못한 어머니와 예원이가 있었다.

    그러니 대충 싸울······.

    잠깐만?

    그런데 아버지가··· 집에 있었나?

    아니, 아직 안 들어왔나?

    왜 이리 사람이 존재감이 없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집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집에 있던 것 같기도 하고······.

    퇴직 이후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존재감을 한탄하며 이지혁은 눈물을 삼켰다.

    이래서 남자는 일을 해야 하는 거구나.

    아드님도 직장을 가질 나이라던 최정훈의 말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단번에 수십의 몬스터들을 재조차 남기지 않고 날려 버렸지만, 아직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남아 있었다.

    한데 몬스터들 사이에 기이한 흐름이 생겨났다.

    이지혁의 능력을 깨달은 몬스터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려 하고, 그 와중에 새로 소환된 몬스터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밀치며 앞으로 질주했다.

    끼에에에엑!

    이지혁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래서 아는 게 중요한 법이지.

    몰랐다고?

    "그럼 죽어야지."

    이지혁의 몸에서 뻗어져 나간 검은 촉수가 사방을 누비며 몬스터의 뜯겨져 나간 파편과 흘러나온 마나들을 집어삼켰다.

    빨아들인 마나를 흑마력으로 전환하여 전신에 휘돌렸다. 마나가 몸에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나 육체에 마나가 차오르는 감각은 즐겁다.

    기분 같아서는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짓밟고 찢어발겨 버리고 싶지만······.

    아직 기분 낼 정도의 마나를 쌓은 것은 아니니 참아야 했다.

    그래도 적당히는 할 수 있겠지.

    이지혁의 양어깨에서 뱀처럼 솟아오른 수십 개의 검은 연기들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영활하게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뱀이 입을 벌리듯 쫘악 벌어지며 달려들고 있는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집어삼켰다.

    우드드득!

    끼에에에엑!

    연기가 몬스터들의 몸을 조이고 우그러뜨리고 뒤튼다!

    압력에 짜부라진 몬스터들의 육체와 마나를 남김없이 빨아들인 이지혁이 낄낄대며 그 자리에 서서 몬스터 군단을 바라보았다.

    단숨에 스물이 넘는 몬스터를 집어삼킨 이지혁은 조금씩이나마 차오르는 마나를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갈증이 인다.

    갈증.

    아무리 삼켜도 도무지 꽉 차오르지를 않는 마나가 그를 목마르게 만들고 있었다.

    더······.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다.

    더!

    이지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이지혁은 더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깊은 심호흡이 이지혁과 함께했다.

    '흥분했네.'

    더 많은 마나를 원하는 충동이 잠시 그를 지배했지만, 빠져나오는 것도 빨랐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여기까지다.

    경계는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스스로가 정한 선을 넘어버린다.

    지금 그가 해야 하는 것은 가족을 지키는 일이다. 그 이상은 그의 역할이 아니다. 그건 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었다.

    "이지혁 씨!"

    뒤에서 달려오는 서아영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의 일은 그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다.

    "가족분들은 일단 최정훈 씨가 맡아서 대피시키고 있어요."

    "음, 신세졌네요."

    "뭘요. 막아주신 걸로 감사드려야죠."

    이상하다.

    이 여자, 왜 이리 고분고분하지?

    "그러니까, 말이 나온 김에······."

    그럼 그렇지.

    이지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왜요? 한 마리에 천만 원 다시 하시려고?"

    "저 몬스터 수 안 보이세요? 나라 살림을 거덜 내실 생각이세요?"

    "그럴 생각 아니시면 자꾸 뭐 해달라고 하지 마시고요."

    궁시렁대는 서아영을 두고 이지혁은 몸을 돌렸다.

    사람은 해주는 만큼 요구 받는다.

    이번에 이만큼을 해주고 나면, 다음에도 그 정도를 해주지 않으면 되레 불평을 듣게 된다.

    그래서 선이 중요하다.

    여기까지라는 선을 그어놔야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오늘 그가 그은 선은 이곳.

    자신의 뒤를 지나는 몬스터를 주살한다. 다른 방향으로 뭐가 어찌 되든 그건 이지혁이 알 바가 아니었다.

    KSF든 방위사든 누구라도 알아서 하겠지.

    어느새 달려든 KSF의 요원들이 이지혁이 막고 있던 라인을 채우기 시작했다.

    속속들이 채워지는 요원들을 보며 이지혁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지혁 씨?"

    "그럼 저희 집 안 무너지게 잘 부탁드리죠."

    서아영이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에?

    이 여자가 웬일이지?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지혁 씨가 먼저 나서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야 우리 집이 위험하니까.

    이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서아영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이지혁이 시기적절하게 나서주지 않았다면 저 몬스터 웨이브가 도시로 퍼져 나갔을 거다.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큰 피해가 생겼을지 예상이 안 될 지경이었다.

    단 한순간, 단 한 번이지만 이지혁이 나서주었기에 적어도 수천의 목숨이 구해진 것이다.

    아직 KSF의 요원도 아닌 이지혁에게 그 이상의 무엇을 바란다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이다.

    평소와는 다르게 뭔가를 더 요구하지 않는 서아영의 태도가 미심쩍은 이지혁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더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

    벌써 서아영은 그에게서 눈을 뗀 채 몬스터 떼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

    뭔가 믿음직스러운데?

    이지혁은 킥킥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일단 포위망은 만들도록 해줬으니 남은 일이야 알아서 하겠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어디 보자, 이제······.'

    가족들을 확보해야 한다. 이 난리통에 사고라도 나면 안 되니까.

    최정훈이 믿을 수 있는 남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게 좋······.

    순간,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이지혁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KSF와 방위사의 포위를 뚫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몬스터들의 무리가 들어왔다.

    긴 날개를 편 도마뱀형 몬스터들이 입가로 불을 뿜으며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한 번도 비행형 몬스터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해봤는지 KSF와 방위사도 전혀 대응하지 못하며 입을 쩍 벌린 채 몬스터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잘한다."

    무능한 인간들.

    어디 한 번을 제대로 일처리하는 꼴을 못 보네.

    저런 인간들이랑 같이 일하게 되면 무슨 꼴을 당할지 눈에 훤했다.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노동환경이란 건 중요하니까.

    그런데······.

    쟤들이 한쪽 방향으로 날아가네?

    몬스터들이 날아가는 방향을 살핀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사람 눈이란 게 참 우습다니까.

    그새 눈에 익었다고 몇 번 타본 차를 보자마자 알아보네.

    저기 저 미친 듯이 달리는 저 차··· 최정훈이 몰던 거랑 같은 종류 같은데?

    허허.

    아니겠지?

    아니지?

    생각과 다르게 이지혁의 몸은 빛살처럼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왜 하필 또 그쪽이냐! 왜!"

    짙게 코팅된 차 유리 건너로 익숙한 금발 머리가 보인다.

    이지혁은 욕지기를 내뱉으면서 최정훈의 차를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 * *

    "꺄아아악!"

    "밟아요! 밟으라고! 따라와요!"

    최정훈은 이를 악물며 엑셀을 꽉 밟았다.

    비행형이라니!

    왜 전 세계적으로 처음 일어나는 일이 자꾸 한국에서, 그것도 그의 주변에서만 벌어지는 것인가!

    비행형 괴물이 있는 줄 알았다면 게이트 매뉴얼은 전부 다 뜯어 고쳐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오늘 같은 일이 매번 벌어질 테니까!

    "그리고 왜 하필 이쪽으로 오냐고! 제기랄!"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그의 입에서도 욕이 튀어나왔다.

    최정훈이 뒤를 돌아봤다.

    빠르게 달리는 그의 차가 몬스터들을 자극했는지 두세 마리가 차량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꺄아아악!"

    이예원의 날카로운 비명이 최정훈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백미러로 차 뒤에 바짝 붙은 날도마뱀의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보였다.

    "큭!"

    코너를 보자마자 핸들을 과격하게 꺾었다.

    끼이이익!

    바퀴가 바닥과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속도를 최대한 줄이지 않고 멋지게 코너링을 해냈지만, 안타깝게도 날도마뱀들 역시 그리 뒤처지지 않고 차를 따라왔다.

    "망할!"

    최정훈이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 어떻게!"

    박선덕이 창문 밖을 보며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느새 날도마뱀들이 뒤가 아니라 차 옆까지 따라붙었다.

    천장에서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카앙!

    쇠가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비늘 덮인 앞발이 천장을 뚫고 들어왔다.

    "꺄아아악!"

    "으아악!"

    이예원이 비명을 지르고, 이철중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러 댔다.

    "음……."

    도가윤이 허벅지에 찬 나이프를 꺼내 허공을 헤집는 몬스터의 앞발을 두어 번 쑤셔박았다.

    끼에엑!

    푸른 피를 철철 뿜어낸 팔이 다시 차 밖으로 빠져나갔다.

    "진정."

    도가윤의 무심한 얼굴을 본 박순덕과 이철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몬스터도 몬스턴데, 이 여자도 뭔가 무섭다.

    "그런데 너희는 왜 탄 건데!"

    이예원이 도가윤과 김다솜을 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주. 차량 용이함."

    "넌 여기 왜 있어?"

    이예원의 칼날 같은 눈빛을 받은 김다솜이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너무 많이 탔어.'

    여섯이다.

    이지혁에 가족에다 급하게 합류한 김다솜과 도가윤까지 태우다 보니 뒷좌석에만 네 명이 탔다.

    때문에 엑셀을 아무리 밟아도 차가 안 나가는 느낌이었다.

    최정훈은 이를 악물고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머리들 뒤로 박쥐같은 날개를 크게 펼친 채 날아드는 도마뱀 떼가 보였다.

    '늘어났어?'

    주변을 살펴보니 차량을 탄 채 속도를 내고 있는 게 최정훈의 차밖에 없다.

    자연스레 시선을 끈 건가?

    최정훈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큰일이 난다!

    멀리 간다고 뭐가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차라리 게이트 출현장소로 가서 지원을 받는 쪽이 빠르다.

    유턴을 했다가는 끔찍한 꼴을 보게 될 테니, 최대한 크게 돌아서 갈 수 있는 루트가?

    카캉!

    그때, 사방에서 쇳소리가 울리며 날카로운 발톱이 차창과 천장을 뚫고 틀어박혔다.

    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들어 올려진 차량이 지면에서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지기를 두어 번 반복하며 범퍼카처럼 들썩였다.

    발톱들이 더욱 파고들며 차량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차가 뜨는 것을 느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최정훈도 먹히지 않는 핸들을 느끼며 절망에 빠졌다.

    우드드득!

    발톱이 파고들며 벌어진 틈에 차의 무게가 더해지자 사방으로 균열이 갔다. 결국 날도마뱀들의 발톱이 박혀 있던 천장이 찢겨 나가며 남은 차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액션 영화처럼 바닥과 닿으며 튕겨 오른 차가 길가로 돌진했다.

    "큭!"

    최정훈은 이를 악물며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틀었다.

    '먹혀라!'

    겨우겨우 통제를 되찾은 차가 가로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다시 도로로 돌아왔다.

    "하아……."

    등 뒤에서 낮은 한숨이 들렸지만, 최정훈의 등가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직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이제는 천장도 없이 날아드는 저 도마뱀들을 상대해야 한단 말이야!

    고개를 돌리자 강제로 컨버터블이 되어버린 차 뒤로 떼 지어 날아드는 도마뱀이 보였다.

    도가윤이 나이프를 든 채 몸을 일으켰다.

    "막을 수 있어?"

    "두셋은."

    "그 이상이 오면?"

    "죽겠지."

    최정훈이 헛웃음을 토했다.

    그럼 죽겠군.

    지금 등 뒤로 보이는 날도마뱀들이 적어도 수십 단위는 넘어가는 것 같으니까.

    최정훈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을 품 안에 넣어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정시 퇴근 한 번 못해보고 죽을 수는 없지!"

    한 발로 액셀을 밟은 채 몸을 반쯤 세워 뒤로 돌렸다. 천장이 날아가 뻥 뚫린 차를 보자 왠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아직 할부도 덜 갚았다고, 이 새끼들아!"

    탕! 탕! 탕!

    최정훈의 울분을 담은 권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날도마뱀의 딱딱한 비늘을 뚫기에 총탄은 너무도 나약했다.

    순식간에 탄창 하나를 비워 버린 최정훈이 난감한 듯 탄식을 내뱉었다.

    막을 수가 없다.

    달라붙는 날도마뱀을 향해 도가윤이 나이프를 휘둘러 위협을 하고는 있지만, 애초에 도가윤은 전투 요원이라 분류하기도 애매한 능력자.

    일반인 여섯으로 수십의 몬스터를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최대한 핸들을 뒤틀며 달라붙는 것들을 떨어뜨리고는 있지만…….

    정면을 바라본 최정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정면에서도 수십의 날도마뱀들이 보였다.

    크게 돌며 게이트로 돌아가고 있다 보니 그들을 쫓지 않던 날도마뱀들과도 조우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날도마뱀들의 시선이 일제히 최정훈의 차로 향한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맹렬하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유언장도 안 써놨는데……."

    사직서는 써놨지만!

    최정훈의 눈이 암담함으로 물들 때, 절망적인 상황을 깨달으며 겁에 질린 이예원이 박선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박선덕도 품에 파고든 이예원을 꽉 끌어안았다.

    도가윤의 방어를 뚫고 날도마뱀의 날카로운 손톱이 이예원과 박선덕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예원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어디 있어! 이지혁! 이 나쁜 새끼야!"

    "오빠라고 해야지! 이 망할 동생 년아!"

    대답은 즉각적이었고, 반응은 더 빨랐다.

    벼락같이 날아든 이지혁이 이예원을 찔러가던 도마뱀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파앙!

    격타음이 아닌, 마치 가벼운 공이라도 걷어찬 듯한 맑은 효과음이 터지며 날도마뱀이 대포알처럼 튕겨 나가 다른 날도마뱀들을 연달아 날려 버렸다.

    "아들!"

    "이지혁 씨!"

    와락 울어버린 이예원이 마구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망할 놈아!"

    아니, 저 기집애가 끝까지?

    부들부들하던 이지혁의 눈에 박선덕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들어왔다.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자신이 이 세계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과연 어머니가 이런 위기에 처했을까?

    아니, 자신이 조금만 더 위기감을 느꼈더라면?

    그걸 떠나서…….

    "날파리 같은 것들이 감히!"

    이지혁의 양손에서 뿜어진 검은 마나가 머리 위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마치 전류처럼 변한 마나들이 충돌하며 검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뻗어라!"

    촤아악!

    앞으로 내밀어진 손과 함께 응축된 전류들이 줄기줄기 뻗어져 나간다.

    검은 벼락이 하늘을 메운 날도마뱀들 사이를 오가며 그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매캐하게 살 타는 냄새가 풍기며, 뿜어져 나온 체액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지혁은 실드를 만들어 날아드는 분비물들을 받아내 되던졌다.

    "엄마, 괜찮아?"

    "…대답할 힘도 없다."

    "나는! 나는 안 물어봐?"

    "너는 안 괜찮아도 돼, 이 기집애야."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막말을 하냐?

    동생이지만 확실히 저것도 제정신은 아니다.

    이지혁이 혀를 찼다.

    "그런데 너……."

    박선덕이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왜 날아다니니?

    그 벼락은 뭐고?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쿵쾅대는 심장과 가쁜 호흡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아이고, 우리 엄마. 열 오른 것 봐!"

    이지혁이 호들갑을 떨며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렀다.

    꽈악.

    그때, 누군가 이지혁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어?"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얼굴이 파랗게 질린 김다솜이 그의 팔을 양손으로 끌어안으며 덜덜 떨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냐? 너 괜찮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김다솜이 몸을 벌벌 떨면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쯧, 놀랐나 보네."

    이지혁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자 김다솜은 그제야 진정이 좀 된 듯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이거 좀 놓지?

    그리고 그걸 따지기 전에… 너 왜 여기 있냐?

    설마 또 현관에 있었나?

    섬뜩함을 느낀 이지혁이 슬쩍 팔을 빼려 하자, 김다솜이 힘을 꽉 주며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으음……."

    이지혁이 떨떠름한 얼굴로 김다솜을 바라보고 있자 이예원의 눈이 불을 뿜었다.

    "너, 그거 안 놔?"

    획.

    김다솜은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게 미쳤나?"

    성질이 발동되려 하는 이예원의 허벅지를 어머니가 살짝 눌렀다.

    왜 그러는지 의아하게 어머니를 쳐다보던 이예원은 박선덕이 눈짓으로 최정훈을 슬쩍 가리키자 다시 다소곳해졌다.

    '하지 마! 그거 호러야!'

    미친! 스펙터보다 더 무섭네! 진짜!

    볼 발그레지지 말라고, 이년아!

    이지혁이 울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도대체가… 내 주변에는 제대로 정신 박힌 여자가 없어.'

    아, 엄마 빼고.

    엄마는… 빼고…….

    최정훈이 하얗게 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완벽한 타이밍에 와주시네요."

    "아니! 무슨 꿀 발라놨어요? 사람 태웠으면 조심조심 눈에 안 띄게 가야지! 왜 밟아서 시선을 끌어요, 시선을 끌기는!"

    지 가족들 살려보겠다고 죽어라 운전했더니만.

    망할 놈.

    고맙다는 말은 못 들을망정.

    하지만 이지혁에게 정상적인 반응을 바란다는 것도 웃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최정훈은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어쨌든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

    말을 하던 이지혁이 눈을 찌푸렸다.

    도가윤의 오른팔에 살짝 혈흔이 비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 것이다.

    "너 다쳤어?"

    "괜찮다."

    "어디 봐."

    "괜찮다."

    정상적인 여자가 없어, 정상적인 여자가.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도가윤의 팔을 잡아챘다.

    길게 그어진 창상이 보였다.

    "괜찮기는."

    회복 마법 계열은 잘 모르는데, 음…….

    게다가 흑마력이나 몬스터들에게서 흡수한 마력으로 회복 마법을 펼쳤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괜히 회복시키려다 저주를 걸어 언데드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한숨을 내쉰 이지혁이 상의의 팔 부분을 찢어 도가윤의 팔을 친친 감았다.

    "괜찮다."

    "알았으니까 좀 닥치고 있어."

    이지혁이 짜증을 부렸다.

    어디 가서 다치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지만,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다가 벌어진 일이다.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는 건 있단 말이지.

    상처 부위를 꽉 감아 지혈한 이지혁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병원 가. 꼭 가라. 흉 진다. 치료비는 내가 내줄 테니까."

    이제 돈 많거든.

    통장에 가득한 돈을 생각하며 히죽 웃은 이지혁의 눈앞으로 불쑥 손이 뻗어져 왔다.

    "응?"

    살짝 까진 상처 부위가 돋보이는 새하얀 손이 그의 눈앞에서 살랑거리고 있었다.

    "흐흠……."

    김다솜이 의도가 가득 담긴 얼굴로 그에게 상처를 보여주고 있었다.

    "……."

    "……."

    "치료할 것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

    이지혁은 그녀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상처 부위를 대충 문질러 주었다.

    그러자 만족했다는 듯 김다솜이 다시 손을 내리고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정상적인 여자가 없어, 정상적인 여자가!'

    하기야 생각해 보면 베라프에서도 그랬지.

    끼이익.

    차가 멈춰 섰다.

    "자, 그럼 이제 안전한……."

    그 순간, 이지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야?

    왜 또 게이트가 눈에 보이는 거지?

    여기도 게이트가 열렸나?

    이지혁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최정훈을 노려보았다.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여기로 돌아와서 도움이라도 받을까 하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KSF와 몬스터들의 혈전을 보며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위사 측은 방어선이 진즉 뚫려 몬스터들이 도시로 난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합시다! 예?"

    "무, 물론이죠."

    이지혁과 최정훈이 눈빛을 주고받는 와중에 누군가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다쳤는데, 관심 좀 가져 주면 안 되겠니?"

    이 시대 가장의 슬픈 목소리였다.

    * * *

    "난리도 아니네."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과 몬스터가 얽히고설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하늘에서는 몬스터가 날아다니며 불을 뿜고, 바닥에서는 피 내음과 화약 냄새가 뒤섞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최정훈 씨!"

    막 몬스터 덩어리를 향해 화염을 뿜어낸 서아영이 뜻밖의 지원군에 반색했다.

    말은 최정훈을 외치고 있지만, 눈은 이지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지?

    도와주러 온 거 아닌데?

    이지혁이 어색한 얼굴로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최정훈은 그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분위기가 좀 묘해지는데, 이거?

    "지혁아!"

    박선덕이 그를 불렀다.

    "어, 엄마."

    "어떡하니?"

    이지혁이 도와줄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아들이 뛰어들었다 다칠까 싶어 하는 우려가 뒤섞여 나온다.

    그런 복잡무비한 어머니의 심정을 느끼면서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일도 아닌데, 뭐."

    이지혁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집을 살폈다.

    유리창은 멀쩡한가?

    다행히 아직 집에 피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럼 뭐해, 이 동네 집값이 폭락할 텐데."

    사방에 널려 있는 몬스터와 총탄 자국을 보니 이 동네가 어떻게 될지 안 봐도 훤했다.

    돈은 아무리 있어도 부족하다고, 집값이 떨어질 것을 생각하니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는 느낌이다.

    아니, 잠깐.

    지금 집값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이지혁은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관심이 없다든가 엮이기 싫다고 하는 감정이야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집값이나 걱정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뭐지?

    이지혁이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뒤틀렸다.

    어느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 뒤틀려 있었다.

    베라프에서의 이지혁이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베라프로 넘어가기 직전의 이지혁으로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그 고정이 풀리면서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이지혁 씨!"

    이지혁이 최정훈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더럽다.

    '부작용이 없을 수 없는 건 알아.'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죽음이라는 단계에서 돌아온 것만 수천 회는 될 거다.

    그런 이지혁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 웃기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미 인간이라는 규격에서 한참은 벗어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더 인간답게 살고 싶다.

    그래서 인간으로 죽고 싶었다.

    인간이니까.

    "그러면 같은 인간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말이지……."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어휴."

    이지혁이 머리를 박박 긁었다.

    인간성 회복 프로그램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하나?

    "이지혁 씨!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서아영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몬스터에게 요원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천만 원이든 뭐든 줄 테니까 어서! 제발!"

    빽! 소리를 지르는 서아영을 보며 이지혁은 코웃음을 쳤다.

    "도와달라고?"

    도와주지.

    그거야 어렵지 않지.

    물론 도와는 주겠지만…….

    "너는 아니야!"

    이지혁이 도가윤과 최정훈을 보았다.

    "어이."

    "…예?"

    "너희는 분명히 우리 가족을 안전히 지킨다고 했어."

    "그렇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 엄마랑 내 동생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더 생기면, 단언하건대……."

    이지혁이 씹어뱉듯 말했다.

    "너희 다 각오해야 할 거야."

    이지혁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보며 최정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입니다."

    "믿어본다."

    이지혁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저 사람,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이지혁의 감정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최정훈이 의아해할 때, 이지혁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등 뒤로 서글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혁아, 나는……."

    아, 아버지…….

    박선덕이 자신도 모르게 남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이지혁이 내려선 곳은 KSF 앞이 아니었다.

    KSF 쪽은 그나마 버티고 있지만, 방위사는 그렇지 못했다.

    하늘을 날고 땅을 뒤집는 몬스터들 앞에서 개인화기는 너무나 무력했다.

    진형이 무너지고 흐트러졌다.

    괴물들의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 앞에서 인간의 피육은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하지만 방위사의 군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물러서면 민간인이 죽는다.

    그런 사명감이 그들의 발을 붙잡았다.

    눈앞으로 괴물들의 발톱이 날아들어도 몸을 돌려 달아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대지에 발을 붙이고 단 한 발의 총탄이라도 더 박아 넣기 위해서 버티고 버텼다!

    "물러서지 마! 물러서지 마! 새끼들아! 물러서지 말라고!"

    정인수의 목에서 피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식 같은 부하들이 갈가리 찢겨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심정을 누가 이해하랴.

    하지만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죽더라도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

    그게 군인이다.

    적어도 민간인들이 완전히 대피할 시간만 있었어도 이리 결사적으로 싸우지는 않아도 됐을 텐데.

    '내 탓이다.'

    안일했다.

    그놈의 매뉴얼이 뭔지!

    게이트가 열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

    혀라도 깨물어 죽고 싶은 심정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의 지휘가 없다면 피해는 더 늘어날 것이다.

    더 많은 피해를 막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며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

    문제는 희생이 더 이상 소수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이 개 같은 KSF 새끼들아! 어떻게 좀 해봐!"

    필요할 때는 절대 도움이 안 되는 새끼들.

    사명감도 없고 안일한 능력자 새끼들!

    다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때, 정인수의 눈에 하늘에서 날아드는 푸른 인영이 보였다.

    정인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지혁!"

    이지혁이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바닥에 쓰러진 군인의 몸에 발톱을 박아 넣으려던 짐승형 몬스터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고는 부상 입은 군인을 집어 들어 사람들 사이로 밀어 넣었다.

    "후송!"

    "예? 아, 예!"

    자연스러운 명령에 부상자가 뒤로 날라졌다.

    "후우웁!"

    긴 심호흡 소리와 함께 이지혁이 눈앞에 산더미처럼 차올라 있는 마나를 빨아들였다.

    '아이러니하군.'

    그가 현대로 돌아온 이후 벌어진 최악의 참사였다.

    그런데 그 참사의 규모가 클수록 이지혁이 쓸 수 있는 마나량은 많아진다.

    마치 큰 사건이 벌어질수록 더 날뛰라는 듯이.

    "그래, 날뛰어주지."

    이지혁의 몸에서 뻗어져 나간 마나의 촉수가 군인들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집어삼키고 후려쳤다.

    몬스터와 군인들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며 초주검이 되어 있던 벙커 버스터 라인이 호흡을 돌릴 틈을 되찾았다.

    "돕는다면 이쪽이지."

    망할 능력자 새끼들이 아니라 말이야.

    "그래도 니들은 불이라도 뿜잖아? 안 그래?"

    이쪽은 달랑 총 하나 들고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총 들고 싸우는 사람이랑 맨몸인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총 든 사람 쪽을 도와야지.

    응?

    이게 아닌가?

    뭔가 미묘하게 틀린 말 같기도 한데?

    "어쨌든!"

    이지혁의 우수에서 마나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마력들이 허공에서 뭉치고 얽혀들며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조절해야 해.'

    저번 실수로 하나 확인한 것.

    이 세계에는 마나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마나 충돌도, 마나 저항도 없다.

    베라프에서라면 한 번 발출된 마력은 선풍기에서 뿜어져 나온 바람이 공기와 충돌하며 약해지듯 서서히 깎여 나간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방출된 마력이 공기와 충돌하지 않고 그 기세를 이어 나간다.

    그러니까 멸절형 마법을 쓸 때는 직선상의 모든 것을 먹어 치워 버리지 않도록 범위를 조절하고 또 조절해서 완벽하게 계산해야 했다.

    이지혁의 뇌가 맹렬하게 움직였다.

    이 기세로 공부를 했으면 일류대를 갔을 텐데…….

    그게 안 되니 중졸이지!

    이지혁이 만들어낸 마력의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서아영!"

    이지혁의 신호를 들은 서아영이 소리쳤다.

    "물러나! 물러나라! 어서!"

    괴물들을 틀어막던 요원들이 분분히 좌우로 몸을 날렸다.

    이지혁이 우수를 꽉 움켜쥐고 아래로 내리눌렀다.

    "으아아아아아아!"

    너무 많은 마나를 사용하다 보니 마나 반동이 그의 육체를 헤집었다.

    베라프에서라면 일시에 회복되겠지만, 여기서는 이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죽어어엇!"

    고통이 분노가 되어 입으로 뿜어졌다.

    고오오오!

    어둠의 마나로 이루어진 구름이 천천히 하강하며 몬스터들을 덮쳤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비명과 울음, 울부짖음이 어두운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마력의 구름에 집어삼켜진 괴물들의 비참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서아영은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쩌며 광경 자체는 지난번이 좀 더 충격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리얼하다.

    괴기 영화보다 더 끔찍한 장면이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알 것 같아.'

    이지혁을 보면 거꾸로 이해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능력자를 어떤 눈으로 볼 것인지.

    얼마나 두려워할 것인지.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악마 같아…….'

    돕고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겠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마력의 구름이 한곳으로 응축되었다.

    "드레인."

    그러고는 이지혁의 뻗어진 우수를 향해 빨려 들어왔다.

    잔존 마나를 흡수한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 오버했나.'

    이렇게까지 과하게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지.

    조금만 자제했다면 도움을 받은 이들이 등 뒤에서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런 개 같은 상황은 나오지 않았을 텐데.

    이미 이지혁의 주변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존의 군대개미처럼 우글대던 몬스터도, 바닥에 모래처럼 흩어져 있던 탄알과 파편들도…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남은 건 걸레 조각처럼 뒤틀리고 우그러져 있는 흙바닥뿐.

    그 기묘한 광경에 KSF도, 방위청도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지혁 씨!"

    그때, 정인수가 헐레벌떡, 말 그래도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덥썩!

    그러고는 이지혁의 양손을 움켜잡았다.

    "고맙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애들이 덕분에 하나라도 더……."

    정인수는 말문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뭘요."

    이지혁은 괜스레 퉁명스레 말하며 정인수에게 잡힌 손을 떼어냈다. 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직 끝난 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방진을 뚫고 탈출한 몬스터들이 있고, 하늘에는 비행형 몬스터들이 아직 몇 마리 살아남아 있었다.

    이지혁이 대부분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아직 많은 수가 있으니 민간인 피해가 커지기 전에 빨리 해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모두 전멸할 뻔한 사태를 단숨에 해결해 버린 것 역시 맞았다.

    서아영은 정인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지혁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이지혁의 존재는 숨길 수가 없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격을 했을 것이고, 사태가 이리 커져 버린 이상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럼 이지혁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정훈 씨."

    "예."

    "일단 저는 애들 이끌고 남은 몬스터들 정리할 테니, 최정훈 씨는 이지혁 씨 가족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서아영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이지혁은 분명 지금의 세상을 뒤흔들 태풍의 핵이 될 것이다.

    그 핵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임무였다.

    "이제 시작이에요, 이지혁 씨."

    이지혁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나 있는지 박선덕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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