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화 (8/118)
  • [■] 내 집은 내가 지킨다 [■]

    ─────

    이지혁은 분노했다.

    저기가 어디인데!

    홈. 마이 홈. 스위트 마이 홈.

    먹을 것과 놀 것과 행복함이 가득한 이지혁의 보금자리!

    이지혁의 안식처!

    꿈과 희망과 컴퓨터가 가득한! 특히 컴퓨터가 가득한! 그의 아름다운 집 아니던가!

    스톤 골렘이 어디서 뭘 하든 이지혁과는 관계가 없지만, 그 '어디'가 이지혁의 집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지금 엄마가 출근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애매하고, 예원이가 집에 오고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인데, 저쪽 방향으로 가는 건 안 되지! 당연히 안 되지!

    이지혁의 머리에 스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짜 저거 어떻게 하지?'

    베라프에서라면 한 방이다.

    그냥 손가락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으음······."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 찝찝하긴 한데······."

    저벅저벅.

    이지혁이 한 곳으로 걸어갔다.

    게이트가 열린 곳.

    이미 모든 브라드를 뿜어내고 사라져 버린 게이트 앞에 도착한 이지혁이 심호흡을 했다.

    이지혁의 눈에 군데군데 뭉쳐 있는 마력들이 보인다.

    서아영이 소멸시킨 브라드가 가지고 있던 마력들이 채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뭉쳐 있었다.

    이전에 코디악 몽키를 죽였을 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었다.

    이 마나가 그가 알던 마나와 동일하지 않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당장이 급한데.

    "드레인."

    이지혁이 양손을 뻗어 마나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전신에 뿌듯하게 마나가 차오른다.

    과연 마력 집약형 몬스터.

    가지고 있는 마력량 자체가 일반 몬스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일단 차이점은 없는 것 같군.'

    우려하던 부작용은 해결되었다.

    주변의 모든 마나를 빨아들인 이지혁이 마나를 그가 가장 선호하는 흑마력으로 변환했다.

    "이 정도면 급한 불은 끄겠네."

    과거에 그가 다루던 마나량에 비하면 정말 쥐꼬리만큼이지만, 일단 마나가 생기긴 했다.

    하기야 그때는 직접 마계로 게이트를 열고 실시간으로 흑마력을 공급 받았으니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기분 진짜 오랜만인 것 같은데.'

    불과 두 달여가 지난 것뿐이지만······.

    마나를 빨아들였다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활력이 넘쳐 나는 기분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강렬한 해방감에 몸을 떨던 이지혁이 스톤 골렘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이지혁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퍽, 꺼졌다.

    * * *

    스톤 골렘이 다가오고 있는 건물 옥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지혁.

    그가 스톤 골렘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주 난리도 아니네."

    아비규환이다.

    스톤 골렘이 지나온 뒤로는 무너져 내린 건물들의 잔해들이 가득했고, 일부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 브라드가 베라프에 나타났다면 이런 결과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면 현대의 도시들은 공격 받을 곳이 너무 많고, 복구도 쉽지 않다.

    겨우 저 정도의 몬스터가 출현한 것만으로도 도시가 박살이 나는 수준. 그게 현대였다.

    '아무래도 상관 없······.'

    아니, 상관 있나?

    저놈이 저렇게 설쳐 대면 수도관이고 전기선이고 인터넷 선이고 다 날아갈 것이고, 마트에 생필품이 들어오기도 힘들어질 것이니 이지혁의 프리 라이프에 지장이 심각하다.

    '이사 가자.'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저놈부터 처리해야지.

    "흠!"

    이지혁이 건물 아래에서 다가오는 스톤 골렘을 바라보며 양손을 털었다.

    이지혁의 육신에서 천천히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검은색 오러가 이지혁의 육신을 감싸며 거칠게 피어올랐다.

    디오레 1세가 지옥의 불꽃이라 칭한 이지혁의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이지혁의 손을 따라 이리저리 일렁이던 마력이 허공의 한 점을 향해 뭉쳐들기 시작한다.

    고오오오오오!

    하늘의 한 곳에 검은 마력의 폭풍이 나타난다.

    골렘을 쫓던 이들도 이변을 감지하고 허공을 바라보았다가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해할 수 없다.

    대체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저기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

    저것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생명을 가진 인간의 본능이 저 검은 폭풍이 가진 불길함을 감지하고 필사적으로 도망쳐라 외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서아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무언가를 더듬어 찾는다.

    꽈악.

    어느새 다가온 최정훈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고는 말했다.

    "진정하세요."

    "아······."

    최정훈은 흙먼지로 엉망인 몰골이지만 서아영처럼 떨지는 않았다.

    서아영을 진정시킨 최정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마 군인들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대원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능력자들만 뭔가를 느끼는 건가?'

    그 순간, 최정훈은 불길한 검은 불꽃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 * *

    "이거, 귀찮은데······."

    이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베라프에서는 그냥 냅다 모아서 질러 버리면 앞에 있는 게 뭐든 간에 쓸려 나갔다.

    아군이고 뭐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의 아군은 마수고, 그의 편은 몬스터였다.

    그러니 주변이나 아군에 미칠 피해를 감안하여 조절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냥 냅다 질러 버리면 이 주변 건물들은 운석이라도 맞은 마냥 모조리 쓸려갈 것이다. 역사에 남을 대량 학살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충돌 범위를 최소로 줄이고 마력을 컨트롤해서 최대한 주변으로 퍼지지 않게 하려다 보니 머리 쓸 곳이 너무 많았다. 반쯤은 본능과 경험으로 때려맞추는 영역이라 해도 말이다.

    일단 스톤 골렘을 따라붙던 군인과 능력자들은 모두 멀리 떨어진 상태니 인명 피해는 걱정할 것이 없다.

    계산을 완료한 이지혁의 눈이 불을 뿜었다.

    "내 집은 내가 지킨다!"

    홈. 스위트 마이 홈.

    스펠링은 미묘하게 생각이 안 나지만, 여하튼 아름다운 그곳.

    "이 돌덩어리야!"

    이지혁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며 검은 불꽃이 스톤 골렘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르르르!

    굉음과 함께 천천히 날아들던 어둠의 폭풍이 순간 응축되더니, 바닥을 향해 폭발하듯 밀어닥쳤다.

    콰아아아앙!

    최정훈은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는 폭음이 귀를 찢고 몸을 때린다.

    이만한 폭발이 터졌는데도 그의 몸이 여파로 허공을 비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눈물이 줄줄 새는 눈을 겨우 뜨고 바라보니 거대한 암흑의 물결이 바닥을 꿰뚫고 있었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거인이 지구를 향해 검은 창을 내리꽂은 듯했다.

    손이 덜덜 떨려온다.

    몸이 제 멋대로 떨려온다.

    저게 대체 뭘까?

    몬스터가 출현하고 능력자들이 나타나면서 상식의 영역은 이미 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건 그 깨어진 상식의 영역마저 뛰어넘는다.

    화아악!

    세상을 채우던 검은 창이 환상처럼 사라졌다.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창이 사라진 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서아영도······.

    주변의 능력자들도 마치 홀린 듯이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남아 있는 골렘의 잔해를 보러?

    그렇지 않다.

    마침내 그곳에 도착한 이들이 본 것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끝도 없이 뚫려 있는 거대한 크레이터였다.

    얼마나 깊이 뚫고 내려갔는지 저 아래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다.

    최정훈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서아영도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건물 옥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광경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지금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 사고 쳤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이 정도로 크게 일을 벌일 생각이 아니었는데!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그의 식은 완벽했고 그의 운용은 이미 신급 영역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실수가 나와 버렸단 말인가.

    그의 계산대로라면 지면을 약 1m 정도 깎는 수준에서 끝났어야 할 일인데, 끝도 없이 대지를 소멸시키며 내려가 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의 식은 완벽했으니 이쪽 세계에서 마법을 시전했을 때, 뭔가 차이점이 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게 급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뒷수습이다!

    저 끝도 없는 크레이터.

    저거, 저렇게 놔두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몸을 부르르 떤 이지혁이 머리를 필사적으로 쥐어짜기 시작했다.

    다른 고위 마법사라면 손짓 하나로 땅을 다시 채워 넣었겠지만, 그는 이지혁.

    그야말로 공격 마법 몰빵캐의 정석.

    방어 마법이니 변환 마법이니 하는 것들은 손도 대본 적 없다. 아는 거라고는 극에 달한 이해도의 공간 마법과 신에 달한 운용의 공격 마법뿐.

    "아! 이거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지혁이 소리쳤다.

    "어스 웨이브."

    콰드드드득!

    깊게 찔린 상처에 새살이 차오르듯 검게 뚫린 크레이터에 흙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검게 뚫린 구멍을 모두 메워 버린 이지혁이 그 자리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일단 이건 해결했다.

    해결했으니까······.

    이지혁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능력자들의 시선을 느끼며 몸을 숙였다.

    '안 보이겠지?'

    이렇게나 먼데.

    지들 눈이 독수리도 아닌데 이 거리에서 자신인지는 못 알아보겠지?

    * * *

    "방금 저기, 사람 있었죠?"

    "예, 저도 봤습니다."

    "파란색 옷 입고 있지 않았어요?"

    "예, 저도 봤습니다."

    "그 파란색 옷이 이지혁 씨가 입고 있던 파란 트레이닝복이랑 같은 색 아닌가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이지혁 씨죠?"

    "예. 저도 그렇게······. 아뇨, 솔직히 저는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정훈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지혁은 위험인물이다.

    극도의 위험인물이다.

    애초에 능력자들 자체가 일반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위험인물이다.

    일반인이 술을 먹고 취해서 난동을 부리면 폭행 사건이 되지만, 능력자가 술을 먹고 취해서 난동을 부리면 그때는 재앙이 된다.

    필사적으로 언론을 틀어막아 쉬쉬하고는 있지만, 비슷한 사건이 벌써 몇 번이고 터졌다.

    능력자가 진심으로 사람을 공격하면 일반인은 대응할 방법도 없고, 도주할 방법도 없다.

    그러니 능력자에게는 일반인의 몇 배에 달하는 제약이 필요하다. 능력자 특별법으로 능력자들을 옭아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이지혁은 규격 외.

    법의 틀을 벗어나 있으면서 스스로도 규격에 얽매이기를 거부한다.

    그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만약 그가 서아영이 가장 바라는 공간계 능력자로 추측되지 않았더라면 이미 감옥에 처박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사람이 이 정도의 힘을 갖춘다?

    그건 정말 재앙이다.

    그의 기분이 어디로 튀는가에 따라서 한 도시가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의 집 주변 반경 몇 십 킬로 내에는 사람이 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국가에 항의해 그를 격리시키려 하겠지.

    하지만 이지혁이 그걸 받아들일까?

    '아니어야 하는데.'

    아니어야 한다. 제발 이지혁만은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최정훈은 진실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최악이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릿속이 암담해지기 시작했다.

    * * *

    몬스터가 재해를 일으켰을 때, 가장 고생하는 사람들이 누굴까?

    군인들?

    능력자들?

    아니면 주변을 통제해야 될 경찰들?

    여기 그 해답이 있다.

    "이건 미친 짓이야."

    김재범은 퀭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쌓인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A4 용지로 출력된 서류들이 드디어 모니터보다 높이 쌓이기 시작했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이 출력된 서류는 그의 PC 안에 들어 있는 자료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벌써 사 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과로사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입사할 때 들어둔 보험이 드디어 효력을 발휘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아니지!'

    나흘을 못 잤더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효도와 불효를 동시에 저지를 뻔하지 않았는가.

    김재범은 누적된 피로와 불만과 짜증을 담아 고개를 획 돌렸다.

    "아아……."

    그 순간,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신과 원망은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다.

    보라.

    저 위대한 관료의 자태를.

    얼핏 보아도 김재범이 처리해야 할 서류의 10여 배에 가까운 서류에 둘러싸여 성(城)을 쌓고 있음에도 전혀 흐트러짐 없는 저 사람을.

    우아한 자태로 한 손에는 텀블러를 든 채 얼음 탄 주스를 마시며 다른 한 손으로는 고속으로 서류를 정리해 넘기는 저 프로의 모습을.

    김재범은 자신의 투정을 참회하며 조용히 눈앞의 이 위대한 직장인을 불렀다.

    "부팀장님."

    "예?"

    "진짜 대단하십니다. 힘들지도 않으세요?"

    "후후."

    최정훈은 어깨를 쭈욱 폈다.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후광처럼 그의 몸을 비추었다.

    "뭐, 이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잖아요."

    "과연."

    역시 경력자는 다르다. 이제 겨우 경력 2년 된 신입인 그로서는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일처리 능력과 강건함이었다. 그도 어서 저리되어야 할…….

    그 순간, 김재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최정훈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텀블러에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저 검은색 병에 둘러진 파랗고 하얀 무늬는…….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저거?

    "자, 잠깐만요, 부팀장님. 지금 대체 뭘 따르시는 겁니까?"

    "네?"

    저거, 자양강장제 아닌가?

    저거, 박X스잖아!

    아니, 이 미친놈이 무슨 텀블러에 자양강장제를 얼음 타서 주스처럼 처먹고 있어!

    "부팀장님, 지금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그거 그렇게 먹는 거 아니잖아요."

    이건 약물 남용이 아니라 약물중독 수준이다.

    자세히 보니 후광은 무슨!

    눈 아래서부터 검게 내려온 다크 서클은 턱까지 내려오다 못해 잘못하면 목 아래까지 내려올 지경이고, 푸석푸석해진 피부는 사포 대용으로 써도 될 수준이다.

    텀블러를 든 손은 미세하게 덜덜 떨리고 있고, 언제나 칼같이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져 숨이 죽어 있었다.

    "부팀장님, 그러시다 죽어요!"

    "하하하하, 농담도 심하시네요."

    "농담 아니거든요!"

    최정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음 탄 자양강장제를 음미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각이 살면서도 꼴불견이다.

    "뭐,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싱긋이 웃는 얼굴이 남자가 봐도 참 잘생겼다. 그래서 더 꼴불견이다.

    "재범 씨도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부팀장님, 코피 납니다."

    "음, 감긴가?"

    "아니, 콧물이 아니라 코피 난다고요! 거, 옷 다 젖어요, 부팀장님!"

    "하하하,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걱정 마세요."

    "아니! 일단 피를 닦으세요."

    "어디 보자, 이쪽 일은 마무리가 되었나?"

    '저 인간도 제정신은 아니야.'

    항상 능력자에 치여서 고통 받는다고 하소연하는 최정훈이지만, 김재범이 보기에는 그도 이미 반쯤은 그쪽에 물들어 있었다.

    제 명에 죽고 싶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에서 빠져나가야한다고 결심하는 김재범이었다.

    카페인에 찌들어 퀭한 눈을 한 최정훈을 보며 김재범은 울분을 토해냈다.

    "대체 이렇게 바쁜데 팀장님은 뭐하고 계신 겁니까?"

    "아, 팀장님은……."

    최정훈은 조금 씁쓰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제일 골치 아픈 일을 맡아서 하고 계시죠."

    * * *

    "…이상으로 긴급 지원 부서의 설립 필요성에 대한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서아영은 발표를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세 사람이 들어온다.

    "그래서……."

    우측의 중년인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귀관은 이 자리가 무엇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서아영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전 국토 긴급 지원 부서의 설립에 대한 브리핑을 위한 자리 아닙니까?"

    "나는 이번 몬스터 재해 사태에 대한 문책을 하는 자리라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안 건가?"

    서아영이 어깨를 으쓱한다.

    "문책이라고 해도 저희 측에서는 잘못이 없으니까요."

    "이봐, 자네!"

    "이번 일을 통해 아셨을 겁니다!"

    서아영은 그의 말을 끊으며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게이트의 출현 양상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매뉴얼대로 상대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또 다릅니다. 게이트의 동시 출현이 늘어나고,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들의 종류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또한 게이트 출현 시부터 활성화 시까지의 시간 또한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대응 방식으로는 이 모든 상황에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는 전 국토의 모든 대게이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소수의 우수하고 초법적인 집단이 필요합니다."

    "그 초법적이란 부분이 문제 아닌가! 문제가! 안 그래도 KSF에 들어오고 있는 진정과 소송이 한두 갠 줄 아나? 너희가 저지른 불법 때문에 인권위다 뭐다 난리도 아니야! 그런데 여기서 권한을 더 늘려 달라는 건가? 그 욕은 우리가 다 감수하고?"

    좌측에 앉은 장년인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애초에 너희 능력자들이 너무 날뛰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그것 하나 제대로 통제를 못하는 건가? 게이트 역시 지금처럼 막으면 될 것 아니야! 정 어렵다면 군 지원을 확충하면 될 일이지!"

    서아영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외면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희가 세계를 지키고 있다고 생색이라도 낼 셈인가?"

    서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세계를 지켜주고 있는 것은 게이트와 몬스터입니다."

    순간, 실내가 조용해졌다.

    그녀가 차마 인정하기 싫은 곳을 지적한 것이다.

    "지금 당장은 몬스터가 출현하고 능력자들이 그것을 막아내고 있기 때문에 쌓이고 쌓인 불안과 불만이 표출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갈 수는 없는 겁니다. 이미 비능력자의 능력자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고조되어 있고, 능력자들의 불만 역시 하늘까지 치솟고 있습니다. 이게 터지는 순간, 우리는 몬스터가 아닌 인간끼리 죽이고 죽이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 아닌가?"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크흠."

    "일반인들에게 능력자는 장전된 총을 들고 있는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1초 만에 죽일 수 있는 사람과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죠. 이미 온라인상에서는 안티 능력자 세력이 들끓고 있고, 오프라인에서도 서서히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서아영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능력자들 역시 불만이 팽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감시와 제약으로 지금까지 억눌러 두었을 뿐, 최근 능력자들의 범죄율이 일반인의 그것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을 감안하면 더 높을지도 모르죠. 언제 그들이 들고일어날지는 모르는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까지 가운데 앉아 있던 중년인이 말없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짓을 본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그 대책이 새로운 기구의 창설이다? 힘을 모아 달라?"

    "예."

    "최상급 능력자들을 모아 전 국토에 다발적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게이트 사태에 즉각 대처하면서 동시에 타 능력자들이 벌이는 범죄들도 단속하겠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나이브하군. 굉장히 나이브한 생각이야. 하지만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은 떠오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원하는 지원은 해주겠네. 다만, 실패하지 않아야 할 거야."

    "걱정 마십시오."

    "나가보게."

    "그럼."

    몸을 돌려 걸어 나가는 서아영을 보며 중년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끼리 죽이고 죽이는 꼴이라…….'

    재미있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우스운 발언이기도 했다.

    '너희를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차마 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 * *

    "빌어먹을 꼰대들."

    서아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궁시렁댔다.

    최정훈은 빙긋 웃으며 커피를 타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잔하시죠."

    "그 말라붙은 피부터 좀 어떻게 하세요. 누구한테 맞았어요?"

    일에 맞았지, 일에.

    네가 내버려 두고 간 일에 얻어맞았지!

    최정훈은 솟아오르는 울분을 삼키며 말을 돌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지원하기로 결정 났어요."

    "오?"

    최정훈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사태도 겹쳐서 절대 안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군요."

    "멕시코 사태를 보면서 지들도 느낀 게 있겠죠."

    "과연."

    선진국이라고 지칭되는 곳들은 능력자들을 국가에서 관리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는 애초에 국가의 영향력이 극히 미비하다보니 블랙 먼데이를 기준으로 국가의 통제력이 완벽히 상실되어버렸고, 지금은 능력자들이 각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반인과 비교할 수도 없는 힘을 손에 넣은 능력자들이 각자 군벌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있는데다 출현한 몬스터들이 제때 정리되지 않고 있다 보니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아프리카의 경우는 사회 기반 자체가 낙후된데다 블랙 먼데이를 기준으로 체제가 붕괴된 것이라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지금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멕시코 사태였다.

    블랙 먼데이 이전에 마약 카르텔과 정부군 간의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던 멕시코는 최근 들어 그 균형이 완전히 카르텔 쪽으로 넘어갔고, 불과 보름 전에 능력자들이 중심이 된 카르텔이 쿠데타를 통해 완벽히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이 바로 위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기에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 사건이 던진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능력자들이 마음먹고 집단을 이루어 대항한다면 국가기관의 전복을 이뤄낼 수 있다는 선례가 생겨 버린 것이다.

    "단순히 그쪽 이야기라고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각국들도 지금 다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중이죠. 이 균형이 깨지는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그래서 준비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감추려 애썼다.

    정형에서 벗어나는 게이트의 출현과 갈수록 불만이 고조되어 가는 능력자들에 대한 통제를 위해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자고 제안한 것은 사실 그였다.

    그렇지만 그 스스로도 과연 이 기구가 모든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통제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해.'

    어쩌면 역차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차별이 없다면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능력자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럼 이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서아영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지혁인데……."

    "하아……."

    "어휴……."

    회의실의 모두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지?"

    최정훈이 말없이 자양강장제 한 병을 더 까서 텀블러에 쏟아 넣었다.

    그건 사람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스트레스 유발제다.

    김재범이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러는 건 어떻습니까?"

    * * *

    둘의 시선이 김재범을 향해 모였다.

    "듣자하니 그 양반··· 걸어 다니는 핵폭탄 수준인데, 통제도 안 되고 개념도 없고 답도 안나온다면서요?"

    "싸가지도 없어."

    서아영의 추임새에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상식도 없지'라도 덧붙였다.

    "여하튼 그럼 노답 아닙니까. 답이 없죠."

    "그렇지."

    김재범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답은 하나밖에 없죠."

    "뭐?"

    "아무도 모르게 슥삭. 슥삭 아시죠? 슥······."

    미쳐 '삭'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서아영이 김재범을 걷어찼다.

    "아악!"

    "야! 이 미친놈아! 이게 무슨 쌍팔년 대 첩보 영화냐!"

    "악! 팀장님! 거긴 안 됩니다! 거긴 밟지 마시고!"

    최정훈은 텀블러 속에서 찰랑거리는 자양강장제를 음미하며 말했다.

    "거, 자꾸 밟았던 데만 밟지 마시고 두루두루 밟으셔야죠. 예, 좋습니다."

    저게 자꾸 미드만 보더니, 드디어 맛이 좀 간 모양이다.

    "암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 앉은 서아영이 씩씩댔다.

    김재범은 억울하다는 듯 낑낑대며 자리에 앉았다.

    "김재범 씨?"

    "예, 부팀장님?"

    "업무가 많아서 머리가 좀 뻑뻑해요? 그게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잖아요?"

    김재범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젠가 꼭 이런 말을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건 CIA가서 하시고."

    최정훈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암살, 암살이라······.

    "그런 게 가능하면 고민하지도 않지."

    "불가능해요?"

    서아영이 은근히 물어온다. 격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아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다.

    "직접 들어보시죠."

    "가윤이한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가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자를 빼 앉은 그녀의 앞에 최정훈이 익숙하게 커피를 타 내밀었다.

    "어때?"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물음에 도가윤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

    "너도 안 되는 거야? 사람을 더 붙여주면?"

    도가윤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접근 자체가 불가능함. 최소 30m 이상 거리에서 감지. 전투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은 예측 불가능. 최악의 상황 가정 시 전멸. 대상자 피해 없음."

    "음, 그렇게 된다면······."

    최정훈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벌집을 건드린 꼴이 되겠죠."

    서아영의 얼굴도 조금 창백해졌다.

    아직 그녀의 뇌리에는 그날 본 그 광경이 화인처럼 박혀 있었다.

    그 정체도 짐작할 수 없는 미증유의 '그것'이 그들을 향한다?

    그건 단순히 재앙이란 말로 표현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재범의 말이 이곳에 모인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건드리기가 겁난다.

    하지만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시한폭탄인지 지뢰인지 알 수 없는 종류의 폭탄이 그들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무시하자니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겠고, 뭘 해보려니 건드리자마자 터질까 봐 겁이 난다.

    "왜 하필 이런 때 그런 인간이 나타나서는."

    서아영이 한숨지었다.

    분위기가 축축 처진다.

    "흐흠······."

    그러자 최정훈이 분위기를 환기하고 나섰다.

    "일단 정리해 보죠."

    일단은 이지혁이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야 대처 방법을 논의할 수 있다.

    "우선 좋은 점은 그 이지혁 씨가 나대는 성격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로 분석하자면, 외부적 자극이 없었을 때는 서식지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히키코모리니까."

    "확실함."

    최정훈은 쓸데없는 추임새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외부 자극에 대한 민감도가 낮습니다. 그 양반이 민감한 타입이었다면 KSF로 연행해 온 순간, 지부 전체가 날아갔을 겁니다. 3일이나 감금해 뒀음에도 뒹굴대며 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볼 때, 성격적으로도 꽤나 무던한 타입입니다."

    "너무 무던하지."

    "입은 무던하지 않음."

    최정훈은 다시금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일단 종합해 보자면, 터졌을 때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쉽게 터지지는 않는 폭탄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단점인데······."

    최정훈의 목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점 외의 모든 것이 단점입니다. 돈, 여자,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다가 세상만사를 귀찮아하고 관심을 가지는 건 게임이 거의 유일하고, 말버릇 더럽고, 성격 나쁘고, 싸가지 없고, 연장자를 배려하지 않으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패션 센스가 나쁜데다가 게임을 더럽게 하며······."

    "거기까지."

    서아영이 최정훈의 말을 끊었다.

    '많이 쌓였구나.'

    저건 분석이라기보다는 거의 뒷담화다. 저 사람 좋은 양반이 저리 악담을 늘어놓게 만드는 이지혁이 정말 대단한 인간인 거다. 물론 나쁜 의미로.

    "그 정도면 거의 인간쓰레기 아닙니까?"

    "폐기물."

    "그나마 욕심이나 이런 측면이 없어서 범죄에 연루될 가능성이 낮다는 게 위안이긴 합니다만."

    최정훈이 한숨을 쉬었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걸어 다니는 폭탄 수준인데, 회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통제를 받아들일 생각도 없어 보이고요. 지금 이대로라면 새로운 기구가 출범했을 때, 위험 요소가 될 겁니다. 그럴 확률은 적겠지만, 기구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고······."

    최정훈은 뒷말을 삼켰다.

    그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능력자들을 규합하려 든다면, 지금의 정부가 과연 그를 막을 수 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서아영이 그의 상상을 끊어주었다.

    "정리하자면··· 그냥 내버려 두면 큰 사고를 칠 것 같지는 않은데, 주변에서 그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답이 안 나온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차라리 우리 측에서 주변을 차단하고 감시 체제로 들어가는 건 어때요? 트러블 자체를 원천 차단하면 문제가 생길 위험도도 줄어들 것 아니에요?"

    "그걸 언제까지 할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더구나 감시 체제를 상시 유지하려면 관련 내용을 보고해야 하는데, 과연 이지혁 씨의 존재를 알아챈 상부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문제라서."

    "으음······."

    서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서아영과 최정훈은 일단 이지혁의 존재를 최대한 감추기로 했다.

    보는 눈은 워낙에 많았지만,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지혁이라는 존재를 감추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약 이지혁이라는 통제가 안 되는 재앙을 상부에서 알았을 경우, 보신에 목숨을 거는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이 너무도 쉬웠다.

    까딱했다가는 KSF 소속의 모든 능력자들이 이지혁 하나에게 달려드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건 막아야 했다.

    어느 쪽이 승리하든 국가로서는 피해만 발생하는 최악의 수인 것이다.

    "언제까지 감출 수 있겠어요?"

    "일단 보고를 누락시켰지만, 보는 눈이 워낙에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지혁의 존재는 모르더라도 상황 자체는 입으로 퍼져 나갈 테니, 상부뿐 아니라 타국의 관심을 끌지도 모릅니다."

    "최악이네."

    서아영은 머리를 마구 긁었다.

    엮이기 싫다.

    정말 엮이고 싶지가 않다.

    그렇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그럼 어떻게든······."

    서아영이 답지 않게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회유를 해보는 걸로."

    "끄응."

    "어휴."

    그렇게 대놓고 티 내지 않아도 나도 알아.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을 억지로 집어삼키는 서아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요?"

    김재범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저번에 따로 방법을 생각하고 계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최정훈의 물음에 서아영이 살짝 목을 움츠렸다.

    "나, 나는 그냥······."

    "그냥?"

    "대충 능력자 애들 두엇 불량배처럼 위장시켜서 시비 걸면 참지 못한 이지혁이 싸울 거고, 그걸로 어떻게 잘 엮어서······."

    "네, 아주 잘 엮이겠네요. 멀쩡한 요원 두엇이 굴비처럼 엮이겠죠. 그 와중에 겸사겸사 폭탄과도 다름없는 인간과 악감정도 엮고 말이죠?"

    "아니, 나는 그냥······."

    "팀장님은 앞으로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안 하는 걸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냥 몬스터만 잘 처리해 주세요."

    울컥.

    서아영의 머리에 핏대가 섰다.

    오늘 반드시 퇴근 전에 저 인간의 책상에 산더미 같은 서류를 안겨주리라.

    "그럼 그 방법은 폐기하는 걸로 하고,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예?"

    "저는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방법은 최라에몽이 생각해야죠."

    "아니, 제가 무슨 요술 상자도 아니고, 우긴다고 방법이란 게 척척 나옵니까?"

    "그럼 제 생각대로 한 번 해보실래요?"

    "아뇨. 제가 요술 상자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안 되도 해볼게요. 그러니 제발 참아주세요."

    서아영을 만류한 최정훈이 눈을 감고 고개를 의자에 기댔다.

    방법, 방법이라······.

    최정훈의 입꼬리가 꿈틀꿈틀대더니 서서히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인간을 옭아매서 궁지로 몰아넣을 생각을 하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마구마구 피어오른다.

    '안 돼, 안 돼. 너무 심하게 가서 반발하면 말짱 황이다.'

    적절한 수준.

    절대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자신들이 나빠 보이지도 않으면서 이지혁을 꼬드길 수 있는 방법!

    순간, 최정훈의 눈이 빛났다.

    "이건 어떻습니까?"

    모두의 눈이 최정훈에게로 향했다.

    * * *

    "그 망할 놈이."

    브라드를 처리하고 몰래 빠져나온 이지혁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처리한다고 처리했건만,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일단 전기와 수도는 멀쩡했지만, 가장 중요한 인터넷이 먹통이다. 난리를 피우는 와중에 광케이블이 날아간 건지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일대의 인터넷이 모두 끊기고 만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한 이지혁은 절규했고,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본 어머니의 등짝 스매시에 겨우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사태를 고려하지 못했기에 컴퓨터에는 최소한의 패키지 게임도 깔려 있지 않았고, 인터넷이 없는 컴퓨터란 그저 밤에 야간 조명 대신 쓸 수 있는 발광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휴대폰으로 소설이라도 볼 수 있었기에 참은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엄마 지갑을 훔쳐 피시방으로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설도 보다 보다 지겨워진 이지혁이 찾아낸 것은 TV라는 새삼스러운 문명의 이기였다.

    "히야!"

    이지혁은 TV를 보며 감탄했다.

    예전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가 없어진 5년 동안 달라진 세상은 그를 TV 앞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가 특히나 눈을 부릅뜨고 보는 것은 걸 그룹이었다.

    예뻐서?

    파릇파릇해서?

    아니다.

    지금 이지혁이 보고 있는 화면에 나오는 걸 그룹들은 과거 그가 알고 있던, 귀엽고 춤 잘 추고 노래 적당히 하던 걸 그룹과는 달랐다.

    아니, 그냥 다른 수준이 아니라 차원이 달랐다.

    왜?

    앳된 소녀들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불꽃을 피워내고, 덤블링을 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일명 센터에 서 있는 앙증맞은 여자아이는 전신에서 자체로 드라이아이스 같은 연기를 뿜어내며 신비스러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현대는 대단해."

    베라프에도 마법 소녀야 있었지.

    마법 소녀가 별 건가, 마법 쓰는 소녀면 마법 소녀지.

    하지만 그걸 아이돌로 써먹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역시나 현대! 역시나 대한민국!

    예쁘장한 능력자 애들이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주는데, 옆에서 춤이나 추는 다른 아이돌들이 밋밋해 보일 수밖에.

    "세상 참 희한하네."

    어떻게든 돈 벌 구석을 만들어내는 연예계를 보며 이지혁이 감탄하는 동안 어머니는 어떻게든 놀거리를 찾아내는 이지혁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아들."

    "응?"

    "예원이가 너무 늦네? 전화도 안 받고,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잘 놀다 들어오겠지."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려니 하고 싶은데, 너도 알다시피 이 주변에 난리가 나서 지금 좀 그렇잖니. 가로등도 많이 날아가고, 어두컴컴한데다 총 든 사람들도 자꾸 지나다니고."

    "그 총 든 애들이 다 지켜주는데 뭐가 걱정이야. 엄마도 참, 그러다 주름 늘어."

    "호호호, 우리 아들이 요즘 참 말을 이쁘게 한다. 그지?"

    "헤헤헤, 내가 좀······."

    "그러니까, 오빠라는 인간이 동생이 전화도 안 받고 이 시간까지 밖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당했을지도 모르는데 걱정도 안 되고 TV나 보고 있겠다, 이 말이지? 넌 동생이 걱정도 안 되니? 이 험한 세상에?"

    순간, 이지혁은 빵 터졌다.

    "아하하하핫! 엄마! 걔가 뭔 일을 당해? 뭔 사고를 칠지 걱정해야 되는 거 아냐? 솔직히 하는 말이지만, 걔가 어디 가서 누굴 패고 다녔으면 패고 다녔지, 어디서 맞······."

    이지혁은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굴 옆으로 리모컨이 맹렬한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데 말을 계속 하지는 않을 테니까.

    "맞고 찾아올래, 그냥 찾아올래?"

    "세상 끝까지 뒤져서라도 반드시 고 기집애를 어머니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오냐."

    이지혁은 궁시렁대며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이지혁의 등 뒤로 '테더링도 할 줄 모르는 게'라는 어머니의 비웃음이 들려온다.

    테더링?

    테더링이 뭐지?

    * * *

    정범혁은 방위사 기동대의 대원이었다.

    현재 육군 방위사는 과거의 특전사 이상의 위상을 가진 대한민국 최고의 정예부대다.

    고르고 골라 뽑힌 전군의 특전사들 중에서도 다시 또 고르고 고른 정예만이 입대할 수 있는 부대.

    방위사라는 명예와 일반 군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복지와 봉급.

    더구나 방위사 기동대는 돈 잘 벌고, 빨리 죽고, 연금까지 빵빵하기에 요즘 결혼 대상자로 가장 선호 받는 직업이다.

    아, 빨리 죽고는 빼고.

    그렇기에 정범혁은 방위사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방위사 마크가 찍힌 군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설 때 쏟아지는 선망의 시선. 그런 시선을 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외부적인 선망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진화되고 합리적인 부대에서 근무한다는 내부적 자긍심이 정범혁의 인생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떨어진 명령은 좀 이상했다.

    게이트가 소멸되었기에 방위사의 임무는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잔여 몬스터의 소탕 및 복구 지역에 대한 민간인 출입 통제로 전환되었다.

    그렇기에 일부는 내부를 순찰하고, 나머지 일부 인원들은 외부로부터 작전지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왜 이쪽으로는 통제하지 말라는 거지?"

    정범혁이 맡은 임무는 외부 통제.

    그런데 외부 통제라는 것은 지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라인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야 당연히 그런 식으로 임무가 배정되었다.

    그런데 오늘 떨어진 임무는 이상했다.

    한쪽 지역.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반경 300여 미터 이내로 접근이 금지된 것이다.

    역대로 이런 임무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아파트에 몬스터라도 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정범혁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목 늘어난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담배를 꼬나문 꼴이, 딱 동네 노는 형이었다.

    '쯧쯧쯧.'

    국가가 위기에 처하고 청년 동력이 상실된 이 세태에 저리 놀고먹는 백수 놈을 보자니 기분이 나쁘다.

    그냥 퇴근하고 편한 복장으로 쉬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럼 저 떡 져서 제멋대로 휘날리는 머리는 어떻게 하고.

    게다가 백수는 그에 걸맞은 포스를 뿜어내는 법이다. 정범혁이 보기에 저놈은 백수 중에서도 상급 백수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결코 내 손으로 일을 할 리는 없을 거라는 포스가 강하게 뿜어져 나오지 않는가!

    "세상이 어찌 되려고!"

    정범혁은 혀를 찼다.

    그런데 그 백수 놈이 정범혁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으음?"

    터덜터덜 걸어온 백수 놈이 정범혁을 꼬나보며 말했다.

    "아저씨."

    "예?"

    아무리 놀고먹는 백수 놈이라도 일단은 민간인이다 보니 존댓말을 하는 정범혁이었다.

    "불 있어요?"

    "불요?"

    "쫓겨나다 보니 라이터를 안 들고 나와서."

    정범혁이 인상을 확 썼다.

    이 인간은 지금 그가 뭐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나?

    전신무장을 하고 경계를 서고 있는 사람한테 뭐? 불?

    '이 새끼가!'

    법적으로 엮는 건 과하지만, 따끔하게 훈계 정도는 해야겠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놈이 연장자한테 불을 달라는 것도 건방지고!

    "아니, 너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정범혁의 입을 틀어막고 뒤로 질질 끌고 간다.

    "읍! 읍읍! 읍읍읍!"

    정범혁은 격하게 반항했지만, 마치 파이프렌치 같은 강력한 힘이 반항을 허락지 않았다.

    끌려가는 정범혁의 눈에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이지혁의 입에 자신의 담배를 물려주고 불을 붙이는 광경이 보였다.

    '대체 뭐야, 이것들?'

    순간, 그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KSF다. 안전 수칙 못 들었어, 이 새끼야? 너 상관이 누구야?"

    '망했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결과는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범혁이었다.

    * * *

    "저 아저씨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먼 곳으로 갑니다."

    "아……."

    "그럼."

    "예. 라이터 잘 쓸게요."

    이지혁은 받은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고개를 돌리자 슈트를 입은 남자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편하긴 하네."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잡아 족치기도 뭐하다. 이렇게 담배도 주고 라이터도 주는데 족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아니, 그건 그거고!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이거!

    "아니, 솔직히 말이야 바른말이지, 걔를 누가 잡아가? 소도 잡아먹게 생겼구만!"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다.

    얼마나 위대한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막말로 걔가 어디서 맞고 다닐 사람인가.

    패고 다니면 패고 다녔지.

    정신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30m 전방에서 발견하자마자 가던 길과 관계없이 방향을 틀어 피해갈 인상 아닌가!

    그런 애가 뭐?

    걱정이 된다고?

    차라리 세계 평화를 걱정하시지!

    "어휴."

    이 기집애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이 넓은 동네에서 걔를 무슨 수로 찾아오라고!

    이지혁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엄마!"

    - 왜?

    "솔직히 이거 좀 오버하는 거 같은데, 나 그냥 들어가서 기다리면 안 될…….

    - 세트로 귀가하지 않을 시에는 네 몸뚱아리가 일체형이 아니라 세트형이 될 것이야.

    "안 되겠지. 응, 찾아서 들어갈게. 걱정하지 마, 엄마."

    전화를 끊은 이지혁은 절망에 빠졌다.

    왜!

    도대체 왜!

    베라프의 멸망의 좌였던 그의 위엄이!

    엄마에게는 도무지 통하지 않는 것인가!

    눈빛 하나로 마물들을 굴복시키고, 손짓 하나로 악마를 부리던 자신인데!

    지금은 거꾸로 눈빛 한 번에 엄마에게 굴복당하고, 손짓 하나로 개처럼 부려지고 있지 않은가!

    "에효."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엄만데.

    "이 기집애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분노가 어머니의 위엄 앞에 방향을 꺾어 갈 곳을 찾았다.

    일단 화를 내려고 해도 찾아야 화를 낼 수 있다.

    보자, 보자.

    어디 보자.

    일단 디텍트는 불가능하고…….

    마나가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디텍트 마법이 개인의 마나 성형을 스캔해 탐색하는 것이니만큼 마나가 없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 적용하기는 힘들었다.

    "막막하네."

    이러고 있자니 처음 베라프에 떨어졌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도 참 막막했었다.

    하필이면 떨어진 곳이 밀림 한가운데라 하루에도 세네 번씩 마수들에게 물어 뜯겼다.

    처음 마수에게 잡혀서 뜯어 먹힐 위기에 처했을 때 느꼈던 그 공포.

    몸에 날카로운 이빨이 틀어박히고 살이 뜯겨 나갈 때 느꼈던 그 고통.

    그런데 먹혀도 먹혀도 살이 재생했고,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를 않자 배가 불러 버린 마수가 도망치는 자신을 벙찐 얼굴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도시락이 되었지."

    마수의 숲을 빠져나가는 동안 자신 덕분에 배를 채운 마수들의 수를 세면 백 단위는 쉽게 넘어갈 거다.

    똑똑한 놈들은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배고플 때마다 한입씩 베어 먹었었지.

    나중엔 그게 일상이 되다 보니까 매너 없이 두 입 먹는 놈한테는 죽빵도 날리고 그랬는데…….

    어차피 안 죽는다 싶으니까 겁대가리가 없어졌지.

    어라?

    이거, 알고 보면 굉장히 슬픈 이야긴데…….

    하다 보니 왜 이리 장난스럽냐. 이게 아닌데?

    여하튼 그리 고생고생을 해서 숲에서 빠져나오니 더 난리가 났었다.

    마을을 찾긴 찾았는데…….

    말은 안 통하지, 피부색이 다르지, 생긴 것도 다르지.

    인간인 듯 인간 아닌 인간 같은 놈이라고 마주치자마자 출동한 경비대에 잡혀서 끌려가고…….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이지혁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었다.

    빌어먹을 베라프.

    이계 가서 잘 먹고 잘살았단 이야기는 다 개구라다. 이지혁이 그 동네에 그나마 적응해서 사람답게 살기까지 백 년이 넘게 걸렸다.

    재생하는 몸뚱아리가 아니었다면 떨어지는 순간에 끔살당해 이지혁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상처를 입는 상태를 이지혁의 '죽음'이라고 가정한다면, 백 년 사이에 적어도 오백 번은 넘게 죽었을 것이다.

    "이걸 소설로 써서 연재를 해야 하는데……."

    하지만 개연성 없다고 쌍욕 먹겠지. 다 실화인데! 쳇!

    이지혁은 머리를 흔들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베라프의 기억을 애써 떨쳐 버렸다.

    아무리 뒤져 봐도 좋은 기억이 없는 곳이다.

    "기억을 뒤질 게 아니라 이 기집애를 찾아야 하는데."

    이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앞으로 걸어갔다.

    일단 대책 없이 찾아보는 수밖에.

    공중에서 보면 더 눈에 잘 띄겠지만, 그만큼 이지혁도 눈에 잘 띌 것이다. 그렇다고 인비저빌리티까지 쓰기에는 마나량이 애매하고…….

    마나가 없어보니 새삼 불편함을 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때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베라프에서 돌아오는 데 만 년은 더 걸렸을 거다. 아니,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체적으로 마나를 수급할 수 없던 그는 계약으로 공급되는 마나가 아니었다면 마법사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이지혁은 담배를 꼬나물고 터덜터덜 걸었다.

    자, 생각 없이 찾아다니는 건 멍청한 짓이다. 표적을 좁혀보자.

    좀 노는 양아치라면 이 시간에 보통 어떻게든 술집 하나를 뚫어서 술을 퍼먹고 있겠지만, 고 계집애가 술 냄새 풍기며 들어온 적은 없었으니 이건 패스.

    아니면 부모님이 안 계신 친구 집에 우르르 몰려가 놀고 있을 테지만, 이것 역시 그 집이 뭔지 알아낼 수 없으니 패스.

    그럼 제일 가능성 있는 건…….

    정말 찌질하게 공원이나 놀이터 한구석에 모여서 담배 피고 소주나 까면서 놀고 있는 경우인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내 동생인데… 그래도 급이 있지, 설마 그러지는…….

    "……말라고!"

    허허허.

    하필 이렇게 공원 앞을 지나갈 때, 많이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리는 건 우연이겠지.

    아니겠지?

    "…니까."

    맞는데?

    이거, 백 펀데?

    이거, 만날 나보고 밥 처먹으라고 틱틱대던 그 목소린데?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놀아도 급이 있는데, 자신의 동생쯤 되는 여자가 이렇게 질 떨어지게 논다는 게 서글펐다.

    아무래도 교육! 확실한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

    이지혁은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일련의 무리가 보였다.

    '음?'

    어? 뭔가 생각하던 그런 상황이 아닌데?

    보나마나 새우 과자에 소주나 까면서 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좀 심각한 거 같다.

    누가 봐도 덩치가 좀 있는 놈들이 한 사람을 우르르 둘러싸고 있다. 전형적인 괴롭힘이거나 삥 뜯기의 현장.

    그리고 그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

    금발?

    그으음바아알?

    '예원이?'

    누가 봐도 저거 금발 애 하나를 여러 명이 둘러싼 채 괴롭히고 있는 형세 아닌가.

    거기다 앞에 있는 계집애들이 금발 애를 툭툭 치기까지 한다?

    '저 새끼들이?'

    이지혁의 눈에서 불이 났다.

    내 동생!

    금쪽같은 내 동생!

    아니, 금발 내 동생!

    나중에 크면 오빠한테 시집올 거라던 우리 예원이. 우리 착한 예원이.

    베라프에 갔다 왔더니 지가 이계에라도 갔다 온 양 맛이 가버린 우리 예원이!

    사람이 어떻게 그리 확 변하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애가 저리 왕따를 당하고 있었으면 변할 만도 하지!

    이 바보 같은 기집애!

    오빠한테 말이라도 했으면 그딴 학교 3초 만에 무너뜨려 버렸을 텐데!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예원아!"

    오빠가 간다, 예원아! 오빠가!

    이지혁은 보도블록이 으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어 앞으로 튀어갔다.

    흐릿했던 놈들의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온다.

    "뭐야! 이거!"

    갑자기 사람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자 당황한 놈들이 이지혁을 바라보며 놀라 소리쳤다.

    으득!

    이지혁은 이를 갈았다.

    가까워지자 상황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눈이 퉁퉁 부은 금발 아이와 그 뒤를 둘러싸고 있는 시커먼 사내놈들. 그리고 그 앞에서 아이의 뺨을 때리고 괴롭히고 있는 날라리 계집애들!

    이 양아치 같은 것들!

    감히! 누구를!

    이지혁은 분노와 울분을 담아서 금발 여자애를 괴롭히고 있는 대장 격 여자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울분과 분노와 좌절을 담아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아니, 니가 괴롭히는 쪽이면 어떻게 하냐! 이 미친년아!"

    * * *

    "아야! 이거 안 놔! 야! 놔! 너 좋은 말 할 때 이거 놔라!"

    머리채를 움켜잡힌 이예원은 격렬하게 반항했다.

    아오, 이걸 때릴 수도 없고!

    "이 야밤까지 집에도 안 기어 들어오고 뭐하나 했더니!"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니가 뭔 상관인데!"

    하?

    이 기집애, 말하는 꼬라지 보소?

    성격 같아서는 왕복 쌍싸대기를 날려서 저기 어디 서해 무인도에다 일주일만 데려다 놓고 엉엉 우는 꼴을 보며 과자라도 먹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엄마가 나를 공중에 매달아 놓고 스파이크 서브 연습을 할지도 모른다.

    엄마 손은 약손?

    개뿔이.

    우리 엄마 손은 핵손이다.

    손에 캡사이신이라도 발랐는지 등짝 스매싱을 한 번 당할 때마다 몸이 불판에 올린 마른오징어처럼 오그라들게 만든다고!

    "놔! 이거 안 놔?"

    "어휴."

    일단 이걸 집에 끌고 가서…….

    그때, 양아치 한 놈이 이지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이."

    "응?"

    "좋은 말 할 때 그 손 놓지?"

    …허허허.

    이지혁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지금 이 양아치 놈이 자신을 협박하는 건가? 베라프의 공포였던 자신을?

    이지혁은 눈앞의 양아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복장, 헤어, 인상까지……. 누가 봐도 생양아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놈이었다.

    그런 양아치 놈이 눈을 부라리며 시비를 걸어 대는 꼴을 보니 참…….

    "놨는데요."

    이지혁은 슬그머니 이예원의 머리를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아니.

    솔직히 좀 쫄린다.

    뭐지? 왜 쫄리는 거지?

    이게 성인이 되면 나타난다는 패시브 '고딩공포증'인가?

    왜, 거, 있잖아. 졸업하기 전에는 병신처럼 보이던 골목에서 담배 피는 애들이 졸업하고 나면 던전 몬스터처럼 보인다는 그 질병.

    지금 눈앞에서 야리는 양아치도 양아친데, 그 뒤에 있는 놈은 뭔 조폭도 아니고… 인상이 진짜 먹어준다.

    심약한 사람은 쟤 얼굴만 봐도 병원 실려 가겠는데?

    이 기집애는 놀아도 이런 살벌한 애들이랑 노냐.

    "너 뭔데?"

    "얘 오빤데요."

    "오빠?"

    "예."

    이지혁은 고분고분 대답했다.

    "아니, 오빠면 오빠지, 왜 다짜고짜 애 머리를 잡고 그러세요? 내가 형님 머리채 잡고 흔들면 형님은 기분 좋으신가?"

    "아니죠."

    양아치 놈이 피식피식 웃더니 이지혁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어? 이건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세요, 형님. 아니면 내가 지금……."

    멱살을 잡힌 이지혁이 이 양아치 놈을 어떻게 족쳐야 잘 족쳤다고 뉴스에 나올까 고민하던 시점에 그런 고민을 단숨에 덜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퍼억!

    갑자기 날아온 주먹이 양아치의 면상을 후려쳤다.

    혹시 또 KSF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지금까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인상 더러운 놈이 다짜고짜 양아치에게 죽빵을 들이꽂더니, 바닥에 쓰러진 놈을 자근자근 밟기 시작했다.

    "악! 아악! 아니 왜!"

    "닥쳐, 새끼야!"

    양아치를 잘근잘근 밟아 걸레로 만들어놓은 놈이 고개를 획 돌려 이지혁을 본다.

    '와, 진짜 인상 더럽네.'

    재는 마스크라도 끼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가?

    임산부나 노약자는 시청을 금하시오, 수준인데.

    그 인상 더러운 놈이 이지혁을 뚫어지게 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90도로 폴더 인사를 한 놈이 어울리지 않게 불쌍한 얼굴을 하더니 사정을 한다.

    "쟤가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삼 일 밤낮을 패서라도 가르칠 테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네?"

    이 덩어리가 지금 뭐라는 거지?

    "저 아세요?"

    "물론입니다, 형님!"

    "잘못 보신 건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예원이 오빠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그렇긴 한데……."

    그럼 이 이상한 반응은 뭐지?

    그야 뭐, 베라프에서라면 자신의 얼굴만 보고도 거품 물고 기절하던 인간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는 정말 법도 없이 살 만큼 착하게 살았는데…….

    "누구시길래?"

    이지혁이 묻자 덩어리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형님, 저 창식입니다."

    "창식이?"

    "예, 형님. 저 예원이 친구 창식입니다."

    "창식이, 창식이……."

    그러니까 창식이가…….

    "아! 창식이!"

    예전에 예원이를 좋아해서 짓궂게 괴롭히다가 제보 받고 달려온 이지혁의 브라질리언 킥을 처맞고 병원에 실려 갔던 창식이.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가 이리 되살아나는구나.

    "그래, 창식이. 니가 창식이구나. 창식이… 그런데 너……."

    이지혁은 창식이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힘들었구나."

    "예?"

    "그래도 예전에는 애가 좀 똘망똘망했는데, 대체 뭔 일들을 겪었기에……."

    "예?"

    "힘내, 인마. 사는 게 다 그렇지."

    최창식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형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왜 이리 삭았어?"

    "그냥 유전자가……."

    "부모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

    "원망 안 합니다!"

    유창식은 소리를 꽥! 지르고는 아차 싶었는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여하튼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 저 새끼는 제가 잘 교육시킬 테니까 이번만 넘어가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뭐, 내가 깡패도 아니고, 멱살 한 번 잡혔다고 사람 패기야 하겠어? 그냥 뭐……."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좀 짜증나는 거 같기도 하고."

    "이 새끼야!"

    최창식이 몸을 돌려 냉큼 달려가더니 다시금 양아치를 자근자근 밟았다.

    악악! 소리가 리얼하게 들려오자 이지혁은 감미로운 음악처럼 음미하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찰칵!

    어느새 번개처럼 달려온 최창식이 이지혁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너, 담배 피냐?"

    "헤헤."

    "어린놈이 폐 썩는다."

    "끊어보겠습니다, 형님."

    "음, 뭐, 그건 그렇고……."

    이지혁의 눈에 아직도 도끼눈을 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예원에게로 향했다.

    "창식아, 네가 쟤 데리고 다녔냐?"

    "꼭 제가 데리고 다녔다고는 할 수는 없고… 같이 다녔지요, 같이."

    이지혁이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최창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최창식은 센스 있게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창식아."

    "예!"

    "노는 건 좋아. 노는 건 좋은데, 쟤가 늦게 들어오면 이 형이 괴롭다. 우리 엄마가 날 괴롭히는 취미가 있으시거든."

    "예, 형님."

    "자, 여기 휴대폰에 전화번호 좀 찍어봐라."

    "전화번호요?"

    "그래, 전화번호."

    최창식은 영 껄끄럽다는 기색으로 이지혁의 휴대폰에 번호를 입력했다.

    이지혁은 입력이 끝나자 지체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루루루~

    신호 대기음이 울리다가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혹시 창식이 휴대폰입니까?"

    - 아닌데요.

    "그렇죠? 안 그래도 이상하더라고요. 창식이는 여기 있는데."

    이지혁이 최창식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최창식도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뒈질래?"

    "살려주십쇼, 형님."

    "다시."

    최창식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입력했다. 확인을 끝낸 이지혁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창식아."

    "예. 말씀하십시오, 형님!"

    "이제 쟤가 늦게 들어오면 내가 전화를 할 거다."

    "…예."

    "어디 한 번 도망 갈 수 있으면 도망가 봐라. 나는 너를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늘 그랬듯이!"

    "늘 그러지는 않았는데요?"

    "여하튼."

    최창식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제가 쟤랑 놀기는 하지만 매번 같이 노는 건 아닙니다. 쟤가 다른 애들이랑 놀면 제가 어떻게 찾겠습니까?"

    "창식아, 형이 세상을 살며 느낀 게 있는데, 사람은 말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요?"

    "아니."

    이지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 할 수 없어도 해내라.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너는 반드시 얘를 찾아내서 집까지 끌고 와야 한다!"

    절망에 빠진 최창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이지혁이 이예원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간다."

    "야! 놔! 이거 안 놔! 내 발로 간다고!"

    최창식은 멀어져 가는 이지혁의 등에 대고 인사했다.

    "살펴 가십시오, 형님!"

    이지혁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지자 최창식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 씨발."

    최창식이 담배를 뻑뻑 피워 대는 동안 양아치 놈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최창식이 나서면서부터 사태를 관망하던 놈들도.

    "아니, 창식아. 대체 왜?"

    "시끄러워, 새끼야. 내가 오늘 너 살려준 거야."

    "어?"

    "생각하니 또 빡 치네. 이 새끼야, 오늘 너 때문에 나까지 줄초상 날 뻔했잖아. 와, 살 떨려."

    "뭔 소린지 모르겠네."

    "너, 저 형이 누군지 알아?"

    "누구? 예원이 오빠?"

    "어."

    "나야 모르지."

    최창식은 한숨을 쉬고는 멍청한 친구 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충고하는데, 앞으로 저 형 얼굴 보면 100m 전방부터 도망쳐라. 저 사람… 엮이면 안 되는 사람이다."

    "왜? 능력자야? 예원이 오빠 능력자라는 말 못 들었는데. 아니, 오빠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능력자는 무슨. 씨발, 능력자면 차라리 낫지. 그 새끼들은 민간인 건드리면 바로 잡혀가잖아."

    "그럼 능력자도 아닌데 왜?"

    "세상에는 능력자보다 더 엿 같은 인간이 있는 법이다. 나중에 니 형들한테 이지혁이 누군지 물어봐라."

    "이지혁?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여하튼 상종 안 하는 게 제일 좋아. 하, 젠장. 실종됐다 그래서 속 편했는데, 왜 돌아와서는."

    최창식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앞으로 이예원과 연락을 하면 저 진상이 따라붙을 걸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귀신은 뭐하나, 저런 거 안 잡아가고."

    잡혀갔다 돌아왔다.

    아쉽게도.

    * * *

    아파트 현관 앞까지 끌려온 이예원이 빽빽! 소리를 질렀다.

    "손 놓으라고 했어!"

    "아니, 이 기집애가 진짜?"

    이지혁은 손을 확 놓고는 이예원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그러게 누가 이 시간까지 돌아다니래?"

    "내 마음이지! 니가 왜!"

    "니?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자꾸 니니거리네? 똑바로 못 불러?"

    "왜? 오 년 만에 나타나서는 오빠 노릇 하시게?"

    "아이고, 예원아."

    이지혁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말했다.

    "왜 이렇게 오빠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너 옛날에는 안 그랬잖아. 대체 왜 이렇게 삐뚤어진 건데?"

    "왜?"

    "그래! 도대체 왜!"

    이예원이 어이없다는 듯 하! 웃더니 말했다.

    "아니, 삐뚤어지는 데 이유가 어딨어?"

    "응?"

    "그냥 그럴 만한 인간이니까 삐뚤어지는 거지. 이게 드라마야, 영화야! 이유가 어딨어!"

    설득력 쩌는데?

    정치인 하면 잘할 것 같은데, 얘?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좀 내버려 두라고! 왜 자꾸 귀찮게 해!"

    "나라고 너랑 엮이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냐?"

    "그럼 왜!"

    이예원의 의문을 풀어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내가 시켰다."

    등 뒤에서 나타난 음울한 기운에 이예원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 엄마."

    촤아아악!

    "꺄아아악!"

    등짝 스매싱이 작렬하자 이예원이 불 위에 올려진 오징어처럼 몸을 뒤틀었다.

    박선덕 여사는 몸을 뒤트는 이예원의 뒷덜미를 움켜잡더니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동네 시끄러우니 들어가 이야기하자."

    "엄마! 엄마! 그게 아니고!"

    "시끄러워, 이년아!"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공포로 몸을 떨었다.

    "엄마가 마왕보다 무서워."

    어째 이예원이 왜 저리됐는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지혁은 최창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냥 유전자가……."

    아니겠지.

    아니어야지.

    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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