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화 (5/118)
  • [■] 내 안식을 방해한 대가는 크단다 [■]

    ─────

    남자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시간은 무엇일까?

    인생을 반쯤 결정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려야 하는 고3 1년?

    군대에서 보내야 하는 지옥 같은 2년?

    아니면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야 하는 직장 생활의 수십 년?

    이지혁은 단연코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남자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시간은 이곳에 있노라.

    백화점을 도는 두 명의 여자를 따라다녀야 하는 이 시간이 바로 지옥이다. 그래, 여기가 지옥이다.

    마계도 이보다 끔찍하진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진짜다. 갔다 와봤거든!

    "이건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엄마, 옷걸이가 너무 나빠."

    "오빠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이 정도면 훤칠하니 괜찮지."

    "엄마는 진짜 아들을 사랑하는구나."

    저 계집애, 말 하는 것 좀 보소.

    내가 뭐 어때서?

    이 정도면 잘생겼지!

    "음, 이것도 별로고, 이것도 별로고······."

    "엄마."

    "응? 우리 아들, 왜?"

    "······살려줘."

    "조금만 더 참아. 금방 끝나."

    예, 금방 끝나겠지요. 그런데 어머니, 두 시간 전에도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나요?

    입어본 옷이 스무 벌이 넘었을 시점부터 이지혁은 공황장애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 나··· 담배 한 대만 피고 올게."

    "새 옷 입는데 담배 냄새 배이잖니! 남의 가게에서 그러는 거 아니다."

    "죽을 것 같아."

    "엄살은."

    이 기집애가 이게 엄살로 보이나?

    지하 200층 심연의 탑에 내려갔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시체 썩는 악취와 마물들의 비린내를 맡으면서도 소풍 온 듯 즐겼던 이지혁이다.

    그런 이지혁이 현대의 백화점 한가운데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아직 이 두 여성분은 자신들의 옷을 고르지도 않았다는 거다.

    그때부터 진정한 지옥이 시작되겠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혀온다.

    "엄마,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것만 입어봐. 전에 가게 것하고 비교해서 어느 게 나은지 좀 보게."

    "이것만 입으면 되는 거지?"

    "그래. 얼른 입고 나와."

    이지혁은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입고 나왔다.

    이지혁을 위아래로 훑은 어머니가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흠, 별로네."

    "거 봐, 엄마. 별로라니까."

    "내 눈에는 처음에 입었던 게 제일 나은 것 같은데?"

    "나도 동감."

    "그럼 그걸로 사자."

    이제야 옷 고르기가 끝났다는 기쁨과 지금까지 그의 노력은 다 무엇인가 하는 허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이지혁은 붉어지는 눈가를 훔치며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래도 내 옷 고르기는 끝났다는 안도감이 그를 기쁘게 했다. 이젠 적어도 사지도 않을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고문을 당할 일은 없겠지! 이제 해방이다!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차라리 본인의 옷을 고르는 게 나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양손에 노란색 패딩을 들고 온 어머니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들! 어느 게 더 예뻐 보여?"

    왜 같은 옷 두 벌을 들고 묻는 것일까?

    사이즈가 다르나?

    아니, 로고가 다르니까 다른 곳에서 나온 옷 같긴 한데, 공장이 같은 곳인가? 그냥 로고만 다른데?

    "비, 비슷한 것 같은데?"

    "이게 비슷하다고? 아들! 똑바로 안 볼래? 완전 다르잖아."

    그러니까 어느 부분이?

    "너 진짜 보는 눈이 없구나. 그럼 이거랑 이건?"

    "틀린 그림 찾기?"

    "장난치지 말고."

    "엄마, 나도 장난이었으면 좋겠어."

    어머니 앞에다 게임을 켜고 '트루 샷'과 '파워 샷'을 보여주며 어느 게 나아 보이냐고 물으면 이 기분은 조금을 이해하실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이해를 넘어 해석까지 요구 받은 이지혁은 뇌가 오버 클럭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다, 당분이 필요하다. 달달한 것이 필요해!'

    아니, 그전에 제발 이 창문 하나 없는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

    유리창을 제대로 설치할 수 없는 건축 기술을 가진 베라프에서도 이렇게 창문 없는 건물 따위는 없었다고!

    문명이 퇴화한 것인가!

    어째서 이 건물에는 창문도 시계도 없는가!

    "엄마, 목마른데 어디 가서 음료수라도 한잔하면 안 될까?"

    "아직 덜 골랐는데?"

    "지, 지금 당장 안 먹으면 내가 쓰러질 것 같은데?"

    "엄살은."

    어머니는 꺄륵, 웃으며 이지혁의 등을 팡팡, 내려쳤다. 그 가벼운 두드림에도 육체가 휙휙 꺾인다.

    그 광경을 봐서인지 이예원이 이지혁을 지원사격해 주었다.

    "엄마, 나도 목마른데, 카페 가서 커피라도 먹고 오자."

    "어머? 그럴래?"

    이지혁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이예원을 보았다.

    저 계집애가 오늘따라 왜 이리 이뻐 보이는 것일까? 혹시라도 오래비가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도와주려고?

    역시 우리 예원이구나. 우리 예원이가 어색해서 나를 까칠하게 대하는 거지,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어차피 한두 시간 볼 것도 아니고, 제대로 돌려면 간식도 좀 먹고 와야지."

    ···사갈 같은 년.

    제대로 돌긴 뭘 제대로 돌아? 내 머리가 제대로 도는 걸 보고 싶은 건가?

    "그래, 그렇겠네. 저녁도 좀 늦게 먹을 것 같으니까. 미리미리 간식 먹고 오자. 뭐 먹을래?"

    "나는 마카롱~!"

    "마카롱 좋지."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꺌꺌대며 앞서가는 두 여인의 등을 보며 이지혁은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베라프가 편했어.'

    적어도 거기에 백화점은 없으니까.

    저주 받아라, 망할 지구야.

    * * *

    "난 다크 쇼콜라떼 먹을래. 그거랑 허니 버터 브레드 먹을까? 인절미도 좋을 것 같고, 허니 치즈 브레드도 좋을 것 같은데······. 음, 고민되네. 엄마, 뭐 먹을 거야?"

    "난 그냥 카라멜 마끼아또 먹지 뭐."

    "빵은?"

    "인절미도 맛있을 것 같고, 애플 시나몬? 저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음, 그럼 엄마 우리 허니 버터랑 인절미 하나씩 시켜서 나눠 먹을까?"

    "그래, 그러자."

    당장 며칠 전만 해도 일찍 들어오니 늦게 들어오니로 머리채를 잡으려던 두 사람이 지금은 저리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서운 공간, 백화점 같으니라고.

    "아들, 뭐 먹을래?"

    "코, 콜라?"

    두 여인의 눈이 동시에 가늘어졌다.

    "카페 와서 콜라를 먹어? 아들, 왜 그러니?"

    "어이가 없다."

    "다른 거 먹어, 다른 거."

    양쪽에서 동시에 치고 들어오는 원투 펀치에 이지혁은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하나를 깨달았다.

    현대의 메뉴가 베라프의 룬어보다 어렵다.

    분명 메뉴는 쉽게 쉽게 음식을 고르라는 서비스 제공이고 룬어는 온화한 엘프도 책을 찢어버리게 만든다는 학술 문자이건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다냐?

    대체 저 프라푸치노는 어느 나라 말인가.

    프랄린? 저건 사람 이름인가? 레슬링 잘할 것 같은 이름인데?

    "프, 프라푸치노가 뭐야?"

    이예원이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한심하단 식으로 이지혁을 빤히 보았다.

    어쩌라고, 모르는데!

    "스무디 같은 거야."

    "스무디?"

    "아, 진짜! 쉐이크!"

    아!

    쉐이크구나.

    그럼 쉐이크라고 하면 되지, 왜 이상한 이름을 처붙이는 거냐? 대체 왜? 내가 없는 5년 동안 커피 업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도무지 메뉴를 알아먹지를 못하게 된 건가!

    "그, 그럼 나는 요거트 프라푸치노!"

    드디어 메뉴를 정했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저희 매장에는 요거트 프라푸치노가 없습니다. 대신 요거트 스무디가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뭐가 다른데요?"

    심지어 아르바이트생마저 설명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했다.

    뭐냐? 여긴 마굴이냐?

    아티팩트 상점에 처음 들어간 초짜 법사도 카탈로그를 보며 이리 혼란스러워 하진 않을 거다.

    "어쨌든 전 그걸로 할게요."

    프라푸치노면 어떻고, 스무디면 어떠냐.

    맛만 있으면 그만이지!

    세상 일 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어머니가 빵과 음료를 주문했다.

    "마카롱도요."

    저렇게 퍼먹고 나중에 왜 먹은 게 없는데 살이 안 빠지냐고 징징대겠지.

    아무래도 좋다.

    여기도 건물 지하지만 주변이 형형색색의 옷들이 아니라 우드 스타일의 인테리어인 것만으로도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올라가야겠지만.

    끔찍하다, 끔찍해.

    * * *

    "끔찍하다, 끔찍해."

    이미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며 푸념했다.

    세상은 너무 편리해졌다.

    심지어 매장의 재고를 매장 직원인 이미래보다 손님이 더 잘 알 정도가 되고 만 것이다.

    * * *

    "여기 있다고 확인하고 왔는데요?"

    방문하자마자 다짜고짜 제품 품번을 부르는 손님을 보며 이미래는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재고를 확인하고,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은 제품을 구매하러 발품을 팔아 이곳까지 왔다며 너스레를 늘어놓는 손님을 보며 이미래는 감동과 곤혹을 동시에 느꼈다.

    어떻게든 신발 한 족이라도 더 팔 수 있다는 감동과 손님이 말한 제품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곤혹.

    그 혼돈에서 이미래를 구원한 것은 사장님의 한마디였다.

    * * *

    "지하 재고 창고에 우리 제품 몇 개 있지 않나?"

    구원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

    덕분에 이미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긴 채 지금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좋은 세상이다, 좋은 세상이야."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작년 지하 창고로 내려 버린 덕분에 매장 직원인 이미래도 모르고 있던 재고를 손님이 알아서 찾아온다.

    덕분에 사장님은 즐겁고, 이미래는 피곤했다.

    특히나 지하 주차장의 미묘한 냄새를 싫어하는 이미래는 빨리 제품을 찾아 돌아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 이 냄새 정말 싫어."

    이미래는 종종걸음으로 지하 주차장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재고 창고로 향했다.

    원래 의도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워낙 발 닿기가 어려운 곳이다 보니 반품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한 악성 재고를 보관하는 곳이다.

    좁은 매장 창고를 감안하여 백화점에서 시범적으로 마련했던 공간이지만······.

    '말이야 좋지.'

    거꾸로 말하자면 내 제품을 다른 매장 주인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에 함께 보관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말이나 되나.

    더구나 입점 업체끼리의 경쟁이 터져 나가는 백화점에서?

    덕분에 창고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미래도 거의 반년 만에 내려가는 창고였다.

    창고 열쇠 소지자를 찾는 데만 시간이 한참 걸렸을 정도이니, 다른 매장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에이······."

    창고 문을 걸어 잠근 커다란 자물쇠에 회색으로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보며 이미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에 손이 닿는 건 정말 싫은데.

    최대한 손가락을 활용하여 자물쇠를 연 이미래는 쇠끼리 마찰하는 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 켜는 데가······."

    어둡다. 스위치를 찾아야 하는데······.

    스마트폰을 꺼내 보조 등을 킨 이미래가 스위치를 찾아 벽면을 더듬었다.

    "아, 여기."

    스위치를 누르자 커다란 창고에 불이 들어왔다.

    "우리 재고가······."

    매장에 배정된 재고 위치를 찾으려 고개를 돌린 이미래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과도한 크기에 비해 텅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인 창고 한가운데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건?

    이미래의 손이 스마트폰을 놓쳤다.

    탕!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튕겨 나간다. 하지만 그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이미래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악!"

    * * *

    "뭔 소리예요?"

    "백화점! 백화점 지하입니다! 지하라구요!"

    서아영의 머리가 최정훈의 보고를 즉각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벅댔다.

    백화점?

    백화점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지하라고?

    지하에 왜 게이트가 열린다는 말인가.

    "지하에 게이트가 열린 적은 없었잖아요."

    "그랬죠. 그런데 지금 열렸습니다."

    "그런 케이스가 없는데······."

    "팀장님!"

    최정훈이 단호하게 서아영의 말을 잘랐다.

    "케이스 연구는 나중에 하시죠. 지금 중요한 것은 레벨 2급 게이트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 위치가 하필이면 백화점 지하라는 겁니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안 가십니까?"

    최정훈의 일침에 서아영도 이성을 되찾았다.

    백화점은 사람이 몰린다.

    백화점 주변 역시 상권이 발달해 있을 테니, 인구밀집도가 굉장히 높을 것이다.

    그런 곳에 게이트가 열린다?

    "활성도는요?"

    "바로 근처 지부를 통해 측정기를 보냈습니다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활성도는 최소 90%입니다."

    "90퍼센트······."

    서아영이 신음하듯 말했다.

    90%.

    그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90에서 100까지 이행되는 데 삼 일이 걸리는 게이트가 있는가 하면, 단 한 시간 만에 변하는 게이트도 있으니까.

    "우선 대응반 급파하세요. 주변에 소환 가능한 능력자들 파악됐나요?"

    "지금 파악 중입니다. 일단 10여 명은 확보했습니다."

    최정훈의 폰이 계속 번쩍대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지시해 둔 일이 계속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모두 콜하시고 우리 측 인원들도 당장 투입하세요. 방위사에는 제가 협조 요청할 테니 저희 타고 나갈 차량··· 아니, 헬기 준비해 주시구요."

    "예."

    "서두르죠! 늦으면 진짜 재앙이 벌어질 테니까요."

    대답도 하지 않고 뛰듯이 밖으로 나간 최정훈을 보며 서아영은 전화기를 들고 방위청 핫라인 지정 번호를 눌렀다.

    '제발.'

    * * *

    "다, 당분이 필요하다."

    이지혁은 덜덜 떨리는 손을 보며 설탕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커피를 자메이카에서 직접 채취해 오는지 주문한 지가 언젠데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 당분!"

    "아, 쪽팔려. 조용히 좀 해."

    "그래, 아들. 다른 사람들이 본다."

    어머니, 지금 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중요하신가요?

    우우웅!

    그때, 진동 벨이 울리며 이지혁은 화색이 되었다.

    당장 진동 벨을 들고 카운터로 뛰어가려 했지만,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고 이예원에게 눈짓했다.

    "얼른 다녀와."

    "내가?"

    "그럼 오빠보고 갔다 오라고 하리? 기본 아니야?"

    쀼루퉁해하는 이예원을 보며 이지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깟 커피, 누가 가져오는 게 뭐가 중요한가!

    "내가······."

    하지만 어머니는 이지혁이 집어 들려던 진동 벨을 독수리처럼 낚아채고는 이예원에게 내밀었다.

    "다녀와."

    "에이 씨."

    이예원은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진동 벨을 받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너도 자꾸 어리광 받아주지 마. 애 버릇없어져."

    "뭔 커피 받아 오는 거 가지고 그래."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그런 것 하나에서 위계가 잡히는 거야. 예원이가 너 우습게 보면 어쩌려고 그러니?"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미 어머니의 딸은 오래비를 사람으로도 안 보는 것 같습니다.

    다 못난 제 탓이지요.

    그때, 날카로운 이예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요거트 스무디예요?"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의 착오로······. 금방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뭐하는 거예요! 진짜!"

    이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왜 저래요?"

    "그러게?"

    이예원이 씩씩거리며 자리로 와서 쟁반을 내려놓았다.

    쇼콜라떼와 인절미 토스트, 허니 버터 브레드와 카라멜 마끼아또.

    "······내 건?"

    "아니, 저것들이 요거트 스무디 주문했는데 바나나 요거트 스무디를 주잖아."

    요거트에 바나나가 들어가면 뭐가 터지기라도 하나?

    거 시키지도 않았는데 과일까지 넣어 주면 건강에도 좋고, 서로 좋은 거지.

    "그래서?"

    "바꿔 달라 그랬어. 성질 같아서는 환불하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 참았어."

    "아··· 그렇구나. 난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건 기본적인 서비스야."

    "그래, 아들.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으응."

    이지혁은 바나나와 요거트가 만났을 시에 벌어지는 화학작용에 대해 고민하며 허니 버터 브레드에 손을 뻗었다.

    찰싹.

    "먹고 싶으면 시켜 먹어.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하거든?"

    "시킬 때 가만히 있다가 꼭 나오고 나면 한입 달라고 하는 사람들 진짜 극혐."

    "······."

    아아, 멸망의 좌여.

    베라프의 악몽이여.

    강산이 백 번 바뀔 긴 시간을 지나 마침내 돌아온 너의 고향은 허니 버터 브레드 한 조각 허락하지 않는구나.

    "좀 먹을 수도 있지!"

    엄마와 예원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아, 내 당분이······.'

    이지혁은 간절함이 어린 눈으로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문명 세계다.

    기계가 모든 것을 대신 해주는 시대가 아닌가.

    그래,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당분은 조금만 기다리면 그의 손으로 들어올······.

    위이이이이이잉!

    그 순간,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긴급 상황입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침착하게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침착한 자세로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가자, 아들."

    "어, 어딜?"

    "실제 상황이라잖아. 빨리 대피소로 가야지."

    "네?"

    이지혁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다급한 얼굴을 한 채 매장 밖으로 뛰어 나가고 있었다.

    민방위 훈련이 있어도 어디 불이라도 났나 하며 어슬렁거리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어서!"

    "아니, 내 스무디가······."

    "지금 스무디가 문제야? 빨리 와!"

    이지혁은 어머니의 손에 팔을 잡혀 질질 끌려갔다.

    "아니, 내 스무디······."

    "이따 다시 사 줄게."

    "그, 그럼 먹던 거라도 가져가지!"

    "빨리 안 와?"

    이지혁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음료와 빵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긴급 상황은 빌어먹을. 내가 긴급인데."

    "뭐라는 거야?"

    퉁명스런 이예원의 반응이 더욱 슬픈 이지혁이었다.

    * * *

    헬기가 채 바닥에 착륙하기도 전에 서아영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최정훈은 얼굴을 굳혔지만, 엄살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뒤따라 뛰어내린 최정훈이 바쁘게 서아영을 쫓았다.

    "대피는?"

    "일단 대피소로 대피 명령 내렸습니다. 경찰 병력이 지금 현장 확인 및 통제 중입니다."

    "측정은 됐어요?"

    "아직입니다."

    "콜한 사람들은요?"

    "세 명은 도착해 있고 나머지는 오는 중입니다. 두엇 빼고는 제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방위청에서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 일단 바리게이트 쌓아주세요. 바리게이트 확보하고 포위망 만들어놓고 후방부터 다시 대피합니다."

    "예."

    엘리베이터를 잡아탈 시간도 아까워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던 서아영이 짜증 가득 담긴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게이트가 이 지경이 되도록 왜 발견을 못한 거래요!"

    "안 쓰는 창고 안에서 발현한 모양입니다."

    "안 쓰는 창고가 말이 돼요? 여기가 부두예요, 아니면 컨테이너 야적장이에요! 하필 왜 여기서······."

    최정훈은 입맛을 다셨다.

    최종 책임자답지 않은 언행이지만, 그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왜 하필 그 많은 포인트 중 이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답답한 것은 최정훈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필······."

    레벨 2급 게이트는 평상시라면 딱히 문제가 될 사안은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게이트 발현 지역이 지하라는 것이고, 하필 그 지하 위로 10층짜리 백화점 건물이 들어서 있다는 점이었다.

    중화기를 활용하려다 건물 기둥 두어 개만 부서져도 서울시 한 복판에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진풍경이 벌어질 것이다.

    중화기를 조심한다고 해도 몬스터들이 기둥을 내버려 둔다는 보장이 없었다.

    '최악이야.'

    최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어떻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최정훈은 계단을 내려가며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민간인 수색 똑바로 하라고 해요. 두 번, 세 번 살피란 말입니다. 백화점 건물뿐 아니고, 백화점 붕괴 시 영향 받을 만한 주변 건물까지 모조리 확인하라고 하세요."

    이렇게까지 지시했는데도 꼭 어디선가 민간인이 발견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전기를 내리는 순간, 날카로운 비프음과 함께 무전기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익!

    - 게이트! 게이트가 열립니다! 몬스터 출현!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최정훈이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서고는 무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터졌다.

    * * *

    대게이트 진압 작전의 요체는 간단하다.

    공간 섬멸.

    게이트가 나타난 주변은 완전히 비우고 병력으로 둘러싸 몬스터들이 퍼져 나가기 전에 완전히 섬멸한다.

    5년간 몬스터로 몸살을 앓던 국가들이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은 끝에 마련한 일종의 매뉴얼이었다.

    첫 번째로 주민들을 대피시킨다.

    두 번째로 능력자들을 게이트 주변에 대기시켜 몬스터들이 집단을 이루기 전에 나오는 족족 섬멸한다.

    그 와중에 빠져나가는 몬스터들은 후방에서 포위한 채 둘러싸고 있던 군 병력들이 사살한다.

    이 세 단계가 기본이었다.

    물론 시간이 좀 더 주어질 경우는 몬스터들이 나오는 주변을 강화 콘크리트나 강화 스티로폼으로 완전히 둘러 돔을 만들어 빠져나갈 확률을 원천 차단한다거나 상황에 따라서 크레모아 등을 선매설하여 화기 선공격을 시행한다거나 하는 바리에이션 등은 있지만, 대체로 위의 과정을 따랐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은 두 가지를 전제로 했다.

    하나, 모든 게이트는 지상에 나타난다.

    둘,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지는 최소 3일의 시간이 걸린다.

    이 두 가지 전제가 맞아떨어졌기에 세워진 매뉴얼이다. 이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가던 KSF와 방위사는 사소한 변수 하나만으로 모든 매뉴얼이 무력화되는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

    게이트의 지하 출현.

    그 하나만으로 게이트 발견 시간이 늦어졌고, 지금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 * *

    "갈겨!"

    "제기랄!"

    투두두두두!

    K7A1 전자동 소총이 불을 뿜는다.

    창고 입구로 밀려 나오던 MC(Monsters Classification) No. 7, 트랜들(Trandal).

    통칭 빌더 몽키(Builder Monkey)라 불리는 몬스터들이 소총탄에 피를 뿌리면서도 앞으로 뛰쳐나왔다.

    화망을 구성하지 못한 소총 화력으로는 빌더 몽키의 두터운 팔을 뚫을 수가 없었다.

    "아아악!"

    빌더 몽키에게 발을 잡아 채인 군인이 비명을 질렀다.

    "피해!"

    잡힌 순간, 끝이었다.

    구할 수가 없다. 구하려면 총을 갈겨야 하는데, 이미 사람을 방패처럼 휘두르고 있는 놈에게 총을 쏘면 잡힌 동료를 죽이는 꼴밖에는 안 된다.

    "씨발! 왜 벌써 열린 거야! 왜!"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고함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퍼억!

    벽으로 날아간 군인이 벽과 부딪쳐 튕겼다.

    공정식 중령은 벽과 충동한 부하가 살아 있기를 빌며 소리쳤다.

    "뒤로! 뒤로! 천천히 거리를 벌려! 입구 쪽으로 화력집중하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의외로 창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빌더 몽키의 수가 많지 않았다. 두터운 표피가 소총탄을 거의 막는다고는 해도 전신에 수백 발의 총탄이 쏟아지는 충격을 버틸 수는 없는 법.

    몇 마리 되지 않던 빌더 몽키가 제압되어 하나하나 바닥으로 쓰러졌다.

    "1소대, 입구 진입로 확보해! 나머지는 경계 및 엄호한다."

    "충성!"

    1소대장의 지휘로 2개 분대가 입구 좌우로 몸을 붙인다.

    웬만해서는 저 안으로 진입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작정 입구만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적어도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확인해야 했다.

    "돌입해!"

    "돌입!"

    분대당 두 명이 입구로 총구를 겨누고 남은 인원들이 안으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하나······.

    "아아아악!"

    "아악!"

    돌입했던 병력들이 장난감처럼 밖으로 튕겨 나왔다. 입구를 경계하던 인원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동료와 뒤엉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투두두두!

    "아아악! 제기랄!"

    "피해!"

    의식을 잃으며 방아쇠울에 걸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는지 총이 불을 뿜었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일단의 병력을 날려 버린 빌더 몽키들이 밖으로 뛰쳐나오며 군인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진형이 와해된다.

    공정식 중령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붙지 마! 붙지 말라고, 이 새끼들아! 물러서!"

    소총수들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미 근처까지 따라붙은 빌더 몽키들은 속도와 순발력이 일반 군인에 비해 너무도 우월했다.

    떨쳐 낼 수가 없다.

    순식간에 병사 네다섯이 피떡이 되어 튕겨 나가자 공정식은 무전기를 들고 쌍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씨발 돌연변이 새끼들아! 우리 애들 다 뒈져야 도착할 거냐?"

    대답은 무전기 안이 아니라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안 그래도 늦어서 잔소리 듣게 생겼는데, 아저씨까지 그러시면 저희 입장이 매우 곤란해지죠."

    공정식이 놀라 뒤를 돌아보자 반팔 셔츠가 매우 인상적인,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기적어기적 걸어오고 있었다.

    "사이커?"

    "아니면?"

    공정식은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좀 해보라고!"

    남자는 혀를 차면서 공정식을 지나 빌더 몽키들을 향해 걸어갔다.

    "쯧, 그러게 뭔 배짱으로 이 좁은 데서 총 하나 달랑 들고 저것들을 막겠다고."

    남자는 군인 하나의 다리를 잡고 찢을 듯 벌리고 있던 빌더 몽키의 양팔을 움켜잡았다.

    우드드득!

    순간, 남자의 두 배는 될 듯한 빌더 몽키의 팔이 부러지며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꺄갸갸아아악!

    빌더 몽키의 고함 소리를 들은 남자가 인상을 쓰며 빌더 몽키의 얼굴에 주먹을 말 그대로 박아 넣었다.

    콰득!

    빌더 몽키의 얼굴이 꿰뚫리며 축 늘어졌다.

    남자는 주먹에 대롱대롱 매달린 빌더 몽키를 털어내고는 어느새 그를 포위한 빌더 몽키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컴 온."

    빌더 몽키들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남자에게 달려들자 남자는 씨익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여하튼."

    공정식은 그 광경을 보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몇 번을 봐도 비현실적이었다.

    인간을 손쉽게 찢어발기던 괴물들이 인간의 손에 도리어 찢겨지고 말 그대로 부서지는 장면은 언제 봐도 유쾌하지 못했다.

    '어느 쪽이 괴물인지······.'

    괴물이라는 단어의 뜻을 풀어보자면 빌더 몽키 쪽이 좀 더 가깝겠으나 직접적으로 받는 느낌은 저 능력자 놈들이 더 괴물 같았다.

    "작전과장님."

    부하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공정식이 어느새 빌더 몽키를 모조리 곤죽으로 만들어놓은 사내를 보았다.

    "이게 끝이야, 아저씨?"

    "일단은. 다만, 저 안쪽에 게이트가 열렸는데, 지금 내부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그래? 그럼 들어가 봐야지."

    "조심해라."

    "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군인이 나 같은 돌연변이 새끼도 걱정해 주고 말이야."

    "니가 뒈지면 우리도 위험하니까."

    "예이, 예이."

    남자는 너스레를 떨며 창고 입구로 걸었다. 걸어가는 도중 남자가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 이거 레벨 2라고 들었는데, 상위 클래스 몬스터는 못 봤어?"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게 우리가 본 전부다."

    "이상하네? 레벨 2급이면 저 안에 얌전하게 있지는 않을 텐데."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남자가 들어가고 나자 공정식은 뒤를 지키고 있던 정보과장에게 물었다.

    "저거 누구야?"

    "아이언(Iron)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이언? 아이언 박성찬?"

    "예."

    공정식이 '호오?' 하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자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았다.

    아이언 박성찬이라면 그도 몇 번이고 들어본 자였다. 수많은 능력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나 있다면 그 능력은 확고하다 해도 좋았다.

    "다행이네. 그래도 빨리 투입된 놈이 알 만한 놈이라서."

    하지만 아이언은 그들의 안심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거기 아저씨!"

    저 호칭만 어떻게 좀 바꿔주면 몇 배는 더 좋은 눈으로 봐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왜?"

    "여기 좀 들어와 봐야겠는데? 아무래도 문제가 좀 커질 것 같아."

    "뭐라고?"

    공정식이 달리듯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황급히 따르던 부하들은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갑작스레 멈춰 선 공정식을 들이받지 않기 위해 좌우로 우르르 쓰러졌다.

    "아니, 작전과장님!"

    불만을 토하려던 정보과장을 위시한 이들은 공정식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공정식이 보고 있는 곳.

    창고의 천장.

    그곳에는 전차도 지나갈 만큼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좆 됐다."

    공정식의 힘없는 뇌까림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정보과장이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공정식은 굳이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 역시 패닉에 걸리기 일보직전이었으니까.

    피해가 클 것을 각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피해가 적고 몬스터들의 수가 적다고 생각했더니······.

    "KSF 연결해서 상황 설명해. 방위사에도 추가 지원 요청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주변 다 틀어막으라고 해! 특히 지하철로 가는 길목은 어떻게든 막아! 이 새끼들이 지하철 노선 타고 퍼지면 진짜 지옥 된다!"

    "예, 그러겠습니다!"

    "서둘러!"

    "예!"

    아이언은 공정식의 일처리를 지켜보다 천장을 향해 점프했다.

    "그럼 나는 뒤쫓아볼 테니, 뒤처리 좀 부탁해요."

    "수고하라고."

    공정식은 무전기를 꺼냈다.

    이 사태를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까?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무전기를 몇 번이고 입가로 가져가려다 내린 공정식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 * *

    "갑갑하다······."

    이지혁은 좌우로 밀려오는 사람들의 압력에 오징어처럼 짓눌리고 있었다.

    "좀 참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그녀 역시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닌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콩나물시루처럼 빡빡하게 들어찬 사람들 사이에서 버티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돼?"

    "대피 명령 해제될 때까지."

    "끙."

    이지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안과 불만이 점철된 얼굴들이지만, 누구도 딱히 나서서 불만을 제시한다거나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변했군.'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들이 출현한 이후, 사람들은 통제에 따르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목숨을 지킬 확률을 높일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실감한 듯했다.

    항상 이런 압박감 속에서 살고들 있는 걸까?

    그런데 사회가 잘 돌아간다고?

    지금 당장은 생존에 대한 욕구가 크고 사회 전반이 경직되어 있으니 드러나지 않을 뿐, 내재된 불안과 트라우마는 상당할 것이다.

    그게 터지는 순간이 온다면······.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뭔 소리야?"

    "아냐."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근처에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 같다. 그것도 대비할 시간도 없이 급박하게.

    '그럼 그 양반들이 오는 건가?'

    KSF. 딱히 나쁜 기억은 없다. 아니, 되레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엮이고 싶은 생각이 없을 뿐.

    "으아아아아앙!"

    그때, 구석에서부터 애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를 진정시키려 부모가 애를 쓰고는 있지만, 몇 시간 넘게 한곳에서 가만히 있는다는, 성인도 힘든 일을 아이가 버텨낼 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것을 아는 성인들도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었다.

    "거, 좀 조용히 시킵시다."

    "시끄러워 살 수가 있나, 진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이의 부모는 연신 주변을 향해 사과를 했지만, 아이를 말리는 데 실패했다.

    도리어 한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연쇄적으로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 울음을 계기로 대피소 내부가 점점 패닉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엄마,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돼?"

    "조금만 더 참아보자."

    이예원도 불안한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물론 이지혁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지혁은 인상을 썼다.

    '게이트만 닫아버리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대피소라 명명된 강당 같은 홀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물론 그전에 풀려 나온 몬스터들을 쓸어버린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방법이야 알고 있지만, 그 방법을 직접 시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미쳤나.'

    이 동네에서도 목숨 걸고 싸울 것 같았으면 미쳤다고 그 고생을 해가면서 지구로 귀환했겠는가.

    귀환의 목적은 간단했다.

    투쟁 없는 편안한 여생.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올 죽음.

    말이 우습기는 하지만, 그는 죽고 싶어서 지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제 와 무슨 이타심이 있다고 앞장서서 괴물들이랑 싸우겠는가.

    단연코 사양이다.

    게다가 또 하나, 아주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서아영이나 최정훈은 그가 힘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특별한 방법으로 측정을 피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힘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속이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그저 일반인.

    베라프로 넘어간 때부터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평범한 일반인이던 이지혁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800대의 측정치는 지금 이지혁의 상태를 정확하게 측정한 것이다.

    이지혁이 베라프에서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원형 복원의 법칙에 가까운 절대적 재생 능력 때문이지, 결코 그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원형 복원 능력이 없었다면 베라프에 떨어진 지 세 시간 만에 죽었을 것이다.

    "죽는단 말이지."

    거꾸로 말하자면 지구로 돌아온 이지혁은 원형 복원 능력을 잃은, 아주 평범한 지나가는 행인 1에 불과했다.

    물론 베라프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얻은 경험과 능력을 통해 일반인에 비해서 우월한 전투 능력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단지 그뿐.

    까딱하면 스쳐도 죽는 상황에 제 스스로 뛰어들 미친놈은 아니었다.

    막말로 처음 귀환했을 때, 그 자르체프인가 하는 몬스터에게 일격을 처맞는 순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부족한 마나량으로 실드는 발동되지 않았고, 순간적으로 강체법을 걸지 않았다면 일격에 머리가 없어졌을 것이다.

    당시에는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유쾌해서 참을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섬뜩한 일이었다.

    그런데 미쳤다고 다시 괴물과 싸우겠는가.

    남은 세월,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컴퓨터나 하면서 띵가띵가 여생을 보내는 것이 이지혁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진정하십시오! 곧 진압될 것입니다!"

    대피소 안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 병력들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불만이 가득했던 사람들이 경찰의 말에 일단은 알았다는 시늉을 한다.

    블랙 먼데이 이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화된 공권력은 겉으로나마 사람들의 불만을 진압해 낼 수 있었다. 물론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애들은 애들이니까."

    문제는 애들이 아니라 이지혁이었다.

    '목마르고 힘들다. 당분이 필요해.'

    그 요거트 스무디 한 잔만 먹었어도!

    바나나가 좀 들어가면 어떻다고, 저 까칠한 계집애!

    어떻게든 당분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당분을 구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쿵.

    가볍게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불안에 떨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모인다.

    대피소의 커다란 철문.

    그곳에서 난 소리였다.

    쿵!

    좀 더 큰 충격이 와 닿았는지 문이 부르르 떨리며 먼지를 피워 올린다.

    경찰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수도권의 건물 밀집 지역에도 게이트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대피소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전시를 상정한 대피소의 수는 한계가 있고, 1,500만에 달하는 수도권 인구를 대피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회의를 거듭한 정부는 이윽고 반쯤 정신이 나갔다고 칭해지는 정책을 들고 나왔다.

    전 지하의 대피소화.

    게이트가 지상에서 나타난다는 것에 착안하여 지하철역과 지하상가 등 지하에 있는 모든 구역을 대피소로 지정했다.

    의외로 이 방법은 잘 먹혔다.

    우선 대피소를 찾기가 용이했고, 괴물들이 땅을 파고 아래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한정된 개수의 입구를 단단하게 틀어막는 것으로 방어를 해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독이 되었다.

    입구에 배치된 화기와 두터운 철문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대형 지하 구조물 안에 건설된 쉘터는 말 그대로 최소한의 방어력만을 갖추고 있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뚫을 수 없는 철문이지만, 몬스터들에게는 그저······.

    콰아아아!

    문이 뒤틀리며 걸어잠근 강철 빗장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튕긴다.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세 마리의 빌더 몽키가 난입해 들어왔다.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이 어린다.

    "꺄아아아악!"

    "안 돼에에!"

    "사, 살려줘!"

    비명이 난무하는 그 순간.

    퍼퍼퍽!

    깔끔한 세 번의 격타음과 함께 빌더 몽키들이 난입해 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나갔다.

    "······."

    조용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이지혁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이지혁은 활짝 열린 문을 서둘러 닫고는 좌우를 살폈다.

    "흠!"

    쉘터 안에 준비되어 있는 식수 박스와 식량 박스가 눈에 들어온다.

    "흐리얍!"

    박스 두 개를 들어 문 앞에 내려놓은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뭐해요?"

    "아······."

    그 말을 들은 경찰들이 서둘러 박스를 들어 날라 입구를 틀어막기 시작했다.

    "아, 뭐하냐고!"

    "아······."

    사태를 지켜보던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박스를 들고 입구로 옮긴다. 백이 넘는 남자들이 움직여 나르자 순식간에 입구가 박스로 단단히 틀어 막혔다.

    하지만 이지혁은 진급 막힌 행보관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니, 저 박스 한 단으로 쟤들을 막겠다고 지금 손 놓고 쉬는 거예요? 죽으러면 방법도 많은데 왜 이런 귀찮은 방법으로 죽으려고 애를 쓰십니까? 예?"

    말은 더럽게 싸가지 없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다시 우르르 몰려가 박스를 두세 겹으로 쌓기 시작했다.

    "중앙을 두툼하게 쌓으란 말이에요, 중앙을! 거기, 책상도 좀 옮겨오고! 아저씨는 왜 벌써 쉬어요! 살기 싫어요?"

    이지혁의 잔소리에 따라 착착 움직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우리가 왜 저 어린놈의 말을 듣고 있는 거지?'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저 자식, 아까 박스 두 개 나른 후부터는 손가락질만 하면서 놀고 있는 것 아닌가.

    의혹과 불만이 쌓였지만, 멈추는 이는 없었다.

    애초에 수천만의 마수 군단을 눈짓 하나로 부리던 이지혁이다.

    지휘 스킬이 있다면 스킬 다 찍고 특성까지 다 찍은 만랩 캐다. 백 명 정도의 사람쯤은 손가락 하나로도 부릴 수 있었다. 물론 방식은 좀 다르지만.

    "에헤이! 거기, 그렇게 쌓으면 넘어간다니까? 저 봐, 저 봐. 넘어가는 거 봐. 아저씨, 군대 안 다녀왔어요?"

    물론 이지혁도 다녀온 적 없다.

    베라프에서라면 말이 다르지만.

    손짓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다고 해서 이지혁의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저질렀다.'

    이놈의 몸뚱아리는 머리보다 반응이 더 빠르다.

    뭔가 난입한다고 느낀 순간, 대책을 내놓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서 원숭이들을 걷어차 내고 있었다.

    최소한 뇌의 통제를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지!

    날아드는 파리 쫓는 것도 아니고, 뭔 몸뚱아리가 알아서 삼연각을 날린단 말인가.

    과정 자체는 최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과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아, 아들!"

    거 봐라.

    "너, 뭐한 거니?"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는 또 뭘로 넘겨야 하나. 다시 기억상실증 드립을 칠까? 그러다가 진짜 얻어맞아서 기억이 상실되지는 않을까?

    "엄마, 일단 이것부터 정리하고."

    "으응."

    일단은 넘기자.

    오늘 일은 내일로!

    내일 일은 모레로!

    넘기고 넘기다 보면 인생도 같이 넘어가고 그런 거지. 뭐, 별거 있나.

    대충 작업이 끝났다.

    어떻게든 틀어막은 입구로 다시 원숭이들이 들이닥쳐도 이 정도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을까?

    문 활짝 열어놓고 있기 뭐해서 막긴 했지만, 철문도 때려 부수는 놈들을 생수 상자 몇 겹으로 막기는 어렵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대로라면 물 풍선 네 개면 총알도 막는다고 했으니, 생수 박스 세 겹이면 웬만한 기관총 정도는 막겠지.

    바리게이트를 이루고 있는 박스들에 들어간 물을 따지면 박스 하나에 24리터. 다섯 겹은 족히 쌓았으니 중간 중간 들어간 식량 박스를 감안해도 4톤은 될 거다.

    아무리 원숭이들이 힘이 좋다 해도 저 4톤짜리 바리게이트를 단숨에 밀어내지는 못할 테니 조금 쉬어도 될 것이다.

    캉! 캉! 캉!

    아니나 다를까, 문을 두드려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바리게이트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 쇠문으로도 못 막았는데, 저 바리게이트는 들썩대긴 하지만 나름 원숭이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상황을 보며 지원군이 오기만 기다리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쾅!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물통 박스들이 폭발에 휘말린 파편처럼 쏘아져 왔다.

    이지혁은 몸을 돌려 어머니와 예원이를 덮쳐 바닥에 쓰러뜨렸다.

    * * *

    물통 박스가 쓰러지는 이지혁의 후두부를 스쳐 지나갔다.

    그저 스친 것뿐인데 순간 의식이 흐려졌다.

    "아들!"

    어머니의 고함 소리에 이지혁이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르르르.

    입구에서 낮은 그로울링 소리가 들려온다. 이지혁은 몸을 돌렸다.

    짐승.

    원숭이와 개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괴수가 입구를 점거하고 있었다.

    덩치는 얼마나 큰지 머리가 천장에 거의 닿아 있었다. 그 형태만 보면 곰과 비슷했지만, 날렵해 보이는 육체가 주는 위압감은 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크르르르.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튕겨진 물통 박스에 얻어맞아 부상을 입은 사람도, 조금 전까지 빽빽 울어 대던 아이들마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저 짐승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박살이 난 입구에는 조금 전 난입했던 원숭이들의 반쯤 터져 나간 시체도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저 괴물이 얼마나 흉포할지 짐작이 갔다.

    "코디악 몽키……."

    숨죽인 신음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절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제발 괴물이 그들에게 흥미를 잃고 돌아서기만을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내가 최초가 되지 않기를.

    약삭빠른 이들은 괴물이 다른 사람을 죽이느라 정신이 없을 때 빠져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운 듯 구석으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이지혁은 코디악 몽키라 불린 괴물을 보며 욕을 내뱉었다.

    "하, 씨발."

    조용히 살고 싶다니까 이렇게 안 도와주나?

    이지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금연 구역이고 개풀이고, 짜증이 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니코틴이고 당분이고 다 떨어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사람 빡 돌게 하네, 진짜."

    크르르르.

    코디악 몽키의 눈이 이지혁에게로 고정되었다.

    거대한 크기이면서 고릴라스러운 묵직함이 아니라 날렵함이 느껴진다는 것도.

    그 날렵함의 베이스가 원숭이류가 아닌 개과 짐승의 냄새가 풀풀 난다는 것도.

    그러면서도 누가 봐도 원숭이라는 것도.

    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었다.

    "하기야 이상하지 않으면 괴물이 아니지."

    너무도 태연하게 코디악 몽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이지혁을 보며 박선덕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지, 지혁아."

    이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저어 그의 어머니를 만류했다.

    "엄마, 아들 미친것도 아니고, 정신 나간 것도 아냐. 내가 생각 없이 죽겠다고 나대겠어?"

    "으응?"

    "신파극은 딱 질색이니까, 빨리 끝내고 집에 가요. 당도 떨어지고,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죽겠네. 아… 나 병신인가?"

    이지혁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박스에서 반쯤 터져 있는 생수병을 꺼내 물을 마셨다.

    "당이 떨어지니 머리가 안 돌아가네. 다 물인데. 젠장."

    이지혁은 채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비벼 껐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자명하다.

    이지혁은 바닥에 침을 뱉고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야, 원숭이 새끼야."

    이지혁의 눈이 일그러진다.

    "이 악물어라. 이빨 다 나간다."

    순간, 퍽! 꺼졌다 코디악 몽키의 코앞에 나타난 이지혁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코디악 몽키의 턱에 틀어박혔다.

    * * *

    "어떻게 됐어요?"

    "게이트 주변은 진압이 끝났습니다. 천장을 뚫고 나간 잔챙이들은 방위사에서 진압 중이고, 떼거리로 몰려 있는 곳은 사이커들 투입했습니다."

    "지금 제일 위험한 곳이 어디에요?"

    "지상층으로 이어지는 곳이 뚫리면 놈들이 거리로 퍼져 나갈 겁니다. 그리고……."

    치익.

    무전기 소음에 최정훈이 말을 끊었다.

    - 코디악 몽키, 3번 대피소로 이동 중. 교전 중이다! 다시 한 번 전한다. 코디악 몽키, 3번 대피소로…….

    최정훈은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예요!"

    서아영이 그를 따라 뛰었다.

    서울 시내 전 지하 구조물의 구조를 외우고 있는 최정훈의 안내가 있어야 최단 시간에 도착할 수가 있다. 서아영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다급한 마음에 물었다.

    "일단 달리세요!"

    최정훈은 대답할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전력으로 달렸다. 서아영과 최정훈 뒤로 무장 병력이 우르르 달리기 시작했다.

    * * *

    쾅!

    사람의 주먹과 괴물의 얼굴이 만나서 나온 소리라 하기에 그것은 너무 컸다.

    체중이 2톤은 넘을 코디악 몽키의 거체가 쏘아진 포탄처럼 튕겨져 나간다.

    벽과 괴물의 육체가 충돌하자 벽이 힘없이 무너진다.

    흙먼지가 매캐하게 피어오른다.

    이지혁은 이죽거리며 천천히 코디악 몽키에게 다가갔다.

    "혀는 안 깨물었어?"

    알아듣지 못할 괴물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얼마나 멍청하고 쓰잘데기없는 짓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유흥이라도 없으면 이 짜증을 풀 데가 없었다.

    이 지하상가만도 대피소가 몇 개는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는 말인가.

    크르르.

    벽을 부수며 나가떨어진 코디악 몽키가 마치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터프하네."

    자르체픈가 하는 놈이라면 이 한 방에 머리가 박살이 났을 텐데.

    대미지는 있는 것 같지만, 이빨 몇 개 부러진 것 말고는 딱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약해 빠졌어."

    코디악 몽키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저런 잡몹 하나 일격에 죽이지 못하다니.

    자신을 아는 베라프의 전사들이 봤다면 배를 잡고 뒹굴었을 장면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기사, 전사, 무투가.

    육체를 사용하여 적을 제압하는 클래스의 수련은 모조리 다 해봤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2류.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못해 지겨울 정도로 쌓여서 겨우 2류에 턱걸이할 수 있을 정도가 되긴 했지만, 그저 그뿐.

    단련하면 할수록 육체가 성장하고 내부에 마나가 쌓여 위력이 강해지는 베라프의 사람들에 비해 내부에 마나라고는 전혀 쌓이지 않고 심지어 근육 한 올 더 불어나지 않는 이지혁의 한계는 딱 2류였다.

    어떻게든 강해지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해 본 끝에 마나 활용에 있어서는 입지전적인 수준에 올랐지만, 베라프의 표현으로는 신생아만도 못하고 이곳 표현으로는 일반인의 수준에서 약간 나은 800대의 에테르를 가진 이지혁이다.

    아무리 활용을 잘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잡몹을……."

    이지혁은 좌절했다.

    전투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과 그건 별개였다. 힘이 있어도 안 싸우는 것과 힘이 없어서 못 싸우는 게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

    안타깝게도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코디악 몽키는 이지혁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 듯싶었다.

    크와아아아아!

    코디악 몽키가 침과 피를 질질 흘리며 성난 기세로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새삼스럽다.

    무척이나 새삼스럽게도 이지혁은 달려드는 코디악 몽키를 보며 죽음과 직면하고 있었다.

    비록 극히 희박하다고는 해도 죽음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지혁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감정이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죽음은 그와 함께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맞아도 죽지 못했고, 극대 소멸 마법을 얻어맞아 분자 단위로 세포가 분리되었을 때도 당연한 듯 살아났다.

    그는 죽음의 신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시간을 넘어 죽음과 직면하고 있었다.

    심장이 거칠게 뛴다.

    그 묘한 흥분감을 느끼며 이지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은데?"

    죽을 수 있다.

    나는 죽을 수 있다.

    빌어먹을, 아무도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모를 것이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살아왔던 세월을 이해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지혁은 달려드는 코디악 몽키에게 일말의 고마움까지 느꼈다.

    아쉬운 점은 지금 이지혁에게는 그런 코디악 몽키에게 고통 없는 죽음이라는 호의를 베풀어줄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뿐.

    코디악 몽키의 앞발이 이지혁의 머리를 내려친다.

    휘두르는 앞발이 가진 묵직함과는 별개로 그 속도는 가공했는지 채찍이 공기를 찢는 소리가 퍼진다.

    이지혁은 우측으로 두 발 걷는 것만으로 그 공격을 피해냈다.

    크르!

    바닥을 스티로폼처럼 부수어놓은 코디악 몽키의 앞발이 좌로 휘둘러진다.

    그 큰 덩치에 걸맞게 전방의 공간을 모조리 휩쓸어 버린다.

    이지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으로 코디악 몽키의 앞발을 스쳐 보냈다. 풍압에 얻어맞은 머리카락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 생생히 느껴졌다.

    "쯧."

    앞발을 휘두르며 살짝 몸이 쏠린 코디악 몽키의 옆구리에 삼격.

    동시에 오른발이 코디악 몽키의 발을 그대로 짓밟았다.

    카아아아악!

    고통과 분노로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는 코디악 몽키의 아랫배로 이지혁의 뒤돌려 차기가 작렬했다.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코디악 몽키의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니까……."

    이지혁은 뒷말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이빨 꽉 깨물라고 했지?

    쾅!

    마나가 있는 대로 뭉쳐진 이지혁의 라이트가 다시금 코디악 몽키의 턱을 쳐 날렸다.

    텅! 텅! 텅!

    날려진 육체가 비스듬히 바닥과 충돌했다가 튀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날아간 코디악 몽키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적당히 보호는 했는데도 어깨 근육이 이지혁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진 듯했다.

    "하, 이젠 재생도 안 되는데……."

    베라프에서라면 느끼기도 전에 알아서 재생되었을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통증을 유발했다.

    이지혁은 이를 뿌득뿌득 갈며 코디악 몽키를 향해 걸어갔다.

    크, 크르륵!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코디악 몽키의 눈은 조금 전처럼 기세등등하지 못했다. 눈앞의 이지혁을 그보다 상위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지혁이 천천히 다가오자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지, 그렇지. 똑똑하네."

    이지혁은 그런 코디악 몽키의 반응이 매우 흡족했다.

    하지만 그뿐.

    "내 안식을 방해한 대가는 크단다, 원숭아."

    이지혁은 이 짐승에 대한 응징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