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화 (4/118)
  • [■] 콩가루 집안이네 [■]

    ─────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최정훈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는 차를 몰아 사라졌다.

    그 얼굴에서 알 수 없는 후련함이 엿보인 것은 그저 착각이겠지, 아마?

    "집이……."

    이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예전에 살던 주공아파트보다 더 낡아 보이는 아파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많이 힘든가 보구나."

    그렇지 않다면 잘살던 집을 놔두고 더 못한 곳으로 이사 올 필요가 없다. 아직은 그래도 아파트에라도 사는 걸 보니 가세가 완전히 기울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최정훈의 차를 얻어 타고 오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블랙 먼데이 이후부터 직업을 잃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이제 겨우겨우 안정이 되어가고 있는 추세지만, 여전히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베라프로 떨어지기 이전 그의 집은 딱히 먹고살기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았다. 식당에 나가는 어머니와 중소기업의 만년 과장인 아버지. 그리고…….

    "예원이는 많이 컸으려나?"

    마지막으로 본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니까 지금쯤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만날 오빠, 오빠하며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현관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에 내려 종이에 적혀있는 호수를 찾았다.

    '너무 늦었네.'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다 보니 벌써 시간이 11시가 다 되었다. 이 세계로 돌아온 첫날이 저물고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하루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이렇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이지혁이 벨을 눌렀다.

    띵동.

    - 누구세요?

    인터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번에는 진짜구나.

    "엄마, 나야."

    - 나라니요?

    "나야, 엄마. 지혁이."

    인터폰 건너편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엄마, 나라니까. 문 좀 열어줘."

    - 지, 지혁아!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쿵쾅대는 발소리가 현관문 너머로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안에서 뛰쳐나온 여자가 이지혁을 보더니 그대로 끌어안았다.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엄마!"

    이지혁은 그 와중에도 은근슬쩍 어머니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까 같은 경우는 사양이었으니.

    "아이고, 이놈아! 우린 니가 죽은 줄 알고!"

    응. 사망신고까지 했더라. 깔끔하게.

    속마음은 살짝 쀼루퉁했지만, 이지혁은 티를 내지 않았다. 5년이나 사라졌다가 돌아온 자신의 잘못이지. 이런 시국에 5년을 안 기다렸다고 뭐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하다.

    "뭐하다 이제 왔어! 뭐하다가!"

    "나도 잘 모르겠어. 설명하자면 복잡해."

    "그래그래, 뭐하다 왔으면 어때. 들어가자, 내 새끼."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면서 연신 이지혁의 등을 두드렸다.

    '이거, 기분이 좀 이상하네.'

    어머니를 봐서 기분이 좋고 반갑기는 한데, 그렇다고 막 눈물이 펑펑 흐를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생기지는 않았다. 되레 '지금은 감동해야 하는 상황이다'라는 이성의 신호에 따라 억지로 감정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지혁이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기도 하지만, 바로 '어제'이기도 하니까.

    이지혁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은 미약하게 탔지만, 이성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자신이 없는 동안 몬스터의 출현을 겪고 가세가 기울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이제 곧 돈을 많이…….'

    응? 뭐지?

    집이 넓다.

    아니, 그것도 많이 넓다. 집 안을 채우고 있는 가구들도 어쩐지 예전보다 고급스럽다.

    어?

    그러고 보니 엄마가 입은 옷도 뭔가 털이 나풀나풀 하는 게, 고급스러워 보인다.

    밖에서 외관만 볼 때는 엄청 낡은 아파트 같았는데 안에 들어오니 뭔가 휘황찬란하다?

    이지혁은 광태가 반짝반짝한 가죽 소파에 앉으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는 자꾸 이지혁의 얼굴과 등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가 진정하는 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들썩이는 가슴은 진정된 것 같지만, 그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5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다시 통곡을 했고, 오늘 겨우 정신이 들어서 집을 찾아왔다는 말에 몇 번이고 다행이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이 집 어디서 난 거야?"

    어머니가 맺힌 눈물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어디서 나긴! 돈 주고 샀지."

    "돈이 어디서 나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요즘 제일 남아도는 게 집이야.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 그리고 여기는 예전에 게이트가 열렸던 곳이라 집이 많이 싸."

    "응?"

    "오호호, 48평형인데 예전 집 반값도 안 하더라니까. 그래서 옮겼지."

    그렇군요.

    그래요, 참 잘됐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뭔가 허전한 기분일까?

    "그럼 가구는?"

    "네 아버지가 원래 에너지 회사 다녔잖아."

    "그랬지."

    "요즘 에너지 회사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거든. 월급이 얼마나 올랐는지 말도 못해."

    "아……."

    아버지도 잘 나가시는구나.

    다행이다.

    참 다행인데, 왜 자꾸 기분이 이렇게 이상하지?

    "이 얼굴 반쪽 된 것 봐. 아이고, 내 새끼."

    어머니, 제 얼굴은 5년 전과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오늘 하루 빠진 칼로리를 감안해도 1㎜도 얇아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몇 번이나 이지혁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단호히 말했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애가 삐쩍 골았네. 이제 걱정하지 마라.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그 대사를 엄마가 하면 안 되는데.'

    그거 내 대산데…….

    "넌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어. 이제 엄마만 믿어!"

    그거도 내 대산데…….

    이상하다.

    베라프에서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언젠가는 돌아와서 이 대사를 꼭 치려고 했는데.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망상을 몇 백 년 동안 했다. 이제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처법이 유형별로 정리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수백 년을 걸쳐 완성한 가족 부양 프로젝트는 시작하기도 전에 좌초됐다.

    "아버지는?"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머니는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더니 전화를 걸었다.

    "여보! 어디에요! 빨리 집에 와봐요, 빨리! 지혁이가 왔어요. 당신 아들 지혁이가 집에 왔다니까! 응? 아니, 지혁이가……. 당신, 술 먹었어?"

    목소리가 점점 올라간다.

    이지혁은 조금씩 소파 구석으로 밀려났다.

    "보고 싶긴 개뿔이 보고 싶어! 지금 집에 있다니까! 얼마나 처먹었길래 말귀를 못 알아먹어! 오지 마! 들어오지 마, 이 화상아! 이런 날까지 술이 떡이 되도록 처먹고 있어! 집에 들어오면 죽을 줄 알아!"

    전화가 거칠게 끊겼다.

    심호흡으로 숨 고르기를 한 어머니가 더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와중에 얼굴로 다가오는 손에 이지혁이 움찔한 것은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아버지는 오늘 좀 늦으실 거야."

    엄마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회사 생활 하다 보면 거래처 사람도 만나야 하고, 바쁘시잖니."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죽인다고 했구나. 계속 바쁘시라고.

    "음. 그래, 우리 아들……."

    5년 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못 보일 꼴을 보였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어머니가 민망해하고 있었다. 이럴 때 어머니를 민망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바로 효도 아니겠는가.

    "엄마, 나 배고파."

    "응? 그래, 배고프지? 엄마가 얼른 밥 차려줄게."

    "응."

    어머니는 눈가를 훔치며 부엌으로 향했다.

    효도가 별 건가,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게 효도지.

    이지혁은 뿌듯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니다. 집에 먹다 남은 것들밖에 없어. 조금만 기다려라. 엄마가 장 봐올게."

    "어, 엄마, 지금 12시야."

    "24시 마트 있어. 기다려. 엄마가 금방 장 봐올 테니까. 불고기랑 된장찌개 해서 오늘은 대충 먹자. 내일은 정말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엄마! 지금 12시야!"

    "시간이 너무 늦어서 채소가 싱싱할까 모르겠네. 잠깐만 혼자 있을 수 있지?"

    "엄마! 12시라니까!"

    불도저가 따로 없었다.

    겨우겨우 어머니를 잡아 지금 당장 배가 고프니 있는 거라도 달라고 사정을 하며 내일은 꼭 맛있는 걸 먹겠다고 약속하자 밥상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고 남은 국을 끓인 것뿐이지만 진수성찬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손맛이 어쩌고가 아니라, 사실 이지혁에게 지구 음식은 다 진수성찬이었다.

    저쪽 동네 음식은 입에 맞고 안 맞고를 따질 수준도 아니었다. 그냥 쑤셔 넣는 것일 뿐.

    감격스럽게 한술 뜨려는 순간, 삐삑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어? 가장이 왔는데 문도 안 열어주고 말이야!"

    살짝 혀가 풀린 목소리.

    이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이 화상아! 술을 얼마나 퍼먹은 거야."

    "우리 박 여사가 오늘 좀 외로운가 봐? 안 찾던 자식놈을 다 찾고. 왜? 오늘 아들내미 하나 만들어볼까?"

    찰싹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이지혁은 좀 뻘쭘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버지."

    "어, 어? 아니, 누구신……."

    "저예요, 지혁이."

    "지혁이는 우리 아들 이름인데… 어?"

    뻘게진 눈으로 이지혁의 얼굴을 살피던 아버지가 놀라서 소리쳤다.

    "지, 지혁아!"

    "아버지!"

    아버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버지의 앙상… 아니, 단단한 팔이 느껴진다.

    헬스하시나? 좀만 더 세게 안으면 내 허리가 나가겠는데?

    "이놈 자식, 이노무 자식!"

    "예, 아버지. 저 돌아왔어요."

    "그래그래! 그래, 이놈아! 그래, 어디……."

    양손으로 이지혁의 얼굴을 부여잡고 한참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데 누구시라고?"

    "……."

    "아이고, 이 화상아!"

    아버지의 등짝에 손꽃이 피었다. 촥촥, 찰진 타격음과 함께.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이 불을 뿜을 때마다 몸을 뒤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전 채찍으로 얻어맞던 노예들을 연상시켰다.

    "그래, 지, 지혁이! 지혁이, 니가 왔구나."

    "예, 아버지."

    "그래, 이놈아! 어쩌다가 이제 왔어, 이놈아!"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정이 있었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아니다, 아니다. 괜찮아. 돌아왔으니 다 괜찮다. 다……."

    아버지는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운지 고개를 숙이고는 눈물을 연신 훔쳤다. 미미하게 떨며 얼굴을 문지르시던 아버지가 고개를 들고 지혁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런데 누구시길래 남의 집에……."

    그만!

    이러지 마. 나의 아빠는 이렇지 않아!

    아버지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아버지를 질질 끌어 소파에 앉혔다.

    "여보, 꿀물 좀 타 와봐."

    "핏물 되기 싫으면 조용하지?"

    "…예."

    어머니의 살기가 아버지의 취기를 날려 버리고 있었다.

    이지혁은 식탁에 다시 앉았다. 일단 아버지와 재회하는 기쁨은 내일 아침으로 미뤄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젠 그냥 밥이나 먹으면서…….

    삐삐삐삑.

    벌컥.

    문이 과감하게 열리고, 또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 * *

    휙!

    어머니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야, 이놈의 기집애야! 지금이 몇 시야!"

    "아, 왜! 별로 늦지도 않았잖아!"

    집 안으로 처음 보는 여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행색이 좀 이상하다.

    하의는 핫팬츠를 입었는데, 핫팬츠가 좀 많이 짧다. 누가 봐도 저건 거의 팬티 수준 아닌가. 거기에 좀 언밸런스하게 위에는 너풀거리는 블라우스를 입었다. 거기까지만 보면 '아, 좀 노는 애구나' 싶을 텐데…….

    '금발?'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가 금발이다, 금발. 갈색으로 염색한 것도 아니고, 리얼 금발이었다.

    '발랑 까졌네.'

    얼굴은 어려 보이는데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저따위다 보니 누가 봐도 생양아치 같이 보였다.

    우리 집에 저런 애가 왜 들어오지?

    "아빠! 또 술 먹었어? 내가 이래서 집구석에 들어오기 싫다니까 진짜! 아, 짜증나!"

    아빠라, 아빠…….

    생물학적 친부를 부르는 단어를 저 양아녀가 썼다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저 양아녀의 아버지란 거고, 저 양아녀가 우리 아버지의 딸이라는 거니까… 우리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고, 내가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란 거니까…….

    양아녀와 이지혁의 눈이 마주쳤다.

    "누구세요?"

    양아녀의 까칠한 목소리에 어머니가 대답을 했다.

    "오빠다. 네 오빠, 지혁이!"

    "오빠?"

    양아녀의 눈이 아래위로 이지혁을 훑었다.

    오빠라, 오빠…….

    그렇다면 저 여자가 나의 동생이라 이 말이구나. 음, 내 동생이라……. 내가 사라진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없던 동생이 생겨난 것일까? 나에게 동생이라고는…….

    "지혁아, 예원이다."

    그래, 예원이밖에 없는데 말이지.

    예원이, 우리 예원이…….

    같은 반에 창식이가 만날 짓궂게 군다고 질질 짜던 우리 예원이.

    창식이 턱주가리에 브라질리언 킥을 찍어 넣었을 때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하던 우리 예원이.

    비만 오면 오빠랑 같이 잘 거라고 앵겨오던 우리 착한 예원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귀여운 우리 예원이가 여기 있다, 이 말이지…….

    "예원이?"

    그래, 여기 눈앞에 있는 이 정신 나간 금발 머리가 우리 착한 예원이라 이 말이지…….

    대체 그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멀쩡하던 애가 정신이 나가 버렸단 말인가!

    이 세상엔 신도, 부처도 없는가!

    라트렐이라도 데리고 와야 하나!

    베라프에 연락에서 빛의 신 렌탈 서비스가 되는지 문의해 봐야 하는가!

    굉장히 띠껍다는 눈으로 이지혁의 아래위를 훑던 이예원이 피식 웃었다.

    "오빠는 무슨 오빠. 5년 동안 없던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오빠 취급을 해달라?"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전 되도록 오빠 취급 안 받고 싶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안 엮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장난해? 오빠는 무슨 오빠야!"

    "이 기집애야! 너 오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어머니와 딸이 격한 감정을 나누는 감동적인 장면을 본 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어이구, 우리 딸 왔어! 어디 한 번 안아보자!"

    "야, 이 화상아! 그냥 자라! 자!"

    "이놈의 집구석은 진짜 조용할 날이 없어! 아, 짜증나!"

    횡설수설하는 아버지와 짜증을 내는 동생. 그 사이에서 좌우로 샤우팅을 지르는 엄마.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가볍게 웃고는 식탁에 앉아 국을 떠먹었다.

    다 식은 미역국 한 숟가락을 떠먹고 고개를 들자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싸우고 있는 가족들이 보인다.

    음, 뭐랄까, 이거. 음…….

    이 상황을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단어가…….

    그러니까…….

    '콩가루 집안이네.'

    완벽하다!

    완벽하긴 완벽한데, 이상하게 자꾸 눈이 아려온다.

    이지혁은 시큰해지는 눈가를 훔치며 묵묵히 미역국을 떠먹었다.

    어쨌든 그 긴 시간을 지나 이지혁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나가! 이 화상아!"

    어쩌면 곧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 * *

    최정훈은 그가 겪었던 일 전부를 빠짐없이 보고했다.

    "육체 계열?"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육체 계열이 아니면 고블린을 그리 떡 주무르듯 패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긴 한데……."

    고블린을 묵사발로 만드는 일쯤은 웬만한 능력자라면 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초급이라 해도 고블린 한 마리쯤은 대부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맨손으로 고블린 위에 올라타 파운딩을 한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육체 계열이 아니라면 감히 그런 짓을 하진 못할 것이다. 아래에 깔린 고블린이 다리나 옆구리를 움켜잡는 것만으로도 다리는 부러지고 옆구리는 찢겨질 테니까.

    "가윤아, 어떤 거 같아?"

    서아영의 시선이 최정훈의 살짝 뒤를 향했다.

    스스슷.

    최정훈의 등 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하지만 서아영과 최정훈 모두 놀라지 않았다.

    이윽고 그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짧은 단발을 한, 아직은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별거 없음."

    "진짜?"

    가윤이라 불린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테르 반응은 일반인 수준. 고블린과 싸울 때도 일반인 수준의 에테르. 체술은 체계적 아닌 실전적."

    "일반인 수준의 에테르로 고블린을 때려잡았잖아."

    "순간적으로 에테르가 유동했다. 에테르 운용은 극히 효율적. 하지만 용량을 감안한다면 평범하다."

    서아영은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인재를 보는 눈은 뛰어나지만, 눈앞의 소녀가 인재를 보는 눈은 더없이 객관적이다. 서로 충돌했을 때는 대부분 소녀의 말이 맞았다.

    "성장 가능성은?"

    "거의 없음."

    "뭔가 숨기고 있을 가능성은?"

    "조금 있음."

    "정확하게 말해봐."

    "1,000 이하의 에테르 수치라면 육체 내의 에테르를 감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련이 어려움. 운용을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봐야 함."

    "그렇지. 그러니까 1,000 이상부터 능력자로 치는 거고."

    "에테르는 800대. 하지만 운영 능력은 숙련자 이상. 처음 어떠한 계기를 통해 에테르를 느끼고 꾸준히 단련해 온 것으로 보임."

    "그럼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건가?"

    "불가능."

    "우우우우."

    서아영이 머리를 움켜잡고 흔들었다. 머리가 마구 헝클어졌다.

    "노처녀스럽다. 추하다."

    "시끄러워! 난 아직 한창때라고!"

    "시들어가는 꽃."

    "나가! 이년아!"

    서아영의 손에 들린 펜이 도가윤을 향해 총알처럼 날아갔다. 도가윤은 서아영이 던진 펜을 잡으며 말했다.

    "뭐가 문제지?"

    서아영은 서랍을 열어 새 펜을 꺼냈다.

    "뭔가 굉장히 찝찝해."

    "어째서?"

    "태도 문제지."

    "이해가 어려움."

    서아영이 최정훈을 슬쩍 바라보았다.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아영의 의견에 동조했다.

    "보통 능력을 각성한 사람, 아니, 5급 이상의 능력자라고 해도 KSF 취조실에 들어오면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능력자인 경우 평소의 삶에서 압박감을 느끼는 일이 잘 없기 때문에 더하죠. 그런데 이지혁 씨 같은 경우에는 취조실에 가둬놓고 나름 시간을 들여 압박을 했는 데도 불구하고 소풍 온 고등학생처럼 굴더군요."

    서아영이 최정훈의 말을 받았다.

    "결론은 KSF를 우습게 여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거나 머리에 나사가 몇 개 빠진 놈이라는 건데……."

    도가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겁을 먹지 않았을 가능성은?"

    "강화 아크릴 밖으로 총으로 무장한 애들이 둘러싸고 있는 게 보이는데도 아크릴에 입김 불어서 하트 그리던 놈이야."

    "나사가 풀린 게 확실함."

    "그랬으면 좋겠는데, 자르체프 대가리를 일격에 날리고, 고블린한테 파운딩을 먹였다잖아."

    소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 불가능."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서아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었다.

    "만약 그 작자가 능력을 숨기고 있다 치면 능력치는 어느 정도 될 거 같아?"

    "내 눈을 피해서 에테르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능력에 대한 판단은 어렵다. 역추산하여 감안했을 때, 최소 8등급 이상."

    "8등급이라……."

    8등급 이상의 능력자라면 대한민국에도 몇 명 되지 않는다. 그것도 최소치로 잡은 것이니, 실제로 얼마나 능력치가 높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가능성은?"

    "3퍼센트."

    "아까보다 더 줄었는데?"

    "능력치가 높을수록 에테르의 분산을 막기 힘들다. 특히나 육체를 강화하려 한다면 거대한 유동이 있었을 것. 불가능한 능력. 3퍼센트는 상황과 나의 착각을 고려한 수치. 현실적인 가능성은 제로."

    "나가리군."

    서아영은 최정훈에게 물었다.

    "감시는요?"

    "일단 쫙 깔아놨습니다."

    서아영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감시는 보름만 유지할게요. 보름 내에 뭔가 움직임이 있을 경우 빠짐없이 보고하시고,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에 보름을 기점으로 마크를 전환합니다. 지원관리부로 넘겨요."

    최정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능력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의문인 사람을 지원관리부에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감시만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면 놔둬도 언젠가는 튀어 나오겠죠."

    "그건 그렇습니다만……."

    능력자 특별법이 처음 발호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실효성이 없는 법이라 비난했었다. 그냥 능력을 감추고 살면 그만인데 뭐하러 자발적으로 등록을 해서 불이익을 당하겠느냐는 논리였다.

    실제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말이 맞지만, 세상일이란 언제나 그렇듯 이성적으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비등록 능력자들은 어떻게든 능력을 발휘했다. 술을 먹고 불을 피우기도 했고, 범죄에 사용하기도 했고, 각종 창의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능력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완벽히 잊고 사는 사람은 존재하기가 어려웠다.

    등 뒤에서 날개가 돋아났는데 한 번 날아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한 번 날아봤는데 두 번 날아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처음에는 조심하지만 가면 갈수록 무뎌지게 되고, 결국 특별법에 걸리기 마련이었다.

    서아영의 말은 그런 뜻이었고, 최정훈도 동의했다.

    분명 지켜보다 보면 능력을 활용할 것이고, 그때는 빼도 박도 못할 테지!

    서아영과 최정훈은 마주 보며 싱긋 웃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피스 와이프?"

    "나가! 이년아!"

    * * *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아영과 최정훈의 바람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능력을 갖춘 자는 그 능력을 써보고 싶은 충동을 가진다. 그건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고려하지 못한 문제는 이지혁은 새로 능력을 얻은 지 5년 된 신출내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마도 세계의 정점에 오른 마도사이자 진리의 영역에 도달한 마학자다. 이제 막 마법을 배운 신출내기처럼 마법을 쓰고 싶어 안달 낼 일이 없었다.

    베라프의 악몽, 멸망의 좌는 지금 식탁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치이이익.

    고기가 구워지는 소리는 언제나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하지만 그 고기가 아직 이른 아침에 산해진미가 산처럼 쌓인 식탁 위에서 구워지고 있다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 것이다.

    '아침부터 꽃등심?'

    이지혁의 어머니, 박선덕 여사는 5년 만에 아들이 살아 돌아온 기쁨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온전히 주부력으로 전환되어 지금 식탁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지혁은 자신의 밥그릇 옆에서 열기를 뿜어내는 삼계탕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많이 먹으렴."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꽃등심과 삼계탕까지야 그러려니 한다 쳐도 불고기와 갈비찜은 언제 하셨을까? 저기 보이는 찜닭은 시간이 엄청 걸리는 음식 아니던가?

    여기도 고기, 저기도 고기.

    소화 잘되는 고기로만 이루어진 밥상이다.

    "우리 아들, 고기 좋아하잖아."

    이지혁은 말없이 고기를 흡입했다.

    과하다. 과하긴 한데… 좋다.

    고기다. 고기!

    "어, 이게 뭐야?"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식탁으로 온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침부터 무슨 잔치해?"

    "애가 살아 돌아왔는데 잔치 못할 거 뭐 있어요."

    "허허, 참."

    아버지는 자리에 앉았다. 박선덕 여사가 그의 앞에 밥과 국을 냈다.

    촉촉한 쌀밥과 먹음직스러운 미역국을 본 아버지가 조심스레 말했다.

    "삼계탕은?"

    "미역국이 몸에 좋아요."

    "삼계탕도 몸에 좋은데……."

    어머니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더 묻지 않았다. 조금 서럽긴 하지만 5년 만에 돌아온 아들과 같은 취급을 바랄 순 없다.

    아버지의 젓가락이 불판 위에서 막 다 구워져 육즙이 먹음직스레 맺힌 꽃등심으로 향했다.

    "오, 이거 아주 맛……."

    그 순간, 앞으로 파고든 집게가 젓가락을 밀어내고는 꽃등심을 낚아챘다.

    아버지를 유혹했던 꽃등심은 촉촉한 자태를 자랑하며 이지혁의 밥 위로 올라갔다.

    "많이 먹어."

    "응, 엄마."

    "그래그래."

    아버지는 그 광경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음은 따뜻한데 이상하게 손이 좀 어색하다.

    "허허. 그래, 많이 먹어라."

    "예."

    아버지의 젓가락이 다시 잘 익은 꽃등심에게로 향했다.

    탁!

    하지만 자연스레 나온 집게가 다시 아버지의 젓가락을 날려 버리고 고기를 집어 이지혁의 밥그릇 위로 올렸다.

    탁!

    탁탁!

    같은 일이 두어 번 반복되자 아버지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나한테 왜 이래!"

    "뭘요!"

    "난 이 집의 가장이야! 좀 더 소중하게 대해줘!"

    "시끄러워요! 애 밥 먹는 데 체할라!"

    "끄응."

    아버지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야 5년 만에 집에 돌아온 자식에 비하면 중요도가 무척 떨어지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가장인데 고기 한 점쯤은 줘야지.

    아버지는 구워지는 고기를 포기하고 갈비찜으로 젓가락을 뻗었다.

    탁!

    절망 어린 눈빛이 박선덕 여사에게로 향했지만, 집게는 단호했다.

    "여보……."

    "고기는 해장에 안 좋으니까 국 드세요, 국."

    고기가 해장에 안 좋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뭔가 따져 물으려던 아버지는 어디 한마디만 더 지껄여 보라는 기색을 내뿜는 어머니의 눈을 보고는 조용히 미역국에 밥을 말았다.

    '술을 적당히 먹어야겠어.'

    5년 만에 돌아온 아들도 못 알아보고 추태를 부렸으니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리가.

    "그래, 지혁아."

    이지혁이 숟가락을 놓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뭔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맨 정신으로 만났다면 할 말이 참 많았을 것 같다. 어쩌면 울고불고 통곡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 그런 꼴을 보이고 이제 맨 정신으로 돌아오고 보니 할 말이 마땅치가 않았다.

    감정적이기엔 어색했고, 이성적이기엔 민망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한참 머뭇대자 어머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말을 해요, 말을! 애 밥도 못 먹게 뭐하는 거예요!"

    "아, 그… 잘 돌아왔다."

    "예, 아버지."

    "먹자. 응. 먹어."

    "예."

    이지혁이 다시 폭풍처럼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불고기는 불고기 국수가 되어 후룩후룩 말려 들어갔고, 갈비찜은 깨끗한 하얀 뼈가 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잡채는 딱 두 젓가락으로 바닥을 드러냈다.

    '좀 남겨주지.'

    아버지는 숟가락을 빨았다.

    그때, 이예원이 교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밥 먹어."

    "됐어. 그냥 갈 거야."

    "차려놓은 거 처먹고 가! 뭐 늦었다고 밥도 안 먹어!"

    "에이 씨."

    이예원은 투덜대면서도 식탁에 앉았다.

    "뭔 고기 파티야? 밥상에 고기밖에 없어."

    "네 오빠가 고기 좋아하잖니."

    "가지가지 한다."

    이예원은 불고기를 흡입하는 이지혁을 흘겨보았다. 눈이 마주친 이지혁이 불고기 그릇을 슬쩍 이예원에게 밀었다.

    "먹을래?"

    "하?"

    음절 하나로 저렇게 다양한 부정적 느낌을 줄 수 있구나.

    표현력이 아주 좋은 아이다. 배우 해도 되겠는데?

    이지혁은 다시 불고기를 당겨왔다.

    쟤는 왜 어제부터 저렇게 틱틱대는 걸까?

    국에 밥을 말아 두어 숟갈 뜬 이예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왜?"

    "용돈 줘."

    어머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너 용돈 받아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용돈 달라고 해!"

    "참고서 사는 데 다 썼단 말이야!"

    "참고서? 참고서어어? 니가 참고서를 사? 지나가던 개가 참고서를 사면 샀지, 니가 참고서를 살 일은 없어!"

    "엄마!"

    "머리카락 다 쥐어뜯어 버리기 전에 학교나 가! 그리고 그거 염색하란지가 언젠데 아직 그러고 다녀!"

    "요즘 애들 다 이러고 다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어느 요즘 애들! 길을 나가봐라, 너처럼 병아리 머리 해서 다니는 애가 있는가!"

    "에이! 진짜!"

    이예원이 몸을 획 돌려 현관으로 가자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신발을 신고 있는 예원에게 오만 원짜리 몇 장을 내밀었다.

    이예원은 배시시 웃으면서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 광경을 본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돈을 왜 줘요, 돈을! 애 버릇 나빠지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크흐흐흠."

    아버지는 연신 헛기침을 하며 어머니의 시선을 피했다.

    "돈만 퍼주면 부모야? 애가 저러고 다니는데 따끔하게 말 한마디는 못할망정 더 놀라고 돈을 줘? 당신이 정신이 있는 사람이야, 없는 사람이야?"

    "거. 용돈이 부족하다잖아."

    "다녀오겠습니다."

    이예원은 혹시 받은 돈을 뺏길세라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 그 꼬락서니를 본 어머니의 눈에서 불이 났다.

    "돈이 부족할 일이 뭐 있어! 처노느라 부족하지!"

    "흠흠. 아, 그래. 지혁아."

    아버지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예."

    "자, 이거 받아라."

    아버지의 지갑에서 빳빳한 현금이 여러 장 나왔다.

    "저 필요 없는데요."

    "돈 있어?"

    "아니요."

    "없으면 받아둬. 사람이 주머니가 든든해야 마음도 든든해지는 법이야."

    이지혁이 망설이자 어머니가 돈을 가로채 이지혁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아버지가 주면 냉큼 받을 것이지, 왜 머뭇거려? 엄마가 통장 만들어줄 테니 그전까지는 이거 써."

    "으응."

    엄마, 딸내미랑 취급이 너무 다른 거 아냐?

    아버지가 잔소리를 피해서 출근하자 어머니가 이지혁을 가만히 보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가자."

    "응? 어딜 가?"

    "엄마 식당."

    "엄마, 아직도 식당 나가?"

    어머니는 가볍게 웃었다.

    "엄마 주방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식당이야."

    그사이에 가게를 내신 모양이다. 5년 사이에 집은 두 배로 커지고 가게가 생겼다. 이지혁이 사라지니 집안이 잘 풀리는 모양이다.

    어?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이상한데?

    "엄마 식당에 내가 왜 가?"

    "너 혼자 남겨두려니 불안해서 안 되겠다. 오늘 쉬려고 했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어쩔 수 없지. 가자!"

    "엄마, 진정해! 나 잘 있을 수 있어. 그냥 얌전히 집에 있을게."

    어머니와 같이 식당에 나가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막상 거기서 이지혁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접시나 닦겠지.

    "어디 나가면 안 된다?"

    "안 나가. 갈 데도 없어."

    "으음, 불안한데……. 그냥 엄마랑 같이 갈까?"

    "안 갈래!"

    타협 끝에 이지혁은 집 앞 대리점에서 휴대폰을 개통하는 조건으로 집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휴대폰에 위치 어쩌고 하는 어플이 줄줄이 깔리고, 그 휴대폰마저 잃어버린다고 개 줄처럼 목에 걸렸다.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한 어머니는 그래도 못미더운 얼굴로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직접 이지혁을 집 안까지 데려다 놓았다.

    "밥은 해놨으니까 챙겨 먹고! 엄마 일찍 올 테니까……."

    "엄마. 안 늦었어? 이제 출근해야지!"

    "늦었지. 늦었는데… 에휴."

    그렇게 몇 번의 잔소리 끝에 어머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셨다.

    '아. 이제 자유 시간이구나. 어색해서 혼났…….'

    그그그그극.

    그 순간, 현관 밖에서 뭔가 묵직한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이게?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어, 엄마?"

    어머니는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도 모를 거대한 박스들로 현관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지혁과 눈이 마주친 어머니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혹시라도 나갔다가 길이라도 잃을까 봐."

    "……."

    "그럼 엄마 다녀올게! 문 좀 닫으렴."

    "예……."

    문을 닫자 다시 그그극, 소리가 들리더니, 박스와 문이 맞닿는 소리가 났다.

    그래, 이게 부모님의 사랑이지.

    5년 만에 돌아온 자식이 길이라도 잃을까 봐 문을 틀어막는다. 얼마나 걱정이 되었으면…….

    그런데 왜 자꾸 눈이 시큰하지?

    집에 혼자 남겨진 이지혁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아들이 돌아오면 쓰게 할 거라고 예전처럼 꾸며놓은 방 한구석에 보이는 컴퓨터.

    "흐흐흐."

    이 세계에서 가장 그리웠던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가족.

    또 하나는 음식.

    그리고 컴퓨터!

    이지혁은 현대 문명의 총화를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컴퓨터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전원 코드를 연결하고 부팅을 시작했다. OS 부팅이 완료되자 이지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서, 설마?"

    한참 뒤…….

    허탈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이지혁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내 컴퓨터 바꿨어?"

    - 이사 오면서 새걸로 바꿨어. 고맙단 소리는 안 해도 돼.

    "어, 엄마. 고마워……."

    새삼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졌다.

    5년 동안 실종되어 사망신고까지 한 아들이 혹시나 돌아올까 봐 헛돈을 써가며 컴퓨터까지 새걸로 바꾸었다니. 다른 모든 사람이 죽었다 말해도 그의 어머니는 그가 돌아올 것이라 꿋꿋이 믿었던 것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다.

    정말 감동적인 일이다.

    감동적인 일인데…….

    이지혁은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마음의 동요를 다스린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안녕.'

    이지혁은 마음속으로 안녕을 고했다. 그 수많은 시간들 속에서도 차마 잊지 못했던 그녀들과의 작별.

    슬픈 이별의 날이었다.

    * * *

    "으음……."

    이지혁이 현세로 돌아온 지도 어언 4일째.

    그동안의 동향을 보고 받는 서아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집 밖으로 안 나온다구요?"

    "예. 전혀 나올 기색이 없습니다."

    최정훈도 난감하다는 투였다. 뭔 사건이 있거나 밖을 좀 돌아다니기라도 해야 동향 파악도 하고 정보도 좀 얻고 할 텐데.

    "전혀?"

    "첫날 휴대폰을 개통하러 집 앞 대리점에 들른 이후로는 전혀 집 밖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서아영이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파트 창문 사이로 컴퓨터를 하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이 보인다.

    도가윤은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촬, 스토킹, 범죄, 공권력 남용."

    "쟤 좀 끌어내요."

    최정훈은 정색했다.

    "제가 무슨 수로 끌어냅니까?"

    비능력자더러 능력자를 끌어내라니, 관이라도 짜 줄 생각인가?

    "일단 사고 안 치는 건 좋은데… 뭐, 지도 사람인데 냅 두면 움직이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정."

    서아영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의외로 세상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 * *

    쿼드라킬!

    화면에 뜨는 커다란 안내 문구를 보며 이지혁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베라프로 가기 전, 가장 즐겨했던 게임이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것만도 놀라운데, 예전에는 마니아만 하던 게임이 압도적인 유저수 1위로 국민게임이 되어 있었다.

    그래픽은 아예 다른 게임이라고 할 정도로 발전하고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게임을 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아니. 달라진 게 하나 있긴 했다.

    * * *

    - 아니! ***야, 거기서 뭐하냐고. **이 **냐! 이 ***야!

    - 해도 너무하네, 저거.

    - 칼서렌 갑시다. ㄱㄱ

    시즌 1 당시 국내에 많지 않던 랭커 중 하나였던 이지혁은 지금 브론즈 5의 밑바닥에서 쌍욕을 먹고 있었다.

    "애들이 왜 이리 눈 돌아가게 잘해?"

    누워 있는 자신의 캐릭을 보면서 이지혁은 가볍게 웃었다. 하기야 5년 만에 하는 게임인데 잘될 리가 없다. 다행히 계정이 날아가진 않았으니 며칠 하다 보면 금세 과거의 실력이 돌아올 것이다.

    "이제 슬슬 손이 풀리는 거 같은데?"

    촵촵촵촵.

    꿀꺽꿀꺽.

    엄마가 가득 사다 놓은 과자와 음료수를 흡입하고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휴우……."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딱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5년이란 시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니까. 무언가 확 바뀌었다고 실감하기에는 짧은 시간이고, 그렇다고 비슷하다고 말하기에는 길었다.

    워프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 외에는 딱히 큰 변화가 없다. 그 워프 게이트마저도 현대 화력의 위엄 앞에서는 허무하게 쓸려 나갔다.

    베라프에 있을 때부터 생각한 일이다.

    만약 베라프와 지구가 전쟁을 한다면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

    답은 공멸.

    베라프의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몬스터들은 인간의 화기 앞에서 쓸려 나갈 것이다. 대부분은 개인화기 수준에서 처리될 것이고, 조금 더 강한 것들은 지원화기의 벽을 넘지 못한다.

    막말로 파이어 볼 쓰는 마법사가 고위 귀족 취급 받는 베라프와 지나가던 히잡 쓴 소녀가 알라의 요술봉(RPG-7)을 날려 대는 이 세계의 기본 화력 차는 극심하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강한 자들이 나오면 상황이 이상해진다.

    전차의 화력을 견뎌낼 수 있는 마수급이 튀어나오게 되면 인류는 이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 120㎜ 활강포가 먹히지 않는 순간, 남는 것은 공대지미사일 뿐인데. 그게 얼마나 통하겠는가. 결국은 전폭기나 지대지미사일이 동원되어야 할 텐데.

    그렇게 겨우겨우 몬스터를 잡아낸다 쳐도…….

    베라프 끝판왕들이 나서기 시작하면 다 끝이다. 용과 고위 성직자들의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핵을 터뜨리지 않는 이상 끝.

    같이 죽자고 핵 샤워를 시작하면 베라프에서는 소수의 드래곤만 살아남고 인류는 전멸. 그 남은 소수의 드래곤도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 아니, 죽겠지.

    인류가 약한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마법이 대단하다고 해도 현대의 인간들이 이루어낸 과학은 마법 이상이다.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류의 무기 체계는 대량 학살과 인마 살상용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차급이나 방공호를 뚫어낼 정도의 화력은 보유했지만, 그 이상 가는 방어력을 지닌 마수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 출현하는 괴수들은 인간의 화력을 버텨내지 못하는 수준이고, 능력자라는 양반들이 괴수 목을 따내고 있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지혁은 할 일이 없었다.

    괴수는 알아서 잘 막고 있고, 돈은 부모님이 잘 번다. 동생은 알아서 잘 노는 모양이고, 친구들은 모조리 연락이 끊겼다.

    이 세계에 돌아오자마자 바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여유가 넘치는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지혁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쉬어도 되겠지.'

    그도 이제 이 세계의 일원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리라. 하지만 그전에 조금은 쉬어도 될 것이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으니까.

    컴퓨터에 앉은 이지혁은 다음 게임을 돌렸다.

    "조금만 쉬는 거야, 조금만."

    한동안 게임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만화도 보면서 누리지 못한 문화의 총화들을 구석구석 누려보자.

    게임이 시작되고, 이지혁은 지금을 즐겼다.

    하지만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 아니! ***야, 눈이 없냐? 채팅창이 안 보여?

    - 탑 노답요.

    - 밴픽부터 뭐같이 하더라. 오픈하자.

    - 오픈은 뭔 오픈이야? 게임 시작한 지 5분인데.

    - 5분 3뎃. 뒈지는 속도 보소. 일부러 던져도 저리 죽기 쉽지 않음.

    - 너 어디 사냐?

    이지혁은 조용히 채팅창을 껐다.

    두고 봐라! 내가 너희 입 다물게 해준다!

    * * *

    복귀 5일 차.

    "우리 아들! 게임하고 있었어?"

    "응."

    "배고프지? 엄마가 밥 차려줄게. 얼른 밥 먹자."

    "응, 엄마."

    "과자랑 음료수도 많이 먹었네? 맛있었어?"

    "5년 만에 먹으니 꿀맛."

    "그래그래, 내 새끼. 놀고 있어. 엄마가 밥 해줄게."

    "응!"

    마우스를 잡은 이지혁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어머니는 그런 이지혁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5년 전에는 그리 꼴 보기 싫던 광경이다. 그런데 이지혁이 실종되고 나자 이 광경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다행이야.'

    살아생전 이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박선덕 여사는 눈가에 자꾸 맺히는 눈물을 훔쳐 내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복귀 7일 차.

    "우리 아들! 게임하고 있었어?"

    "응, 엄마!"

    "그래, 배고프지?"

    "조금."

    "엄마가 금방 밥 차려줄게."

    "응!"

    복귀 10일 차.

    "우리 아들! 또 게임하고 있네?"

    "응, 엄마."

    "밥은 먹고 하는 거니?"

    "아직 안 먹었는데?"

    "그래. 게임도 좋지만 몸도 챙겨야지. 얼른 밥 먹자."

    "응."

    복귀 15일 차.

    "아들, 게임 안 질려? 또 게임하고 있니? 넌 어떻게 된 애가 볼 때마다 게임하고 있니? 나 출근하고 계속 게임만 하는 건 아니지?"

    "응, 다른 것도 해. 책도 보고."

    "그래.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뭐든 과하면 안 좋은 거야."

    "응. 명심할게, 엄마."

    복귀 20일 차.

    "내가 밥 먹으러 오라고 했지! 컴퓨터 선 뽑아버리기 전에 당장 안 나와?"

    "아, 다 끝났어! 이 판만 하고 금방 끝난다니까?"

    "금방? 금방 끝나? 니가 금방 끝난다고 한 지가 언젠 줄 알아? 지금 나와 밥을 먹든가, 아니면 전원 내린다?"

    "아, 진짜. 다 이겼는데!"

    복귀 25일 차.

    "책상 좀 치우고 있으라고 했지! 이게 방이야? 돼지우리지! 아침에 치워두고 나갔는데 어떻게 하루 반나절 만에 방이 이 꼴이 돼! 니가 사람이니? 사람이야?"

    "치울게. 이따 치운다니까."

    "그노무 게임! 모니터 안에 들어가겠다. 겨 나와서 밥 처먹고 게임을 하든지 말든지 하라고!"

    "어."

    복귀 30일 차.

    "아아아아아! 엄마! 귀! 귀귀! 엄마, 귀!!"

    "내가 밥 처먹으라고 했지! 게임이 그리 좋냐? 응? 게임이 그리 좋아?"

    "엄마아아! 귀! 아들 귀! 귀 떨어져! 이거 좀 놓고!!"

    "아이고, 내 팔자야. 남편이란 인간은 허구한 날 술이고,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놈은 5년 동안 사라졌다 나타나더니 컴퓨터만 붙들고 살고!"

    "엄마! 귀 떨어진다니까!"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놈이 귀는 있어서 뭐하게!"

    "그게 왜 말이 그렇게 돼! 아아야야아!"

    "밥이나 처먹고 놀든지!"

    실종돼서 고생하다 5년 만에 돌아온 귀한 내 아들이 쌀이나 축내는 컴퓨터 기생충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한 달이었다.

    "아! 엄마! 귀 떨어져!"

    "이게 어디 엄마한테 소리를 질러! 너 오늘 관 한 번 짜볼래?"

    "귀 떨어진다니까!"

    "컴퓨터를 갖다 버리든지 해야지 정말!"

    빠른 태세 전환이 필요했다.

    "어머니,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그냥 다시 집 나가! 이 화상아!"

    "헐."

    귀환 30일 차에 이지혁은 베라프로 끌려가기 전의 포지션을 완벽하게 되찾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 과하게 되찾았다.

    * * *

    "안 나와요?"

    "……예."

    "한 달을?"

    "그러게 말입니다."

    서아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지혁이 집에 간 지가 벌써 한 달이다. 지원관리부를 통한 일반 감시 체제로 전환된 것도 보름이 넘었다. 그런데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야 만 것이다.

    그녀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사람이 한 달을 집 밖으로 안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방에 꿀 발라놨데요? 히키코모리?"

    "일단 방 밖으로는 나가는 것 같아 보이니 은둔형 외톨이 성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직접 보아 아시겠지만,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겠죠. 말 몇 마디로 주먹을 부르는 인간이 히키코모리일 리가 없지. 그 깐죽거리는 혓바닥을 놀리기 위해서라도 대화를 하려 할 테니까. 그럼 왜 안 나온대요? 집이라도 지킨대요?"

    고블린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인간이 집이나 지키고 있다니. 확실히 집은 잘 지킬 것이다. 전략 거점 수준 아닌가.

    "파악한 바로는 하루에 수면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이 게임과 인터넷 서핑에 투자되고 있습니다."

    최정훈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생활 침해. 정보 통신망 이용 촉진 및 개인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서아영이 소리를 질렀다.

    "뭐라는 거야! 이상한 법조항 만들어내지 마!"

    "……실존법입니다만."

    "진짜요?"

    "예."

    "뭔 법 이름이 그리 길대요……."

    "무식함. 나이에 걸맞은 법률적 지식 없음. 백치미가 증가함. 결혼 확률 감소."

    "그래! 나 노처녀다! 그래서 니가 남자라도 한 번 소개시켜 줘 봤냐!"

    최정훈은 모니터를 집어 던지려는 서아영을 말리느라 땀을 빼야 했다.

    "결혼에 대한 책임과 권리는 개인에게 귀속됨.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음."

    서아영은 심호흡을 하며 끓어오르는 피를 식혔다. 저 악랄한 조동아리와 싸워서 얻을 것이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으니까.

    "그러니까… 게임이랑 웹질이나 하면서 삶을 만끽하고 있다는 거죠?"

    "예."

    "그 게임이란 것에서 랭킹이 높나요?"

    가끔 능력을 갖추고도 게임에 빠져서 폐인처럼 지내는 능력자들이 있었다. 현실에서보다 게임 내에서 가지는 능력이 더 높은 경우, 게임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이지혁의 경우는 아니었다.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지경입니다."

    최정훈도 게임을 좋아하다 보니 지금 이지혁의 랭킹이 가지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러지?"

    서아영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게임을 하고 인터넷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능력을 발현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능력이 생긴 사람은 그 능력을 써보고 싶어 안달이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능력을 여러 번 써본 사람은 능력을 일상생활에서도 자연히 사용하게 된다.

    지금까지 KSF의 관심 대상에 올랐던 능력자 중 이 법칙을 벗어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예외가 생긴 것이다.

    "진짜 능력자는 맞아요?"

    "비능력자가 맨손으로 고블린을 때려잡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측정기에서는 측정이 안 되었잖아요."

    능력자가 아닌 일반인은 화기를 들지 않고서는 몬스터를 상대할 수 없다. 그리고 능력자의 능력은 반드시 측정기에서 측정이 된다.

    이 두 가지 절대명제가 충돌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가이드가 없으니까.

    "일단은 계속 감시하세요. 단, 기한은 보름입니다. 보름이 지나도록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아쉽지만 포기하죠."

    "하지만……."

    "계속 인력을 낭비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도 시간, 사람 모두 부족한데."

    "그렇긴 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왠지 입맛이 쓰다. 수많은 능력자를 상대하며 생긴 그의 촉이 이지혁은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정 안 되면……."

    서아영의 눈이 도가윤에게로 향했다.

    "강제로 끄집어내 봐야지."

    서아영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받은 도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당스러운 미소. 아주 잘 어울림. 이미지와 들어맞음."

    "너, 따라 나와."

    "거절함. 바보와는 싸우지 않음."

    "죽인다!"

    최정훈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능력자란 것들은 다들 정신이상자들뿐이야.'

    * * *

    그 와중에 또 하나의 정신이상자는 자신이 아닌 현실의 오류를 찾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지혁은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 세계로 돌아온 지 무려 한 달.

    이제 소소한 적응이 모두 끝날 시기다. 그러니 과거의 그의 능력을 모두 되찾을 시점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걸까?

    이지혁의 눈에 그에 대한 열렬한 반응이 보였다.

    * * *

    - 그냥 게임을 접으라고. 왜 게임해서 욕 처먹고 남 괴롭히냐? 메저냐?

    - 이젠 화도 안 난다.

    - 이거, 매칭이 이상해. 내가 아무리 심해충이라도 그렇지, 저런 놈이랑 같이 게임이 잡히는 게 말이 되나?

    - 혹시 팔이 불편해서 발로 게임하심? 그럼 이해함.

    - 발도 없어서 혀로 하는 거 아님?

    - 내가 닉 부이치치랑 게임을 하고 있었구나. 감격스럽다.

    * * *

    "이상하네?"

    상식적으로 그전에 해놓은 가락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게임이 안 풀린다는 게 말이 되나? 아무리 유저들의 기본 실력이 늘고 지금 그가 하는 게임과 과거의 게임이 거의 다른 게임 수준이라고는 해도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이유는 대충 알 것 같기도 했다.

    "손이 쓰레기야."

    마음은 천상에 있는데 손은 마리아나 해구에 있다.

    빤히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아는데 생각처럼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 * *

    - 아니!

    '아니시에이팅'이 시작된다. 게임에서의 '아니!'는 그러지 말란 뜻이 아니다. '이제부터 극딜 들어갑니다'라는 뜻이다.

    - 법사나 암살자 하지 말고 그냥 탱탱한 거 골라서 고기 방패나 하라고. 자기 실력 딱 보면 내가 뭘 잡아야 하는지 판단이 안 되나? 누가 봐도 고기 방패각이구만!

    울컥!

    이지혁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베라프의 멸망의 좌이자 마도의 정점에 오른 어둠의 군주에게 마법사를 하지 말라니!

    웬만하면 채팅을 하지 않는 이지혁도 이번만은 참을 수 없었다.

    * * *

    - 야! 게임하다 보면 좀 못할 때도 있는 거지.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 좀? 좀? 좀? 좀?

    - 외국 살다 오셨어요? 한국어를 잘 모르시네?

    - 거 봐요. 일부러 죽는 거 아니라니까. 저게 실력이라니까.

    - 실력으로 저럴 수가 있는 거냐? 눈이 콧구멍에 달렸나?

    * * *

    나쁜 놈들.

    이지혁은 돌변해 버린 인터넷 문화에 좌절했다.

    이 세상에는 신도 악마도 없는가.

    나름 얻은 것도 있었다.

    한 달 동안 온갖 욕을 처먹었더니, 5년이란 시간 동안 인터넷에 퍼져 있던 온갖 악의적인 은어와 패러디와 욕설들을 물 흐르듯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욕 특성이 있다면 최대치를 찍었을 것이다.

    - 나 없어도 되는 것 같은데, 자꾸 욕하면 게임 안 한다?

    - 제에에에에에발!

    - 님, 생각 잘하셨음. 없는 게 이기는 데 더 도움됨. 리폿 안 할 테니, 우물에서 와드 박고 노셈.

    - 이제 좀 할 만하겠네!

    - 개이득! ㄹㅇ 개이득.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닌데…….

    - 열심히 한 번 해봄.

    - 아니, 열심히 하지 말고 그냥 쉬라고, 이 ***야!

    - 노력충 극혐.

    - 양심도 없나.

    - 그냥 나도 던짐.

    * * *

    "아오! 이 새끼들이 진짜!"

    이지혁은 마우스를 집어 던졌다.

    썩을 놈의 새끼들. 내가 해킹하는 법이라도 배워서 니들 찾아간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방문 옆을 지나던 예원이가 썩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왜?"

    "엄마가 전화 받으래."

    "응?"

    책상 위에 놓인 전화를 보니 부재중이 두 통이나 와 있었다. 게임에 몰입하다 보니 몰랐던 모양이다.

    "아, 그래. 고마워."

    이예원은 대답도 하지 않고 벌레라도 보는 눈으로 이지혁을 슬쩍 훑더니 몸을 획 돌려 가버렸다.

    '쟤는 나한테 왜 저런데?'

    알 수도 없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다. 이지혁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응, 엄마."

    - 아들! 너 또 컴퓨터에 처붙어서 게임하고 있지?

    "아, 아니야. 게임 안 했어……."

    - 예원이한테 물어본다?

    "딱 한 판 했어."

    - 손모가지 날려 버리기 전에 적당히 하지?

    "으응."

    엄마가 이렇게 과격했었나? 기억 속의 그의 엄마는 자상하고 자애롭고 참고서 살 거니까 용돈 좀 달라고 구라 친 자식에게 왜 그랬냐고 안타까워하면서 의자를 집어 던지시…….

    아, 원래 그랬구나. 우리 엄마네.

    - 오늘 게임 더 했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모니터 액정이 얼마나 단단한지 과학 실험 좀 하자꾸나.

    "뭘 그런 걸로 실험을 해!"

    - 초등학생 애들도 벽돌이 자유낙하하는지 옥상에서 실험하는 세상인데, 우리 아들도 과학 실험 좀 해야지?

    "헐."

    - 컴퓨터 작살나는 꼴 보기 싫으면 게임 적당히 해라. 이따 보자.

    전화를 끊고 이지혁은 가볍게 웃었다.

    참 귀여운 협박이다. 베라프로 가기 전까지의 이지혁이었다면 이런 협박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게임을 끄고 불만을 토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다르다.

    이지혁이 누군가!

    베라프의 멸망의 좌다!

    한 세계의 정점을 찍은 정복자이자 마도의 극에 오른 마도사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이런 협박은 간지럽지도 않았다.

    이지혁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게임을 껐다.

    "모니터는 소중하니까."

    물론 절대 결코 협박에 굴해서 게임을 끈 게 아니다. 게임에서 욕먹는 게 짜증도 좀 나고 이제 재미도 좀 덜해서 다른 걸 하려고 끊 거지, 절대로 엄마가 무서워서 게임을 끈 건 아니다.

    절대로…….

    그는 정점에 올랐던 마도사니까.

    이지혁은 컴퓨터 책상에 발을 올리면서 인터넷 창을 켰다. 게임을 안 한다고 해서 할 게 없는 건 아니다. 그도 사람인데 한 달 동안 게임만 했겠는가. 그의 두 번째 취미가 시작되었다.

    찹찹찹찹찹!

    꿀꺽꿀꺽꿀꺽!

    이지혁은 모니터를 보며 낄낄댔다.

    손은 끊임없이 과자와 음료수를 입으로 쑤셔 넣었고, 입과 혀는 맹렬히 가동하는 기계처럼 과자를 부수고 다져 배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자연스레 모니터에 출력된 글을 보고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취미는 장르 소설 읽기였다.

    베라프로 가기 전부터 장르 소설을 읽는 것은 그의 취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좀 더 즐겁게 읽을 수가 있었다. 그가 베라프로 간 사이, 장르 시장의 주류가 현대 레이드 물로 바뀐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지혁이 즐겨 읽는 것은 현대 귀환물이다.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몰입이 엄청 잘된다. 주인공에게 공감하기도 쉬웠다.

    남들은 판타지물로 보겠지만, 그에게는 직업물이었다.

    그리고 미묘하게 장르도 바뀌었다. 남들에게는 진지한 현대 레이드물이 그에게는 묘하게도 직업 체험물이 되고 말았다.

    그가 지금 읽고 있는 글의 주인공은 이계에서 50년을 개처럼 구르며 고생해서 마침내 지구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구에서도 사서 고생을 하며 구르고 있었다.

    "낄낄낄낄낄!"

    비록 소설 속이지만 남들은 귀환해서도 개고생을 하는데 자신은 이리 편히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은근히 대리만족이 된다. 이게 사람 사는 맛 아니겠는가.

    꿀꺽꿀꺽꿀꺽.

    "캬아아아!"

    이지혁은 시원하게 사이다를 들이켜고는 몸을 떨었다. 이게 사이다다. 이게 바로 현대 문명의 이기인 것이다.

    그가 아무리 정점에 달한 마도사라 해도 어떻게 하면 물에 이산화탄소를 녹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과학은 젬병이었으니까.

    베라프에 있을 때, 탄산음료가 너무 먹고 싶어서 북부 지방의 석회수에다 과일즙을 녹여 보았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것은 과일 탄산음료였으나 결과물은 북한에만 판다는 탄산 단물 비슷한 그 무언가였다.

    원한다면 베라프에서 왕이 되어 살 수도 있었다. 무한한 권력을 손에 넣었겠지.

    "그러면 뭐하나, 컴퓨터도 없는데."

    시골만 가도 할 게 없어서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현대인이 중세 시대에서 즐겁게 지낸다?

    판타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게 바로 판타지였다.

    현대는 천국이다.

    맛난 먹을 것도 다양하고, 개인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문화와 쾌락이 있다.

    "그리고 컴퓨터가 있지."

    아, 아름다운 문명의 총화여.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지는 못한 듯하다.

    쾅!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 엄마?"

    방 안으로 들어온 어머니가 이지혁의 책상 주위를 둘러보았다. 먹다 남은 과자 봉지와 페트병이 어지럽게 컴퓨터 책상을 채우고 있고, 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게 사람 사는 방이냐, 돼지우리냐?"

    돼지가 들었다면 우린 의외로 깨끗한 동물이라고 항변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에는 억울함을 표현할 돼지가 없었고,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깨끗한데……."

    "니 눈은 옹이구멍이냐!"

    당장에라도 손에 들린 핸드백을 집어 던질 듯 움찔움찔하던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었다.

    "됐다. 나중에 치우고 옷 입어라."

    "어디 가요?"

    "니 옷 사러 갈 거다."

    "나 필요 없다니까요."

    "나중에 뻘소리하지 말고 얼른 준비해."

    "아니, 진짜 나는……."

    "우리 아들은 참 이상한 게, 처맞기 전에는 말귀를 못 알아듣더라. 그지?"

    "지금 입겠습니다, 박 여사님."

    "옳지."

    어머니는 거실에서 소리쳤다.

    "딸내미, 너도 준비해! 나갈 거다!"

    "내가 왜 가!"

    "너는 옷 사기 싫은가 보지?"

    "준비 중이에요, 어머니."

    이지혁은 목소리까지 변하는 이예원의 꼬락서니를 보며 혀를 찼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가식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뭐?

    나도 똑같다고?

    그럴 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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