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화 (3/118)
  • [■] 이러려고 돌아온 게 아니야! [■]

    ─────

    "돌아오긴 했는데 말이야……."

    이지혁은 손에 들린 돈을 세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상하게 일이 꼬이긴 했지만 공돈도 생겼고, 고작 몇 시간 끌려 다닌 것에 비하면 수익이 괜찮았다.

    게다가 덕분이 이쪽 세계가 돌아가는 사정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가장 고무적인 것은 그가 베라프로 끌려 들어갔던 날 이후로 겨우 5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5년이라니!

    최악의 상황으로는 이 세계가 멸망했을 것도 가정했다. 베라프에서 보냈던 시간과 동일한 시간이 흘렀다면 인류가 핵전쟁으로 모조리 멸종해도 이상하지 않았고, 새로운 지배 종족이 나타나도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겨우 5년이라니!

    적어도 진화한 바퀴벌레와 소통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야 할 걱정은 없어졌으니, 이 얼마나 상쾌한 일인가.

    게다가 차원 축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괴물들이 나타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다행히 그의 신분이 존재했다.

    결국 자신은 그 지옥 같은 베라프를 탈출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육체는 지금 상처 입었다.

    쌍코피가 터졌던 코가 시큰거린다. 아직 회복이 덜된 것이다. 몸이 잿더미가 돼도 3초 만에 원형으로 복원되던 베라프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 이제야 자신은 다시 '인간'이 된 것이다.

    뭔가 뭉클하다.

    그 길었던 시간 동안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는 외로움이나 이 세계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 건 애초에 극복했다. 대충 베라프에 떨어진 지 150년쯤 지나고부터?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잊지 못한다는 것과 죽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구에서의 삶을 잊어갈 수만 있었다면,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 수만 있었다면 이곳으로 돌아오겠다고 그 발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베라프에서 살아가다 죽었겠지.

    하지만 그에게는 망각이 허락되지 않았고, 죽지도, 늙지도 못하는 몸 덕분에 영원의 세월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

    그게 바로 멸망의 좌, 이지혁이었다.

    그런데 이젠 상처를 입는다. 죽을 수도 있다! 이제야 인간이 된 것이다.

    일단 돌아오고 싶다는 막연한 의지만을 목적으로 삼다가 막상 돌아오니 멍해졌다. 딱히 뭔가를 하고 싶어 돌아온 것은 아니니까.

    "집에 가야지."

    우선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집에 가야지, 집에.

    그리고 그전에…….

    이지혁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옷부터 사자."

    현명한 결정이었다.

    가까운 쇼핑센터를 찾아 SPA 브랜드 매장으로 들어갔다. 이지혁은 후드를 있는 대로 눌러쓰고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에게 쏟아진 시선이 지금까지 평생 동안 받은 시선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차라리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듯 신기해하는 시선은 나았다. 뭔가 모자란 인간을 보는 듯 동정 어린 시선이 그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쪽팔려 죽을 것 같다.'

    그라고 이런 옷을 입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나름 자신의 정체성을 찾겠다고 청바지도 만들어보려 애쓰고, 나름 현대식의 복식을 고수했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백 년, 이백 년이 지나다 보니 그런 것도 무의미해졌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그냥 닥치고 성능!

    지금 사람들이 거적때기쯤으로 바라보는 이 로브는 베라프의 마법사라면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가지고 싶어 할 보물이다. 물리 저항에 마법 저항, 거기에다 자동으로 마나 간섭과 수식 보조까지 가능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자체적으로 마법 회로를 보유하고 있어서 간단한 수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마법을 발현할 수 있었다. 아티팩트 수준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라고 해도 좋은 수준의 보물인 것이다.

    '그럼 뭐하나, 이젠 그냥 거적때기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라프에서 절대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 로브가 이곳에서는 그냥 거적때기였다. 마력 회로에 가득가득 들어차 있던 마나는 텅텅 비어 있고, 억지로 마나를 끌어서 밀어 넣어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마나의 법칙이 아니라 세계의 법칙 자체가 달라서인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미련 없이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아니, 설령 이 로브가 제 성능을 120% 발휘하고 있다 해도 갈아입어야 한다. 이제 이지혁은 불사신이 아니니까. 까딱했다가는 쪽팔려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베라프에서는 나름 트랜디한 패션이건만!

    적당한 셔츠와 적당한 바지를 챙기고 팬티와 양말, 신발까지 집어 들었다. 탈의실로 가자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직원이 그를 막아섰다.

    "손님, 계산 먼저 하셔야 됩니다!"

    "언제부터 입어보는 걸 사고 나서 해야 됐다고! 5년 전엔 안 그랬는데!"

    "옷은 괜찮지만, 그 양말과 팬티는 계산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옷도 같이 계산하시죠."

    "아니, 누굴 거지로 아나!"

    직원은 표정과 눈빛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하기야 겉모습만 보면 거지로 보인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땡전 한 푼 없었으니 거지가 맞긴 하지.

    '이걸 때릴 수도 없고.'

    이지혁은 입맛을 다셨다.

    라트렐의 눈이 드래곤 하트와 각종 마력 액세서리들을 모조리 튕겨내지만 않았어도 떼돈을 벌었을 텐데,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마력 회로가 고장 난 로브 한 벌과 대마법 방진이 모조리 사라져 버린 옷들뿐이었다.

    재료가 없어 새로 새겨 넣을 방법도 없었다. 새로 새겨 넣는다고 해도 이 세계에서 베라프의 마법들이 제대로 동작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자르체프라는 괴물을 상대할 때도 그런 탓에 마법은 전혀 쓰지 못했다. 베라프를 헤매며 배워둔 강체법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그는 목 없는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현금으로 계산을 마치고서야 탈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본 계산대 직원의 의심 가득한 눈빛이 있었지만, 다행히 경찰이 출동하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고 신발까지 새로 신고 나자 이 거적때기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고민이 들었다.

    가져가자니 쓸모가 없고, 버리자니 아쉽다.

    결국 이지혁은 종이 가방에 베라프에서 입고 온 옷과 신발을 쑤셔 넣었다.

    탈의실에서 나와 전신 거울 앞에 서자 훤칠하니 잘생긴 놈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좋네."

    현대식으로 바뀐 복장을 보자 괜히 기분이 좋았다. 실실대며 웃다가 매장을 벗어났다. 옷과 신발이 정리되자 동물원 원숭이 보는 듯한 시선은 사라졌다.

    종이 가방을 든 채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실수하지 않고 잘 탈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의 몸은 알아서 자연히 표를 끊고 있었다. 기억이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럴 때 참 좋았다.

    적응할 필요가 없다.

    그의 몸은 베라프에 있었지만, 그의 기억과 혼은 이곳에 있었으니까.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지하철을 환승하고 겨우 예전에 살던 동네에 도착했다.

    이지혁은 감격에 찬 얼굴로 낡은 주공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참 쪽팔렸던 이 집이 왜 이리 정겹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의 집 현관 앞에 섰다.

    '아, 그래도 담담하진 않구나.'

    뭔가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기억 때문에 어제 왔던 집에 그냥 다시 들어가는 기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보면 베라프에서 보낸 시간이 그저 흘러간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기억이 변동되지 않는다는 제약이 풀려서 베라프에서의 기억이 예전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러면 어떠랴.

    띵동.

    이지혁은 벨을 눌렀다.

    - 누구세요?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지혁은 가슴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나야, 엄마."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온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지?

    엄마 기준에서는 5년 만에 보는 건데 많이 놀라겠지? 그동안 어디서 뭘 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이제 겨우 자신이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니까.

    "아들!"

    문이 벌컥 열리고 중년의 여인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돌아왔구나.

    이제야 이곳에 돌아왔구나.

    벅찬 감동에 새어 나오려 하는 눈물을 억지로 밀어 넣는 이지혁에게 뛰쳐나온 여인이 말했다.

    "누구세요?"

    "……."

    이 아줌마가 5년 지났다고 자식도 못 알아보나?

    이지혁은 서운함과 짜증을 한껏 담아 소리쳤다.

    "그쪽은 누구시죠?"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다시 보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가까운 시일 내에.

    그래서 곱게 보내준 것이다. 적당히 풀어놓고 감시하다 보면 어떻게든 건수가 생길 테니까.

    빨리 보면 빨리 볼수록 빨리 건수가 생겼다는 뜻이고, 감시하던 애들의 능력이 높다는 뜻이니까 나쁠 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빨라도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서아영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짓눌렀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덫에 걸린 토끼의 반항이 너무 심하길래 적당히 추적기를 붙이고 다시 풀어줬다. 그런데 이 토끼가 반나절 만에 제 발로 다시 기어 들어왔다.

    서아영은 뻘쭘하게 서 있는 토끼, 아니,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이지혁 씨."

    "…예."

    "아니, 우리가 굉장히 만만하게 보인 모양인데, 우리 좀 바쁜 사람들이거든요? 저기 보이는 최정훈 씨는 삼 일에 한 번씩 퇴근해요. 그만큼 바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서 얼굴을 봐야 한다느니, 말을 해야 한다느니 하면 우리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해요?"

    이지혁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예요?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갔는데요……."

    "갔는데 뭐요?"

    이지혁의 입술이 살짝 떨려왔다.

    이지혁은 한참을 그렇게 먹먹한 듯 떨다가 아주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이……."

    "이?"

    "이사 갔대요."

    서아영은 아무 말도 못했다.

    최정훈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자꾸만 훔쳤다.

    5년 만에 집에 돌아왔더니 집은 어디로 이사 갔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알려진 것만 5년이다.

    이지혁은 들썩이는 어깨를 내리누르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이러려고 돌아온 게 아니야!'

    새삼 지구에서의 삶이 험난하다는 걸 깨달은 이지혁이었다.

    * * *

    "천천히 들어요, 천천히."

    최정훈은 안쓰러운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걸신들린 듯 밥을 퍼서 입으로 마꾸 쑤셔 넣는 이지혁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몰골을 보니 제대로 된 밥을 먹은 지가 몇 년 된 거 같은데.'

    제대로 된 밥은 매끼 먹었다. 베라프 생활 후반기에는 그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문제는 한식을 먹어본 게 아득하다는 것이다.

    이지혁은 김치찌개를 말 그대로 흡입했다. 처음 시켰던 1인분은 금세 동이 났다. 넉넉잡아 3인분을 더 시켰는데 앉은 자리에서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더니, 지금은 냄비 바닥을 긁고 있다.

    '식성 계열 능력이 있었나?'

    밥 잘 먹는 능력을 개화한 능력자가 세상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뻘 생각까지 들었다.

    텅.

    깨끗하게 비워진 냄비가 맑은 소리를 낸다.

    이지혁은 뭔가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숟가락을 빨았지만, 최정훈은 굳이 그에게 식사를 좀 더 하겠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문이 열리고 직원이 출력된 A4 용지를 들고 들어왔다. 최정훈은 서류를 받아 들고 읽어 내려갔다.

    "이지혁 씨, 여기 보이시죠?"

    "예."

    "여기 써져 있는 게 부모님 주소예요. 원래 이런 거 저희는 볼 수 없는 거예요. 다음부터는 경찰서로 가주세요. 아셨죠? 실종 신고 되어 있는 부분 때문에 번거로워질까 봐 이번만 해드리는 거예요."

    단순 실종자면 그냥 주민등록증만 살리면 그만이지만, 이지혁은 깔끔하게 사망 처리가 된 상태라 절차가 좀 번거로웠다. 최정훈은 그 과정을 대신 처리해 주는 대신 이지혁에게 관련된 개인 정보를 모조리 빼냈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실종된 지 2년만 지나도 몬스터에게 먹혔구나 하고 사망 처리를 해버렸다. 소지품이고 뭐고 한입에 꿀꺽해 버리는 몬스터가 워낙 자주 출몰하기 때문이었다.

    "예!"

    이지혁은 말 잘 듣는 어린이가 되었다.

    "주소지 보면 어딘지 아시겠죠?"

    도리도리.

    "모르시겠어요?"

    끄덕.

    말 잘 듣는 어린이라기보다는 말귀 알아먹는 개 같은 느낌도 좀 난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할까……."

    최정훈은 고민에 빠졌다.

    대충 주소 적힌 종이 쪼가리를 쥐어 주고 알아서 찾아가라고 내쫓아도 문제는 없다. 그들이 그런 사소한 임무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길 잃은 어린이, 아니, 길 읽은 멍청이의 집을 찾아주는 것은 경찰 아저씨들의 일이 아닌가.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이 멍청이는 그냥 멍청이가 아니라 능력이 있는 멍청이였다. 게다가 그의 팀장이 침을 아주 꼼꼼히 바르는 중이었다.

    이런 능력자 놈을 대충 홀대했다가 괜히 악감정이라도 쌓이면 골치가 아팠다.

    "잠시만요."

    결국 최정훈은 결정을 떠넘기기로 했다. 대신 결정을 내려줄 사람을 찾아가자 그 결정권자는 말도 들어보지 않고 눈을 찌푸렸다.

    "팀장님."

    "아! 또 왜요! 왜!"

    최정훈은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말이라도 들어보고 짜증을 내라.'

    "그 이지혁 씨 말입니다."

    "주소지 파악 안 됐어요?"

    "됐습니다."

    "그럼 알려주고 보내면 되잖아요."

    "못 찾아가겠답니다."

    서아영은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벽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경찰서에 연락해서 태워주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기는 한데, 그래도 될까 싶어서."

    "에휴."

    서아영은 최정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대충 어떻게든 해결하면 되는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최대한 친분을 쌓아놓아야 나중 일이 수월하다.

    특히나 이지혁은 공간 계열 능력자라 추정되고 있지 않은가. 공간 계열 능력자는 특히나 귀하고, 특히나 중요했다.

    경찰차에 태워 보내는 게 안 될 건 없지만, 왠지 찝찝하다. 그렇다고 직접 데려다 주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최정훈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태워주세요."

    "제가 말입니까?"

    "처음 데리고 온 것도 최정훈 씨니까 책임을 지셔야죠."

    "뭐, 그건 그런데, 제가 지금 미팅 들어가야 됩니다."

    "뭔데요?"

    "이번 건 때문에 진술 좀 해야 하거든요. 뭐, 심각한 건 아닙니다. 부주의로 통제구역에 허가 없이 들어갔으니 고과나 좀 까이고 말겠죠."

    서아영은 피식 웃었다.

    혼자 결정해도 될 일을 굳이 물으러 온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다.

    "제가 처리할 테니 다녀오세요. 대신에 오실 때 저녁 좀 사다 주세요."

    "그거야 뭐 어렵겠습니까? 뭐가 필요하신데요?"

    "스테이크 도시락하고, 음료는 슬러시 킹에서 레몬 트위스트 스트로베리로 사 주시구요, 디저트는 체다 킹 치즈 박스가 좋겠네요. 나만 그렇게 먹으면 좀 미안하니까 직원들 아메리카노도 한 잔씩 먹였으면 좋겠는데?"

    "악마."

    "네?"

    "아닙니다."

    최정훈은 궁시렁대면서도 그러겠노라 방을 나섰다. 고과가 까이는 거에 비하면 싸게 먹히는 거다. 그것도 엄청 싸게.

    하지만 뭔가 기분이 찝찝하다.

    '나도 고급 인력이란 말이다.'

    어디를 가도 엘리트 소리를 들을 학력과 행정고시를 아주 가볍게 통과한 고급 인력이 도시락이랑 커피 심부름을 하고 있다. 이건 국가적인 낭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가 그런 직장인데. 따져 보자면 그의 팀장은 범국가적인 인력인 데도 불구하고 하는 일이라고는 바쁘기만 하고 실용성은 전혀 없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뭐, 국가기관이 다 그렇겠지만.

    결국 최정훈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방을 나와 이지혁에게로 갔다.

    "이지혁 씨, 가시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 *

    "와, 차 좋네요!"

    이지혁은 최정훈의 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무원이라더니, 이런 고급 세단을 타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집에 돈이 많으신가 봐요?"

    최정훈은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타고난 흙수저로, 능력 하나만으로 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메이드 인 개천산이었다.

    "봉급이 좀 됩니다."

    "공무원인데?"

    "생명 수당이 좀 됩니다."

    "이야, 좋은 직장이네요."

    최정훈은 쓰게 웃었다.

    괴물을 상대하면서 받는 생명 수당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그의 생명 수당이 높은 이유는 괴물이 때문이 아니라…….

    '너 같은 놈 때문이지.'

    비능력자인 최정훈은 능력자를 전담으로 맡았다. 그것도 법과 공권력으로 옭아매는 일이 잦았다. 막말로 감정이 격해진 능력자가 꿀밤만 한 대 먹여도 그날로 초상 치르는 거다.

    삐삑.

    보조석에 이지혁을 태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저번에는 걸어서 출근하셨잖아요."

    "지하철 타러 가는 길이었죠."

    "차가 있는데 왜 지하철을 타셨어요?"

    최정훈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삼 일 만에 퇴근하느라 맨 정신에 차 몰고 집까지 도착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

    이 차가 그냥 나온 차가 아니구나.

    몸을 갈아서 샀는데, 차라도 좋아야지.

    이지혁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췄다. 눈앞에서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면 좋아하지 않겠지.

    최정훈의 피와 눈물이 어린 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좋았다.

    "5년 동안의 기억이 안 나신다구요?"

    "예. 기억이 전혀 없네요."

    "기억이 어디까지 있으신 거죠? 블랙 먼데이(Black Monday) 이전인가요?"

    "블랙 먼데이가 뭐예요? 블랙 프라이데이는 아는데."

    "아, 블랙 먼데이에 대한 기억은 없으시군요."

    블랙 먼데이.

    전 세계에 동시에 게이트가 열린 날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대괴수 체제가 전혀 없던 세계 각지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불과 100개의 게이트가 열렸을 뿐이지만, 그 피해는 막심했다.

    잊지 말자는 의미와 대괴수전이 시작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이날을 블랙 먼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게이트가 처음 열린 날을 말하는 겁니다."

    "게이트?"

    "몬스터가 나오는 곳을 말하는 거죠."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라…….

    워프 게이트 같은 건가? 그럼 몬스터들이 타 차원에서 튀어나온다는 말인데…….

    이지혁은 조금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오자마자 본 잔챙이야 소총으로 톡톡, 때려주다가 수틀리면 람보가 쓰던 기관총 같은 걸로 갈겨 버리면 곤죽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말하는 게이트가 워프 게이트라면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베라프를 예로 들어 드레이크라도 한 마리 튀어나온다면 현대의 보병 화기로는 감당이 안 된다.

    '전투기가 붙으면 어떻게 될까?'

    속도는 비교가 안 된다. 현대의 전투기는 마하를 우습게 넘나드니까. 하지만 선회 능력에서는 더 비교가 안 된다. 살아 있는 생물은 순간적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솟아오르기도 한다. 속도에 치중한 전투기들이 그 선회 능력을 따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속도를 내 적당히 스쳐 지나가며 공대공미사일 등으로 격추를 노리고, 드레이크는 회피하는 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겠지만…….

    "개털리겠지."

    문제는 공대공미사일의 화력으로는 드레이크의 비늘을 뚫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순히 격추한다고 다가 아니었다. 도심지에 출현하여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기라도 한다면 공대공미사일은 봉인될 것이고, 어떻게 잡을 방법이 없었다.

    지대공미사일이라도 날려야 하는데, 천궁급은 주변에 끼칠 피해를 감안하여 쓸 수가 없고, 신궁급은 간지러울 것이다.

    드레이크만 해도 이 정돈데 만약의 만약에 드래곤이라도 넘어온다면?

    멸망이다.

    핵이라도 쏘지 않는 이상 답도 없다.

    솔직히 핵도 드래곤의 물리 방어를 뚫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거기다 찬스는 단 한 번.

    최초의 일격으로 죽이지 못한다면 다음에 날아오는 미사일은 공간 이동으로 깔끔하게 피해 버리겠지.

    현대의 화력은 확실히 드래곤을 상회하지만, 그 화력을 상대하지 않는다면 답이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좀 심각한데…….'

    물론 잘나신 윗분들이 손 놓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게이트의 존재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베라프만 생각해도 이 정도다. 그 자르체픈가 하는 몬스터는 베라프에서 전혀 본 적이 없는 종류의 몬스터였으니, 고등형 몬스터가 없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드래곤보다 더한 괴물이 튀어나올지.

    다만!

    '나랑은 상관없지.'

    이지혁은 마음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고생은 할 만큼 했다. 지구를 전부 뒤져도 자신보다 고생한 사람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까지 와서 그 짓을 하라고?

    에이, 농담도 심하시지.

    원래 그런 건 현역들이 하는 법이다. 전쟁터 한가운데로 파병 가서 개고생을 몇 십 년 하고 돌아와 은퇴하고 쉬는 사람에게 전쟁 날 것 같으니 원대 복귀하라고 하는 꼴이었다.

    칼부림 안 나면 용하지.

    "그럼 적응이 쉽지 않으실 텐데요."

    "지금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게이트니 뭐니 하는데, 괴물이 나온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도 이상하고. 저 혼자 뚝 떨어진 느낌이죠."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지만, 내용은 꽤 심각했다. 최정훈은 미간을 좁혔다.

    '진짠가?'

    기억을 잃었다는 거짓말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슬쩍 떠봤는데, 지금 보여주는 반응은 정말 모르는 사람의 태도였다. 산간벽지에서 문명을 접하지 않고 살다가 어느 날 산속에 나타난 괴수 때문에 출동한 군대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반응했다.

    과하게 흥분하지도 않고, 과하게 침착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황당해했다.

    '좀 더 확인을 해봐야겠는데.'

    이 인간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능력자이긴 능력잔데 어느 쪽 능력자인지가 애매하고, 행방이 묘연한 5년간의 행적도 알 방법이 없다. 온갖 방향에서 다 조사를 해봤는데도 말 그대로 실종.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인간은 모 아니면 도였다.

    엄청난 능력자이거나 깔끔하게 꽝이거나.

    그걸 확인해야 확실한 대책을 논할 수 있다. 엄청난 능력자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으로 끌어들어야 하고, 꽝이라면 적당히 아래 부서로 넘겨서 관리시키면 된다.

    '그런데 방법이 애매하단 말이야.'

    능력 확인하겠다고 공격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당한 게이트에다 던져 놓을 수도 없다. 측정치만 나온다면 데려가서 굴려 대면 줄줄이 나올 능력이건만, 측정치가 안 잡히니 구속도 불가능하고 일반적인 매뉴얼을 적용할 수도 없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삐빅! 삐빅!

    그 순간, 휴대폰에서 경보가 울렸다. 최정훈은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길가로 댔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레벨 1. 위치는?'

    근처다!

    최정훈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꼭 가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관할 구역이긴 하지만 레벨 1의 경우 KSF에서 방위사로 책임이 넘어갔으니까.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에서 열리는 게이트를 무시하고 간다는 게 껄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쥐꼬리만 한 직업적 소명이 하필 이럴 때 팔딱대고 있었다.

    "이지혁 씨."

    "예?"

    "근처에 게이트가 열려서 그러는데, 제가 직업상 꼭 가봐야 하거든요?"

    "아, 그러세요? 그럼 그냥……."

    "같이 가시겠어요?"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은 미간을 좁혔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최하 레벨이니까요. 간단하게 정리될 겁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모셔다 드리죠."

    "얼마나 걸리나요?"

    "길어봐야 세 시간 안팎일 겁니다."

    세 시간, 세 시간이라…….

    이지혁은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대충 내려서 주소 불러주고 택시 잡아타고 가도 문제는 없다. 굳이 몬스터가 나온다는 곳에 가서 생길지도 모르는 귀찮은 일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다.

    '궁금하다.'

    그 게이트가 어떤 식으로 작동이 되고, 어떤 몬스터가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다.

    이제 이 세계를 살아간다면 그러한 지식은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딱 세 시간만 투자한다고 생각하면 투자 대비 효율은 나쁘지 않았다.

    "그럴게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최정훈은 이지혁의 말이 바뀔까 두렵다는 듯 급하게 엑셀을 밟았다.

    그와 동시에 창문을 열고 손을 올려 천장에 무언가를 붙였다.

    위이이이이잉!

    사이렌이 울리자 차들이 미묘하게 길을 터준다.

    "오오."

    뭔가 공권력의 가호가 오러처럼 번져 나가는 느낌. 그 기묘한 충족감에 이지혁이 감탄을 내뱉었다.

    "현장에 도착하시면 절대로 제 지시를 따라주셔야 합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예, 걱정 마세요."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절대 나서지 말아주세요. 초보 능력자가 의욕을 드러내다가 사고를 치는 일이 빈번합니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전 능력자가 아닌데요."

    "그렇죠. 네, 그렇죠."

    최정훈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그건 이제 가보면 알 일이고.'

    이 사람과 엮이면 일이 자꾸 꼬이는 느낌이 든다. 이쯤에서 확실하게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 * *

    현장은 이미 통제되고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민간인의 대피가 이루어지고 차량이 통제되었다.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차량 위에 올려진 사이렌을 본 초병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최정훈은 배지와 신분증을 내밀었다.

    신분을 확인한 초병이 간결하게 경례를 붙였고,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차를 몰아 안으로 향했다.

    "게이트라는 게 아무 데나 나타나는 모양이죠?"

    "두서가 없습니다. 산간벽지에 나타나기도 하고, 길 한복판에 나타나기도 하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미 건물이 지어져 있거나 한 곳에 나타나서 건물을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 정도입니다."

    "그럼 물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 데나 나타나면 바다 한복판이나 바닷속에도 나타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하늘에 떠서 나타나지는 않나요? 나오자마자 다 떨어져 죽으려나?"

    최정훈의 머릿속에 절로 그림이 그려졌다. 심해 한복판에 나타난 게이트에서 무지막지한 괴물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쏟아져 나오자마자 모두 목을 부여잡고 둥둥 떠오르다 익사하고, 좋은 영양소를 본 물고기들이 달려들어…….

    최정훈은 고개를 휘저었다.

    "아직 허공에 나타난 게이트는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바다 안 쪽에는 나타났는지 알 수 없지만, 해안에서 올라온 몬스터가 없는 걸로 봐서는 게이트가 생기지 않거나 게이트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이 모두 익사했겠죠."

    "아, 그렇군요."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대로라면 워프 게이트의 소환 위치가 무작위가 아니라는 건데?

    소환 위치도 무작위가 아닌데다가 육지에만 소환되어 육지형 몬스터만 나온다. 뭔가 계산이 깔린 냄새가 풀풀 났다.

    '확인만 하자, 확인만.'

    음모를 파헤치겠답시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닐 생각은 없다. 다만 눈앞에 있는 게이트를 확인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차량이 길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일전에 보았던 차륜형 장갑차들이 보였다. 높이 솟은 건물 측에 지원화기가 설치되고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정훈이 구석으로 차를 세우고 문을 열었다.

    "내리시죠."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괜찮긴 한데,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으실 텐데요."

    "내릴게요!"

    이지혁은 바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목숨은 소중한 거니까.

    최정훈은 이지혁을 이끌고 두 대의 장륜장갑차 뒤쪽에 설치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충성!"

    "예."

    최정훈을 본 군인들이 경례를 했고, 최정훈은 가볍게 경례를 받았다.

    '와, 이 아저씨 생각보다 높은 사람인가 본데?'

    그동안 심부름이나 하고 호구처럼 어린 여자에게 갈굼 받는 모습만 봐서 그냥 하급 공무원인 줄 알았는데, 현장에 오자 포스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댄디한 슈트와 잘 정리된 헤어스타일에서 나오는 남성미가 장난이 아니었다.

    "어떻습니까?"

    "한 시간 쯤 남은 것 같은데."

    모니터 앞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중년의 군인이 최정훈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원 요청은 안 하셨나요?"

    "레벨 1은 이제 지원 안 하기로 했잖아. 왜 왔어?"

    "지나가던 길이라 들렀습니다."

    "할 일 어지간히 없나 보네."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형 방위 사령부.

    일명 방위사.

    대괴수 전문 군단을 양성한다는 취지 아래 국방부에서 새로 만들어낸 조직이다.

    대인과 대괴수는 상대법부터 훈련의 양식이 전혀 다른데다가 각 지역을 방어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다양한 곳에서 랜덤하게 생성되는 게이트에 대응할 수 없기에 기존의 군 체제와 다른, 새로운 부대가 필요했다.

    다만, 화기가 중심이 되는 방위사와 능력자가 중심이 되는 KSF는 그 목적은 같으나 방식이 전혀 달랐기에 언제나 자잘한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견원지간까지는 아니더라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정인수 대령도 영 반갑지 않다는 투였지만, 이 정도면 방위사 소속으로는 굉장히 온건한 반응에 속했다.

    "저분은?"

    정인수 대령이 이지혁을 가리켰다.

    "아, 지나가던 길이라 같이 들렀습니다."

    "능력자야?"

    "아뇨. 아직 민간인입니다."

    정인수 대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봐, 최정훈 씨. 제정신이야? 작전지역에 민간인을 끌고 들어와?"

    최정훈은 정인수 대령의 반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아직이라는 말을 붙여서 대충 여지를 주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 꼬투리 한 번 잡아보겠다는 뜻이었다.

    상대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제 KSF의 투입이 없어진 레벨 1 상황에서는 방위사가 모든 책임을 졌다. 민간인 신분인 자를 끌고 들어와 사고라도 나면 문제가 심각해질 테니 저리 반응하는 걸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 여지만 제거해 주면 되겠지.

    "모든 책임은 저희 측에서 지겠습니다."

    "최정훈 씨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그쪽 동네를 말하는 거야?"

    "KSF에서 지죠."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정인수는 최정훈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자 한발을 뺐다. 그 쪽에서 책임진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럼 저는 게이트 쪽을 한 번 둘러보겠습니다."

    "조심해. 괜히 사고 치지 말고."

    "하하, 걱정 마십시오."

    천막 밖으로 나오며 최정훈은 한숨을 쉬었다. 저 군바리 놈들은 도대체가 협조성이 없다. 그동안 KSF 측에서 지들을 살려준 적이 몇 번인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디게 꼬장꼬장하네요."

    이지혁이 툴툴거렸다. 자신이 앞에 있어 최정훈이 속으로만 삼킨 말을 대신 해주는 것만 같았다.

    "뭐, 감투라도 하나 차셨나? 군인이면 배나 좀 집어넣지."

    어?

    꽤나 적절하게 추임새가 들어오는데?

    의외로 사회생활을 잘할 스타일이었던가?

    최정훈의 이지혁의 평가가 '직장 생활을 한다면 상사의 스트레스성 뇌경색 확률을 높일 위험 인자'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면 욕은 죽도록 퍼먹어도 의외로 센스가 있을지도 모를 타입'으로 변경되었다.

    "긴장되어서 그러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요."

    최정훈은 바리게이트를 지나 생성되어 있는 게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이게 게이트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쉽게 와서 보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 예."

    최정훈이 뭐라고 하든 말든 이지혁의 눈은 게이트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거, 진짜 워프 게이트 아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모양의 문이었다.

    거울처럼 생긴 푸른색 문.

    마법은 학파마다 그 발현 방식이 다르고, 개인에 따라서 또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한 면이 있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살필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 워프 게이트였다.

    그가 알고 있는 워프 게이트와는 형식이 달랐지만, 같은 용도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거, 마나 간섭으로 취소해 버릴 수 있나?'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남들 앞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다 쳐도 이 게이트를 만들어낸 자들에게 이곳에 마나 간섭을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정보를 넘기는 것은 탐탁치 않았다.

    게다가 게이트가 뭐 대단한 마법도 아니고, 취소된다면 다른 곳에 새로 생겨날 것이다. 한마디로 의미가 없었다.

    "그 레벨이라는 건 어떻게 구분하는 거죠?"

    "크기를 보고 구분합니다. 1m가 넘지 않는 게이트가 1레벨로 분류되죠. 그 위로는 크기에 따라 단계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바로는 10레벨 게이트가 최고입니다."

    이지혁의 기준으로는 조잡한 방식이었다.

    인간형 몬스터라면 이 통로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1레벨 게이트에서 리치라도 나온다면 이 게이트는 말 그대로 헬 게이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쪽에는 이쪽 나름의 기준이 있을 테니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이 푸른색이 붉은색으로 완전히 변하면 게이트가 열립니다. 남은 시간이……."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타이머를 바라보았다.

    "15분 정도 남았네요. 물러나야겠어요."

    이지혁이 신기한 듯 타이머를 보며 물었다.

    "이거, 시간을 어떻게 재는 거예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냥 색의 변화 시간을 단위로 측정해서 계산하는 거예요."

    "네?"

    "파란색에서 완전한 붉은색으로 변하면 문이 열리니까 실시간으로 색의 변화를 측정해서 완벽히 붉은색이 될 시간을 추정하는 거죠."

    "아, 그러면 되는구나."

    마나 측정이 아니라 색을 측정한다라……. 간단하면서도 의외의 방식이었다. 마나의 동조율을 계산하는 수식을 짜고 있던 이지혁이 피식 웃어버렸다.

    '뭘 생각하든 마법이 먼저가 되어버렸군.'

    마법을 배웠으니 일반인보다 우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버려야겠다.

    "자, 이제 나가시죠. 저 뒤에 가서 구경하시면 될 겁니다."

    이지혁이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최정훈은 울리는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받았다.

    "예, 팀장님. 현장입니다. 예? 아니, 그래도 와야죠. 관계가 없다고 해도 뭔 일 벌어질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괜히 늦게 대응했다가 민간인 피해가 나면 안 되니까 몇 명 대기시켜 주십시오. 예? 없어요?"

    최정훈은 전화를 붙들고 안절부절못했다.

    "없으면 어쩝니까?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게 왜 없어요? 예? 지원 보냈다구요? 아니, 우리 관할이 여긴데 왜 우리 쪽을 비우고 다른 쪽에 지원을 보냅니까!"

    한참을 전화기 잡고 울분을 토하던 최정훈이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때려치워야지 진짜."

    최정훈은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이지혁을 발견하고는 다시 만면에 영업용 미소를 띠었다.

    '카멜레온이야, 뭐야?'

    감정 변화가 총천연색이네.

    "아, 이제 지뢰 설치하나 보네요. 물러나죠. 저쪽이면 잘 보이고 좋겠네요."

    "예."

    이지혁은 최정훈을 따라 조금 떨어진 곳의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잘 보이네요."

    거의 붉은색으로 변해 버린 게이트와 그 주변을 포위한 장갑차와 보병 부대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게이트 뒤쪽으로는 어떻게 세운 것인지 모를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세워져 있었다.

    "저게 뭐죠?"

    "급속 경화 콘크리트입니다. 서큐어폼(Securefoam)으로 교체하자고 몇 번 이야기 했는데 아직 저걸 쓰네요."

    "서…큐? 뭐요? 서큐버스?"

    "서큐어폼이요. 경화 스티로폼입니다. 속도도 빠르고 가격도 저렴한데, 안정성 문제를 자꾸 거론하네요. 그냥 틀을 좀 더 두껍게 제작하면 그만인데 왜 자꾸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방산 비리 아닌가, 이거?"

    혼자서 자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최정훈을 내버려 두고 이지혁은 게이트에 집중했다.

    그 순간 게이트가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 * *

    최정훈이 게이트 쪽을 가리켰다.

    "게이트가 빛을 발하고 나면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죠. 실제로 보긴 어려운 광경입니다. 잘 보세요."

    이 양반은 뭐 이리 신이 났지?

    이지혁은 들썩이는 최정훈을 보며 고개를 꺄웃했다.

    상사라는 서아영이라는 여자의 몸에서는 마력이 느껴졌다. 모르긴 해도 아침에 봤던 자르체프라는 괴물 따위는 떼로 달려들어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정훈은 완벽한 일반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괴물이 쏟아져 나오는 게이트를 보며 신을 내고 있다는 건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나옵니다!"

    내뿜어지던 빛이 약해지며 게이트 안에서 녹색의 괴물들이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발사!"

    지휘소의 통제와 동시에 총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

    끼에엑!

    꺄아아악!

    전방에 넓게 포진한 보병들이 일제히 총을 갈겨 댔다. 게이트 후방은 이미 콘크리트 벽을 세워두웠기에 부담 없이 연사를 할 수 있었다.

    녹색의 괴물들은 나오는 족족 피 분수를 전신으로 뿜으며 쓰러졌다.

    "엄청 나오네요! 웨이브네, 웨이브야."

    '웨이브라…….'

    이지혁은 피식 웃었다.

    저걸 웨이브라고 부른다면 자신이 연 데몬 게이트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베라프에서 자신을 상대했던 이들이 이곳에 있다면 주둥아리 함부러 놀리지 말라고 최정훈은 후드려 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블린입니다. 가장 자주 출몰하는 괴수죠. 정식 명칭은 따로 있는데, 다들 고블린이라 부릅니다."

    이지혁은 눈을 좁히며 핏덩어리가 된 녹색의 괴물들을 자세히 살폈다. 신장은 대충 1.2m쯤에다가 녹색의 피부, 찌그러진 얼굴.

    '다른데?'

    그가 아는 고블린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생김새가 전혀 달랐다. 그가 아는 고블린은 저런 연녹색의 숏 다리가 아니라 검녹색의 야수였다.

    그런데 하는 짓이 뭔가 닮았다.

    죽은 고블린의 발치에 독 대롱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만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먼 친척쯤 되는 건가?'

    그렇다면 어딘가 베라프와 비슷한 생물 구조를 가진 차원에서 소환되는 것 같았다. 소환되는 차원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고.

    어쨌든 이지혁이 아는 고블린과 비슷하다면 저만큼 소환된다는 건 꽤 위험한 일이었다. 10여 마리의 고블린만으로 마을 하나쯤은 초토화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못해도 100 단위가 넘는 고블린이 그대로 풀려난다면 결과야 빤했다.

    캬아아악!

    다만, 현대의 화기는 확실히 강력했다.

    숙련된 병사는 되어야 1:1로 상대해 볼 수 있는 고블린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다. 나오는 족족 피 분수를 뿜으며 쓰러지는 꼴을 보다 보니 되레 고블린이 불쌍할 지경이다.

    "그렇지!"

    최정훈은 완전히 신이 났다.

    하기야 내가 안전하다는 확신 아래서라면 폭력은 아주 즐거운 감상의 대상이 된다. 복싱과 이종격투기가 괜히 인기가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고블린들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쌓아올려진 시체를 바리게이트로 삼아 살아남은 고블린들이 시체를 방패처럼 들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고블린의 단단한 육체를 생각하면 소총탄으로 시체를 관통하여 뒤에 있는 고블린에게까지 피해를 준다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달려들던 고블린의 발밑에서 지뢰가 퍽퍽! 터졌다.

    발목이 반쯤 뒤틀린 고블린이 바닥을 구르는데, 거기도 지뢰가 설치되어 있는지 몸이 퉁퉁 튕겨 오른다.

    하지만 지뢰는 결국 1회용품.

    꾸역꾸역 밀려오는 고블린을 모조리 막아낼 수는 없었다.

    "젠장, 크레모아 한 방만 터뜨리면 속이 시원하겠구만."

    '좀 진정하시죠.'

    이런 도심지에서 크레모아라니……. 아니, 아군도 이렇게 밀집해 있는데 크레모아를 썼다가는 후폭풍에 사람 죽는 꼴을 봐야 할 것이다.

    야전이라면 이리 밀집대형 짜서 사격할 게 아니라 사방에 크레모아 설치해 놓고 그냥 날려 버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긴 도심 한가운데였고 크레모아를 날려 속 시원하게 고블린을 쓸어버리면 책임자의 목도 시원하게 날아갈 테지.

    고블린들이 대열에 거의 다가서자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사격 중지! 2조 앞으로!"

    정인수 대령의 고함 소리와 함께 후열에서 대기하던 방패병들이 커다란 바디 벙커를 들고 전열로 튀어나왔다.

    쿵!

    묵직한 바디 벙커가 바닥에 내리 찍혔다.

    카아아아!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지만, 강화 세라믹으로 특수 제작된 바디 벙커를 뚫을 수는 없었다.

    투투투투투!

    바디 벙커에 달라붙지 못한 고블린들을 향해 건물 옥상에 고정된 MG50이 불을 뿜었다. 중기관총답게 피 분수가 아니라 한 발, 한 발에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리는 게 보였다.

    저 연약해 보이는 고블린들을 상대로 MG50을 갈기는 건 몬스터 학대다.

    하지만 그 파괴력이 양날의 칼로 작용하기도 하는 법이다. MG50의 총구는 아군의 근처로는 향할 수가 없었다. 탄이 박히지 않아도 바닥에 박히면서 튀어 오르는 아스팔트 파편만으로 인간의 몸은 핏덩어리가 될 것이다.

    달라붙은 고블린들을 상대하는 것은 오로지 소총수와 방패수의 몫이었다.

    "버텨! 새끼야! 똑바로 안 버텨!"

    "아아악! 씨발!"

    작달막한 고블린 몇 놈이 달라붙었을 뿐인데 몸 전체가 뒤로 밀려난다. 바디 벙커가 바닥과 마찰하며 끽끽대고 있었다.

    인간은 덩치에 비해서 운동능력이 무척 떨어지는 생물이다. 맨 손이라면 토끼 한 마리 잡지 못한다.

    "총구 확인 똑바로 하고 갈겨!"

    방패와 방패 사이로 총구가 튀어나와 불을 뿜었다. 방패병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총이 방패를 넘어 달라붙은 고블린을 쏴 재꼈다.

    "밀린다! 저쪽 밀리잖아! 뒤쪽 받쳐 줘!"

    잘 싸우고는 있지만, 한쪽 대열이 무너지고 있었다.

    최정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거, 사상자가 날 수도 있겠는데?"

    대열이 무너지면 대열 안으로 고블린들이 파고든다. 그럼 총을 사용할 수가 없다. 자칫하다가는 고블린이 아니라 아군의 총탄에 맞아 죽는 사람이 속출할 것이다.

    "개 같은 윗대가리 새끼들."

    욕이 절로 나왔다.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정인수 대령이 잘못한 건 아니다. 상황 발생 이후부터 빠르게 병력을 동원해 대형을 갖추고 게이트 오픈 이전에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지금 대형이 뚫리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도심지에 동원할 수 있는 장비에 제한이 있는 것이다.

    막말로 저 게이트가 야산에만 나타났어도 지금쯤 이 주변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화기로 그냥 쓸어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심 한가운데에서는 개인화기와 지원화기 이상의 화기를 동원할 수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 하나 쓸어버리겠다고 건물을 날려 대다가는 몇 년 내로 서울에 건물이 모조리 사라져 버릴 테니까.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 목숨보다 건물이 중요하진 않잖아."

    아니면 군바리는 사람도 아닌가?

    윗대가리들은 군바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은 확실히 군바리들을 아끼고 있었다.

    "2차 방어선으로 물러난다! 대열 깨지 마, 새끼들아! 등 보이는 순간, 대가리에 총알 박힐 줄 알아!"

    확성기에서 정인수 대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이 있었는지, 가장 후열의 소총수부터 일사불란하게 장륜장갑차로 이루어진 2차 저지선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거리를 벌린 만큼 고블린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방패수들이 뒤로 물러나자 고블린들은 그들을 쫓는 대신 건물 앞에 쳐진 바리게이트를 부수고, 일부는 게이트 뒤편에 쳐진 콘크리트 외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쏴! 쏴! 저 새끼들 다 떨어뜨려! 한 놈이라도 놓치면 니들 다 뒈지는 줄 알아!"

    외벽을 타고 오르는 고블린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졌다. 하지만 화력이 집중된 틈에 저지선과 게이트 사이를 막아주던 건물을 타고 오르는 일단의 고블린들이 있었다.

    "저거, 저!"

    정인수는 이를 갈았다. 당장 고블린들을 쏘고 싶었지만, 눈앞에 달려드는 놈들이 우선이었다. 지금 어설프게 명령을 내렸다가 화력이 분산되면 장갑차 뒤로 고블린들이 넘어오거나 저 바글대는 놈들이 백 바리게이트로 쳐둔 콘크리트 벽을 넘어서 시가지로 달려들 것이다.

    "세 마리!"

    게이트가 거의 닫혀가니 조금만 버티면 이 거름으로도 안 쓸 놈들을 소탕할 수 있다.

    그럼 저 세 마리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근처에서 사살해 낼 수 있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통제구역을 벗어난 고블린이 날뛰는 걸 잡아내야겠지만, 그래도 세 마리라면 대처 범위 안에 있다.

    '일단 경찰 쪽으로 협조 요청을 해서 저쪽으로 지원 병력을 파견해 달라고 하면 되겠지. 어떻게든 민간인 피해만 없으면…….'

    그래, 민간인 피해만 없으면 된다. 자식 같은 놈들이 다치는 것을 보면 피눈물이 나고, 죽는 것을 보면 내장이 뒤집히는 듯 아프지만… 그게 군인. 민간인을 지키는 것이 군인의 의무다.

    어떻게든 민간인 지역으로만 들어가지 않…….

    그때, 건물 벽을 타고 오르던 고블린들이 옆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마치 파쿠르(Parcour)를 하는 것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어 한곳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민간인 피해만…….'

    고블린들이 전력으로 뛰어드는 곳에는 검은 패션 슈트를 챙겨 입은 희멀건 꺽다리 놈과 그 꺽다리 놈이 데려온 민간인이 있었다.

    "저 개새끼, 내가 사고 칠 줄 알았다!"

    정인수 대령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 * *

    최정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보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바닥에서 일한 지도 벌써 4년. 현장을 견학하거나 지휘하는 것은 이제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뭔 일인가. 그 4년이라는 경험 안에서 저렇게 몬스터들이 그를 노리고 죽어라 달려든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저렇게 건물을 타넘으면서까지?

    '제기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이지혁을 건물 아래로 내려가게 하려던 최정훈의 발이 멈췄다.

    건물 아래로 내려가면 일단은 안전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다. 그 하나를 살리려고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내버려 두고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현관문을 닫는다 해도 고블린들이 진짜 그를 노리고 달려드는 거라면 현관문 따위는 눈 깜짝할 새에 찢겨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내려가는 도중에 고블린과 마주친다면 즉사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비장의 한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 비장의 수를 꺼냈다가는 이지혁과 어색해질 것이고, 방위사와의 관계도 끔찍해질 것이다.

    그럼 어떤 게 최선인가.

    최정훈의 눈이 좌우를 살폈다. 반대편 건물 창에 배치된 저격수들이 보인다. 최정훈은 고개를 돌려 정인수 대령과 눈을 마주치고 저격수들을 가리켰다.

    오픈된 곳에서 시간을 번다.

    이대로 표적이 된다면 고블린들의 움직임이 단순해질 테고, 저격수들이 편히 저격할 수 있을 것이다.

    고민은 길었지만 행동은 재빨랐다.

    "이지혁 씨, 이쪽으로!"

    최정훈은 이지혁을 끌고 난간 끝에 바짝 붙었다. 거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예상대로 고블린들은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거리면 세 마리 다 잡을 수 있을까?

    탕!

    한 발의 총성!

    달려들던 고블린의 머리에 핏물이 픽, 솟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진다.

    '두 발. 두 발 더!'

    탕!

    또 한 발의 총성.

    두 번째 고블린도 역시 헤드샷 한 방에 뻗어버렸다.

    마지막 남은 고블린은 분명 공격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텐데도 속도를 더 내는 것을 선택했다.

    "쏘라고!"

    탕!

    최정훈의 목소리와 총성이 동시에 터졌다!

    하지만 고블린은 쓰러지지 않았다. 옥상 바닥 한곳이 파이며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그와 동시에 고블린이 최정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기랄!"

    빗나갔다.

    왜 하필 지금!

    최정훈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이지혁이 능력자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능력자가 아니라면 그를 보호해야 했다.

    자신의 몸을 내주고 최대한 거리를 벌린다. 능력 있는 저격수라면 그 와중에도 고블린만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고블린은 그런 최정훈의 의지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그를 타 넘어 이지혁에게로 달려들었다.

    최정훈이 다급히 소리쳤다.

    "나와! 저거 막아! 이지……."

    '이지혁 씨, 도망쳐요'라는 말이 미처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미쳤나!"

    순간, 이지혁이 자신에게 달려들던 고블린의 긴 귀를 한 손으로 움켜잡더니 몸을 빙글 돌려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쾅!

    메치기로 나와서는 안 될 굉음이 울렸다.

    바닥에 처박힌 고블린의 몸이 그 반동으로 1m 가까이 튀어 올랐다.

    얼마나 강한 힘으로 내려쳐야 그 반동만으로 고블린이 저렇게 치솟을 수 있다는 말인가.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최정훈은 한동안 그를 고민하게 했던 문제 하나를 풀 수 있었다.

    "육체 계열이네……."

    최정훈의 오해가 깊어져 갔다.

    * * *

    이지혁은 바닥에 너부러진 고블린의 얼굴을 발로 한 번 질끈 밟더니, 배 위로 올라탔다.

    "내가 만만하냐?"

    이지혁이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교대로 고블린의 얼굴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허리 보소.'

    주먹을 내려칠 때마다 허리가 탁탁 튕기는 것이, 여러 번 해본 솜씨였다. 당장 이종격투기 체육관을 가도 관장이 박수를 쳐줄 파운딩 실력이다.

    "저쪽 동네에서 봤으면 10킬로 밖에서 대가리 처박고 벌벌 떨었을 놈이 뭘 믿고 나대지?"

    최정훈은 이지혁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고블린한테 하는 말이겠지?

    퍽퍽퍽!

    고블린을 후려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이지혁이 외쳤다.

    "아니, 약해 빠진 게 뭘 믿고 나대냐고!"

    고블린한테 하는 말일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근데 왜 식은땀이 흐를까?

    주먹이 뻗어질 때마다 고블린의 작은 몸이 들썩들썩했다.

    "이, 이지혁 씨!"

    "예?"

    "주, 죽은 거 같은데요?"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은 고블린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더니 혀를 찼다.

    "왜 이리 약골이지?"

    '그게 약골일 리가 있나!'

    평범한 인간이라면 고블린과 마주치는 순간에 죽는다. 인간이 아무리 단련한다고 해도 고블린과 비슷한 덩치의 침팬지 한 마리 이기기 어렵다. 일반적인 짐승도 그럴진대, 괴수라 불리는 고블린과 인간의 격차가 얼마나 심하겠는가.

    단단한 육체에는 이도 박히지 않는다. 그 근력은 그저 움켜잡는 것만으로 사람의 뼈를 부수고 살을 찢어낸다.

    그런 고블린을 파운딩으로 잡는다?

    "역시 능력자시군요."

    이지혁은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아닌데요?"

    "역시나 육체 계열이십니까?"

    "네? 아닌데요?"

    "육체 계열도 아니신데 몬스터를 맨손으로 때려잡으신다고요?"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피떡이 된 고블린을 발로 툭툭, 찼다.

    "이런 약골 하나 잡는 데 뭔 능력씩이나."

    "아, 예. 능력도 필요 없다는 거군요."

    "아니라니까요."

    그사이 남은 고블린들을 모두 정리한 정인수 대령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래쪽에 진을 치고 있다 보니 옥상 위에서 뭔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들은 것은 고블린이 처리되었고,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보고뿐이었다.

    정인수 대령은 바닥에 널브러진 고블린을 보더니 인상을 썼다.

    "아니, 민간인이라며!"

    "신분은 그렇습니다."

    "뭔 배짱으로 민간인을 데리고 왔나 했더니, 능력자면 능력자라고 말을 해줘야 할 것 아냐. 괜히 걱정했네."

    "아,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뭐, 됐고."

    정인수 대령이 고블린의 얼굴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무식하게도 팼네."

    정인수 대령의 눈이 피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는 이지혁의 주먹으로 향했다.

    "능력자쇼?"

    "아닌데요."

    "……."

    이 상황에서도 이지혁은 당당했다.

    "맞는 거 같은데?"

    "아닌데요."

    정인수 대령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니, 몬스터를 맨손으로 떡이 되도록 패놓고 능력자가 아니라고? 저거, 댁이 팬 거 아니요?"

    "맞아요."

    "그럼 능력자 맞잖아!"

    "아닌데요?"

    이 새끼가?

    정인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최정훈이 급하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하하하하! 대령님, 이분이 지금 장난을 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럼 놀려먹는 거구만?"

    "아뇨, 아니죠.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잖습니까. 민간인 신분이라니까요. 맨손으로 고블린을 잡든 황소를 때려잡든 어쨌든 민간인은 민간인입니다."

    "그게 뭔 소리야? 장난해?"

    "어쩌겠습니까. 측정치가 1,000이 안 넘는데."

    "뭐?"

    정인수는 황당했다.

    이게 뭔 개소린가?

    "진짜야?"

    "예. 측정 지수 840입니다. 그러니 민간인이죠."

    "아……."

    최정훈은 정인수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양반은 능력자를 싫어한다. 그것도 아주.

    갑자기 툭 튀어 나온 것들이 몬스터를 상대한다고 깝죽대고 군인을 무시한다며 능력자란 능력자에게 모조리 시비를 걸고 다니는, 아주 골치 아픈 인종이다.

    그나마 최정훈이 정인수와 대화가 되는 것도 그가 순수한 비능력자이기 때문이다. 소속이 KSF이기 때문에 민간인은 아니지만, 능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이라도 섞을 수 있는 것이다.

    이지혁을 능력자라고 소개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러니 사실을 적당히 밝혀서 이 상황을 넘어가는 게 좋았다. 게다가 정인수는…….

    정인수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더니 이지혁에게 거수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오해했습니다."

    민간인에게는 매우 친절했다.

    능력자에게는 온갖 시비를 걸고 어떻게든 괴롭히려고 악을 쓰는 진상 말년 같은 인간이 민간인을 상대로는 더없이 친절한 참 군인이 되었다.

    '볼 때마다 소름 끼친다니까. 저거, 이중인격도 아니고.'

    "아, 괜찮습니다."

    이지혁도 그 갭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정인수가 말을 멈추고 씨익 웃더니, 이지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커피 한잔하러 가시죠?"

    "예?"

    정인수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 * *

    "…그러니까 말입니다."

    "자네, 할 일 없나? 좀 가지?"

    "그러고 싶은데, 제가 이분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해서……."

    "어딘데? 멀어? 내가 모셔다 드리면 되지."

    "그게… 잘 모셔다 드리라고 팀장님이……."

    "내가 모셔다 드렸다고 해. 억울하면 직접 오라고 하면 되겠네."

    최정훈의 왼쪽 머리가 쿡쿡 쑤셨다. 편두통이 시작된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지?'

    아무리 민간인 피해가 전무하고 건물 피해도 양호했다지만, 현장 책임자가 지휘 천막에서 민간인을 앉혀놓고 커피나 먹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왜 자신은 이 웃기는 상황을 내버려 두지 못하고 안달복달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능력자가 아니신 줄 알았으면 진작 인사드렸을 텐데요. 그런데 그 고블린은 어떻게 잡으신 겁니까?"

    "그냥 덤비길래 후드려 팼는데요."

    "캬! 그렇죠, 그렇죠. 덤비는 게 있으면 그냥 쥐어 패는 게 답이죠. 손은 괜찮으세요?"

    "멀쩡해요."

    "고블린 얼굴이 쭈글쭈글해 보여서 그렇지 엄청 단단할 텐데, 그걸 묵사발로 만들고도 멀쩡하시다니!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셨나 보군요."

    "아뇨. 딱히 운동을 하지는 않았는데요."

    "타고났네! 타고났어!"

    저 리액션 보소.

    웬만한 예능 프로에 가져다놔도 리액션으로 먹어줄 것 같았다.

    최정훈이 옆에서 보든 말든 정인수는 아주 적극적으로 작업을 치고 있었다. 저러다 곧 형, 동생 하다가 소주 한잔하러 갈 기세였다.

    차마 그 꼴은 볼 수 없다. 어디 감히 자신이 침 발라놓은 물건에 손을 댄단 말인가.

    그리고 이지혁, 이 인간은 KSF에서는 그렇게 틱틱대더니 왜 여기서는 저리 고분고분…….

    부스럭부스럭.

    꿀꺽꿀꺽.

    찹찹찹찹.

    최정훈의 눈에 음료와 과자를 폭풍흡입하고 있는 이지혁이 들어왔다.

    '아, 이게 공략법이구나.'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 콜라를 몇 캔이나 들이붓고, 김치찌개를 물처럼 마시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정인수는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데 이지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단답으로 대답하며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꺽~"

    음료와 과자가 모조리 비워지고 나자 이지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나른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음……."

    이지혁이 슬쩍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뭐? 왜?

    니 나이를 내가 알려줘야 해?

    "호적상으로는 23세입니다."

    "아이고, 무척 동안이십니다. 전 이제 겨우 고등학생쯤 된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지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잘 먹었어요."

    "벌써 가시게요?"

    "예. 오랜만에 집에 가는 거라……."

    "아이구. 그러시구나. 그럼 가시는 길 위험할지도 모를 텐데, 장갑차라도 한 대 내어드릴까?"

    어느 미친놈이 위험하다고 도심 한복판에서 장갑차를 타고 다닌단 말인가.

    저 양반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제가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최정훈이 끼어들자 정인수가 대놓고 인상을 썼다. 하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발 물러났다.

    "이것도 인연인데, 전화번호라도?"

    "휴대폰 없으십니다."

    정인수가 입맛을 다시고는 순순히 물러났다. 너무 깔끔한 반응이 되레 의심스러웠지만, 딴지를 걸기는 좀 애매했다.

    "그럼."

    최정훈이 이지혁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정인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들이 멀어지자 통제 명령을 내리던 작전과장에게 물었다.

    "작전과장."

    "예, 대대장님."

    "우리 애들이 맨손으로 고블린이랑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맨손요? 몇 명으로 말입니까?"

    "일대일로."

    "에이, 그건 안 되지 말입니다."

    "그렇겠지?"

    "대검 하나 쥐어 준다 해도 웬만큼 훈련 받은 애들 아니면 고블린 못 잡습니다. 사람이 주먹으로 때리는 거에 아파할 놈들도 아니고, 대검으로 찔러도 칼 잘 안 박힙니다. 힘도 워낙 세서 관절기도 전혀 안 들어가구요. 난전 벌어지면 애들 팔다리 찢겨 나가는 건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그게 정상이지."

    정인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했다.

    "그럼 능력자는 아닌데 그게 되는 놈이면 어떨 거 같아? M60 하나 쥐어 주면 람보가 따로 없겠지?"

    "힘세다고 전투 잘하는 건 아니지 말입니다. 그래도 훈련시킬 맛은 날 겁니다. 훈련만 잘 시켜놓으면 괴물도 잡겠지만, 능력자 새끼들 모가지도 딸 수 있을 것 같지 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의미 없는 상상이라는 것은 정인수도 알고 있었다. 군대는 한 명에게 100을 투자하여 100의 효용을 얻는 곳이 아니라 열 명에게 10을 투자하여 80의 효용을 얻는 곳이다. 100의 능력을 가진 엘리트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을 열 명이 나눠 할 수 있게 만드는 곳.

    왜냐면 엘리트가 전사하면 대처할 방안이 없지만, 일반 병력은 시간과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지혁이 날고 기는 능력을 가졌다 해도 그에 맞춘 훈련 방안과 장비, 교범, 전투 매뉴얼 등을 확립하는 것도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리고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그런 건 KSF에서 할 일이니까.

    깔끔하게 미련을 버려야 하지만, 왠지 자꾸 미련이 남았다.

    "그런데 쟤, 군대는 갔다 왔을까?"

    미련이 슬금슬금 이지혁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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