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그러시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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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치워야지."
직장 생활이 엿 같은 건 전 세계 모든 직장인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하급자는 하급자대로, 상급자는 상급자대로 나름의 애환이 있고 고통이 있다.
그러니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야 누가 없겠는가. 다들 그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지만 토끼 같은 자식과 짐승 같은 마누라를 생각하며 참고 사는 거지.
"그만둘 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참기에는 너무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국가 공무원인데다 연봉도 높은, 꿈의 직장이지만, 실제로는 퇴근 시간이 미친년 널뛰듯 하고, 업무 강도는 지옥을 방불케 하고, 인간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정신과 의사에게 제정신으로 살고 싶으면 직장을 옮기라는 권유를 받을 정도였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분명 퇴근을 새벽 5시에 했는데 출근이 11시까진 게 말이나 되나?
그래, 이해한다. 이해한다, 이거다.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 전에도 이틀 동안 집에 못 간 사람이 새벽 5시에 퇴근했는데 인심 썼다는 듯 11시까지 출근하라는 게 말이나 되냐고.
"오늘은 꼭 사표 쓴다."
최정훈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사직서를 만지작거렸다. 이 사직서를 품에 넣고 다닌 것이 벌써 일 년.
때가 묻다 못해 반질반질해진 사직서의 봉투를 바꾸고 새로 챙겨 넣은 것이 불과 일주일 전.
오늘만큼은 이 사직서를 그 빌어먹을 팀장의 얼굴에 던져 줄 것이다.
남들은 다 출근하고 휑해진 거리를 혼자 걸어 출근하는 기분이 아주 더럽고 좋았다.
어떻게 이 넓은 길에 사람 하나 없단 말인가.
하기야.
직장이 있는 사람이면 다 출근했을 것이고, 학생들은 다 학교를 갔을 것이고, 남아 있는 사람이라 봐야 애들 학교 보내고 짬 내서 장보는 가정 주부거나 백수거나 아니면…….
바로 그때, 최정훈의 시선에 한 사람이 포착되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후더분한 망토를 전신에 두른 사람이 엎드린 채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아, 노숙자도 있지.'
할 짓 없는 노숙자도 이 시간에는 눈에 잘 띌 것이다. 그런데 그 노숙자가 하는 짓이 심상치 않았다. 바닥을 더듬는 손끝이 살짝살짝 경련하더니, 이내 몸 전체가 눈에 보이도록 확연하게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발작?'
최정훈은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라도 아픈 거라면 지금 당장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응급처치를 할 의학적 지식이 없으니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119 아니던가.
한데 그때, 뭔가 미묘한 신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아……."
"흠……."
최정훈은 휴대폰을 든 채 가만히 노숙자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지만, 목소리 자체는 꽤나 어린 티가 났다. 어리다 해서 발작을 하는 경우가 없다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상황을 보는 게 옳을 듯하다.
'노숙자는 아니군.'
가만히 보니 저 망토도 뭔가 수제품 냄새가 풀풀 난다. 하기야 저런 망토를 어디서 팔진 않을 테니, 입으려면 직접 만들어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리다.
패션 센스가 정신이 나갔다.
그리고 그 패션이 아무리 봐도 수제 제작품이다.
아픈 건 아닌 것 같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해 봤을 때, 눈앞에 보이는 괴인의 정체가 대충 짐작이 갔다.
코스플레이어.
코스어 중에서도 아주 제대로 막장인 코스어다. 다른 사람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코스프레를 하고 자신만의 설정에 빠져 사는 인간.
아마도 지금 지옥의 마력이 자신에게 접신하고 있다는 설정이겠지.
세계가 막장으로 흘러간 몇 년 전부터 이런 식의 설정을 잡고 노는 미친놈들이 많아졌다. 능력은 가지고 싶은데 능력이 없는 것들이 자신만의 설정 안에서라도 능력자가 되려 하는 것.
아아아… 하는 걸로 보아서 외칠 말은 아마 아스모데우스? 아니면 아스타로트?
디아블로나 벨제붑처럼 흔하지도 않고 아주 적절하다.
개성적인 세계관을 설정했구나.
하지만 그의 예상은 깔끔하게 빗나갔다.
"아… 아아! 아스팔트으으으으!!"
괴인은 바닥을 마구 쓰다듬더니, 이제는 숫제 얼굴을 바닥에 붙이고는 비벼 대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아스팔트다! 딱딱하다! 딱딱해! 으하하하핫!"
최정훈은 발광을 하는 괴인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아쉽게도 그가 틀린 것 같다.
휴대폰을 열어 긴급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119죠? 여기 길 한복판에 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어 보이네요. 빨리 와서 좀 어떻게 해주시죠. 네? 경찰에 전화하라고요? 아뇨. 뭔 죄를 지은 건 아닌데, 아무리 봐도 금치산자나 정신이상자 같은데요. 네? 경찰요? 이거, 출동 거부 아닙니까? 예? 아니라고요?"
최정훈이 전화를 하든 말든 바닥을 뒹굴던 괴인은 고개를 번쩍 들어 좌우를 살폈다. 순간, 최정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
정신 나간 미친놈이 지금 뭔가 목표물을 찾고 있는데, 이 넓고 휑한 도로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저 미친놈, 둘뿐이었다.
"아, 지금 제가 좀 위험한 것 같은데요. 일단 경찰에도 연락해 주세요. 그리고 같이 좀 출동해 주셔야겠는데요. 아무래도 제가 무사할 것 같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다행히도 괴인의 눈에 최정훈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괴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길 한쪽 벽에 세워져 있는 현대 문물의 이기, 네모난 금속 상자였다.
"자, 자판기!"
괴인은 엉금엉금 기어 자판기로 다가가더니, 마치 절대반지를 바라보는 골룸처럼 손을 뻗어 자판기 유리 너머에 전시되어 있는 음료수들을 쓰다듬었다.
"자, 자판기! 콜라! 사이다! 자판기!"
이쯤 되면 중증이다. 119가 오기 전에 난동이라도 부리면…….
그때, 괴인의 눈이 획 돌아 최정훈에게 고정되었다.
움찔.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핏발이 잔뜩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괴인의 눈은 뭔가 괴기로웠다. 마치 짐승 같았다. 그도 직업상 반쯤 미친놈들을 자주 봐왔다. 그중에는 살인자도 있었고, 살인자보다 더한 인간들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괴인이 보여주는 눈빛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그 눈빛에 어려 있는 강렬한 감정의 파동이 최정훈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후드 아래 드러난 얼굴은 이제 갓 스물쯤 되어 보였다. 하지만 앳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괴인이 최정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먹잇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맹수가 퇴로를 차단하듯 그 느릿한 걸음이 달아날 곳을 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꿀꺽.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휴대폰 너머로 애타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헝클어진다.
뭔가 해결책을 떠올려야 하는데,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어느새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괴인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아저씨."
"……."
"아저씨!"
"으응, 응?"
잠깐의 침묵.
살짝 망설이는 듯하던 놈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코 빠르지 않고 느긋한 목소리가 최정훈의 귀에 똑똑히 틀어박혔다.
"콜라 사 먹게 1,300원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
"……."
"네?"
최정훈은 전화를 끊었다.
* * *
치이익!
콜라 캔을 따는 소리는 언제나 상큼하다.
최정훈은 가볍게 콜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옆에서 콜라를 흡입하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이 이상한 놈은 자신에게서 돈을 강탈하더니, 그 강탈한 돈을 자판기에 쑤셔 넣고는 콜라를 뽑아 마셨다.
한 캔으로 만족을 못하는지 무려 세 캔을 연속으로 뽑아 마시더니, 이제 등 따시고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고는 자판기에 등을 기대고 꺼억, 하고 트림을 해 대고 있었다.
'피 같은 내 돈.'
그래봐야 5,000원도 안 되는 돈이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다. 차라리 불우이웃이라도 도왔으면 덜 아까웠을 텐데,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놈은 불우이웃이라기보다는 불행이웃에 가까웠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가만히 뜯어보면 나름 괜찮게 생겼다.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추남도 아니다. 살짝 올라간 눈매가 사람을 사납고 심술궂게 보이게 하고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적당히는 생긴 얼굴이었다.
그런 놈이 왜?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녀?"
"저도 좋아서 입은 건 아니거든요."
"새로운 왕따나 뭐 그런 거냐? 벌칙 게임? 이 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콜라를 얻어먹으시오?"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이상한 놈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짜증이 어렸다. 지금 나는 등 따시고 배부르니 자꾸 쓸데없이 말 걸지 말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이 은혜도 모르는 놈.
"사람들이 욕한다. 옷은 제대로 입고 다녀야지."
"네네, 그러려구요."
최정훈은 울컥했다. 나름 걱정해 준 건데 이 정신 나간 놈은 여전히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줄 거 줬으면 갈 길 가지 뭐 얻어먹을 것 있다고 여기서 죽치쇼?'라는 문장을 표정과 눈빛만으로 전달하는 신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뭐해? 학교 안 가냐?"
"직장 안 가세요?"
어른이 물어보면 대답부터 해야지, 되묻는 버릇을 보니 버르장머리를 바랄 수 없는 놈이다.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 빨리 가셔야겠네요.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많이 늦은 거 같은데. 근데 희한하긴 하네. 어떻게 이 넓은 길에 사람 하나가 없지?"
"시간이 시간이니……."
최정훈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너무 없지 않나. 그리고 조금 전에 119에 신고를 하다 끊었는데 왜 구급차가 안 오지?
"어?"
불길한 예감이 확 들었다.
최정훈은 순간적으로 좌우를 살폈다. 그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최정훈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저기 길 끝, 먼 곳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인다. 그리고 그 형체는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형체 자체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그들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망했다."
최정훈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이해했다. 최악의 상황이 최악의 타이밍으로 맞아떨어졌다.
'어제 사표를 낼걸.'
결국은 이렇게 죽을 것을.
최정훈은 깊게 한숨을 쉬고 연민 어린 눈으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 * *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은 가능했다. 그는 민간인으로 분류가 되지 않으니 작전 지역 안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제지하지 않는다. 코드 스캔기가 반응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자연스레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코드 스캔으로 민간인들을 찾아 대피시키고 통제 라인을 형성하는 도중 지나쳐 버렸겠지. 하지만 이 청년은?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희끄무레했던 형체는 이미 확고히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고, 이제 곧 그들에게 도달할 것이다.
최정훈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형체를 주시했다.
사람, 아니, 굳이 말하자면 거인이라고 불러야 할 형체.
신장은 적어도 3m에 달해 보이고, 두 다리와 두 팔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절대 저걸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가죽을 벗긴 인간의 몸에 되는대로 약물을 쑤셔 넣어 네다섯 배로 부풀리면 저런 형태가 될 것 같았다.
저걸 뭐라고 부르더라?
"자르체프."
아마 비슷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첫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붙였던가? 분명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사람의 이름을 갈가리 찢어 죽인 괴물에게 붙이다니, 악취미다.
딱히 신기한 생물은 아니다. 꽤나 자주 목격되는 괴물이니까. 뭐, 그리 호들갑 떨 일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저 괴물이 맨손으로 곰을 마른 오징어 찢듯이 찢어 죽이는 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찍은 목표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면 저 둔중해 보이는 몸을 가진 주제에 최대 속도가 치타에 맞먹는다는 점?
그런 건 다 사소한 문제다.
그나마 개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저놈이 아무리 봐도 자신과 청년을 목표로 찍은 것 같다는 것뿐인데, 그것도 사소한 문제였다.
중요한 건 단 하나, 이제 곧 자신은 갈기갈기 찢겨 죽을 거라는 것. 그걸 감안하면 다른 건 모두 사소한 일일 뿐이다.
눈앞의 청년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모양이었다.
"와? 저거 뭐지? 여기에 왜 저런 게 있지?"
청년은 신기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맹렬히 달려오는 괴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징그러! 뭐 저리 생겼지. 아저씨, 저거 뭐예요?"
"괴물이겠지."
"여기 왜 괴물이 있지? 언제부터 있었어요?"
"예전부터."
"아, 그럼 안 되는데. 잘못 왔나?"
최정훈은 헛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죽을 테니 마음을 편히 먹었다. 직업이 직업이라 목숨은 언제나 반쯤 내놓고 있었으니 딱히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놈은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눈앞에서 괴물을 본 경험도 딱히 없을 텐데도 머리에 나사가 여러 개 빠졌는지 달려오는 괴물을 보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도망가지 말고 차라리 그 자리에 있어. 쫓아서 잡으면 반드시 찢어 죽일 테지만, 제자리에 있는 것들을 깔끔하게 때려죽이기도 하니까."
"와, 사람도 공격하는 모양이네? 신기하다."
니가 더 신기하다, 이 미친놈아.
이제 말할 시간도 없다.
십여 미터까지 거리를 좁힌 괴물이 땅을 박차더니, 그 육중한 거구를 공중으로 띄워 올려 청년에게 날아갔다. 오른팔이 뒤로 팽팽하게 당겨지며 외부로 노출된 징그러운 근육이 꿈틀대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아마 저 휘두르기에 맞으면 코끼리도 일격에 즉사하겠지.
하지만 청년은그 모습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뭔가 있나?'
그 태연한 모습이 품지 말아야 할 기대를 갖게 했다.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청년은. 그러고 보면 아까 그 눈빛도 평범한 청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어쩌면 능력자? 저 정도 잡몹은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는 고위 능력자?
청년은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비웃음이 담긴 비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드!"
콰아앙!
거대한 폭음이 터지고…….
실드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긴 청년의 육체는 메이저 리거가 전력을 다해 수면으로 던진 납작한 돌처럼 아스팔트를 수면 삼아 통통통통, 물수제비처럼 튕기다 처박혔다.
어찌나 멋지게 튕기는지, 사람이 죽는 광경인데도 공포나 놀라움보다 감탄이 먼저 나올 정도였다.
'사람이 저렇게도 날아가는구나.'
최정훈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저것보단 곱게 죽기를. 다행히 죽기 전에 한 가지 교훈은 얻을 수 있었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 가는 길이라도 고운 법이다.
'폼이라도 잡지 말지.'
그나마 저 우스운 꼴의 유일한 목격자인 최정훈이 곧 증거 인멸될 거라는 사실이 청년에게 위안이 될 것이다. 아니, 증인 인멸이라 해야 하나?
크르르르르.
청년을 날려 버린 자르체프의 시선이 최정훈에게로 향했다. 최정훈은 고통이 없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으하하하하핫! 죽을 뻔했다. 진짜 죽을 뻔했어! 와! 까딱했으면 죽었다! 죽었다고! 이히히히힛! 와, 실드가 안 켜지네. 깜짝 놀랐다."
저 길 끝에서 제대로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정훈은 놀라 눈을 떴다.
방금 전, 물수제비처럼 날아갔던 청년이 고개를 좌우로 털며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저거?"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날아가서 아스팔트 바닥에 몇 번이고 처박혔는데 저리 멀쩡하게 걸어온다는 게 말이 되나?
아니, 사실 좀 멀쩡하지는 않았다.
청년의 코에서 피가 줄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 그대로 쌍코피가 제대로 터졌지만, 그것도 모르는지 청년은 활짝 웃으면서 해맑게 걸어왔다.
얻어맞아서 죽을 뻔한 게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전에 죽을 뻔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죽어야지.
양심이 있으면 그런 걸 맞고는 죽어주는 게 사람으로서의 도리였다.
크르르르.
자르체프도 어느새 최정훈에게 관심을 끄고 걸어오는 청년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너도 황당하구나.'
자르체프의 지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지성이라는 게 있으면 황당해하거나 당황해하겠지.
크르아아!
'아니, 화내는구나.'
자르체프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청년에게 날아갔다. 조금 전보다 더 빠르고 강맹한 기세로!
청년은 그 광경을 보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었다.
"아저씨, 봤어요? 저 죽을 뻔했다니까? 으하하하핫! 코피가 안 멈춰! 안 멈춘다!"
'그래, 봤지. 이제 죽는 것도 보겠네.'
최정훈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승길 동무가 저런 정신 나간 놈이란 게 영 못마땅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아, 진짜 귀찮게!"
뭔가 떠들어 대던 청년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자르체프를 보고 짜증을 냈다. 안타깝게도 자르체프는 청년의 짜증을 존중해 주지 않았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끝내겠다는 듯 두 손을 모아 내려쳤다.
아니, 내려쳤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청년이 양손을 모아 머리 위로 올린 자르체프에게 한 걸음 슬쩍 다가가더니, 자르체프의 머리를 향해 부채질하듯 손을 휘저었다.
퍼억!
순간,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자르체프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쿠웅!
그 육중한 거구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 디러."
청년은 자신의 손에 튄 자르체프의 체액과 살점을 보고 기겁을 하더니 바닥을 향해 손을 털었다. 잘 떨어지지 않자 자르체프 옆에 쪼그려 앉아 그 널찍한 등판에 손을 문대 닦았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혼이 빠졌다.
'내가 뭘 본 거지?'
굉장한 걸 봤다.
분명 뭔가 굉장한 걸 본 거다. 저 어린 청년이 날뛰는 괴물을 한 방에 잠재우는 걸 봤으니, 그걸 굉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정훈의 놀람은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최정훈이 자르체프를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르체프를 죽이는 걸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저 괴물을 저런 식으로 쉽게 농락하듯 죽이는 사람은 맹세코 처음 봤다는 것.
아니, 따지자면 더 쉽게 죽이는 사람도 있었다. 손짓 하나로 태워 버리거나 얼려 버리거나 날려 버리거나 어쨌거나.
다만, 그런 이들은 그 결과에 이르기 위한 과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최정훈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방금 저 청년은 정말 파리 쫓듯이 휘두른 손으로 자르체프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런데 그 간단한 손짓이라는 결과 사이에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지 도무지 유추할 수가 없었다.
"저, 아저씨."
"어? 아… 네!"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 나왔다.
청년은 가만히 최정훈을 보더니 무척이나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날려갔다 와서 목마른데, 콜라 하나만 더 사 주시면 안 돼요?"
"……사 드리겠습니다."
최정훈은 직접 자판기로 가 콜라를 뽑고는 청년에게 가져다주었다. 청년은 헤실헤실 웃으며 콜라를 받아 들더니, 뚜껑을 따고 마셨다.
최정훈은 그런 청년을 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무난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고민에 빠진 최정훈을 도와준 것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였다.
위이이이잉!
"이제 오네."
최정훈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늦어도 너무 늦다.
"어? 뭐지?"
하지만 청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좌우를 살폈다.
드르르르르.
그들의 시선에 나타난 것은 차륜형 장갑차.
도심에 어울리지 않는 차륜형 장갑차 여러 대가 골목 안으로 힘겹게 진입했다. 멀쩡한 도심에 나타난 장갑차 부대.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장갑차의 해치가 열리더니, 총기로 중무장한 인원들이 우르르 내려 두 사람을 포위했다.
"아저씨, 우리 뭐 잘못한 거예요?"
최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잘못한 건 없죠."
"그런데 이 사람들 왜 이런데요?"
"별일 아닙니다. 잠깐 같이 가주시면 되니까요."
"네?"
최정훈이 품 안에서 얇은 지갑을 꺼내 열고는 앞으로 내밀었다. 지갑 안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배지가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KSF의 최정훈입니다. 귀하께 벌어진 일에 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깐 같이 가주시죠."
"네?"
"방위특별법에 의거하여 능력자라 분류되는 자는 명확한 근거와 2급 이상 관계자의 요청에 의거 최대 72시간 동안 신원을 구속할 수 있습니다."
"네?"
"동행하시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사방에서 철컥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총구들이 일제히 청년에게로 향했다.
청년은 그 광경을 살짝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네?"
"끌고 가."
군인들에게 양팔을 잡혀 끌려가면서도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네?"
* * *
화면을 바라보는 여자도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 안에 있는 꼬마가 자르체프의 대가리를 날려 버리고 최정훈 씨를 구했다고요?"
"예."
"그런데 능력자 등록이 안 되어 있다고요?"
"예."
"그럼 등록 거부로 집어 처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상황이 좀 이상합니다."
"뭐가?"
최정훈이 한숨을 쉬었다.
"실종자인 것 같은데, 5년 동안 실종되어 있었습니다. 아예 사망 처리가 되어 있어서 거부가 아니라 미비가 되는데, 본인 스스로 그런 법안이 발효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라 딱히 적용할 조항이 없습니다."
"그럼 보내면 되잖아."
"그게 좀 찝찝합니다."
"또 왜요?"
"자르체프를 잡아 죽이는 걸 바로 앞에서 봤는데, 대체 무슨 방법으로 죽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왜 몰라?"
"저도 어떻게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최정훈 씨."
"예."
"일이 많아서 치여 죽으려고 하는 최정훈 씨. 제발 집에 가서 하루만 전화고 뭐고 신경 안 쓰고 잠 좀 잤으면 좋겠다고 하는 최정훈 씨."
"……예."
"그러면서도 일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 최정훈 씨! 어떻게 삼 일 만에 집에 보내놨더니 그 잠깐 사이에 또 일거리를 물어 오세요! 워커홀릭이세요?"
최정훈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워커홀릭이라니.
자신은 일 때문에 자살 직전인 사람이었다.
삼 대조 조상까지 싸잡아 욕해도 이 정도의 모욕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끔찍한 낙인에 딱히 반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와, 대단하다. KSF 직원이라는 사람이 통제구역에 어슬렁거리며 들어간 것도 황당한데, 어떻게 그 안에서 또 사건이 터지냐? 이 상황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아니, 그전에 죽다 살아난 부하 직원을 위로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불만은 넘쳐흘렀지만 최정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여자에게 어설프게 말싸움을 걸었다가는 안 그래도 바쁜 시간 중 많은 영역을 잔소리 타임이라는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일로 낭비해야 할 테니까.
여자가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화면을 다시 노려보았다.
'제발 생긴 만큼만 좀 하자.'
겉모습만 보면 더 바랄 게 없다. 제멋대로 흐트러뜨린 머리가 금세 찰랑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간다. 무슨 샴푸 쓰시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그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또 어떤가.
저렇게 대놓고 인상을 쓰며 이를 갈아대는데도 이쁜 여자는 정말 흔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몸매가 빠지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170의 키에 나올 데는 과도하게 나오고 들어갈 데는 과도하게 들어간 몸매는 얼굴을 가려도 몸매만으로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상이 조금 날카롭긴 하지만, 그게 흠이 되지 않을 만한 미모와 몸매를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럼 뭐하나.
'속이 썩었는데.'
마녀 팀장.
바토리 부인의 재래.
걸어 다니는 서라운드 스피커.
신은 공평하시도다. 이 여자에게 연예인 귀싸대기 날릴 미모와 군대 선임 쌍싸대기 날릴 성격을 동시에 주셔서 밸런스 붕괴를 막으셨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자신의 상사인데.
서아영.
지금 모니터와 보고서를 동시에 보며 짜증을 팍팍 내고 있는 여자의 이름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최정훈의 직속 상사이자 최정훈을 괴롭히는 습관성 위염의 원인이다.
모니터를 가만히 보던 서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저게 특이 능력자란 거죠?"
서아영이 가리킨 '저것'은 방 안에만 있기가 심심했는지 벽에 설치된 매직미러에 입김을 불어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는데 나사가 빠져도 좀 많이 빠진 모양이다.
"아마두요."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확실합니다."
"확실히 제정신이란 거예요?"
"아뇨. 확실히 제정신이 아닙니다."
서아영과 최정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최정훈은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했다. 미친놈을 미친놈이라고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니까……."
서아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말하려고 하던 그녀는 잠시 머리를 휘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가보죠. 말을 해보면 알겠죠."
"예."
서아영은 성큼성큼 걸어 취조실로 향했다.
취조실은 커다란 공동 가운데 만들어진 작은 방이었다. 때때로 일반적인 벽으로 막을 수 없는 능력자들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방이었다.
서아영은 간단한 보안 절차를 거쳐 방문 앞에 서더니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청년이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겁먹은 듯한 눈으로 서아영을 올려다보았다.
'가증스러운 놈.'
조금 전까지 유리에 입김을 불어 하트를 그리던 놈이 사람이 오니까 쫀 척하는 거 봐라. 저거, 저거.
하지만 서아영은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부터 취조할 사람을 시작부터 움츠러들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안녕하세요. 성함이?"
청년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지혁이요."
"아, 이지혁 씨시구나. 반가워요. 저는 여기 팀장을 맡고 있는 서아영이라고 해요."
서아영의 환한 미소를 본 이지혁이 따라 미소를 지었다.
"예, 반갑습니다."
"별일은 아닌데. 나름 저희도 규정이 있어서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어, 잘 모르겠는데요?"
"나이를 잘 모르신다고요?"
"예. 시간관념이 좀 애매해서."
"아, 그러시구나."
서아영이 최정훈과 시선을 마주쳤다.
'미친놈 맞는 거 같은데?'
'맞다고 했잖습니까.'
서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뭐, 나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죠. 그럼 사는 곳이 어디시죠?"
"서울요."
주소를 말해야지, 이 꼴통아.
서아영은 입으로 나올 말과 속으로 생각할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이나 주소 같은 것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 스킵할 필요가 있다.
"그러시구나. 별로 쓸데없는 질문은 넘어갈게요. 지혁 씨, 지혁씨가 자르체프, 그러니까 그 괴물을 처치한 게 맞죠?"
지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닌데요."
"네?"
"제가 한 거 아닌데요?"
서아영의 시선이 최정훈에게로 향했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제가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렇다는데요?"
"아, 저 아저씨 벌벌 떠시더니 헛것 보셨나 보네. 전 그런 적 없는데요?"
서아영의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그러시다는데?"
"아닙니다! 진짜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제가 무슨 수로 그런 괴물을 죽여요. 어떻게 죽인 건지 보셨어요?"
"그야……."
최정훈은 그가 본 바대로 충실하게 설명을 했다.
"이렇게 손을 휘적 하니까 자르체프 대가리가 펑! 하고……."
"휘적, 펑?"
서아영의 목소리가 갈려 나왔다. 목소리에 어린 어조로 볼 때,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목소리가 아니라 그를 갈아 마실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휘적하니까!"
"펑."
이지혁이 내뱉은, 영혼 없는 추임새가 최정훈의 목소리에서 힘을 앗아갔다.
"뭐,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으니까 헛걸 보셨을 수도 있죠."
최정훈은 억울했다.
저 가증스러운 놈 좀 보소.
"와, 이거,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내가 미치게는 못해줘도 진짜 팔짝 뛰게는 해줄 수 있으니까 입 다물고 저쪽으로 찌그러져요."
"옙."
최정훈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찌부러뜨린 서아영이 안색을 확 바꾸고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지혁을 향해 말했다.
"우리 직원이 착각을 한 모양인데, 그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전 그냥 거기에 지나가고 있었는데 괴물이 달려들더라구요. 그래서 이제 죽었구나 하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더니 괴물 머리를 터뜨려 죽이고는 사라졌어요."
이지혁은 손짓, 발짓을 동원해 가며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그 자세히라는 것은 이지혁의 기준이었지만.
서아영의 미소가 더욱 화사해졌다.
"아, 우연히 지나가시다가 우연히 괴물을 만나셨고, 우연히 지나가던 선비…… 아니,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주셨군요."
이지혁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그렇죠!"
"그러니까 이지혁 씨는 괴물이 죽은 거랑은 전혀 관계가 없으시다?"
"물론이죠."
"우리 직원이 헛것을 봤다?"
"기가 허하신 모양이더라구요. 괴물 보고 놀라지도 않으시던데요?"
"아, 그러시구나."
서아영은 두말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 그거 확보했어? 어? 했다고? 이쪽에 연결 좀 해봐."
간단한 통화를 마친 서화양이 이지혁을 향해 다시금 업무용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지혁 씨가 하신 말씀대로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바로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다음부터 선량한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확인 똑바로 좀 해주세요."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 하나만 더 확인할게요."
"또요?"
"간단한 거예요. 대답도 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같이 보시기만 하면 되거든요?"
"뭘요?"
"이거요."
서아영이 가리킨 곳은 벽면이었다.
"저게 뭐……."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벽면이 껌뻑하더니 화면이 나타났다.
이지혁이 멍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징그럽게 생긴 괴물이 어떤 괴상한 복장을 한 청년에게 달려들어 팔을 휘두르려 하자 청년이 살짝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괴물의 머리가…….
"펑!"
최정훈이 방금 전 당했던 울분을 담아 효과음을 삽입했다.
그 장면에서 화면이 멈추더니 청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기 시작했다. 한 단계, 두 단계… 점점 청년의 얼굴이 클로즈업이 되더니, 이내 화면은 가득하게 청년, 이지혁의 얼굴로 꽉 차버렸다.
최정훈은 멍하게 화면을 바라보는 이지혁을 향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마디를 더 추가했다.
"휘적, 펑."
"……."
"휘적, 펑."
어지간히 억울했던 모양이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서아영이 최정훈을 슬쩍 밀어내더니 다시금 화사한 업무용 미소를 입매 가득 담고 말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이지혁은 최정훈과 서아영, 그리고 자신의 얼굴이 커다랗게 나와있는 화면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즘은……."
"요즘은?"
이지혁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CCTV 화질이 참 좋네요."
자포자기였다.
* * *
"KG 제품으로 싹 바꿨거든요."
"전자 제품은 KG죠."
겨우 억울함을 해소한 최정훈의 추임새가 맛깔스럽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이야기해 볼까요?"
서아영의 상큼한 미소가 마치 승리를 선언하는 것 같았다.
이지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서아영은 그런 그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본인이 하신 것 맞죠?"
"아닌데요."
"에이, 맞는 거 같은데?"
"아닌데요."
"누가 봐도 본인인데?"
"아닌데요."
서아영의 손바닥이 책상을 내려쳤다.
쾅!
책상이 부르르 떨렸다. 이지혁도 부르르 떨었다. 이 앙상한 팔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부러지지 않고 버틴 책상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이봐요, 이지혁 씨!"
"옙."
이지혁은 군기가 바짝 들어 대답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좋을 것 없어요. 저희도 바쁜 사람들이에요. 인정할 것 빨리 인정하고 넘어가야 처우를 정할 수 있단 말이에요."
이지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뭐죠?"
"질문 있는데요."
서아영은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세요."
"저, 아까부터 자꾸 저보고 괴물을 죽였냐고 하시는데요."
"그런데요?"
"만약 제가 괴물을 죽였다면 잘한 거 아닌가요? 민간인 피해도 줄인 거고, 괴물이면 일단 퇴치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왜 제가 자꾸 죄인 같죠?"
"모르세요?"
"모르니까 묻죠."
서아영은 두통이 온다는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더니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어디부터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왜 이 양반은 이런 기초적인 상식도 없는 것인가.
"능력자 등록법에 의거해서 능력자라 분류되는 사람들은 모두 국가에 등록을 해야 해요. 등록하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죠."
"그런 법이 있어요?"
"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능력자 등록법도 모르죠?"
이지혁은 딴청을 피웠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정신병원에 끌려갈 게 빤하다. 그러니 미쳤다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하겠는가.
"여하튼 제가 능력자인데 등록을 안 하고 괴물을 죽여서 문제가 되는 거다, 이거군요."
"괴물을 죽였는가는 문제가 안 돼요. 능력자인가가 문제인 거지. 간단하죠?"
"네, 선생님. 이해했습니다."
서아영은 이제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 생각보다 일이 간단하게 끝났다.
"자, 그럼 물을게요.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까 미등록 기간에 대한 처벌은 없을 거예요. 딱히 사고를 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새로 등록하고 교육만 받으시면 돼요.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대답하세요."
서아영은 승리의 선언을 했다.
"본인이 한 것 맞죠?"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장군이 날아간 이지혁의 표정을 감상하며 승리의 세리모니를 날릴 시점이다.
그리고 외통수에 걸린 이지혁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닌데요?"
"이 샊……."
"어허! 팀장님, 안 됩니다! 민간인입니다, 민간인!"
서아영은 입술 끝까지 튀어 나왔던 육두문자를 애써 집어넣고는 심호흡을 했다. 이상하다. 원래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일이 잘 없는데…….
'뭔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
저 깐죽거리는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까지 와서도 헤헤거리는 저 여유 때문인지.
아니면 저 살짝 올라가서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눈꼬리 때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휴우, 좋아요!"
서아영이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그럼 대체 왜 저 통제된 구역 안으로 들어갔는지부터 들어볼까요? 그전에 이지혁 씨의 실종 신고가 접수된 지가 5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뭘 했는지부터 듣고 싶네요. 대답할 수 있죠?"
"아, 그게……."
"네."
이지혁은 머리를 잡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생각이 날 듯 날 듯 안 난다는 리액션을 보며 서아영과 최정훈은 몸을 떨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저 전형적인 리액션에서 유추되는, 아주 고전적이고도 지긋지긋한 변명이 떠올랐다.
"저… 기억이 잘……."
서아영과 최정훈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하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어색한 웃음이 그들 사이를 오고 갔다. 서로 크게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아, 기억상실증이시구나."
"아무래도 그런 듯요."
"분명히 지난 5년 사이의 기억이 이상하게 생각이 안 나시겠네요?"
"의사세요?"
"큰일이네요. 기억상실증이라고 하시는 분을 핍박할 수도 없고, 절대 기억 안 나실 테니까요."
"제가 기억만 나면 이 오해를 확실하게 해결해 드릴 텐데, 제가 다 아쉽네요."
"아, 그러시구나."
서아영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최정훈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아니! 민간인이라니까요, 민간인! 패면 안 됩니다! 여기 실시간으로 녹화도 되고 있다구요!"
"누가 팬대, 누가! 저기 저분 뺨에 뭐 묻은 거 안 보여? 내가 떼어드린다니까!"
"진정 좀 하세요! 왜 이리 흥분하십니까! 팀장님!"
"후욱! 후욱!"
서아영은 최정훈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더니 이를 갈며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아니다, 이거죠?"
"네."
"절대 본인이 한 게 아니다?"
"물론이죠."
"좋아요. 그럼 그건 아니라 치고, 능력자란 건 인정하시는 거죠?"
이지혁이 되레 물었다.
"대체 그 능력자라는 게 뭐예요?"
"일반인이 가지지 못한 초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거죠."
"그럼 아니죠. 전 일반인이니까."
"그렇단 말이죠?"
으득.
서아영이 최정훈에게 소리쳤다.
"최정훈 씨, 측정기 가져오세요!"
"알겠습니다."
최정훈이 급하게 밖으로 나가자 서아영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뭔가 미소는 짓고 있는데 이마에 핏대가 꿈틀꿈틀하는 것이, 날 선 적의가 느껴졌다.
"정리할게요. 그러니까, 본인이 하신 게 저얼~대 아니다?"
"네, 그렇습니다."
"바로 앞에서 자르체프 머리가 터졌는데요?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저야 모르죠. 앞에 계신 분이 전문가 같은데, 본인도 모르시는 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또 모르죠, 자폭이라도 했는지."
"아, 괴물이 자폭했다?"
"그냥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서아영은 눈앞에서 싱글벙글대고 있는 애송이의 주둥이를 후려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말했다.
"아까 하신 말이랑 전혀 다른데?"
"제가 정신이 좀 오락가락해서요. 제가 뭐라고 했었죠?"
"지나가던 선비님이 구해주셨다고."
"동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네요. 좋아하거든요. 헛소리를 가끔 하게 되는 게 흠이지만."
"아, 그러시구나."
서아영은 품 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명함을 한 장 꺼내서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명함에는 법무법인 신뢰라는 회사명이 써져 있었다.
"이게 뭐죠?"
"변호사 연락처예요. 제가 종종 애용해 봤는데, 참 변호를 잘 하시더라구요. 특히 국가 상대 소송의 전문가시죠."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걸 왜 자신에게 준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걸 왜 제게?"
"꼭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측정기가 오면 측정을 할 거고 측정결과가 능력자로 나오면 아주 재미있으실 거예요. 등록 거부, 등록 위증, 공무집행방해, 통제구역 침탈 등 아주 걸 수 있는 건 모조리 걸어서 개박살을… 아, 죄송해요. 좀 곤란해지실테니까요. 그때 꼭 필요하시지 않겠어요?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으시면 인생 박살 나는 건 순식간이니까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살기가 어려 있다.
"협박으로 들리는데요?"
"협박요? 에이, 아니죠. 제가 왜 협박을 하겠어요. 그리고 이런 건 협박도 아니에요. 협박은 이런 거죠. 그리고 만약 능력자로 등록되면 교육 기간 있는 거 아시죠? 이지혁 씨는 아주 훌륭한 능력자가 될 것 같으니까, 제가 직접 담당해서 아주아주 제대로 된 교육을 해드릴게요."
서아영은 아주 좋아 죽겠다는 투였다.
"죽이시지는 않겠죠?"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런데 가끔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아, 걱정 마세요. 진짜 힘들면 그런 말도 못하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이지혁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처음부터 순순히 협조만 해주셨으면 이럴 일 없었을 텐데, 참 안타깝네요."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협박 같은데……. 공공기관에서 이래도 됩니까?"
"아, 모르시는구나. 능력자들은 컨트롤이 어렵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애초에 적용되는 법이 조금 다르거든요. 능력자가 아니시면 제가 잘못하고 있는 건데, 그럼 제가 사죄드려야죠."
"그럼 미리 사과하시는 게?"
"에이, 설마요."
그때, 문이 열리고 최정훈이 손에 뭔가 혈압계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왔다.
혈압계는 혈압곈데 몸에 감는 부분이 넓고 컸다. 마치…….
"복대 아닙니까?"
"이동식 에테르 측정기예요."
"전자식 복대 같은데?"
"이동식 에테르 측정깁니다."
"아니, 아무리 봐도……."
"잔말 말고 차시죠."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정훈은 그의 가슴에 측정기를 감았다.
"복대 같은데……."
서아영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능글맞게 구는 저놈의 목을 따버리고 싶었다.
"마지막 기회예요. 지금이라도 다 인정하고 사과하시면 정상참작해 드릴게요."
"그럴까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물론 서아영은 정상참작 따위는 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희망을 가졌다가 무너지는 꼴을 눈으로 똑똑히 봐줄 테다.
"에이, 안 할래요."
하지만 이지혁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혹시 에테르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면 꿈 깨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특이 능력자들이 에테르 양을 속이는 일이 빈번해서 최신형은 그런 것까지 다 잡아내거든요? 제아무리 날고뛰는 능력이 있어도 절대 측정 결과를 속일 수가 없어요."
서아영의 마지막 협박에도 이지혁은 태연했다.
"제가 뭘 안다고 속이고 하겠어요. 진짜 전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그래요? 그럼 보면 알겠네요."
삐빅.
서아영이 버튼을 누르자 측정기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삐삐삐, 하는 소리와 함께 측정 중이라는 단어가 뜨다가 이내 결과 값이 출력됐다.
842.
서아영은 멍하게 그 숫자를 바라보았다. 최정훈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어때요?"
서아영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또 한 번 삐삐삐, 하는 소리와 함께 측정 중이라는 단어가 뜨다가 841이라는 숫자가 떴다.
이지혁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저게 무슨 뜻이에요?"
서아영은 이지혁에게 둘러진 측정기를 풀었다가 다른 부위에 감으려 했고, 덕분에 최정훈이 대답을 했다.
"저게 에테르 값입니다."
"잘 나왔나요?"
"뭐랄까. 에테르 값 자체는 사람이면 누구나 일정 이상이 뜨거든요."
"예."
"기본적으로 사람이 가진 에테르 값은 평균이 500 정도 됩니다. 하지만 이 에테르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초능을 발현시키죠. 그래서 그 사람들을 능력자라고 부릅니다."
"비정상적으로 높다면 얼마 정도?"
"능력자로 분류되기 위한 최소 에테르 값이 1,000 정도죠. 1,000 이상의 에테르를 가진 사람을 초급 능력자로 분류하거든요."
"아, 그렇구나."
삐삐삑.
이지혁의 골반에 감긴 측정기에서 848이라는 숫자가 떴다. 황급히 풀려진 측정기가 다시 다리에 감겨 측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800대니까 능력자가 아니네요? 아까 평균이 500이라고 하셨는데, 평균보다 높으니까 능력자로 분류된다거나 하진 않겠죠?"
"예. 뭐, 1,000 이하로는 능력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 그렇구나."
삐삐삑.
다리에서 측정된 에테르 수치는 700대였다. 이지혁은 반대쪽 다리에 감기려는 에테르 측정기를 밀어내고 의자에 앉았다.
"그럼 저는 일반인이네요?"
"분류상으로는 그렇죠."
"그럼 여기 이유도 없이 끌려왔네요?"
"아니, 이유가 없는 건 아니죠."
"아까 말씀하신 대로면 확실한 근거와 2급 이상 관계자의 요청이라고 하셨는데……."
"예."
"확실한 근거가?"
"음, 저 화면을 보시면……."
"에이, 에이. 저는 일반인인데 일반인이 괴수 머리를 날리는 영상을 확실한 근거라고 할 수는 없죠.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최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테르 수치가 800이 나온 사람이 자르체프 머리를 날려 버렸다?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 듣기 딱 좋았다.
상식대로라면 길 가던 아줌마가 호랑이 옆구리에 붕권을 날려 일격사시켰다는 말과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럼 저는 별다른 증거도 없이 여기에 끌려와서 지금까지 협박 받고 욕을 퍼먹고 있었다는 건데……."
턱.
의자에 한껏 기댄 이지혁이 발을 책상 위로 올렸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거, 아저씨."
"예?"
"나 담배 하나만 주라."
"……."
"거, 담배 한 대 피기 딱 좋은 날씨네."
최정훈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이봐요!"
하지만 뒷말을 이으려는 순간, 이지혁이 그의 말문을 막았다.
"아니면 전화기를 주시든지."
그의 손에서 팔락대고 있는 명함이 최정훈의 시야에 아프게 들어왔다.
* * *
법무법인 신뢰.
'법무법인 신뢰?'
저 명함이 대체 왜 저놈의 손에 있단 말인가.
국가 상대 소송의 스페셜리스트이자, 10원 한 푼 더 받으려고 항소하기를 서슴지 않는다는 공기관의 흡혈귀. 공기관에 시추기를 박고 세금을 석유처럼 뽑아낸다는 세금 시추기의 명함이 왜 저기에 가 있단 말인가.
세상에 그 많은 변호사와 법무사를 다 놔두고 왜!
일 년에서 천 명씩 쏟아져 나오는 로스쿨 변호사도 많은데 왜 하필!
최정훈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저 명함의 출처라 짐작되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움찔.
제 발 저린 도둑이 그의 시선을 피한다. 최정훈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나가는 순간 저 망할 계집애의 얼굴에다 사직서를 던져 버리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것도 모서리로!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최정훈은 이 끔찍한 상황 아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사를 생각해 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번 뒤로 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어느 정도 잘못을 인정하면서 적절한 타협을 제시해야 한다. 이 바닥에 굴러먹은 지가 벌써 10년. 로비와 제안은 그의 특기였다!
최정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모든 방향성을 검토하고 마침내 그가 할 수 있는 최적의 대답을 찾아냈다!
"피우시는 것이 있으면 지금 사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자포자기다.
* * *
하지만 이지혁은 관대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우리 사이에 뭘. 그냥 가지고 계신 거 한 대 주세요."
"예."
최정훈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이지혁의 손가락 사이에 공손히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꺼내려는데, 이지혁이 서아영을 불렀다.
"저기, 누님."
"……네?"
절망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던 서아영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이지혁은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저 불 좀."
서아영은 힘없이 손을 뻗었고, 최정훈은 그런 서아영의 손에 라이터를 쥐어 주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최정훈은 그녀의 손을 꾸욱 잡았다.
'참아라. 여기서 발작하면 얄짤 없다.'
이지혁의 눈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CCTV를 살짝 응시했다.
하지만 서아영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여기 금연인데……."
"벌금 얼만데요?"
"10만원……."
"껌 값이네. 손해배상금에서 깎아드리면 되나요?"
찰칵.
입에 물린 담배에 공손하게 불을 붙인 서아영이 영혼 없는 눈으로 물러났다. 이지혁은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고는 천천히 연기를 뿜어내었다.
"거, 그러니까,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러셨어요? 선량한 사람을 이렇게 강제로 구속하고 협박하고 괴롭히셔도 됩니까? 밥도 안 주고?"
"아,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됐어요, 됐어. 엎드려 절 받기지. 그리고 저 아줌마 하는 거 보니 까딱하면 설렁탕 코로 먹어야 될 것 같은데, 무서워서 밥이나 먹겠어요?"
서아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으드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밀폐된 좁은 방 안에서 서라운드로 퍼져 나갔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이지혁은 태연하게 담배를 폈다.
"자, 잠시만……."
최정훈이 서아영을 잡아끌며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후욱! 후욱!"
"아니, 그러니까 명함은 왜 주셨어요!"
"최정훈 씨!"
서야영이 최정훈의 양팔을 꽉 잡았다.
"왜요? 또!"
"저, 저 새끼 죽빵 한 방만 후리면 안 될까? 안 되겠지? 정말 안 될까? 기술적으로 잘 치면 이빨은 안 날리고 정신만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미쳤어요? 왜 요즘 살 좀 찌시나? 콩밥으로 다이어트 좀 하시게?"
"지금 심정 같아서는 저 새끼 죽빵 한 대만 칠 수 있으면 지옥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갈려면 혼자 가세요. 엄한 사람 끌고 들어가지 마시고! 그러게 협박은 왜 하셨어요, CCTV 녹화되고 있는 거 아시면서. 안 그래도 요즘 우리 팀 잡음 많은데, 이거 소송이라도 걸리면 작살나는 건 순식간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서아영이 초조한 듯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CCTV 지우면 안 될까?"
"공문서 훼손까지? 이야, 그냥 감빵 가기는 아쉬우시니까 직위 해제까지 당하시겠다?"
"아아악! 뭔가 방법을 찾아줘, 최라에몽! 진짜 저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니까!"
"빨리 내보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죠. 게다가……."
"게다가?"
"아시잖아요. 저 양반이랑 척져서 좋을 일 없을 거 같은데?"
"끙."
서아영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협박이니 고소니 하는 것이야 대충 흘려듣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소송이 들어온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었다.
최정훈이 엄살을 부린 것일 뿐, 서아영이 맡고 있는 일과 그녀가 가진 능력으로 다진 입지는 그 정도 소소한 일로 흔들릴 정도로 취약하지 않았다.
'문제는 저 인간 자첸데…….'
CCTV를 확인하니 더 확실해졌다.
저 인간, 능력자다.
그런데 그 능력이라는 게 지금까지 밝혀진 수많은 능력과도 유사점이 전혀 없고, 에테르 측정기로도 측정되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결론은 두 가지.
서아영과 최정훈의 상식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커다란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가 가진 능력 자체가 지금까지 밝혀진 능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특이 능력이라는 것.
어느 쪽이든 척을 져서 좋을 건 없었다.
지금 그들은 단 한 명의 능력자도 아쉬웠다. 그러니 저런 특이 사항 넘치는 능력자와의 관계가 파탄 나서 좋을 게 없었다.
"측정이 왜 안 되지? 아, 갑갑해!"
에테르가 1,000만 넘어준다면 각종 법률로 제약할 수가 있다. 그러면서 자연히 끌어들이면 되는 건데, 에테르가 1,000을 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들이 준비한 모든 올가미는 상대가 능력자라는 것을 감안한 것들이었다. 통제구역 내에서는 초법적인 권한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게 아닌 경우의 일반인들에게는 지나가는 순경, 아니, 의경 1보다 못한 것이 그들이었다.
그에게 구속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능력자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능력자의 증명은 온전히 에테르 측정기가 측정한 수치에 달려 있었다.
'에테르 측정기에는 일반인으로 나오지만 제가 보기에는 분명 능력자입니다'라고 말하면?
안 그래도 능력자 특별법이 인권침해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발악하고 있는 인권위에서 그녀의 목을 따러 올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그 말이 인정되는 순간, 그녀의 의지에 따라 평범한 일반인이 능력자가 되어 능력자 특별법의 적용을 받는 일이 벌어질 텐데.
최정훈이 그녀를 달랬다.
"일단 돌려보내죠. 누군지 알았으니까 천천히 감시하면 될 것 아닙니까. 지금 잡아둬 봤자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어 보이고, 관계만 악화될 겁니다."
"휴, 알겠어요."
서아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지금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일단은 내보내고 다른 방법을 알아보자. 어떻게든 목줄만 걸면 그때 작살내도 된다.'
군자, 아니, 군녀(?)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
서아영은 그렇게 다짐하며 심호흡을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이지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지혁 씨."
"네."
"사소한 오해가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귀가하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네. 뭐, 이해합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머리가 터지는 거고, 고래가 싸우면 새우는 새우깡 되는 거죠. 높은 데서 일하시는 분들이 사소하게 한 오해에 협박 받고 인생 조질 뻔했다고 해서 불만 가지면 되나요. 소시민 주제에."
"하. 하. 하. 하."
서아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같은 말을 해도 기분 나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저 깐죽거림을 파라미터로 표시하면 대체 몇이 나올까?
"담당자의 오해로 불필요한 수고를 끼쳐 드리게 되어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에이, 현대사회에 죄송한 게 있나요? 죄송하지 않으셔도 돼요. 좋은 법 놔두고 왜 힘들게 말로 그리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후우, 후우…….
서아영은 심호흡을 했다.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니, 지금 살인을 면하는 게 좋은 걸까? 그냥 면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나는 확실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 괴상한 놈과 말을 더 섞는다고 해서 그녀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가시는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일어나시죠."
분명히 고소를 하니 마니 입을 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지혁은 의외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입니다."
서아영은 이지혁을 안내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최정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이지혁의 뒤를 지켰다.
이윽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서아영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잠시 흥분하긴 했지만,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하지만 이지혁은 떠나지 않았다.
뭔가 꼬투리 잡을게 더 남았나?
서아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가십니까?"
이지혁은 대답이 없었다.
무시한다기보다는 뭔가 할 말이 남았는데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초조해진 서아영이 답변을 재촉하려고 할 때 즈음, 이지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
서아영이 이를 악물었다.
"고소하고 싶으면 고소하세요. 얼마든지 상대해 드릴 테니까요. 그깟 배상금 물죠. 얼마나 된다고!"
"에헤이! 팀장님!"
최정훈이 흥분하려는 서아영을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이지혁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고소는 할 생각도 없어요. 대신."
"대신?"
떠듬대는 어투로 이지혁이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
"차비 좀 주시면 안 되나요?"
"……."
"제가 집에는 가야 되는데, 땡전 한 푼 없어서."
서아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뭐, 차비야 꼭 중요한 건 아니죠. 걸어가면 되니까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으니 걸어가면 되는데……."
이지혁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옷이 좀……."
서아영이 이지혁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신발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전신 망토, 망토 사이로 보이는 옷은 재질을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거친 직물이었다.
이대로 거리로 나간다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연예인 부럽지 않을 기세였다.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빼 들었다. 지갑 안에 있는 오만 원권 몇 장을 빼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지혁이 벅찬 감격이란 이런 것이다를 온몸으로 보여주며 돈을 받아 챙겼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볼게요!"
최정훈은 희희낙락하며 멀어져 가는 이지혁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진짜 이상한 양반이네요."
"감시 붙였죠?"
"물론입니다."
서아영은 이제 멀어져 거의 보이지도 않는 이지혁을 보며 이를 갈았다.
"감시 빡세게 돌리세요. 도무지 뭐하는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확보해야 하니까요."
"예."
보고서에 따르면 이지혁은 통제구역 한가운데에 그냥 나타났다. 최정훈처럼 ID가 KSF 소속으로 되어 있어서 제지 없이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통제구역 한중간에 그냥 나타난 것이다.
최소한 텔레포트 능력자이고, 어쩌면 그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다.
"일단은 그냥 보내준다만, 우리 가까운 시기에 꼭 만나게 될 거야!"
서아영은 다음에 그와 다음에 만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 서아영도 그와 그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거, 영수증 처리를 어떻게 합니까?"
"영수증이라니요?"
"이지혁 씨한테 준 돈, 비용 처리해야죠. 능력자한테 쓴 돈인데."
"뭔 소리예요? 저 사람 능력자가 아닌데. 측정 결과 안 보셨어요?"
"아니, 실질적으로 능력자잖습니까."
서아영은 빙긋 웃었다.
"나는 또 웬일로 착하게 구나 했네. 재주껏 비용 처리해 보세요. 근데 승인 안 날걸요?"
서아영이 산뜻한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향하자 최정훈은 얼굴을 왈칵 구겼다.
"내 돈!"
되는 게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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