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화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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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꾸 허위 사실 유포하지 마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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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는 광활했다.

    빛의 주신 라트렐의 성지(聖地)에 세워진 거대한 성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 한가운데에 그 고고하고 순결한 백색 외벽을 뽐내고 있었다.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은 이 드넓고 푸른 초원을 걸으며 라트렐이 그들에게 내린 은총을 감사했고, 이 넓은 초원 한가운데 우뚝 선 거대한 백색의 성을 보며 라트렐의 위엄을 느꼈다.

    그렇기에 이곳은 언제나 기쁨과 찬미로 가득했고, 평화와 은총의 대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말이다.

    * * *

    지금 빛의 신 라트렐의 안식처를 자처하는 이 대지에는 심상치 않은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라트렐을 상징하는 순백색의 외벽 밖으로 하얀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성령에 감싸인 듯 빛나는 갑주를 입은 수만의 병사들이 열을 맞춰 서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플레이트 아머로 전신을 감싼 기사들이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백마를 탄 채 위용을 뽐냈다.

    바로 이들이 빛의 신 라트렐의 의지를 대행하는 라트렐 성기사단이다.

    다만, 이상한 점이라면 그 하나하나가 절대적 위력을 발휘하기에 언제나 전 대륙에 퍼져 라트렐의 이름을 전하던 이들이 지금 이곳에 전원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누백 년간 라트렐 성기사단이 한곳에 모두 모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무척이나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라트렐의 군세 옆으로 주홍빛의 갑주를 입은 이들이 보인다.

    그들의 군세 역시 라트렐의 새하얀 군세에 비해 전혀 밀려 보이지 않았다.

    태양신 드란을 모시는 드란 기사단과 태양신의 신병(神兵)들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대지의 신 가베인을 뜻하는 황토색의 군세.

    불의 신 파로를 뜻하는 붉은색의 군세.

    물의 신 브즈고트를 뜻하는 푸른색의 군세.

    하나 된 땅을 의미하는 '베라프'에 존재하는 12교단의 군세가 모두 이곳에 도열해 있었다.

    신성제국을 수호하는 신성 병단과 마도제국의 모든 것이라는 제마 병단 등 각국의 정예 병단들이 도열해 있고, 그 뒤로는 심지어 베라프에서 핍박 받는 야만인들의 군대까지 모여 있었다.

    형형색색의 군세들이 끝없는 초원을 가득 메운 광경.

    이것이 베라프의 힘.

    이것이 바로 베라프의 모든 것이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인류의 절대적 공조.

    이것이 가지는 의미를 아는 이라면 감개가 무량할 만했다.

    하지만 이 엄청난 광경을 이끌어낸 노인의 눈에서는 자부심보다는 불안함이 엿보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붉은 성복의 노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와 동시에 노인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다.

    "그들은?"

    "이제 곧……."

    가벼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두 노인은 안색을 굳히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입술을 깨무는 이들, 성호를 긋고 신에게 비는 이들, 미간을 찌푸리고 적의를 드러내는 이들.

    불안함.

    그리고 미약한 공포.

    그들의 눈이 노인에게로 모였다.

    노인.

    대륙 최고의 교단, 라트렐의 첫 번째 종복이자 라트렐의 목소리.

    그리고 사상 초유의 인류 연합을 만들어낸 라트렐 교단의 교황 디오레 1세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을 일일이 마주하였다. 그런 그를 보며 타 교단의 교황들과 각 왕국의 왕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오레 1세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인의 장막이 끝나는 초원의 지평선.

    지평선을 바라보는 디오레 1세의 눈은 그답지 않은 불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만한 전력이 모였습니다."

    드란 교단의 교황, 베르시겔의 목소리는 살짝 떨려 나오고 있었다.

    "인류는 지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씀을!"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오레 1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고무시켰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의 주인이 내려주신 신탁에 따라 인류의 모든 힘을 이 한곳으로 모았다.

    교단과 교단 사이의 알력.

    국가와 국가 사이의 대립.

    진부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심이 있기에 디오레 1세는 기어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완수해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이 불안감은 무엇일까?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이 은밀한 불안감을 어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서, 성하!"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찾았다.

    "오, 옵니다, 성하! 저기!"

    손끝이 향한 곳.

    파란 하늘과 초록의 대지가 맞닿는 곳.

    한 점 일그러짐 없이 펼쳐져 있던 지평선의 한곳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대지와 하늘을 검게 뒤덮으며 다가오는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물결이자 헤일이었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다가오는 그것들을 보며 디오레 1세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것은 어둠이요.

    저것은 절망이요.

    저것은 고통이다.

    라트렐의 은총이 닿은, 이 빛 어린 대지가 암흑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은 디오레 1세의 가슴마저 검게 물들였다.

    "아……."

    "……세상에."

    지평선을 가득 채워 버릴 것 같은, 아득한 수의 강철 거인들.

    그 뒤를 따라 마치 헤일처럼 밀려 들어오는 끔찍한 마수들.

    그들의 머리 위로는 가지각색의 날개를 펼친 비마(飛魔)들이 구름처럼 날아올라 대지를 검은 그림자로 가득 뒤덮고 있었다.

    마수의 울부짖음과 강철 거인들이 움직일 때마다 발생하는 기괴한 금속음이 뒤섞여 장중한 불협화음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낸다.

    눈이 있는 자는 그 광경에서 절망을 볼 것이요.

    귀가 있는 자는 그 광경에서 운명을 짐작할 것이다.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자들에게서 발생한 동요가 거대한 파문이 되어 사위를 뒤흔들었다.

    강철 거인들의 진격이 멈추었다.

    인간의 군세를 마주한 마수들이 끔찍한 괴성을 토하며 강철 거인들의 뒤로 바짝 다가선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위협적인 괴성들이 들려온다.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짜부러질 것만 같은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드란 교단의 교황, 베르시겔이 소리쳤다.

    "보시오!"

    그가 가리킨 곳.

    거기서부터 괴수들의 광란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끝없어 보이던 굉음과 괴음 속에서 작은 침묵과 정적이 생겨나더니, 이윽고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 광경은 지금까지의 들끓는 광기의 축제보다 되레 공포스러웠다. 악다구니를 쓰던 저 마수와 악귀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 * *

    정적.

    세상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의 광기는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심장 뛰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듯한 정적이 이 드넓은 초원을 지배했다.

    끼이이익.

    그리고 그 정적을 깨며 을씨년스러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강철의 거인들 중 둘이 천천히 몸을 돌리고 마주 보더니,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벅.

    저벅.

    아주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저 먼 곳에서 이곳까지 들릴 리 없음에도 디오레 1세의 귀에는 그 발자국 소리가 똑똑하게 와 닿았다.

    마수들은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은 채 뒷걸음질 쳐 길을 열었고, 강철 거인들은 무겁게 시립하여 그들의 주인을 맞이했다.

    마치 홍해가 갈리듯 좌우로 벌어진 짐승들의 숲 사이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자를.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겉모습은 별다를 게 없다. 깊게 눌러쓴 로브의 후드 아래로 짙은 음영이 내려앉아 그 얼굴을 짐작할 수 없을 뿐.

    그러나 마치 빛을 흡수하는 듯 무저갱의 어둠으로 물든 암흑의 로브 끝으로 드러난 손은 짙고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로브 사이사이에 걸쳐진 형형색색의 보석은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인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마법사들의 복장.

    그럼에도 그 모습이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의 육신을 맴도는 검은 오러 때문일 것이다.

    불꽃 같기도 하고, 검은 연기 같기도 한, 불길한 검은색 오러가 그의 주변을 휘돌고 명멸하며 타올랐다 사라진다.

    빛의 신을 모시는 디오레 1세는 그 오러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악의 근원이고, 지옥의 불꽃이다.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디오레 1세는 심장이 조여왔다. 지금 그의 앞에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있다.

    세계의 멸망을 가져오는 자.

    죽은 자들의 왕.

    산 자의 절망.

    살아 있는 자들의 왕국을 먹어 치우고, 숨 쉬는 자들의 숨을 먹어 치우는 자.

    12교단의 주적.

    아니, 살아 있는 자들의 적.

    베라프를 보호하던 12주신이 비명과도 같은 신탁을 내리게 만들고, 베라프를 지배하던 48국의 왕들이 서로에 대한 증오와 견제를 내려놓으며 쫓기듯 그 힘을 모으게 만든 자.

    공포와 절망으로 대륙의 모든 힘을 한곳으로 몰아넣은 자.

    디오레 1세는 쥐어짜듯 소리쳤다.

    "그대, 멸망의 좌여!"

    디오레 1세의 목소리가 증폭되어 대지를 울렸다.

    "죽은 자들의 왕이여, 산 자들의 절망이여, 수만의 마수와 수억의 짐승들의 지배자여!"

    그 말에 화답하듯 지금까지 조용히 시립해 있던 마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울부짖으며 악다구니를 써 댔다.

    순간, 디오레 1세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백만의 군단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바로 앞에서 짐승들의 그로울링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인류는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는 땅, 바로 이곳에서 그대의 야욕은 무너질 것이고, 그대의 군단은 자연히 돌아가야 할 곳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내놓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피는 이 대륙에 흐르는 젓줄이 될 것이고, 우리의 육신은 대륙을 살찌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자애로운 12주신의 품으로 돌아가 바라 마지않던 안식을 취할 것이다!"

    디오레 1세의 외침에 정렬해 있던 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수백만의 병력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디오레 1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 이것이 인류의 힘이다. 12주신의 가호가 함께하는 인간의 의지다.

    그의 가슴을 죄어오던 절망과 공포가 무뎌지고, 그 자리를 벅찬 감동이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불꽃처럼 명멸할 것이고, 초개처럼 스러져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굳은 의지는 그대의 심장에 신앙의 칼을 꽂을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느껴지는가, 사악한 마법사여! 우리의 힘이 느껴지는가, 죽음마저 벗어난 리치여!"

    "아니! 잠깐만!"

    * * *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지 가득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던 이들은 이내 그 음성의 주인이 그들의 앞에 서 있는 마귀, '멸망의 좌'라는 것을 깨달았다.

    멸망의 좌는 손을 들어 올려 후드를 걷어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의외로 꽤나 앳된 청년의 그것이었다. 어둠의 기운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피부는 조금 붉고 누르스름했지만 그뿐, 의외로 평범했다.

    짧게 깎은 머리는 이 세계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형식이었으나 그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그가 왜 멸망의 좌라 불리는지 알게 해주었다.

    가느다란 눈썹 아래로 보이는 작은 눈과 낮은 코, 기이한 혈색과 함께 인간이되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되, 인간이 아닌 자였다.

    멸망의 좌가 소리쳤다.

    "누가 리치야! 가만있으려니까 멀쩡한 사람을 뼈다귀 만들고 있네! 이렇게 뽀송뽀송한 리치 본 적 있어?"

    디오레 1세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본 적은 없다. 리치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 그리고 기록상으로도 저렇게 살이 올라 있는 리치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로브 쓴 스켈레톤이 리치 아니던가.

    시선이 느껴진다.

    살짝 삐딱한 시선이 그의 등 뒤로 꽂히고 있었다.

    리치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아군이란 양반들이 이런 시선을 보내다니…….

    디오레 1세는 겸연쩍게 헛기침을 하고 소리쳤다.

    "그대가 악마의 비술로 죽음을 거부하고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것은 대륙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섭리를 벗어난 자여, 그 겉모습이 인간과 같다 해도 그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설령 그대가 인간이었다 해도 이미 인간의 길에서는 벗어났다! 그대가 멸망시킨 왕국의 수가 몇인지 아는가! 그대가 죽인 인간의 수가 몇인지 아느냔 말이다!"

    멸망의 좌는 디오레 1세의 피맺힌 절규를 들으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지 태연하게 답했다.

    "저기, 자꾸 허위 사실 유포하지 마시죠. 죽음을 거부한 게 아니라 죽지를 않는 거예요. 나도 죽으려고 악을, 악을 써봤지만 죽지를 않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그리고 내가 멸망시킨 게 아니라 자기들이 자멸한 거지. 아니, 라트렐 교단에 가야 하니까 좀 지나가겠다는데 피거품 물고 달려든 것들이 누군데, 이제 와 내 탓이래?"

    디오레 1세는 멍한 눈으로 멸망의 좌를 보았다.

    저 강철 거인들과 마수들의 군단을 이끌고 '지나갑니다'라고 하는데, 어느 미친놈들이 '예, 그러세요'라고 하겠는가.

    그건 기본적인 상식 아닌가! 상식!

    "됐고. 당신이 대장인 것 같으니까 거래 좀 하자."

    "거래라고 했는가?"

    "난 싸울 생각도 없고,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륙을 멸망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멸망의 좌가 손을 들어 첨탑 가장 꼭대기를 가리켰다.

    빛을 받아 오색으로 영롱히 빛나는 보석.

    라트렐이 이 대지를 굽어 살핌의 증거.

    '라트렐의 눈'이 그곳에 있었다.

    "저것만 넘겨주면 곱게 물러가 주지. 마수들도 모두 돌려보낼 거고, 골렘들도 정지시킬 거야. 원한다면 골렘은 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저것만 내놔."

    "큭큭큭큭."

    디오레 1세는 낮게 웃었다.

    "그대가 라트렐의 눈을 이용하여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는 걸 모를 줄 알았는가?"

    "아니, 어디서 자꾸 그렇게 허위 정보를 얻어오는지 모르겠네. 누가 그래?"

    "그대에게 라트렐의 눈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신탁이 내려왔다! 그것도 12교단 모두!"

    멸망의 좌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더럽게 막아서더라."

    "라트렐의 눈을 얻고 싶다고? 가져가 보아라.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그대는 라트렐의 눈을 얻지 못한다. 우리의 희생이 베라프를 구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목숨을 기꺼이 내어 바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절대 우리를 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12주신의 가호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찬미 라트렐!"

    디오레 1세의 선언과 동시에 수백만의 군세에서 그들만의 성호를 그리며 신을 찬미했다.

    "대화는 의미가 없겠군."

    어차피 이곳까지 오면서 대화로 풀어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눈앞의 이들은 결코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어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이다.

    디오레 1세가 소리쳤다.

    "그대는 이곳에서 그 길었던 삶의 마지막을 보게 될 것이다, 섭리를 거부한 자여!"

    그 말에 멸망의 좌가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디오레 1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간악하고 사악한 마도사의 웃음이 그저 거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자들을 보아오고 그들의 고충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던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비웃는 것으로 보이는 저 웃음 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감정의 편린이 엿보였다.

    환희와 절망, 씁쓸함, 비통함, 그리고 애절하기까지 한 안타까움…….

    "이봐, 그거 알아?"

    멸망의 좌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게 내 소원이야."

    그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 이곳에서는 말이야. 그래서 이룰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거든. 너희들이 바라는 나의 소멸을 위해서 저 라트렐의 눈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나직했으나 조금씩 커져 갔다.

    "그래, 여기에서 난 그저 괴물이다. 그저 악마다. 죽지도 못하고, 사라지지도 못하는 괴물이다! 그래서 죽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내가 사람일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단 말이다!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죽어주기 위해서!"

    그의 목소리에서 피 내음이 묻어났다.

    절규.

    "그런데 왜 막는 거냐!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막아서 왔으면서 왜 마지막까지 막는 거냐! 너희들이 그토록 원하는 대로 죽어주겠다는데 왜 막는 거냐고!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몇 백 년인지 알기나 해? 막겠다고? 나를 또 막겠다고? 그럼 죽어라. 죽고 또 죽어라. 내가 아무리 갈망하고, 얻고, 또 구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을 너희에게 내려주지.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알게 될 것이다."

    장난기 어리던 청년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피맺힌 절규를 토해내는 괴물.

    오로지 홀로 전인미답의 경지에 오른 마도사이자 수억의 절망을 이끄는 어둠의 군주.

    대륙의 절반을 죽음의 대지로 바꾸고 남은 절반을 이곳으로 밀어 넣어 조롱하는 최악의 절망.

    대륙에 멸망을 가져올 자.

    그 말 그대로 '멸망의 좌'였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 그렇겠지."

    멸망의 좌의 눈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금껏 숨을 죽이던 마귀들이 이를 드러냈다.

    멸망의 좌에게 억눌려 있던 마수들의 흉성이 폭탄처럼 터지며 대지를 뒤덮었다.

    키에에에엑!

    어떠한 신호도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마수들은 마치 짠 것처럼 괴성을 토해내며 앞으로 치달렸다.

    수만의 마수들이 서로 뒤엉키고 짓밟히면서도 앞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강철의 거인들이 둔중한 걸음으로 그들과 함께 앞으로 또 앞으로 움직였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발밑의 마수들이 짓밟혀 끔찍한 비명을 토해냈지만, 감정이 없는 강철의 거인들은 그저 전진할 뿐이었다.

    인류의 모든 힘이 이곳에 집결했다. 그 힘은 강대하고, 그 힘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 힘조차 지금 보이는 마수들의 광기 앞에서는 위축되었다.

    새하얀 군세가 연신 출렁였다. 자신도 모르게 물러선 반걸음이 대형을 밀어내고 파문을 낳는 것이다.

    "지고하고 전능하신 존재여, 여기 그대의 종들이 그대의 뜻을 바라고 갈구하노니! 새벽을 몰아내는 여명이여, 그대의 종들을 굽어살피소서!"

    디오레 1세의 양손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터져 나오며 성벽을 둘러싼 군세를 축복했다.

    나머지 12교단의 교황들 역시 각자의 신을 찾으며 병력들을 축복했고, 그들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이성을 되찾고 마수들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인간의 군세와 마수의 군단이 충돌했다.

    살점과 뼈가 사방으로 튀고,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옥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다.

    "퍼부어라, 퍼부어!"

    군세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성직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닥치는 대로 신성력을 퍼부어 댔다.

    마수들은 신성력 앞에 나약해졌고, 아군의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된다.

    "우오오오오!"

    그 순간, 대치를 깨고 앞으로 뛰쳐나가는 이들이 있다.

    털가죽으로 전신을 감싼 채 한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다른 한 손에는 무시무시한 해머를 든 자들.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야만 용사들이 지금은 대륙에 선봉에 섰다.

    그들의 도끼는 마수의 몸을 뼈째 갈랐고, 그들의 해머는 마수의 머리를 수박 깨듯 부수어놓았다.

    하나 마수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땅속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칼날이 후방을 헤집는다.

    갑자기 발밑에서 튀어나온 칼날에 속수무책으로 발목을 잘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물러서지 마라!"

    마법 병단의 마법이 마수들이 집중된 곳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마수들이 강하고 강철 거인들이 거대하다 해도 그 수의 차이가 무려 백배에 달했다. 인간의 군세는 끝이 없고, 희생을 개의치 않는 무차별적인 돌격 앞에 마수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갔다.

    하늘은 여전히 비마들이 장악하고 있지만, 지상은 확실히 인류가 앞서고 있었다.

    "라트렐이시여! 당신의 종들을 축복하소서!"

    "파로의 불길이여!"

    광역 축복이 쏟아지고, 지쳐 가던 이들이 넘치는 활력으로 재무장된다.

    "라트렐이시여!"

    디오레 1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삼십 년 가까이 끌었던 이 지난한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수의 군단은 강대하다. 그러나 결집된 인간의 힘은 더욱 강했다. 마수의 군단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으음?"

    그때, 그의 눈에 멸망의 좌의 움직임이 보였다.

    사상 최악의 마도사이자 죽음조차 초월하여 진리에 도달했다 불리는 멸망의 좌.

    석상처럼 서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멸망의 좌가 천천히 그 손을 들어 올렸다.

    곧 그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아니, 허공뿐만이 아니다. 멸망의 좌의 앞과 좌우로 총 네 개의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나 검은빛을 뿜어냈다.

    "뭔가! 저건!"

    어떠한 마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법진의 거대함만으로도 저 마법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 막아라!"

    마법사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창이 끝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멸망의 좌를 좌시하지 않았다.

    레인저들이 화살을 날리고, 마법사들이 마법을 퍼부었다.

    그사이 멸망의 좌의 입이 천천히 열리고 무감정한 선고가 똑똑히 울려 퍼졌다.

    "열어라!"

    마법진이 빛을 뿜더니 칠흑의 문[Gate]이 생겨났다. 멸망의 좌를 노린 화살과 마법들은 남김없이 그의 앞에 생겨난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디오레 1세는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며 그의 앞에 생겨난 네 개의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저 안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기운이 게이트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다급한 마음이 비명이 되어 튀어나왔다.

    "막아아아아앗!"

    다급한 디오레 1세와는 반대로 멸망의 좌는 느긋하게 말했다.

    "먹어 치워라."

    그 순간, 게이트 안에서 그로테스크한 형태를 지닌 마귀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늘에 생겨난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마귀들은 등장과 동시에 바닥으로 추락하여 반쯤 떡이 되었지만, 그 짓물러진 육체를 돌보지도 않고 게걸스럽게 앞으로 뛰쳐나갔다.

    쏟아져 나온다.

    쏟아져 나온다.

    쏟아져 나온다.

    이미 대지를 뒤덮을 만큼 마수와 악마들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온 세상을 악귀들로 뒤엎어야 성에 차겠다는 듯 끝도 없는 마귀들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늘은 마귀들로 가득 차다 못해 뒤덮여 버렸다. 마귀들은 저들끼리도 물어뜯고 괴성을 지르며 엉켜들었다. 마치 마귀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늘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앞에서, 그리고 옆에서, 또는 발밑에서.

    마수들은 달려들었다. 머리를 내려쳐 깨고, 목을 가르고, 길게 자라난 다리를 끊어 치고… 죽이고 또 죽여도 마수들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애초에 인간 따위는 손가락 끝으로 찢어발길 수 있는 마수들이 되레 인간보다 많아 보였다.

    웨이브(Wave).

    그야말로 마수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디오레 1세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죽이고 죽여도 너무 많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이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마귀들이 게이트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고 있었다.

    정말 저자는 이 세계의 멸망을 가져오는 자란 말인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

    카아아아아아아!

    거대한 불의 창이 허공을 꿰뚫었다. 빛의 광선이 허공을 수놓고, 새하얀 서리의 폭풍이 마귀들을 얼리고 깨뜨렸다.

    수천 발의 화살이 마치 이무기처럼 허공을 꿰뚫자 마수들의 시체가 비가 되어 바닥으로 추락했다.

    "우르크!"

    "달려라, 다리 짧은 것들아!"

    디오레 1세의 눈에 습기가 맺혔다.

    화살과 마법으로 허공을 수놓는 엘프.

    마수들의 옆으로 치받아 달려 들어가는 드워프와 오크들.

    그리고 허공의 비마들을 후려치고 브레스를 뿜어 대는 드래곤들.

    인류뿐 아니다.

    인류만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

    허공으로 뿜어진 화염의 브레스가 검은 하늘에 거대한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사이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디오레 1세는 그 빛이 마치 라트렐의 광명처럼 느껴졌다.

    드래곤들이 뿜어낸 브레스가 허공에 있던 게이트 하나를 부수어 소멸시켰다.

    [그대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불멸의 혼이여.]

    거대한 황금빛의 드래곤이 전한 사념이 멸망의 좌를 향해 울리고 또 울렸다.

    디오레 1세는 가슴속에서 울렁이는 감격을 제어하려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그의 노안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인간만이 아니다.'가 멸망의 순간을 막기 위해 베라프의 모든 종족들이 이곳에 결집했다.

    하늘을 가득 덮은 드래곤과 대지를 채워오는 유사 인류들을 보며 멸망의 좌는 눈살을 찌푸렸다.

    "끝까지 날 막아서겠다는 건가, 로드 아펠드리체?"

    [그대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멸망을 부르는 자. 차원의 열쇠가 그대의 손에 들어가게 둘 수는 없지.]

    "그래그래, 지겹도록 들었다. 수도 없이 들었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그 이유로 내 앞을 막아선 것이 벌써 몇 번째지?"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이어지겠지. 그대는 불멸의 존재, 나는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사는 자. 그대와 나의 악연은 이어지고 또 이어질 것이다.]

    "아니, 틀렸어."

    멸망의 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뻗어진 손은 황금의 용, 아펠드리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여기서 모든 것은 끝난다."

    그리고 멸망의 좌의 뻗어진 손끝에서 거대한 흑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가 마치 뱀처럼 황금의 용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아!

    황금의 드래곤이 토해낸 비명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너희는 알았어야 해. 무한의 시간과 불변의 정신을 가진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내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말이야. 이미 모든 것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유영하던 드래곤들이 멸망의 좌를 향해 일제히 브레스를 뿜어냈다.

    형형색색의 브레스들이 한곳을 향해 날아드는 것은 그 모습 자체로 장관이었다.

    굉음이 터졌다.

    아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베라프 전역을 뒤흔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힘의 여운이 빠져나갔을 때…….

    모든 것은 멈추어 있었다.

    마수와 마귀들은 숨을 죽였고, 인간들은 눈과 귀로 피를 뿜으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멸망의 좌가 서 있던 곳은 지형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나 있고, 고온과 고압으로 녹았다가 얼려지길 반복한 크레이터의 주변은 생경한 암석이 거울처럼 매끈하게 생겨나 있었다.

    멸망의 좌.

    한때 그리 불리던 육편은 새까맣게 탄 채 크레이터의 바닥에 짓눌려 있었다.

    그가 소환한 데몬 게이트(Demon Gate)는 마력의 충돌 앞에 갈가리 찢겨 취소되었고, 그의 육신은 재와 먼지가 되어 휘날렸다.

    디오레 1세는 그 광경을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대단한 자라도 저기에서 살아남을 수는…….

    '살아남아?'

    순간, 디오레 1세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고 해야 할 멸망의 좌의 육체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까만 숯가루에 불과했던 육체에서 새하얀 뼈가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혈관이 돋고 살이 차올랐다. 피가 흐르고 피부가 생겨났다. 이윽고 생채기 하나 없는 육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

    그는 죽음을 초월한 자.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자.

    삶이라는 고통의 순간을 영원히 방황하는 자.

    어느새 아공간에서 꺼낸 로브를 걸치고 비틀어진 액세서리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멸망의 좌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멸망의 좌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백만에 달하는 인간의 군세.

    하늘을 지배하는 드래곤들.

    인간과 수천 년의 전쟁을 해왔다던 엘프와 드워프들.

    심지어 몬스터라 분류되는 오크들마저 자신 하나를 노려보며 저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기 지평선 끝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베라프 전체가 자신 하나를 막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멸망의 좌는 낄낄 웃었다.

    아주 재미있는 곳이다.

    아주아주 재미있는 곳이다.

    원하지도 않던 자를 강제로 끌고 오더니, 돌아가려 하니 전력으로 막는다. 그것도 가당찮은 이유로.

    잊을 수 있었다면 포기했겠지.

    죽을 수 있었다면 죽어갔겠지.

    하지만 자신은 이 세계에서 유리된 자.

    죽을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다.

    이미 헤아릴 수도 없는 먼 시간 전,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의 기억은 단 하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의 기억은 모래처럼 흐려졌으나 그가 온 세계에서 겪었던 일들은 이곳에 떨어진 그날 화석이 되어 머리에 박혀 버렸다.

    그러니 돌아가야지.

    잊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면… 돌아가야지.

    "마지막으로 말하지, 로드 아펠드리체."

    단 하나면 된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라트렐의 눈을 내놔라. 그럼 순순히 물러가 주지."

    아펠드리체는 멸망의 좌의 흑마법에 위협을 받으면서도 결코 굴종하지는 않았다.

    [이 세계가 멸망하는 한이 있어도 그대에게 라트렐의 눈을 건네줄 일은 없다. 그것은 결코 그대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역시나 너희들은 말귀를 못 알아먹어."

    [포기하라, 불멸자여. 그대가 포기해 주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포기하라고?"

    아펠드리체는 그 물음에 담긴 수많은 말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멸망의 좌를 바라보았다.

    * * *

    돌아가고 싶어.

    주어진 운명에 휩쓸려 고통 받고 헤매던 소년은 기나긴 시간의 끝에서 멸망의 좌가 되어버렸다. 이 세계는 그에게 너무도 가혹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운명은 결국 세계와 소년을 대립하게 만들었다.

    허나 그렇다 해도 그 소년을 위로하기 위해 세계를 버릴 수는 없다.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인 쪽이 옳다.

    [불멸의 혼이여, 그대가 죽지 않는다 해서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대를 봉인하여 영원히 가두어두는 것도 가능하다. 끝없는 수명을 가진 우리들이 그대의 봉인을 억겁 동안 유지할 것이고, 그대는 영원히 풀려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경고다. 물러나라.]

    "내 경고는 끝났다, 베라프여."

    그는 아펠드리체가 아닌 베라프를 향해 말했다. 그의 의지를 가로막고 선 모든 존재들에게 그가 선언했다.

    "그대들이 초래한 결과다."

    그의 양손에 검게 물든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잠잠하던 마수들이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멸망의 좌에게서 마력의 파동이 감지되자 드래곤들이 일제히 다시 브레스를 뿜었다.

    하지만 그뿐.

    드래곤들의 브레스는 멸망의 좌에게 닿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아니, 소멸되었다기보다는 사라져 버렸다.

    아펠드리체는 침음을 삼켰다.

    멸망의 좌는 자신에게 뿜어져 오는 브레스를 막지 않았다. 그저 하나하나의 브레스 앞에 하나씩의 워프 게이트를 소환하여 브레스 자체를 대륙 어딘가의 공간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기괴하고도 합리적인 발상이지만, 무모한 짓거리이기도 했다. 소환한 워프 게이트의 좌표가 조금이라도 틀리다면 브레스는 이공간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게이트와 충돌할 것이고, 연쇄적으로 폭발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래도 상관없다. 그는 죽지 않을 테니까.

    손쉽게 브레스를 막아낸 멸망의 좌가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그의 손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와 동시의 그의 가슴에 걸린 목걸이와 양팔의 팔찌에 박힌 보석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보석들.

    일반적으로 드래곤 하트라 불리는 용의 심장이 멸망의 좌가 뿜어낸 암흑의 마나에 공명하여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멸망의 좌의 발아래 검은 홀(Hall)이 열리더니, 검은색 연기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와 멸망의 좌를 감싸고 돌았다.

    [막아! 막아라!]

    멸망의 좌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아펠드리체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고함을 듣고 멸망의 좌에게 날아들던 드래곤들이 그 자리에 멈추서더니 돌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멸망의 좌가 뿜어낸 음차원의 마나가 그들을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검은 연기의 소용돌이로 보일 뿐이지만, 마나로 이루어진 존재인 드래곤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저 작은 소용돌이 안에 얼마나 거대한 힘의 폭풍이 불고 있는지 말이다.

    그 마기에 기겁한 것은 드래곤들뿐만이 아니었다.

    마기로 이루어진 존재인 마수들조차도 괴성을 지르며 달아났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마수들의 몸이 마기에 닿는 순간, 급속도로 쪼그라들더니 미라처럼 말라붙었다. 그러고는 한 줄기 연기로 화하여 멸망의 좌에게로 빨려들었다.

    멸망의 좌의 주변이 죽음의 대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풀은 말라붙고, 나무는 순식간에 고목으로 변했다.

    멸망의 좌는 그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눈을 떴다.

    그의 양손이 허공으로 뻗어지자 비마들이 사라져 버린, 청명한 하늘 한 중간에서 검은 구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디오레 1세는 멍한 눈으로 구름을 바라보았다.

    구름.

    저것을 구름이라 할 수 있을까?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검은 뇌전이 내리친다. 검은 화염이 타오르고, 검은 우박이 넘실거린다.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저 완벽한 어둠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은 천천히 커지더니, 이내 하늘을 모두 덮어버렸다.

    인간도.

    유사 인류도.

    몬스터도.

    드래곤마저도…….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드래곤들조차도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대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알지도, 짐작하지도 못했다. 아펠드리체만이 멸망의 좌의 발아래 생겨난 홀(Hall)이 마계의 근원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뿐이었다.

    "라트렐이시여!"

    디오레 1세는 성호를 그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저것은 죽음이다.

    단계를 뛰어넘은 완전한 선고.

    그들은 지금 죽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목을 찢어낼 것만 같은 한 맺힌 절규.

    영겁의 시간 동안 쌓이고 또 쌓였던 분노와 고통이 지금 이 순간 터져 나온다.

    "집에 가고 싶은 것뿐이라고!"

    멸망의 좌의 손이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의 구름이 바닥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들아!"

    베라프의 하늘에서 멸망이 떨어져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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