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할 수 없는 미래 (2)
나와 유미의 시선이 교차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유미가 균열을 만들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넝쿨을 타고 내려오던 여자의 목이 비틀어지듯 뜯어졌다.
콰지지지직
툭
허무하게 잘린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유미는 ‘이게 끝?’이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기습이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끝날 줄이야.
불길한 감각.
불쾌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두근-두근- 내 심장이 거칠게 경고했다.
‘끝이 아니다.’
목을 잘랐는데 끝이 아니었다.
“유미야! 뒤로 물러서.”
“네?”
머리가 잘린 몸통이 넝쿨에 매달려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몸통에 화염방사기로 불을 붙이려고 다가서던 유미가 내 경고에 뒤로 물러섰다. 유미가 뒤로 물러서자, 바닥을 구른 머리통. 눈을 감고 있던 머리통이 눈을 반짝 떴다.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의 머리통.
스르르륵!
잘린 목 부분에서 넝쿨이 돋았다. 마치 문어 다리처럼 돋아난 넝쿨이 머리통을 움직여 잘린 몸으로 다시 돌아갔다.
“흐음. 음. 아- 아- 이거 참. 너무 하잖아. 다짜고짜 목부터 자르다니.”
목소리가 제대로 나는지 ‘아-아-’ 소리를 내곤 우리를 돌아보며 샐쭉 웃는 여자.
“그래도 뭐. 그 아이는 좀 자란 것도 같고.”
“......”
“......”
“우리 자기는 많이 늠름해졌네.”
여자가 나를 자기라고 부르자, 유미의 꼭 쥔 손이 화염방사기 손잡이를 조금씩 우그러뜨렸다. 내가 유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꼭 쥔 손잡이를 푸는 유미였다.
“그럼 다시 이야기해볼까? 자기가 먼저 말할래? 아님, 내가 먼저 말할까?”
“......”
“계속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을 거야?”
“......”
“여자를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라고.”
여자는 맨발이었다. 하얗고 섬세한 발이 이끼와 작은 넝쿨이 깔린 바닥을 밟자, 넝쿨과 이끼가 쑥 자라났다. 걸음걸음 자라나는 넝쿨과 이끼들. 시간을 빨리 감는 것처럼 쑥쑥 자라난 넝쿨과 이끼가 의자 모양으로 엮였다.
넝쿨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은 여자가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유미는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유미의 손을 잡고 여자에게 물었다.
“왜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지?”
우리가 선제공격했다. 그래서 목이 잘렸음에도 반격하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여자는 내가 유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곤 콧소리를 냈다.
“흐응-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며? 호호홋. 내가 이겼네. 사랑은 변하는 거라고 했잖아.”
“......”
“...... 헛소리 집어치워.”
“어라? 날 원망하는 거야? 그럼 나쁘지. 나도 자길 많이 사랑했다고. 그래서 경고도 해주고 그랬었는데 자기가 못 알아들었잖아.”
“......”
운명에 대해서 말하고 필연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 경고였단 말인가? 내가 실험체로 관찰당하고 있다는 경고? 그걸 사랑해서 해줬다고 말하는 건가? 이가 갈렸다.
“그게 이윤가? 그게 지금 우릴 공격하지 않은 이유?”
여자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날 요염하게 쳐다봤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유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왤까? 내가 왜 공격하지 않을까?”
여자의 발밑에서 자라나 기분 좋게 꿈틀대던 넝쿨들이 돌연 살기를 품었다.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넝쿨들.
“그렇게 입을 다물고만 있으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잖아. 자기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실망하게 할 거야?”
넝쿨들이 점점 많이 피어올랐다. 마치 뱀이나 촉수처럼 꿈틀대는 넝쿨들. 유미가 바짝 긴장했다. 유미가 바짝 긴장하는 게 재롱처럼 보였는지 여자가 픽-웃었다. 여자의 웃음에 따라 넝쿨들이 유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냉정해야 했다.
‘원하는 게 뭘까?’
원하는 게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게 있으니까. 협박하고 있었다.
‘어째서 하얀 슬라임 같은 수액을 쓰지 않는 거지?’
숲을 지배한다면 하얀 슬라임 같은 수액도 쏟아냈을 것이다. 귀족의 시체를 파먹은 넝쿨 괴물들도 곁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슬라임 같은 수액도 넝쿨 괴물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여자의 맨발에 닿은 넝쿨들.
‘숲을 지배하는 게 아니다.’
숲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우릴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사랑 때문에 살려준다? 개소리였다. 저년이 사랑을 알았다면 그 따위로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란 듯이 호텔로 들어가고, 생체실험에 사용되는 약들을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먹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얀 슬라임 수액만 물량으로 뽑아내도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 유미의 굉장한 주먹도 젤리처럼 말캉거리는 수액을 죽이는 건 힘들었다. 화염방사기가 떨어지고 염화 능력이 소진되면 수액에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히 끝장을 낼 수 있는 수액을 쓰지 않고 있었다. 왜? 숲을 지배한 게 아니니까.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숲의 여왕이라면 여기 들어온 귀족들을 전부 죽이고 피로 잔치를 벌였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몸을 숨기고 있었을까? 이 숲으로 도망친 이유는 토마스를 견디지 못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토마스의 균열 능력을 흡수한 유미에겐 모습을 드러냈다. 유미의 능력이 토마스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건가?
유미와 내가 숲을 나가 이곳을 불태우자고 하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토마스가 죽은 것을 알고, 안용재가 죽은 것을 안다고 가정하면...
‘알았다.’
“어설픈 협박은 집어치워.”
유미를 위협하며 촉수처럼 다가서던 넝쿨들이 딱 멈췄다. 여자가 날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우리 자기. 그래서 대답은?”
유미는 나와 여자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유미는 넘길 수 없어.”
“그럼 이건 어때?”
여자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넝쿨이 돋아났다. 안용재를 따른 귀족들의 머릿속에 기생하던 기생충과 비슷하게 생긴 형태의 넝쿨. 유미의 머릿속에 기생충을 넣겠다는 소리였다.
“내가 그딴 걸 용납할 거라 생각하나?”
“흐응.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걸. 아쉽게도 둘 다 거절하면 나도 난감하다고. 솔직히 말해서 자기처럼 능력 있는 남자를 그냥 포기하기도 힘들고.”
유미가 내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죠?”
“협상 중이다.”
“혀. 협상이요?”
“저쪽에선 널 인질로 하자고 하고 있어. 널 여기에 남겨두고 나만 나가거나. 아니면 네 머릿속에 기생충 같은 넝쿨을 심자고 하고 있다.”
“예? 예엣? 왜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전력은 최강의 전력이라고 봐도 됐다. 초음파 슬레이브를 이용한 능력 봉쇄도 그렇고 유미의 균열도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까다로운 존재는 나였다. 위기감응이 있는 이상 남은 귀족들 가운데 날 죽일 존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 우리에게 여자가 원하는 것은 장악이었다. 숲이 안전하게 확장할 수 있도록 시간을 끌어라. 잔여 귀족들을 규합하고 숲을 지켜라. 여자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어째서요?”
“아직은 숲의 여왕이 아니니까. 시간이 필요한 것이겠지. 숲을 장악할 시간이.”
여자가 ‘역시. 우리 자기 멋져.’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충분히 서로 만족할 거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뭐로 봐서 거래라는 거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도 이만하면 요란했다.
“어라? 충분히 거래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는 한쪽만 생각하는 것 같아. 반대를 생각해 보라고. 자기가 날. 아니, 숲을 도우면 어떻게 될지를.”
여자의 손에 놓인 작은 넝쿨이 실지렁이처럼 꼬물꼬물 재롱을 떨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야. 안전한 세상? 다툼이 없는 세상? 자기는 평화를 원했잖아. 숲이 커지면 인간이 만든 문명의 흔적이 전부 지워지게 돼. 사람들은 순수했던 옛날로 돌아가는 거지. 평화로운 세상이 오는 거야.”
“웃기는군.”
“어머. 그런 세상을 원하는 거 아니었어? 안용재를 죽일 때, 토마스를 죽일 때 그런 세상을 원했던 거 아니었어? 자연과 하나 되는 삶. 얼마나 좋아.”
“......”
숲이 지금은 이렇지만 변이가 계속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이런 숲이 계속 커 나가도록 그냥 두라고? 그런 세상이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이라고? 넝쿨 괴물이 되면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이라는 건가? 그렇게 숲이 세상을 점령하면 숲을 장악한 그녀는 여왕이 되는 것이다.
약점이 뭘까? 생명체인 이상 약점이 있을 것이다. 불을 지르면? 숲이 반응해 수액을 내뱉을 것이다. 이 여자가 슬라임 같은 수액을 조종할 수 있다면? 그건 위험했다. 넝쿨 괴물은? 혹시 넝쿨 괴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여자는 내 침묵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계속 말했다.
“안용재와 했던 말. 그리고 거기 애기랑 했던 말 나도 들었어. 이대로 숲을 나가서 이 숲을 파괴한다고 뭐가 변할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인간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고 그렇게 살다 자연에 먹혀버리고 말 거야.”
“......”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봐. 자기가 그 능력으로 잔여 귀족들을 규합하는 거야. 인간들을 모아 이렇게 말하는 거지. ‘위험한 숲이 커지고 있다. 자연과 싸우기 위해 우리 인간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 이렇게.”
“......”
나와 유미, 인아가 마음먹고 생존자들을 장악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잔여 귀족들을 규합하는 것도 가능했고 고위 귀족을 잡아먹은 숲이라는 공적도 있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은 숲을 공격하되, 숲이 충분히 넓어지기 전까지 대규모 네이팜 폭격이나 전술핵을 쓰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숲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유미를 넘기라는 소리였다. 아니면 유미를 데리고 나가되 유미에게 기생 넝쿨을 넣자고 했다. 그 대가로 우릴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는 것이다.
“거대한 숲과 맞서 싸우자며 인간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잖아. 자연스럽게 자기는 인간의 왕이 될 수 있는 거야. 인간의 왕. 인류를 위협하는 강한 자연에 대항하는 인류의 구원자. 자기가 그렇게 인간들을 모으는 동안, 나는 숲을 장악해 숲의 여왕이 되는 거야.”
“......”
숲이 확장되는 동안, 여자가 숲을 장악하는 동안, 나는 인간을 장악하라는 것이었다. 만들어진 적대관계를 통해 서로의 권력과 지배력을 공고히 하자는 유혹.
“그렇게 우리 둘은 인간의 왕과 숲의 여왕으로 세상의 평화를 조율하는 거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의 지원과 약간의 시간이라고 할까?”
여자가 요염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굵은 넝쿨들이 휘적휘적 허공을 흔들었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거짓말!”
유미가 빽 소리를 질렀다.
“어머? 애기는 어른들이 말하는 데 끼어드는 거 아니란다. 아니. 응. 거기 애기. 유현 씨를 사랑해?”
“그. 그래!”
여자가 놀랐다는 것처럼 양 볼에 손을 대고 ‘어머 어쩜.’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정말.”
유미가 단언했다. 여자는 유미의 용기 어린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재차 다시 말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랑해?”
“사랑해. 난 너처럼 사랑 가지고 장난치는 년이 제일 싫어.”
여자는 유미의 날 선 대답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머나. 그래? 그럼 진정한 사랑을 하는 애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겠네. 설마? 아니야?”
뱀처럼 간교한 여자의 말을 내가 끊었다.
“그만.”
여자는 내가 말을 잘랐음에도 유미를 보고 계속 말했다.
“이 숲에서 나와 싸우면 둘 다 살아 나가기 힘든 게 사실이야. 하지만 네가 이걸 품기만 하면 유현 씨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나와 계약할 거야.”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재롱떨던 넝쿨이 유미를 쳐다봤다.
“저 사람은 바보 같아. 냉정한 것 같지만 속은 그렇지 않거든, 그래서 믿을 수 있어. 네가 이걸 품으면 저 사람은 너를 살리기 위해 숲을 공격하지 않을 거고, 널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간들을 규합하겠지. 그래. 그럴거야 그럼 유현 씨가 왕이 되는 거지. 너는 유현 씨를 왕으로 만든 여자가 되는 거고."
"......"
"정말로 유현 씨를 사랑한다면 네가 나서서 나와 유현 씨가 싸우지 않도록 중재해야 하지 않을까?”
이년이!
“입 다물어!”
“어라. 왜 화를 내죠? 사실을 말하는 건데.”
“내가 그딴 걸 인정할 것 같나?”
“그럴 줄 알았어요. 후후훗.”
휘리리릭
여자가 앉아있던 의자가 풀리며 넝쿨들이 공작이 날개를 펼치듯 사방으로 펼쳐졌다. 부채꼴 모양으로 활짝 펼쳐진 넝쿨들. 우리와 이야기하면서 의자 뒤로 계속 넝쿨을 만들었는지 엄청난 양이었다.
“거기 애기. 잘 생각해. 싸우면. 난 유현 씨를 사로잡아 꼭두각시로 만들 거야. 이 숲에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실패하면 네가 사랑하는 유현 씨는 내 꼭두각시가 되는 거야.”
“닥쳐!”
“하지만 네가 스스로 희생해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유현 씨는 마음이 약해서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지 못하거든.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하는 걸 보면 모르겠어? 네가 결정하면 유현 씨는 영원히 너만 사랑할 거라고.”
“닥치라고!”
뒷짐 진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맨 처음 유미와 밖으로 나오면서 했던 신호들.
[공격준비]
목은 잘라도 소용없었다. 불로 때우면 숲이 반응해 수액이 나왔다.
뇌를 파괴하고 뇌만 불태운다.
[머리조준]
목을 잘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유미도 여자의 뇌를 공격할 것이다. 화염방사기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유미가 저년 머리를 뜯으면, 내가 염화 능력으로 뇌만 태운다.
가능할까?
행동패턴을 통해 약점을 파악하긴 정보가 부족했다.
‘저게 본체가 아니라면?’
내가 걱정하는 건 저게 본체가 아닐 경우였다. 넝쿨 괴물들은 귀족들의 머리를 수확해서 어디론가 갔다. 넝쿨 괴물이 머리를 가져간 곳에 본체가 있다면? 지금 저 모습이 껍데기라면?
스스로 숲을 완전히 장악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숲을 장악하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어야 했다. 숲을 장악하면서 이곳에 온다는 것은 불가능. 높은 확률로 저건 본체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둔다면 저건 유미를 유혹해 인질로 잡을 것이다.
“유미야. 저년의 헛소리 듣지 마. 네가 인질이 되면 아무 소용없어. 아까 말했던 것 잊지 마. 난. 우리가 살기 위해 귀족들을 죽인 거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위해 싸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