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57화 (257/261)

타협할 수 없는 미래 (1)

불타오르는 연기 뒤편으로 빨간 불꽃이 입맛을 다셨다.

화르르륵

안용재와 재벌계파를 쑤신 건 효과적이었다.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오면서 지나가던 다른 계파 귀족들과 충돌했다. 재벌계파에서 안용재를 구하겠다고 미친 듯이 몰려들자 연쇄 반응이 시작된 것이다.

저쪽으로 이렇게 몰려가는 것을 보니, 저쪽에 여왕이 있는 건 아닐까? 토마스가 죽은 것을 모르는 그쪽 계파도 모여들었고 정지계파도 모여들었다. 마치 불꽃에 모여드는 불나방처럼 꾸역꾸역 모여드는 귀족들.

안용재를 찾으러 발버둥 치는 재벌계파 귀족들과 충돌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각 세력의 슬레이브들이 충돌하고 G-22 탄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렇게 피와 불꽃과 비명이 숲을 풍요롭게 했다.

상황은 해가 저물고 나서야 진정됐다. 살아남은 귀족들도 있었고 생지옥에서 도망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 뒷정리를 순식간에 처리한 유미였다.

*

취리리릭

슈리리릭

“윽. 징그러워라. 이걸로 교신했다는 건가요?”

유미가 회충처럼 보이는 것을 보곤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이 기생충 때문에 복종했다는 거잖아요. 아무리 권력이 좋고 힘이 좋아도 그렇지 이걸 먹을 생각을 했다고요? 아우.”

실로 재벌다운 생각이었다. 안용재를 구하겠다고 난리를 친 이유가 이놈에게 있었다. 안용재에 대한 복종심과 위치 추적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기생충 때문이었다.

“일종의 고독(蠱毒)인가?”

“고독이요?”

“음. 뭐 상상 속의 벌레인데. 사람을 조종하기 위해서 특수하게 만든 벌레를 의미하지.”

“아. 그렇구나.”

대충 설명하자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용재의 몸속에 있던 모체가 위협을 받자, 안용재 휘하 고독을 먹은 자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왔던 것이다. 안용재가 죽으면 어차피 고독으로 인해 죽을 테니까 말이다.

“벌레를 이용한 위치탐지라.

“신기하네요.”

확실히 기생충을 이용한 피아 식별능력은 예상외였다. 불에 탄 안용재를 대충 치료했다. 스팩1과 영양주사를 섞어서 놓자 고위 귀족다운 회복력을 보여주는 안용재였다. 일그러진 얼굴이 조금 펴지자 안용재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흐. 숲을 나가는 방법? 크흐흐. 숲 밖에 있던 자들까지 전부 이리로 들어왔는데 이젠 무슨 수로 나가려고? 뭔 짓을 했는지 아나? 네놈이 뭔 짓을 했는지 알아?”

숲 밖에 기생충을 가진 자가 없어, 방향도 알 수 없게 됐다는 소리였다.

“......”

“이제 됐나? 이제 만족해? 고위 귀족을 비롯해 남한의 귀족들이 전부 죽어 나갔다. 남은 자들은 하위 귀족들밖에 남지 않았어. 몇 명 남지 않은 하위 귀족들로 질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나? 네놈이 원하는 게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세계란 말이다!”

“질서라. 벌레를 뇌 속에 심어 놓고 질서? 기생충으로 지배하는 걸 질서라고 배웠나 봐?”

“네놈!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진정 모르는구나! 동맹 놈들이 수작질을 부린 바이러스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다. 좀비들은 강화 좀비로 변하기 시작했다. 곤충에, 동물에, 식물까지 생태계 전반이 변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단 말이다.”

“호-그래서? 연방의 귀족들께서도 인류의 안정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셨다는 건가? 그 방벽 안쪽에서 자기들끼리 오순도순 살면서?”

방벽 안쪽에 만든 그들만의 공간. 방벽 밖에 있는 자들에게 시민권을 준다는 미끼를 던져 고기 방패로 사용했던 연방이 언제부터 인류의 생존에 그렇게 신경을 썼을까? 놈들은 인류든 인간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놓고 변명이.

안용재의 눈동자는 체념과 허탈, 광기가 뒤섞여 타올랐다.

“귀족들은 능력자란 말이다. 그들을 전부 죽여 버리면 남한이 어떻게 될지 생각이라도 해봤나? 변이를 일으킨 짐승들은 누가 막을 건가? 질서를 잃어버린 생존자들을 어떻게 통제 할 건가? 이 빌어먹을 숲으로 도망친 여왕은 어떻게 할 거냔 말이다! 그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이 있나? 있느냔 말이다!”

방법? 있었다. 거점을 만들면서 계획했던 방법. 변이된 생태계와 싸우면서 생존자들은 서로 잡아먹기보다 협동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며, 능력자들과 비능력자들은 서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자연스럽게 구축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고 희생이 따르겠지만, 최소한 뇌에 기생충을 키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귀족들의 정신계 능력에 당해 의지를 상실한 꼭두각시가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귀족들이 원했던 이상향보다는 피 흘리고, 피 흘린 만큼 변할 수 있는 세상이...

“크하하하하! 미친놈! 미친 새끼! 고작 그런 생각으로.”

놈이 원하는 질서, 놈이 원하는 세계는 그랬다. 정신 지배가 횡행하고 뇌에 기생충을 키우며 힘으로 억압된 세상. 귀족이 아니면 노예인 세상. 그런 세계가 질서 있는 세상, 안전한 세상이라면 그딴 세상 알까 보냐?

안용재의 머리통에 유미가 화염방사기를 겨눴다. 여차하면 균열로 토막내고 불을 지를 기세였다. 손을 들어 유미를 말렸다.

“그래? 질서를 생각하고 생존자들을 생각하셨으면 잘됐네. 필요한 정보가 있는데 말이야. 잘 알려주시겠지?”

“크흐흐하하하하하! 빌어먹을 잡놈이!”

잠시 후, 안용재의 웃음소리가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르르륵!

사지가 없는 몸통에 촛불처럼 불이 붙었다.

*

안용재는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했다. 대규모 조직을 가지고 있어도 통제하기 힘든 상황인데 고작 몇 명이서 뭘 하겠냐며 비웃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 절망하길 원했다.

“그 사람 말이 사실일까요?”

“사실이든 거짓이든 걱정할 시간에 대비하는 게 맞겠지.”

숲의 중앙에는 거대한 공터가 있으며 그곳에 이 숲의 핵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여왕이 있다면 그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꼭 있었으면 좋겠어요.”

유미가 두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빌딩에서 당하고, 레드 존에서 도망쳤던 것이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었다. 원거리 공격인 균열에 근거리 펀치까지 있으니 복수할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음. 있어야 깔끔하긴 하지만...”

레드 존 그녀는 가장 먼저 변이를 이용한 새로운 생명체를 전선에 투입했다. 곤충처럼 생긴 변이체가 토해낸 소화액이 G-22탄환의 주요 성분이었다. 그것만 있을까? 연방과 동맹의 싸움보다 연방과 레드 존과의 싸움이 더 치열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에이. 걱정돼요? 토마스를 피해서 여기로 도망쳤다는데 그럼 제가 이기죠.”

“그래? 하긴. 토마스를 피해 도망쳤다면 균열을 버티지 못했다는 거니까.”

레드 존 그녀를 찾기 위해 숲을 뒤진 지 벌써 이틀. 숲에 들어온 건 사흘이 지났다. 사흘 밤낮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쉴라치면 숲이 우릴 잠식하기 위해 움직였다. 한 장소에서 2시간 이상 멈춰있을 수 없었다.

숲을 헤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옷과 배낭에 이끼와 넝쿨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예전 평택에 들렀다가 나왔을 때 신발과 겉옷에 넝쿨과 이끼가 피어올랐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넝쿨 괴물을 처리하기 쉬워졌다는 것이다. 유미의 균열과 화염방사기 조합은 넝쿨 괴물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변이된 숲에서 나온 특유한 물질이 합성섬유를 부식시켰다. 그나마 천연소재로 된 옷은 조금 더 버텼지만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군복은 금방 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속옷만 입고 다니겠어.”

“헤헤헤. 진짜요?”

“웃을 일이냐?”

“자연으로 돌아간 기분이잖아요.”

유미가 가슴을 모으며 장난쳤다. 피식- 웃고 말았지만, 변이된 숲은 녹색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2월 중순의 밤공기는 아직도 차가웠다. 이정도 추위에 힘들 일은 없었지만, 그만큼 열량소모가 컸다. 열량 소모를 줄이기 위해 모닥불이라도 피우면 계속해서 쏟아지는 흰 수액들. 수액들을 처리하기 위해 화염방사기를 쏘면 더 많은 수액을 쏟아 부었다. 확실히 숲은 우리에게 적대적이었다.

“그 자연이 우릴 잡아먹고 싶어 한다는 게 문제지.”

“이렇게 빡빡한 숲인데 그년은 어디 숨었을까요? 그년도 숲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흔적도 없는 걸 보면 안용재가 거짓말을 했을까요?”

“거짓말하는 표정은 아니었어.”

안용재는 우리가 절망하길 원했다. 우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을 겪길 원했다.

“뭐. 엿 먹어 보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놈은 우리가 처절하게 절망하길 원했으니 오히려 믿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공터에 그년이 있다고 했는데. 이틀이 넘도록 나오지 않는 공터라니. 아무래도 속은 기분이랄까요.”

“조금만 더 찾아보고 없으면, 숲을 나가는 걸로 가닥을 잡자. 이대로는 답이 없으니까.”

“정말 짜증나게 만드는 숲이네요. 우리 숲에서 나가면 통째로 날려버려요.”

“그래. 그러자.”

귀족들이야 여왕이 가진 지배 능력의 편린이라도 찾기 위해 생포하려고 했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밖에서 네이팜탄을 가득 실어와 숲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면 됐다.

‘치누크 헬기를 써서 네이팜을 쏟아 부어 버리면 끝이지.’

슬라임 같은 수액이 넘치는 숲이라고 하더라도 톤 단위로 쏟아지는 네이팜 불꽃을 버티는 건 무리였다.

‘혹시라도 버티면 소형 전술핵이라도 꽂아주지.’

연방과 동맹이 싸우면서 썼던 소형 전술핵을 생각해 보면 몇 발 정도는 어딘가 꿍쳐 놨을 것이다. 그걸 찾아 쓰면 됐다.

“핵이요? 좋아요. 화끈하게 날려버리자고요!”

유미가 숲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아- 동감이다.”

*

숲을 통째로 날려 버릴 생각을 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숲을 나갈 생각에 기꺼워하던 유미의 표정이 약간 우울하게 변했다.

“안용재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 그렇게 될까요?”

안용재는 생존자들이 갈기갈기 찢겨 힘을 잃고 변이된 생태계에 잡아먹힐 것이라고 했다. 바로 우리 때문에.

“우리가 멸망을 앞당겼다고?”

“네.”

우리가 귀족들을 죽였기 때문에 지배층에 공백이 생겼고, 능력자들이 대거 죽었다. 그 공백이 혼란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죽고 죽이는 끝없는 혼란의 시작. 끝에 무엇이 남을까? 안용재는 우리가 여왕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여왕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남은 것은 절망뿐이라고 비웃었다.

“멸망이냐? 노예냐? 그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건 누구 결정인데?”

“그래도. 연방의 지휘체계가 무너졌으니 다시 무법 지대가 되는 건 맞잖아요.”

연방과 동맹의 싸움에서 연방이 승리했다. 남은 것은 동맹의 잔당 정도였고 각 지방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식인 세력이었다. 산에 사는 호랑이가 죽고 늑대도 죽었으니 남은 것은 들개무리였다. 우리만으로는 그 혼란을 바로 잡긴 힘들었다.

“말했잖아. 단순한 전장이라면 슬레이브도 나쁘지 않겠지만 살아가고 발전하려면 슬레이브만으로는 한계 아닐까? 내가 지배 능력을 얻어 생존자들을 강제로 지배하면 그건 전부를 슬레이브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 그래서야 미래가 있을까?”

“알아요. 하지만. 현실은 아니잖아요. 미래를 생각하고 다시 문명을 발전시키려면 분명히 유현 씨가 한 생각이 맞아요.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아니잖아요. 생각해 봤어요. 이대로 우리가 거점으로 돌아가 조금씩 주변을 장악해 가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고.”

“......”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귀족들이 장악해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지역은 어떻게 되는 거죠? 동맹이나 식인종들을 축출하고 안정을 찾아가던 곳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일반 좀비들도 변이를 일으켰고 동물이나 곤충들까지 사람들을 습격하면 우리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유미야 오해하는 게 있어.”

“오해요?”

“이렇게 생각해 보자. 놈들이 질서를 위해 유미 너를 넘겨라. 그러면 난 너를 놈들에게 넘겼어야 할까?”

“네?”

“피와 희생 위에 세운 귀족들의 질서. 연방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너나 인아를 희생해야 한다고 놈들이 말했다고 하자. 놈들에게 우릴 넘겼어야 할까?”

“......”

“나는 그게 싫었어. 놈들에게 노예처럼 부림 받기도 싫었고 뇌 속에 기생충을 키우기도 싫었어. 아무리 입에 발린 말을 해도 내 생각은 그랬어.”

“그럼. 안용재가 말했던 것처럼 그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건가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

“내가 원하는 세상과 놈들이 원하는 세상은 달랐으니까. 난 그걸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야.”

얼굴이 약간 빨갛게 변한 유미가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탐지 꼬마의 입술이 달싹였다.

“특이 반응 포착. 고속 접근 중. 3시 방향. 거리 3.4km. 3km. 2.5km.”

꼬마의 말대로라면 거의 아음속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였다.

“유미야!”

“준비했어요.”

화르르륵-

화염방사기 끝에 불꽃이 붙었다. 초음파 슬레이브와 탐지 꼬마가 자리를 잡았다.

우수수수- 굵은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숲이 경배했다.

“어머. 가만히 듣자니 숲을 태우겠다고? 그건 안 돼.”

요염한 목소리. 넝쿨을 타고 그녀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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