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혈의 숲 (6)
정희제가 없다고 말하는 안용재였다.
‘여기에 없다는 건가? 아니면 죽었다는 건가?’
전형적인 주어, 목적어 없는 화법. 누가 없는지, 어디에 없는지 말하지 않는 방식. 지레짐작하도록 유도하는 화법이었다. 반쯤 일그러진 얼굴로 킬킬거리는 안용재의 눈빛엔 언뜻 광기까지 엿보였다. 하긴 나라도 사지가 잘렸다면 그럴 테니.
그가 웃건 말건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유미와 초음파 슬레이브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불을 질렀다. 불길이 치솟아 오르자 마지 면역체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굵은 거목에서 하얀 슬라임 같은 액체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와 진화에 나섰다.
태우는 불꽃과 막으려는 아메바들. 이 숲은 과연 뭘 원하는 건가? 우걱우걱-꿀꺽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고 나서야, 뿌옇게 흐려지던 정신이 맑아졌다. 내가 놈을 무시하고 입을 다물자 안용재도 입을 다물었다. 작은 신경전. 고삐는 내가 쥐고 있었다.
“뭐. 꿈틀거려봐야 손바닥 안이지. 하긴, 그 몸으로 순간이동 해봐야 소용없겠지만.”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경 쓰고 있다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
“큿...”
작게 분노를 참는 소리가 놈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하지만 반응이 예상보다 작았다. 역시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사지가 잘렸어도 전신이 일그러질 정도의 화상을 입었어도 안용재는 안용재. 재벌계파 수장이자 재벌가의 가주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정희제의 행방을 묻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자 결국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적이 뭐냐? 정희제를 찾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네놈의 목적은 뭐냐?”
잘린 팔다리를 재생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화상도 마찬가지. 그러니 정희제의 행방을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협상 카드를 찾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리고 협상의 기본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하는 데서 시작했다.
“후- 목적이라... 그냥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거.”
“뭐?”
화상으로 일그러진 안용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멍하니 눈을 동그랗게 뜬 안용재의 입에서 광소가 터졌다.
“크. 크크크하하하핫. 나. 이 안용재가. 고작 이딴 새끼에게. 크크크크크.”
안용재는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팔이 있다면 배를 잡고 웃을 정도로 몸을 뒤틀며 웃었다.
“그렇게 웃기나?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게 그렇게 웃겨?”
“크흐흐흐흐. 사람답게 살고 싶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한다는 짓이. 크크흐. 윗대가리들을 전부 쓸어버리겠다는 건가? 크후후. 혁명가도 아니고 몽상가? 아니. 그냥 미친개였구먼. 흐흐흐.”
“안 됐네. 미친개에 물려서.”
“하- 미치겠군. 돌아버리겠어. 후우- 좋아.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땅? 여자? 재물? 원하는 게 뭐냐?”
“이딴 세상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안용재의 흉측하게 눌러 붙은 얼굴이 꿈틀 흔들렸다.
“그렇군. 그래. 안전. 독립을 원한다는 거로군.”
마인드 리딩이 통하지 않음에도 놈은 내가 원하는 것에 근접했다. 땅따먹기로 그 자리에 앉은 건 아니라는 소리. 착 가라앉은 분위기. 언제 그렇게 웃었느냐는 것처럼 안용재가 느릿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없는 것들이 돈을 가지면 하는 게 단순해. 주식. 부동산. 그것밖에 몰라. 그나마도 제대로 된 물건에 투자하는 것들은 거의 없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칭 전문가란 놈들이 ‘좋다.’ 그러면서 작은 이익을 던져주면 옳다구나 거기에 돈을 꼬라박지. 그러다 망하면 꼭 남의 탓을 해요. 자기가 선택해 놓고 말이지.”
“......”
“그런 놈들 많이 봤어.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더란 말이지. 없이 살다 눈먼 돈이 생기면 이제까지 못써본 한을 풀겠다고 고급 승용차에, 언제 그런데 살아봤다고 관리비가 비싼 주상복합에, 펑펑 돈을 쓰는 걸 낙으로 삼으면서 그걸 전부라고 생각하더라고. 이건 뭐 돈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면서 돈 몇 푼 쥐면 상류층이 됐다고 착각한단 말이야.”
“......”
유미가 달궈진 화염방사기를 호호 불며 왔다.
“다. 태웠어요. 슬라임 같은 게 계속 나오는데 자리 옮겨야 하지 않나요?”
“탐지 꼬마, 초음파 챙겨서 먼저 출발해. 바로 따라갈 테니까.”
“네-”
유미가 전리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먼저 일어섰다. 놈이 유미의 생각을 읽지 못하게 유미를 먼저 보냈다. 유미가 멀찍이 앞장서서 가자 내 옆구리에 짐짝처럼 매달린 안용재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 돈이 뭔지 아나? 돈은 시간이야. 인생이고. 근데 돈을 벌 방법도 모르는 놈들이 돈이 생겼다고 펑펑 쓰는 꼴이란.”
안용재는 돈에 힘을 대입해 비유하고 있었다. 서민들은 돈을 쓸 줄 모른다는 소리. 힘이 없던 자들이 힘을 갖게 되면 힘을 낭비할 따름이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가 힘을 줘서 똥을 싸든, 김장 김치로 싸대기를 날리든 그건 내 마음 아니겠어. 그게 하고 싶은 말인가?”
“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인생이고 시간이라면 약육강식으로 변한 세상에서 힘은 뭘까? 힘 그 자체가 시간이고 삶이었다. 허나 그것도 힘을 쓸 줄 알아야 의미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힘을 쓸 줄 모르는 내가 허튼 곳에 힘을 쓰고 다닌다며 돌려서 이야기했다.
“졸지에 눈 먼 힘이 생겨서 널 때려잡았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응?”
“허- 참.”
안용재가 내 대답을 듣곤 기막혀했다. 내가 이렇게 막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숨을 고른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외국인들에게 주식을 넘기고, 무역협상을 할 때 바가지를 쓰면서도 퍼주고, 로비해서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 모를 거야. 암.”
“......”
이건 또 무슨 소리.
“안전과 독립이라고? 크크크. 반도역사에 안전과 독립이 존재한 적이 있었나? 안전을 찾고 독립을 찾는 놈들은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 것들이란 말이지. 암. 그런 놈에게 이 안용재가. 이 꼴이 될 줄이야.”
“세상이 망했어도 변하는 건 없다는 소린가? 망한 세상도 변한 게 없다는 소리?”
좋지 않았다. 안용재는 분명 외국-외세에 대해서 운을 띄웠다. 그리곤 다시 안전과 독립을 말하면서 지금 상황도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놈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네놈도 봤을 텐데. 힘이 없던 놈들이 힘을 갖게 되면 어떻게 하는지 말이야. 없던 놈들이 힘을 가지면 이제까지 억눌렸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을 것처럼 지랄하지 근데 그거 아나?”
올백머리가 떠올랐다. 힘이 생기자. 그 힘으로 먹고 죽이고 지배하려고 올백. 이 세상에서 약육강식이 진리라고 외쳤던 올백. 식인종 두목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본 생존자 그룹들은 전부 그렇게 변해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약자를 억누르는 조직으로 변해있었다. 약자는 언제든 먹히는 비상식량이 됐고 강자는 그들을 지켜준다며 약자를 먹었다. 가두고 사육했다. 실로 변한 것은 없었다. 사태 전이나 사태 후나 강자와 약자는 존재했고 그 관계는 변한 게 없었다. 안용재는 그걸 꼬집고 있었다.
“힘없는 놈들이 졸지에 힘을 얻고 난 뒤 뭘 했지? 뭘 하던가? 힘을 얻고 나면 그 힘을 어디다 쓰던가? 그들을 눌렀던 위가 아니라. 과거 자신들과 같았던 없는 사람들에게 쓰지 않던가? 크흐흐. 힘이 없던 놈들이 힘을 가져도 하는 짓을 똑같아. 본래의 구조는 변하는 게 없단 말이지.”
“......”
미꾸라지 같은 놈. 화재를 돌리면서 놈은 내가 원하는 말을 피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고. 사태 초기. 세상이 망했어. 개 같다고 욕하던 정부도 망했고. 돈 벌어서 외국 놈들 우대하는 재벌도 망했고. 남의 집에서 전시 작전권 휘두른다던 미군도 망했어.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지?”
“......”
내 침묵을 뭐로 생각했는지 안용재는 신이라도 난 것처럼 말했다.
“망해버린 세상이라서 새로운 체계라도 들어설 줄 알았나? 처녀가 애를 배기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안용재를 바닥에 가만히 내려놨다. 그러자 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설마 하는 눈빛.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네놈 말대로라면 난 뭐지? 아- 일반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서 내가 미쳤다고? 널 물어뜯어서 미친개라고? 아니면 네놈들처럼 지배하겠다는 지배욕이 없어서 이깟 놈이라고 한 건가? 뭐 상관없겠지. 그게 네가 하고 싶은 말이란 말이지. 그걸 유언으로 생각해도 되겠나?”
이놈은 확실히 많이 알고 있었다. 확실히 이놈은 숲을 나갈 방법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희제의 행방도. 통신기를 쓸 수 없는 숲에서 연락을 취할 방법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비유적으로 말한 이야기에도 의미심장한 것들이 많았다.
내가 원하는 자유도, 독립도 없다는 소리를 돌려하는 것도 그랬다. 하지만 그뿐. 이놈에게 직접 숲을 나가는 방법을 묻는다면 놈은 그 방법에 수작질할 것이다. 다른 질문도 마찬가지.
내 눈이 차갑게 가라앉자 안용재의 일그러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네놈. 설마. 그냥 이대로?”
“......”
사지가 잘렸을 때. 일반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차라리 죽여라.’ 혹은 ‘제발 살려주세요.’ 안용재는 둘 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사지가 잘렸을 때. 자신의 목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부터 찾았다.
자기를 죽이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고 그걸 간파했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한다면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껏 썰을 풀었다. 내 흥미를 끈다. 나와 협상할 거리를 찾는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정말 그럴까?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안용재는 내가 원하는 것을 금방 찾았다. 그 뒤에 나온 이야기는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마치 내 생각이 잘못됐다고 말하면서 내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이야기였다. 내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이유가 뭘까? 놈의 말에 대꾸하면 화제를 돌려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화제를 만들며 시간을 끌었다.
놈의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사지가 잘린 놈이 시간을 끌어서 뭘 할까? 통신할 방법이 있고 시간을 끌었다는 것이 합해지면? 이곳으로 누군가 오고 있다는 것.
“내가 언제까지 너를 끌고 다닐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마지막으로 할 말은 그게 전부? 생각보다 소박하네.”
“너... 네놈 설마?”
애석하게도 누군가 이곳으로 온다면 이젠 이놈을 살려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곳으로 온 놈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아- 그래. 무전기를 쓸 수 없는 숲에서 뭔가 신호를 보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 지금쯤이면 제법 근처까지 오지 않았을까?”
안용재의 화상입은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내 말 속에 숨은 의미까지 파악했다. 확실히 난 놈이었다.
“날 이용해 전부 죽일 셈이냐! 네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모르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 알고 있다. 너희 같은 놈들이 없는 세상이 되겠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세상에 한발 다가서겠지. 안용재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안용재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안 돼!”
화르르륵!
안용재의 전신에 불꽃이 퍼졌다. 앞장서서 가던 탐지 꼬마가 멈춰 입술을 달싹거렸다.
“적. 귀족. 탐지. 방향. 3시. 4.시. 5시. 셋. 셋. 둘. 고속 접근.”
탐지 범위 밖에서 천천히 다가오다 다급해졌는지 내달리는 놈들이었다. 적당한 온도로 불태웠기 때문에 죽지도 않고 실시간으로 계속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 산채로 불타는 안용재의 입에선 끊이지 않고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악!”
초음파 슬레이브를 불이 붙어 꿈틀거리는 안용재 근처에 눕게 하고, 유미는 굵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불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근처의 나무에서 하얀 수액이 나와 슬금슬금 안용재를 향해 기어갔다.
“저깄다. 놈을 잡아라!”
“회장님. 불을 꺼 빨리.”
8명이나 되는 귀족들 가운데 고작 둘만 나를 추격하고 나머지 여섯은 불이 붙은 안용재를 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놈들이 안용재의 곁에 모여들자, 옆에 있던 초음파 슬레이브가 입을 벌렸다.
-■■■■■■
“큭- 이게 무슨 소리야.”
“능력이! 능력이!”
“엇? 능력이 사라져?”
물을 다루는 능력과 결빙 능력으로 안용재의 몸에 붙은 불을 끄던 귀족이 갑자기 사라진 능력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그 틈을 타 늑대처럼 달려든 유미.
“끼야아아앗!”
초음파 슬레이브를 잡으려고 하는 놈들을 유인하기 위해 유미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죽여!”
“저년부터 죽여!”
“일단 쏴!”
유미를 향해 G-22와 권총들을 겨눈 귀족들.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벌어지며 총과 함께 팔이 썰리기 시작했다. 나이프를 쥔 손도 마찬가지. 삽시간에 바닥에 떨어진 팔들. 자기도 모르게 잘려나간 팔뚝이 활어처럼 퍼덕거렸다.
“끄아아악!”
“으아아악!”
내 뒤를 추격하던 놈들이 등 뒤에서 쏟아지는 비명을 듣고 몸을 돌렸다. 이건 무슨 병신 짓이지? 사양하지 않았다.
“타올라라!”
화륵!
머리통에 불이 붙자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하는 놈들이었다. 군 면제가 많은 높은 분들이라 그런지 가지가지 했다.
스르릉-
칼을 뽑자, 맑은소리를 내며 칼날이 애교를 떨었다.
내 옆구리에 들린 탐지 꼬마가 쉬지 않고 입술을 달싹였다.
“적. 귀족. 반응. 5시. 6시. 4시. 둘. 둘. 셋.”
좋다. 많이 오고 있구나.
서걱-
숲이 선혈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