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55화 (255/261)

선혈의 숲 (5)

“자네는 신중한 사람이라 믿고 허심탄회하게 말하지.”

“......”

“자네가 다루기엔 너무 위험한 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좋은 명검은 여벌의 목숨만큼 귀하겠지요.”

안용재는 유미를 칼에 비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유미를 다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흠. 뭘 근거로 이런 판단을 내린 거지?’

탐지 꼬마가 항상 놈들의 거리를 알려줬다. 아무리 가까워도 1km 안쪽으로는 접근하지 않던 놈들이었다. 그렇다면 1km밖의 거리에서도 나와 유미의 관계를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귀족이 있다는 소리였다.

아마도 내 머리를 노렸던 그 귀족의 능력 같았다. 원거리 공격을 하려면 원거리를 볼 수 있어야 하니까. 일단 귀족 넷 가운데 하나의 능력은 알 수 있었다.

‘원거리 공격-관측 능력.’

까다로운 능력이었다. 역시 고위 귀족이라 그런지 그 곁에 있는 친위대 격도 만만치 않았다.

‘초장거리 저격이 있으면서도 토마스를 죽이지 못했다는 건, 염력 방어를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은 아니라는 건가?’

“분수에 맞지 않는 보물은 항상 죽음을 재촉하는 법이지.”

“분수에 맞지 않는다니요.”

넝쿨 괴물과 싸울 때 나는 아무런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유미에게 지시를 했다. 집에서 빈둥대는 니트처럼 가끔 화염방사기나 쏴주고 넝쿨을 피해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러기는 했지만 유미가 내게 종속된 것처럼 보다니.

‘유미를 일종의 슬레이브로 착각한 건가?’

그런 착각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짐짓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사내가 살짝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흐음. 그늘이 없으면 나무 아래 있던 풀도 마르는 법이야.”

“......”

동맹이 망했으니, 너희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자네가 가진 칼은 너무 위험해. 출신도 마찬가지고. 들어봤겠지? 학살자 토마스의 이름을. 그자는 동맹 출신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찢어 죽이는 작자야. 손익분기점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지. 공교롭게도 그 토마스의 능력과 자네가 가진 칼의 능력이 많이 유사해. 그걸 토마스가 알면 어떻게 될까? 토마스는 우리 연방의 고위 귀족이라고. 동맹의 잔여 세력을 긁어모은다고 이길 수 있는 자가 아니란 말이야. 도망을 치려나? 언제까지. 어디로?”

토마스가 죽은 줄 모르는 사내가 슬며시 회유를 시작했다. 하지만 내용에는 구체적인 조건이 없었다.

‘조건 없는 회유라. 내가 먼저 붙잡기를 바라는 건가?’

이놈의 능력은 뭘까? 담담한 표정으로 정확하게 말해달라고 되물었다.

“그 말씀은?”

“흐음- 그렇다는 말이야.”

내가 되묻자 사내가 잠시 물을 마시며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 물을 마시나. 내가 빤히 쳐다보자. 사내는 짐짓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을 권했다.

“괜찮습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지만 못 알아들은 척하고 뻗댔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렇게 나가자 사내의 잔잔한 미소 속에 뭔가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불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내가 입을 합 다물고 있자 사내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순간, 살짝 머리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정신계 능력? 설마 정신계 능력을 쓰는 건가?’

아주 미세하게 간질거리는 느낌. 머리를 감지 못해 살짝 가려운 느낌과 유사한 감각이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짧은 시간. 민감한 내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정도로 교묘한 움직임이었다.

“이 숲에서 언제까지 자네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왕을 찾으면? 여왕을 죽이려고 하는 건가? 없애려고? 그런다고 남는 게 뭔가? 아니면. 자네가 여왕을 지배하려고? 어떻게?”

“......”

“설마. 동맹의 그 알량한 구호를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왕을 우리가 잡으면 세상을 정복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말하던가? 하하하. 그게 가능하겠나? 여왕을 잡아 혹시라도 ‘지배’의 능력을 확보한다 치세. 지배의 범위가 얼마나 되겠나? 아무리 강한 능력이라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그럼에도 동맹 놈들은 지배 능력이 무슨 인류를 억압해 노예로 만드는 능력인 것처럼 매도해 놓고, 정작 자기들은 그 능력을 얻기 위해 죽자고 연구했더군. 놈들을 처리하고 자료를 수거해 보니, 동맹이 지배 능력 연구에서 우리보다 앞섰더라는 말이지. 하하하.”

“......”

시로가 알고 있던 지식은 단순히 시로가 천재거나 고위 연구원이라서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놈들이 말은 뻔지르르하게 하지만 속은 썩었지. 자유라고? 인류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그 얼마나 위선적인 표어란 말인가? 말뿐인 표어. 왜? 믿기지 않나? 그럼.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작자들이 그런 놈들과 결탁했겠는가?”

“그런 놈들이라니요?”

“후후후. 시로 에지우드, 레이나 디트릭. 그 이름이 상징하고 있던 게 뭔지 아나? 에지우드는 미 육군 화학-생물학무기 연구소 이름이야. 디트릭도 비슷하지. 놈들의 이름은 가명이다. 자신들의 가명을 731부대의 연구를 계승한 곳으로 썼다는 거다. 시로라는 이름은 이시이 시로의 이름을 따온 명칭이지. 그런 놈들이 모여서 인류의 자유를 수호하고 정의를 지킨다고 말했던 거야. 얼마나 위선적이란 말인가? 아닌가?”

“......”

“호오?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알면서도 동맹에 있었단 말인가?”

“......”

사내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자연스러운 표정. 하지만 그 태연한 태도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묵묵히 사내를 쳐다보자 남자가 동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지금 동요하고 있었다. 어째서? 왜?

토마스가 이 떠버리를 죽이지 못한 이유가 뭘까? 토마스의 균열은 공격 범위 내에서 거의 필살의 위력을 보여주는 능력이었다. 그가 죽이지 못했다면 방어력이 뛰어나야 했다. 공간을 찢어 균열을 만드는데 그걸 방어한다?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토마스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거나 피할 수 있으면서도 방어가 아닌 능력이 뭘까? 토마스의 공격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렇다면... 가능했다. 예측? 예지? 그건 아니었다. 난 놈을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놈이 무슨 말을 하던 놈을 잡을 생각이었다.

고위 귀족은 전부 죽인다. 이 숲에 있는 것들도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예지나 예측이라면 이걸 모를 리 없다. 그럼 이놈의 능력은 뭘까? 뭔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유도할까? 혹시. 이놈의 능력이...

‘마인드 리딩.’

독심술?

과연 그렇다면 토마스의 공격을 읽을 수 있었다. 예측과 예지가 아니더라도 마음을 읽고 대비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놈이 보여준 미약한 불안감.

히죽-

사내의 미소에 화답하듯 웃어줬다. 놈은 내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는 걸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죽일까?’

약간 불안한 기색인 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 기회?’

‘잠깐.’

재계 서열 1위 회장이었다. 그런 놈이 내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속내를 드러낸다고? 원거리 저격을 배치했다 풀고? 이게 놈의 시험이라면? 놈에게 또 다른 능력이 있다면? 지금 이게 놈이 내 공격을 유도하려는 짓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았다.

놈은 덫을 치고 있었다.

귀족들은 일종의 정신계 능력이 있다고 했다. 동맹의 남자 알렉스. 물에 작용하는 염력을 사용하던 남자 알렉스가 자신은 귀족이 되지 못하고 소모품이 될 것이라 연방에서 빠져나왔다고 했다.

부산에서 만난 귀족 윌슨이 마음대로 데리고 다녔던 여자 알렉스.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염력을 사용해 귀족들의 방패 역할을 했던 여자. 나중에는 뇌를 파 먹혀 죽은 그 여자는 귀족이 되지 못한 능력자들의 말로를 보여줬었다.

정신계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강해도 도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신계 능력은 귀족이 가진 기본적인 소양 같은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토마스가 균열-절단 능력이 있고 주로 그것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정신계 능력이 없었다면 다른 정신계 능력을 방어하지 못해 단순한 도구가 됐을 것이다.

환영을 보여주든, 인식을 조작하든, 텔레파시든, 그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정신계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능력이 있어야 다른 정신계 능력에 먹히지 않았다.

부산에서 만난 귀족들이 날 보고 놀랐던 이유는 내가 듀얼(이중) 능력자라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당시에는 정신계 방어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염화 능력이 있어서 놀랐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족이 다른 귀족의 정신계 능력에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놈들은 내가 정신계 능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강력한 염화 능력이 있다고 놀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안용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마인드 리딩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토마스의 공격을 피하거나 역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적과 싸우면서 자신의 약점을 알게 되는 법. 안용재의 적인 토마스를 보면 안용재의 공격 방식을 알 수 있었다.

‘토마스와 함께 있던 놈들의 능력.’

방어막. 그것도 강력한 물리 방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강력한 물리 공격을 할 수 있는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역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방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갖춘 토마스가 방어를 생각했다는 소리였다.

‘토마스가 조심할 정도로 강한 위력의 공격. 혹은 막기 힘든 공격이라는 소리.’

안용재의 어딘가 어색하게 보이는 여유로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놈의 무장은 권총 그리고 나이프. 귀족들이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에 비해 월등하게 길고 날카롭게 보이는 나이프 손잡이엔 예의 그 빨간 버튼이 달려있었다. 무기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근거리 공격.’

토마스의 균열-절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했다. 위기 감응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이 있었어도 피하는 게 벅찼을 정도로 무식한 능력이었다. 그걸 마인드 리딩 만으로 피할 수 있을까? 마인드 리딩은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이었다. 오른쪽을 공격한다는 생각을 읽고 그와 동시에 반응해야 했다.

‘반응?’

‘신체반응?’

혹시. ‘자기 시간 가속’ 혹은 ‘고유 시간 가속’과 같은 자신의 움직임을 빠르게 할 수 있는 능력? 아니면 순간이동? 어느 계열이든 그런 쪽의 능력이라면...

“그러니까. 원하시는 게 뭡니까?”

“하하하. 원하는 거라. 말하지 않았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화가 된다고.”

다시 분위기가 변했다. 내 마음을 읽지 못했지만, 살기를 읽은 건가? 그렇다면 놈의 친위대가 끼어들기 전...... 놈과 내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욱신- 옥죄는 심장.

“타올라라!”

내 선택은.

선공이 아닌, 방어였다.

초고온 백염이 반구로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악!”

안용재의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놈의 팔에 쥐어진 단도가 내 뒷목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화르르륵!

떨썩-

백염에 뼈까지 녹아 뚝 떨어지는 팔뚝. 고통으로 일그러진 안용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터져라!”

안용재의 능력이 ‘순간이동’이든 ‘자기 시간 가속’이든 놈을 잡으려면 주변을 동시에 초토화해야 했다.

콰아아아앙!

압축된 백염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졌다. 눈앞에 있던 안용재가 마치 허상처럼 사라졌다.

“크으으아악! 어. 으. 어떻게?”

10m 정도 앞에서 등판이 새까맣게 탄 안용재의 무릎이 꺾였다. 끔찍한 전신화상을 입은 그의 몸뚱이가 재생하려고 애처롭게 꿈틀댔다.

어질-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는지 현기증이 일었다. 우걱-주머니에서 에너지 바를 꺼내 입에 밀어 넣고 카타나를 뽑아들었다. 이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안용재의 왼팔과 두 다리를 잘라냈다.

“크윽. 너. 너. 네놈.”

사지가 절단되고 타버린 탓에 몸통만 남은 안용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질- 다시 현기증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전투 속행은 무리였다.

“회장님!”

“죽여!”

친위대가 이쪽으로 내달리자, 유미는 초음파 슬레이브를 데리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친위대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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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음파 슬레이브가 먼저 돌입해 초음파를 터뜨린 뒤 곧바로 유미가 난입하자, 주변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됐다. 그렇지 않아도 유미를 막기 힘든데, 초음파까지 터졌으니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슬레이브는 먹통이 됐고 귀족들은 순간적으로 능력이 마비됐다. 놀라는 것도 잠시. 유미의 자비 없는 균열에 토막 났고, 가벼운 펀치에 곤죽이 됐을 따름이었다. 흥건하게 피가 녹색 이끼를 붉게 물들였다. 이끼와 넝쿨들이 환희했다.

초음파 슬레이브를 소모하지 않고 계속 쉬게 했기 때문에 범위와 능력이 조금 더 강해졌다. 그래서 놈들이 제대로 능력을 사용해 보기 전 끝을 낼 수 있었다.

유미가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휴- 지켜보는데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그냥 초음파를 고위 귀족에게 썼으면 좋았잖아요.”

“저놈들에게도 탐지 슬레이브가 있어서 말이지.”

애초에 저쪽에서 독대를 청했기 때문에 초음파 슬레이브를 데려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놈들에게도 탐지 슬레이브가 있었다. 이쪽에서 몸을 숨긴다고 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초음파 슬레이브를 안용재에게 써먹기는 힘들었다.

“써먹겠다고 데려갔으면 역으로 놈의 마인드 리딩에 걸렸을 거야.”

“그렇기도 하네요. 뭐. 이제 고위 귀족은 하나 남은 건가요?”

유미가 주먹에 묻은 피를 슥슥-닦으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 정희제 하나 남았다. 나 조금 쉴 테니 정리 좀 부탁해.”

“네.”

유미가 익숙하게 놈들의 장비를 챙겼다.

화르르르륵!

화염방사기가 불꽃을 뿜었다.

타오르는 시체들. 피를 머금고 환희에 떨던 이끼와 넝쿨들이 비명을 지르며 잿더미가 됐다.

“크크큭. 하나 남았다고? 토마스를 죽인 건가? 그렇군. 우릴 노렸군. 크윽. 여왕이 아니라. 우릴 노린 거였어. 정희제? 크흐흑. 그놈은 없다.”

몸통만 남은 안용재가 화상에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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