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혈의 숲 (4)
“회장님이라고?”
한국에서도 300명 정도 밖에밖에 없는 귀족들은 그 출신과 성향에 따라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치계, 재벌계, 그리고 외국계. 토마스 넬슨을 중심으로 한 외국계 세력은 주한 미군과 외국인으로 이뤄진 세력이었다.
토마스 넬슨은 죽었으니, 이제 남은 고위 귀족을 둘. 그 가운데 회장님님이라는 칭호를 쓰고 다닐 세력이라면 재벌계파 밖에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해 각 계파가 100명씩 이뤄졌다고 가정하면 재벌계열 귀족들의 숫자는 100명. 한국 100대기업 회장만 귀족이 된다고 하더라도 최상위 부자들만 귀족이 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재계서열 100위 회장이 서열 1위 회장에게 ‘회장님’을 찾으며 저런 눈빛을 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저런 눈빛은 독립된 사업체를 가진 사람의 눈빛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굳이 따진다면 윗분을 모신다는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이 남자는 재벌가의 가신격인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가신격인 부사장, 이사, 전무 같은 사람들을 귀족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기업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뫼비우스의 띠를 순환하는 쌍둥이별 마크가 박힌 주사기. 방벽 안쪽에 우뚝 솟아있던 본사건물. 그 건물 지하에 운영되고 있던 비밀 실험실과 사병이 떠올랐다.
“안용재?”
“크흐흐.”
내 질문에 놈은 빨간 미소를 지었다.
‘우연일까?’
우연일 가능성은 없었다. 숲과 연관된 무엇을 재벌계 귀족들은 알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충돌하는 건 위험했다. 탐지 꼬마의 입술이 다시 달싹거렸다.
“12시. 1시. 2시 방향.”
“넝쿨 괴물. 접근. 숫자는 넷. 여섯. 셋.”
하필 지금 넝쿨 괴물이 움직이다니. 이곳에서 열셋이나 되는 넝쿨 괴물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우연이 계속 겹치면 더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 혹은 ‘필연’이었다. 이 상황에서 ‘당연’하다는 듯 등장한 회장과 넝쿨 괴물이라. 양팔이 뜯긴 놈을 노려보자 놈은 내 눈빛을 받고 태연히 웃었다.
“크흐흐흣. 포위됐군. 아까처럼 또 해보지? 응? 크크크.”
도발일까? 그저 단순한 도발? 아니면 회장에 대한 믿음? 토마스의 능력이 균열-절단이었다. 안용재의 능력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자신감이 충분할까? 게다가 이곳을 알고 온다는 건 아무래도 뭔가 있다는 소리였다.
“귀족과 슬레이브. 2km 거리 접근.”
“넝쿨 괴물. 1.8km 거리 접근.”
탐지 꼬마가 입술에선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 흘러나왔다. 완벽한 포위 형국. 마치 동시에 공격하기라도 할 것처럼 거의 비슷한 거리에서 비슷한 속도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반원으로 포위하는 진형이라니.’
무전기를 쓸 수 없는 상황. 진형을 넓게 펴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반원으로 넓게 포위하는 진형을 펼치는 것은 교신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회장의 능력이 뭐지?”
“능력? 크크큭.”
퉷! 놈이 뱉은 침이 힘없이 튀었다. 내 허벅지에 튄 침을 슥 닦았다.
“이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지.”
산 낙지처럼 손아귀에서 힘차게 꿈틀거리는 넝쿨을 놈의 상처 난 옆구리에 던졌다. 상처에 던져진 넝쿨이 뱀처럼 움직여 놈의 몸통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데굴데굴 통나무처럼 구르며 몸을 파고드는 넝쿨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발버둥치는 놈의 허리띠를 붙잡아, 귀족들이 접근하고 있는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으아악-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놈이 쿵 소리를 내며 굵은 나무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염방사기. 장비. 전부 챙겨.”
아아아악
멀리서 넝쿨 괴물이 몸을 파먹어 들어가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놈이 회장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안면이 있는 자라면 추적이 늦춰지거나 최소한 포위 진형이 흔들릴 것이다.
‘게다가.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
토마스가 지휘하는 병력엔 넝쿨 괴물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게 토마스가 가진 균열-절단 능력의 위험성 때문일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작용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넝쿨 괴물이 보조를 맞춰 우릴 포위하는 것도 이상했다. 다만, 좀비나 변종을 유인하는 약품 같은 건 연방에서 진작 개발했다. 그런 약품을 이용해 넝쿨 괴물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제어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끄아아악
“전부 챙겼어요.”
“넝쿨부터 친다.”
“넝쿨이요? 귀족이 낫지 않을까요? 저쪽에 고위 귀족이 있다면서요?”
“토마스를 잡았을 때는 난전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넝쿨 괴물과 협력이라도 하는 움직임이야.”
내 말에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뽑아둔 혈액 팩을 유미에게 건네주자 유미가 단숨에 쭉 마셨다. 유미가 피를 먹는 동안 나도 재빨리 에너지 바를 입에 구겨 넣고 물로 삼켰다.
“가자.”
“네.”
*
유미가 쓰는 균열-절단 때문에 넝쿨 괴물을 상대하기 편해졌다. 넝쿨에 마비액이나 소화액, 부식액 같은 것이 묻어있어 접근해서 잘라내기 까다로웠는데 유미의 균열로 멀리서 잘라내면 깔끔했다. 거기에 뒤처리도 쉬웠다. 화염방사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르르륵!
뾰족하게 찔러오는 넝쿨을 유미가 잘랐다. 잘린 넝쿨 위로 쏟아지는 화염. 순식간에 사방이 불바다가 됐다.
“세 마리. 저 지금 세 마리요.”
“끙. 다치지 않게 조심해.”
“네이-”
유미는 넝쿨 괴물을 잡으면서 균열 능력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졌다. 유미가 능력 사용에 익숙해질수록 넝쿨 괴물은 유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싸! 다섯 마리!”
토막이 난 넝쿨들이 공중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그 위로 쏟아지는 불꽃. 화염방사기로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며 추임새를 넣는 유미였다.
“이쪽 싹 태웁니다. 태워요.”
“그래.”
휘이이이익
뜨거운 불꽃이 10m가 넘게 쭉 쏟아지며 불의 장벽을 만들었다. 이렇게 쉼 없이 불꽃을 만들려면 염화 능력을 엄청나게 사용했어야 했다. 칼로리 소모가 극심했을 뿐 아니라 집중력도 많이 약해졌을 것이다.
“이거 하얀 슬라임 같은 게 안 죽어요.”
균열이 잘 먹히지 않는지 유미가 슬라임이 나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균열을 크게 만들면 찢어진 공간으로 빨려 들어갈 텐데 작은 균열로는 아메바처럼 움직이는 수액을 죽일 수 없었다.
“불도 잘 안 붙어요.”
“계속 붙여!”
화르르르륵!
유미 혼자서 쐈을 때는 버티면서 다가오던 하얀 수액 덩어리들이 내가 가세해 집중적으로 불꽃을 쏘아내자 견디지 못하고 오그라들었다. 아메바처럼 움직이는 수액은 일종의 소화기 역할을 하는 놈들 같았지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불꽃을 버티지 못했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 좋은데요?”
“확실히 내가 아는 화염방사기 성능은 아니네.”
“신제품. 응? 아? 신무기? 그런 건가요?”
“그렇겠지.”
“후후훗. 이게 있으면 혼자서도 저것을 충분히 잡겠어요.”
유미는 물 만난 물고기 마냥 혼자서 찢고 태우고 했다.
“그쪽은?”
“두 마리 놓쳤어요. 아요- 아까워라. 넝쿨이라 그런지 반쯤 잘려도 몸통만 괜찮으면 도망치네요. 그냥 팔다리가 뜯어졌는데 바로 넝쿨이 쑥 나왔다니까요. 와-진짜 사긴 거 있죠.”
유미가 녹색 체액을 뿌리며 펄떡거리는 넝쿨에 화염방사기를 쏴대며 대답했다.
“거기부터 이쪽까지 전부 불태워.”
“옛-써.”
“저쪽 놈들이 지금은 가만히 있지만 언제 저격할지 모르니까 조심하고.”
“네.”
“조심해. 그거 묻으면 위험하다.”
“헤헤헷. 알겠어요. 그런데 저쪽은 어떻게 됐어요?”
“네가 하도 엽기적으로 설쳐서 그런지 접근하지 않고 있어.”
“쳇- 엽기적이라니요. 흥. 우리 힘이 빠지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아마.”
멀리서 G-22로 저격하리라 생각했었는데 놈들은 멀찍이 떨어져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았다. 탐지 꼬맹이가 말하길, 옆구리에 넝쿨을 박아 던진 놈의 곁에 모여 있다고 했다.
이제 양팔이 잘린 놈이 뱃속에 들어간 넝쿨을 제거하고 쌩쌩하게 나온다면, 재벌계파 귀족들이 넝쿨 괴물에 대해 진작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유미가 넝쿨 괴물들을 싹쓸이하고 다닐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미를 마음껏 설치게 한 이유는 놈들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넝쿨 괴물로는 시간 끌기도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놈들은 유미의 무력을 무시하고 우리와 싸우거나 아니면 우리와 대화를 하려고 할 것이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놈들에게는 도발과 무력시위를 동시에 했다. ‘회장님’을 찾던 놈에게 넝쿨을 박아 던진 것이 도발이었고 유미로 하여금 넝쿨 괴물을 탈탈 털게 한 것이 무력시위였다.
도발에 걸려 덤벼들면 그대로 좋았고, 무력시위에 겁을 먹고 후퇴해도 좋았다. 도발에 걸려들어 앞뒤 재지 않고 공격한다면 놈들이 흥분했을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그럼 우리 쪽에 승기가 있었다.
하지만 내심 바라는 건 놈들과 지금 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에게 유리한 시간, 우리가 싸우기 좋은 환경에서 싸워야 했다. 토마스와 싸웠을 때도 생각지 않은 변수가 생겼는데 놈들이 가진 패도 모르는 상황에서 놈들에게 끌려가듯 싸우는 건 최악이었다.
“놈들이 우릴 보고 있었을 텐데 제가 너무 설쳤나요?”
“아니. 잘했어. 의도했던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한 번에 놈들을 쓸어버릴 수 없다면, 유미의 균열 능력은 발각될 것이다. 그리고 유미의 균열 능력은 매우 강한 능력이었지만 다른 고위 귀족을 죽일 만한 능력은 아니었다.
토마스의 균열이 절대적인 능력이었다면 토마스가 왕이 됐지 3인의 고위 귀족 가운데 하나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 유미보다 강력한 균열을 만들 수 있는 토마스도 안용재를 죽일 수 없었다는 소리였다.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심각한 피해를 보거나.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3인의 고위 귀족이라는 체계가 잡혔겠지.’
이제 유미에게 균열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놈들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쪽 입장에서 보자면 토마스의 능력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토마스보다는 약한데? 그래도 저런 능력이 있는 자들이라면 동맹이라는 소린데. 동맹이 여기 왔다는 건 놈들도 여왕을 노린다는 건가? 여러 생각이 들 것이다.
“흐응. 쟤네 왜 저러는 거죠?”
“간을 보고 있는 거지.”
고위 귀족인 토마스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테니, 우리를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고민이 많아지면 빠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냥 우리가 먼저 칠까요?”
“아니. 여기선 안 돼.”
“왜요?”
“주변에 아메바 같은 것들이 너무 많이 생겼어.”
“그런데요?”
화염방사기를 쏘아대지 않자, 불길이 약해졌다. 그 틈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얀 슬라임 같은 수액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어 불을 끄기 시작했다. 이곳엔 크게 상처가 난 나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수액이 나왔다는 건 나무가 자체적으로 수액을 내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저 수액이 불만 끄고 말까? 만약 저 많은 숫자가 덤빈다면? 넝쿨 괴물이 쏘아낸 넝쿨에도 소화액, 부식액, 마비액 성분이 있었다. 하얀 수액처럼 보이는 아메바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밤과는 달리, 낮에는 더 많은 숫자의 아메바가 생겼다.
“일단 불을 한 번 더 지르고 이동하자.”
놈들이 우릴 공격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어쩌면 이 숲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두고 움직여야 했다.
*
분위기를 보아하니 놈들은 우리가 있던 쪽으로 넝쿨 괴물이 모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화염방사기로 열심히 불을 지르자 접근하지 않은 이유도 아메바처럼 나온 수액 때문이었다. 화염방사기만 있다면 수액을 없애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소모율이었다. 수액을 잡기 위해 화염방사기에 사용하는 연료를 많이 소모해버린다면 넝쿨 괴물이나 다른 식물형 괴물과 싸우는데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깨끗하게 불태운 장소를 버리고 이동하자 놈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추격해왔다. 그리고 나와 독대를 요구했다. 예상 범위 안에 있는 행동이었다.
걱정하는 유미에게 괜찮다고 하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서자 사내가 웃었다.
“흠-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신중하군. 난 그런 신중한 성격을 좋아하지.”
많이 봐야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힘만 믿고 위아래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은 세상에서 신중한 자세는 좋은 태도지. 암.”
허허롭게 웃는 남자였다. 안용재. 알려진 나이대로라면 50대인데 말투가 노인 같았다.
“그렇습니까? 그럼 저 구석에서 제 머리를 노리는 사람은 좀 치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크흠. 신중한 데다가 감까지 좋은 건가? 허허허. 인재로군. 인재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손을 올리는 남자였다. 조곤조곤 살며시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본신의 능력에 자신 있으니 독대하자고 했으면서도, 따로 멀리서 날 노리는 자를 매복시킨 것으로 보아, 겉과 속이 다른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