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2)
“움직임은?”
“없음.”
생체 반응만 있고 움직임이 없었다.
“최대한 멀리까지 확인해 봐.”
탐지 꼬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없음.”
반경 7km 안쪽엔 귀족이 없다는 소리였다. 이놈들이 어디로 갔을까? 방향으로 봐서는 놈들이 이쪽으로 오다가 흩어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을지도 몰랐다. 놈들을 발견한 장소가 장소니 만큼, 귀족들이 선착장 방향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인아에게 주의를 줘야 했다. 무전기를 켰다.
[치지직...]
“인아. 인아?”
[치지지직...]
“인아야?”
[삐이이잇. 치지지직]
불길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새로 장악한 슬레이브까지 합하면 서른이 넘는 슬레이브가 있었다. G-22와 백린 연막탄, 네이팜 수류탄이 있는 소대급 병력이 그렇게 쉽게 당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숲으로 고작 1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교전이 벌어졌다면 총소리든 수류탄 소리든 충분히 들릴 거리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유미가 잡음만 흘러나오는 무전기를 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확실하지 않지만, 이 숲에서는 통신 불능인 것 같아.”
“네? 그럼.”
“연락하려면, 숲 밖으로 나가야 한단 말이지.”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했다. 빙글빙글 흔들리는 나침반이었다.
“이거야 원. 갈수록 태산이군.”
예비로 가지고 있는 나침반 전부 한꺼번에 고장 날 리 없으니, 이상 사태가 분명했다. 어쩐지 이상한 숲이다 싶더니 이럴 줄이야. 유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아가나요?”
“......”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자리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곳의 나무들은 20~30m가 넘는 크기였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커지는 나무들이었다. 중간중간 말라 죽은 나무들이 보였다. 다른 나무들이 변할 때 변하지 못한 나무들이 말라 죽어 있었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건가?’
생존경쟁에서 도태되면 죽는다는 경고처럼 말라 죽은 나무들은 해골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적자생존이라는 차가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풍경. 목숨을 건 경쟁이라면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됐다.
인아에게 연락하러 돌아가려면 1시간 넘게 되돌아가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나침반이 작동되는 곳을 찾아 헤매다 보면 몇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단순히 조심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시간을 허비하는 건 경쟁에서 지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경쟁에서 진다는 것은...
말라 죽은 나무가 앙상하게 웃었다.
“계속 이동한다.”
“앞에 있는 연방의 슬레이브는요? 그래도 숫자가 제법 되는데 그냥 두고 가나요?”
“미끼일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낙오된 것일 수도...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움직이지 않고 있는 슬레이브를 건드릴 필요는 없어.”
이 숲에서는 통신이 불가능했다. 이걸 이용해 숲에서 싸운다면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이 안으로 들어온 귀족들 사이의 알력도 이용하기 쉬웠다. 서로서로 견제하고 있다면 지금 이 숲에 들어온 귀족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반대파를 소거하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이런 기회를 놓쳐선 안 됐다.
“우리는 귀족들만 노린다.”
“알겠어요.”
*
기능을 상실한 나침반은 소용없었다. 울창한 숲은 하늘의 별을 가리고 있었다. 별빛도 달빛도 들어오지 않는 숲은 깊은 지하갱도처럼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볼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동하기 힘들었다.
“3km. 앞.”
“슬레이브.”
“셋. 반응.”
탐지 꼬마가 웅얼거렸다. 벌써 몇 차례 탐지된 것들은 전부 슬레이브였다. 귀족들은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는지 탐지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계속 허탕을 친 게 힘들었는지, 유미가 약간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탐지에 걸리지 않는 무슨 방법이 있거나 그런 게 아닐까요?”
“귀족들?”
“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선착장에서 우리와 교전한 놈들이 쓰지 않았을 리 없어.”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놈들은 우리가 동맹 측 잔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동맹에는 탐지 슬레이브가 없었으니까, 대비하지 않은 거 아닐까요?”
“그런데 이 숲에서는 같은 연방의 귀족들끼리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라, 자신들의 기척을 숨기고 있다?”
“아닐까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닌데 말이야. 일단 확인부터 해보자.”
“네.”
3km 전방에 슬레이브 셋이 있다고 했으니, 멀찌감치 떨어져 놈들을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탐지 꼬마가 말해준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멀리 어둠 속에 보이는 슬레이브는 이상했다.
“맨손이라고?”
“저도 봤어요.”
무방비하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기능 정지가 된 모습이었다.
“셋이라. 셋.”
하필 셋이었다. 링커 한 명이 통제할 수 있는 슬레이브의 숫자는 셋. 공교롭게도 같은 숫자였다. 유미가 주변을 도리도리 살폈다.
“링커가 죽은 걸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링커만 골라서 죽였다면 귀족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다고...”
“그런 것 같다. 주변에 반응은?”
탐지 꼬마가 눈을 데룩 굴리곤 팔을 들어 방향을 표시했다.
“이 방향. 2.4km. 슬레이브 6.”
“이 방향. 3.1km. 슬레이브 2.”
그리곤 고개를 갸웃하던 꼬마가 뒤를 휙 돌아봤다.
“고속으로 이동. 4.2km. 슬레이브 아님.”
“귀족인가?”
“모름.”
꼬마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고속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슬레이브도 아니고?
“유현 씨 설마.”
“그럴 수도 있겠다. 가자.”
귀족도 슬레이브도 아니면서 이 숲에 있는 존재. 레드 존의 그녀. 여왕. 아니면 그 일당일 확률이 높았다.
*
숲은 끝없이 깊어졌다. 20~30m높이었던 나무들은 이제 40~50m는 될 법했다. 영화나 사진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 숲 안쪽은 기이한 열기로 훈훈할 지경이었다. 이미 겨울 점퍼를 벗어 버린 지 오래였다.
마치 타잔이라도 되는 건지, 이 어두운 숲을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무엇이었다. 중간에 잠깐 놓쳤지만 천운으로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반응이 잡혔을 때는 정체불명의 흔적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속 이동 물체. 귀족 세력과 충돌.”
“뭐라고?”
“링커. 반응 소실.”
충돌했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링커의 반응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꼬마였다.
“방향은 이 방향 맞아? 거리는?”
“4km.”
전속력으로 움직였다. 40~50m 크기로 자란 살아있는 나무들은 가로 걸리지 않았지만, 말라 죽은 나무들이 가로 걸렸다. 비쩍 말라 죽은 나무들이 꺾이고 엉켜 마치 목책처럼 가로막은 곳도 많았다.
“거리 3km. 귀족 반응 소실.”
“귀족은 모두 몇 명?”
“넷. 셋.”
“셋이라고?”
“둘.”
탐지 꼬마의 안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정보가 많다는 소리였다.
“귀족 넷, 슬레이브 여섯, 링커 둘 교전 지역으로 이동.”
“1.2km 좌측에서 접근.”
“교전 지역. 귀족 둘. 도주.”
“정체불명. 도주하는 귀족 추격.”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했다. 한바탕 싸우고 도망치고 있는데 또 다른 귀족이 싸우고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쯤 되면 총소리든 네이팜 수류탄 터져 타는 냄새든 뭔가 있어야 했는데 조용했다.
“일단정지.”
“네? 네.”
“탐지 상황은?”
“귀족 반응 하나 소실. 하나 도주. 탐지 거리 벗어남.”
“정체불명은? 하나 남은 놈 끝까지 추격하고 있어?”
“탐지 거리 벗어남.”
“그럼 교전 지역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놈들은?”
“이동.”
“정체불명을 추적하고 있는 거야?”
“이동 방향 일치.”
“좋아. 일단 놈들을 추격하자.”
갑자기 탐지 꼬마의 눈동자가 극심하게 흔들렸다.
“우측 4.1km 급속도로 접근 중.”
“뭐가 접근하고 있다는 거야?”
“정체불명.”
숲에서는 탐지거리가 들쑥날쑥했다. 그래도 그렇지 앞에 있다가 갑자기 우측에서 접근하고 있다니. 우리가 있는 방향을 정체불명이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유미야 준비해.”
“네.”
“정체불명. 탐지범위 이탈.”
“뭐라고?”
“정체불명 추격하던 귀족. 이쪽으로 접근 중.”
귀족 넷, 슬레이브 여섯, 링커 둘이 있다는 그룹이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였다. 정체불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와 귀족들이 서로 싸우게 한 것이 분명했다.
“놈들이 벌써 가까이 왔어요.”
야간투시경을 쓴 자들이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욱신- 심장이 내리눌렸다.
“눈 감아!”
내가 섬광탄을 터뜨리는 것과 저쪽에서 G-22를 쏘는 것이 교차했다. 펑! 밝은 빛이 어둠을 녹이듯 사방으로 퍼졌고 그 빛의 장막을 찢어발기듯 G-22의 특수탄이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내가 탐지 꼬마와 유미를 한 손에 하나씩 잡고 엎드렸다. 초음파 슬레이브 둘도 나를 따라 엎드렸지만, 둘 다 살아남지는 못했다. 초음파 슬레이브 하나가 G-22에 곤죽이 됐다.
“읏!”
유미가 이를 뽀득 갈며 G-22를 꺼내 들었다. 나도 G-22를 뽑아들었다. 놈들은 야간투시경을 벗어던지고 사방으로 G-22를 쏴대기 시작했다. ‘어? 사방으로 쏘고 있다고?’
“유미야 잠깐. 쏘지 마. 정체불명은?”
엎어진 채로 탐지 꼬마가 웅얼거렸다.
“전방. 거리. 800m. 정체불명. 교전 중. 링커 반응 소실. 링커 반응 소실.”
“뭐에요 저거?”
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리 예광탄과 총구의 불빛이 번쩍이는 곳을 쳐다봤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스파이더맨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무엇이 그 아래 있는 귀족과 슬레이브를 농락하고 있었다.
취릭!
어두운 넝쿨 같은 것이 한 귀족의 목을 휘감았다. 나무 위로 끌려가는 귀족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악!”
“능력이 왜 안 먹히는 거야.”
“진정해. 집중하라고!”
“으아아악! 살려줘. 쏴! 쏘라고!”
버둥거리던 귀족의 목이 생으로 뽑혔다. 목이 생으로 뽑히면서 척추 일부분이 딸려 나왔다. 귀족의 머리통을 둘둘 말고 올라간 넝쿨. 잠시 뒤, 오독오독-두개골 씹는 소리가 건너편 나무 꼭대기에서 들렸다.
링커를 잃은 슬레이브들은 기능 정지한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귀족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조명탄 쏴. 신호탄 쏘라고!”
길게 꼬리를 물고 올라간 신호탄은 울창한 나뭇가지를 뚫고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 올라갔어도 그 신호를 볼 수 있다고 보긴 힘들었다.
“저거, 귀족의 정신계 능력이 먹히지 않는 거죠?”
“어. 그래. 나도 봤어.”
나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신계 면역을 정체불명인 그것도 가지고 있었다. 넝쿨을 다룬다고? 식물과 융합한 건가? 귀족의 머리통을 먹었다면 변이를 견디지 못할 텐데. 살아남은 귀족 셋이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왔다.
귀족들은 밤눈이 그렇게 좋은 게 아닌지, 뒤에서 접근하는 넝쿨을 알아채지 못했다. 맨 뒤에 있던 귀족이 꼬치에 꿰이듯 꿰어져 허공으로 떠올랐다. 귀족이었다. 재생력과 방어력이 약할 리 없는 귀족이 단 한방을 막지 못해 끌려갔다. 끄아아아악! 허공에서 들리는 비명이 뚝 끊기며 두개골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미가 달려온 두 귀족을 향해 G-22를 겨누자, 그걸 알아봤는지 허겁지겁 달려온 한 남자가 고개를 흔들며 고함질렀다.
“잠깐. 휴전. 휴전!”
바로 뒤따라온 사내는 지옥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씨발. 다 죽었어. 다 죽는다고!”
윙-나지막한 울림과 함께 정신간섭이 느껴졌다. 유미를 바라보자, 유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미가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퍽! 소리와 함께 고개를 흔들며 휴전이라고 했던 놈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살짝 골을 울리던 감각이 사라지자 유미는 한결 좋아졌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살폈다.
“으악. 씨발! 왜 쏴!”
뒤에 있던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정신간섭을 하려고 해놓고 왜 쐈냐고?”
유미가 차갑게 웃었다.
“이런 병신 새끼가.”
살아남은 귀족이 머리통이 날아간 시체에게 욕설을 내뱉곤 깜깜한 허공을 노려봤다. 놈을 무시하고 탐지 꼬마에게 물었다.
“정체불명은?”
“감지범위 이탈.”
저렇게 난리를 치고 그냥 사라졌다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는 속도는 맨땅을 내달리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4km를 몇 분도 걸리지 않고 이동했다.
유미가 두 손을 들고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을 겨누며 말했다.
“저건 뭐지? 저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 말해.”
그제야 그 귀족은 우리 모습을 살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얼굴이라는 걸 확인한 사내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너. 너흰 누구냐? 동맹?”
빡!-
유미의 가벼운 펀치가 사내의 높은 콧대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뒤로 발라당 넘어진 사내가 뭉개진 코를 붙잡고 나를 봤다. ‘뭐 이런 무식한 년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소용없어. 저건 뭐지? 저게 여왕인가?”
“아저씨 죽고 싶어?”
유미가 살짝 웃으며 다시 주먹을 꼭 쥐자. 사내가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도 몰라. 여왕을 찾아 들어왔는데. 저런 게 있을 거라곤 전혀 몰랐다고.”
“그래? 정말이지?”
“씨발. 이런 상황에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어. 저건 능력도 먹히지 않는다고.”
사내가 다시 한 번 피를 퉷- 뱉고는 소리를 질렀다. 귀족이라 그런지 유미에게 맞은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고위 귀족들은. 셋 모두 들어왔다고 하던데 전부 살아있나?”
“몰라. 통신도 되지 않고. 이 숲에서 벌써 삼일이나 이러고 있었어. 우리도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지 싸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고.”
유미가 씩 웃으며 사내의 말을 씹었다.
“거짓말이네요. 우릴 보자마자 공격했으면서.”
“아니야...”
유미가 웃으며 G-22를 사내에게 겨눴다. 사색이 된 남자가 뭔가 변명을 하려는 데, 탐지 꼬마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귀족 7. 슬레이브 21, 링커 7 접근 중.”
총소리를 듣고 방향을 잡았는지 이제까지 중 가장 큰 무리가 접근했다.
“7명이라고? 7명이면 안용재나 토마스 넬슨이야. 둘 가운데 누군지 모르지만, 고위 귀족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사내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유미가 사내를 겨눈 G-22를 치우지 않고 대답했다.
“고위 귀족이 이쪽으로 온다는데요?”
“정체불명은?”
“반응 없음.”
유미가 깜깜한 숲 저편을 노려봤다.
“아까처럼 우릴 미끼로 삼으려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