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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247화 (247/261)

폭풍 속으로 (4)

쨍! 단도와 쿠크리가 튕겼다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인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유현 씨!”

“......”

쿠크리를 든 단발머리 여자는 목이 잘린 두 귀족을 잠시 바라보곤 서서히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인아와 비슷한 옆모습에 혹시나 했었는데, 그녀였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 오랜만입니다. 척인경 조장님.”

“......”

그녀. 인경의 무기질적인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냉정한 표정이었던 인아가 ‘척인경 조장.’이라고 하는 내 말을 들었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단도를 고쳐 쥔 인아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나왔다.

“죽여 버려요!”

“?”

“......”

인아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찔렀다.

“이건 언니가 아니야!”

“......”

“죽여요! 제발 죽여 버려요!”

인아의 목소리가 나와 척인경 사이를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이런 식으로 만난 것이 벌써 두 번째... 아니, 세 번째였다.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인아는 인경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할 리 없었다. 처음 연방의 장벽 안으로 침입. 장근태로 위장했을 때부터 인경은 반쯤 정상이 아니었다.

명령에 따르는 충실한 도구. 능력상으로 빗치와 슬레이브의 중간쯤인 그녀는 슬레이브를 만들기 위한 프로토 타입 비슷한 것이었다.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인경의 모습에서 여러 차례 위화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이런 식으로 결판을 내야 할 줄이야. 인경은 그 특유의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나와 인아, 그리고 초음파 슬레이브를 번갈아가며 노려봤다. ‘아직도 명령을 수행하려고 하는 건가?’

“인아야.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부상당한 슬레이브들부터 치료해.”

인아가 도망치려고 한다면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인경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인경의 시선 안쪽에 인아가 있는 게 대응하기 쉬웠다. 인아의 차가운 얼굴. 눈꺼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 알겠어요.”

인아가 사지 잘린 슬레이브들의 팔다리를 붙이고 스펙1을 주사했다. 스펙1의 효과는 재생촉진이었다. 스펙과 슬레이브 특유의 재생력이 합쳐지자 급속도로 잘린 팔다리가 붙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인경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행동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쿠크리를 들고 있던 인경의 몸이 흔들리듯 움직였다.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 같은 움직임. 시야에서 벗어난 인경의 쿠크리가 사각에서 쏘아졌다. 노리는 곳은. 종아리? 아니, 아킬레스건. 욱신- 심장이 꾹 쥐어짜지는 감각과 함께 다리를 살짝 들었다.

색-소리를 내며 쿠크리가 허공을 갈랐다. 바로 이어진 반격. 사각을 공격했지만 피하고 곧바로 반격한 것에 대해 일반적이라면 놀라거나 잠깐이라도 경직됐을 텐데, 인경은 놀라지도 않았고 경직되지도 않았다. 그녀는 기계적이었다. 내가 1격을 피하자, 무심하게 2격을 내리쳤다. 2격을 피하자, 3격. 4격. 5격. 끝없이 이어지는 공격.

인경의 공격이 계속될수록 위기 감응이 발작하듯 작동했다. 확실히 칼질을 제대로 배운 자와 배우지 않은 자의 차이가 드러났다. 위험한 공격을 피할 때는 동작이 클 수밖에 없었다. 콤팩트하게 움직이고 효과적으로 반격해야 했는데 피하기에 급급했다.

캉!

오른쪽. 분명히 오른쪽이었는데 동시에 왼쪽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오른쪽을 막자마자 왼쪽으로 칼을 돌렸다.

챙!

카타나를 밀며 뒤로 빠졌다. 그 짧은 순간에 왼손에 단도를 꺼내 든 인경이었다.

역수로 쥔 단도 손잡이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보였다. 칙-투명한 액체가 단도의 칼날에 촉촉하게 배어 나오는 모습. 일단 거리를 벌려야 했다.

“으야아아아앗!”

달려드는 인경을 후려쳤다. 칼질이라기보다는 방망이질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식한 휘두름에 인아가 단검과 쿠크리를 교차해 막았다.

차앙!

카타나와 쿠크리가 충돌하면서 높은 금속음이 고막을 흔들었다. 붕- 떠오른 인경의 몸이 3~4m뒤로 날아갔다.

“유현 씨! 엎드려요!”

잘린 사지가 붙은 슬레이브들과 인아가 G-22를 겨누며 외쳤다. 총소리와 함께 매콤한 화약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인경은 순식간에 벽을 엄폐물 삼아 몸을 숨겼다. 인아와 슬레이브들이 인경을 견제하는 동안, 떨어진 에너지를 보충했다. 뻑뻑한 에너지 스틱을 물과 함께 대충 삼키자 놀란 근육과 신경이 회복됐다.

“초음파는?”

“소용없었어요.”

“정말 괜찮겠어?”

‘정말 죽여도 괜찮겠냐.’는 말의 줄임. 인아는 예의 그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엔 아무런 동요가 없었지만,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쯧- 저번보다 더 위험해졌어.’

어설픈 근접전이라면 위기 감응으로 씹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달인의 수준이라면 달랐다. 인경과의 접전은 마치 위기 감응이 있는 존재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저번에는 순수한 육체적인 능력은 이쪽이 밀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근력과 반사 신경, 순발력 어느 하나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게 없었다. 무기도 마찬가지. 일반 쿠크리라면 두 쪽이 났어도 진작 났을 텐데, 쿠크리는 내가 들고 있는 카타나와 비슷한 재질인 것 같았고 왼손에 들고 있는 단도는 귀족이 들고 있던 단도와 같은 모델 같았다.

“심리전이라도 해보고 싶지만,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으니...”

“괜찮아요. 죽여요.”

염화 능력을 쓸 틈을 주지 않았다. 칼에 집중하느라 염화 능력을 사용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빗치들을 상회하는 인경을 잡으려면 광범위한 면적을 고온으로 태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에너지 소모가 극심했다.

‘젠장.’

잠깐 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위기 감응이 경고를 보내왔다. 팅! 철침을 튕겨내자, 인경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인경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 휘말려 간신히 팔다리를 다시 붙인 슬레이브부터 썰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인 정찰기를 격추했기 때문에 놈들이 현재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랄까?

“정말 대단하네.”

“......”

순수 전투력만 따진다면 인경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했던 인경인데 무슨 개조를 어떻게 당했는지 상식에서 벗어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위기 감응도 없이 총구의 방향만으로 총알을 피한다니 뭔 사기냐.’

양파 껍질 까듯 슬레이브들을 하나씩 썰어가며 다가오는 인경의 쿠크리를 인아와 초음파 슬레이브를 지키면서 싸우기란 쉽지 않았다. 중간에 인아가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반대 방향으로 간 유미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어.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까. 너는 유미를 지원하러 가라.”

차가운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인아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일 수 있는 슬레이브는 둘, 초음파 슬레이브를 합해 셋이었다.

“쟤는 두고 가.”

초음파 슬레이브를 두고 가라고 했다.

“네?”

“가면서 탐지 꼬마와 내 초음파 데려가고.”

“...조심해요.”

“그래. 금방 갈게.”

인아가 슬레이브들을 데리고 빠지는 동안, 인경을 견제했다. 의외로 인아가 빠지는 것을 막지 않는 인경이었다.

“어이- 조장. 이제 죽는다고. 진짜로 죽어.”

“......”

무슨 실험을 어떻게 했기에 저렇게 변했을까? 타격조 자체가 슬레이브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생체실험과 전투데이터 축적의 역할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슬레이브를 도구로 삼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이런 말은 조금 낯간지럽지만 말이지. 자유의지 같은 건 전혀 없는 거야?”

“......”

“명령한 귀족 놈들 둘 다 죽었는데 이제 그만하지 않겠어? 저번처럼 퇴각한다든지 말이야.”

“......”

칸막이 건너에 있는 인경은 반응하지 않았다. 무감정하고 오직 명령을 수행하는 것만 집중하는 모습. 사실 척인경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지금까지 칼을 섞었으니, 날 죽이기 쉽지 않다는 건 알겠고. 나를 뒤에 달고 명령을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잖아.”

“......”

내가 슬레이브를 도구로 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슬레이브가 되는 순간 자기 의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명령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 그게 슬레이브였다. 본능도 이성도 삶도 모두 주인에게 속해버린 가련한 인형.

“영 껄끄럽다면 보고라도 해보라고. 무전기 있잖아. 무전기.”

“......”

보고를 빌미로 인경의 위치를 파악하려 찔러봤다.

‘걸리지 않나? 피곤하네.’

텔레파시나 그런 것으로 무전기를 대체했을까? 저격수 핸리와 R을 떠올려보면 무전기를 사용했었다.

‘무전으로 현재 상황을 보고하지 않고 이미 죽은 귀족이 내린 명령을 속행한다는 소린데.’

위기 감응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인경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 여자 덕에 위기 감응이 말랑말랑해진 느낌이었다.

“날 죽이지 않으면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까 하는 말인데.”

“......”

“명령에 집착하면 정말 죽는다고. 당신.”

“......”

사각-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척을 감추고 다가온 인경이 단도를 던졌다. 말랑말랑해진 위기 감응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카타나로 단도를 튕겨내자, 단도 날에 흐르고 있던 액체가 튀었다.

‘이건...’

순간적으로 귀족이 떠올랐다. 단도에서 튄 액체가 눈에 들어가 안구가 녹았던 귀족의 모습. 얼굴을 돌려 눈에 튀는 것을 피하면서 옆의 볼에 튀도록 얼굴을 가져다 댔다. 단백질 녹는 냄새와 함께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눈에 액체가 튄 것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윽! 씨발.”

액체가 튀어 시력을 잃었다고 판단했는지 인경이 쇄도해 들어왔다. 휭-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쿠크리가 내 머리통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 찍혔다.

‘지금!’

와락! 내 옆에 서 있던 초음파 슬레이브를 인경이 휘두르는 쿠크리를 향해 밀쳤다. 인경은 반사적으로 쿠크리의 날을 옆으로 틀었다. 내려친 칼을 무리하게 비트느라 자세와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인경이었다.

휘청거리며 초음파 슬레이브를 움켜잡은 인경을 향해, 카타나가 길게 빛을 뿌렸다.

툭.

쿠크리를 잡고 있던 인경의 팔이 떨어지며 나와 인경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거 생포하라는 명령이었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인경과 내가 마주 보고 있었다. 염화 능력을 사용하기 딱 좋은 위치였다. 무인 정찰기도 격추했으니 능력을 사용해도 놈들에게 들킬 일도 없었다.

화르르륵!

인경의 안구가 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눈알이 불타고 양 팔이 절단됐음에도 인경은 생포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이제 쉬라고. 조장. 아니, 인경 씨.”

서걱!

인경은 그렇게 자유를 얻었다.

*

-■■■■

유미가 있는 곳에서 작은 초음파가 터졌다. 인아가 데려간 내 초음파 슬레이브가 지원을 시작한 것 같았다. 초음파가 터졌음에도 이상하게 조용했다. 인경과 싸우면서 에너지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에 칼로리 바를 씹으며 움직였다.

건너편에서는 한 귀족과 유미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툭툭-가볍게 뻗은 잽에 고개가 뒤로 휙휙 젖혀진 유미가 이를 악물고 주먹을 휘둘렀다. 부웅-이곳까지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족은 자연스러운 위빙으로 유미의 주먹을 피하며 유미를 샌드백처럼 두들겨댔다.

‘권투를 했나?’

초음파로 귀족들의 정신계 능력을 막는 것은 성공해 보였지만, 슬레이브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전부 총을 축 늘어뜨리고 멍하니 서 있는 모습. 인아와 유미의 슬레이브들뿐만 아니라 연방의 슬레이브들도 같은 모습이었다.

인아는 단도를 들고 또 다른 귀족을 견제하고 있었다. 유미를 상대하는 귀족이나 인아를 상대하는 귀족 모두 반쯤은 장난치는 모습으로 능글맞게 움직였다.

“어이어이. 그 단도. 우리 물건인데 말이야. 그거 위험한 거라고. 큭.”

인아를 상대하는 귀족이 능글맞은 얼굴로 말했다. 인아는 대답 대신 단도를 휘둘렀다.

유미의 얼굴에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은 귀족이 인아를 농락하는 놈에게 말했다.

“이년 이거 정말 터프한데. 잡아서 내 전용으로 만들어야겠어.”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동맹 놈들 제법 상등품을 가지고 있었잖아.”

20m 안쪽으로 접근해야 했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면서 접근하는데 놈들이 가진 탐지 슬레이브가 눈에 들어왔다.

‘제길 걸렸나?’

하지만 놈들의 탐지 슬레이브가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일반 슬레이브들과 마찬가지로 멍하게 서 있는 모습. 하지만 그와는 달리 링커들은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후방에서 제대로 유미와 인아를 겨냥하고 있었다.

‘슬레이브에게만 작용하는 능력인가?’

귀족들은 정신계 능력만 있는 게 아니었다. 꼬마 귀족만 해도 그랬다. 입을 변형시켜 뭔가를 쏘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놈들 중 하나에게 슬레이브를 물리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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